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Catch Me If You Can
신화그룹 3세들이 체스 말에 비유되기 시작한 건, 이정호 전 대표의 갑작스러운 퇴임 이후부터였다.
이주호 회장의 동생이자 오랫동안 신화그룹을 이끌어왔던 기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차기 이양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별명을 붙이기 좋아하는 언론의 관심은 3세들을 향했고, 그때부터 저 고전적인 표현이 시작됐다.
킹과 퀸, 나이트, 비숍, 그리고 룩.
각자의 위치가 완전히 고정된 체스 말은 3세들을 표현하기에 딱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그 역할이 완전히 고정된 건 제법 최근의 일이다.
킹은 이주호 회장의 장남인 이민혁으로, 차기 권력 이양의 중심에 있는 사내다. 사실 이민혁이 이르게 대표 자리를 받기 전까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의 승계를 반신반의했었다. 이민혁의 뒤에는 언제나 사내 권력이 약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뒤따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려를 불식시킨 건 늘 왕의 옆을 지키는 두 수문장이었다.
이주호 회장의 차녀이자 이민혁의 동생인 퀸 이연아, 그녀는 3세들 중 누구보다 언론과 친하고 또 그들을 다룰 줄 아는 영리한 자였다. 이연아는 권력 이양의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제 오빠를 향하도록 설계하며 그를 왕의 자리에 올린 킹메이커다.
사실 권력 기반이 약한 왕이라는 건, 절대 좋은 표현은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언제나 그 자리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에 시달린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그 우려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왕의 곁을 지키는 또 다른 충신, 나이트 때문이었다.
퀸 이연아가 그룹 밖을 맡는다면, 나이트 이연우는 그룹 안을 감시하는 눈이었다.
힘의 권력에 익숙하고 또 그것을 잘 이용할 줄 안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오만함으로 비쳐졌고 또 누군가에게는 완전무결한 자신감으로 그려졌다. 물론 그 간극은 왕에 대한 반기를 든 이들을 찾는 데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균열이었다.
왕과 여왕을 지키는 아름다운 기사.
그 낭만적인 표현으로 묘사되는 나이트 이연우는 지금…….
“이 얼굴이 어디 가서 빠질 리가 없는데.”
휴대폰을 셀카 모드로 한 채로 제 얼굴을 뜯어져라 살피고 있는 중이다. 이연아는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면서 제 동생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그런 말을 네 입으로 직접 하는 거 안 민망하니?”
“어중간해야 민망하겠지.”
제 동생들의 아웅다웅한 대화에 킹, 이민혁은 살짝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삼키면서 표정 관리를 했다. 지금 그들은 예술계에 여러 선이 있는 외가에서 열린 행사에 나란히 참석해 앉아 있는 차다. 요새 워낙 일이 많은 터라 삼남매가 나란히 앉아 얼굴을 맞댈 시간이 없다가 오랜만에 여유롭게 만난 자리였다.
사실 이민혁과 이연아, 두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막냇동생이 일 때문에 바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연우는 자리에 앉은 이후로 쭉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식사도 마다하고 휴대폰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슬쩍 들여다본 연우의 휴대폰 화면이 셀카 모드인 걸 확인했을 땐 ‘얼마나 바쁘면 저러겠어.’하며 가졌던 약간의 애잔함이 순식간에 가루가 됐지만 말이다.
이연아는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제 동생의 같잖은 행동에 슬쩍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연이어 물었다.
“그래, 그 안 빠진다는 얼굴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어떻게 이 얼굴로 꼬시는데 안 넘어오지?”
담담하게 흘러나온 대답이었지만, 그 파장은 꽤 컸다.
이민혁은 쥐고 있던 나이프를 작게 삐끗했고, 이연아는 입술을 적시던 물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연우를 제외하는 두 남매는 순간적으로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주변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가족석이었던 터라 입 가벼운 이들과는 꽤 떨어져 있다는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안전을 확인한 후의 행동은 뻔했다. 지루한 행사에 슬쩍 노곤함이 깔렸던 눈은 이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관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연아는 제 바로 옆에 앉은 막냇동생을 쿡 찌르며 채근했다.
“어머, 야.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알다마다.
연우는 속으로 대답하며 휴대폰 액정 속의 제 얼굴을 뜯어 살폈다.
요새 이연우는 살며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 그건 바로 선배, 아니 이제는 ‘태호 형’이 된, 문제의 오메가다.
솔직히 이연우는 임태호를 좀 얕봤다.
정말 까마득하게 오랜만에 태호의 집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일부러 눈을 접어 웃고 나른한 향을 흘리자 동그란 뺨이 붉게 물드는 걸 보고 여느 때처럼 첫 관문은 어렵지 않게 열었다고 생각했었다. 알파로 발현한 후부터,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도 이연우는 그 자신이 가진 것을 지독하게 잘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태호가 저를 슬쩍 눈에 담으며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사실 그래서, 조금만 분발하면 될 줄 알았다. 이제껏 언제나 손만 뻗으면 내로라하는 오메가들을, 아니 때로는 알파들까지 품에 안을 수 있던 위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이 베타인 척하는 오메가 선배는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모를걸. 오래 알고 지내기는 했는데 소개해 준 적 없으니까.”
“오래? 그럼 대학 때부터?”
“뭐 대충 그 정도.”
8년을 선후배로 지낸 게 문제였을까.
임태호는 이연우가 슬쩍 손을 스치거나 어깨를 기대고, 일부러 달짝지근한 향을 낼 때마다 분명 희미하게나마 ‘반응’은 했다. 뺨을 붉힌다거나, 살짝 어깨를 떤다거나, 늘 똑바로 마주 보던 시선을 피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딱 그뿐이었다.
언제나 타인의 일방적인 애정과 호의에 파묻혀 그것을 제 마음대로 선택하며 살았던 이연우다. 그는 시선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데 누구보다 능숙하다. 한 번 자각하고 나니 얼마 안 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임태호가 저를 바라보는 건 그저 다섯 살 어린 후배를 달래고 예뻐하는 눈이었다.
자존심 상하는 표현이지만, 얼마 전 형인 민혁이 했던 말마따나 태호는 정말 저를 알파로 안 보는 게 분명했다. 가끔 보이는 긴장은 섹슈얼 텐션이 아니라 그저 그가 수줍음 많은 사내이기 때문에 보이는 부끄러움이었다.
다시 말해, 임태호는 저에게 두근거린 게 아니라 그냥 항상 볼이 빨갰던 거다!
거기까지 파악하고 나니 참 기가 찼다. 아니, 대체 이 얼굴로 그렇게 치대는데 진짜 후배로밖에 안 보여? 진짜 어떻게 그러지!
이연우는 생전 접하지 못한 이 난해한 상황의 파훼법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제 모습을 재점검 중이었다.
이연우는 몇 주간 수없이 떠올렸던 가정을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약에, 임태호가 저에게 조금이라도, ‘알파’를 보는 눈으로 마음을 열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반하게 된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참 많은 게 바뀔 거다. 8년간 선후배에서 겨우 아는 형과 동생이 됐고, 그럼 그때는 어떤 이름을 새로 가지게 될까.
여전히 아는 형과 동생? ……아니면?
이연우는 임태호가 저에게 떨면서 오메가임을 밝히는 순간도 몇 번 상상해 봤다.
워낙 부끄러움 많은 사람이니까 아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변해서 벌벌 떨면서 말할지도 몰라. 아니, 씨발. 진짜 울지도 모르겠다. 그 성격에. 그러면 그땐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아직 1단계도 넘지 못한 이연우는 최종 단계를 망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은 고아한 신화그룹 나이트 그 자체였지만, 자고로 형과 누나라는 존재는 혈육의 예쁜 겉가죽에 속을 관계가 아니다.
특히 맏이 이민혁이 그랬다.
지금 그는 제 막냇동생이 말하는 사람이 이전에 넋을 빼고 말하던 ‘선배’임을 눈치채고 표정 관리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하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이민혁, 그는 밖에서만큼은 냉랭한 인상의 후계자여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게 샐쭉해진 민혁의 속을 달래 주는 시원한 한 방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얘. 오래 알고 지냈으면 뻔하잖아. 견적 나오네.”
이연아는 이연우와 같은 알파다. 극우성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그 향이 진한 우성의 시원스러운 미인이기도 하다. 민혁은 제 여동생이 코웃음 치며 이연우를 공격하는 걸 마음껏 방조했다.
“네 전적이 좀 화려하니? 나라도 만나는 거 부담스러울걸.”
“누구 만나는 거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데.”
“아니, 이게 무슨 순진한 말이야. 오늘 왜 이래, 이연우?”
“내가 뭐?”
“맨날 밥상머리에서 입맛 떨어지는 말만 해대더니 왜 이렇게 귀엽게 구니?”
이연우는 아침에 젖은 머리로 귀가한 뒤 식사를 깨작거리며 ‘섹스해서 밥맛없어.’라고 말하는 등의 행동으로 가족들의 아침 식사에 지장을 준 전적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자신의 과거에 무딘 법이다. 게다가 다른 무언가에 몰입한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이제껏 잠잠하게 동생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맏이 이민혁의 입이 조용히 열린 건 그때였다.
“연우, 너 향만 놓고 보면…….”
그건 어찌나 엄숙한 말투였는지, 멀리서 본다면 엄청나게 진지한 말을 꺼내는 것처럼 보였다.
“개 쓰레기였어.”
언제나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다정한 이민혁, 그라면 상상할 수 없는 난폭한 언사였다. 하지만 그것에 반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연아는 순간 턱을 괴고 고개를 푹 숙이며 끅끅대고 웃는 것으로 제 오빠의 말에 격렬한 동의를 표했을 정도다.
한편, 순식간에 개 쓰레기가 된 이연우는 제 형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향만 놓고 보면 개 쓰레기였다고? 내가?
과거 이연우 그는 형과 함께 유배에 가깝게 떨어졌던 유학길에서 ‘약간의 장난감과 함께 하는 어덜트 파티’에 참여했다가 국내로 강제 귀환했었다. 물론 그 당시 그는 미성년자였다.
결국, 대학은 국내에서 골라야 했고 그렇게 간 곳에서 복학생이던 임태호를 만났다.
처음에는 끔찍하게 싫었던 국내 생활이 나름대로 괜찮아진 건, 자신의 모국이 마약만 빼고 뒤에선 뭘 하든 괜찮으며 서로 합의가 맞는 하룻밤 상대들이 더 많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어차피 대학 졸업하면 완전히 매여 살 건데, 이때라도 놀아보자 싶었다.
그래서 정말 대학 4년간 최선을 다해서 놀았다. 진짜, 열심히 놀았다.
진득하게 몸을 섞고 난 뒤 뒤섞인 페로몬을 달고서 또 다른 향을 품에 안아 보기도 했고, 허리를 쳐들고 저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알파들과도 놀아봤다.
이연우에게서는 언제나 그 특유의 고혹적인 향에 덧씌워진 누군가의 향이 났다.
가끔은 하나, 대체로 둘에서 셋. 알 거 다 아는 나이가 된 이상, 그 의미를 모르는 알파와 오메가는 없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금욕적인 얼굴과 몸을 한 채로 누군가와의 정사흔이 남은 극우성 알파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임태호의 앞에서는 제 파트너들을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다. ‘오메가 연인’을 보이지 않는 임태호가 부담스러워할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고, 사실 그보다 더 큰 건 그 자신이 그렇게 다정한 상대가 아니었던 탓이다.
이연우는 부끄럼 많고 순한 선배, 자상한 임태호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깍듯한 후배가 되기 위해 노력했었다. 뒤섞인 향? 베타였다고 생각했으니 별 신경도 안 썼다. 베타라면 알 수가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사실, 오메가였다고 한다면?
“와……. 진짜 개씨발…….”
진짜 망했다.
그럼 이제까지 그걸 다 알고 있었어? 진짜?
연우는 뒤늦게 자각한 제 현실에 저도 모르게 진심 가득한 욕을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 탓에 누가 들을까 싶어 깜짝 놀란 건 이연아였다.
“얘가 어디라고 말을!”
“억울해. 몰랐다고!”
“뭘 몰라?”
-오메가라는 걸!
이연우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대답을 속으로 외쳤다. 진짜 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 없었다. 이제껏 그래도 나름 이미지 관리를 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한 대 맞았다.
연우는 ‘그래도 나 요새는 좀 조신하게 지냈는데.’까지 생각했다가 저를 8년간 지켜본 사람에게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싶어졌다. 왠지 귓가로 열이 확 올랐다. 그리고 또 궁금해졌다. 대체 그 사람은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진짜 그 동그란 머리통 안에 든 생각을 끄집어내고 싶어졌다.
앞에서는 되게 곱상하고 예의 바른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새끼들이랑 굴러먹던 놈이라고 생각할까? 이연우는 그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가정을 떠올렸다가, 제가 아는 임태호를 떠올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하고 착해 빠진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험한 생각도 못 할 거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새삼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로 이연우의 얼굴은 하얘졌다, 새파래졌다,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언제나 유유자적, 제멋대로 여유롭게 주도권을 휘두르던 극우성 알파의 몰락에 조금 고소해진 건 이민혁이었다.
로맨티시스트 오메가는 오늘도 정의 구현에 성공했다.
민혁은 이 행사장에 자리한 후로 처음 조금 소리 내 웃었다. 그건 가족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그 테두리 밖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드문 일이라, 저만치에서 그들의 테이블에 시선을 두고 있던 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관심을 눈치챈 이민혁은 뒤늦게 제 표정을 고쳤지만, 이미 그들에게 고정된 사람들의 이목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신화가家의 후계에 관한 관심이 극에 달했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연아가 바른 립스틱이나 이연우가 차고 온 셔츠의 커프스 같은 자질구레한 것까지 모두 떠드는데, 하물며 그 후계 구도의 중심에 있는 이민혁의 표정 변화라니.
이연우는 제 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보고 이연아에게 살짝 눈짓했다.
‘다음엔 그냥 우리끼리 오자, 씨발.’
이연아는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흥미 본위의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상, 오늘은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피곤하게 될 것이 뻔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찾아온 사내 역시 그중 하나였다.
“하하, 세 분이 같이 나오시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신화그룹에는 크게 두 개의 파가 있다.
현재 회장의 위치에서 명실공히 수장의 역할을 하는 이주호 회장과, 그의 동생이자 이제는 자리에서 물러난 이정호 전 대표의 세력이다. 파가 갈렸다고 한들 이들이 평생 반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몇십 년 전 다른 재벌가에서 왕자의 난이니, 혈족 전쟁이니 하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고 경제지를 달굴 때, 신화그룹에서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귀여운 헤드라인이 걸렸었다는 건 요즘도 자주 나오는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룹 내에 세력이 생긴 건 참 단순한 원리 때문이었다. 태양이 둘이면, 그림자도 둘이다. 단지 그랬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태양은 하나다.
“어떻게 시간이 다 맞았습니다. 외가 쪽 일이기도 하고.”
남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이연우였다.
빙긋이 아몬드형으로 기운 눈은, 조금 전까지 욕을 중얼거렸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유려해 보였다. 남매의 앞에 서 있는 중년 사내는 박영진 이사로, 이정호 전 대표를 태양으로 삼았던 그림자 중 가장 앞에서 있는 사내였다.
박영진의 시선은 자신의 인사에 대꾸한 이연우부터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가운데에 앉은 이연아, 그리고 마지막은 저를 향해 가볍게 묵례한 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이민혁이었다. 주름진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자리에 앉은 세 사람 중, 그걸 보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
“아시잖습니까? 이목이 한참 집중된 시기입니다.”
이연우는 박 이사의 말에 살짝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박영진의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 번째는 새로 옹립될 킹, 이민혁을 향한 견제다. 깊은 주름이 박힌 눈과 입매의 시간은 그가 신화그룹에서 몸담은 몇십 년 동안 느리게 새겨진 것이니만큼, 많은 수를 앞서 두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뜻은-
“……저 씹새끼는 왜 형 볼 때마다 시비야. 개 같은 거 진짜.”
“어른들의 사정?”
“지랄하네. 내 말 쳐 씹던데.”
박영진이 자리를 뜨자마자 신랄하게 쏟아진 쌍욕에 이연아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막냇동생을 말리려 들지 않았다. 조금 전, 박영진은 예의 바른 얼굴을 한 채로 이연우의 화답을 무시했다.
민혁은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고 속삭였다. 평소 같았다면 그걸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이연우가 가만히 있던 것이 저 때문이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아, 됐고. 미안하면 그거나 좀 더 말해 봐.”
“뭐?”
종일 손에서 꽉 쥐고 있던 휴대폰 대신 뒤늦게 나이프와 포크를 쥔 이연우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지적 오메가 관점.”
이연우의 형, 이민혁과 임태호는 동갑이다.
◈◈◈
임태호는 ‘알파 이연우’에게 흔들린 적 있다.
이연우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것이고, 사실 임태호 그 자신도 확실하게 자각한 채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바로 딱 1년간 겹쳤던 대학 시절의 몇 달간은 그런 가벼운 열병에 걸렸었다. 그린 듯한 모습과 향을 가진 알파가 다정하게 다가온 것에 퍽 설렜다고 설명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연우가 기억하는 ‘손만 대도 얼굴이 빨갛게 익으면서 긴장하는 선배 임태호’의 모습은 사실 대부분 그 기간의 것이다. 한두 달의 두근거림이 다섯 살 어린 후배를 보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뀌었을 무렵에는 이연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근사한 후배에 대한 설렘을 접는 건 꽤 쉬웠다.
물론 그건 이연우가 막 자각하고 좌절에 빠진 문제가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연우의 깨달음대로, 임태호는 제 예쁜 후배의 화려한 전적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그건 베타가 아닌 이상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거였다.
처음에는 좀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했었다. 언제나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다정다감한 말만 건네는 후배에게서 ‘그런 흔적’이 보란 듯이 남아 있다는 건, 저도 모르게 귓가를 뜨겁게 했다. 태호는 극우성 알파의 향이 얼마나 좋은지도, 그 향에 다른 이의 흔적이 섞여들면 정말 엄청나게 자극적이고 야한 느낌이 든다는 것도 제 ‘예쁘고 착한’ 후배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하지만 그래서 이연우의 향을 더 좋아하게 됐다.
대학교 마지막 시험을 제 작은 원룸에서 함께 밤새워 준비하다가 이연우가 깜박 잠들었을 때, 서늘하면서도 그 끝이 달짝지근한 이연우 특유의 향을 몰래 들이켜며 드물게 제 자신이 오메가인 걸 감사히 여겼던 적마저 있다.
그쯤 되니 ‘아, 저 정도 향이면 사람들이 정말 좋아할 만할 거야.’ 하고 순순히 이해도 갔다. 하지만 임태호가 이연우에 대한 미약한 떨림마저 깔끔하게 놓을 수 있었던 건 단지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집안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무서울까요?”
“연우네?”
“……으, 진짜 어떻게 거길 그렇게 부르세요? 아무리 학교 선배였다고 해도 대단하다.”
요새 임태호는 근 몇 년 만에 이연우를 제외한 새로운 퇴근 후 친구가 생겼다. 유현민이다.
술에 완전히 뻗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진 것이 미안해서 그다음 날 곧바로 전화를 건 태호는, ‘안녕하시옵니까?’하는 말도 안 되는 극존칭을 쓰는 현민의 말에 웃음이 터져서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한편, 유현민은 무려 그 신화그룹의 사람들을 정말 옆집 부르듯 ‘연우네’라고 부르는 임태호의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요 몇 주 부쩍 친해진 이 동글 말랑한 형님은, 말수도 많지 않고 작은 장난에도 빨갛게 변할 정도로 수수한 사내다. 별다른 사치도 모르고 저와 만나서 하는 일도 서로 책을 교환해서 읽는 정도가 다다.
그런 모습만 보고 있자면 요새 연일 경제지에 이름을 올리는 신화그룹의 사람과 선후배로 가깝게 지내는 건 엄두도 못 낼 일 같은데, 세상에 저 말간 얼굴로 그 어마어마한 곳을 ‘연우네’, 세 글자로 줄여서 말한다.
현민은 시선은 여전히 책에 고정한 채 빨대로 음료를 쭉 빨면서 입을 열었다.
“태호 형, 그분 자주 만나세요?”
“연우 말하는 거야?”
“으으, 또 누가 있겠어요.”
“어제도 만났는데.”
임태호는 저를 보며 혀를 내두르는 유현민을 보며 작게 웃었다. 사실, 태호는 현민이 제 상냥한 후배를 저렇게까지 겁내고 어려워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중이다. 하지만 현민은 그날 밤, 이연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향을 두른 채 저를 바라보았는지 잘 기억한다.
회사의 그 누구도 이연우 팀장의 그 빈정거리는 말투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야, 그 얼굴로 홍보팀이라니 어울리기는 한다.’하고 농담으로 말할 뿐이다. 이건 뭐, 어디 가서 ‘사실 그 이연우가 이랬다니까요!’ 하는 말을 했다간 어디서 자다 왔냐는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할 정도다.
“만나서 대체 뭐 하세요?”
“그냥 별거 안 해.”
임태호는 조금은 멋쩍은 목소리로 저와 이연우의 하루를 읊기 시작했다.
“영화 보고, 밥 먹고…… 음, 차 마실 때도 있고. 집 와서 쉴 때도 있고.”
“둘이서?”
약간은 추궁처럼 들리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채 파악하지 못한 태호는 ‘으응.’하면서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 게 없는데 싶어서였다. 이 나잇대의 사내들이 어울리는 것에서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술을 잘하지 못하는 태호 때문에 술집을 가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 정도가 특이사항에 들어갈 거다.
하지만 ‘이런 분야’의 눈치가 빠르기로 소문난 유현민은 약간 과장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연애 박사까지는 아니어도 연애 코치 정도는 할 만한 깜냥을 지녔다.
그리고 지금, 그의 레이더에 약간의 이상 기류가 포착됐다.
“형님.”
“응?”
유현민은 자신이 떠올린 문장을 내뱉기 전에 말간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는 눈앞의 사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흐린 선이 여러 겹 겹친 쌍꺼풀, 살짝 처진 눈매에 통통한 얼굴선, 동그란 코. 170대 중후반의 평범한 30대 초반 직장인.
게다가, 베타.
이런 사람과 ‘그 사람’은 사실, 친한 선후배 사이라는 것도 얼른 믿기지 않는다. 굳이 사회적 지위나 외모를 놓고 따지려는 게 아니라 성격만 봐도 그렇다.
슬쩍 호기심이 발동한 현민은 태호를 살살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거 완전 데이트 코스인데?”
“하하, 아냐. 그런 거.”
“알파랑 베타가 만나는 거, 요새 누가 그거 촌스럽게 흠잡아요?”
임태호에게서는 딱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유현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임태호의 변화를 관찰했다. 워낙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니, 이런 말을 했을 때 조금이라도 여지가 있다면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거나 당황하겠거니 해서였다.
“아냐, 그냥 후배야. 친한 동생.”
하지만 태호의 반응은 깔끔하고 담백하다 못해 익숙한 부정이었다.
사실 그건 실제로도 그랬다.
임태호는 이연우와 함께하며 저런 장난기 섞인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었다. 사람들은 이연우에게 던지지 못하는 질문을 임태호에게 던지고는 했었다.
『야, 너 혹시 이연우랑 만나? 왜 같이 다녀?』
임태호는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과 동기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완전히 땅에서 펄쩍 떨어질 정도로 놀라며 퍼덕였었다. 마치 마음속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다. 목구멍까지 열이 치솟을 정도로 벌겋게 변한 태호는, 허둥대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깔고 내뱉는 무신경한 질문들은 처음에는 당혹으로 다가오지만, 쌓이고 나면 오랫동안 학습한 당연한 사실이 된다.
나와 이연우는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없어.
임태호는 8년 동안 그것을 수없이 배워 왔다. 때로는 상황이 알려주었고, 어떨 때는 사람이 자각하게 해 주었으며, 가끔은 저만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제 후배를 보며 스스로 깨닫기도 했었다. 이건 임태호가 이연우에 대한 설렘을 금방 접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어쩌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현민은 조금의 동요 없이 말끔한 얼굴을 하는 태호를 향해 턱을 긁적이며 툭 입을 열었다.
“햐. 신기하네.”
“왜?”
“형님한테는 참 잘하시나 봐요. 밖에선…….”
뭐라고 멍하게 말을 잇던 유현민은, 갑자기 확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얼른 말을 고쳐 끝냈다.
덕분에 태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게 됐다. 그가 아는 이연우의 모습은 하나다.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한, 가끔은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려 깊은 사내.
연우는 ‘밖’에선 어떤 모습일까. 임태호는 처음으로 그게 궁금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기회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
“이거 넥타이가 좀 별론가?”
“아뇨. 잘 어울리십니다.”
“너무 가벼워 보이진 않고?”
태호는 저를 향해 소곤소곤 물음을 던지는 부장에게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으며 작게 덧붙였다. ‘정말 괜찮은 것 같은데요.’
하지만 사실 그 말은 부장이 아니라 임태호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지금 그는 전혀 괜찮지 않다. 긴장한 표정으로 목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있는 부장보다 몇 배는 더 마음을 졸이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지금 그가 와 있는 곳 때문이다.
“신화 쪽에서 이번엔 지노 쪽에 안 밀리겠다고 아주 이를 갈았다고 하더라고. 우리 쪽까지 초대한 거 봐. 아주 그냥 보란 듯이 자랑하려는 거지.”
“네에…….”
사람들이 가득 찬 채로 웅성거리는 홀에서 제대로 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는 부장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사장 대리로 이 자리에 대신 참여한 그는, 이제껏 이런 자리에 와 본 적 없다. 물론 그건 임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호는 작게 한숨 쉬며 단상 위에 붙여진 커다란 현수막을 눈에 담았다.
/ 신화 전자 ○○○○○ 공개 행사 /
“크, 역시 신화그룹은 음식도 때깔이 다르네. 임 대리, 자네도 좀 들게.”
부장은 가볍게 준비된 핑거푸드와 과일을 입에 넣으며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태호의 귀에 그런 말이 들릴 리 없었다. 태호는 잔뜩 들떠 보이는 부장의 권유를 대충 거절하고는, 막 도착한 유현민의 메시지를 슬쩍 확인했다.
-헐, 전 쪼렙이라 거기 못 가는데! 개부럽….
……나도 쪼렙인데 여기 왜 있을까?
직장인 5년 차 대리 임태호는 울적하게 생각했다.
사실, 회사 내에서 다른 직원들도 꽤 이곳에 오고 싶어 했더랬다. 누구라도 지긋지긋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 하루쯤 이렇게 관계자 공개 행사에 와서 구경하는 쪽을 택할 거다.
하지만 그 수많은 간절한 후보자 중 선택된 건 ‘순둥순둥한 임 대리’였다.
해외 출장이 겹친 사장이 하고많은 사람 중에 임태호를 콕 지정한 이유는 하나다. 워낙 얌전하고 사고 안 치는 사람이니 중요한 자리에 가서 거슬리는 일 없이 있다가 오겠거니, 하는 당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태호에게는 직장 동료들이 모르는 가장 큰 결격 사유가 있었다.
“오늘 뭐냐, 그 3세들도 온다고 하던데. 혹시 누가 오는지 임 대리는 아나?”
“……아뇨. 딱히 전해 들은 건 없습니다.”
연우야 오지 마. 연우야 오지 마. 연우야 오지 마. 연우야 오지 마.
임태호는 속으로 제가 예뻐하는 후배를 향한 간절한 바람을 외쳤다. 사실 제일 쉬운 확인 방법은 이연우에게 직접 연락해서 ‘너 오늘 회사 행사에 참여하니?’하고 묻는 것이지만, 간이 작은 태호는 혹시라도 연우가 되물을 말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유현민의 메시지는 요란한 이모티콘과 함께 이어졌다.
-저희 팀장님도 오늘 거기 가신 거 보니까 안 갈지도 몰라요. 설마 3세가 다 가겠어요.
-근데 혹시 가면…… 그냥 잽싸게 숨으세요ㄷㄷ
유현민이 속한 전자1팀의 팀장은 신화그룹 3세 중 하나다.
태호는 제가 잽싸게 숨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다가, 얼마 안 가 현실적은 물론 신체적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다. 이연우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거나, 혹시라도 이연우가 온다면 정말 숨도 안 쉰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밖에 없다.
안 오겠지. 그래, 정말 설마 다 오겠어.
임태호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쓰며 저를 향해 또다시 말을 늘어놓는 부장을 향해 힘겹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이다.
“이연우, 예쁘게 방긋방긋 웃어.”
“누나나 잘해. 진짜 표정 썩은 사람한테는 아무 말 안 하고.”
“……현이 오빠는 원래 저렇잖아.”
욕인지 옹호인지 모를 말에 신화그룹의 ‘룩’, 이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는 남매의 말마따나 서늘하다 못해 냉랭한 인상에 작은 웃음기도 걸지 않고 있었다. 이정호 전 대표의 둘째 아들인 이현은, 유현민의 상사이기도 한 사내다.
임태호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번 공개 행사에는 신화그룹의 체스 말들이 대부분 참석한다. 회장인 이주호가 몇 번이나 참석하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라, 해외 출장에 가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 거의 강제 동원 수준으로 무조건 얼굴을 비치게 됐다.
오늘 이연우는 영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이 행사를 위한 회의니 뭐니 하는 것으로 며칠 전부터 밤을 꼴딱 새운 탓이다. 민혁은 영 안색이 어두운 연우를 항해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피곤하면 좀 일찍 먼저 들어가고.”
“안 그래도 그러려고. 죽겠네.”
이연우는 홀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찰나를 노려 작게 대답했다.
거대한 연회장의 안은 이미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업체 관계자, 기자, 신화그룹의 직원들…….
누군가의 시선이 집요할 정도로 꽂혀 드는 건 언제나 겪는 익숙한 일이고 또 충분히 감내해야 한다고도 생각하는 그였지만, 오늘처럼 피곤한 날은 역시 숨이 막혔다.
이연우, 그가 제 스스로가 어떻게 보일지 잘 알게 된 것도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다.
어디에서나 유독 눈에 띄는 아이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사내가 될 때까지 그는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신화 가를 뒤에 둔 배경, 연갈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외모, 극우성 알파로 발현한 뒤 가지게 된 새로운 성별과 향.
이 모든 것은 이연우를 돋보이게 했지만 반대로 그를 어디에서도 숨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연우는 익숙한 미소를 빙긋이 건 채로 자리에 앉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행사의 1부가 끝나는 시간만을 셈했다.
행사 시작을 위해 사람들에게 으레 하는 인사를 시작한 사회자, 제 각자 말을 늘어놓는 목소리들, 그릇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사소한 마찰음, 중간중간 들리는 카메라의 셔터음.
이연우는 속을 달래며 괜히 물을 몇 모금 삼켰다. 확실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여느 때처럼 대충 넘길 수 있었을 소음들에 자꾸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영 성격이 좋지 않기는 해도 이런 행사장에서만큼은 그린 듯한 신화그룹의 나이트가 되던 이연우를 잘 아는 3세들의 눈이 흘끗 제 동생에게로 꽂혔다. 어찌 됐건 이연우는 꽤 사랑받는 막내다. 그걸 알아챈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허리를 꼿꼿하게 펴서 자세를 바로 한 채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로 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뭔가 정말로 익숙한 인영이 눈에 걸린 건 매우 우연찮은 일이었다.
이연우는 곧바로 제가 본 것을 의심하고 또 부정했다. 순간이나마 그가 떠올린 이름은 절대로 여기에 있을 리 없는 누군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떠오른 퀘스천 마크는 사람들이 분주히 스치는 와중에도 자꾸자꾸 작은 가시처럼 그를 거슬리게 했다.
세상에 저런 동글 말랑한 사람이 하나 더 있을 수도 있나.
이연우는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저만치 멀리 있는 그 ‘누군가’는 이연우가 있는 쪽에서는 교묘하게 각도가 가려져 채 다 보이지 않았다. 아닌 척하며 계속 고개를 기웃거리던 연우는, 보일 듯 말 듯 하며 자꾸 시야가 가리는 것에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결국 작게 튀어나온 불만은, 그렇지 않아도 요주의 상태이던 가족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이연우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리 좀 바꾸자.”
“나?”
“아니. 현이 형. 빨리.”
이민혁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조금 초조하게 말하는 제 막냇동생의 말에 동그란 눈이 됐지만, 정작 자리를 바꿔 달라는 요청을 받은 사촌, 이현 쪽은 담담했다. 그는 별 대답도 없이 바로 제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연우는 곧바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신화가 테이블의 작은 이동은 잠시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별다른 의심은 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늘씬하고 차가운 인상인 그들을 보며 뭔가 일이 있어 자리를 바꿨나 보다, 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자리를 옮긴 이연우는 자연스러운 얼굴을 내건 채 은근슬쩍 제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그가 확인하고 싶은 건 하나다. 저만치 떨어진 구석의 테이블에 앉은 한 남자가 푹 숙인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
허탈해질 것이 분명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남자의 곁에 앉은 다른 중년 사내의 얼굴이 본 적 없는데. 그런데도…….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연우의 눈은 잠시 동안 가늘어졌다가, 이윽고 천천히 크게 커졌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내는, 고개를 든 찰나에 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사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주쳤다고 느꼈다’라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를 거리였지만, 그건 착각이 아닌 듯했다.
시종일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 아니 이제는 형이 된 임태호가 제대로 목을 펴지도 굽히지도 못한 채로 석상처럼 굳어 있었으니까.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이연우였다.
이연우는 자연스러운 척 떨리는 손으로 제 휴대폰을 꺼내서 주변을 살피며 액정을 꾹꾹 힘주어 눌렀다.
-태호 형?
한번 제대로 눈에 들어오고 나니, 멀리 떨어져 앉은 태호의 행동은 마치 코앞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임태호는 제가 보낸 문자에 말 그대로 펄쩍 뛰었다. 보낸 메시지 옆의 숫자가 곧이어 사라지는 건 일종의 확인 사살에 가까웠다.
이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급하게 메시지를 이었다.
-여기 어떻게 왔어요?
-부장님이랑 같이….
-회사?
메시지는 읽은 게 분명한데 얼른 답장이 오지 않아 저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임태호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게 보였다. 이연우는 이어지는 답장에 순간 입술을 꽉 물면서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삼켰다.
-진짜 미안해. 우리 회사 사실 신화 쪽이랑 거래해…………
이연우는 때때로 임태호를 메시지의 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다섯 살 연상의 남자는,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온갖 감정이 느껴지게 해서다. 글자만으로도 풀이 죽을 대로 죽은 게 느껴지는데, 위로는커녕 자꾸 희미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언제부터요?
-조금…, 진짜 조금 됐어…….
굳이 이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제게 그걸 말하지 않은 이유를 뻔히 짐작할 수 있는데, 임태호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괸 채로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동그란 머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렌즈라도 끼고 올 걸 그랬네.
살짝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눈에 뭔가를 걸치는 걸 귀찮아하는 터라 일할 때 아니면 자주 안경을 끼지 않는 연우는, 저만치에서 꼬물거리는 선배를 보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이연우는 인파들 속에서 임태호와 함께 그렇게 단둘만의 세계를 만들며 잊고 있었던 게 있다.
“…….”
바로 막냇동생을 유심히 살피던 제 가족들이다.
이민혁은 죽어 가던 막냇동생 뒤에서 실시간으로 번지는 꽃밭 환영을 보면서 이게 뭔가 싶어졌다. 그걸 느낀 건 민혁뿐만이 아니었는지, 온종일 조용히 있던 사촌 형 이현, 그 역시 처음으로 입을 뗐다.
“저거 혹시 약했어?”
“……아마 아닐 거야.”
마약이 중대한 위법 행위인 나라에서 자신 있게 ‘에이, 형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웃을 수 없다는 건 어쩌면 조금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연우는 정말 그런 의심을 받아도 될 정도로 한순간에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연우의 가족들은 제 막내의 시선이 종종 닿는 곳을 따라가고는 했지만, 이 거대한 홀 안에서 이연우의 안색을 살피며 앉아 있는 흐린 인상의 사내를 콕 집어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이연우의 이상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부 끝났는데 안 가?”
“어.”
“피곤하다며.”
“됐어. 괜찮아.”
민혁은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정말 자신의 막내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진심으로 의심했다. 이런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망갈 방법을 궁리하던 사람이 이연우다.
부모님 대신 동생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던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숱하게 겪었던 민혁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며칠간 밤새워서 피곤해 죽겠다던 녀석이 안 가고 행사장에 끝까지 앉아 있겠다니.
심지어…….
“너 오늘 왜 이렇게 잘 웃어? 보긴 예쁘다, 얘.”
“언젠 웃으라며.”
저렇게 시종일관 고상한 얼굴을 하고?
이민혁은 마치 어디서 준비해 온 것처럼 듣기 좋은 단어를 엮어 말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 제 막냇동생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막내가 철이 들었구나, 하고 내심 뿌듯해하기도 했다.
툭하면 ‘전지적 오메가 관점’을 내세우며 빙의했던 탓일까.
그 순간 이민혁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생각을 하는 오메가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임태호다. 태호는 처음으로 보는 ‘밖’의 이연우에 멀리서나마 눈을 반짝이는 중이었다.
사실, 조금은 감탄도 했다. 1부 행사가 끝나자 이연우의 근처에는 3세들을 아는 척하기 위해 슬슬 눈치를 보며 신경전을 벌이는 무리가 생겼다. 그건 몇 걸음 떨어져서 보니 더욱 잘 띄었다.
이렇게 커다란 행사의 호스트가 된다는 건 어떤 일일지, 태호는 잘 감이 안 왔다.
8년 넘게 가까이 지내면서 잠시 무뎌졌던 현실 감각이 새삼스레 확 피부로 와 닿았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저만치에서 보이는 제 후배는 참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한 올 헝클어짐 없이 잘 세팅된 머리에 몸에 딱 맞는 슈트를 두른 이연우의 모습은 정말 저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도 보였다.
그때 태호의 휴대폰이 작게 진동했다. 이연우였다.
-차라리 빨리 2부 시작했으면 좋겠네요.
-왜?
이연우의 답장은 한 박자 늦게 왔다.
-어르신들 상대하는 거 피곤해요.
임태호는 순간 제 옆에 부장이 앉아 있다는 것도 잊고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한 걸 겨우겨우 눌러 삼켰다. 저런 우아한 얼굴을 한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메시지를 눌러 쳤을 이연우라니. 늘 아무렇지도 않게 나눴던 메시지인데도 왠지 속이 간질간질했다.
이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체하지 못해 안달인 알파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모습을 하고서 제게 몰래 말을 건다는 우쭐함이 들기도 했다.
“임 대리, 뭐가 그렇게 재밌나? 같이 좀 보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애인이라도 생겼어?”
이제 슬슬 눈에 피곤함이 깃든 부장은 그답지 않게 휴대폰을 자주 살피는 임태호를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태호는 당황함에 살짝 귓가가 발갛게 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하니 지금 저쪽에 있는 ‘그’ 이연우와 몰래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 하하. 아뇨, 부장님. 그냥-.”
조금은 어색한 억양으로 떨어지던 임태호의 말은 끝까지 다 이어지지 못했다.
홀 중앙 쪽에서 난 작은 탄성과 파열음 때문이었다.
직원과 사람들로 빙 둘린 저쪽에서는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확 번졌다. 임태호는 물론이고 부장의 눈까지 동그랗게 변한 채로 고개가 돌아갔다.
“뭐야? 무슨 일인지 보이나, 임 대리?”
“음. 잠시만요. 잘 안 보이는…….”
태호는 저도 모르게 문장의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입을 작게 벌린 채 딱 굳었다. 회장 안의 작은 소란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뒤늦게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어머, 세상에! 괜찮아? 안 뜨거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얼룩은커녕 보기 싫은 주름 하나 없었던 빳빳한 슈트 위로 연갈색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신화가의 차기 세력이나 마찬가지인 3세들의 테이블을 맡아 잔뜩 기합이 들어갔던 직원 하나의 실수였다. 별다른 게 아니라 옅은 홍차여서 진득거리거나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한 벌에 몇백은 우습게 넘어가는 이연우, 그만을 위한 옷은 이미 흐린 갈색으로 보기 싫게 얼룩이 생긴 지 오래였다. 직원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의 벌벌 떨며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들은 수건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들고 와서 이연우의 상태를 살피느라 바빴다.
이 홀에 들어오는 직원들은 모두 다 본가의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주의 사항을 교육받은 이들이었고, 그들은 거의 일주일간을 꼬박 숙지한 주요 인사들의 매뉴얼에서 눈앞의 그린 듯한 사내의 이름 역시 가장 상단에서 확인했었다.
[고전적인 취향. 대체로 까다롭지 않으나 의전을 신경 쓸 것.]
그때는 별것 없네 싶었던 ‘고전적’과 ‘의전’으로 뭉뚱그려진 표현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찔한 경고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혼란을 한 번에 잠재운 것은 사건 당사자인 이연우였다.
“괜찮아, 안 뜨거워. 걱정 안 해도 돼.”
“진짜? 혹시 쓰리거나 그러면……!”
“하하, 아냐. 그 정도는.”
혹시라도 다쳤을까 싶어 당황했던 3세들은, 그려 만들다 못해 완벽한 미소를 걸고 있는 막내의 얼굴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조금은 얼빠진 생각이지만 그들은 지금 눈앞의 남자가 자신들의 동생이 맞나 하는 문장을 저마다 동시에 떠올렸다.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옷은 새로 부탁할 수 있을까요?”
마치 금빛 물이 일렁이듯이 매끄러운 눈웃음이었다. 그 모습에 직원 하나는 귀를 벌겋게 물들인 채 앞장섰고, 연우는 ‘실례.’라고 말하며 옷의 얼룩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걸음걸이로 홀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은 얼마나 우아하던지, 희미하게 남은 페로몬의 잔향마저 흠잡을 데 없었다. 깜짝 놀라 긴장했던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흘렀다. 몇몇 오메가들도 마찬가지의 얼굴을 한 채였다. 하지만 제 동생의 약물 투약을 부정했던 이민혁은 달랐다.
그는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였다.
“……연우 진짜 어디 아파?”
◈◈◈
두근, 두근, 두근.
지금 임태호는 귀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커다란 나무문 근처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허겁지겁 뛰어온 것도 아닌데 목이 바짝 마르고 얼굴로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 게 느껴지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저를 이상하게 볼까 싶어 멈출 수도 없다.
서른셋 인생 처음으로 해 본 미행은 정말이지 절대 녹록치 않았다.
제 후배는 분명 멀쩡하게 걸어 나가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덜컥 겁을 먹은 태호다.
‘혹시 연우 어디 다친 거 아니야?’
이 불길한 가정을 한 번 떠올리고 나자 도저히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임태호는 부장에게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후다닥 이연우의 뒤를 쫓았다. 어찌나 보폭이 큰지 이미 한참을 앞서가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에 어디서나 가장 먼저 짚어지는 극우성 알파 특유의 향이 이 어설픈 추적의 동료가 됐다.
……없지?
진짜 아무도 없는 거 맞겠지?
태호는 주위를 둘레둘레 살피며 식은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이건 살면서 언제나 사고 한 번 친 적 없고, 늘 인파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 인생을 살아온 임태호 생애 가장 큰 모험이었다.
혹시라도 구두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까 싶어 까치발까지 들어 총총걸음을 친 태호는, 계속 목표 지점이 아닌 척 지나치던 나무문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러고는 용기를 내어 똑똑, 두들겼다.
사실 처음 노크는 너무 작게 하는 바람에 소리가 안 나서 두 번째에야 제 박동처럼 들리는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네, 들어오세요.”
방 안에서 나직하게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목소리로 떨어진 허락이 들렸다. 이연우였다. 하지만 섣불리 문을 열고 발을 옮길 엄두가 안 난 태호는 머리만 빼꼼 내밀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었다.
그것에 의아해진 건 대답한 이연우 쪽이었다.
직원이 수건이라도 더 가지고 왔나 싶어 고개를 돌렸던 그는, 문틈으로 보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당연히 회장에 있어야 할 동그란 얼굴이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만 빼서 저를 보고 있다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
“……몰래 쫓아왔어.”
마치 큰 죄를 지었다는 것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는 작기는 해도 고해성사처럼 또박또박했다.
“선배가요?”
“…….”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의 뜻이다.
세상에, 저 임태호가 몰래 쫓아왔다니. 이연우는 그걸 깨닫자마자 작게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태호는 그러잖아도 붉게 변한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익었다. 우물쭈물하는 표정이 좀 더 놀리면 당장에 도망칠 모습이라, 이연우는 얼른 문가로 다가가 부끄럼 많은 제 선배를 끌어당겼다.
“들어와요. 빨리요.”
임태호는 응접실 안으로 발을 딛는 몇 초 동안 ‘나 진짜 들어가도 돼?’를 다섯 번은 물었다. 이연우는 그 수많은 질문에 깔끔하게 ‘그럼요.’ 하나로 대답하면서,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조심스러운 사내를 달랬다.
말수가 적은 태호로서는 이례적인 질문 공세는 응접실 안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화상 같은 거 안 입었어?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네에. 미지근했어요. 접시가 깨지긴 했는데 깔끔하게 쪼개져서 상처 하나 없고요.”
힘이 바짝 들어갔던 어깨가 눈에 띌 정도로 축 늘어지는 것을 보는 건 왠지 기묘한 경험이었다. 이연우는 흰 셔츠에 묻은 찻빛 얼룩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아, 진짜 다행이다.’하고 속삭이는 임태호를 내려다보며 왠지 속이 뜨끈해졌다.
솔직히 연회장에서의 행동은…… 반쯤은, 아니 사실 100퍼센트 임태호를 두고 한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화는 안 내더라도 그렇게 나긋하게 눈을 접어 웃고 소름 돋을 정도로 교과서적인 말을 줄줄 내뱉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뭐 지금 보니 소용없는 일이었나 싶기도 했다.
정작 보길 바랐던 사람은 혹시라도 제가 다쳤을까 싶어서 긴장해 벌벌 떨면서 쫓아왔다고 하니, 형들과 누나 앞에서 괜히 웃긴 짓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올 것도 같은, 묘한 고양감에 가까웠다.
연우는 긴장이 풀린 발간 얼굴을 한 태호를 향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호 형.”
“…응?”
아직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태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연우의 아몬드형 눈이 살짝 윙크하듯 가늘어졌다.
“그런데 저 옷 갈아입고 있었는데.”
일부러 살짝 톤을 낮춘 목소리는 옅은 장난기가 어린 채였지만 문장이 문장이니만큼 묘한 울림을 주었다. 깜짝 놀랐다가, 초조했다가, 안도했다가 하며 급박한 감정 변화를 겪는 통에 잠시 과부하가 걸린 태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한 채 제 후배를 끔벅끔벅 올려다보았다.
“…어? ……어어? 나갈까? 아니, 나갈게!”
잠시나마 편하게 늘어져 있던 임태호는, 고장 난 로봇이 갑자기 오작동하는 것처럼 뻣뻣해진 채로 펄쩍 뛰며 곧바로 뛰쳐나갈 기세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태호는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사내가 ‘쉬잇.’하고 손을 입술에 가져다 대는 걸 보고 곧바로 움찔하며 얌전해졌다.
그렇게 어영부영 붙잡힌 임태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우와, 우와, 우와. 어떡해.’
태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쭈물 구두코만 바라보았다. 눈앞의 알파가 재킷과 베스트, 넥타이까지 다 풀고 셔츠 한 장만 느슨하게 걸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한 탓이었다. 게다가 이 순간에 제 착하고 멋진 후배의 향이 더욱 짙게 느껴지다니!
그건 좋다고 하기에는 끔찍하고, 끔찍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다디단 순간이었다.
‘알파’는,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은 제 선배의 모습을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눈에 새기면서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어 개 풀린 단추를 지나 하나, 둘, 셋…….
셔츠의 깃이 벌어지는 것과 어디 하나 빠짐없이 단단하게 늘씬한 근육이 새겨진 몸이 드러나는 건 정직할 만큼 일정하게 비례했다.
천과 살갗이 스치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였나. 태호는 손바닥에 긁힌 자국이 남을 정도로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완전히 뒤를 돌아 벽에 머리를 대고 설까. 그러면 너무 웃기게 보려나. ……아, 그래도 진짜 이렇게 있는 건 너무 창피한데.
임태호는 이연우가 셔츠를 벗는 그 몇 초간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이제껏 8년을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이연우가 이렇게 가까이서 옷을 갈아입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임태호의 고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말끔하게 준비되어 있는 새 셔츠를 휙 둘러 걸친 후배의 나긋한 말 때문이었다.
“태호 형, 괜찮으면 넥타이 좀 매 주실래요?”
-되게 예쁘게 묶던데.
나직하게 덧붙여진 문장은 상냥하기 짝이 없었지만 고개를 저어 거절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을 만큼 딱 부러졌다. 태호는 머뭇머뭇 제 후배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용케도 고개를 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직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 않은 이연우의 몸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눈가로 벌겋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너무 장난쳤나?’
결국, 먼저 반성한 건 태호가 쩔쩔매는 것에 약한 연우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썹을 휜 채로 손을 떠는 선배는, 평소 같았으면 금세 묶었을 타이를 자꾸 헤맸다. 이연우는 자신보다 시선이 한 뼘은 낮은 태호가 입술을 꽉 다물고 제 넥타이를 매주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이것도 나름대로 꽤 섹슈얼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넥타이를 매는 건 가장 약하고 예민한 부분 중 하나를 가장 정중하게 조이는 행위다.
아. 입술 안쪽에 살짝 옅은 점이 있었구나. 왼쪽 쌍꺼풀이 조금 더 진한가? 코끝이 동그랗네. 그리고 또…….
이연우는 저도 모르게 임태호를 눈에 담는 것에 한껏 집중한 채로 8년간 셀 수도 없이 많이 봐온 얼굴을 뜯어 살폈다.
물론 그건 그렇지 않아도 긴장한 태호에게 좋지 못했다.
오메가의 숨이 살짝 커지고, 그보다 좀 더 느긋한 알파의 숨이 반 박자 늦게 간지럽게 섞여들었다. 이 순간, 알파가 자각하지 못한 게 있다면 그 자신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짙어진 스스로의 향과 빨라진 심장 박동이다.
그때였다.
순간 내 심장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 서로 놀랄 정도로 큰 굉음이 들려온 것은.
“이연우! 너 진짜 괜찮은 거 맞-!”
굳게 닫혀 있던 응접실의 문을 연 것은 아무래도 우리 막내의 상태가 이상하다며 앞장서서 달려온 이연아와 그 뒤를 따른 두 오빠, 이민혁과 이현이었다.
“맞…….”
“…….”
“…….”
마치 서로가 서로를 유령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임태호는 이연우의 넥타이를 잡은 채로 그대로 석상처럼 굳었고, 뻔뻔하게 임태호를 놀리던 이연우마저 잠시 머리가 백지장이 됐다.
하지만 그건 문을 열고 들어온 세 사람 역시 큰 차이는 없는 터라, 엄청난 소리 끝에 시작된 적막은 제법 기약 없이 길어졌다. 이 혼란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신화그룹의 새로운 차기 왕으로 추대되는 서른셋의 로맨티시스트 이민혁이었다.
“……누구?”
늘 하는 깍듯한 말투는 나올 여력조차 없이 흩어졌다. 그냥 머리에 떠오른 단어를 곧바로 입 밖으로 내뱉는 게 고작이었을 뿐이다. 깜박, 깜박, 깜박. 발그레한 볼을 한 흐린 인상의 남자, 임태호의 눈은 그렇게 느리게 한 세 번쯤 움직였다.
임태호의 두 번째 고장이었다.
“비, 비, 비, 비!”
“비?”
“……비서입니다!”
네 번을 더듬은 뒤 흘러나온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어쨌거나 제법 씩씩하게 흘러나온 대답이긴 했다. 그 순간 이민혁, 이연아 남매는 대답 대신 눈으로 대화했다.
‘오빠, 저런 연우 비서 본 적 있어?’
‘당연히 절대 없어.’
남매의 합의는 1초면 충분했다.
“도련님! 가시죠!”
비서라고 주장하는 덜덜 떠는 남자는 뻣뻣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직 단추도 채 다 잠그지 못한 신화그룹의 나이트는, 그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백퍼 비서 아니네!
심증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작 같이 있던 이연우가 세상 얌전하고 착하게 졸졸 따라가는데, 이건 뭐 성인 납치라고도 할 수 없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휑해진 응접실 안에 남은 신화그룹 3세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서로만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남매의 사촌인 이현의 낮은 목소리가 툭, 하고 그들의 귀를 때렸다.
“이연우, 요새는 비서랑 같이 옷도 벗어?”
◈◈◈
그러니까, 꼭 무슨 영화처럼 도망치는 곳이 못해도 바닷가나 예쁜 전망이 보이는 곳이었으면 덜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하, 하핫, 아, 진짜 저한테 아무도 도련님이라고 안 그래요……. 아, 하핫, 아, 죽겠다.”
“……생각나는 말이 없었어.”
“그래도 도련님은 심했어요.”
하지만 지금 이연우와 임태호의 현실은 신화그룹 본사 홀의 인적 드문 곳에 있는 화장실 안이다. 임태호는 새빨갛게 변한 제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보여서 차가운 물에 연거푸 세수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세수를 열심히 해도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부끄러움도, 이제는 거의 주저앉아 웃고 있는 이연우의 웃음도 멈출 수 없었다.
“진짜 겁도 없다, 선배는. 아. 형이지, 이제.”
웃는 걸 참아보려는 듯 작게 한숨까지 쉬는 이연우의 목소리는 참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임태호는 왠지 더 창피해졌다. 좀 괜찮은 모습으로 연우 가족들한테 첫인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평생 피해 다니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형 얼굴 진짜 빨갛다.”
“엄청 떨렸어.”
“응, 대단했어요.”
임태호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늘 신문이나 뉴스에서만 보던 이연우의 가족들이 어떻게 하필 그 순간에 우르르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
“가족분들이 다 키가 크더라.”
“하하, 그게 첫 소감이에요?”
“누님분이 나랑 키가 거의 비슷하던데.”
“힐 신어서 그래요.”
아무리 선후배라지만 단추를 반쯤 푼 그룹 총수의 막내아들과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로 넥타이를 매주는 거래처 대리가 한 방에서 딱 붙어 있는 모습은, 모르긴 몰라도 분명 보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태호는 손을 물로 적신 다음에 제 뺨에 가져다 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먼저 말 안 해서.”
“아니에요. 저 위해서 말 안 한 거나 마찬가지인 거 알아요.”
“응.”
“그래도 좋은데요. 오늘 같은 날에 형도 보고.”
‘형’. 태호는 아직 영 익숙하지 않은 단어에 조금 머쓱한 표정을 했다가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한 손으로 눈가를 꾹 가려 눌렀다. 정말 흔해 빠진 단어인데도 이연우의 목소리를 통하면 늘 저렇게 기묘한 울림이 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따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은 도저히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 좀 놀랐어.”
얼굴을 보지 않고 있어서 할 수 있는 말들은, 생각보다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여기저기에 신문이나 뉴스에서나 보던 사람들이 있고, 사진도 많이 찍고…….”
“하하.”
“연우 너는 그 사람들 한가운데 있는 걸 보는데…….”
임태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조금은 부끄러워도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입 밖으로 이런 말을 꺼내 본 적 없었으니 조금은 엉망진창으로 이상한 오늘 같은 날에 기대서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멋있었어. 아, 우리 연우가 평소에 이래서 바빴구나, 싶기도 하고.”
사실 임태호는 이연우가 제 말에 조금쯤 웃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것도 아니라면 ‘항상 해 왔던 거라서 괜찮아요.’ 이제껏 봐왔던 여느 때의 후배는 늘 이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역시 오늘은 뭔가 좀 이상했다.
“…이제 네 개네요.”
손이 약간 차가워진 탓일까. 손등에 닿는 후배의 손가락은 평소보다 좀 더 따뜻한 것 같았다. 이연우는 임태호가 눈을 가리고 있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 잡으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우선, 하나.
“후배.”
“…….”
“아는 동생.”
그리고 약간의 한숨이 섞인 둘.
“가짜 상사도 뭐, 포함하고.”
장난처럼 짚어내는 셋. 그리고…….
“그런데 ‘우리 연우’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마지막, 넷.
어느새 완전히 잡힌 한쪽 손이 떨어지며 일부러 가려 피했던 이연우의 시선이 똑바로 와 닿았다.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가, 빈틈없이 깍지 끼어 잡았다가, 그다음은 부드럽게 당겨 태호의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가.
늘 다정하고 따뜻했던 후배의 행동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심장이 다시 시끄럽게 뛰기 시작한 건, 제 손바닥에 닿는 이연우의 얼굴이 저보다 더 열이 올라와 있는 것을 눈치챘을 때였다. 그 순간 임태호는 8년간 불렀던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왠지 좀 부끄러워졌다.
“……저기, 연우야.”
“태호 형.”
임태호는 대답보다는 되물음에 가까운 부름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으응.”
하지만 그는 저를 잡아 삼킬 듯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후배를 마주 볼 용기는 채 내지 못했다. 이연우는 그런 임태호를 채근하거나 지적하지 않고 한동안 말없이 눈에 담더니, 약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파의 입에서 나온 건, 임태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형 애인은 얼마나 관대한 편이에요?”
임태호의 눈은 저도 모르게 동그랗게 뜨였다. 계속해서 피하던 시선을 똑바로 겹친 것도 그때였다.
“그건…… 왜?”
기다렸다는 듯 조금은 희미한 웃음기가 걸린 눈이 예뻤다. 그래서일까, 임태호는 제게로 느긋하게 기울어지는 이연우의 얼굴을 피하지 못했다.
“이러면…….”
따뜻한 숨이 코앞에서 부딪히고 서늘함보다 달짝지근한 향이 강해진 페로몬이 속을 덥혔다. 태호는 그 순간 손을 꽉 그러쥐었다.
“화내려나 싶어서.”
그 어떤 대답도,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고개를 틀어도 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알파의 입술이 맞닿을 것 같아서였다. 단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이연우의 눈은, 머리카락 색보다 조금 더 옅은 갈색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임태호는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해서 눈꺼풀을 벌벌 떨었다. 마치 입을 맞출 듯 가까워졌던 알파의 얼굴이 떨어진 건 그때였다. 차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옅은 한숨이 스쳤던 것 같기도 했다.
“장난이에요. 부장님이랑 같이 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응.”
“저도 이제 슬슬 가봐야 해서. 선배가 먼저 갈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나갈까요?”
태호는 괜히 세면대로 몸을 휙 돌리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머, 머, 먼저 가!”
“…네. 그럼 나중에 연락해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듣기 싫게 긴장한 티가 역력한 제 목소리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깍듯하고 예의 바른 인사였다. 태호는 그 느긋하면서 단정한 목소리에 괜히 바보처럼 심장이 벌렁거리는 그 자신을 탓했다.
장난이라잖아. 바보야? 뭐 이런 거에!
하지만 만약 임태호가 제 완벽한 후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봤다면 상황은 꽤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혼자만 바보가 아니라는 위안은 얻었을 거다. 화장실의 문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고개를 숙인 사내를 봤다면, 또 어땠을까.
“미쳤어. 미쳤어. …씨발, 진짜 미쳤어?”
아마 ‘바보야?’라는 자책보다는 ‘씨발 미쳤어?’ 쪽이 더 큰 강도를 가졌을 거다.
이연우는 곧장 복도를 걸어 나가 조금 전 임태호와 함께 빠져나온 응접실로 도망치듯 향했다. 이건 정말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연우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상황에서도 방금 상황을 다시 그려보았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귀 끝까지 빨갛게 변한 얼굴이? 동그란 턱 선으로 물기가 타고 떨어지는 모습이? 제대로 날 보지도 못하면서, 씨발, 입만 열면 예쁜 말만 줄줄 쏟아내는 목소리가?
아니, 사실 뭐가 됐든 가장 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임태호를 탓할 게 아니다.
진짜 키스할 뻔했잖아!
이연우는 깨달았다.
임태호를 연상의 선배로만 봐왔던 건, 오히려 제 쪽이었다. 제 일상에서 부서지기 쉬운, 약한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흐린 조각 같은 사람으로 그 나름대로 귀하게 여기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달리 먹기 시작하자 흔들리는 쪽은 임태호가 아니다.
오히려…….
“얘, 너 그 사람 누구니?”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이연우를 맞은 건 한참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었다. 넋이 나간 채로 따라 나간 동생이 영 마음에 걸렸던 이연아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상황 파악부터 나섰다.
“왜, 비서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 쳤던 사람!”
머리털 나고 나서부터 늘 함께했던 동생이다.
늘 사고뭉치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완전히 경우 모르는 녀석은 아니었던 터라 예뻐할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던진 건 이연아였지만, 이민혁은 물론이고 이현까지 응접실 가운데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연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배.”
“뭐?”
“선배였어. 선배였는데.”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연우의 표정을 볼 수 있었던 건, 그가 새빨갛게 변한 제 얼굴을 가리는 것 대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을 때였다.
“…….”
“그랬는데…….”
자신 없이 말꼬리를 흐리는 목소리는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씨발. 존나 아깝다.’
이건 이연우가 마음을 진정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후 떠올린 첫 문장이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쪽이었지만, 흔히들 이럴 때 담배를 피우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다. 세상에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눈뜬장님이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까웠다.
사실 처음부터 말도 안 됐다.
어떻게든 임태호, 그 숫기 많은 남자와 친해지고 싶어서 굳이 정하지 않아도 됐을 멘토 선배니 뭐니 하는 웃긴 학과 규정까지 갖다 대면서 옆으로 비집고 들어갔던 것부터가 말도 안 됐다.
그 후로도 웃긴 짓만 했었다.
임태호의 앞에서는 욕은커녕 늘 깍듯한 존댓말을 쓰면서 선배, 선배 하고 붙어 다녔고 어떻게든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잘 보이고 싶어서 전전긍긍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떠올릴 새도 없었다.
8년을 그 곁에 있으면서 너무 당연해졌으니까. 이연우는 소파에 다리를 쭉 편 채로 기대고 앉아 눈을 가늘게 떴다.
스물다섯의 임태호라니! 씨발, 그때 애인이 있다고 우겼어도 찔러나 볼걸.
이연우는 과거의 저를 욕하며 이를 갈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참 귀여웠다. 여전히 부끄럼 많은 사람이기는 해도 지금은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이나 여유가 붙었다지만, 그때는 완전히 낯을 가려서 복학한 1년 내내 제 옆에만 찰싹 붙어 다녔었다.
……그래. 1년 내내 나하고만 있고, 나랑만 얘기하고, 나한테만 웃었는데!
연우는 제가 떠올린 그 완벽한 문장에 애꿎은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를 뒹굴었다. 베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때부터 옆에 있으려고 그 난리를 쳤는데, 사실 오메가니 베타니 하는 게 상관있었을 리 없다.
솔직히 그때의 임태호는 좀 더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어서 작정하고 지금처럼 갖다 박으면서 들이댔으면 순순히 먼저 오메가 애인 같은 건 없다고, 사실 자기가 오메가라고 고백했을 게 분명했다.
사실 그건 정확한 진단이었다.
당시 임태호가 겨우 한 달 못 되게 사귀었던 알파 하나는 태호에게 솔직한 고백을 들은 적도 있었다. 물론 이건 이연우는 모르는 일이다.
“아, 등신 새끼. 그냥 나가 뒈지세요.”
페로몬을 짚어 확인할 수 있는 오메가라면 누구든 뒤돌아보게 되는, 아니 심지어 같은 알파와 향을 모르는 베타들마저 시기와 선망 섞인 눈으로 보게 만드는 가장 반짝이는 극우성 알파. 누구인들 한 번쯤 눈에 담게 되는 사내. 신화 그룹의 나이트.
그 근사하고 멋들어진 표현을 모조리 가지고 있는 남자는 세상 다시없을 우울과 자책에 빠진 채 온갖 상스러운 단어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부터 임태호를 꼬실걸.
씨발. 아까운 내 8년. 캠퍼스 커플 해 볼걸. 씨이이발. 개 같은 인생.
굳게 닫혀 있던 이연우의 집 현관문이 짧은 전자음 소리와 함께 열린 건 그때였다.
타인의 향에 굉장히 예민한 편인 연우는, 머잖아 제 공간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기도 전부터 방문객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 방문객은 이연우와는 달리 며칠 전부터 구름 위를 걷듯 행복한 상태인 남자였다.
“막내야아~.”
“미친. 말투 왜 그래. 토 나와. 꺼져.”
바로 이연우의 형이자 이주호 회장의 장남, 이민혁이었다.
신화그룹 저택 바깥에서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처럼 냉랭한 인상의 오메가인 그는, 요새 바쁜 일정 와중에도 인생의 낙이 하나 생겼다. 바로 제 막냇동생의 러브스토리다.
감히 대신화그룹의 차기 수장, 이민혁 대표를 향한 냉대는 싸늘하게 이어졌다.
“왜 왔어? 가. 심란하니까.”
“저번에 본 그분이, ‘그 선배’ 맞지?”
하지만 이민혁은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었다.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온 건지 반듯한 슈트 차림이기까지 한 민혁은, 제 재킷을 대충 벗어 걸어 두고는 이연우의 맞은편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알아서 뭐 하게?”
“언제는 오메가 관점이니 뭐니 알려달라며. 연아한테도 말 안 해. 걱정 마.”
처음에 이연우가 패닉에 빠져 어영부영 꺼내 놓은 임태호의 성정체성은, 사실 어떻게 보면 태호가 오랫동안 비밀로 해 왔던 것을 악의 없이 커밍아웃 한 거나 다름없다. 정확히는 친구 일이라고 우기면서 말했던 걸 이민혁 그가 눈치챘던 것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연우는 살짝 한숨을 쉬면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짤막하게 덧붙였다.
“……진짜 누나가 뭐 아냐고 물어봐도 절대 말 하면 안 돼.”
이민혁은 제 동생의 그 말에 좀 감동받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이기는 했지만 알파로는 ‘저 새끼 저거 페로몬만 좋지 재활용도 안 돼.’하고 종종 생각했던 터라, 마음의 울림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사실, 민혁은 요 며칠간 이연우의 ‘선배’ 임태호에 대해 알아봤다.
그는 대표 자리에 앉아 차기 권력의 중심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아직 완벽히 이 거대한 유기체 같은 권력에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다. 민혁은 제 자신의 그런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 옆을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사람이 이연우라는 건 이민혁, 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임태호를 확인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이연우의 형이라서 한 일이 아니라 신화그룹의 대표로서 제 옆을 지키는 기사가 푹 빠져든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덜컥 걱정도 됐다. 이연우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사람이라면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까.
신화그룹에서 제일가는 로맨티시스트로 꼽히는 그는, 달고 행복한 단어들이 제가 밟고 있는 땅의 위치와 얽히면 어떤 칼끝으로 돌아오는지 누구보다도 잘 경험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태호에 대해 알아볼 것을 지시한 날엔 종일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초조함에 빠져 온갖 상상을 했었다.
그래서 비서가 조금 머쓱한 얼굴로 ‘확인해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라고 말했을 땐, 심장이 쿵 내려앉는 줄만 알았었다.
“근데 그때 방에서 둘이서 뭐 한 건지만 말해 주면 안 돼?”
“한 거 없어! 씨발, 뭐라도 했으면 좋겠네!”
오늘따라 평소보다 훨씬 뾰족한 반응을 보이는 막냇동생이건만, 민혁은 마냥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기만 했다. 비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 결과는 놀라웠다.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단 한 번도 모난 적 없이 자라고,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내로라하는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수석 졸업까지. 그나마 눈에 띄는 건 스펙보다 하향 지원한 회사였지만 내실 있고 안정적인 곳이라 그 안에서 경력을 잘 쌓으면 괜찮은 곳으로 이직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였다.
세상에 저 이연우가 늘 말도 안 되는 말투로 공손하게 전화를 받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민혁은 사실 별로 안 친한 거 아닌가 생각했던 과거의 어떤 날들이 미안해졌다.
이민혁은 제 막냇동생 옆에 이렇게 정상적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서른셋 인생에서 처음 알았다. 임태호는 약쟁이도, 술꾼도, 섹스중독자도, 인생 한 방을 노리고 몸으로 접근한 사람도 아니었다. 진짜 이연우가 말한 그대로 ‘선배’였다.
하필 저 안하무인 예쁜 개망나니가 그 난장판 인맥 속에서 반한 게 가장 정상적이다 못해 혼자 반짝이는 사람이라니.
보고서를 들고 얼이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신화그룹의 킹 이민혁은 깊게 다짐했다.
이건 진짜 하늘이 돕지 않는 이상 이럴 수 없는 거야. 이분 아니면 이연우, 쟨 진짜 답 없어!
민혁은 죄 없는 쿠션을 괜히 반으로 접었다, 폈다 하면서 푹푹 한숨을 내쉬는 제 동생을 다정함과 꿍꿍이가 동시에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8년을 그냥 선후배로만 지내서.”
이럴 수가. 귀여워.
이민혁은 순간 제가 떠올린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안간힘 썼다. 여기서 이렇게 말했다간 성질 더러운 막내가 도로 입을 꾹 다물어버릴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작게 웅얼거리는 이연우는, 평소의 그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건 참 흔하고 뻔한 데다 전형적이기까지 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건만, 세상에 무서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던 저 잘난 극우성 알파에 덧씌워지니 새삼 다르게 보였다. 민혁은 결국 입술을 딱 붙이고 웃음을 한 번 삼켰다가, 여전히 그 기운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물어보면 안 돼?”
“뭘?”
“아무리 내가 조언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잖아. 그 당사자가 아닌걸.”
연회장에서는 완전히 다 크다 못해 저절로 혀를 내두를 만큼 근사한 모습이더니, 역시 막내는 막내였다. 이민혁은 순식간에 제 말에 집중하고 있는 이연우의 모습을 보며 차근차근 덧붙였다.
“직접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하지.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미나, 뭐 그런 것부터라도.”
“…그런 건 다 알아.”
사실이다. 이연우는 임태호가 좋아하는 음식도, 취미도, 쉬는 날 보는 TV 프로그램도 안다.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은 몇 마디 짧은 물음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또 견고하다.
그래서 후배라는 이름표를 떼고 다가서는 게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서로 아예 처음부터 알아가는 사이라면 천천히 공통점을 맞춰 가며 가까워질 수 있을 텐데, 이연우와 임태호는 이미 8년간 선후배로는 가까워질 만큼 가까워진 사이다. 민혁은 조금 의아한 눈을 한 채 당연한 물음을 던졌다.
“그럼 네가 모르는 게 뭔데?”
재깍 나오던 이연우의 대답이 처음으로 뚝 끊겼다.
이연우는 다시 한 번 짧을 한숨을 쉬더니 한참을 괴롭히던 쿠션을 당겨 안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선배에 대해 모르는 것.
다시 말해, 임태호에 대해 알고 싶은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쉽게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질문의 답은, 이제는 너무나 많아져 버렸다.
◈◈◈
열 명의 직장인에게 퇴근 후의 피로를 풀어 주는 존재를 묻는다면 몇 개의 답이 나올까?
어떤 사람은 시원한 맥주를 꼽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운동이나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을 꼽으며 아마도 열 개의 대답이 나올 거다.
“임 대리님, 오늘 저희 끝나고 술 한잔 할 건데. 같이 가실래요?”
“…저, 갈 수는 있는데, 제가 술을 못해서요.”
“콜라 있잖아요! 사이다도 있고. 그럼 같이 가요.”
임태호는 제 옆자리에 앉는 동료가 쾌활하게 말하는 것에 흐리게 마주 웃었다.
직장 동료들은 가끔씩 저희끼리 모인 자리에서 ‘대체 임 대리는 퇴근하고 뭘로 스트레스를 풀까?’하는 말을 한 적 있다.
태호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기껏 물어보면 말꼬리를 흐리며 ‘…아마, 책?’ 하고 대답하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점이 문제가 됐던 건 아니다.
임태호는 숫기 많고 약간 소심한 편이긴 했지만 자기가 맡은 일 하나는 정말 깔끔하다 못해 흠결을 찾기 힘들 만큼 완벽하게 하는 타입이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도와줬으면 도와줬지 폐가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동료들의 이런 궁금함은 그저 인간적인 수준에서의 의문에 가까웠다. 임태호는 분명 매사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일 외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말수 적인 사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직장 사람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리고 가끔은 이렇게 술자리에도 참석하지만 함께 걸을 때면 언제나 반 발짝 늦게 걸어오는 조심성 많은 베타. 그게 임태호였다.
사실 이때까지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퇴근 시간이었다.
……그 얌전하고 조용한 임 대리를 기다리고 있는 장신의 사내만 없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술집에 가서 먹을 메뉴 이야기나 하며 시시덕대던 사람들은 놀라 눈만 크게 끔벅였다.
“여언…! 아니, 아니. 여기 어떻게, 아니, 무슨 일로-.”
“저 형 회사도 알고, 퇴근 시간도 아는데요, 뭐.”
저 큰 목소리를 내는 동글동글한 남자는 분명 늘 함께하는 동료 임태호 대리가 맞았다.
하지만 그들은 임태호가 저렇게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것도, 당황해서 허둥지둥 말을 더듬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태호는 그런 동료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신화그룹의 ‘그’ 이연우인데, 펄쩍 뛰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임태호는 며칠 전 행사장에서 ‘그런 일’이 있던 이후로는 잘 들어갔냐는 형식적인 인사 외에는 서로 연락이 드물었던 후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그나마 용케 이성적으로 한 행동은 이연우의 이름을 내뱉지 않고 삼킨 게 다다.
“그게, 어, 아니야, 우선 빨리, 어디든 가서, 그……!”
“아, 차 가지고 오셨나 봐요. 다행이다. 저 몸만 왔거든요.”
단어 단어로 두서없이 떨어지는 문장을 용케 해석한 이연우는 살갑게 눈을 접어 웃었다.
사실 ‘진짜’ 비서를 시켜 임태호의 빌라 앞에 차가 있는지 없는지 다 확인하고 온 그였지만, 임태호가 그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때, 슬슬 눈치를 보던 동료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임 대리님. 이 동생분이랑 가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죠?”
연우는 문득 저와 눈이 마주친 태호의 동료들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건채로 작게 묵례했다. 그 모습에 무리에 있던 오메가 몇은 약간 멍한 표정이 됐고, 곁에 있던 알파는 작게 움찔했으며 베타 동료 하나는 조용히 상황 파악을 끝마쳤다.
하지만 지금 ‘얌전한 임 대리님’은 그 기묘한 분위기를 파악할 여유가 없다.
임태호는 제 동료들에게 꾸벅 인사한 다음에 이연우의 팔을 붙잡고 허둥지둥 주차장으로 뛰다시피 걸어 도망쳤다. 하지만 그렇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뒤따르는 이연우는 목까지 벌겋게 변한 임태호와는 달리 평온하기만 했다.
“하하, 좀 천천히 가요.”
“여긴 왜 왔어! 누가 알아보면 어떡하려고!”
“최대한 못 알아보게 하고 왔는데. 알아봤을까요?”
슈트 차림이 아닌 가벼운 캐주얼한 옷을 입은 채 앞머리까지 가볍게 내린 이연우는, 대학 졸업 후로는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임태호는 저를 향해 눈을 접어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잇는 후배를 보며 순간 말문이 막혀 입만 달싹거렸다.
이연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형도 바로 못 알아봤잖아요. 한 박자 늦게 놀라던데, 뭘.”
“그거야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연우 그는 오는 길에 숍까지 들러서 머리 하고 왔다. 옷도 절대 대충 고른 게 아니다. 전담 스타일리스트까지 불러서 세상 제일 뻔뻔한 얼굴로 캐주얼 데이트룩을 주문했다.
오늘 그는 며칠간 연습하고 갈고닦은 말들을 털어놓을 참이다.
“형, 시간 있어요?”
“……연우 너 정말!”
“미리 말 안 하고 와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풀렸다, 풀렸다.
임태호의 표정을 잘 아는 이연우는 겹쌍꺼풀이 진 눈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처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확신했다. 오늘은 이연우 제가 생각해도 좀 무리하기는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선택이었다.
“오늘만 봐주세요. 네?”
실로 혼신의 미인계였다.
임태호는 저를 내려다보며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눈썹을 휘어 웃는 이연우에게 약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대답도 하기 전에 조용히 주머니에서 차 키부터 꺼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진짜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네에.”
이연우는 임태호가 좋아하는 미소를 얼굴에 건 채로 깍듯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제 후배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착하고 순한 사내, 임태호는 다른 방면의 고민을 시작했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고 나자 이성이 삐죽 고개를 든 거다.
‘연우 무슨 일 있나? 회사까지 온 건 처음인데.’
그도 그럴 것이 이연우는 내비게이션에 제가 예약한 곳이 있다며 식당 하나를 찍은 뒤로는 차 안에서 간간이 떨어지는 나직한 일상 이야기를 할 때 빼고는 꽤 진지한 표정이 됐다. 뭔가 몰래 엿보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늘 차분하게 갈무리되어 있던 향도 묘하게 일렁였다.
임태호는 운전하는 내내 살짝 긴장 상태로 이연우가 제게 할 말을 떠올렸다.
보통 이럴 때에는 회사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곳 역시 각각 개별 독방으로 나뉘어 외부와 차단된 정갈한 한정식 집이었다.
“한정식 좋아하죠? 여기 깔끔하게 잘해요. 오늘은 제가 멋대로 끌고 온 거니까 제가 살게요.”
“……으응.”
사실 평소 같았으면 반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이라도 내게 해 주면 안 되냐고 말했을 태호이지만 오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판에 가격조차 안 적혀 있는 식당의 음식이 얼마인지 알았다간 괜히 더부룩해질 것 같아서였기도 했고, 종종 보이는 제 후배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서이기도 했다.
취향이 꽤 까다로운 이연우가 자신한 탓일까.
얼결에 끌려온 저녁 식사는 평범한 밑반찬인 멸치조림을 먹으면서도 이 멸치는 얼마짜리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할 정도로 손꼽히게 맛있었다. 하지만 임태호는 그렇게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도 완전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이연우가 저에게 털어놓을 일련의 말들이 어떤 것일지 걱정스러웠다.
이미 머릿속 한편에서는 ‘뭔가 회사에 문제가 생겼나 봐. 집안일인가? 표정이 어두워.’ 하며 확신이 선 임태호는, 이제나저제나 제 고운 후배가 그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근심을 털어놓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연우는 중간중간 짬이 났을 때마다 잠시 생각에 잠기거나 태호의 근황을 물으며 예쁘게 웃기만 할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건 소심한 걱정인형 임태호의 상상을 더욱 나쁜 쪽을 향해 치닫게 하는데 한몫했다. 물론 이건 임태호 시선에서의 일이다.
제가 걱정되어 끙끙 앓는 태호를 차 안에서부터 눈치채고 있던 이연우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태호 형, 저 고민이 있는데요.”
묘한 빛을 띠며 가늘어진 알파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오메가는, 올 게 왔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눈에 힘을 주며 그 나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솔직히 임태호는 처음에 제가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후배의 깊은 고민을 들어 줄 때마다 하던 신중하고 따뜻한 문장 대신, 조금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응?”
“제 주변에 한 사람이랑 진득하게 오래 만난 게 형뿐이어서요.”
등줄기로 소름이 쫙 돋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임태호는 순간적으로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돌처럼 굳은 채 눈만 깜박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을 찌르는 말이었지만 평소처럼 얼굴 위로 곧바로 당황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회사까지 찾아와서 저를 데리고 온 다음에 한 시간 넘게 삼키다가 털어놓는 이연우의 고민이다. 그런 상황에 허둥대기라도 한다면 그것처럼 무례한 일은 없을 거다. 임태호는 이연우가 뻔히 짐작했던 생각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동요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터라, 태호는 시선을 어디에 똑바로 두지 못하고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론 영악한 알파는 그런 초조한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는 중이었다.
이연우의 고운 얼굴에 옅은 우울함이 걸린 건 그때였다.
“전 이제까지 계속 그쪽은 실패만 해 와서, 이 사람 저 사람 많이도 만나 봤는데 그것도 지나고 보니 다 의미 없고…….”
천천히 흐려지는 문장부터 그 끝에 걸린 자책 어린 한숨까지.
그건 평소의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던 극우성 알파의 모습이 아니었다. 임태호는 콩닥콩닥 뛰는 제 심장 소리 위로 예쁘고 착하고 다정한 후배에 대한 걱정을 먼저 올린 채로 눈썹을 휘었다.
그 슬픈 목소리가 어차피 망한 거, 이제라도 자신의 과거를 뒷수습하려고 발버둥치는 시도라는 걸 알 리 없다. 이연우는 살짝 기가 죽은 듯 시선을 떨구고 마지막 감정 처리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까 문득, 아 정말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인 게 아닌가 하고…….”
“아니야! 그런 거!”
이 순간을 이연우의 가족들이 알았더라면 ‘너 문제 있어, 미친 새끼야!’하고 대번에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름답고 교활한 알파의 앞에 있는 건 신입 사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수 1위, 회사에서는 순둥순둥, 고등학교 때는 부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임태호다.
“정말요?”
“당연하지!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얼마나 착하고, 예쁘고, 멋지고, 어……. 어…, 여튼. 그런데! 전혀 아냐.”
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온 진심 가득한 칭찬을 깨달은 임태호는, 뺨을 옅게 물들이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문장을 마치는 데 성공했다. 평소 같았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표현에 하필 저 순간 며칠 전 있었던 ‘장난’이 떠오른 건 참 얄궂은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 제가 말하는 순간에 확 일렁이는 이연우의 향이라니. 오늘은 정말 산 넘어 산이었다.
“태호 형, 그럼 저 좀 도와주세요.”
“……뭐, 뭐얼?”
태호는 약간 삐끗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임태호의 위로는 그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당장에 그 예쁜 연갈색 눈동자에서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처연한 표정이었던 후배는 온데간데없고 나른하게 눈웃음치는 알파만이 있는 걸 보면 분명 그랬다.
“형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연애.”
임태호는 이제껏 대놓고 상대를 꿰어내는 페로몬 같은 건 유도해 본 적도, 그걸 받아본 적도 없다. 그 자신이 하기에는 워낙 부끄러움 많았고, 그럴 상대를 찾는 것은 몇 번의 처절한 실패를 겪고 포기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 정말 문득, 임태호는 생각했다.
연우는 누굴 만날 땐 이런 향을 내는 걸까?
“저한테 좀 가르쳐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