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A Knight in Shining Armor
지금 임태호는 심각하다. 그것도 아주, 꽤.
[서울 데이트 코스]
점심까지 마다하고 사무실에 혼자 남은 태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 검색창에 친 건, 바로 서른셋 인생을 살며 단 한 번도 찾아본 적 없는 정보였다. 임태호는 그렇게 온갖 블로그와 사이트에서 나오는 정보를 보며 예쁘게 정리했다. 겹치는 코스는 정리하고 SNS에서 팁이라고 있는 것들도 싹싹 긁어모았다.
심지어는 혹시 나중에 보안팀에서 조회해 보고 웃을까 봐 아예 사내 컴퓨터는 이용하지도 않고 휴대폰 LTE로 검색해서 손으로 직접 A4용지에 옮겨 쓰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태호가 회사에서 빌린 게 있다면 A4용지 서너 장이 다다.
그건 점심시간에만 계속된 게 아니었다.
태호는 집까지 그걸 들고 와서 완벽에 완벽을 기했다. 이 보고서 아닌 보고서를 제출할 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태호는 약속 시간, 아니 이제는 결재 기한에 가까운 주말 오전이 될수록 밤잠까지 줄여 가며 그 문서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는 제일 아끼는 예쁜 후배이자 동생, 이연우를 제가 베타이고, 오메가 연인이 있다는 거짓말로 속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다. 8년이다.
그런데 그렇게 8년을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이 이제는 진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서 연애하고 싶단다. 그것도 오랫동안 장수 커플인 제 도움을 받아서!
사실 처음 그 말을 듣고 집에 오는 길에는 퍽 우울했었다.
너무 오랫동안 속여 온 탓일까. 잠시 동안 완전히 묻혀 있던 죄책감이 풍선처럼 마음을 메워 갔다. 조금 충격도 받았다. 연우는 날 저렇게 믿고 의지해 주는데 저라는 인간은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것을 까맣게 속이면서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잊고 있었다는 걸 자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잘해 주고 싶었다.
저 반짝반짝하는 알파가 그 자신이 문제 있다거나 하는 생각 같은 건 절대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임태호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연우는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멋진 사내고 또 다정한 알파였다.
저는 33년 인생 중에서 실패한 연애만 해 봤다지만, 저렇게 근사한 사람은 어떻게든 잘 되는 쪽이 인류애적인 접근이기도 할 거다. 그래서 임태호는 결심했다. 어떻게든 이연우가 바라는 그 ‘오래오래, 잘하는 연애’를 성공시키고 말겠다고!
한편, 그 불타는 의지의 대상인 이연우는 임태호가 며칠간 꼬박 밤을 새워서 정리해 떨리는 손으로 제출한 보고서를 보며 생각했다.
‘이게 논문이라면 대번에 표절로 쫓겨났겠네.’
솔직히 뻔히 보였다. 아니, 애초에 자기 애인이랑 어떻게 노는지 메시지로 툭 물어본 것에 이렇게 바짝 긴장해서 종이로 요약문을 만들어 오는 사람이 세상에 임태호 말고 또 있나 싶었다. 이건 뭐 ‘이상적인 연애법’이 아니라 2인 최적화 서울, 수도권 탐방지도에 ‘연애는 컴퓨터로 배웠어요’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런 걸 알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었다.
이연우 그는, 임태호가 좋아하는 게 궁금하다.
뭘 하고 놀고 싶은지, 어떤 데이트 코스가 좋은지, 만약에 연인이 생긴다면 하고 싶었던 희망 사항들을 엿듣고 싶을 뿐이다. 그걸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알려주기만 한다면 뭐든 못 이뤄줄까.
“선배, 고마워요. 진짜 잘 활용해 볼게요.”
“……응, 잘 써 봐!”
아, 씨발. 기뻐하고 있어…….
이연우는 잔뜩 얼었다가 제 말 한마디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눈을 반짝이는 임태호를 보고 살짝 머리를 짚을 뻔했다. 잠깐 잊었었다. 임태호는 곰도, 판다도 아닌 무생물 찹쌀떡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이연우, 그가 실망한 기색을 꺼낼 수 없는 건 이것이 눈앞의 남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연우는 이번 주 내내 오늘을 꽤 기대했다.
모든 건 마음에 달렸다더니, 정말 그런 건지 그렇게 자주 왔던 임태호의 작은 빌라로 오는 게 어찌나 설렜는지 모른다.
이 아담한 공간에 정말 옅게 남아 있는 페로몬이 태호의 것이라는 걸 다시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 그렇게 향이 잘 어울릴 수 있지, 하고 자꾸 웃음이 났다. 흐린 향을 좀 더 제대로 맡고 싶다는 욕심과, 태호가 늘 생활하는 이곳에 제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겹쳐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아직 함께할 수 없었다.
임태호의 향은 너무 약하디약해서, 욕심껏 페로몬을 열고 제 흔적으로 채우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묻혀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이연우는 잠시 태호의 볼을 쭉 잡아당기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그걸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괜히 베란다로 향했다. 이건 뭐 바람이라도 쐬어야지, 속이 뒤집혀서 영 답이 없었다.
연우는 창문을 있는 대로 열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막 겨울을 떨치고 봄에 들어선 날씨는 제법 온기를 품고 있건만 속은 괜히 까끌까끌하기만 했다.
저건 철벽일까?
철벽이라면 대체 무슨 종류의 철벽일까?
연우는 하늘 여기저기를 패치워크처럼 수놓은 구름을 보면서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베란다 구석에서 이연우의 눈에 들어온 작은 박스가 하나 있었다.
“형, 이거 뭐예요?”
“응? 아, 그냥 안 쓰는 물건들 정리해 둔 거야. 본가 빈방으로 보낼까 하고.”
임태호는 꽤 깔끔한 성격이다. 깔끔한 성격의 다른 말은 쓸데없는 물건은 바로바로 잘 버리고 치우는 편이라는 거다. 그런데 그런 태호가 가지고 있는 안 쓰는 물건이라. 연우는 문득 호기심이 동했다.
“저 열어봐도 돼요?”
잠깐 마실 거라도 찾아보겠다며 총총대며 부엌으로 향한 태호에게서 ‘응!’ 하는 꽤 기분 좋아 보이는 대답이 들렸다. 임태호는 제가 열심히 만든 보고서가 후배에게 도움이 되어 아직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중이었다.
그걸 느낀 이연우는 정말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한숨을 내쉬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쓸모없지는 않지만 안 쓰는 것.
이연우는 임태호가 상자 안에 차곡차곡 보관한 것들을 보고 그 적절함에 작게 웃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틈날 때마다 일기를 쓰는 성격인 만큼 손때 묻은 일기장 몇 권이었다. 연우는 잠깐 그걸 볼까 하다가, 슬쩍 눈을 굴려 본 태호가 머그컵을 들고 이쪽으로 오는 걸 확인하고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임태호에게 미움받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상자는 그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들어가 있었다.
앞서 봤던 일기장부터 여행 사진을 정리한 사진첩, 너덜너덜할 때까지 본 유독 좋아하는 책들, 그리고…….
“우와.”
교복이었다.
이연우는 곱게 다림질까지 되어 있는 그 짙은 네이비색의 반듯한 옷을 펼치며 작게 탄성을 흘렸다. 고등학교 때 유학길에 올라 있었던 그는 이런 한국식 교복을 입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 유니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반듯하게 각이 진 옷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연우는 어느새 베란다 문에 기대어 조금은 멋쩍은 얼굴을 한 채 머그잔 하나를 건네는 태호에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거 형 거예요?”
“응. 고등학교 때.”
“와, 상태도 완전 좋은데요?”
사실 고등학교 시절은 임태호 인생에서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갔던 때다.
태호는 매일같이 공부하고, 밥 먹고, 또 앉아서 공부하고를 착실하고 또 성실하게 반복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임태호는 지금 봐도 제법 품이 넓은 옷을 보며 왠지 약간 뒷목이 뜨끈해져서, 괜히 눈을 빙글 굴리며 들고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임태호가 친히 타서 가져다준 커피믹스를 마치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값비싼 음료를 마시듯 진지하게 음미하던 이연우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태호 형.”
“응?”
“저는 나중에 애인 생기면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뭔데?”
역시 커피는 언제나 옳다.
이렇게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방법으로 훌륭한 각성 효과를 준다.
이연우는 그 명민한 머리를 굴려 전략을 수정을 시작했다. 임태호가 하고 싶은 걸 말 안 하면, 반대로 나라도 연애할 때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 이대로 살다가는 몸 안에 사리가 쌓여 죽을 거다.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우의 얼굴에는 어느새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와주겠다고 먼저 말해 주세요.”
“뭐, 뭐길래 그래?”
“빨리. 먼저 대답해야 말할래요.”
솔직히 임태호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법을 좀 알아야 한다.
특히, 지금 그의 눈앞에서 끈적이는 욕망을 마치 솜털처럼 가볍게 흔들기 시작한 남자를 더욱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태호는 임태호였다. 그렇잖아도 외동으로 태어나 저보다 어린 사람에게 약한 태호는, 그중에 이연우의 말에 가장 약하다.
그렇게 태호의 입에서는 가장 해선 안 될 허락이 떨어졌다.
“알겠어. 도와줄게. 뭔데?”
자신의 미래를 그리지 못한 가엾은 임태호는, 제 말에 정말 요 몇 달 사이 봤던 표정 중 가장 달콤하게 녹는 것 같은 웃음을 짓는 이연우의 얼굴에 새삼 태평하게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연우는 마치 꿀을 녹여 단어로 바꾼 것 같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교복 데이트요. 아. 진짜 신나네요.”
“……응?”
“근데 전 교복이 안 맞아서 아쉬운 대로 그렇게나 해 볼까요?”
태호는 얼굴과 목소리에 홀려서 상황 파악이 늦었다.
“원조교제 콘셉트.”
하지만 이미 이연우는 완전히 혼자 딴 세상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임태호의 보고서 아닌 보고서를 받고 꽤 착잡해졌던 그는, 지금 완전히 새로운 미로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은 것 같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태호 형이 찾아 준 것도 써 먹고, 나도 행복하고!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주말 계획이 있을 수 있다니. 역시 사람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한껏 찬란하게 빛나는 후광을 두른 이연우와는 달리, 임태호는 지금 좀 급했다.
“……여, 연우야. 연우야, 잠깐만.”
“저는 돈 많고 성격 나쁜 재벌3세고 형은 재벌3세의 돈을 보고 만나는 고등학생이에요. 알겠죠? 저는 오늘 활짝 열린 지갑이랍니다.”
“아니! 전혀 모르겠어!”
“에이. 다 이해했으면서. 대체 제가 형 아니면 누구랑 이러겠어요? 마침 형이 잘 정리해 주신 것도 있으니까 오늘 괜찮은 코스 하나 골라서 돌아봐요.”
이연우는 마치 아나운서처럼 단 한 번의 더듬거림도 없이 물 흐르듯 말하며 제가 발굴한 교복을 구김이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도로 개어서 그 주인에게 내밀었다. 물론 그 주인은 쉽게 수령하려 들지 않았다.
“태호 형, 약속을 지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알아. 알아. 아는데, 이건 진짜 아니야. 연우야. 이연우?”
“지금 입으면 좀 넉넉한 게 불편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옷이야 맞겠지만-.”
뭐라고 있는 힘껏 거부해 보려던 태호의 말은,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을 가까이 한 이연우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꽉 막혔다. 요새 일이 많다며 주 중에는 얼굴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하고, 오늘처럼 주말에나 겨우 시간을 빼서 만나는 후배의 얼굴이 이처럼 행복해 보이는 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를 일이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는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전 젊으니까 형 할래요.”
극본 이연우, 연출 이연우, 주연 이연우 그리고 임태호의 개막장 스토리는 그렇게 물밀듯이 크랭크인에 성공했다. 연우는 태호의 손에 교복을 꼬옥 안겨주며 예쁘게 눈을 휘었다.
“태호 형, 걱정 마세요.”
뭘? 대체 뭘? 임태호는 차마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입만 뻐끔거렸다. 그건 어떻게 보면 참 맹하게 보이는 얼굴이라, 연우는 기어코 태호의 볼을 가볍게 한 번 잡아당겼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조금 찌릿찌릿하게 좋았다.
“재벌3세는 사실 그 고등학생한테 푹 빠져 있답니다.”
좋은 거짓말쟁이는 아흔아홉의 거짓 속에 한 개의 진실을 숨기는 법이다.
◈◈◈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는 게 이런 뜻일까. 의도치 않게 묵언수행 중이던 임태호는,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재벌3세를 향해 속삭였다.
“……정말 형 소리 듣고 싶어?”
이연우는 임태호와 함께 빌라를 빠져나와 신화그룹 체인의 백화점에 도착한 지금까지, 줄곧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연하나 교복 같은 키워드에 동요해 본 적 없었고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던 사람들을 정신 나간 변태새끼들이라고 욕했던 그는, 잠시 제 인생 전부를 부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장난기가 동해서 한 부탁이었다.
약속 아니냐고 박박 우겨서 교복과 함께 침실로 밀어 넣고 삼십 분 동안 나오지 않는 임태호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새빨갛게 익어서 부끄러워할까만 기대했었다.
그런데 정말, 뭔가가 마음속에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니, ‘확’ 꽂혔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거다.
첫 시작부터 제 앞에 서 있던 것이 당연했던 사람. 선배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이제야 겨우 형이 된 임태호가 품이 넉넉한 빳빳한 교복을 입고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눈썹을 아래로 휘는 모습이라니.
이연우는 처음에는 한 1분은 넋이 빠져 있다가, 태호가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웃으려면 빨리 웃어….’하는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콘셉트잖아요. 기왕 하는 거 완벽하게 하는 게 좋죠.”
“실례하겠습니다. 오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연우의 다정하고 뻔뻔한 말에 뭐라 대답하려던 태호의 입은 단둘이 남았던 VIP룸의 문이 열리자마자 다시 조개처럼 꽉 닫혔다. 언제 이야기하고 있었느냐는 것처럼 시선이 땅바닥으로 휙 떨어진 것도 함께였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렇게 곤란한 얼굴로 쩔쩔매는 임태호의 표정이 좋았다.
그렇잖아도 요새 지난 8년을 복기하면서 속이 탈 만큼 탔던 연우다. 바보같이 다른 데에 시간 낭비하느라 스물다섯의 임태호를 일주일에 고작 세 번 봤던 게 아쉬웠다. 그다음 해에는 임태호가 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보기 힘들어졌었고, 태호가 취업 준비를 할 때에는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봤을 정도로 바빴었다.
참 이상했다.
고작 몇 달 전의 자신은 임태호와 보낸 지난 과거가 아쉬울 거 없이 퍽 고운 빛깔을 지녔다고 생각했었을 텐데 지금은 그 틈새가 모두 아쉬웠다.
‘처음으로 최종 면접까지 갔던 회사에서 떨어졌을 때 문자로만 위로하지 말고 직접 찾아갈걸.’
‘언제 생일이었던가, 그때 온종일 집에 있겠다고 했었는데. 옆에 있어 줘야 했는데.’
이연우는 어쩌면 이제 와 참 쓸데없을 생각을 하면서 제가 흘려보낸 시간과 절대 줄어들 수 없는 5년을 아까워했다.
그런데 오늘, 이제는 뻣뻣해진 교복을 입은 임태호의 모습은 꼭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표정 같다. 저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늘 긴장한 채 어색하게 인사하던 베타 선배 임태호가 눈앞에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 얼굴을 보니 정말 바보처럼 마음이 들떴다. 예전으로 돌아가 새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것만 같은데 심지어 오늘만큼은 제가 임태호의 시간보다 더 앞섰다. 장난처럼 말한 ‘오늘은 활짝 열린 지갑입니다.’라는 말은 사실 꽤 진심이 섞인 선언이었다.
뭔들 못 해 줄까?
이연우는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제 옆에 앉은 임태호를 가깝게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눈이 휘둥그레 떠지는 게 빤히 보였지만, 이연우는 괜히 그걸 모르는 체하고 시선을 퍼스널쇼퍼가 가지고 온 물건에만 집중하는 척했다.
그런 두 사람을 조금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던 직원은, 이연우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상품 브리핑을 시작했다.
브리핑의 테마는 이거였다.
<고등학생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쓸 만한 거면 뭐든지>.
“흠, 흠. 네, 말씀하신 제품들입니다. 우선 여기 가장 왼쪽의 상품은 이번에 나온 ○○의…….”
이제껏 살며 처음 받는 난해한 주문이었지만 직원은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최선을 다했다. 마치 기계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흘러나오는 설명은 가히 VIP의 의전을 담당하는 쇼퍼다운 능숙함이 돋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임태호는 훌륭한 상품 소개에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어깨였다. 약간 딱딱한 심지가 들어간 품이 넓은 재킷의 선을 따라 손가락이 느긋하게 움직였다. 마치 부드러운 물 위를 건드리듯 장난처럼 건드리는 행동에, 태호는 연우의 손이 닿는 어깨를 몇 번이고 움찔거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이어진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상품, 은…… 흠, 죄송합니다. 최근 가장 높은 판매고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상품인데요.”
청산유수로 흘러가던 직원의 말이 처음으로 삐끗했다.
아무리 능숙한 베테랑이라고 한들, 그룹 내 소문이 자자한 그 ‘나이트’가 교복 차림의 미성년자를 품에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기댄 채 자신의 브리핑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말을 더듬게 될 거다. 심지어, 소름끼칠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숨 안 쉴 거야?’하고 묻기까지 하는데 한 번쯤 머리가 하얗게 변하지 않을 리 없다.
산전수전 다 겪은 직원은 VIP를 담당하고 처음으로 브리핑에서 세 번이나 실수했다. 하지만 그걸 탓하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일 테다. 애초에 VIP 당사자 역시도 그것을 지적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연우는 지금 정말 올 한 해 중 가장 기분이 좋다.
솔직히 그도 이런 자세로 브리핑을 들을 생각이 아니었다.
잠깐만 이렇게 태호에게 장난을 쳤다가 그만두려 했다. 그런데 그럴 생각이 싹 가신 건, 장난스럽게 태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을 때였다. 이연우는 유독 사람들의 페로몬에 예민하다. 사람마다 지문처럼 다른 페로몬의 흔적도 잘 알아채고, 가끔 알파나 오메가인 가족들이 향이 진한 화장품을 쓰거나 하면 질색할 정도로 감각이 빨랐다. 약으로 눌러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태호의 흔적도 짚어냈을 정도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임태호를 품에 끌어안고 그 보드라운 목에 제 얼굴을 기대는 순간. 정말, 그 찰나의 순간.
이연우는 처음으로 임태호의 비밀에 온전히 닿았다.
그건 언제나 희미한 잔향으로만 짚을 수 있었던 향이었다. 사람의 페로몬이 가장 진하게 남는 부분은 늘 드러나 있는 곳보다 한 겹 감춰진 살갗이 연한 부분들이라는, 잠시 잊고 있던 그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자 괜히 목이 마르기도 했다.
화려하게 압도되거나 취하게 만들 정도로 농염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속을 견딜 수 없게 간질이는 쪽은 아마 이 여리고 흐린 향일 터였다. 연우는 뻣뻣하게 굳다 못해 아예 기절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는 태호의 등을 살살 쓸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뭐 갖고 싶어?”
“…진짜, 필요 없는데…….”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완전히 쉰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연우는 그제야 속으로 혀를 차며 제가 끌어안은 채 어르고 있던 몸을 품에서 내놓고 태호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 너무 했나?’
이연우의 반성은 조금 늦었다.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을, 놀려도 너무 놀렸다.
임태호는 솔직히 지금 조금 울컥했다.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어떡해. 자꾸 보잖아. 아. 창피해, 정말.
사실 태호의 가정에는 그럼 다른 사람이 없으면 괜찮은 건가, 하는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래도. 내가 하나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진짜 완전 신났어, 이연우.
태호는 자신의 눈치를 슬슬 보는 후배를 알고도 괜히 눈을 샐쭉하게 떴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이야기하려던 두 사람은, 이연우가 존대를 하고 임태호가 말을 놓으면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더욱 기묘한 그림이 된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말투마저 조정한 지 오래였다.
“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다른 걸 좀 볼까.”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루퉁한 임태호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연우는 곧바로 직원에게 다른 물건을 더 부탁하려고 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요! 진짜 제가 괜찮아서요!”
“지하 제외하고 1층부터 14층까지, 거기서 또 식당가 빼면 총 12층인데, 여기서 태호, 네가 가지고 싶은 게 하나는 있지 않겠어?”
임태호는 긴장한 표정의 직원이 ‘시정하겠습니다. 다시 빨리 준비해서 오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걸 보고 딱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이연우는 정말 제가 뭔가를 고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걸 멈추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와. 진짜 나쁜 재벌3세잖아!
태호는 속으로 생각하며 허둥지둥 직원이 가지고 나가려던 이동식 걸이 앞에 섰다. 이렇게 된 거 진짜 이중에서 빨리 대충 고르는 게 나을 것 싶어서였다. 연우는 딱 제 예상대로 행동하는 태호를 보며 옅게 웃었지만, 그런 걸 태호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신은 임태호의 편이 아니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잠시만요. 조금만 더 보고요.”
비싸. 진짜 비싸다. 이것도, 저것도, 진짜 다.
옷, 가방, 신발, 액세서리……. 정말 다양하게 진열된 상품 중 대충 고르려던 태호의 손은, 은근슬쩍 가격을 확인하자마자 저절로 공손해졌다. 이건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저 ‘제멋대로 재벌3세’는 이 중에서 뭔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다.
태호는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머리를 팽팽 굴렸다.
제 선택이 길어질수록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직원들의 말끔한 얼굴이 파리해져 가는 건 착각이 아님을 잘 알아서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임태호는 살며 처음 겪는 사치의 진퇴양난에 빠졌다.
“별로인 것 같은데. 그냥 다시…….”
아, 진짜. 이연우!
임태호는 진심으로 조금 속에서 분통이 터졌다. 물론 그건 다른 사람이 내는 화와 비교하면 한 15퍼센트 정도의 감정 기복이었지만 여하튼 언제나 매사에 무던한 무생물 찹쌀떡의 분노였다.
“-연우 형!”
울컥한 채로 내뱉은 단어는 평소보다 확실히 크고 뾰족했다. 사실, 태호는 그 순간 자기 목소리에 자기가 혼자 놀랐다. 워낙 평소에 말을 크게 하지 않는 터라 이렇게 목소리를 키운 것만으로도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임태호의 ‘울컥’은 딱 세 글자 이후로 급격히 톤이 줄어들었다.
“이거 다 진짜 예쁘고 좋은데요.”
“…….”
“근데 저 이런 거 말고 좀 배고픈데. 그냥 밥 먹으러 가면 안 될까요?”
차라리 먹는 게 남는 거랬다. 물론 가격도 이것들보다는 나을 거다.
임태호는 자신의 한 달 월급을 우습게 넘기는 시계를 조심스레 옆으로 밀면서 물었다. 그러나 이 문제 많은 재벌3세는 묻는 말에 얼른 대답하는 것 대신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태호는 직원들의 시선을 피해 연우에게 얼른 눈짓했다.
‘뭐해?’
하지만 그건 별 소용 없는 짓이었다. 본 건지 못 본 건지. 이연우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건 태호였다.
“이연우!”
임태호는 몰랐지만, 그 순간 직원 일동은 마치 파도치듯 작게 움찔했다.
“안 돼?”
품이 넉넉한 교복 차림을 한 흐린 인상의 태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슈트를 입은 신화그룹의 나이트에게 반말로 채근하는 건, 사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참 말도 안 되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네. 가요.”
말이 실체화되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면 방금 이연우의 대답 끝에는 하트가 붙어 있었을 거다. VIP 대접이라면 이골이 난 직원들이었지만, 그들은 대체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연우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먼저 성큼성큼 걷는 태호의 뒤를 홀린 듯이 따라 나갔다. 급하게 발을 옮기는 임태호는, 이연우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방금 룸 안에서의 행동을 혼내기 시작했다. 네, 네에. 네. 알겠어요. 죄송해요. 이연우는 임태호가 하는 말에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건 과장 없는 사실이었다.
이연우의 영혼은 아직도 그 VIP 룸에 남아 있었다. 세상에 교복 입고 ‘연우 형’이라고 부른 다음에 ‘이연우!’라니. 이건 반칙 수준이 아니었다.
완전 룰을 파괴한 거나 다름없다.
“연우 너, 듣고 있어?”
……아, 돌겠네. 진짜.
이연우는 여전히 귓가가 빨갛게 변한 채인 임태호를 보며 차마 하지 못하는 대답을 앓는 듯이 삼켰다. 진짜 큰일이었다. 바보 같다는 건 알지만, 정신을 못 차리겠다.
방금 진짜 개청순섹시했어.
실로 완벽한 드림보이의 등장이었다.
◈◈◈
호텔 라운지에서의 식사는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곳에 도착하자 완전히 힘이 풀린 임태호는 곧바로 교복 재킷부터 벗은 후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았다. 이연우는 그런 임태호를 보며 작게 소리 내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음에는 꼭 형이 써 둔 식당에 같이 가요.”
“이 꼴로는 다음은 없어. 절대로.”
“하하, 알았어요.”
지금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호텔 S의 라운지다.
잠시 넋이 빠졌던 이연우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근사한 곳으로 가자고 난리였지만, 임태호가 무조건 가까운 곳으로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통해 의도치 않게 신화그룹의 체인만 돌아다니게 됐다.
재킷은 진작에 벗을걸. 태호는 여전히 교복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곧바로 학생처럼 보이지 않는 제 차림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진짜 오늘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임태호의 서른셋 인생 부끄러움 어워드 1위를 차지할 하루였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상황의 주범인 이연우는 어떻게 따지기도 어렵게 생글생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심지어 축 늘어져 있는 저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눈을 찡긋하는 장난기라니, 정말 해도 너무했다.
결국, 태호는 그 역시도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 먹지? 형은 뭐 먹고 싶어요?”
“……기분은 좀 좋아졌어?”
갑작스럽게 툭 떨어진 태호의 물음에 이연우는 무슨 말이냐는 듯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끝내 주는 저녁 야경을 배경으로 한 후배의 얼굴은 참 이럴 때마저도 곱고 근사해 보였다. 언제였던가 ‘너희 가족들은 다 잘생기고 예뻐?’ 하고 물었던 질문에 ‘저는 신화그룹 전체 유전자의 기적이에요.’라고 말하던 대답이 생각난 임태호는, 작게 쿡쿡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우 너 요새 많이 피곤해했잖아. 며칠 전에는 전화하다 잠들고.”
이연우는 요새 정말 바빴다. 그래도 전에는 평일에 한두 번은 같이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걸 꿈도 꾸기 어려울 정도로 늘 시간에 쫓겼다. 밤늦게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게 신경 쓰였던 태호는, 그때마다 제가 보았던 ‘밖’에서의 이연우를 떠올리며 좀 찡해졌었다.
언제나 그런 얼굴과 그런 모습을 해야 하니까 힘들겠지. 그러니까 연애 같은 것도 생각나고 그러나 보다. 조금은 핀트가 다른 걱정이었지만, 임태호가 예의 그 ‘보고서’를 더욱 힘주어 작성했던 것도 상당 부분 그 안쓰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 네가 그렇게 재밌어하니까 했지, 다른 사람이면 이런 거 절대 못 해.”
“…….”
“창피해. 진짜.”
한평생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조곤조곤 살아온 임태호다.
누군가는 답답하고 고루한 삶을 산다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얌전하기만 했던 사내가 오늘 고등학생 때 입던 교복까지 입고 이 말도 안 되는 장난스러운 하루에 동참한다는 건, 사실 번지점프보다도 더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임태호는 제 교복을 들고 눈을 반짝이는 이연우를 향해 딱 부러지게 ‘싫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스무 살에 처음 만났고, 이제 스물여덟이 된 이연우는 함께한 시간이 8년이나 됐는데도 언제나 그 나잇대보다 딱딱하고 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을 줄 안다.
뭔가 조금은 힘이 빠져서 처진 것 같았던 이연우가 대번에 세상에서 예쁜 웃음을 짓고 정말 그답지 않은 아이 같은 장난을 치자고 하는데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왔다. 오히려 ‘아, 모르겠다. 오늘 하룬데, 뭐.’ 하는 자포자기의 문장이 먼저 떠올랐다.
오늘처럼 정신없는 아이 같은 하루는 정말 이연우여서 가능했다.
임태호는 왠지 제가 내뱉은 말에 얼굴이 뜨끈해져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후배의 눈을 피해 물을 홀짝였다. 뭐라도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 말 없이 그저 자신을 눈에 담는 시선이 따가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낯간지러운 침묵을 이기지 못한 태호는, 뭐라도 시키자고 먼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태호의 계획은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저쪽, 라운지로 들어오는 홀 입구에서 ‘어어!’하는 누군가의 놀란 감탄사에 묻혀 물거품이 됐다.
또각, 또각, 또각. 대리석에 부딪히는 구두 굽 소리는 경쾌할 만치 빨랐다.
그리고 그 소리만큼…….
“이 개쓰레기 새끼!”
주먹도 빨랐다.
“뭐, 연아한테 말하지 마? 잘도 말하지 말래!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형?”
얼빠진 이연우의 목소리는 정말 듣기 드문 것이었지만, 임태호는 그것에 놀랄 겨를이 없었다. 그것보다 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찾아온 슈트 차림의 사내는, 이제 이연우를 주먹으로 패다 못해 발로 차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순간 얼음이 된다더니 딱 그 짝이 된 임태호는, 정말 쩡하니 굳어서 입만 벌렸다.
“그냥 맞아! 맞아 죽어, 그냥!”
“잠, 깐, 잠깐, 형! 형, 잠깐 내 말 좀!”
“형이라고 부르지 마! 대체 언제 정신 차릴래, 어?!”
이연우와 임태호가 있는 곳이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한 번 차단된 곳이라는 건, 어쩌면 오늘의 행운 중 가장 큰 것일지도 몰랐다.
“개망나니 새끼 좀 철들었나 했더니, 미성년자아?! 고등학생? 백화점 갔다가, 이젠 여기로 와? 간이 부었지, 네가?”
“진짜 진정하고, 아! 방금 진짜 아팠……!”
신화그룹의 킹, 새로운 후계자. 대표 이민혁. 그는 신화그룹 호텔 S를 맡고 있다. 그리고 승마가 취미인 민혁은 다리 힘이 정말로 세다. 정말정말 세다.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진정하라고 때릴까? 그냥 오늘 다 끝내! 내가 진짜 이연우 너 때문에 쪽팔려서-.”
이민혁은 정말 서른셋 인생에서 오늘만큼 화가 난 적이 없다.
언제나 집 밖에서만큼은 냉랭한 이미지와 질서를 중요시하던 민혁은 지금 그 가면을 완전히 내던진 채다. 세상에, 이 개망나니 막냇동생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기뻐서 폴짝폴짝 뛰었던 게 엊그제 일인데. 너무너무 기뻐서 밤잠까지 설쳤는데. 어떻게 기른 동생인데!
그는 이전부터 제 동생에게 누누이 말했었다. ‘알파, 오메가, 베타 다 만나도 되는데, 미성년자는 안 돼!’ 그런데 그렇게 신신당부로 가르쳤던 막내, 이연우가 미성년자를 끼고 오늘 하루 신화그룹 체인 백화점에서 했던 행동과 이제는 호텔로 막 들어섰다는 것을 보고 받았을 때의 기분이라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뒤늦게 배신감이 물밀듯이 솟구쳤다.
진짜 이 새끼, 가만히 안 둔다. 이민혁은 목까지 벌겋게 변한 채로 넥타이를 풀어서 비어 있으리라 생각한 제 동생의 맞은편으로 휙 던졌다. 그러자 그 넥타이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대신에 공중으로 붕 떴다. 누군가가 아슬아슬하게 붙잡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
“…….”
언젠가 한 번쯤 겪은 적 있었던 침묵이 반복됐다.
“……하, 후우, 내 말 들으랬잖아! 아, 진짜!”
이연우는 엉망이 된 제 옷을 조금 신경질적으로 펴면서 약간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가 이 꼴이 되고도 성격대로 크게 목소리를 내지 못한 건, 이민혁의 넥타이를 잡은 맞은편의 사내 때문이었다.
……아. 진짜 죽고 싶다.
순딩순딩. 온화한 단어 사용의 대표주자 임태호는, 그답지 않은 격렬한 단어를 떠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뭐야. 둘이 무슨 선봐?
이연우는 한껏 비뚜름해진 채로 투덜거렸다.
물론 그건 생각에 국한된 것으로, 겉으로는 살짝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한편, 불만의 대상인 두 오메가는 그런 이연우의 불만은 깡그리 무시한 채로 자신들만의 수줍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실례되는 일을……. 후우, 죄송합니다. 저는 연우 형, 이민혁이라고 합니다.”
“아! 아아, 네, 저는 임태호입니다. 연우 학교 선배고요…. 저야말로 저번에 비서라고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요. 정말 뵐 낯이 없습니다.”
물론 발그레하게 뺨이 물든 임태호는 꽤 볼만하다.
이연우는 임태호를 핥듯이 뜯어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봐도, 봐도 신기했다. 깔끔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맞지는 않는 슈트를 입고 다닐 땐 그냥 평범한 그 나잇대의 직장인이었는데, 머리를 다듬지 않고 교복에 운동화를 신겨두니 또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고 동글동글하니 순한 인상이라 옷의 영향을 많이 받는 걸까?
이연우는 제 시선을 태호의 얼굴에서부터 쭉 따라 내리기 시작했다. 그건 누가 본다면 참 고아한 신화그룹의 나이트 그 자체였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연우를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봤던 사람이 있다.
바로 이민혁이다.
그는 천천히 나른한 빛이 깃드는 제 막냇동생의 눈을 정확히 파악하고는, 웃는 낯을 한 채 테이블 밑으로 연우의 정강이를 찼다. 그 탓에 이연우는 1초 정도 숨을 들이켰다가 별일 아닌 척 내뱉어야 했다.
이민혁은 고운 눈 안에 ‘씨발 씨발 씨발’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연우, 너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평상복 사 와.”
“……당장?”
“당장. 사람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물론 이 형제의 대화 사이에는 괜찮다며 허둥지둥 고개를 저으며 임태호의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이민혁은 임태호를 향해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꼭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하는 것으로 그 소심한 남자의 입을 도로 다물게 하는 데 성공했다. 임태호는 이연우의 형이기 전에 연일 경제지에서만 보던 엄청난 위치의 사내가 저에게 존대하며 공손하게 사과하는 것을 못 견디게 불편해했다.
“백화점 문 닫았어, 형.”
“옷은 백화점에서만 판다든?”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던 이연우의 말은 오히려 본전도 못 찾았다.
이연우는 ‘하하, 그렇지.’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으면서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욕을 삼켰다. 그래, 뭐 임태호의 옷을 사 오는 건 나쁘지 않다.
이제껏 가끔 생각날 때 선물하는 정도가 아니면 태호의 옷을 신경 쓸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이것저것 입히는 맛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맨날 무채색 아니면 네이비색이 한계인 노숙한 옷장을 제 취향으로 가득 채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제 형인 이민혁이었다.
이연우는 웃고 있는 눈과는 달리 움직이는 고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는 자신의 형과 임태호를 여기에 단둘이 두고 가는 게 좋은 선택일지 확신이 안 섰다. 하지만 말간 표정으로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태호를 보자니, 차라리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뭐.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태호 형, 잠깐만 기다리세요.”
평소에도 저렇게 공손하고 예쁘게 말하면 좀 좋을까.
이민혁은 마치 꿈결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며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제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삼켰다. 물론 그런 아련한 감정은 ‘쓸데없는 소리 하면 진짜 전쟁 날 줄 알아! 씨발! 종아리에 백퍼 멍들었어!’ 하고 곧바로 휴대폰을 울리며 도착한 메시지에 와장창 깨졌다.
그러고는 좀 궁금해졌다.
대체 이렇게 제 성질머리대로 살아온 녀석이 어쩌다가…….
“아. 그러고 보니까 식사하셨나요?”
“아. 아니요.”
딱 봐도 순하다 못해 다른 사람한테 폐 끼치는 거라고는 모를 사람한테 꽂혀서 팔자에도 없는 예쁜 척을 하고 다니는지, 정말 알고 싶어졌다. 이민혁은 평소 외부에서 짓던 형식적인 얼굴 대신 느슨하게 풀린 미소를 한 채로 최대한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연우 기다리면서 뭐라도 좀 먹을까요?”
“…넵.”
솔직히 민혁은 태호의 대답에 웃음이 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래도 후배 형에 자신과 동갑인 사람한테 저렇게 깍듯하게 ‘넵’이라니, 대체 제 동생과 평소에 어떻게 대화할지 상상도 안 갔다. 보고서로 봤던 증명사진 속 얼굴보다 훨씬 더 얌전해 보이는 인상인 임태호는, 사실 이연우와 같이 서 있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것처럼 존재감이 약했다.
그래서 더 연우의 눈에 들었던 걸까.
이민혁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임태호를 사근사근하게 챙겨 주며 식사 주문을 챙겼다. 대체로 민혁이 말하고 태호가 나직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대화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곳은 이민혁의 공간이기도 했기에 분위기 전환은 어렵지 않았다.
민혁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던 태호의 어깨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걸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민혁도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었던 터라 식사를 어느 정도 하고 나자 한참을 이야기하던 둘 사이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깔렸다.
오늘의 대화에서 한 번도 먼저 화제를 트지 않던 태호의 입이 천천히 열린 건 그때였다.
“저어. 그런데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이민혁은 너무 공손하다 못해 조심스러운 임태호의 물음에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태호는 저와 동갑내기인 민혁의 허락에도 여전히 약간은 망설여지는지 입술을 달싹이며 한동안 머뭇거렸다. 덕분에 민혁 역시 약간 속이 두근거렸지만, 겉으로는 그런 태호를 재촉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띤 채 얌전히 기다렸다.
“혹시 연우가…… 집에서는 많이 다른가요?”
“……네?”
워낙에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라 까딱하면 놓칠 뻔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두들겼다. 그 탓에 민혁은 저도 모르게 살짝 삐끗하여 동요하고 말았다.
“아! 나쁜 의미는 절대 아니고요.”
임태호는 누가 봐도 무해한 얼굴로 귀를 붉히며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연우랑 꽤 오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연우는 항상 너무 어른스럽고 듬직하다고 해야 하나.”
“하, 하하하….”
“연우 형님께서 연우한테 말씀하시는 게 신기했어요.”
겉으로는 임태호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지금 이민혁은 태호 못지않게 엄청나게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그는 눈앞의 선량한 표정을 한 남자가 줄줄 읊는 말 중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제가요?”
이민혁이 꽤 능숙하게 담담한 표정을 만들 수 있는 편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가엾은 임태호는 몸 둘 바를 몰라 했을 것이다. 민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잠시 하얗게 변했던 머리를 굴렸다.
내가 대체 뭐라고 말했더라. 이민혁은 잠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던 얼마 전의 상황을 되짚기 시작했다. 정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서 무작정 이연우가 있다고 하는 곳으로 직행했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개쓰레기 새끼에, 개망나니 새끼에, 사람 새끼가 아니라고 했다.
아주 그냥 새끼란 새끼는 다 쳤다.
그걸 깨달은 이민혁의 얼굴은 순간 핼쑥해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신화그룹의 일원으로서 단련된 얼굴과 말은 이런 위기의 순간에 적절하게 빛을 발했다. 민혁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필사적으로 제 말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아아, 뭐. 막내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어렸을 때부터 데리고 다니기도 했으니까요.”
“아. 형님이랑 같이 유학 갔었다는 말은 들었어요.”
“네에. 아무래도 그렇게 쭉 같이 있다 보니까 좀 편해서 한 말이죠. 하하!”
절대 망하면 안 된다. 우리 막내의 연애 전선!
이민혁의 눈물겨운 노력은 사실 이연우에게는 ‘그럴 거면 처음부터 그 지랄을 떨지 말았어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지만, 여하튼 그랬다. 태호는 민혁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새로 알게 된 이연우의 면을 신기해했다. 자신이 보기엔 손 갈 일 없는 마냥 근사한 후배인데도 역시 가족이 보기에는 좀 다를 수밖에 없구나 싶어서였다.
한편, 이연우보다 훨씬 뻔뻔하지 못했던 형, 민혁은 왠지 마음이 불편해져서 괜히 물컵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제 동생이 마음에 둔 사람 앞에서 곱게 웃고 말하는 건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 귀 끝까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못 마주치던 연우의 얼굴을 떠올리면 괜히 찡해지기도 하고, 언제나 선후배였던 이 관계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감히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뭔가 속이 따끔따끔했다.
이민혁은 우연찮게 임태호의 비밀을 알게 됐다.
이연우가 직접 말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제 동생의 얄팍한 인간관계를 잘 꿰고 있던 터라 어렵지 않게 눈치챈 것에 가깝다. 이건 다시 말해, 이민혁은 양쪽 모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중계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음, 태호 씨.”
뭔가를 한참을 생각하던 민혁은 조심스럽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혹시 ○○○ 물산 아실까요? □□기업도요.”
“네. 알아요.”
“그리고 또…… 아, 제일 유명한 곳은 아무래도 지노그룹이겠죠.”
태호는 말갛게 눈을 깜박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노’. 그곳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전자 부문에서 신화그룹과 언제나 경쟁하는 굴지의 대기업. 호텔 재벌로 시작한 신화그룹은 지노에 비해 비교적 후발주자로 전자 산업에 뛰어들었고, 몇십 년간 몇 대 재벌 그룹에 나란히 꼽히는 영원한 라이벌로 꼽히기도 한다.
이민혁의 선문답은 계속됐다.
“혹시 지금 말한 곳들의 공통점을 아시겠어요?”
사실 갑자기 이민혁이 저에게 그 회사들의 이름을 쭉 나열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태호는, 왠지 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약간 찔끔해진 채로 작게 ‘글쎄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민혁의 눈에 희미한 웃음기가 걸렸다.
쌍꺼풀이 없는 민혁은 그 동생인 연우와는 생김새가 꽤 달랐지만, 역시 형제는 형제인지 서늘했던 인상이 웃을 때 바뀌는 것만큼은 제법 비슷했다.
“태호 씨랑, 저희 동생 녀석이랑 동문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그랬다.
이제껏 살며 가장 잘한다고 칭찬받았던 것이 공부였던 임태호는 그래도 사람들이 한 손에 꼽는 학교에 갔고, 그곳에서 이연우를 만났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연우 말고도 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컨대 방금 이민혁이 말한 이들이 그렇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아무래도 이쪽이 좁다 보니까 어디 행사라도 가면 꼭 한 번씩 마주치는데, 사실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기업 3세들이 국내 대학 가는 이유는 하나거든요.”
“이유요?”
“인맥. 선후배, 동기 인맥. 우리나라 그거 심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이민혁은 조금 묘한 얼굴이라, 임태호는 뭐라 대답하는 것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쪽을 택했다. 왠지 뭐라고 말을 먼저 꺼낼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호의 옅은 경직을 눈치챈 탓일까, 이민혁은 얼른 표정을 고쳐 짓더니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연우 그 녀석은요. 행사나 중요한 자리 가서도 자기 학교 사람들 아는 척을 안 해요.”
“…….”
“선후배는 물론이고, 뻔히 같은 학번이던 동기들까지……. 먼저 인사하면 대충 받아주는 게 다예요. 아니 뭐, 받아주면 다행이죠. 쌩한 얼굴 한 채로 ‘반갑습니다, 신화그룹 이연우입니다.’ 이런다니까요.”
대체 ‘쌩한 얼굴을 한 이연우’는 어떤 걸까.
태호는 조금 멍하게 제가 들은 표현을 곱씹었다. 그러나 이연우와 함께했던 8년의 시간 어디에도 그런 표정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게 참 이상했어요. 분명히 연우는 이 말을 되게 자주 했었거든요.”
민혁은 제 모습이 비춰 보이는 찻잔에 시선을 둔 채로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 오늘 선배랑 약속 있어.”
옛 기억을 살피고 있는 건 태호뿐만이 아니었다. 이민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어땠었는지 알고, 또 지금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고 있다. 그건 임태호조차도 모르는 이연우의 다른 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들이 다 너무 신기해서 물어봤어요. 파티나 행사 가서도 한 번도 못 봤는데, 대체 그 선배가 누구야? 하고.”
“……아.”
“그런데 물어도 말을 안 해요. ‘알아봤자 귀찮게 할 거잖아.’ 하면서.”
작은 웃음기가 걸려 있는 문장이었건만 태호는 그것에 똑같이 눈을 휘어 웃을 수 없었다. 왠지 목이 꽉 막히고 눈가가 시큰하니 열이 올랐다. 임태호는 어느새 저를 똑바로 보고 있는 이민혁의 시선을 눈치채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우한테 선배는 임태호 씨 딱 한 분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이민혁은 뭔가 개운해진 목소리였다. 그는 제 동생이 실수로 자신에게 던진 임태호의 비밀 대신, 제 동생이 가지고 있던 비밀 하나를 몰래 흘렸다.
“너무 오지랖을 부렸나요. 이연우 걔, 이거 알면 또 저한테 엄청 잔소리할걸요.”
“아, 아니에요. …어, 그랬군요. 그렇구나…….”
태호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꾸 그 끝이 먹먹하게 흐려지는 단어들을 두서없이 배열했다. 그건 참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 같은데, 제 후배의 다정한 형은 그마저도 괜찮다는 듯 이연우와 꼭 닮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
흐린 쌍꺼풀, 둥그런 코끝, 통통한 얼굴선.
나이는 서른셋에 그럭저럭 자리 잡은 중견 기업의 대리. 평범한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공부는 곧잘 한다는 말을 들었고, 공부 외에는 딱히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찾지 못해서 그 유일한 장기인 공부를 열심히 했다.
실력 반, 운 반으로 나름 손꼽히는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대학에 그렇게 잘 적응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중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더 사람들 사이를 겉돌게 됐다. 술자리에서 걸핏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제각각의 풋풋한 연애사 그 어느 구절에도 끼어들 수 없었고, 그 나잇대의 남자들이 가장 먼저 걱정하며 시기를 맞추는 군대도 언제나 머나 먼 화제였다.
임태호는 거울 속에서 이를 닦고 있는 칙칙한 눈가의 남자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베타인 척하는 오메가.’
예민했던 고등학생 시절, 약간의 의기소침으로 시작된 이 비밀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고 진득해졌다. 베타의 사회에도 오메가의 사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의 다른 뜻은 동성을 바탕으로 한 최소한의 사회 그룹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태호는 그것을 학교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치듯 군 휴학을 하면서 깨달았다. 동기들이 모두 복학할 때쯤에야 한 늦은 입대였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입영통지서에 자그맣게 적힌 ‘O’마크를 누군가 볼까 싶어 허둥지둥 가방 깊은 곳에 숨기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다시 시작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벌벌 떨면서 겨우겨우 오메가임을 고백했던 첫 연애는 베타 임태호는 괜찮아도 오메가 임태호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끝났다.
‘난 그냥 편하게 만날 사람을 원했는데, 오메가는 좀 부담스러워.’
태호는 아직도 가끔 거의 10년 전에 들었던 그 문장의 의미를 되짚고는 한다.
……편하게? 어떻게, 뭘 편하게 만나려고 했었는데?
차라리 이해하지 못했으면 편했을 뜻은, 임태호를 언제나 처음 억제제를 먹었던 그날로 돌아가게 하였다. 태호는 그나마 옅은 눈인사라도 나누던 사람들이 대부분 졸업하거나 완전히 학년이 갈린 때가 되어서야 복학했다.
그게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다. 신입생이던 스무 살 이연우를 만났던 그날은 그랬다.
“임 대리님, 오늘 몸이 안 좋으세요?”
“아, 아뇨! 아니에요. 커피 한 잔 마시고 해야겠어요.”
아침부터 이상할 정도로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임태호를 신중하게 살피던 동료 하나는, ‘하긴. 요새 밥 먹고 오면 너무 졸리더라고요.’ 하며 태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태호는 괜히 다른 사람을 걱정하게 한 것 같아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탕비실이 괜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전기 포트에 물을 받고 버튼을 누르자 머지않아 보글보글 끓으면서 증기가 올라왔다.
딸각. 물이 다 끓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임태호는 좀 늦게 반응했다. 사실 요 며칠 그는 계속 이런 상태다. 자꾸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꽉 차서 이렇게 뭐든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한다.
이연우.
이름만으로는 성별을 유추하기 어려운 고운 어감을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갔다. 이연우는 모를 것이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완전히 포기했던 시간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다른 빛깔로 가득 찼었는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다.
임태호가 가지고 있는 소중하고 고운 기억들은 하나같이 이연우가 만들어 준 거다.
푸른 녹음이 일렁이는 캠퍼스를 누군가와 똑같은 음료를 입에 물고 걸을 때도, 밤새워 함께 시험공부를 할 때도, 언젠가 지나가듯 나중에 보고 싶다고 말했던 영화를 나란히 교양 수업을 빼먹고 보러 갔을 때도 언제나 그 다정한 후배가 곁에 있었다.
예쁜 시간뿐일까.
갑작스러운 조부모의 입원으로 혼자 서 있게 된 졸업식에 숨까지 몰아쉬며 급하게 달려왔던 사람도,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부끄러울 정도로 커다란 꽃과 케이크를 들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집 앞까지 찾아왔던 사람도 이연우였다.
늘 소중하고 어여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사내였다.
임태호의 인생에서 이연우는 그 무엇보다 반짝이는 보물 같은 부분이었고, 그 자신보다 더 자랑스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껏 그렇게 8년을 함께하면서도 임태호는 단 한 번도 그 근사한 알파에 대한 사소한 기대조차도 품지 않았었다. 감히 품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연우에게 제가 어떤 사람일까 하는 물음은 차마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도 해 본 적 없었다.
저런 사람이 내 후배여서, 또 나와 이렇게 계속 함께해 주어서 참 기뻤다.
하지만 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이연우가 서 있는 곳과 제가 밟고 있는 땅의 위치를 항상 가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편하게 만나면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주말이면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이라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연우가 바빠지고 그가 원하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때가 온다면 언제든 지금의 소중한 관계가 멀어지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고, 언제나 무의식 저쪽에서는 매일같이 쌓여 가는 다짐을 했었다. 오랜 준비를 해 두어야 언제고 찾아올 날에 조금이라도 우울함을 덜고 여느 때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연우, 그 상냥한 후배가 저와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같은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이연우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과 오늘의 상냥함에 만족했었다. 그것만으로도 분에 겨운 일이라고 여겼었다.
그랬었다. 며칠 전까지는.
“……아.”
탕비실 의자에 앉아서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임태호는, 이미 타 둔 커피믹스에 꽤 미지근해진 물을 대충 부었다. 커피라도 대충 들이부어야 자꾸 머리를 드는 바보 같은 생각들이 잠잠해질 것 같았다.
한편, 8년간 함께했던 탓일까.
평범한 일상에 지장이 생긴 건 임태호만의 일이 아니었다. 왼손에 꾹 쥔 휴대폰을 놓지 못하고 틈날 때마다 액정을 확인하는 이연우 역시, 어제오늘 일에 집중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연우, 너 오늘 회의에서도 그러고 있어, 어?”
“…어련히 잘할 거거든!”
“진짜 잘해. 괜히 오늘 같은 날 꼬투리 잡혀서 좋을 거 없으니까.”
이연우는 제 누나 이연아의 뾰족한 목소리에 뻐근해진 제 뒷목을 주무르며 알았다는 듯 대충 눈짓했다. 그 누구보다 빈틈없이 완벽한 차림새인 그는, 오늘 주요 이사들이 모두 모이는 임원 회의에 참석한다. 평소 같았다면 홍보팀 팀장이 무슨 임원 회의냐며 내뺐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다. 형인 이민혁이 대표가 된 후 처음으로 그를 중심으로 한 회의다. 반드시 그 옆을 지켜도 모자를 판이다.
하지만 이연우는 오늘처럼 중요한 날마저 자꾸 아무런 알림도 없는 자신의 휴대폰에 눈이 갔다.
임태호는 며칠 전 주말 이후로 연락이 어렵다.
조금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신통치 않다.
평소보다 메시지의 답변 주기도 늘어났고, 전화하면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한참을 뜸을 들이다 작고 느리게 대답한다. 그건 아주 묘한 변화였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할 이연우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반해서 안절부절못해 본 적도, 속앓이한 적도 없던 알파는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작은 행동에도 쉽게 초조해진다는 것을 몰랐다.
망할. 이거 끝나면 오늘 밤엔 얼굴 보러 가볼까.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 느긋한 미소를 띤 채였지만, 머릿속으로는 자꾸 온갖 상상이 둥실거렸다. 이연우는 오늘따라 저를 꾸중하듯 들리는 회의를 시작하겠다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깨에 빳빳하게 힘을 줬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아니, 최소한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다. 회의 내내 작은 틈도 보일 수 없는 신경전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 어느 쪽도 갓 왕좌를 이어받은 3세의 편인 곳이 없었다. 아버지를 지지하던 자들도, 그 동생이었던 이정호 전 대표를 지지하던 자들도 결국에는 같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이민혁을 손아귀에 쥐자.’
이전까지는 보기 좋게 양분되어 평화롭기는 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권력이다.
그런데 지금, 후계자로 불리는 새 대표가 자리에 앉으며 힘의 우위에 설 기회가 왔다. 두 세력 중 순순히 고개를 숙일 만큼 야망 없는 자들은 없었다. 피부가 아릴 만큼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욕망 덕분에, 이연우는 물론이고 다른 3세들은 회의 내내 한 번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연우는 회의가 끝나고 웅성거리며 자료를 정리하는 분위기 속에서 제 형, 이민혁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나 먼저 들어갈게.”
“그래. 바로 집으로 가니?”
“아니. 볼일 좀 보고.”
연우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제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6시 20분. 퇴근 시간에 딱 걸려서, 태호의 빌라까지 가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다. 차라리 아예 넉넉잡고 밤에 출발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시간대였지만, 그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임태호가 보고 싶었다. 1분이라도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이연우 그 자신도 요새 태호에게 쏟는 어리광이 심해졌다는 자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전에는 대체 어떻게 잘 지냈던 건데?’하면서 종종 스스로를 향한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오늘처럼 힘들었던 날만큼은 꼭 임태호를 만나고 싶었다.
여느 때와 같은 다정한 목소리. 희미한 미소.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들마저 하나하나 신중하게 들어주고, 진심이 가득 담긴 예쁜 단어들을 골라 주는 상냥함. ……거기에 이제는 간질거리는 흐린 향까지!
이연우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속으로 작게 욕을 삼켰다.
8년을 옆에 두고 몰랐는데도 다른 새끼가 안 채 간 게 용하다, 진짜.
“이민혁 대표님.”
얼핏 들으면 한없이 깍듯해 보이는 목소리였건만, 내내 굳어 있던 긴장이 살짝 풀리던 얼굴 위로 순식간에 다시 살얼음이 올라왔다. 박영진 이사였다. 이연우는 사람들이 제법 빠져나간 회의실 안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남아 있는 멤버들은 꽤 뻔했다. 박영진 이사를 필두로 한, 이정호 전 대표의지지 세력들이었다.
“잠시 따로 자리를 내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예, 박 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빙긋이 웃는 주름진 입가는 자상한 듯 접혀 들었지만, 그 웃음에 속을 만큼 순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연우는 그 어떤 내색도 없이 곧잘 대응하는 제 형 이민혁 뒤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나마 박영진 이사의 시선이 저에게 닿았다 떨어졌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는지, 이어지는 박영진의 말은 공손한 문장에 묘하게 뾰족한 가시를 품고 있었다.
“하하. 별건 아닙니다. 전해 듣기로는 얼마 전 호텔에서 조금 소란이 있었다고요.”
별 표정의 동요 없이 있던 이민혁의 눈가가 처음으로 살짝 찌푸려졌다.
연우가 며칠 전 ‘그 모습’을 한 임태호와 함께 다닌 곳이 신화그룹의 체인이고, 하나같이 VIP들이 머무는 공간이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두 사람 덕분에 입단속을 시키기도 쉬웠다. VIP룸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모아두고 그날 보았던 것에 대해 엄히 함구령을 내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 효과가 나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건, 지금 이민혁과 같이 서 있는 이연아의 눈에 걸린 의아함이다. 신화그룹의 퀸으로 불리는 그녀조차 그 소란스러웠던 하루를 모른다.
……그런데 박영진 이사가 그날의 이연우를 안다?
이건, 차라리 사방팔방 이야기가 퍼진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다. 이민혁은 대답 대신 이어지는 박영진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대표님이나 여기, 우리 이연아 전무님, 그리고 이현 팀장님도 시간이 되신다면 함께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룹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연아는 제 오빠 이민혁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 살짝 턱짓했다. 하지만 이민혁은 그 물음에도 답해 줄 수 없었다. ‘우리 막내가 고등학생이랑 원조교제를 하고 다니는 줄 알고 갔는데, 사실 그 고등학생이 서른셋이었어.’ 같은 말은 임태호의 인권을 위해서라도 삼켜야 할 문장이었다.
결국, 먼저 나선 것은 사건 당사자인 이연우였다.
“가만 들어보니 그건 아무래도 제 얘기 같은데요, 박 이사님.”
이연우는 속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다 지껄이면서도 겉으로 만큼은 그린 듯한 고아한 눈웃음을 걸었다. 그 모습은 다정하다 못해 달콤하게까지 보여서, 상황을 모르는 이연아와 이현은 그들도 모르게 살짝 눈썹을 꿈틀했다.
으레, 저런 표정을 한 이연우는 엄청나게 열이 받아 있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모든 일에는 질서가 있지요.”
“질서요?”
“아무리 요새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지킬 건 지켜야 하니까요.”
이어지는 박영진 이사의 말에 이연우의 고개가 살짝 나른하게 젖혔다.
“이게 다 사회생활 아니겠습니까, 도련님?”
이연우와 이현은 같은 팀장 직책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현의 이름 뒤에는 팀장님을, 이연우의 이름 뒤에는 도련님을 붙인 이유는 하나다.
‘일종의 서열 잡기.’
대부분의 꽉 막힌 이들이 생각하기에, 사실 나이트 이연우는 그들이 대하기 가장 만만한 존재처럼 보인다. 3세 중에서 나이도 가장 적고 경력도 짧은 데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 역시 이유 없이 낮춰 보는 것에 비합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사회생활……. 네에, 그렇군요.”
아마 지금처럼 곱게 눈웃음을 치는 지금의 이연우의 태도 역시, 주름지고 거만한 얼굴에 의기양양함을 짓는 데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이연우는 여전히 예쁜 미소를 건 얼굴 그대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연우를 정말 가까이서 봐왔던 사람들은 잘 안다.
“그럼 따로 자리를 마련하시기 전에, 먼저 여기서 여쭤야겠군요.”
저 천사 같은 미소는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다.
“내 데이트에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이민혁은 묘하게 바뀐 이연우의 말투를 눈치채고는 살짝 한숨을 삼켰다.
저번부터 노골적으로 이연우에게 핀잔주려는 자들의 행동을 말리지 않은 건 순전히 이연우를 위해서였다. 그러잖아도 눈에 띄는 이연우라, 만약 눈에 띄게 감쌌다가는 더한 빈정거림을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민혁은 차라리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전부터 중재하는 게 나았을까 하는 후회를 뒤늦게 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편, 이연우의 당당하다 못해 사근사근한 태도에 박영진 이사의 쪽에 서 있던 중년 사내 하나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정말이지 입에 담는 게 다 민망하군그래!”
…대체 무슨 일인 건데?
당장의 흐름이 도저히 얼른 파악되지 않는 이연아는 그녀답지 않게 조용히 눈을 굴렸다. 보아하니 아마도 자신들의 막내 이연우가 뭔가 저지른 건 분명한데, 제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면 오빠인 이민혁이 손을 써도 제대로 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이연아의 의문은 머잖아 이어진 한 이사의 빈정거리는 문장에 깔끔하게 해결됐다.
“대낮에 뻔뻔하게 고등학생이랑……. 백화점이요? 호텔? 하, 거 참. 방금 데이트를 했다고 했습니까?”
만약 마음 한구석에 돌이 내려앉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이었다면, 조금 전 이연아가 받은 충격은 그 누구보다도 컸을 것이다. 순간 석상처럼 딱 굳었던 연아는 저게 정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제 오빠 이민혁을 바라보았다.
한데, 이민혁의 태도는 조금 묘했다.
이연아의 경악 어린 태도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작게 어깨를 으쓱한 게 다였다. 고등학생이랑 백화점이랑 호텔을 돌아다녔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이연아는 작게 입을 벌렸다. 제 오빠가 막냇동생 뒷수습을 하고 다니더니 이제는 기본적인 모럴마저 흔들리는 건가 싶어져서였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민혁에게는 조금 억울한 해석이다.
“네. 분명히 데이트했다고는 했는데…… 하하, 박 이사님. 뒷조사를 좀 대충 하셨나 봅니다.”
“다시 말해 주겠습니까?”
“절 쪽 주려면 좀 더 분발하셔야겠단 말입니다.”
세상에 저보다 더 달콤하게 웃을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고운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이어지자, 솔직히 보는 입장에서는 조금 멍한 기분이 됐다. 이연우는 그 우아한 태도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로 제 누나 이연아의 머리를 백지장으로 만들 말들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 학생 아닙니다.”
“…….”
“서른셋이었습니다. 교복만 입었을 뿐이고요.”
미안해요. 태호 씨.
이민혁은 이 자리에 없는 그 수줍음 많은 사내를 떠올리며 속으로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저 몇 시간 함께 있었던 것이 다이지만, 태호가 이 상황을 안다면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할 것이 뻔히 그려지는 민혁이었다.
마치 ‘오늘도 태양은 뜨고, 지구는 회전한다.’라는 말처럼 담담하게 흘러나온 이연우의 말에 놀란 건 이연아뿐만이 아니었다. 승기를 잡은 군인처럼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이연우를 몰아치던 박영진 이사를 비롯한 몇몇 임원이 술렁였음은 물론이고,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로 있던 사촌 이현마저 대충 얼개가 그려지는 전개에 그답지 않은 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멀쩡한 건 이미 한 번 큰 폭풍을 겪고 나자 모든 것에 초연해진 이민혁과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연우뿐이었다. 그런 담담함이 눈에 거슬렸던 탓일까. 이사 중 특히 입이 거친 한 명은 괜히 날이 선 어조로 한껏 빈정거리는 말을 뱉었다.
“……나, 나 원 참! 어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부끄러워해야 할 게 뭔가요?”
“뭐요?”
“내가 나 싫다는 사람 붙들고 억지로 입혀서 목줄이라도 끌고 다녔다던가요? 헤어질 때 내 손으로 예쁜 옷으로 갈아 입혀서 집까지 모셔다드렸는데요.”
그날, 이연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늦게 자리로 복귀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충 옷을 골라 바로 태호가 있는 곳으로 오고 싶었지만, 워낙 까다로운 그 자신의 취향에 발목이 잡혔다. ‘이 색은 태호 형한테 별로야.’, ‘이거 입히면 다리 길어 보이고 예쁘겠다.’, ‘그런데 이 바지에는 이 셔츠가 별로인데.’ 등의 깐깐한 자기 검열 때문에 상의는 물론 새 신발과 벨트까지 완전히 맞추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잔뜩 시간을 쓴 만큼 임태호는 집에 돌아갈 땐 이연우의 표현대로 정말 예쁜 새 옷을 입고 돌아갈 수 있었다.
“소문이 난단 말입니다, 소문이!”
“그럼 그 교복 입은 사람이 사실 서른셋이라는 소문을 내세요. 신화그룹 이연우가 그거에 미쳐 산다고도 덧붙여서요.”
말끔하다 못해 상큼하기까지 한 결론이었다. 세상에 다시없게 고운 눈웃음을 치면서 말하기까지 하니, 말이 길어질수록 어떻게 반박할 여지도 찾지 못하고 말린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덕분에 얼굴만 반반한 3세라고 생각했던 이연우에게 한 방 맞은 기분이 된 몇몇 나이 든 임원들은 목이 벌겋게 되어 괜히 혀를 찼다. 먼저 선수를 쳐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박영진 이사의 진영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박영진은 그 특유의 느긋한 얼굴을 한 채로 대충 상황을 수습한 뒤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한 수였다.
“후우, 우리 도련님이 어디서 무슨 덜떨어진 걸 데려다가 재미있게 노셨는지는 모르겠는데…….”
박영진이 그걸 깨달은 건, 제 말에 약간은 냉랭하고 또 무심한 듯한 포커페이스를 걸고 있던 킹 이민혁이 눈에 띄게 동요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본 순간이었다.
그는 이민혁이 얼마나 제 앞에서 얼굴을 고쳐 만드는지 잘 알고 있다. 가족이라면 끔벅 죽는다는 소문이 자자한데도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동생들을 감싸지 않고 서늘한 눈을 한 채 물러나 있는 것만 봐도, 그 신중함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우 이런 별거 아닌 도발에 흔들리다니. 정말로 이민혁답지 않았다.
박영진 이사는 그렇게 몇 걸음 뒤의 왕에 정신이 팔려 바로 제 코앞의 기사가 제 말에 어떻게 변했는지를 짚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걸 먼저 알아챈 것은 박영진 이상으로 이연우를 쉽게 보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나이트의 얼굴에 예쁘게 걸려 있던 미소가 단 몇 초 사이에 완전히 생기가 빠지듯 사라지는 모습을 바로 코앞에서 모두 지켜보았다.
이제까지 제 막냇동생이 그 자신의 모욕을 받아치는 것을 방해하지 않던 이민혁의 고개가 처음으로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그건 완전히 허물을 벗은 자신의 동생을 꾸중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순식간에 날 선 살얼음이 확 올라오듯 서늘하게 일렁이는 향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상황 파악 못하시네들.”
목소리에 온도가 있다면 이연우의 문장은 고작 몇 초 사이에 싸늘하게 얼어 있을 게 분명했다. 이연우의 시선이 먼저 닿은 건, 유독 그를 향해 빈정대던 임원이었다. 그는 저를 눈에 담는 그 고운 갈색 눈에 이전에는 몰랐던 빛이 담겼다는 것을 눈치채고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임원은 베타였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짚어내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잠깐 숨을 참을 정도로 냉랭한 긴장감이 뒷골을 확 당기게 했다. 임원은 저를 향해 천천히, 아주 느리게 아몬드형 눈을 호선으로 휘는 이연우를 멍청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내가 연예인 스폰 해 주면서 뒹굴기를 했습니까?”
임원의 목이 시뻘겋게 변한 건 정말 삽시간의 일이었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그는, 제가 들은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하자마자 순식간에 열이 확 올랐다. 이연우는 그런 임원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작게 낄낄대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우아하기 짝이 없는 외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교활한 빛을 띠고 있었건만, 이미 이번 게임의 승패는 나이트의 손에 쥐어진 지 오래다. 이연우의 시선은 가장 즐거운 유희를 앞둔 사람처럼 작게 너울대며 천천히 움직였다.
기세등등하게 박영진의 뒤에 서 있던 자들은 그 예쁘장한 눈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그것을 슬쩍 피했다. 그들은 지금 이연우가 꺼낸 말의 의미를 잘 안다.
저건, 이민혁이 입막음시킨 이연우의 일을 박영진 이사가 알아내어 조롱하려던 것에 대한 보기 좋은 카운터다. 그걸 증명하듯 그렇게 움직이던 이연우의 시선이 멈춘 건, 주름진 눈에 실린 경멸을 감추지 않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박영진 이사였다.
이연우는 그런 박영진 이사를 향해 미소 띤 고개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면 서울에 부인 하나, 경기도엔 애인 하나, 부산엔 남편 하나 두고 앞으로는 좇질 하고 뒤로는 쑤셔지기를 했습니까?”
적의 약점을 알아내고 손에 쥐고 있는 건 박영진 이사뿐만이 아니다.
생쥐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법이다. 지금, 이연우는 박영진 이사에게 그걸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것도 박영진, 그가 가장 치욕을 느낄 상황에서 미소를 지은 채로!
……아, 맙소사. 이연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어디 진짜 더러운 소문으로 재밌게 놀아볼까요?”
“감히 너…….”
손등에 하얗게 뼈가 올라올 만큼 주먹을 쥐고 있는 박영진을 향해 상냥하다 못해 연인을 대하듯 다정스러운 태도로 말을 잇는 이연우의 눈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이연우, 그는 자신이 받았던 것을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알파다.
“보는 눈이 많은데, 표정을 조심하셔야지.”
박영진은 제가 들은 말이 언젠가 일찍이 그가 이민혁을 향해 했던 말임을 상기하고는 입가를 옅게 떨었다.
“좆같아도 이게 사회생활 아니겠어요?”
전쟁 선포도 이런 전쟁 선포가 없다.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쉽사리 끝을 낼 수는 없었다. 물러선다면 그건 왕과 직결된 기사의 명예가 상하고, 그대로 대립한다면 어느 쪽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판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유일하게 뚝 떨어져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전 이정호 대표의 차남이자 남매들의 사촌인 ‘룩’, 이현이었다.
이현은 서늘하게 찢어진 눈매를 살짝 한숨 쉬듯 휘더니,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자리에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바로 금방이라도 박영진을 향해 무슨 일을 벌인대도 놀랍지 않은 제 사촌 동생, 이연우에게로다.
그는 말끔한 얼굴을 한 채 웃고 있지만, 뒷목이 발갛게 변할 정도로 열받은 이연우를 뻔히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이 차 많은 저 친척 동생은, 늘 언제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죽이 잘 맞았었다.
이현은 이연우를 잡아당겨 누가 보면 참 우애 좋은 사이로 생각할 정도로 느긋하게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물론 그 순간 이연우는 그 고운 눈에 ‘뭐야, 씨발?’하는 그 자신의 의사를 뚜렷하게 담긴 했다.
이현은 이연우가 그러든지 말든지, 제 슈트 안주머니를 뒤적이며 낮은 목소리로 툭 입을 열었다.
“교복 입고 다니는 거 보니까 좋든?”
예쁜 미소로 덮여 있기는 하지만 이연우의 얼굴에 분명 삐죽하게 솟아났던 반항이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이연아는 그런 제 동생을 보고 상황만 이렇지 않았다면 저 곱상한 머리를 한 대 후려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예쁘고 청순한데 섹시하기까지.”
“그럼 됐네.”
노골적일 만큼 직접적인 찬사였다.
“이 팀장님, 아무리 그래도 경우라는 게……!”
“뭐 어떻습니까. 지 눈에 예쁘다는데. 민혁아?”
이현은 저를 향해 뭐라고 말하려는 박영진 이사에게 대충 대꾸하며 손에 든 담뱃갑을 민혁을 향해 작게 흔들었다. 이렇게 룩, 이현이 대놓고 이연우를 싸고돌며 담배 피우는 것 하나까지 이민혁의 허락을 받기 시작하니 불리해진 건 박영진 이사 쪽이었다. 박영진은 자신이 모셨던 전 대표의 아들인 그에게 세게 나오지 못한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패전에 쐐기를 박은 건 이민혁이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 집무실로 언제든 오십시오.”
박영진 이사는 언제 흔들렸었냐는 듯 다시 냉랭한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이민혁을 보며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더니, ‘…기억하겠습니다.’ 하고 최종 선고를 한 후 곧바로 회의실을 떴다. 그게 어찌나 살벌한 태도인지, 남아 있던 다른 임원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기 바빴다.
그 덕에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려서 살짝 탁자에 기댄 이연아는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오빠. 곤란했을 텐데.”
“…저 영감, 가만히 안 있을 거라는 것만 알아둬. 아버지 은퇴하시고 잔뜩 약이 올랐어.”
담배를 하나 꺼내 문 채 느긋하게 불을 붙이는 이현의 시선이, 어느새 웃음기를 싹 지운 채 박영진의 뒤를 눈으로 좇는 이연우를 향했다.
◈◈◈
하루가 길었다.
임태호는 차 뒷좌석에 던져 둔 생수 묶음을 들고 오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임태호는 신입 때도 하지 않던 자잘한 실수들을 잔뜩 했다. 그런데도 누구에게도 책망받지 않았던 건, 태호가 평소에 워낙 꼼꼼하게 일은 물론이고 사람들까지 챙겼던 탓이다.
‘괜히 다들 걱정만 하게 만들었네.’
야근까지 하고 온 태호는 왠지 좀 우울해졌다. 오늘은 얼른 씻고 침대에 누워서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1층, 2층, 3층……. 제법 깔끔하게 관리된 데다가 햇빛도 잘 드는 남향이기는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건물은 이렇게 무거운 짐을 든 날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태호는 계단을 오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제집이 있는 마지막 층에 올라서자마자, 태호의 손은 무거운 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됐으니까.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을 걸 그랬네요.”
“……이연우?”
“네에.”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부른 이름에 절대 오늘만큼은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태호는 잠시 꺼진 현관 앞의 불을 손을 휘휘 저어서 도로 켰다.
제 현관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정말로, 진짜 이연우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어? 그냥 집에 들어가 있지!”
“괜찮아요. 주인 없는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기 뭐해서.”
“전화를 하지.”
놀라서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키워 대답하자, 이연우는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태호는 저도 모르게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일할 때는 곧잘 끼는 안경까지 끼고 있는 걸 보니 퇴근하고 바로 온 모양새였다.
야근까지 하고 온 터라 대체 눈앞의 이 후배가 얼마나 저를 무작정 기다렸는지 짐작조차 안 갔다. 다른 건 몰라도 제 후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서늘하다는 것쯤은 뻔히 짚어졌다.
“빨리 들어가. 아무리 날씨 풀렸다고 해도 그러다가 감기 걸려.”
억지로 등을 밀다시피 해서 현관으로 밀어 넣자, 이연우는 작게 ‘……아, 좋네요. 진짜.’하고 속삭였다. 하지만 태호는 그 말에 대한 의미를 묻는 것보다 얼마나 바깥에 있었는지 모를 연우를 쉬게 하는 게 더 급했다.
이연우는 저보다 한 뼘은 작은 남자가 자신을 자그마한 식탁 의자에 앉힐 때까지 기꺼이 질질 끌려갔다.
“저녁 식사는 했어? 나는 그냥 대충 빵이나 먹으려고 했는데…….”
“같이 먹어요. 저도 엄청 배고픈 건 아니라.”
“그냥 앉아 있어. 빨리.”
임태호는 오늘따라 드물게 엄했다. 슈트 재킷을 벗어서 의자에 대충 걸치고는 태호를 도우려고 했던 이연우는, 덕분에 눈만 깜박거리며 도로 제자리에 엉거주춤 앉아야 했다. 달그락, 달그락. 찬장에서 접시를 꺼내는 손이 바빠졌다. 연우는 식빵 몇 쪽을 꺼내서 토스트기에 넣는 태호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임태호의 걱정처럼, 이연우는 태호를 꽤 오래 기다렸다. 한 시간을 넘었을 때부터 그냥 시계를 보지 않고 있었으니 저 착한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이유도 알 것 같기는 했다.
8년을 함께한 선배에서 어느 순간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사람으로 바뀐 탓일까. 그렇게 기다리면서도 전처럼 태호가 없는 집 안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연우다. 게다가 요새처럼 임태호가 저를 묘하게 서먹하게 대할 때면, 더욱 그렇다.
이연우는 집 안 여기저기에 내려앉은 임태호의 향을 몰래 들이켜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새 많이 바빴어요, 형?”
“…그냥. 조금 그랬어.”
같은 집에 들어선 지도 제법 되었는데 아직도 이연우는 임태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그건 태호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탓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연우는 먼저 건네받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의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붉게 물든 태호의 귓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새빨갛게 변한 게 나 때문이면 참 좋을 텐데.
시답잖은 희망 사항은 그 자신이 떠올리고도 참 꿈속을 걷는 것이라 오히려 헛웃음만 나왔다. 지금처럼 제발 돌아서 나 좀 봐 주면 안 되냐고 끈질기게 쳐다보고 있는데도, 그걸 다 알고 있을 사람은 냉장고에서 딸기 몇 알을 꺼내면서 그걸 모르는 체하는데 정말 속이 탔다.
이연우는 임태호에게서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그래서 자꾸 휴대폰 보게 되던데.”
“…응?”
“형이 언제쯤 시간 될까 하고요.”
머릿속으로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문장들이 저절로 떠오르는 게 어색했다.
내가 뭐 싫어질 행동을 했나? 어떻게 해야 날 볼까.
형이 그날 많이 부끄러워했는데 그것 때문에 화가 났을까? 그래도 옷 사서 갔을 땐 괜찮은 분위기였는데. 마지막에 셋이서 같이 커피 마실 때 잘 웃고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집에 데려다줄 때만 해도, 오히려 옆자리에서 계속 나 훔쳐보는 것 때문에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메시지 답장은 왔나, 전화는 해도 될까.”
“…….”
“무슨 일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머릿속은 이렇게 뒤죽박죽인데도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작은 떨림도 없이 멀쩡한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제가 했던 모든 행동을 다시 되짚으며 태호에게 잘못 보인 게 없나 전전긍긍하던 이연우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언제나 임태호에게 좋게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저 바르고 착하기만 한 사람은, 제 험한 욕 한마디나 거친 행동 한 번에 말간 얼굴을 굳히고 멀찍이 가 버릴 것만 같아서 언제나 임태호의 앞에서는 멋진 모습만 보이려고 발버둥 쳤다.
이렇게 혹시라도 밉보인 게 없을까 끙끙대는 건,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거나 다름없다. 연우는 제 말이 이어질수록 고개를 돌려 서로 마주 보는 것 대신 우물쭈물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접시만 물에 몇 번을 헹구는 태호를 눈에 담다가, 약간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금요일도 괜찮고요.”
요즈음 임태호의 주말은 완전히 이연우의 차지였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태호는, 문득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어, 음. 잠깐만. 확인 좀 해 볼게.”
3주 넘게 주말 내내 후배랑 만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임태호는 혹시라도 제 행동이 이연우에게 이상하게 보일까 싶어 잠시 아무런 일정도 없는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괜히 뺨으로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사실 임태호는 이연우를 집에 들인 이후부터 계속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 소리에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씻던 접시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트릴 뻔한 것만도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 시작은 분명 이민혁의 말이었다.
이제껏 일방적일 것으로 생각했던 제 호감이, 선후배라는 단어로 곱게 만든 8년간의 관계가- 사실은 감히 단 한 번도 기대하지 못했던 견고함과 특별함으로 쌓여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왠지 울컥하고 목이 멨고, 다음에는 양손에 새로 산 제 옷을 잔뜩 들고 온 이연우를 보며 작게 웃음이 터졌었다.
들떴다. 뿌듯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내가, 이연우에게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아무래도 조금 힘들 것 같아, 이번 주는.”
임태호는 혹시라도 제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릴까 봐 걱정하면서 괜히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요새 그는 꽤 심각한 상태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온종일 말도 안 되는 가정들이 머리를 떠돌았다.
연우에게 하나뿐인 선배가 나라면…… 그렇다면.
“대신 다음 주나 평일 저녁은 괜찮을 것 같은데.”
키스하려고 했던 거, 그건 정말 완전히 장난이었을까? 8년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연애 얘길 갑자기 했던 건?
‘베타 임태호’는 절대 알아서는 안 될, 그 순간의 페로몬이 자꾸 입을 바짝 마르게 했다. 임태호는 저를 향해 눈을 접어 웃으며 입이 달 정도의 나른한 향을 내던 이연우를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가 목덜미가 화끈해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이연우가 알까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서 태호는, 저의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좀 잠잠해질 때까지 이연우와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아주 예전에도 이렇게 마음이 일렁였을 때가 있었지만, 잘 잠재우고 좋은 선후배로 지낼 수 있었다. 임태호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이연우의 시선을 피해 휴대폰만 쳐다보는 척했다.
그때였다. 임태호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연우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 건.
“부럽네요.”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임태호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었다.
“…어?”
“형 애인.”
이연우는 묘한 얼굴이었다. 그건 일순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그를 봐 왔던 태호는 저것이 전혀 즐거운 표정이 아님을 잘 알았다.
“애인이라면 비어 있는 형 집에 들어와 있어도 이상하진 않잖아요.”
“…….”
“바쁜데 내가 귀찮게 하는 거 아닐까 메시지 보내면서 덜덜 떨지 않아도 괜찮고.”
담담한 목소리에 담긴 내용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태호는 순식간에 쉼 없이 쏟아진 문장에 머리가 멍해져서, 잠시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였다.
“조금이라도 목소리가 어두우면 종일 걱정하면서 휴대폰만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되고.”
“…연우야.”
“요즘처럼 날씨 좋은 날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일 테니까.”
마지막 문장을 내뱉는 이연우의 미간은 슬쩍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임태호를 한동안 마주 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을 꽉 얽맨 넥타이가 이렇게 불편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오늘 일이 많아서, 좀 예민했었나 봐요.”
“…….”
“정말로 미안. 다 헛소리였어요. 아무래도 오늘 먼저 들어갈게요.”
이연우는 지금 그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자길 봐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애 같은 짓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임태호가 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 뻔히 ‘그 비밀’을 아는 주제에 못된 말을 늘어놓았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사람을, 별거 아니라고 달래지는 못할망정 잔뜩 어리광을 부렸다.
역시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종일 최악이었다.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고 다니는 인간이 멋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부터 눈이 뒤집혔다. 똑같이 갚아줬지만 그래도 분이 다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이 좀 급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사생활을 건드리지 않는 게 암묵적인 합의나 다름없는 ‘이쪽 판’이다. 서로 건드려서 좋을 것 없음을 잘 알아서다.
조롱을 목적으로 먼저 접근한 건 분명 박영진이었다.
분명 잘못을 찾는다면 그쪽을 꼽아야 한다. 그런데 태호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서 속이 다 아팠다. 이것도 내 잘못이고, 저것도 내 잘못 같았다. 거기에 저를 슬슬 피하는 태호까지.
아. 진짜 꼴사납다. 애도 아니고, 진짜.
기다려도 오지 않았을 때부터 빨리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이렇게 애 같은 모습을 보일 일은 없었을 텐데. 이연우는 태호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급하게 제 재킷을 집어 들었다. 오랜 시간 당연하게 배워 온 걸음걸이가 이 와중에도 꼿꼿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임태호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헤어졌어.”
사실 태호는 그 순간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몰랐다.
말이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툭 튀어나와서 그 내용을 자각할 새도 없었다. 임태호가 그 자신의 몇 초 전 행동을 곱씹게 된 건, 금방이라도 집 밖으로 빠져나갈 것처럼 현관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던 이연우의 뒷모습이 마치 석상처럼 멈춘 것을 자각했을 때였다.
……나 방금 뭐라고 했지?
임태호는 스스로에게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닫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그대로 얼어버렸다. 하지만 그 자신이 받은 충격보다 더 먼저 산재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근사한 후배의 존재였다.
“선배.”
“…….”
“지금 한 말…… 뭐예요?”
‘선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게 정말 틀린 말은 아닌지, 한때는 너무나 당연하게 들었던 익숙한 단어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형’ 대신 과거의 단어를 꺼낸 당사자는 그걸 깨닫지도 못한 것 같았다.
정말 오늘 이연우는 평소와는 다르다.
8년 동안 붙어 지내면서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표정들을 이 짧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임태호는 익히 알고 있던 나긋한 미소 대신 의미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이연우를 향해, 제가 했던 말을 천천히 반복했다.
“헤어, 졌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고 도망치듯 돌아서는 뒷모습을 붙잡고 싶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오늘따라 지친 얼굴을 한 후배가 말하는 낯선 문장들 속에서 희미한, 이제껏 감히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가정을 기대해 버렸다.
그걸 깨닫는 순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후회하게 되면 어떡해?’
마음속 깊숙이 숨어 있는 무언가가 속삭였다.
임태호는 이제껏 언제나 자신을 따라다녔던 그 희미한 벌레를 애써 무시하면서 주먹을 꽉 쥐어 모았다. 정말로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 손이 떨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눈앞의 남자가 분명히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 저에게 그 어떤 말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있다는 거였다.
“…미, 안해.”
“…….”
“연우 네 연애를…… 도와준다고 했는데…… 사실 잘 안 됐어, 나도.”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꽉 눌린 숨이 덩달아 같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화제를 직접 꺼낸 탓일까, 아니면 그 오랜 거짓말을 어설프게 끝내는 중이기 때문일까. 노력이 무색하게도 임태호는 목덜미와 뺨은 물론 귓가까지 벌겋게 변한 채로 벌벌 떨면서 고백을 마쳤다.
가진 모든 용기를 다 긁어모아 말하고 나면 후련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무서워졌다.
임태호는 저를 보고 있는 것이 뻔한 이연우를 마주 보지 못하고 눈꺼풀까지 희미하게 요동치며 시선을 떨궜다.
이연우가 제 말에 뭐라고 말할지 짐작조차 안 갔다. 그리고 이연우의 대답은 실제로도 임태호가 상상하지 못한 것 중 하나였다.
“안 우네요.”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태호는 그래서 더욱 덜컥 겁이 났다. 저를 보는 남자가 정말 어떤 얼굴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가늠이 안 갔다. 그래서 이연우가 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꿎은 손만 힘주어 말아 쥐었다.
이연우의 물음이 이어졌다.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상담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경쾌하고, 다그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억양이었다. 슬퍼? 우울해? 임태호는 그 자신에게 물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전혀 반대다.
마구 엉망으로 심장이 뛴다. 하지만 태호는 그걸 솔직하게 말하는 것 대신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잘…… 모르겠어.”
제 자신과 한 이별은 정말 기묘한 느낌이었다.
임태호는 저와 딱 한 걸음 차이로 가깝게 다가온 이연우 앞에서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가 내뱉었다. 심장이 어찌나 크게 뛰는지 머리꼭지까지 열이 뻗치는 기분이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이연우가 안경을 벗는 게 보였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연우는 약간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힘들어해야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있으면 안 돼요.”
“……왜?”
임태호는 조금 전 그 자신이 내뱉은 몇 개의 문장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했는지 잘 모른다. 늪에 빠지는 것 같은 최악의 하루를 순식간에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날로 바꿔 놓고서, 저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린 채다.
이연우의 손이 붉게 익은 임태호의 귀로 움직였다.
유독 부드럽고 연한 부분에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남은 손가락이 닿자, 임태호는 마치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연우는 그걸 눈으로 한껏 담으며 따끈하게 열이 오른 귓바퀴부터 귓불을 따라 제 손을 움직였다.
그다음은 귀와 이어진 턱 선이었다. 또렷하게 각이 진 얼굴과는 거리가 먼 동그란 얼굴형은 손끝에 닿을 때마다 보드랍게 미끄러졌다. 연우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서서히 들리던 고개는, 이윽고 턱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올려졌다.
솔직히 임태호는 그 순간 두 손으로 벌겋게 변했을 게 분명한 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첫 번째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연우의 표정 때문이었다. 이연우는 임태호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예쁜 눈웃음을 걸고 있었다.
“저는 굉장히 못돼 먹은 인간이라…….”
그럴 리가.
임태호가 반사적으로 떠올린 단어는 급하게 들이켠 숨 때문에 막혀 들었다. 두 번째 이유 때문이었다. 항상 당연할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던 그 서늘하고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이렇게까지 저를 향해 쏟아지는 건 처음이었다.
“선배가, 아니, 형이 슬퍼하는 틈을 노릴 생각이었으니까.”
임태호는 머리가 하얗게 변한 와중에도 문득 생각했다. 아, 연우는 마음이 급하면 형 대신 오래된 호칭을 꺼내 드는구나.
“괜찮다고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고……. 그러다가 문득 저한테 기댔을 때.”
언제였던가, 이연우의 향이 진해졌을 때 이게 연인을 위한 향일까 떠올렸던 순간이 다 우스워졌다. 감히 비교조차 안 된다. 태호는 저도 모르게 꾹 눌렀던 숨을 길게 토해 냈다. 어느새 뺨을 간질일 정도로 가까워진 상대의 온기가 속을 데웠다.
입술이 마주 닿기 전, 이연우는 작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이러려고 했거든요.’
임태호는 그 부드럽고 따뜻한 살덩이가 제게 부딪히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미 그 전에 너무 떨고 긴장했던 탓인지, 사실 가볍게 입을 맞췄던 그 순간은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건 순진해 빠진 착각이었다. 임태호가 옅게 떨리는 숨을 흘리는 틈이야말로 이연우가 바랐던 것이었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일 때마다 꽉 다물린 입이 떨어지며 말 대신 헐떡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연우는 그 소리가 좋았다. 나직하게 말하는 다정한 목소리에 반한 게 시작이었다면, 이렇게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한숨을 듣는 게 새로운 관계의 시작일 테니까.
벌어진 입으로 간질이듯 혀를 밀어 넣자 놀란 태호가 반사적으로 연우의 몸을 짚었다.
그걸 자연스럽게 제게 두르도록 유도하며 남은 손으로 뜨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가까이 잡자, 임태호는 그 자신이 이연우의 목에 팔을 감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자꾸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런 틈조차 주지 않고 몇 번이고 고개를 꺾어 깊게 입 맞추며 임태호가 제 숨을 삼키게끔 했다. 살짝 힘이 풀려 휘청이는 태호의 몸이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깊게 혀를 섞다 옅은 잔향처럼 닿는 임태호의 페로몬을 운 좋게 찾을 때마다, 머리 한구석이 완전히 뚝뚝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한 문장, 한 문장 바들바들 떨면서 내뱉는 임태호를 보면서, 이연우는 정말로 누군가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제정신이 아니도록 만들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뭐, 꼬셔서 어떻게 하겠다고?
이연우는 한때 그 스스로가 호기롭게 말했던 표현을 떠올리며 속으로 헛웃음 쳤다.
“태호 형.”
꼬시기는커녕 이미 넘어간 건 제 쪽이었다.
그것도 자각했던 것보다 꽤 오래전부터 임태호를 눈으로 좇고 있었으니, 이건 애초에 시작부터 글러먹은 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의 인생에서 드문, 아니 전무했던 완패에도 불쾌함은커녕 들뜬 채 바짝 입이 마르기만 했다.
발갛게 변한 눈가를 한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임태호라니.
늦어도 한참 늦었고, 돌아와도 한참을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람이 벌벌 떨면서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8년 만에!
“이제 저랑 사귈까요?”
◈◈◈
신화그룹에서는 가끔 드문 가족회의가 잡히고는 한다.
그건 대체로 이주호 회장의 명령 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제법 심각한 사안을 앞뒀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신화그룹 3세들은 그런 드문 호출이 떨어졌을 때 다들 제각각 긴장한 채로 신화가의 중심에 있는 본채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의 회의 주체는 좀 달랐다. 장소 역시 낯선 곳이었다.
“다들 닥치고 내 말이나 들어봐.”
물론 회의 내 사용 어휘 역시 매우 낯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석 인원이 어디 가서 빠질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민혁을 위시한 이연아, 그리고 사촌인 이현까지 자리한 이곳은, 다름 아닌 신화가 중심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이연우의 별채다.
회의를 소집한 주체이자 3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 나이트 이연우의 말은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술술 이어졌다.
“앞으로 난 최대한 야근을 줄일 생각이야. 정말 큰 행사나 프로젝트 마감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이건 그룹 전체가 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야근 없는 기업 문화’. 궁극적으로 좋은 방향이잖아?”
‘노력’, ‘기업 문화’, ‘궁극적인 이로움’.
이보다 더 듣기 좋은 표현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청산유수로 흐르는 말은 얼핏 들어보면 참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지 않았다. 아니 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는 쪽이 정확하다.
하지만 이연우는 제 가족들이 어떤 얼굴을 하든지 제 할 말을 꿋꿋하게 이어갔다.
“아. 그리고 나한테 출장의 ‘출’도 꺼내지 마. 절대 안 가.”
“…….”
“형들이랑 누나가 알아서 분배해. 국내도 싫고, 해외는 더 싫어. 최대 범위는 당일치기 가능한 곳이야.”
그나마 이번에는 이상적인 표현 대신 진솔한 사리사욕이 그득히 묻어 있는 안건이었다. 이연우는 제가 갈 수 있는 출장 지역을 친절하게 꼽기까지 했다.
“경기도는 괜찮아. 위로는 춘천, 아래로는 멀어도 천안까지만 갈 수 있어.’”
그건 거의 통보에 가까운 출장지 선포였다.
이연우의 말을 듣던 묵묵히 듣던 이현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뭐겠어. 당분간 솔로들끼리 알아서 좀 해 주라는 거지.”
몹시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이연우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탁자 위에 곱게 마련되어 있던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건 모습만으로는 참 우아한 회의 주최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물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고혹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 신화그룹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녀, 이연아였다.
“……개새끼.”
그건 정말 이연아, 그녀답지 않은 표현이었지만, 이 과격한 표현은 딱히 누구의 손가락질도 받지 않았다. 애초에 대상인 이연우가 그런 비난 따위에는 전혀 굴하지 않고 새로운 화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진짜 존나 이뻐. 존나 귀여워. 존나 섹시해. 게다가 개멋있기까지 해.”
이미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변한 이연우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지 오래였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나랑 사귀지?”
“그러게 말이다!”
“사귀자는 말에 진짜 빨갛게 변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데, 진짜 씹어 삼키고 싶더라. 개미친.”
솔직히 이연아는 연애 시작으로 방방 들뜬 막내가 조금 배 아팠다.
요사이 그녀의 연애운은 별점으로 따지면 텅 빈 별 하나, 점수로 따지면 30점 미만의 우울함 연속으로 가득 차 있는데 온갖 내숭이란 내숭은 다 떨어가며 꼬리 친 막내는 교복데이트까지 하며 러브라인에 골인했다.
나도 내숭 떨어야 하나. 이연아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툭 입을 열었다.
“얘. 근데 그분은 너 좋다던?”
정말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듣자 하니 8년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던 ‘그 선배’인 데다가, 행사 때부터 있지도 않은 비서라고 둘러대며 몰래 만나던 사이다. 저렇게 방방 뛰는 것만 봐도 빙빙 돌다가 드디어 눈이 맞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했던가.
애인 찬송가를 늘어놓던 이연우는, 분명 몇 초간 멈췄다. 그러고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분명히 좋아하기는 해.”
아무리 봐도 정신승리였다.
“그런데 아직 나만큼은 아니야. 그건 인정해.”
솔직히 우겨서 사귄다는 대답을 받아낸 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키스로 다리가 풀린 채 헐떡이는 사람을 품에 안고 ‘사귀어 주세요!’하는 것에 ‘으응….’ 하는 달뜬 수긍을 얻은 쪽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연우, 임태호 커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냐. 그거 완전 사랑…….”
“사랑이야?”
“사랑이야!”
세기의 로맨티시스트 이민혁은 드디어 본인이 만든 실타래를 본인이 직접 풀어서 예쁘게 리본까지 묶는 데 성공했다. 그는 살짝 기가 죽으려는 이연우를 한 번에 다시 북돋워 주고는 드디어 시작된 제 막냇동생의 어여쁜 연애담에 귀 기울일 준비를 했다.
딱 절반만 행복하고 남은 반은 고통받는 회의 아닌 회의는 그렇게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뭐야, 여긴 왜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
그는 잘 태닝 된 밀빛의 피부에 그와 딱 어울리는 초콜릿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였다.
‘똑똑’하고 뒤늦게 노크하며 이연우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사내는 먼저 들어와 있던 3세들 역시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반색하며 그를 반긴 건 이연아였다.
“안이 오빠! 미치겠어. 이연우, 저거 지금 애인 생겼다고 난리도 아냐.”
“와! 연우가? 진짜?”
“안 믿기지. 근데 지금 완전 저거 맛 갔어.”
사내는 아예 저에게 인사하지도 않고 이민혁과 딱 붙어서 임태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있는 막내 이연우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가, 억울하다는 듯 이현을 향해 화살을 돌렸다.
“현이 넌, 나 심심하다고 할 때 이런 거 말 안 해 주고 뭐했어?”
“데이터 낭비야.”
이현은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한 후 남은 차만 홀짝였다. 매사에 의욕 없는 사람은 이럴 때는 영 쓸모가 없는 법이다. 사내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으며 이민혁과 이연우 가운데에 자리를 만들어 끼어 앉았다.
“이럴 수가. 우리 막내의 연애라니. 내가 무슨 조언이라도 해 줘?”
“형 모쏠이잖아.”
신화그룹 3세에는 오메가가 둘 있다. 그건 오메가가 귀하기로 유명했던 신화그룹에서 굉장히 드문 발현이었던 터라, 정말 온갖 사랑과 예쁨은 그들에게 다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연우가 부루퉁한 얼굴을 한 채 형이라고 부른 사내는, 이민혁보다 3년 먼저 태어났고 딱 그만큼 먼저 오메가로 발현했었다.
“아니거든.”
“일주일 만난 것도 쳐?”
“당연히 쳐야지!”
사내는 웃으며 이연우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물론 이연우는 그걸 질색하며 싫어했지만, 사내를 밀어내는 대신에 ‘왜 이렇게 쌩쌩해? 형은 그냥 가서 쉬어!’하고 그 나름의 무뚝뚝한 걱정을 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정호 전 대표의 장남. 이현의 형.
신화그룹 3세의 마지막 말. 비숍, 이안이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