소설리스트

​​외전 2. THE PINK ROOM​​ ​​​​ (9/9)

외전 2. THE PINK ROOM

이연우와 임태호가 오피스 커플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얻은 지 몇 달. 신화가 내부에서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대두했다.

바로, 대체 누가 ‘이연우 애인 입사’에 대한 정보를 흘렸나라는 조금은 때늦은 고찰이었다.

전 직장의 경력까지 고려해서 배정해 주는 자리를 차마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한, 무려 인사 총괄 이안이 출국 전 직접 스카우트한 ‘사원’ 임태호야 확실히 눈에 띄는 인사이기는 했다. 말이 사원이지, 입사 후에도 팀장인 이현이 임태호에게는 제법 태도를 달리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그, 나이트 이연우를 변모시킨 소문의 연인이 입사할 거라는 소문은, 신화그룹의 입구 스캐너에 임태호의 지문이 입력되기도 전부터 돌기 시작했던 거다.

사실 이연우는 그게 이안이 인사 처리를 하면서 이야기가 새어 나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소문을 듣고도 별 꼬투리를 잡지 않고 넘어갔던 거다. 하지만 연우는 어느새 대륙을 넘어 이탈리아 어디에서 제과제빵 단기 코스를 시작했다는 제 사촌 형 이안과의 전화에서 몹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다.

「음? 이상하네. 형 어디 가서 흘린 말이 전혀 없는데.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 일이라면 관심도 의욕도 없이 몇 걸음 뒤에서 방긋 웃고 있을 게 다일 이연우이지만, 제 오메가에 관한 것만은 다르다. 이 세상 누구의 일보다 성심성의껏 집착할 생각도, 의지도 가득하다. 연우는 이안과 전화를 끊는 순간부터 그 소문의 출처를 캐기 시작했다.

워낙 시간이 지난 터라 시간은 좀 걸렸다.

하지만 저 밖에 있는 것을 뒤지는 것도 아니고, 손바닥 안에 있는 오래된 기억을 살피는 것쯤이야 찾는 이의 끈질김에 달린 문제였다. 이연우는 몇 날 며칠이 걸리든 그 소문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 했고, 정·재계 전체를 통틀어 이름 높은 신화가의 정보팀은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충실히 움직였다.

신화그룹의 나이트가 그렇게나 바라던 범인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연우는 고개를 비뚜름하게 한 채로 제 연인의 입사에 대해 떠들고 다닌 사람을 흘겨보았다.

그 눈빛에 슬쩍 움찔한 범인은 변명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가까운 임원분들이랑 회의하다가 지나가듯 말했는데…….”

……사실, 그 소문의 주체에게 ‘범인’이라거나, ‘잡혔다’는 단어를 쓰는 건 좀 부적절하다.

그 소문의 시작은 어쨌거나 신화그룹의 새로운 왕좌에 앉은 사내였기 때문이다. 이민혁은 제 앞에 있는 찻잔 한 번, 막냇동생의 부루퉁한 얼굴 한 번, 임태호의 얼굴 한 번을 번갈아 보면서 그답지 않게 눈치를 봤다.

사건의 전개는 이랬다.

사내 임원회의가 끝날 무렵, 우연히 이연우의 화제가 나왔더랬다. 신임 대표의 최측근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언제까지 홍보팀에 둘 것인지, 아니면 아예 홍보팀 쪽에서 자리를 잡게 할 것인지가 주요 내용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이민혁은 문득 혼잣말처럼 ‘아, 그래도 조만간에 태호 씨 들어올 테니까 가까운 홍보팀이 낫겠어.’라고 중얼거렸고 널찍한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새겨들었다.

그다음은 쉬웠다. 대체 ‘태호 씨’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임태호의 이야기가 대놓고 퍼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 이연우가 홀딱 반해서 이제나저제나 휴대폰을 쥐고 산다는 것을 모르는 고용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수많은 귀가 들은 이민혁 대표의 작은 혼잣말이 갖가지 버전으로 각색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당사자인 태호는 제가 이연우의 애인이라는 사실이 퍼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다. 애초에 감출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갔다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연인 관계라고 공표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못해도 몇 주는 잠잠히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사람이 한두 명 있는 곳도 아니고, 1층 홀로 들어설 때부터 마른침을 삼키게 되는 대기업인데 설마하니 첫날부터 일파만파로 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조용히 눈에 안 띄게 움직였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니까 유현민이 ‘형! 김밥천국 갔다 왔어요?!’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분명 아무도 이연우를 향해 아는 척하지 않았고 빤히 보는 시선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건 필사의 모르는 척이었던 거다. 두 사람의 식사 메뉴는 물론이고 김밥천국에서는 임태호가, 스타벅스에서는 이연우가 계산했다는 것까지 한 달은커녕 반나절 만에 사내 전체에 쫙 퍼졌다.

“연우가 집에서 덜덜 떨면서 걱정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그만……. 정말 미안해요.”

“……연우가 떨었어요?”

“아, 형!”

비뚜름한 얼굴로 있던 이연우는 제가 연인에게 내색하지 않았던 비밀까지 술술 불기 시작한 친형을 향해 뾰족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연우 그도 지분율이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아무리 민혁이 임원회의에서 말을 흘렸다고 해도 사원들에게 임태호의 이름까지 먼저 퍼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인사팀 총괄 이안의 추천으로 입사한 눈에 띄는 신입 사원을 보고도, 개발 1팀 직원들이 ‘에이, 저 사람은 아닐 거야’하고 잠시나마 확신하기도 했던 거다. 정말 태호의 바람대로 몇 주간은 잠잠히 넘어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큰 문제는 이연우였다.

저 누구보다 눈에 띄는 알파는 저와 임태호의 사이가 단순한 대학 선후배가 아니라는 걸 몸소 증명했다.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저만치에서부터 따로 떨어져 걸어 봤자, ‘그 이연우’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상기된 뺨을 한 채로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면 별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이연우의 시선 끝에 누가 있는지 좇는 사람들의 눈만 불어날 뿐이다.

태호는 살짝 머쓱한 표정이 된 제 알파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건 이민혁이었다. 사실 범인으로 지목된 그는 내심 속을 졸였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태호는 제 막냇동생과는 달리 상식적인 범위 안에서 생활하는 수줍음 많은 사람이라, 이렇게 주변의 이목이 쏠리는 상황을 버거워하지는 않을까 얼마나 마음 쓰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임태호는 그 걱정이 무색하게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말간 얼굴이었다. 오히려 이민혁이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는 쪽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다.

임태호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이민혁을 눈치채고, 왜 그러냐는 듯 미소 짓는 얼굴을 기울였다. 왠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된 민혁은, 턱을 긁적이며 말을 고르고 골라 입을 열었다.

“그게, 조금 놀라서요.”

“네?”

“연우랑 관계 알려지면 아무래도 사람들 관심도 많이 쏠리고 그러니까……. 입사 초기인데 많이 심란하시지는 않을까 싶었거든요.”

“아, 행동 조심, 말조심하겠습니다.”

느긋하니 별 긴장한 기색이 없던 태호의 얼굴에 일순 진지함이 깃들었다. 이건 뭐, 잘 있던 사람에게 괜한 말을 꺼낸 것이나 다름없다. 민혁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는 듯, 얼른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태호 씨는 그냥 편하게 지금처럼 하시면 되는걸요. 사고야 연우 쪽이 조심해야죠.”

“아니 난 왜 튀어나와?”

“전 그냥 태호 씨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잘 다니셔서, 그게 좋아서요.”

이민혁은 제 동생의 삐죽한 목소리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제 할 말만 다 했다. 태호는 그 모습에 살짝 눈가를 휘어 웃었다. 그제야 제 알파의 가족이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뭔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임태호는 테이블 아래로 제 알파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대답했다.

“그게, 대체로 예전에 다 한 번씩 있었던 일이라…….”

“예전이요?”

이번에 의아해진 건 민혁이었다. 물론, 그는 순식간에 잠잠해진 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임태호를 보고 있는 제 동생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의 중재도 뻔히 짐작했다.

작지만 또박또박한 태호의 목소리는 쭉 이어졌다.

“대학교 때부터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요. 아무래도 비슷한 상황이 없지는 않았거든요.

“……아.”

신화그룹의 그 이연우와 이렇게 오랜 시간 같이 붙어 지내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나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이연우의 곁을 졸업하고 나서도 꼼짝 않고 지키는 유일한 ‘선배’, 임태호는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

이연우와 가깝다는 이유로 청탁 비슷한 말도 적잖게 들어봤다.

하지만 그 수많은 부탁 중 이연우의 귀까지 들어간 건 한두 개 정도가 다다. 그것도 ‘학과에서 사정 힘든 후배들 동문 장학금 만든다는데, 같이 조금씩 낼까?’ 같은, 특정한 대상이 없는 말이 전부였다. 임태호는 그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내에게 피해가 갈 일은 가끔 스스로도 해놓고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한편, 이민혁은 그런 임태호의 말뜻을 모두 이해하고 찡한 기분이 됐다. 딱 봐도 저렇게 순하디순한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시선에 치였으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나, 새삼스러운 고마움이 밀려왔다.

……우리 얼굴 예쁜 개망나니가 뭐라고!

신화가 최고의 로맨티시스트인 그는 잠시 격앙된 눈으로 태호를 보다가 꽤 오래전부터 고민했던 문장을 끄집어냈다.

“태호 씨, 우리 말 놓을까요?”

임태호와 이민혁은 나란히 서른셋 동갑내기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서로 존대하면 되잖아요.”

“어, 어어, 저어, 그래도 어떻게……!”

“저 부끄럽지만, 친구라고 내세울 사람이 재미없는 알파 녀석밖에 없어서 얼마나 심심했는데요.”

이제 민혁은 태호의 유독 보드랍고 끝이 동그란 손까지 꽉 잡았다.

“알겠죠? 진짜 이제 친구 하기에요. 저 말 놔요?”

“저, 정말 그래도 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에이, 밖에서만 같이 조심하면 돼!”

친근한 어조로 떨어진 이민혁의 말에 태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발갛게 변하다 못해 귀 끝까지 붉게 변했다. 세상에 대표와 말을 놓는 사원이라니, 왠지 속이 두근거렸다. 동갑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신문이나 경제지로만 접하며 조금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연인의 가족과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아, 왠지 좀 설레기도 했다.

서른셋의 오메가 둘은 전에 없는 훈훈한 분위기를 뽐내며 서로 살갑고, 또 조금은 수줍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물론, 이 자리에는 서른셋도, 오메가도 아닌 사내가 한 명 있다.

바로 어느 순간부터 제 연인과 가족의 대화에서 철저히 소외되던 알파, 이연우다. 그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휜 채로 비뚜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신규 우정 전선을 갈라놓았다.

“……둘이 선 봐?”

◈◈◈

속담도, 격언도 아니건만 예전부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 말 중 이런 게 있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태호야, 통화 괜찮아?”

“…….”

“아아, 응. 다른 게 아니고. 혹시 수요일 저녁 같이할까 하고. 연아, 연우 다.”

……하지만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극우성 알파 이연우는 그냥 지기로 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친형을 부러워하고 있다. 살며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모를 그 낯선 감정에 표정 관리마저 잘 안 된다.

스스로도 어이없을 정도로 유치하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하하. 어, 연우 옆에 있지. 바꿔 줄까?”

이연우는 저를 향하는 문장에 순간 고개마저 휙 들고서 휴대폰을 넘겨받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민혁의 말은 이연우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어? 어어. 그래. 알겠어. 그럼 그때 보자. 응. 들어가.”

민혁은 태호와의 전화가 끝나자마자 제 비서에게 수요일 저녁 시간을 확실히 빼놓으라는 문자까지 하나 보냈다. 주변에 사람이야 넘쳐나는 그이지만, 마음 편히 만날 사람은 갈수록 적어진다. 한 명, 한 명이 새삼 소중해진 지금, 이렇게 새로 생긴 친구는 꽤 소중하다. 그게 앞으로 가족까지 될 사람이라면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

이민혁은 작게 입술 끝을 올려 웃다가, 맞은편 소파에 석상처럼 굳은 채 앉아 있는 제 막냇동생을 뒤늦게 발견했다.

“왜?”

“……아냐.”

연우는 조금 느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본채를 나섰다. 잠시 차가운 바람을 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임태호와의 연애가 거의 일 년을 꽉 채워가는 지금, 이연우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갈수록 바닥을 보이는 제 자신의 한심함이다.

분명, 혹자들은 연애에도 안정기가 있다고 말했다. 눈만 마주쳐도 두근거리고 설레는 시간이 지나면 같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또 편안한 그때가 온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연우와 임태호는 그 순서가 좀 뒤죽박죽이다. 이미 그 ‘안정기’라는 건 1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쭉 함께하면서 쌓일 만큼 쌓였다.

연애라는 건, 사람을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쪼잔하게 만든다.

이연우는 제 연인을 향해 ‘태호야’라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말하는 형을 볼 때마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든다. 짜증 날 만큼 유치하고 또 멍청해 보인다는 걸 아는데, 갈수록 별것이 다 신경 쓰인다.

동갑내기의 같은 오메가라는 건, 오메가의 삶을 산 지 얼마 안 된 태호에게 정말 필요한 존재일 거다. 머리는 그걸 너무 잘 안다. 태호와 기꺼이 허물없이 지내는 형에게도 정말 진심으로 고맙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는 못나 빠진 알파 하나는 자꾸 멍청한 문장을 머리로 구겨 넣는다.

말 그대로 ‘친구’가 생긴 임태호는 요새 가끔 이연우가 전혀 모르는 말투를 쓴다.

‘어, 그래? 괜찮을걸. 하하. 말단한테 너무 특혜 주는 거 아니야?’

나이 어린 연인을 배려하는 연상의 망설임 같은 게 없는 편안한 목소리는 고민 상담을 늘어놓던 유현민과 이야기했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현민은 연하의 알파로, 이연우를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하지만 이민혁은 다르다. 동갑에, 말도 코드도 잘 통하는 같은 오메가다.

때문에 연우는 최근에 제 형과 전화하는 태호의 낯선 목소리를 멍하게 듣느라 화장실에서 물을 한참 틀어 놓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사람을 사귀는 것에 신중한 데다가 부끄럼까지 많은 태호와 만만치 않게 사람을 가리는 민혁은, 이연우라는 공통분모를 두고 전에 없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제껏 이연우는 탐욕스러울 정도로 임태호와의 관계를 한가득 틀어쥐고 있었다.

후배, 연인, 약혼자…….

그 거리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결혼을 약속한 지금은 전보다 그 간격이 더욱 좁아졌으면 좁아졌지, 멀어졌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게 가진 게 많아도 욕심은 늘 새롭게 돋아난다.

제 형의 앞에서 임태호는 참 편해 보인다. 연상이라는 이유로 몸에 밴 양보를 꺼낼 필요도 없이 대등한 위치에서 웃는다. 만약 눈앞에 작은 케이크 한 조각이 있다면 임태호는 이연우에게는 ‘형은 괜찮으니까 너 먹어.’하고 당연하다는 듯 미룰 것이다.

하지만 동갑내기 친구 이민혁에게는 다르다. 둘은 나란히 포크를 꺼내 들어 함께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쪽이 될 거다. 유현민에게도 그랬듯, 아마 연인인 이연우는 절대 듣지 못할 임태호의 고민을 먼저 듣게 되기도 할 거다.

이연우는 잘 때를 빼고는 제 왼쪽 손목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손목시계를 빤히 눈에 담았다. 사실 연우는 태호처럼 꼬박꼬박 시계를 차고 다니는 편이 아니었다. 굳이 제가 손목시계를 확인하지 않아도 시간을 확인해 주는 사람은 넘칠 듯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좀 달라졌다. 이 시계를 볼 때마다 참 많은 것을 상상하게 된다. 연인이 된 남자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모두 다.

그래서일까.

요즘 따라 제 앞에서만큼은 힘들다는 말은커녕, 작은 투정 한 번 내보이지 않으려는 임태호가 좀 더 제 품에 기댔으면 하는 바람이 자꾸 치밀어 오른다.

선후배로 함께했던 시간은 하루하루가 끝내주게 행복한 기억들이었지만, 거기서 연인으로 발전한 지금은, 그것이 약간의 부작용을 동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임태호는 다섯 살 어린 연인 이연우의 앞에서 언제나 선배로 있으려고 한다. 정말, 언제나.

이연우가 이렇게 그 나름의 욕망, 혹은 고민을 품고 있을 때, 임태호 역시 최근 유독 집중하게 된 화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오메가로 발현 후,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시작하게 된 첫 사회생활이 안겨 준 질문이었다.

‘대체 알파와 오메가들은 왜 이렇게 각인에 의미를 둘까?’

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요새 TV에서 한창 하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한창 잘나가는 두 배우가 나란히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는 시작부터 화제였다. 그 눈에 띄는 알파메일 백율과 박승환이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한 화, 한 화 방송될 때마다 끊임없이 연일 화제의 중심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드라마는, 최근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그들과 엮인 베타들이 몹시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주제로 향했다.

바로 한 베타를 사이에 둔 두 알파의 각인이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잠깐 커피를 마시는 타이밍이 되자, 사람들은 바로 전날 있었던 드라마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베타 직원들은 ‘대체 각인이 뭔데 그래요? 각인하면 뭐, 그 사람 두고 딴사람 만나도 꼼짝 못 하는 그런 건가?’라고 조금은 못된 가정까지 들어 질문을 쏟아냈고, 알파와 오메가 직원들은 ‘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그러다가 진짜 뭔 일 날 줄 알아요. 그런데 각인한 사람 우리 중에 있나?’하고 신나게 대화를 시작했다.

적지 않은 팀원들 사이에서 각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는 ‘그거 하면 진짜 인생 망한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서 가시방석에 앉은 건 태호였다. 덕분에 요 몇 주간 수요일과 목요일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임태호는 사람들이 온갖 호기심을 가지고 내놓는 각인의 대상이었다. 그것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드라마처럼 일방 각인 상태이기도 하다.

……무려, 그 극우성 알파 이연우에게!

“형, 안 나가세요?”

“나 뭐 전화 받을 게 하나 있어서. 그냥 간단하게 뭐 사 와서 사무실에서 먹고 좀 쉬려고.”

결국, 임태호는 같은 팀원들과 함께하는 오늘 점심시간은 건너뛰기로 마음먹었다. 정말이지 입맛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요 며칠은 감기 기운이 있는지 으슬으슬한 게 컨디션도 영 좋지 않았다.

태호는 현민이 추천한 카페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두 개 샀다. 한 개가 아닌 두 개인 까닭은, 네다섯 시가 되면 배고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현민을 위한 것도 같이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그룹 개발 1팀에는 임태호와 마찬가지로 그 드라마 탓에 입맛이 뚝 떨어진 사람이 있었다.

“……식사하러 안 가셨어요?”

“괜찮습니다.”

바로 개발 1팀의 팀장 이현이었다.

탕비실에서 나오던 현과 딱 마주친 태호는, 잠시 동안 눈을 멍하게 깜박이다가 봉투에서 주섬주섬 샌드위치 하나를 꺼냈다. 현민의 몫으로 사 온 것이었지만, 당장에 점심을 거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저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저, 그래도요. 이거 드세요.”

이현은 얼결에 받아 든 두툼한 샌드위치를 마치 탐색하듯 눈으로 훑다가, 작게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했다. 사실, 이 1팀 내에서 그에게 이런 걸 건네는 사람은 입사한 지 이제야 두세 달 된 임태호가 처음이었다. 이현 그는 회식이 아닌 이상, 점심시간에 팀원들과 함께 식사하지도 않는다. 가끔 누가 권하기라도 하면 ‘체하게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하고 비뚜름하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휙 사라지는 사람이 그였다.

임태호는 이현이 제가 건넨 샌드위치의 출처를 궁금해하는 건가 싶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회사 뒷골목으로 나가면 있는 지하 카페에서 팔아요.”

“벌써 그런 것까지 압니까?”

“현민이가 이 근처 맛집 지도 수준이던데요. 앱에도 안 나오는 곳을 다 알더라고요.”

태호 몫의 커피를 하나 더 타는 것은 현의 일이었다.

“제 형도 그렇습니다.”

“이안 총괄님이요?”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거다’가 말버릇일 정돕니다.”

임태호는 몇 번 들어와 보지 않은 이현의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갓 입사한 개발 1팀에서도 누구보다 동글동글하고 순한 인상으로 꼽히게 된 임태호와 금방이라도 어딘가에 총질하다 온 것 같은 살벌한 사내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남자의 식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떻게 보면 1팀에서 팀장인 이현을 보고 움츠러들지 않는 건 팀원 연식이 가장 짧은 임태호였다.

“맛있네요.”

“그렇죠? 거기 가서, 신화그룹 유현민 먹는 대로 주라고 하면 이렇게 줘요.”

천진하게 이어진 임태호의 말에, 이현의 눈썹 하나가 살짝 휘었다.

아침부터 한 손에 주전부리가 든 검정 봉투를 들고 출근하는 유현민은, 점심때는 또 오후를 위한 간식을 챙긴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먹는 걸 좋아한다고는 생각했는데, 무슨 칵테일 바도 아니고 이름을 대면 나오는 샌드위치가 있다니. 대체 카페 사장과 무슨 친분을 쌓고 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유현민의 취향으로 커스텀 된 특제 샌드위치는 굉장히 맛있었다. 바삭하게 구운 빵에서는 버터의 풍미가 느껴졌고, 적당히 간이 밴 참치와 싱싱한 채소의 조합은 바닥으로 떨어졌던 입맛마저 돋우게 하기 충분했다.

말 없는 팀장과 말 없는 신입 사원의 식사는, 음식을 씹는 소리마저 크지 않았다. 요 근래 가장 인기 많은 드라마가 지겨워서 도망친 두 사람이라 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임태호는 이현보다는 사회 친화적인 구성원이었다.

그는 근 10분간 단 한마디도 없이 샌드위치와 커피만 마시고 있는 지금의 상태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조심스레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식사만 하나요?”

“뭐 어떻습니까.”

가끔 너무 솔직한 대답은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임태호가 그랬다. 태호는 턱을 긁적이며 그렇죠, 하고 작게 대답했다. 이현은 살짝 움츠러든 기색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지는 않았기에, 그 역시도 잠시 기억을 더듬어 대화를 이어 갔다.

“임태호 씨는 딱히 받을 전화도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왜 혼자 빠졌습니까?”

하지만 그 역시 화기애애한 대화를 위한 주제라기보다는 송곳처럼 예리한 지적이었다. 나름대로 신경 쓰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현은 이현이다.

임태호는 조금은 곤란한 듯 눈을 굴리다가 거짓말 대신 진실을 말하는 쪽을 택했다.

“……당분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쭉 그렇지 않을까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현은 그 지극히도 개인적인 문장 안에 담긴 다른 의미를 곧장 집어냈다.

“그 망할 드라마 때문에?”

“팀장님도 안 좋아하세요?”

“기사도 안 읽을 정도로.”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조금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사실 그건 꼭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의도치 못하게 목소리가 커졌다는 쪽에 가까웠다. 태호는 그걸 어렴풋이 깨닫고, 갈수록 목덜미가 뜨끈하고 눈가가 흐린 게 오늘은 조금 눈치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칼퇴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받았다.

“어제 백율이 각인했대요. 박승환이랑, 주인공 누구더라. 베타 누구 두고 그렇게 됐다던데요.”

“안 보시는 것치고는 잘 아십니다.”

“뭐, 기사나 사람들이 하는 말만 봐도요.”

이현은 순간 임태호가 평소보다 조금……, 들뜬 말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무던한 얼굴이었기에 그 이질감을 끝까지 의심하지 못했다.

샌드위치 하나를 맛있게 다 해치우고 남은 원두커피를 홀짝이던 태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주먹만 천천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 약간의 감기 기운 같은 열기에 임태호는 최근, 아니 연인의 각인을 알고 난 이후부터 쭉 그의 마음속 갚은 곳에서 품고 있던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요, 각인은.”

“…….”

“어떻게 해야 할 수 있고……, 대체 어떤 기분일까요.”

이현은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들었다.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가 되면 이런 건 쉬울 줄 알았는데.”

마지막 말은, 정말로 임태호가 말할 생각이 없던 거였다. 왠지 기분 나쁠 정도로 속이 끈적이고 울렁거려서 무언가를 게워 내듯 터트린 문장에 가깝다. 태호는 아직까지 왜 제가 지금 이 순간을 이토록 껄끄럽게 느끼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눌러온 단어, 단어를 터트린 태호와는 달리 이현은 꽤 담담한 얼굴을 한 채로 친척 동생의 연인을 바라보다가 그가 오랫동안 자문해서 얻은 답을 기꺼이 꺼내 놓았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겁니다.”

“네?”

“그건, 그러니까…… 각인은.”

이현은 조금 찌푸리듯 웃었다. 사석에서 만난 것도 적지 않고, 매일같이 같은 팀에서 얼굴을 맞대게 되면서 어쩌면 주 중에 이연우보다 이현을 더욱 많이 만나게 된 태호이지만 저 시종일관 날 선 듯 보였던 사내가 저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임태호 씨가 죄책감이나 그 비슷한 어떤 걸 느낄 정도로 대단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왠지 콱하고 폐부를 찌르는 말에 태호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됐다. 이현은 문득, 아주 나중에, 정말 나중에 제가 몇 번이고 상상하고 그렸던 그날이 오면 제가 각인한 그 사람도 저런 얼굴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고해성사와 그 색이 비슷한 말을 이었다.

“일종의……, 자기만족 비슷한 겁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싶어서 하는, 자기만족이요.”

“…….”

“힘들게 하는 건 각인보다는 다른 쪽이죠.”

언제나 망설임 없이 말을 잇던 이현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까지 조금은 머뭇거리듯 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태호는 작게 물었다.

“……그게, 뭔가요?”

그 순간만큼은 왠지, 눈앞의 사내가 베타라는 것을 잊었다. 이현은 그 기대에 부응하듯 알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넘칠 듯이 많은 사람들 중 딱 한 사람이 되는 거.”

“…….”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이현의 얼굴은 이제 답지 않을 정도로 흐린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살다 살다 그 녀석을 부러워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임태호는 언제나 서늘하다 못해 날 선 채라, 신화 가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고 내심 생각했던 팀장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왠지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임태호 씨?”

태호는 작게 대답했다. 아니, 제대로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임태호는 대답이라기보다는 입을 벙긋거리는 정도로 말한 게 다다. 조금 전까지 잘 먹은 샌드위치가 체하기라도 한 건지 속이 더부룩하고 숨 쉬기가 껄끄러웠다.

이현은 그제야 제 잘못을 인지했다.

각인에 대해 말하던 순간, 제 페로몬이 어땠을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제 향을 오랫동안 꽉 눌러 감춰 오고 또 엄청난 양의 약을 들이부어 먹는다고 해도, 오랫동안 마음에 담은 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십 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습관적으로 억제제를 먹던 사람이 이제야 막, 원래 그가 갔었을 삶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문제 아닌 문제가 있다. 이현은 그걸 간과했다.

……정말이지 임태호는 좋은 ‘선배’다. 여러모로.

이현은 작게 한숨을 삼키며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이연우는 제 사촌 형의 연락을 꽤 늦게 확인했다.

밖에서 약속된 점심 약속의 상대들이 제법 까다로운 자들이었던 탓에, 비서도 없이 혼자 간 후 휴대폰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연우는 일정을 끝내고 본사로 들어오는 길에야 제 휴대폰에 가득 쌓인 부재중 전화 스물여섯 통과, 한가득 쌓여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의 이름은 꽤 강력했다.

[변태 새끼].

그건 사촌 형인 이현이다. 이연우는 조금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뒷목을 주무르며 그 가득한 문장들을 확인했다. ‘보는 대로 연락 요망’이라는 건조한 문장으로 시작된 메시지는, 중간부터는 ‘밥 좀 작작 처먹어’로 바뀌었고, 이윽고 마지막 메시지는 ‘이연우 너 도착하는 대로 바로 네 사무실로 올라가’로 끝났다.

그럼 뭐 바로 올라가지 다른 데 갈까.

이연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고는, 약간의 찝찝함을 안은 채로 평소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제 사촌 형은 줄기차게 전화할 때는 언제고 몇 번 다시 전화를 해 봐도 신호만 갈 뿐 얼른 받지를 않았다.

“오셨습니까. 몇 가지 보고 드릴 사항이 있는데요.”

“……네, 그래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홍보팀이 있는 층에 발을 내디뎌 복도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비서 하나가 따라붙었다.

대표 이민혁이 안정될수록 그의 수족인 이연우는 바빠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안까지 자리를 비운 이상, 당분간은 쭉 이럴 거다. 분 단위로 움직이는 매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연우는 문득 이 거대한 건물 한쪽에 있을 제 연인을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정말로.

이연우는 자신에게 일정하고 빠른 목소리로 중요 내용을 브리핑하는 목소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머리로는 지금 제 연인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는 제가 신입생이었고 임태호가 4학년이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된 기분이었다.

……신입 사원한테 치근대는 재벌 총수 아들은 좀 그렇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비서의 말이 잠시 끊긴 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이연우의 표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근사한 얼굴을 그려 만드는 것에 익숙한 사내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마음에 둔 사내를 그릴 때의 얼굴과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긴 복도를 쭉 걷고, 그다음 홍보팀 사무실을 지나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 이연우의 집무실이다. 이연우가 그 몇 분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뒤로 대여섯 명의 사람이 붙었다. 이연우는 그들에게 필요한 각각의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집무실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일찍 오셨습니다. 들어가서 얘기하죠.”

업무 회의에 가까웠던 점심을 마치고 들어오자마자 또다시 회의다. 어떻게 앓는 소리를 해 볼까 해도, 멀쩡한 척하지만 저보다 몇 배는 더 녹초가 된 형이나 누나를 알면서 적당히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연우는 회의가 끝날 시간을 셈하며 오늘 저녁 제 연인과의 데이트를 상상했다. 어디가 좋을까. 뭘 할까. 보통은 한식을 좋아하지만, 아직은 날이 좀 끈적이니까 깔끔하게 면 종류를 먹어 볼까. 식사하고 나면 뭘 할까. 뭘 하는 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이연우는, 비서보다 먼저 제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아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면서 정신을 또렷하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알파의 별거 아닌 바람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건 문을 여는 순간 잠시나마 눈앞을 하얗게 만들었던 페로몬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향은 이연우의 뒤에 있던 알파나 오메가들에게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한 번 지나치면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 수준으로 진해진 것이 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겨우 조금 짙어진 페로몬이 집무실 문을 당겨 연 알파에게로 범위를 좁혀 국한한다면 꽤 다른 의미가 된다.

이연우는 제가 너무 피곤하다 보니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아니면 하도 임태호만 떠올리다 보니까 머리 한구석이 좀 어떻게 된 건가, 하고 꽤 가능성 있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연우가 그렇게 언제까지나 멍하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뒤로 향해 있던 제 의자가 별다른 소리도 없이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곱게 만들어 걸고 있던 미소를 별안간 싹 지웠다.

그 순간 이연우의 뒤에 있던 이들은 분명 똑똑히 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약간의 정적 뒤에 툭 떨어진 나직한 ‘씨발’을.

다음은 귀가 울릴 정도로 큰 충돌음이었다. 아니, 뭔가가 부딪힌 것으로 착각할 만큼 거세게 문이 닫혔다. 사람들은 코앞에서 굉음과 함께 굳게 닫힌 문을 감히 다시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지 허둥지둥 달려온 비서 하나가 놀란 목소리로 ‘누구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안 돼요!’하고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안 됐다.

조금 전, 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또 닫은 사람은 한 시간이 꼬박 넘는 시간 동안 기다렸던 이곳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

임태호는 오메가로 발현한 후 그 이름 아래 살아온 순수한 시간을 따진다면 고작 몇 달이 전부일 것이다. 심지어 그 얼마 안 되는 기간은 오메가의 생활에 충실했다기보다는, 주로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데에 노력하는 것으로 채워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매번 주기적인 히트사이클을 겪는 태호 나이 또래의 오메가는 감기 기운과 흥분 직전 몸이 달아오르는 감각을 어렵지 않게 구분한다. 그 정도 되면 긴가민가하며 고민할 필요도 없이 월차를 쓰고, 제 열기를 달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오메가 임태호’는 이제야 겨우 열아홉 수준이다.

열아홉에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 멈췄던 시계가 이제야 천천히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숫되기 짝이 없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페로몬 샤워를 한 상대가 아닌 극우성 알파와의 시간은,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임태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마치 몇 달 전의 자신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억제제를 삼키며 생활하는 극우성 알파를 임태호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리 없다.

그나마 모든 불행 중 다행이 있었다면 그건 이현이 제법 예민한 알파였다는 것일 테다.

이현은 제 사촌 동생의 연인이 ‘이상 증상’을 보이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집어냈다. 정말 그가 베타였다면 히트사이클이 이렇게 확 앞당겨지지도 않았겠지만, 베타가 아니었기에 태호가 아슬아슬한 상태임을 깨달을 수 있기도 했다.

이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사실 이현이 아니었더라도, 제 알파를 찾으며 멍한 얼굴이 되는 임태호를 대할 방법은 많지 않았을 거다. 현은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태호를 이연우의 집무실로 직접 올려 보낸 뒤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일종의 응급 처치나 다름없었다.

그건 히트사이클의 초입에 다다른 오메가를 가장 편한 환경에 두기 위한 최대한의 배려이자, 별다른 수가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조치였다.

이연우는 제 의자에 앉아 마치 기절한 것처럼 축 늘어져 있는 연인에게로 뛸 듯이 발을 옮겼다.

“형, 태호 형!”

알파는 의자가 움직이며 그곳에 앉은 사람의 어깨선이 슬쩍 보인 것이 다였는데도, 자신의 공간에 한발 앞서 와 있던 사람이 임태호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역시.

각인까지 한 연인이다. 모를 수가 없었다.

평소의 맑았던 향과는 달리, 지금 얼마나 달고 끈적이는 페로몬을 내뿜고 있는지 정도는 첫 숨에 깨달았다.

이연우는 목까지 발갛게 변한 임태호가 약간은 초점 잃은 눈을 한 채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히트사이클 전조 후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아는 건 꽤 중요한 사항이다. 지금 당장,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태호의 상태를 파악하는 거다. 머리도 마음도 그걸 너무 잘 안다. 몸만 농염한 페로몬을 따라 부글거릴 뿐이다.

연우는 왠지 입이 바짝 바르고 아랫배가 당기는 것 같은 감각을 꽉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약 같은 거 없어도 되겠어요? 언제부터 이랬던-.”

하지만 그런 필사적인 노력은 단 한 번의 손짓에 쉽게 휘청했다. 그건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것도 포함한 표현이었다.

이연우는 차마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제 슈트 앞섶을 구겨질 정도로 세게 잡아당기는 손에 휙 끌려갔다. 가까스로 테이블을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저를 잡아챈 사람에게 부딪히지 않으려는, 반사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릴 노력 덕분이었다.

아랫입술이 따끔했다.

연우는 제 입술을 살짝 깨물고 빨아들이며 정신없이 매달리는 사람이 그 임태호라는 것이 채 믿어지지 않아, 몇 초간은 멍하게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몇 번인가 태호가 먼저 키스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임태호는 키스보다 뺨에 부딪히는 부드러운 스킨십을 더욱 선호하는 편이었고, 이렇게 입을 열게 만들어 혀를 섞는 행위를 먼저 시작하는 건 한결같이 부끄러워했다.

임태호가 덮치면 끝장나게 설레고 좋을 줄 알았는데!

“하아, 형, 태호, 형. 잠깐만, 잠깐만요.”

연우는 제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급히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임태호라. 물론 머리가 띵할 정도로 좋고, 설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뿐만이 아니다. 참을 수 없이 곤란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씨발. 씨발. 씨발. 진짜, 씨발. 이연우는 발갛게 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에게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을 꾹꾹 눌러 삼키며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최대한 다정하게 되풀이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점심시간……, 끝날 때.”

평소에도 크게 말하는 편이 아니기는 하지만, 꺼질 듯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단어, 단어마다 열기가 그득했다. 심지어 임태호는 그 짧은 대답을 하면서도 제 뺨에 닿은 알파의 손에 어떻게든 더 붙고 싶은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점심시간부터라면, 히트사이클 전조로부터 겨우 두어 시간 지났다. 하지만 태호의 성격에 이렇게 먼저 매달릴 정도로 조급해졌다는 건, 일반적일 때보다 훨씬 더 빠름을 증명한다.

이연우는 작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사실 그는 오늘 같은 날을 꽤 많이 상상했었다.

설마 회사에서 시작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약을 끊은 이상 반드시 닥칠 임태호의 실질적인 첫 히트사이클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연우다.

이번은 억제제 없이 맞는 첫 히트사이클이다.

게다가 그 곁에는 극우성 알파인 저까지 있다. 어쩌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감각이 몰아칠 수도 있다. 이연우는 처음 맞는 그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사실, 태호는 일찍이 앞선 히트사이클 때 이연우의 영향권에 든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했다. 바로 이연우가 슬쩍 열린 문 너머로 임태호의 비밀을 엿봤던 첫 순간이다.

하지만 그때 임태호가 이연우의 영향을 받았었다는 사실은, 당사자 둘 다 모르니 별 도움은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죽겠다 싶어도 절대 거칠게 손대지 말아야지. 직접 삽입하는 것보다 도구를 써서 풀어 주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거야. 페로몬은 얼마나 열어야 할까? 어중간하게 하느니 차라리 다 여는 게 정신없이 지나가게 할 수 있으니까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또…….

이연우는 제 연인이 자신과 맞는 첫 히트사이클이 버겁거나 당혹스러운 기억이 아닌 머리 한구석이 말랑하게 녹을 것 같은, 어쩌면 기억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으로 남기를 바랐다.

그걸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쾌락에 들뜨는 건 제 오메가 하나여야 한다. 최소한 이번만큼은, 태호가 견딜 수 있는 쾌감에서 딱 몇 걸음만 나가는 정도가 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이연우는 저에게 살살 몸을 부딪치며 입술이 닿는 곳마다 조르듯 키스하는 연인을 달래듯 입을 열었다.

“형, 여기서 바로 하기에는 준비된 게 없어요.”

“……뭐가?”

버릇처럼 등을 쓸면서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별거 아닌 작은 움직임마저 자극이라는 듯 허리를 뒤로 빳빳하게 펴면서 더운 숨을 흘리는 통에,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고 있는 알파는 새삼스레 한 번 더 들끓었다.

“……지금, 상태가……, 어떤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더…….”

“그냥 하자.”

“…….”

“괜찮아, 괜찮으니까, 연우야.”

이연우는 그 자신이 극우성 알파였던 탓에 저와 같은 극우성인 오메가들에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쪽이었다. 페로몬이 진하고 좋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알아도, ‘그래서, 그게 뭐.’하고 저를 뒤흔들게 하는 것에 일부러 더 심드렁하게 굴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우는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이 그렇게 입을 모아서 흠모했던 그 망할 극우성 페로몬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는 지금 임태호의 향이 겨우 열성도, 우성도 아닌 오메가 페로몬 정도라고 생각하겠지만, 각인까지 한 알파인 이연우는 정말 사정이 다르다.

한참을 눌러 참았던 작은 욕이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씨발, 진짜…….”

이연우는 기다렸다는 듯 팔에 목을 두르는 태호에게 깊게 키스하면서 손으로는 벌써 느슨하게 변한 연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목에 얌전히 하고 있던 사원증 목걸이를 집어 던지고, 그다음은 급하게 셔츠를 풀어 벌리자 따끈하게 열이 오른 보드라운 피부가 손안 가득 잡혀 들었다.

“흐으, 아……, 응!”

태호는 제 맨 피부를 우악스럽게 잡는 손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어울리지 않는 노골적인 신음을 흘렸다. 언제나 단정하고 말갛기만 했던 목소리는 벌써부터 묘한 기대감에 차 있었다. 이연우는 그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시작은 가슴이었다.

그는 제 연인이 놀라지 않도록, 어쩌면 뻔한 단계를 밟아갈 생각이었다.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은 했다. 말랑한 기색 하나 없이 빳빳하게 올라온 작은 유두를 입에 넣자마자, 평소 같았으면 한참을 녹여야 내는 소리가 터지지만 않았더라도 알파는 최대한 예측 가능한 섹스를 이어 갔을 거다.

“하아아, 아, 아, 흐으응, 연우야, 아…….”

이연우는 제 이름을 칭얼거리듯 부르는 목소리에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잡고 있던 무언가를 놓쳤다. 목소리뿐일까. 물기 어린 눈으로 저를 보면서 더 해 달라고 보채는 임태호라니.

이전에 몸을 섞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정말 이렇게 달뜬 채로 어쩔 줄 몰라 하고 매달린 적은 없었다. 이제 와 확신하건대 임태호와 섹스를 하면서 제정신을 붙잡고 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부드럽게 풍만하지도 않고, 딱히 단단한 근육이 새겨지지도 않은 가슴은 손안에 딱 맞게 꽉 움켜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 위를 아프지 않게 손가락 끝으로 훑으면서 자극하고 끝에는 예민해진 젖꼭지를 꼬집듯 괴롭힐 수는 있었다.

이연우는 아랫배가 쭉 당기다 못해 바지 안의 성기가 답답해질 정도로 몰리는 흥분에 입술을 혀로 한 번 훑었다. 갈수록 이성적인 제어를 벗어나는 알파 페로몬은 이미 집무실 안을 흉흉하게 채운 지 오래였다.

겨우 가슴을 가지고 장난친 정도에 울먹이며 발을 구를 정도면, 아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최대한 배려하면서 상냥한 기억만을 남기려고 했는데, 저에게 닿지 못해 안달인 임태호를 보고 있자니 자꾸 다른 생각이 슬금슬금 머리를 들었다.

이연우는 발정으로 헐떡이는 연인을 책상에 눕히고, 달뜨게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예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신사적인 섹스와 약간의 짓궂음 정도는 함께할 수 있었다.

태호는 속옷과 함께 쭉 끌려 내려간 바지에 수치스러워할 새도 없었다. 고운 눈웃음과는 전혀 다르게 흉포할 정도로 날뛰는 알파 페로몬은, 이연우가 늘 생활하는 공간의 책상 위에서 훤하게 아래를 드러내 보이는 현재 상황을 자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은 히트사이클이네.”

“흐으, 읏!”

“하기도 전에 이렇게 젖은 건 처음 같은데요.”

알파는 조금 통통한 안쪽 허벅지를 지나 하얀 종아리 끝까지 쭉 하의를 벗겨 내던졌다. 그리고 제가 실오라기 하나 없게 만든 다리를 잡아 벌렸다.

그다음은 노골적으로 눈으로 훑는 관찰이었다.

그는 이미 앞이 축축하게 변한 지 오래인 태호의 사타구니부터 찬 공기에 닿아 꽉 오므라졌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구멍까지 집요하게 뜯어 살폈다. 손만 닿아도 소리를 내며 발가락을 곱은 채 달달 떠는 태호는, 그 시선마저 자극된다는 듯 뒤로 울컥 액을 흘렸다.

충분한 흥분감 그 어디에도 거부 반응이 없음을 확인한 이연우는, 작게 웃은 뒤 제 연인의 사타구니로 망설임 없이 고개를 처박았다.

임태호의 입은 유독 작고, 혀가 부드럽고 말랑해서 딥키스에 썩 적합한 쪽은 아니다. 펠라티오 역시 마찬가지다.

태호는 오럴을 할 때마다 금방 턱이 아픈지 자주 인상을 찌푸린다. 그래서 이연우는 제 연인에게 직접 오럴을 받는 것보다 자신이 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지금처럼 제 오메가에게 기꺼이 봉사할 준비가 된 히트사이클 기간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흐윽, 그러지, 마아, 싫어……, 힉, 아……!”

이 정도 사귀었으면 그저 좋아하며 받아도 될 텐데, 임태호는 제가 하는 것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곧잘 하면서 그 반대가 되는 건 머리꼭지까지 열이 오른 상태에서도 늘 부끄러워했다.

쾌감에 엉덩이를 흔들고 허벅지로 고개를 조여대면서 그만하라고 하는 건, 역시 영 설득력이 없다. 이연우는 제가 입으로 머금기 전부터 잔뜩 단단해진 채로 선액을 흘리던 기둥을 깊게 물고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세게 빨았다. 사내의 성기를 입에 담을 줄 몰랐던 오만한 알파를 이렇게 만든 건, 정말 임태호여서 가능했다.

사실 태호는 오럴을 받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싫다고 하기에는 솔직히, 좋다. 좀 더 진솔해지자면, 만약 이연우가 딱 성기만 빨고 애무한다면 눈가가 시큰할 정도로 부끄러울지언정 싫다는 말까진 안 했을 거다.

하지만 이연우는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상까지 간다.

태호는 제 허벅지가 점점 들리며 푹 젖어 질척해진 채로 움찔대는 뒤로 더운 숨이 닿기 시작한 순간부터, 눈앞으로 몇 번이고 전기가 튀는 것을 보았다.

“히익, 흐으으, 아, 연우야, 아…….”

혀끝으로 살살 굴렸다가 꽉 다물린 곳을 꾸욱 찌르기도 하고, 일부러 질척한 소리를 내며 할짝대는 집요함에 숨이 저절로 헐떡였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자극에서 벗어나 보려고 해도 딱딱한 책상에 눕혀진 채로 골반께가 잡혀 벌려진 상태로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처박은 알파를 피할 수 없었다.

태호는 고개를 도리질 치기도 하고, 몇 번을 들썩이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예민한 부분으로 쏟아지는 자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 말라는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쾌감에 허덕이는 소리를 고스란히 쏟아냈을 뿐이다.

처음에 누울 때는 조금 서늘하다고 느꼈던 원목의 감촉은 어느새 등을 촉촉하게 만든 땀과 함께 미지근하게 달라붙었다. 하반신으로 몰리는 감각은 간지럽다가도 온몸을 훑는 듯이 매서웠고, 또 어느 순간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찌르르하게 발가락 끝을 바짝 곱게 만들었다. 임태호는 칭얼거리기도 해 보고, 우는 건지 말을 하는 건지 모를 소리도 내 보면서 제 아래에서 살짝 움직이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종종 눈에 담았다.

붉게 상기된 뺨을 한 알파는, 가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옅게 웃었다. 자신의 성기를 입에 물고 눈을 휘는 모습은 정말 입이 바짝 마를 만큼 야했다.

하지만 그렇게 태호의 아래를 한참 동안 끈질기게 괴롭히던 연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푹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아, 맞다.”

그 작은 목소리는 지금 상황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일상적인 톤이라, 태호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이연우는 그 시선에 묘하게 나른하고 또 태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태호 형, 저 문을 잠갔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물론 그건, 여유로움을 뒤집어쓴 언제나와 같은 폭탄이었다.

“누구 들어오면 이거 바로 보겠다. 그렇죠?”

“……이연우!”

“회사에서 형 좆이랑 구멍 빨면서 고개 처박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사내 커플이 좋긴 하네요.”

안쪽의 약한 피부를 이를 세워 깨물며 웃는 목소리에 흥분 어린 장난기가 가득했다. 고운 말만 쓰는 후배는 오래전에 그만뒀다지만, 그래도 태호의 앞에서는 가능한 정제된 단어를 사용하던 알파가 굳이 골라 사용한 음탕한 단어에 태호의 귀가 벌게졌다.

정말로, 정말로 저 문이 열린다면.

그 누군가는, 무려 신화그룹의 이연우가 오메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성기를 빨고 뒤를 혀로 간질이는 모습을 바로 보게 될 거다. 태호를 애무하며 조금씩 벗기 시작한 셔츠 너머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도.

태호는 잔뜩 들어 올린 채인 제 허연 다리가 이제야 좀 부끄러워져서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이연우는 기다렸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허벅지 좀 붙여 봐요. 안 그러면 형이 더 감질날걸.”

“……왜, 애…….”

“뭐,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겠네.”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지금처럼 크게 들린 적 있었을까. 태호는 머리 한구석을 흐물흐물하게 하는 기대감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한 번 핥았다. 그러자 귓가에서 알파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애액으로 충분히 젖은 구멍이 제 안을 꿰뚫을 것을 기대하며 자꾸 움찔거렸다.

“흐윽, 아, 아, 읏!”

“이제 빨리 쑤셔 주라고 엉덩이도 다 흔들고. 하여간 야해요, 사람이.”

혀로 한참을 간질인 구멍 뒤로 알파의 손가락 몇 개가 불쑥 들어왔다. 임태호가 느끼는 부분을 정확하게 아는 그는 망설임 없이 내벽 안쪽을 짓뭉개고 장난치듯 쑤시다가, 그 손을 뺌과 동시에 태호의 엉덩이 골과 허벅지 사이로 잔뜩 꺼덕이며 흥분한 채던 제 성기를 찔러 넣었다.

뒤로 직접 삽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요란한 소리가 난 건, 이미 끈적일 정도로 울컥거리며 흘러나오는 애액 때문이었을까, 히트사이클의 열기로 이연우를 기다릴 때부터 앞으로 몇 번을 사정한 눅진함 때문이었을까.

몸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채로 눕혀진 임태호는, 제 은밀한 틈새로 퍽퍽 큰 소리가 나도록 알파가 허리 짓 할 때마다 안까지 전해지는 떨림에 몸이 한껏 달았다.

이연우는 자꾸 허리를 들썩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연인의 뜻을 눈치채고, 그 자신도 조금은 한숨으로 꽉 막힌 목소리로 낮게 입을 열었다.

“당장 형 구멍으로……, 후우, 처넣고 싸고 싶은 거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거예요, 지금은.”

“아, 흣, 흐으, 힉!”

“뒤로 받아먹고 싶어도 잠깐 참아. 신입 사원 배부르게 만드는……, 재벌 3세는 좀 막장이잖아.”

히트사이클에 극우성 알파가 직접 안에 사정하면, 이연우가 말한 상황이 펼쳐질 확률은 한없이 높아진다. 그 정도는 갓 오메가로 발현한 것이나 다름없는 임태호라고 해도 잘 안다. 삽입하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말도 거짓이 아닐 거다. 거칠게 허리 짓하며 낮게 속삭이듯 말하는 문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열기가, 중간중간 매끄러운 문장 대신 한번 참았다가 토해 내는 긴 한숨이 머리꼭지까지 흥분한 채임을 증명한다.

태호는 자세를 달리해서 테이블을 움켜쥔 후배위로 다시 한 번 제 뒤와 거세게 부딪히는 진동에 상체까지 뒤틀며 헐떡였다. 혀로 한참을 풀고, 손가락으로 잔뜩 헤집은 구멍이 자꾸 간지러웠다. 언제나처럼 가득 차는 부피감을 찾아 꽉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며 저절로 움찔댔다.

참으라고 하지만, 참으라는 말의 의미도, 이유도 알지만…….

잔뜩 달아오른 머리는 그 의미를 고민할 새도 없이, 입 밖으로 비음 섞인 칭얼대는 단어를 내던져 버렸다.

“……그치마안…….”

“그렇지만, 뭐?”

평소의 임태호라면 절대로 꺼내지 않을 말 때문에, 이연우는 솔직히 좀 놀랐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정말 많이 놀랐다. 그래서 뭐라 대답한다는 것을 당황한 나머지 살짝 무뚝뚝하게 대꾸해 버렸다.

허리를 들어 뒤돌아보는 오메가의 눈가에는 슬쩍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연우는 그게 제가 울린 게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아니 ‘울린 건’ 맞지만, 여하튼 감정적인 의미로 그렇게 한 게 아님을 잘 아는데도 괜히 마음이 철렁했다.

그래서 알파는 평소와 같은 온갖 다정한 말을 쏟아 내며 달래려고 했다. 그건 대체로 ‘태호 형, 조금만 참아요. 우선 좀 열 가라앉고 나면 어디든 가요.’ 같은 상식선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 많은 문장 중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차례를 이어받아 폭탄 같은 한 단어를 흘리는 임태호 때문이었다.

“그래도…….”

“…….”

이연우는 순간 제 집무실의 천장으로 시선을 돌린 채 긴 한숨을 쉬어 버렸다.

“……후우.”

“으응? 연우야아, 연, 우야아…….”

“그래, 알았어. ……잠깐만요. 후우우, 잠깐만.”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어리광은 히트사이클이 되어서야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머리가 띵하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이연우는 잠시 그 자신이 울긋불긋하게 만든 오메가의 등에 이마를 댄 채로 숨을 골랐다. 태호는 그 잠시도 참을성 있게 굴지 못하고 자꾸 제 알파의 이름을 불렀다.

‘연우야.’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하기만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엄청나게 음란한 조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름의 장본인은 오늘에야 알게 됐다.

이연우는 제 오메가의 엉덩이 골과 허벅지 사이에 있던 단단한 제 성기를 빼내어 대충 바지를 올렸다. 훤하게 풀린 셔츠 단추를 어떻게 꿰입었는지는 더욱 모르겠다. 알파는 테이블에서 헐떡이는 제 연인을 의자에 곱게 앉힌 후, 이마에 입술을 한 번 떨어트린 다음 곧바로 문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은 이연우 그의 우려 아닌 우려대로 잠기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이연우와 임태호, 그 둘 중 누구도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연우는 제 집무실에서 나와 작은 비서 대기실을 지나, 자신이 속한 홍보팀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오피스로 직행했다. 어찌나 성큼성큼 걸었는지 기껏해야 1, 2분도 안 걸렸을 거다.

사람들은, 정확히는 그곳에 있던 알파와 오메가들은 이연우의 모습을 눈에 담기 전부터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 동시다발적인 움직임에 베타들 역시 동료들의 시선이 꽂힌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모두 한결같을 정도로 같은 표정이 됐다.

지금, 그 곱고 완벽하다던 신화그룹 나이트의 모습은 정말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다’. 하얀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고, 목덜미까지 벌겋다. 단 한 번도 헝클어진 모습을 본 적 없는 머리나 옷차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구겨진 셔츠에, 대충 구색만 맞춰 잠근 단추 사이로 몸의 근육이 그대로 그려졌다.

게다가 이 말도 안 되는 페로몬이라니.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어떤 정황’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그 이연우의 모습에 멍청하게 보일 만큼 얼빠진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런 얼굴을 한 제 팀의 사람들을 달래기는커녕, 그 얼빠짐에 쐐기를 박는 질문을 던졌다.

“콘돔 있으신 분 계십니까.”

“……예?”

“콘돔이요.”

정말 한 3초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을 거다. 홍보팀의 사람들은 ‘일동 정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석상처럼 굳었다가, ‘아, 그거…….’, ‘그거…….’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차마 가지고 있는 사람도 꺼내기 싫은 그 침묵 끝에, 용기 있는 직원 하나는 조심스럽게 제 가방 저쪽 구석에 있던 작은 사각 형태의 질긴 비닐을 꺼냈다. 동그란 원형이 볼록하게 그려지는 그것은, 섹스 도중 나온 ‘그 이연우’가 찾던 물건이 맞았다.

하지만 이연우는 제게로 수줍게 전해진 그것을 받아 들고는 뒷목을 주무르며 조금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알파는 제 손에 쥐어진 콘돔을 툭 치면서 낮게 입을 열었다.

“한 개로 안 될 것 같은데.”

◈◈◈

회사에서 그 유명한 신입 사원 연인의 히트사이클을 받아 주며 콘돔을 찾은 이연우의 이야기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이제야 막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렸다는 자유인 이안의 귀까지 빠르게 들어갔다. 이안은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밟으러 가는 중에, 그 극악한 와이파이 상태로도 꿋꿋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대단해!]

7시간의 시차가 나는 곳에서 전해진 사촌 형의 짤막한 감탄에, 이연우는 슬쩍 눈썹을 꿈틀하고는 대충 휴대폰을 내던졌다. 그는 가족의 말에 대답하는 것보다 침대에서 쉬고 있는 제 오메가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더 중요한 사내였다.

하지만 달짝지근한 주스 한 잔과 부담 없는 작은 크루아상 몇 개를 들고 호텔 침실로 돌아온 연우의 눈에 보인 건, 막 히트사이클의 끝물에 접어든 태호의 얼굴이 아닌 동그랗게 올라온 이불 뭉치였다.

임태호는 부끄러울 때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저렇게 숨는다. 정말 무슨 곰도 아니고, 이불로 굴을 파고 있는 거다. 연우는 옅게 웃으며 이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는 이불 뭉치의 끝을 잡아 올렸다.

“태호 형, 이것 좀 드세요.”

이런 상태의 제 오메가를 달래는 법을, 알파는 이제 꽤 잘 안다. 새하얀 이불 안으로 슬쩍 보이는 태호의 얼굴은 꼭 울 것처럼 입을 앙다문 채였다.

이연우는 살살 달래며 끌어 내리자 어렵지 않게 내려가는 이불 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오메가의 뺨에 쪽, 하고 소리 나는 뽀뽀를 한 번 했다.

“왜, 창피해?”

“……창피해.”

“사내 커플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한 거라고 생각해요. 조퇴 대신 효율적으로 동선을 줄인 거죠, 뭐. 요새 그게 뭐가 흉인가?”

흉은 아니지만, 제가 열에 취해 헐떡이는 사이 ‘그 이연우’가 ‘그 이현’에게 찾아가 라지 사이즈 콘돔 한 통을 기어코 구해 집무실로 다시 들어갔다는 며칠 전의 소식과, ‘어우야~ 좋은 시간 보내세용’이라는 유현민의 메시지를 동시에 확인하는 건 너무 부끄러웠다. 정말 속된 말로 쪽팔려 죽겠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부끄러움은 임태호의 몫이었다.

이연우는 오히려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지금이 형 페로몬 제일 진한 것 같아요. 진짜 좋아.’하며 제 오메가를 이불째로 끌어안기에 바빴다.

부끄러움도 넘칠 듯 많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의 포기도 빠른 편인 임태호는, 짧은 한숨을 쉬며 이연우의 품에 제 머리를 기댔다. 정사 후의 나른함과 노곤한 온기가 있어 다행이었다.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오락가락했던 며칠이, 평소보다는 조금 길었던 열기를 지나 끝나 가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후희를 즐기는 히트사이클은, 제 알파의 품에 안긴 채로도 잘 실감이 안 났다.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저에게는 없으리라 생각했던 탓일지도 몰랐다.

태호는 저에게 자꾸 간지러운 입맞춤을 떨어트리는 알파의 입술을 가만히 받고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연우야. 나 되게 신기한 일 있었어.”

“신기한 일? 뭔데.”

거의 반사적으로 속삭이는 이연우의 목소리는 평소 같은 존댓말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 순간에는 좀 더 잘 어울리는 친근한 느낌이라 썩 나쁘지 않았다. 임태호는 제 손을 깍지 끼어 잡은 이연우와 가볍게 손장난을 하면서 느리게 말을 이어 갔다.

“왜 며칠 전에. 팀장님이 도와줘서……, 너 기다리는데. 사실 그땐 너무 어지러워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싶었거든.”

“늦어서 미안해요. 휴대폰을 보는 건데.”

“아냐, 사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있어서 힘든 줄 몰랐어.”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재깍 사과부터 하는 알파의 말에 태호가 흐리게 눈을 접어 웃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히트사이클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도, 임태호가 제 집무실에서 혼자 숨을 몰아쉬며 저를 기다렸던 그 두어 시간이 두고두고 씁쓸하게 남을 정도로 마음에 걸렸다.

태호의 페로몬이 요새 조금 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그저 불안정한 게 아니라 히트사이클의 전조라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직은 그걸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급해서 제가 놓쳤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태호는 그런 제 연인의 속이 훤히 그려져서, 맞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며 자신의 ‘신기한 경험담’을 이어 갔다.

“그런데, 그렇게 앉아 있는데…… 왠지 진짜 갑자기!”

“…….”

“‘아, 저 앞에 연우 온 것 같아.’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최대한 가벼운 어조로 말하려고 노력하는 오메가의 목소리는 며칠간 열심히 쓴 탓에 살짝 쉬어 있었다. 이연우는 왠지 뜻 모를 눈을 한 채로 제 연인의 말을 대꾸 없이 들었다.

“근데 어떻게 그 순간에 진짜 네가 딱 문을 열었어.”

“…….”

“소름 돋을 정도로, 딱 그 순간에.”

새삼 그때를 떠올리면 설레기라도 한다는 듯, 임태호의 눈은 슬쩍 반짝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은 이연우 그가 홀딱 빠져 있는, 연상의 연인이 드물게 보여 주는 천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언제나처럼 늘어놓는 ‘형 너무 멋있어요. 예뻐요. 섹시해요. 귀여워요.’ 등등의 찬양 대신, 가만히 제 오메가의 얼굴을 뜯어 살피기만 했다.

제 가까운 이들의 변화에 민감한 태호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내의 평소 같지 않은 반응을 금방 눈치챘다. 그래서 제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문장을 되짚어 보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왜?”

“…….”

하지만 알파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언짢거나 기분이 상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입만 꽉 다문 채로 말이 싹 사라졌다. 태호가 그나마 겨우 집어낼 수 있는 건, 제 알파의 페로몬이 불과 조금 전과는 달리 묘하게 저 아래에서 들끓고 있는 것 같다는 거였다. 아니, 사실 그것도 좀 긴가민가했다.

결국 임태호는 ‘……피곤한가?’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다운 무난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당연히 이연우는 피곤해서 말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곧바로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문장을 겨우 눌러 참느라 바쁠 뿐이다.

‘아니! 둔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그걸 몰라!’

알파는 저를 보며 말간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연상의 연인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딱 그 순간에, 얼마나 느낌이 다른데. 그건 진짜 모를 수가 없는데!

정말이지 ‘형, 그게 각인이거든요!’라고 토로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진짜 바보야. 곰이야, 뭐야…….”

“뭐가?”

“…….”

이연우는 연인이 채워 줄 수 있는 영역과 가족이나 친구, 때로는 지인이 채워 줄 수 있는 영역이 모두 다름을 안다.

그건 정말 얼마나 가깝든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라,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지나든 그득한 욕심이 조금쯤은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아마 그 빈틈을 저는 늘 쉼 없이 바라고 또 질투할 거다.

어쩔 수 없다. 안 그러려고 해도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욕심 정도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다. 각인한 연인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게다가 약간의 결핍은, 관계를 언제나 목마르게 만드니 나쁘지만은 않을 거다.

보아하니 제 오메가의 각인은 저와는 다른 온도로 딱 임태호답게 끓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확 불이 붙으며 저 사람에게 완전히 허덕이게 될 저 자신의 미래를 수긍하게 하는 쪽보다는, 연인의 부재에 민감하고 때로는 그 기척을 조용히 좇는 쪽이 좀 더 잘 어울리기도 하다.

“빵 맛있다. 연우 너도 먹어.”

이연우는 제가 들고 온 크루아상을 이불 하나 두른 나신으로 품에 안긴 채 먹는 태호를 빤히 눈에 담다가, 저도 모르게 나오려던 웃음기를 ‘네에’, 하는 대답으로 감췄다.

저에게 각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임태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 버리는 건, 제아무리 뻔뻔한 알파라도 조금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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