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Bishop Controls Only One Color​​ (4/9)

4. Bishop Controls Only One Color

제아무리 일찌감치 연애를 포기한 임태호였다 해도, 살면서 몇 번쯤은 누군가의 곁에 서 있는 그 자신을 상상한 적이 있다. 물론 그건 이상형 상상이라기보다는 ‘베타를 만난다면 아마 남자 쪽을 만나게 될까?’, ‘여자라도 나보다 키 큰 알파 만나면 좋겠다.’ 정도의, 아주 희미하게 스쳐 가는 가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몇 초간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진 희망 사항 속에서 대체로 꾸준했던 것도 있기는 했다.

바로 상대의 나잇대다.

임태호는 한두 번의 처참하리만치 가벼웠던 연애 실패 끝에 무의식적으로 제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연상을 만나고 싶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대체로 연상이면 조금 더 듬직하고 믿을만하다는 별 근거 없는 미신에 가까운 통념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임태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연우야, 잠깐만.”

“왜요?”

“숨 막혀…….”

이렇게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고 한참이나 혀를 섞어 키스하는 다섯 살 연하의 연인이 생길 것이라고는, 감히 꿈에서도 바라지 않았었다. 태호는 제 입에서 나간 더운 숨 섞인 문장이 왠지 조금 투정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얼굴이 벌게졌다.

물론 그건 별로 티도 안 났다.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연우는 그런 임태호를 보며 옅게 웃더니 ‘알았어요.’하고 작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어찌나 달콤하던지, 사실 태호는 긴장으로 잔뜩 힘을 줬던 어깨에서 잠시나마 힘을 뺐다. 하지만 그건 영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흐으읏! ……아, 정말!”

차라리 투정부리는 쪽이 나았다.

조금 전까지 한참을 깨물고, 핥고, 부딪히던 입술이 발갛게 물든 목덜미에 닿는 순간, 저절로 날카로운 숨소리가 나면서 부끄러울 정도로 몸이 튀어버렸다. 그러잖아도 침대 헤드에 기댄 이연우와 맞물린 하반신이 엄청나게 신경 쓰여서 몸 둘 바를 몰랐던 태호의 눈썹이 조금 샐쭉하게 휘었다.

“형, 숨 막힌다면서요. 그래서 입 대신 목에다 한 건데.”

짐짓 억울하다는 어조였다.

하지만 그건 말뿐이었다. 곱게 눈웃음치며 살짝 부루퉁해진 눈가에 입술을 떨어트리는 얼굴은 당당하다 못해 장난기마저 어려 있었다. 임태호는 정말, 정말, 정말 몰랐다.

8년간 알았던 저 상냥하고 우아한 후배가 이렇게 뻔뻔하고 또 야한 사람이었다니, 정말, 진짜, 진심으로 단 일분일초도 짐작하지 못했다. 사실 이 정도로 ‘야하다’라고 한다면 이연우가 퍽 아쉬워할 일이었지만, 어쨌든 꽤 보수적인 33세 남성 임태호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정말 연우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후배에서 동생이, 동생에서 연인이 된 이연우는 감히 임태호의 상상 밖에 있는 모습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임태호는 제 귓가에서부터 간지럽게 입술을 떨어트리기 시작하는 연인의 따끈한 체온에 작게 어깨를 움츠리며 이연우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언제나 임태호를 배려하지 못해 안달이던 후배 이연우는, 연인 이연우가 되자 꽤 집요해졌다.

정확히는 스킨십을 할 때가 그랬다. 혀를 섞어 키스할 때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혀끝이 부딪히고 감기도록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몇 번이고 삼킬 듯이 깊게 입을 맞췄고, 지금처럼 숨이 막힌다거나 하는 핑계를 대면 말랑말랑하고 여린 귀부터 목덜미까지 키스하며 종종 이를 세워 깨물기까지 했다.

왜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손잡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 아닌가? 아니다, 키스부터 시작했으니까 시작점이 다른 건가? 실전 경험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임태호는 손이 빠르고 야한 연하 애인의 공세에 매일같이 눈이 팽팽 돌았다.

“태호 형.”

“……후우, 으응.”

“숨 막힌다면서요. 왜 키스도 안 하는데 숨을 안 쉬어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게 한 장본인의 짓궂은 말이었다. 약간 억울해진 태호는 뭐라고 항변해 보려고 했지만, 살짝 제 시선 아래에서 눈을 휘어 웃으며 은근슬쩍 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이로 푸는 능숙함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정말 너무 창피해서 목구멍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르면 저녁, 늦으면 오늘처럼 늦은 밤에 만나 입을 맞추면서 임태호는 이연우의 저런 능글맞은 야한 장난기 외에 새로 알게 된 것이 있다. 바로 몇 장의 천 너머로 전해지는 연인의 몸이었다.

운동이라고는 온종일 회사 의자에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 하는 평균치의 가사활동이 전부고, 굳이 나누자면 동글동글 통통한 편인 흔하디흔한 직장인 A의 신체조건을 가진 태호다. 심지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넌 참 몸이 물 같다, 야.’하는 농담을 들었을 정도로 유독 피부가 약하고 말랑말랑 편이기까지 하다.

사실 그래서 이연우를 꽤 동경했었다.

대수롭지 않게 ‘원래 집안사람들이 다 큰 편이에요.’라고 말하는 연우였지만, 키도 크고 뼈대부터 딱 벌어진 게 참 근사하게만 보였었다.

그래, 쉽게 말해 연인이 되기 전까지는 퍽 눈이 즐겁고 마냥 보기 좋았더랬다. 임태호는 제가 뻗은 손이나 맞닿은 허벅지에 닿는 단단한 감촉에 긴장이 잔뜩 어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안 되겠다. 진짜 헬스 끊자.

태호는 속으로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째일지 모를 다짐을 했다. 사실 이건 이연우의 ‘육체적 거리’가 확 좁혀지면서부터 하게 된 생각이긴 했다. 그걸 실천에 옮기기 어려웠던 건, 퇴근 시간마다 무섭게 날아오는 이연우의 ‘태호 형, 어디예요?’ 때문이었다.

목덜미와 이연우의 입술이 닿으면서 나는 소리가 컸다.

태호는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긴장한 몸으로 허벅지를 들썩였다. 그 작은 반응 하나하나를 모조리 머리에 새기고 있는 이연우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이연우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퇴근하고 오는 전화는 안 받아요. 급하면 다른 휴대폰으로 하겠죠.”

“그래도…… 읏, 잠깐만. 받아야지. 누님이신걸.”

임태호는 벌겋게 된 얼굴로도 부득부득 연인의 무릎에서 몸을 움직여 저만치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이연우의 업무용 휴대폰이었다. 언제나 다정다감한 임태호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다소 엄격해진다.

그걸 잘 아는 이연우는 결국 작게 어깨를 으쓱하며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의 가내 데이트는 종료 휘슬이 울린 듯했다.

임태호는 전화에 짤막하게 대답하며 풀어 둔 넥타이를 다시 챙겨 매는 이연우를 보면서 열이 오른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연우와 사귄 지 몇 주째.

이제 곧 한 달을 눈앞에 두고 있건만, 임태호는 아직도 제 현실이 잘 실감이 안 났다.

이연우잖아. 이연우. 근데 진짜 내가 이연우랑 방금…….

잠깐 멍하게 있던 태호가 현실로 훅 끌려 들어온 건, 그마저도 연우가 나직하게 ‘아, 진짜 가기 싫다.’하고 중얼거리며 이마에 떨어트린 입술 때문이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딱 중간 지점에 머무른 날씨가 폐까지 가득 찬 느낌이 이걸까, 임태호는 이연우가 가고 난 침대에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생각했다. 요새 태호는 이렇게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늘었다.

특히, 제 연하 연인이 떠나고 나면 유독 그렇게 됐다.

자그마한 빌라 곳곳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 났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임태호에게 충족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주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뭔가 몸이 노곤하게 늘어질 만큼 좋으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한 배덕감이 같이 삐죽 머리를 들었다.

8년을 함께한 연인은 없어졌다지만, 아직 임태호에게는 무엇보다 결정적인 비밀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태호는 아직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자신이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베타 임태호’로 살아온 탓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실 오메가이기 때문에 더더욱 엄두가 안 나는 것이기도 했다.

알파는 오메가를, 베타는 베타를 주로 만나는 건 괜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서로의 페로몬을 짚을 수 있는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취향에 가까운 향에 쉽게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 그건 머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베타가 ‘그냥 첫눈에 반했어.’라고 말하는 것과, 알파나 오메가가 ‘향 맡자마자 눈이 확 떠졌어.’라고 말하는 것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동급의 표현이다.

이연우의 주변에는 같은 오메가인데도 저절로 시선이 쭉 따라갈 정도로 근사한 사람들이 많았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애인을 소개해 준 적 없는 건 이연우 역시 별다를 바 없었지만, 8년을 알파 이연우 곁에 있었던 오메가 임태호는 베타라면 모를 작은 비밀들을 잘 안다.

차라리, 베타인 게 낫다.

그렇다면 최소한 상처는 덜 받을 거다. 혹시라도 내가 향이라고는 거의 나지 않는 오메가여서 이 관계가 끝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거라고 스스로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임태호는 이연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끝나고 혼자 남을 때마다 늘 스스로 성호를 긋는 것처럼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다디단 꿈결 같은 시간이 주는 고양감과 오랫동안 깊게 새겨진 쓰디쓴 자각은 언제나 한 발짝, 한 발짝을 걷는 것처럼 함께 따라왔다.

선배에서 연인이 된 후로 가장 결정적으로 바뀐 건 이거다.

선배 임태호는 후배 이연우와의 미래를 희미하게나마 상상하고는 했지만, 오메가, 아니 베타 임태호는 알파 이연우와의 미래를 아예 그릴 수조차 없게 됐다. 감히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울했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절대 아니다.

임태호는 그냥 지금이 마냥 분에 넘치게 좋았다.

행복했다. 기뻤다. 즐거웠다. 가끔은 회사에서 일하다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나와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들떴고, 이연우가 저를 향해 웃으며 입 맞출 때마다 저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언제나 신중하게 제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해 온 태호는 살면서 처음으로 아무런 조심스러움도, 고민도 없는 관계를 시작했다.

그건 이연우라서 가능했다.

미래는 설령 먹빛일지언정 지금은 이렇게나 반짝이는 게 소중할 뿐이다. 이연우의 페로몬을 들이켜던 임태호는, 문득 이연우가 극우성인 것마저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작은 행복조차도 없었을 터였다.

요새 태호의 일상은 꽤 많이 달라졌다. 휴대폰을 자주 깜박해서 동료가 ‘태호 씨, 휴대폰은 휴대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던 건 예전 일이다. 스팸 문자에 액정이 깜박이기만 해도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고, 괜히 봤던 메시지를 또 보고, 또 보고 하다가 하필 이연우가 새 메시지를 보냈을 때랑 겹쳐서 엄청 부끄러웠던 적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달짝지근한 연애를 하기 시작하면 꼭 그걸 말하고 싶어지고는 한다. 그건 소위 ‘티 내고 싶어진다’와도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임태호는 ‘나는 신화그룹 이연우와 사귄다!’하고 쩌렁쩌렁 말하고 다닐 정도의 담은 없는 사내였다. 그런 행동은 아마 몇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거다.

그렇지만 임태호도 사람이다. 제가 가장 동경하고, 좋아하고, 아끼던 사람과 연인이 되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있지, 나 사귀어….’하는 정도의 가벼운 토로 정도는 가끔 생각나는 법이다.

태호는 사건 발생 약 3주 차를 넘어서는 지금이 되어서야 그 용기가 겨우 났다.

게다가 운 좋게도 임태호에게는 이연우와의 관계 변화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헐.”

이건 카페 가장 구석진 곳에서 몸을 수그린 채로 만난 ‘딱 한 명’, 유현민의 첫 반응이었다.

“헐, 헐, 헐 대박. 제가 진짜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두 사람, 뭐 있다는 거 제가 옛날에 다 알았어!”

유현민은 엄청나게 작은 목소리로도 그 격렬함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한편, 태호는 저와 이연우 사이에 대체 뭐가 있었다는 걸까 생각하며 턱을 긁적였다. 유현민과 이연우가 술집에서 만났던 건 꽤 예전의 일이다. 그 시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술에 뻗은 저를 업어서 집에 데려다준 이연우가 그다음 날 한 말 때문이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연우 한 번 봤지 않아?”

“행사 때 멀~리서 본 거 빼고 그렇게 가까이서 이야기 한 건 물론 처음이었죠!”

……그런데 그게 뭐 좀 임팩트 있었나!

유현민은 임태호에게 제가 겪었던 수모 아닌 수모를 말하는 것 대신 제가 시킨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켜는 걸 택했다. 눈치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는, 이제 임태호가 그 이연우의 애인이 된 이상,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할 줄 안다.

이거 말하면 모르긴 몰라도 자긴 진짜 좆 될 거다. 영혼의 레이더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현민은 표정을 바꿔 헤헤, 웃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굴렸다.

“아니, 아무리 친한 선배여도 한밤중에 그렇게 바로 달려오는 후배가 어디 있어요? 가족이 취해서 뻗어 있다고 해도 싫겠다.”

“…으응. 연우가 착해서.”

하지만 애써 웃는 표정을 만든 유현민을 멈칫하게 한 건 뜻밖에 임태호였다.

현민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커플 바퀴벌레성 발언에 잠깐 움찔했다가, 속으로 ‘나도 꼭 다른 팀 오메가랑 소개팅!’하고 굳게 다짐하며 말을 이었다.

“근데 뭐 어떻게 연애할 시간은 있어요? 형 요새 되게 바쁘다면서요. 뭐, 특허?”

“응. 그래도 나만 일하는 거 아니니까.”

아닌 게 아니라 요 근래 임태호는 꽤 일이 많아졌다.

몇 년 동안 회사에서 바짝 매달린 프로젝트가 결실이 맺느냐, 아니면 또 미뤄지느냐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참 신기했다. 이전 같았으면 이렇게 정신없을 때 집에 들어가서 쓰러져 잘 생각만 했을 텐데, 갓 시작한 연애의 힘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그분도 되게 바쁠 텐데.”

현민이 빨대 끝을 씹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태호는 그 우물우물한 문장에도 귀가 곧바로 쫑긋해졌다.

“연우?”

“예에. 지금 뭐 있어요. 단어가 생각 안 나네. 그, 있잖아요. 나 대표입니다, 하는 거 땅땅 하는.”

“취임식?”

“오, 그거요. 이민혁 대표 정식 취임식 때문에, 요새 본사랑 호텔 앞 보도블록 간다고 하던데요.”

대체로 큰 행사의 시작은 멀쩡한 것을 교체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임태호는 얼마 전 저와 있던 이연우가 ‘이건 도저히 빠질 수가 없는 일이다.’라고 한숨을 쉬면서 저녁 식사만 겨우 같이했던 날을 떠올리며 자신이 시킨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뭐. 잘 만나고 계신가 보네.”

현민은 잠시 생각에 빠진 태호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히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덕분에 약간 민망해지려던 태호는, 문득 제 앞에 앉아 있는 현민을 새삼 다시 보게 됐다.

유현민은 어딜 봐도 잘나갈 것이 뻔한 알파 남성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서글서글하니 보기 좋은 데다가 페로몬의 분위기도 딱 그의 경쾌한 분위기에 어울린다. 유학파에, 젊은 나이에 곧바로 신화그룹에 입사한 인재이기까지 하다.

저 정도면, 그래도 나름 여러 사람을 만나 보지 않았을까?

태호의 가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최근 그를 졸졸 따라다니던 사소하지만 제법 진지한 고민까지 이르렀다.

“……있잖아, 현민아.”

“예?”

게다가 성격까지 좋다. 분명히 유현민은, 이연우를 대신해서 ‘궁금해요, Q&A’를 진행할 최적의 상대다. 하지만 태호는 제가 현민에게 이런 것까지 물어볼 정도로 가깝나, 혹시 실례가 아닐까 싶어져서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둘 현민이 아니었다.

“에에이. 왜요? 뭔데요.”

“…그, 그게.”

“예.”

“내가 알파랑 사귄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러는데.”

있긴 있었다. 오메가라는 걸 밝히자마자 깨졌지만. 태호의 말꼬리는 그 끝이 꾸물꾸물 쪼그라들었다. 한편, 눈치 빠른 유현민은 그 조심스러운 서두만으로도 대충 내용 견적을 뽑는 데 성공했다.

오호라. 연애 상담이로구먼!

현민은 빠르게 두뇌 회전을 시작했다. 이연우는 무섭다. 하지만 그룹 총수 막내아들의 연애사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거기에 임태호는 너무너무 마음에 드는 형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다.

유현민은 빨리 말하라는 듯 급하게 손짓했다.

한 마디,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단계별로 귀가 빨개지는 태호를 보는 건 정말 감질 나는 일이었다.

“…원래, 다들, 그렇게…….”

“원래? 다들? 그렇게?”

차마 큰 소리로 말할 엄두가 안 난 태호는, 현민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는 귓가에 뒤 문장을 작게 소곤대기 시작했다.

“원래 다들 그렇게 사귀자마자 자주…… 그래?”

“‘자주 그런다’는 게 뭔데요.”

평소에는 또박또박 잘만 말하던 사람이 이럴 때는 문장 구성이 영 엉성했다. 콕 집어서 상세한 묘사를 묻는 유현민의 냉혹한 요청에, 임태호는 곤란한 듯 눈을 깜박이더니 이제는 아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있잖아, 왜. 무릎에…… 앉히고, 키스하고.”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했죠?”

“……3주 좀 넘었는데.”

새빨갛게 변한 임태호의 얼굴을 보는 유현민의 입가가 씰룩였다.

사실, 현민은 찰나지만 ‘재벌3세의 광란의 섹스 파티’ 등등의 싸구려 가십 잡지의 헤드라인이 튀어나오는 것을 상상했었다. 그건 눈앞에 앉아 있는 게 저 수줍음 많은 임태호라는 걸 잠시 잊은 꿈같은 상상이었다.

아니, 스물여덟에 서른셋 아냐? 한창땐데 진짜 뽀뽀가 다야? 무릎에 좀 앉을 수도 있지 않아? 하지만 유현민은 그런 자신의 짓궂은 물음 대신 숫기 없는 형을 놀리는 쪽을 택했다.

“와. 아주 그냥 생긴 건 3년간 금욕하고 손만 잡고 다닐 것처럼 생겨 놓고! 벌써어?”

“…….”

“그, 키스라는 거, 입에만 하는 거 아니죠?”

유현민은 급하게 들이켜던 음료에 사레가 들린 태호에게 티슈를 챙겨 주며 작게 키득키득 웃었다. 물론 ‘햐. 역시 사람은 얼굴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하고 중얼거리며 임태호의 부끄러움을 더해 주는 것도 함께였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분명 그 살벌한 기사님께서는 이전에 저를 만났을 때부터 임태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페로몬을 뿌리며 세상 삐딱한 태도로 자신을 대했을 것이다. 이 정도 장난은 뭐 그때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던 소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여간, 커플은 만악의 근원이라니까.

유현민은 임태호의 등을 도닥이며 생각했다.

◈◈◈

지금, 신화그룹 체인 호텔 S의 널찍한 회의실 하나는 3세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의 차지가 되어 있다. 코앞으로 다가온 신화그룹의 킹, 이민혁의 대표 취임식 때문이었다.

그룹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허구한 날 크고 작은 행사가 있는 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이정호 전 대표가 은퇴한 뒤 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공석을 채울 사람이 이민혁임을 공식 석상에서 발표한다는 건, 이전까지의 서류상 대표와는 차원이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 때문에 보좌진들은 이민혁이 행사 당일 입을 슈트의 색, 무늬, 헤어스타일과 커프스의 모양 같은 사소한 것부터 행사장의 꾸밈까지 몇 번을 다시 수정하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새롭게 신화그룹을 승계할 젊은 왕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될 거다. 이날만큼은 그 어떤 사소한 흠도 있어서는 안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벌써 몇 번을 다시 쓴 취임 수락문을 다시 읽어보는 이민혁의 사소한 표정 변화 하나에도 보좌진들의 심장은 바닥에 떨어졌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물론 그건 이연아 쪽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그녀는 좌석 배치도를 두고 한참을 씨름하면서 신경이 꽤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 되는 행사에서 사람들이 앉는 위치는 철저히 정치적인 의도를 품고 있다. 테이블 하나, 의자 한 칸만 달라져도 관계가 달라질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회의실 안은 벌써 며칠째 이렇게 종이가 움직이는 소리와 속삭이는 목소리로 가득 찬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마치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 두는 것처럼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문장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임태호 쪼물쪼물 하고 싶다…….”

“으하핫!”

진심이 덕지덕지 붙은 그 노골적인 욕망은 세상에서 가장 고아한 표정을 한 채 입을 연 나이트의 희망 사항이었다. 덕분에 3세들 중 가장 웃음이 많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비숍, 이안은 이렇게 이연우가 애인 앓이를 할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아, 진짜 미치겠다. 나 지금 그 ‘임태호’라는 분 얼굴도 모르는 데 왠지 알 것만 같아.”

완전 경직 상태로 굳어서 업무를 보던 보좌진들은 속으로 일제히 그 문장에 동의했다.

이민혁의 취임식을 함께 준비하는 이 소수 정예의 멤버들은 3세의 오른팔 격이나 다름없는 이들로, 벌써 몇 주를 이 회의실에서 취임식에 매달리는 중이다.

이 말은, 다시 표현하자면 이연우의 임태호 찬양을 몇 주째 함께 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느새 나이트의 새로운 애인의 이름이 임태호라는 것도, 외동인 서른셋이라는 것도, 대학 동문이자 8년 동안 선후배로만 지냈다는 것도, 수석 졸업했다는 것도, 생일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것도, 고등학교 때 별명이 부처님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연우가 저렇게 종종 꾹 눌렀다 터트리는 것처럼 태호에 대한 그리움을 늘어놓으며 한탄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참석자의 변동을 체크하던 이연아는 그제야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이연우에게 핀잔을 줬다.

“얘, 제발 그런 건 생각으로 해.”

물론 이안이 쿡쿡대고 웃는 소리는 덤이었다.

하지만 그런 뾰족한 문장은 별 효과가 없었다. 임태호를 어언 일주일째 코빼기도 보지 못한 이연우다. 그런 정도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생긴 것 하나만큼은 정말 금욕과 단정함의 화신처럼 생긴 이연우의 입이 음산하게 열렸다.

“지금 내가 생각으로만 하는 걸 누나가 알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아니야. 내가 잘못했네. 그냥 그거 해, 쪼물쪼물.”

남매의 대화에 이안은 이제 의자에서 삐끗할 정도로 웃음이 터져서 완전히 테이블에 머리를 숙이고 웃기 시작했다. 이제,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흐르면 꼭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온종일 뻣뻣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민혁의 웃음기 걸린 선포다.

“잠깐 쉬었다가 할까요?”

“예.”

보좌진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활짝 폈다.

요즈음, 이 회의실의 휴식 시간은 늘 이렇게 주어진다. 이연우가 애인 자랑으로 꽉 막혔던 분위기를 환기하면 이안이 됐든 이연아가 됐든 누군가가 웃음이 터지고 순식간에 긴장감이 느슨해진다. 이때야말로 보좌진들이 쉬는 것답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보좌진들은 꽤 놀랐다.

사실 그들은 이 각자 성격 강한 3세들을 제법 오랫동안 가까이서 봐 오며 나름의 대응 메뉴얼을 가지고 있었다.

3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이안은 언제나 잘 웃고 다정다감한 성격이라 불편할 게 하나 없었고, 이연아는 처음에 약간 낯을 가릴 뿐 워낙에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꽤 인기가 많았다.

또, 첫인상으로는 서릿발이 날리는 대표 이민혁은 알수록 따뜻하고 말랑한 데가 있는 상사였고, 느낌만 놓고 보면 가장 살벌한 이현은 애초에 보좌진을 귀찮아해서 오늘도 제 소속인 개발1팀 집무실에서 오지도 않은지라, 뭐 판단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각자 다른 3세 평가에서도 보좌진들이 모두 입을 모아 공통된 의견을 내는 3세가 있었다.

바로 이연우다.

보좌진들은 커피를 마시거나 창을 열어 환기하는 척하면서 이연우와 이안의 대화에 귀를 쫑긋했다.

“아, 부럽다.”

“진짜 영혼 없다. 차라리 그냥 구경하는 게 재밌다고 해.”

“하하. 뭐, 그것도 있고.”

솔직히 보좌진들은 다들 하나같이 가장 어려운 3세로 이연우를 꼽았었다.

그건 성격이 까칠하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도, 누구보다 눈에 띄는 외모에 극우성의 매력적인 페로몬을 지녀서도 아니었다. 그저…… 이연우는 말 그대로 ‘어려웠다’.

종일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모시면 알 수 있다. 그린 듯한 미소를 곧잘 짓는 저 알파는, 분명 호불호도 뚜렷하고 성격이 만만한 편도 아니다. 하지만 이연우는 가까운 보좌관 그 누구에게도 솔직한 내색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다.

이연우에게는 보좌진들 사이의 우스갯소리인 ‘차 문이 닫힌 다음에 나오는 말은 모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라는 말이 불필요했다. 화가 나는 일이 있든, 기쁜 일이 있든, 아니면 그 어떤 일이 있든 자신의 다음 일정을 확인할 뿐 절대 자신의 일정 선 이상을 꺼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그걸 지적받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한데, 그걸 마치 하나하나 새겨 기억하듯이 모두 지켜보면서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상사는 무엇보다 불편한 법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나이트라는 별명은 참 잘 어울리는 거였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약점을 노리다가 완전히 그게 드러났을 때 칼을 뽑아 드는 것도 기사라고 한다면 말이다.

“왜 아직도 숫자 1이 떠 있지?”

“바쁜가 보지.”

“맞아. 우리 태호 형은 진짜 일 열심히 해…….”

“너도 네 애인님 좀 본받지 그러니.”

담담하게 혼내는 이연아의 말에 보좌진 하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삼켰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세상에 그 대하기 힘든 ‘나이트’에게 진짜 애인이 생겼다니. 그것도 쉴 때마다 휴대폰을 붙잡고 그가 더 매달리는 연애를 한다니. 사실 보좌진들은 처음 이연우의 저 이상 행동을 보았을 때 사태 파악이 안 되어서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교환했을 정도로 놀랐었다.

한편, 몸을 쭉 펴서 스트레칭을 하던 이민혁은 묘하게 기운이 빠진 제 막냇동생의 옆으로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은근슬쩍 임태호와의 연애담을 몇 개라도 들으며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연우의 옆에 붙어 앉자마자 곧바로 약간의 위화감으로 덮어씌워졌다.

“…이연우, 잠깐만.”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휴대폰을 보는 막냇동생의 모습은 여느 때와 별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 대신 두 동생을 살뜰하게 챙겼던 민혁이다. 하루 이틀 이연우를 본 게 아니다. 민혁의 손이 곧바로 연우의 둥근 이마로 쭉 뻗어졌다.

휴대폰 액정만 뚫어져라 보던 이연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왜?”

“너 열 있는 거 아냐?”

묘했다.

이연우의 옆에 앉는 순간, 정말 묘하게 열감이 돌았다. 그래서 그냥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것인데도 열을 짚어본 거다. 민혁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열 좀 있는 것 같은데. 무리하지 마.”

“오빠, 쟤가 요새 무슨 무리를 해? 연애를 무리했음 모를까!”

저만치서 들리는 억울해 죽겠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연아였다. 그 말에 작게 키득대고 웃던 이안은, 저도 상체만 비스듬히 돌려서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어라?’ 하는 표정이 됐다.

“…진짜 있는 것 같은데.”

“그치, 형?”

“말도 안 돼! 내가 연우 쟤 대신 출장 두 개 갔어! 아파도 내가 아파야지!”

그다음에 이연우의 이마를 짚은 건, 이럴 순 없다는 표정으로 달려온 이연아였다. 덕분에 순식간에 인간 체온계들의 연구 대상이 된 이연우의 눈썹이 한쪽으로 비뚜름하게 휘었다. 솔직히 보좌진만 없었더라면 이연우는 ‘아. 하지 마, 꺼져!’ 했을 거다.

“열 하나도 없어! 오빠들은 무슨 얘 막내라고 싸고돌아.”

“그런가? 내 손이 차갑나?”

이연우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연우는 고개를 휙 돌려 가족들의 손을 피하며 ‘형이나 준비 잘하면 되는 거지.’하고 조금 심드렁하게 말하는 것으로 제 몸 상태의 진단을 마쳤다.

그때였다. 3세들이 있는 회의실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같이 얼굴이 풀렸던 보좌진 하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방문자를 확인했다.

회의실 안에 있는 이들의 시선은 모두 자연스럽게 입구로 쏠렸다.

“와, 박 이사님!”

그리고 그 부드럽게 변했던 분위기 역시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변했다.

“진짜 오랜만에 봬요. 잘 지내셨어요?”

“이안 님, 귀국하셨다고 해서 늦게나마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으악, 그거 진짜 별로예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안을 제외한 나머지 3세들의 얼굴과 자세가 정말 순식간에 다른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바뀌었다. 하지만 그 묘하게 싸늘한 시선의 끝에 있는 박영진 이사는, 그런 태도 같은 건 안색에도 없다는 듯 깍듯한 태도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였다.

모두에게 악인인 자는 세상에 없다.

이안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영진 역시 그랬다. 이정호 전 대표를 오래 모셨던 그는, 그의 아들들인 이안과 이현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온 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 두 형제를 대할 때만큼은 발톱을 세우지 않은 맹수 같은 모습을 했다.

이민혁은 그런 박영진 이사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자 마치 그 시선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박영진 이사는 그 웃는 낯으로 능청스럽게 민혁의 쪽을 향해서도 한마디 툭 던졌다.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아무래도 곧 취임식이라 그렇겠지요.”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오래 방해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잠시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이라서.”

여전히 옅은 미소를 걸고 있는 이안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운 건 그때였다.

이안은 이연아는 물론이고 이연우에게까지 한 명 한 명 인사하고는, 마지막으로 이안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는 박영진 이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살짝 찌푸리듯 웃었다. 그런 이안을 깨달은 박영진 이사는, 처음으로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이 됐다.

“왜 그러십니까?”

“박 이사님.”

“예.”

이안은 눈을 접어 웃으며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저 없을 때 쓸데없는 행동 안 하셨죠?”

활짝 웃는 얼굴로 흘러나온 말은 마치 안부를 묻듯 경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 중 그 뜻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잔뜩 긴장한 채던 보좌관들은 물론이고, 이민혁까지 잠시 무표정한 얼굴을 깨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짐짓 다정하기 짝이 없는 문장 안에 담긴 묘한 명령과 경고를 잘 알아서였다.

3세들 중 누구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이안. 그렇기에 이안에게는 비숍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전에 이 회의실의 누구보다 가장 먼저 신화그룹 3세의 이름을 가진 자다. 게다가 오메가가 드물기로 유명했던 신화 가에서 오메가로 발현해서 말 그대로 완벽한 로열로드를 걷기까지 했다.

그런 이안 그가, 박영진 이사의 눈에 담긴 적대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박영진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입을 열었다.

“……그럼요. 제가 뭘 하겠습니까?”

“하하, 네. 늘 믿고 있어요.”

이보다 완벽한 왕의 경호가 더 있을까.

이연우는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박영진 이사의 뒷모습을 보며 다리를 꼬고 앉아 옅게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박영진 저자는, 지금 완전히 한 대 맞은 기분일 것이 분명했다.

이민혁과 이안.

이 둘은 서로 다른 세력을 상징한다.

거기에서 박영진은 이안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 했던 자들의 선봉에 섰었고, 당사자인 이안의 거부로 자신의 바람을 채 이루지 못했다. 아직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텐데, 저 다정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형은 가끔 이렇게 누구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이연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묘하게 경직된 분위기의 회의실을 쭉 둘러보며 제 동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얘들아?”

“…….”

“빨리 사랑한다고 하지 않을래. 현이는 절대 안 해 줘서 이 형이 너무 외롭거든.”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말에 가장 먼저 옅은 웃음이 터진 건 이민혁이었다.

◈◈◈

실로 한참 만의 해후였다.

회의실에서 온종일 임태호 찬가를 시기마다 다른 버전으로 읊어대던 이연우는, 드디어 만난 연인을 가만히 두기에는 너무나 혈기왕성한 스물여덟 살의 알파였다. 물론 서로의 하루를 묻고 바쁜 일정을 들으며 격려해 주는 것도 연인의 중요한 의무였고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체로의 연인이 그렇듯,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달짝지근한 포옹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다음 껴안는 것이 가벼운 키스가 되고, 그 가벼운 키스는…….

이연우는 키스하며 열이 오를 때마다 어느 순간 두 손을 모두 써서 임태호의 뺨을 당기고, 말랑한 귓불부터 머리카락까지 모두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천천히 발갛게 변한 목으로, 어깨로 손가락을 움직인다.

사실 임태호는 처음에는 이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연우의 손이 어디에 가 있는지도 몰랐다. 잠시 숨을 고를 때마다 그 손이 서서히 내려간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특히 오늘처럼 오랜만에 만나 평소보다 급한 느낌으로 저에게 매달리는 이연우가 눈앞에 있다면, 더욱 그랬다. 태호는 노골적으로 달콤한 기운이 섞인 이연우의 페로몬에 뒷목에 소름마저 돋았다. 아무리 알파와 이런 경험이 없는 태호라지만, 이게 저를 향한 흥분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어느새 러그가 깔린 바닥에 자연스럽게 눕혀진 임태호는 머릿속으로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를 반복하면서도 배 속 깊은 곳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키스는 괜…찮아. 그래. 맞아. 태호는 심장이 마구 쿵쾅대고 뛰는 저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런 자기 암시는 곱게 있던 임태호의 셔츠가 천천히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완전히 깨졌다. 결국 임태호는 나른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알파를 향해 처음으로 급한 목소리를 냈다.

“여, 연우야!”

“……네에.”

“너무 빠른 것 같아.”

“뭐가요?”

나직하게 대답하던 목소리가 한숨과 흥분으로 살짝 쉬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탓일까.

태호는 ‘진도가!’라는 솔직한 말을 얼른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그 문맥을 눈치채지 못할 이연우가 아니었다. 모르는 척 되묻기는 했지만 저렇게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너무 빠른 것 같아!’하면 누구라도 그 뜻을 유추할 수 있을 거다.

내심 그 당황한 얼굴을 보며 몇 초나마 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물론 그건 ‘아. 나도 모르게 손이 내려갔네.’ 정도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하기는 했다. 제 연인이 된 남자가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보수적이고 조심스러운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자. 참자. 참자.

이연우는 속으로, 말 그대로 참을 인을 새기며 제가 눕혔던 임태호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안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형.”

세상에, 이렇게 폭 안기는 감촉이라니, 이연우는 이때마다 몇 번을 했는지 모를 지난 시간을 다시 후회한다. 이걸 모르고 살았다니,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씨발!’ 말고는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옆에 붙어 앉는 건 괜찮아요?”

“……괜찮아.”

“이렇게 형 안는 것도?”

사실 이연우는 키스보다 이렇게 태호를 가만히 안고 있는 걸 더 좋아했다. 부끄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도 제 품에 얌전히 있는 임태호를 보는 것도 좋았고, 팔에 닿는 말랑말랑한 감촉도 좋았고, 고개를 숙이다가 가끔 운 좋게 스치는 흐린 향도 좋았다. 뻔히 답을 알면서 물어본 질문이었건만 태호는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 졸귀씹귀다.

이연우는 짐짓 느긋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른 상스러운 표현을 떠올리며 내적 행복에 허우적댔다. 하지만 사실 그 생각은 이연우만 한 게 아니다.

“형한테 뽀뽀는?”

임태호는 이어지는 이연우의 질문에 살면서 처음으로 ‘아, 이래서 연하랑 사귀는 거구나.’하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다. 숨이 간지럽게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묻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자, 이연우는 사르르 눈을 휘며 입술을 부딪쳤다.

마치 새가 가볍게 부리를 가져다 대는 것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태호는 그 입맞춤을 잠시 멍하게 마냥 받고만 있다가, 문득 떠오른 문장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건 한참 전부터 생각했지만 차마 상황이 부끄러워 내놓지 못했던 물음이었다.

“…연우야, 그런데.”

“네.”

“너 평소보다 좀 열이 있는 것 같아.”

처음에는 이민혁, 두 번째는 이안, 그리고 세 번째는 연인인 임태호까지 며칠 동안 참 자주 듣는 말이었다. 이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태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열 따위 없으니 일이나 하라며 제 누나가 길길이 날뛰던 것이 생생해서였다.

이연우의 흐린 미소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임태호는 ‘잠깐만. 감기 기운일 수도 있으니까, 차라도 한 잔 끓여줄게.’하며 연인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연우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먼저였다.

“태호 형.”

“응?”

“방금 그 말 진짜 야했어요.”

사실 임태호는 이연우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장난기 가득한 문장을 듣고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멀뚱멀뚱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던 것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닌 터라, 임태호는 제법 몇 박자 뒤에 그 다정한 목소리 뒤에 깔린 음란한 상상을 읽어냈다.

덕분에 이연우는 거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임태호한테 한 대 맞았다. 사실 처음 맞았을 때는 태호를 뒤에서 놀라게 했다가 한 대 맞았던 거라, 엄연히 따지고 보면 처음 맞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 아프지도 않은 통통 튀는 솜주먹에 기죽을 사내가 아니었다.

“저 오늘 자고 갈까요?”

“……안 돼.”

이민혁의 대표 취임식은, 내일로 성큼 다가왔다.

◈◈◈

어떻게 보면 이연우는 신화그룹 3세들 중 가장 보수적인 편이다.

물론 그건 성격적인 면을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이건 성향이나 취향의 영역에 더 가깝다.

그는 토스카니니의 엄격한 레코딩을 아끼고, 쉴 때마다 가장 먼저 오페라 감상을 떠올릴 정도로 퍽 고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이연우는 새로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 자신의 범주 안에 무엇인가를 들여놓는 것에 극히 신중하고, 그만큼 까다로운 취향을 가졌다.

보좌진들이 가장 대하기 어려운 3세로 이연우를 꼽는 것 역시 이런 면이 크게 일조했을 거다. 그래서일까. 이연우의 생활은 별다른 예외나 그 자신의 계획을 벗어나는 일 없이 대체로 일정하고 단조로웠다.

그는 회사의 일을 하면서도 한 주의 일정한 요일, 일정한 시간마다 언제나 정재계 전문가들의 코치를 받았고, 또 그만큼 변함없이 운동하고 최대한 잘 정해진 식단을 주로 먹었다.

잘 조율된 생활 반경과 언제나 그 자신이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매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연우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걸 선호했다. 그 자신의 상태를 언제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건 때로는 오만하게 보일 만큼 여유로울 수 있던 것의 바탕이 됐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이연우의 그런 일상에는 평소와는 다른 변화가 생겼다.

“이연우.”

“…….”

“이연우?”

이연우의 누나, 이연아는 왠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제 동생을 연거푸 불렀다. 이연우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어.”

“무슨 정신을 놓고 있어? 긴장해.”

살짝은 힘주어 하는 말에, 연우가 ‘알아.’ 하고 작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평소의 이연우와는 꽤 달라서, 이연아는 살짝 갸웃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최근 이연우가 그답지 않았던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연우도 진짜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면 달라진다는 걸, 서른 해 살면서 처음 알게 된 그녀다.

그래서 이연아는 동생의 묘한 상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사실 그런 작은 것에 하나하나 신경 쓰기에는 그녀 역시도 너무 바빴다. 아니, 이연아뿐만이 아니라 3세들 모두가 마지막 점검으로 정신없는 상태였다. 연아는 물론이고 대표 취임식을 앞둔 이민혁의 곁에도 수행원들 몇 명이 붙어서 그의 스타일 하나하나를 모두 점검해 주고 있었고, 막판에 급하게 변동된 참석자 명단까지 줄줄 읊느라 더욱 바쁜 상황이었다.

“와, 오늘 다 엄청난데?”

훅 끼치는 긴장감을 순식간에 완화하는 부드럽고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안이었다. 그는 제 사촌 동생들, 정확히는 이민혁을 응원하기 위해 일찌감치 연회장의 대기실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이안의 그런 다정한 칭찬은 곧바로 이어진 뾰족한 말에 묻히고 말았다.

얼굴에 미소를 짓고 반기려던 이연아의 눈에 먼저 적발된 뒤따르는 방문자, 이현 때문이었다.

“현이 오빠. 오빠 머리, 그거 혼자 대충 하고 온 거지!”

“굳이 대충은…….”

“실장님, 여기 헤어 좀 봐 주세요. 아, 좀 신경 쓰라니깐, 오빠.”

변명을 다 하기도 전에 질질 끌려가서 강제로 다시 헤어 세팅을 받는 이현의 얼굴이 심드렁해졌다. 이안은 제 연년생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세상만사 귀찮은 삐딱함에 작게 웃으며 민혁과 가볍게 눈인사했다.

솔직히 오늘 이안, 그는 좀 홀가분했다.

차일피일 온갖 핑계와 사정으로 미뤄지던 이민혁의 대표 취임식이다. 이안은 어쩌면 이민혁보다 이날을 더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참 많은 사람들이 이안을 이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었다.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곁에서 보던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건, 이안에게는 참 힘든 일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던 대표직이고, 관심도 없었던 후계다.

이안은 막중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이타적이고 그룹의 이름을 그 자신보다 더 위에 두는 이민혁과, 그룹의 이름 위에 서서 그 위치에 충실한 것, 딱 거기까지만 하려는 이안. 어쩌면 이것이 둘의 가장 큰 차이였다.

‘오늘만 지나면 한풀 꺾이겠지.’

이안은 속으로 그 자신을 다독이며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몇 명씩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짧은 회의를 하는 둥 정신없는 모습이 차라리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있자니 얼마 안 가 곧바로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누군가가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모습을 한 이연우였다.

와. 역시 옷걸이가 되면 뭘 해도 끝내 주네. 제 동생이기는 하지만 이안은 조금 순수하게 감탄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몸에 딱 맞는 슈트와 전문가의 손을 거친 한 올 헝클어짐 없이 세팅된 머리, 정돈된 얼굴까지, 오늘의 이연우는 정말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이안은 손이 비는 사람들끼리 잡담이나 하고 있을 요량으로 멍하게 앉아 있는 이연우의 뒤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약간의 장난기가 동한 탓이었다.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고 이연우의 뒤로 다가간 이안은, 흔히 하는 장난을 하려고 했다.

정말 그게 다였다.

우당탕, 하며 의자가 나뒹굴고 그 앞의 테이블에 있는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는 상황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 엄청난 소리에 놀란 3세들과 고용인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으로 쏠렸다.

“……와, 오랜만에 낙법 했어. 아직도 되긴 하네.”

이안은 테이블에 완전히 내던져져 제압당한 채로도 묘하게 느긋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그렇게 여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민혁은 놀라 대번에 달려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안이 형,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응. 멀쩡해. 아, 이거 좀 부끄럽네.”

사실 테이블에 부딪힌 팔에 멍 정도는 들 것 같았지만, 이안은 굳이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고 멋쩍게 웃었다. 저를 들어다 메다꽂은 사람의 표정 때문이었다. 이연우는 제가 한 행동에 그 스스로가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이연우, 너는 무슨 애가! 너 오늘 왜 그래, 정말?”

“아냐, 아냐. 연아야. 내가 놀리려다 그런 건데.”

얼마나 놀랐는지 순식간에 확 핏기가 가신 이연아는 그 어떤 말문도 못 떼고 서 있는 이연우의 팔을 붙잡아 돌려 똑바로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손끝이 닿기도 전에 조금은 매서울 정도로 세게 내쳐졌다. 그건 손목이 따끔할 정도의 거친 행동이라, 이연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이 터졌다.

대기실 안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너무 놀라고 황당하면 오히려 할 말을 잃게 된다는 것처럼, 3세들은 물론이고 고용인들마저 엉망이 된 바닥을 정리할 생각조차 못 하고 적막에 빠졌다.

순간이나마 모두가 행동을 멈춘 채 이 모든 소란의 주인공인 이연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라고 책망하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다. 그 당사자인 이연우가 자신의 누나를 밀쳐낸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가장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상태였으니까.

“……미안.”

“…….”

“미안. ……실수, 였어.”

이연우에게서 정말로, ‘정말로’ 그답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겨우겨우 누르고 있었다는 듯 엉망으로 일렁이는 페로몬이 순식간에 마개가 열린 것처럼 몰아쳤다가, 이연우가 살짝 주먹을 움켜쥐며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야 겨우 정돈되어 사그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 휘몰아치는 열감은 언제라도 깨질 유리잔에 담긴 불덩이처럼 희미하게 끈적였다.

……그 의미는 하나다.

“이연아, 의사 불러.”

이민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제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이연우의 이상 상태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연아는 작게 욕을 삼키며 급하게 대기실 옆으로 연결된 복도로 뛰어갔다. 하이힐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러트.

그것도, 극우성 알파의 러트가 시작됐다.

◈◈◈

이연우는 언제나 러트를 의도적으로 조정하는 쪽이었다.

그룹의 일이 있거나 바쁠 때는 러트를 억제하는 약을 그 후유증을 겪는 날까지 계산해서 챙겨 먹었고, 그 자신이 원할 때만 의도적으로 파트너를 가지고 러트를 즐겼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원래 주기에서 한참을 동떨어진 채로 시작되는 러트는, 그가 알파로 발현한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막을 수 있는 약 없습니까?”

“극우성은 최소한 일주일 전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하물며 이미 시작됐을 때는……. 원래 주기가 어떻게 되십니까?”

“못해도 두 달 뒤.”

약간은 날카롭게 변한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이연아의 시선이 슬쩍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이 회장으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연아 그녀는 물론이고 오늘의 주인공인 이민혁까지 모두 다 대기실에 묶여 있었다. 그나마 먼저 자리를 뜬 이현과 이안이 적당히 사람들과 인사하며 시간을 벌어주고 있겠지만, 그것도 오래는 못 갈 거다.

“요새 페로몬을 열어 두신다거나 하신 적 있습니까?”

극우성은 발현과 동시에 의무적으로 페로몬 컨트롤부터 배운다.

때문에, 억지로 페로몬을 열어 둔다거나 하는 일은 병원에서 뭔가 체크한다거나 하지 않는 한 있기 드문 일이다. 하지만 병원에도 가지 않았던 이연우는 요 근래 의사가 물은 행동을 참 자주 했었다.

임태호가 제 향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마킹을 하려는 의도도 조금은 있었다. 이연우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한숨 섞인 욕설은 그걸 증명한다.

의사 쪽으로 몸을 돌린 채라 뒷모습만 보이는 이연우였지만, 그 뒷목이 붉게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민혁은 그제야 문득 얼마 전 회의실에서 그가 동생의 열감을 눈치챘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게 전조였을 텐데.

워낙에 이런 쪽엔 평소에 완벽하게 준비하는 막냇동생이라, 설마 러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민혁은 작게 머리를 짚었다가 애써 목소리 톤을 올리며 말했다.

“연우 너는, 그냥 오늘은 빠지자. 이 상태로 어떻게 있으려고.”

“말이 돼? 그러잖아도 트집 잡으려고 안달 난 인간들만 오는 날인데.”

“그래도-.”

살짝 붉게 변한 이연우의 시선은 아주 잠시나마 이현에게 머물렀다가, 곧바로 제 누나인 이연아를 향했다.

“누나가 좀 고생해.”

미리 복용하는 약을 제외하고 알파의 러트를 잠시나마 느리게 할 방법은 하나다.

바로 같은 알파의 페로몬을 가까이서 열어 부딪히는 것이다.

덕분에 취임식 내내 팔자에도 없는 공작새 짓을 하는 게 확정된 이연아는 진심을 담아 단어 하나하나 힘주어 경고했다.

“……넌 진짜 끝나면 죽을 줄 알렴.”

“쓸데없는 말 하는 거 좀 줄이고. 그러면 행사 끝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민혁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입이 살아 있는 막내를 칭찬해야 하는지, 아니면 따끔하게 혼내야 하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은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급한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예정된 취임식 시작 시각이었다. 사실, 호스트가 들어가는 것치고는 이것도 늦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무엇도 왕과 그를 지키는 두 사람의 편이 아닌 듯했다.

회장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길목에 먼저 서 있는 사람의 존재를 보는 순간, 이민혁과 이연아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디서 말이 샜을까.’

“이연우 ‘팀장’님.”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중년 사내의 입가에는 주름진 미소가 깊게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기다리는 거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연아는 순간,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곁에서 매무새를 정돈해 주던 고용인 몇의 얼굴을 되짚었다. 사방에 저자의 거미줄이 있다. 그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그들을 붙잡아 두는 것을 잊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안도, 이현도 곁에 없는 상태에서 러트가 온 이연우라니. 이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은 없었을 거다.

“설마 그 상태로 들어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박 이사님.”

이민혁은 저도 모르게 초조한 한숨이 섞인 채로 박영진 이사를 불렀다. 하지만 박영진은 그런 이민혁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면서 천천히 이연우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나 따르는 형님 얼굴에 먹칠하려는 것도 아니고.”

“…….”

“이런 기본적인 자기관리조차 안 되는 사람이 우리 그룹의 미래라…….”

박영진 이사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제가 겪었던 모욕을 잘 기억하는 사내다.

저를 따르는 임원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 자리에서 저 새파란 알파 녀석에게 조롱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로 열이 뻗었다. 그 순간에 이현, 그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는 베타 녀석이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참 즐거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연우가 러트가 왔다고 했다. 그래서 급히 의사니 뭐니 하는 자들을 불렀지만, 극우성인 터라 아마 큰 뾰족한 수가 없으리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즐거울 데가 없었다. 그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당혹과 수치로 물들어 쩔쩔매는 것을 꼭 봐야지 제 지난 모욕이 보상될 터였다.

……게다가, 이연우가 없다면 오늘 취임식의 흐름을 슬쩍 제 쪽으로 몰아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거다. 박영진은 저보다 시선이 조금 높은 극우성 알파의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연아의 향에 가려 있기는 하지만 저 무표정한 얼굴을 보아 겨우 참아 누르고 있는 것일 게 분명했다.

“참 부끄럽습니다. 오늘 취임식에 참석하시는 건, 안 될 일이지요.”

박영진 이사는 이연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이민혁도, 이연아도 끼어들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실 박영진의 말 자체는 틀린 게 없다. 극우성쯤이나 되는 알파의 러트 관리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게 하필 이민혁의 취임식 날 터졌다고 하는 건, 깐깐한 사람들에게는 변명조차 안 될 것이다.

박영진 이사는 이연우의 얼굴에 수치가 떠오르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 자존심 센 극우성 알파의 귀가 벌겋게 변해서, 제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대는 바보 같은 때를 기대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박영진의 얼굴에는 통쾌함 대신 묘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의 예상을 엇나간 반응 때문이었다.

사실 순간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된 건, 박영진뿐만이 아니었다. 이연우의 가족인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이트, 이연우. 그의 얼굴에 손꼽히도록 홀리듯 고아한 미소가 걸렸기 때문이다.

그 여유로운 얼굴에 울컥 불쾌해진 박영진 이사는, 지금이 그렇게 한가로운 얼굴을 할 때냐며 호통 치려고 했다. 하지만 박영진은 이번에도 그가 원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이연우!”

당혹이 가득 어린 목소리는 이민혁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제 형의 목소리에도 그가 멋대로 시작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박영진은 팔이 저릴 정도로 저를 세게 붙잡은 악력에 질려 엉겁결에 이연우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연우가 향한 곳은 복도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작은 비상구였다. 어두컴컴한 그 좁은 곳 안에서 있는 빛이라고는 희미하게 밝혀진 비상등뿐이었다.

잠긴 문 너머로 급하게 변한 이민혁과 이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쾅,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컸다. 박영진 이사는 저를 내려다보는 이연우가 저보다 한 뼘은 더 넘게 컸다는 것을, 이렇게 좁은 공간에 나란히 들어선 뒤에야 처음 알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나직하게 쉰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뭐, 그렇게 나랑 섹스하고 싶어?”

잠시 말문이 막혀 있던 박영진 이사는, 사실 그 말을 처음 듣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 뭐라고?”

“뒷구멍이 쑤셔도 참으셔야지. 그래 뭐. 내가 연상 취향이긴 한데 말이야.”

킬킬거리며 낮게 웃는 소리는 그린 듯이 고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박영진은 그제야 이연우가 저에게 한 말이 뇌리에 확 박혔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전혀 꼴리질 않네.”

“무슨 짓, 뭘 하려는 거야! 놔! 놓으라고!”

박영진은 저를 가까이서 붙잡고 웃는 이연우를 밀쳐내려고 했다. 취향이 질이 나쁘기는 했지만, 박영진 그 역시 이연우와 마찬가지인 알파였다. 때문에 그는 이연우가 하려는 것이 뭔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마운팅이다.

러트를 맞은 극우성 알파는 그 어떤 때보다 진한 페로몬을 흘린다. 그걸 이렇게 좁은 공간 안에서 정면으로 받는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거다. 같은 알파의 페로몬을 뒤집어쓴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속이 끓어 올랐다.

하지만 이연우는 저와 체격 면으로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중년 사내를 가볍게 제압하고는 귓가에 대고 웃었다.

“덕분에 서려던 것도 죽겠어. 하하, 도우러 온 거면 성공하셨네요. 박 이사님.”

“…너, 이연우, 너! 이 새끼!”

“설마 박히고 싶어서 그렇게 된 건가요?”

단단하게 솟아오른 박영진의 사타구니를 보며 이연우가 작게 웃었다.

성인 남성의 발기는 꼭 좋은 의미의 흥분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지금처럼 같은 알파의 페로몬에 거세게 반항하다 보면 저절로 반응하기도 한다. 그걸 모르는 이연우가 아니다. 하지만 이연우는 박영진 이사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걸 보며 마지막으로 곱게 눈을 휘어 웃어 주었다.

“누가 보면 나랑 뒹굴다 온 줄 알겠어요. 좆같으니까 그 꼴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고. 응?”

이번에도, 또 지금도 나이트는 박영진의 말을 흉내 내며 마지막 검을 내리꽂았다.

잘 고정된 넥타이에 주름 하나 가지 않았고, 셔츠의 단추 하나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같은 알파로서 완전히 지배당했다. 진득한 러트 페로몬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박영진은 핏대까지 선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이연우를 노려보았다.

이연우는 그런 박영진을 놓아 주며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그 탓에 문을 발로 차려고 했던 이민혁이 살짝 비틀거릴 뻔했다.

“이연우, 너 지금 뭐 했어?”

“저딴 거에 하길 뭘. 아. 그래도 안 여는 게 좋을걸.”

혀끝까지 열이 오른 것 같은 감각이 영 달갑지 않았다. 기사는 당혹이 가득한 얼굴을 한 자신의 왕을 흘끗 보면서 작게 심호흡하더니,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형만, 완벽하게 해.”

◈◈◈

연우는 오늘 잘하고 있을까. 지금쯤이면 행사는 끝났을까.

임태호는 종일 바쁜 와중에도 종종 휴대폰을 보면서 제 연하 연인을 떠올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단 한 번의 메시지도 없는 것이 제법 신경 쓰였다.

“임 대리님, 이거 확인 좀 해 주시겠어요?”

“네? 네. 주세요.”

요새 임태호의 회사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큰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 때문이었다. 별다른 야근이 없는 회사였지만, 요즘 들어 회사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일도 많아졌다. 종일 이연우의 연락을 기다리는 오늘 같은 날조차도 야근 무리에 함께 남아야 할 정도로.

“……어!”

그런데 그 때, 정말로 듣기 힘든 임태호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사무실의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휙 ‘임 대리’를 향했다. 하지만 태호는 제 동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는지 모르고, 부재중 전화 표시만 덩그러니 떠 있는 제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이연우]

종일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태호는 잠시 다른 동료의 자리에 가 있다가 전화를 놓쳤다.

……듣고 싶었는데. 연우 목소리. 지금 전화하면 바쁠까?

요즈음 저 순하디순한 임 대리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던 몇몇 눈치 빠른 사람들은, 임태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진 것을 금방 짚어내었다. 연인은 닮는다고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 태호는 연애를 감추는 것에 큰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태호가 약간 시무룩하게 미련이 남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순간, 까맣게 변했던 액정이 다시 밝게 반짝였다. ‘이연우’. 임태호는 반색하며 얼른 전화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반가운 연락은, 이번에는 받기도 전에 급하게 뚝 끊어졌다.

우울한 표정이 됐다가, 다시 확 밝아졌다가, 다시 축 처지는 태호의 표정은 거울처럼 선명했다. 게다가, 지금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동료들은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살금살금 탕비실로 향하는 태호의 발걸음을 모조리 보았다. 정말 임태호 혼자 은밀한 이동이었다.

태호는 탕비실 가장 구석진 곳에서 제 연인을 향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이연우는 방금 전화를 끊었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꽤 늦게 전화를 받았다.

-아, 태호 형.

“…응! 전화했길래.”

임태호는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그건 들뜬 느낌이 나지 않게 하려고 꽤 애쓴 것이기도 했다. 왠지 하루 종일 전화를 기다린 티를 내는 게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연우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태호는 이때까지만 해도 연우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었다.

-……실수로 걸었나 봐요. 일하는 데 방해했네요.

“오늘 큰 행사는 잘 끝났어?”

-네. 그럼요. 어차피 제 일이라고 하기도 뭐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임태호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 중 하나는, 타인의 말을 귀 기울여서 신중히 들어준다는 것이다. 태호는 누군가는 쓸데없는 주제라고 혀를 찰 내용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한참을 고민한 대답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그런데 그런 임태호가 8년을 넘게 같이한 이연우다.

아주 작은 변화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태호는 살짝 긴가민가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연우의 목소리나 억양은 얼핏 들으면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뭔가 조금 낯선 느낌이었다.

“연우야?”

-……후우. 네.

일부러 임태호는 뜸을 들였다. 휴대폰 너머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 있어?”

-괜찮아요. 아니, 미안해요.

“뭐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설렘으로 콩콩 뛰었던 마음에 갑자기 확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이렇게 작은 행동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형, 정말로 전화는,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건 거예요.

평소 같았다면 느긋한 목소리로 그의 하루를 노래하듯 말했을 이연우다. 하지만 지금은 좀 이상했다. 묘하게 횡설수설하는 목소리는 중간중간 씹히는 것처럼 끊어져 들렸다. 아침에 이제 준비하고 있다는 짤막한 메시지를 받은 이후로 온종일 기다렸던 전화다.

그런 연락이 이렇다면, 걱정하지 않을 연인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연우는 자세한 설명 대신 조금은 급한 목소리로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을 듯 굴었다.

-형, 미안해요. 끊을게요.

“이연우, 끊지 마.”

다행스럽게도 뚝 끊긴 신호음 대신 낮고 길게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임태호의 동료들은 일하면서도 닫힌 지 한참이 지나도록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탕비실 문을 향해 흘끗흘끗 시선을 주었다. 피곤한 야근 시간에는 이런 별거 아닌 화젯거리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임태호는 못해도 10분은 더 지난 후에야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휴대폰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이었기는 했지만,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통 곧바로 자리에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을 임 대리는 오늘 영 평소 같지 않았다.

“부장님.”

“으응?”

이렇게, 부장에게 곧바로 발을 옮겨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것만 봐도 그랬다. 사람들은 괜히 헛기침하면서도 태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일찍 들어가 봐도 될까요?”

“뭐어? 안 돼. 오늘은 어쩔 수 없다는 거 자네도…….”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임태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끊었다. 그것도 무려, 상사의 말을 끊었다. 임태호를 오랫동안 봐 온 누군가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실은 임태호가 입사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들 바쁜 거 너무 잘 아는데…… 일이 생겼습니다. 사실 내일도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야근에서 먼저 가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거의 일방적인 월차 선포였다.

아무리 법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 분위기에서는 제아무리 간 큰 사람이라고 해도 꺼내기 힘든 말을, 무려 저 임 대리가 했다.

당연히 부장은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이제껏 직원 중 가장 얌전하고 말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첫손가락에 들던 태호였기 때문이다. 부장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대신하여 물었다.

“일, 뭐?”

당연하게 튀어나온 물음이었지만, 이제껏 작은 목소리로도 제 할 말을 다 하던 임태호의 입이 순간적으로 꾹 다물렸다. 무언가를 다짐하는 얼굴이라는 건 딱 저런 게 아닐까. 태호와 친한 동료 하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애인이.”

임태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애인이, 러트여서요.”

“…….”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나 말갛던 눈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덕분에 부장은 저도 모르게 얼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어찌나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가 재킷과 가방만 들고 휙 사무실을 빠져나가는지, 부장은 뒤늦게 떠오른 물음을 태호에게 채 묻지도 못했다.

“임 대리가 만나는 사람, 오메가 아니었나?”

사실 임태호는 회사를 허겁지겁 빠져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연우 어떡해!’

정말 이 생각 하나가 슬쩍 지나가는 농담 어린 음담패설에도 귀를 벌겋게 물들이는 순해 빠진 임 대리를 움직이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애인이 러트라서 내일도 휴가를 내겠다는, 그 의미가 분명한 말까지 내뱉게 만들었으니, 그 원동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다.

후배에서 동생으로, 동생에서 연인이 된 알파가 러트가 왔다고 한다.

그것도,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정말 미안해요. 러트라서…… 저도 모르게 걸었나 봐요.’라고 하는데 심장이 내려앉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다. 결국, 임태호는 이연우를 알게 된 이래 처음으로 ‘너 어디야! 당장 말해!’하고 소리쳤고, 이연우는 찔끔해서 곧바로 자신이 있는 곳을 실토했다.

그 엄청난 걱정에 밀려났던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온 건, 회사 건물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찍었을 때였다.

[호텔 S]

무작정 ‘가야지!’하고 마음먹기는 했는데, 활자로 또박또박 적힌 세 글자를 보니 잠시나마 순간 멍해졌다.

임태호가 회사를 곧바로 빠져나온 건 대단한 용기를 내야겠다는 생각도, 소위 말하는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제가 받기도 전에 끊었을 정도로 열에 들뜬 채로 연락했으면서 갑자기 찾아온 러트를 감추려는 이연우만이 머리에 가득 차서 곧바로 뛰쳐나왔을 뿐이다.

결국 차의 시동을 걸어둔 채 고민하던 태호가 먼저 향한 건, 내비게이션이 말하는 경로가 아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상냥한 미소를 건 채인 중년 약사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호기롭게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정작 쉽사리 말문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손님은 오랜 약사 생활을 한 그녀에게도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임태호는 다시 한 번 작게 심호흡한 뒤에야 조금 전 회사에서 하고 나온 말을 겨우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 애인이, 러트가 왔는데요.”

약사는 태호의 얼굴이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벌겋게 변하는 걸 보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

“뭘, 가져가야 할까요?”

“잠시만요. 챙겨 드릴게요.”

“네, 네에.”

태호는 마침 약국에 손님이 저 혼자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왠지 너무너무 부끄러웠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무언가들’을 챙기기 시작하던 약사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혹시 애인분이 우성이라거나 하나요?”

“……네. 극우성인데요.”

입 밖으로 자신의 연인이 극우성 알파라고 떠드는 건 정말 귓가까지 화끈해질 정도로 열이 오르는 일이었다. 빨갛게 익은 채로 공연히 주위를 둘러보며 그답지 않게 부산스럽게 있던 임태호는, 약국 구석에 있는 정수기를 발견했다. 그건 초조함과 부끄러움, 걱정이 동시에 마구 교차하는 지금 같은 때 가장 필요한 거였다.

비치된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시면서도 혹시 몰라 휴대폰을 중간중간 확인하자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약사가 양손에 작은 상자를 든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은 건 그때였다.

“이쪽 것이 좀 더 비싸기는 하지만 노팅용 콘돔인데요.”

참 친절하고 상냥한 추천이었다.

하지만 임태호는 정말 그 순간 물을 뿜을 뻔한 걸 겨우 도로 삼키고 사레가 들어 한참을 콜록거렸다. 그가 살며 단 한 번도 직접 들을 일 없었던 단어 때문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아뇨, …아닙니다.”

“극우성에, 러트까지 온 알파라고 하셔서. 이건 일반형이고요. 뭘로 드릴까요?”

사실 이연우에 대한 걱정이 너무 앞서서 현실 자각이 좀 부족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임태호는 약사가 들고 있는 양손의 작은 상자를 번갈아 보다가 어느 한쪽을 손짓으로 겨우 선택했다.

그 뒤는, 솔직히 기억이 좀 희미하다.

새삼스럽게 지금 제가 이연우와 몸을 섞으러 간다는 자각이 확 들어서 운전대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호텔에 도착한 다음도 묘하게 부끄러운 상황 투성이였다. 이연우가 말한 호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통 감도 안 와서, 중앙 홀에 있는 직원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봤을 때만 해도 그랬다. 정말정말 작은 소리로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근처에 있는 직원들까지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그랬다!

이연우가 말한 예의 그 호실은, 일반 고객들이 사용하는 곳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향으로 한참을 향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태호는 그 문 앞까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의 대우를 받으며 도착했다.

“혹시라도 불편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호출해 주십시오.”

“예, 예에.”

태호는 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총총 자리를 뜨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의 객실과는 다른 눈앞의 원목 문은, 그냥 열고 들어가면 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차마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먼저 메시지부터 보내봤다.

-연우야, 나 지금 문 앞인데. 들어가도 괜찮니?

이연우는 바로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연인의 답장을 기다리며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있는 것처럼 끌어안은 서류가방을 만지작거리자, 부끄러워서 바로 들지 못한 약국 봉투가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화해 볼까? 임태호는 문 하나 사이로 이연우를 둔 채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걱정은 얼마 안 가 불필요해졌다. 절대로 먼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며 마치 급하게 끌려가듯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은 임태호는 호텔에 오는 내내 이런저런 상상을 했었다.

연우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우선 ‘괜찮은지.’ 같은, 물어봤자 별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들을 먼저 해야 하나. 아무리 억제제를 먹었다지만, 내가 오메가라는 걸 들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수많은 가정 중에도 없었던 게 있었다.

바로, 이제껏 한 번도 닿아 본 적 없던 알파의 러트 페로몬을 접했을 때의 상황이었다.

자신을 덮친 사내를 밀어내지 못하고 정신없이 몰아붙여진 채로 키스를 받기 시작한 태호는 순간적으로 정말 머리가 한 번 하얗게 변했다가, 또 그다음에는 까맣게 변했다.

머리꼭지부터 발가락 끝까지 모든 솜털이 확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익숙하기 짝이 없는 향인데.

분명히, 8년을 알고 지냈던 그 향이고 저에게 숨 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입을 맞추는 알파는 이연우가 맞는데 이상하게 완전히 그 근본이 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약간은 서늘하면서도 끝이 달짝지근했던 상쾌한 느낌의 향이, 이렇게까지 끈적이며 머리를 마비시키는 단 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실 임태호는 까딱 잘못하면 그 순간에 완전히 머리 한구석에 남은 이성을 잃고 제 연인에게 휩쓸려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연우가 급하게 혀를 섞어 매달리면서 입술을 따끔하게 깨무는 순간 희미하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연우야, …하아, 잠시만. 연우, 야. 이연우.”

“……응?”

“너, 완전히 얼음장이야. 잠깐만 정신 차려 봐, 연우야.”

사실 임태호의 표현은 정확하지는 않았다.

묘하게 손에 엉겨드는 이연우는, 얼마나 차가운 물을 끼얹어 맞고 있었는지 처음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지만 머지않아 닿는 곳마다 뜨끈한 열이 짚어졌다. 언제나 임태호의 앞에서만큼은 완벽하리만치 정돈된 모습만 보였던 이연우다. 막 자고 일어나서도 머리가 살짝 부스스한 것만 빼면 목소리조차도 갈라짐 없이 근사했었다.

하지만 지금, 겨우겨우 입술을 떼고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태호를 눈에 담는 남자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슬쩍 보이는 객실 바닥에는 슈트 재킷과 넥타이가 굴러다니고, 이연우 그 자신 역시 구겨진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로 완전히 물에 쫄딱 젖은 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꿈인 줄 알았어요…….”

“꿈 아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진짜.

임태호는 이연우의 쉰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속삭였다.

묘하게 붙지 못해 안달인 알파를 살살 달래 가며 객실 안쪽으로 이끄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중간에 무릎에서 힘이 빠질 뻔했던 것을 겨우겨우 버틴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을 붙잡으려 노력하고 있는 건 태호뿐만이 아닌 듯했다. 몇 번을 고개를 흔들고, 눈을 세게 감았다 뜨면서 고운 미간을 찌푸리던 이연우가 겨우겨우 내뱉은 문장은 그걸 증명했다.

“…오늘 야근이라면서요.”

“그, 그냥, 어떻게 잘 부탁했어.”

조금 전까지 완전히 뭔가를 놓은 사람처럼 키스하던 사람이 꺼내는 말치고는 너무나 일상적인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 뒤에 꾹꾹 참아 누른 열기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 태호는 솔직히 제가 하고 온 말 대신에 대충 둘러대는 것을 택했다.

“그냥 가도, 괜찮아요.”

이연우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바보라도 다 알 거다.

손등에 뼈가 하얗게 그려질 정도로 힘을 주어 임태호를 끌어안고 품 안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모습은 문장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얀 셔츠가 축축하게 달라붙어 단단한 근육이 그대로 그려지는 몸은, 분명히 처음 품에 안겼을 때는 마냥 차갑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뜨끈하게 변해 있었다.

태호는 왠지 속이 답답해져서 한숨 쉬듯 물었다.

“어떻게 괜찮은데?”

“뭐. 그냥. 하하, 쑥스럽게.”

“…그럼 나한테 전화는 왜 했어? 두 번이나.”

농담하듯 말하며 웃는 목소리가 잔뜩 갈라지고 쉬어 있는 것이 속상해서 조금은 뾰족하게 묻자 이연우는 처음으로 고개를 슬쩍 들어 태호를 올려다보았다.

임태호는 발갛게 변한 이연우의 눈가에 노골적으로 일렁이는 흥분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어떻게든 무시하려고 애썼던 연인의 향이 새삼 확 속을 덥게 만들면서, 허벅지 안쪽에 저절로 힘이 꽉 들어가는 것도 함께였다.

그냥 가도 괜찮다는 이연우의 말은 거짓말이 아닐 거다.

먼저 전화했지만 끝내 목소리를 듣지 않고 끊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어쩌면 이대로 정말 돌아가는 게 맞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사실, 조금 무섭다.

이렇게 열에 달뜬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파와 몸을 섞는다는 건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게다가 최악의 상황에는, ……오메가라는 걸 들킬 수도 있다.

임태호는 주먹에 한번 힘을 꽉 줬다가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사 왔어.”

주섬주섬 가방에서 꺼내는 비닐봉지 소리는 이 근사한 공간에도, 머리끝까지 바짝 긴장하게 하는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태호는 잊지 않고 한 손에 꽉 붙잡고 있던 가방 안에서 제가 사 온 것을 꺼내 이연우에게 봉지째 건네는 데에 성공했다.

연우는 그걸 받고도 곧바로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몇 초간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눈앞의 개청순섹시한 연인님께서 건네주는 물건인데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자신이 받은 것들을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행복한 시간을 위해… 러브젤]. [식물성분 함유 열상 치료제 ○○○].

그리고 그다음은 손바닥보다 작은 자그마한 상자였다.

이연우는 열기에 눈의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툭 입을 열었다.

“……노팅용?”

이연우가 봉지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씩 꺼낼 때부터 단계별로 얼굴의 붉은 기를 더해 가던 임태호는, 콕 집어서 물건을 설명하는 이연우의 말에 완전히 최종 단계형에 이르렀다.

“그건 약사 선생님이 주셔서!”

“…….”

“극우성 알파가 러트면, 그거 쓰는 게 낫다고…….”

태호는 우물우물 변명하듯 말하면서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절대로 말하지 않으려는 이연우에게 그냥 알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임태호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갓 싹트기 시작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 이연우의 유일한 선배라는 사실만으로도 하루 종일 구름 위를 떠다니듯 기뻤었다. 나만 저 멋진 사람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제껏 단 한 번도 충족되지 않았던 무언가가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의 연인이 됐다.

감히 단 한 번 바라지도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저를 향해 다정하게 속삭이고, 웃는다.

8년간 몰랐던 향을 내면서 혀를 섞어 키스하는 이연우의 모습을 볼 때마다 태호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계속 꾸물꾸물 자라났다. 임태호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의 이름을 잘 몰랐다.

평소의 그였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행동들을 할 수 있던 건, 모두 다 그 새롭게 자라난 낯선 감정 때문이었다. 임태호는 이연우가 저를 만나기 전에 어떤 근사한 향들을 달고 다녔는지 잘 안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부터 이연우에게서 완전히 그 페로몬들이 사라지고 온전히 이연우 그의 향만 남게 됐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러트로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와서 풀린 목소리로 저에게 전화를 건 이연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임태호의 그 은밀한 감정에는 하나의 이름이 붙었다. 임태호는 그렇게 스스로가 자각하지도 못한 생각에 이끌렸다. 오메가라는 것을 들키게 되는 게 두려운 만큼, 다른 한편으로는 러트가 온 이연우를 그 어떤 오메가에게도, 아니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아졌다.

누구보다 돋보이다 못해 반짝이는 저 사람의 러트는 나를 향한 거야.

이제 정말, 이연우는 내…….

언제였던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속삭였던 마음속 저쪽의 목소리가 이제는 다른 문장을 새기기 시작했다. 태호는 그제야 문득 객실 안의 모든 창문이 다 열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차갑게 하려고 한 걸까? 하지만 춥지 않은데. 잠시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은 얼마 안 가 이어진 이연우의 말에 깔끔하게 소거됐다.

“묶어요.”

임태호가 친절하게 준비된 준비물을 건넸다면, 이연우가 내민 것은 오늘 그가 온종일 했었고 이후에는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넥타이였다. 연우는 태호의 손에 제 넥타이를 쥐게 하고는, 두 손을 마치 수갑을 차듯 모았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제가 절대 못 풀도록요.”

“그래도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고개를 저으려던 태호의 말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단호하게 흘러나온 연우의 말에 뚝 잘렸다.

“러트인 알파랑 섹스해 본 적 있어요?”

“…….”

“극우성인 알파하고는?”

어느 쪽도 없다.

상기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알파에게 할 대답을 찾지 못한 임태호는 결국 머뭇거리면서도 이연우의 말을 따랐다. 나름대로 세게 묶는다고 묶는데도 이연우가 몇 번이나 다시 시키는 통에, 정말 이렇게 세게 묶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힘을 주어 끈을 당겨야 했다.

이연우는 단단하게 고정된 제 손목을 몇 번 움직여 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진짜 짜증 나네요.”

정말로 듣기 힘든 이연우의 짜증 어린 목소리여서, 태호는 조금은 철렁한 마음에 작게 ‘왜?’하고 물었다. 여전히 시선을 묶인 제 손목에 고정한 채인 연우의 대답은 약간은 한숨 섞인 채로 흘러나왔다.

“더 끝장나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형이 하고 싶다고 매달릴 때 하려고 했는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답에 임태호가 ‘그런 사람이 옷 안으로 손 넣었어?’하고 묻자, 이연우는 쓰게 웃으며 ‘그건 어쩌다 그런 거예요.’하고 변명했다.

“다음엔 다 제가 준비할게요.”

‘다음’.

이연우의 말에는 언제나 너무 당연할 정도로 함께하는 미래가 숨어 있다.

그걸 깨달은 태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됐다.

◈◈◈

손 묶자고 한 게 잘한 일 맞을까, 씨발.

이연우는 제 두 손을 꽉 깍지 끼어 잡으며 생각했다. 정확히는 임태호가 제 셔츠의 단추를 풀어 주는 순간부터 속으로 쌍욕을 삼키기 시작한 그다. 원래는 셔츠 단추 정도는 스스로 풀려고 했다. 아무리 세게 묶었다지만 그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태호는 연우가 그걸 시도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아마도 애초에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덕분에 이연우는 벌겋게 열이 오른 손을 벌벌 떨면서 제 옷을 벗기는 연인을 보는 기회를 얻었다. 체온에 미지근해진 젖은 셔츠가 벗겨지는 감각마저 모조리 자극으로 돌아오는데, 그걸 팔에 대충 걸쳐지도록 벗기는 사람이 임태호라니!

촉각은 물론 시각까지 온통 머리꼭지까지 열이 오르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이연우는 단단하게 묶인 제 두 손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묶은 탓에 채 다 벗겨지지 않은 젖은 셔츠 너머로 닿는 침대 헤드의 나무가 유독 서늘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

긴장감이 역력한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우는 그 물음 하나로 정말 가까스로 깜박, 깜박 희미하게 점멸하는 것 같은 정신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형도 셔츠 벗으세요.”

“…으, 으응.”

이연우는 제가 말하는 목소리에 속으로 옅은 헛웃음이 났다.

머릿속으로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다리를 벌리고 그 뒤를 마음대로 휘젓고 싶어 안달이 난 주제에, 용케도 멀쩡한 목소리를 내는 스스로가 황당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 자신을 탓하면서도 이연우의 시선은 끈질길 정도로 임태호의 행동 하나하나를 좇고 있었다.

태호는 저를 감상하듯 가늘게 뜬 나른한 눈으로 훑는 집요함에 눈이 시릴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 이렇게 옷을 벗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연우의 셔츠를 풀 때보다 더욱 손이 덜덜 떨려서 셔츠를 벗는 것만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창피했다. 정말정말, 많이. 군살은커녕 말랑한 부분 하나 없이 단단하게 꽉 조여진 근육으로 가득 찬 사내의 몸을 한 사람이 볼품없는 제 몸을 보고 내심 혀를 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건 참 실제와는 동떨어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제 머리 당겨 안으세요.”

손이 묶인 채로 저를 바라보는 알파가 하는 다정한 명령이었다.

태호는 은근슬쩍 팔로 제 몸을 가리면서 침대로 엉거주춤하게 올라와서, 헤드에 기대고 앉은 사내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 이연우가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아니. 그렇게 말고.”

“…….”

“올라타야죠?”

강제성은 없다.

아니, 애초에 이 행위의 시작부터 이연우는 단 한 번도 임태호에게 관계를 강제한 적 없었다. 모두 다 임태호, 그가 직접 선택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얼굴로 피가 몰렸다. 태호는 옅게 떨면서 천천히 앉아 있는 연인의 사타구니 가까이 다가갔다.

몇 번인가 이연우의 키스를 받으면서 해 본 적 있는 자세인데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임태호는 이제 아예 팔을 교차한 채로 가리고서 느리게 연인의 몸에 올라타 앉았다.

‘잘했어요.’ 낮게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직 이연우의 명령은 하나 더 남아 있다. 태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가리던 팔을 풀었다. 8년을 함께했는데도 이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체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천천히 가슴께로 더운 숨이 가까워지도록 하는 건 더욱이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었다.

“흐으읏…!”

열감이 돌지 않아 아직 부드러운 돌기를 살살 이로 깨무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실은 간지럽다는 표현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됐다. 자꾸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것 같아 부끄러운데, 그걸 참는 것마저도 잘 안 됐다. 무엇보다 임태호를 미치게 하는 건 이연우의 머리를 스스로 끌어안음으로써 이 간질간질한 감각을 제 자신이 피할 수 없도록 하는 상황이었다.

히트사이클을 겪을 때도 별 쾌감을 느끼지 못해서 한 번도 스스로 만진 적 없는 유두를 물고 빠는 감각에 태호의 하반신이 저절로 들썩였다.

입 안으로 굴리지 않는 다른 가슴을 세게 잡았다가, 자그마한 유두를 돌리고 꾹 누르며 희롱하는 건 단단히 묶여 있는 손으로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연우는 임태호의 걱정이 무색하게 완전히 눈앞이 흐릴 정도로 열이 올라 연인의 몸에 빠져들었다.

이연우는 저를 어설피 끌어안은 몸에 고개를 묻은 채로 서서히 손을 움직였다.

스스로 몇 번이고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제약을 걸어 두어 다행이었다. 만약, 손이 묶이지 않은 채였더라면 진작에 이 희미하게 떠는 몸을 어떻게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임태호와 키스하거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가끔 흐린 페로몬을 만날 때마다 종종 상상했었다.

대체 임태호는 섹스할 때 어떤 향이 될까.

지금은 이렇게 흐리고, 옅기 짝이 없는데 잔뜩 열이 올라 헐떡이게 되면, 그리고 심지어는 그게 나를 향하게 되면 어떻게 변할까. 이연우는 제 연인이 알면 얼굴을 잔뜩 물들일 음란한 생각들을 하면서 임태호가 직접 제게 손을 뻗는 날을 기대했었다.

결국 임태호는 그의 상상대로 제게 먼저 다가와 줬다. 물론 이런 날에, 이런 이유로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힉, 흐윽, 여, 연우야아, 잠깐만…….”

맞닿은 사타구니의 무게감에 마른 입술을 적시며 슬쩍 바지의 훅을 푼 뒤 속옷 위로 단단해진 성기를 쓸자 임태호가 놀란 눈을 한 채로 작게 앓았다.

“태호 형, 이 뒤로 어떻게 섹스하는 줄 알아요?”

묘한 배덕감이 일었다.

임태호가 이제껏 히트사이클을 몇 번이나 겪은 오메가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것을 모르는 척 상냥하게 속삭이는 건 어쩌면 참 못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뒷골이 뻐근하게 당길 정도로 흥분하게 만드는 거였다. 태호가 발갛게 변한 눈으로 저를 보는 게 보였다.

제 몸 위에 올라탄 사내의 뒤가 지금쯤 얼마나 젖어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이 부끄러움 많은 사람의 안으로 마음대로 쑤셔 넣고 싶어서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저는 보다시피 손이 이래서, 형이 직접 해야 해요.”

짓궂은 알파는 연인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형이 직접, 형 뒷구멍에 손을 넣어서 벌리세요.”

“…흑….”

“손가락이 서너 개쯤은 들어가야 하니까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임태호는 이연우의 말에 작게 허리를 뒤척이며 허벅지에 힘을 줬다.

연우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자유로운 손가락 끝으로 임태호의 성기를 덧그렸다. 부끄러운 단어를 일부러 고르고 골라 말하는 것에 얼굴이며 귀는 물론이고 목과 어깨, 가슴까지 붉은 물이 퍼지는 모습이 예뻤다.

마저 다 벗으세요, 하고 상냥하게 종용하자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도 바지와 속옷을 천천히 끌어내리는 모습이 묘했다. 부끄러움 많은 숫됨과 쾌락을 아는 사내의 모습이 동시에 보인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연우는 성기와 맨 엉덩이를 드러낸 채 제 위에 앉은 임태호의 모습을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눈에 담았다. 딱 1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때의 자신에게 임태호와 이런 관계가 된다고 하면, 스스로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건 임태호 쪽도 크게 다를 바는 아니었다.

자꾸 손이 떨리고 무릎에서 힘이 풀려서 바지와 속옷을 차마 다 벗지 못하고 어설프게 다리 사이에 걸어 둔 태호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연우의 표정을 보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연인을 마주 보는 것 대신에 제가 사 온 젤을 손에 펴 발라 조금은 익숙하게 자신의 뒤로 손을 움직였다.

애초에 히트사이클 때에도 느리게 흥분하고 젖는 편이다.

그래서 태호는 제 뒤가 아직은 손가락이 들어가기 힘들지 않을까, 하고 멍하게 변한 머리로도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성인 데다가 억제제까지 먹고 있는 상황에는 쉽게 애액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경험이 없는 태호도 잘 아는 거였다.

이연우는 자신의 어깨를 짚은 채로 살짝 허리를 틀어 스스로 준비를 시작하는 야한 연인을 보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보통의 베타 남성이 저렇게 별반 거부감 없이 애널섹스를 준비한다는 건 꽤 드문 일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연인은 참 야했다.

하지만 벌겋게 상기된 채이기는 했지만, 제법 익숙해 보였던 임태호의 얼굴에 묘하게 당황한 기색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태호의 작은 행동, 표정, 눈짓 하나에도 모두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연우는 그걸 어렵지 않게 읽어내었다.

……왜, 그러지?

이연우는 제 속을 간지럽히는 임태호의 향에 자꾸 흐려지는 정신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태호는 정말 어찌할 바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연우는 그 얼굴의 뜻을 곧바로 읽어내지 못해 속이 탔다.

왜 그러는 걸까? 뭐 때문에? 연우는 당혹스러운 눈을 한 태호의 얼굴부터 붉게 변한 어깨, 팔, 그리고 살짝 틀어진 음란한 허리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가 젤로 잔뜩 젖어 있는 태호의 손까지 눈이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연우는 임태호가 당황한 이유를 깨달았다. 의도치 않은 문장 역시 입 밖으로 저절로 튀어나왔다.

“돌아 버리겠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어깨를 튀며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임태호는 상상도 못 할 음탕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연우는 작게 숨을 삼켰다가 헛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가만히 있어요?”

“……그게, 그러니까.”

말할 수 없을 거다. 저 부끄러움 많은 남자는.

게다가 저에게 작은 비밀까지 가지고 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꺼낼 수 없을 터다. 이연우는 묶인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하얗고 동그란 손끝을 적시고 있는 게, 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딱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연우는 임태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인지 아니면 흥분인지 모를 것이 섞인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예쁘고 야한 형은…….”

“…….”

“손가락이 필요 없을 정도로 뒤로 먹고 싶다는 거지?”

말간 얼굴에 순식간에 홍조가 번지며 시선을 확 아래로 내리는 모습은 차라리 보기 좋은 유혹이었다. 이연우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 베타로 살았을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오메가인 것을 감췄던 사람이, 그래, 무려 저 임태호가 자신 때문에 흥분해서 뒤를 열 준비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젖은 거다.

머리가 작게 지끈거릴 정도로 울렸다.

너무 열이 오르고 흥분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이연우는 왠지 뻣뻣해진 것 같은 혀를 천천히 움직여서 그가 가장 아끼는 울림의 이름을 불렀다.

“임태호.”

대체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연우는 새까만 눈동자가 겨우 저를 마주 보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풀어.”

“……어?”

묘하게 평소와는 다른 말투였지만, 상황에 당황하고 놀란 임태호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제 앞에 다시 한 번 주어진 연인의 손을 보며 말갛게 눈을 깜박였다.

“풀어요. 당장.”

연인의 손목을 단단히 묶은 넥타이는 러트인 알파, 그것도 극우성인 알파와 섹스해 본 적 없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보호 장치였다. 분명 이연우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태호는 일순 담담하게까지 들리는 연인의 요구를 의심하지 못하고 차라리 연우의 손을 묶었던 때보다 훨씬 더 망설임 없이 그 말을 따랐다.

하지만 임태호는, 최소한의 이성을 갖추고 있었을 때의 이연우 판단을 믿어야 했다.

어쩌면 그게 정말로 태호, 그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실크 원단이 점점 느슨해질수록 눈앞의 알파가 어떤 눈이 되어 갔는지를 안다면 아마도 태호는 순순히 그 매듭을 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순간, 방금까지만 해도 임태호에게 주도권 아닌 주도권을 준 채 느긋하게 명령하던 알파는 완전히 사라졌다.

“읏, 아, 연우야, 잠깐마안, 흐, 으읏, 아, 흑……!”

못해도 평균치는 되는 체격인 임태호의 몸은 순식간에 들려서 곧바로 침대에 눕혀졌다. 태호는 젤과 애액이 뒤섞여 묘하게 끈적이는 점성이 가득한 뒤로 이제껏 내내 구속되었던 손가락이 부드럽게 밀고 들어가는 감각에 몸을 비틀며 새된 신음을 터트렸다.

“지금, 하아, 형, 제 손가락 바로 집어삼킨 거예요?”

“아, 하윽, 아앗… 아, 아니, 힉…, 아!”

“진짜 야하네, 우리 태호 형은.”

급하게 넣은 손가락 두 개를 가볍게 돌리며 내벽을 꾸욱 누르고 짚어대자 태호의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헐떡이는 소리가 터졌다. 최소한의 페로몬 컨트롤을 해 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것을 포기하자, 임태호의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확 열이 올랐다. 내벽을 자극할수록 울컥하고 애액을 흘리는 구멍이 이연우의 손가락을 세게 물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늘 흐리게 스치기만 했던 임태호의 향이 진해지는 것이 느껴질수록 머리가 자꾸 하얗게 변했다. 이제껏 꽤 기분 좋은 섹스를 즐겨왔었고 나름대로 쾌락의 종류는 적지 않게 겪었다고 생각했었건만, 저 꺼질 듯이 간지러운 페로몬 앞에서 자꾸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이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옅게 경련하는 연인의 귀를 따끔하게 깨물면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껏 노팅용으로 사다 주셨는데…….”

느긋한 척 굴지만 사실 그도 여유 같은 건 아주 한참 전에 잃었다. 임태호의 몸이 저를 받아들이는 데 무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난 뒤로는 약간 미친 것 같은 기분이 됐던 것도 같다. 이연우는 조금은 급하게 콘돔을 씌우고 순식간에 뿌리까지 제 것을 처박았다.

선배와 형, 그에게 익숙한 두 단어가 멋대로 뒤섞여서 흘러나왔다.

“안 하고 넘어가긴 죄송하잖아. 응, 선배?”

“흐으윽, 하아, 아…, 히익, 흑!”

러트의 페로몬을 고스란히 맞은 몸은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져서 이연우의 손만 스쳐도 몸서리치듯 튀었고, 앞으로는 그 자신도 모르게 사정한 채로 희뿌연 정액을 토해 냈다.

태호는 이제껏 제가 겪었던 그 적당하고 안온한 쾌감이 아닌, 순식간에 숨을 턱 막히게 할 정도로 깊숙하게 처박았다가 쭈욱 내벽을 건드리며 빠져나가는 단단하고 뜨거운 살덩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흣, 아, 연우, 야아, 흑, 잠깐, 만.”

억눌린 한숨이 나왔다가도,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낯선 높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건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연우가 뭐라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입이 막혀 들었기 때문이다.

태호는 이 질척이는 소리가 서로의 타액이 부딪혀서 나는 건지, 아니면 점점 거칠어지는 허릿짓에 몸이 부딪히면서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흐리게 변한 시야 너머로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이연우가 보였다.

……진짜, 야한 게 누군데.

임태호는 까슬까슬한 음모가 닿을 정도로 제 뒤로 깊숙하게 들어오는 성기에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도 순간적으로 제가 들었던 말을 되돌려줬다.

언제였던가, 잘못 연결된 사이트에서 완전히 허리가 들린 채 삽입되는 남자의 영상을 봤을 때만 해도, 태호는 벌겋게 변한 얼굴을 한 채 ‘세상에 저게 어떻게 가능해!’하고 생각했었다. 그 상태로 뭔가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렇게 성인 남성의 하체를 붙들어 올리려면 보통 완력으로 될 리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임태호의 그런 두 가지 가정은 모조리 잘못된 거였다. 아니, 경험 부족에서 비롯한 오만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하는 자세만으로도 부끄러워 사타구니를 자꾸 손으로 가리려고 했던 태호는, 이제 슬쩍 발기한 채 꺼덕이는 그 자신의 성기도, 몸으로 흩뿌려진 희뿌연 정액도 감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걸 가릴 만한 정신이 없는 상태라는 게 맞았다.

“다리 제대로 어깨에 올려.”

늘 그 끝이 둥글었던 다정한 목소리를 대신하는 열 오른 명령조에, 축 늘어지려고 했던 무릎으로 겨우 어설프게나마 힘이 들어갔다. 이연우는 임태호가 늘 부끄러워했던 연한 허벅지를 세게 힘을 주어 잡아 올린 뒤에 찌를 때마다 히끅대는 소리를 내던 부분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흐으, 아, 아, 흐읏, 아, 그마안.”

대충 허리를 흔들거나 손을 움직이면 됐던 모조 성기의 좋은 점은, 언제나 적당히 버거운 쾌감에 도달했을 때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그것도 주기를 잃은 러트에 빠진 알파라면 더욱 얘기가 달라진다.

다리를 활짝 벌려 누른 채 집요하게 한 곳만을 찔러 퍽, 퍽 거세게 피스톤질 할 때마다 늘 작고 조심스러웠던 태호가 내는 소리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한 교성이 터졌다.

“힉, 아, 앗, 힘들어……, 연우야, 힘, 들어…….”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묘하게 풀려 있었다.

임태호는 쾌감에 약해도 너무 약했다. 분명히 저 잘 조여드는 뒷구멍으로 두꺼운 기둥을 받아먹는 법은 아는데, 겨우 한두 번의 사정 만에 말이 꼬일 정도로 헐떡이며 칭얼거렸다. 이연우는 노골적으로 혀를 써서 임태호의 벌어진 입 안을 희롱하다가, 열감이 가득한 한숨을 토하며 속삭였다.

“섹스할 때, 후우… 어리광부리는 편이었네요. 의외야.”

“…그, 게에, 아니고. 정말로…, 너무.”

변명하듯 웅얼거리며 말하는 목소리에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힘줄까지 돋을 정도로 흥분한 성기가 푹 쑤셔 들어갈 때마다 매끈하게 집어삼키고, 빠져나올 때면 아쉽다는 듯 끝까지 물어대던 구멍에서 성기를 빼내자 태호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꺼내는 감각에도 허벅지 안쪽을 덜덜 떨 정도로 좋아하면서, 잔뜩 겁먹어 엄살을 부리는 연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연우는 낮게 웃으며 한껏 손에 쥐고 놀리고 싶었던 가슴께로 손을 움직였다. 분명 처음 이를 세워 깨물고 빨았을 때까지만 해도 말랑말랑했던 유두가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생각이나 고민 따위를 할 이유도, 겨를도 없었다. 이연우는 그 작은 돌기를 혀로 살살 굴리면서 임태호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건 직접 몸 위로 올라타게 했었을 때와 일순 비슷한 체위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태호 형, 알파는… 노팅이라는 걸 해요.”

바로 한껏 자유로워진 그의 두 손이다.

이연우는 단단한 제 성기를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태호의 엉덩이골에 대고 비비면서 열기로 뚝뚝 끊어지는 단어를 엮어 말을 이었다. 물론 태호는 그 감각을 못 견뎌 하며 허리를 뒤틀었지만, 이연우는 임태호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부드러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대체로는… 러트 때, 오메가에게 하는 건데.”

“흑, 아, 히익, 으응, 흣. 그만, …그마안, 연우야.”

“사실 하는 쪽도, 받는 쪽도 썩 기분 좋은 건 아니야. 어떻게 하든 안 아플 수는 없으니까요.”

축축하고, 따뜻하면서 습한 뒤는 조금 전까지 자신의 안을 멋대로 꿰뚫고 흔들었던 기둥을 반기듯이 움찔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낮게 쉰 목소리는 흥분을 전혀 감추지 않은 채로 이어졌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딴 웃기지도 않은 것까지 써가면서, …하냐면.”

꽉 다물어졌던 구멍은, 알파의 성기를 천천히 그 귀두 끝부터 머금기 시작했다.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제 뒤로 침입하는 묵직한 부피감에 하악, 하고 높게 찢어지는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이연우의 어깨에 매달렸다. 사실 태호는 이제껏 형식적으로만 알아왔던 ‘노팅’이 어떤 감각인지 알았다면 이렇게 순순히 사내의 침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고 나면, 형한테서 내 향이 날 거거든.”

앉은 채로 뿌리 끝까지 깊게 삽입되는 성기가 버거운지 옅게 숨을 헐떡이는 임태호를 눈에 담는 이연우의 목께에 붉은 기가 돌았다. 그 자신의 말대로 노팅은 러트를 맞은 알파에게도 달가운 건 아니다. 잔뜩 조이는 상대의 뒤를 성기로 가득 채운 채 버티는 행위는 알파에게도 꽤나 힘든 일이다.

무슨 말이냐는 듯 풀린 눈으로 이연우를 바라보던 태호는, 얼마 안 가 제 연인이 말한 노팅의 의미를 깨닫고 크게 허리를 휘며 발가락 끝까지 확 오므렸다. 어떻게 하든 안 아플 수는 없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었는지, 옅게 투정하던 임태호는 눈에 띄게 이연우에게 두서없이 울먹이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히익, 흑, 이거, 하지 마. 싫어… 연우야, 싫어, 응?”

사실, 태호는 아프다기보다는 무서운 게 더 컸다.

이미 더 이상 깊을 수도 없을 정도로 쑥 들어간 이연우의 성기가 제 안을 가득 채우는 낯선 감각에 덜컥 겁이 났다. 오메가의 이런 반응은 노팅을 당할 때의 본능이나 다름없는 반사적인 옅은 불안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태호는 제 알파를 끌어안고 무작정 작게 칭얼댔다.

알파는 실은 제 연인에게 한 가지 말해 주지 않은 게 있다.

노팅은 이연우, 그의 향만 임태호에게 전해지는 게 아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건 노팅을 핑계 삼은 이연우의 작은 욕심이었다. 임태호가 열성이고, 또 지금처럼 억제제를 먹는 이상 절대로 극우성에게는 남지 않을 흔적이 아쉬워서, 욕심나서, 가지고 싶어서. 그래서 온갖 유치한 핑계를 대며 노팅을 택했다.

이연우는 그 자신도 옅게 땀이 어린 채로도 연인의 귓가에 대고 연신 ‘미안, 많이 아파? 아냐. 무서워하지 마. 응, 미안해.’하고 소곤거렸다. 열기가 머리를 휘어잡은 와중에도 손에 닿는 연인의 피부에 옅게나마 촉촉한 기운이 어리는 것이 신경 쓰였다. 임태호의 이마에 작게 입술을 누르며 숨을 삼키는 속이 더웠다.

…언제 끝날까, 이건.

이연우는 생각했다.

◈◈◈

잔뜩 달뜬 채 머릿속에 딱 한 가지 생각밖에 남지 않는 시기가 지나고 나서 하는 샤워는 그 어떤 때보다 개운하다. 줄곧 열감이 뜨끈하게 느껴지던 시야가 맑았다. 이연우는 한동안 고개를 수건에 묻고 있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솔직히, 혼자 씻는 목적으로는 넉넉하다 못해 과하게 큰 곳이건만 혼자 올 수밖에 없던 그다.

“형?”

“…….”

“벌써 씻고 나왔어요?”

침대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이불 뭉치가 잠깐 흠칫하더니, 희미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저 괴이한 움직임의 정체는 씻겨 주겠다고 몇 번을 말해도 한사코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욕실로 도망쳤던 임태호다.

사실 태호가 첫 정사 후에 저렇게 부끄러워할 거라는 건 뻔히 예상 가능한 범주의 일이었다. 키스만으로도 얼굴을 못 들던 성격인데, 러트를 이유로 이런 짓, 저런 짓 잔뜩 하고 나온 지금이야 얼마나 창피해할지 안 봐도 뻔했다.

이연우는 옅게 웃으며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 동그란 이불 뭉치를 살살 쓸었다. 비교적 판판한 느낌인 것을 보니 아마도 이쪽이 등인가보다, 하고 짐작하기도 했다.

“머리 말려야죠. 드라이기 소리 안 들리던데.”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이불 밖으로 나오기를 유도한 말이었건만, 역시나 임태호는 그 정도로는 꼼짝도 안 했다. 오히려 연우가 작게 웃는 목소리에 더욱 부끄러워졌는지 이불 안에서 꾸물꾸물, 더욱 몸을 작게 말아 버리는 듯했다.

연우는 그걸 보며 좀 더 소리 내어 웃다가,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다리인지도 모를 그 이불 뭉치를 통째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동안 품에 넣고 있자니, 도톰한 솜이불 너머로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문득 이연우는 이것마저도 참 임태호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드럽고, 편하고, 금방 전해지지는 않지만 간질간질한 온기.

“형, 있잖아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까운 선후배의 관계는 다시 말해 서로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익숙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연인이 된 이연우와 임태호 사이에는 작은 부작용이 하나 생겼다. 연우는 그 자신도 아직 채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연인이 숨은 이불에 기댄 채로, 아주 작고 느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필 지금 이런 말 하면…… 오히려 불안할까 싶어서 고민했는데요.”

나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태호는 애꿎은 이불을 세게 말아 쥔 채로 귀만 쫑긋 새웠다. ‘…그렇다고, 안 하는 게 더 싫어서.’ 이연우는 한숨처럼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삼키고 고민하던 문장을 곧바로 내뱉은 건 아니었다. 그는 왠지 조금 망설이듯, 제가 이불째로 끌어안은 임태호의 몸을 손끝으로 그리면서 한참 있었다.

“……진짜, 좋아해요.”

응. 임태호는 속으로 대답했다.

“정말 많이요.”

으응. 임태호는 한 번 더 대답했다. 물론 입 밖으로는 못 꺼냈다.

“……아, 바보 같네.”

무릇 연인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같이, 어쩌면 숨 쉬는 것보다 더욱 쉽게 하는 말을 꺼내는 귀가 벌겋게 익었다. 좋아한다. 겨우 이 단어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러트와는 다른 열이 속에서 훅 치밀어 올랐다.

씨발, 중학생이 말해도 이것보다는 멋있게 했겠다.

이연우는 속으로 제 어설프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고백을 욕했다. 함께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시간만큼 도저히 쉽게 나오지 않던 말들이 많았다. 좀 더 연인 같은 말을 하고 싶은데, 언제나 나오는 건 익숙한 후배가 할 만한 문장들뿐이었다.

“사실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 쓰고 싶었는데요.”

“…….”

“진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답지 않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문장을 이어가는 이연우의 모습은,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본다면 헛웃음을 흘릴 정도로 사랑에 빠진 알파 그 자체였다. 제 감정을 어떻게 감춰야 하는지도, 아니면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사내가 된 이연우는, 자꾸 굳어 버리는 혀를 겨우겨우 움직였다.

“……창피해서. 다음에는 꼭 말할게요.”

부끄러움을 단 한 번도 직접 인정해 본 적 없었던 오만한 목소리가 작게 기어들어 갔다.

차라리 임태호가 이불 안에 숨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운 좋게도 이렇게 한심한 꼴을 다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연우는 왠지 입이 바짝 말라서 괜히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로 겨우 숨만 쉬었다.

그때였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이연우의 손등을 슬쩍 덮는, 그보다 더 열이 오른 온기가 느껴진 건.

연우는 놀란 눈을 멍하게 깜박이며 이불 밖으로 겨우 삐죽 나온 임태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세게 잡는 것도 아니고, 거의 위에 얹은 후에 살짝 그러쥐는 정도의 조심스러운 스킨십은 이틀간을 꼬박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뒹군 사이에 하는 것치고는 제법 숫됐다.

이연우는 작게 입술을 깨문 채 몰래 웃다가, 태호가 손을 내밀면서 생긴 이불 안의 틈으로 별안간에 휙 파고들었다.

덕분에 임태호는 얼마나 놀랐는지 이불 안의 침략자를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한동안 눈만 깜박인 채로 얼었다가, 한 박자 늦게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툭 입을 열었다. ‘연우 너 얼굴 되게 빨개.’ 물론 이연우 역시 그것에 지지는 않았다. ‘형도 똑같거든요.’

얼마만의 여유로운 한 때인지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연우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는 연락 안 왔어요?”

“……문자만.”

“요새 진짜 바쁘다면서 어떻게 잘 나왔네요. 쌓은 이미지가 좋아서 그런 건가?”

이연우는 나직하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젖은 머리카락이며 동그랗고 말랑한 뺨에 입술을 떨어트리는 간지러운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지극히 팔불출적인 해석이 가득 담긴 문장에 살짝 민망해진 태호는 멋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하고 와서…… 봐줬나 봐.”

“뭘요?”

배우자의 히트사이클과 러트에는 법적으로 최대 2일까지 휴가가 가능하다.

알파와 오메가의 인권과 관련된 제도는 많지만, 무릇 복지라는 게 그렇듯 엄하게 강제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사회에서, 이 특별 휴일은 제아무리 블랙 회사라고 해도 제법 까다롭게 지키는 사항이다. 최근에는 ‘우리는 별일 없지만 그래도 똑같이 쉬게 해달라.’라며 베타들이 들고일어나는 통에 베타 역시 관련 내용이 논의되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건 물론 부부관계가 아닌 연인은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다.

그걸 잘 아는 태호는, 조금은 미안함이 깃든 어조로 한숨 섞어 말을 이었다.

“애인이 러트라고 휴가 내주라고 억지 부렸거든.”

“…….”

“가면 정말 맨날 야근해야 해.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들고 가야겠다.”

……아 진짜 개멋있어.

이연우는 새삼스레 임태호에게 한 번 더 반했다.

◈◈◈

신화그룹의 회장. 이주호.

그의 불같은 성격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재계 모두에 유명했다.

덕분에 동생인 이정호 전 대표의 유순한 태도와도 자주 비교되고는 했지만 이렇게 색이 다른 형제는 그룹 차원에서 보면 꽤 좋은 상성이었다. 살벌하게 공세를 펼치며 사업을 확장하고, 점유율을 확장해야 하는 분야는 이주호 회장이 맡고, 언론과 정치계를 살살 구슬리며 적절한 로비를 하고 때로는 이주호가 휩쓸고 간 뒷정리를 하는 건 이정호 전 대표의 몫으로 나뉘며 그 합이 퍽 잘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정호 전 대표가 사임한 후, 그 자리를 예상과는 달리 이주호의 아들인 이민혁이 물려받으며 그 치우침 없는 힘의 균형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건 뭐, 출근할 때마다 내 책상 남아 있을지 걱정해야 할 판 아닙니까?”

임원 하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술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얼핏 들으면 농담처럼 들릴 문장이었건만, 그와 함께 있는 이들의 표정은 일제히 어두워졌다. 그만큼 초조해진 탓이었다.

이주호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최근 있었던 이민혁의 대표 취임식에서 기조연설을 맡았던 박영진 이사가 식을 앞두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것에 말 그대로 진노했다. 제 장남을 좋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도, 언제나 몇 걸음 물러나 있던 이주호 회장이다. 그런 삐걱거리는 부분마저 경험하고 포용하는 것 역시 교육이라고 믿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릴 때부터 워낙 애교 많고 잘 안기는 아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3세들 중 이주호 회장의 무릎에 앉아 본 경험이 있는 건 이민혁이 유일할 정도로 유독 눈에 못 넣어 안달이었던 첫째다. 그런 이민혁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서는 자리인 만큼 이주호 회장, 그도 갖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자리에 이정호 전 대표 세력의 우두머리인 박영진이 보란 듯이 불참한 거다. 이주호 회장은 취임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원들을 모아놓고 참 오랜만에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이민혁 대표’를 물 먹이는 짓을 하려거든 제 눈에 흙이 들어간 뒤에나 하라며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모습은, 한창 불도저로 유명하던 젊은 시절과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주호 회장을 말린 건 그 동생인 이정호 전 대표였다. 덕분에 이들은 이주호 회장에게 한 번, 이정호 전 대표에게 한 번 그렇게 두 번을 만신창이로 깨졌다.

술자리에 함께 있는 임원들의 시선이 저쪽 구석에 앉아 있는 박영진 이사에게로 흘끗 향했다.

사실, 어찌 보면 지금의 열세에 가장 큰 획을 그은 건 박영진 이사의 탓이다.

하지만 그들은 박영진에게 뭐라 말도 꺼내지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토로하려던 문장이 저절로 쏙 들어가게 하는 흉흉한 표정 때문이었다. 박영진은 언제나 가면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웃던, 여유롭기 짝이 없던 사내다.

그런데 그랬던 그의 얼굴이 변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연락 두절 이후부터다. 그 시선을 느낀 탓일까. 박영진 이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우리 그룹은 꼭 오래된 성 같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영문을 모를 서두에 몇몇 임원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박영진은 제 술잔에 직접 술을 따라 채우고는,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켰다.

“값비싼 신비주의. 고풍스러움과 고루함을 왔다, 갔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박 이사.”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하는 박영진 이사를 몇몇 임원이 달래도 보았지만, 박영진은 ‘취해요? 그럴 리가요.’하며 오히려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여전히 중세에 갇혀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주 짜증 날 정도로 충성스럽고, 찬란해.”

넋두리 같은 말이었다.

몇몇 임원은 그것에 동의한다는 듯 그들끼리 술을 마시기도 했고, 몇몇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거리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박영진 이사의 말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박영진은 제게 쏠린 시선들을 향해 샐쭉 눈을 접어 보였다. 하지만 박영진을 지켜봐 왔던 이들은 안다.

저 웃음은, 이전의 그 여유 만만한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하하. 그게 싫다는 말이 아닙니다. 싫기는? 오히려 반겨야지요.”

“…….”

“중세는 왕정이 땅에 떨어지고 사제가 가장 힘을 쥐었던 시기 아닙니까.”

어찌나 가볍게 흘러나온 말이던지, 사람들은 잠시 그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저마다 술을 마시거나 한숨을 쉬었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철저히 칸막이가 나뉜 곳임이 지금처럼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 임원 하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춘 채 급히 속삭였다.

“……박 이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연아는 나중 문젭니다. 왕을 치러 가는 데엔 순서가 있지요.”

노골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순간 몇몇 이들은 시선을 아무도 없는 미닫이문 바깥으로 돌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껏 이들이 이민혁을 견제했던 건 순식간에 끈 떨어진 연이 된 상태에서, 새로 자리에 앉을 수장과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려던 거였다. 그래야만 중요한 순간마다 협상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서다.

하지만 방금 박영진 이사의 말은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이미 정돈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후계에 대한 가벼운 반발을 넘어섰다.

킹 이민혁. 퀸 이연아. 그리고 그 앞에 먼저 있는 건…….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사실 이제 박영진에게 이민혁 ‘대표’의 자리 같은 건 중요치 않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있다. 이연우. 이연우. 이연우. 어차피 이제 이민혁은 쉽게 손댈 방법이 없다. 다른 임원의 말대로, 곱게 자리보존하고 회사를 뜨기 위해서는 이민혁을 머리 위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연우는?

“이안이나 이현이 그걸 그대로 보겠습니까?”

“이현은 소란스럽게 눈에 띄는 걸 가장 질색합니다. 예상보단 잠잠할 겁니다.”

3세들 중 가장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이현이다. 매스컴도 철저히 피하고, 공식 석상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은 채 여느 사원들처럼 회사의 부속품으로만 지내려는 자다. 박영진은 그걸 잘 안다.

“문제는, 이안인데.”

박영진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생들을 끔찍하게 예뻐하지요.”

“…예,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자존심도 가장 세시지. 뼛속까지 신화그룹 도련님인 분이시거든.”

누군가가 실수로 들고 있던 술잔을 삐끗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에 웅성거리거나 소란을 피울 여유는 없었다. 오히려 긴장 가득한 한숨을 삼킨 게 다다.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듣자 하니 기사님께서 요새 퍽 빠져 계신 분이 있다고 하니, 내 쓸 만한 졸개를 찾아보지요.”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에 잠겼다.

완전히 기울어버린 저울이다. 이걸 평행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협상 테이블을 펼칠 수 있는 정도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민혁의 무게추를 하나쯤 빼내야 한다.

혼란과 수긍이 함께하는 얼굴들을 찬찬히 둘러본 박영진 이사는, 임원들을 향해 느긋하게 덧붙였다.

“피를 보지 않는 왕위 계승엔 견고함이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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