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 Zugzwang​​ (5/9)

5. Zugzwang

“연우야, 미안한데 나한테 전화 좀 해 줄래?”

“네에.”

소파에 앉아 임태호가 추천한 책을 슬렁슬렁 읽고 있던 이연우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서로 눈만 깜박, 깜박. 집 안에서 들려야 할 진동 소리에 귀 기울이는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태호의 작은 빌라 안은 그 흔한 냉장고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 안 들리지?”

“네. 그런 것 같은데요.”

“차에 두고 왔나…….”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게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그래 놓고도 썩 개운한 얼굴은 아니었다. 요새 임태호는 정말 매일같이 야근한다. 연우가 몇 번 정도 입을 삐죽이며 이건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해도 그저 흐리게 웃으며 ‘회사에서 정말 오래 준비하던 게 있거든. 그게 진짜 코앞이야.’하고 감싸고돌 뿐이다.

이연우는 매일같이 임태호의 걱정을 한다. 함께 있어도 마음이 철렁할 때가 많아졌다. 화장실에서 가볍게 세수하고 손을 씻던 연우는, 문득 화장실 찬장 안에 곱게 들어가 있는 연인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이거 백 프로 손 씻는다고 넣어 뒀다가 깜박했네. 연우는 옅게 웃으며 태호를 불렀다.

“태호 형, 휴대폰 찾았는데요.”

벌써 집을 빠져나갔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연우는 살짝 턱을 긁적이며 임태호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래 써서 낡은 지갑형 가죽케이스에는 제법 중요한 게 많았다. 태호가 주로 쓰는 카드부터 약간의 현금, 나름 성실하게 꼬박꼬박 챙겨 찍고 있는 것 같은 카페의 도장까지 제법 두툼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연우는 휴대폰을 들고 나와 다시 소파에 기대앉아 제 연인을 기다렸다. 한 15초쯤은 그랬을 거다. 알파의 시선이 아주 슬쩍, 제 손에 떨어진 연인의 휴대폰으로 향했다. 이제까지 연우는 태호의 휴대폰에 별반 관심을 둔 적 없다. 워낙 프라이버시가 철저한 집안에서 자라기도 했었고, 그 자신이 살며 다른 이의 휴대폰을 신경 쓸 일 같은 건 한 번도 없었기 때문도 있다.

그냥, 그냥. 그냥 한 번 켜 보기만 하자.

이연우는 휴대폰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액정 화면을 툭 쳤다. 그건 연우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줄 행동이었다. 세상에, 제 연인은 휴대폰 잠금도 없이 산다. 아니 이 형이 진짜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연우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태호의 휴대폰을 도로 곱게 품고 있으려고 했다. 자고로 너무 정보 접근이 쉬우면, 사람이 괜히 움츠러드는 법이다. 하지만 임태호가 운이 없는 건지, 이연우가 운이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은 연이어 계속됐다.

하필 그 순간 온 메시지라니. 이연우는 화면 상단을 깜박이며 수놓는 메시지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두었다.

-혀어엉님~. 우리 금욜에 보는 거 맞죠?

-뭐 먹죠? 완전 맛있는 거!

-히히히히 밥밥밥밥밥

임태호의 친구치고는 굉장히, 그것도 아주 굉장히 심하게 밝은 말투였다.

메시지가 쭉 계속될수록 이연우의 눈썹은 그에 비례해서 천천히 위로 휘기 시작했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이번 주 금요일에 어디서 뭘 먹을 건지 쉼 없이 문장을 이어갔다. 이연우는 이 문장 밑에 떠오른 이름이 누군지, 아주 잘 안다.

“어, 휴대폰 어디 있었어?”

“화장실이요.”

빙긋 표정을 고쳐 짓고 입꼬리를 올린 얼굴 뒤로는 수많은 생각이 떠다녔다. 이연우는 제 옆에 앉는 임태호를 당겨 안으며 슬쩍 운을 뗐다.

“형, 금요일에 뭐 맛있는 거 먹을까요?”

대답을 고민하는 얼굴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생각에 찼다가, 얼마 안 가 얌전히 열렸다.

“…금요일, 음, 금요일은 힘들 거야.”

“왜요?”

“약속이 있거든. 친구랑.”

슬쩍 옷 안으로 들어간 커다란 손이 유독 여린 피부를 만지작거리자, 태호가 간지럽다는 듯 작게 웃었다. 연우는 그런 제 연인을 뒤로 안은 채 품에 안고서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임태호는 정말 베타 같아졌다. 그건 정말 일말의 과장 따위 없는 표현이다.

임태호는 이제 단 한 점의 페로몬도 짚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뭔지는 직접 묻지 않아도 뻔하다. 먹는 억제제의 양이 늘어난 거다. 이연우는 그런 연인을 가볍게 다독였다. 요 근래 어찌나 피곤해 하는지, 가끔 태호는 이렇게 안겨 있다가 잠들 때도 많았다.

과로도 과로지만, 약의 영향도 클 거다.

이렇게까지 완전하게 페로몬을 숨기는 게 만만한 일일 리가 없다. 대체 얼마나 약을 먹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사실 이연우는 임태호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았다. 말할 줄 알았다. 8년간 지속한 선후배 관계가 연인으로 바뀐 지금,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그 비밀도 자연스럽게 꺼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태호가 선택한 건 오히려 그걸 깊숙이 감추는 거였다.

정말 완전히 베타가 되기를 선택한 거다.

대체 왜 그랬을까, 왜? 이연우는 제 연인의 선택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워낙 자존감이 약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열성이라는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넘치듯이 많으니까. 태호 형은 그중에서도 유달리 더욱 그걸 꺼내기 힘들어하는 쪽인 걸까.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이연우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임태호가 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선만 마주쳐도 눈빛이 달라지고, 뺨이 발갛게 변한다. 자신과 같은 깊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해도, 같은 색을 띠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물어볼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연우는 누군가를 찾아갔다.

사실 처음에 이연우가 임태호의 비밀을 알고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의 전례가 컸다. 이연우는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비스듬히 누운 채로 툭 입을 열었다.

“형, 궁금한 게 있는데.”

막내의 말에 세 명의 형은 일제히 살짝 고개를 들어 반응했다.

덕분에 살짝 웃음이 터진 이연아다. 지금 신화그룹 3세들은 이주호 회장의 기나긴 설교를 들은 후에 함께 모여 쉬는 중이었다. 설교의 내용은 뻔했다. 앞으로 처신을 조심하라느니, 자기 계발에 힘쓰라느니, 회사 안의 인맥을 소홀히 하지 말라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저에게 시선이 꽂힌 것을 느낀 이연우는, 제가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사내 이현을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억제제를 먹는 이유가 뭐야?”

일순 담담하다 못해 일상적으로 들리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이현을 제외한 이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에 찼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연우는 그 반응을 뻔히 알면서도 제 물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극우성 알파가 그 정도로 완벽하게 페로몬이 사라지려면, 얼마나 먹어야 해?”

“……이연우!”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안이었다. 그는 정말로 드물고, 보기 힘든 경직된 얼굴을 한 채였다.

어느 집단, 어느 집안, 또 어느 무리라도 사람이 모이면 쉽게 꺼낼 수 없는 화제가 하나쯤 생기는 법이다. 그건 신화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남부러울 것 없는 재벌가라고 해도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가 하나는 있다.

그런데 지금, 어느 순간부터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 것이 당연해져서 누구도 감히 의문을 떠올린 적 없는 그 사실을 이연우가 꺼내 들고 만 거다. 하지만 모두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가운데 이연우만큼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금기의 당사자인 이현이었다.

“묻는 이유가 뭔데?”

이현은 제가 보고 있던 태블릿 피씨를 끄면서 나직하게 대답했다. 이 공간에 있는 두 극우성 알파만은 마치 ‘오늘 저녁은 뭐야?’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 같은 한가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

“억제제를 먹어서까지 베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베타 이현.

이현은 신화가에서 오메가만큼이나 드문 베타라고 알려졌다. 그는 제 사촌 동생의 말에 충실하게 답을 이어갔다.

“사람마다 다르겠지.”

“형의 경우에는 뭔데?”

이현은 살짝 한숨을 쉬며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이연우를 마주 보았다. 같은 극우성 알파임을 떠나서, 이현과 이연우는 언제나 그 속내가 퍽 비슷했다. 그래서일까. 이현은 제 허벅지를 베고 소파에 누워 있는 이 제멋대로인 막내가 오늘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작정임을 눈치챘다. 이연우는 제 형의 대답을 다그치지 않고 기다렸다.

열여섯 살에 이른 발현을 한 이현이다.

그리고 그 발현 이후로 아무도 이현에게 지금 이연우 같은 질문을 하지 못했었다. 사실 그가 할 수 없게끔 한 것에 가까웠다. 열여섯 살의 발현으로부터 거의 2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이현은 서른다섯 살이 됐다.

그 오랜 기간만큼 묵은 답이 이현의 입에서 느리게 흘러나왔다.

“……누가 싫어해서.”

응접실 안은 어느 순간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적막에 찼다.

이안은 너무 놀라서 슬쩍 손까지 떨었고, 이민혁은 쓸데없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이연우는 그런 제 형을 올려다보는 모습 그대로 담담하게 오래된 과거의 그날을 꺼내 들었다.

“대체 누가 어떻게 싫어하길래…….”

“…….”

“발현하자마자 방에 처박혀서 죽겠다고 버티고.”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이연아는 생각했다.

그날의 기억은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선명하다. 어릴 적부터 늘 함께 지냈던 네 사람이다. 누구보다 가까웠고, 누구보다 절친했다. 이현은 극우성 알파로 발현한 다음, 눈 떴던 그날에 자살을 기도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없이 죽으려 들었다.

그 시도가 끝난 건,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억제하는 약을 먹으면서였다.

이연우는 모두의 귀에 들리도록 똑똑히 말을 이었다.

“겨우 숨 붙여 살려뒀더니 그다음에는 억제제까지 먹어?”

적어도 이연우는 안다. 이현은 지금 제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사실 이현은 이렇게 된 지 제법 됐다. 연우는 어쩌다 가끔, 정말로 어쩌다 가끔 스쳐 지나가던 제 사촌 형의 페로몬을 기억한다. 늘 칼끝 위를 걷듯이 불안하게 요동하던 향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던가, 그 향이 잠잠해졌다. 그래서 지금쯤이면 물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현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이연우의 표정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연우는 누워 있던 이현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옆에 바로 앉았다.

“아,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이전보다 더욱 깊은 침묵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그 침묵의 색도 이전과는 좀 달랐다. 불과 몇 분 전에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터질까 싶어 경악에 차 조마조마해 하는 거였다면, 이번에는 그들이 들은 말을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적막이었다.

이연우는 모두가 묻고 싶은 질문을 친절하게 대신해 주었다.

“정말?”

“어.”

“19년 동안 억제제 먹는 이유가, 좋아하는 사람이 알파인 걸 싫어해서라고?”

좋은 말투로 물었다 뿐이지, 평소의 이연우라면 ‘개소리 말라’고 했을 억양으로 흘러나온 되물음이었다. 이현은 순순히 그 말에 수긍했다. 딱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벽한 요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짓이지.”

이연우의 표정은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게 말이 돼!’하는 얼굴이 되었다. 사실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현은 그런 제 가족들의 반응에 놀랍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늘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어.”

“와! 알긴 아네, 미친!”

최대한 곱게 말하려던 이연우의 시도는 몇 분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 사람은 안 말려? 뭐라고 안 해?”

“모를걸.”

“모르는데 그 짓을 해? 그 사람이 뭐라고.”

억제제를 먹는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이렇게 이해가 안 가나?

이연우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임태호가 이해가 안 되어서 똑같이 억제제를 먹는 가족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쪽도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말을 줄줄 내뱉는다.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알파인 게 뭐라고. 오메가인 건 또 뭐고, 베타여서 좋을 게 뭔데. 이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이연우를 향해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

“굳이 이유를 찾자면 지레 겁먹은 내 잘못이겠지.”

아무도 묻지 못했던 오래된 비극의 이유는 어느 누구의 생각보다 더 낭만적이었다.

이해가 안 돼. 절대로 이해 안 될 거야. 아마, 절대로.

이연우는 소파 헤드에 머리를 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혼란을 초래한 이현은, 뭐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막냇동생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더니 얼빠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을 향해 살짝 눈썹을 찡긋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을 가만히 있던 이연우의 입이 나직하게 열린 건 그때였다.

“……안 되겠네.”

오늘따라 저 예쁘장한 막냇동생은 입을 여는 족족 폭탄만을 투하했다. 그 탓에 이현을 제외한 다른 3세들은 저도 모르게 동시에 ‘또 뭐!’하는 문장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역시나 이연우는 마지막 폭탄을 크게 터트렸다.

“나도 줘 봐, 그 약이라는 거.”

“…이연우, 지금 너 무슨 말 하는 거야!”

“내가 뭐 저렇게 평생 먹겠대? 전혀 그럴 생각 없어.”

이현의 말이 전염이라도 된 건지, ‘지레 겁먹은’ 민혁과 연아의 반응이 크게 쏟아졌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게 뭐 어떻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게다가, 그의 옆에는 현재진행형의 좋은 경험자도 있었다.

“극우성은 따로 처방받아야 해.”

“그래? 그럼… 건강검진 핑계라도 대볼까.”

이미 이연우는 완전히 마음을 정했는지, 실행력 좋게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덕분에 3세들은 정말 드물게도 서로의 생각이 계속 통했다. 이연아는 도저히 황당함을 감출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 왜 저러는 거야?”

◈◈◈

이연우는 언제나 눈에 띈다. 정말, 언제나.

그런데 그렇게 눈에 띄는 그는 오늘 평소보다 더욱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연우는 회의가 끝날 즈음 조금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의 전매특허인 고운 눈웃음을 흘리면서였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연우는 그 깍듯한 인사 끝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건 어찌나 단호하기 짝이 없던지, 조금은 급하게도 보였지만 어쨌거나 그 태도만은 우아한 채였다. 이연우는 홍보팀의 팀장 자리를 맡고 있다. 신화그룹 정도 되는 대기업에 팀장이 한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위로 수많은 직급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연우가 빠져나가자 반사적으로 긴 한숨을 터트렸다. 얼마나 곱상한 얼굴을 하고 있고, 또 얼마나 상냥한 태도를 하고 있든 간에 자신들이 속한 이 거대한 그룹의 피라미드 위에 있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눈앞에 없으면 편하게 불리는 법이다.

이연우와 함께 있던 직원 몇들 역시 그랬다. 직원 하나는 회의실에서 빠져나가면서 목소리를 낮춘 채로 입을 열었다.

“이연우, 극우성이지 않았어요?”

“네. 그렇죠.”

사람들의 입에서는 마치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뜰 거야, 하는 평온한 억양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에 더욱 의아해진 직원이다. 눈치 빠른 누군가는 그것을 깨닫고 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난 또, 뭐라고. 잠깐 억제제 먹는다던데.”

“아! 역시. 에이, 언제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고.”

직원은 아쉬워 죽겠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이연우는 팀장직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그가 속한 팀이 아니면 이렇게 코앞에서 보기는 어려운 사내다. 신화그룹 이연우가 아닌, 극우성 알파 이연우의 페로몬은 꽤 유명한 편이다. 아니, 사실 굉장히 유명하다. 그렇기에 이렇게 작은 회의실에서 바짝 몸을 붙여 앉아 하는 회의에 이연우가 오는 날은 꽤 많은 이들의 환심을 산다.

하지만 오늘 ‘그’ 유명한 신화그룹 이연우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이유는 평소와는 좀 다르다. 직원 하나의 아쉬움처럼, 조금 다른 이유를 바탕으로 한다.

오늘 그렇게나 유명한 이연우의 페로몬이 마치 지우개로 싹싹 지워낸 것처럼 흐려졌다.

다른 업무를 보던 몇몇 사람들은 같은 방에 이연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황급히 고개를 들기까지 했다. 조금 전 이연우는 그 화려한 외모가 아니었다면 최소한 알파로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마치…… 열성처럼.

한편 그렇게 회의실을 빠져나간 이연우의 발이 향한 곳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그곳에 다른 이들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부터 했다.

그리고 그다음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것을 확신한 이연우는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낯은 목소리와 함께.

“……아, 진짜 토할 것 같네.”

억제제를 먹는 건 끔찍했다.

생각보다, 상상보다, 예상보다 훨씬 더.

그건 이연우 그가 극우성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극우성 특성상, 억지로 제 페로몬을 억누르는 것을 거세게 거부하는 본능이 최악의 상황을 불러냈다. 의사는 사람마다 다를 거라고 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연우는 그중 최악에 속하는 경우였다. 정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알파가 억제제를 먹어서 올 수 있는 부작용은 다 왔다.

구토감, 어지럼증, 메스꺼움, 두통, 오한, 불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과하게 힘들지는 않지만, 평온을 유지하기에는 극히 껄끄러운 것들이 이연우를 덮쳤다. 그래서 그는 이 증상이 시작되자마자 제 사촌 형 이현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부터 빽 질렀다. ‘형 진짜 변태 맞지?’하고 외치자, 이현은 작게 코웃음 치고는 전화를 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현이 먹는 억제제의 약은 이연우가 먹는 양과는 비교 불가다.

물론 이런 불행 중에도 작은 다행은 있었다. 신은 이연우를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었다.

바로 임태호였다.

그의 하나뿐인 연인은, 이연우의 향이 옅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섹스 중에 한 노팅 때문이었다. 덕분인지, 연우는 태호에게 할 이런저런 핑계를 떠올리는 건 한시름 놨다. 그 온몸으로 ‘나는 연우 너를 믿어!’하고 말하는 것 같은 사람에게 할 생각도 없는 건강검진 핑계를 대며 거짓말을 늘어놓는 건 역시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야근?”

-응. 그래도 이 정도면 되게 빨리 끝난 거야.

연인과 하는 통화는 언제나 달다. 정말, 언제나.

이연우는 눈을 감은 채로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임태호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귀에 새겼다. 이 목소리는 정말 이연우, 그가 처음부터 늘 좋아했던 거다. 적당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언제나 평균보다는 좀 작은 편이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기 때문에 곧잘 귀에 감긴다.

“형, 목소리 좀 피곤한 것 같은데.”

-…아니. 괜찮아.

이연우는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임태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거짓말.’

엄청나게 힘들다. 정말, 엄청나게 힘들고 하나도 괜찮지 않다. 열성이라 기본적인 억제제 양은 훨씬 적을 거라고 해도, 지금 이연우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억제제를 먹는 게 이렇게 성가시고 귀찮고 어렵고 힘든 거라는 것을 안 이상 매일매일 제 연인을 생각할 때마다 속이 상한다.

한편으로는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극우성이 아닌 열성의 삶은, 그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사람들 눈에 곧잘 띄지도 않았고 저를 잘 모르는 이가 갖는 조건 없는 호의가 섞인 시선도 없어졌다. 오히려 조금 더 어려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종일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로 있다가 겨우 그게 잠잠해진 것은 태호와 통화할 때뿐이다.

이제는 말할 때도 됐잖아. 언제든 말해도 괜찮은데. 화내지도 않을 건데. 이렇게 힘들게, 정말 힘들게 계속 약을 먹는 이유가 뭐야?

머릿속으로 온갖 질문을 떠올려 봤지만, 질문으로 꽉 차올랐던 풍선은 이내 펑하고 터지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답은 남지 않았다. 이연우는 태호에게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잘 자라고 인사한 후에 그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약을 얼마나 먹고 있을까? 나에게 오메가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먹으면서 저렇게 매일같이 일하는 걸까. 이런 거에 익숙해지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억제제를 먹기로 선택한 건 육체적으로는 꽤 힘든 선택이었을지도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엔 미처 몰랐던 연인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되어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그래서였을까.

머릿속에서 깊게 묻으려고 마음먹었던 한 가지 정보가 자꾸 삐죽 머리를 든 건, 정말 이연우 그가 어떻게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연우는 정말 그걸 무시하려고 애썼다. 저렇게 억제제를 먹고, 늘 일에 시달리는 연인이 숨을 돌릴 틈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마음은 참 기특했다. 시도도 좋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진심 가득한 기특한 시도보다 위에 서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사랑을 향한 질투가 그 훌륭한 예다.

◈◈◈

편의점에서 잔뜩 사 온 커피를 쪽쪽 빨아 마시며 여느 때 같은 식곤증을 이겨내려던 현민은, 비어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현민의 입사 동기였다.

“야, 뭐 하냐?”

“잠깐 좀 쓸게. 실수로 뭐 잘못 눌러서 내 컴퓨터 10분째 업데이트야.”

“그런 건 퇴근할 때 해, 새꺄.”

“넌 뭐 볼 때마다 뭐 먹고 있더라.”

현민은 웃음기 어린 제 동기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워낙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현민이다. 그리고 그런 유현민이 가장 좋아하는 건 오늘 같은 날이다.

바로 금요일!

모든 직장인이 가장 좋아할 바로 그 요일이다.

게다가 이번 금요일은 좀 더 특별하다. 낯을 가리는 편이라 유학 후 귀국한 다음에 회사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새 인맥이 없던 현민이 유일하게 가까워진 누군가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유현민은 퍽 들뜬 기운을 감추지 못하고 힘든 하루를 버텼다. 오늘은 온종일 긴장에 찬 신입 사원이 걱정 하나 없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게다가 잔뜩 놀고 나서도 토요일과 일요일이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늘 주변 자리 상황을 보며 퇴근하던 현민은 오랜만에 씩씩하게 가방을 싸 들고 ‘들어가 보겠습니다!’하며 먼저 인사했다. 세상에 이런 황금 같은 금요일마저 눈치 퇴근을 하게 된다면 회사 다닐 맛이 나지 않을 거다.

오늘 유현민의 계획은 제법 단순명료하고, 또 굉장히 욕구에 충실한 거였다.

밥 먹고, 술 마시고, 엄청나게 단 커피 하나 마시고 집에 들어가기. 실로 완벽한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유현민은 정말 날아갈 것 같은 발걸음으로 약속 상대, 임태호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얼큰한 찌개와 밥을 잔뜩 먹고, 그거랑 같이 술까지 마시면서 회사 욕이나 잔뜩 해야지.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느 신입 사원들처럼 유현민도 쌓인 게 많았다.

늘 저에게 신경질적인 사수도, 같이 입사한 만큼 정도 쌓고 가까워질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경쟁심에 활활 불타는 동기들도, 방금이라도 사람 몇은 쏴 죽이고 온 것 같은 표정으로 늘 회의인지, 얼음판 위에 앉아서 꾸중 듣는 건지 모를 분위기를 만드는 팀장도 모두 스트레스 덩어리 그 자체였다.

반면 임태호는 어떤가.

보기만 해도 본인의 무해함을 사방에 떨치는 것 같은 그 형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조용히 들어준다. 솔직히 같이 놀기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도 그런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시종일관 상냥하기까지 하니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다.

약속장소에 태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먼저 왔나 보네? 현민은 자리에 앉아 메뉴를 확인하며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여하튼 잔뜩 먹을 거다. 분명 태호는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켰냐고 할 테지만, 유현민은 며칠 전에 받은 월급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상태였다.

유현민은 여태껏 봤던 임태호의 식성까지 고려해서 먼저 음식을 시켰다. 손을 싹싹 비비며 기다리고 있자니 허기가 몰려왔다. 형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현민은 신나게 식사를 시작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러고 있자니 참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모든 테이블이 복작복작하게 찬 식당 안에서 혼자 씩씩하게 4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기가 힘들다. 어차피 태호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도 없겠다, 한가하기 짝이 없는 상태인 현민은 각종 음식을 마치 임금님처럼 늘어놓고 있는 자를 흘끗흘끗 구경했다.

솔직히, 저 의문의 사내 빼고는 이 식당에서는 현민이 가장 많은 매상을 올려 준 사람이었을 거다.

얼굴보다 더 커다란 뿔테안경에 유독 캡이 널찍한 모자를 눌러쓴 알 수 없는 식당계의 큰손. 가장 바쁜 시간에 4인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는 것 따위에는 일말의 부담감도 느끼지 않는 당당한 사람.

물론 그건 이연우였다.

“……후우.”

알고 있는 지식을 선택적으로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연우는 집게를 들어 고기가 타지 않도록 한 번 뒤집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안 오려고 했다. 정말 안 오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제가 봤던 메시지 속 내용이 며칠 동안 머리를 빙빙 맴돌았다. 몇 요일, 몇 시, 언제 어디서 만나는지. 뭘 먹기로 했는지. 빌어먹을, 그렇게 몸이 안 좋으면서 전에 봤던 그 ‘유현민’이라는 알파 녀석과 만나 놀겠다고 하는 것에 솔직히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형도 쉬어야지. 다른 사람도 만나고 그래야 하잖아. 당연해.

이연우는 지금 제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정말로 잘 안다. 솔직히 이연우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참 못나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이연우는 딱 그 일반적인 대세에 맞는 생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못난 새끼 하자. 하고 만다.

그래, 난 이 세상 최악의 찌질이다, 씨이발. 썅!

언젠가 임태호에게 ‘연우야, 넌 참 고기를 예쁘게 자르는 것 같아.’라고 칭찬받았던 전적이 있는 이연우는, 그 칭찬이 빈말이 아닌 것을 증명하듯 곱게 가위질을 하면서 치밀어오는 화를 삼켰다.

유현민. 제 질투를 한몸에 받는 알파. 저 눈치 없는 녀석은 임태호와의 저녁을 차지한 것으로도 모자라, 계속 뒤를 곁눈질하며 저를 구경 중이었다. 그건 정말 성질날 정도로 눈에 띄어서,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이연우는 잘라 놓은 고기를 빈 접시로 덜어 둔 뒤, 오늘만 해도 백 번은 넘게 쉰 것 같은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고개를 올려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었다. 그건, 저만치에서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던 누군가를 위한 행동이었다.

“최대한 빨리 온다고 왔는데. 오래 기다렸어?”

“……허, 얼.”

“현민아?”

얼마나 허둥지둥 왔는지 약간 숨까지 빨라진 임태호는, 뭔가 얼빠진 얼굴을 한 유현민을 향해 직행했다. 하지만 현민은 코앞의 태호를 못 알아본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게 있더니, 뒤늦게 말을 쏟아냈다.

“허억! 헉! 예! 아니, 아뇨, 형! 왔어요!”

“응. 기다리게 해서 미안.”

“아니에요! 형, 음식은 제가 먼저 주문했어요.”

“잘했어.”

…금요일. 금요일에 마가 꼈어. 이건 백퍼야. 현민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임태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사내의 시선은 참 고민할 여지도 없이 명백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아는 척하면 진짜 죽는다.’

과거 한 번 겪었던 그날의 기억이 지독하게 오버랩 되는 것은 착각이 아닐 거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다.

유현민은 눈이 마주친 알파를 향해 임태호 몰래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이연우가 앉아 있는 한, 임태호는 오늘 아마 고기 집게에 손 한 번 댈 수 없을 거다. 아무리 펄쩍 뛰며 ‘형도 한다니까.’라고 해도 소용없다. 현민은 세상에서 가장 싹싹한 동생의 얼굴을 한 채로 고기를 굽고 얼큰한 탕이 팔팔 끓는 것을 확인했다.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평온하게 넘기는 것이야말로 유현민의 최대 목표였다. 다행히도 태호와의 시간은 평소랑 별다를 게 없었다. 태호는 조곤조곤 말하거나 주의 깊은 표정으로 듣고, 자신은 조금은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끈다.

오. 이거면 된다니까. 유현민은 콩닥콩닥 뛰던 심장 박동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래서 조금 방심한 것도 있다.

그래서 유현민은 임태호의 옅은 하품 한 번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툭 입을 열었다.

“형, 많이 피곤해요?”

“…응, 조금.”

누구에게나 일상적일 법한 대화였다.

하지만 고기가 타거나 말거나 귀를 쫑긋한 채로 앉아 있던 사내에게 그 두 단어로 이어진 대답은 마음 한편을 쿵하고 내려앉게 할 돌덩이나 다름없었다.

나한테는 안 피곤하다고 했잖아.

이연우는 왠지 좀 멍해졌다. 거짓말이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저렇게 순순히 대답할 수 있는 거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이상해졌다. 날카로운 실에 마음이 꽉 묶인다면 꼭 이런 심정이 아닐까 싶었다.

“하하, 연애하느라 바쁘시구나!”

“혹시 피곤한 거 티 나?”

“예?”

태호의 드문 질문이었다. 입 안 가득 고기를 우물우물 씹고 있던 현민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유현민의 미각을 신속하게 마비시킬 대화는 시작됐다.

“……연우 신경 쓸까 봐. 연우 있을 때도 티 나는 거 아닌가 걱정이네.”

‘헉. 씨발!’

유현민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태호는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임태호가 이연우에게 등진 상태인 게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

더 이상 대화를 쓸데없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하려는 현민의 필사적인 노력이 시작됐다.

“하, 하하하, 하. 누구 만난다는 게, 역시 힘들죠.”

하지만 그건 지뢰 중의 지뢰였다.

“생각보다 더 그러네.”

헉. 안 돼. 안 돼. 그러지 마! 혀엉. 안 돼! 현민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벽에 살짝 머리를 기대기까지 한 임태호의 말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계속됐다.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이연우와 유현민, 둘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 같은 한숨이 흘렀다. 물론 이연우 쪽은 다른 한쪽의 반응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유현민은 달랐다. 현민은 저쪽에 있는 모자를 눌러쓴 남자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머리를 팽팽 굴렸다.

눈앞에 선연하게 펼쳐진 ‘좆 됐다 로드’가 실로 끔찍했지만, 이대로 파릇파릇한 신입 사원 생활이 꼬일 수는 없었다. 유현민은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사태 진정에 나섰다.

“형, 원래 연애가 다 그래요.”

“그런가?”

“정확히 뭐가 힘든데요? 뭐……. 성격 차?”

이 미션을 헤쳐 나가고 말겠다. 절대로 신화그룹에서 일한다는 거 들키면 안 된다.

현민은 등줄기로 쫙 흐르는 긴장감을 누르며 그가 생각한 가장 그럴듯한 답을 냈다. ‘성격 차’. 그래, 정말 눌러쓴 모자 너머로 살벌하게 눈을 빛내는 남자와 이 순하디순한 임태호가 안 맞을 이유라고는 그것뿐이다.

하지만 임태호는 쉽게 답을 낸 유현민과는 다르게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고민했다. 사실 그 시간은 실질적으로는 길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현민은 그 몇 배로, 관계 당사자인 연우는 그 몇백 배로 느꼈다.

“…있지.”

“예.”

임태호는 언제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한다.

그 조심스러움은 까다로운 이연우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의도치 않게 두 알파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던 임태호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연우 같은 사람이 나랑 만날까?”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이후로 줄곧 생각하던 것이 흘러나온 통에, 현민은 저도 모르게 제 생각이 흘러나온 건가 싶어졌다. 하지만 진지하기만 한 말간 얼굴은 제가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요. 현민은 진심 가득한 말 대신 매끄러운 표현을 입에 담았다.

“다 뭐 궁합이 잘 맞는 거죠. 선후배만 8년이라면서요?”

“응. 그것도 신기해. 그래도 지금 같은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 같아.”

“왜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연우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임태호의 그 나지막한 문장에 귀를 쫑긋했다. 언제나 저 작은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 왔던 그동안이 허튼 시간이 아님을 증명하듯, 이연우는 이 소란스러운 공간 안에서도 임태호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완벽하잖아?”

“콜록, 큭, 콜록, 컥…, 크, 크흠. 흠.”

그리고 그 대가도 혹독하게 치렀다.

긴장으로 바짝 마른 목을 축이려던 연우는, 태호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온 문장에 사레가 들어 발작하듯 기침을 토해 냈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던 4인 테이블 점령자는 다시 한 번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른 사람을 몰래 보는 것에 익숙한 편이 아닌 태호는 제 뒤에 앉은 사람을 완전히 돌아보지는 못하고 살짝 어깨만 으쓱했을 뿐이다.

한편, 그 충격적인 말을 들은 현민은 속으로 진실한 답을 삼켰다. 인성은 완벽하지 않은 것 같은데….

“처음에는 진짜 좋았어, 연우랑 만나서.”

현민은 마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임태호의 말을 들으며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한참을 미친 듯이 기침하던 이연우가 테이블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채라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는 게 이렇게 신경 쓰일 줄은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임태호는 유현민의 그런 걱정을 덜어줬다.

“아, 물론 지금도 너무너무 좋아.”

“……후우,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유현민은 정말 속을 쓸어내린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싶을 정도로 안도했다. 하지만 임태호는 유현민을 그렇게 순순히 안심시킬 생각이 없는 듯했다.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불안해요?”

“응. 불안하다가 제일… 맞는 말 같아.”

산 넘어 산이었다.

현민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찾았다. 그러자 더 골 때리는 상황은, 이제껏 술에는 거의 손대는 일 없고 콜라만 먹어도 취하는 것 같다던 임태호가 ‘현민아, 나 맥주 조금만 줄래? 진짜 조금만.’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실 요새 불안해서 잠도 잘 못 잤어.”

유현민의 시선이 슬쩍 이연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연우는 여전히 취객처럼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은 채라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진짜, 연우는 나랑 왜 사귀지? 왜애?”

“그러게요…. 참 저도 알고 싶다, 아니, 아니, 음. 왜일까요.”

“처음부터 그랬어.”

저도 모르게 실언할 뻔한 현민은,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한번 말을 시작하니 뭔가 맺힌 게 터지기라도 한 건지, 분명 처음에는 술을 ‘조금만’ 달라고 했던 태호는 이제 제 손으로 직접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한테 오더니 그래. 선배! 혹시 제 멘토 선배 좀 해 줄 수 있으세요?”

“멘토 어쩌고는 뭐예요?”

“있어, 그, 뭐 학교에서 시켰던 거. 솔직히 귀찮다고 다들 안 했는데… 하재!”

……그때부터 시작이었구먼.

유현민은 왠지 제가 보지도 않은 두 사람의 시작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스무 살의 이연우라. 그 곱상했을 얼굴로 어떻게 웃으며 임태호에게 다가가 살살 꼬리를 쳤을지, 정말 뻔히 보였다.

“선배인 걸로도 만족했는데.”

“솔직히 그 ‘선배’ 타이틀만이라도, 다들 가지고 싶어 할걸요.”

“…하하. 맞아. 그런데 난 진짜 그것만으로도 좋았어.”

임태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쯤은 대단한 관찰력이 없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사실 유현민은 임태호가 이연우와 함께하는 것이 아직도 채 믿기지 않는다. 사실 저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진수성찬들이 없었더라면, 마음대로 애인 욕도 하고 속풀이를 하라며 등을 두들겼을지도 모른다.

“나 빼고 다 반짝반짝했어, 연우 옆에 있는 사람들은.”

“에이. 형이 뭐 어때서!”

“아냐. 난 진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뭐라고 부정의 말을 내보내려고 했던 현민은, 잔뜩 힘이 들어간 문장의 그 묘한 뜻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임태호, 그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건.

“선후배만 8년.”

“…….”

“그냥, 요새 자꾸 이런 생각이 들어.”

분명 둥글게 웃으면서 넘어가야 하는 순간인데도, 진심이 가득한 단어 하나하나를 마주하고 나니 자꾸 입이 바짝 말랐다. 그래서 현민은 말 대신 괜한 술을 몇 모금 더 들이켜는 쪽을 택했다.

“8년이나 곁에 있었는데.”

역시 다른 커플의 연애담은 딱 달짝지근한 것만 듣는 게 좋다. 저렇게 진심이 가득한 고민을 듣는 건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난 그동안 단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아닐까.”

이연우의 선배인 것만으로도 넘치게 만족했었고 얼마 안 가 ‘하나뿐인’ 존재라는 것에 감동했던 임태호는, 연인이 되고 나자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상대에게 좀 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은 특별한 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작게, 하지만 끈질기게 싹튼 소망의 발목을 잡는 게 있었다. 아니 사실 그건 발목을 잡아채다 못해 임태호를 지금 그가 발 딛고 있는 현실로 와 닿게 하였다.

8년 동안이나 좋은 선배였다. 그런데 그 관계가 이렇게 다디달게 바뀐 건…….

“지금은 그냥, 다 연우가 힘든 때라서.”

“그래도 여지가 있었으니까 시작된 거죠!”

“그런가.”

술에 취한 탓인지, 작게 말하는 태호의 목소리에는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저기, 태호 형!”

“그래도.”

나름대로 오늘 밤에는 그럴듯한 말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현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입에 커다란 무게추가 달린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그걸 알아도.”

“…….”

“……부러워.”

사실 이연우는 임태호가 제 향을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꽤 당황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가볍게 생각했다. 제일 난장판을 치고 놀았던 때가 8년 전이다. 딱 임태호를 만났던 때다. 그 뒤로도 뭐 마냥 얌전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테지만 솔직히 그게 그에게 큰 동요를 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해도 괜찮았으니까. 거리낄 것도, 눈치 볼 일도 없었으니까. 최소한 겉가죽만큼은 신화그룹 일원다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게 그 나름의 최선이었다.

이연우는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제 연인이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엿들었다. 사실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임태호를 엿보고, 임태호의 마음을 엿듣고.

선후배가 아닌 연인 임태호와의 관계는 쭉 그랬다.

‘선배’ 임태호를, 최소한 연인이 될 만한 상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힘들게 매일같이 약을 먹으면서 말하지 못한 비밀을 몰래 알게 되고 나서부터, 임태호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이연우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8년간 사귀던 오메가 연인이 있었다?

그 얄팍한 거짓말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연우는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다. 늘 함께하고 곁에 있는 관계에 뿌듯해하기 전에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는 그 희미한 향의 주인이 누군지 정도는 깨달아야 했다. 태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말 같았으면 일주일도 채 못 가 눈썹을 휘었을 거면서, 관대함을 핑계로 안일하게 굴었다.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도 우습다.

사실, 정말 사실은.

8년간 임태호를 선배라는 이름을 붙인 마음 편한 도피처로 여겼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는 쪽이 진실에 가까울 거다. ‘임태호는 왜 나한테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이전으로 하나씩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니, 이제껏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따라오는 답들이 많았다.

‘나는 어쩌면,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걸 나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걸 모조리 임태호의 자존감 탓으로 여겼던 게 아닐까? 혹시, 아니, 실은 임태호가 지금에 와서까지 나한테 오메가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결국에는 나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답들에 ‘혹시’, ‘어쩌면’이라는 가정을 붙이는 건, 이연우 그가 스스로가 떠올린 생각에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기 위해 애쓰는 자기방어였다.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후배인 척했지만 사실은 단 한 순간도 임태호에게 진심을 내뱉은 적이 없었고, 대학 내 모든 베타의 귀에도 뻔히 들어갈 정도로 유명했던 예민한 감각은 우습게도 태호의 앞에서만 둔하기 짝이 없어졌다.

이연우는 8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임태호가 절대로 먼저 입을 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결국에 그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은 말할 수 없도록 몰았다. 절대 의도치 않은 것이었다 해도, 결과는 그랬다.

그래서 태호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가 늘 자랑스럽게 여겼던 임태호와의 8년을 돌이키고 나니, 저의 하찮은 마음 한 점을 부럽다고 말하는 연인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언제나 누구보다 저를 주의 깊게 살피던 태호다. 가족들보다도 더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던 그 사람이, 그런 적당하게 보기 좋은 제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임태호는 다 알고 있었을 거다.

제 표정과 말이 모두 적당히 그려 만든 것임을 아주 오래전부터 느꼈을 거다. 잠도 못 잘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고, 완전히 베타가 되기 위해 억제제를 더욱 집어삼키도록 몰아붙인 건 다른 사람이 아니다. 알파는 그걸 속이 쓰릴 정도로 분명히 깨달았다.

그래서 이연우는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임태호와 유현민이 식당을 뜰 때까지도 계속 그렇게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 식당의 종업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 쭉.

“저, 손님. 이제 문 닫을 시간이어서요.”

“…….”

“손님.”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이연우가 슬쩍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는 저를 부른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작게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언제나 그럴듯했던 목소리는 낮게 갈라진 채라, 정말로 취한 사람 같기도 했다.

종업원은 내부를 정리하면서도 잔뜩 시킨 음식을 거의 손조차 대지 않은 이상한 손님을 몰래 관찰했다. 한참을 테이블에 고개만 처박고 있던 손님은 천장을 한 번 봤다가, 또 바닥을 한 번 봤다. 그다음은 긴 한숨이었다.

‘에이. 나가라니까.’

종업원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알았다고 대답은 곧잘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기는커녕 휴대폰을 든 손님, 이연우 때문이었다.

이연우는 조금은 멍한 눈으로 곧장 한 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몇 번이 흐른 뒤에 곧장 한 남자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는 ‘어, 왜?’하고 친근하게 대답하는 자신의 친형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형 말이 맞았어.”

-응?

이연우의 휴대폰 너머로는 그 뜻을 모르겠다는 물음이 흘러나왔다. 이연우는 잠시 숨을 삼켰다가, 오늘 밤 내내 그의 얼굴을 푹 숙여 가리던 모자와 안경을 벗었다. 태도 나쁜 손님을 흘겨보던 종업원의 눈이 놀라 동그래진 순간도 그때였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형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거 하지 말걸.”

-……이연우?

이연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폈다가, 그다음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목이 꽉 막혀서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못했다. 그 대신 조금은 급하게 바뀐 숨이 흘러나온 게 다였다. 시야가 흐렸다. 이연우는 한 손으로 얼른 제 눈가를 가렸다. 하지만 그건 그 자신을 달래는 데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이연우. 연우야, 너 어디야? 왜 그래? 응?

휴대폰 너머로 놀란 이민혁의 말이 계속됐다. 약해진 마음이 다정한 문장에 쿡쿡 무너져 내렸다. 이연우는 결국 겨우겨우 마지막 말을 속삭이듯 털어놓았다. 그 모습은 정말로 금요일 밤 정말로 넘치듯 흔한 취객 중 하나나 다름없었다.

“형 말, 들을걸…….”

◈◈◈

임태호는 누군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든다.

그런 숙면이야말로, 요즘 같은 야근 연속에서 그가 버틸 수 있는 몇 안 되는 힘이다. 게다가 일주일 내내 고된 회사 일을 하고, 오랜만에 술 약속까지 즐긴 다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더욱 단잠을 잔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한번 자면 중간에 목이 마르거나 화장실에 가는 일도 없이 푹 자는 태호는, 이상하게도 깊은 새벽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 말 그대로 그냥 떠졌다. 태호는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취의 대표 현상인 갈증 탓에 물이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래도 임태호는 임태호다.

갈증에 끌려 발을 옮기면서도 태호는 반쯤은, 아니 80퍼센트 정도는 잠에 취해 있었다. 귀신처럼 구석에 쪼그려 앉은 장신의 남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정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였다.

그 남자를 발견하고 딱 2초 뒤. 임태호는 33년 인생 중 가장 크게 괴성을 내질렀다.

“으와아악! 악! 아악!”

“…….”

“누구세요!”

진짜 심장이 백만 번은 내려앉은 태호는 반사적으로 손에 잡힌 구둣주걱을 손에 쥐고 외쳤다. 하지만 남자는 말이 없었다. 태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불을 켰다.

그러고는 정말,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꼭두새벽의 침입자는 태호, 그가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놀라게 할 건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울어?”

평소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정돈된 모습이 아닌 가벼운 티 한 장에 청바지를 입은 이연우는 꽤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선 건, 집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 눈에서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임태호는 그 스스로도 이렇게 커다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왜!”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했고, 그다음은 이연우의 눈물에 마음이 철렁해서 아직도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여는 남자는 분명 제 연인이 맞았다.

“태호 형.”

“응, 응, 응. 왜, 연우야.”

그 다 죽어가는 작은 부름에 얼른 정신을 차린 임태호는 허둥지둥 이연우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는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한 손에 든 구둣주걱으로 연인을 도닥이려다가 한 박자 늦게 그걸 내던졌다.

“연우야, 왜 그래. 응? 무슨 일 있어?”

“혀엉.”

“응!”

머리가 산발이 되고 뺨에는 베개 자국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태호는,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것이 역력한 얼굴이지만 그 눈만은 또랑또랑했다. 이연우는 그런 제 연인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진짜 쓰레기예요.”

단 한 번도 감히 연관 지어 생각한 적 없는 단어의 등장에, 태호는 무슨 말이냐는 듯 당혹이 가득한 얼굴을 옆으로 기울였다. 이연우는 그런 임태호를 향해 썩 친절하지는 않은 부연설명을 계속했다.

“진짜 완전… 쓰레기…….”

“왜, 왜애. 누가 그래!”

“제가요…….”

그 내용이 어쨌건 진정성은 가득한 고백이었다.

이연우는 임태호가 영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네가? 네가, 너한테?’하고 되묻자, 여전히 무릎을 세워 웅크린 채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고운 눈에서 흘리는 눈물도 덩달아 후드득 떨어진 건 물론이다.

임태호는 잔뜩 놀란 채로도 목소리를 좋게 내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너 쓰레기 아냐!”

그 자신을 쓰레기라고 자책하며 엉엉 울고 있어도, 어쨌든 이연우는 이연우다.

그런 말인즉슨 이런 상황에서도 머리가 팽팽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남자라는 거다. 이연우는 제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지면서 바라보는 연인을 향해 저도 모르게 약한 카드부터 내밀었다.

“형, 사실은요…….”

“응.”

“저 욕 엄청 잘해요.”

나름대로 떨며 고백한 첫 진실이었다. 이연우는 말간 눈을 깜박이며 저를 바라보는 임태호를 보며 저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몇 초간의 침묵은 쉽사리 긴장이라는 것을 모르던 이연우를 그 어느 때보다 바짝 얼어붙게 하였다.

“욕?”

“……네.”

“그게 뭐?”

“입 진짜 거칠어요.”

차라리 뭐라도 딱 부러지는 반응을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임태호는 평소의 이연우가 아는 그대로였다.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처럼, 그저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몇 초 뒤에 이런 말까지 했다.

“딱히 안 그러지 않아?”

“아니에요, 그래요.”

“그렇다고 해서 쓰레기는 아닌걸!”

이연우는 벌써 마음 한구석이 찡해졌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제 연인을 불안하게 했던 것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았다. 연우는 오늘 그중 대표적인 것부터 꺼내 볼 생각이었다. 임태호와 함께할 시간은 많을 테니까.

작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이연우는 저에게서 나는 그 낯선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어찌나 울었는지 눈이 다 시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가 했던 행동들을 무엇으로 더해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저지른 일이 한둘이어야지 그걸 요약해서 말이라도 할 거다.

결국 연우는 자신의 그 긴 과거를 세 단어로 줄이는 걸 가까스로 성공했다.

“…나쁜 짓도 많이 했는데.”

임태호의 눈썹은 처음으로 작게 움찔했다. 태호는 ‘나쁜 짓’이라는 단어에 담긴 수많은 함의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람이다. 이연우는 그 작은 반응의 몇백 배만큼 움츠러들었다. 이연우는 임태호의 표정이 이전부터 늘 신기했다. 어떨 때는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는 것처럼 그 생각이 훤히 보이는데, 이럴 때는 이상할 정도로 생각을 모르겠다.

한참을 입술을 붙였다, 뗐다가 하며 달싹이고 있던 태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람, 해쳤어?”

불행 중 다행으로 이연우는 살면서 별달리 몸싸움할 일이 많지 않았다.

“사람이랑은 그냥 싸운 정돈데, 다른 이런저런 게…….”

다행히도 임태호는 고작 몇 초 만에 완전히 생각과 속이 훤히 보이는 연인이 됐다. 그렇게 환히 웃으며 눈을 빛내는 얼굴이라니, ‘안심했어!’라는 단어를 표정으로 바꾸면 꼭 그랬을 거다.

“아냐! 사람 안 해치면 된 거야! 다 나쁜 짓 하고 살아!”

……라고,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사는 대표적인 인물인 임태호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게 있다.

임태호가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의 입으로 꺼내야 하는 고백이다. 이연우는 웅크렸던 다리를 풀고 제 연인에게 바짝 다가갔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 실제로도 그랬다. 매일같이 약을 먹고, 제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베타가 되어야만 했던 연인에 대한 첫 사과였다.

“더 있어요.”

이제 임태호의 작은 빌라에서는 그 옅은 향이 나지 않는다.

잔뜩 약을 먹어 억제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흐렸던 페로몬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탓이다.

“태호 형, 저 예전에 막…….”

“…….”

“…이 사람, 저 사람 엄청 만났어요…….”

이연우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그리고 길게 내뱉었다. 태호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안 나서, 연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웅얼거렸다.

“엄청 많이.”

“…….”

보통의 연인이라면 과거에 대해서 이렇게 구구절절이 이야기할 필요 없을 거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이연우와 임태호의 경우는 좀 다르다. 8년을 선후배 관계로 지냈고, 그중에서 이연우는 임태호에게 많은 말들을 했었지만, 진짜 언어는 단 한 번도 담은 적 없었다.

그 상황에서 임태호가 알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하나다. 이연우에게 남은 다른 이들의 향이다.

이연우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꼴 보기 싫게 굴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얼마나 웃긴 모습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게 약을 먹던 것조차 몰랐던 8년이 속상하고, 연인이 된 지금 더 큰 부담을 주고 있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이런 말을 꺼낼수록 임태호가 저에게 얼마나 어떻게 실망할지 감도 오지 않아 무서웠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건요.”

임태호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눈을 한 채다. 꼼지락, 꼼지락. 맞잡은 손을 움직이기도 했다.

“제가 너무 엉망진창으로 살아서. 그래서.”

“아니야, 그런 거…….”

“그래서, 형을 못 알아봤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어진 마지막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던 태호의 입이 기어코 꾹 막혔다. 태호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연인의 손가락만 꽉 움켜잡았다. 이연우는 그걸 피하지 않고 꽉 맞잡으며 작게 웃었다.

“……8년이나.”

눈앞이 자꾸 흐려져서 제대로 마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러자 태호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근사하고 멋진 알파가 되는 건 이미 망했어. 이연우는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다.

얼마든지 구차해져야 한다. 한없이 못나고 한심해지는 수밖에 없다. 바보 같을 정도로 매달리고, 날 좀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무릎이라도 꿇어야 한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딱 하나만 얻으면 된다.

이걸로 아직 제게 확신을 갖지 못하는 임태호가, 저를 믿게 되면 된다.

이연우는 임태호를 끌어당겨 제 품에 가까이 붙였다. 이런 황당하기 짝이 없을 순간까지도 순순히 따라와 안겨 주는 몸이, 약간은 발갛게 물든 붉은 귓가가 예뻤다.

“태호 형, 이제 형만 볼게요.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요, 제가 진짜 잘할게요.”

“…응.”

“뭘 더 말하면 될까요. 뭐라도 궁금한 거 있어요, 형?”

임태호는 부끄러울 때마다 시선을 피한 채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이제껏 이연우는 임태호에게 이런 것을 물은 적이 없었다. 이연우에 대해 궁금한 것. 알고 싶은 것. 8년간 수없이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언제나 속으로 삭이는 버릇을 했던 터라 얼른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임태호는 그냥 지금 이 순간 순수하게 떠오른 의문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있지, 근데.”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얼굴을 두 손으로 대충 쓸어 남은 눈물자국을 지우려고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몇 시간 동안 뚝뚝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올 리 없었다. 태호는 연신 제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귀와 뺨을 어루만지는 연인을 바라보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진짜 욕해?”

긴장감과 옅은 물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에 확 웃음이 번졌다. 임태호는 낮게 웃는 이연우의 웃음소리가 정말 좋았다.

“네에. 그럼요.”

“해 볼 수 있어?”

이연우는 임태호의 이마에 얼굴을 맞댄 채로 찌푸리듯 웃었다.

가장 쉬우면서, 또 가장 어려운 첫 요청이었다. 임태호는 부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 그는 이연우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다. 그저 명령하기만 하면 된다.

“씨발.”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억양으로 흘러나온 욕이었다.

“…우와.”

“임태호 존나 멋있다.”

덕분에 임태호는 순수하게 감탄했지만, 이어진 말에 그 감탄은 쏙 기어들어 갔다. 여전히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문장은, 그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개섹시하고 청순해. 썅, 진짜 내가…….”

“아, 알았어. 잘 알겠어. 참 잘하네.”

뺨이 발갛게 변한 임태호는 민망함이 가득한 짧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러자 이연우는 아이처럼 작게 웃었다. 그런 이연우의 웃음을 본 건 처음이라, 임태호는 턱을 긁적이면서도 제 연인을 눈에 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저 싫어지진 않았어요?”

이연우는 여전히 옅은 웃음기가 걸려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태호는 그가 조금은 초조한 듯 시선을 돌렸던 것을 눈치챘다. 임태호는 제 연인의 표정을 잘 안다. 누구보다도 신중하게 지켜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망했다든가. 뭐 그런 거.”

“……당연히.”

아, 놀랐다.

임태호는 순간적으로 저를 안은 남자의 품이 경직된 것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니지.”

“와, 지금 임태호가 저 놀린 거 맞죠?”

쌍꺼풀이 여러 겹 겹친 살짝 우울한 눈매가 슬쩍 접히면서 소리 없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 덕에 이연우는 조금 궁금해졌다. 그래서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꼬면서 슬며시 눈치를 봤다. 태호는 그마저도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이며 눈짓했다.

‘신기하다. 정말.’

이연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싫어지지도, 실망하지도 않아요?”

솔직히 여전히 조금 자신이 없어서, 이연우는 ‘새벽에 깨운 것만 해도 싫을 것 같은데.’하고 괜히 장난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임태호는 그 까다로운 취향의 이연우가 한 번에 반했던 사람이다. 그 말은, 다시 표현하자면 몇 번이고 우습게 다시금 반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임태호는 살짝 눈썹을 아래로 휜 채로 웃더니, 제법 형편없었던 이연우의 첫 고백과는 달리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많이 좋아해서?”

“…….”

“다 울었어?”

아. 씨발. 진짜 존나 섹시해. 완전 하고 싶다.

30분, 아니 15분 전까지만 해도 연갈색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고 울던 남자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면서 진솔해진 후에도 할 수 없는 문장을 입 안에서 굴렸다. 여전히 그 속내를 모르는 임태호는, 저를 끌어안은 이연우에게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자러 가자. 잘생긴 얼굴이 이게 뭐야?”

◈◈◈

제 막냇동생의 집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이민혁은, 그곳의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옴과 동시에 그답지 않게 큰 소리를 냈다.

“이연우! 나 진짜 심장 떨어져 죽는 줄 알았어!”

하지만 그 대화 대상은 신화그룹의 중심에 자리 잡은 이민혁 대표의 호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여전히 덜 마른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안 죽었네, 뭐.”

“아니, 한밤중에 전화해서 그러면 형이 놀라, 안 놀라!”

“내가 뭐.”

뻔뻔하게 되묻는 말에 이민혁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울었잖아!”

물론 어제 새벽 펑펑 울고 토요일 내내 임태호의 옆에 풀칠한 것처럼 붙어 있다가 이제야 미적미적 귀가하는 길이 맞다. 하지만 자기가 울었다는 것을 임태호가 아닌 사람에게 인정할 이연우가 아니다. 그게 가족이라고 할지언정 예외는 없다.

“안 울었거든.”

“웃기네. 완전 울었어!”

“똑똑. 정신 차려, 이 대표.”

이연우는 꿋꿋하게 제 형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자신의 침실로 발을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는 게 있었다. 사실 그건 이연우가 임태호의 집을 빠져나왔을 때부터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이었다.

뚜벅뚜벅 곧바로 집의 안쪽으로 발을 옮기려던 연우는, 가던 걸음 그대로 돌아서서 곧장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자신의 형에게로 향했다. 민혁은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댄 채 저를 내려다보는 동생에게로 고개를 젖혔다. 곧잘 쓰고 다니는 안경이 없는 이연우의 표정은 조금 서늘하게도 보였다.

“왜?”

이민혁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은 얼굴로 이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이연우의 얼굴이 제 형에게로 기울었다. 그것에 놀란 민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연우의 고개는 제 형의 목덜미에 닿은 채였다. 민혁은 그 간질간질한 숨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보다 이연우가 제 형의 어깨를 잡아 누르는 게 먼저였다.

“형도 억제제 먹어?”

“무슨 소리야?”

이연우는 손에 꼽히도록 타인의 향에 예민하다. 그걸 모르는 이가 없다.

연우 그 자신도 자신의 감각에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어 한다. 민혁은 제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기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마침 잘됐다는 듯 긴 잔소리의 물꼬를 틀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걸 제대로 듣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 그래. 너 억제제 끊어, 이연우.”

“…….”

“건강검진 받을 생각도 없으면서. 바쁜 사람들 귀찮게 뭐 하는 거야, 그게.”

각인에는 몇 가지 전조 증상이 있다.

“야, 연우 너 내 말 듣고 있는…….”

그중 대표적인 것은, 연인을 제외한 이의 향을 짚어낼 수 없는 거다.

뭐라고 말을 더 이으려던 민혁은 정말 가볍게 스쳐 지나간 그 생각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이건 다른 사람이라면 애초에 떠올리지도 못했을 가정이었을 거다. 제 동생이 마음을 빼앗긴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민혁이 아니었더라면, 감히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 분명하다.

“…….”

“…….”

“……에이. 설마.”

민혁은 제가 떠올린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어진 이연우의 말에 오래가지 못했다.

“향이, 하나도 안 나.”

돈깨나 있다는 집안에서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발현과 동시에 페로몬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향을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마치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체화되도록 주지시키는 것이 있다.

<절대로 각인을 해선 안 된다>.

각인은 육체와 의식 그 위에 있는 어떤 강력한 자기 규제와 비슷하다. 그걸 ‘비슷하다’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어떻게 각인이 이루어지는지 의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확실한 해석을 찾지 못한 탓이다. 세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의 내려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각인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 절대적인 규제의 끝에 있는 것이 결국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타인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정재계에서는 각인을 또 다른 표현으로 불렀다.

‘가장 낭만적인 자살법.’

이 표현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개인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건 누가 되었든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될 거다. 때문에 물질이든 권력이든, 그 어떤 것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각인은 결단코 멀리해야 함이 당연했다.

신화그룹의 3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심지어 아주 어릴 적 발현하기 전부터 그걸 배워 왔다. 각인해서는 안 된다는 건, 혹시나 베타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3세의 아이에게, 또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에게 전해야 할 당연하고 절대적인 진리나 마찬가지였다.

비이성이라는 단어로도, 감성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은 모든 것을 위험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억제제 부작용일 거야.”

이민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마른세수하더니 단정 짓듯 말했다. 그런 제 형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연우는, 제 형의 맞은편으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당장 약 끊고 지켜봐.”

“각인이라고 치면, 약효 다할 때랑 초기가 겹쳐.”

각인의 초기 증상은 상대의 페로몬만 지각하게 되는 현상이다. 만약 이연우의 지금 상태가 단순 억제제 부작용이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각인이라면 초기 증상이 나타날 때와 약의 부작용이 남는 시간이 딱 들어맞는다.

각인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있어야 한다. 민혁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중 한 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상담 끝나고 나서 3분 안에 집안에서 연락 온다는 거에 얼마 걸래?”

사실 지금은 이연우 그도 확신이 없다. 임태호와 종일 함께 집 안에 있었을 때는 몰랐다. 정말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향을 좇느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태호의 집 밖으로 나섰을 때, 왠지 느낌이 묘하기는 했지만 그게 열여덟엔가 발현하고 나서 처음으로 겪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낯설어서였음을, 제 형을 만나기 전까진 설마 상상하지 못했다. 민혁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최소한 임태호 씨랑 같이 상의라도 하자. 그건 괜찮지?”

꼬박꼬박 토를 달던 이연우의 말이 처음으로 뚝 그쳤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은 민혁은, 더 이상 불안할 수 없는 심정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뭐야?”

“…….”

“뭐야, 뭔데 말이 없어?”

저 예쁜 얼굴을 한 막냇동생은, 어째 하는 말마다 폭탄이고 밟는 곳마다 지뢰가 따로 없다. 오늘따라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가정만 연달아 떠올리게 된 이민혁은, 바짝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저를 말없이 마주 보고 있는 이연우를 향해 ‘절대 아니지?’하는 어조로 물었다.

“일방 각인이라고만 하지 마.”

“부작용일 거라며.”

“……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뭐가 됐든 나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야.”

이연우는 머리를 잡고 앓는 소리를 내는 제 형을 향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담담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속이 탄 건 민혁이었다.

“아니지만, 아니겠지만! …각인이라고 가정해 보자.”

임태호는 좋은 사람이다. 제 동생의 연인으로는 누구보다 좋을지 모른다.

최소한, 지금까지 이민혁이 본 임태호는 그랬다. 하지만 그건 임태호라는 사람의 극히 일부분이다. 다정했던 연인이 그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는 걸 이민혁은 잘 안다. 그래서 더욱 걱정됐고, 또 무서웠다.

“너 그럼 어떡할래. 그것도 일방 각인?”

“…….”

“대체 어쩌다가 그런 걸 한 건데?”

각인을 어떻게 하게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각인을 그만두게 하는 방법이 있는지도 마찬가지다. 늘 멋대로 보였지만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만큼은 얄미울 만큼 정확히 멈춰 서던 이연우는, 이미 그 마지막 지점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부작용이라고 하는 쪽이 설명하기는 쉬워.”

이연우는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제 머리를 손으로 조금 거칠게 털어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거라고 치면…… 언제 어떻게 하게 된 건지 짐작도 안 가.”

각인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멍청한 짓이라고 늘 세뇌될 듯 배워 왔고, 그만큼 이연우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각인에 대한 거부감이 심어져 있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시작됐다. 억제제를 먹으며 시작된 부작용들도, 일방 각인이라는 믿기 힘든 가정도 사실 신화그룹의 이연우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딘가에 내놓고 떠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그걸 잘 아는 이연우는, 지금의 상황에 충격보다 신선한 놀라움을 먼저 얻었다.

“대체 나 임태호 왜 이렇게 좋아하지? 신기하네.”

“돌겠다, 진짜! 내가 알겠냐!

“집에다가는 말하지 마.”

한가롭게 옆에 있는 쿠션을 끌어당겨 기대는 이연우는 자기 일임에도 심각함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다른 형이나 누나는 영 의리가 없단 말이지.”

“나도 의리 없거든!”

이민혁은 저를 향해 느긋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왜 그래, 형.’하는 동생을 보며 작은 괴성과 함께 소파에 고개를 숙였다. 연우의 말대로, 민혁은 이 따끈따끈한 폭탄을 집안에 알리지 못할 거다. 이건 한평생 착하고 순한 모범생이었던 그에게 의외인 일일지도 모른다.

이연아는 애초에 대부분의 일을 집안과 공유하고, 이안은 자신의 핸들링을 넘어갈 사안일 경우 곧바로 알린다. 그나마 우군에 가까운 이현은 대체로 눈감아 주는 편이지만 제가 귀찮아질 것 같다면 가차 없는 편이다. 하지만 이민혁은 좀 다르다.

어떤 이보다도 그룹에 충성스럽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제 혈육을 아낀다. 게다가 제 동생이 사랑에 빠지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연우는 완전히 소파에 드러누워 긴 한숨을 토해 내는 이민혁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조만간 알게 되겠지.”

사실 이연우도 잘 몰랐다.

지금 제가 그 대단한 각인이라는 걸 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억제제의 부작용인지 감이 안 온다. 늘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각인이 절대 악인 것처럼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각인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같이 소름 돋을 정도로 낭만적이다.

누군가는 각인하는 순간 ‘아, 이게 각인인가’ 싶을 정도로 알게 된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각인하게 됐다고도 했다. 연인이 근처에 있으면 그 기척을 저절로 따라가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우는 한 줌의 희망을 품었다.

만약에 정말 각인이라면, 혹시 임태호 역시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였다. 물론 어떤 상황인지는 임태호를 직접 만나면 답이 나올 거였다. 아무리 태호가 저에게 비밀을 가지고 있더라도, 각인 같은 것을 완벽히 숨길 수는 없을 테니까.

문자와 전화로는 알 수 없는 임태호의 상태를 상상하며, 바보 같지만 실은 꽤 기대도 했다.

서로가 눈코 뜰 새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 운 좋게 퇴근 시간이 맞은 날, 비서를 먼저 내보내고 그답지 않게 허둥지둥 연인의 빌라로 향한 연우다.

그리고 이연우는 임태호를 만나 5분도 안 되어 확신하게 됐다.

“김치찌개 맛이 뭔가 빠진 것 같은데.”

……만약에 각인이라면, 빼도 박도 못하게 나만 한 거 맞네.

세상 천진난만하게 찌개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태호의 얼굴에는 조금의 초조나 긴장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연우는 한숨을 애써 삼킨 채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어 보이며 임태호가 건네는 숟가락으로 맛을 한 번 봤다.

“마늘?”

“아. 그거 같다.”

요리의 마지막 마무리가 완성됐다. 임태호는 냉장고에서 다진 마늘을 꺼내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조금 덜어 넣었다.

“형.”

“응?”

“저랑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그 새벽 이후로, 이연우가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언제나 주의 깊게 연우를 살폈던 그는 곧바로 그걸 눈치챘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왠지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후배일 때에도, 다른 관계가 된 후로도 한결같이 다정했던 이연우이지만, 뭘 알고 싶고 뭘 함께하고 싶은지 묻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임태호를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으로 만들었다.

기쁜 것 같기도 했고, 왠지 울컥하게 되기도 했고, 어찌할 바 모르게 들뜬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태호는 얼른 대답하는 것 대신에 애꿎은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이연우는 그런 태호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얼굴이 잘 보이도록 했다.

“뭐든 괜찮은데.”

일부러 조금 야살스럽게 말하는 목소리에 담긴 장난기를 짚어 낸 태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연우는 그 미소를 기다렸다는 듯 콧등에 쪽, 하고 작게 입을 맞췄다. 이연우와 하고 싶은 것. 후배 이연우가 아니라, 애인인 이연우와 하고 싶은 것. 태호는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연아는 신화그룹 3세 중 가장 바쁘다.

최근에는 더욱 바빠졌다. 바로 막내의 연애 전선 때문이다. 이연우는 그가 이전에 선언한 바대로 출장에는 완전히 발을 뺐다. 무조건 몇 안 되는 국내 출장만 다니고 가장 많은 해외 건에서는 모두 빠져나갔다. 그걸 얄미워하기에는, 이연우는 정말 해외 출장을 빼면 평소보다 능률이 배로 올랐다. 정말로 이민혁의 좋은 장기짝이 된 거다.

그녀는 퉁퉁 부은 다리를 괴롭히는 구두를 대충 벗어 던지며 곧바로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 후로 이연아가 향한 곳은 이연우의 저택이었다. 신화가의 부지 안에서 사람의 발길과 꽤 떨어진 곳에 있는 그 건물은, 외진 편이기는 하지만 가장 풍경이 좋은 곳 중 하나였다.

“이연우 안에 있죠?”

“예. 대표님도 계십니다.”

연아는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가드를 향해 작게 눈짓했다. 보통 사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이렇게 사람을 물리는 그녀다. 이연아는 막냇동생의 집으로 들어간 뒤 얼마 안 가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이민혁이었다. 이민혁은 그 도도하기로 유명한 이연아가 어리광부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오빠, 나 진짜 다리 완전 부었어.”

“왔구나. 비행기 타는 게 원래 힘들지.”

“진짜. 이연우 걔는 지만 먼 곳 안 나가고 말이야.”

이민혁은 작게 투정하는 동생의 말에 옅게 웃었다. 이연아는 이때까지는 그 작은 웃음의 의미를 몰랐다.

“맞다. 이번에 지노 쪽 회장 사모가 이연우 좀 보내 달라고 한 거 들었어?”

“…어, 어어?”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웃겨, 진짜. 그쪽 둘째랑 이연우랑 엮어서 이젠 좀 같이 잘해 보자고 할 생각이었다네.”

살짝 긴장한 듯한 민혁의 시선은 슬쩍 집 안으로 향했다. 제 동생의 말을 말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연아는 그보다도 먼저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그녀 특유의 톡 쏘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제 막냇동생을 놀려먹을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울 연우가 아무리 막살았다고 해도 말이야, 지노랑은 진짜 아니지 않아?”

“……누나?”

“그래, 13시간 꼬박 비행기에 갇혀 있다가 온 네 누나…….”

슬쩍 눈썹을 추켜올린 채로 말하던 이연아의 말이 끊긴 건 그때였다. 그리고 그렇게 순간이나마 할 말을 잃은 그녀를 향한 작은 인사말이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네, 네에! 안녕하세요. 어머, 어머, 세상에.”

못 들었겠지? 이연아는 그녀 자신을 위안하듯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는 건, 임태호의 뒤에서 입꼬리만 올리고 눈을 부릅뜬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연우의 얼굴이 증명했다. 최소한 이연우는 들었다.

청순하고 섹시하고 예쁘고 멋있는 임태호.

이연아는 그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엄청난 수식어의 남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는 예상하지 못했다. 연우가 잠시 태호의 시선을 가린 사이, 연아는 상황을 설명하라는 듯 제 오빠에게 작게 눈짓했다.

‘연우 집에 놀러 오셨대.’

이민혁은 극존칭으로 작게 속삭였다.

임태호의 바람은 작고 단순했다. 늘 이연우가 제 빌라로 찾아오는 것 대신에, 그도 이연우의 집에 가보기를 바랐다. 연우가 한 건, 제 연인이 드물게 털어놓은 작은 희망 사항을 곧바로 들어준 게 다다. 이연아가 줄줄 내뱉은 쓸데없는 말은, 전혀 바라지 않았던 거다.

이연우는 슬쩍 시선을 돌려 임태호의 표정을 살폈다. 약간 긴장했는지 살짝 뺨이 붉어진 태호의 얼굴은, 사실 그렇기에 더욱 평소와 같아 보였다. 형은 못 들었겠지? 이연우는 제 누나와 별다를 바 없는 희망 사항을 꿈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태호는 이연아가 빠르게 내뱉은 말을 모조리 들었다.

그것도 아주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하지만 임태호는 아직까지는 그것에 동요하지 않았다. 연아의 말이 워낙 실감 나지 않는 표현으로 엮어진 문장들이었기 때문이다. ‘지노그룹’, ‘회장 사모.’…. 임태호는 이연우와 가까울 뿐이지, 평범한 서민 중의 서민이었다. 태호는 남매들의 걱정과 긴장과는 달리, 그 현실감 없는 단어들에 놀라지도 못했다.

결국 그날 밤 안절부절못하는 삼남매를 달래다시피 하는 시간을 보낸 임태호가, 문득 제가 들었던 말을 다시 상기하게 된 건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였다. 그것도 직장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은 가까운 동료에게서다.

함께 점심을 먹고 온 태호의 동료는, 슬쩍 그를 보다가 바짝 고개를 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저기, 태호 씨.”

“네?”

“……혹시 애인 사진 같은 거 있어?”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던 태호는 마시던 것을 보기 싫게 뿜을 뻔했다. 그걸 운 좋게 콜록이며 삼킨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 아뇨. 없어요.”

“에에이. 없긴. 너무 빼지 말고 좀 보자.”

순식간에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이 태호의 표정을 좇았다. 사실, 사무실 내에서 임태호의 애인은 모두의 관심사다. 세상에 저 숫기 없고 얌전한 임태호가 애인이 러트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하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짙게 남은 향이라니!

동료들은 귀까지 뻘겋게 된 채로 모니터 앞에 고개를 숨겨 버린 태호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살폈다.

하지만 태호는 한번 입을 다물면 누구보다도 조용해지는 사내다.

게다가, 설령 말하고 싶다고 해도 말할 수 없다. ‘여러분이 그렇게 궁금해하는 제 애인은 인터넷에 치면 나온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셈이다.

“진짜 안 보여줄 거야?”

“……네.”

임태호는 엄청나게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덕분에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태호의 머리에 문득 한 단어가 떠오른 건 따끈하게 열이 오른 뺨이 조금 진정될 때쯤이었다.

‘지노그룹 둘째’.

이연아의 코웃음 가득한 말만큼, 사실 그 만남은 삼남매의 어머니인 박희원 관장 선에서 단칼에 거절된 것이었지만, 임태호가 그것까지 알 리 없다. 잠깐 머뭇거리던 태호는 검색창에 머뭇머뭇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그냥 궁금한 거야. 정말, 그냥. 임태호는 저 자신에게 그렇게 다짐하듯 말했다.

어떻게 보면 참 귀여운 그 검색어를 치자, 온갖 블로그 포스팅들과 기사들이 곧바로 쏟아져 나왔다.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태호는 괜히 주변을 한번 훑어본 뒤 그 기사들의 헤드라인을 훑었다. 그러고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노의 문제아, 이번에도 또.]

[재벌 3세, 언제까지 갈 셈인가?]

[지노의 3세, 또 음주운전…….]

아니, 인상을 찌푸리다 못해 솔직히 그답지 않게 기분마저 좀 상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사람을 연우한테 소개하려고 할 수가 있지?’

임태호는 감히 제 연인에게 가져다 댈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조금 울컥했다. 임태호에게 이연우란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연인이다. 감히 이런 사람하고는 가져다 댈 수 없다.

사실 지노그룹에서는 제 그룹의 말썽꾼을 신화그룹의 폭탄과 엮어서 역사 깊은 불화에 찬 두 기업의 관계도 상쇄하고 아무한테나 자식을 보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지만, 그건 어느 쪽이든 실패였다.

이연우는 신화그룹의 잠재적 폭탄이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지노그룹의 둘째처럼 매스컴이나 공개적인 소문에 휩싸인 적 없었고, 무엇보다 사랑받는 예쁜 폭탄이었다.

태호는 잔뜩 언짢아진 채로 기사 하나를 눌렀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냈다.

“…와.”

“응?”

“아, 아니에요.”

보통 온갖 문제를 휘몰고 다니는 사람을 상상할 때, 사람들은 흔히 그 죄목에 걸맞은 모습을 상상한다. ‘얼굴값을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 건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갓 생성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태호는 아주 잠시간의 검색만으로도 잠시나마 제 연인의 상대로 지목됐던 사람이 이목구비가 뚜렷한 호남형의 사내이고, 우성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어깨에서 힘이 쭉 풀렸다.

‘어떤 타입을 좋아하냐고 안 사귈 때 물어볼걸.’

임태호는 늦어도 한참 늦은 후회를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인터넷 창을 통째로 끈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쓸데없는 자격지심과 늘 따라다니는 옅은 고민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냥 까맣게 잊고 있던 게,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떠올라서는! 임태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때, 임태호를 위로하듯 휴대폰 액정이 깜박였다.

-차 안 가지고 출근했댔죠. 오늘 데리러 가도 괜찮아요?

이연우는 꼭 이렇게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마다 연락한다. 아니 사실, 요 근래에는 임태호의 시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내라, 언제 메시지를 보내든 별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태호는 퇴근하기 전에 화장실에 들러서 앞머리의 방향을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를 반복하며 거울 속 제 얼굴을 살폈다. 물론 어떻게 하든 흐리고 조금 우울하게 처진 눈을 한 남자가 서 있었을 뿐이다.

요새 임태호는 세상에 다시없을 천국과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 자신의 현실을 늘 왔다 갔다 한다. 이연우가 상냥하고 다정한 연인으로 눈앞에 있을 때면 땅에서 몇 걸음 붕 떠오른 것 같아지고, 이렇게 혼자 제 모습을 되짚으면 뒤늦게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하게 된다.

이연우에게 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정말로.

그래서일까. 조금은 멍하기도 하고 약간은 시무룩하기도 한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 태호는, 평소 같았으면 금방 눈치챘을 동료들의 시선이 자신을 쫓아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연우를 만날 때까지 그 옅은 우울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얼굴을 반쯤 가린 커다란 안경을 쓴 채 태호의 회사 근처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이연우는,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제 연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심상찮음을 짚어냈다. 애초에 태호는 대체로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 못 된다.

‘회사 일이 많았나?’

이연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태호를 반겼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응.”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각인이든, 부작용이든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이 이상한 세상은 딱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바로 약으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임태호의 꺼질 듯이 흐린 향을 얼른 찾아낼 수 있다는 거다. 연우는 그 향을 크게 들이켜며 연인의 뺨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그냥 간단하게 근처에서 먹을까?”

그 행동이 좀 간지러웠는지, 태호는 시선을 빙 돌려 떨궜다가, 몇 번 깜박였다.

별것 아닌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그건 자상한 연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연우가 ‘어우, 씨발, 진짜 개귀엽네.’하며 욕을 삼키게 하기 충분했다.

시작이 무섭다고, 임태호에게 한번 원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본 얼굴이 드러나려고 안달이었다. 그건 양쪽 모두에게 위험천만한 일이다. 연우는 겨우 표정을 고쳐 지으며 최대한 일상적인 목소리로 ‘그래요, 그럼.’하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이연우의 예민한 시야에 먼저 들어오는 게 있었다.

아무리 태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향이 짚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신경이 날카로운 편인 그다. 살금살금 뒤를 밟는 이들의 모습은, 눈치 못 채기가 어렵다. 이연우는 임태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연인의 시야를 가린 다음, 슬쩍 근처를 얼쩡거리는 사람들을 훑었다.

그러고 얼마 안 가, 그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태호의 직장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묘한 기대감에 찬 눈을 한 사람들이라니, 뭘 상상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연우는 보란 듯이 달짝지근하게 웃으며 임태호를 근처의 적당한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 와중에 구경하던 사람의 대부분은 떨어져 나갔지만, 운 좋게도 마찬가지인 커플로 보이던 두 사람은 끝까지 쫓아왔다.

…거 되게 열정적이네.

연우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태호를 동료의 시선에서 등지고 앉도록 했다.

“형, 뭐 먹을래요?”

“다 괜찮아.”

한편, 이연우는 자신들을 쫓아온 이들을 신경 쓰느라 잠시 그답지 않게 놓친 게 있었다.

“오늘은 이 메뉴 추천드리는데. 어떠세요?”

“아. 네.”

바로 서빙을 받으러 온 종업원과 임태호의 표정이었다.

이연우는 한껏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그만큼 대충 대하느라 저를 향해 얼굴 가득 심상찮은 미소를 담는 종업원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임태호는 달랐다.

이연우를 마주 보고 있는 그는, 눈앞의 두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연우가 지금은 알 수 없는 종업원의 페로몬까지 모두 하나하나 짚어냈다. 순간 입가가 시무룩하게 내려간 태호는 어깨마저 축 처졌다.

얼마 뒤 그걸 한발 늦게 알아챈 이연우가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정말 뻔한 일이다.

“태호 형?”

임태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대답을 원한 부름이 아니었던 탓에 뭐라 더 이을 말이 없던 이연우는,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식당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해도 곧잘 말하고 웃던 태호는, 한순간에 이상할 정도로 기가 죽었다. 연인의 작은 변화에도 전전긍긍하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가끔씩 텐션이 처지고 힘든 날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정말 적당히 하자 싶은데도 심장 한쪽이 무너질 듯 뛰었다.

그런데 그때, 이연우의 숨을 눈짓 한 번에 쥐고 있는 임태호의 입이 열렸다.

“연우야.”

“네.”

“나 뭐 물어봐도 돼?”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당당하게 뭐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었는데도, 정작 멍석이 깔리니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제 잘못들이 지나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연우는 ‘그럼요.’하고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뭐지. 뭐지. 뭐지. 뭐지. 진짜, 뭐지. 이연우는 테이블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 다리를 한 번 꼬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하지만 오늘 임태호는 이연우를 완전히 손에 쥐고 있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왜, 뭔데요?”

작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은 여전히 그 속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있는 편인 임태호인데도 저렇게 시무룩한 얼굴이 됐을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포커페이스가 된다. 결국 이연우는 그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계속 임태호의 눈치만 봤다. 물론 그러면서도 태호와 만난 지 겨우 한 시간째인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기도 하고, 아주 먼 과거를 회개하듯 떠올려 보기도 하는 등 머리만은 바빴다.

이제 임태호에게만큼은 완전히 고개를 숙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연우다.

그 고고한 자존심도, 뻣뻣한 태도도 연인의 앞에서만큼은 얼마든지 바닥에 내동댕이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연우는 종업원이 디저트를 확인하고 갔을 때, 긴 한숨과 함께 쭉 얼굴을 가리던 안경을 벗었다.

제법 말끔한 회사원의 복장을 한 태호와는 달리,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목적인 이연우는 가벼운 셔츠 하나에 면바지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때문인지 평소보다 그 나잇대가 좀 더 뚜렷하게 짚어지기도 했다.

“태호 형.”

깜박, 깜박. 임태호는 쌍꺼풀이 여러 겹 진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응?”

뜻밖의 거친 표현에 놀란 표정이 된 태호다. 하지만 이연우는 저런 얼굴이 된 연인에게 어떤 눈짓과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안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임태호에게 예쁘게 보이는 법만큼은 그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형이 저 안 봐줘서요.”

다섯 살 연하 애인의 애교는 확실히 강력하다. 그것도, 8년 된 콩깍지가 낀 상태인 임태호에게는 무엇보다 완벽한 효과를 보인다. 온종일 기운이 빠져 있던 태호에게서 처음으로 순수한 웃음이 터진 것만 봐도 그렇다.

“그게 뭐야?”

“정말이에요. 밥 먹는 내내 안 봐줘서, 진짜 힘든데요.”

이연우의 가족들이 본다면 입을 떡하고 벌리다 못해 넋이 나갈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은 임태호뿐이다. 연우는 얼른 말하라는 듯 제 연인을 향해 살짝 눈을 찡긋했다. 결국 태호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근사한 알파가 대놓고 눈을 접어 웃으며 살살 꾀려 드는 것에 굳었던 마음을 기꺼이 풀고 말았다.

“있지, 연우야.”

“네에.”

“넌 원래 어떤 사람 좋아해?”

이번에 조금 놀란 건 이연우 쪽이었다. 사실 연우는 식사 내내 태호가 내뱉은 저 귀여운 질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갖 상상을 다 했었다.

“……혹시, 이상형 말하는 거예요?”

“응. 말하자면, 뭐.”

태호는 조금 멋쩍은 얼굴로 턱을 긁적였다. ‘이상형’이라는 단어로 다 말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건 임태호가 요새 궁금했던 것과 가장 비슷한 표현이었다.

사실 이연우가 기존에 만나던 사람들과 임태호는 정반대에 가깝다. 그때의 취향을 외모로만 따지자면 길고 늘씬한 쪽을 선호했다. 집안이나 위치는 뭐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꽤 달라졌다.

만약 조금 전의 질문을 태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었다면 몇 초 안 지나 바로 답이 나왔을 거다. 최근 몇 달간 완벽하게 확립된 이상형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 말의 주인공에게 곧바로 ‘형인데요?’라고 말하는 것 대신에 최대한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인의 신중한 단어를 흉내 내면서다.

“굳이 이상형이랄 것까진 없었지만…….”

“…….”

“이제까지는 저랑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났었어요.”

태호는 그 문장이 떨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테이블보를 주먹으로 꽉 쥐었다.

“그런데 요새 생긴 희망 사항은…….”

하지만 연인의 그런 긴장을 달래듯, 이연우의 눈이 곱게 접혔다. 태호는 조금 멍한 표정이 된 채 그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형이랑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

“……그건 평생 해도 안 될걸.”

“왜요. 저 진짜 노력 중인데.”

하하, 이연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건 그려 만든 표정으로 내거는 어리광보다 훨씬 더 힘이 셌다. 실은 힘이 센 정도를 넘어서 마음 한구석을 쾅, 하고 울렸다. 반짝이는 금가루가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임태호는 이연우와 제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이연우가 자신과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태호는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반짝이는 연인을 보면서 ‘아마 평생 가도 그것만은 안 될 거야. 어떻게 그래.’하고 속으로 몰래 생각했다.

“궁금한 건 이게 다예요?”

다른 곳에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을 노란 전등은 제 연인의 앞에서만큼은 고운 금빛이 된다. 태호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니 바보라도 제 앞의 남자는 자신에게 빠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종일 끙끙 앓았던 것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둘째.”

“둘째?”

“지노그룹 둘째. 잘생겼던데.”

물론 그건 이연우에게는 전혀 담담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형! 그 새낀 진짜 답 없는 깡패새끼예요!”

지난번 고해성사 이후,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터진 언사였다.

사실 평소라면 그 어조에 조금은 놀랐을 태호이나,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태호는 대체로 말간 표정을 유지하는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잠시 묻어 두었던 언짢음이 다시 되살아나서였다.

“거기도 참 이상하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너한테 소개하려고 해?”

가슴에 손을 얹고 이연우는 제 연인이 남 욕하는 걸 처음 봤다.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건 욕이라고 보기도 힘들지만 여하튼 그렇다. 오히려 놀란 건 임태호가 아닌 이연우 쪽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이 더 풀렸다.

“집에서 지노 얘기 꺼내면 아빠, 아니 아버지 경기 일으켜요.”

임태호를 솔직히 대하기로 마음먹기는 했었는데, 굳이 들키고 싶지 않은 것까지 흘려버렸다. 태호는 작게 웃으며 ‘아빠라고 했었구나.’하고 쐐기를 박는 것으로 이연우의 마지막 한 줌 내숭을 짓이겼다.

“여하튼. 누나 말, 정말 신경 쓰지 마세요.”

“응.”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하기. 그건 임태호가 잘하는 것 중 하나다.

그런 태호에게 뭐라 더 말을 이으려던 연우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종업원이 디저트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종업원은 다디단 디저트를 임태호 쪽에, 씁쓸한 커피를 이연우의 앞에 두었다. 물론 주문은 그 반대였다.

이연우는 종업원의 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 위치를 손수 바꾸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신경 쓰이죠?”

“……응.”

그리고 그 작은 대답을 듣는 순간, 이연우는 확 터지는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이따금 운 좋게 태호의 향이 닿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들뜨는데, 오늘따라 묘하게 솔직하기까지 하니 왠지 속으로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어떻게 해야 신경 안 쓰게 할 수 있을까요?”

눈썹을 슬쩍 휘며 느긋하게 던지는 말은 약간의 장난기와 야함이 섞여 있었다. 사실 이연우는 그때까진 제가 오늘의 주도권을 쥔 줄 알았다. 말간 얼굴을 한 제 연인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따그닥, 따그닥, 하고 몇 번 두드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임태호는 씁쓸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조금 전 제 테이블로 서빙한 종업원이 서 있는 곳을 흘끗 봤다. 온 신경을 태호에게 집중하고 있던 이연우는, 그 시선이 가는 곳을 따라갔다가 상기된 뺨이 된 채 저와 눈이 마주친 여자 덕에 운 좋게 삼켰던 웃음을 기어코 터트리고 말았다.

누군가 머리 꼭대기에 서게 된다면 참 불쾌할 줄 알았는데. 기분 나쁘기는커녕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좋았다. 이연우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해결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그리고 그 순간, 임태호는 처음으로 조금 속이 들떴다.

이연우의 페로몬이 조금 더 진했으면 좋겠는데 묘하게 부족한 느낌이었다. 노팅의 여파로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희미하게 깨달은 거다. 하지만 임태호는 언제 이연우의 향이 짙어지는지 잘 안다. 태호는 저도 모르게 바짝 마른 제 입술을 혀로 적셨다. 이연우의 목소리가 잔뜩 낮아진 것도 그때였다.

“지금 여기서 형한테 키스할 생각인데.”

“…뭐?”

“참고로 저기, 저쪽에는 형 회사 사람들이 있고요. 두 명 정도?”

상상도 못 했던 말에 태호의 몸이 반사적으로 몇 센티는 튀어 올랐다가 내려갔다.

당연히 안 될 얘기였다. 평소였으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다. 하지만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여전히 자신의 알파를 곁눈질하고 있는 종업원 쪽으로 시선이 간 건 정말 우연찮은 일이었다. 이연우는 그런 연인을 향해 선택하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이연우는 임태호가 저를 밀어낼 줄 알았다.

그 임태호가 먼저 고개를 틀어 제게 입 맞출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해서 좀 더 짓궂게 군 거다.

덕분에 스킨십을 할 때만큼은 언제나 태호를 리드하던 쪽이던 연우는 조금 얼빠진 얼굴이 됐다. 임태호가 살짝 입술을 부딪쳤다가 떼어내며 감았던 눈을 실눈으로 뜰 때까지도 그랬다. 몇 초간 상황 파악이 안 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연우는 그 더운 숨이 제게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으로 동그란 머리를 잡아당겼다.

숨을 쉬느라 살짝 벌어진 입으로 혀가 들어가고,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살덩이가 곧바로 부딪혔다. 혀 아래의 부드러운 곳을 살살 건드리자 태호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테이블에 허리가 걸쳐진 채라 편히 움직일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릎이 저절로 튀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보였을 거다.

임태호의 작은 요청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지금 이 식당에 있는 사람들 중, 저 근사한 알파가 임태호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호 형, 세 개 중에 골라요.”

이연우는 몇 번이고 제 연인의 숨을 대신 삼키며 통통한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열이 오른 목소리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호텔, 저희 집, 형네 집.”

임태호는 ‘왜?’하고 달싹이는 입모양으로 물었다. 그러자 열감이 확실한 갈색 눈동자가 재밌다는 듯 가늘게 휘었다.

“왜겠어요?”

◈◈◈

이연우는 임태호가 못해도 호텔을, 그리고 거의 압도적인 확률로 그 자신의 집을 고를 줄 알았다. 하지만 태호의 선택은 달랐다. 조금은 멍한 눈이기는 했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이연우의 집을 골랐다. 솔직히 의외였다. 이연우의 집은 혼자 뚝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신화가문 부지 내에 위치한다. 어쨌거나 연우의 가족과 마주칠 확률이 존재하는 거다.

그래서 이연우는 제 집으로 차를 몰며 물었다. ‘형, 왜 저희 집 가자고 했어요?’

여전히 귀가 발갛게 물든 태호는, 그 말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둘 다 회사 가기 편하니까.’하고 매우 현실적인 대답을 했다. 오늘 임태호는 그렇게 확실히 제 알파의 머리 위에 있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랬다.

물론 육체적인 위치를 따진다면 좀 다르긴 했지만.

이연우의 손이 곱슬기가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단단한 손가락 마디마디에 걸리는 태호의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적당히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그 식당 또 가야겠어요.”

알파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박고 어설프게 성기를 할짝이던 임태호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벌겋게 변한 눈가와 목덜미를 한 태호는, 조금은 억울한 얼굴이었다. 연우는 그런 연인의 귓불을 살살 어루만지며 옅게 웃었다. 따끈한 물이 차 있는 널찍한 욕조 안은 그 어떤 흐리고 약한 향이라도 더욱 짙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다신 안 갈 거야.”

“왜, 임태호가 먼저 키스한 역사적인 장소인데.”

좋은 선생님 밑에서는 좋은 제자가 나온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다. 게다가 그 제자가 한평생 모범생으로만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욱 좋은 시너지가 나온다. 임태호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그는 이연우가 알려주는 대로 착실히 오럴섹스를 배워 갔다. 처음에 어설프게 혀를 움직이고 귀두를 살짝 입에 머금고 있던 것이 다이던 남자는 어디 가고, 이제는 제법 입 안에 공간을 넓게 만들어 삼켰다가 볼이 홀쭉하게 들어갈 정도로 길게 빨아들인다. 태호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욕조 안의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연우는 머리가 찡하게 울릴 정도로 치고 오르는 쾌감에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부위가 습하고 뜨끈하게 덮이는 감각도 컸지만, 사실 상황과 시각이 주는 자극이 좀 더 적나라했다. 촉촉하게 땀이 어린 발간 얼굴을 한 연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데 흥분하지 않을 알파는 없을 거다.

사실 이렇게 펠라티오를 받는 걸 그는 처음엔 꽤 꺼렸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이 썩 높지 않은 편인 임태호다. 연우는 혹시라도 제가 연인의 위에 있다거나 하는 느낌보다는 차라리 기꺼이 그 발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관계 형성에 더 나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연우에게 몇 번 오럴을 받은 임태호는 그 자신도 해 보겠다고 주장했고, 결국 연우는 그걸 영 내키지는 않는 마음으로 응했다. 그리고 그건 의외의 수확이 있었다.

이연우는 열이 오른 표정으로 고개를 움직이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법 단단해진 기둥을 유독 부드러운 손이 훑을 때마다 작은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이연우는 제 연인이 이렇게 오럴을 해 줄 때마다, 임태호가 어떤 부분을 자극하는 걸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

“내가 형이 빨아 주는 거 왜 좋아하는지는 알아요?”

단단한 성기를 입에 문 채로 시선만 들어 올린 태호는, 저를 내려다보는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 열기로 가득한 갈색 눈동자가 느긋하게 반달로 휘면서 나른한 웃음기가 걸렸다. 빨간 혀가 살짝 입술 위를 적시는 모습은 수없이 봐왔던 일상적인 행동인데도 한없이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연우는 살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은, 형이 좋아하는 데를 되게 열심히 하거든.”

이연우의 발이 천천히 임태호의 중심으로 움직였다. 갑자기 가해진 부드러운 압박에 옅게 흥분한 채로 선액을 흘리고 있던 태호의 것은 순식간에 힘을 얻어 단단해졌다. 그걸 깨달은 이연우는 임태호가 좋아하는 예쁜 미소를 지은 채 놀리듯 음란한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러면서도 제 발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기둥 옆을 살살 혀로 긁고…… 가끔은 살짝 이를 세워서 놀리기도 하고.”

“……으, 흐으, 아, 응.”

“귀두 쪽을 얕게 핥아 주면 숨이 넘어가잖아.”

이연우는 입에 성기를 문 채로도 옅은 신음을 흘리는 연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단단해진 제 것을 그 축축한 곳에서 꺼내며 보란 듯이 벌어진 입술과 얼굴을 스치게 했다. 이렇게 할 때마다 얼핏 봐서는 수치심에 눈가를 떠는 것으로 보이는 임태호의 얼굴 뒤에 가려진 흥분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된 연우다.

“그럼 나는 그런 임태호 보고 꼴려서…….”

이연우는 대충 걸치고만 있던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지더니, 제 연인을 순식간에 번쩍 들어 물기 가득한 대리석 바닥에 눕히며 덧붙였다. ‘형 다리 사이에서 정신 못 차리고.’

태호는 그 웃음기 가득한 말을 들으며 한쪽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음담패설에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열감이 훤하게 느껴지는 손이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활짝 잡아 벌리며 한없이 야한 자세를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떨 땐 제 거 빨면서 허리도 흔들던데. 다음에는 형 뒤에 다른 거라도 넣어볼까요?”

……이런 말 마음대로 하려고 그날 울면서 온 걸지도 몰라.

임태호는 세상에서 가장 단정하고 금욕적인 목소리로 계속되는 야한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평소에는 연인의 말투가 바뀐 걸 크게 자각할 일이 없는 태호가, 그 변화를 가장 크게 눈치채는 순간이 바로 몸을 섞을 때였다.

이연우의 손이 따끈한 물로 부드럽게 풀린 구멍을 원을 그리듯 살살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건 얼마나 간질거리는 움직임인지, 조금은 장난스럽게도 보였다.

“물론 내가 쑤실 때가 제일 좋긴 한데. 하다 보면 혼자 가는 걸 자세히 못 본단 말이죠.”

“…그걸 왜, 흐으, 자세히…….”

임태호는 중간에 튀어나올 뻔한 소리를 가까스로 삼키며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어진 다리 가운데로 흥분한 채 꼿꼿하게 서 있는 성기가 창피했지만, 저걸 손으로 숨기기라도 하면 짓궂은 제 연인이 얼마나 더 집요하게 구는지 잘 알게 된 터라 제 중심을 차마 가릴 엄두도 못 낸 채였다.

“형은.”

“……읏!”

“내가 가는 거 다 보잖아요.”

연우는 흥분으로 가늘어진 눈으로 웃으며 연인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진짜 눈앞이 띵하거든. 완전 뿌리 끝까지 오물오물, 다 먹으려 든다니까.”

이연우의 손가락은 좁은 구멍으로 슬금슬금 밀고 들어가며 입구 가까운 곳의 내벽을 가볍게 문질렀다. 임태호는 이상한 소리가 나려고 하는 걸 참으려고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 치며 발버둥도 쳐봤다. 그렇지 않아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슬쩍 오른 몸 온도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연우는 임태호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틈을 주지 않았다.

“엄청 따뜻하게 젖어 있고, 빼면 자꾸 움찔거리면서 조르는데…….”

“이연우!”

“뒤로 혼자 하는 거 보여 주면 안 돼요?”

“…싫어.”

흥분한 성기를 가운데 두고 다리를 벌리고 뒤로는 사내의 손가락을 삼킨 채로 내는 목소리로는 제법 단호했다. 이연우는 조금 더 어리광부리는 듯한 어조로 임태호의 귀를 깨물면서 재차 말을 이었다.

“저도 손으로 뺄게요. 피차 새로운 눈호강. 별로야?”

“별로야.”

“아. 너무 아쉬운데.”

야해. 야해. 진짜 야해. 이연우 진짜 바보야.

임태호는 목덜미까지 따끈하게 달아오른 채로 제 연인의 음란한 장난기를 탓했다. 하지만 임태호의 상상력은 아직 멀었다. 이연우는 제가 손수 벌린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을 고민하듯 손으로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곧이어 임태호를 마치 인형을 들어 올리듯 잡아 일으켰다.그러고는 연인의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대리석에 그가 도로 누웠다. 그러자 태호는 발갛게 열이 오른 상황에서도 놀란 눈을 깜박였다.

“직접 움직여 봐요.”

“어?”

“제 거 넣고, 형이 허리 움직이라는 말이에요.”

물론 임태호는 그 말에 펄쩍 뛰면서 풀린 무릎으로도 몸을 고쳐 앉으려고 애썼다.

“못 해, 정말, 진짜 못 해!”

“왜 이래요. 혼자만 재미 볼 거야? 손으로 앞 만져 줄 테니까, 형은 뒤로만 가면 되는데?”

세상에 어찌나 평온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인지 태호는 그 문장의 선정성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하지만 그런 임태호의 반응을 비웃듯이, 이연우는 그보다 다정하고 달콤한 어조로 상냥하게 명령했다.

“이연우 따먹는다고 생각하고 해 봐.”

입이 거칠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던 말은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

‘따먹는다’는 표현을 육성으로는 처음으로 들은 임태호는, 자신의 근사한 연인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이제까지 내색하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임태호는 주저하며 제 연인의 위에 앉으면서도 그 음탕하기 짝이 없는 단어가 자꾸 귓가를 울려서 혼났다.

몸 위에 올라탄 채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연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올이 가는 갈색 머리카락이 젖어서 적당히 흐트러져 있고, 뺨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빨갰다. 중심을 잡으려다 쭉 뻗은 단단한 근육질의 상체를 손으로 훑었을 때는 그 감촉에 새삼스레 열이 올랐다.

부드럽게 풀어진 뒤로 잔뜩 단단해진 기둥이 천천히 밀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절대로 못 할 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뒤에 스스로 뭔가를 밀어 넣는 건 처음이 아니었기에 행위 자체는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모조 성기와는 다른 열기와 부피감이었다.

순식간에 확 조이는 뜨끈한 내벽에 잠시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던 이연우는, 옅게 허벅지를 떠는 임태호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내 손 잡고. 아프지는 않죠?”

“……응.”

임태호가 주도하는 섹스는 이연우의 섹스와는 꽤 달랐다.

조심성도 부끄러움도 많은 성격만큼, 태호는 아주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며 제가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 나섰다. 그렇다고 해서 이연우도 마냥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연우는 한 손은 태호가 제게 지탱할 수 있도록 한 채로 긴장으로 살짝 수그릴 뻔했던 앞을 천천히 만지기 시작했다.

앞과 뒤를 모두 자극당하면서 다가오는 쾌감을 피할 수 없는 위치가 된 임태호를 바라보는 건 정말로 신선한 느낌이었다. 조금은 흐리지만 늘 다정한 기색을 품고 있던 눈이 몽롱하게 풀리고, 억눌린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젖힐 때마다 물방울이 어깨에서부터 가슴으로, 배로, 깊은 중심으로 타고 흘러내렸다.

이연우는 잘 다듬어졌다거나 완벽하다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삼십 대 초중반 남자의 몸을 보며 진심으로 흥분했다. 단단한 근육들이었다면 손에 꽉 잡히지 않고 미끄러졌을 텐데, 힘주어 잡으면 주먹을 꽉 채우는 감촉도 좋았다.

저를 삼키는 구멍을 마음대로 꿰뚫던 때와는 달리, 감질날 정도로 느리게 물어 삼켰다가 천천히 뱉어내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자니 정말로 임태호에게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물에 젖은 몸이 부딪혔다 떨어질 때마다 유독 큰 소리가 났다. 태호는 그게 부끄러운지 집어삼킨 성기를 더욱 꽉꽉 물었다.

…진짜 죽인다. 이연우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하지만 짓궂은 부탁을 한 사람치고는 연인에게 모질지 못한, 아니 모질 수 없는 알파의 말은 마냥 다정하기만 했다.

“…흐으, 하…아. 응.”

“무리하지 말고.”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며 두꺼운 기둥이 제가 느끼는 곳을 깊게 꾸욱, 짓누르는 감각에 태호는 옅게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을 흘렸다. 이연우는 태호의 성기 끝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긁듯이 문지르며 사정을 유도했다.

얼마 안 가, 임태호는 흐으윽, 하고 길게 앓는 소리를 내며 희뿌연 정액을 토해 냈다. 그때 순간적으로 임태호의 구멍은 제가 집어먹은 기둥을 꽉 물어들었다.

그리고 결국 임태호는 기어코 이연우의 입에서 옅은 욕을 속삭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 씨발.”

아무리 연인의 앞에서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지만 비속어를 쓰는 것만큼은 의도적으로 피하던 연우였다. 태호는 약간 멍하게 변한 눈으로 그런 제 알파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이었다. 그걸 눈치챈 연우는, 왜 그러냐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아니야.”

“뭔데요?”

노골적으로 흥분으로 살짝 갈라진 목소리는 약간 무뚝뚝하게도 들렸다. 태호는 살짝 움츠러든 채로 작게 입을 달싹였다.

“안 하길래…….”

그렇게 작게 줄어드는 말은 끝에 가서는 거의 입만 벙긋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이연우는 그 작은 입모양을 어렵지 않게 읽었다. ‘노팅.’ 그리고 그 단어의 뜻을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고 나자 온몸의 솜털이 다 서는 것처럼 뒷목이 찌릿거렸다.

이렇게 습기 가득한 욕실에서야 겨우 그 향이 짚어지는 연인의 페로몬이 숨을 덥혔다.

예상에 없던 자리다 보니 가지고 있는 콘돔이 없었다. 그래서 노팅을 하지 않았다. 임태호가 정말 베타라면 상관없을 테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간 얼굴을 한 채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숨을 몰아쉬는 남자는, 제 머리 꼭대기에 서는 것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게 분명했다.

이연우는 사정 후 힘없이 늘어진 임태호의 허벅지부터 손을 급하게 타고 올리더니, 힘이 빠진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태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면서 벌어진 구멍에 힘을 줬다.

몸을 일으켜 뒤로 제 것을 삼키고 있는 말랑말랑한 몸을 꽉 끌어안는 감촉이 소름 돋게 좋았다. 맞닿은 몸에서 전해지는 감각은 임태호의 정액인지, 그렇지 않으면 땀인지, 물인지 모를 채로 질척였다. 연우는 조금은 급하게 제 성기를 빼서 태호에게 벽을 짚고 엎드려 서게 했다. 느리게 조여드는 것도 끝장나게 좋지만, 지금 몸이 바짝 달은 건 임태호가 아닌 이연우 쪽이었다.

“……흐윽, 앗, 아, 히익…, 흑, 앗…!”

조금 전 임태호의 움직임은 섹스가 아닌 아이들 장난이었다고 말하려는 듯 거친 움직임이었다. 퍽, 퍽, 힘껏 벌어진 뒤로 성기를 깊게 처박을 때마다 태호의 무릎이 꺾여 갔다. 이연우는 그런 연인의 골반을 힘주어 붙잡은 뒤 마음대로 주저앉지도 못하게 했다.

뿌리 끝까지 깊게 처박은 채 닿은 허리를 돌리자 임태호는 그 쾌감에서 도망치려는 듯 헛발질을 쳤다. 하지만 물이 첨벙이며 닿는 감각마저 지독한 자극이었다. 궁지에 몰린 태호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도 있었다.

바로 이연우의 향이다.

언제나 숨이 막힐 정도로 거세서 숨을 헐떡이게 하였던 극우성의 페로몬은, 오늘따라 뭔가 속을 감질나게 애태웠다. 여린 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농염했지만 짙다고 하기에는 또 순식간에 몇 발짝 뒤로 도망치는 것만 같았다. 태호는 제 뒤를 깊숙하게 찌르는 성기에 신음이라기보다는 높아진 교성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큰 소리를 냈다.

“가끔은, 후우…, 오늘처럼 먼저 키스하고 그래.”

이연우는 골반을 붙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임태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채 제 입술에 가까이 붙였다.

“많이도 안 바랄게. 가끔이면 돼.”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이연우와 임태호는 닮은 점이 있다.

임태호가 이연우와 함께하는 미래를 감히 꿈꾸지 못했었다면, 이연우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무게의 감정이 되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건 비슷한 듯 다른 거였다. 이연우는 눈앞의 남자를 제가 더 사랑하게 될 현재와, 앞으로 올 미래까지도 당연히 받아들인 채였다.

아니, 이연우는 오히려 제가 매번 한두 발짝씩은 더 깊은 마음을 가졌으면 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됐든, 발아래에 서 있는 저를 보면서 임태호가 안심할 수 있다면야 발등에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연우는 태호의 뒤에서 제 것을 빼냈다가, 힘이 풀려 말랑한 틈새가 생긴 통통한 허벅지 사이로 제 성기를 처박으면서 사정했다. 어찌나 흥분한 채인지, 한참을 꿀럭이며 토해진 희뿌연 정액이 임태호의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렀다.

태호는 그 감각에 작게 떨면서 연인의 팔에 기댔다. 이연우는 흥분감에 머리꼭지까지 열이 오른 상태로도 그런 임태호를 단단하게 받쳐 안았다.

섹스가 감정을 나누는 행위라는 건 참 진부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그게 뻔한 수식이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줍음 많고 모든 것에 조심스러운 사람이 제 앞에서는 기꺼이 옷을 벗고 가장 부끄러울 자세로 몸을 섞는다는 게 이렇게나 기쁠지 몰랐다.

이연우는 제 숨이 닿는 임태호의 젖은 머리카락과 동그란 이마에 정신없이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때였다. 여전히 희미하게 떨리는 임태호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제 연인의 고개를 잡아당기기 위해서였다. 붉게 변한 눈가를 한 태호의 표정이 마치 눈을 감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이연우는 기꺼이 그걸 따랐다.

키스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간지러운 입맞춤이었다.

솔직히 거기까지만 했어도 완전히 미칠 듯 좋았을 건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임태호는 입술을 부딪치는 걸 시작으로 턱 끝, 그다음은 얼굴선을 따라서 고개를 움직였다. 그건 마치 이연우, 그가 평소에 임태호에게 하던 행동과 비슷했다.

덕분에 이연우는 임태호의 얼굴이 천천히 제 목덜미 안쪽 깊은 곳으로 기울어졌을 때 그 자신도 모르게 숨을 한 번 삼켰다. 이제껏 태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스킨십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돌려받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임태호가 제 향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이연우는, 이 순간 자신의 페로몬이 연인의 마음에 들기를 바랐다. 그 누구의 호감도 손쉽게 얻어냈던 자랑이었건만 임태호의 앞에서는 이렇게 떨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진짜 미치게 하는데 뭐 있네.”

이연우는 낮게 한숨 쉬듯 말했다. 그러자 살짝 눈꺼풀을 감은 채 이연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태호가 왜 그러냐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연우는 그런 태호의 콧잔등에 쪽, 하고 작게 소리 내 키스했다.

“섹스하고 있는데, 섹스하고 싶어요.”

살짝 숨소리처럼 흩어지는 달큼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연우의 귓가를 스쳤다.

◈◈◈

이민혁은 뭔가 생각에 빠진 듯한 제 막냇동생을 흘끗 봤다.

오랜만에 같이 점심이나 하자며 만난 지 30분. 이연우는 어느 순간부터 쭉 저런 상태다. 사실 민혁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아직도 다른 사람들의 페로몬이 짚어지지 않는지, 혹시라도 몸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이것저것 확인할 생각으로 만나자고 했던 거다.

하지만 동생의 얼굴을 보고 나자 그런 말이 저절로 쏙 들어갔다. 정확히는, 약해진 이연우의 극우성 페로몬 덕분에 겨우 짚을 수 있게 된 누군가의 흐린 향에 입이 꾹 다물려졌다. 이게 임태호 씨 페로몬이구나. 이민혁은 제가 우연히 알게 된 비밀을 마음속으로 깊게 묻었다.

잠시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민혁은, 어느 순간 연우가 저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바쁜 부모님 대신 늘 뒤를 쫓아다니며 챙겼던 막냇동생의 표정은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연우는 시종일관 그 뜻 모를 눈을 하고 있었다. 이민혁은 조금 머쓱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식사 내내 묘한 침묵을 이어갔던 연우는, 이윽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난 형을 절대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여전히 영문 모를 소리에 민혁의 눈썹 하나가 슬쩍 휘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제 형이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좀 이제 알 것 같아. 그 오그라드는 DVD 같은 것도 포함해서.”

“…야, 왜 남의 취향을 욕해?”

이연우가 말하는 오그라드는 DVD란, 이민혁의 서재 한편을 완전히 빼곡하게 채운 온갖 종류의 로맨스 영화들을 뜻한다. 연우는 며칠 간격으로 새롭게 채워지는 그 칸을 보면서 좀 질린 얼굴을 했었다. 특히, 민혁이 슬픈 로맨스 영화를 보고 나서 눈이 퉁퉁 부어서 나올 때가 가장 그랬다.

이연우는 조금 뾰족한 목소리로 말하는 제 형을 향해 작게 웃더니 또다시 약간 낮게 가라앉은 눈이 됐다. 말하는 순간, 그 중간중간의 작은 틈새마다 자꾸 머릿속을 채우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런 연우를 눈치챈 민혁은, 사랑에 빠진 자신의 동생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누굴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되면…….”

한동안 말을 삼키고 가만히 있던 이연우의 입이 열린 건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뒤였다.

“아니, 적어도 그랬던 기억이라도 있으면.”

“…….”

“그런 이야기들이 좋아질 수도 있겠다 싶거든, 요즘은.”

나이 터울이 더 적은 연아는 기억의 시작조차 모를 정도로 당연하게 함께한 동생이라면, 막내인 이연우는 좀 다르다. 아주 어렸을 적 일인데도 이민혁은 제 막냇동생을 처음 봤던 때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

난산으로 어머니인 박희원을 잔뜩 고생시키고 예정일보다 두 달 빨리 태어났던 이연우는, 저와 같은 남동생이라며 한참을 기대했던 이민혁을 놀라게 할 정도로 작고 새빨갰다.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도 제 작은 동생을 보며 ‘살아 있는 거 맞아?’라고도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런 기억이 남긴 세뇌 탓일까, 이민혁은 어렸을 때 유독 몸이 작고 약한 편이었던 이연우의 뒤를 쫄쫄 따라다니며 챙겼었고 훌쩍 큰 성인이 된 지금도 약간은 어린아이 보듯 대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민혁은 조금 속이 울컥했다.

왠지 예상치도 못한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태호 씨한테 잘해.”

“어련히 잘하고 있어.”

“더 잘해, 더.”

잔뜩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떨렸다. 이연우는 그런 제 형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한 척하며 가볍게 말을 흘렸다.

“됐고. 와인?”

워낙 술이 약해 평소 같았으면 바로 마다했을 민혁이지만, 왠지 오늘은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결국 두 형제는 나란히 와인 한 잔씩을 홀짝이며 입맛을 돋웠다.

“역시 알파 새끼들은 정신 차리려면 연애를 해야 해.”

“뭐 벌써 취해?”

“안 취했거든!”

소믈리에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저도 모르게 터질 뻔한 웃음을 입술을 말아 누르며 꾹 참았다. 저를 자주 찾기는 하지만 3세들 중 가장 까다로운 이연우와, 평소에 가까이서 얼굴 볼 일도 거의 없는 이민혁 대표가 있는 자리임을 상기해서다.

그런 노력을 알았을까. 민혁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믈리에에게 살짝 눈짓해서 자리를 뜰 수 있게 했다. 좀 더 마실까 하고 있던 이연우는 조금은 맥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요새 걱정할 일은 별로 없지 않아?”

이연우의 말이 맞다. 요 근래 사내 상황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 그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일이 터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터라 썩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민혁은 그런 불길한 예상은 도로 삼키면서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네가 제일 큰 걱정이지. 약은 끊었지?”

“어. 그래도 보름 정도는 간대.”

아직 이연우의 페로몬은 열성 알파 수준으로 흐리다.

게다가 이연우의 세계는 여전히 한 사람의 향만이 짚어질 뿐이고, 각인일지도 모른다. 그룹 내 최정점에 있는 신화그룹 3세가 각인, 그것도 일방향 각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어떤 파장이 일지 사실 상상도 되지 않는다. 주가가 떨어지는 건 우스울 정도로 당연한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이민혁은 그답지 않게 이 막막한 상황은 이연우가 먹은 억제제의 약효가 다하는 그때 가서 고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왔던 제 동생은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방향으로 달라지고 있다. 민혁은 그 변화를 믿고 싶었다.

◈◈◈

요새 임태호는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는 날이 늘었다.

퇴근길에 잠시 졸다가 사고가 날 뻔한 날 이후로, 출퇴근의 삼사십 분 정도 되는 그 짧은 시간마다 눈을 붙이게 됐다. 여기에는 한창 일이 늘어나 피곤해진 탓도 있지만, 억제제를 갑자기 확 늘리면서 컨디션이 나빠진 것도 한몫했다.

“임 대리, 방금 내가 메일로 보낸 거 확인 좀 하고 연락 주라고.”

“네.”

슬쩍 충혈되어 빡빡한 눈을 꾹꾹 지압하던 태호는, 급하게 발을 옮기며 나가는 부장의 말에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의료 기술을 주전문으로 다루는 태호의 회사는 오랫동안 한 대학 의료팀과 협력해서 준비해 온 프로젝트의 발표를 코앞에 두고 있다. 덕분에 요사이는 다른 업무팀에 속했던 태호까지 덩달아 일의 마무리를 함께 돕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빽빽하게 들이찬 서류를 검토하고, 최종 결과 발표를 준비하는 건 제아무리 회사에서 몇 년 구른 태호에게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태호는 커피를 홀짝이며 부장이 보내준 자료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피곤하기는 해도 이제 이런 힘든 일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제법 공기가 후텁지근해진 지금, 머잖아 여름이 될 거다.

태호는 며칠 전 휴대폰 너머로 나직하게 속삭이던 연인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두 사람은 짧은 휴가를 노려 함께 보낼 계획을 짰다. 아니, 사실 계획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한없이 두루뭉술하게 여기도 좋겠다, 저기도 좋겠다 하는 식의 희망 사항을 늘어놓는 게 전부였지만 임태호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저와의 미래를 당연하게 함께 그리는 연인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감히 바랄 수 없었던 기대가 머리를 들 때마다 그것을 누르기 급급했던 태호는, 이제 그 상상에 멍하게 젖어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임태호는 부장이 보낸 파일을 여러 번 점검한 다음 답장을 보내고, 얼른 연락했다. 전화기 너머 부장의 목소리는 뭔가 굉장히 다급해 보였다. 그래서 태호는 전화를 끊고도 고개를 슬쩍 갸웃하며 의아해했다.

그때, 임태호의 옆자리에 있던 친한 동료 하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태호 씨, 우리 아래층에 신입요. 대학 졸업반인 베타였다던가, 알죠?”

태호는 동료의 말에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부서끼리 같이 모여 회식을 하면서 얼핏 얼굴을 본 것도 같았다.

“네. 본 것 같은데요.”

“보안팀 사람이 그러는데…….”

동료의 목소리가 바짝 줄어들었다. 임태호는 동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동료가 씨익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킥킥대고 웃었다.

“세상에. 그 친구가 회사 컴퓨터로 야동 검색을 했대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임태호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졌다.

“……와. 세상에.”

“진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난 회사 와이파이로 메시지도 안 보내는데.”

요즘처럼 예민한 때에는 보안팀에서 매일같이 직원들의 로그를 확인한다. 덕분에 조금 신경 쓰는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쉴 때도 회사 컴퓨터로는 개인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임태호는 옅게 웃는 동료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다가, 문득 부장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지금 무슨 일 있나요?”

“무슨 일?”

“부장님 목소리가 좀……. 그, ○○대 연구팀이랑 협력 건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이야 지원해 주고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일은 아니라. 잠시만요. 한 번 물어볼까.”

태호보다 훨씬 더 마당발인 동료는 이런 일에서는 누구보다 믿음직스럽다. 아무리 임태호 그가 직접 담당한 일은 아니라지만, 이걸 준비해 왔던 부서가 얼마나 핼쑥해진 채로 돌아다녔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태호도 이걸 도왔던 지난 한두 달간 진이 쏙 빠졌다.

임태호는 별일 아니겠지, 하고 애써 생각하면서도 그답지 않게 파티션 너머로 슬쩍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로 뭐라고 메시지를 치고 있는 동료의 모니터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동료의 입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헐.’ 하는 소리가 터졌다.

“왜요?”

“갑자기 규정 특약 운운하면서 우리랑 독점 안 한다는 통보가 왔대. 그래서 지금 완전 비상. 사장님까지 다 갔다는데.”

평소에도 약간 입이 걸걸한 편인 동료는 빠르게 타자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뭔 미친 소리야?’하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태호는 지금만큼은 그 말에 완전히 동감했다.

“이거 엄청 오랫동안 같이 작업한 거 아니에요?”

“솔직히 이쪽 업계가 얼마나 좁은데. 아무리 푸쉬를 해 줘도 거기서 거기인 걸, 무슨 배짱이야?”

어느새 태호의 근처 앉은 사람 몇은 하나같이 귀를 쫑긋한 채 두 사람의 말에 작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태호보다 더 먼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디랑 같이 손잡겠다는 건데? 우리라고 가만있겠어?”

그 목소리는 조금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도 섞여 있었다. 임태호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왠지 긴장했다. 심각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곧잘 말을 받아 대답하던 동료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이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건 착각이 아닌 듯, 한동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동료는 이윽고 조금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

“신화 재단…… 메디컬센터 쪽이랑 할 것 같대요. 그래서 완전 패닉인 거라고…….”

동료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그 말 이후, 사무실 안은 여러 경악어린 가정으로 가득 찼다.

‘신화 재단 메디컬센터? 지금, 그 신화그룹 말해?’

‘말도 안 돼. 그 정도 되는 곳에서 이런 걸 직접 신경 쓸 리가 없는데. 관리는 우리 같은 데 맡기고 제휴하고 말지.’

온갖 의혹으로 엮인 말들이 임태호의 귓가를 윙윙 울렸다.

하지만 그걸 가장 먼저 물어본 당사자인 태호는 그 상황에 뭐라 입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의 이름에 숨이 턱 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수많은 문장 중 하나가 불쑥 태호를 향한 것도 그때였다.

“임 대리, 혹시 뭐 들은 건 없었지?”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확 ‘임 대리’로 지칭된 태호에게로 향했다. 태호는 이 사무실 안에서 신화그룹을 담당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수많은 눈들이 일제히 저를 바라보는 느낌에, 임태호는 등줄기로 순간 소름이 다 돋은 것 같았다.

“아… 아뇨, 워낙에, 상관없는 부서라. 전혀…….”

“이쪽은 부품 컨펌 쪽인데 메디컬센터랑 무슨 관련이 있겠어요. 신화그룹 계열사만 50, 60개가 넘어가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임태호의 말을 지지해준 건 옆자리의 동료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하긴, 그렇지.’하며 다시 저마다 온갖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신화그룹의 화제로 가득 찬 적 없었던 사무실은 이제 누구나 다 그 이름을 입에 담고 있었다.

태호는 왠지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것 같아 괜히 두 손을 초조하게 쓸었다.

-형, 오늘 몇 시에 퇴근해요?

임태호의 휴대폰 액정이 깜박하고 빛났다. 임태호는 그 메시지의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누가 볼까 싶어 후다닥 작은 기계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급하게 답을 보냈다.

-오늘 늦어. 회사로 오지 마.

거짓말을 한 게 아닌데도 왠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신화그룹의 나이트. 이연우.

그는 임태호의 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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