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The Knight On The Rim Is Grim
“혀엉, 어디예요?”
밖에서는 말조차 별로 많지 않은 그 이연우가 이렇게 다정하다 못해 입맛까지 달짝지근해질 정도로 애교 가득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알면, 꽤 많은 이들이 놀랄 거다. 물론 그건 거의 두 달 만에 모두 모인 식사자리에 있는 신화가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으응, 회사구나. 저녁은 먹었어요? 저는 지금 먹으려고요.”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이연우는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내였다. 연우는 단 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을 한 채로 상냥하게 말을 이어갔다.
“에이, 요새 보면 형이 저보다 더 바쁜 것 같은데요. 건강 상할까 봐 엄청 걱정이에요.”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장 표정 관리가 힘든 건 이민혁이었다.
민혁은 제 부모님은 물론 사촌 형제들과 그 형제의 부모인 이정호 전 대표 부부의 입까지 꾹 틀어막아 버린 막내의 말에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그 옆에 있는 이연아의 질린 표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보통 어른들 앞에서라면 저런 통화를 안 할 법도 한데, 역시 이연우는 이연우였다.
결국 연우는 나직하게 한숨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로 제 아버지 이주호 회장의 헛기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아. 보고 싶다, 진짜.”
“……흠, 크흠.”
“하하. 그래요. 주말에 봐요. 응.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네에. 네.”
전화를 끊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쁜 구슬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처럼 달콤한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덕에 저 통화의 주인공을 아는 3세들을 제외한 이주호, 이정호 부부의 표정은 한없이 묘해졌다.
민혁은 상황을 설명하라는 듯 저를 향해 눈짓하는 제 어머니의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물만 삼켰다. 이건 누가 봐도 이연우가 직접 설명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주호, 이정호 부부와 이안, 이현 형제. 거기에 삼남매까지 더해서 모두 아홉 명이나 모인 널찍한 공간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찼다. 아니, 정확히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자마자 평소의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서 익힌 당근을 찍어 먹는 이연우의 포크 소리만 났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삼남매의 어머니이자 신화가의 안주인인 박희원 관장이었다.
“……누구니?”
정확히 이름을 지칭하지 않고 떨어진 물음이었건만, 그 질문이 향하는 곳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질문을 받은 이연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입에 넣고 씹고 있던 음식을 느긋하게 삼키고 나서 딱 그만큼이나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어요. 존나 예쁜 형.”
전혀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었건만 이연우가 말한 탓인지 왠지 그 정도로도 충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민혁의 입에서 한참을 꾹 참던 옅은 웃음이 터졌고 이안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담담한 반응인 건 이연우가 그러든지, 말든지 식사에만 집중하던 이현뿐이었다.
“다들 알고 있던 게냐?”
“연우가 얼마나 많이 얘기하는지 알면 큰아버지 놀라실걸요.”
이안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이주호 회장을 향해 상냥하게 대답했다. 이주호 회장은 신화그룹 3세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났던 조카 이안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뻐했었고, 이안은 그랬던 큰아버지 이주호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의 누구냐? 나도 아는 치냐?”
“음. 그건 연우한테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겠는데요.”
이안은 이주호 회장의 추궁을 살살 피해 가는 것만큼은 그 아들인 이민혁보다 한 수 위였다. 그리고 심문하듯 캐묻는 것보다 살살 달래며 물어야 하는 이연우를 그 부모보다 더 잘 다루는 것도 다른 사람이었다.
바로 이정호 전 대표의 오메가이자 이안, 이현의 또 다른 아버지인 사내, 지원형이었다.
“와, 우리 예쁜이 누구 만나? 나 볼래.”
신화가 안에서 이연우를 향해 ‘예쁜이’ 같은 단어를 쓰는 건 지원형이 유일하다.
이주호 회장 부부는 제 자식들이 본격적인 후계 경영에 참여했을 때부터 ‘이 팀장’ 같은 식의 호칭으로 불렀을 정도로 친구 같은 부모와는 거리가 먼 편이다. 이연아나 이연우가 부모인 회장 부부보다 맏이인 이민혁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은 이유도 그런 살갑지 않은 태도가 한몫했다.
하지만 무뚝뚝한 편이었을 뿐이지, 제 아이들에게 무심했던 쪽은 절대 아니었던 터라 이주호 회장 부부는 조금 초조한 눈으로 지원형의 행동을 좇았다.
원형은 3세들 누구에게나, 심지어 그 자신의 아이인 이안과 이현에게까지 친구 같은 부모였기에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연우와도 유독 가까웠다.
“사진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어. 보자, 보자.”
흥미롭게 눈을 빛내는 지원형의 시선이 시조카 이연우가 건넨 휴대폰 액정에 한참을 머물렀다. 원형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채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전부터 말로만 들었던 ‘청순섹시남신’이 내심 궁금했던 이안 역시 제 아버지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삐죽 기울였다. 그리고 그 웃음이 똑 닮은 제 아버지와 똑같은 표정이 됐다.
덕분에 이연우의 부모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이 되었다. 사진 한 장으로 저런 얼굴이 될 만큼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져서다. 이어지는 지원형의 말도 그 근심에 한몫했다.
“…야, 이거 욕하는 거 아닌데. 우리 예쁜이 짝으로는 의왼데?”
“뭐가 의외예요?”
“너 맨날 쭉빵이들만 만났잖아. 정호야, 봐봐.”
이주호 회장은 막내아들의 휴대폰을 엉겁결에 받아 쥐는 제 동생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정호 전 대표는 제 오메가처럼 한동안 이연우의 휴대폰 액정 속 사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형님.”
“뭐냐?”
불같고 괄괄한 인상인 이주호 회장과는 달리 유순하고 부드러운 이정호 전 대표는 그 아들인 이안이 쏙 빼닮은 것 중 하나다.
“진짜 조금 의왼데요.”
“우리 태호 형이 뭐가요!”
결국 성격 급한 이주호 회장은 제 동생에게서 아들의 휴대폰을 건네받아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휴대폰 안에서는 동글동글한 인상의 평범한 사내가 눈을 감고 있었다.
사실 가족들의 ‘의외다’라는 말은, 정확히는 태호를 향한다기보다는 이연우의 과거를 비롯한 굉장히 복합적인 ‘의외’를 뜻한다. 지원형이 말했다시피 이연우는 언제나 소위 ‘쭉빵’인 사람들을 선호했고, 그들과 한결같을 정도로 가벼운 만남을 가졌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보든 말든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온갖 애교를 피우며 말하는 사람이라니. 누구라도 의외라는 말이 나왔을 거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이연우의 업보다.
이주호 회장은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태호 형?”
“알잖아. 선배!”
선배. 선배. 선배.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주호 회장 부부는 얼마 안 가 자신들의 막내가 언제나 공손하게 전화를 받던 예의 그 ‘선배’를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작게 입을 벌렸다. 지원형은 그 반응들을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아, 캠퍼스 커플 좋은데. 학교 다니면서 배 부르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거 빼고.”
“……원형아.”
“틀린 말 했냐?”
대학교 2학년 때 결혼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굉장히 이른 선택일 것이다.
하나 이정호 전 대표 부부는 그렇게 굉장히 어릴 때 결혼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뺨에 볼우물이 쏙 파인 미소를 지은 채로 멋쩍게 눈을 굴리고 있는 오메가, 첫째 이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원형의 말은 이연우에게는 큰 도움이 안 됐다.
이연우는 임태호와의 캠퍼스 커플에는 장렬하게 실패한 쪽이다. 그 때문인지, 식사 시간에 큼직한 폭탄을 아무렇지도 않게 터트린 알파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비뚜름해졌다. 사실 그는 요새 태호와 제가 동갑이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때로는 차라리 자신이 더 나이가 많은 쪽이 나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 사항에 빠지기도 한다.
요 며칠, 임태호는 전화 통화도 어려울 정도로 바빠졌다.
목소리 역시 힘이 하나도 없다. 그런 걸 들을 때마다 얼마나 심장이 내려앉는지 임태호는 모를 거다. 제가 그랬듯 가끔은 칭얼거리기도 하고, 조금은 어리광을 부리며 기댄다면 차라리 마음이 좀 더 편할 텐데.
임태호는 늘 여전하다.
오메가라는 사실을 제게 털어놓지 않았던 것처럼, 언제나 제 뒤에서 묵묵히 서 있었던 것처럼, 태호 그 자신의 힘든 말은 언제나 눌러 삼킨다. 방금도 그랬다. 말하는 목소리가 축 늘어진 게 단순히 바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는데도 임태호는 단 한 번도 힘든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연우는 그게 조금 속상했다.
그래서 꿈꿔 봤자 쓸모없는 생각을 전보다 훨씬 자주 하게 됐다.
차라리 내가 임태호보다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동갑이었다면 좀 더 나에게 기댔을까. 이연우는 조금 식어서 질겨진 고기를 씹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임태호는 회사 구석 계단에 숨어 하던 제 연인과의 전화를 끊은 뒤 한참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 과장하지 않고, 그는 회사 사람들 중 이 사태의 진전을 가장 바라는 이 중 한 명일 것이다. 태호는 요 며칠 사무실에 앉아 있기가 버거웠다. 아니,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어딜 가나 모두 하나같이 신화그룹의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찌나 심장이 옥죄는지, 태호는 제가 뭔가 잘못하거나 실수한 게 하나 없는데도 마치 죄지은 기분이 됐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동료의 말대로 신화그룹은 계열사만 몇십 개다. 이건, 그 계열사 중 한 군데와 일어난 마찰에 불과하다. 임태호도, 태호의 회사 사람 그 누구도 모르는 이 막막한 상태를 그보다 더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제 연인에게 털어놓는다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한참을 차가운 계단에 앉아 있던 태호는 문득 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허둥지둥 일어났다. 잠깐만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해 놓고서는 너무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걸 증명하듯, 태호의 자리에는 요 며칠간 잔뜩 까칠해진 부장이 서 있었다.
“임 대리, 어디 있다 오나!”
“죄송합니다.”
임태호는 변명 대신 짧은 사과를 꾸벅했다. 이건 사회생활에서 꽤 유용한 태호의 장점 중 하나였다. 부장은 언제나 얌전히 자리에 앉아 일하던 태호에게 더 뭐라 말하지 못하고, 조금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나랑 어디 같이 좀 가야겠네.”
“예?”
“그래도 자네가 신화 쪽 담당했던 직원 아닌가.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태호뿐만 아니라 사무실의 다른 동료들의 얼굴까지 순간 긴장이 어렸다. 임태호는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가, 한 박자 늦게나마 급하게 말을 받았다.
“저, 부장님. 저는 전자 쪽과 일해서…….”
“지금 그게 뭔들 중요하겠나! 오늘 연구팀이랑 신화 재단 쪽이랑 같이 만나기로 했으니까, 긴장 단단히 하라고.”
솔직히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부장의 논리가 말도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에 뭐라고 토를 달 수는 없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아니 사실 싸움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 바닥에 있는 어느 회사에 가든 신화 재단의 메디컬센터는 최고의 VIP로 꼽힌다. 아무리 오랫동안 공을 들인 합작이라고 하더라도, 저런 절대 갑의 앞에서는 한낱 공물로 변할 뿐인 거다.
“자네 넥타이 다른 거 없나?”
“아, 태호 씨. 내 것 빌려줄게요.”
임태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태호는 저에게 자신이 차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건네 주는 동료를 향해 겨우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까마득하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감각은 고풍스러운 금테로 새겨진 ‘신화 재단 메디컬센터’라는 명패를 봤을 때 더욱 피부로 와 닿았다.
신화그룹은 8년 전부터 태호가 일방적일 정도로 좋아했던 이름이다.
사소한 가전제품부터 가끔 큰맘 먹고 사는 것들까지 태호의 물건에는 모두 그 로고가 새겨져 있는 게 당연했다. 연인이 된 후에는 그게 더해져서, 신문을 볼 때마다 혹시 모를 기사 하나를 찾아 뒤적이게 됐었다.
그런데 그 친숙한 이름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로.
임태호는 제 회사의 사장을 앞세운 여러 굵직한 중장년 사내들의 맨 뒤를 따라 걸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사실 태호는 오늘 이 자리에 올 필요가 없었다. 직접적으로 연관된 부서도 아닌 곳의 대리가 할 수 있는 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그 예상만큼 상황은 뻔하게 흘러갔다.
“…사장님,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는 게 어디 있습니까? 우리, 신화 쪽이랑 전혀 거래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저희 쪽이랑 기술 제휴를 한다거나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번 합동 연구가 날아가면, 그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제품 여러 개에 곧바로 비상이 걸린다. 그만큼 많은 일이 걸린 거다. 사장의 말에 같이 작업을 진행했던 대학 연구원 하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태호네 회사 사장과 사람들을 볼 때부터 시종일관 저런 초조한 얼굴이었다.
그걸 알아챈 눈치 빠른 회사 사람 하나는, 얼른 그 연구원 쪽으로 화제를 옮겼다. 신화 재단 사람들에게 애걸하는 게 안 되면 오랜 시간 우군이었던 자라도 회유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시도는 허튼 것이 아니었는지, 무뚝뚝한 얼굴을 한 신화 재단의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연구원은 준비되어 있던 물을 몇 모금 마시더니 잘 단정되어 있던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사실, 저희 쪽도 굳이 이러고 싶은 건 아닌데…….”
‘굳이 이러고 싶은 게 아닌데?’
입 한번 떼지 못하고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아 눈치만 보던 태호까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게 되는 말이었다. 사장은 신화 재단의 사람 중 하나가 연구원의 말을 막으려는 것을 자르고, 머뭇머뭇 눈치 보는 사내를 급히 닦달했다.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거야말로, 임태호의 회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감질나게 이어지지 않던 말은 갑작스레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말쑥한 차림의 젊은 사내에 의해 얼마 안 가 뚝 끊겼다.
“이사님 오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던 사내들은 마치 군인이라도 된 듯 급하게 일어섰다. 그 탓에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던 태호의 회사 사람들과 대학 연구진들까지 모두 어영부영 함께 무릎을 일으키게 됐음은 물론이었다.
논의가 시작되고 거의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느긋하게 들어오는 중년 사내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신화 재단의 사람들이 일제히 꾸벅 허리를 굽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얘기는 어디까지 됐나?”
“거의 끝나갑니다.”
너무나 손쉽게 화제를 끝내 버리는 재단 사람의 태도에 임태호의 회사 사람들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끝나기는커녕, 그들에게 협상은 이제야 막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오만한 태도이던 신화재단 사람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느라 바쁜 중년 사내에게 그 불편을 곧바로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년 사내는 비어 있던 중간 의자에 느슨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건 신화그룹과는 그 규모가 다를지언정 엄연히 다른 기업의 수장과 그를 돕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보일 태도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걸 깨달은 임태호의 회사 사장의 목덜미가 벌겋게 변했다.
하지만 이사로 불린 중년 사내, 박영진은 그 눈에 뻔히 보이는 모습을 눈치채고도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박영진 이사는 제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품평하듯 훑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그 누구도 말을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박영진의 입이 다물어진 건 그때였다. 시종일관 느긋한 모습이던 그의 눈은, 한 사람에게 머무른 채로 잠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인 채였다. 신화재단 사람 중 몇 명은 이제껏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치 방 안의 부속품처럼 앉아 있던 임태호를 그제야 발견했다.
설마 아는 사이인가.
박영진 이사에게 공손히 대답하던 신화재단 사람 하나는 영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통통한 얼굴의 남자는, 방 안의 시선이 모두 제게 쏠린 것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건 태호를 데리고 온 부장과 회사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눈에 띄지 않고 얌전한 임 대리. 그들이 아는 임태호는 별 특이할 게 없는, 순하기로는 회사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남자였다. 하지만 박영진 이사만은 달랐다.
“하하, 이렇게 말하기도 전에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예?”
태호의 입에서는 살짝 삐끗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한 중년 사내의 얼굴은, 이제껏 신화그룹에 관한 신문 기사를 마치 제 일처럼 꼼꼼히 읽은 태호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도 본 적 없다. 임태호는 역시 제가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회사 사람들이 모두 저를 보고 있는 것과 눈이 딱 마주쳐서 고개를 도로 원위치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했던 심장이 크게 쿵쾅대고 뛰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 게 좋지요.”
갈증이 이는 것처럼 목이 바짝 말랐다. 임태호는 저를 향해 부드럽게 입을 연 박영진 이사를 향해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나직하게 이어진 박영진의 말이 그보다 먼저였다.
“우리 어린 도련님과는 아직 잘 만나고 계십니까?”
사실 임태호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잠시 멍하게 눈만 깜박였다.
지금의 상황도, 눈앞의 중년 사내의 나긋한 표정도 모두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신화재단 사람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른 건 아니었는지 일제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태호와 박영진 이사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 기묘하게 친절한 조롱이 섞인 문장을 가장 먼저 이해한 건 역시 그 말의 당사자인 임태호였다. 태호는 놀라 자리에서 들썩이며 의자 다리가 듣기 싫게 긁히는 소리를 냈다. 임태호의 회사 사장은 그런 제 부하 직원을 보고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임 대리, 저쪽과 구면인가?”
“아, 제가 실례했군요.”
박영진 이사는 사장의 말에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제 슈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 단계를 휙 건너뛰어 임태호를 항해 작은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그 명백한 무례함에 임태호를 데리고 온 부장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태호는 제게로 불쑥 내밀어진 종잇조각을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박영진입니다.”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하는데,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임태호는 경직된 얼굴로 박영진 이사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박영진은 눈가 주름이 깊어지게 웃더니, 재단의 사람들에게 작게 턱짓했다.
더 높은 상급자의 등장에 잠시나마 상황이 나아질 것을 기대한 건, 어쩌면 바보 같은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의 작은 신호 하나에 신화 재단의 사람들은 겨우겨우 끌어왔던 협상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라 더 말을 해 보려고 해도 ‘더 논의할 사항은 없습니다. 자세한 건 법무팀과 이야기하시지요.’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반복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결국 임태호의 회사 사람들은 그 끔찍한 대우를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벌겋게 변한 눈으로 일어섰다. 태호 역시 손에 쥔 명함이 슬쩍 구겨질 정도로 힘주어 잡은 채 그 뒤를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막아서는 장난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임 대리님’은 남아야지.”
사실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몇 초 동안은 ‘회사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박영진 이사의 말에 앞서던 사람들이 저를 흘끗 돌아보는 눈을 보고, 그조차도 끝났다는 걸 알았다.
잠시나마 눈앞에 검은 막이 내려왔다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어서, 임태호는 머무는 사람의 여유도 떠나는 사람의 조급함도 가지지 못한 채 저를 스쳐 가는 사람들 사이에 섰다. 널찍한 회의실은 그렇게 얼마 안 가 단둘만 남았다.
임태호는 왠지 휘청이고 넘어질 것 같은 발에 힘을 주며 박영진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지독한 향수가 몇 개나 섞인 것 같은 박영진의 페로몬이 짚어졌다. 늘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몇 발짝 뒤에 서 있는 임태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중년 사내가 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금방 눈치챘다.
저 사람, 박영진 이사는 제가 언제 입을 여는지 구경하듯 지켜보고 있다.
태호는 짐짓 느긋해 보이는 박영진의 얼굴 뒤에 깔린 옅은 조롱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미숙하지는 않았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심호흡하고 내뱉은 말은 왠지 중간에 목소리가 갈라져서 듣기 싫게 한 번 끊겼다. 그 말에 박영진은 기다렸다는 듯 입가의 미소를 짙게 하고 잠시 웃더니 임태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태호는 그 시선에 동요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며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우리 도련님이 어찌나 자랑을 하는지 궁금해서 안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
“…….”
“별 볼 일 없는 집안 사람에게 빠지는 거야 이 그룹 오랜 내력이니 뭐, 그걸 가지고 흠을 잡는 건 제 얼굴에 침 뱉는 꼴 아닌가.”
임태호는 문득 제 연인이 저를 ‘도련님’ 같은 표현으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분명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눈앞의 중년 사내가 저를 향해 낄낄대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빈정거리며 이어지는 문장에 담긴 웃음기가 이연우를 향해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참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됐다.
박영진 이사는 입을 꾹 다문 태호를 보고 웃으며 느긋하게 덧붙였다.
“아, 맹세컨대 그때까지 나쁜 의도는 없었다네.”
기묘할 정도로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태호는 마치 제 상사라도 되는 듯 ‘임 대리, 자네는 영 관심 밖이었어.’하고 웃는 박영진 이사의 말에 처음으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박영진 이사는 그게 재밌다는 듯, 아예 자세를 고쳐 앉아 더욱 살갑게 대화를 이어갔다.
“대학 선후배라고?”
“…네. 그렇습니다.”
“꽤 오래 알고 지냈던데. 언제부터였지?”
매사에 상냥하고 화가 나려야 날 수 없는 성격인 태호이지만, 지금만큼은 속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들끓었다. 이렇게 여유롭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놀리듯 말을 잇는 박영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건 박영진이다. 태호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우가 신입생이고, 저는 4학년일 때 만났습니다.”
“4학년, 그래. 4학년. 군 복학을 했던가.”
사실, 임태호는 이때까지는 혹시 박영진에게 엉망이 된 회사 상황을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는 회사 사람들에게 저와 신화그룹의 관계를, 정확히는 이연우와의 관계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코앞으로 다가온 때마저 최대한 좋은 방향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히죽 눈을 가늘게 뜨는 박영진 이사는 그런 태호의 기대를 완전히 짓밟았다.
“바로 그게 문제였어.”
그러잖아도 잔뜩 긴장한 채였던 태호는 마치 실수를 찾아냈다는 것처럼 못 박는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 탓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목소리가 조금 떨린 채 흘러나와 버렸다.
“……네?”
“XX년도에 충남에서 군 생활 하셨더라고. 깜박 그냥 넘어갈 뻔했지 뭔가.”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있지, 있고말고.”
순식간에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휘몰아쳤다. 대체 박영진 이사, 저 남자가 제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박영진은 임태호가 시선을 어디 한군데 침착하게 두지 못하고 제 말을 짐작하려 애쓰는 걸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사실 박영진, 그는 이렇게 즐거울 데가 없었다. 그 오만해 빠진 녀석이 홀딱 반해 쫓아다닌다는 상대가 제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드디어 제대로 된 서열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거기에 베타 사단은 없었다고 하거든.”
박영진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지는 임태호의 경직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베타’인 임 대리 자네가 있던 그해, 거기엔 어떤 사람들만 있었을 것 같나?”
“…….”
“참 신기하군그래. 베타가 오메가인 척할 수 있는 겐가?”
이 회의실에 있는 두 사람 모두, 박영진의 물음이 뻔히 아는 답을 놓고 놀리듯 떨어진 것임을 잘 안다. 하지만 임태호는 그것에 불쾌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그건… 그건, 그러니까…….”
“아니면, 그 반대인가?”
뭐라고 애써 변명이라도 해 보려고 입을 달싹이던 임태호의 눈가가 벌벌 떨렸다.
박영진은 그걸 보며 속이 뻐근해질 정도로 유쾌해졌다. 저런 얼간이가 이연우의 연인이라는 것도 흡족했고, 심지어는 이제 제 손아귀에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즐거웠다. 박영진은 귓가가 벌겋게 변한 임태호를 향해 한껏 품위를 갖춘 비열한 문장을 내뱉었다.
“하하. 요새는 도련님까지 그러는 걸 보면서, 젊은 친구들 사이에 억제제가 유행인가 했다네.”
사실 임태호는 박영진의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박영진이 말하는 도련님이 제 연인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연우와 억제제라니,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호는 그 말을 곱씹을 겨를도 없이 이어진 박영진의 물음에 어깨를 들썩였다.
“자네가 오메가라는 거, 아는 사람 있나? 물론 도련님을 포함해서.”
오메가로 발현하고 억제제를 먹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듣는 물음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한참을 떨어진 병원과 약국을 갈 때가 아니면 차라리 베타로 불리는 게 훨씬 익숙한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임태호의 뒤에는 남은 여유가 없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벼랑 끝으로 떨어질 것 같은 울렁거림이 덮쳐왔다. 태호는 이제 희미하게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난 그저 현명한 판단을 권유하려는 걸세.”
박영진은 짐짓 상냥하게 달래는 말투로 임태호를 향해 웃었다. 정말 알면 알수록 예상보다 더 즐거웠다. 이연우가 쩔쩔맨다는 남자를 앞에 두고 마음대로 모욕을 주고 그 약점을 휘두르는 기회가 생길 줄이야. 사실 임태호는 형식상으로 확인하고 다른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었는데, 이런 엄청난 게 제 발로 굴러들어올 줄은 몰랐다.
제 오메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떠는 저 모습을 이연우, 그 새끼가 봐야 할 텐데.
박영진 이사는 느슨하게 다리를 꼬아 등받이에 기대며 입술을 틀어 올리다가, 느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연우와는 몇 번이나 잤나?”
임태호의 흐린 인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과 수치로 찼다. 태호는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입을 겨우 움직여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거의 10년을 붙어 다니지 않았나. 그 정도 옆에 있다 보면 신화그룹 일원이 되고 싶어서 다리 벌리는 연놈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잘 알겠지.”
“…….”
“그 더러운 멍청이들 앞에는 좋은 선배가 하나 있거든. 우리 대표님, 아니 이제 ‘전’ 대표님이 딱 그 전철을 밟아서 말이야. 헛꿈을 꾸는 녀석들이 참 많아졌어.”
모욕을 주려고 일부러 고르고 고른 단어들이 그대로 마음을 후벼 팠다. 태호는 당장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겁보다 지금의 수치에 떨면서 눈꺼풀까지 희미하게 부들거렸다. 그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아온 그가 이렇게 순수한 악의가 가득한 말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임 대리, 남성 오메가와 베타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되겠지?”
“…….”
“참 골 때리는 일 아닌가. 사실 베타라서 꽤 안심했을 텐데.”
박영진은 임태호의 눈 안에 담긴 옅은 절망감을 읽고, ‘내 말을 잘 이해한 것 같군.’하며 낮게 칭찬했다.
임태호는 그런 주름진 미소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궈 버렸다. 그는 제가 이연우에게 오메가인 걸 말하지 않은 이유를 변명할 자신이 없었다. 박영진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화그룹의 일원이 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감히 그런 건 단 한 번도 가정해 본 적조차 없다. 하지만 오메가라는 걸 감춘 근본적인 이유는 박영진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눈부시고 다정한 알파의 옆에 있고 싶어서, 그래서 베타인 척했다.
베타 임태호는 이연우의 곁에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설 수 있는 좋은 방패였다. 선후배 사이였던 과거도, 연인이 된 지금도 결국 마찬가지다.
이연우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게 다다.
이런 상황이 된 이 순간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바람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을 정도로, 이연우의 옆에 서고 싶다.
사실은, 정말 사실은…….
제가 다니는 회사가, 그 안에 있는 동료들이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하든 간에 지금 간신히 차지한 이연우의 옆을 잃고 싶지 않다.
임태호는 잠시나마 제 머리에 스친 생각을 깨닫고는 왠지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당장 저 두꺼운 문 밖에 있을 사람들을 두고서, 언제나 저를 믿는 그 다정한 연인을 두고서, 이 모래성 같은 거짓말을 지키고 싶다는 꿈을 꿨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문 임태호를 한동안 지켜보던 박영진 이사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이제 곧 작은 가십을 하나 만들 생각이라네.”
마치 달콤한 독이 서린 것 같은 어조였다. 태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못하고 그 말을 듣고 있는 저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예컨대, 재벌 3세와 평사원 사이에 있는-.”
박영진은 눈 안에 천천히 역겨움 가득한 의문을 띄우는 임태호를 지켜보았다. 말갛게 눈을 깜박이던 남자가 고작 몇십 분 만에 이런 표정을 할 수 있다니, 정말 이연우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박영진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베타 하나?”
“대체, 그게 무슨…….”
“알잖나. 자네와 퍽 친한 전자팀의 친구. 하필 알파라니. 얄궂지.”
-유현민.
태호는 저를 향해 늘 방긋 웃으며 쾌활하게 말을 거는, 이연우보다도 더 어린 사내를 떠올리고 핏기가 가셨다. 유현민은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 사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말려들 이유는 전혀 없다. 애초에 그런 관계도 전혀 아니다.
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한 채로 급하게 말을 이었다.
“잠시만요. 현민이는 전혀, 정말 전혀 상관없어요, 정말 그냥……!”
“자네는 그렇게 말하겠지. 그 친구도 그렇게 말할 거고. 그런데 세상에는 말보다 다정한 사진 몇 장이나 메시지 몇 개를 믿는 사람이 훨씬 많다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태호의 머리 위에서 춤추듯 내려앉았다. 말도 안 돼, 임태호는 작게 중얼거려 봤지만 그런 경악이 상황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임 대리, 자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네.”
박영진은 흘끗 제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살짝 혀를 차면서 전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태호는 제 절망이 눈앞의 중년 사내에게는 겨우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졌다.
“일이 터졌을 때, 아주 잠깐만 침묵하면 돼. 한 사나흘쯤, 아니 일주일 정도면 더 좋겠지.”
“…….”
“뭐 그다음에는 이연우에게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며 눈물 콧물 짜내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물을 엎지르는 거니까.”
박영진 이사는 다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의자에 힘이 빠진 듯 기대서 있는 태호를 잠시 바라보더니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퍽 유쾌하기는 했지만, 이연우가 잠시 만나다 말 하자 투성이 오메가에게 제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하지만 이제껏 계속 제대로 목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왜 이러시는 건데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던 박영진 이사는 조금 눈에 이채를 띠고 그 문장의 발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된 말을 할 수는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움츠러들었던 흐린 인상의 남자가 발악하듯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저한테, 아니, 연우한테, 다른 사람한테, 왜요!”
그리고 박영진은 그 마지막 발버둥을 짓밟는 걸 가장 좋아한다.
주름진 눈이 가늘어지며 짐짓 연륜이 느껴지는 자상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임태호는, 그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토해진 답답한 숨을 흘렸다. 정말로 알고 싶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끔찍한 벼랑으로 몰고 가는지 묻고 싶었다.
박영진 이사는 뭔가를 생각하듯 잠시 미소를 머금은 표정 그대로 임태호를 바라보다가, 진심 어린 걱정인 양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몇 년쯤 공부를 더 하고 오시면 좋겠거든.”
“뭐라고요?”
“아, 물론 개인적인 감정도 꽤 있네. 없다고 하면 거짓말 아니겠나.”
임태호는 그게 전부 아니냐고 소리를 치려고 했다. 하지만 박영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먼저 선수를 쳤다.
“하지만 말이야. 나라고 이연우가 완전히 나자빠지는 걸 바라지는 않아. 그건 그룹에도 좋을 게 없잖나?”
“…그럼 대체……!”
“임 대리, 우리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네.”
임태호와 유현민에 대한 조사와 이번 압박까지, 이건 박영진 그의 단독 행동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사내에서 입김이 세다고 할지언정 혼자서 3세들의 감시를 피해 이런 움직임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은 체스판의 뒷줄을 차지한 왕을 직접 치거나 다른 3세들과 대립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앞에 서 있는 폰의 죽음에는 무디다. 아니 오히려 환영한다. 이 모든 건, 권력의 재분배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기꺼이 만든 판이다. 박영진 이사, 그가 한 건 큰 청사진을 짠 것에 불과하다.
박영진은 멍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임태호를 향해 가까이 걸어간 뒤, 한 단어씩 힘주어 말했다.
“이민혁 신임 대표 옆의 적당한 공백.”
한편, 임태호는 박영진이 내뱉은 ‘우리’라는 표현에 순간적으로 숨까지 턱 막혔다. 눈앞의 중년 사내에게 애원하고 소리치는 것으로는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박영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이제야 겨우… 자리 잡은, 건데요.”
태호는 금방이라도 운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듯 문장을 쏟아냈다.
“연우도 그렇고, 연우 형님이나, 가족 분들도…….”
임태호는 이연우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잘 안다.
내심 재벌 3세라면 회사 안에서도 건드릴 사람 하나 없이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을 찔끔 반성했을 정도로 이연우는 매일같이 일에 쫓겼다. 하루에 겨우 네 시간 자는 게 전부라고 했었다. 그 와중에 늘 시간을 정해서 온갖 전문가들에게 지도를 받고, 신문을 항상 챙겨 보는 태호도 몰랐던 정재계 상황을 꿰고 있기까지 했다.
우아한 백조가 수면 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을 훔쳐본 기분일 정도로, 이연우는 그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써서 겨우 지금까지 왔다.
하지만 그런 감상적인 문장은 박영진의 이사에게는 날 선 코웃음만을 불러냈을 뿐이었다.
“그래. 겨우 자리 잡았지. 갓 대표 딱지를 붙였고, 이제야 이름뿐인 팀장이 아니라 새 프로젝트를 시작할 정도가 됐지. 자네 말이 맞아. 그래서, 그러니까!”
박영진은 순간 임태호가 바짝 얼어붙을 정도로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러니까, 지금이어야지. 조금이라도 휘두르면 뿌리가 뽑혀 나가는 지금이어야 한다고.”
“…….”
“이민혁 옆을 지키는 게 하나쯤은 없어져야 숨통이 트이는 사람이 자네의 그 귀여운 회사의 사람들 전부보다 많을걸세. 특히 그중에서 이연우를 원하는 사람은 더욱 많겠지.”
태호는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바짝 얼어붙은 채로 박영진 이사의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마주 보았다.
“임 대리, 자네 재량에 달린 문제라네.”
“…….”
“단 한 번 지각도 없이 성실하게 다닌 자네 회사는 물론이고, 신화그룹 이연우와 하는 연애놀음도 꽤 즐겁지 않나?”
허울 좋게 말하고 있지만 박영진이 그리는 건 이연우의 확실한 사내 매장이다.
박영진 그의 말대로 이연우가 좀 더 공부를 하고 오든, 다른 곳에서 일을 하든 간에 몇 년쯤 지난 뒤에 돌아오면 상황은 지금 같지 않을 거다. 이민혁을 지지하던 지지대 하나가 뽑힌 틈새를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이들이 빠르게 채워 갈 거고, 나이트 이연우, 그의 별명은 신문이나 경제지에서도 깔끔하게 도려내질 것이다.
몇 년만 벌면 된다.
지금처럼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그거면 나이트로서의 기능은 끝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반반한 어린 재벌 3세 도련님의 명예가 바닥에 처박히는 게 제일이었는데,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임태호가 등장했다.
재벌가의 부부들이 가장 많이 갈라서는 이유는 바로 옆에서 부리던 메이드와의 추문이 주는 수치와 모욕을 못 견뎌서다. 이 바닥의 재벌들은 지저분한 난교 스캔들보다 수직 관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더욱 못 견뎌 한다. 그런데 임태호는 거기에 딱 맞는 신입 사원까지 있다. 그걸 알게 된 임원 몇은 무릎을 치고 웃기까지 했다.
불같은 성격의 이주호 회장과, 프라이드 하나라면 누구도 위에 서지 못하는 박희원 관장이 그런 낯부끄러운 상황을 지켜볼 리가 없다. 이연우는 곧바로 몇 년쯤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처박히게 될 거고, 돌아와서 근사하지만 그 힘은 없는 명패를 쥔 채 신화그룹의 이름에만 만족해야 할 거다.
계획은 완벽했다.
“자네 회사가 이 연구에 몇 년이나 협력했지. 1년? 2년?”
박영진 이사는 잠시 거칠어졌던 말투를 느슨하게 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며칠 안에 답을 듣겠네.”
“…저, 잠시만……!”
“뭐, 대단치 않은 곳에서 그 정도 투자했으면 상당히 애착이 클 거야. 오래 기다리게 할수록 고달파질 테고 말이지.”
임태호는 채 말도 다 잇지 못한 채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박영진의 뒷모습을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
대체 이게 얼마 만의 임태호야.
이연우는 제 연인을 뒤에서 품에 안고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고개를 처박은 채 한껏 행복해했다. 밤마다 전화하며 목소리를 듣는 것도 정말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체온을 맞대고 숨소리를 듣는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다.
이연우는 따끈하게 열이 오른 임태호의 몸을 빈틈없이 단단히 끌어안으며 한껏 후희를 즐겼다.
드디어 망할, 임태호의 회사 일이 끝났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 데이트를 하고 호텔로 와서 섹스까지. 머리 한구석이 달짝지근하게 절여진 기분이었다. 제 연인은 여전히 향이 거의 짚어지지 않았지만, 사실 향이 없더라도 이렇게 살갗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한껏 거칠어졌던 태호의 숨소리가 천천히 규칙적인 리듬으로 변해 가는 걸 듣는 것도 좋았다.
제게 오롯이 몸을 기대고 손을 마주 잡은 온기가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이연우는 살짝 땀에 젖은 이마에 쪽쪽,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상기된 뺨을 한 채 눈을 감고 있던 태호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물기에 젖은 까만 눈에 제가 비치는 게 보여서, 이연우는 ‘더 쉬어요.’하고 작게 속삭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오늘은 내가 씻겨 줄까 하는 야한 생각도 조금 했다. 손에 닿는 말랑말랑한 감촉이 왠지 입을 바짝 마르게 했다.
“…연우야.”
“네에.”
조금 전까지 잔뜩 소리를 내며 매달리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살짝 가라앉은 임태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나직한 느낌이었다.
아, 씨발. 어떻게 사람이 이러냐.
이연우는 저를 마주 보는 연인의 말간 표정에 왠지 아랫배가 살짝 당기는 것을 달래며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연우는 태호의 컨디션이 좀 더 좋았더라면 아직 성에 차지 않은 제 욕심을 마구 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임태호는 평소보다 뭐든 쉽게 지쳐 나가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작은 자극에서 숨을 헐떡이며 달뜬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도 이어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게 뻔히 느껴졌다.
때문에 이연우는 아무래도 막 커다란 일을 끝낸 뒤의 탈력감이 있는 모양이라고 제법 그럴듯한 짐작까지 하면서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태호를 안았다.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그를 무리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호는 자신의 잔뜩 쉰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더니, 별 소용 없던 몇 번의 헛기침 뒤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랑 뭐 하고 싶었던 거 있어?”
막 섹스가 끝난 다음 하는 말로는 지나치게 관대한 문장이었다. 이연우는 약간 곱슬기가 있는 임태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거요?”
“응. 뭐든지.”
역시 임태호는 그 자신이 얼마나 야한 사람인지 진득하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 엉큼한 생각 대신 나름대로 순진무구한 연하 애인의 목소리를 냈다.
“전 형이랑 있는 건 다 좋은데.”
“그래도. 뭐라도 있을 거 아니야.”
하지만 임태호는 오늘따라 쉽게 수긍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여느 때의 태호처럼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을 예상했던 연우는, 어느새 몸까지 슬쩍 돌린 채로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연인을 향해 조금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 뭔가를 해 주려는 연인은 정말 눈이 아릴 정도로 예뻤지만, 오늘 임태호는 그렇게 썩 좋은 컨디션이 아닌 걸 뻔히 안다. 그건 몸을 섞으며 더욱 분명해졌다.
요새 이연우, 그의 최우선은 억제제를 먹는 임태호를 배려하는 거다. 정말 그게 이연우의 가장 큰 바람이다. 연우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듯 태호의 뺨을 만지작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만 듣는 거 말고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옆에 있으니 그것도 해결됐고.”
“…….”
“같이 맛있는 것도 먹었고. 하루 종일 수다도 떨었고…….”
동그란 얼굴선을 타고 마디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올라가다가 말랑한 귓불을 건드렸다. 덕분에 아직 감각이 예민한 태호의 어깨가 잘게 튀었다. 이연우는 그걸 고스란히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또, 형이랑 섹스도 했고.”
한없이 다정한 어조로 흘러나온 야한 농담 같은 말에 태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진짜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사실 평소의 임태호였다면 이연우가 이렇게까지 말한 시점에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임태호는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아니, 조금보다는 더 많이. 태호는 제 귀를 만지는 연인의 손등을 덮어 부드럽게 깍지를 끼면서 한 번 더 채근했다.
“…정 그러면, 아니면 굳이 나랑 같이 하는 게 아니어도 평소에 한 번쯤 하고 싶었던 것도 괜찮아. 아무것도 없어?”
계속되는 태호의 말에 연우의 얼굴이 살짝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이쯤 되면 뭔가 조금 위화감이 들 정도로 끈질기다. 이건 임태호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이 작게 속삭이는 알림, 내지는 경고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걸 표정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상냥한 연인의 얼굴과 웃음기까지 어린 목소리를 하고서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호 형.”
“응.”
“우선, 정말정말 고맙고, 또 좋은데요. 이것만 먼저 물어볼게요.”
물론 그 속으로는 이연우, 그가 오늘 종일 보고 들었던 연인의 모든 모습을 다시 되감으면서다.
“……무슨 일 있어요?”
사실 연우의 말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쪽의 의미에 더 가깝다. 정말 누군가는 믿지 못할 정도로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는 거다. 하지만 그런 이연우의 걱정은 틀렸다. 임태호는 정말로 순수하게 제 연인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을 뿐이었다.
태호는 곧바로 대답하는 것 대신 손등으로 단단한 뼈가 그려지는 연우의 손을 잠시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이연우의 물음에 잠시 목구멍에 뭔가가 탁 막힌 기분이었다.
임태호는 제가 사무실에 도착하는 순간, 곧바로 살얼음이 끼듯 조용해지던 순간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거다. 전날까지만 해도 같이 웃으며 이야기하던 동료들의 눈 역시 마찬가지다. 그날 밤, 회의실 밖에서 유일하게 저를 기다리고 있던 부장의 씁쓸한, 혹은 황당한 미소의 의미가 밝혀졌다.
회사의 사람들은 임태호가 해명하기도 전에 박영진 이사가 말한 ‘어린 도련님’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덕분이라면 덕분에, 태호는 며칠간 회사를 갈 필요가 없어졌다.
정확히는 가지 못하게 된 게 맞을 거다. 회사의 보안팀이 임태호의 사용 로그를 확인하고, 자리를 모두 뒤져 살피기로 했다. 임태호는 감히 그걸 거절할 수 없었다.
회의실 안의 상황이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박영진이 나가고 몇 분 후에 빠져나온 뒤 닥친 현실이 더욱 바닥이었다. 그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상황은 잔뜩 움츠러들었던 태호에게 기묘한 위로를 선사했다.
불이 꺼진 침실에 누워 있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으며 침착해졌다. 요 며칠 늘 야근에 지쳐 있던 때와는 정반대로 어색할 정도로 시간이 많아진 터라, 임태호는 제 연인에게 ‘지금 회사야.’하는 씁쓸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박영진 이사. 그의 이름 역시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늘 이정호 전 대표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터라, 몇 년 전의 홍보 기사 속에 있는 게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니, 없어.”
“…….”
“그냥 이건 내가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야.”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심이 섞인 고백이었다.
사실 박영진 이사가,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다른 이들이 이연우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임태호를 알았더라면 며칠 전처럼 그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최소한 임태호의 앞에서 이연우의 존립을 위협하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거다. 차라리, 사실은 이게 정말 네 연인을 위한 거라며 있지도 않은 위험 요소를 꾸며내 말하는 것이 더욱 승산이 높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긴 하죠. 우리 형, 바빠도 좀 바빠야지.”
“……응. 미안해.”
“미안하기는요. 바쁘면 좋은 거라잖아요. 그래도 이제 다 끝났잖아요?”
임태호는 이연우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며칠간 집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틀어박혀 있으면서 차라리 박영진 이사가 자신을 신화그룹의 배경을 보고 접근하는 사람으로 대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에는 수치심에 속이 문드러졌던 말이었는데, 그래서 더 빨리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연우와 임태호.
이 두 사람의 관계는 8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꽤 많은 게 바뀌었다. 단순히 호칭이 바뀌는 것을 떠나 마음의 거리가 달라지기도 했다. 겉모습과 위치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이 다른 때도 많았다.
지금 당장도 그렇다.
알파, 이연우가 지금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자신의 연인을 배려하고 살살 달래듯 품에 안으며 마음을 열게 하는 거라면…… 오메가 임태호의 우선 사항은 제법 오래전부터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하나의 큰 대전제를 두고 있다.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반짝이는 이연우를 있는 힘껏 아끼고, 또 지키는 것.
임태호는 오랜 시간 이연우의 곁에 좋은 선배로 서 있으며 그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연인으로서도 다르지 않을 거다. 아니 연인이기에 그 전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지금 임태호는 누가 봐도 이연우의 약점이다.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도 쳐 봤지만, 냉정해진 머리는 현실 파악이 빨랐다. 태호는 그걸 깨닫자마자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퍽 빠르게 정돈됐다. 이연우의 옆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어야 했는데. 다정함에, 상냥함에 취해서 많은 걸 욕심 낸 대가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임태호는 뒤늦게 후회했다. 물론 그 감정은 이연우를 향한 게 아닌 그 자신을 찌르는 송곳이었다.
불이 꺼진 어두운 집 안에서, 태호는 제 심장을 잘게 찢는 것 같은 말을 혼자 몇 번이고 연습했다. 이제껏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문장은 참 형편없는 목소리와 단어들로 흘러나왔다.
있잖아. 연우야. 사실은 나 애인 같은 건 없었어. 베타도 아냐. 실은 그 오메가가 나였어. 이제까지 내가 널 속였어.
혼자서도 덜덜 떨며 흘러나온 문장들은 매번 조금씩 달랐지만 그 끝은 언제나 같았다.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하게 될지도 몰라.’
그때마다 태호는 제가 내뱉은 말의 무책임함에 스스로를 혐오했다.
하지만 제가 이제껏 8년을 속이고, 기만하며, 숨겼던 것을 털어놓는 것이 박영진 이사 무리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것임을 알았기에 멈출 수 없었다.
무서웠다. 연인이 된 후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수많은 얼굴을 보여 준 이연우가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어떤 표정을 하고 저를 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몇 번이고 답답한 숨을 삼켜도 봤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항상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랐지만 단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어주는 알파를 위해 뭐든 해 주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랜 거짓말을 털어놓는 게 고작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저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진짜 ‘열성’, 그 자체였다.
그래서 혹시라도 진실을 말하기 전에 이연우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정말, 뭐든지.
이연우는 잠시 말이 사라진 제 연인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목소리의 톤을 높여 말을 이어갔다.
“저, 형 기다리면서 가족들한테 진짜 많이 자랑했어요.”
“…자랑할 게 뭐 있어.”
태호는 왠지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를 향해 예쁘게 눈을 빛내는 알파를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하더니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왜요. 청순하고, 멋있고, 예쁘고. 이거 말도 안 되는 조합인데. 완전 핫 섹시한 애인이라고 엄청 말했는데요.”
마치 오늘도 태양은 뜬다는 듯 뻔뻔하리만치 당당하게 흘러나온 문장이었다. 태호는 잔뜩 침울해져 있던 순간을 잠시 잊고 저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되묻게 됐다. ‘핫 섹시’. 정말 저와 일억 광년은 먼 묘사 때문이었다.
“진짜 그렇게 말한 거 아니지?”
진짜 그렇게 말했다. 사실 그보다 좀 더했다.
이연우는 진심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임태호를 보며 대답 대신 몇 번 예쁜 갈색 눈을 깜박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작은 침묵이 흘렀다. 태호가 작게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도 났다.
…정말? 진짜? 임태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 연인을 채근하듯 바라보았다. 이연우는 그걸 능글맞게 모르는 척했다.
“음. 임태호랑 같이하고 싶은 거라.”
“……진짜야?”
“아, 없진 않았던 것 같은데. 교복은 이미 봤고…….”
이연우와 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능청을 떨며 말을 돌리는 모습 같은 건 절대 보지 못했을 거다. 종일 조금 지친 듯한 얼굴이었던 태호에게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이 터졌다. 이연우는 그걸 훔치듯 눈에 담으며 살짝 입술을 말아 붙인 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하고 싶은 거. 임태호랑 하고 싶었던 거…….
연우는 태호가 준 숙제를 머릿속에서 빙빙 돌리면서 괜찮은 걸 찾아 나섰다.
단순히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걸 먹고 이야기하는 건, 좋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데이트에 가깝다. 그는 뭔가 약간 우울해 보이는 임태호를 저렇게 웃게 할 수 있는 걸 떠올리고 싶었다. 옅게 키득거리는 연인을 빠짐없이 품에 안은 채로 입술이 닿는 곳마다 키스하며 얼마나 있었을까.
이연우는 문득 어떤 한 가지 작은 소망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 있다.”
“뭔데?”
임태호는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얼른 물었다. 연우는 그 달뜬 반응이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
제가 고른 ‘같이 하고 싶은 것’이 임태호에게 신선한 환기가 될 거라는 이연우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었다. 왠지 힘없이 축 처지던 임태호의 어깨가 곧게 펴지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확실히 사람이 없네.”
“사실 일요일이니까 올 수 있는 거죠, 뭐. 누구 만나기라도 하면 좀 귀찮잖아요.”
“모르는 건물 엄청 많이 생겼어. …아, 그래도 저건 그대로다.”
알파 특유의 독점욕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연우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임태호의 과거를 자꾸 탐낸다. 제 연인의 시간에 존재할 수 없었던 때를 끊임없이 욕심내는 것이다.
이연우는 널찍한 캠퍼스 안에서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을 골라 걸으며 임태호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지금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작점에 와 있다. 대학을 졸업한 지 한참인 태호는 완전히 리모델링하거나 새로 생긴 건물들을 둘러보며 연신 작게 탄성을 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연인을 처음 만난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학위를 위한 곳에 불과할지 몰라도, 두 사람에게는 하나하나가 기억이 서린 특별한 장소일 수밖에 없다. 이연우와 임태호는 나란히 커피까지 하나씩 뽑아 든 채로 푸른 나뭇잎으로 가득 찬 교내를 걸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기억과는 꽤 달라진 학교의 모습에 신기해하던 두 사람의 말이 묘하게 줄어든 것도 그때부터였다. 왠지 속이 간질간질했다.
이연우는 이곳을 거닐던 스무 살의 그때보다 키도 2센티 정도 더 컸고, 임태호는 스물다섯 살 때보다 조금 살이 빠졌다. 이제 두 사람은 갓 입학한 신입생도, 아직 머리가 다 자라지 않아 늘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던 4학년도 아니다.
하지만 음료수를 입에 물고서 나란히 걷고 있자니 정말로 아주 예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연우는 말없이 걷는 태호를 마주 보는 게 왠지 조금 그답지 않게 부끄러워져서, 괜히 먼저 입을 열었다.
“강의실도 많이 바뀌었겠죠?”
“…….”
“○○관이었나, 어디 되게 의자 불편한 곳 있었는데.”
사실 후배들의 학습 환경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는 이연우다. 의자가 불편하다 못해 강의를 듣다가 허리를 삐끗한다고 해도 제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연우는 제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있는 연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길래, 술술 흘러나오는 말을 대충 털어놓았다.
“또 뭐였지? 학식. 그것도 그땐 꽤 먹을 만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떨지…….”
“연우 너 좋아했었어.”
입을 움직이면서 속으로는 ‘진짜 등신새낀가?’하면서 제 자신을 욕하고 있던 이연우의 말이 어정쩡하게 뚝 잘렸다. 이연우는 하던 말을 끊겨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보통 때라면 분명 조금 불쾌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불쾌함 대신 그답지 않은 멍한 얼굴이 됐을 뿐이다. 이연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저보다 몇 걸음 뒤에 뚝 멈춰 서 있는 임태호를 바라보았다.
“……네?”
스스로가 들어도 좀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그걸 고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연우는 지금 제 연인이 한 말이 얼른 머리에 입력되지 않은 채였다. 임태호는 쌍꺼풀이 여러 겹 져서 조금은 흐려 보이는 눈을 한 번 굴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작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했었다고. 학교 다닐 때.”
“……형이요? 저를?”
“응.”
솔직히 이연우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까딱하면 놓칠 뻔했다. 하지만 그걸 겨우 붙잡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쓸 수 있었던 건, 제가 너무 놀란 채 반응하면 임태호가 어떤 기분이 될지 모르겠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웃자. 웃어야 한다. 명심하자. 지금 임태호는 베타야.
연우는 저 자신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겨우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어. 어어. 음, 그러니까…… 그땐, 형 애인도 있었잖아요.”
“…….”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예요? 하하.”
농담처럼 가볍게 넘겨야 한다.
이연우는 임태호의 말을 이해한 순간부터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을 감추며 긴장으로 마른입을 괜히 커피 한 모금으로 숨겼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놓고도 영 자신이 없었다. 임태호를 베타로 알고 있는 제 자신이라면 어떤 말을 하는 게 가장 적절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순식간에 이연우를 손아귀 위로 올린 임태호는 잠시 말없이 말간 얼굴로 있다가 툭 말을 이었다.
“……헤어질까 고민했을 정도로 좋아했어.”
이연우가 그 순간 욕을 삼킨 건, 정말 기적적인 일이었다.
연우는 속으로는 ‘씨발’을 초당 몇 번을 했다. 머리가 띵하고 울려서 반사적으로 새파란 하늘을 한 번 보며 작게 숨을 삼켰다가 내쉬는 것도 함께였다.
대체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연우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말이 이어지는 것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망할.
임태호가 좋아했다고? 학교 다닐 때, 나를?
당장에 묻고 싶은 말이 순식간에 몇 개는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체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그리고 또 언제부터 그만뒀어요? 왜 말 안 했어요…….
하지만 이연우는 그 질문들 중 그 어떤 것도 꺼낼 수 없었다.
정말로 임태호가 아주 잠시라도 저를 마음에 담았었다면, 정말 그랬었다면 최소한 그걸 어떻게 포기하게 됐을지는 알 것 같았다. 베타 임태호가 아닌 오메가 임태호가 보는 제가 어땠을지, 참 처참할 정도로 뻔히 그려졌다.
이연우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초조해져서 잘 다듬어져 있던 제 머리를 조금 거칠게 쓸어 넘기며 입을 달싹였다.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입에 무거운 추가 달린 듯 얼른 열리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임태호에게 실례가 될까 걱정이었고 그렇다고 다시 한 번 웃으며 넘기기에는 태호는 이상할 정도로 묘한 얼굴이었다. 조금은 슬픈 것도 같고, 조금은 화난 것도 같고, 조금은 침울한 것도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약간 찡그리듯 웃는 얼굴이었다.
“캠퍼스 커플 해도 좋았겠다. 그치?”
지금 임태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연우는 정말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생각으로, 또 어떤 기분으로 아주 예전의 이곳에서 스쳤던 마음을 털어놓고 있는지 짐작조차 안 갔다.
바람이 불면서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따가운 햇볕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질 만도 한데, 연우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연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다 집중했다.
살짝 찌푸려진 눈썹, 작게 깨물었다가 풀어놓는 입술,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손.
이 순간 가장 시끄러운 건 이연우, 그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였다. 임태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 작은 변화 하나하나에 솜털까지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연우?”
하지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보다 먼저 귀에 걸린 건 제법 걸걸한 사내의 물음처럼 흘러나온 제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 탓에 뭐라고 입을 열려던 임태호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걸 보고 속이 살짝 뒤집힌 이연우는 살짝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연인의 저만치 뒤에 있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거뭇거뭇한 빛이 섞인 수염을 기른 남자가 놀란 얼굴을 한 채로 있었다. 그는 이연우도 아는 사람이었다.
“허어. 세상에. 자넨, 누구더라. 그, 임…….”
“임태호입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어! 그래, 임태호!”
일부러 인적 드문 곳만을 골라 걷고 있었는데, 행운과 불운은 마치 그림자처럼 같이 따라온다.
이연우는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임태호를 보며 속으로 울컥한 것을 삼키고 대충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평소 같았으면 적어도 태호가 있는 곳에서는 이러지 않았을 텐데, 왠지 뭔가를 놓친 것 같은 불쾌함이 더 커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
남자는 임태호와 이연우 둘 모두를 가르쳤던 경영학과의 노교수였다.
“자네들 설마 아직도 붙어 다니나? 정말 대단들 하군. 학교는 무슨 일로 왔나?”
“그냥 잠깐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시간 되면 내 연구실 들러서 차라도 마시고 가게. 나 참. 이게 얼마 만인가!”
게다가 대학 시절 임태호를 가장 예뻐했던 교수이기도 했다. 태호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제 알파를 흘끗 돌아보았다. 약간 굳은 표정이던 이연우는 그제야 조금 인상을 펴고 연인이 잘 아는 예쁜 표정을 덧씌울 수 있었다.
“…잠깐인데요, 뭐.”
심지어는 임태호가 안심할만한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입에 담는 게 가능했다.
연우는 속으로 몇 번을 참을 인을 새기며 웃는 낯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온갖 불평불만이 계속됐다. 아, 망할 노인네. 진짜 왜 하필 거기 있고 난리야. 주말에 학교는 또 왜 와?
이연우는 마치 서재처럼 책이 가득한 노교수의 연구실에 임태호와 나란히 앉은 채로도 약간 부루퉁한 눈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하나뿐인 연인이 ‘사실 너 학교 다닐 때 좋아했어.’ 같은 말을 하는 그 중요한 순간에 교수가 낀다면 누구라도 이런 표정이 될 터였다.
노교수는 그런 이연우의 속내를 어렵잖게 간파해 냈다.
“저 친구, 학교 다닐 때 되게 뺀질댔는데. 아직도 그러나?”
“연우가요? 아니에요. 전혀요.”
“아니긴. 범생이는 자네였지. 이연우 저 친구는 맨날 ‘척’만 했어. 지금도 보게.”
……아니, 씨발?
연우는 별다른 대답 대신 낮게 하하, 하고 웃으며 작은 미소를 걸었다. 장난기 가득한 눈을 한 채 허허실실 웃는 낯으로 쏟아지는 노교수의 공격에 겨우 미소를 그려 만든 이연우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역시 오늘은 안 될 것 같다며 내빼야 했다. 그다음에 태호의 말을 마저 들었어야 했는데.
이연우는 임태호에게 물러 터진 제 판단을 후회했지만, 한 번 둔 수는 무를 수 없는 법이었다.
“정말 어떻게 아직까지 같이 다니나, 그래.”
“…하하.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한 1년 같이 학교 다녔나?”
“네.”
말수가 뚝 줄어든 이연우를 대신하는 건 임태호였다.
다행스럽게도 태호는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과 쉽게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실은 동갑내기보다 그걸 더 편해했다. 노교수는 저를 향해 희미하게 눈을 휘는 임태호를 지긋이 보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뒤로는 그 나이대의 사람들이 건네고는 하는 뻔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요새 무슨 일을 하느냐. 결혼은 했느냐. 아니, 결혼을 안 했으면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
사실 그 순간은 시종일관 지루한 기분이었던 이연우가 유일하게 조금 흐뭇함과 의기양양함이 동시에 섞인 눈을 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노교수의 말에 순식간에 귀가 벌게지며 우물우물 ‘예에’, 하고 대답하는 태호를 보며 차를 홀짝이다가, 제게로 질문이 돌아오자 세상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그럼요.”
드림보이를 연인으로 삼은 알파란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다.
노교수는 새삼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작게 헛웃음을 흘리더니, 별안간에 생각났다는 듯 작은 탄성을 흘렸다.
“맞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순 생떼를 썼었지!”
이 자리에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등장이었다. ‘생떼’. 차마 그 표현이 제 연인을 향한 것임을 짐작조차 못한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가 그런 적이 있었는지 되짚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노교수에게 그런 적은 없었다.
게다가 노교수의 시선은 임태호가 아닌 이연우를 향해 있기까지 했다. 결국 연우는 영 껄끄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달리 누구겠나?”
슬슬 이연우는 교수를 따라온 것을 넘어서 괜히 같이 오고 싶은 곳으로 학교를 골랐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오지 않았다면 임태호의 그 깜짝 놀랄 고백은 듣지 못했을 게 뻔하니 과거로 되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저 빙글빙글 웃고 있는 노교수의 입이었다. 연우는 노교수의 웃음이 영 이해되지 않아서 살짝 눈썹을 휜 채 입만 웃어 보였다. 사실, 이때까지 이연우는 정말로 노교수가 하려는 말을 상상조차 못 했다.
“그때 학과 시스템이, 바로 위 학년을 멘토로 골라서 학교에 적응하는 거 돕고 그러는 거였잖나.”
“…교수님!”
물론 그 유유자적하다 못해 오만한 태도는 딱 몇 초 뒤에 완전히 박살 났다. 이연우는 노교수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뒤늦게 눈치채고 순식간에 태도를 달리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꼭꼭 하기로 유명한 경영학과 노교수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4학년 복학생으로 하겠다고 강짜를 놓으면서 내 연구실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하는데. 까먹으려고 해도 까먹을 수가 없어.”
스물다섯 살의 임태호가 가지고 있던 비밀 하나와 스무 살의 이연우가 가지고 있던 비밀 하나가 나란히 열린 셈이니, 어찌 보면 의도치 않게 참 공평한 상황이 됐다. 태호는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을 빛내는 노교수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임태호, 자네는 모르나? 저 친구, 자네랑 같이 짝지어 달라고 날 아주 귀찮게 했었단 말일세.”
“……네?”
“어찌나 성가시던지 재벌 3세만 아니었어도 내 걷어차 쫓아냈을 걸세. 하하!”
이제 제 연인에게 제법 솔직해진 이연우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을 졸라서 붙어 있을 핑계를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연우에게 곱게 미화해서 남겨두고 싶은 마지막 한 조각 추억이라고나 할까, 그 비슷한 거였다.
스무 살의 신입생 이연우는 낯가림도 심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잘 얼굴도 비치지 않는 4학년 복학생과 가까워질 방법이 없었다.
아니, 보통의 신입생이라면 그래도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연우는 교내에서 모르는 이 하나 없는 유명 인사였다. 무려 그 이연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임태호와 붙어 다닐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제 동기들은 형식상으로 서류만 내고 끝인 있으나 마나 한 학과 규칙을 이용했다.
……솔직히, 4학년은 선배 아니냐며 정말 좀 떼를 썼다. 인정한다.
덕분에 이연우는 노교수와 남은 몇 분간의 대화 내내 입도 벙긋 못하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목 뒤까지 홧홧한 것이, 제 자신이 어떤 낯빛일지 확인하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진짜 내가 쪽팔려서, 씨발!
속이 다 배배 꼬이는 기분이었다. 연우는 일찍 끝났으면 싶던 노교수와의 대화가 일분일초라도 늘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노교수와 임태호는 다음에 또 보자며 너무나 상쾌하고 신속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임태호는 평소답지 않게 교수 연구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지체 없이 상황 파악에 나서기까지 했다.
“연우야.”
“…….”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
결국 이연우는 몇 걸음 못 가 벽에 머리를 박은 채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이 딱히 서늘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닿는 부분마다 뜨겁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씨이이발.
“…후우, 아니, 그게…….”
“응.”
이연우는 얼굴을 조금은 거세게 마른세수 하고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왠지 혀끝까지 열이 오른 것 같았다. 대체 태호 형은 어떻게 나 대학 때 좋아했단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 하는 생각도 좀 했다. 물론 그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연우에게 임태호의 말간 표정은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태호는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인사이드에서는 한참 멀었던 임태호마저 입학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 이연우다.
제 연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와!’하고 작게 소리가 났던 그들을 임태호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이연우가 저와 함께하려고 교수님을 찾아갔었다니.
교수의 말대로, 저는 그저 4학년 복학생 베타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른 사람보다 눈에 띄는 건 정말…… 기껏해야, 뭐 성적 조금이 다였을 거다.
게다가 교수가 전한 그 사실에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와 귀 끝까지 새빨갛게 변한 채로 저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이연우라니. 정말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태호는 그 귀한 광경을 모두 지켜보면서 왠지 심장 한편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연우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살짝 헝클어진 머리도 쓸고, 멀쩡한 구두 굽을 괜히 바닥에 몇 번 찍기도 하면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 열감이 가득한 손으로 임태호의 손을 맞잡았다.
아무리 사람이 별로 없어도 학교인데, 이래도 되나?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주변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 걱정은 별 쓸모없는 거였다. 연인의 손을 잡은 이연우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교내에서 가장 인적이 드물 것 같은 곳이었다.
임태호는 주차장과도, 건물과도 한참을 떨어진 그곳을 잘 안다. 대학시절 혼자 산책 삼아 자주 왔던 곳이다. 이곳에 있는 건, 그저 높다랗게 심어진 나무들뿐이다. 태호는 드물게도 변하지 않은 공간을 눈에 담다가, 제 손을 꽉 움켜잡은 이연우의 뒷모습까지 시선이 닿았다.
언제나 여유로웠던 연인의 뒷덜미가 붉었다. 작은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여기서…….”
마치 이연우와 임태호가 바뀐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렇게 나직하게 말하는 건 대체로 임태호였고, 이연우는 그것에 귀를 기울여 주고는 했었다. 태호는 속삭이듯 이어지는 말을 따라 숨을 죽였다.
“여기서, 형을 처음 봤어요.”
“…신입생 환영회 때가 아니고?”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에 이연우가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결심한 듯 뒤도는 이연우의 얼굴은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이연우가 정말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닐까, 임태호는 문득 생각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
“그냥, 선배를…….”
이연우가 부르는 선배라는 단어는 참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울림을 준다.
“처음으로……, 뭐 그 비슷한 거예요.”
말을 대충 흐리는 이연우를 보고 있자니, 임태호는 덩달아 속이 더워졌다.
그 무엇이 뒤에 따르든 처음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왠지 눈이 조금 시큰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사실은 이연우가 저를 먼저 선택한 거였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뭐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임태호는 이연우의 말을 끝까지 캐묻지 않고 그 대신 다른 걸 골랐다. 이거라면 제 연인이 말해 줄 수 있겠지, 싶은 생각에서였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임태호의 예상은 완전히 엇나갔다.
“……그건 비밀.”
“왜? 말해 줘.”
“싫어요.”
이연우가 이렇게 확고하게 싫다고 말하는 걸 얼마 만에 듣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정말 이곳에서 있었던 일과 그걸 훔쳐보던 제 감정만큼은 절대로 내보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제가 공을 넘겨받는 쪽을 택했다.
“태호 형이야말로 좀 전에 무슨 말 하려고 했었잖아요.”
“…….”
“뭐였어요?”
임태호는 발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저를 보는 이연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근사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왠지 지금은 그보다 예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오늘 임태호의 고백 아닌 고백은 작은 예행연습이었다. 사실, 그 말을 떠올리면서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와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내일 퇴근하고 볼까?”
이제 눈앞의 알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지쳤다. 그래서 정말 최악의 상황에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저 예쁜 모습을 오늘만큼은 이대로 두자는 마지막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연우는 따끈한 제 뺨을 손으로 연신 식히면서도 곧바로 대답했다.
“저야 좋죠.”
“이번에는 내가 너 있는 쪽으로 갈게.”
이연우는 발갛게 얼굴을 물들인 상태로도 눈을 크게 떴다.
덕분에 임태호는 ‘아, 귀엽다.’하고 조금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태평한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정말요?”
“응.”
“와!”
회사 근처로 가 주는 게 뭐가 그렇게 엄청난 일이라고, 연우는 눈에 띄게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태호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금, 아니 많이 뒤늦었을지도 모를 후회를 했다. 진작 자주 할걸. 베타라는 거짓말만 하지 말고, 진작에 좀 더…….
그때,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한 손으로는 손부채질을 하며 더운 열을 식히던 이연우는, 제 휴대폰을 꺼내 슬쩍 메시지를 확인했다. 요 근래 한창 진행 중인 일의 회신이었다. 아, 하필 주말에 진짜. 이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태호는 그걸 눈치채고 흐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먼저 들어가.”
“집에 데려다주고 갈게요.”
“아니야. 나도 어디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
이연우는 제 연인이 저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며 괜히 둘러대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눈으로 임태호를 살폈다. 하지만 태호는 여기서 그만 제 갈 길을 가자며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연우는 괜찮다고 마다하는 태호를 기어코 가까운 역 앞까지는 태워다 준 다음에 정말 이걸로 되냐는 말 열 번, 연락한다는 말을 열 번 정도 하고 나서야 제 연인을 두고 차를 몰았다. 그마저도 어찌나 가기 싫어하던지, 핑계만 있다면 일분일초라도 더 태호와 붙어 있을 기세였다.
겨우 혼자가 된 임태호는 빽빽한 인파들 사이에서 저 멀리 가는 익숙한 차체를 한참 눈에 담다가, 이연우의 앞에서는 오랫동안 참았던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태호는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들러야 할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던 태호는, 저녁 즈음인데도 이제 제법 해가 길어져서 환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얼마 가지 않아 쾌활하게 태호를 반겼다. 임태호는 그 밝은 목소리에 왠지 속이 좀 씁쓸해져서, 다시 한 번 짧은 한숨을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현민아, 지금 많이 바쁘니?”
◈◈◈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다.
물론 뒷골을 서늘하게 하는 무시무시한 연인을 뒀다는 게 위험 요소기는 했지만, ‘애인님이랑 안 노시고 저는 왜요?’라고 슬쩍 떠본 문장에 ‘연우 방금 일하러 갔어.’하는 초록불이 떴다. 그래서 유현민은 별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집을 뛰쳐나왔더랬다.
‘오늘은 태호 형이랑 PC방이나 가볼까. 형한테 게임 가르쳐 주면 잘할까?’하는 나름 그럴듯한 계획도 있었다.
“예?”
정말 오늘의 유현민은 근심 걱정이라고는 없는, 아니 유일한 괴로움이라면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게 다인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주말을 맞아 마치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운 카페 한가운데에서 임태호를 만나 웃으며 안부를 물었을 때까지만 해도, 진짜 그랬다.
유현민은 제가 들은 말을 곧바로 믿지 못하고 가벼운 현실 부정을 했다.
“저, 좀 시끄러워서 잘 못 들었어요, 형.”
임태호는 자신의 말을 들은 현민의 표정이 잠시나마 멍해진 채로 굳었던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태호는 그것을 트집 잡는 대신 제가 방금 한 말을 다시 한 번 힘주어 내뱉는 것을 택했다.
“…현민아, 정말 미안해.”
“…….”
“형 오메가인데, 이제까지 베타라고 했었어.”
몇백 번이고 연습한 탓일까. 생각보다 목소리는 덜 떨렸다. 임태호는 오늘 하루 두 번째의 예행연습을 했다. 물론 이번은 연습의 의미만 있지 않았다. 정말 있는 힘껏 모든 용기를 쥐어짜 내고 미안함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두 긁어서 꺼내 놓은 고백이었다.
“어. 어어…. 어. 그렇구나.”
“…….”
“미안할 건…… 없죠. 어. 물론이죠. 그래요.”
유현민은 임태호를 아주 오래 본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앞의 남자가 희미하게 떨면서 제게 깊은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알파인 이상 그걸 모를 수 없었다. 임태호와 제법 적지 않게 만났는데도 이제껏 오메가라는 생각은커녕 그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이 말하는 바가 뻔했기 때문이다.
현민은 왠지 뒷목이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아서 제 목을 주무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물론 현민의 그런 침묵이 계속될수록 아직 본론에도 가지 못한 태호의 낯빛은 허옇게 변해 갔다. 상상도 못했던 전개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유현민은 그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속으로 이크, 싶어졌다.
“태호 형, 저 솔직하게 말할게요.”
“……응.”
“사실 지금 좀 놀라기는 했어요. 많이요.”
혹시라도 태호가 상처받을까 싶어 급하게 꺼낸 문장은 영 하나마나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현민은 말해 놓고 더욱 후회할 표현을 허둥지둥 덧붙였다.
“아! 이거 진짜 그냥 순수하게 놀랐다는 거예요. ‘깜짝!’ 하고요!”
“…….”
“…진짜 그냥 깜짝!”
나름대로 책도 많이 봤고, 또 내심 달변가라는 자부심이 있던 현민은 스스로의 끔찍한 표현력에 기가 찼다. 어딜 봐도 큰맘 먹고 겨우 용기 낸 사람을 달래고 지지하는 표현으로 ‘깜짝!’은 정말 볼썽사나운 선택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임태호는 그 쩔쩔매는 표정을 보며 조금은 울 것처럼 웃었다. 솔직히 유현민은 그 표정에 순간 속이 울컥했다. 아니, 세상에 저 순둥한 형이 어쩌다가 베타인 척했지? 현민은 태호의 심정에 잔뜩 공감해 주기 위해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우, 왠지 그분께서 저번에 태호 형이랑 술 마시는 거 되게 싫어하는 것 같더라니.”
“그분?”
“누구겠어요. 형님 애인님이요.”
하지만 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한 말은 곧바로 지뢰로 변했다.
유현민은 이연우의 말을 꺼내자마자 눈에 띄게 우중충한 얼굴이 된 임태호를 보며 순간 당황하여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가득 띄웠다. 그건 처음에는 ‘어라? 왜 그러지?’ 수준의 의문이었다. 하지만 몇 초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잖아도 흐린 인상에 울적함을 더하는 임태호를 보면서 그의 빠른 눈치가 신속하게 가동됐다.
“……태호 형.”
“…….”
“설마 이연우 팀장님…… 그거 몰라요?”
끄덕, 끄덕.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두 번의 고갯짓이 이어졌다.
현민은 저도 모르게 ‘허어어억!’하는 소리를 육성으로 토해 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사귀었어요?”
“……그냥…….”
“그냥이 아니라! 어우, 야! 뽀뽀만 해도 알겠다! 하자 있는 거 아녜요?”
사실, 그냥이 아니라 이연우가 다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유현민은 저도 모르게 만석인 카페에서 큰 소리로 이연우의 알파성을 비난했다. 태호는 마치 제 일처럼 흥분해 주는 현민을 보며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닌 것 같던데…….”
적어도 어젯밤이 그걸 증명한다.
“……그래요?”
“……응.”
임태호는 벌겋게 익은 얼굴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유현민은 ‘아, 그렇군.’하면서 순식간에 소강상태가 됐다. 생각해 보니 오메가인 형한테 너무 직접적인 걸 물었나, 한참은 늦은 뒷수습의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조금 전까지 열심히 대화하던 두 사람 사이에는 옅은 민망함이 찼다. 한참을 멋쩍게 있던 현민은 턱을 긁적이며 태호의 눈치를 봤다.
“…저어, 태호 형. 그런데요.”
“응.”
“말씀해 주셔서 저야, 진짜 진짜, 저엉말 고마운데요.”
유현민의 갈색 눈동자가 잠시 방향을 잃은 듯 태호를 봤다가, 아직 음료가 잔뜩 남은 제 컵으로 향했다. 태호는 그 작은 망설임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예상대로 현민은 옅게 펌이 되어 있는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도로 말을 삼켰다.
“아니에요. 제가 너무 주제넘게.”
“…아냐, 연우 얘기하려는 거지?”
현민은 정확히 정곡을 찔려서 뭐라 대답도 못 하고 입술만 작게 달싹였다.
그는 태호의 짐작대로, 연인도 아닌 저에게 이렇게 말한 비밀을 이연우도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고 했다. 임태호는 그런 유현민의 솔직한 지적에 감사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제가 숨겨왔구나 싶어 마음이 따가워졌다.
“말할 거야.”
태호는 제 자신에게 명심시키듯 단어 하나하나에 가득 힘을 주었다.
“내일 말하려고. 원래는 오늘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하긴. 애인한테 말하는 거랑, 친구한테 말하는 건 느낌이 많이 다르겠지.
유현민은 살짝 힘없이 처진 임태호를 보며 그럼 된 거라고 응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임태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현민아, 그런데.”
“예?”
오늘 만나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제대로 눈을 마주쳤을 때부터 임태호는 저런 얼굴이었다.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꼭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기도 한 표정을 한 채였다. 현민은 순간 ‘뭐가 아직도 더 있을 수가 있나?’하고 생각하며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현민은 어쨌거나 지금 기분이 꽤 홀가분했다. 누군가가 저를 믿고 의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람의 자존감을 채워 주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말이 이어지든 임태호를 꽤 잘 위로할 수 있을 거라는 제법 듬직한 생각도 했다.
정확히는, 했었다.
임태호의 말은 천천히 시작됐다. 요 몇 달 동안 임태호를 정신없이 바쁘게 했던 회사의 업무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건 현민, 그도 알고 있던 터라 그 내용을 얼른 따라잡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의 중간부터였다.
어느 순간부터, 현민은 대답이나 추임새 같은 행동 대신 멍하게 눈만 깜박이며 태호의 말을 듣게 됐다. 태호가 차마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몇 번을 떨고, 되삼키며 꺼내 놓은 부분을 들었을 땐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돼.’하고 작게 그걸 부정도 했다.
이연우랑 임태호, 그 사이에서 내가 뭘 한다고?
유현민은 제가 떠올린 문장에 솔직히 좀 황당한 헛웃음을 흘렸다가, 반사적으로 태호와 제가 앉아 있는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였다. 임태호는 그걸 눈치채고 작은 목소리로 몇 번을 했는지 모를 사과를 한 번 더 했다.
“미안해. 나도 우선 여러 번 확인하고 골랐는데, 오늘은…… 없는 것 같아.”
“와, 씨발. 이건 형이 미안할 게 아니죠! 완전 또라이들 아냐!”
늘 태호의 앞에서는 방긋방긋 웃으며 형님, 형님 하던 유현민은 어울리지 않는 욕까지 하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임태호는 이 순간까지도 제 편을 드는 유현민을 보며 잠시 미안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이연우와 저는 연인 관계이고, 박영진 무리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라도 하지만 유현민은 정말 말 그대로 이 일의 철저한 제삼자였다.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신화그룹에 들어온 게 다다. 얼마 전에 이제야 겨우 일이 좀 손에 익는다고 웃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임태호는 왠지 목이 꽉 막히는 것 같아 괜히 마른침만 몇 번 삼키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입을 뗐다.
“나도 내일 연우랑 얘기해 보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건데. 정말 너한테는 아무런 피해도 안 가도록 할 수 있는 거 다 해 볼게.”
“…….”
“그런데 그래도…… 우선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맞는 것 같아서…… 오늘 연락했어.”
후우우, 하고 긴 한숨이 유현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상황을 다 알고 나니 임태호가 제게 오메가인 걸 밝힌 건, 이건 뭐 완전 반강압 때문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창백하게 질린 얼굴만 봐도 그렇다. 전혀 알릴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사람을 낭떠러지로 몬 것이다.
사실 임태호는 모른 척해도 됐을 거다.
차마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유현민은 임태호가 이 모든 일을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침묵하더라도 이연우가 그것에 실망조차 하지 않을 거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질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이연우 같은 사람은 제 이름이 한낱 신입 사원 따위와 나란히 서는 것보다 임태호를 추문에 휩싸이게 하는 걸 더 열 받아 할 거다.
세상천지에 연인 뒤를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살벌하게 협박하며 눈을 희번덕거리며 뜨는 알파가 많지는 않다.
솔직히 그딴 게 둘이나 된다면, 그건 세상이 말세라는 증거다.
“……태호 형.”
유현민은 미지근하게 식은 제 음료를 빨아 마시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현민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태호는 그에 얼른 대답했다.
“으, 으응.”
“…저희 쪽 팀장님이 좀 그렇긴 해도, 진짜 재벌 3세 맞거든요.”
임태호는 순간 ‘좀 그렇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현민은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조금은 긴장감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3세? 누군데?”
“이현이라고, 아마 그분이랑 친척일 걸요.”
아는 이름이었다. 신문이나 경제지에서 가끔 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거의 다뤄지는 일이 없기도 했고, 인터넷에 사진 한 장 올라와 있지 않아서 한 번도 그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사실은 한 번 봤었지만, 임태호는 그때 그 사람이 이현인 줄 몰랐다.
“그런데 들리는 말은요. 이분이 이연우 팀장님이랑 완전 친하대요.”
“연우랑?”
“네. 그런데 이분 아버지가 전 대표잖아요. 형 말대로라면 그 사람들 진짜 상사. 그쵸?”
분명 박영진 이사 무리들이 따르던 사람은, 퇴임한 이정호 전 대표다. 유현민은 제 다름대로 머리를 굴린 내용을 이어 말해 갔다.
“이연우 팀장이랑 완전 친하고, 자기 부서 신입 사원이기까지 한 사람이 좆될 것 같으면 그래도 좀 도와주지 않을까요?”
“…너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 이현은 회사 내 유명한 아웃사이더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승진도 마다하고 팀장으로 남아 업계에 직접 부딪히는 쪽을 선택한 3세라고 했다. 소란스러운 건 딱 질색하고, 절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며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괴짜 중의 괴짜다.
게다가 살벌하기는 또 얼마나 살벌한지!
정말 1분 전에 누구 몇 명 총으로 쏴 갈기고 왔다고 해도 믿을법한 인상에, 가엾은 신입 사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화법을 구사한다.
“형은 그래도 그분이라도 있다지만, 사실 저는 까라면 까야 하는데요. 뭐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존나 억울하잖아요.”
유현민은 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진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유현민입니다.」
실로 비장하기까지 한 서두였다. 태호는 그걸 보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치 왕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사실 그건 썩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늦은 시간 연락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다른 용무 중이실까 봐 이렇게 문자를 먼저 보내 봅니다. 혹시라도 괜찮으시다면 통화가 가능하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물론 답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임태호도, 유현민도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답을 꽤 기다려야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보내 놓고 나서 다시 한 번 서로를 다독이는 따뜻한 시간을 가져야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이 절절한 읍소문의 상대는 한 오메가와 한 알파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채, 메시지 옆에 있던 숫자 1을 신속하게 없앴다.
그러고는…….
[개미친 팀장새끼]
임태호는 유현민의 휴대폰을 밝힌 저장된 누군가의 이름을 보며 긴장 가득한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민아.”
“…….”
“……괜찮겠어?”
조금은 앗차 싶지만, 괜찮지 않더라도 이제는 돌아갈 길이 없다. 유현민은 고개를 저으며 전화를 받았다.
“예, 팀장님. 유현민입니다.”
◈◈◈
유현민은 이현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그 어떤 때보다 부산스럽게 굴었다.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서 평소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다리 떨기를 했다가, ‘으으으.’하면서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다. 어느새 제법 어두워진 인적 드문 공원은 그의 집 근처였다. 이곳에 오면서도 얼마나 따라오는 이가 없는지 살피면서 왔는지도 모른다.
임태호는 이현과의 통화 이후로 눈에 띄게 초조해진 유현민을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이 그렇게 등록되어 있는 거야?”
현민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차라리 유현민은 제가 까마득한 재벌 3세와 삼각관계 스캔들로 엮여서 사내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들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욱 긴장한 모습이었다. 정말 그랬다. 현민은 아직 닥치지도 않은 실감나지 않는 미래의 일보다, 당장 다가오는 현재의 공포가 더 컸다.
“진짜 개 무서운 인간이거든요.”
“팀장님이?”
“예. 사실 저 진짜! 아니, ‘조오오온나’ 싫어해요. 동기들이 다 불쌍하대요.”
예쁜 동생 콩깍지가 아니라, 현민은 정말로 누가 봐도 호감일 사람이다. 태호는 살짝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쌓인 게 한두 개가 아니던 유현민은 빠르게 제 설움을 토로했다.
“진짜 맨날 뭐만 하면 ‘유현민 씨!’라고 소리치고. 맨날 저 보는 것 같아서, 누구한테 뭐 물어보는 것도 심장이 떨려요.”
처음에 신입 사원을 엄하게 대하는 상사는 어디에나 있다. 태호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그 성향으로 넘길만할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무서워하다니. 태호는 ‘솔직히 지금 온다고 하는 것도 우리 쏴 죽이러 오는 걸지도 모르죠. 하하하!’하고 애써 농담을 하는 현민을 보며 괜히 저까지도 살짝 긴장했다.
이연우의 사촌이라는 사내는 현민이 ‘조금 급하고, 심각한 일이라 전화로는 힘든데….’까지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나오겠다고 했다. 사실 이것까지만 보면 싫어하는 사람을 대하는 거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유현민의 표현만 보면 그와는 정반대다.
“헐, 왔다. 왔다. 저 지프차!”
차라리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 반응이었다.
태호는 저만치에서 보이는 커다란 검은색 차체를 보고 현민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현민!”
깜짝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는 조금 급한 어조였다.
그건 현민이 재현했던 ‘유현민 씨’도 아니었다. 임태호는 순식간에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사내를 보고 솔직히 좀 놀랐다. 이연우 정도의 장신인 남자는, 그 낮은 목소리만큼이나 대하기 힘든 싸늘한 인상이었다. 이연우도 무표정하게 있으면 꽤 차가운 얼굴인데 사촌이라는 저 남자, 이현은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냉랭해 보였다.
현민이 몇 번이나 ‘완전 살벌해요. 살벌해.’하고 말했던 건 괜한 것이 아니었던 거다.
순식간에 어정쩡하게 굳은 채 서 있는 유현민의 코앞까지 온 남자를 보며 임태호는 입도 벙긋 못했다. 그건 당사자인 현민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실, 지금 유현민은 엄청 놀란 정도가 아니다.
긴장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현민은 이제껏 언제나 깔끔한 포마드 계열로 정돈된 머리와 딱 맞는 슈트를 입은 모습의 팀장, 이현의 모습만 보았었다. 언제나 그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현의 모습은 그와는 많이 다르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채 이마를 가린 검은 머리카락 하며, 단조로운 무채색이기는 하지만 현민, 그가 입어도 될 듯한 캐주얼한 옷차림까지 사실 저 멀리서 뛰듯이 걸어오는 걸 봤을 땐 제 팀장이 아닌 줄 알았다.
임태호는 이현이 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유현민을 뜯어 살피는 것을 숨소리도 못 낸 채로 훔쳐봤다. 이현은 누가 봐도 급하게 온 기색이 역력했다. 태호와 현민, 두 사람을 모두 얼어붙게 했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찮아?”
“예에?”
유현민의 입에서 순간 긴장감 없는 괴성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이현은 그 소리에 웃지 않았다. 오히려 유현민의 놀란 얼굴이며 몸까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훑었다. 그 뜻 모를 관찰에 현민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심각한 일이라길래.”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한숨이 섞여 있었다. 임태호는 그 안에서 옅은 안도를 느꼈다.
“놀라서…….”
“아, 아아! 죄송합니다! 그런 쪽은 아니었습니다. 그게, 전화로 말하기가 힘들어서 한 말이었는데.”
유현민은 제가 저 무서운 사람을 전화 한 통으로 완전히 낚았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말했다. 하지만 임태호의 생각은 좀 달랐다. 태호는 쩔쩔매는 현민을 여전히 신중하게 살피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싫어한다고?’
이현은 눈썹을 아래로 휜 채로 입을 달싹이는 유현민을 한동안 그렇게 보다가, 머잖아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뒤로 가볍게 쓸어 올렸다.
“알겠습니다. 뭡니까?”
“아, 예에. 그게 말입니다.”
만약 유현민이 개과의 인간이었다면, 잔뜩 움츠러들었던 꼬리가 바짝 올라가며 살랑거리기 시작했을 거다. 현민은 이현이 도착한 이후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던 태호 쪽을 그제야 슬쩍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 우선 이쪽…….”
솔직히 이현은 유현민의 뒤에 임태호가 있는 줄도 몰랐다.
정말 저만치에서 현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뛰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약간은 힘이 풀린 무뚝뚝한 인상이 그제야 입을 앙다물고 긴장한 채인 임태호 쪽으로 슬쩍 돌아갔다.
두 사람은 이게 첫 만남이 아니다.
하지만 태호는 그때 당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스쳐 지나가듯 만난 이현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현은 다르다. 정말 누군가의 찬양을 세뇌 수준으로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현은 정말로 의도치 않게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제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임태호의 이미지를 툭 내뱉어 버렸다.
“……비서?”
“예?”
작은 되물음은 이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유현민의 것이었다. 사실 이현이 작게 중얼거린 말은 임태호, 그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편했을 내용이었다. 하지만 태호는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유현민은 순식간에 어두운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뺨이 벌겋게 변하는 태호를 보며 이게 뭔가 싶어졌다.
사태 수습을 시작한 건 실수 아닌 실수를 한 이현 쪽이었다.
“아니. 미안합니다. 이연우랑 만나는 분, 맞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임태호입니다.”
“이현입니다.”
솔직히 이현은 임태호의 이름과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만 알 뿐인가. 태호의 간단한 프로필과 왜 그가 청순하고 예쁘고 멋있는가에 대한 이연우 나름의 논리로 무장된 찬양을 몇 개쯤은 눈감고도 쓸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임태호가 제 맛 간 사촌과는 달리, 굉장히 정상적이고 숫기 없는 사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래서 이현은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 대신 지금 당장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이 있습니까?”
이현답게 곧바로 떨어지는 직구였다.
잠시 마른침을 꼴깍 삼킨 유현민은, 미리 자판기에서 꺼내 둔 커피 하나를 의자에서 주섬주섬 챙겨다가 건네며 ‘저기, 여기 잠깐 앉아 주시면…….’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현은 그걸 별다른 말없이 순순히 따라 주었다.
유현민에게 말하는 게 임태호의 몫이었다면, 이현을 맡는 건 유현민이었다.
현민은 제가 오늘 태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작게 심호흡을 하며 느리게 반복했다. 물론 중간중간 말이 막히는 부분도 있었다. 울컥하고 억울함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현민은 저도 모르게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그 부분을 대신 말해 주는 건 임태호였다.
태호는 제가 입을 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연인의 사촌 덕에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현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던 조금 전은 어디로 간 건지, 이렇게까지 감정이 얼굴 위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살며 처음이었다.
그건 유현민 역시 마찬가지인지, 잠시 진정된 현민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혹시 팀장님께서 뭔가 도와주실 수 있는 건 없나 하고.”
“…….”
“되게 주제넘은 생각인 건 아는데…….”
“아니. 잘했어.”
이름을 부른 것 이후로, 두 번째로 듣는 이현의 반말이었다.
현민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제 팀장의 눈치를 봤다. 사실, 임태호도 유현민도 눈치채지 못한 채이지만 이현, 그는 지금 머리꼭지까지 화가 난 상태다.
그것도 굉장히, 많이.
“잘 생각한 겁니다, 현민 씨.”
이현은 유현민이 건넨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뒤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표현을 달리해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이렇게 말하세요.”
“……예.”
현민은 마치 선생님에게 말하는 것처럼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좀 얼떨떨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상냥한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 중에는 없었다. 언제나 무섭고, 살벌하고, 엄한 상사였던 이현이다. 자기 가족 일이어서 그런가? 현민은 작게 턱을 긁적였다.
이현은 그런 유현민을 잠시 보다가, 시선을 살짝 돌려 임태호를 향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유현민을 칭찬하는 말에 왠지 아군이 생긴 것 같아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살짝 풀고 있던 태호는 다시 긴장한 얼굴로 그 날 선 눈매를 마주 보았다. 이현은 낮지만, 정확히 들리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걸 유현민과 저에게 먼저 말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현의 질문에 움찔하고 놀란 건 임태호가 아니라 유현민이었다.
사실, 현민은 일부러 한 가지를 빼놓고 설명했다. 바로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사실과 그걸 움켜쥔 박영진의 협박이었다. 태호는 그 묘한 사실 관계 수정에 살짝 입술을 달싹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연인과 가까운 가족이라고 한들 초면에 가까운 이현인지라, 그걸 보충하지 않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현은 그 어설피 가려진 인과관계를 호락호락 지나칠 사내가 아니었다.
“지금 연우는 이거 모르지 않습니까? 알면 이렇게 조용하게 있을 새끼가 아닌데.”
“…….”
“이연우에게 먼저 말한다고 한들 손해 볼 것은 없잖습니까? 오히려 그게 맞는 순서일 텐데요. 태호 씨의 회사 일을 다시 풀어내는 거야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임태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저를 바라보는 냉랭한 시선에 맞섰다.
이현. 이정호 전 대표의 차남. 베타. 유현민의 상사. 그리고 연우와 가까운 가족. 태호는 눈앞의 사내에 대해 제가 아는 사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다. 이현에 대해 임태호가 아는 건 이게 다다. 솔직히, 정말로 생판 남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 연인과 잘못 하나 없이 곤경에 빠진 현민을 도와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임태호는 저보다도 더 안절부절못하며 둘을 번갈아 살피는 유현민을 잠시 보다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내뱉는 숨에 입을 열었다.
“전 억제제를 먹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지 못할 일이 없었고, 하지 못할 말이 없었다.
“……오메가여서요. 열성이고요.”
태호와 현민의 말을 들으면서도 단 한 번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현의 눈에 처음으로 선명한 감정이 실렸다. 임태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도 않은 채 저를 보고 있는 이현을 향해 조금 찡그리듯이 웃었다.
“그런데 그걸 연우에게 말하지 않고…….”
“…….”
“8년을, 보냈습니다.”
유현민은 임태호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는 걸 들으며 왠지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태호는 일순 그 얼굴만큼은 담담한 것처럼 보여서 더욱 말문이 막히게 했다.
“연우가 제 향을 가끔 알아채기라도 하는 날에는, 오메가 애인이 있는 척했고요.”
“…….”
“그러다, 연우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걸 알고…….”
쉼 없이 말을 잇던 임태호는 그 순간 잠깐 목이 멘 듯 입술을 꽉 깨물고 다른 곳을 한 번 봤다가, 주먹에 꽉 힘을 주어 말아 쥔 다음에 제 연인의 가족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있지도 않은 애인이랑 8년 만에 헤어진 척했어요.”
“…저기, 태호 형.”
“연우와는 그렇게 사귀게 됐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될 일은 없었을 거예요.”
유현민은 이 상황을 전해 듣고도 태호를 탓하기는커녕 대신 화를 내줄 정도로 착해 빠진 동생이었다.
겨우 만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는 사람에게 저렇게 행동할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 얼마 없다는 걸, 그보다 조금 더 먼저 사회에 나온 임태호는 잘 안다. 이제 막 시작한 사회생활을 저 때문에 망가지게 하지는 않을 거다.
임태호는 저 자신보다 더 울컥한 얼굴을 하는 유현민을 보며 흐리게 눈을 접어 웃고는,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무엇 하나 빼지 않고 모두 눈에 담았다.
“그 뒤로도 오메가라는 걸 말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베타인 척하려고 약을 더 먹으면 먹었지…….”
“…….”
“이렇게 쉽게 털어놓을 수 있을 줄 알았으면,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연우한테 좀 더 빨리 말할 걸 그랬죠.”
쉽게?
어떻게 저 표정이, 저 목소리가 쉽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현민은 왠지 속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토해 내고 말았다.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기회가 많이 있었을 텐데.”
사귀기 전에는, 베타가 아닌 열성 오메가 임태호를 이연우가 어떻게 볼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그렇게 근사하고 멋진 사람들만 가득한 이연우가 열성 오메가를 언제나 곁에 두는 선배로 함께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겼다.
베타 임태호라면 누구의 의심도 없이, 심지어는 연우 그 자신의 의심도 피한 채 극우성 알파의 절친한 선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연우의 연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였다.
“……무서워서.”
연인이 된 순간 8년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심지어는 마음의 가책조차 없이 습관처럼 이어온 그 거짓말이 순식간에 무거운 족쇄로 바뀌었다. 사귀기 전보다 더욱 말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사실은 나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였어. 8년 동안 있지도 않은 오메가랑 사귄다고 하면서 널 속였는데, 이제는 사귀니까 말해 줄게.’
……떠올린 변명은, 정말이지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었다.
박영진 이사 무리는 임태호의 약점을 가장 천박한 단어와 표현을 엮어 정확히 찔렀다. 임태호는 저를 바라보는 이현의 시선 속에서 무언가 잔뜩 일렁이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감히 짐작할 수 없어서, 그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꽉 움켜진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에이. 내일 말할 거라면서요!”
“……응.”
“지금 연습한다고 생각해요. 이연우 팀장님, 그분도 괜찮다고 할 거예요. 정말로요.”
유현민은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내며 임태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흐리게 웃는 임태호가 방금 제대로 된 일면식도 없던 이현에게 스스로가 오메가인 것을 밝히며 ‘무언가’를 겨우 다짐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좀 더 속이 상했다.
몇 달 만난 사람에게 저렇게 친절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태호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건 유현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그 이연우가 애인인데 말단 중의 말단인 신입 사원인 저는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임태호는 저를 놓지 않았다. 현민은 그게 사무치게 고마웠다.
“우선 당분간 모르는 전화는 다 피하십시오.”
그때, 낮은 목소리가 잠시 울적하게 처져 있던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이건 제 명함이니까, 가지고 계시고.”
“…네, 네에.”
“회사는 나가고 계십니까?”
임태호는 갑자기 저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이현을 보며 잠시 말간 표정으로 눈만 깜박이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아니요. 조사 중이라고 해서.”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쪽에도 누가 됐든 심어 뒀을 테니까.”
와, 씨! 회사도 안 나가고 있었어?! 유현민은 임태호의 말에 울컥한 얼굴이 됐다.
하지만 눈치 빠른 현민은 그렇게 태호에게 잔뜩 감정이입을 하느라 작은 변화 하나를 놓쳤다. 정확히는, 현민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입을 한 채 방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가 된 이현을 깨닫지 못했다.
이주호 회장이 온다고 한들 불러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 신화그룹 3세 중, 아니 내로라하는 그룹의 재벌 3세 중 가장 괴팍하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내.
이현이 신화그룹 3세를 지칭하는 별명 중 ‘룩’을 얻게 된 건, 담을 쌓고 아무와도 섞이지 않는 그 외딴 성처럼 보이는 싸늘한 태도 때문이었다. 심지어 박영진 이사 무리들이 짐작했을 때에도 이현은 그 어떤 상황에도 가장 위험이 되지 않는 판 밖의 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임태호는 그 성 안에 갇혀 사는 사내를 직접 제 발로 문을 열고 나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의미인지는 이현의 팀에 속한 유현민조차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 이현이 제 사무실을 나와 단 한 번도 발걸음을 옮긴 적 없었던 이연우의 팀으로 향했을 때의 파장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사원이 예상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이연우, 얘기 좀 하지.”
툭, 하고 누군가가 쥐고 있던 펜을 떨어트리는 소리가 났다.
이연우가 있는 본사 홍보팀. 이곳의 수많은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공간을 방문한 사람을 보고 잠시 얼이 빠졌다. 그게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는 저 멀리 유리 벽 너머로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함께 증명했다.
의아한 건 이연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의미였다.
‘아, 밖에서는 서로 말 높이기로 했잖아!’
연우는 속으로 삐딱한 제 사촌 형의 말투에 코웃음 치며 확인하던 서류첩을 부러 소리 나게 책상에 두들겼다. 이렇게 사내에서 편하게 말하던 것이 큰형 이민혁이나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솔직히 온갖 잔소리를 다 듣는 건 이현이 아니라 제가 될 터였기 때문이다.
가족 중 유독 편한 상대였기에 더욱 한가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후우. 지금 회의 들어갈 준비 중이라서요. 나중에…….”
“네가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한 사람.”
하지만 이현은 이연우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그 말을 잘랐다. 그 탓에 미소 띤 얼굴에 눈썹 하나만 희미하게 휘고 있던 이연우는, 머잖아 제가 잠시 연결하지 못했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천천히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그 ‘오메가’ 이야기인데.”
“…….”
“그래도 나중에 할까?”
이연우가 오늘 저녁 만나기로 한 사람은 딱 한 명이다.
지난밤 이연우는 평소의 그 짧은 수면 시간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설레는 말들을 잔뜩 하던 태호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울려서 바보처럼 히죽이다가 밤을 다 보냈다. 그러면 조금 느슨하게 나올 법도 한데, 오늘 임태호가 제 회사 근처로 온다는 생각에 옷도, 머리도, 무엇 하나 대충 할 수 없어서 일찌감치 사람을 불러 평소보다 몇 배 더 공을 들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탓에 차 안에서는 오랜만에 조금 졸기도 했다.
이연우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서류첩을 그대로 내려놓고 업무 공간에서 뚝 떨어진 인적 드문 곳으로 먼저 발길을 옮겼다. 그 얼굴은 조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꽤 싸늘한 채였던 터라, 지켜보는 이들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하지만 이현은 그런 냉랭한 반응에도 꽤 담담했다. 그와 이연우는 닮은 구석이 많다. 외모나 취향이 비슷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제법 빼닮았다는 거다. 그래서 서로 살가운 성격이 아닌 데다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인데도 유독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다.
실망하거나 화내지 않을까.
이현은 인적 없는 어두운 비상계단에 도착해서야 천천히 저를 돌아보는 사촌 동생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이연우가 임태호라는 베타, 아니 오메가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는지 잘 안다. 그 자존심 세고 고고한 이연우가 완전히 풀린 얼굴을 한 채로 통화하는 것을 봤을 때만 해도 속으로 조금 놀랐으니까.
잠시간의 정적 끝에 이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제 만났어.”
“태호 형을?”
“그래.”
이현은 머릿속으로 쏟아질 질문에 빠르게 대답을 늘어놓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연우의 물음은 퍽 차분하고 침착했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뜸을 들이듯 천천히 흘러나왔다.
“태호 형이…… 직접 말했어?”
이현은 잠시 고민했다.
임태호가 오메가인 것을 먼저 고백한 게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에 저 자존심 세고 고고한 이연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앞서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봐 온 사촌 동생을 그보다 더 잘 파악한 건 오히려 유현민 쪽이었다.
이연우는 긍정을 뜻하는 짧은 침묵에 실망하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얼마간 꼼짝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현은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했었다. 자신의 연인이 제2의 성별이라고 불리는 것을 숨겼을 때 그 상대는 어떤 반응을 할까?
지금, 이현은 그 오랜 궁금증 하나를 이연우의 방식으로 보고 있었다.
이연우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묻고 싶어졌다. 이연우가 억제제를 먹으면서까지 베타로 사는 이유를 물었던 날처럼, 이현 그도 연인의 거짓말을 알게 됐을 때 너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질문 기회를 먼저 낚아챈 건 이연우 쪽이었다.
“……어땠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연우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신 조금은 막힌 듯한 목소리로 나오는 질문이 다였을 뿐이다. 이현은 제 동생과 그 연인을 위한 거짓말을 했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어.”
“……다행이네…….”
사실, 안타깝게도 어제의 임태호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었다. 온종일 창백한 인상을 한 채 어깨를 축 늘어트린 모습은, 아무리 좋게 쳐줘도 괜찮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당장 기절할 것 같은 안색이라고 말하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현은 이연우의 한숨 섞인 작은 안도에 제 말을 정정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이연우가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것을 천천히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건 절대로 표정을 보여 주지 않을 것 같던 이연우의 손을 저절로 내려가게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박영진 이사가, 정확히는 내 아버지 쪽 사람들이 임태호 씨에 대해 알아. 오메가라는 것까지 전부.”
이현은 제 슈트 안주머니에서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한 박자 늦게 실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작게 혀를 찼다. 오늘 그 누구보다 근사한 모습인 알파는, 마치 모든 감정을 싹 도려낸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였다. 이현은 그 형형하게 번득이는 눈을 마주 보면서 느리게 말을 이었다.
“덕분에 약점 잡힌 채로 협박당한 모양이야.”
“……뭐?”
“8년을 숨기고 베타인 척하고 이연우 애인 자리까지 꿰찼는데 이제 와 오메가라고 하면 네가 어쩌겠냐는 거지.”
그 순간 이연우는 잠시 숨을 쉬는 것까지 잊은 듯했다.
“나한테는 예쁘게 둘러 말한 거겠지만 어떻게 표현했을지는 뻔한 일이고. 임태호 씨, 그쪽 회사에 압력까지 넣었다고 하니까.”
“언제부터?”
“오래되지는 않았어.”
이연우는 매스컴의 노출을 피하는 형 대신 제 아버지와 공식 석상에 대신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비록 사석에서는 입만 열면 어디서 무슨 폭탄을 던질지 모를 막내였다지만, 그려 만든 고운 표정만큼은 3세들 중 가장 완벽하게 지을 수 있는 극우성 알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연우는 그 멋진 표정과 정갈한 페로몬 중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유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뼈를 씹어 삼킬 듯 살벌한 인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태호의 일이다.
하나뿐인 연인이자, 아마도…….
3세들 중 행동력을 빼놓고 말하기 아쉬운 연우는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비상구를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그런 이연우를 막아선 건 고개를 비뚜름히 기울인 채 벽에 기댄 이현이었다.
“왜?”
“더 들어. 너랑 임태호 씨, 거기에 신입 사원 하나까지 낀 삼각관계 스캔들이 대기 중이니까.”
산 넘어 산이었다. 아니, 차라리 이해 가능한 범위의 일이라면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을 거다. 이현은 그 자신도 썩 달갑지 않은 말을 이어갔다.
“이미 라온 신문 데스크까지 통과했어. 막을 수 있을지 아직 확신 못 해.”
“신입 사원은 뭔 소리야, 그게?”
“듣기 좋잖아. 재벌 3세 커플 사이에 낀 신입 사원.”
이연우는 잘 정돈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신입 사원이라니, 얼른 떠오르는 얼굴들이 몇 개 있었다. 당장 그가 속한 홍보팀 사람들만 해도 엮기 좋을 면면들이 있었다.
“누군데. 아는 사람이야?”
“내 쪽 사람이라 넌 모를 거야. 유현민이라고…….”
절대로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 이현의 낮은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덕분에 이연우는 이제까지의 표정 중에서 가장 뚜렷한 감정을 지닌 얼굴이 됐다. 그건 의아함과 황당함, 거기에 약간의 신경질적인 짜증까지 섞인 것이었다.
“유현민, 그 새끼가 우리 그룹 개발 1팀이라고?”
현민은 한때 이연우 같은 사람이 하나만 더 있으면 세상이 말세일 거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세상은 말세가 맞다. 이현은 순식간에 온도가 몇 도는 뚝 떨어진 목소리와 눈을 한 채로 곧바로 반응했다.
“……알아?”
“그거 박영진 라인인 거 아니야?”
이번 일이 정리되면 가장 먼저 알아볼 관계가 이현에게 하나 추가됐다. 이현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하는 제 사촌 동생을 조금은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그룹 딱 반으로 쪼개면 우리 아버지 세력이고, 또 그 딱 반이 작은아버지 쪽이야. 틀린 말 아니잖아.”
“신입 사원이야.”
“신입 사원 하나 매수 못할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유현민이 아니었다면 이현, 그가 먼저 경계했을 거다. 하지만 유현민만은 다르다. 이현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보증해.”
“형 팀이라고 해도 감쌀 걸 감싸.”
“내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정도 뜻 같아?”
그제야 살짝 말투가 날카로워졌던 이연우의 입이 다물어졌다. 사실 그 자신이 팀장으로 있는 개발 1팀 팀원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이렇게 일일이 챙겨 줄 이현이 아니다. 오히려 현의 성격상 일찌감치 발을 빼고 먼저 이연우의 먹잇감으로 던져 주는 게 더욱 있을 법한 일이다.
“유현민 커버는 내가 해. 쥐새끼 하나 못 잡아낼까.”
“…….”
“그런데 넌 어떡할래?”
스캔들이 터지면 나이트의 이름이 바닥에 곤두박질칠 것이다.
그건 단순히 잠깐 바람처럼 이는 흙먼지가 스치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트와 폰이 같은 무게로 저울질당하는 저속한 사건 사고를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솔직히 이연우, 그는 제 자신의 느긋했던 마음을 이 순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이연우는 박영진 이사와 그 무리들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믿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누구보다 그룹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 왔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그들이 순식간에 자신들을 비추던 태양이 사라진 상황에, 누구보다 탈력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으리라는 것을 이해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지금의 이 삐걱거리는 과도기가 끝나면 그들과 공생하고, 또 공존할 수 있는 때가 오리라 기대했다. 때문에 지금의 불화를 경계하되 내치지는 않았던 거다. 그건 이연우뿐만 아니라 이민혁이나 이연아, 심지어는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믿음이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 솔직히 등에 칼이 꽂히기 일보 직전이다.
소위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바닥에서는, 사생활을 건드리는 건 절대로 금기시되는 불가침 영역이다. 적대 그룹끼리도 그러는데 하물며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같은 그룹의 사람들끼리라면 세력 싸움을 넘어선 이 정도의 집단행동은 내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연우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눈을 감았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어제 임태호가 왜 그렇게 평소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말과 행동들을 연이어 했었는지, 그리고 오늘 저녁, 저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드디어 그 그림이 그려졌다.
이렇게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다.
태호가 정말로 원하는 날에 제 눈을 보며 털어놓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그 모습은 얼마나 예쁠까 몇 번이고 상상하기도 했었다.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이연우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한참을 소중하게 아끼고 아껴서, 임태호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 가득 차게 하는 것. 떨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들게 하는 것.
그렇게 되면, 언제든 저에게서 발을 뺄 것처럼 망설이는 눈을 한 임태호를 고스란히 바라볼 수 있을 거고, 그때쯤에는 저에게 생긴 작은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잠시 동안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이연우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형, 나 뭐 하나만 좀 도와줘.”
◈◈◈
임태호는 이제 몇 번이고 와서 제법 그 근방이 익숙해진 신화그룹 체인 호텔 근처에 주차한 채로 휴대폰만을 만지작거렸다. 차마 호텔 주차장으로 갈 수 없던 이유는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오늘 그에게 온 완전히 상반된 내용의 두 연락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연인인 이연우에게서 왔다.
[형, 미안해요. 오늘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아요. 보기 힘들 것 같아.]
사실 태호는 이 문자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온종일 시계만 보며 긴장했던 힘이 확 풀리는 것 반, 그러면 언제 연우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반으로 마음이 복잡해졌었다.
하지만 차라리 좀 심란한 게 나은 거였다. 그로부터 딱 삼십 분 뒤에 온 메시지를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늘 저녁 8시 호텔 S. 이연우 일이니 가능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투만큼이나 건조한 느낌의 문자는, 이현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덕분에 태호는 멍하게 눈을 끔벅이다가 언급된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근처에 도착해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콕 집어 ‘연우의 일’이라고 말하는 통에 괜히 온갖 상상을 다 하게 됐다. 그리고 저만치 멀리 보이는 금회색의 건물을 바라보며 애꿎은 휴대폰 메시지만 번갈아 확인했다.
이연우에게 괜히 ‘혹시 너 무슨 일 있니?’ 하고 물어보는 건 왠지 자살골을 넣는 것 같았고, 시종일관 싸늘한 얼굴을 한 채로도 이렇게 저를 챙겨 주는 이현의 말에 토를 달 정도로 용기 있지도 못했다.
결국 임태호는 일곱 시 반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렇게 호텔 근처에서 끙끙대며 시간만 보냈다. 물론 인내심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현은 그런 임태호의 걱정을 머잖아 신속하게 없애 주었다.
-어디십니까?
“네, 네에. 안녕하세요. 그게, 근처이기는 한데요. 제가 오늘 아직 연우를 못 만나서…….”
-압니다.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어디신지 말씀하세요.
여유로울 정도로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말 앞에서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임태호는 호텔 근처 유료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다음 저를 데리러 오는 검은 세단에 한 번 더 몸을 실었다. 그건 어찌나 은밀한 움직임이던지, 태호는 뭔가를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하고 있는 기분에 주변을 몇 번이나 살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분은 정말 괜한 거였다.
시종일관 깍듯한 태도를 한 양복 차림의 사람의 뒤를 따르는 긴장감이, 연인의 가족이자 친한 동생의 상사라는 사내와 단둘이 웬 응접실에 있게 되었을 때의 머쓱함보다야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긴장한 채로 마른침만 꼴깍 삼키는 태호를 보며 작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더니, 살짝 비뚤어진 제 넥타이를 바로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연우가 뭐라고 연락했습니까?”
이제껏 33년을 살아오면서 만나 왔던 수많은 이들 중 가장 낮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꼽으라면, 임태호는 아마 눈앞의 남자를 망설임 없이 꼽을 것이다. 태호는 온종일 만지작거렸던 휴대폰을 꼭 쥐면서 대답했다.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아서, 만나기 힘들겠다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제 차림을 다듬은 이현의 시선이 슬쩍 임태호를 쭉 훑었다. 자의 반 타의 반 휴직 중인 거나 마찬가지인 임태호의 차림은 정말로 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이연우를 만나게 될까 봐 혹시 몰라 챙겨 입은 옷 때문이었다.
“오늘 임태호 씨가 여기 온 거, 당연한 얘기지만 이연우는 모릅니다.”
당연하기까지 한 거였구나.
태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대체 연우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걸까, 울컥 불안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현은 조금 바빠 보였다. 임태호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내 말고도 다른 이들이 가까이 와서 뭐라 작게 속삭이는 것에 지시를 내리기도 하고, 휴대폰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묻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임태호는 여기 오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을 느린 목소리로 입에 담았다.
“저, 그런데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가끔은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워지는 물음들이 있다. 방금 임태호가 용기 내어 꺼낸 질문도 그랬다. 태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서늘한 표정에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입술 안쪽을 살짝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저도 궁금합니다.”
“……네?”
“이연우가 임태호 씨를 부르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제 영문도 모르고 당하시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월권했을 뿐입니다.”
분명 대답을 듣기는 했는데 더욱 영문을 모를 말뿐이었다. 하지만 이현은 그것에 대한 보충설명을 해 줄 생각은 없는지, 태호의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비서에게 살짝 눈짓하며 ‘잘 모셔.’하고 짤막하게 지시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임태호는 겨우 담담한 표정을 내걸고 있던 얼굴에 눈에 띄는 의문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현은 그것에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정말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음기를 걸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법한 눈을 한 채 나직하게 덧붙였다.
“한 번쯤 진짜 비서 노릇 하는 것도 재밌지 않습니까?”
‘진짜 비서 노릇?’
임태호는 저와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를 남겨 둔 채 살짝 인사하고 먼저 자리를 뜨는 이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만 끔벅였다. 제 연인의 사촌이라는 자는 오늘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임태호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던 남자는 얼마 뒤 시계를 확인하더니 한껏 예의를 차린 목소리로 ‘가시죠.’라고 하더니 어딘가로 다시 한 번 태호를 이끌었다. 태호는 아무리 봐도 일반 손님들이 발붙이기 힘들 것 같은 복도를 한참을 걸으며 제 앞에서 몇 보 앞서는 남자의 뒤꽁무니만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걸 깨달았을까. 남자는 슬쩍 곤란한 듯 눈썹을 휘더니, 이현보다는 훨씬 더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했다.
“굳이 뭘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 같이 계시기만 하면 되니까요.”
“죄송합니다만, ‘저희’라는 게…….”
“비서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중앙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안쪽을 계속 살필 수 있는 구조고요.”
누가 이현의 비서 아니랄까 봐 조금 더 상냥해졌을 뿐이지 완전히 의문을 해소시킬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현의 비서는 임태호를 오랜 혼란에 빠트리지 않았다. 그걸 증명하듯, 임태호는 이윽고 제가 들어선 작은 대기 공간에서 ‘헉’하는 급한 숨을 들이켜게 됐다.
중앙홀.
임태호는 놀람과 긴장 가득한 눈으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혹시라도 무언가 지시 사항이 있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위치란, 반대로 말하면 이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관찰에도 썩 괜찮은 구도를 선사했다.
저만치 떨어진 곳이기는 했지만, 태호는 거기에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을 제법 많이 알았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화그룹에 관한 기사라면 누구보다 꼼꼼히 읽던 태호는, 몇 번이고 눈에 새겼던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씩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이주호 회장 부부와 이정호 전 대표 부부였다.
워낙 생김새가 동떨어지기로 유명한 이주호, 이정호 두 사람은, 정말 같은 형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이 달랐다. 그 옆에는 이미 한 번 만나 식사까지 한 적 있는 이민혁이 있었고, 잠시 스치듯 봤던 이연아도 있었다. 이현 역시 그의 형이라고 알려진 남자와 함께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룹의 총수 일가가 아닌 이들 중 가장 먼저 임태호의 시선을 잡은 건 당연히 박영진 이사였다. 태호를 만났을 때는 시종일관 여유 가득한 얼굴이었던 그는, 오늘만큼은 조금 초조하고 또 불편한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임태호는 비서들의 뒤에 몸을 감춘 채로 숨소리마저 조심했다.
“…오늘 안 오신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대표님께 연락까지 했는걸.”
임태호는 비서들 몇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몰래 훔쳐 들으며 그들이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바로 제 연인인 알파였다. 저 적지 않은 사람들 사이 그 어디에도 이연우는 없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가려진 연우를 찾지 못한 것일까 봐 몇 번을 까치발을 서 봐도 결과는 같았다. 애초에, 이연우는 다른 누군가 때문에 눈에 안 띄기에는 너무나 화려한 사람이었다.
임태호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은 휴대폰을 괜히 한 번 확인하며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스럽게도, 이연우는 저녁 식사치고는 조금은 늦은 시간대에 줄지어 들어오는 트롤리 가장 뒤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널찍한 홀, 수많은 이들 중 그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그건 참 새삼스러운 일이었는데도 종일 보고 싶었던 탓일까. 태호는 잠시 상황도 잊고 제 연인의 얼굴을 넋을 놓고 눈에 담았다.
하지만, 피를 나눈 가족인 형과 누나는 달랐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민혁은 뻔뻔한 얼굴로 걸어 들어와 비어 있던 남은 자리에 앉는 막냇동생에게 작게 핀잔을 줬다.
“미안. 이왕에 먹는 거 좀 두루두루 맛있게 먹을 만한 게 좋잖아. 나름 신경 썼어.”
“누가 들으면 직접 요리한 줄 알겠다, 얘. 네가 모이자고 해 놓고.”
민혁의 말에 연아까지 한마디 보탰다. 그러자 이연우는 작게 눈을 접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 저쪽 테이블 부른 건-.”
아니, 정확히는 입을 열려고 했다.
조금 핀잔하는 목소리로 말하는 가족의 말을 받아치려던 이연우는 순간 작게 멈칫했다.
덕분에 태어나 이렇게 신경을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태호는, 갑자기 끊긴 목소리에 자리에 앉은 이연우를 보려고 사람들 어깨너머로 정말 머리꼭지만 슬쩍 내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말 과장 않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만치 떨어져 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연우의 시선은 분명히 임태호가 있는 홀 외곽의 이 대기실을 향해 있었다. 덕분에 임태호는 그 몇 초간 온갖 생각을 하면서 눈을 굴렸다.
보일 리가 없는데? 이렇게 뒤에 있는걸.
한편, 잠시 말을 멈춘 채로 의아한 눈으로 저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시선을 받아내던 이연우는, 말을 잇는 것 대신 작게 한숨을 쉰 다음 조금은 비뚜름하게 눈썹을 휜 채로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 도로 미소를 지은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을 이었다.
“……현이 형이잖아. 그렇지?”
가족들은 뜻 모를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는 막내, 이연우를 보며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시선만 교환했다. 솔직히 오늘, 조금 무리해서까지 모든 이들이 다 모인 건 저 두 사람 때문이었다. 고작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 말들이 무엇보다 빠르게 퍼졌다.
‘그 이현’이 ‘그 이연우’를 ‘회사에서’ 찾아갔다.
이주호 회장부터 다른 3세들은 물론 현직에 있는 임원들부터 회사 일에서 손을 뗀 지 오래인 이정호 전 대표까지 그 강조점 가득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연우가 웬만하면 시간을 내서 모이자는 연락을 한 것이다.
총수 일가 그 누구도 빠지지 않는 자리가 사전 약속 없이 이렇게 만들어지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무슨 바쁜 일이 있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함께했는데, 생각도 못했던 이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바로 이현이 앞서 호출한 임원들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민혁은 싱글거리고 웃는 막냇동생과 그와는 정반대의 냉랭한 표정을 한 사촌 형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런 민혁의 궁금함을 해소해준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듣기 좋은 웃음기가 더해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영진 이사였다.
“저희는 이현 팀장님께서 긴히 모여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달려왔습니다만.”
이민혁은 겨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 짐짓 경쾌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아무리 사이가 소홀하다고 한들, 작은 아버지인 이정호 전 대표가 있는 자리에서까지 그걸 드러내지는 않으려는 거였다.
그건 박영진 이사 역시 마찬가지인지, 눈을 휘며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이 우연히 같은 장소를 빌리신 건 아니실 테고. 무슨 일일까요?”
“한 번쯤 이런 자리 갖는 것도 좋지 않나요? 이렇게 모여서 얼굴 맞댈 시간이 얼마나 있다고.”
“물론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얼마 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미지근한 긴장감이 깔린 분위기는, 이연우가 신경 써서 준비했다는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을 때도 쭉 계속됐다. 솔직히, 3세들은 이 어색한 평화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무슨 일로 이연우와 이현, 저 속 모를 알파 둘이 이런 판을 짰는지는 몰라도 괜히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민혁과 이연아는 물론 평소에도 곧잘 웃으며 분위기를 띄우는 이안까지 식사 내내 안간힘을 쓰면서 허울뿐인 다정함을 그리려 애썼다. 하지만 어쨌거나 가시방석인 건 어쩔 수가 없다. 몇몇 이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식은땀을 닦아내며 경직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오늘 이 자리를 그런 분위기 좋은 화합을 위해 만든 게 아닌 두 알파였다.
곧잘 웃던 이연우도, 애초에 제대로 된 참여 의사가 없어 보이던 이현도 식사가 시작되고 나자 입을 다문 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 힘겨운 시간을 관찰하듯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 탓에 이연아가 테이블 아래로 몇 번이고 ‘야, 너 무슨 일인데?’ 하고 메시지를 보내도, 몇 번이고 눈치를 줘도 그 뻣뻣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덫이었다.
이연우는 그 심상찮은 분위기에 임원 몇이 눈에 띄게 얼굴이 굳은 채로 자신들끼리 낮게 속삭이기 시작하자, 그것을 노골적으로 눈에 담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그 비뚜름한 행동은 겨우 웃음을 이어가던 다른 이들의 입마저 다물게 할 만큼 눈에 띄었다. 이연우는 식기가 움직이는 작은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침묵이 깔리게 되자, 맨 처음 이 홀에 들어왔을 때처럼 화사한 웃음을 천천히 띠기 시작했다.
차라리 대놓고 싸움을 걸어라, 걸어.
이연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며 한숨 쉬듯 생각했다. 하지만 연아의 그런 생각은 농담으로도 해서는 안 됐다.
“얼굴 펴세요, 이사님들.”
“…….”
“웃으면서 밥이나 먹자고 부른 게 아니라는 거,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
그 순간 이민혁에게서 ‘맙소사.’하는 작은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오지 않은 건, 정말 기적적인 일이었다.
“솔직히 현이 형이 안 불렀으면 오기나 하셨겠어요.”
줄곧 긴장감이 깔린 분위기를 살피면서 일부러 눈감은 척 하던 이주호 회장은, 보기 좋은 웃는 얼굴로 뼈가 어린 말을 내뱉은 제 아들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 게냐?”
“아. 답 없는 ‘도련님’이니까 잠깐 고자질 좀 해 볼까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장난기 어린 듯 가벼웠지만, 사실 이연우의 입 밖을 나올 문장에는 그 귀여운 표현으로 감쌀 수 있을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 그쪽 테이블 분들끼리 중견 기업 하나 물 먹이고 있는 거, 여기 있는 분들은 아시는 일인가요?”
사실, 이건 중앙홀로 들어오는 총수 일가를 봤을 때부터 곧바로 떠올렸던 공격이었다.
워낙 벌려 놓은 판이 있다 보니 이연우가 분명 제 연인에 대한 걸 듣고 날뛰려는 거겠지, 하는 상상은 가장 어렵잖게 할 수 있는 상상 중 하나였다. 덕분이라면 덕분이라고 할지 박영진 이사 무리는 그 말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이미 전에 입을 맞췄던 내용으로 가볍게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연우는 오늘 저들의 속을 한 번 뒤집어엎은 뒤 시작할 작정이었다.
“설마, 이미 은퇴한 지 한참 된 전 대표님 지시도 아닐 거고.”
“……뭐요!”
“하하. 해 본 소리예요. 해 본 소리.”
성격 급한 임원 몇 명이 곧바로 벌컥 소리를 내지른 말에 이연우가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몇십 년을 따른 이정호 전 대표다. 그런 그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불쾌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늘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한다며 불같은 이주호 회장과는 정반대라고 불렸던 이정호의 냉랭한 표정보다야 나았다. 바턴은 이주호 회장에게서 이정호 전 대표에게로 넘어갔다.
“저게 무슨 말인지 설명하세요.”
“…메디컬센터 연구개발 사업 진행상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 말하게 할 셈입니까?”
박영진 이사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듯 웃었다. 몇몇이 흥분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 정도 상황이야 진작에 그렸던 거다. 빠져나갈 방법도 충분히 미리 준비해 두었다.
서류도, 사람들의 말도 하나같이 잘 맞춰 두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연우는 오늘 박영진 이사 무리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빠져나가도록 할 생각이 없었다. 연우는 썰어 둔 고기 한 점을 씹어 삼킨 다음, 물까지 한 모금 마신 후에 보란 듯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지금 이민혁 대표 마음에 안 차 하시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
“그 자리 앉히고 싶었던 이안은 그런 것에 관심이라고는 없고. 이현은 뭐, 자리 지키고 있는 게 감사할 수준이니. 이쪽이 썩 달갑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이연우가 아직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는 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이연우는 여전히 흐린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얼마나 눈엣가시야. 나는 끈 떨어진 연 신세 된 것 같은데 저쪽은 승승장구하는 것 같고.”
“굳이 그렇게 표현하실 것까지는……!”
“그렇다고 나 하나 밟아 보겠다고 내 애인이 다니는 회사 괴롭히는 건, 솔직히 너무 유치하잖아요? 영 정중하지도 않고.”
뭐라고 이연우의 말을 끊어 보려던 한 임원의 시도는, 그걸 깔끔하게 무시한 채 이어지는 문장에 툭 잘려 나갔다. 워낙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모두가 잠시 반응할 새를 잊은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이민혁이었다.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전 대표와 현 대표, 두 사람의 질문에 일관된 부정의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얄팍한 수를 읽지 못할 이는 이곳에 없었다. 식사 내내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이끌어 보려고 노력했던 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안타깝게도 오늘 이곳에 박영진 이사 무리를 감싸줄 손은 없는 듯했다. 그건, 그들이 오랫동안 충성했던 이정호 전 대표의 차남이자 그들을 이곳으로 부른 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라온 신문 쪽에 미리 통과시킨 기사까지 제 착오입니까?”
“…….”
“신화그룹 이연우랑 사귀는 일반인 베타. 그 가운데 낀 신입 사원의 특종 제보.”
이현, 그는 그답지 않게 눈에 띄는 감정을 드러낸 채로 서늘하게 웃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내용이?”
……그 건방진 오메가 새끼가!
박영진은 임태호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그는 제 앞에서 벌벌 떨면서 긴장하던 임태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대학 동기는 물론이고 그의 회사 사람들까지, 임태호. 그 꼴같잖은 사내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한결같았다고 했다.
말수 없고 눈에 띄지 않는 소심한 남자.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그 평가를 듣고 솔직히 박영진은 좀 코웃음 치기도 했었다. 이연우, 그 콧대 높은 새끼가 세상에 저런 형편없는 치를 선택할 정도로 어떻게 돌아 버리긴 했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오메가라는 게 알려져서 이연우의 화를 사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시선을 끌 사내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제 쪽의 제안을 당연히 수락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일이 터졌을 동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그 멍청한 얼굴을 좀 더 유지한 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니까. 이처럼 무책임하면서 편리한 선택지는 더는 없었을 거다.
적당히 사건이 터지고 나면, 수습 뒤에 이연우와 함께 사이좋게 한두 해 정도 해외로 나가 있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걸 발로 걷어차고 이연우에게 달려가 입을 놀리다니!
박영진은 이 자리에 임태호가 있다면 그 흐리멍덩한 얼굴을 코앞까지 끌고 와서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솔직히, 이해 안 가는 게 하나 더 있기도 했다.
바로 이현이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저 모든 일에 무관심한 사내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건지, 이것만큼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박영진은 설마 그것만큼은 그가 이토록 무시하고 있는 임태호와는 무관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였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고르고 있던 박영진을 향해 장난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건.
박영진은 그 건방지고 주제넘은 행동을 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근사한 얼굴에 기다렸다는 듯 고운 눈웃음이 걸렸다.
“박 이사님, 생각하는 거 너무 뻔히 보이잖아요.”
“…….”
“우리 예쁜 태호 형 너무 미워하지 마, 진짜 속상하거든.”
이 지겨울 정도의 자랑은, 솔직히 요 근래 그가 몇 번이고 습관처럼 했던 말이다.
하지만 박영진은 오늘 이연우가 그의 속을 살살 긁기 위해 의도했던 그 어떤 빈정대는 말보다 그 깃털같이 살랑이는 목소리에 가장 울컥했다.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좋다고 제 연인을 싸고도는 알파의 여유로운 얼굴이 박살 나는 꼴을 보고 싶어졌다는 쪽이 좀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후우. 예.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박영진 이사는 잘 정돈되어 있던 그의 머리를 한번 쓸더니, 주름진 입가를 고민하듯 잠시 꾹 다물었다가 한숨 어린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조금 강압적으로 몰아붙인 건 사실입니다. 물론 그때는 거기가 이연우 팀장님이 만나시는 ‘임태호 씨’가 계신 곳이라는 건 정말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정말 필요해서 진행했던 일이니까요.”
“몰랐다?”
“예. 그런데 저희 전략기획 쪽에서 먼저 그 스캔들을 알게 된 겁니다.”
박영진은 저를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여는 이정호 전 대표를 향해 조금은 처량한 듯 눈썹을 휘었다.
“총수 3세의 애인이 같은 그룹 신입 사원과……. 후우,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습니까?”
“…….”
“그래서 그때부터 그분, 임태호 씨에 대해 알아보게 된 겁니다.”
박영진의 말은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정말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습니다. 그 임태호 씨가…….”
말의 주도권을 쥔 영악한 혀에 천천히 날이 서기 시작했다.
박영진은 말을 잇기 전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눈으로는 저를 서늘하게 노려보는 이연우를 흘끗 본 다음에, 말을 이어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빠르게 눈치챈 알파가 그보다 먼저였다.
“거기까지.”
“저희 쪽의 해명 자리를 만드신 거 아니십니까?”
“알아. 아는데, 거기까지 하시라고. 방금 막 남은 기회까지 다 걷어 차셨으니.”
이연우의 목소리는 꽤 개운하고 깔끔했다.
덕분에, 박영진 이사는 제가 알고 있는 임태호의 비밀을 입에 담기 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 상황에 저런 가뿐한 목소리라니. 하지만 이연우는 박영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을 이어갔다.
“어쨌거나 우리 그룹 사람이 될 몸인데, 그렇게 건방 떨면서 홀대하니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거든.”
“……뭐라고요?”
박영진의 물음은, 사실 모두가 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좀 긴가민가했어. 그런데 엊그젠가, 딱 확실히 알겠더라고.”
이연우는 박영진에게서 제게로 다시 쏠린 관심을 한 줌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왠지 속을 간지럽힐 정도로 묘해서, 왠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게 했다. 알파의 말은 그 침묵에서 몇 초쯤 지난 뒤에야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로 이어졌다.
“아, 각인한 사람이 나 좋아해 주면 진짜 엄청난 기분이구나. 뭐 이런 거?”
“……뭐?”
“난 또 억제제 부작용인 줄 알았지. 아니다. 진짜 억제제 부작용이었던 때도 좀 겹쳐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연우는 물을 다시 한 모금 마시더니 살짝 기지개 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직 제 말이 완전히 입력되지 않았다는 표정을 한 가족과 임원들의 면면을 새기듯 바라보며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댁들이 임태호를 괴롭힌 덕에, 어찌나 예쁜 짓을 많이 해 주던지. 내가 그거에 완전히 쐐기가 박힌 것 같거든.”
“이연우!”
경악이 섞인 노호성은 이주호 회장의 것이었다. 박영진 이사는 그답지 않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회장님!”
“-누가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베타인지…….”
모두가, 심지어는 이민혁과 이현조차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유로운 건 이연우 혼자였다.
“그딴 건 전혀 모르겠어. 지금이 딱 그거더라고. 각인 초기.”
이연우는 앉아 있느라 살짝 구겨졌던 제 재킷을 빳빳하게 펴 당기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를 만나기 전, 차림을 가다듬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그쪽 테이블 다 합치면 지분이 얼마나 되더라. 적지는 않죠.”
“……뭐, 뭐어……!”
“날 완전히 밟아 버렸다가는 그룹 이름에 금이 갈 거고, 딱 적당히 엿 먹여서 신임 대표 옆에서 떨어져 나가게 해야 하는데……. 가십만큼 좋은 주제가 없지.”
지금 이연우에게 이 공간에 있는 이들의 경악이나 놀람 따위는 전혀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가족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연우는 의자까지 테이블 안에 도로 집어넣어 정리한 후, 뚜벅뚜벅 어느 곳을 향해 걸으며 장난처럼 말을 이었다.
“취향 참 고약하셔들. 참고로 임태호 회사 쪽도 지금 뒤집어엎고 있거든?”
“…….”
“제발 뭐 하나라도 안 걸리길 기도하시라고. 보아하니 이미 힘들 것 같지만.”
이연우의 반듯한 발걸음은 홀 한쪽으로 이어진 작은 대기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그림자들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 사람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걸 따라가던 이민혁은 그 마지막에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시선을 천장으로 돌려 버렸다.
그는 지금 제 동생의 세계에 남은 향은 단 하나라는 걸 안다.
“……오늘 못 볼 줄 알았는데.”
사실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방금 들은 것이 이연우의 목소리가 맞는지 조금쯤은 의심했을 거다. 이연우는 제 연인의 손을 가볍게 당겨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태호의 손은 있는 힘껏 힘이 들어간 채로 쥐어진지라 그가 원하는 대로 온기를 나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연우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이런 거 보여줘서 미안.”
연인의 말에 임태호의 손은 손등의 뼈가 하얗게 올라올 정도로 더욱 힘이 들어갔다. 연우는 그 초조한 반응이 조금 속상하다는 듯 찡그려 웃더니,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제가 다 알고 있던 일이에요!”
“그럼 그걸, 그냥 각인하게 내버려 뒀단 말이냐!”
언제나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장남. 아니, 그 전에 살며 이주호 회장의 작은 핀잔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예쁨 받는 아이. 이민혁은 그렇게 33년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제 아버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민혁은 벌겋게 변한 목을 한 채로 크게 소리치는 아버지의 앞에서 잠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도 분명 몇 주 전까지는 제 막냇동생의 각인을 걱정하며,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길 바랐던 편이었다.
사실 지금도 이 상황에 대한 답이 얼른 나오지 않는다.
“……연우 선택이죠!”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다. 제 동생과 그 연인이 잠시나마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이연우는 다행히도 그 아슬아슬한 노력에 부응해서, 눈에 불을 켜고 자신과 그 연인의 모습을 쫓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겨우 비어 있는 응접실 하나로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와, 살벌하네요. 그렇죠?”
밝은 어조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짐짓 장난스럽기까지 한 것이 평소의 이연우와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임태호는 그런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를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태호는 제 머리카락과 뺨을 덧그리는 단단한 손을 살짝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이연우.”
“네에.”
정말, 평소 같았다면 저 상냥한 대답에 조금은 웃을 수 있을 텐데.
태호는 연우가 입 맞춘 제 손이 왠지 벌벌 떨리는 것 같아 괜히 바짓단을 말아 쥐다가, 조금 힘이 풀려 휘청였다. 다정한 미소를 걸고 있던 이연우는 그것에 놀라 곧바로 반응했지만, 태호는 그 전에 제가 무릎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섰다.
이연우는 임태호를 찾아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절대로 찾아낼 수 없었던 곳에 있는 저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사실 홀에 들어왔을 때부터 깨달았던 거다. 그래서 그렇게 의아할 정도로 똑바로 제가 있던 곳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찌 되었건 임태호는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될 동안 오메가였고, 각인의 초기 증상을 모르지 않았다.
“알았던…… 거지?”
꾹 눌렀던 말을 겨우 토해 내는 순간, 태호는 틈이 날 때마다 제 목덜미나 품 깊은 곳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켜던 연인이 떠올랐다. 이연우는 몇 초간 뜸을 들였다가, 여전히 너무 나직하고 따뜻해서 왠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언제……!”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조금은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가, 얼마 안 가 말을 잇는 것 대신 덜덜 떨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런 순간까지도 이연우와는 달리 담담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연우는 크게 심호흡한 뒤 겨우 말을 잇는 제 연인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아니, 왜…….”
하지만 임태호는 이번에도 말을 다 잇는 것에 실패했다. 혹시라도 태호가 더 말을 이을까 싶어 잠시 기다리던 연우는, 잘게 떠는 연인을 달래려는 듯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임태호는 제 어깨에 이연우의 손이 닿자 흠칫 떨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걸 밀쳐내지 않았다.
“오래된 건 아니에요. 사귀기 몇 달 전쯤.”
이연우는 그게 기쁘다는 듯,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듯 조금 먹먹한 숨이 섞인 고백을 시작했다.
“…열성 오메가.”
“…….”
“그걸 모른 척한 건 선배가, 아니 형이……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길래. 그래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임태호를 진정시키려던 이연우의 시도는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은 듯했다.
태호는 그 다정하기 짝이 없는 말에 좀 더 울컥한 눈이 된 채로, 계속 몇 초 이상 오래 마주 보지 못하던 연인의 눈을 처음으로 똑바로 마주 담았다. 이연우는 저 시선과 얼굴을 좋아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용기를 다 긁어모아 털어놓을 때의 긴장과 떨림이 고스란히 잡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임태호의, 오메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베타인 척해서.”
“…….”
“8년간 속여서.”
임태호는 왠지 앞이 흐려지는 것 같아 얼른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숨을 크게 삼켰다.
보기 흉하게 떨더라도 절대로 울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이건 태호, 그가 오늘 제 연인 앞에서 비밀을 털어놓는 상황을 몇 번이고 그리면서 다짐했던 거였다. 하지만 이연우가 상냥하게 어깨를 쓸고, 손바닥이 맞닿도록 깍지를 낄 때마다 자꾸자꾸 그 노력이 뿌옇게 변했다.
“아니, 사귀고 나서도 그래서…….”
태호는 겨우겨우 말을 이었지만, 결국 그 끝을 맺지는 못했다.
화나지 않았어? 실망하지는 않았어? ……미안해. 나도 이런 내가 정말 싫은데.
임태호는 울지 않으려고 괜히 천장을 한 번 봤다가, 심호흡했다가, 눈을 빠르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8년 넘게 쭉, 비밀로 했잖아요.”
이연우의 입이 열린 건, 그런 연인을 한참을 새기듯 바라본 뒤였다.
“저랑 만난 뒤에는 약이 늘었죠. 하루에도 몇 개나 되는 약을 먹으면서, 베타가 되려고.”
임태호는 왠지 그 다정한 목소리가 저를 질책하는 것처럼도 느껴져서, 작게 어깨를 흠칫했다. 물론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얼른 어깨를 쓸고 손에 입을 맞추는 애정 어린 행동이 이어지며 겁먹은 오메가를 달랬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선배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 했던 걸, 겨우 사귀기 시작한 걸 핑계로 끄집어낼 수가 있겠어요?”
“…….”
“태호 형, 저는요.”
사실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하고는 있지만, 연우 그 역시도 자꾸 마음이 울렁이고 꼭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태호처럼 저도 눈가가 시려서 얼마나 속을 달래고 있는지 몰랐다.
임태호는 제 연인이 저도 모르게 ‘선배’와 ‘형’을 겹쳐 쓰는 걸 보며 그의 동요를 겨우 깨달았다.
“형이 베타여서 좋았어요.”
“…….”
“그런데 형이 알파였다면 또 알파라서 좋아졌을 거고.”
진짜 안 울 거야. 정말로. 내가 무슨 낯으로 울어.
태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어진 이연우의 말은, 기어코 태호가 얼른 제 눈가를 한 번 급히 훔치게 하고 말았다.
“지금은 오메가라서 좋아졌어요.”
아주 예전, 어느 날. 이제 이름도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 동기에게 건네졌던 말은, 이연우 그에게 작은 마법을 걸어준 문장이기도 했다.
연우는 이번에는 그게 제 연인을 향했으면 했다.
“……형은.”
연우는 두꺼운 나무 문 밖으로 들리는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번에는 제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뚝뚝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그걸 문질러 닦는 연인을 앞두고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 이렇게 초조할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움켜쥔 연인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따듯했다.
“잘못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