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외전 1. FETHISH​​ (8/9)

외전 1. FETHISH

*본 외전은 7화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임태호는 성적性的으로 꽤 담백하다. 아니, 가끔 보면 꽤 무심할 정도다.

그건 어릴 적부터 ‘어쩜 애가 이렇게 순해요?’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그의 무던한 성격 탓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자신의 또 다른 성별을 억눌러 감춘 채 살아온 반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호가 스킨십을 싫어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사실 임태호는 그 자신도 스스로가 스킨십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임태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제 알파의 백허그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바보처럼 헤실헤실 풀리는 표정을 감추면서 쉼 없이 어깨며 머리카락을 쓸고, 뒷덜미에 입술을 떨어트리는 감촉을 느끼는 건 어쩌면 싫어할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태호는 그렇게 따뜻하고 편안한 연인의 품 안에서 평소답지 않은 단호하다 못해 딱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우 네가 가져가.”

임태호의 시선은 딱 한 군데를 향해 있었다. 바로, 그가 오늘 오후에 받아서 내용물을 확인한 후 거실 구석에 숨기듯 던져둔 연갈색 택배 상자다. 연우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제 오메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어리광을 부리듯 태호의 귓가에 작게 쪽, 쪽 하고 부러 소리 나는 입맞춤을 했다.

“저거 종량제 봉투에 어떻게 버려. 꼭 가져가야 해.”

하지만 태호는 이번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반드시 저 박스를 집에서 없애겠다는 의지가 연인의 애교에 흔들리는 마음보다 더 큰 듯했다.

이연우는 그제야 고개를 슬쩍 기울여서 제 오메가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조금은 곤란한 듯 눈썹을 휘는 모습은, 태연하게 다량의 성인용품, 그것도 소위 SM용 도구들을 주문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왔다.

회사를 나와 이렇게 단둘이 딱 붙어 있을 때면 안경을 잘 끼지 않고 머리도 조금은 느슨하게 헝클어트리는 이연우는, 그 외견만 따지자면 한없이 우아한 단어들만 어울릴 터였다. 그러나 알파는 그보다도 차근차근 제 연인을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우리 자기는 무심하기도 하지.”

“……뭐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데.”

태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이 순간 무너지고, 목덜미로 금세 빨간 물이 들었다. 이연우는 그 모습을 보며 짐짓 순진한 듯 눈을 굴리면서도 속으로는 숫된 제 연인에 대한 새삼스러운 찬양을 늘어놓았다.

‘역시 임태호는 야해!’

사실, 주기적으로 열에 들뜨는 알파와 오메가들은 아무래도 베타보다는 성인용품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억제제를 먹었다고 하더라도 가끔 삐죽 고개를 드는 히트사이클은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그런데 겨우 가죽 족쇄와 목걸이, 패들 같은 물건 몇 개에 아직도 저렇게 부끄러워할 수 있다니.

이연우는 임태호가 좋아하는 반짝반짝한 연하 연인의 표정을 만들어 짓고는, 가족들이 듣는다면 헛구역질을 할 천진한 목소리로 뭇 유혹 같은 문장을 떨어트렸다.

“형, 그런데 저게 입문자 세트래요.”

“말도 안 돼. 저게? 진짜?”

“진짜! 플레이할 때 안 다치도록 특별하게 만든 가죽 패드라서 착용감도 좋대요. 안 써 봤지만, 뭐, 사용자 리뷰가…….”

게다가 끝에는 미련이 뚝뚝 남는 목소리와 포기한 듯한 처연한 시선 처리까지.

이연우는 임태호와 연인으로 쌓는 시간을 더해 갈수록 이런 요령만 늘고 있다. 그리고 태호는, 이제 어렴풋이 제 알파가 자신의 약점을 이용한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언제나처럼 저 모습에 흔들렸다.

괜한 표현이나 호들갑이 아니라 태호는 저런 성인용품을 살면서 처음 봤다. 그에게는 전설 속의 구전으로만 전해 오던 것처럼 ‘엄청난’ 것이 바로 저런 소위 ‘플레이’용 도구들이다.

그런데 그 검은 가죽 일색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완충재와 불투명 포장지에 감싸인 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갈색 택배 상자에 담겨 제 일상으로 들어오다니!

태호는 몇 초 나마 떠올린 이걸 제 연인과 사용한다는 가정과 차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실제 상황을 그리며 잠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미 임태호는 반쯤, 아니 3분의 2쯤은 넘어왔다. 한참을 입을 달싹이며 고민하다가 내놓은 대답만 봐도 그렇다.

“……쓴다고 쳐 보자.”

“우와!”

이연우의 눈 안에는 순간이나마 온갖 우주가 펼쳐졌다.

사실 그가 굳이 수많은 성인용품 중 이것들을 고른 건, 처음엔 별달리 큰 뜻은 없었다. 세상 가장 진지한 얼굴로 여러 종류의 콘돔들을 장바구니에 담은 뒤 우연히 잘못 클릭한 메뉴에서 ‘그러고 보니 태호 형이랑 도구플은 한 적 없지.’하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상품들을 살피다 보니 이제껏 감히 제 연인과 단 한 번도 엮어 생각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BDSM 도구를 홀린 듯 사게 된 거다.

어쩌면 저렇게 펄쩍 뛰며 부끄러워하지만 않았더라도 도구 몇 개는 금방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잖아도 불안정한 페로몬을 흘리는 임태호 때문에 몸을 섞을 때면 금방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고 마니까. 하지만 임태호는 이연우의 짐작보다 훨씬 더 진지한 사람이었다.

혼자 일방 각인까지 한 연인을 신경 쓰던 그는, 정말 드물게 제 알파가 먼저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정도는 해 주고 싶었다. 때문에 온종일 머리 한구석에 가죽 족쇄와 패들, 눈가리개가 둥둥 떠다녔으니, 오랜만의 데이트를 하면서도 영 조마조마했더랬다.

“저것들을 쓴다고 치면……, 그럼 난…… 뭐해?”

임태호는 숫되기는 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SM의 ‘S’와 ‘M’이 뜻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안다. 게다가 이연우는 이미 무릎을 꿇는다느니 개처럼 뒹군다느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건, 그럼 적어도…… 뭔가 뚜렷하게 원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임태호의 그런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예쁘게 눈을 빛내는 알파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찰싹찰싹?”

긴장 가득한 물음과는 다른 태평한 대답에, 이연우는 임태호와 알고 지낸 이래 처음으로 쫓겨날 뻔했다.

◈◈◈

워낙에 고생이 많았던 형이라 혹시라도 안색이 나쁘거나 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던 현민은, 전보다 더 발그레하니 혈색이 좋아진 태호를 보며 오래된 격언 같은 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 걱정하지 말고 나나 잘하자.’

한편, 임태호는 저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현민을 눈치채고, 우동 면발을 문 채로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아니, 뭐어……. 두 분 다 얼굴 폈다 싶어서요.”

“…….”

“요새 이연우 팀장님 얘기 엄청 들려요. 몇 초 전까지는 완전 진지하게 일 얘기 하던 사람이, 휴대폰만 잡으면 ‘네에~ 혀엉~.’한다고.”

이연우의 ‘울 자기 전용 말투’를 흉내 내는 목소리에, 임태호는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그답지 않게 사레가 들려 옅게 콜록거렸다. 확실히, 그 자존심 센 알파가 ‘네에’, 하고 말꼬리를 늘리며 어리광 부리듯 말하는 사람은 임태호 단 한 명뿐이다.

“다들 이연우 코 꿴 거 누구냐고 난린데, 입 근질거려 죽겠다니까요? 어디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냐고요.”

일부러 과장해서 하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임태호는 왠지 열이 오른 것이 뻔히 느껴지는 제 뒷목을 주무르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현민이 너 인기 많지 않아?”

“음, 당연히! 나쁘지 않죠.”

유현민의 대답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태호는 그 자신감이 왠지 좀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얼마 안 가 조금은 시무룩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요새 소개팅은 다 실패예요. 어째 운이 영 안 따르네요.”

장난이 아니라, 유현민은 이제까지 꽤 자신만만한 알파였더랬다. 큰 키에 꾸준한 운동으로 단단한 몸, 호감형의 얼굴까지. 그는 오메가든, 베타든 누구라도 좋아할 사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유현민의 연패 소식이라, 솔직히 조금은 의외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음, 난 그런 건 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네.”

어떤 한 사람이 떠오른 것도 사실이다. 태호는 그런 제 생각이 왠지 좀 멋쩍어져서 턱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본의 아니게 누가 들으면 퍽 기뻐할 질문을 내뱉었다.

“……혹시, 가까이는 없어?”

하지만 유현민은 그 달짝지근한 가정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가까이? 어우, 형. 저는 회사 사람이랑은 절대 안 만날 거예요.”

“그래도 모르잖아.”

“사내 커플 했다가 찢어지기라도 해 봐요! 전 그거 감당 안 돼요. 으!”

곱씹어 보면 현민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신입 사원의 사내 연애라, 누구라도 썩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이해는 한다.

‘……그건 그렇지만.’

임태호는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누군가의 표정을 떠올리다가 역시 당사자가 제일 중요하지, 하고 그 누군가를 밀어냈다. 태호 그 역시도 최근 직면하게 된 생긴 작고 사소하지만, 한편으로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호는 그 자신의 인기를 장담했던 알파를 잠시간 눈에 담다가, 여느 때와 같은 ‘알파 카운슬링’을 받아볼까 했다. 눈치 빠른 유현민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그걸 알아챘다.

“왜요?”

“아, 아냐.”

하지만, 아무리 편한 동생이라고 한들 ‘있지, 너 찰싹찰싹 해 봤니?’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임태호는 차마 입 밖으로 당당하게 꺼내지 못하는 문장을 끌어안고 눈만 끔벅끔벅했다. 워낙에 거짓말에 서툰 탓일까, 그 모습은 한껏 어색하기만 했다.

“보아하니 또 이연우 팀장님 일인데?”

“아, 아냐, 꼭 그건 아닌데……!”

“에이~. 야한 얘긴가 보네?”

“…….”

정확히 정곡을 찌른 문장이었다.

사실 현민의 추리는 대단할 것도 없었다. 얼굴이 활짝 필 정도로 신수가 훤해진 연인 중 유독 부끄러움 많은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면, 대체로 그건 성적인 화제만 남는다.

그건 어떻게 보면 태호 스스로는 말 못할 화제를 현민이 대신 끄집어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살면서 이런 주제로 하는 대화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태호다. 그는 오히려 뭔가 잘못됐는데 빠져나갈 수 없는 무덤을 스스로 판 기분으로 바짝 마른 입술만 혀로 한 번 훑었다.

“있잖아.”

“네.”

“혹시……, 그, 써 봤니?”

유현민은 임태호답지 않은 불친절한 설명에 뭐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태호는 그걸 차마 크게 말할 자신이 없어서 흥미롭게 눈을 빛내는 현민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딱 몇 초 뒤엔가 유현민의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저 임태호에게서는 평생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단어 때문이었다.

분명 임태호는 저번까지만 해도 끽해야 뽀뽀 얘기만 꺼내도 얼굴을 벌겋게 붉히던 부끄러움 많은 사내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대체 어떻게 저기까지 갔는지 영문 모를 일이었다.

“……어, 음, 저는 안 써 봤는데요.”

현민은 장난기가 좀 있을 뿐이지 훌륭한 포커페이스와는 영 거리가 멀다. 소위 ‘잘 놀 것같이’ 생겨서는 그런 쪽도 아니다. 그냥 피트니스 센터에서 혼자 묵묵히 운동하고, 집에 와서는 책 읽고 TV 보는 평범하다 못해 얌전한 계열이다. 괜히 임태호와 장단이 잘 맞았던 게 아니었던 거다.

그건 다시 말해서, ‘입문자용 고급 가죽 세트’ 같은 건 그의 반듯했던 유학 생활 내내 별달리 볼 일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현민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 그분은, 워낙 형 아껴서 험한 행동은 못 하지 않을까요?”

“…….”

“근데 사귈 때 그것도 참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 많기는 한데…….”

소위 ‘속궁합’이라는 건, 결혼 전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제법 많은 커플에게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임태호 나이 서른셋, 그걸 모르지 않는다. 성적 취향은 성에 눈뜬 사람의 수만큼 다양할지도 모른다.

이연우가 워낙 제 오메가를 아끼니, 험한 행동은 못 한다?

그 말은 정말 아주 조금의 틀림도 없다. 유현민의 가정이 정반대인 것만 봐도 그렇다. 이연우는 지금 제가 묶기는커녕 묶어 달라고 난리다.

그걸 위한 입문자용 고급 가죽 세트에는 눈가리개까지 있다.

어, 어떡하지. 연우가 밝히기 싫어할 수도 있잖아! 태호는 양 뺨을 붉게 물들인 채로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이게 이연우의 취향이라고 하는 건 연인의 비밀을 까발리는 것 같다.

때문에 임태호는 그 반대 방법을 선택했다.

“아, 아냐아, 연우가 하는 게 아니라…….”

그건 실로 참사랑이었다.

“……내 쪽이…….”

“……아, 아아……. 알겠어요. 알겠어요, 형.”

대체 뭘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유현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귀 끝까지 벌겋게 익은 임태호를 바라보았다. 속에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긴 한숨이 우글거렸다.

그 길디긴 시간을 거쳐 겨우 오메가로 발현한 태호다. 그것만으로도 짠한데, 웬만해서는 쉽게 접하지 못할 취향을 자각했다니! 현민은 저 부끄러움 많은 형이 얼마나 고민이 많았으면 저에게 털어놓았을까 하는 지레짐작을 바탕으로 한 애잔함을 담은 표정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래도 걱정은 안 됐다.

이런 말 하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임태호 한정으로 한없이 극단적인 그 알파라면, 태호의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이연우와 임태호, 이 커플의 핵심을 기묘하게 꿰뚫는 분석이었다. 유현민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면서 무슨 말이든 해 보려고 애썼다.

“제가 그쪽은 잘 모르지만, 왜, 그 단계별로…… 뭐 있지 않을까요.”

“…….”

“왜, 그…… 해외…… 사이트 같은데 보면 분류가…….”

임태호는 해외 사이트라는 단어로 잘 정제된 뜻이 뭔지 모를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다. 그날, 태호는 살며 처음으로 ‘VPN 앱’의 종류에 대해 알게 됐다.

◈◈◈

일방 각인을 한 알파 혹은 오메가는 제 상대의 작은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인생을 일방적으로, 또 기꺼이 저당 잡혔는데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대범한 사람은 없을 거다. 각인한 이들은 제 연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에 젖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위해서라면 한없이 용감해지지만, 반면 정말 별거 아닌 사소한 것에도 두려움이 몰려오는 겁쟁이 사자들이다.

그리고 그건, 이연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하, 하하, 더워서 좀 찝찝하네. 나 좀 씻고 올게!”

“네에.”

임태호는 어제오늘 좀 이상하다.

시선을 피하고, 손도 안 닿으려고 한다. 연우는 그 순간 정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가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시 살폈다.

……하지만 정말 나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딱 붙어서 얼마나 잘 보냈는지 모른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얘기하고, 가끔은 아직 오지 않은 어떤 날에 대해 함께 상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왜, 대체 왜, 요 이틀 사이 서먹하게 구는 걸까. 그런 별거 아닌 행동들이 얼마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지 알긴 할까.

이연우는 제 연인의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드러눕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약을 끊은 임태호는 그 약하고 흐린 향이나마 선명하게 짚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렇게 불안할 때 각인한 알파의 눈에 가장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연인의 휴대폰이다.

“……태호 혀엉?”

이연우는 은근한 목소리로 제 연인을 구슬리듯 불렀다. 하지만 태호는 이미 씻으러 들어가 물을 틀기라도 했는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연인 사이에 휴대폰을 보면 안 된다는 건 하나의 충고처럼 전해지는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인 사이에서 한두 번쯤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연우의 손은 슬금슬금 임태호의 휴대폰으로 향했다. 머릿속으로는 ‘야, 야, 그만해.’하는 실낱같은 소리가 있었지만, 현대의 연인 사이에서 불안함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살펴보는 건 이 손바닥만 한 기계가 된 지 오래다.

그 흔한 패턴이나 지문인식이라도 걸어 둘 만한데, 임태호는 잠금 하나 안 걸고 산다. 보안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그와 어울리지 않고, 이보다 더 느슨할 수는 없을 정도다.

하지만 태호의 휴대폰은 그만큼 별 볼 일 없다.

사진첩에 가장 많은 건 이연우 그가 직접 찍은 셀카들이고, 전화 목록을 훑어봐도 ‘이연우, 이연우, 이연우, 이연우, 이연우’다. 연우는 성까지 꼬박 붙여 저장된 자신의 이름을 슬쩍 ‘우리 자기♡’로 바꾼 다음, 슬쩍 몇 개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있는 쪽으로 손가락 끝을 움직였다.

하지만 임태호의 메시지 대부분은 정말 대단치 않았다. 가장 최근에 대화를 나눈 건 당연하다 싶게 저였고, 그래 봤자 유현민, 드물게 안부를 묻는 제 형의 말 정도가 다였다.

아무리 봐도 휴대폰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기본 앱 외에는 없던 임태호의 휴대폰 바탕에, 묘한 앱이 깔린 것을 보기 전까지는.

‘VPN’. 이연우는 이게 뭔지 안다. 그리고 이 앱이, 이 자그마한 반도에 사는 20~30대의 성인들에게 어떻게 쓰이는지도 안다. 하지만 이 휴대폰의 주인은 임태호다.

임태호가 누군가. 살짝만 야한 말을 해도 귀 끝까지 새빨갛게 변하고, 그러지 말라며 은근히 따끔하게 한 방 먹이는 남자다.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억만 광년은 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창을 눌러 켜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머나.”

그리고 이연우의 입에서는 답지 않은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살면서 임태호의 휴대폰을 통해서는 절대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한 문장 때문이었다.

[Warning 불법 유해 정보(사이트)에 대한 차단 안내……].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창 하나로 심장이 뛰게 할 수 있는 건 정말이지 임태호가 유일하다. 이연우는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조용히 아이피 우회 앱을 켰다.

그러고 나서 제 연인이 들어갔던 사이트의 흔적을 되짚자…….

알파는 잠시 눈을 크게 뜬 채로 자그마한 휴대폰 액정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화면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살색 화면들이 내는 소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소리는 음소거로 한껏 줄어들어 있었다.

몇십 분 뒤, 가벼운 샤워를 마치고 나온 임태호는 막 따뜻한 물을 끼얹고 나온 그 자신보다 발갛게 물든 뺨을 한 이연우를 마주했다.

“형, 전 마음의 준비가 됐어요.”

태호는 잠시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말간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요 며칠 임태호를 보는 이연우가 그랬듯, 태호 역시 제 연인이 저런 표정을 짓는 의미를 몰랐다. 그래서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준비?”

“아! 먼저 사과할게요. 다시는 휴대폰 안 뒤질게요.”

현대인들은 휴대폰에 많은 비밀을 담아 두고 산다. 하지만 임태호는 아니다. 그처럼 작은 기계에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사람의 반응은 마냥 담백하기만 했다. 태호는 막 생각났다는 듯 펄쩍 뛰며 다정하게 말하는 연인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응, 근데 나 휴대폰에 뭐 볼 거 없는데?”

볼 게 없다니.

아주 핫했다. 볼 거 많았다. 중학생 때도 이렇게 꼼짝하지 않고 영상에 집중한 적은 없었을 거다. 이연우는 그러잖아도 고운 눈매를 반달로 휘어 웃으며 임태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에이, 형도 참.”

“왜?”

알파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듯한 연인의 휴대폰을 도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제가 보았던, 그리고 임태호가 봤었을 그것을 살며시 재생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소리도 슬쩍 키운 채였다.

“아, 심장 떨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임태호는 제 알파의 페로몬을 잘 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후배였을 때, 그의 마음이 시작되었을 때, 연인이 되었을 때, 또 지금까지. 처음에는 그저 서늘하기만 했던 향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언제나 바로 곁에서 무엇 하나 빠짐없이 모두 짚어 왔다.

게다가 이연우는 무작정 밀어내기에는 심히 반짝이는 알파다. 태호는 제 옆에서 살짝 상기된 뺨을 한 연인을 마주 보며 목덜미로 홧홧한 열이 오르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태호 형, 드디어 우리의 입문자용 세트가 빛을 발할 때가 됐나 봐요.”

“그래, 형이, 알아는 봤어. 우선 뭔지 알아야…….”

이연우는 임태호가 자신을 형이라고 지칭해서 말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형이 이랬어,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 때마다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처럼 단호한 눈을 한 채 말할 때면 진짜 좋아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뭘 해도 하니까.”

“그래서 그 결과는요?”

태호는 두 눈에 보석을 박은 듯 반짝이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알파를 보며 왠지 부끄러움에 입이 다 마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나 맞기 싫어.”

이제껏 살면서 야동을 한 번도 안 봤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정말 가끔이기는 하지만, 직접 찾아본 적도 두어 번 있다. 약 타이밍을 놓쳐서 곧 히트사이클이 올 것 같을 때 일부러 흥분을 빠르게 이끌려고 본 적도 있고, 여하튼, 삼십 대 초중반이 되기까지 드물게나마 본 적 있다.

하지만 태호가 본 건 언제나 전문 회사가 딱 임태호 그 같은 평범하고, 또 부드러운 취향에 맞춰 만든 정석 중의 정석 영상이었다. 대체 ‘SM 영상’은 어디서 볼 수 있나 싶어 구글링해서 찾아본 계열의 영상들은, 그러니까……, 정말 임태호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이연우는 목까지 울긋불긋해지기 시작한 연인을 보며 제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태호의 앞에서 한껏 고운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태호가 저만치에 처박아 둔 ‘입문자용 세트’ 박스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준비됐다니까요, 제가.”

“그렇다고 내가 널 어떻게 때려!”

“걱정 마세요. 제가 이거 여기 혼자 있을 때 한번 해 봤거든요.”

임태호의 표정은, 정말 이연우가 지난 시간 동안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예쁘게 물든 얼굴로 입을 딱 벌리는 표정은, 부끄러움과 놀라움과 충격과 호기심 그 비슷한 언저리의 어떤 것이 모두 섞여 있었다.

아니 어떻게 나보다 나이도 다섯 살은 더 많은 사람이 이런 얼굴을 할 수 있지. 이연우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아니, 그냥 테스트요. 왜, 가공 고급 가죽이라기에.’하고 놀란 연인을 달랬다.

하지만 태호는 차마 그 검은 가죽 세트에 손댈 엄두도 안 난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깜박였다. 이연우는 귀여울 정도로 소담스럽게 박스를 채우고 있는 물건 중 그나마 일상적인 모양새에 가까운 가죽 패들을 집어 들었다.

“진짜 찌릿한 정도? 자, 한번 해 보세요.”

“내가?”

“네, 그럼요. 아니, 아니!”

연우는 긴장한 얼굴로 가죽 패들을 움켜쥔 태호가 스스로의 팔뚝을 치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형한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저한테요.”

“아프면 어떡해.”

“안 아파, 안 아파. 빨리요.”

태호는 셔츠 소매를 올리자 바로 드러난 연인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핏줄이 도드라진 채 단단한 근육이 박힌 새하얀 팔뚝은, 살짝만 쳐도 금세 붉은 물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거절하자니, 이연우는 정말 요 한두 달 사이 봤던 얼굴 중 가장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호는 제 알파의 저런 반짝반짝한 모습에 정말 약하다.

임태호는 정말 최대한 손에 힘을 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워낙 낯선 것을 손에 쥔 채라 그의 의도보다는 조금 더 세게 부딪혔다. 최대한 소리가 잘 나도록 만들어진 패들은, 하얗고 단단한 피부에 착 달라붙으며 큰 마찰음을 냈다.

그와 동시에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던 알파의 입에서 작은 탄성 같은 목소리가 터졌다.

“와!”

“미안해! 아프지! 살살 한다고 했는데 힘 조절이 안 됐어!”

살면서 주먹다짐에는 한 번도 끼어 보지 않은 태호다. 말싸움조차 해 본 역사가 없다. ‘순하다’와 관련된 온갖 단어들이 그의 뒤에 주렁주렁 매달려 다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 임태호가 성인용품으로 가장 사랑하는 알파를 ‘찰싹’ 소리 나게 때린다니, 말이 안 된다. 태호는 소리만 요란했지 그렇게 심하게 부어오른 것도 아닌, 붉은 기만 살짝 어린 연우의 팔을 연신 쓸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이연우의 ‘와!’는 임태호가 걱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떡해, 아파? 아니다, 아픈 데 물어보면 더 아프지!”

“……자기야.”

“으응?”

“저 설 것 같아요.”

임태호가 겪은 이전의 놀라움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됐다.

태호는 패들로 제 팔을 ‘착착’ 소리 나게 치며 입을 쩍하니 벌렸다. 하지만 그렇게 해 봐도 대체 이걸로 한 대 맞았다고 그게……, 그게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뭔지,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 이걸로 그래?!”

“이게 참 마음대로 안 되네요. 얘야, 서면 안 돼 할 수도 없고.”

“안 된다고 해 봐!”

그 태호가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얼마나 당황한 상태인지를 뻔히 보여 주는 거나 다름없다. 알파는 제 연인의 말에 그답지 않게 ‘헤헤’하고 조금은 숫된 듯 웃었다. 세상에 ‘그 이연우’의 저런 예쁜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임태호뿐이다.

연우는 벌게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인 태호의 옆에서 깃털처럼 살랑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대도 쓸까요? 와, 눈 가리고 맞으면 장난 아니겠다.”

“……이게 뭐야아…….”

“저 눈 가리고 묶여 있을 테니까 형이 위로 앉을래요?”

사실 임태호는 이연우와 사귄 이후로, 좀 더 정확하게 기간을 좁히자면 오메가라는 게 알려지고 상황이 좀 정리된 이후로 자신의 연하 애인에게 놀라는 일이 많아졌다.

‘베타’ 임태호 기준일 때에도 이연우는 정말 그 한계까지 야한 알파였다. 젖어들지 않아 빡빡한 뒤를 젤로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온갖 음탕한 방법을 다 써가며 녹이면서 기어코 입에서 민망한 소리가 튀어나오게 하던 짓궂음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정말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메가’ 임태호가 되어 만나는 침대 위에서의 알파는, 이전의 이연우가 저를 얼마나 배려했었는지를 알려 주는 것만 같다.

일부러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하거나 뒤로 엉덩이만 높이 쳐들게 해도 눈가가 시큰해질 정도로 부끄러운데, 왜 꼭…….

“미친. 진짜 형한테 따먹히는 기분 들겠다. 뒤로 얼마나 잘 받아먹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저 가지고 자위한다고 생각하고 해 봐요.”

이런 말을 하는 건지!

태호는 제 옆에서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연인을 뻔히 느끼면서도 차마 따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감춘 손을 내릴 엄두도 못 냈다. 세상에 다시없을 듣기 좋은 목소리로 저런 문장을 술술 내뱉을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상의를 훌훌 벗어 재낀 알파는, 가만히 뒀다간 오늘 고개를 들어 저를 보지 않을 작정인 연인을 향해 희미하게 눈가를 접어 웃으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예습했으니까 실전 가야죠. 요새 쌓인 거 많으면서.”

“……아니거든.”

“왜? 엊그제 잘 때 손으로 좀 만지니까 금방 서던걸.”

이연우의 장난기 어린 말에 임태호는 잠시 얼빠진 눈이 됐다가 이윽고 목구멍까지 열이 올랐다. 며칠 전이라 함은, 태호 그가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화장실에 갔다가 앞뒤로 잔뜩 끈적이며 젖어 있는 제 속옷을 보고 놀라고 당황해서, 연우 몰래 그걸 처리하느라 진땀 뺐던 날일 거다.

무슨 중학생도 아니고 이 나이에 몽정이라도 했나 싶어서 얼마나 부끄러웠었는데. 눈앞의 알파는 그걸 뻔히 알고 있다 못해 오히려 진범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부루퉁한 표정이었는지, 이연우는 ‘좀 감정 실어서 때려도 돼.’하고 낮게 웃으며 콧잔등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미안해요, 형 가슴만 좀 본다는 게.”

“자는 사람 가슴을 왜 봐!”

“그게, 요새 좀 욕구불만이거든.”

이제 곧 10년은 보는 눈웃음인데, 왜 여전히 저거에 넘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가죽 패들 끝을 이로 살짝 물면서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얼굴이 정말 야했다. 대놓고 달콤한 향을 뚝뚝 흘리는 알파 페로몬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연우가 유일하게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을 모두 내려놓고 온몸 바쳐 유혹하는 유일한 상대인 임태호는, 그제야 ‘진짜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뭐 하고 지낸 거야.’하며 제 알파의 과거를 한탄했다.

하지만 때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끌어안기며 맞닿은 하반신 아래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은, 한 대 맞은 것만으로도 설 것 같다며 칭얼거렸던 말이 아예 농담은 아니었다는 걸 증명했다.

야한 애인을 두면 똑같이 야해진다. 둘 중 누가 더 야했는지는 서로 말이 다르지만 말이다.

“형이 올라타는 거 좋아했을 때부터 이런 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어.”

“바보야, 진짜.”

“누나가 연애 너만 하냐고, 하아, 그만 좀 티 내고 다니라는데.”

‘-어떻게 해야 티가 안 나는지 모르겠어.’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웃음기 어린 문장 중간중간마다 더운 숨이 섞였다. 혀를 섞어 키스할 때마다 손끝까지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은 이연우도, 임태호도 섹스하기 직전 가장 긴장하는 순간이다.

입맞춤 정도로도 이렇게 좋은데 대체 옷을 벗고, 따끈한 열기가 돌기 시작한 몸에 입을 맞추고, 그 안으로 집어넣고, 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숫자를 세기 힘들 정도로 몸을 섞었지만, 이 순간마다 늘 낯섦에 던져지고 만다. 태호는 살짝 풀린 눈으로 제 가슴께에 고개를 처박은 채 정신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읏, 흐으, 이 세우지 마.”

“응, 미안.”

어쩌면 지금이 극우성 알파가 연인인 게 가장 좋은 순간일 거다. 극우성은 아무리 그 흥분을 감추려고 해도 들끓는 페로몬을 숨겨 누르지 못한다. 그건 정말 마음 한구석이 꽉 차는 것 같은 충족감을 준다.

단단하게 다듬어진 사내의 팔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죽 족쇄가 하나 채워졌다. 긴장과 흥분이 뒤섞이는 한숨과 타액이 부딪히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가죽 족쇄들이 이어진 검은 쇠고랑 때문이었을까. 정신없이 셔츠의 단추를 풀고 매달리던 연인은 아주 일상적인 소리 하나를 놓쳤다.

……예를 들면 현관의 도어록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 같은 걸 말이다.

“…….”

“…….”

“…….”

이연우와 임태호는 둘 다 흥분으로 얼굴이 붉게 변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어둡지는 않았다. 연인의 시선이 그 둘이 여기 있는 이상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될 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 아니 사람들을 본 태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아니, 아니!”

사실 지금 같은 평일 오후 4시는 직장인 임태호가 집에 있던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 ‘그들’이 임태호의 집에 지금 방문한 이유는 보통 같았더라면 일곱 시 전후로 퇴근할 태호의 시간에 맞춰 저녁이라도 준비해 놓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 임태호는 직장인이 아니다.

“어머니 오셨어요!”

“…….”

“어, 어어, 아버지도 오셨……, 하하, 하!”

그랬다. ‘그들’은 임태호의 부모였다. 임태호는 제가 올라타 있던 사내를 표현 그대로 내동댕이치고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셔츠에 허둥지둥 팔을 끼워 넣으며 연인이 아닌 아들의 얼굴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누가 봐도 여전히 열감이 가득하다. 그 어색한 침묵 가득한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건, 태호의 어머니였다.

“태호 너……, 약…….”

“아! 얼마 안 됐어요. 정말요.”

“…….”

“아직 완전히 안정적이지가 않아서, 그래서 나중에 말씀드린다는 게…….”

태호의 아버지는 베타이고, 태호의 어머니는 태호와 마찬가지인 열성 오메가이다. 그녀는 제 아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억제제를 먹으며 베타의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안다. 태호가 고등학교 때에 약을 사다 준 게 그녀이기도 했다.

임태호는 머쓱한 얼굴로 제 머리를 공연히 몇 번 쓸었다.

지난번, 휴대폰을 멀리하면서 회사 보안이니 뭐니 하며 연락을 뚝 끊은 이후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부모님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뭘 먼저 끄집어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태호는 제가 왜 이 시간에 집에 있는가를 해명하기 전에 먼저 소개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태호 그의 손으로 내동댕이쳐서 침대 옆으로 떨어진 다음 급하게 셔츠를 꿰입은 극우성 알파이자 연인인 남자였다.

이연우는 딱 타이밍 좋게 침대 뒤에 쪼그려서 옷을 갖춰 입은 후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안녕하십니까. 태호 형과 교제 중인 이연우라고 합니다.”

“그…… 그래요. 그래…….”

워낙에 급하게 옷을 입은 탓일까. 단추 하나를 잘못 꿰어서 순서가 쭉 밀려 있는 셔츠 단추가 알파의 옷맵시를 비뚜름하게 했다.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건 태호였고, 그다음은 태호의 부모님 순이었다. 당사자인 이연우는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그걸 제법 긴 침묵 뒤에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귀여운 실수였다.

아무리 잘 보여도 모자랄 두 사람의 시선이 침대 위에 널려 있는 것들로 향하는 것을 눈치챘을 때의 아찔함이라니!

임태호는 학원 등을 이유로 대학교 4학년 한 해만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고, 덕분에 온종일 붙어 있을 수 있었지만, 경기도 외곽의 본가로 가는 일은 더욱 적어졌다. 이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한들, 학과 후배를 대중교통으로는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곳까지 데려가 부모님께 굳이 소개하는 일은 영 일반적이지 않다.

덕분이라면 덕분에, 8년을 알고 지낸 임태호의 부모를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서로가 늘 임태호를 통해 말로 전해 듣기만 했다.

그런데 그 첫 만남으로 ‘입문자용 세트’를 주변에 늘어놓은 침실은 역시 좀 별로일 거다.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 한 번 깜짝인 적 없던 이연우는 왠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중년 부부는, 누가 임태호의 부모 아니랄까 봐 당혹이 가득한 이목구비가 둥글고 선한 것이 이런 성인용품과는 백만 광년은 멀어 보였다.

……썅, 우선 첫인상은 망했네. 연우는 속으로 욕을 자근자근 곱씹었다.

연우는 뭇 오메가와 베타, 때로는 알파의 심장까지 술렁이게 했던 그린 듯한 미소를 얼굴에 건 채로 입을 열었다.

“저, 어머님, 아버님. 이건- 변명하자면.”

“…….”

“이건 태호 형한테 쓰려던 게 아니라, 제가…….”

물론, 그건 입꼬리를 간신히 올린 채 새하얗게 변한 머리를 재부팅 하려고 애쓰던 임태호의 손에 저지됐다.

태호는 제 연인의 등 어딘가를 정말 잡히는 대로 움켜쥐며 이연우가 입을 다물도록 했다. 때문에 이연우는 연인의 부모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가장 꼿꼿한 자세로 등을 곧장 펴고 따끔함을 참기 위한 환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알파의 폭탄 같은 문장에 찬물을 끼얹은 오메가는, 상황을 진전시키기 위한 첫 번째 스텝을 밟았다.

“후우, 하하. 하. 나가서, 어……, 부엌에서 이야기할까요?”

태호는 방을 뒤늦게 빠져나가면서 제 귓가에 대고 ‘우리 자기는 갈수록 손이 매워지네요.’하며 귓가로 스치듯 속삭이는 연인의 등을 몰래 한 번 더 콩, 하고 쥐어박았다.

◈◈◈

우선, 임태호가 해야 할 첫 번째 해명은 대체 오후 4시에 왜 집에서 연인과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부모님에게 여과 없이 말하기는 좀 힘든 내용이었기에 태호는 진실 중 일부만 가까스로 내보였다.

“회사는…… 사실, 퇴사했어요. 억제제 끊은 거랑 거의 비슷하게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니. 다 어련히 잘 알아서 했을 것을.”

임태호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곤란하게 하거나, 말썽을 피우는 일 한 번 없이 한결같을 정도로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입술을 삐죽이며 화를 낼 법한 사춘기에도 언제나 ‘네.’하고 사랑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반항 한 번 없었다.

하지만 그랬던 태호가 이제껏 딱 한 번 부모님의 말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적이 있었다. 열아홉의 어떤 날이었다. 태호는 아무리 부작용이 없다고 해도 약은 약이라며, 그때 당시는 작았던 약상자를 들고 가려던 부모님을 만류했다.

그러고는 빠른 목소리로 요즘의 억제제가 얼마나 잘 나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는지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긴 옹호의 끝에는 부모님의 뜻과는 다르게 그 자신도 당분간은 약을 먹고 싶다는 말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임태호는 정말로 드문 것이었다. 그래서 태호의 부모는 ‘하긴 고삼인데. 고생스럽겠지.’하는 일상적인 반응을 하며 제 아이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을 그렇게 가볍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때부터 딱 1년이 지난 후였다. 임태호는 성인이 되어서도 억제제를 끊지 못했다. 전 세계 가장 많은 이들이 먹는 약 중 하나이기에, 부작용까지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해도 중독성은 없다던 페로몬 억제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호는 모르는 일지만, 태호의 부모는 당시 꽤 많은 의사와 사람들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임태호의 부모가 과거에 했던 말만 똑같이 했을 뿐이다. ‘요새 애들이 좀 그렇대. 히트사이클이니, 러트니 귀찮다고 말이야.’

시간은 흘러갔다.

1년은 금방이었다. 5년쯤 지나고 나자 걱정보다는 누군가가 지나가듯 말하던 그 말이 더욱 진실처럼 들렸고, 10년이 흐르자 ‘어쩔 수 없지’하는 수긍인지 체념인지 모를 이해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런 임태호가 억제제를 끊었다고 한다.

사실 태호의 부모는 제법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든가 하는 건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오랜 억제제를 끊었다는 사실만이 그들의 마음에 더욱 크게 남았을 뿐이다.

허둥지둥 떨어진 말과, 그것을 달래는 문장 이후부터 시작된 짧은 침묵을 깬 건 태호의 아버지였다.

“신화그룹, 그 친구냐? 왜 그 이름이…….”

“이연우요. 저보다 다섯 살 어려요.”

“그래, 벌써 꽤 오래 같이 지냈지.”

“그렇죠. 8년이 넘었으니까…….”

이연우는 지금 잠깐 빌라 근처 편의점으로 음료를 사러 갔다. 사실 굳이 집에 마실 게 없어서라기보다는, 억제제를 끊은 태호와 부모님이 셋이서 이야기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다.

태호는 다시 시작된 짧은 침묵에 괜히 목덜미를 쓸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사귀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까.”

“뭐, 보통 젊은 친구들 만나는 게 다 그렇지 않니.”

임태호가 말이 많지 않은 사내로 자란 건, 아마 늘 말을 필요 이상으로는 하지 않는 집안 분위기 탓일 거다. 이제껏 몇 안 되는 연애가 있었지만, 그중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제 부모에게 알려 본 적 없는 태호는, 하필 그런 상황을 부모님께 보인 것이 슬슬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곧바로 ‘제가 연우 집에 찾아가서 청혼까지 했어요.’라고 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그 수줍음과는 별개로 언제나 모범생이자 착한 아들이었던 태호는 제 부모님의 표정에 담긴 걱정을 어렵잖게 집어냈다. 웃으며 격려하듯 말하고는 있지만, 미소 띤 얼굴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랜 후배이자 이제 이제는 연인이 된 신화그룹 이연우다.

태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듯 눈을 굴리다가 최근의 일보다는 좀 더 오래된 과거를 끄집어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때요.”

이 역시도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고, 아마도 지금이 그 적기였다.

“그맘때쯤 며칠 결석은, 보통 발현열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저도 그랬고. 처음 열 내리고 나왔을 때, 정말 신기했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페로몬이 느껴지고 그래서요.”

“나도 참 알고 싶구나. 그 페로몬이라는 게 뭔지.”

“하하. 진짜 신기해요, 아버지.”

아들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상황에서 떨어진 뜬금없는 주제에도, 태호의 부모는 그것에 핀잔을 주는 대신 웃으며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태호는 그 배려가 감사했다. 잔뜩 긴장한 채 억지로 꾸며 만들기만 했던 표정에 처음으로 진짜 미소가 걸렸다.

“오메가로 확진 받고, 막 발현한 거니까 불안정할 수 있대서…… 그때, 처음으로 억제제를 먹고 학교에 갔었어요. 조금 기대도 됐어요.”

“…….”

“그런데 제가 딱 교실 들어가자마자 제일 친한 친구들이 그러는 거예요.”

하도 오래전 기억이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어릴 적 농담처럼 쭉 이어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에 생각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태호는 숨을 한 번 삼키고는 이제껏 살며 한 번도 끄집어낸 적 없던 기억 속 문장을 끄집어냈다.

“‘야, 너 당연히 오메가 아니지? 네가 오메가면 진짜.’ 뭐 이런 말들요. 걔들은 다 알파였는데…….”

“……태호야.”

“알아요. 언제 적 얘긴데요.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나이 대에 민망해서 괜히 한 말이었을 텐데. 그게 왜 그렇게 부끄럽고 속상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땐 태호도, 태호의 친구들도 모두 어렸다. 그래 봤자 수능을 앞둔 10대 후반의 아이들이다. 오메가로 발현하면 때에 따라 초반에는 억제제를 먹는다는 걸 꿰고 있기에는 다들 고만고만했다.

“수능 끝나고 대학 들어가면 끊으려고 했었어요. 처음엔.”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그랬다. 스무 살이 된다는 건, 왠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보장해 주는 것만 같았다. 임태호도 그때는 ‘나도 오메가로 살아야지. 꼭 그럴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생각했었다.

하지만 입학식이었나. 태호는 차라리 수능 끝나자마자 억제제를 끊을 걸 하고 후회했다.

“조금만 더 이따가, 조금만 더 이따가…….”

동기들도, 선배들도 태호의 눈에는 하나같이 저보다 훨씬 멋졌다. 사실 신입생들은 그 나이 대가 보통 그렇듯 어설프게 꾸미기 마련이지만, 이전까지는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할 줄 알았던 태호의 눈에는 누군들 근사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과의 첫 오리엔테이션에 ‘신입생? 베타는 저쪽 가서 자.’라는 말을 정정하지 못했던 건, 고등학교 때부터 쭉 이어진 습관 같은 것이 준 후유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몇 번 정도 털어놓았을 때, 사실 별로 좋은 말은 못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더 겁이 났어요. 창피하고.”

“…….”

“너무 오랫동안 반대로 걸어와서, 되돌아가기 막막한 거 있잖아요. 거의 습관처럼, 버릇처럼 쭉 걷는 것같이. 언제부터인가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종교는 없지만, 고해성사를 한다면 꼭 이런 기분일 거다. 태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훔쳤다가 한숨처럼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겼던 말을 내놓았다.

“돌아갈 수 있는 지점을 넘어가 버렸다는 것만……, 아는 거.”

임태호는 저에게 뭐라 위로, 혹은 부정의 말을 꺼내고는 싶지만, 왠지 말문이 콱 막힌 것 같은 표정을 한 제 부모님을 보며 조금은 곤란하게 눈썹을 휘어 웃었다. 그는 눈앞의 두 사람이,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부터 쭉 계속된 억제제 생활에 사실 누구보다 마음에 생채기가 났을 이들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사실 저도 오메가로 살고 싶었어요.”

차마 이연우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쉼 없이 쭉 내뱉을 수 있는 건, 제 말들이 그 오랜 시간에 대한 위로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서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이렇게 살고 싶었는지 몰라요. 누구랑 마음 편하게 사귀어도 보고, 혹시라도 오메가라는 거 들킬까 봐 쩔쩔매지 않고. 정말…… 지금처럼요.”

머릿속으로 하나뿐인 연인을 떠올리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언제나 얌전하던 아들의 표정도, 연인의 앞에서 뺨을 붉히던 오메가의 표정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에 좀 더 가까웠을 거다.

“그런데 대체 제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연우를.”

◈◈◈

몰래 들을 생각은 아니었다. 몰래 듣는 거라면 이제 지긋지긋했으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오랜만의, 아마도 정말로 중요할 대화를 눈치 없이 방해하게 될까 봐 자동 도어록을 끄고 현관 신발장 위에 있는 열쇠를 들고 나왔더랬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보다야,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훨씬 더 덜 거슬리고 또 작았을 테니까.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아예 편의점을 탈탈 털어온 듯이 온갖 종류의 음료수를 들고 온 이연우가 열쇠를 돌리는 소리는 정말로 작았고, 덕분에 점수를 따고 싶어 안달인 세 사람에게 그의 움직임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나랑 사귀지…….”

“응?”

이연우는 이제껏 몇 번을 떠올리고, 또 그중 몇 번은 입 밖으로 냈던 문장을 새삼스럽게 내뱉었다. 임태호의 부모는 오래 머물다 가지 않았다. 아이의 성격은 부모가 가장 많이 형성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그들은 정말 평상시의 태호처럼 딱 해야 할 말만을 하고 자리를 떴다. 현관문을 나설 무렵에는 제법 긴장이 풀려 농담도 몇 마디 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연우는 그때쯤의 기억이 또렷이 나지 않는다. 뿌옇게 증기 낀 유리 너머로 생각을 더듬는 것처럼 흐리기만 하다.

심장이 어찌나, 또 얼마나 덜컹거리듯 뛰는지!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 보라는 듯 살짝 기울인 얼굴에 담긴 희미한 의아함마저 좋았다. 이연우는 상기된 뺨을 한 채 태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눈에 담았다.

연인으로 오래 함께하다 보면 부끄러움마저 옮는 걸까?

사실 그건 이연우를 아는 몇몇 사람들이 듣는다면 ‘이젠 제발 부끄러움이 늘어날 때도 됐어!’하고 기뻐할 일 일지도 모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연우 그는 요새 임태호 앞에서만 이렇게 부끄러움이 늘었다.

태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마치 제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 이연우는 그게 기쁘고 고마우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솔직히 임태호와의 관계에서 제가 한 건 저 남자에게 반해서 졸졸 따라다닌 것밖에 더 없다.

그래서 차마 평소처럼 뻔뻔하게 웃으며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현관에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힌 다음에야 오래 기다리셨죠, 하며 능청을 떨 수 있었다.

이연우는 제가 끌어당겨 안는 것을 피하기는커녕 순순히 끌려와 이제는 익숙한 듯 품에 자리하는 온기에 잠시 울컥한 숨을 삼켰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태호 형, 저 정말 마조히스트는 아닌데요. 왠지 그 기분은 알 것 같아요.”

“무슨 기분인데.”

알파의 말에 대답하는 작은 목소리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형 너무 멋있어요.”

“……응?”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 진짜. 진짜 좋아요.”

이제 임태호의 앞에서는 언제나 가감 없는 진실만을 말하려고 하는 이연우이지만, 조금 전의 말은 요새 했던 그 어떤 말보다 그의 진심 그 자체였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좋아할 수 있는 거였나, 내심 의아하고 또 황당할 정도로 제 품의 남자가 좋다. 이 간질간질하게 옅은 향이며, 살짝 낮고 다정한 목소리며, 늘 생각도 못 했던 방법으로 늘 다시 반하게 만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며…….

이건, 누나인 이연아가 늘 말하듯 정말 각인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연우는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힘주어 입을 열었다.

“형한테는 가죽으로 맞는 게 아니라 발로 밟혀도 좋을 거야.”

알파의 성격대로라면 정말 실제로 이루어질지도 모를 말에, 태호는 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일방적으로 눈앞의 상대를 사랑할 것을 명령받은 로봇이라고 해도 저 정도로 불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 안 밟을 거야.”

“네, 형 뜻대로 하세요.”

이연우는 임태호의 얼굴 여기저기에 조금은 급하게 입술을 떨어트리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정말 세상에 노예가 생겨도 저렇게 공손하진 않을 말투였다. 태호는 제게 떨어지는 그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을 이제 제법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왠지 속이 간지러워졌다.

“진짜 다 예뻐. 눈도, 코도, 귀도 다.”

“저, 연우야. 그렇게 봐 줘서 정말 고마운데-.”

“아, 허벅지 안쪽 촉감 진짜 좋은 거 알아요? 엄청 말랑말랑한데 부드럽고, 쭉 타고 올라가면…….”

알파는 뭔가에 불이 붙어도 제대로 붙은 듯했다. 정신없이 얼굴에 입을 맞추고, 옷 위로 다급하게 몸의 선을 따라 움직이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간 것만 봐도 그랬다.

페로몬은, 정말 뭐라고 더 말할 것도 없다.

저 자신의 향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지만, 장담하건대 이연우 그처럼 스치기만 해도 일종의 확신을 주는 향을 내는 경우는 흔치 않을 거다.

태호는 정신없이 저에게 키스하며 달려드는 사내에게 눕혀진 채로 익숙하게 다리를 벌려 허리를 조였다. 그것은 자각한 채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거의 반사적으로 한 행동에 가까웠다.

이연우는 확실히 손이 빠르다. 머리끝까지 흥분한 채로도 손만은 멈추지 않고 옷을 벗기는데, 그게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맨살이 맞닿고 나서야 제 몸을 가리던 천 조각이 사라진 것을 눈치챌 정도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태호는 셔츠가 완전히 벌어진 제 가슴께에 고개를 묻고 살짝 따끔하게 이를 세워 깨무는 알파를 보고 나서야 제가 반라의 상태임을 깨달았다.

“응, 하아, 연우야. 잠깐만.”

“……네에.”

열기 때문에 눈가까지 벌겋게 변한 채로도, 알파는 제 오메가의 작은 목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꽉 맞닿은 하반신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흥분이 선연했다.

임태호 그는 이연우를 정말 좋아하고 또 사랑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끔씩 이연우가, 저 근사하고 완벽한 알파가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와 방법으로 저에게 빠져 있는 것을 재확인하게 될 때마다 정말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충족감일까? 아니면 일종의 고양감?

“……안 묶어도 돼?”

그것도 아니면 이제껏 몰랐던 새로운 성향의 발견?

지금의 연인에게는 그 어느 쪽이든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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