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Looks Like The Letter “L”
사실 임태호에게 퇴직을 종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이후, 회사에 생겼던 여러 마찰은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됐다. 주변의 변화도 조금 있었다. 태호의 자리에서 세 칸 떨어져 있던 동료의 자리가 텅 비었고, 다른 부서 두어 개도 그런 듬성듬성한 이 빠짐이 생겼다.
수많은 이들이 밤잠 설치고, 전화기 앞에서 앓으며 보내던 시간이 순식간에 없었던 일이 됐다. 여느 때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시작된 거다. 이미 신문의 데스크를 지났다고 했던 스캔들 역시, 마음 졸였던 것이 무색하게 그 어느 곳에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덕분에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잠시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태평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임태호는 출근카드를 찍고 입구를 지나가는 순간 마주쳤던 어떤 동료의 시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는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늘 눈인사했던 다른 부서의 사람이었다. 몇 번은 같이 술자리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려워하는 것도 같고, 어쩌면 두려움이 깃든 것 같은 눈으로 태호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했던 공간에 다시 돌아온 태호는, 더 이상 상냥한 사수이자 믿음직스러운 동료, 얌전한 부하 직원인 ‘임 대리’가 아니었다. 일주일 넘게 손을 떼고 있던 업무들을 다시 시작하며 늘 해 왔던 일상을 보내려고 해도 어딜 가나 떨칠 수 없는 시선들이 임태호의 주변을 일렁이며 맴돌았다.
하지만 임태호는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다.
언젠가는 지금을 황당했던 에피소드 중 하나로 떠올릴 수 있는 미래가 제게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안온한 공간에서 벗어나는 건, 용기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런 임태호가 퇴사를 결심하게 되는 순간은, 머잖아 찾아왔다.
그건 오랜만에 만난 협력 업체 사람 하나가 ‘어! 임 대리님, 저번에 왔을 땐 안 계시더니.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하고 묻는 순간이었다.
정말 참 별거 아닌 인사였다.
앞으로도 만날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안부를 묻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가벼운 문장 하나에 일상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동료들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췄다. 그들은 ‘임 대리’의 공백이 건강 악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은 물론이고 저쪽 너머 있는 부장의 시선까지 임태호에게 꽂혔다.
태호는 그때 깨달았다. 무슨 수를 쓰고, 어떤 웃는 얼굴을 하더라도 한 번 깨진 흔적을 덧칠해 감출 수 없다는 걸, 인사 하나에 혹시라도 무언가 실언한 건가 싶어 쩔쩔매는 협력 업체의 사람을 달래며 배웠다.
서른셋, 대리.
종종 승진을 막연하게 생각하며 5년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다녔던 회사의 퇴직금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먼저 계산해 보지 않은 탓에 처음엔 ‘생각보다 더 나왔네!’ 했던 것 같다. 별다른 이직 욕심도, 야망도 없었건만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길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임태호는 꺼 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깜박, 하고 신화그룹의 로고가 한 번 떴다가, 얼마 안 가 바탕화면이 켜졌다. 그리고 몇 초 뒤, 메시지 몇 개가 우렁차게 휴대폰을 울리며 쏟아졌다.
[태호 씨, 잘 지내요?]
[임 대리, 요새 어떻게…….]
[마음이 편치 않아 문자…….]
…….
서두를 빼고 모두 뒷부분이 툭 잘려 나갔는데도, 그건 신기하게 저마다 모두 비슷한 형식을 한 문장들뿐이었다. 태호는 그것을 조금 건조한 눈으로 빠르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딱, 그가 전날 휴대폰을 켰을 때 보았던 지점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연우의 이름은 없었다.
벌써 3주째 태호는 제 연인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문자 한 통 받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쏟아져 들어오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제 연인은 급하게 속삭였었다.
‘태호 형,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처리하고 갈게요.’
임태호는 방금 막 들은 것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낮은 목소리를 천천히 씹어 삼켰다.
이제 태호는 ‘그날’ 이연우가 저에게 다정하게 건넸던 문장들을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외울 수 있다. 시간은 넘칠 듯이 많았다.
사실, 임태호는 이렇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지낸 적이 별로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처음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취업 준비생일 때에도 매일같이 스터디와 학원에 출석 도장을 찍었던 터라, 정말 이렇게 집에 종일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 건 정말 처음이다.
하지만 태호는 서른셋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 한두 달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보낼 생각이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언제나 모난 적도, 눈에 띄던 적도 없던 임태호와는 거리가 먼 일탈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변화는 이제껏 그가 살면서 해 왔던 수많은 선택 중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용감한 거였다.
그답지 않게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태호는, 여름 특유의 저녁 빛을 띠기 시작한 창밖을 보면서 부스스하게 변한 얼굴을 괜히 몇 번 마른세수했다.
갈수록 여름이 길어진다더니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당장 반소매를 입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쨍해 보였다.
그때 태호의 휴대폰이 작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임태호는 거의 반사적으로 곧바로 그것에 반응했다가, 액정 위의 이름을 보고 조금은 흐리게 찌푸리듯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사실 그는 전화를 받기도 전부터 제 어머니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뻔히 그려졌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호의 어머니는 그가 예상했던 걱정들을 술술 쏟아냈다.
“아니에요. 요새 회사 보안 때문에……. 휴대폰을 입구에서부터 사물함에 넣어요. 네, 당분간 그래서 좀 통화하기 힘들 거예요.”
언제부터 이렇게 거짓말을 잘했을까.
태호는 속이 씁쓸해졌다. 사실 가만 생각해 보면, 저는 생각보다 이런 쪽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랐다. 고등학교 때 발현한 이후로 이연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이렇게 깜박 속였을 정도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실력인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임태호의 그런 자화자찬 아닌 자화자찬은 얼마 못 가 파스스 무너졌다.
-띵, 동!
임태호는 순간 그 익숙한 소리가 현실에서 들린 게 맞는지 얼른 확신이 안 서서, 담담하게 잇던 말까지 뚝 끊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라는 듯, 몇 초 뒤 ‘띵동, 띵동, 띵-동!’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반복됐다. 태호는 놀라 허둥지둥 제 휴대폰 하단을 꽉 붙잡았다.
들으셨을까? 아니겠지? ……아냐, 그보다도. 혹시.
“죄송해요. 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임태호는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서 제 어머니에게 빠른 목소리로 말하고는, 전화가 끊어지기가 무섭게 제 현관으로 거의 뛰듯이 달려 나갔다. 머리 한구석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외치면서도 철없는 심장은 순식간에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연우일까?’
이 가정 하나에, 겨우 유지했던 평상심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깨졌다. 무거운 현관문을 여는 몇 초가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태호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쇠문을 밀어 열었다.
임태호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한 주인공은 확실히 알파가 맞았다. 또, 임태호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이름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쪽이었다. 태호는 몇 초간 긴장이 풀려서 얼빠진 채 있다가 멍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민아?”
“태호 혀엉! 정말 연락도 안 되고!”
“미안해. 휴대폰 켜두기 좀 그래서…….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전에 형한테 책 하나 보내면서 주소 물어봤었잖아요.”
온갖 용기를 다 쥐어짜 내서 꺼냈던 고백 이후로 처음 보는 유현민이었다.
말이 퇴사 후 집에 있는 거지 사실 사람에 지쳐 있던 태호는, 정말 몇 주 만에 누군가가 진심으로 반가울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건 기묘할 정도로 평화로워진 모든 것에 되레 겁먹고 끙끙대며 걱정하고 있던 유현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태호와 유현민은 현관문도 안 닫은 채로 신발장에서 다 큰 성인 사내 둘이서 말 그대로 폴짝폴짝 뛰면서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현민은 조금 한숨이 섞이기는 했지만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다정스레 입을 열었다.
“아. 진짜 걱정했어요. 진짜 형,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하지만 유현민 그는 제가 생각했던 문장을 채 다 이어 말하지 못했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서 있는 임태호 때문이었다. 현민은 입을 살짝 벌리기까지 한 채로 몇 주 만에 안색이 창백해진 태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
임태호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덩달아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눈을 깜박깜박했다. 하지만 현민은 그런 태호를 보면서도 한동안 뭔가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벙찐 채로 있더니, 작게 달싹이듯 입을 열었다.
“태호 형.”
“응.”
“저기, 그러니까, 이거…….”
평소 대화를 주도하는 건 대체로 유현민 쪽이었다.
현민은 처음에 좀 낯을 가릴 뿐이지, 한번 마음을 열고 나면 한껏 따르는 애교 많고 정 많은 성격이었고, 애초에 태호는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걸 훨씬 좋아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좀 달랐다.
현민은 여느 때와는 달리 차마 뭐라 단어를 고를 수 없다는 듯 입만 뻐금거리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어도 제 주변의 사람들을 언제나 주의 깊게 살피는 태호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현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머잖아 문득 착한 동생이 난데없는 이상 증상을 보이는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응. 약 끊은 지 일주일 좀 넘었어.”
사실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걸 들은 당일에는, 대체 그 페로몬이 어떨지 상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당장 닥친 일들을 이해하는 것만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호와 연락이 뚝 끊긴 몇 주 동안 소식 없는 그를 기다리면서, 유현민은 임태호의 향을 종종 상상해 본 적 있었더랬다.
사실 열성 오메가의 향은 뭐가 되었든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알파로서의’ 흥미를 끌기는 영 어렵다. 오히려 가끔은 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해서, 어떤 알파들은 열성 오메가 대신에 베타를 만나는 쪽이 정서적으로 더 편하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유현민은, 마치 심장 한쪽을 솜털이 보송보송한 깃털로 살살 간질이는 것 같은 여린 향을 짚어낸 순간 잠시 멍해졌다가, 이윽고 속으로 ‘헉!’ 했다. 눈앞의 남자가 정말로 오메가라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로 수긍했다고 한들, 생각과 현실은 또 다른 면이 있는 법이었다.
유현민은 ‘들어와.’하며 기꺼이 문을 열어 저를 자그마한 빌라 안으로 이끄는 임태호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조금은 초조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그럭저럭 연애를 잘하고 다닌 현민이지만, 적어도 사귀는 사이가 아닌 오메가가 혼자 사는 집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 나름의 약간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다. 반 보만 뒤로 가도 낭떠러지일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가엾은 평사원 하나가 총수가의 3세들에게 등이 떠밀린 것부터 시작됐다.
◈◈◈
신화그룹 3세들의 발현은 그 당시에는 꽤나 화제였다.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베타인 이현은 차치하고서라도, 유독 알파가 많기로 소문난 집안에서 이안과 이민혁이 나란히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물론 몇 년 뒤 이연아와 이연우가 나란히 알파로 발현하면서 ‘아, 역시!’하는 반응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연우는 딱히 알파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엇으로도 발현하지 않고 베타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더 많다. 오메가로 발현한 뒤 어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이안과 이민혁은 너무 피곤해 보였고, 알파로 발현한 뒤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발버둥 치는 이현 쪽은 어린 마음에도 꽤나 큰 거북함을 남겼었다.
하지만 그런 희망 사항 아닌 희망 사항과는 달리, 이연우는 누구보다 눈에 띄는 극우성의 알파로 발현했고, 제게 주어진 또 다른 성별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알파니, 오메가니, 아니면 베타니 하는 것들에 대한 고민은 잊은 일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연우는 요 몇 주간 그 어린 시절의 오래된 생각을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차라리 진짜 베타였으면 이 꼴은 안 봤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연우는 전혀 손질하지 않은 채로 이마와 귓가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장난처럼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쪽도 좀 지겹지?”
물론 그건 짐짓 가벼운 듯한 내용과는 달리 썩 기분 좋은 말투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건 자신의 거처에 갇힌 지 3주째인 상황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꽤 온화한 문장이었다.
이연우의 말에 현관문을 앞을 마치 석상처럼 지키고 있던 가드 하나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지. 죄송할 게 뭐 있나. 회장님 지신데.”
짐짓 나긋하게 들리는 우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제 이연우를 지키는 자들은 저 웃음에 속지 않는다.
오히려 저 상냥한 문장에 더욱 긴장한 얼굴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저 고아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서 이제껏 감히 상상한 적 없었던 험악한 말을 쏟아내며 새벽에 창문을 깨서라도 나가려던 남자를 똑똑히 기억한다.
한 달이 덜 되는 기간 동안, 이연우의 가드는 다섯 명에서 거의 서른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주호 회장에게 충성스러우면서 신화가 저택을 오랫동안 지켰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로만 뽑혔는데, 그중에서 특히 전자가 중요한 선발 조건이 됐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이제 곧 회장님 은퇴하시는데.”
“…….”
“눈 한번 딱 감고 나면 꽃길 펼쳐진다니까? 니 아들 새끼가 좆같은 걸 어쩌겠냐고 하세요. 그 성격에, 정곡 찔리면 오히려 뒤끝 없어.”
맹세컨대, 경호팀의 사람들은 그 고고한 신화그룹의 나이트가 이런 단어를 엮어 말할 수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경호원들은 그 어떤 때보다 비밀유지서약을 거듭 강조하던 늙은 집사장의 말이 곧바로 이해됐다.
이연우는 다섯 명에서 열 명, 열 명에서 스무 명, 이윽고 서른 명까지 늘어난 가드들을 그 곱상한 눈웃음과 함께하는 난동과 회유, 협박을 섞으며 달달 볶았다.
사실 연우가 제 연인에게 꽤 자신만만하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애초에 오랜 선배인 임태호와 사귄다고 했을 때도 놀라기는 했을지언정 싫은 내색은 전혀 없던 집안의 분위기 탓이 컸다.
약간은 방심했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솔직히 이연우는 제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날 이후 아예 서로 이야기할 자리조차 만들지 않고 무작정 감금할 거라고는 3세들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절대로 각인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정말로 너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거다.’
이연우는 알파로 발현한 순간부터 그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파와 오메가로 발현한 신화그룹 3세들은 20대 초반 정도까지 모이기만 하면 그 말을 마치 으레 있는 절차처럼 꼭 들었다. 그건 마치 백지 위에 몇 번이고 가위표를 치는 세뇌 같은 말이었던지라, 그 정도로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각인을 거북하게 여기게 됐을 거다.
그래서 언제였던가, 대학 입학이 확정되고 오랜만에 온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이연우는 비뚜름한 목소리로 물었던 적도 있다. ‘대체 각인하면 얼마나 좆되길래 하면 안 된대?’
아쉽게도 그때 이연우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화기애애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집안 어른들이 정색한 채 각인의 위험성에 대해 늘어놓는 잔소리만 왕창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 귀찮더라도 정확한 이유를 물었어야 했다.
이연우는 이제 제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경호원들을 보며 눈썹 하나를 비뚜름하게 휘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아예 병째로 홀짝였다. 이건 휴대폰은 물론 임태호와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모조리 압수당한 이연우가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위안거리였다.
그런데 그때,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현관문이 열렸다. 표정에 온도가 있다면 순식간에 몇 도는 떨어진 이연우의 냉랭한 얼굴에 찔끔했던 가드들의 시선은 슬쩍 그쪽으로 향했다가, 머잖아 눈에 띄게 환하게 펴졌다.
신화가의 저택 안에서 이연우의 머리 위에 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의 등장 때문이었다.
“또 술 마시고 있는 거니?”
주름이 팬 얼굴마저 묘하게 단장된 느낌이 드는 고운 인상을 지닌 여자는, 신화그룹의 안주인이자 이연우의 어머니, 박희원 관장이었다.
“…누구?”
이연우는 제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 대신 살짝 고개를 기울여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중년 사내를 향해 마치 명령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건 어쨌거나 외부인에게만큼은 늘 깍듯했던 이연우답지 않은 비뚜름한 태도였다. 박희원 관장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사람들을 물렸다.
“다들 잠시 자리 좀 비워 주세요. 박사님도 잠시 뒤에 들어오시겠어요?”
“예.”
이연우가 무슨 짓을 해도 열리지 않았던 육중한 현관문은, 박희원 관장의 말 한마디에 다시 한 번 곧장 열렸다. 덕분에 이연우는 제 눈썹을 비뚜름하게 휘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는 눈을 했다.
“잔뜩 상한 얼굴로 회사에 갈 생각이니?”
“망할 ‘출장’ 가서 어지간히 고생했나 보다 하겠지, 뭐. 방금 영감은 뭔데요?”
박희원은 와인 병을 가볍게 흔들며 소파에 늘어져 앉는 자신의 막내아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 역시도 뒤따라 앉았다.
“네 상담을 위한 분이야.”
“무슨 상담요?”
경영에 참여한 이후로 박희원 관장은 제 자식들을 언제나 깍듯한 직함으로 불렀다.
그건 단순히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한 일이 아니다. 그 이름에 담긴 위치와 책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한, 교육의 마지막 단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박희원은 신화그룹의 안주인이자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는 손꼽히는 갤러리의 수장이 아닌, 어렸을 때부터 늘 제대로 신경 써 주지 못한 막내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연우는 잠시 대답 대신 한숨을 삼키는 제 어머니를 향해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한 답을 대신 꺼냈다.
“정신과?”
“……그래.”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그 어디서나 누구보다 눈에 띄던 그린 듯한 얼굴은 조금은 야위고 수척해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더욱 예민하게 빚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희원 관장은 익숙한 페로몬이 순간 넘실대듯 일렁이려던 것도, 이연우가 그걸 가까스로 참아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임태호 집안? 왜, 지노 둘째라도 만나야 성이 차시나.”
소위 이 정도 되는 집안의 만남이란 다 비슷하다. 감정보다는 관계가 선행되고, 다정하고 달짝지근한 말보다는 종이 위에 적힌 활자가 더 정확하다. 신화그룹의 명패를 이름 뒤에 달고 있는 사람 중 그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순진해 빠진 생각을 하는 채였다면 진작에 지금의 자리를 잃었을 거다.
박희원 관장은 이연우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화를 꾹 누르고 있는 것을 잠시 동안 눈에 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그건 이 저택 바깥사람들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약간은 달래는 것 같은 어조여서, 이연우는 다시 한 번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눌러 참았다. 거의 3주 가까이 보지 못했던 어머니다. 보지 못하니, 이렇게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다. 아무리 이 말도 안 되는 감금생활을 따지고 싶더라도 지금은 눌러 참아야 했다.
하지만 박희원 관장도 그 3주간의 격리에 대해 아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설마 몰랐을까. 신화그룹 이연우가 쉴 때마다 만난다는 ‘선배’를?”
“…….”
“선후배도 괜찮아. 연애도 좋고, 아니, 차라리 그 사람 손이라도 잡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뭐 흠잡을 게 있겠니? 지노에서 처치 곤란인 녀석이랑 만나게 하자는 말이나 들을 정도로 사윗감 시장에서는 엉망인 거 뻔히 아는데.”
내로라하는 집안 오메가들 자존심을 좀 상하게 했어야지. 박희원 관장은 작게 한숨 쉬듯 덧붙였다. 그 애정과 걱정이 뒤섞인 말에 울컥해서 화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그런데 뭐가 문젠데요?”
그 대신 이연우는 곧바로 떠오른 물음을 문장으로 토해 내는 쪽을 택했다. 제 아들의 답답한 심정이 가득 섞인 목소리에, 박희원 관장은 그녀답지 않게 또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을 택했다. 그녀라고 자기 아들을 거처에 가두고 경호원들을 몇 명이나 붙이며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아니, 이주호 회장 부부는 이연우만큼이나, 실은 이연우보다 더 3주간 밤잠을 제대로 못 이뤘다.
“혈육이라고는 하나 없는 천애 고아와 시골 마을에서 가장 난폭하기로 소문났던 집안의 장녀의 외동아들.”
마치 별거 아닌 잡담을 하듯 가볍게 흘러나온 문장이었던 터라, 이연우는 제 어머니가 한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사실 어찌 보면 접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단어들의 연속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고, 이연우 그조차도 8년간 함께 지내면서 가끔 술자리에서나 단편적으로 들었던 조각들이 처음으로 이어진 문장이 되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집안의 사람과 엮인다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웃음 살 일이겠지만, 네가 좋아 죽는다면야 못할 게 뭐겠니.”
박희원 관장이 말한 그 ‘외동아들’은, 이연우의 연인인 임태호다.
“평가하려는 건 아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단다. 적의 식구는 많을수록 좋지만, 우리 식구의 머릿수는 단출할수록 좋으니.”
“진짜 정떨어지는 소리만 하시네.”
소위 친인척이라고 하는 건 많을수록 하나하나가 제어하기 힘든 공과 같다. 이연우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눈에 띄게 질린 표정을 했다.
아무리 태어날 때부터 신화가의 일원이었던 그라고 하더라도, 이 살얼음판 같은 곳에서 누구보다 냉랭하다고 평가되는 박희원 관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 자식의 질타 어린 시선에도 담담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그건 이연우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화제 전환이기도 했다.
“○○그룹 장남, 기억하니?”
이연우는 지금 제 어머니가 말하고 있는 남자를 멀리서 몇 번 봤었다.
하지만 그 생판 남인 남자가 왜 지금 이 상황에서 튀어나와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내는 이연우와는 나이 차가 꽤 났던 터라 별다른 접점이 없었지만, 사촌 형인 이안과는 그래도 제법 친분이 있었던 자였다.
연우는 그를 언제나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던 호남형의 사내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곧잘 얼굴을 내밀던 행사에서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더니 거의 몇 년간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가라앉았었다.
그러던 ○○그룹 장남이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건, 불과 작년의 일이다. 이연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입을 열었다.
“……죽었잖아요.”
“그래. 자살했지.”
국내 10대 재벌 안에 보란 듯이 들던 ○○그룹의 장남은, 정재계는 물론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는 소식으로 그의 마지막을 썼다. 이연우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을 했던 사촌 형 이안과 함께 그의 빈소에도 찾아갔었다.
“끔벅 죽을 정도로 좋아 날뛰며 만나다 보면 각인이 참 근사한 꿈결 같은 것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사람 마음처럼 상하기 쉬운 게 없어.”
“…….”
“어떤 때는 10년이고 20년이고 가지만, 또 어떤 때는 고작 한 달을 못 가.”
이연우는 처음에는 제 어머니가 머릿속 기억에서 저만치로 물러났던 이름을 다시 꺼낸 이유를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었다. 사실, 이어지는 말을 듣고도 설마 하며 모르는 척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고 해도 좋을 거다.
“그 자존심 센 알파가 울고불고 빌면서 기어 다녔다고 하더구나.”
“엄마, 잠깐만.”
“그 사람만 그랬을까. 얼마든지 더 댈 수 있어.”
박희원은 이연우가 나이가 좀 든 이후로 주변을 의식해서 쓰지 않으려고 했던 ‘엄마’라는 단어를 꺼내 달래려고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호칭에 하나뿐인 막내아들을 대하는 눈이 좀 더 깊어졌을 뿐이다.
이연우는 길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말로 몰랐다. 약혼자와 삐걱거린다는 말은 들었던 것 같지만, 몇 년간 사라졌다가 그런 선택을 한 배경 같은 건 소문으로도 들리지 않았었다. 그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말 정도가 다였는데.
“최악의 가정이잖아요. 그럼 이혼할 거 무서워서 결혼은 어떻게 해?”
“좋은 파트너가 되면 좋겠지만, 얼마든지 다시 원점으로도 만들 수 있는 서류 몇 장만 있으면 되는 계약이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할 수 있지.”
“…….”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도 그 모양인데, 베타에게 일방향 각인? 얘야, 넌 지금 쉬운 길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인질이 되어 왔어.”
이연우는 제 어머니가 쏟아내는 말에 대답 대신 처음으로 살짝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며 마른 입술을 살짝 적셨다. 그건 3주 만에 처음 듣는 바깥 식이었다.
……박영진 이사 무리가, 임태호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이연우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직까지도 임태호를 베타로 알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희원 관장은 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막내아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한숨 어린 말을 이어갔다.
“그래. 임태호,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한단다.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알잖니.”
“…….”
“여긴 좋은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지.”
이연우는 울컥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어머니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각인을 막내아들의 지독하게 철없는 실수로 여기는 그 절절한 시선에 변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각인은 실수가 아니다. 차라리, 실수처럼 그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것이라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내 역시, 여느 재벌가의 3세들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각인만은 안 된다는 말을 들어왔을 거다. 어머니의 말을 빌려 ‘끔벅 죽을 정도로 좋아 날뛰더라도’ 굳이 그걸 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다른 방법은 없었을 거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누군가를 들여보내는 건, 오랫동안 머릿속에 새기듯 쌓아온 거부감을 의식하기도 전에 끝나버린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의 세계가 변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도 한때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의심하고, 또 조금은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국 선택지를 지워가다 보면 남는 건 딱 하나뿐이다.
이연우는 마주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 어머니의 옆으로 털썩 주저앉듯 몸을 기댔다. 그 별거 아닌 행동에 철의 여인이라 불릴 정도로 쉬이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박희원 관장의 조금 눈시울이 붉어졌다.
“들여보내세요.”
“…….”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의산가 뭔가 하는 사람. 얘기는 해 볼 테니까.”
효과가 없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우선은 앞에 놓인 오해와 걱정을 나름대로 풀기 위해서는 이 무의미한 화해의 제스처라도 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처받는 이 없이 임태호와의 약속도 지킬 수 있다.
이연우는 자신의 어머니가 밖에서 제법 기다렸을 의사를 불러들이는 걸 가만히 보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이런 말을 듣고도, 저의 남은 시간이 모조리 한 남자의 손아귀에 쥐어졌다는 것이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조금 궁금해졌다.
……임태호는 어떨까, 지금.
◈◈◈
언제나 밝은 활기를 넣던 이연아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조금 힘이 없다.
“사직서 냈대.”
“…….”
“회사에서는 인수인계도 안 받고 바로 처리했다고 하고, 전화도 안 돼. 대부분 끄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민혁과 이안의 입에서 동시에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지금 다른 이들, 특히 이주호 회장의 시선을 피해 몰래 시간을 맞춰 만났다. ‘난리’라는 단어로 표현해도 과장이 없을 그날 이후, 그들은 평소 같은 회동마저 엄히 금지됐다.
이안은 그답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우는?”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니라던데.”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게 무슨 말이야.”
“뭐겠어. 술 마시고…… 나간다고 난리 피우기도 하고, 그러다 또 마시고. 가드만 세 배로 늘다 못해 싹 다 베타로 바뀌었다니까, 다른 방법이 있나.”
이안은 이연아의 말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몇 번 마른세수했다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각인은 잘 모르지만. 그거, 상대랑 떨어져 있는 거 별로 안 좋은 거 아니야?”
“미칠걸.”
이안의 걱정을 달래려는 어설픈 시도 대신 쐐기 같은 대답을 해 준 건 그의 동생인 이현이었다. 정말 드물게도 민혁이 ‘형!’하는 눈으로 흘겨보는 것도 소용없었다. 애초에 이현은 적당한 위로보다는 조금은 아픈 사실을 말하는 편인 사내다.
결국 더욱 굳은 얼굴이 된 이안을 위로하듯 입을 여는 건 이민혁의 몫이었다.
“나랑 연아, 현이 형은 절대 근처에도 못 가. 연우 빼돌릴 거 뻔하다고.”
“나라도 한 번 보러 갈까?”
“지금쯤 한창 감각이 돌아오고 있을 텐데, 오메가가 가서 좋을 건 없지 않을까.”
민혁의 조심스러운 말에 이안은 ‘그 말도 맞네….’ 하며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연우가 그의 집 안에 감금된 지 3주가 넘어가고 있지만, 사실 당시의 상황 자체는 그 첫 주 안에 모두 깔끔하게 정리됐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몇 걸음 뒤로 되돌리기만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임태호의 회사와 신화 메디컬센터, 그리고 또 다른 협력사 사이에 얽혀 있던 계약을 푸는 건, 애초에 칼자루를 쥔 쪽에서는 별일도 아니었다.
스캔들을 쥐고 있던 라온 신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희원 관장은 예술계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눈을 피할 수 없음을 이용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라온 신문의 약점 하나를 이용했다. 마찬가지로, 라온 신문의 외손자 하나의 이중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로라하는 집안끼리의 스캔들 거래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오히려 라온 신문 쪽에서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냐며 펄쩍 뛰기까지 했으니, 주도권이 반대로 넘어왔으면 넘어왔지 뒤탈을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연우를 ‘해외 출장’ 상태로 만들고 임태호를 퇴사까지 하게 만든 일련의 사태가 수습되는 건 그렇게 고작 며칠이면 충분했다. 게다가, 그 상황을 되짚는 과정 어디에도 누군가를 탓할 부분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건 멀쩡한 중견 기업 하나에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유를 앞세워 입김을 넣고 그룹 3세와 평사원 하나를 엮어 신문사에 슬쩍 스캔들을 흘린 것이 박영진 이사 무리라는 정확한 물증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상황은 모두 한쪽을 가리키는데도 건성건성 얽힌 적당한 증거들과 이연우의 각인이라는 대형 폭탄 하나로 정작 이 일련의 사태를 만든 자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물론 심증만큼은 속이 쓰릴 정도로 넘쳐났다.
덕분에, 이안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마음의 부채를 지는 걸 피할 수 없게 됐다.
그건 이민혁이나 이연아가 제 탓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현은 그런 자신의 형을 물끄러미 보더니, 처음으로 제 혈육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던졌다.
“임태호 씨 물건이라도 보내.”
“응?”
“향이 좀 남아 있는 쪽으로. 오래된 옷이라던가 뭐 그런 거. 몇 개 있어도 훨씬 나을 테니까.”
“진짜? 각인하면 그렇대?”
온종일 어두운 얼굴이던 이안은 초콜릿색 눈동자를 크게 뜨며 영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동생에게 되물었다. 이현은 그 기대 가득한 시선에 살짝 건성으로 눈썹을 휘면서도, 왠지 모르게 확신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하지만 응급 처치 방법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또 있다. 이연아는 조금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빠, 근데 연우 걔 지금 머리만 짧다 뿐이지 완전 라푼젤이야. 정말 아무도 근처에 못 가는걸.”
그 말은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는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정말 이연우는 성안에 갇힌 기사님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받은 건 이민혁이었다. 그는 제 목을 동여맨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진심 반, 한숨 반으로 방향 잃은 한탄을 토해 냈다.
“애초에 태호 씨한테 그런 부탁을 어떻게 해? 이 꼴을 보게 해 놓고서.”
“…….”
“역시 재벌 새끼들은 완전히 맛 갔구나 싶어 하지 않을까.”
무거운 침묵은 진한 동의의 색을 띠고 있었다.
이안은 머릿속으로 그 순한 얼굴을 한 남자 임태호를 찾아가 ‘안녕하세요. 혹시 안 입으시는 옷이나, 오래된 물건 같은 거 몇 개 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다가, ‘아, 내가 생각해도 미친 사람들 같아.’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 울적한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날 이후, 시종일관 기묘할 정도로 침착한 상태이던 이현이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제 슈트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후 곧장 누군가의 이름을 찾아 눌렀다.
뭔가 방법이 있나?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동생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신호가 갔을까, 이윽고 이현의 입에서 휴대폰 너머 누군가를 향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유현민 씨, 통화 가능합니까.”
……유현민. 유현민. 유현민. 유현민이 누구지?
이안은 분명 낯선데도 묘하게 머리 한구석에 분명히 있는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런 다른 3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일제히 그 이름의 주인공이 이번 사건의 ‘문제의 신입 사원’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놀란 표정이 되었을 때쯤, 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외근 좀 가셔야겠습니다.”
◈◈◈
‘굳이 티 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임태호 옷가지나 오래 쓴 물건을 몇 개 받아 올 것. 자연스럽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유현민은 자신의 팀장에게 들은 그 막중한 임무를 곱씹으며 임태호가 준 주스를 홀짝였다. 이건 뭐, 차라리 훔치라고 하는 게 더욱 쉬울 미션이나 다름없었다. 슬쩍 눈을 굴려 살펴본 임태호의 집은 무엇 하나 과하지 않게 깔끔하고, 거슬리는 물건 하나 없이 정돈된 것이 참 그답다는 말이 나오는 곳이었다.
“이연우 팀장님이랑은 어때요?”
현민이 부엌에서 과일 몇 개를 챙기던 태호에게 굳이 그 질문을 한 건, 사실 이전까지는 몰랐던 약간의 부담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거의 한 달 전 임태호의 비밀을 들은 이후로 이 사건사고 많은 커플의 근황을 몰랐다. 태호와 연락이 뚝 끊긴 뒤 이연우가 꽤 긴 출장을 갔다는 말만 멀리서 전해 듣고는, 태호 형이랑 어디 간 건가, 하고 생각했었을 뿐이었다.
자그마한 빌라 거실 한편의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사실이 새삼 다시 와 닿았다. 이 간질간질하게 희미한 향은 ‘사실 나 오메가야.’라고 밝히는 것보다 더욱 뚜렷한 증거인 셈이었다.
유현민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외근 명령보다 회사까지 그만뒀다는 임태호의 안부가 더욱 궁금했다. ‘에이, 대체 이런 걸 나한테 왜 시켜. 태호 형 멀쩡하게 잘 있네!’하고 조금 투덜거리기도 했다.
……곧이어 이어진 임태호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꽤 태평한 마음이었다.
“실은 못 본 지 몇 주 됐어. 이제 곧 한 달 정도.”
하지만 저 다정다감한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평화를 깨부수는 전적이 화려했다. 몇 주간의 밀월여행 같은 거나 생각했던 현민은, 덕분에 저도 모르게 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예? 예에에?”
“전화나 문자도 안 되고.”
“……형, 혹시, 그…… 오메가라는 것 때문에…….”
유현민은 차마 문장을 끝까지 다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헤어지셨어요?’ 같은 말은, 저 놀랍도록 말간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꺼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임태호는 그런 유현민의 말을 짐작하고는 그 전에 대답했다.
“아니. 안 헤어졌어. 아니야, 그건. 오메가라는 것도……, 내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대.”
“그런데 왜 안 만나요? 문제 될 것도 없네, 그럼! 일도 잘 처리됐다면서요.”
단어 하나하나 힘을 주어 ‘헤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임태호의 대답에 안심하기도 잠시, 유현민은 이어지는 문장에 더욱 의아한 얼굴이 됐다.
지나가듯 말하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기는 했지만, 이현 팀장은 분명 저에게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라고 말했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마음 졸일 일 같은 건 거의 한 달 가까이 아무것도 터지지 않았고, 현민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오래된 말을 믿으며 임태호가 잘 지내고 있겠거니 했었다. 감히 이현에게 찾아가 ‘저, 팀장님. 근데 태호 형은 잘 지내나요?’ 같은 걸 물을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연우 집안 분들이 막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헐! 왜요! 아, 진짜 거 웃기는 사람들이네!”
임태호는 마치 제 일처럼 화를 내는 유현민을 보며 조금 흐리게 웃었다.
눈앞의 착한 동생은 늘 그랬다. 자신이 곤란한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저를 탓하기는커녕 대신 씩씩대며 화를 내줬다. 어쩌면 지금처럼 상황이 정리된 것도 현민의 도움이 컸다.
“하여간 제가 그 거기 사람들 다 마음에 안 든다니까요. 아니, 예쁘게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찢어놓고 말이야!”
그래서 태호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하필 유현민이 ‘하여간 재벌 새끼들 노답’까지 말했을 무렵이었다.
“연우가 나한테 각인했대.”
“……예?”
“아마 그래서 그런 것 같아. 찾아보니까 오래 못 만난 경우에는, 각인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마치 오늘 저녁 식단을 말하는 것처럼 평이한 목소리였다. 덕분에 유현민은 자신이 들은 말을 머릿속으로 몇 번을 되짚어보아야 했다.
각인? 각인이라고?
당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일상생활에서 단 한 번도 끄집어낼 일 없었던 낯선 단어의 등장에, 제대로 된 사고가 어려웠다. 결국 유현민은 제대로 된 대답 대신 조금은 멍한 목소리로 ‘저 실제로 각인했다는 사람 처음 들어요. TV에서만 봤어요.’라고 말했고, 태호는 그 역시 작은 목소리로 ‘나도 그래. 그런데 생각보다 많대. 말을 안 할 뿐이지.’하고 대꾸해 줬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다 들으셨어요?”
“들은 게 아니라…… 보건복지부랑 통계청 홈페이지에 있던데.”
실로 임태호다운 조사방법이었다.
덕분에 유현민은 잠시 상황을 잊고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가, 앞서 얼이 빠진 채라 제대로 짚지 못했던 물음을 던졌다.
“오래 못 만난 게 어느 정돈데요?”
“…몇십 년 감옥에 갔다던가.”
“말도 안 돼!”
현민의 입에서 곧바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실 이연우가 임태호에게 각인했다고 하는 것도 영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각인이라니. 그 단어는 유현민에게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두 글자였다. 알파로 발현한 뒤 ‘각인’이라는 현상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제껏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알파나 오메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동이라는 것 정도 말고는 알고 있는 지식도 전무했다.
사실 그건 오메가라기보다는 베타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 연인과 떨어져 있는 요 몇 주간 각인에 대해 그 나름대로 열심히 알아본 거다. 어차피 시간도 많았다.
임태호와 유현민 사이에는 잠시 뭐라 할 말을 잃은 침묵이 흘렀다. 특히 더욱 생각이 많아진 건 유현민 쪽이었다. 사실, 제가 아무리 빽 하나 없는 평사원이라고 한들 정말 뜬금없는 지시였다. 대뜸 임태호의 물건을 뭐라도 빌려 오라니.
그런데 이연우가 각인했다고 하면 참 여러 가지가 달라진다. 이 모든 뜻 모를 상황에 의미가 생긴다. 현민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태호가 준 주스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왠지 모르게 유현민의 두뇌 회전에 깊은 신뢰가 생긴 임태호는, 그 고요한 시간을 기꺼이 기다렸다.
“태호 형.”
“응.”
“잘 생각해 보면, 각인이라는 거…….”
임태호는 눈앞의 알파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현민이라면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을 말해 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그리고 유현민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엄청나게 자기만족도 높은 노예 계약 아니에요?”
정말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감히 떠올리지 못했던 표현이었다.
“그분이 각인해서 싫대요? 아닐 텐데.”
“……그야, 싫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싫어할 수가 없죠.”
태호는 이제껏 제 연인이 각인한 ‘상황’에만 집중했었다.
때문에, 쉬는 동안에도 그것과 관련된 것만 살피고 고민했다. 각인 증상에 대해서 찾고, 앞으로 전개될 미래만 신경 쓰며 속앓이를 한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끙끙 앓는 것보다 행동이 더 빠른 현민은, 그보다 더 직접적이고 솔직한 언어로 지금을 정의했다.
“그거 쉽게 말하면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연인이 된 이후로, 아니, 8년을 알고 지내면서 감히 단 한 번 생각으로도 떠올리지 못했던 문장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이연우 팀장, 앞으로 형 없음 안 되는데?”
“…….”
“그러니까 거기서 아무 짓도 못하고 얌전히 있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럴 리 없는 가정이다. 딱 한 달 전으로만 돌아간다면, 임태호는 유현민의 말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르다. 어쩌면 저 말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생겨 버렸다.
임태호는 그제야 처음으로 이연우가 자신에게 각인한 것의 ‘의미’를 멍하게 곱씹었다. 그건 왠지 목 안쪽까지 화끈한 열이 오를 정도로 간질간질한 일이었다.
이연우가, 나를 좋아한다. 그것도, 나보다 더.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건데. 그런데…….
귀만 새빨갛게 변한 임태호를 보며 더욱 신난 건 유현민이었다.
“그렇네에! 이제 형이 갑이네!”
“가, 갑? 무슨 갑?”
“갑을병정 할 때 갑이요! 형 이제 완전 갑질 해도 돼! 가서 확 들이받아요! 그래도 꼼짝 못 할걸, 그쪽 사람들!”
그렇지 않아도 현민은 쌓인 게 참 많았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이현이 사사건건 제 행동에 트집을 잡는 통에 팀장한테 찍혀서 얼마 못 갈 불쌍한 신입 취급을 받았는데, 오늘은 이 외근 지시 때문에 사방에서 동정 가득한 시선과 함께 가는 길에 먹으라고 건네주는 초콜릿까지 받았다. 그건 자존심 빼면 시체인 유현민에게 꽤 타격이 큰 거였다.
현민은 이때다 싶어 서서히 뺨까지 붉게 익는 태호를 향해 열심히 고자질을 시작했다.
“태호 형, 실은요, 저 오늘 여기 온 거 저희 팀장님이 시켜서 온 거예요.”
“연우 사촌 형님?”
“예, 예. 저번에 봤던 그 살벌한 인간. 뜬금없이 형 찾아가서, 형 것 물건 좀 슬쩍 챙겨 오라는 거예요.”
이현은 분명 임태호에게 굳이 티 내지 말라고는 했지만, 말하지 말라고도 한 적 없다. 유현민은 신나서 이현이 한 말을 술술 불다 못해, 확신에 가까운 자신의 추측까지 덧붙였다.
“그래서 전 ‘뭐, 하다 하다 이런 걸 시켜!’ 했는데, 각인해서 그런 거였네!”
“각인이랑 내 물건이 무슨 상관이야?”
회사에서는 늘 상사에게 시달리고, 회사 밖에서는 이연우의 살벌한 눈초리를 한몸에 받던 신입 사원, 유현민은 이 파워게임에서 순식간에 가장 우위에선 순하디순한 오메가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태호 형 페로몬이요!”
“……뭐?”
“떨어트리기는 해야겠는데, 각인한 사람이 그게 되겠어요? 영 힘든가 보죠!”
이제껏 임태호는 제 자신의 향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억제제를 쭉 먹어 왔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오메가라는 자각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연우가, 그 극우성 알파가 제 향이 필요하다고 한다.
오래 쓴 물건이라도 챙겨 가야 할 정도로!
만약에 얼굴이 벌겋게 익는 것이 소리가 나는 거였다면, 태호에게서는 분명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만큼 뺨이 화끈거리는 게 훤히 느껴졌다.
임태호는 민망한 마음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며 ‘잠깐만 기다려. 그럼 뭐라도 챙겨 줄게.’하고 유현민의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사태 파악 후 잔뜩 들뜬 현민은, 그런 태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신나게 훈수를 뒀다. 심지어 임태호의 얇은 스웨터 몇 개를 두고 코를 박은 채 킁킁대며 ‘이게 좀 더 페로몬이 짙은데요?’ 하기까지 했다.
태호는 그 모습에 왠지 더욱 속이 간지러워져서 제가 오래 쓴 지갑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이것마저 이연우가 예전에 생일선물로 챙겨 준 거였다. 늘 들고 다녔으니, 분명 제 흐리고 탁한 페로몬이 남아 있을 거다. 정말 열성이나마 오메가여서 다행이었다.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안도에 가까운 문장을 떠올렸다가, 문득 그 내용에 스스로가 조금 놀라 멍해졌다. 현민이 했던 말들도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뭐, 들이받아?
하지만 그 낯선 기분과 생각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저쪽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유현민의 경쾌한 목소리 덕분이었다.
“아. 맞다. 형, 뭐 전해 드릴 말은 없으세요? 이연우 팀장님한테요.”
참 살갑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태호는 얼른 대답하는 것 대신 오히려 더욱 입을 꾹 다물게 됐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면, 감히 어떤 것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기 마련이었다.
눈치 빠른 현민은 그 침묵의 뜻을 금방 알아챘다. 정말, 저 커플은 둘 다 저보다 나이도 많은데 이래저래 참 마음이 쓰였다.
에휴, 그래. 할 말이 얼마나 많겠어. 괜히 걸릴까 봐 뭐 눈에 띄게 들고 갈 수도 없고. 유현민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차다가, 제가 들고 온 가방에 시선이 닿았을 때쯤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이거라면 절대, 저얼대 들킬 리가 없다.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어?
유현민은 왠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된 임태호를 씩씩하게 이끌었다.
◈◈◈
대체 저 의기양양한 표정은 뭘까.
이현은 조수석에 앉은 유현민을 백미러로 슬쩍 살피며 생각했다.
이제껏 늘 긴장한 표정만 보여 줬던 신입 사원은 오늘 참 신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임태호의 물건을 들고 이연우를 찾아가야 한다는 부탁을 하면 놀라거나 싫어할 줄 알았는데 현민은 생각보다 멀쩡하다 못해 퍽 기분 좋아 보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저, 팀장니임.”
심지어는 먼저 말을 걸기까지 한다.
그건 입을 뗀 당사자인 현민은 모르겠지만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저렇게 말꼬리를 늘이며 부르는 건 더욱 상상도 못 할 거였다. 그 덕에 적당한 반응을 놓친 이현은, 몇 초 뒤에야 겨우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뭐 하나만 여쭤 봐도 됩니까?”
“……그러세요.”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이제껏 몇 번이나 갔는지 셀 수도 없이 자주 향했던 본가로의 길이다. 하지만 이현은 오늘따라 그 길이 묘하게 짧게 느껴졌다.
“사실 처음에 연락드렸을 때는, 이렇게 쭉 도와주실 줄 몰랐는데.”
“…….”
“좀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요.”
아마도 그건 옆에서 조금은 눈치 보듯 눈을 굴리며 말하는 사람 때문일 거다. 현은 그제야 ‘조금쯤 요령을 부릴걸.’ 같은 그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어차피 유현민은 모르는 길인 것을 약간은 돌아와도 됐을 텐데.
“상황을 보아하니 한 명쯤 아군이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낮은 목소리만큼이나 무뚝뚝한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어느새 이현의 불친절한 표현력에 꽤 적응한 유현민은,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더 캐묻는 것 대신에 눈앞의 바리케이드를 보는 것을 택했다. 신문에서만 가끔 보던 총수 가의 저택 입구는 작은 차단기는 물론이고 꼬불꼬불한 인이어를 낀 경호원들까지 살벌하게 서 있었다.
물론 운전자가 운전자인 만큼 그 철통같은 장벽은 곧바로 열렸다.
“물건 전해 주면서 임태호 씨 얘기나 적당히 해 주면 될 겁니다.”
“예에.”
사실 유현민은 이때까지는 ‘뭐 별일 있겠어?’ 하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이제껏 저를 언제나 잡아먹을 눈으로만 봤던 이연우가 좀 고마워할 걸 생각하면 엣헴, 하고 목에 힘이 들어가기까지 했다. 여기가 정말 사람 사는 덴가 싶을 정도로 넓은 신화가의 저택을 눈으로 훑으며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하지만 그런 발랄한 마음은 부지 저쪽에 문과 창문가마다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키고 서 있는 건물을 보며 머잖아 ‘에이, 설마’ 로 바뀌었다.
설마 저기로 가겠어. 저긴 왠지 무섭다, 야.
……하지만 언제나처럼 설마는 현실이 되는 법이다.
몇 걸음 앞장선 이현은 그 옆에 있는 다른 길목 대신 가장 경계가 삼엄해 보이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현의 뒤를 놓칠세라 쫄쫄 따라가던 현민의 얼굴에 긴장이 어린 것도 그때였다. 현을 발견하자마자 꾸벅 허리를 숙이는 남자들은 누가 봐도 잘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눈 하나 깜짝할 팀장, 이현이 아니었다.
“일 때문이니까 이쪽 직원이라도 잠깐 들여보내.”
“죄송합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와, 진짜 갇혔나 보네! 유현민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어제 내내 욕했던 미친 재벌가를 다시 한 번 흉봤다.
“열어.”
‘열어’라는 짤막한 단어가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 ‘죽어’로 들릴 수 있는 능력은, 어찌 보면 참 대단한 거였다. 현민은 절대 비키지 않을 것 같던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일순 긴장한 눈을 하는 걸 보며 뒤에서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결국 두 손을 든 건 경호팀이었다.
만약 이민혁과 이연아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는 이연우를 빼돌리거나 하는 쪽과는 영 거리가 먼 이현인 데다가, 직접 들어가는 것도 다른 직원이라고 하니 별수 없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현민은 뭐라고 잠시 회의하는 듯하던 경호원들이 저에게 오는 것을 보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섰다. 왠지 잠입 스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신분증 확인을 해도 되겠습니까.”
“예예, 개발 1팀 유현민입니다.”
“휴대폰은 두고 가십시오. 가방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런데 노트북은 꼭! 들고 가야 하는데…….”
자고로 힘은 이럴 때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현민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슬쩍 제 옆에 삐딱하게 서 있는 이현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함께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현이 살짝 눈썹을 휘는 것만으로도 경호원 중 가장 상급자로 보이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프리패스다웠다.
“인터넷 사용은 어렵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짤막하게 밖에서 있겠노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유현민은 조마조마한 속을 달래며 경호원 하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과연 그 신화가에서 작정하고 가둔 게 맞는지, 커다란 현관을 지나 짧은 복도를 지나면서 만난 잠금장치만 세 번이었다. 덕분에 현민은 진짜 이런 곳에 그 성격 확실한 이연우가 있는 게 맞나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불안은 썩 오래가지 않았다. 머잖아 제가 정말로 이연우의 거처에 도착했다는 것을 매우 직접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진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앞서 걷던 경호원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덕분에 별거 아니라는 듯 얼른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는 눈가가 약간 떨렸다. 저 경호원은 약을 먹거나 해서가 아니라, 진짜 베타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보란 듯이 날 선 페로몬으로 뒤덮어놓은 걸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는 없을 거다.
극우성도 정도껏 이어야지!
유현민은 왠지 속이 매스꺼울 정도로 답답해졌다.
솔직히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나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같은 알파의 짙은 페로몬은 거부감밖에는 안 된다. 경호원은 현관을 지나 얼마 가지 않은 자리에서 멈춰 서더니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쪽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에.”
“……웬만하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현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CCTV라도 있나, 하고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이연우의 집은 대체로 무채색의 아이템들이 딱딱 보기 좋게 어우러진 조금은 허전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한 공간이었다. 현민은 그 세련된 내부를 눈으로 훑으며 얼른 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여길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는 법이다.
“대체 저쪽이 어디냐고요.”
유현민은 거실에서 세 갈래 길로 갈라진 복도 입구에 서서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생겨먹은 집이어서야 경호원이 말한 ‘저쪽’이 어딘지 알 길이 없다.
아무리 허락을 받고 들어왔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을 하나하나 열고 확인하는 것도 영 껄끄럽다. 이건 뭐, 마음만 같아서는 두더지 게임을 하듯 이연우가 뿅 하고 나타나 줬으면 좋을 지경이었다. 이 정도 덕을 쌓고 있으면 한 번쯤은 하늘이 도와줘도 되는 거다.
현민은 제법 뻔뻔하게 생각하며 가장 가까운 문부터 슬쩍 노크해 보려고 했다.
“-형?”
“으어억! 악!”
하지만 오늘, 하늘은 그런 유현민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모양이었다.
가장 안쪽 굳게 닫혀 있던 문 하나가 갑자기 발작적인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다소 거친 방식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현민은 갑자기 튀어나온 장신의 인영을 향해 들고 있던 서류첩을 거의 내동댕이치며 커다란 괴성을 내질렀다. 덕분에 대충 만든 가짜 업무 서류가 바닥으로 한껏 흩날렸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 같은 통에 그걸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었다.
“…….”
“…….”
……그리고, 아마 그건 복도 끝 저만치에 서 있는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실 여기가 이연우의 집이고 그의 향이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짙게 배어 있지 않았다면, 현민은 저 앞의 극우성 알파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현민의 기억 속에서 이연우는 늘 깔끔하다 못해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가끔은 안경을 걸치고 있기도 했지만, 그때마저 콧대에 눌린 자국 하나 없었다. 편한 사복 차림을 본 건 딱 두 번이었지만 그나마도 모두 태호 때문이었다.
저렇게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잔뜩 구겨진 셔츠를 걸친 이연우는, 정말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잘 실감이 안 났다. 유현민은 여전히 놀람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먼저 입을 연 건 저만치에 서 있는 알파, 이연우였다.
“뭐야?”
“……예?”
이 집 사람들은 하나같이 짤막하게 말하는 게 버릇이라도 되는지, 문장 요건이 영 부실했다.
덕분에 유현민은 몇 초간 눈만 멀뚱멀뚱 뜬 채로 무표정한 사내의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분명 이연우는 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찌나 가라앉은 눈이던지 현민은 왜 그러냐는 물음은커녕 숨소리도 크게 못 냈다.
왜 그러지. 나 뭐 실수했나? 혹시 소리 질러서 열 받았나?
현민은 제가 내던진 서류가 흩어져 있는 바닥을 보며 궁지에 몰린 머리를 빠르게 팽팽 회전했다.
차라리 전처럼 저를 노골적으로 흘겨보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편할 거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사내는 기묘할 정도로 차분한 표정을 한 채였다. 그 때문일까.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이연우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는, 현민은 저도 모르게 어깨까지 움찔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연우와의 거리가 좁아질수록 왠지 금방이라도 목덜미가 잡아 뜯길 것 같은 저릿한 긴장감이 들었다. 분명 저와 체격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사람인데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이건 단순히 페로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드디어 열 걸음 정도가 남았다.
현민은 그게 꼭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뭐지? 왜 저래? 진짜나 한 대 맞는 거 아냐? 이연우는 서서히 가까워졌다. 아홉 걸음. 여덟 걸음. 일곱 걸음. 여섯 걸음.
궁지에 몰리면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된다고 했던가. 그 순간, 유현민은 기적적으로 눈앞의 남자가 말하며 뛰어나온 단어와 제 자신의 상태를 연결하여 사고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속에서 저절로 욕이 터졌다.
‘아. 씨발!’
현민은 그제야 허겁지겁 제가 걸치고 있던 얇은 여름 카디건을 벗었다. 각인으로 잔뜩 감각이 예민해진 알파가 잠시나마 저를 ‘형’으로 착각하고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대체 그 망할 ‘형’이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바로 이 옷의 주인이다.
하나하나 고심해서 챙겨 온 다른 물건들도 그 착각에 열심히 부채질해 줬을 거다.
……3주 넘게 못 봤다고 했던가?
틈만 나면 연락하고 만날 때도 제 오메가와 있는 저를 그렇게나 잡아먹을 눈으로 바라봤던 이연우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이나 떨어져 있던 연인의 향이 듬뿍 나는 다른 알파를 보면서, 각인까지 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사내가 대체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지 감도 안 왔다.
임태호의 카디건을 벗은 건 정답이었는지, 점차 거리를 좁히던 이연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현민은 저와 이연우 사이에 남은 다섯 걸음이 그렇게 안도로 다가올 줄 몰랐다.
그때, 무표정하지만 고운 얼굴을 한 알파의 팔이 현민 쪽으로 쭉 뻗어졌다.
유현민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태호의 카디건을 엉겁결에 얼른 건넸다. 물론 그 짧은 와중에도 혹시라도 손이 스치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다. 기억보다 약간 인상이 날카로워진 이연우는 자신이 건네받은 카디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 보드라운 옷감에 가볍게 고개를 묻었다. 그건 스침 하나하나가 눈에 박힐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조금은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왠지 입을 맞추는 것도 같았다. 현민은 그 짧은 평화 동안 작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말랑말랑한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눈을 감고 태호의 옷에 나른하게 얼굴을 기대고 있던 극우성 알파의 갈라진 목소리 때문이었다.
“2년 전엔가.”
“…….”
“생일 선물이었어.”
유현민은 이연우와 시선이 다시 마주친 그 순간, 정말 진심으로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네가 미쳤구나. 이걸 입고 들어와?”
저 봐, 눈이 맛이 갔어. 완전 갔어!
역시 재벌가와는 엮이면 안 된다. 그래 봤자 평탄한 인생만 꼬인다.
현민은 속으로 ‘헝헝헝’하는 울음을 삼키며 저를 찢어발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급하게 몇 발짝 물러났다. 이제 이연우와 유현민의 거리는 여덟 걸음이 됐다. 현민은 세상에 살며 그렇게 살벌한 팀장이 그리워질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혀, 혀, 형님. 연우 형님! 진정하십쇼. 진정요. 그거, 태호 형한테 빌린 거예요. 형님 드리려고요.”
“왜 하필, 또, 네가 들고 오는데?”
……어우 씨발!
현민은 형님, 형님 하고 바짝 기면서도 속으로는 진심 어린 대답을 토해 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저는 이상할 정도로 전적이 화려했다.
처음에는 한밤중에 완전히 취한 임태호와 함께 있는 채로 만났고, 두 번째는 이연우한테 못하는 진심 가득한 말을 대신 들었으며, 그다음으로는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고백도 제일 먼저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걸로 모자라서 하필 임태호의 향을 주렁주렁 달고 이연우를 만나러 오는 임무까지 맡았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다 이유가 있지만, 모든 걸 다 모아 놓고 보면 이건 그 어떤 연인이 봐도 수상한 새끼가 분명하다. 이연우가 스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걸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하게 된다.
“연우 형님, 제발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제가! 제가아! 목숨 걸고 들고 온 게 있어요.”
실은 목숨까지는 안 걸었다.
그냥 이현 빽으로 경호원들 눈을 피해 노트북 하나 들고 온 게 다다. 이연우는 유현민이 가방에서 꺼내는 노트북을 보며 그 사실을 정확히 지적했다.
“노트북에 목숨 걸 거면 그냥 지금 죽자.”
“형님,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요! 태호 형! 임태호! 임태호오!”
이 사람, 이러는 거 태호 형도 알아?
유현민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로 다섯 걸음으로 가까워진 이연우를 멈출 유일한 단어를 급하게 쏟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무표정한 얼굴을 한 알파는 그 말에 곧바로 반응했다.
현민은 이 기회를 놓쳤다간 이 살벌한 집구석의 사람들이 아니면 아무도 방문한 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변을 당해도 아주 끔찍한 변을 당하리라는 위기감에 찼다.
덕분이라면 덕분에, 노트북을 열어서 혹시 몰라 내 문서 깊은 곳에 숨김 파일로 저장했던 문서를 여는 데에는 한 치의 지체도 없었다. 유현민은 화면을 가득 채운 노트북을 그대로 이연우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연우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다.
“임태호, 뭐.”
바로 요 몇 주간 제대로 된 연락 한 번 할 수 없었던 제 연인의 안부다.
하지만 현민은 그 싸늘한 물음에 대답 대신 노트북 화면으로 ‘요기, 요기.’ 하고 한껏 공손하게 눈짓했다. 유현민이 애지중지하는 하얀 노트북에는 관심조차 없던 이연우는, 그제야 슬쩍 이맛살을 찌푸리며 흘끗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분명 별거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유현민은 딱 3초 만에 생명연장의 꿈을 이뤘다.
[연우야, 안녕.]
액정을 가득 채운 하얀 바탕 위에 쓰인 단 다섯 글자의 힘은 위대했다. 이연우는 순식간에 유현민의 손에서 노트북을 낚아챘다. 덕분에 현민은 그 거친 손길만큼 진심 가득한 욕을 삼켰다.
아니, 아직 할부금 갚고 있는 걸 저딴 식으로 가져가냐!
“……씨발, 함초롬바탕…….”
각인이라는 건 컴퓨터 폰트까지 사랑하는 거구나. 미쳤다, 미쳤어.
유현민은 그 병적인 애정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런 현민의 표정이 애정에 눈먼 알파에게 보일 리 없었다. 이연우는 함초롬바탕체에 줄 간격 180퍼센트로 또박또박 쓰인 임태호의 전자 편지를 한 줄 한 줄 읽기 시작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가족들하고도 잘 있을지 걱정이야. ……아니라면, 꼭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손글씨로 적힌 것도 아닌데 왠지 제 연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태호의 걱정 가득한 문장은 구구절절 이어졌다. 거기에는 이연우가 몰랐던 사실들도 있었다.
이연우는 ‘사실, 나 얼마 전에 회사도 나왔어. 연우 네가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해. 내가 선택한 거거든.’이라는 부분에서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 그 순간 가여운 평사원 하나는 재벌 3세의 손에 들린 제 2개월 된 반짝반짝한 새 노트북에 흠집 하나라도 더해질까 조마조마한 눈을 했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자 편지의 내용은 연우가 그리워하다 못해 꿈까지 몇 번 꿨던 너무나 사랑스러운 일상으로 바뀌었다. 더위에 약한 그를 걱정하는 부분에서는 살짝 입꼬리까지 올라갔다.
하나, 여기서 이연우가 간과했던 게 하나 있다. 바로 편지는 대체로 머리말, 본론, 꼬리말로 구성된다는 사실이었다. 마침 안부를 묻는 머리말이 끝났다.
[……있잖아. 내가 정말 많이 생각을 해 봤어.]
보통 이런 단호한 줄 띄움 다음에 이어지는 서두는, 대개 불행의 시작이다. 심지어 앞에 콕콕콕 찍은 말줄임표까지 있는 경우는 내용 전환을 확실하게 암시한다.
알맹이야 어찌 되었건 고등교육의 산물인 이연우는, 그 문장을 읽자마자 순간 확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라서 노트북을 세게 내리 닫았다. 물론 그 거센소리에 유현민의 심장도 함께 내려앉았다.
“야.”
“……예에. 형님.”
하지만 이연우의 ‘갑’은 임태호지, 유현민이 아니다.
“일곱 번째 줄부터 읽어.”
아니 뭐 이제 하다 하다 이딴 걸 시키냐!
현민은 저를 향해 도로 노트북을 건네는 연우를 보며 반사적으로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그 경악과는 달리 손은 착실하게 제 노트북을 다시 받아 들었다. 묘하게 귀족을 모시는 시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 찝찝하기는 했지만, 차라리 이게 노트북에는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흠, 흠. ……있잖아. 내가 정말 많이 고민을 해 봤어.”
사실 유현민도 임태호가 남긴 이 문서를 읽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괜히 애인끼리 주고받는 말을 제가 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일부러 열어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뭐 이렇게 대신 읊게 되어서야 그 노력이 영 쓸모가 없어진 셈이다.
현민은 혹시라도 눈앞의 변덕스러운 사내를 거스를까 싶어, 그 나름대로 최대한 태호 특유의 나직하고 조곤조곤한 어조를 살려 말을 이었다.
“늘 항상 먼저 와 주고,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웠어.”
“…….”
“그런데…….”
“-잠깐만. 거기까지!”
나름대로 감정 이입해서 읽고 있던 현민은 그 조금은 매섭게 들리는 목소리 덕분에 순간 혀까지 깨물 뻔했다.
덕분에 고작 두 줄 읽었는데 왜 또 멈추라는 건가 싶어서 약간은 심통도 났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울컥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던 유현민은, 맑은 갈색이라 가끔 ‘네 눈은 소 아니면 개과야.’라는 말을 들었던 큼직한 눈을 느리게 깜박이게 됐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뻔뻔하리만치 살벌하고 당당하게 저를 협박하던 사내라고 하기에는 참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형님?”
“…….”
심지어 이연우 그는, 저를 부르는 유현민과 눈을 마주치려고도 들지 않았다.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인 얼굴은 뭔가 거북한 것 같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초조해하는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 순간 유현민은 이연우가 알게 된다면 저를 노려볼 문장을 떠올리고 말았다.
겁과 이성을 상실한 입이 정말 반사적으로 툭 움직인 건 그때였다.
“……헤어지자는 소리 아닌데?”
실로 착한 스포일러였다.
“지, 진짠데요!”
“…….”
“진짜. 정말로요…….”
유현민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살짝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던 이연우는, 작게나마 움찔하더니 흉흉하게 빛나는 눈을 들어 제 정곡을 찌른 신입 사원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현민은 그 냉랭한 표정에 담긴 ‘거짓말이면 죽는다.’라는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읽어내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유현민의 낭독은 몇 번의 헛기침 뒤에 다시 시작됐다.
“흠, 크흠. ……그런데. 한 달 가까이 너 기다리다 보니까, 실은 방금 이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 사실 나도 좀 신기해.”
현민은 이걸 쓰던 태호의 표정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 이 후반부가 그 동글동글한 얼굴을 한 형이 세상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했던 때였을 거다. 클라이맥스를 앞둔 유현민은 다시 한 번 목을 가다듬더니,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을 이었다.
“연우야, 무리해서 올 필요 없어.”
그리고 그 문장은 현민의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연우의 공격을 받았다.
“야, 그거 아니라며!”
“……예? 아아, 안 헤어져요. 안 헤어져! 진짜예요!”
겨우 유지하고 있던 다섯 걸음의 거리가 확 좁혀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현민은 그 가까워진 거리가 주는 위압감보다, 이제는 초조함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극우성 알파가 급하게 제 노트북을 빼앗아 가는 모습에서 느끼는 통쾌함이 조금 더 컸다. 어쨌거나 늘 말을 전해 들으며 일방적으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인 이연우였기 때문이다.
“보십쇼! 그쵸?”
급한 표정으로 연인의 마지막 문장을 훑는 극우성 알파의 귓가로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꽂혔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 조금은 건방진 어조에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읽은 그 짤막한 몇 글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꽉 찼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거 살벌하시네! 진짜.”
“…….”
“태호 형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데요. 계속 우리 연우, 우리 연우 하면서 아주 그냥 제가 형님이었으면 아마 감동받아서…….”
[이번에는 내가 갈게.]
솔직히 얼마나 찡했는지 모른다.
저 같았으면 아주 이놈의 집구석,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헤어지자고 했을 텐데 이 순하기 짝이 없는 형은 그 와중에도 이연우의 걱정뿐이었다.
사실 막말로, 각인한 이연우쯤이야 이제 손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유현민은 왠지 멍한 표정이 된 이연우를 보며 더욱 힘을 얻어서 한껏 말을 이어갔다. 이참에 여태껏 꾹 눌러왔던 설움을 조금이나 털어낼 작정도 조금쯤은 있었다.
“유현민.”
“……예.”
하지만 힘없는 신입 사원의 행보는 거기까지였다.
현민은 고작 이름을 부른 것 하나로 대나무가 꺾이듯 그 기세가 잠잠해졌다. 발끝부터 일렁이며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페로몬에 입이 바짝 말랐다.
아. 너무 깝쳤다.
사실 꽤 낯을 가리는 편인데도 눈앞의 저 고운 알파에게는 저도 모르게 말이 좀 편해지고 말았다. 이연우를 향한 연애 상담부터 일상까지 몰래 들어오면서 얻은 일방적인 친근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정보가 너무 많은 탓이었다. 이연우의 목소리는 천천히 이어졌다.
“너, 이현이랑 같이 왔지?”
마치 한숨처럼 나직한 문장이었다.
덕분에, 현민은 몇 박자 늦게 ‘예, 예에.’하고 멍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목소리만큼 멍하게 황당한 표정이기도 했다. 한동안 노트북 액정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이연우는, 곧바로 긴 숨을 토해 내며 눈을 감고 뒤로 목을 젖히느라 그런 현민을 보지 못했다.
올이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그린 듯한 얼굴을 타고 가볍게 흘러내리는 나른한 모습은, 오늘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살벌한 얼굴을 한 채 저를 죽일 듯 굴던 사내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가서 전해.”
“……”
“사실 성질 같아서는.”
하지만 저 극우성 알파는 유현민이 아는 한 고아한 얼굴과는 영 거리가 먼 말만을 주로 하는 사내다. 현민은 왠지 그 간지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바짝 긴장한 채로 숨소리마저 죽였다.
언제나 듣기 좋던 이연우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낮게 갈라진 채였지만, 그건 한편으로는 지금의 느슨한 모습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런 유현민의 걱정 아닌 걱정은 머잖아 현실로 이어졌다.
“…이현, 네 오메가가 다리 벌리는 꼴 볼까 싶었는데.”
가까스로 꾹 닫혀 있던 유현민의 입에서 기어코 ‘허어억!’하는 큰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무슨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냐, 저 사람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의 등장에, 현민은 차마 토해 내지 못하는 볼멘소리를 속으로 쏟아냈다.
하지만 느긋하게 눈을 감은 이연우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게 생각보다 예쁜 짓을 하길래 봐 드리는 거니까……. 앞으로 관리 잘해 주시라고.”
덕분에 잠시 얼이 빠진 채로 대답 없이 있노라니, 곱게 내려앉아 있던 이연우의 눈꺼풀이 가늘게 뜨였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노래하듯 흘러나온 흉흉한 문장과는 달리 퍽 즐거워 보이기까지 해서, 현민은 일순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연우는 유현민이 처음 보는 나긋한 목소리로 연이어 채근했다.
“……응?”
“아! 예, 예에. 알겠습니다. 예.”
현민은 왠지 소름까지 돋을 정도로 바짝 얼어붙은 채 필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대체 이연우가 저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저 사내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점점 숨이 막히고 목이 따가울 정도로 짙어지는 극우성 페로몬 역시 그런 위기감에 한몫했다. 왠지 머릿속에 붉은 경고음이 마구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 묘한 위압감은 거기까지였다.
이연우는 일부러 따로 챙겨 줄 필요도 없이 현민이 들고 온 것 중에 제 연인의 물건만을 용케 찾아 챙겨 들고는 그가 뛰쳐나왔던 방으로 휘청이듯 몸을 돌렸다. 정말 그게 다였다.
달칵.
유현민은 이연우가 문을 닫는 걸 확인하자마자 크게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왠지 온몸의 피가 발아래로 확 몰리는 것 같았다. 그다음은 조금 기억이 흐릴 정도로 급했다. 현민은 허둥지둥 제 가방과 노트북을 들고 말 그대로 튀어나왔다.
저를 기다리던 경호원까지 몇 걸음 앞질러 후다닥 이연우의 건물을 빠져나오니, 마치 끈적끈적한 수렁에 빠져 있다가 처음으로 공기를 만난 사람처럼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팀장님!”
세상에 저만치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내가 이렇게 반갑게 보일 줄은 정말 몰랐다.
유현민은 가방을 끌어안은 채 얼른 이현 쪽으로 뛰어가다가 탁한 담배 연기에 잠시나마 살짝 눈을 찌푸렸다. 담배를 몇 개비씩이나 연이어 태우면서 기다리던 남자는, 그 순간을 분명히 봤다. 이현은 제가 들고 있던 장초를 짓이겨 끄면서 그 부름에 낮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던데.”
“진짜 이거 다시는 안 할 겁니다!”
“설마 이 난리를 또 칠까.”
현민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이현의 짤막한 목소리에 왠지 묘하게 젖은 눈이 됐다. 분명 객관적으로는 조금 전 들었던 이연우의 나긋한 문장들이 훨씬 더 상냥한 쪽에 가까울 텐데도 차라리 이쪽이 더 낫다 싶어서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뭡니까?”
제 신입 사원의 변화를 곧바로 눈치챈 이현은, 빈틈없이 유현민의 대답을 추궁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내 시달리고 나온 현민은 그걸 빠져나올 재량이 없었다. 결국 유현민은 머뭇머뭇 제가 들은 문장을 순화하여 전하기 시작했다.
“이연우 팀장님께서요.”
“네.”
“……그…… 흠, 흠. 연인분과 오래오래 잘 지내시라고…….”
“…….”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해. 현민은 자신의 편집 능력에 속으로 자화자찬하며 말을 맺었다. 그 험악한 문장을 이렇게 예쁘게 바꿀 수 있다니, 사실 저는 홍보팀에 배정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건 이연우가 홍보팀에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역시 난 지금이 좋아!’로 바뀌기는 했다. 하지만 현민은 아직 남은 고비가 하나 더 있었다.
“유현민 씨, 이연우가 했던 말 그대로 해 보세요.”
“……예?”
“괜찮으니까, 빨리.”
바로 피도 눈물도 없이 냉랭한 팀장 이현이었다.
유현민의 노력 따위 전혀 모르는 그는, 잠시 그답지 않게 뚝하니 멈춰 선 채 있더니 어쩜 현민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문장을 곧바로 힘주어 내뱉었다. 그 탓에 유현민은 얼굴 가득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쩔쩔맸다. 전해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 이런 걸 말해도 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현은 유현민의 곤란한 얼굴에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삐딱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결국 현민은 ‘에라, 미친 재벌들아!’하고 속으로 울면서 어울리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사, 사실, 기분 같아서는…….”
“…….”
“다리…….”
어떻게든 말문을 뗐는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을 숨을 삼키던 현민은, 눈 딱 감고 다정하게 흘러나왔던 그 상스러운 문장을 줄줄 이어갔다. 좋게 잘 포장해서 말해 줬더니 기어코 말하라고 몰아붙인 건 이현 쪽이다.
“네 오메가 다리, 벌…리는…꼴, 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예쁜 짓을 해서, 봐주지만.”
“…….”
“……앞으로 관리 잘하시라고…요.”
이현은 말수가 극도로 적다. 그만큼 웬만해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도 드물다.
가끔 회사에서 ‘아, 이 정도면 진짜 열 받겠는데?’ 싶은 상황에도 예의 그 냉랭한 얼굴을 한 채로 명령하는 정도가 다다. 신입 사원인 현민이 제 팀장을 더욱 어려워하는 이유에는 그런 점도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혼낼 땐 혼내고 가까워질 땐 가까워지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겠는데, 금방이라도 몇 명 쏴 죽이고 온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매번 ‘유현민 씨!’라고 하니, 이건 뭐 공포의 상사 그 자체다.
하지만 현민은 지금 이 순간 제 직속 사수조차 듣지 못한 이현의 나직한 욕을 들었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게다가 그 낮은 목소리 끝은 분명히 ‘씹’ 비슷한 단어로 끝났다.
현민은 저 사람도 욕을 하는구나 싶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긴 베타 사내라면 누구라도 열 받을 소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놀람에 잊고 있던 작은 호기심이 감히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저거, 다시 말하면 사귀는 오메가가 있다는 거잖아!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만나, 저런 사람을?
이건 뭐 완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어디 가서 이현이 사귀는 오메가가 있다는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대형 사건이다. 현민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알만 빼꼼히 돌려 제 옆에서 작게 씨근거리고 있는 사내를 슬쩍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현은 제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주먹에 힘을 줬다가, 풀었다 하며 열 받은 걸 쉽게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현의 지금 감정은 열 받은 것보다는 당혹이 좀 더 컸지만, 현민이 거기까지 알기는 어렵다. 당장 제 사촌 동생의 집으로 들어가 뒤통수라도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을 다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나오려던 한숨을 잠시 짧게 삼키고는, 꾹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갑시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은 언제나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법이다. 지금처럼 심란할 때면 더욱더. 그 법칙에서는 제아무리 이현이라도 자유롭지 못했다.
“……저, 팀장님.”
“네.”
이현은 자신을 조심스럽게 부르는 유현민의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예상하지 못했던 표정을 하고 있는 신입 사원의 얼굴에 정말 그답지 않게 멍한 눈이 됐다.
“파이팅!”
그 초롱초롱한 맑은 갈색 눈동자라니.
이현은 유현민이 그런 표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정말 처음 알았다. 게다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얼굴에 담긴 선명한 뜻도 읽을 수 있다. 저건, 어딜 봐도 ‘짜식. 너도 사람이구나!’하는 기특한 눈이다.
지금, 저는 분명 유현민에게 ‘기특하다’는 격려를 받은 거다. 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현민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신이 나서 먼저 총총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늘씬한 인영은, 그런 제 팀장님의 표정 따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작게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삼키기에 바빴다.
쉬운 연애는 없다.
그건 집 안에 처박힌 채 자신의 기사를 기다리는 나이트에게도, 눈앞에 먹잇감을 두고도 손쓰지 못하는 룩에게도 마찬가지인 법이다.
◈◈◈
임태호는 유현민을 통해 짧은 메시지를 보낸 이후로 매일같이 약국을 간다.
그것도 못해도 다섯 군데는 더 넘게, 컨디션이 좀 좋을 때는 열 군데도 간다. 게다가 이 부지런한 방문에는 나름의 대전제까지 있다.
바로 될 수 있는 한 처음 가는 동네의 처음 가는 약국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은 어쩔 수 없이 갔던 곳을 재방문하게 된다면, 적어도 며칠은 지난 곳만을 가야 한다.
태호는 약을 끊은 지 딱 한 달하고 스무 날째인 오늘, 잔뜩 떨리는 속을 달래며 딱 열 번째 약국 문을 열었다. 이곳은 왠지 좀 마음이 급해져서 택시까지 타서 움직인 오늘의 마지막 방문 장소였다. 태호는 약사가 저를 향해 뭐라 인사말을 던지기 전에 숨을 크게 삼킨 뒤 먼저 입을 열었다.
“억제제 좀 주세요.”
“네, 본인이 드실 거예요?”
“……예.”
약사는 임태호를 한 번 흘끗 보고는 곧바로 자신이 있던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태호는 그 움직임을 좇아 눈을 가늘게 떴다. 약사가 고르는 약이 무엇인지 정말 몇 초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약사가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상자를 본 임태호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2주 드실 수 있고요.”
“…….”
“부작용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제일 약한 거예요.”
태호는 저를 향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가는 문장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다가, 얼굴을 쓸었다가, 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묘한 변화를 깨닫지 못한 약사는 그 작은 상자를 봉투 안에 담으며 주의사항을 쭉 읊었다.
“전에 드셔 본 적은 있으세요?”
임태호는 제 자신이 스스로의 페로몬을 잘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억제제를 끊은 다음에야 알게 됐다. 그건 마치 익숙했던 언어를 오래 사용하지 않아 잊은 것처럼, 한때 알았던 기억만 있을 뿐 그 의미는 증발한 것과 비슷했다.
어떻게 보면 악재에 악재가 겹친 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억제제 장기 복용의 후유증으로 페로몬이 불안정한데, 태호는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했다. 그는 제 미약한 향이나마 어떻게 열고, 또 거둬야 하는지 몰라 쩔쩔맸다.
객관적으로 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물을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연락되는 믿을 사람이라고는 유현민 정도인데, 아무리 그래도 알파에, 끼친 폐도 이만저만이 아닌 사람을 불러 제 상태를 확인하도록 하는 게 뻔뻔한 짓임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혼자 집 안에서 끙끙 앓던 태호는 그의 삶에서 가장 익숙하고 또 안전한 장소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바로 약국이었다.
태호는 저를 철저히 낯선 손님으로만 대할 타인이자 전문가의 시선을 믿기로 했다. 그건 꽤 믿음직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태호를 꽤 초조하게도 만들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서너 군데의 약국에서는 영 긴가민가한 얼굴로 ‘억제제? 알파 거요, 오메가 거요?’하고 물었고, 어제는 두 곳에서 ‘누구 거 사다 주는 거예요?’ 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단 한 군데의 예외도 없었다.
“……손님?”
“아, 아아. 아니, 어. 음, 죄송합니다! 다음에 올게요!”
임태호는 오늘, 처음 가는 열 군데의 약국에서 그 어떤 따라오는 질문도 없이 오메가 전용 억제제를 주문하는 데 성공했다.
억제제 후유증으로 페로몬이 널뛰기하는 상태라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누가 봐도 의심하거나 고민할 여지 없이 오메가였던 것이 분명했다. 아니, 페로몬의 흐름이 뒤죽박죽 엉망이 된 통에 운 좋게 가진 것보다 더욱 강한 향을 흘렸던 것도 같다.
임태호는 꼭 뭔가를 잘못한 사람처럼 약국을 뛰어나와 그 바로 옆으로 꺾이는 코너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방금 전 제가 들은 말을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곱씹었다.
……억제제를 먹어 본 적 있냐니!
이연우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 동안 임태호는 자신이 오메가로, 그것도 열성 오메가로 보이게 된다면 과연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몇 번이고 상상했었다. 유현민이 제 옷가지며 물건을 몇 개 챙겨 갔던 날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자신의 향이 궁금해져서 괜히 이불에 고개를 처박고 스스로는 자각하지도 못할 페로몬을 맡으려고도 해 봤다.
오늘따라 하늘은 유독 파랗고, 날은 살짝 후덥지근했고, 햇볕은 뜨거웠다.
약을 저만치로 밀어두던 날 막연하게 상상했던 지금은, 사실 조금 더 거창하고 요란했다. 아니, 오메가로 발현하고 베타의 삶을 선택했던 때부터 임태호에게 오메가라는 건 이렇게 일상적이고 평온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조금은 무섭다. 아니, 정말 많이 떨린다.
임태호의 눈이 저절로 습관처럼 차고 다니는 시계로 향했다. 세 시 반. 어떻게 보면 이르지만, 한편으로는 무엇을 새로 준비하기에는 살짝 촉박한 시간이었다. 임태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연우와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한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긴장 때문인지 유달리 연인의 근황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처럼 용기가 필요한 때 그 바람은 그다지 좋지 않은 생각일지도 몰랐다.
임태호 그의 애정과 용기 가득한 ‘전자 편지’ 이후 성안에 갇힌 나이트의 상태는 그다지 썩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이번에는 내가 갈게.]
처음에는 이보다 더 설렐 수 있는 문장은 없었다.
이연우는 고작 한두 번 읽은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새겨진 그 짧은 글줄 몇 개를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리며 혼자 한참을 웃었다. 임태호의 말처럼 언제나 먼저 다가갔던 건 이연우였다. ‘선배 어디예요?’ 는, 이연우 그가 임태호와 8년을 함께하며 가장 자주 했던 말 중 하나다.
아니, 사실 태호의 위치를 확인하는 건 대학 때부터 무의식중에 자리 잡기 시작한 그의 버릇이나 다름없다.
참 뭐라 이름 붙이기 모호한 낭만 같은 호감을 품고 다가갔던 스무 살. 이연우는 임태호와 서로의 시간표를 공유한 그다음 주 내내 저보다 다섯 살 많은 선배의 연락을 기다렸었다. 이제 서로 연락할 구실도 생겼으니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언제 시간 되냐고 물어보지는 않을까.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상상했다.
일부러 임태호의 하루가 끝나는 건물 주변을 얼쩡거리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교수가 한 시간이나 더 빨리 끝내준 전공 강의실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기도 했다. 공강에도 휴대폰을 손에 꼭 붙들고 몇 분 단위로 확인하며 침대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유일한 제 대학 멘토가 된 남자는 한 주 내내 얼굴을 마주치기는커녕 전화 한 번, 문자 한 통 없었다.
솔직히 좀 기가 찼다. 자존심도 상했다.
내가 지금 일주일 동안 뭘 한 건가, 대체 이게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멍청한 짓이지 싶었다.
그래서 딱 그 주의 일요일 밤, 스무 살의 이연우는 스물다섯 살의 임태호에게 조금은 열 받은 채 전화했었다. 망할 선배는 그마저도 좀 늦게 받았다. 덕분에 저절로 뾰족한 말투가 튀어나왔던 것도 같다.
『선배. 많이 바쁘셨어요?』
『……이연우?!』
정말이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 전화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연우는 좀 울컥하려는 걸 꾹 참으며 최대한 차근차근 대답하려 애썼다. 솔직히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갔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게……, 전화할 줄 몰랐어.』
군 복학을 하고 아직 머리가 다 자라지 않아 뾰쪽한 두상에 조금은 흐리멍덩하게까지 보이는 자신 없는 이목구비. 틈만 나면 긴장으로 벌겋게 변하는 얼굴은 솔직히 좀 멍청해 보였고, 말이 고학번 선배지 학과 내에서 만인의 밥처럼 대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남자.
그게 임태호였다.
『내일 점심 공강이시죠?』
『어? 으응.』
그런데 대체 왜.
살다 살다 와, 저거랑 뒹굴어보고 싶네, 하던 사람한테도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을까. 연우는 입 밖으로 한 글자씩 느리게 문장을 내뱉으면서도 자꾸만 자신의 행동을 의심했다.
『……같이 식사하실래요?』
어쩌면 그건 이연우가 자각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에게 한 첫 데이트 신청이었을 거다.
스무 살이었다.
이연우의 감정은 그렇게, 스무 살에 시작했다.
설령 처음부터 대단한 애정의 빛깔이 아니었을지라도, 어느 쪽으로든 쭉 나아갔던 그 마음은 그렇게 이연우 그가 직접, 처음으로 그 스스로 문을 열었었다. 그렇게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칠 일 없을 임태호를 위해 망설이면서도 그의 무릎 한쪽을 굽혔다.
뭐든 시작이 어렵고 그다음이 쉽다고 했던가, 그 말은 정말 맞았다.
살며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먼저 눈웃음치고, 예쁜 단어를 엮어 말을 걸고, 살갑게 손을 건네는 행동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잠시, 얼마 안 가 그건 단 한 사람을 위한 특권이라는 이름표를 걸고 전보다 더욱 당당하다 못해 편안해졌다.
다른 사람을 쉽게 곁에 두지 않는 태호가 저를 누구보다 반짝이는 선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못내 좋았다. 그래서 임태호에게는 더욱 예외를 뒀다. 그러면 그럴수록 임태호가 저를 더 예뻐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그 흐린 눈에 묘한 뿌듯함이 엿보였으니까.
연인이 된 후로도, 감히 감정을 내놓는 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하거나 꿈꾸지 않았었다.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이 먼저 시작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처음으로 임태호가 먼저 다가오겠노라고 제 귓가에 속삭이듯 연락해 왔다.
그걸 전해 주러 온 사람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지만, 그 내용이 모든 것을 다 용서하게끔 했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 태호에게 찾아갈 생각만 했었는데, 반대로 임태호가 나를 찾아온다니! 언제나 내뱉은 말은 꼭 지키려는 성격이라, 이렇게 갈라지기 전에 했었던 회사로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이어 지키려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날부터 이연우의 생활은 꽤 달라졌었다.
얼마 안 되는 문장 중에서도 몇 번을 거듭 물었던 ‘잘 지내고 있냐’는 말을 지키려는 듯, 마시던 술을 끊고 식사를 챙겨 먹기 시작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무리해서라도 저택을 빠져나가려던 위험천만한 시도를 뚝 그쳤다.
솔직히 이연우의 가족들, 특히 회장 부부는 그런 막내의 변화를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틈을 엿보는 것으로 의심했던 쪽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밝아진 모습을 몰라볼 정도로 무심한 부모도 아니었기에, 그들은 반신반의하며 이연우의 경계를 살짝 풀었다.
연인의 가슴 설레는 연락을 받은 이연우는 실제로도 잠시나마 퍽 잘 지냈다.
저택을 나가겠다며 하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그만두니 종종 산책도 나갈 수 있게 됐고, 가끔은 그 스스로가 자진해서 본채로 넘어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는 했다. 그건 이연우의 각인을 지지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중립을 취하는 쪽도 모두 반가워할 소식이었다. 어쨌든 간에 그는 이 신화가 안에서 사랑받는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종일 연인의 생각을 하며 꼭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들뜬 채로 하루하루 날짜를 꼽던 이연우도, 그걸 지켜보며 걱정으로 초조한 속을 쓸던 가족들도 차마 몰랐던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기사담에서는 흔히들 제 사랑을 구하기 위해 역경을 헤치는 자의 고난을 주로 다룰 뿐 성안에 갇힌 자의 불안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신화그룹의 그 누구도, ‘나이트’가 저를 구하러 올 기사님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의 의미가 그리 클 줄 몰랐다. 그건 당사자인 이연우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마냥 낭만에 젖은 채로 제 연인을 떠올리다가 느슨해진 감시를 피해 문득 장난처럼 본채의 전화기를 들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임태호의 전화번호야 이미 언제 외웠는지 기억도 안 날 예전부터 꿰고 있었기에 망설일 새도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들을 제 연인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기대하며 조금은 떨기까지 했었다. 신호가 가는 소리보다 두근대고 울리는 심장박동이 더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설레는 결과는 꽝, 실패로 돌아갔다. 임태호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아. 아쉽다.’
이연우는 귓가에 남은 기계음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속으로 한참을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한 번 그렇게 기회를 엿보고 나니 잠도 잘 안 왔다. 자신을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진짜 딱 한 번만 임태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결국 그다음 날부터 이연우는 생전 해 본 적 없던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딱 일 분만이라도, 아니 그저 ‘여보세요?’하는 태호의 한마디라도 듣는 것.
딱히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정해 놓은 건 없었다. 조금은 멍청하게 ‘형 저예요.’ 하지 않을까 싶어 피식 웃었을 뿐이다.
이연우는 온갖 핑계와 틈을 노려 움직였다. 솔직히 몇 번은 고용인들이 알면서도 눈감아줬을 게 분명할 정도로 대놓고 전화기를 들기도 했고, 한 번은 퇴근하고 들어오던 제 형을 복도에서 붙잡아 구석으로 몰아서 휴대폰을 빼앗듯 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거의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이연우는 이전의 그 지독했던 탈출 시도 대신 임태호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는 똑같았다. 늘 꼬박 전화를 받던 연인의 휴대폰은 늘 예외 없이 꺼져 있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넘길 수 있었던 숫자가 더해질수록 얼굴에는 핏기가 가시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작은 벌레가 기어 올라왔다.
이연우는 그 검디검은 벌레를 다독이듯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올 거야. 온댔잖아?’
그렇지만, 그건 별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 작은 벌레는 무엇을 향한 것일지 모를 의심이라는 이름표를 달고서 천천히 단꿈에 젖었던 자신의 속을 갉아먹었다.
임태호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또 그만큼 정말로 조심스럽고 겁 많은 사람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차라리 권력욕이나 재물욕이 넘치는 편이었으면 좋다 못해 기뻤을 거다. 그랬다면 신화그룹 이연우라는 이름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타이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임태호는 그쪽과도 거리가 멀었다.
평소의 태호라면, 사실 이런 일과는 절대 얽히지 않으려고 했을 게 분명하다.
8년간 지켜봐 왔으니 잘 안다. 제가 없는 하루하루가 생각보다 더 편할 수도 있다. 벌써 한 달이 한참 넘었다. 여기서 일 년이 되고, 또 거기서 하루씩, 하루씩 더해지는 건 쉬운 일일 거다.
……임태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연우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흔히 그렇듯,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상을 했다.
전처럼 이곳을 빠져나가 찾아갈 시도조차 못 했다. 감히 이 신화가의 저택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임태호가 찾아오는 순간에 제가 없을까 봐 걱정됐고, 사실은 제 연인이 이미 함께했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알파는 진심을 담기는 했어도 강압이나 으름장과는 거리가 멀었던 오메가의 문장에 목을 맨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이제 베타 경호원 무리가 필요 없었다.
아니, 완전히 상황이 바뀌어 등을 떠밀어도 저택을 빠져나가지 않으려 들었다.
이연우의 일과는 잠깐의 봄날을 거쳐, 커튼을 친 어두운 침실에 처박혀 웅크린 채로 태호의 물건을 쥔 채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연인의 향을 좇거나, 본채의 창이 넓은 중앙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종일 저택의 저쪽 끝 출입문을 오가는 차를 지켜보는 게 전부가 되었다.
그런 막내아들을 보며 미칠 지경이 된 건 이주호 회장 부부였다. 요 근래 눈에 띄게 밝아졌던 이연우를 보며 제 아이만큼은 일방 각인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며 겨우 다잡고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사실 그들은 이연우가 탈출 시도를 그만두고 제대로 된 식사를 시작한 것을 보며 각인을, 그 하나의 감정적 종속이나 다름없다는 현상을 어느 정도 컨트롤하게 된 줄 알았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건 마음이 불편했지만 역시 잠시 떨어트려 놓는 게 맞는 일이었다며, 그들 자신의 선택을 한숨 쉬듯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고작 2주도 못 가서 가장 나쁜 형태로 박살 났다.
차라리 나가겠다며 창문을 깨고 경호원을 갈아치웠을 때가 나았다. 결국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건 성격 급한 이주호 회장이었다. 그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제 막내아들을 본채로 끌고 오도록 지시했다.
그는 이연우에게 아주 따끔하게 호통칠 생각이었다. 어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냐고, 정말로 네 그 선배라는 사람을 다시 보고 싶다면 똑바로 처신하라며 혼쭐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신화가의 호랑이로 불리는 그는 제 막내아들의 몰골을 보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건 그의 아내이자 이연우의 어머니인 박희원과 이민혁, 이연아 남매와 같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
이연우는 어디에 던져 놓아도 눈에 띌 것으로 생각했던, 그 겉모습만큼은 감히 흠잡을 데 없던 극우성 알파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좀 달랐다.
침실에서 질질 끌려 나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구겨진 옷차림이며, 뭘 제대로 먹지 않아 어지러운지 살짝 찌푸린 어두운 눈가까지. 솔직히 그 장신의 키와 눈에 띄는 이목구비로도 순간이나마 다른 인상을 주었다.
솔직히, 가족이 아니라 생판 남이었다면 그 이연우라는 걸 못 알아볼 정도로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아예 쉬어 쩍쩍 갈라지다 못해 듣기 좋게 낼 의지조차 없는 듯한 목소리는 그 낯섦에 더욱 한몫했다.
“……끌고 나와 놓고, 왜.”
“아예 죽을 생각이라고 써 붙이지 그러냐?”
호통치는 말투 속에 걱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주호 회장의 말에 이연우는 제대로 된 반응 대신 조금은 냉랭하게 웃었다. 뭐라 말할 여유도, 기운도 없는 탓이었다.
그 싸늘한 분위기를 지켜보던 이연아는 속이 체한 듯 답답해지는 기분에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연우의 각인을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던 쪽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이민혁은 그런 제 여동생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괜찮아?”
“오빠, 지금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못된 누나일지도 모르지만.”
“…….”
“난 진짜 저거 안 해.”
각인을 제대로 부르지도 않는 질린 어조에 이민혁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걸었다.
제 여동생이 이렇게 안팎으로 시작된 마음고생에 치이는 건 물론이고, 연우의 공백으로 생긴 업무량까지 맡아 진땀 빼고 있음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백한 안색의 이연우와 머리를 짚은 이주호 회장 부부, 무거운 표정의 남매들까지. 본채의 분위기는 그렇게 숨소리 하나 제대로 터지지 않는 수렁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똑똑, 하는 작고 주기적인 간격의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이주호 회장은 슬쩍 이맛살을 찌푸린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감히 끼어들어도 되나 싶은 표정을 한 채로 걸어온 보안팀의 사람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저에게 쏠린 하나같이 서늘한 시선들에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가, 괜히 왔다는 눈을 한 채로 얼른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뭐냐니까?”
“방문객이 하나 있습니다만. 조금……, 특이해서 보고 드리려고 했습니다.”
보안팀의 경호원은 제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괜히 말꼬리가 작아지려는 것을 겨우 담담하게 만들었다. 속으로는 언제 봐도 틀로 찍어 만든 듯이 차가운 그들의 인상에 혀를 내두르면서였다.
“이 시간에?”
“예. 그……, 택시를 타고 왔는데, 우선 정문 쪽에서 막고 있습니다.”
신화그룹 본가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등장이었다.
그 누구와의 약속도 없는 저녁 시간, 총수 가의 저택으로 택시를 타고 오는 낯선 방문객이라.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신화가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주 가끔 그런 이들이 있었다. 잔뜩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로 ‘재벌 새끼들 집으로 가자!’라고 하며 본가로 찾아오는 자들.
물론 그들은 여지없이 지금처럼 입구에서 잘렸다. 지금처럼 보고가 오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 택시를 타고 온 사람이, 술에 취하기는커녕 너무 멀쩡한 얼굴을 한 채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경호원은 그런 사실까지 구구절절 말하는 것 대신에 얼른 눈치껏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또, 이주호 회장 역시 그 비슷한 지시를 하려고 했었다.
“……나.”
조금은 목이 멘 것도 같은, 갈라진 문장이 조금은 급하게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나, 머리 이상하지 않아? 형, 나 머리 어때, 지금?”
“뭐?”
“얼굴 괜찮아? 옷은?”
이민혁은 뜬금없이 저에게 쏟아진 질문 세례에 멍하게 눈을 끔벅이며 기계적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고는 제 막냇동생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대답을 속으로 대신했다. 머리도 이상하고, 얼굴도 이상하고, 옷도 이상해.
이연우는 그 침묵의 의미를 금방 알아채고는, 방금까지 힘없이 질질 끌려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하게 일어났다가 ‘씻고 오면 늦잖아!’하며 작게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가, 또 일어섰다가, 그다음은 창밖을 훑었다가.
그 산만하다 못해 안절부절못한 반응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덕분이라면 덕분에, 자리에 있는 신화그룹의 사람들은 본가로 택시를 탄 채 찾아왔다는 그 의문의 손님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민혁은 보안팀의 직원에게 작게 눈짓했다.
‘손님’을 들여보내라는 뜻이었다.
정문에서 본채까지, 그리고 또 지금 이 중앙 거실까지는 빨라도 10분이 못 될 거다. 정말 겨우 10분이다. 겨우 그게 다인데, 가족들은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의 낯선 모습을 봤다. 이연우는 보다 못한 이민혁이 ‘너 괜찮아.’하고 달래야 할 지경으로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안 되겠어, 나 셔츠만이라도 갈아입고……!”
이연우는 결국 다시 한 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금방이라도 본채에서 빠져나가려고 들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제 형의 거처로 가서라도, 좀 더 말끔한 차림을 하고 싶었다. 세상 누구보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이다. 지금 같은 모습은 안 됐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중요한 기회를 망설이다가 놓치는 법이다.
그건 자신의 기사를 기다리던 ‘나이트’ 이연우도 그랬다.
금방이라도 중앙 복도에서 가장 가까운 쪽으로 뛰어나갈 듯 굴던 이연우는, 갑자기 전기라도 통한 사람처럼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그러고는 거실로 연결된 작은 통로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가족들은 그 행동의 의미를 당장에는 몰랐었다.
보안팀의 사람을 앞세우고 걸어오는 어떤 한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실 그들이 베타였다면, 이연우에게 ‘어떻게 오는 걸 먼저 안 거야?’라고 물었을 거다. 이연우는 마치 누군가 귓속말을 한 것처럼 남자, 임태호의 존재를 한발 앞서 쫓았으니까.
하지만 이연우에 이어 임태호를 본 가족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은 그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답지 않게 얼빠진 목소리로 열린 이연아의 물음 역시 그것을 증명했다.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놀란 채 끝까지 다 맺어지지도 못했다.
“뭐야, 왜…….”
사실 그렇게 놀란 건 이연아나 이주호 회장 부부 뿐만 아니었다. 태호를 앞서 알고 있던 민혁 역시 멍한 눈이 되는 걸 감추지 못했다.
바로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임태호에게서 짚어지는 아주 옅은 향 때문이었다.
그건 꾸미거나 스치듯 어린 것이 아니었다. 분명, 임태호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베타 선배라고 했다.
분명 이제껏 쭉 8년을 같이 지낸 베타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무슨 짓을 한 건지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오메가였다. 그 향이 흐리고 옅을지언정 분명 오메가가 맞았다. 덕분에 어디를 가도 말문이 막히는 일 없던 이주호 회장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허어, 하고 꽉 막힌 한숨이 흘렀다.
사실,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다시 봐도 그 이연우가 유난이라는 유난은 다 떤 상대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집안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쯤이야 이미 꿰고 있는 일이다. 둥그렇고 상기된 뺨 하며, 긴장으로 옅게 떨리는 눈가까지 참 겉모습만 봐서는 무엇에 이연우가 그리 홀렸는지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이연우가 저 남자에게 각인까지 하게 된 건 아마도 여기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8년의 세월 때문일 거다. 그 시간 속에 모든 것이 있다.
한편, 이연우는 그렇게나 기다렸던 연인을 앞에 두고도 그 어떤 말 한 마디 토해 내지 못한 채 애꿎은 주먹만 꽉 쥐었다.
“…….”
“…….”
한참 만에 보는 연인 앞에서 조금이라도 근사해 보이기는커녕, 눈가가 확 뜨거워지고 울컥 목이 메서 큰일이었다. 역시 임태호는 멋있다. 이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기다리길 잘했다. 이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제가 선물한 셔츠, 바지, 구두, 가방. 거기에 세상에서 제일 예쁠 새하얀 꽃까지.
정말 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애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울컥한 눈으로 제 연인을 바라보던 이연우는, 얼마 안 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게 됐다. 말간 표정과 크게 뜨인 새까만 눈동자만으로도 태호의 뜻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연우, 너 그게 뭐야?’
세상에, 태호 형은 저렇게 멋지게 저를 데리러 왔는데, 저는 세상에 다시없을 거지꼴이었다.
제 스스로의 꼴을 위아래로 훑은 연우의 귀가 새빨갛게 변했다. 솔직히 이렇게 엉망인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인 그였다. 가족들은 연인 사이에 흐른 그 잠시간의 침묵이 주는 대화를 눈치채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 시선을 깨달은 태호는, 다른 이들이 모르게 작은 심호흡을 했다. 별로 연습하지 못했던 문장이라 매끄럽게 나오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녁 시간에 찾아뵈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듣고 싶어 한참을 앓았던 조금은 작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덕분에 연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제 연인의 노력과는 다른 조금은 큰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실례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저는, 연우 대학 선배.”
그 때문일까. 나름대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임태호의 목소리가 기어코 조금은 흔들렸다. 하지만 태호는 작게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흠, 죄송합니다. 선배이고, 지금은…… 교제 중인.”
이번에는 꼭 제가 먼저 해야 할 말들이 있었으니까.
“임태호라고 합니다.”
◈◈◈
이 꽃 이름이 뭐라고 했었더라.
태호는 간간이 덜컹거리면서 움직이는 택시 안에서 살살 올라오는 꽃향기에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정답을 떠올리는 것 대신 긴장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최대한 빨리 움직였는데도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7시 20분. 앱으로 택시를 잡아 불렀을 때 예상 시간이 50분이었으니, 도착하면 8시가 넘을 거다. 솔직히 그 시간은 남의 집에 예고도 없이 방문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시간이라는 걸 잘 아는 태호다. 그게 연인의 집안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임태호는 오늘의 기회를 미룰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불안정한 상태에서 언제 또 ‘오메가처럼’ 보일지 알 수 없을뿐더러, 원래 가진 것보다 더 짙은 페로몬을 내는 지금 상태로 첫인상을 주고 싶다는 자격지심도 솔직히 조금은 있었다. 태호는 그렇게 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다가, 바깥 풍경이 바뀌는 것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제 생각에만 빠져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빠져들려고 했다.
“저, 손님.”
“네?”
“정말 이 길로 가는 거 맞습니까?”
백미러로 흘끔흘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여는 중년의 택시기사였다. 태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8년 동안 드물게나마 몇 번 와 본 적 있는 길은, 워낙에 일상적이지 않은 탓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대답할 수 있었다.
“네. 맞는데요.”
“……여기 신화 본가 가는 길이에요. 왜 그, 회장 일가 사는 곳! 한 이십 년 전에 옆 부지까지 다 사들여서, 이제 저어기로 들어가면 완전 공원 수준인데.”
확실히 얼핏 봐도 주변에 돌아가며 택시를 잡을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신화 가의 본가는 완전히 도심 속의 외지나 마찬가지인 거다. 그걸 깨달은 태호는 조금 곤란하게 눈썹을 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요금 더 드릴게요, 선생님.”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이 시간에 어쩌다가 저런 데를 가나 싶어서지.”
택시기사의 시선은 작은 거울 너머로 임태호를 쭉 훑었다.
그건 평가의 기색보다는 순수한 의문이 깃든 눈에 가까웠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럴 법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택시를 탄 평범하다 못해 조금은 힘없는 인상의 남자가 단정하기는 해도 가벼운 캐주얼 차림을 하고 꽃다발을 안은 채 재벌가의 본저택으로 향한다면 누구라도 그 이유를 궁금해할 거다.
하지만 평소 택시를 탈 때면 기사의 말을 잘 받아주는 편이던 임태호는 이번만은 대답 대신 흐린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다. 더 곤란할 상황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에 신화 본가의 정문 앞을 막고 있는 보안팀의 사람들이 그랬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아니. 여기 뒤쪽의 손님이. 여기 볼 일이 있으시다고.”
택시기사 딴에는 긴장한 얼굴의 손님을 도와주기 위한 말이었지만, 덕분에 신화가의 저택을 지키는 보안팀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진 듯했다. 태호는 허둥지둥 창문을 열고서 잠시 말을 골랐다. 그의 입에서는 그 자신을 이연우와 엮어 설명할 가장 익숙하고 편한 표현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연우, 대학 선배……, 임태호라고 합니다.”
“……잠시 대기하십시오.”
신화그룹의 나이트가 근 두 달 가까이 대외적으로는 ‘출장’ 중이지만 실상은 그게 아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보안팀이다. 덕분에 경호원들 몇은 한없이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태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일상적인 소개에 잠시 멈칫하더니, 얼른 본채로 무전을 보냈다.
한편, 임태호는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고용인들을 보며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연우였다면 그 자신을 뭐라고 소개했을까.’
그건 지금처럼 긴장 가득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문장일지도 몰랐지만, 태호는 저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기소개에 조금 놀란 채였다. 아직도 이연우의 연인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스스로를 새삼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용감해지고, 조금 더 씩씩해져야 한다.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그렇지 못했던 것 같지만, 적어도 앞으로 있을 모든 용기를 끌어 써야 할 때가 있다면 아마도 지금이다. 언제나 저를 사랑해주기만 한 알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 다 해 보아야 한다.
이제는 제 차례다.
태호는 제가 사 온 꽃다발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했다.
사실, 이 꽃은 오늘 임태호가 가지고 온 최후의 보루다. 과연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그렇게 몇 번 심호흡하면서 꽃의 향을 들이켜는 건 태호에게 꽤 도움이 됐다. 마침 조금쯤은 연인의 페로몬과 닮아 있었던 탓이다. 덕분에 임태호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채 놀란 얼굴로 저를 이끄는 경호원의 뒤를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로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서 유지했던 평정을 깨트리는 데 일조한 건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
“…….”
바로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이연우다.
태호는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연인의 몰골에 한참을 외울 듯이 연습했던 인사말을 모조리 잊고 잠시 눈만 끔벅였다. 그는 눈앞의 현실 ‘이연우’와 기억 속의 ‘이연우’가 얼른 이어지지 않아서, 사실 처음에는 몇 초간 순수하게 ‘뭐지?’ 하기까지 했다.
대학교 때 다 같이 MT를 가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일어나도 옷이 조금 흐트러져 있던 것 빼고는 멀쩡하던 사람이다. 제 집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조금 나른하게 풀린 것이 다른 의미로 근사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 두 달 만에 보는 제 연인의 모습은 8년간 쌓인 기억과는 완전히 달랐다.
덕분에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거지?’라는 그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퍼뜩 떠올릴 정도로 놀랐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며 구김이 간 옷, 살짝 야위어 보이는 뺨까지. 이연우는 겨우 두 달 만에 그 고운 얼굴이 눈에 띄게 상해 있었다.
놀라움 다음에 밀려오는 감정은 속상함이었다. 나이트가 어쩌다 거지가 돼!
태호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욱 퍼뜩 들었다. 이연우가 저렇게 갇혀 있게 된 것에는 제 지분이 크다고 생각하는 탓이었다.
놀라 경악한 신화가 사람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꽂혀 드는 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저녁 시간에 찾아뵈어 정말 죄송합니다.”
좀 더 멋진 호감형의 목소리였으면 좋았을 걸 하는 별 볼 일 없는 생각이 이 순간에도 들 줄은 몰랐다. 사실 그 목소리도, 말투도 무엇 하나 빠짐없이 이연우를 반하게 만든 계기였지만 연인의 가족을 앞둔 사람은 누구라도 제 흠을 먼저 찾기 마련이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실례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저는, 연우 대학 선배.”
태호는 습관처럼 제 소개를 이어가다가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죄송합니다. 선배이고, 지금은……, 교제 중인 임태호라고 합니다.”
말을 끝마치고 살짝 고개를 드는 모습에, 이연우는 아마 만 번째 정도로 반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하면 살짝 패륜일지도 모르지만, 제 가족들이 악당이고 제가 거기에 끌려온 이 모 씨 정도 된다면, 저 긴장한 얼굴을 한 채로도 꿋꿋이 온 남자는 정말 말 그대로 왕자님 같았다.
……게다가 저 손에 들고 있는 꽃은 뭔데!
사실, 저 긴 복도 끝에서 임태호가 눈에 보이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제 연인이 이 본채에 도착한 순간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솜털이 일어서고 신경이 바짝 당겼다. 덕분에 이연우는 각인한 사람들이 보이는 증상을 설명한답시고 늘어놓는 말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제야 조금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온 세포가 한 사람에게 집중하듯 저절로 움직이는데, 거기에 대고 이런저런 분석을 해대는 건, 아마 별 소용 없는 짓일 거다.
임태호의 정중한 인사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던 이주호 회장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우선 먼저 묻겠네. 내 착각이 아니라면…….”
깊은 내 천자가 새겨진 미간에 담긴 시름이 생생해서, 태호는 그 잠시간의 망설임을 눈썹을 휘며 기다렸다. 이주호 회장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을 지우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혹 자네, 오메가인 겐가?”
“예. 그렇습니다.”
이제껏 말했던 그 어떤 문장보다 매끄럽게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묘하게 울리는 것이라, 태호는 잠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이연우의 연인으로, 베타가 아닌 오메가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자체가 모두 다.
“연우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니, 사실은…….”
임태호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조금은 빠르게 문장을 더했다.
“이제껏 연우까지도 잘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애초에 오메가라는 걸 밝힐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태호 형!”
두 달 만에 하게 된 대화 아닌 대화는, 연인의 문장에 담긴 약간의 자책을 읽어낸 이연우가 그 순간을 참지 못한 탓이었다.임태호는 저를 울컥한 눈으로 보고 있는 이연우를 몇 초간 바라보았다. 이연우는 그 이상 임태호의 말에 끼어들지 않았다. 태호가 얼마나 용기 내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알파가 이 순간에도 전하고 있는 건 명확했다. 이렇게 갈라지기 직전 했던 그 말을 몇 번이고 다시 전하고 있는 거다.
절대로 잘못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라는 그 말을.
그걸 깨달은 태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가, 이어지는 문장에 한숨을 섞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좀 더 씩씩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게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시선 탓에 왠지 목구멍으로 뜨끈한 게 올라오는 것 같은 걸 꾹꾹 누르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우가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걸 들은 것도 그날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페로몬 억제제를 복용 중이었습니다.”
“…….”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신화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임태호를 보며 조금 놀랐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태호를 이전에 봤던 민혁을 제외하고는 정말이지 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건 임태호가 실은 베타가 아닌 오메가였다는 사실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임태호는 어찌 보면 서류만으로도 모난 거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이렇게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더욱 두드러졌다.
임태호는 아무리 가족이라고는 해도 ‘말썽꾼’이라는 단어를 쓰는 데에 망설임이 없을 이연우와 8년을 같이 붙어 다닌 예의 그 ‘선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얌전한 게 뻔히 보이는 남자다. 그건 표정, 사용하는 단어, 행동거지 하나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어떻게든 저와 비슷한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과 어울린다. 색다름을 찾다가도 결국 그 안에서 같은 조각이 있는 이들과 함께한다. 전형적일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일수록, 그 현상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신화가의 콧대 높은 사람들은 감히 생각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좀 다를지 몰라도, 8년이나 이어질 선후배 관계라면 분명 바로 보이는 공통분모가 몇 개는 있을 거다. 저 대단한 이연우가 그 오랫동안 서로 교류하고, 연인이 되고, 각인까지 할 만한 그 대단한 이유가 실제로 보면 곧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보일 거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 오메가 임태호는 그들의 기대 아닌 기대와는 좀 달랐다.
그건 실망했다는 쪽은 아니다.
오히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난제에 빠졌다는 쪽에 가깝다. 솔직히 모르겠다. 대체 자신들과 임태호의 공통분모가 뭔지. 최소한 신화가의 이연우와 임태호가 8년이나 선후배로 함께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뭔지, 또 연인이 될 만한 대단한 ‘무언가’가 뭔지.
대체 임태호와 이연우가 같이 보냈다던 그 시간이 어땠을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대체 어떤 선후배 관계를 보내야 연인으로 발전하고, ……심지어 저 사람한테 각인까지 했다고 할 수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렇게 당장 코앞에 있는 임태호가 어떤 사람일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이제껏 사람을 수없이 봐온 회장 부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삼남매의 어머니인 박희원 관장은 잠시 고민하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받았다.
“…그래요.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인 일이에요. 회사도 그만뒀다고.”
“아닙니다. 제가 선택한 건데요.”
깍듯하고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이었다. 박희원은 그런 막내아들의 연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
“오랫동안 밝히지 않았고, 왜 우리 애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걸, 지금 이렇게 말하는지 물어도 될까요.”
박희원 관장의 질문에 눈에 띄게 반응한 건 그걸 받은 당사자 쪽이 아닌 이연우 쪽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지금이 제가 끼어들 때가 아님을 알기에 크게 숨을 들이켜며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 쪽을 택했다.
그건 페로몬으로도 당장 티가 났다. 약간 흔들릴지언정 시종일관 비교적 침착한 임태호 쪽과는 달리, 누구보다 완벽하게 제어된 채여야 할 이연우의 극우성 향은 일그러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안정하게 들끓었다. 이제 이 본채의 거실에는 그걸 모르는 이는, ‘공식적으로도’ 아무도 없다.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 생각하듯 있던 태호의 대답이 시작된 건 그때였다.
“전 말만 오메가였지 그 생활에는 관심이 없어서…….”
“…….”
“아니, 관심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전혀 모르다시피 해서, 실은 처음에는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었습니다.”
이제껏 쭉 조금은 긴장한 얼굴인 채던 흐린 이목구비에 처음으로 조금 씁쓸한 듯한 미소가 걸렸다. 이연우는 그 작은 웃음에 순간적으로 팔에 쭉 소름마저 돋는 것 같았다. 항상 제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던 ‘선배’가 저를 향해 저렇게 슬쩍 웃어줬던 날, 얼마나 들떴었는지도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그동안 각인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
“각인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한 사람들은 굉장한 충족감과 안정감을 먼저 말했습니다. 어떤 연구 조사에서는 각인한 사람들은 두뇌 활성 반응 자체가 다르다고 하면서, 이보다 더 좋은 각성제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희귀병이 나았다거나 하는 좋은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임태호는 잠깐 숨을 참았다가, 그가 이제는 외울 듯이 본 그 반대 사례에 대해 쭉 입에 담았다.
“다른 한쪽에서는, 각인을 세상에서 가장 일방적이고 의존적인, 알파-오메가 유전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하는 특이 현상 중 가장 악질의 것으로 말했습니다.”
성실하게 예습 복습한 것을 거침없이 술술 읊는 모습은 이연우 그가 익히 아는 모범생 임태호다웠다. 태호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연인과 닮은 이목구비를 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으며 천천히, 무엇보다 중요한 마지막 문장을 이었다.
“……각인한 상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이유는, 정신의학 쪽에서도 아직 정의가 안 됐고요.”
그건 이주호, 박희원 회장 부부가 제 막내아들의 각인에 경악했던 까닭 중 어쩌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 망할 각인이라는 것을 하면, 상대를 밀어낼 수가 없다고들 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감히 그 뜻을 감히 거절할 의지조차 들지 않는다는 게 대부분의 의학 보고 결과였다.
상대를 향한 그 어떤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순응이라니.
그런 예쁜 문장은, 이런 세계에서는 너무나 위험하다. 그래서 회장 부부는 제 막내아들과 임태호를 무조건 떼어놓았다. 혹시라도 그 각인이 조금이라도 약해지지 않을까, 아니면 착각이었다며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면서.
하지만 그 두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신화 가의 사람들이 얻게 된 건, 그들의 나이트가 눈앞의 저 남자 임태호의 손에 떨어진 게 분명하다는 증거들뿐이었다.
“감히 어떻게, 가족분들의 걱정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임태호는 어느새 까칠해질 정도로 마른 혀를 입술로 한 번 적셨다.
“제가 오늘 이렇게 찾아뵌 건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가능성?”
“네.”
담담하게 이어지는 태호의 말에, 신화 가의 사람들보다 그 문장의 당사자가 아마 한 백 배는 더 놀랐을 거다.
“여기 오기 전에, 저도 연우에게 각인하고 싶었습니다.”
“…….”
“이렇게 하면 할 수 있다더라, 저렇게 하면 하는 거라더라.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다 해 봤는데.”
당사자, 이연우는 순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게 제 연인의 말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들었다. 임태호는 그 표정을 알아채고는 조금은 찡그리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을 했다.
“……우려하시는 대로,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인지 그게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방 각인이 문제였다면, 이제 최소한 그게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타가 아니니까요.”
“아니, 아니에요. 그건 태호 씨 탓이 아니죠! 그게 어떻게 마음대로 되는 건가요?”
깜짝 놀라 마다하는 문장이 터진 건, 이제껏 잠자코 태호의 말을 듣고만 있던 신화그룹의 후계자, 이민혁에게서였다. 임태호는 그 완전하고 진심 가득한 부정에 울컥하는 게 올라올 정도로 고마웠다.
사실, 임태호는 제가 이연우에게 쉽게 각인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쨌거나 각인이라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거라고들 했으니까. 그리고 내심, 정말 내심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자신 아닌 자신도 했었다. 제 연인과의 감정의 시소에서 더 무거운 쪽에 앉아 있는 것은 분명 저일 거라고. 언제나 깨어질 듯 곱게 아껴주는 연인이지만, ‘그래도’ 이건, 아마 내가 더 좋아하는 관계일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해 왔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만만한 믿음과는 달리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다 못해 어느 순간 그게 한 점에 다다르게 되면 저도 모르게 하게 된다는 그 각인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늘 세상의 향을 맡을 수 있었고, 긴가민가 헷갈리는 순간마저 없었다.
태호는 이 두 달간, 그게 제 연인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랐다.
덕분에 임태호의 시선이 처음으로 바닥으로 떨궈졌다. 그걸 눈치챈 이연우는, 잠시 멍하게 있던 정신을 얼른 붙잡고는 조금은 울렁이는 속을 달래며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알파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박희원 관장이었다.
“무슨 말인지도 알겠어요. 또, 노력도 알겠습니다. 그래. 임태호 씨라고 했지요?”
“……네.”
그녀의 목소리는 다그치는 기색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문에서 들었던 철의 여인이라는 수식어와는 달리 상냥하게 달래는 상냥한 음색에 가까웠다. 덕분에 안도와 긴장을 동시에 느낀 태호다. 보통, 이런 부드러운 문장 속에 뼈가 담기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애 옆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만나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 솔직한 말로…….”
“…….”
“환영이었어요. 의외인가요?”
하지만 그렇게 바짝 얼어붙은 채로 귀를 쫑긋한 것이 무색하게, 박희원 관장의 말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태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제 알파의 고해성사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생각보다 말썽을 많이 피웠다고 들었습니다.”
“말도 말아요. 설마 말썽뿐일까.”
덩달아 긴장해 있던 이연우의 눈썹은 그 와중에도 작게 꿈틀했다.
그는 임태호의 귀에 저의 나쁜 말이 들어가는 건 뭐가 됐든 거슬리는, 참 어쩔 수 없는 알파였다. 임태호는 박희원 관장의 웃음기 어린 대답에 바짝 굳었던 어깨에서 몇 초나마 힘을 뺐다. 그건 이 본채로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긴장을 푼 순간이었다.
“어때요, 선후배에서 지금은.”
“…….”
“사귀게 되니 많이 달라지던가요?”
박희원 관장은, 굳이 그때를 노린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달라졌겠지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니. 그건 꼭 직책에만 따른 게 아니거든.”
임태호는 둥그런 눈을 순간 뻣뻣하게 굳힌 채로 고풍스럽지만 그 속내를 다 읽을 수 없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박희원 관장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이연우는 사귀게 된 이후 참 많이 달라졌다.
후배 이연우가 아닌, 연인 이연우는 더욱 다정하고 또 상냥해졌다. 채 다 털어놓지 않았던 하루를 털어놓기도 하고, 함께하는 미래를 속삭이고, 사랑을 고백하게 됐다. 잠들기 직전까지 통화하고 또 같이 잠에서 깨는 것조차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됐다.
이연우만 바뀌었냐고 물으면 그것도 절대 아니다.
어쩌면 이연우보다 더욱 많이 바뀐 건 임태호다. 이제껏 살아왔던 삶이 뿌리째 뒤흔들렸다. 선배 임태호가 아닌 연인 임태호가 된 이후 늘 걸치고 있던 베타의 이름표를 뗄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심지어 지금은, 그렇게 한 채로 이곳에 오기까지 했다.
“나는 임태호 씨가, 지금보다 더 많이 달라졌을 때……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겠어요.”
이제 이연우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혹시라도 막 시작한 각인을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떼어내 본 건 임시 방책에 불과하다. 그게 이미 실패로 돌아갔다는 건 최근 망가진 채 움직였던 나이트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신화그룹의 가장 빛났던 기수의 발판에는 이미 그 자신이 새긴 주인의 이름이 패인 지 오래다.
나이트는, 더는 이곳의 패가 아니다. 이제 그 사실을 신화가의 모두가 안다.
임태호는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신중히 답변을 고르다가,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러운 대답을 찾았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선배와 후배에서 연인이 되는 데 8년이 걸렸다.
서로를 알아가는 것만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렸는데, 당장 이연우를 나쁜 방향으로 휘두를까 걱정으로 가득 찬 연인의 가족들이 저를 믿는 것이 하루아침에 가능할 리 없다. 박희원 관장의 말대로 언젠가 이날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이연우와 함께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어찌 되었든 신뢰를 얻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너무 늦게 찾아뵈었습니다. 여러모로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밤 9시가 훌쩍 넘어 어느덧 10시에 가까워진 늦은 때까지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다. 흘끗 시계를 확인한 임태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애초에 너무 급하게 정한 무리한 방문이었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 달성은 있었다.
이제 제가 베타가 아닌 오메가이고, 각인할 의사까지 있다는 걸 안 이상, 신화가의 사람들도 완전 일반 각인이라며 마음을 끓이지는 않을 거다. 이참에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잔뜩 했으니 속도 좀 후련하다.
태호는 제가 형식상, 좀 더 정확히는 연우가 사 줘서 메고 온 가방을 다시 들고, 나름대로 최악의 상황을 그리며 사온 꽃다발도 흘끗 봤다. 생각 이상으로 분위기가 좋게 풀려서 이 예쁜 꽃은 제 연인과 잘 어울리는 선물이 된 듯했다.
그때였다.
“……태호 형?
“응?”
“설마 지금……, 가려고요?”
이 세상 단 하나뿐인, 각인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연인 이연우였다.
태호는 그 영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잠시 눈을 끔벅였다가, 단 한 대답 말고 달리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는 영 자신 없이 대답했다.
“으응. 그렇…지?”
사실 임태호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는 미리 약속을 잡고 일찌감치 찾아올까 싶은 생각이었다. 어렸을 적 ‘남의 집에는 저녁에 전화하면 안 돼.’라고 배웠던 태호는, 사실 갑작스레 찾아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결례를 저지른 차였다.
하지만 임태호의 그 대답은, 그 연인에게는 절대 정답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연우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가-.”
“저한테 각인 안 해도 돼요!”
태호는 그걸 깨닫는 순간 등줄기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이연우는 조금 전까지 잠잠히 제 말을 들어주던 상냥하고 사려 깊은 알파다. 하지만 그는 제가 돌아간다는 말을 하자마자 눈빛이 바뀌었다. 아니, 아예 안광이 흐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표정이 서늘해졌다.
“다른 사람 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됐어요, 전 그냥 형이 그런 생각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사실 그 변화를 느낀 건 태호뿐만이 아니었다.
이연우가 두 달간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는 가족들은 왠지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했다. ‘터질 게 터졌구나’. 그건 틀린 짐작이 아니었다. 이연우는 마치 얌전히 꾹 눌러 참고 있던 둑이 터진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차라리 내 집으로 가요. 나랑 얘기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연우야, 지금 어르신들 다 계시잖아. 잠시만.”
“얘기 다 끝났다면서요. 그럼 이제 제 차례죠.”
임태호는 뭐라고 입을 열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한 건, 어떻게 제대로 통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구 엉망으로 일렁이는 연인의 페로몬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이렇게 휘청이고 흔들리는 이연우는 본 적 없었다.
심지어, 두 달 전 그날까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연, 우야?”
그래서 겨우 가까스로 이름을 부른 게 다였다. 그러자 이연우는 뭐라 쏘아붙이듯 말하려다가, 입술을 눈에 띄게 힘주어 꽉 깨물고는 스스로의 페로몬을 마치 짓밟듯 억눌렀다. 임태호는 그 이유를 뭐라 찾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아직 페로몬이 불안정한 저에게 부담이 갈까 봐.
그럴까 봐, 그 자신이 제대로 제어가 힘들 정도로 일렁이는 상황에서도, 눈앞의 알파는 제 향을 제어하려고 한다.
이연우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 삼켰다. 어떻게든 진정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속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울렁였다. 좀 더 노골적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운한 마음과 반가운 마음, 들끓는 애정, 그 모든 게 뒤섞여 왈칵 터졌다.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어요.”
“…….”
“나한테 온다고 한 거잖아. 그럼 이번만큼은 중요한 건 나잖아요!”
그랬다.
기다리라고 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간다고 했다.
그리고 임태호 역시 이번에는 이연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떨어져 있는 동안 그의 모든 생활은 이연우를 위해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호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제 연인의 말을 들었다.
이연우 역시 임태호의 그런 하루하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렇게 선명하게 짚지 못했던 향을 내며 서 있는 것만 봐도 뻔히 그릴 수 있다.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걸치고 있는 옷 하나, 하고 있는 시계까지도 제가 선물한 건데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호 형이 온다고 해서. 이번에는, 형이 나한테 와 준다고 해서!”
솔직히 이건 투정이다.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은데,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데, 정말 멋있는 연인이 되고 싶은데!
거의 두 달 만에 보이는 꼴은 이런 후줄근한 모습에 하는 말은 임태호와는 달리 이렇게 못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연우는 제 입에서 술술 나오는 문장들을 도저히 눌러 막을 수 없었다.
“혼자 미친놈처럼 헤실헤실 웃다가, 혹시 언제 올까 싶어서 하루 종일 창문 밖만 보다가.”
“…….”
“깜박 잠이라도 들면 얼마나 놀라서 깼는지 알아요? 얼마나, 얼마나 그렇게…….”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저 새까만 눈동자가 정말 보고 싶었다. 낮고 다정한 목소리도. 진짜,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걸 얼마나 얌전히, 착하게, 참았는데.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냥,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했었는데요. 밤낮으로 해도, 한 번도 전화 안 받는 거 보고.”
이런 못난 말이라도, 최소한 제대로라도 해야 하는데. 이연우는 제 목소리가 자꾸 듣기 싫게 갈라지고 꽉 매여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저는, 손가락 끝은 물론 숨소리마저 흔들릴 정도로 떨고 있었다.
“……지금 눈치껏 포기해야 하라는 뜻인데 이러고 있나 싶어서.”
임태호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가 정말 얼마나…….”
아니, 보였었다.
이연우는 연인의 모습이 천천히 뿌옇게 변하는 걸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제 뒤에서 가족들이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정말이지 찌질하고 한심한 모습은 다 보이는 것 같아 목덜미로 확 열이 치솟았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진짜 한심하게 굴지 말자, 좀. 연우는 그 자신에게 세뇌하듯 속삭였다. 하지만 제 연인은 그런 노력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미안해, 연우야, 이연우. 미안해, 그런데 진짜, 진짜. 진짜! 그런 거 아니었어!”
대체, 임태호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건지.
이연우는 저를 반하게 했던 그 다정한 목소리, 상냥한 단어 하나하나에 또 다시 꾹 누르려고 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보고 싶었는데, 정말 두 달을 어떻게 버텼는데 한 시간 동안 부모님하고만 떠들고 바로 가려고 해 놓고서. 언제 또 다시 볼지 어떻게 알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했으면서.
어떻게든 담담해지려고 했는데, 자꾸 어떻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숨을 헐떡거리게 됐다. 연우는 차곡차곡 쌓아왔던 마음을 결국 울컥 드러내고 말았다. 물론 우는 게 역력한 목소리로다.
“……일부러, 안, 받았잖아요.”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래, 연우 너한테!”
정말 임태호는 과장 않고 바닥에서 한 몇 센티는 펄쩍 뛰어 올랐을 거다.
요 근래 휴대폰을 꺼두고 생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제 연인의 전화를 피하려고 했던 건 하늘에 맹세코 절대 아니었다. 연우가 전화할 줄 알았다면 아예 휴대폰을 쥐고 살면 살았지, 꺼두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다. 그저 저에게 연락하는 전 회사 사람들이 지긋지긋해서 그래서 끄고 지냈을 뿐이다.
모르는 번호가 있는 걸 보기는 했는데, 당연히 스팸인 줄 알았지 제 연인이 건 것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임태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연인의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치를 봤다.
물론 얼이 빠질 정도로 놀란 건 이연우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지금의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순간 할 말을 잃고 입만 벌렸다. 어찌나 고집도, 자존심도 세던지 어릴 때도 눈물이 없다시피 했던 게 이연우다. 그런데 지금, 그 고고한 극우성 알파가 운다.
……전화 안 받았다고.
“나도 화 안 낼 건데.”
“응, 응. ……응? 뭐라고?”
“나도, 형 오메가라는 거, 아무렇지도 않은데.”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태호는, 이어지는 연우의 말을 이해하고 순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두 손을 가린 채로 웅얼거리듯 말하던 연우의 손이 내려간 것도 그때였다.
“왜 나한테는 먼저 안 왔어요. 내가 그렇게 별로예요? 그렇게 못 미더워?”
“아니야, 그런 거!”
“그런데 왜 항상 나한테는 먼저 안 와요. 왜 항상 다른 사람인데요!”
발갛게 변한 눈가로 펑펑 방울진 눈물을 떨어트리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미남의 모습은 사실 퍽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런 제 모습 따위 신경 쓸 여력조차 없다는 듯, 목에 파랗게 핏대까지 세워가며 고함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을 이어갔다.
“대체 얼마나 더 티를 내야 해, 내가! 사람이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죠! 오메가잖아, 그럼 알잖아!”
“…….”
“사귀면서 형 좋아 죽는 거 몰랐어요? 바보같이 쩔쩔매는 거 뻔히 다 알았으면서!”
이연우의 말이 맞다.
알았다. 가끔은 속으로 열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이연우의 향은 사랑에 빠진 걸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태호는 제 연인이 뚝뚝 울면서 하는 말에 뭐라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쪽팔리게 교수한테까지 찾아가서 같이 붙어 다니게 해달라고 생떼를 썼다고요! 그걸 들었는데도 몰라, 왜! 그 정도면 아 이연우가 나 존나 좋아하나 보다 하고 믿어도 됐잖아!”
“……미, 미안해. 내가 그때 좀 겁나서…….”
“전 뭐, 안 무섭나!”
겨우 내밀었던 변명은 도로 쏙 들어갔다. 울며 말하는 미남을 이길 카드 같은 건 임태호에게 없다. 특히, 자신이 느낀 두려움을 순수하게 인정하는 연하 연인보다 더할 말 같은 건 절대로 없다.
“각인하는 법 찾아봐도 모르겠다면서요! 저도 몰라요! 저도, 하려고 한 거 아니라고요!”
어찌나 울며 말했는지, 이연우는 잠시 숨을 급히 몰아쉬었다.
태호는 그 급해진 헐떡임이 안타까워서 저도 모르게 달래던 연우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알파는 잔뜩 화내고, 소리치듯 고백하면서도 그걸 필사적으로 꽉 맞잡았다.
“저도 그냥, 어쩌다가 저도 모르는 새 각인해 버린 건데. 이제 정말 형밖에 없는데!”
“……응.”
“열흘 넘게 전화해도 안 받아 놓고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간다고 하지.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태호 형이 알아요?”
임태호는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역시 섬세함은 좀 부족하다.
매사에 무던하고 모난 데 없는 성격이라 무엇 하나 거슬리는 것 없지만 가끔은 이렇게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부분을 보지 못하고는 하는 거다. 이연우는 저를 마주 보는 다정한 눈을 보며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던,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했던 가장 끔찍한 가정을 쏟아냈다.
“……사실 이제 이쪽이라면 지긋지긋하고 질려서. 꼴 보기 싫어져서 가버리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물론 그와 동시에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 역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임태호는 그런 이연우를 보며 잠시 속상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저보다 한 뼘은 더 높고 체격은 훨씬 더 탄탄하니 딱 부러진 사내를 조심조심 품으로 당겨 안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울지 마. 연우 너 안 미워, 진짜야.”
하지만 그런 다정한 낮은 목소리는, 알파에게 약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한 부추김이 되는 것이 분명했다. 임태호는 어깨가 옅게 흔들리는 알파를 품에 안은 채 그 단단한 어깨너머로 연인의 부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노력하겠다고 말 한 지 몇 분이나 됐다고, 이 집의 막내아들을 대성통곡하게 했다. 임태호는 왠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조금은 달래듯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꼭 뭐든 연우 너한테 말할게. 휴대폰도 안 끌게. 진짜 바로 받을게. 응?”
“몰라요…….”
한편, 그런 임태호의 노력을 지켜보던 신화가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건 임태호의 걱정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울보야. 진짜.”
“제가 뭘요!”
“잠깐 얼굴 들어 봐. 저번에 새벽에 와서도 펑펑 울더니,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네.”
……저게 뭐냐, 대체?
이민혁은 ‘대체 그 새벽은 또 언제야?’하며 멍하게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제 동생이 형 말 잘 들을 걸 그랬다며 우는 게 분명한 목소리로 전화했던 어느 날 밤을 떠올리고 작은 탄성마저 낼 뻔했다.
이제야 모든 궤가 다 맞는 기분이었다.
임태호는 세상 다정한 손길로 살짝 부은 이연우의 눈가를 문질러주더니, 다시 한 번 ‘울지 마. 응?’하고 상냥하게 달랬다. 그러자 이연우는 작게 훌쩍이면서도 그 손을 내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같이 있고 싶어 안달인 걸 겨우 한 시간 얼굴만 보고 떨어지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어. 민혁은 이제껏 중립이던 제 여동생에게 살짝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연우는 지금 눈물로 조금 놀림 받을지언정 아군을 하나 더 얻었다.
태호의 나직한 목소리는 쭉 이어졌다.
“있잖아. 형이, 네 말대로 정말 각인하는 걸 열심히 알아봤는데도……. 하는 법을 모르겠어. 무섭게 해서 진짜 미안해.”
임태호가 스스로를 ‘형’이라고 지칭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걸 곧바로 눈치챈 이연우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남은 앙금을 털어냈다.
“유현민 그 개새끼는……, 맨날, 매애앤날 형이랑 붙어 다니고……. 그 새끼 알파잖아요.”
“응, 응. 미안해.”
“오메가라는 것도……, 흐윽, 걔가 먼저 듣고. 자존심 상해서 진짜…….”
“정말 미안해. 현민이 신화그룹 직원인 거 미리 말 안 한 것도, 다 미안해.”
불쌍한 신입 사원 유현민은 이제 회장 부부의 앞에서까지 언급됐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연우에게 지금 중요한 건 제 연인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해 주고 사랑해 주는 지금 이 순간뿐이다. 솔직히 지금 자신이 울고 어리광부리고 있는 걸 가족들이 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다.
눈앞에 있는 임태호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이연우는 제 연인이 저를 올려다보며 뭔가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깨달았다. 그러고는 아주 조금 그답지 않게 겁을 먹었다. 그는 지금 낙엽만 굴러가도 놀랄 만큼 불안한 상태다.
하지만 지금 임태호가 생각하고 있는 건 이연우를 불안하게 할 말과는 꽤 거리가 멀다.
……아마도.
“있잖아. 연우야.”
“……네?”
“저기. 그래서. 대신에, 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신화그룹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쯤이야 진작에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을 끊었다. 누가 봐도 확실한 오메가가 되면 그 불안이 좀 덜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도 이연우가 한 그 각인이라는 걸 하려고 노력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사이트들도 다 들어가 보고, 웃긴 책도 읽어봤다.
하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언제 할 수 있을지 확신도 할 수 없다.
이연우가 무서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렇게 불안해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제 눈에는 언제나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완벽한 극우성 알파였으니까. 임태호는 제 연인과 맞잡지 않은 다른 한 손에 쥔 꽃다발을 힘주어 잡았다. 오늘 몇 시간을 들고 다녔더니, 줄기가 조금은 미지근해진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은 손으로 열이 몰려 그런 착각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혼할래?”
임태호가 준비한 마지막 카드는,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청혼이었다.
솔직히, 그의 청혼은 신화그룹에서 저와 이연우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면 조금은 비장하게 말할 각오로 생각했었던 문장이었다. 이렇게 눈가 가득 눈물을 머금은 연인을 앞두고 그를 달래다가 꺼낼 생각은 없었다.
오늘 온종일 이 본채로 와서 떠든 힘겨운 문장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네 글자였는데도, 왠지 순식간에 불덩이를 삼킨 듯 속이 뜨거웠다. 게다가 이연우는 그 청혼에 무려 3초간 대답이 없었다. 게다가 임태호는 부끄러움이 많다.
……그것도, 엄청.
덕분에 수줍음 많은 청년의 생애 최초 청혼은 내밀었던 꽃다발을 딱 4초 만에 곧바로 거둬들이는 것으로 끝났다.
“…싫음 말고.”
“할래요! 할게요! 하게 해 주세요! 죄송해요! 태호 형, 할래요!”
솔직히 4초는 좀 가혹했다. 최소한 놀랄 시간은 줘야 한다.
이연우는 너무 놀라 순식간에 놓친 고백을 두고 언제 서운함에 따지고 화낸 사람이냐는 듯, 완전히 돌변해서 태호에게 매달렸다.
“해요! 하자! 결혼해! 형, 제발!”
세상에 다시없을 나이트의 청혼 승낙은, 어찌 보면 조금은 안타까울 정도로 여러 번 반복됐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 임태호가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이연우는 언제 펑펑 울었냐는 것처럼 임태호의 눈을 보려고 고개를 기울여가며 ‘형?’, ‘태호 형?’, ‘혀어어엉?’ 하고 있다.
임태호가 온 이래로, 작은 탄성 이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 냉철한 신화그룹의 여왕, 이연아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저 진짜 장담하는데요. 연우 쟤, 저건 각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절대.”
시선만은 여전히 막냇동생과 그 연인에게로 향해 있는 이연아의 목소리에는, 조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
결국 이연우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건 다시 말해 임태호를 집에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의 거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알파는 제 연인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 좀 더 정확히는 그를 자신의 품에 가두듯 끌어안고서 누워 입술이 닿는 곳마다 키스하기에 바빴다.
“이거 형 페로몬이죠.”
“……아마도.”
솔직히 태호는 지금 여러모로 숨쉬기 힘들다.
그건 이연우가 저를 있는 힘껏 끌어안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방금 연우가 말한 ‘페로몬’ 탓이다. 하지만 태호는 아직도 눈가가 살짝 붉게 충혈된 연하 연인을 두고 그런 제 상태를 내색할 수 없었다.
답지 않게 조금은 들뜬 듯한 이연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항상 되게 흐리게 남아 있는 것만 겨우 맡았었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는 아니다.
그저 이연우의 거처에 어려 있는 극우성의 페로몬은, 아니 어쩌면 이연우 그 자체가, 막 오메가로 발현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임태호에게 너무 큰 자극일 뿐이다. 일전에 억제제를 먹을 때 한 번 놀러 오듯 방문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약간 기분이 들뜨는 정도가 다였는데, 지금은 술을 들이부은 것처럼 멍해지고 혀가 꼬이려 들었다.
임태호는 최대한 그걸 내색하지 않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입을 열었다.
“내 향이 어떤지……, 궁금해.”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엄청 진하거나 튀는 계열은 아닌데.”
물론 당연히 그럴 거다. 열성 오메가라는 분류는 아마도 그래서 내려진 것일 테니까. 하지만 이연우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는다는 듯, 그가 느끼는 감상을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하려는 듯 태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쭉 들이켰다.
“정말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따뜻한 물에서…….”
“…….”
“옅은 단 향이 스치는 것 같달까.”
이연우의 말은, 도저히 진심이 아니라고는 믿기 힘든 ‘진짜 좋아.’ 하는 속삭임으로 끝이 났다. 태호는 그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은 몽롱해진 머리로도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제 알파라는 저 남자는 정말, 정말, 정말 바보다.
이연우는 임태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반짝이는 사람이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거다. 저 사람이라면, 정말 뭐든 선택할 수 있을 텐데. 극우성 알파. 신화그룹. 태호는 그 단어 하나하나가 조각난 채로 둥둥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을 느끼며 이연우의 페로몬을 짚었다.
이연우의 나직한 물음은 계속됐다.
“약 끊은 지는 얼마나 됐어요?”
“한 달, 하고, 음. 딱 이십일…….”
“꽤 됐네.”
못난 꼴은 그만 보이겠다며 막 샤워하고 온 이연우의 머리카락은 제대로 말리지 않아 조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태호는 그 차갑고 부드러운 것이 뺨이며 목덜미 같은 부드러운 살갗을 스칠 때면 왠지 저릿저릿하니 작게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제대로 대답한 게 맞나?’
사실, 임태호는 잘 말해 놓고도 마치 잠결에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말한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 연인과의 시간에 푹 빠진 알파는, 오메가의 그런 이상 증상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태호 형, 이거 장난으로 말하는 거 아니고요. 진짜 심각한 거예요.”
“……응?”
“히트사이클 때 꼭 바로 연락하세요.”
조금은 멍하게 풀리던 태호의 눈이 처음으로 조금 크게 반짝 뜨였다. 드물게 뇌리에 바로 꽂히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연우는 조금은 뻣뻣한 연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면서, 숫기 없고 부끄러움 많은 제 연인이 당황하지 않도록 말을 이어갔다.
“억제제를 오래 먹다가 끊은 거니까, 어떻게 올지 모르잖아요.”
“…….”
“진정제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임태호는 저를 쓰다듬는 그 손이 좋아서 잠시 대답 대신 눈만 깜박였다. 그러자 이연우는 그 반응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태호의 동그란 이마에 제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 하고 부딪히며 확답을 들었다.
“알겠죠?”
“…알았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흘러나온 대답이었건만, 태호의 작은 목소리를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찾아 듣는 이연우는 기쁘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임태호는 그런 제 연인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제 입이 바짝 마를 정도로 달고, 또 가끔은 서늘한 이 극우성의 향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흔적이 섞일 일도 없을 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연우가 저를 먼저 떠나는 건 불가능하게 됐다. 정말로 그렇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이연우의 눈가는 불과 몇 시간 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그렇게 한참을 눈에 담다가 ‘있지, 연우야.’ 하고 작게 부르자, 이연우는 너무나 좋아하는 나긋한 목소리로 ‘네에.’ 하고 대답했다.
“이제……, 너 나갈 수 있는 거야? 뭔가……, 흐지부지 끝나서.”
“…….”
“어떡하지? 나 정말 또 오려고 했는데.”
이연우는 신속 간결하게 철회된 청혼에 정말 절절하게 매달렸다.
솔직히 잘못한 게 뭐라고, 굳이 찾자면 3초 안에 ‘네! 할게요!’라고 대답하지 않은 게 얼마나 큰 죄라고 정말 싹싹 빌면서, 종래에는 ‘소리쳐서 미안해요. 다 내가 잘못했어요.’ 까지 나왔다. 신화가의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 제법 완고한 편이던 회장 부부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황당한 헛웃음까지 흘렸다.
자기 할 말 다해야 직성이 풀리고 제멋대로 살아온 극우성 알파다.
정말 표현 그대로 이제껏 거리낄 게 없었다. 뒤로는 신화그룹이 있었고, 그 자신만으로도 더없이 빛났다. 애초에, 어렸을 때부터 그 괄괄한 이주호 회장조차 단 한 순간도 어려워한 적 없을 정도로 뻔뻔한 성격을 타고났던 게 이연우다.
그런데 그런 이연우가 누군가에게 한참을 애원하다시피 매달려서, 제발 ‘청혼 수락’을 받아달라고 비는 모습이라니. 이보다 더 이연우를 완벽하게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더 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심지어,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임태호가 애태우던 알파의 목줄을 잡아당긴 방법도 또다시 고작 네 글자가 다였다.
‘……그래, 그럼.’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겨우 몇 마디, 아니 몇 마디라고도 할 수 없는 것에 휘둘리는 이연우를. 덕분이라면 덕분에, 연인은 어렵지 않게 함께 이연우의 거처로 올 수 있었다. 앞으로 나이트를 쥐고 움직일 수 있는 게 누군지 고작 몇 글자로 확실히 보여 준 셈이었으니, 감히 이 거대한 성채의 주인이라고 한들 그 앞을 귀찮게 할 수 없었다.
이연우는 프러포즈까지 해 놓고서 아직도 그다음을 걱정하는 근심 많은 제 오메가를 보며 작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여전히 눈가가 조금 따끔거리고 자고 일어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웃긴 목소리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도 심장이 기분 좋게 설렌다. 조금은 꿈같기도 하고, 심장 가득 따뜻한 공기가 가득 찬 것처럼 뜨뜻미지근하다.
그래서 쪽, 하고 콧잔등에 입술을 떨어트리며 장난처럼 입을 열었다.
“왜. 뭐가 걱정이에요. 형이 나 책임지는 거 아니었어요?”
정말 농담이었다.
이 사랑스러운 연인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이제 이연우 그가 집중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저를 위해 오메가의 삶을 선택한 연인을 위해, 임태호 그가 기대하고 상상하고 바랐던 것보다 더욱, 일방적이리만치 온전한 애정을 쏟아내 주는 것. 이연우는 제가 먼저, 또 혼자 각인해서 다행이라고 몇 번일지 모를 생각을 했다.
이연우는 문득 그렇게 8년 동안의 관성으로 제 연인을 비춰보았다. 늘 몇 걸음 물러서 있고, 언제나 조금쯤은 손에 쥔 것을 먼저 놓아 양보하는 성격을 먼저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태호의 대답은 정말로 뜻밖의 것이었다.
“……응. 그럴 거야.”
“…….”
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아니 사실은 좀 멍청한 얼굴이 될 것 같길래, 이연우는 괜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를 올려다보는 연인의 표정은 얼핏 보면 참 평소의 임태호와 별다를 바 없었다. 약간 뺨이 붉고, 여러 선이 겹친 흐린 쌍꺼풀을 깜박, 깜박.
……뺨이 붉어?
이연우는, 그제야 제 연인의 묘하게 늘어진 말꼬리나 나른한 얼굴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것이 단순히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다.
“태호 형.”
“으응…….”
“미안, 나 때문이구나. 몰랐어요.”
너무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의 해후가 기뻐서, 임태호가 갓 발현한 상태나 다름없다는 걸 잊었다. 이연우는 제게 부드럽게 안겨 오는 연인의 말랑한 몸을 안으며 어느새 따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만약에 페로몬에 잠깐 이성이 흐려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방금 임태호가 한 말도 그것과 비슷한 종류일 거다. 이연우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도, 자꾸 너울대려는 제 페로몬도 꾹꾹 참아 눌렀다.
한때 임태호를 버겁게 했던 이연우의 페로몬은, 그가 자각하고 조절을 시작하자 종일 긴장으로 종종걸음친 오메가를 위한 딱 좋은 이완제가 됐다. 연우는 천천히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제 연인을 보며 볼우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
어떤 사람들은 신화그룹 3세의 실세를 두고 장녀 이연아를 먼저 꼽는다.
대표 자리에 있지만, 언론과의 공식 접촉이 거의 없는 이민혁보다, 여러 대외 활동을 활발히 하며 인지도가 높은 그녀야말로 실질적인 유명세를 쥐고 있다는 뜻에서다.
하지만 그녀를 요즘의 연애운으로 풀이해 본다면?
아마도 보통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근사한 문장과는 조금 다른 내용으로만 가득 차게 될 거다.
이름 이연아. 나이 서른. 솔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있지만, 영 잘 안 됨. 덕분에 시원시원한 성격과는 별개로, 연애 관련 화제에는 대체로 심기 불편.
그 때문일까.
그녀의 고운 입술에서는 답지 않은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찡찡대면서 처 울 땐 언제고…….”
솔직히 조금은 도발조로 흘린 문장이었다.
그 말에 약간 부끄러워한다거나 머쓱한 눈을 하기만 했더라도 애초에 막냇동생을 퍽 예뻐하는 그녀의 비뚜름한 시선은 금방 가라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보다 몇 킬로 체중이 빠진 터라 살짝 인상이 날카로워 보이는 이연우의 시선은 그런 반응 대신 담백하리만치 별 미동 없이 제 누나를 향했다.
그다음은 뜻밖의 상냥한 권유였다.
“커플 시계 볼래? 시침 위에 몰래 태호 형 이름 썼는데.”
“너나 많이 보세요!”
동생들의 대화를 듣던 이안과 민혁의 입에서 동시에 ‘풋’하는 작은 웃음이 터졌다. 이연아와 이연우,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이 되려고 노력했건만, 저도 모르게 삐져나오는 미소만은 억누를 수가 없었던 탓이다.
나이트, 이연우는 실로 완벽하게 부활했다.
성경의 용례 이후 현대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를 다시 가져다 써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지금 그에게 가져다 붙일 것이 가장 어울릴 정도로 찬란하게 다시 떠올랐다. 내심 눈치가 있는 이들을 수군거리게 했던 이연우의 ‘장기 출장’이었다.
사실 말이 출장이지, 두 달 넘게 자리를 비우게 된 이유가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었다. 덕분에 잠시나마 막 대표로 취임한 이민혁의 수족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냐는 소문마저 돌았다.
하지만 그 잠시간의 공백 뒤 이연우는 보란 듯이 복귀했다.
전보다는 살짝 마른 듯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실로 유명하던 그의 외모가 더욱 도드라지게 되었으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연우가 두 달여 만에 SH타워 정문을 통과하던 그날, 1층 로비가 잠시나마 정적에 찼을 뿐이다.
심지어 그는 살며 처음으로 제 눈물의 가치와 힘을 깨닫기까지 했다.
이성을 차리고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이렇게 울길 잘할 수 없었다. 그날 울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매달리지 않았다면, 신이 멋짐은 주셨어도 눈치까지는 주지 않은 임태호는 그 예쁜 말간 얼굴을 하고 집으로 총총 떠났을 거다. 말도 안 된다. 진짜 다시 생각해도 소름 끼친다.
하지만 오늘 이연우를 찾아올 사람은 더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3세들끼리의 모임마저 듬성듬성 참여하는 이현이었다. 매사에 조금은 무심해 보이던 그는, 오늘따라 살벌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연우.”
“뭐.”
서른다섯과 스물여덟. 어떻게 보면 꽤 나이 차이가 난다고 봐도 될법한데, 두 사람의 대화는 얼핏 보면 가까운 친구 같기도 했다. 다른 3세들은 이현의 작고 낮은 목소리를 들으려고 저마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귀를 쫑긋했다.
이현은 목소리를 더욱 줄이고서는 제 사촌 동생에게 말을 이었다.
“……현민이 얘기. 회장님한테 했어?”
상황은 이랬다.
막내아들의 눈물 어린 문장 속에서 일전에 한 번 대두한 바 있는 신입 사원의 이름을 재차 들은 이주호 회장이, 그의 직속 상사인 이현을 호출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대체, 유현민 그치는 누구냐? 누군데 우리 막내가 자기 오메가랑 매애애앤날 붙어 다닌다고 눈물바람으로 난리인 게냐?’
덕분에 이현은 한 일 년 치 말을 다 쏟아내며 제 신입 사원을 변호해야 했다. ‘큰아버지, 한잔 하십시오.’ 하면서 찬장에서 술을 먼저 꺼낸 것이 대체 몇 년 만인지도 모르겠다.
이연우는 싸늘하게 눈을 빛내는 사촌 형의 말에 대답 대신 나른하게 턱을 괴고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이지 그건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고운 얼굴이었다.
덕분에 살짝 짜증이 치민 이현은, 저번의 일까지 보태 뭐라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저기, 형.”
바로 이민혁이었다.
“그런데 저번부터 유현민이 누구야? 형 팀 신입이라는 건 알겠는데…….”
“맞아. 나도 궁금했어.”
거기다 이연아까지 합세했다.
그들의 요지는 이거였다.
대체 저번부터 자꾸 등장하는 그 신입은, 대체 ‘무슨 사연’을 가진 신입 사원이냐는 거다. 임태호와 단순히 업무를 맞추던 사이 이상으로 친분이 있는 건 확실한데, 보아하니 이현과도 그저 팀장과 팀원 사이로는 보이지 않아서다.
사촌 동생들의 반짝이는 눈을 본 이현의 입이 도로 다물어졌다. 그는 대체 이연우가 어디까지 떠든 것인지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러 온 거지, 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 그때, 곤경이라면 곤경에 처한 이현을 도운 건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나랑 형동생 하는, ‘아는 동생’ 하나 있어.”
“…….”
“어찌나 형님, 형님 하면서 따르던지. 그런 애 하나 있으면 좋지.”
이연우는 ‘너 저번에 걔 말하면서 훌쩍훌쩍했어’라고 말하는 듯한 제 형과 누나의 시선은 철저히 모르는 척하며 뻔뻔스레 말을 이었다. 덕분에 상황을 물으러 온 이현은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이 됐다. 그는 아직 이연우가 어떻게 임태호를 붙잡았는지 모른다.
정말 오랜만의 평화였다. 요 몇 달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한참만이다. 이안은 저만치의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로 제 동생들이 간만에 소리 내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문득 시선이 창문 밖으로 닿았다.
마침 날씨가 좋았다. 이런 청명한 날씨는, 이안 그가 딱 좋아하는 날씨였다.
산책하기도 좋고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도 괜히 응원을 받는 것 같은 높은 하늘과 구름이 예뻤다. 이안은 작게 숨을 들이켜고는 그의 전매특허 같은 옅은 눈웃음을 건 채로 똑똑, 하고 손가락 마디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간만에 다 모였다고 진짜 말 많네. 이제 내가 말해도 돼?”
“하하, 어. 왜. 형?”
이안은 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이민혁을 잠시 눈에 담았다. 서늘한 이목구비 때문에 밖에서는 냉랭한 대표이사 취급받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상냥하고 마음 여린 사촌 동생. 사실, 이안에게 이민혁은 조금 특별하다.
오메가로 처음 발현했을 때, 주변 친척들은 이안에게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었다.
‘너는 정말로 드문 경우야. 이후로 오메가는 없을걸.’
그리고 바로 다음 해, 연년생 동생 이현이 발현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른들의 말대로 오메가가 아닌 알파였다. 그것도 극우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은 단 한 순간도 알파로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이현은 저 스스로가 알파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몇 번이고 그 자신을 해치려 들었고, 결국에는 ‘베타 이현’으로 알려졌다. 그 순간은, 어엿한 성인으로 자리 잡은 지금도 다시 떠올리기 꽤 힘들다.
그래서일까.
이안은 그가 스무 살 때, 이민혁이 발현열이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은 그답지 않게 겁을 먹었었다. 연년생 동생이 발현했을 때 이안 그는 고작 열일곱이었고, 그 순간은 아수라장 같은 혼란과 불안으로만 가득 덧칠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민혁은 오메가였다.
신화그룹에 절대 다시 나올 리 없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자신과 같은 오메가. 덕분에 이안은 3세들 중 가장 먼저 이민혁을 만나러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 발그레한 채로 ‘형! 나 형이랑 똑같대!’하고 웃으며 눈을 반짝이던 민혁을, 이안은 벌써 십 년도 더 넘게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웃음이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도.
이안은 자꾸 감상적이 되는 것 같아 속으로 그 자신을 탓하며 혀를 찼다. 어느새 동생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 쏠려 있었다.
“음, 사실 나중에 다 있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현이까지 와서…….”
나름 안색을 살피면서 천천히 말을 잇고 있는데, 벌써 눈썹 하나를 추켜올리며 낌새를 채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치 빠른 막내 이연우였다. 이안은 연우를 향해 살짝 찡그리듯 웃으며 먼저 눈짓하고는, 그가 꽤 전부터 준비했던 것을 꺼내 놓았다.
“나, 몇 년 정도 해외 나가 있으려고.”
“……형!”
“원래 바깥 나돌아다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뭐, 겸사겸사. 공부를 좀 더 할지, 일할지는 안 정했어. 어쨌든 나가는 건 확정이야.”
실로 깔끔하게 정돈된 문장이었다.
뭐라고 치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이연아는 놀라다 못해 황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야, 어쨌든 확정이라니!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뭐……, 하하. 그렇게 됐어.”
신화그룹 3세들 중 좋게 말해서 가장 독립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해서 가장 마이웨이, 즉 한 번 하겠다 마음먹은 걸 꺾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안이다. 그걸 잘 아는 다른 동생들은 이안의 상냥한 통보에 잠시 제대로 된 대답 대신 거의 한숨에 가까운 반응만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금은 비뚜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안이 할 말을 이미 일찌감치 한발 앞서 짐작한 듯했던 알파였다. 이안은 그의 반응을 조금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다리를 꼰 채 뭔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이연우는,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건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방 안에 있던 3세들이 모두 듣기에는 충분했다.
“-다시 말하면.”
“…….”
“봐달라는 거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이연우의 복귀가 뜻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다.
수많은 것 중 대표적인 건, 이민혁 대표 체제 완전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도 하나 있다. 바로, 아주 오랫동안 검을 든 채로 멈춘 채였던 나이트가 움직일 거라는 사실이 그렇다.
이안은 크게 한숨을 삼켰다가, 그 한숨보다는 훨씬 작게 대답했다.
“……응.”
본채의 응접실 안은 순간이나마 어느 누구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에 찼다.
3세들 중 누구보다 더 먼저 신화가의 이름 아래 살았던 이안이다. 살며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말은, 다시 말해 그 누구도 그가 원하던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는 말과 같다. 이안은 그게 가능한 길을 걸어왔다.
그렇기에 박영진도 한때 이안을 평가하며 ‘그 누구보다 자존심 센 신화그룹 도련님’이라고 말했던 바 있다. 그건 어느 정도는 맞았다. 지금 이안은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어떤 것들을 처음으로 내려놓았다. 그것이 자존심이 되었든, 명성이 되었든. 뭐라 이름으로 붙여 설명할 수 없는 가치를 기꺼이 떼어내어 바닥에 두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 응접실 안에 없다.
이연우는 조금은 심란하다는 듯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안은 그런 제 사촌 동생을 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로 다들 바짝 엎드릴 테고, 이참에 위험 요소가 아예 없으면 더 좋겠지. 민혁이 자리 잡는 동안 다른 생각 못 하도록.”
“……작은아버지 쪽 사람들 최대한 덜 다치게 하면서, 제일 깔끔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고르겠다?”
이연우의 두 번째 질문이었다.
이안은 이번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웃음이라기보다는 미안하다는 사과로 보였다. 사실 이건 이안이 선수를 친 거나 다름없었다. 두 달 만에 돌아온 이연우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뻔했다.
자신과 자신의 연인을 위협한 판 위의 모든 병정을 치는 것.
이안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 쪽도 놓을 수 없었다. 제 적당한 방관이 일을 키웠다는 죄책감을 떨치고 싶은 마음도 조금쯤은 있었다.
이연우는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안, 저 상냥하고 다정한 사내가 예뻐하지 않았던 동생 같은 건 한 명도 없다. 그건 이연우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 잘생긴 막내.’ 늘 버릇처럼 쓰던 단어에 가득 담긴 애정만 보아도 그 마음을 짚어낼 수 있다.
결국 연우는 그런 제 사촌 형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좋아.”
“…….”
“그런데 박영진은 안 돼. 형한테는 오래 알고 지낸 삼촌 같은 사람이어도, 그 사람은 선 넘었어.”
“……알아. 고마워. 그리고 다들 미안.”
언제나 이안은 이렇다. 마치 깜짝 선물처럼 왔다가, 이곳이 제자리가 아니라는 것처럼 훌쩍 떠나버리고는 한다. 덕분에 이야기의 주체 아닌 주체인 이민혁은 어느 순간부터 아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고개를 숙인 채였다.
제 가족의 선택을 완전히 말릴 수도, 응원할 수도 없는 후계 구도의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자의 무게란 그랬다. 이안은 그런 민혁을 보고 턱을 긁적이더니, 전보다 훨씬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혹시 가기 전에 뭐 하나만 내 마음대로 하고 가도 될까?”
조금은 뜻 모를 질문이었다. 때문에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던 다른 3세들의 얼굴과 꼼짝하지 않을 것 같던 민혁의 고개까지도 조금이나마 움직였다.
여전히 심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연우는, 조금은 일부러 만든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형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야?”
“뭐. 대충은.”
“그럼 그걸 왜 허락을 받아. 신화그룹 인사총괄 님이.”
분명 겉포장만큼은 무뚝뚝하건만 그 안에 담긴 뜻만은 분명했다. 이안은 제게 그렇게 말해 놓고 공연히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하는 막냇동생을 보며 잠시 눈만 깜박이다가, 결국 전과는 조금 다른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려버렸다.
“세상에. 들었니. 우리 막내가!”
결국 이안은 이안이다.
동생들을 끔찍이 아끼는 신화그룹의 맏이. 그가 비숍의 이름을 얻은 건, 왕과는 또 다른 절대적인 예우의 의미이기도 하다. 제가 잘못을 한 것 아닌데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두 손으로 가리듯 턱을 괴고 있던 민혁은, 그제야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형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받았다.
“……형. 사실, 형이 연우 자를 수도 있어. 쟤 팀장이잖아.”
“잘라버리자. 오빠. 이제 자를 때도 된 거 같아.”
언제나 든든한 우군이었던 형과 누나는 순식간에 적으로 돌변했다.
결국 남매는 이안의 입에서 여느 때와 같은 경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데 성공했다. 이안은 눈가에 주름이 다 잡히도록 큭큭대고 웃으며 제 연년생 동생에게 ‘현아, 어떡할까?’하고 다정하게 물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별 개입 없이 지켜만 보던 이현의 대답은 짧지만 진심 가득했다.
“내 밑으로 보내봐.”
3세들 중 이안은 누구보다 가장 듣기 좋게 소리 내 웃는다. 이연우는 그런 제 사촌 형을 보며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눈을 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오늘 바빠. 나중에 또 봐.”
“응. 그래.”
사실, 어쩌면 저렇게 예쁘게 마주 웃어주는 사촌 형 덕분에 걱정 하나를 던 셈이다. 언제라도 다시 비슷한 상황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최소한 덜었다. 못된 생각일지는 몰라도 사람은 머릿속에서만큼은 뭐든 가정하고 떠올릴 수 있는 거다.
신화 가의 저택 안에서의 이연우는 3세들과 같은 가족들이 아는 막내 이연우였다. 그곳에서 그는 낮은 채도의 조금은 가벼운 의상을 걸치고, 가끔은 부루퉁한 표정을 건 채로 빈정대는 것도 허락되는 동생의 위치다.
하지만 세상 누구나 그렇듯 위치에 따라 사람도 달라진다.
이연우 역시 그렇다. 그 웅장한 부지를 빠져나온 순간부터, 이연우는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눈짓 한 번 쉽게 흘리지 않는 신화그룹의 극우성 알파일 뿐이다.
연우는 뒷좌석에서 서류 몇 개를 눈으로 훑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온 신문이랑 일정 하나 잡죠.”
“예.”
“그리고, 홍보팀에 연락해서 외부 대응 준비시키고, 법무팀이랑 임시 주총 준비하세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비서는 백미러 너머로 보이는 제 상사의 얼굴을 훑었다. 보좌진들이 가장 대하기 어려워하는 3세라는 위용에 걸맞게, 이연우는 슬쩍 안색을 살피는 것으로는 그 뜻을 살피기 어려웠다.
“어떤 내용으로 말입니까?”
“신화그룹 현 이사, 스캔들로 인한 해임 건입니다.”
“……예.”
마치 일상적인 하루를 전하듯 평이한 어조로 흘러나온 폭탄이었다.
덕분에 비서는 그 말에 놀란 기색조차 띠지 못한 채 속으로 놀란 한숨을 겨우 삼키며, 잠시 긴 신호가 걸렸을 때 슬쩍 비서팀에 문자 하나를 찍어 보냈다. 그런데 그때, 잠잠하던 이연우의 휴대폰이 작게 울렸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것을 흘끗 바라보던 이연우는, 이내 조금은 급하게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에. 형!”
최소한 조금 전의 대화에서 목소리가 두 톤은 더 올라갔을 거다.
비서는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헉’하는 소리를 내는 실수를 할 뻔했다. 일전의 그 ‘쪼물쪼물’ 하고 싶다던 형이 분명했다. 정말 저 이연우가 잡혀도 제대로 잡혔다 싶기도 했다.
-혹시 바쁜데 전화했어?
“아뇨. 전혀.”
조용한 차 안에서의 통화는 휴대폰 너머로 그 베일에 싸인 ‘태호 형’의 목소리가 슬쩍 전해지게끔 하는 행운도 있었다. 전혀 안 바쁘다니! 비서는 불과 몇 분 전 제가 들은 엄청난 지시를 상기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오늘 저녁은?
“바쁘지도 않지만, 형이 만나자는데 일이 있어도 빼야죠.”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임태호는 전화 내내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로 질문만 한다. 이연우는 백미러로 눈이 마주친 비서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라온이랑 저녁은 잡지 마.’
“그나저나 웬일이에요. 임태호가 먼저 저녁 먹자는 연락을 다 하다니.”
-……그냥.
“그냥?”
-하루 종일 노트북 보고 있으려니까 피곤하기도 하고.
오메가의 말에는 드문 어리광이 묻어났다.
비서는 지금 제 상사의 얼굴을 임태호라는 사람이 꼭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 서늘한 얼굴을 한 채로 있던 아름다운 사내가, 귓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예뻐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한 채 통화 하고 있는 걸 저만 보기는 좀 아까웠다.
“맞아. 그렇겠다. 자기소개서 그거, 쓰는 거 일이잖아요.”
-써 본 적 있어?
임태호는 요새 재취업을 준비 중이다.
꽤 괜찮은 회사에서 경력을 쌓았고, 그 자신도 이제껏 놀며 지내지 않았다 보니 사실 불황 속에서도 전망은 크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태호는 그 성격답게 약간은 걱정을 스스로 찾아 하는 편이라, 하반기 공채를 앞둔 요즘 조금 지쳐 있었다.
그걸 잘 아는 이연우는 얌전히 자신의 로열로드를 이실직고했다.
“……죄송합니다.”
-와. 금수저!
“금수저라니. 너무 낮춰 말씀하시네요. 최소 다이아죠.”
-하하. 맞아. 아, 연우야, 잠깐만.
웃음기 어린 태호의 목소리가 잠깐 휴대폰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틈을 보고 있던 비서가 작게 소곤거리는 보고과 겹쳐졌다.
“라온 신문과 두 시간 뒤로 일정 잡았습니다.”
그건, 다정한 연인과의 대화와는 거리가 먼 나이트의 움직임을 알리는 첫 나팔이었다. 이연우는 제 비서에게 낮게 대답했다.
“삼십 분 뒤로 하죠.”
“예?”
“그 건방을 떨어두고 어디서. 삼십 분. 머리 처박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세요.”
너무나 고운 미소를 띤 얼굴로 하는 말이라, 사실 비서는 몇 초간은 그 문장과 내용을 이어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나 매끄럽게 이연우를 수행했던 그답지 않게 잠시 멍하게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비서는 뒤에서 누군가가 경적을 밟는 소리에 후다닥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연우야. 네 거 택배 왔는데?
“어. 딱 맞춰 왔네요.”
비서는 마치 노래하듯, 또 속삭이듯 다정하게 이어지는 달짝지근한 목소리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눈에 힘을 주며 운전대를 붙잡았다. 보아하니 오늘은 참 많은 일이 있을 거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모자라다.
하지만 3세들 중 가장 대하기 쉬운 듯 또 까다롭던 이연우는, 오늘 비서의 혼을 제대로 뺄 작정인 듯했다.
“뭐 좀 사서 보냈어요.”
-응? 뭐?
“형이랑 섹스할 때 쓰려고. 이것저것.”
비서의 기본 소양중 하나는 운전 실력이다.
급정거 따위 없이 언제나 매끄럽게 차를 몰아야 하고, 가급적 제 운전으로 뒷좌석에 타고 있는 상사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비서는 방금 저도 모르게 정지선에 조금 급하게 멈췄다.
제발 목소리라도 조금만 천박했더라면. 저 고아한 얼굴이 조금만 더 흠잡을 데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비서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사실 그는 나름대로 제 상사인 이연우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던 사내였다.
-……이연우 너, 이게……, 다…….
“혹시라도 나한테 질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고민한 건데.”
이연우는 나른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맨날 그 생각밖에 안 한다고 말하면 진짜 좀 질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였다.
“SM은 안 해 봤죠, 형?”
연인을 떠올리며 입에 담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단 내가 뚝뚝 떨어졌다.
이쯤 되면 비서가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였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었다. 이연우는 제 앞좌석에서 작게 콜록거리는 헛기침 소리 따위에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이, 연인과의 야한 통화에만 집중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형은 약간 매저 기가 있어요.”
-……내가 언제. 아니야.
“아닌가?”
-아니야. 절대로.
잔뜩 힘을 주어 부정하는 임태호의 얼굴이 얼마나 붉게 변해 있을지 보지 않아도 뻔히 그려졌다. 그걸 상상하니 왠지 목이 마르고 아랫배가 빳빳하게 당기는 기분이기도 했다. 연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로 눈을 휘어 웃으면서, 태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상냥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
“전 형 앞에 무릎 꿇는 거 생각만 해도 완전…….”
어느새 익숙한 차창 너머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연우는 라온 신문에 가서 담판을 짓기 전, 회사에 들러 결재해야 할 서류가 몇 개 있었다. 그건 나이트라기보다는 홍보팀 팀장의 업무에 더 가깝다.
“어쨌든, 이따 우리의 숨겨진 성적 취향을 찾아 개처럼 뒹굴어 보자고요. 사랑해요. 형.”
-끊어!
그 이연우가 휴대폰에 뽀뽀하는 소리까지 내는데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끊을 수 있는 오메가는 세상에 임태호가 유일할 것이다. 아니, 사실 이연우는 그가 전화를 끊기 전에 먼저 목소리가 끊어지는 경험을 해본 일이 매우 드물다.
양측의 입장을 모두 대변하자면, 임태호 역시 이렇게 먼저 끊어본 건 스팸 전화도 공손히 거절하는 그의 서른 셋 인생에서 거의 최초의 일이었지만, 여하튼 그렇다.
이연우는 뚝 끊긴 휴대폰을 들고 잠시 그의 갈색 눈동자를 깜박, 깜박 했다.
“……와.”
솔직히 비서는 몇 초쯤 걱정했다. ‘저렇게 전화를 먼저 끊다니! 기분 나빠하시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건,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불필요한 몇 초였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알파는 그걸 충실하게 증명했다.
“방금 진짜 섹시하지 않았습니까?”
“…….”
입이 있지만 할 말은 없었다. 비서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여기서는 그 어떤 대답보다 이 고요함이 좋은 답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오랜 비서 경력이 낳은 선택은 역시 틀리지 않은 듯했다.
어느새 신화그룹 나이트로 완벽하게 돌아간 이연우가, 태연하게 차에서 내리며 혼잣말처럼 웃었으니까.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Epilogue
임태호는 초등학교 때부터 손 안 가는 아이였다.
특히, 별다르게 깨우기도 전에 아침부터 반짝 눈을 뜨는 점이 그랬다.
하지만 오늘따라 태호는 유독 일찍 일어났다. 아예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어둑어둑 할 때부터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성에 차지 않는 곳을 다려놓은 옷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람이 너무 긴장을 하면 물 한 모금도 마실 생각이 안 든다고, 아침 식사는 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태호는 문득, ‘아무것도 안 먹었다가 조용할 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나면 어떡해?’하는 생각에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커피와 식빵 한 조각도 챙겨 먹고 나왔다.
출근시간에 사람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채 지하철을 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오늘 아침은 운 좋게 자리까지 났다. 덕분에 태호는 졸린 얼굴의 승객들 사이에서 유독 또랑또랑한 눈으로 앉아, 제 오래된 지갑을 꺼낼 수 있었다. 그 지갑에는 어제 막 받은 친구가 하나 있다.
그건 몇 년간 썼던 사원증과는 완전히 다른 새빨간 모양의 카드였다. 임태호는 그 위에 적힌 이름을 작게 입 안으로 굴려 읽어보았다.
‘사원 임태호.’
오늘은 몇 달 만의 새로운 첫 출근 날이었다.
“앞으로 우리 팀에서 함께할 임태호 씨입니다.”
이현은 여느 때와 별반 다를 거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그의 팀애 새로 들어오게 된 직원을 소개했다.
특별채용.
그것도, 무려 인사총괄이 직접 집까지 삼고초려해서 스카우트했다는 ‘사원’. 그 기묘한 단어 조합은 표면상으로는 그게 바로 임태호가 이현의 팀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였다. 태호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유독 눈을 빛내고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앞으로 함께 하게 될 사람들이 한결같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들의 얼굴에 깔려 있는 약간의 긴장이 느껴졌다.
태호는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임태호입니다.”
정말 과장 않고 천 번은 넘게 연습한 문장이었다. 덕분에 태호의 첫 인사는 제법 나직한 호감형으로 흘러나왔다. 애초에 태호의 목소리는 살짝은 낮은 편으로 듣기 편한 부드러운 저음에 가까웠다.
“갑작스레 큰 기회를 얻게 된 거라 많이 얼떨떨하고, 또…….”
사실 임태호의 이 인사는 연인이자 약혼자인 알파와 함께 준비한 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벌벌 떠는 태호의 옆에서 연우가 함께 들어주며 문장을 다듬어 준 것에 가깝다. 하지만 태호는 저와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 그 잘 만든 말들이 매끄럽게 뱉어지지 않았다.
태호의 말이 멈추자 당사자보다 더욱 철렁한 건, 며칠 전부터 태호가 올 자리를 하루에 세 번씩 물티슈로 닦던 현민이었다. 그는 속으로는 온갖 소리를 다 내면서 태호의 첫 인사가 성공리에 끝나기만을 응원했다.
하지만 ‘신입 사원’의 이어진 말은 유현민은 물론 이현의 예상과도 좀 달랐다.
“……실은, 다들 아시다시피 낙하산입니다. 죄송합니다.”
언제나 미리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기 좋아하는 태호가, 드물게도 선택한 임기응변은 깔끔한 인정이었다.
임태호는 이미 오랫동안 다닌 전 직장에서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의 눈빛이, 표정이 달라지는 순간을 겪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아예 진솔하게 그런 싹을 뽑고 시작하고 싶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는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결정적인 기회는 인맥으로 온 거라 다름없어서…….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안이 출국 전, 그의 권한으로 단행한 인사는 바로 임태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인사 총괄 이안의 삼고초려 스카우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안의 임태호 영입은 뒤로 갈수록 스카우트라기보다는 어쩌면 인정에 의한 호소나 부탁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안은 사촌 동생의 연인이 소위 ‘제 사람들’로 인해 회사에서 퇴사하게 된 것을 못 견뎌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연우의 스케줄 관리 담당으로 붙이는 쪽을 고려했었다. 연인이기도 하니 서로가 더욱 시너지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임태호는 그것을 단 일초도 고려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우선 이런 식으로 제가 신화 그룹에 들어가는 건 너무 눈에 띄고 죄송스러운 일이라는 게 가장 컸고, 두 번째는 이유는 ‘같이 일하면 서로 싸우거나 안 좋은 말 하게 되니까…. 저는 응원해주고 싶어요.’ 였다.
감정이 풍부하고 솔직한 이안은 그 말에 내심 눈물을 찍어 누르며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왔더랬다. 그러다 문득 제 동생이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위치도 다시금 상기했다.
이게 바로 임태호가 하고 많은 팀 중 이현의 팀으로, 약 보름 간 팀장과의 일대일 특별 교육을 받고 특별 채용 된 경위다. 여기서 이현 그의 개인 의견이 반영될 기회는 그다지 없었다. 늘 방긋방긋 웃는 형이 찾아와서 ‘현아, 연우 말고 다른 사람을 네 밑으로 보내야겠어.’ 하고 부탁인지 협박인지 모를 목소리로 말하는데, 어쨌거나 그도 팀장이다. 이안이 까라면 까야 한다.
임태호는 하나하나 눈을 마주쳐 웃은 뒤, 정말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깍듯한 인사에 개발 1팀의 팀원 몇은, 순간 슬쩍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에 담긴 뜻은 이거였다. ‘에이. 아니네, 뭐.’
사실, 신화 그룹 직원들 사이에서는 최근 묘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3세, 이연우에 관한 거였다.
이연우가 연애를 시작했댄다. 아주 장난이 아니라고 했다. 가끔 복도에서 전화를 하며 걷다가 사르르 꿀이 떨어지다 못해 뒤로 한 500미터는 꽃밭으로 만드는 것 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한 게 모조리 그 사람 때문이라고 한다. 워낙 보안이 철저하기는 하지만. 저쪽 비서팀의 풍문에 따르면 차 안에서 통화하는 건 더 난리랬다.
그런데 요 몇 주 어디선가 솔솔 흥미로운 얘기가 흘러나왔다. 바로 조만간 그 문제의 ‘이연우 애인’이 그룹에 입사한다는 얘기였다. 당연히 이 시기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사에 올랐다.
물론 그중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이 개발 1팀의 임태호였다.
그 ‘이안’의 삼고초려에 그 ‘이현’의 팀에 배정이라니. 누군가는 그 사람이 백퍼센트 소문의 그 사람이라며 확신하며 펄쩍 뛰었었다. 하지만 개발 1팀의 직원들은 이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평화가 이어지는 것을 감사히 여겼다.
보아하니 저 사람은 아니다.
좀 특이하게 들어오기는 했지만, 저렇게 수수하고 깍듯한 사람이 재벌 3세의 애인일 리가 없다. 재벌 3세도 보통 3세인가? 그 이연우다. 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도 보일 것만 같은, 누구보다 화려한 극우성 알파다.
임태호는 근 한 달간의 근심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평온하게 인사를 마치고, 아직은 어색한 제 자리에 뻣뻣한 자세로 처음 앉았다. 유현민의 바로 옆자리였다. 현민은 그런 태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태호 형. 환영해요.”
“응. 고마워.”
유현민은 어찌나 비실비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지 처음 본 순간부터 쭉 평소보다 얼굴이 동그랗게 보일 지경이다. 첫 인사로 시작된 오전은 생각보다 꽤 바쁘게 흘러갔다. 근 보름 동안 이현과 매일 저녁 만나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업무 파악을 하기는 했지만 또 회사에 나와 앉아 있으니 체감이 달랐다.
그저 앉아서 사용하는 사내 인프라를 파악하고, 자료를 훑는 것만으로도 오전 몇 시간은 우습게 훌쩍 갔다.
“저어. 식사 하러 가요. 다 같이 제대로 인사나 할 겸.”
“네!”
현민이 챙기지 않아도 싹싹한 성격의 직원 하나가 먼저 태호에게 말을 건넸다. 태호는 그 문장 하나가 사무치게 고마워서, 얼른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가 할 얘기가 은근히 많았다. 사실은 개발 1팀과 이전에 인연이 있었다는 것부터 차근차근 말하다보면 점심시간이 모자랄 거다.
임태호는 팀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갈 준비를 하다가 저만치에 있는 사무실에서 빠져나오는 이현과 눈이 마주쳐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현은 참 제 사촌 동생과는 딴판인 남자의 태도에 마주 인사해 준 뒤, 그도 식사를 하러 가려고 했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그가 속으로 혀를 차며 욕하던 당사자가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
“…….”
직장인이 출근과 동시에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퇴근이라지만, 점심시간 역시 휴식의 의미에서는 제법 큰 의의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일분일초가 소중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발 1팀의 사람들은 쉽사리 발을 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홍보팀 이연우가 한참을 떨어진 개발 1팀을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는 꽤 된 일이지만, 몇 달 전 이현이 이연우를 찾아가 회사가 술렁였던 이후 오늘 정확히 그 반대가 된 꼴이다. 개발 1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무실 유리벽 저 너머로 보이는 장신의 인영에 몇 초간 단체로 꿈을 꾸는 건가 하는 헛된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이연우는 상냥한 목소리로 그들의 단체 환각을 살포시 깨부숴 주었다.
“음, 저 눈치 없이 다른 분들이랑 같이 하는 첫 점심 식사 방해하러 온 건가요?”
……세상에 저 얼굴은 뭐라니!
이연우 앞에서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하는 유현민의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그 신화 그룹 나이트 이연우는 지금 만면에 옅은 홍조를 띠고 있다. 귀 끝까지 살짝 발갛게 물든 건 물론이다. 그건 어딜 봐도 설렘과 부끄러움 가득한 알파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묘하게 청초함까지 깃든 표정에 솔직히 이현까지도 좀 얼이 빠졌다.
그는 저딴 표정을 하는 사촌 동생을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하늘에 맹세코 처음 본다. 이연우는 그 통통하니 예쁜 입술을 한 번 가볍게 깨물면서 곤란한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은 마치 ‘어떡하죠, 형?’하고 묻는 것만 같은, 전형적인 연하 애인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한 건 부끄러움 많은 서른셋의 오메가였다. 임태호는 아침의 인사에 이어 두 번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다음은 제 연인, 이연우에게로 직행이었다. ‘사람 없는 곳, 사람 없는 곳, 사람 없는 곳!’ 임태호는 입 모양으로 자신의 알파에게 세 번 연속 급하게 속삭였다. 이연우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듣고 생긋 눈을 접어 웃었다. 그 모습은 어찌나 당혹스러울 정도로 예쁘던지, 이현은 기어코 작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한 편, 이연우는 제 오메가의 바람대로 회사에서 인적 드문 구석진 비상계단으로 임태호를 이끌었다. 그리고 단 둘이 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보는 순간 쏟아내고 싶었던 말을 아무렇게나 마구 내뱉었다.
“으으으으, 혀어어어엉, 자기야아.”
“연우야, 쉿! 조용! 회사야. 진정해, 조용, 조용해!”
“미안해요. 내일부터는 격일이나 며칠에 한 번씩 올게요. 그런데 오늘은 포기가 안 됐어.”
정말이다. 이연우 그도 눈치가 있다. 아니, 오히려 눈치가 빠른 사내다.
하지만 정말 오늘만큼은 주체가 안 됐다. 그는 임태호만큼이나 일찍 일어나서 새벽부터 발을 동동 굴렀다. ‘태호 형은 잘 일어났을까, 혹시라도 어제 너무 긴장해서 늦잠 잤으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부터 시작해서 회사에 도착해서는 그렇게 떨더니 인사는 잘 했을까, 회사 의자는 안 불편할까, 자리는 좋을까, 테이블 높이는 괜찮을까 등등 온종일 그가 할 수 있는 임태호에 대한 생각이란 생각은 다 했다.
그런데 맙소사.
저와 같은 회사 건물에 있는 임태호라니. 이제 임태호가 그룹의 사람이라니. 이연우는 여전히 빳빳한 기운이 남아 있는 임태호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핥듯이 집요하게 훑으며 단어 하나하나 그득한 욕망을 담아 입을 열었다.
“아. 씨발. 미치겠다. 왜 이 생각을 진작 못 했을까. 등신 새끼가.”
“이연우! 누가 들어!”
“캠퍼스 커플을 못했으면 오피스 커플을 하면 됐는데. 형. 저 지금 심장 터지려고 해요.”
이연우는 여전히 조금 상기된 얼굴로 연인의 보드라운 손을 가져다가 제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솔직히 처음에는 장난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태호다. 하지만 와이셔츠 한 장 너머로 단단한 가슴 근육이 짚어지고 머지않아 정말로 쿵쾅대고 뛰는 박동이 느껴지는데, 다섯 살 연하 연인의 설렘이란 게 이렇게 큰가 싶어서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연우는 정말 지금 말 그대로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회사에 왔는데 임태호가 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엄청난 효율의 환경이 있을 수가 있는지, 아무리 봐도 실감이 안 났다. 알파는 오늘 밤에 이집트 어디에서 여행 중이라는 제 사촌 형 이안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진심 가득한 감사를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태호 형. 점심 뭐 드실래요? 첫 점심 제가 살게요.”
“아니야. 뭘 또 네가 사.”
“와. 그럼 형이 사 주는 건가요. 이것도 또 설레네요, 미친다. 진짜.”
솔직히 이연우는 지금 임태호가 정수기 물만 따라줘도 황홀해 할 거다.
태호는 뺨을 예쁘게 물들인 채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제 알파를 보며 다시 옅게 웃은 뒤, 슬쩍 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이야기하느라, 벌써 황금 같은 점심시간의 꽤 많은 부분이 날아가 있었다. 저야 대충 먹어도 된다지만 연우까지 부실하게 때우도록 하는 건 경우가 아니다.
“……있지. 연우야.”
“네에.”
“요 앞에 김밥천국 갈래?”
태호는 콧잔등을 긁적이며 조금은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알파는 그런 제 오메가의 모습 하나하나를 단 일초라도 놓치기 아쉽다는 듯, 눈도 아껴 깜박이며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따 저녁에 비싸고 맛있는 거 사 줄게. 오늘 첫날이라 너무 눈에 띄는 건 좀 그래서.”
작게 이어지는 문장의 끝은 ‘안 될까, 연우야?’하는 나직한 부탁이었다. 그걸 들은 이연우의 입가에는 아주 천천히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안 될까?’라니!
임태호는 아직도 그가 손에 쥔 것을 모른다. 알파는 제가 먼저 연인의 손을 깍지 끼어 잡았다.
“갈까요. 그럼.”
사람들을 눈을 피해 한 분식집 데이트는 오랜만이었다.
그건 꼭 대학교 때로 돌아간 것도 같아서, 태호는 식사를 하며 제 연인에게 슬쩍 그 얘기를 했다가 ‘전 이제 대학에 미련을 버렸어요. 회사에 집중할래요.’하는 대답만 들었다.
그러고는 들어오는 길에는 십분 정도 시간 간격을 둬서 따로 들어왔다.
이연우도, 임태호도 서로의 관계를 감출 생각은 없었다. 특히 이연우와의 관계로 이전 직장에서 진저리치는 시간을 보낸 태호가 그 부분에 더욱 단호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세상 모두가 알게 된다 하더라도 얌전히 눈에 안 띄게 사귈 수는 있는 거다.
특히 회사에 출근한 첫 날은 더욱 그렇다. 태호는, 적어도 오늘 점심은 그렇게 보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임태호의 착각이었다. 개발 1팀의 신입 임태호가 신화그룹의 뜨거운 감자가 되기까지는, 그 점심시간을 포함한 딱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얼굴을 예쁘게 물들인 채 눈웃음치는 ‘그 이연우’와 개발 1팀의 새 사원이 나란히 회사 근처 김밥천국에 갔고, 이연우는 고구마치즈돈가스를, 임태호는 육개장을 시켜먹은 뒤 후식으로는 스타벅스에서 나란히 빨대를 물고 나왔다는 근황은 사내 메신저를 통해 이제껏 알려진 그 어떤 3세 비화보다 더 빨리 사내 전체에 퍼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