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hhh…….
「신화그룹 3세, 후계 다툼 없이 무혈 입성하나?」
임태호에게는 오래된 습관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신문을 보는 것이다. 임태호는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스침과 냄새, 활자 하나하나를 읽는 모든 과정을 좋아했다. 갓 잉크가 마른 쌉싸름한 냄새와 함께 잠에서 깨는 것이야말로, 임태호의 전형적인 아침 풍경이었다.
토스트 하나를 물어 든 태호의 시선이 신문 중간, 특별 기획 페이지에 고정되었다. 사실 임태호는 웬만한 기사에 동그란 눈을 크게 뜨는 일이 드물었다. 워낙에 매사에 무던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대기업의 이름은 임태호,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임태호는 입에 물고 있는 빵조각을 씹는 것도 잊은 채로 그 빽빽한 문장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건조한 활자들 사이에서 한 이름을 찾아냈다.
「……한편, 일명 ‘나이트’ 이연우의 차후 행보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는 대표적인 친 이민혁 파 중 하나로, 아직 2인자 이미지가 강한 신화전자의 홍보팀…….」
회사든, 동창들 사이에서든 가장 화나게 하기 힘든 사람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임태호의 눈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신화그룹의 모바일 사업을 2인자라고 표현한 문장 때문이었다. 임태호는 한결같이 신화전자의 휴대폰만을 쓰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8년 전부터 최대한 신화전자의 물건만을 골라 사용한다.
8년. 휴대폰도 약정이 끝날 때마다 통신사를 갈아탄다는 시대에 어떻게 보면 충성스러울 정도로 긴 그 브랜드 선호 기간은, 임태호와 이연우가 선후배로 지낸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임태호는 신입생이던 이연우를 스물다섯의 가을에 처음 만났다.
말수 적은 공부벌레 4학년 임태호와 입학 전부터 ‘야, 우리 학교에 신화그룹의 손자가 온대.’ 라는 소문을 몰고 다녔던 이연우의 조합은 사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다. 당사자인 임태호조차 내가 어떻게 이연우와 친해졌지, 하고 신기해할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누구에게나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이연우. 임태호는 이연우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과 행사가 끝나고 우연히 함께 남게 됐던 날이었다. 신입생 후배에게 인사 한마디 먼저 건네지 못하던 임태호에게 이연우는 생긋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연우라고 합니다.』
임태호는 ‘심장이 터질 것 같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그 순간 처음 알았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크게 뛰는 제 박동 소리를 들으며 어설프게 고개를 주억거렸던 것이 임태호와 이연우의 첫 만남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 자신을 한참 탓하기도 했었다.
좀 더 근사하고 멋진 선배로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임태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졌을 것이 분명한 ‘그 유명한 신입생’과의 만남을 형편없는 모습으로 마무리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이연우는 임태호를 몰랐겠지만, 임태호는 이연우를 잘 알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오감이 마비되지 않고서야 그렇게 어디서나 눈에 띄는 최상의 알파를 자각하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연우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는 사내였다. 반면, 그 환하게 빛나는 곳에서 감히 시선조차 닿지 않는 구석 어딘가가 임태호의 자리였다.
‘야, 오늘 이연우 학식 갔대.’, ‘들었어? 이연우 조별 발표.’…….
가만히 있어도 이연우의 일거수일투족이 들려왔다. 임태호는 그 수군거림을 들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임태호는 이연우와 제가 서로 통성명한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었다.
잠시 멍하게 오랜 과거를 되짚던 임태호는, 작게 진동하며 깜박이는 휴대폰을 그러쥐었다. 이연우였다.
-선배, 오늘 점심 같이 할래요?
임태호는 이른 아침부터 온 짧은 메시지를 보며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8년, 임태호와 이연우는 그 어떤 이들보다 그린 듯이 보기 좋은 선후배 사이다. 짤막하게 ‘그래’, 하고 답장을 보내자, 시간에 맞춰 회사 근처로 데리러 오겠다는 깍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
“선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임태호는 이연우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스물다섯의 가을과 겨울, 그리고 그다음 해 스물여섯의 봄까지 몇 개월 동안 이어졌던 풋내 나는 열병 같은 짝사랑에 빠졌을 때에도 눈앞의 알파가 저를 향해 ‘선배’라고 부를 때마다 입이 바짝 마를 만큼 긴장했었다.
오래전의 귀여웠던 기억을 회상하던 태호는 흐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대학 때 생각이 나서.”
“대학?”
“생각해 보면 신기하잖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지낸다는 게.”
울퉁불퉁한 면 하나 없이 매끄럽게 떨어지는 계란형의 얼굴이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린 듯이 고아한 얼굴을 한 이연우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참 여러 가지가 있다.
‘재벌3세’, ‘극우성 알파’…….
하지만 그 수많은 표현 중 임태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연우를 나이트에 빗댄 것이었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금욕적이다 못해 조금은 냉랭하게까지 보이지만 그 위에 감정이 더해졌을 때 감정이 확 피어나듯 번지는 고운 이목구비는, ‘왕자님’이라는 뻔한 단어보다 ‘기사님’ 쪽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와인 한 잔 할래요?”
“점심에는 좀 그래. 회사도 다시 들어가 봐야 하고.”
“그런가. 아쉽다.”
나이트 이연우는 흔히 재벌3세 하면 떠오르는 거만하고 비뚤어진 이미지와는 거리가 저만큼 떨어진 사내다. 임태호가 이연우를 ‘정말 기사 같아.’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저런 깍듯한 모습 때문이다.
코스모스 복학으로 스물다섯의 가을에 4학년 꼬리표를 달게 됐던 임태호는, 교내에서 가장 유명한 신입생이 저를 찾아왔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이연우는 저보다 다섯 살이 더 많은 고학번 선배인 태호에게 직행하더니 조금은 답지 않게 우물쭈물 망설이며 입을 열었었다. 덕분에 임태호는 대학 생활 동안 처음으로 학회실에 있던 주변 선후배와 동기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저, 선배님. 혹시.』
스무 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설프게 성인의 영역에 들어선 나이.
하지만 이연우는 그 어떤 숫됨도 찾아볼 수 없는, 남자보다는 사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던 알파였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아마 긴 유학 생활 때문일 것이라고 점쳤었다. 예의 바르지만 비굴하지 않고, 상대의 말에 침착하게 귀 기울이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한 모습은 이연우, 그가 어디에서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유일 터였다.
하지만 이연우, 그는 학과 내에서 가장 존재감 없고 대단할 것 하나 없던 복학생 선배 앞에서 처음으로 조금은 자신 없는 얼굴을 내비쳤다. 약간은 확신 없는 눈이었다.
『제가 아직 선배 멘토를 못 찾아서요……. 이번 학기에는 꼭 제출하라고 하는데.』
긴장하면 벌겋게 변하는 얼굴로 더듬댔던 통성명 이후,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치고는 생략된 것이 너무 많았다. 임태호는 이연우가 자신의 이름 외에는 그 무엇도 알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것이었다.
교내 최고의 유명인사, 아니,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가득한 재계에서 단연 첫 번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모습을 한 알파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약간 시선이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자 옅은 쌍꺼풀이 진 아몬드형 눈동자가 살짝 휘었다. 부끄러움 많고 언제나 조심스러운 성격인 임태호가 경악한 얼굴을 한 학과 사람들의 얼굴을 잠시 잊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고 만 것은, 바로 그 고운 미소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언제나 단정하게 정돈한 채 극우성의 진득함만을 전하던 이연우의 향이 잔뜩 일렁이며 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얼굴은 물론 목가까지 벌겋게 변했던 태호다.
“왜 그렇게 잘 못 먹어요? 입에 안 맞나?”
쉬이 줄어들지 않는 임태호의 접시를 흘끗 보며 이연우가 입을 열었다.
임태호는 모르지만, 그 탓에 저쪽 뒤편에 서서 신화가家 일원의 눈짓 하나에도 긴장하고 있던 매니저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태호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재깍 입을 열었다. 그는 돌이켜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낯부끄러운 감정을 지녔던 8년 전의 기억에 약간 뺨이 상기된 채였다.
“아니, 맛있어. 그냥 잠깐 멍하게 있었네. 요새 일이 많아서…….”
“일이 많을수록 잘 먹어야죠. 요새 살도 좀 빠진 것 같아.”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단호하게 흘러나온 문장에 태호는 턱을 긁적였다.
사실 임태호, 그는 객관적으로 평균보다는 조금 더 통통한 편으로, 날렵한 턱선을 가진 이연우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동그란 얼굴과 말랑한 체격을 가진 서른셋의 남자였다. 좀 빠졌다면 오히려 다행인 것 같은데. 임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포크 끝으로 노릇하게 구운 감자를 으깼다.
“아, 맞다. 선배, 금요일에 시간 괜찮아요?”
“응? 으응…….”
“영화나 같이 봐요.”
이연우는 종종 이렇게 임태호에게 영화나 공연을 함께 보자고 제안하고는 한다. 물론 이건 평범한 동행 수준이 아니다. 영화는 신화가 저택 내에 마련된 소규모 상영관에서 직접 영사기를 돌려서 보는 것이고, 공연은 가장 최적의 뷰를 자랑하는 위치에서 좌우로 한 칸씩을 비워 둔 채 관람하는 초호화 코스다. 처음에는 이 거북한 동행에 뻣뻣하게 굳었던 태호는, 8년의 시간이 흐르며 그것에 꽤 적응했다.
“<○○○○>, 아직 안 봤죠? 저번 주에 개봉한 건데.”
언젠가 임태호는 ‘영화관에 아직 올라가 있는 것을 어떻게 집에서 볼 수 있는 거야?’ 하고 물었던 적 있다. 물론 그 대답은 평범한 소시민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거 저희 쪽 계열사에서 배급한 거라서요.’
평소에 워낙 소탈한 터라, 가장 절친한 후배가 국내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자주 잊었던 임태호는, 가끔씩 이렇게 다른 세계의 대답을 들을 때야 ‘이연우’라는 고운 이름 뒤에 있을 수많은 꼬리표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아직 안 봤어.”
“하하. 다행이네요. 난 또 애인이랑 먼저 봤을까 봐 걱정했잖아요.”
‘애인’. 어떻게 보면 일상적이기 짝이 없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찔끔한 표정이 된 태호는, 괜히 물로 입을 적시며 눈을 굴렸다. 한결 밝은 목소리가 된 듣기 좋은 저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임태호에게는 벌써 8년을 만난 연인이 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좀 베일에 싸인 분이셔야지. 선배랑 나랑 얼마나 자주 보는데, 어떻게 8년을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봐요?”
“아, 알잖아. 주변 사람 만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이연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언제나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저 알파는 무언가를 두 번 부탁하는 일이 없었다. 그건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와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연우는 까마득한 과거의 어느 날 지나가듯 ‘선배 애인은 언제쯤 볼 수 있어요?’ 라고 물었다가 태호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내, 내 애인은 내 친구 만나는 것도 싫어해!’라고 대답한 이후로, 8년간 그림자도 보지 못한 사람의 사진 한번 보자 한 적이 없다.
왠지 긴장으로 목구멍까지 까칠해진 것 같아서, 임태호는 잘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겨우겨우 입에 밀어 넣었다. 사람들은 이 정반대의 선후배를 두고 언제나 놀라움에 혀를 내둘렀다. 애초에 동문이라는 것 빼고는 외모도, 환경도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임태호는 이 어울리지 않는 선후배 관계가 8년간 지속되면서도 별다른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던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극우성 알파 이연우와 베타 임태호>.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의 선망이나 다름없는 나이트 이연우가 볼 것 없는 다섯 살 연상의 선배와 단둘이 식사를 즐기고, 공연을 보러 다니거나 그 철옹성 같은 저택에 초대해 영화를 본다고 해도 흉을 보지 않는다. 동성의 알파-베타 관계란 대체로 그렇다.
애초에 이 둘의 관계에 ‘무슨 일’이 생기려면 진작에 생겼어야 할 시간이 흐른 것 역시, 이런 느슨한 시선에 한몫했다. 임태호는 긴장으로 목 뒤가 뻣뻣하게 당기는 것 같아 괜히 옷깃을 다듬는 척하며 굳은 근육을 슬쩍 주물렀다.
임태호는 오메가다.
그것도, 간단한 약 몇 알로 그 흔적을 억눌러 감출 수 있는 열성.
……‘알파 이연우’는 그 사실을 모른다.
◈◈◈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임태호가 그렇듯, 그건 이연우 역시 마찬가지다.
“연우 너, 주말에 □□ 쪽 취임식 좀 가.”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던 이연우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턱 끝은 여전히 꼿꼿하게 고정한 채로, 살짝 눈만을 내리 깐 모습은 약간 오만하게도 보였다. 이연우의 누나이자 신화그룹 이주호 회장의 차녀인 이연아는 그런 제 동생을 보며 달래듯 입을 열었다. 고운 얼굴 위에 떠오른 표정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예쁘게 하고 가서 좀 방긋방긋 웃기도 하면서 생색내고 와. 거기 요새 우리가 계속 입점 선수 친다고 꽤 부루퉁하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이연아는 저도 모르게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순간적으로 쭈뼛하니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날이 선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이연우와 같은 알파인 그녀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괜히 적 만들어 좋을 게 뭐야. 살살 달래야지.”
“그쪽 역량 부족을 왜 나보고 달래래? 누나가 가. 아니면 형 보내든가.”
“너 요새 안 바쁘잖아!”
“바빠! 약속도 있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책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가서 예쁘게 처 웃어? 미친.’ 하는 욕이 섞여 들었다. 자신과 같은 알파인 막냇동생을 달래는 데 영 소질이 없는 이연아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일정을 그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상냥하고 친절한 후배. 언제나 예의 바르고 근사한 동생. 최상위 포식자의 모습을 한 극우성의 알파. 그건 임태호가 이연우를 떠올릴 때마다 그리는 단어들이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옅은 쌍꺼풀이 진 아몬드형 눈동자를 옅게 휘어 고아한 미소를 걸고, 보드랍고 예쁜 혈색을 한 입술로는 달콤한 문장만을 담는 모습은 단연 그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분명 이연우는 임태호의 앞에서만큼은 늘 그런 알파였다.
사실 8년 전, 스무 살의 이연우는 스물다섯 살의 임태호를 꽤 싫어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꽤 한심하게 여겼다.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눈을 굴리는 다섯 살 많은 복학생 선배는, 유학길에서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억지로 붙잡혀 귀국한 비뚤어진 신입생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려웠다.
옅은 쌍꺼풀이 몇 겹이나 진 흐린 인상의 선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대학의 경영학과. 그곳의 전형적인 공부벌레가 임태호였다. 하지만 그랬기에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숨 돌릴 만한 곳을 찾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던 이연우와 자주 마주치게 됐다.
이연우는 둥그런 눈을 크게 뜨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임태호에게 먼저 인사하고는 했다. 어쨌거나 이연우, 그는 집 밖에서만큼은 그럴싸한 신화가의 일원의 모습을 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려 만든 미소를 건 인사가 다였다. 선배, 임태호는 그것만으로도 안절부절못하며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멍청한 표정을 한 채 우물우물 대답을 중얼거렸다.
거슬렸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다.
인적이 드문 도서관 구석이나 캠퍼스 외곽에서 마주치는 횟수가 차츰 쌓여 가던 어느 날, 말간 얼굴 뒤로 아주 희미한 향을 짚어냈을 땐 조금 코웃음도 쳤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할 것같이 굴면서 오메가는 만나네.’, 싶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베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인종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제법 다양한 답이 나온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 아마 ‘베타’들은 체질과 유전적인 특성을 기반으로 전 세계 70억 인구에 대한 모호해진 분류에 대해 설명할 거다. 혹자들은 이제 혼혈이 많아서 딱 몇 개로 나누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되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베타’가 아닌, 전체 인구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그와 다른 단순한 세 분류를 내놓을 확률이 높다.
‘알파’, ‘오메가’ 그리고 ‘베타’.
확실한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인종보다도 많은 수를 차지한 자들의 구분법이었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들, 알파와 오메가들이 인류학적 돌연변이라고도 했다. 일종의 특이 동종 유인 호르몬, 즉 ‘페로몬’을 가진 그들은 마치 지문처럼 각자의 향을 지닌 채 서로에게 상호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인종도, 성별도 그 무엇도 이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알파는 그 어떤 인종과 성별에도 구애 없이 생식生殖할 수 있었고, 히트사이클이라는 성적 충동기 아래에서 오메가라면 그 누구든 수정受精과 번식이 가능했다.
이연우는 그 유리된 세계관에서 가장 손꼽히게 눈에 띄는 사내였다.
극우성으로 판정된 그의 향은 같은 알파 사이에서는 거부감에 가까운 경외나 시기를, 오메가에게는 무엇보다 입을 마르게 하는 자극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 사이에서 베타의 자리는 없었다. 때때로 베타 연인을 둔 알파나 오메가가 있기는 하지만 본능에 가까운 욕구를 자극하는 향이 없는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연우는 ‘베타 임태호’를 보며 눈썹을 꿈틀했었다.
찰나이기는 했어도,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향은 분명 오메가의 것이었다. 연인들 사이에 서로의 향이 남는 것을 흉으로 여기는 사람 따위 없다지만, 왠지 저 숫되기만 한 선배에게서 누군지 모를 자의 흔적이 짚어지는 것은 참 의외였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만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의도치 않게 빨리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데면데면한 관계에 변화가 생긴 건, 놀랍게도 그 오만하기 짝이 없던 이연우의 변화 때문이었다.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날의 일이었다.
학과의 오메가 신입생 하나가 원래 주기보다 훨씬 더 이르게 시작된 히트사이클을 맞았다. 교내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긴 신입생은, 급히 119를 불렀다. 하지만 개인의 비극은 언제나 지극히 평범한 날에 급습한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미담보다 누군가의 불행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경영학과 걔, 그날 그랬대. 들었어?]
정확한 지칭 없이 쏟아지는 문장들이 넘실대기 시작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경영학과 걔>.
이연우는 자신과 같은 수업을 듣던 동기의 얼굴을 잘 알았다. 앞으로의 일은 뻔하게 보였다. 이미 ‘어차피 걔 그때 힛싸라 존나 좋았을 건데, 뭐.’ 하는 질 낮은 낄낄거림마저 시작된 이상, 학과 차원의 작은 소란 정도로 파묻히는 건 쉬웠을 거다.
평소처럼 찾아갔던 캠퍼스 구석에서 들리던 작은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있잖아.』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걸렸다. 이제껏 들어왔던 희미한 떨림이 아닌,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따뜻한 문장이었다.
『원한다면 이대로 지나가도 돼.』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내뱉는 등신. 언제나 발갛게 뺨을 물들이며 긴장한 손끝을 감추지 못하던 소심한 새끼. 언제나 사람 없는 구석에서 책에 코를 파묻고,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어설프게 눈인사하던 바보 같은 선배.
이연우는 이제껏 자신이 태호를 보며 떠올렸던 문장을 되새김질했다.
자신이 왜 발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입술을 꼭 깨문 채 그들의 모습을 엿보고 있는지 그 이유 같은 것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그저 저 작은 소곤거림 같은 간지러운 문장이 묻힐까 염려하는 것처럼, 겨우 숨을 삼켰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에 필요하다면……. 내가 도와줄게.』
‘사건’ 후, 처음으로 보는 신입생 동기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연우는 조금 놀랐다. 아니, 사실은 멍하게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제 동기에 대해 기억하고 있던 건, 환하게 잘 웃고 떠들던 밝은 눈이었다. 저렇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야위고 지친,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은 창백한 안색을 한 사람은 없었다. 신입생의 얼굴에 작은 경련과 함께 천천히 감정이 덧씌워졌다.
그걸 눈치챈 임태호는 그제야 익숙한 ‘선배’가 됐다.
살짝 울상으로 처진 눈썹을 휘며 마른 어깨를 가볍게 쓸었다가, 등을 다독였다가, 또다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며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이제껏 수도 없이 봤던 숫된 얼굴이었다. 임태호는 그런 후배를 보며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작지만 급하게 덧붙였다. ‘난 내년이면 졸업인걸. 내가 도울게.’
그 나직한 속삭임을 들은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임태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야윈 신입생을 어설프게 제 품에 넣고 다독였다. 하지만 이연우는 봤다. 그렇게 달래고 있는 선배의 손도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학과의 누구보다도, 아니 이연우 그가 살며 보았던 누구보다도 조심스럽고 또 소심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답답하다고 욕할 정도로.
『너는 잘못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야.』
사람이 저렇게 빠르고, 크게 숨을 쉴 수 있구나.
스무 살의 이연우는 점차 커져 가는 흐느낌에 왠지 손끝이 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응?』
잔뜩 긴장한 얼굴인데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약간의 망설임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완전한 확언에 마른 어깨가 무너지듯 들썩였다.
이연우는 그때야 처음으로 ‘임태호’가 보였다.
사실 그 뒤의 기억은 간유리 너머의 그림처럼 조금 뿌옇다. 한참을 멍하게 흐린 눈동자를 훔쳐보다가, 도망치듯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것만 확실할 뿐이다. 이연우는 그러고도 몇 시간을 그답지 않게 멍하게 있어서, 형과 누나에게 무슨 일 있냐는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자꾸 그 나직한 문장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러다 결국, 저녁 식사 시간에 꾹 닫혀 있던 입이 툭 열렸다.
『학교에 쓰레기 새끼가 있어.』
그건 밥상머리에서 비뚜름한 빈정거림 반, 낯부끄러운 섹스 라이프에 대한 질문으로 입맛을 뚝뚝 떨어지게 했던 이연우가 살면서 처음으로 꺼낸 정상적인 ‘학교생활’ 이야기였다.
그걸 들은 이주호, 박희원 회장 부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연우의 형인 이민혁과 누나 이연아의 표정 물론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한 골칫덩어리이자,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해 늘 마음에 걸리던 막내아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던 이주호 회장은 조금은 안달하는 기색으로 그 담담한 문장을 채근했다. 그 내용이 뭔들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이후 ‘당연히 그렇게 해야 마땅한’ 징계와 법적 절차의 표본이 된 ‘○○대 사건’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고 단호하게 흘러간 여러 비화 중 하나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뒤에 숨어 조용히 손을 뻗던 온기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이연우, 그 혼자다.
이연우는 그날 이후 이제껏 공손히 인사하기는 했어도 어떻게 보면 기계적일 정도로 거리를 뒀던 임태호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말수도 적고 부끄럼도 많은 복학생 선배와 몇 달간 수도 없이 부딪히며 그의 뻔하다 못해 전형적인 움직임을 파악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물론 애당초 자기애가 퍽 높은 편이 아니었던 임태호와 가까워지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반쯤 억지로 ‘교내 멘토’ 어쩌고 하는 핑계를 대자 말갛게 눈을 깜빡이며 마른침까지 삼키는 모습을 봤을 땐, 정말 진심으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마저 했던 그다. 하지만 이연우는 참을성을 가지고 높다랗기만 했던 임태호의 볏단을 차곡차곡 바닥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이나 판단은 없었다. 그냥 조금쯤은, 아주 조금쯤은…… 궁금했던 게 다였다.
언제나 제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마른침만을 꼴깍 삼키던 흐린 인상의 선배가, 몰래 훔쳐봤던 그날의 얼굴을 저에게도 보여 줄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이런저런 계산 없이 그저 반듯하게 곁을 지켜 주는 사람에 대한 어설픈 낭만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변덕스러운 이연우가 매우 드물게 느낀 인간적인 호감이었을 거다.
이연우는 온갖 핑계를 다 대가며 기어코 임태호의 곁으로 스며들어갔다.
사람들은 얼마 안 가 성적이 나올 때와 조별 과제를 할 때가 아니라면 존재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부벌레 복학생 ‘베타’ 임태호와, 대재벌가인 신화그룹의 일원이자 누구보다 눈에 띄는 ‘극우성 알파’ 이연우가 부쩍 가까워졌다는 걸 눈치채곤 입을 쩍 벌렸었다. 손꼽히는 집안의 자제들에게도 썩 살갑게 굴지 않고 선을 두던 그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딱 8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 스물여덟이 된 알파 이연우와 서른셋의 ‘베타’ 임태호는 놀라울 만한 사이가 아니다. 8년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시작한 같은 학과 선후배 관계가 인간적으로 무르익기에 충분했다. 이연우는 임태호의 앞에서만큼은 ‘신화그룹 나이트’라는 별명에서 벗어나 그 나이대의 청년처럼 웃을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이연우의 원래 성정과 과거의 화려한 전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헉’하고 헛숨을 들이켤 정도로 곱상한 태도였다. 낯을 가리며 저를 어려워하던 임태호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답지 않은 우아한 얼굴을 내걸었던 그다.
……물론 그때만 해도 8년이나 그러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연아는 비뚜름한 얼굴을 한 채 다리를 꼰 제 동생을 보며 톡 쏘는 말투로 되받아쳤다. 그녀 역시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친구도 없는 게 무슨 약속.”
묘하게 진실을 꿰뚫는 말이었다.
“선배.”
비뚜름하게 꾹 닫혀 있던 입에서 짤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사석에서 이연우가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임태호는 이연우의 유일한 ‘선배’다.
◈◈◈
‘집에 오는 길에 억제제 꼭 사 오기.’
임태호는 늘 가지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수첩의 윗부분에 꾹꾹 힘주어 메모를 남겼다. 요 며칠, 갑자기 쏟아지는 업무에 몇 알 남지 않은 약을 사는 것을 깜박 잊은 터라, 집에 남아 있는 건 정량보다 훨씬 못 미치는 반쪽짜리 약뿐이었다.
사실 억제제로 자신의 페로몬을 누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 아니다.
의사나 간호사 같은 의료 관계자나 베타를 대상으로 하는 일을 하는 알파나 오메가들은 억제제를 복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임태호는 평범한 중견 기업의 대리다. 페로몬은 그의 업무에 하등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태호라고 해서 처음부터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아무리 향이 옅고 흥분도 느린 열성 오메가라지만, 베타인 척하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다. 이틀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페로몬 억제제를 챙겨 먹어야 하고, 두어 달에 한 번씩은 꼭 컨디션이 나빠져서 월차를 모으는 건 엄두도 못 낸다.
하지만 임태호는 자신의 정확한 ‘성별’을 드러내는 것 대신 그 귀찮은 과정을 밟는 것을 택했다.
발현 인구 대부분은 성인이 되기 직전에 자신의 진짜 성별을 찾게 된다. 지독한 발현통 이후에 눈을 뜨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임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호는 며칠간의 열병 끝에 오메가로 발현했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기는 했어도, 제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한 것이 싫지 않았던 태호다. 그의 어머니 역시 열성 오메가였기 때문이다. 태호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향’을 알게 됐다.
신기했다. 사람이 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버지는 베타였기에, 태호는 ‘알파’들이 가진 향이 어떤 것일지 내심 궁금해 하며 며칠 만에 학교로 향했다. 그게 불안정한 발현 초기 증상을 위해 억제제를 먹고 세상에 나갔던 첫날이었다.
‘네가 오메가였으면 진짜 토 나왔을 텐데. 다행이다, 야.’
오랜만에 등교한 친구를 반기는 그 나잇대 아이들의 말은 악의 없이 천진하게만 들렸다.
임태호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오메가인 건, 그렇게 이상한 건가?
‘사실 나 오메가로 발현했어.’
임태호는 그 단순하지만 무거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향으로 가득 찬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앞자리에 앉은 오메가 친구가 자신과는 달리 얼마나 근사한 향을 가지고 있는지, 이제는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억제제를 먹을 핑계를 찾아 나섰다.
수험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초반에 발현했다는 건, 제법 그럴듯한 이유가 됐다. 대학 초반의 술자리도, 첫 중간고사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한두 번 정도는 제가 오메가라는 것을 밝혔던 적도 있었다.
연인이었던, 아니 연인이라고 믿었던 자의 앞에서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 가족들이 뒤늦게 태호의 억제제 의존을 눈치챘을 땐,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분명 중독성이 없는 약이건만, 태호는 억제제를 끊을 자신이 없어졌다.
임태호는 거울 속의 그 자신을 흘끗 보았다. 옅은 선이 겹쳐진 흐린 이목구비와 동그란 코, 살짝 통통한 뺨과 뻣뻣한 반곱슬의 머리카락까지 무엇 하나 그럴듯한 게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아니, 솔직히 조금은 우울하고 못난 인상에 가까워 보였다.
출근이나 해야지. 태호는 잠깐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전원이 들어온 장난감처럼 뻣뻣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영 컨디션이 나쁜 날이라, 묘하게 허둥대다가 꽤 아끼며 사용하던 머그컵 하나를 기어코 깨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역시나, 오늘 하루는 아침의 불길한 예상처럼 운이 나쁜 날이었다.
그걸 깨달은 건, 점심식사 후 찾아오고는 하던 옅은 식곤증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서늘하게 피가 식고, 온몸의 솜털이 확 곤두섰다. 임태호는 갑자기 고장 난 기계처럼 퍼득이며 달력을 확인했다.
“임 대리님, 어디 불편하세요?”
요 근래 회사 일을 핑계로 제대로 약을 챙겨 먹지 않았던 탓일까, 평소 주기보다 거의 삼 주는 앞당겨진 히트사이클이었다. 긴장으로 귓가가 쿵쾅거릴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변해 가는 와중에도 깊은 곳에서부터 간지러운 나른함이 시작된다는 건 제법 끔찍한 일이었다.
긴장으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더듬거린 것이 도움이 됐을까, 아니면 최근 늘어난 업무로 직원들이 돌아가며 크게 앓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임태호는 어렵지 않게 반차를 얻어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늘 콤플렉스로만 작용했던 ‘열성 오메가’라는 꼬리표가 처음으로 다행으로 다가왔다.
만약 보통의 오메가였다면 아무리 기존에 억제제를 먹었다고 한들 발정기 특유의 진득한 향을 숨기기 어려웠을 터였다.
하지만 임태호는 알약 몇 개로 자신의 페로몬을 거의 완전하게 숨길 수 있을 정도의 열성이었다. 그 정도로 흔적이 약했던 덕에 반쪽짜리 히트사이클의 열기를 ‘오메가 연인이 있는 베타’ 정도로 둘러댈 수 있었다.
차마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택시를 잡아타고 아담한 투룸 빌라로 돌아오자마자 바짝 얼었던 몸에서 긴장이 확 풀렸다. 임태호는 현관문에 기댄 채로 한동안 신발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한두 시간이 지나면 제가 어떤 모습이 되어 침대 위를 혼자 뒹굴며 머리꼭지까지 차오른 열에 헐떡이게 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 속 깊은 곳이 간질거리고 허리가 들뜨는 감각은 벌써 십 년도 넘게 겪어 온 것이었지만,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끔찍하기만 했다. 낮게 흘러나온 한숨은 흥분보다는 자책이 가득했다.
‘이런 게’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임태호는 생각했다.
◈◈◈
금요일.
선배에게 연락이 없다.
아니,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다. 그 탓에 그린 듯이 쭉 뻗어 있던 고운 눈썹이 희미하게 휘었다. 이연우는 여전히 까맣게 불이 들어오지 않은 제 휴대폰 액정을 흘깃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딱딱, 테이블을 두드렸다.
사실 전날 밤에도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했던 차였다.
임태호를 알고 지낸 지 어느덧 8년, 이연우는 그 순한 얼굴을 한 선배가 얼마나 시간 약속을 꼼꼼하게 챙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임태호는 약속이 있는 전날 저녁이나 밤에 꼭 확인 문자를 보낸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 순서를 잊은 적 없다.
이연우는 오늘의 약속을 제법 기대했었다.
안팎에서 떠드는 그룹의 후계 경영 이야기에 완전히 지친 상태로, 그가 완전히 어떤 계산이나 고민 없이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과의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태호에게서 연락이 뚝 끊긴다는 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에는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결국 연우는 태호의 점심시간에 맞춰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임태호는 메시지를 읽지 않은 것에 이어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8년 동안 이런 일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온종일 그답지 않게 초조하게 보내다가 형에게 작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지금이야 홍보팀 팀장 자리에 앉아 있다지만, 본격적으로 후계 구도가 갖춰지고 나면 상무이사로 올라가게 될 거고, 머잖아 작은 행동거지 하나에도 사람들의 눈이 쏠릴 것이란 걱정 때문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애초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눈에 띄는 사내가 그였다.
하지만 연우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선배 혼자 자취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니야? 멀쩡히 회사 다니는 사람이, 메시지도 전화도 안 보는 게 말이 돼?’
이연우는 임태호를 잘 알았다. 그가 이제껏 알아 온 선배는 이렇게 갑자기 연락 두절 될 일이라고는 없는, 정말 시계추처럼 깍듯한 생활 패턴을 가진 사내였다.
결국 그렇게 좌불안석으로 있기를 몇 시간. 이연우는 있지도 않은 회의를 둘러대며 기어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최대한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가족들의 말에는 이렇게 뻔히 속이 보이는 근무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왠지 마음이 급했다.
임태호는 당사자인 태호가 짐작하는 것보다도, 또 이연우 그 자신이 자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비서 대신에 운전대를 잡고 급하게 차를 모는 길이 유독 길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헛웃음도 났다. 비록 그를 알고 지냈던 시간 속에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라고 해도, 하필 그 예외가 유독 일이 많다던 오늘일 수도 있었다.
휴대폰이 고장났다거나, 아니면 깜박 늦잠을 자서 허둥지둥 회사에 출근한 다음에 정신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연우는 그 수많은 이성적인 가정들 위로 떠오른 불안에 집중한 채로 급하게 태호가 사는 빌라 앞에 차를 댔다. 속으로는 욕도 조금 했다. 물론 그건 선배를 향한 것이 아닌, 이연우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연우는 태호가 이 집에 살기 시작한 때부터 외우게 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헛웃음 쳤다. 사실 그건 평온을 가장하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몰랐다. 문을 여는 손이 그 어떤 때보다도 급했다.
“…….”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차 키, 슬리퍼 두 개, 소파 위에 주름 하나 없이 예쁘게 놓인 쿠션.
가구 수는 많지 않지만 안목이 좋은 태호의 취향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집 안은, 분명 이연우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차마 입을 열어 임태호를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겨우 삼켰다.
선배, 임태호에게는 오메가 연인이 있다.
그는 8년을 가까이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다. 사실 그만큼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지낸다면 ‘정말 만나는 사람 있는 거 맞아?’하고 고개를 갸웃할 법도 하지만 태호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연우는 이제껏 임태호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향.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여리고 흐린 향.
이연우는 이제껏 임태호에게서 늘 그것을 짚어 왔다.
태호의 집에서도, 어쩌다 가끔씩 타게 되는 승용차에서도 그 흔적은 언제나 첫 숨에 잠시 스치는 바람처럼 속을 간질거렸었다. 유독 타인의 페로몬에 예민한 이연우조차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는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향은 언제나 태호의 곁을 떠돌았다.
그래서 연우는 이제껏 동성이라는 사실 외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 사내에 대해 웬만해서 먼저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극우성 알파인 저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면이 있나 보다, 하며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던 쪽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 이 아담한 빌라 안은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그 흔적만 오랫동안 익숙해진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연우는 잠시 그답지 않게 얼이 빠진 채로 숨을 죽였다. 사실, 진해졌다고 한들 보통의 오메가 수준에 가까운 향이었지만 연우는 언제나 잔향처럼 짚었던 이 페로몬을 거의 완전한 채로 맞닥뜨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약간은 옅은 물 냄새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 온 다음 첫 숨처럼 굉장히 청량한 쪽에 가까웠다. 이연우는 천천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현관문을 닫았다. 오감과는 그 종류가 다른 형태로 짚어지는 향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이 경우에 취할 행동은 몇 개 없다.
‘선배 오메가가 와 있나 보구나.’하면서 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 나가거나, 등록한 지는 한참 됐지만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 없었던 임태호의 가족에게 연락해서 근황을 물어보는 것도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연우는 자꾸 머릿속에서 언젠가 흐리게 떠올렸다가 웃으며 지웠던 가정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슬쩍 열린 문 틈 안으로 더운 기운이 확 끼쳤다.
아니, 사실은 그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이연우는 순간 그렇게 느꼈다.
8년.
이연우는 그 시간을 임태호와 보내며 찰나의 순간 동안 이 여리디 여린 향을 만났었다. 가끔 그 꺼질 듯이 약한 페로몬을 짚어낸 날이면 속으로 ‘선배는 참 선배와 비슷한 느낌의 오메가를 만나는구나.’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때로는 웃으며 장난처럼 이런 상상도 했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선배가 오메가라면 어떨까.
그 상상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썩 모럴이 좋지 않은 편인 이연우다. 그는 눈앞에서 말갛게 웃는 상냥한 선배를 보며 가끔은 이런 질 나쁜 상상을 하고는 했다. 늘 조심스럽고 수동적인 임태호에게 오메가 연인이 있다는 건 그 상상에서만큼은 잠시 접어 둔 채로, 이연우는 오메가가 된 임태호를 그려보고는 했었다.
저 유약한 얼굴을 한 남자는 향에 취해 누군지 모를 자의 위로 올라타는 것보다야, 헐떡이며 다리를 여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발칙한 가정까지 하면서였다.
방 안에서 ‘누군가’가 더운 숨을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이연우는 왠지 쭈뼛하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아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잔뜩 달아오른 향은 분명 선배, 임태호의 주변을 마치 그림자처럼 떠돌던 흐린 흔적이었다.
“흐, 읏, 하아, ……으.”
이연우는 임태호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백 명이 동시에 말한다고 하더라도 태호 특유의 약간 낮은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다. 8년 전 임태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멈춰 섰던 건 그 듣기 좋은 나직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저쪽 문 틈 너머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낯선 한숨 소리에 연우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
가끔 베타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고는 한다.
‘알파가 앓는 러트와 오메가가 겪는 히트사이클은 어떤 느낌일까?’
임태호는 종종 베타인 회사 동료들이 그런 주제를 꺼낼 때마다 해 줄 수 없는 대답을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별거 아니에요’.
그도 그럴 것이, 열성 오메가인 임태호의 히트사이클은 보통의 오메가들보다 훨씬 그 정도가 약했다. 본격적으로 열이 오르기 전날에는 약간 어지럽고 속이 뜨끈해지는 것으로 전조를 눈치챌 수 있었고, 완전히 본능에 충실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미지근하게 성욕이 들끓는 정도가 다였다.
뒤가 저절로 젖어들고 허리가 뒤틀릴 즘에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쥔 모조 성기로 구멍을 쑤시며 헐떡여야 하기는 하지만 그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임태호는 꽤 짧고 담백하게 히트사이클을 보내는 편이었고, 이번 같은 예외는 애초에 극히 드문 사고에 가까웠다. 그에게 히트사이클은 언제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쾌한 경험에 가까웠다.
임태호는 쾌락 이전에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싱겁게, 혹은 상처만 받고 끝난 몇 번의 연애가 그런 자학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배 속 깊은 곳이 간지럽고, 무언가 척추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 감각이 시작됐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마저 쾌감이 되어 발가락 끝을 바짝 곱게 만들었다. 그건 수없이 겪어서 익숙하지만 단 한 번도 능숙하게 대처할 수 없었던 자극이었다.
태호는 제 심장의 박동 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것을 들으며 조금은 급하게 제 뒤로 손을 움직였다. 흥분으로 벌름거리기 시작한 구멍이 적당히 젖어 있었다. 임태호는 이 순간이 가장 싫었다. 열에 헐떡이며 자신의 뒤를 직접 자극해 벌리기 위한 준비를 할 때마다 쾌감인지 혐오감인지 모를 감정이 뒤섞여 치밀었다.
그냥 빨리 끝내야지.
어차피 이번에도 금방 지나갈 거야.
이성을 깜박이게 하는 열기가 점차 더해지기 시작할 때쯤, 임태호는 제 자신을 겨우 다독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 갑작스러운 시작만큼이나 예외의 상황으로 가득했다.
가장 먼저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건, 마치 무더운 한여름에 달리기를 한 것처럼 바짝 마른 입과 달음박질치는 심장이었다. 임태호는 제 머리를 울리는 그 요란스러운 소리에 조금 놀랐다. 열아홉 살에 처음 겪은 이후로 떨칠 수 없는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찾아왔던 열기다. 지독하게 싫어했고, 싫어하는 만큼 잘 알 수밖에 없었던 쾌감은 언제나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듯 더디고 흐렸다.
……아니, 흐렸었다.
언제나 이불 아래로 소극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태호다. 열성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은 그럴만한 여유가 있을 정도로 더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이상했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임태호는 벌겋게 변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들썩였다. 어깨까지 벌벌 떨릴 정도로 고양된 흥분감이 슬슬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태호는 마치 불을 삼킨 듯 속부터 따끈하게 열이 오르는 제 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마치 히트사이클을 처음 겪는 열아홉 살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뒤가 간질간질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이제껏 지금처럼 손끝이 저릴 정도로 선명하고 무더운 적이 없었다.
천천히 손이 뒤로 움직였다.
꽉 맞물린 곳은 이미 잔뜩 젖은 채로 질척이고 있었다. 덜덜 떨면서 구멍을 벌리기 시작하자, 다물린 곳이 벌어지며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쳤다.
“흐윽, 읏, 아……, 응, 읏…….”
임태호는 살면서 지금 이 순간처럼 ‘발정’이라는 노골적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제대로 이성을 갖추고 있을 때만큼은 꾹 눌러 참던 민망한 소리가 입 밖으로 저절로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부터 시작된 열기는 순식간에 온몸을 집어삼켰다. 이렇게 스스로가 낸 신음을 제대로 듣는 건 처음인 태호는, 제 목소리를 들으며 수치심에 떨면서도 슬금슬금 허리를 뒤척였다. 히트사이클을 겪으며 어설프게나마 쾌감을 아는 몸이 바라는 건 하나였다.
태호의 손이 천천히 침대 구석에 처박혀 있던 모조 성기로 움직였다. 흥분으로 푹 젖어 있는 뒤는 실리콘 성기를 어렵지 않게 물기 시작했다.
“……아, 흐으으, 흑.”
한껏 다리를 벌린 채 직접 제 구멍으로 무언가를 집어넣는 행위는, 부끄러움이 많은 그에게 이렇게 ‘혼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평소보다 몇 배로 흥분한 채로 헐떡이는 모습이라니. 태호는 뒤를 쑤실 때마다 옅은 전기가 튀듯 떨며 점점 커지는 교성을 내뱉었다.
서툴게 원하는 지점을 꾹 짓누를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오스스 서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태호는 어떻게든 모조 성기가 깊게 들어가 제 안을 휘젓게 하고 싶어 안달한 채로 허리를 흔들며 옅게 흐느꼈다.
언제였던가, 히트사이클은 별 게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은 오만이었다.
속이 근질근질하고 속이 턱턱 막히는 감각은 이제껏 오메가라는 단어 아래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임태호는 살며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던 쾌감에 차서 마치 숨이 가쁜 동물처럼 헐떡거렸다. 살갗이 이불에 스치기만 해도 어깨가 저절로 바짝 튀고 부르르 떨릴 정도로 치밀어 오른 흥분만이 저절로 허리를, 손을 움직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누군가 빨고, 이를 세운 것도 아닌데 온몸에 울긋불긋하게 열이 올랐다.
젤을 쓰지 않으면 쉽게 열리지 않던 뒤가 ‘오늘따라’ 푹 젖은 채로 벌름거렸다. 잔뜩 허리를 쳐들고 모조 성기를 더욱 깊숙이 들어오게 하려고 숨을 몰아쉬는 스스로를 자각할 겨를 같은 건 이제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임태호는 제 자신이 토해낸 희뿌연 정액을 다리 사이로 뚝뚝 흘리면서 밀려오는 사정감과 채 해소되지 않은 열기 사이에서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땀에 절어 축 늘어진 팔에는 여전히 구멍에 쑤셔 박힌 채인 모조 성기를 빼낼 힘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태호는 희뿌옇게 시야가 변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한숨을 쉬며 제 흥분으로 지저분해진 이불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건 누군가 본다면, 감히 그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내, 임태호일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태호는 타인의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만큼 대담하지 못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쁜 숨을 헐떡이던 어깨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천천히 늘어지기 시작했다. 임태호는 여전히 붉은 기가 가득한 몸을 한 채로 완전히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예상치 못한 쾌감은 때로는 벅찬 피로와 비슷한 색을 띤다.
태호의 아담하지만 잘 정리된 침실은 어느새 색색대는 고른 숨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윽고, ‘누군가’는 잠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다가 결국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그건 평온하기 짝이 없이 곤히 잠든 임태호와는 달리, 이제껏 작은 숨조차 제대로 들이켜지 못하고 있던 이연우였다.
귀 끝까지 새빨갛게 변한 그는, 꾹 눌러 참고 있던 떨림을 토해 내면서 언제나 익숙하게 해 왔던 페로몬 컨트롤을 하려고 애썼다. 그건 극우성으로 발현한 이후부터 언제나 습관처럼 하기를 종용받았던 것 중 하나다. 상대에게 자극을 주지 않으면서 극우성 특유의 진득한 향을 숨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극우성 알파가 해야 하는 당연한 매너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극우성도 사람이다. 감정이 동요하면 당연히 그 본성인 페로몬 역시 요동칠 수밖에 없다.
이연우는 속으로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시답잖은 상상들을 하면서 스스로 향을 숨기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향을 제어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억누르는 건 사실 극우성인 그에게 불가능한 것일지도 몰랐지만, 완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서 겨우 벽에 기대고 앉은 지금 이연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
언제나 옅은 잔향처럼 흩어졌던 오메가 특유의 달짝지근한 향이 목을 얽맸다. 왠지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도 같고, 자꾸 어떻게 참지 못하는 한숨이 터져 나올 것도 같았다. 속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들끓었다.
결국, 고른 소리를 내며 잠든 이 문 너머의 남자가 제 흔적에 깨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있던 연우에게서 얼마 안 가 기어코 작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씨발, 어떻게 저걸…….”
-몰랐을 수가 있지?
스스로를 향한 물음은 마치 탄식처럼 그 끝이 흐려졌다.
◈◈◈
요 근래 신화그룹 안의 최대 화두를 꼽는다면, 누구나 후계 승계의 중심에 있는 이주호 회장의 장남 이민혁을 꼽을 것이다. 그는 이제껏 단 한 순간도 신화그룹의 중심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내다. 냉랭한 이목구비와 신비주의에 가까운 태도 덕분일까. 이민혁, 그는 외부 언론에서 빈틈없는 후계자이자 체스 말의 중심 킹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건 집 밖에서의 이야기다.
이주호 회장은 워낙 알파가 많은 신화 가문에서 드물게 오메가로 발현한 첫째 아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뻐했다.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그는 상냥하고 다정한 청년으로 자랐고, 자연스럽게 가족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이민혁이 후계 싸움 없이 자연스럽게 선두에 서게 된 건 아마 그런 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이민혁이 유독 예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바쁜 부모님 대신 거의 업어 기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다섯 살 아래의 막냇동생, 이연우였다. 나란히 미국 유학을 갔을 때에도 낮에는 학교를, 저녁에는 온갖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 이연우를 잡으러 직접 뛰어다녔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예뻐하는 막냇동생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소파에 멍하게 앉아서 삼십 분, 창문 밖을 보면서 또 십 분, 휴대폰을 보면서 또 몇 분…….
오랜만에 여유가 있어 본가에서 쉬고 있던 민혁은, 제 동생의 이상 증상을 눈치채고 주변을 빙빙 돌며 안색을 살폈다. 이연우는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도 머쓱할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민혁이 가지고 온 책의 절반 정도를 다 읽었을 때였다.
“……형.”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탓에 살짝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이민혁은 그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민혁은 제 동생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응?”
“형 오메가 맞지?”
올해로 서른셋인 이민혁은, 열일곱 살 이후부터 늘 오메가였다.
그걸 모를 이연우가 아니다. 민혁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물음에 잠시 눈만 끔벅거렸다. 여전히 깊게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인 제 막냇동생은, 도통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그렇지?”
“전지적 오메가적 관점에서 생각해 봐.”
……그건 또 뭐야?
이민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종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제 고운 동생이 또다시 침묵할까 싶어서였다. 이연우는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단어 하나하나를 토해 내듯 문장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형이 오메가야, 그런데 그걸…….”
“…….”
“친한 친구한테 감췄어. 베타라고 거짓말하면서. 아마 약까지 먹었을 거야.”
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민혁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덩달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왜 감췄을까?”
민혁은 엉겁결에 제가 들은 말을 천천히 다시 떠올려 보았다.
‘내가 오메가라는 걸 친한 친구에게 베타라고 하면서 감췄다. 이유가 뭘까?’
사실 이 질문은, 묘한 울림이 있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민혁, 그의 짐작보다는 전혀 심각하지 않은 듯 보였다. 덕분에 민혁은 걱정보다는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동생이 하루 종일 심각했던 이유는 따로 있고, 이건 메인 디쉬를 앞둔 전채요리와도 같으리라는 가벼운 생각에서였다.
“별로 안 친해서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연우는 완전히 진심이었다.
연우는 제 형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문장에 작게 눈썹을 꿈틀했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으며 힘주어 반박했다.
“친해. 정말 친하대.”
“아는 사람 얘기야?”
“……어, 친구.”
‘이건 내 친구의 친구 얘긴데’로 시작되는 말의 대부분은 본인의 이야기라는 건 인류 대부분의 진리다. 하지만 이민혁은 설마하니 세상천지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제 동생이 이런 일로 종일 멍하게 있었을까 싶어 솔직 담백한 전지적 오메가적 관점을 이어갔다.
“착각 아닌가?”
“착각?”
“꼭 그런 사람들 있잖아. 자기 혼자 친하다고 착각하는 사람.”
이연우는 임태호를 정말 좋아했다.
분명 초반에는 탐탁지 않아하고 한심하게 여겼던 때도 있었지만, 나중 되어서는 그랬던 자신을 그답지 않게 반성했을 정도로 따랐다. 그건 세상천지에 접고 들어갈 일 없던 극우성 알파이자 신화그룹의 일원인 그로서는 몹시도 드문 일이었다.
임태호는 이연우에게 가족과는 다른 범주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끌려오듯 귀국해서 수능을 보고 다니게 된 대학 생활 자체에 몹시 삐딱했던 연우가 대학 상활에서 얻은 게 있다면 임태호뿐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태호는 가족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고 상담하거나 가끔은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선배였다.
임태호는, 정말 ‘선배’라는 의미가 정말로 잘 어울리는 그런 존재였다.
학교 앞 작은 태호의 원룸에서 밤새 시험공부를 하고, 같이 꾸벅꾸벅 졸다가 지각할 뻔해서 허둥지둥 뛰어갔던 스무 살의 기억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서로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금요일 저녁이 가까워지면 가장 먼저 ‘오늘 시간 되면 술 마실래요?’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이연우는 임태호와 그렇게 8년을 함께했었다.
하지만 이 기억은 모두 이연우, 그의 시각일 뿐이다. 말마따나 정말 이민혁의 말처럼 혼자 서로 간의 거리를 착각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연우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있다가 작게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의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이연우도 며칠간 한참을 고민하며 정말 수많은 가정을 세웠었다.
‘선배는 나한테 오메가라는 걸 왜 감췄을까? 그것도 애인이 있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많았다. 하지만 이연우가 떠올릴 수 있는 것 중에는 그 무엇도 그럴듯한 것이 없었었다. 그는 임태호에 대한 것을 어쩌면 태호 그 자신보다 잘 안다.
태호의 작은 버릇도, 입맛도, 말투도, 말이 많지 않은 태호가 털어놓은 집안일도, 회사에서의 크고 작은 일들까지.
8년. 8년을 알고 지냈는데…….
말해 줘도 됐잖아.
이연우는 조금은 초조한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침대 위에서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던 태호의 모습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툭 튀어나온 거스러미처럼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이제껏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그 흐린 향이 닿았던 순간들 역시 새삼스레 속을 간지럽혔다.
한편, 이민혁은 고민이 심화된 듯한 제 동생을 보며 덩달아 진지하게 이연우가 떠올리지 못한 ‘전지적 오메가적 관점’을 더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성실한 성격 탓이었다.
“근데 그 사람이 알파야?”
“……어.”
“그럼 이것도 조금은 가능성 있지 않을까?”
이민혁, 그는 악의 없는 순수한 상담가다.
“별로 알파처럼 안 보이는 거.”
정말로, 악의는 없었다. 하지만 상담에 큰 재능이 없는 것은 확실했다. 제 동생의 눈가가 묘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누군지 모를 오메가 A, 정확히는 임태호에게 이입하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파처럼…… 안 보여?”
“음, 그러니까 어떤 의미가 됐든 호감은 아니라는 거지. 완전 별로라서 굳이 오메가라는 걸 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람?”
민혁은 상냥하게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건 동생의 고민 해결을 알리는 듯 그저 해맑기만 했다. 하지만 그 말에 고민의 당사자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멍하게 있던 이연우는 잠시 고풍스러운 전등이 걸린 천장을 봤다가, 얼마 안 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민혁이 작게 고개를 갸웃한 순간은 그때였다.
제 동생의 손이 손등으로 하얀 뼈가 덧그려지고 푸른 핏줄이 툭 불거져 나올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얼마 안 가 그 작은 의문은 확신이 됐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한 번 쓸어 올리며 낮게 그르렁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제 동생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씨발. 진짜 개 같네.”
가족이지만 참 언제 봐도 반듯하니 잘생겼다, 하고 감탄했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변한 지 오래였다. 민혁은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롭게 곤두선 채로 일렁이는 동생의 향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목까지 붉은 물이 든 연우를 보며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머리를 굴렸다.
이거, 100퍼센트 연우 일 맞지? 그치?
……근데 연우한테 베타라고 속일 만한 ‘친한 친구’가 있나?
이민혁은 그제야 ‘솔직히 연우 친구 없는데’까지 생각했다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매우 드물게도 이연우가 공손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는 가족 모두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개차반 막내가 드물게도 보기 좋은 얼굴과 목소리를 하길래 경악했던 사람이었다.
학교 베타 선배!
“미친. 이제까지 얼마나 별 같잖은 짓을 다 했는데!”
이민혁은 적잖게 들었던 그 호칭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떠올린 가정이 맞는지 확인했다.
“설마 ‘그 선배’야?”
“…….”
침묵은 정답을 뜻한다.
이민혁은 벌겋게 변한 채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제 막냇동생을 보며 조금 전까지 제가 가볍게 답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리며 살짝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연우는 제 큰형이 그러든지 말든지, 비수가 되어 꽂혔던 말들을 작게 씨근거렸다.
“뭐, 혼자 친하다고 착각해? 아. 씨발.”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야.”
“알파로 안 보여? 비호감? ……완전 별로라서,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어? 비호감인 사람이랑 8년이나 잘만 붙어 다니더라!”
사실 지금 이연우의 감정은 분노보다는 서운함에 가깝다.
가족처럼 믿고 의지했던 사람, 아니 때로는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깊은 속내를 기꺼이 털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과의 신뢰가 알고 보니 일방통행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 높다란 자존심이 약간 상하기도 했었다.
그 탓에 오늘 오전 일찌감치 온 전화는 차마 받지도 못했다.
연우는 임태호가 몇 개에 걸쳐 보낸 긴 사과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다가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한참 늦게 답을 보내기도 했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약속 당일 펑크를 냈다는 태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마냥 진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연우는 그 자신도 ‘네, 괜찮아요, 선배. 바빠서 전화 못 받았어요. 몸조리 잘해요.’ 하고 기계적인 대답만 겨우 했다.
평소에는 작은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 같더니 어떻게 8년 동안 베타인 척, 오메가 애인이 있는 척했는지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제 형에게 찾아와 슬쩍 물어봤더니 이건 뭐, 차라리 안 물어보는 게 나을 뻔했다. 말 그대로 대답 하나하나가 죽창도 이런 죽창이 따로 없다.
씨발. 이대로는 절대 못 지내!
이연우는 동글동글 순하기 짝이 없던 선배 임태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온종일 생각했던 결심을 내뱉었다.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거 듣고 만다, 내가.”
“어, 어떻게?”
이민혁은 저도 모르게 불안감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가족이기는 하지만 ‘참 잘생겼구나.’하고 늘 감탄했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걸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른하게 가늘어진 눈과 슬쩍 붉어진 뺨은 묘한 느낌마저 줬다. 민혁은 저 표정이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님을 직감했다.
“존나 꼬셔서.”
도톰하니 예쁜 입술과 듣기 좋은 나직한 목소리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표현이었건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이연우다웠다.
하나뿐인 ‘선배’, 임태호.
이연우는 그와의 관계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그저 묻어 두기에는 대체 왜 8년간 저에게 감췄는지도 알고 싶다. 비록 한없이 가벼워 보이기는 해도, 이건 며칠간 그답지 않게 넋을 놓고 고민했던 결과다.
8년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9년이나 10년 차가 된다고 해서 말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직접 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면 되는 거다.
이연우는 ‘그런데 그다음엔?’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자는 담백하고 안일한 결론을 내렸다. 어찌 보면 이건, 태호와의 시간을 굉장히 맹신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연우가 한 가지 간과했던 것이 있다.
그건 그 자신의 친형인 이민혁이 좋게 표현하면 세기의 로맨티시스트고 나쁘게 말하면 세기의 사랑 바보라는 것이다.
“전지적 오메가적 관점에서 말해 달랬지?”
늘 제 동생들에게 다정했던 목소리는 소위 신화그룹 외부인들이 아는 냉랭한 어조로 변해 있었다. 이민혁은 평소 그답지 않은 뾰족한 문장을 내뱉으며 제 막냇동생, 이연우에게 쿠션을 내던졌다.
“나 같으면 너랑 안 사귄다, 새끼야.”
◈◈◈
진짜 화났나 봐. 어떡하지?
그 끝이 살짝 동그란 터라 그렇지 않아도 약간 처진 것처럼 느껴지는 태호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태호는 자신이 약속을 펑크 냈던 날 이후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듣지 못한 후배의 짤막한 메시지를 보며 퍽 침울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일이 많다며 바빴던 이연우가 겨우 저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여유를 냈는데, 그걸 말없이 잠수타다니. 제가 생각해도 기분 상할 것 같았다.
제 비밀이 그 곱상하고 친절한 후배에게 들켰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태호는, 휴대폰만 손에 쥐고 틈이 날 때마다 종일 전전긍긍했다. 물론 그건 늘 무던하고 감정의 동요가 깊지 않던 ‘동글둥글 임 대리’ 에게는 굉장히 드문 일이라 회사 사람들의 시선을 함께 끌었다.
“임 대리?”
“네, 네에? 네.”
태호는 저를 향해 슬쩍 떨어진 부장의 물음에 깜짝 놀라 들썩이며 대답했다.
“아직도 팩스 안 들어왔나?”
“네. 아직입니다.”
“담당자가 신입으로 바뀌더니 영 일 처리가 늦네. 뭐라 할 수도 없고. 참.”
한숨 반, 이죽거림 반으로 내뱉어진 부장의 말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대리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 보탰다.
“그쪽이 절대 갑인데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지.”
임태호는 제법 탄탄한 중견 기업에 다닌다.
적어도 손꼽히는 내로라할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이지만, 태호는 경쟁이 치열한 대기업 대신 탄탄하고 성장 가능성 있는 쪽을 택했다. 그건 끊임없이 계속될 경쟁을 잘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탓도 물론 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그건 바로 신화그룹과의 거래다.
태호는 온종일 제 속을 따끔따끔하게 했던 후배가 덩달아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주변 눈치만 봤다. 회사의 그 누구도 임태호가 ‘그’ 신화그룹의 나이트, 이연우와 늘 연락하는 사이라는 것을 모른다. 사실 당사자인 연우조차 태호의 회사가 신화그룹과 거래를 시작했다는 걸 알지 못한다. 괜히 상냥한 제 후배가 신경 쓰게 될까 싶어 말하지 않은 탓이다.
결국 태호는 슬쩍 화제를 돌려 문제의 신입 담당자에게 연락한다며 주변을 조용히 했다.
“안녕하세요. □□의 임태호 대리입니다. 통화 괜찮으신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이따가 제가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에.”
확실히 이번 신입 담당자는 전과는 다르다.
임태호는 뚝하고 끊긴 전화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적어도 내일까지는 꼭 넘겨야 하는 서류인 터라, 부장까지도 몇 번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의 그 신화그룹 신입 사원은 뭔가 단단히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근처의 동료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부장마저 ‘임 대리, 믿고 가겠네.’ 하는 속 편한 말을 하면서 자리를 뜨는 사이, 어느새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된 태호는, 제 컴퓨터 하단의 시계를 빤히 바라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사정은 언제나 상황이 급한 을이 하는 일이다. 임태호는 조금 울적해진 채로 전화기를 들었다. 조금이나마 그를 위로해 준 건,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재깍 들린 상대의 목소리였다.
-임 대리님!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최대한 빨리 연락드린다는 게 일이 많아서 늦어졌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서류를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최대한 밝게 낸 목소리였건만, 신입 사원 특유의 정석적인 깍듯함은 그 순간 정적으로 바뀌었다.
-후우,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꼭 새벽까지 보내 두겠습니다.
“저희 쪽도 내일 1시까지가 지원금 신청이라 급해서요. 그럼 전산에 넣을 수치라도 먼저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예? 예에, 잠시만요.
“…….”
전화기 너머로 ‘어, 어어, 음, 그러니까…… 어…….’하고 뭔가를 한참을 찾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사 내에서 신입 사원들에게 가장 신망받는 사수, 임태호는 이제껏 수없이 들어왔던 익숙한 소리를 들으며 제 머릿속의 가설 하나를 확신하기 시작했다.
“저, 혹시.”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는 때때로 냉정한 선고처럼 들리기도 하는 법이다.
“엑셀 못하세요?”
-…….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침묵이 흐른 것은 임태호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신화그룹 개발1팀 같은 엘리트들이 모인 곳에서, 대기업 쪽은 아니지만 엄연히 한 담당자를 받을 만큼 신임받고 있는 신입 사원이라면 분명 보통내기는 아니었을 거다. 그걸 증명하듯 이 신입은 대체로 빠릿빠릿한 반응을 보여줬었다. ……엑셀 작업을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태호는 순간 살벌할 정도로 적막에 빠진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제 한숨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살짝 떨어져서 숨을 내뱉은 다음, 자신도 엑셀 창을 켰다. 퇴근이 생각보다 더 늦어질 것 같지만 앞으로 계속 합을 맞출 업무 파트너를 위해 몇 시간을 희생해야 할 순간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막히신 부분부터 말씀해 보시겠어요?”
◈◈◈
이 자그마한 반도에서는 직장인들 대부분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세 개 있다.
한글, 파워포인트 그리고 엑셀이다. 하지만 문제의 신화그룹 신입 사원은 그 필수 삼대장 중 엑셀과는 유독 거리가 먼 미국 유학생 출신이었다.
임태호는 사람들이 복작복작한 지하철역에서 작게 턱을 긁적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회사에 들어온 지 몇 년, 대리까지 단 임태호지만 외근이 아닌 퇴근 후 사적인 이유로 거래처의 사람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왠지 긴장도 조금 됐다. 워낙 신입 사원들 뒤치다꺼리를 많이 했던 태호는 하루의 야근으로 얻어낸 잘 정리된 제안서에 충분히 만족했지만, 이제껏 언제나 전화로만 이야기했던 신화그룹 신입 사원은 사정이 다른 모양이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이틀 전 밤을 새워 도와준 신입 담당자를 기다리고 있다.
임태호가 그 담당자에 대해 아는 건 얼마 없다. 나이도, 얼굴도 모른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태호는 제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에 평소보다 바짝 긴장해서 파드득 떨며 전화를 받았다.
-어디세요?
“어, 으음, 1번 출구인데요.”
-저도 나왔는데. 어디 계시지~.
아마 내가 더 연상에, 회사는 다르지만 직급은 더 높은 상대 담당자일 텐데.
임태호는 제가 너무 긴장한 티를 내며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 속으로 소심한 제 성격을 탓했다. 휴대폰으로 들리는 상대의 목소리는 마냥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태호는 저와 마찬가지로 전화하고 있는 사람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성큼성큼 잰 걸음으로 먼저 다가온 청년이 있었다.
“임태호 대리님?”
임태호는 제 이름을 부른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와, 인기 많겠다.’
“유현민입니다.”
살짝 펌 기운이 남아 있는 갈색 머리 때문인지 신입 담당자, 유현민은 시선이 훌쩍 높은데도 무뚝뚝하거나 어려운 인상 대신 밝은 느낌을 주는 사내라는 단어보다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170 중반대인 태호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껑충 큰 키의 사람이 눈을 접어 웃으며 꾸벅 머리를 마주 숙이는 건 조금 귀엽게도 보였다.
임태호는 저와 속도를 맞춰 걷는 유현민의 곁을 따라 걸으며 살짝 긴장한 채로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늘 전화로만 만나던 신입 담당자는 참 그 모습다운 경쾌한 느낌의 페로몬을 가진 알파였다. 조금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임태호는 이연우가 아닌 다른 알파와 단둘이 술을 마시러 오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를 정도로 까마득했다.
하지만 그 묘한 긴장감은, 현민이 ‘여기 안주가 참 맛있어요!’하고 데리고 온 술집에서 얼마 안 가 깨졌다.
“입사 지원서 쓸 때 프로그램 활용 능력 상중하 체크하는 게 있었거든요.”
“네에.”
“그런데 솔직히 ‘하’라고 체크하면 안 되잖아요. 못해도 ‘중’은 해야죠! 그래서 뻥쳤죠!”
……응. 맞아. 그렇긴 하지. 태호는 솔직담백한 현민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그래밍이 직업이 아닌 이상 어느 입사 지원서에나 있는 사무프로그램의 활용 능력을 기세 좋게 ‘하’라고 체크하는 신입 사원은 솔직히 없을 거다. 보통 중간은 한다고 해 놓고, 붙으면 뭐 그때부터 공부해야지 생각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파워포인트나 한글은 괜찮았는데, 아, 엑셀 이거 왜 이렇게 어렵죠?”
“그래서 학원 많이들 다녀요.”
“저도 인강 듣는 건 시작했는데…… 퇴근하면 피곤해서 듣다 잠드는 건 둘째 치고, 가끔 엊그제처럼 양이 많아지면 완전 바보 되더라고요.”
제법 술을 급하게 들이켠 터라 벌써 목덜미가 벌겋게 변한 현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멋쩍게 말했다. 처음에는 퍽 어려운 인상이었던 거래처의 엘리트 직원이 순식간에 몇 살 어린 연하의 신입 사원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태호는 현민이 빨리 취하지 않도록 일부러 물잔을 채워 주며 달래듯 입을 열었다.
“저는 자격증까지 있는데도 신입 땐 자주 헤맸어요. 아는 것도 안 보이고.”
“아! 말 놓으세요. 형 맞으시죠? 저 스물일곱인데.”
임태호는 저도 모르게 요 며칠간 그를 끙끙 앓게 했던 후배를 떠올리며 눈앞의 청년과 저와의 나이 차이를 셈했다. 현민은 태호가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로 ‘전 서른셋이긴 한데…… 말 놓는 건 좀.’하고 말하는 걸 용케 잡아내고는, 짐짓 장난스럽게 먼저 선수를 쳤다.
“에헤이, 일할 때만 서로 말 높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냥 형 해요, 형!”
“으응.”
“저 유학도 오래한 데다가 외동이어서 친구도 없고 심심했거든요. 좋다.”
“……나아, 나도 외동이야.”
“정말요! 역시 통하는 게 있다니까.”
사실 유현민은 쾌활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제법 낯을 가리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귀국 후에 이런저런 스터디에 기웃거리면서도 얼른 사람과 가까워지지 못했었다. 직장 동기들 앞에서 한탄이나 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고, 괜히 부모님께 걱정 끼치기도 싫었던 그에게 임태호처럼 상냥한 형이야말로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현민은 그답지 않게 조금 들떠서 수줍음 많은 태호와의 대화를 열심히 이어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가 놀랐을 정도로 제법 잘 맞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도, 책을 좋아해서 베스트셀러는 꼭꼭 체크하는 취미도,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서점이라는 것까지 다. 덕분에 어려울 것만 같았던 낯선 만남은 태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 좋게 무르익었다.
지구상 그 누구보다 용감한 존재인 금요일 밤의 직장인 둘의 만남은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제법 괜찮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까맣게 꺼져 있던 임태호의 휴대폰 액정에 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술을 잘 못하는 태호 대신에 몇 배로 술을 퍼부은 현민은, 다정한 성격의 새로 알게 된 형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휴대폰의 주인인 태호는 귀 끝까지 벌겋게 변한 채로 테이블에 금방이라도 머리를 박을 듯 꾸벅거리고 있었다.
유현민은 충혈된 눈으로 액정 위의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연우]
잔뜩 취했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은 현민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얼굴 하나가 불쑥 머리를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속한 그룹의 재벌 총수 가문 일원인데,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유현민은 이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사람과 제가 아는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유현민은 지극히 상식적인 범위 안에서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이연우’라는 이름은 엄청 흔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명이인이 절대 없을 이름도 아니었다. 현민은 호의를 가득 담아 취한 태호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예! 임태호 씨 휴대폰입니다.”
취기가 올라 가라앉은 목소리는 끝이 약간 갈라진 채 흘러나왔다.
현민은 왠지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 길게 심호흡을 하며 속을 달랬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휴대폰 너머의 사람은 현민의 말에도 대답이 없었다. 끊어졌나? 현민은 귀에서 휴대폰을 떼서 액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액정 위의 시간은 별문제 없이 차곡차곡 잘 쌓여 가고 있었다. 현민은 누가 봐도 술주정 같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여보세요~ 똑똑~.”
-……누구십니까?
솔직히, 술김인데도 속으로 ‘어우 씨. 살벌한 거 보소. 지가 뭐 남친이세요?’ 하고 투덜거린 게 사실이다. 눈치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현민은 밤늦게까지 저와 술을 마시면서 휴대폰 한 번 들여다보지 않는 임태호를 보며 이 형은 분명 저와 같은 솔로가 분명하다고 속으로 확신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낮게 가라앉은 사내의 목소리는 영 심상치 않은 터라, 현민은 저를 설명할 가장 무난한 단어를 끄집어냈다.
“어, 으음. 아는 동생인데요.”
-‘아는 동생?’
“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가장 내뱉어서는 안 될 자기소개 중 하나였다.
-아는 동생, 누구?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의 말이 비뚜름하게 짧아지며 서늘해진 것은 유현민, 그의 착각이 아니었다. 현민은 그걸 한 박자 늦게 눈치채자마자 곧바로 기분이 상했다. 오늘의 그는 금요일 밤의 용감무쌍한 직장인이자, 새 형을 얻어 잔뜩 텐션이 올라간 어리광 많은 외동아들이었다.
“말하면 압니까?”
-알아야지. 모를 수가 없거든.
“와, 뭐래. 유현민! 유현민입니다! 압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대폰의 주인은 여전히 테이블에 코를 박고 숙면 중이었고, 현민의 목소리는 저쪽 떨어진 테이블의 종업원이 흘끗 시선을 던질 정도로 커졌다. 종업원과 눈이 마주친 현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묵례했다. 현민은 취하면 쉽게 욱하는, 참 전형적인 취객이었다.
아니, 전화 대신 받아준 게 단데. 내가 뭘 잘못했겠어. 어?
현민은 의기양양하게 생각하며 예쁘장한 이름을 가진 사내, ‘이연우’의 사과를 기다렸다. 먼저 사과만 한다면 저도 미안하다며 접고 들어갈 의향이 충분했다.
하지만 오만한 말투를 자연스럽게 두른 상대는 이번에도 현민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터진 낮은 웃음소리는, 조금 한숨이 섞여 있는 것도 같고 또 조금은……
-……모르겠네. 몰라선 안 되는데.
잇새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유현민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지금 어디야?
솔직히 기세에 눌린 채로 어영부영 술집의 위치를 실토한 유현민은, 자신이 휴대폰 너머의 남자에게 한 수 접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미적지근해진 맥주를 쭉 들이켰다. 주소 물어봤으니까 데리러 오려는 거겠지. 암, 그때만 안 쫄면 되는 거지. 그렇고말고. 현민은 남아 있는 안주를 긁어먹으며 씩씩하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현민의 정신승리는 제법 나쁘지 않게 진행됐다. 그는 제 자신이 제법 괜찮고 근사한 알파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는 편이었다. 정말이지, 술집 문을 열고 주변을 쭉 훑어본 뒤 뚜벅뚜벅 제가 있는 방향으로 직행하는 장신의 남자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난 취했어. 분명히 취했을 거야. 이건 꿈이야.
유현민은 필사적으로 제 자신에게 외치며 술기운이 달아나다 못해 쭈뼛하고 온몸이 솜털이 서는 감각에 팔을 쓸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테이블 앞에 선 무표정한 남자의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로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아는 동생?”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럴 리 없지만…….
그 이연우였다.
◈◈◈
이연우는 임태호의 생활을 잘 안다.
‘안다’라고 확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건, 임태호는 가끔은 놀리고 싶을 정도로 딱 떨어지는 생활을 하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의 하루 일과를 시간표로 볼 수 있다면, 임태호의 시간표 밑에는 언제나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혀 있을 거라고 농담처럼 생각했던 때가 있을 정도다.
밤 11시.
이 시간이면 태호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책을 읽거나 가벼운 집안일을 한다. 때문에 이연우는 제 선배에게 주로 이 시간대에 연락하고는 했다. 하지만 늘 편하게 걸었던 전화는, 이번만큼은 몇 번의 심호흡을 동반했다.
반드시 선배 입으로 직접 오메가라는 고백을 듣겠다고 기세 좋게 말해 놓긴 했지만 사실 아직도 좀 얼떨떨했다. 선배가,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건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일인데도- 아니, 사실 그러고 나니 더 머쓱하고 그답지 않게 민망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거짓말도 못하는 사람이 이제껏 히트사이클 때마다 늘 저에게 거짓말을 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조금쯤 심술부린 것도 맞다.
사실 이연우는 ‘그걸’ 엿보게 되지만 않았더라도 몸이 안 좋아서 약속을 펑크 냈다는 임태호의 말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의심 없이 순순히 믿었을 거다. 오히려 걱정하며 쩔쩔맸을 거다. 그러고 나니 왠지 헛웃음도 났다.
이제껏 제 자신이 선배, 임태호를 얼마나 단 한 치의 불신 없이 따랐는지를 깨달아서였다.
게다가 그걸 자각하고 나자 더 큰 문제 역시 뒤따랐다.
……왜 화도 안 나냐, 씨발.
이연우는 임태호가 보낸 문자를 보며 속으로 제 자신을 향해 욕을 씨근댔다. 휴대폰 액정 위에 적힌 메시지만으로도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지도록 하는 건,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능력이었다.
정말 그는 며칠 동안 퍽 심각했었다. 어떻게 보면 저를 몇 년간이나 속여먹은 건데도, 당혹이 가라앉고 나자 새로 더해지는 시간만큼의 또 다른 생각이 싹트는 현상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임태호인데.’ 같은 종류의 믿도 끝도 없는 신뢰였다. 정말,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제 자신을 향해 혀를 차 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8년간 제 곁에 있었던 그 동글동글한 사내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를 기만했다며 두 번 다시 안 보고 돌아섰을 것을 며칠을 고민하고, 걱정하고, 서운해하고, 이제는 내심 감싸고 있는 제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선배.
임태호는 이 두 글자로도 충분했던 사람이었다. 분명 그랬었다. 이연우는 그답지 않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들고, 신호음이 가는 걸 들으면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임태호의 반응을 착실하게 먼저 그리는 걸 잊지 않았다.
아마 선배는 살짝 더듬으면서 미안하다고 하겠지. 예전에 집안 일 때문에 며칠 연락 안 된다는 것도 다 히트사이클 때문이었을 거야. 씨발. 어쩌겠어? 알파도 러트 있잖아. 그런데 연락해서 뭐라고 하지? 다시 약속 잡자고? 언제로 하지? 잠깐, 히트사이클이 끝난 오메가는 컨디션이 어땠더라.
고작 몇 초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온갖 가정들이 머리를 휩쓸었다. ……다시 한 번, 예상하지 못했던 것에 뒤통수를 얻어맞기 전까지는.
저절로 벽에 있는 시계로 힐끔 시선이 갔다. 11시 분.
회식이 아닌 이상, 임태호가 절대 밖에 있을 리 없는 시간이었다. 혹시 회사 동료인가 싶어 잠시 말문이 막힌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하지만 갈수록 가관이라는 표현을 이런 데에 쓰는 게 아닐까 싶은 대답만 돌려받았을 뿐이었다.
‘아는 동생?’
이연우는 곧바로 욕을 내뱉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닥치고 임태호나 바꾸라며 거칠게 말할 뻔한 것도, 그걸 꾹 눌러 참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누른 것도 모두 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게 분명한 남자가 그 자신을 선배의 ‘아는 동생’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선배 휴대폰에 맨날 다 늙은 중늙은이들만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뭔 개 같은 아는 동생? 연우는 어떻게 보면 태호에게 실례인 생각을 뻔뻔하게 하면서 곧바로 차를 끌고 나섰다. 이 시간에 어딜 가냐고 묻는 가족과 고용인들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씨발, 뭐? 아는 동생? 저절로 짜증 섞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만약에 임태호에게 정말 그런, 특별한 게 있다면…….
“아는 동생?”
적어도, 그건 제가 차지해야 할 자리일 거다.
이연우는 저와 눈을 마주 보지 않고 시선을 빙글빙글 돌리는 청년을 노려보며 툭 입을 열었다. 그러자 청년, 유현민은 마치 작살이 꽂힌 물고기처럼 화들짝 놀라며 ‘예에’와 ‘으으윽’의 알 수 없는 중간 발음으로 우물대며 대답했다.
지금 유현민은 머릿속에 가득 찬 세 단어 때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여유가 없다.
그 단어들은 바로 ‘씨발’과 ‘좆됐다’, 그리고 ‘뒈졌다’다.
솔직히 유현민은 좀 억울하다. 거래처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갑자기 그룹 총수의 막내아들이 뛰쳐나오는 게 말이 되기나 하는 건지 하늘에 묻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당장에 하늘보다 더 무서운 건 눈앞에 서 있는 핵폭탄급 직장 상사였다.
사실 유현민은 저 먼발치에서 이연우를 볼 때마다 혀를 내둘렀었다. ‘거 참 세상 혼자 사는 사람이구먼.’하고 감탄하기도 했었고, 대체로 서늘한 인상인 신화그룹 3세 중에서 가장 인상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유현민은 그 생각을 모조리 철회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그 고운 미소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 언제부터 ‘아는 동생’이셨나?”
“예에? 어어…….”
현민은 나직하게 떨어진 물음에 임태호와 공적으로 처음 통화했을 때를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말을 놓기로 한 근 몇 시간 전부터라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몇 시간 전이라고 했다간 장난 치냐며 말꼬리가 잡힐 것 같아, 조용히 그 기간을 부풀리는 쪽을 선택했다.
“하, 한 달쯤 됐습니다.”
눈앞의 ‘알파’를 내려다보는 이연우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유현민은 한껏 공손하게 말한 것이었건만, 덕분에 이연우는 속이 한 번, 아니 네댓 번은 뒤집어졌다.
한 달이면 정말 최근의 일이다. 연우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질문들을 겨우겨우 눌러 삼켰다. 눈앞의 ‘아는 동생’이라는 남자는 임태호가 오메가라는 걸 알고 있을지 셈해 보는 제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유치하게 느껴졌다. 한없이 드높아 흠집 날 일 없었던 그 고고한 자존심도 좀 상했다.
왁자지껄했던 술집 내부는 이미 묘한 웅성거림과 함께 한쪽으로 시선이 집중된 지 오래였다.
현민은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피부가 왠지 싸늘하게 시릴 정도로 따끔거리는 페로몬에 눈 밑이 슬쩍 떨리는 것 같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 정도라면 발현과 동시에 제 향을 컨트롤하는 것부터 배웠을 극우성 알파일 거다. 극우성 알파가 제 향을 잘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알파-오메가 사회의 매너 중의 매너다. 그걸 신화그룹 도련님이 안 배웠을 리도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제 심기가 불편한 것을 살얼음이 서걱거리는 향으로 표현한다는 건 뭔가 단단히 꼬여도 꼬였다는 거다.
현민은 술집의 조명이 어두컴컴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싶어 왠지 좀 울고 싶어졌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은 유현민을 완전히 버린 게 아니었다.
“……으음.”
그 작은 웅얼거림의 주인공은 이 모든 고민과 혼란의 중심에서 홀로 평화롭던 유일한 사람, 임태호였다. 약간 춥다는 듯이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젓는 태호의 이마에는 희미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유현민은 저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던 살벌한 시선이 세상모르고 취해 잠든 임태호를 향하는 것을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다가, 머잖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현민의 반응만이 아니었다.
술집 안의 알파-오메가들은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그들이 동시에 반응한 이유는 하나다. 마치 물 안으로 새파란 잉크가 퍼지듯 번져 갔던 극우성 알파의 날 선 향이, 절로 어깨가 흠칫거릴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현민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얼굴로 이연우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건 별로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저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하던 눈앞의 극우성 알파가 뺨에 테이블 자국이 난 임태호를 보며 찌푸리듯 웃는 건, 차라리 안 보는 게 마음 편했을 비밀 같은 순간이었으니까.
베타는 알파나 오메가의 향을 짚어내지 못한다. 극우성이 난동이라고 묘사할 만큼 날뛰어야 옅은 정전기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다다. 현민은 후다닥 눈을 굴려 바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사태 파악을 하려 애썼다.
‘저 형, 베탄데. 향은 왜 걷어 줘?’
어찌 보면 핵심을 정확히 관통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진 이연우의 말 덕분이었다.
“선배.”
“어…… 으응.”
“선배, 정신 차려 봐요. 후우, 콜라만 마셔도 취한다는 사람이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셔요?”
“……아니, 아냐. 같이 섞어서, 어? 어어?!”
유현민은 저에게 말할 때보다 반 톤은 높아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임태호를 깨우는 이연우를 보며 제가 저 동그랗고 순한 남자에게 뭔가 실수한 게 없나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물론 실수는 바로 떠올랐다.
당장 오늘 술자리만 해도 제 잘못을 도와준 걸 감사하기 위한 자리였다.
안타깝게도 임태호의 고개가 벌떡 올라가는 건 불쌍한 신화그룹 평사원 하나의 머리가 푹 떨궈지는 것과 비례했다. 태호는 술기운에 풀린 눈을 최대한 크게 뜬 채로 안 믿긴다는 듯 눈앞의 남자를 불렀다.
“연우야?”
“……네에.”
“우와!”
막 옅은 잠에서 깨서 시야각이 30도 정도에 불과한 임태호는,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현민을 보지 못하고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현민이랑 같이 있었는데.”
물론 그 말에 유현민은 ‘아니, 씨발! 형님! 저 여기 있어요!’하고 음소거로 울부짖었다.
현민은 제발 이연우가 그의 머릿속에서 제 이름 석자를 깔끔하게 지워 주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이미 이연우는 전화로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유현민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긴 지 오래다.
그런 일련의 사건을 전혀 모르는 임태호는 쌍꺼풀이 여러 겹 진 흐린 눈매를 접어 웃으며 살짝 꼬인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약간 부정확할 뿐이지, 그 억양은 평소의 임태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연우야.”
“네.”
“많이 화났지?”
아마도 저 소심하고 생각 많은 남자는 이연우에게 이 말을 하는 상황을 몇 번이고 상상하고 또 연습했을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이연우는 조금 한숨이 날 뻔했다. 사실 처음부터 화는 안 났었다. 서운했고, 당황했고, 혼란스러웠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살짝 처진 눈이 뭔가를 생각하듯 몇 초간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간은, 이연우에게는 꽤 길게 느껴졌다. 태호는 그런 기다림에 작은 보답을 한다는 것처럼 헤헤, 하며 드물게 소리 내 웃었다. 요 며칠간 있었던 묘한 거리감이 확 좁혀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뺨에 테이블의 나무결이 고스란히 남고 술기운에 울긋불긋해진 태호가 헤실헤실 웃는 모습에 덩달아 표정이 풀릴 것 같아진 이연우는 괜히 무뚝뚝한 톤을 꾸며 물었다.
“왜 웃어요?”
“……역시 연우 너는 세상에서 제일 착해.”
혼잣말 같은 대답은 그 끝이 무뎠지만 의미를 전달하기는 충분했다.
덕분에 애써 담담한 표정을 걸던 연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건 불쾌보다도 익숙하지 말을 들은 후의 머쓱한 표정에 가까웠다.
임태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후배 이연우가 아닌 신화그룹의 나이트 이연우는 저런 고운 단어와는 꽤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다.
국내에서 무슨 꼬투리가 잡힐지 몰라 보낸 유학길에서는 합법과 최악의 경계선을, 도로 잡아다 앉히니 신화그룹의 이름을 보고 접근하는 이들과 보란 듯이 뒹굴었다. 덕분에 신화그룹 경영전략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폭탄으로 발전할 수 있는 3세로 이연우의 이름을 먼저 꼽으며 온갖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그뿐인가.
군대 하나 못 빼면 능력 없다는 말이 나온다는 재벌가에서 신화그룹 3세들이 모두 현역 입대 또는 특전사 딱지까지 달고 있는 것 역시 갖가지 진단서를 주렁주렁 떼서 병역 면제를 받은 이연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엄밀히는 ‘군대 내 알파 메일 난교 파티’ 내지는 ‘이병의 상관 폭행’ 따위로 신화그룹의 이름이 1면에 실리게 하느니 그냥 다른 녀석들이 좀 고생하라는 이주호 회장의 명령을 따른 것이긴 했다. 하지만 형인 이민혁은 그렇다 치고 사촌들마저 순순히 그걸 따른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이연우 저건 진짜 그럴지도 몰라.’하는 확신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이연우에게 그냥 착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착하다니. 이건 거리가 멀어도 좀 먼 게 아니다. 하지만 임태호는 슬쩍 제 시선을 피하는 근사한 후배를 말갛게 올려다보며 웅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제일 제일 착하고, 예뻐.”
“…….”
“정말, 정말, 저어엉말…….”
칭찬인지 그냥 술주정인지 모를 문장은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풀린 눈으로 말을 이어가던 태호가 제 후배의 품에 머리를 콩, 박으며 잠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어깨는 임태호가 다시 잠들었다는 걸 알리는 가장 확실한 신호였다.
이연우는 제 재킷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다섯 살 연상의 선배를 내려다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는 임태호가 저를 이렇게 묘사하는 걸 처음 들었다. 아니, 임태호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이연우를 저런 단어로 말한 적 없었다.
……뭐,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제일 예뻐?
만약 이 자리에 이연우를 손톱만큼이라도 아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낄낄대고 웃음을 터트렸을 거다. 잠시 분위기에 움츠려 있던 유현민조차도 속으로 ‘그건 아닌 듯!’하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임태호의 취중진담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연우는 그 낯간지럽다 못해 열이 오르는 수식어 덕분에 며칠간 저를 괴롭혔던 문제의 답을 막 찾았다. 그걸 깨닫고 나자, 한숨 대신 누구를 향하는 것일지 모를 쓴웃음이 툭 흘러나왔다.
밑도 끝도 없는 술주정을 늘어놓는 저 순해 빠진 남자는 이제까지 8년을 늘 그랬다.
다른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며 시선을 피하면서도 마음을 연 저에게는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었고, 영악하게 계산하는 법을 모르는 흐린 얼굴에는 늘 일방적일 만큼 순진한 호의가 걸려 있었다. 소심하고 조심성 많은 선배 임태호는, 후배 이연우를 그 자신의 제일가는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연우는 임태호의 앞에서만큼은 그린 듯한 사내를 흉내 내 행동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호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가족들이 질린 얼굴을 한 채 경악하든 말든, 임태호의 말투를 닮은 다정한 목소리를 내고, 고르고 골라 정제된 단어를 엮었다. 임태호가 한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착하고 예쁘게 보는 사람의 기대를 어기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정말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가족마저 황당해했었고, 그 자신이 곱씹어도 멍청해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연우는 ‘안녕히 가십쇼.’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망할 아는 동생 따위 보기 좋게 무시한 채로 태호를 부축했다. 하지만 한참을 헤실거리다가 또다시 잠든 이 선배는, 아무래도 영장류보다는 곰이나 판다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집까지 오는데 한 번을 안 깨?!”
이연우는 세상모르고 잠든 선배를 침대에 눕히며 거칠어진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임태호는 그 목소리에도 깨지 않고 잘만 잤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연우는 제 셔츠 단추를 몇 개 풀며 살짝 빨라진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직 제법 쌀쌀한 기운이 있는 이른 봄인데도 이마에는 옅은 땀이 맺히고, 구김 하나 없던 옷은 이미 여기저기가 구겨진 지 오래였다.
살며 처음으로 해 본 취객 부축은 정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잡으면 저기로 기울고, 저렇게 잡으면 여기로 기울었다. 하지만 차도 가지고 왔겠다, 이연우 그의 피지컬이 부족하지도 않겠다, 임태호가 살짝 통통한 편이긴 해도 투룸 빌라까지 데리고 오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임태호가 엘리베이터 없는 4층에 산다는 것이었다.
함부로 손을 대려야 댈 수가 없었다. 뒤로 업자니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태호가 넘어갈까 걱정이었고, 앞으로 안아 들자니 몸이 늘어져서 자꾸 가슴이나 하반신으로 손이 스치는 게 신경 쓰였다. 그 탓에 이연우는 축 늘어진 성인 남성을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몇 번을 조심스럽게 고쳐 안으며 숨을 참아야 했다.
임태호, 그만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이연우 역시 임태호에게만큼은 꽤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이연우 그는 오메가라면 편의를 봐주는 신사와는 거리가 멀다.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취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발로 데굴데굴 굴려서 쓰레기 분리수거 전봇대 앞에 버리고 올 성질머리를 가진 게 이연우다. 이건 정말 100퍼센트 ‘임태호 전용 특혜’다.
그 어떤 근심 걱정도 없는 평온한 얼굴에 조금 울컥한 이연우는 둥그스레한 볼을 쭈욱 당겼다.
“이건 뭐, 찹쌀떡이세요?”
임태호의 종족은 이제 곰과 판다에서 편의점에서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음식으로까지 떨어졌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잡아당길 생각을 해 본 적 없던 다섯 살 많은 선배의 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말랑거렸다. 연우는 잠든 태호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가, 곱게 자던 얼굴에 작은 인상이 걸리는 걸 보고 얼른 손을 놓은 뒤 살짝 붉어진 뺨을 살살 쓸어 주었다.
“진짜 개 잘 자네.”
이연우는 임태호가 들으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표현으로 엄청난 양질의 숙면을 놀라워했다.
그는 앞으로도 이 ‘선배’의 비밀을 계속 모른 척 눈감아 줄 생각이다.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다. ‘별로 안 친한 사이’여서 감춘다는 가정도, ‘비호감에 알파 같지도 않아서’라는 가정도 사양이다. 이제 와 왜 오메가인 걸 감췄는지 물어보며 어색해지기에는 함께한 시간이 아깝다.
기꺼이 인정하기로 했다.
태호는 이연우, 그의 인생에서 앞으로도 계속 함께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알고 싶어졌다. 8년을 이 사람 옆에서 보냈다. 있지도 않은 오메가 애인을 만들어 가면서 사소한 거짓말들을 이어 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억지는 아닐 거다.
세상에 그렇게 예쁘고 착한 후배라면, 이 정도는 봐줘야 한다. 이연우는 임태호의 옆에 풀썩 누우며 다소 뻔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역시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8년간 한없이 견고해진 관문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침실 곳곳에 어린 흐린 향이 뒤늦게 속을 간지럽혔다.
……대체 이걸 어떻게 꼬셔서 털어놓게 만드나?
◈◈◈
아침에 제 아담한 싱글 침대에서 일어난 임태호는, 눈앞에 있는 말도 안 되는 꿈에서 깨어나려고 애썼다. 그 꿈은 어찌나 비현실적이던지 머리가 깨질 듯이 밀려오던 숙취마저 한 번에 사라지게 만들 정도였다.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임태호는 오늘이 토요일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일으킨 몸을 다시 침대에 뉘였다. 이래야 꿈에서 깨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꿈은 묘하게 현실감 넘쳤다. 예컨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숨처럼!
꿈이야. 꿈이야. 응, 맞아. 이건 꿈이야.
태호는 꿈속에서 심장이 빨리 뛸 수 있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꿈마저 평소와는 달랐다. 미간 정중앙에 내천자가 새겨질 정도로 꾹 눈을 감은 태호는 혹시 제가 가위에 눌린 게 아닌가 싶어 발가락도 꼼지락 꼼지락 움직여 봤다.
하지만 역시 가위는 아닌 것 같았다. 태호의 발가락은 쥐었다, 펴졌다 잘만 움직였다.
“선배, 일어났어요?”
……아니 진짜 꿈이 아니고서야 연우가 옆에서 자고 있을 리가 없는데!
임태호는 갑작스레 귓가로 소곤대듯 들린 낮은 목소리에 괴성을 내며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눈을 세게 감았던지 한 박자 늦게 초점이 잡혔다.
“그 소리 뭐예요?”
“지인짜, 지, 지인짜!”
“진짜?”
시야가 또렷해질수록 이불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진짜 연우야?’ 같은 얼빠진 물음에 대한 대답은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세상에 저런 모습을 한 사람이 둘일 수는 없다. 유독 볕이 잘 드는 4층 남향 빌라는 아침마다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온다.
정말로, 이연우였다.
태호는 제 옆에 나른하게 누워서 살짝 목을 젖히는 후배를 보며 뭐라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게 눈만 깜박였다. 살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하며 부스스한 머리는 누가 봐도 막 일어난 사람의 것이 맞는데도, 길게 내리깐 속눈썹이 먼저 보인 건 서로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넋이 나가 있던 태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 살짝 웃음기 섞인 이연우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어제 선배 엄청 취했던 건 기억나요?”
“으응…….”
사실 기억 안 난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임태호는 속으로 ‘아, 이게 필름이 끊긴다는 거구나.’하고 멍하게 생각했다. 역시 긴장한 채로 술을 마셨더니 취기가 일찍 올랐던 것 같았다.
“마침 전화했는데 선배가 너무 취해서 통화가 안 되길래 데리러 갔어요. 술주정도 했는데.”
“나 뭐 실수했어?”
“실수라기보다는 뭐, 선배 사과 받았다고 해 둘게요.”
기억나지 않는 어제의 윤곽이 뻔히 그려지는 대답이었다. 왠지 조금 부끄러워진 태호는 입술을 딱 붙인 채로 제 후배의 시선을 피했다. 이연우는 그런 임태호를 느긋하게 눈에 담다가 어젯밤부터 단 한 번도 머리에서 지운 적 없는 물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사람은 누구예요?”
“누구?”
“선배 ‘아는 동생’이라던데.”
아는 동생?
영 익숙하지 않은 단어에 몇 초간 멍하게 있던 태호는, 뒤늦게 어젯밤 저와 함께 부어라 마셔라 용감하게 시간을 보낸 유현민을 떠올렸다. ‘모닝 이연우’의 충격이 너무 커서 머릿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아, 현민 씨. 아니, 현민이.”
……뭐야, 씨발. 아직 그 정돈 아니네.
임태호의 대답을 들은 이연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는 제 선배가 눈엣가시의 호칭을 한 박자 늦게 고치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임태호의 성격상, 아직 제대로 말도 못 놓은 녀석과 그렇게 친근한 관계일 리가 없을 거다. 이연우는 그걸 깨닫자마자 그 스스로가 좀 우스울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무슨 중학생 애도 아니고 유치해 빠졌다는 것도 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도 좀 했다.
한편, 임태호는 며칠간의 저기압에서 막 해방된 이연우와는 영 다른 상황에 부닥친 참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방금 이연우가 묻고 그 자신이 순순히 실토한 ‘아는 동생’, 유현민 때문이었다.
그는 ‘어제 내가 만난 그 사람이 너희 그룹 직원이란다’ 같은 말을 하지 않을 눈치는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이제야 겨우겨우 신화그룹을 절대 갑으로 두는 거래를 텄다는 말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기도 했다.
임태호는 엄청나게 어색한 억양으로 이연우가 묻지도 않은 유현민에 대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거래처…… 직원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태호의 앞선 대답에 기분이 퍽 좋아진 연우는 그런 어설픈 말에도 ‘그렇구나.’하고 상냥하게 대꾸하며 넘어가 줬다. 임태호는 속을 쓸어내리며 앞으로 절대 제 새로 생긴 아는 동생에 대한 화제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선배.”
“으, 응?”
임태호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흠칫 떨며 대답했다.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처음 보는 것 같은 잠에서 막 깬 얼굴의 후배도, 간질간질한 숨이 닿는 거리도, 서로 피부가 닿는 부끄러운 감촉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말한 것도 아닌 어제의 해명도.
늘 다정한 온기를 품고 있던 연갈색 눈동자가 가로로 느긋하게 휘었다. 그건 조금 비현실적일 정도로 나른하고 또 근사해서, 태호는 잠시 그 모습에 멍하게 시선을 빼앗겼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자신의 침대에 느슨하게 누워 있는 사람이 그 이연우라는 게 새삼 실감 나기도 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어설프게 이불을 쥐고 있던 통통한 손가락 위를 마치 깃털처럼 살살 건드리자, 태호의 동그란 어깨가 저절로 튕기듯 떨렸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
“안 돼?”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고 또 예쁘다고 생각했던 후배의 낯선 말투였다.
임태호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조금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