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6)

5.

같이 잠든 줄 알았는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디트리히는 조금 기분이 저조해졌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에르나도 아침 수업 준비를 해야 할 테니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자신이 조금 더 신경 썼다면 그녀를 방까지 모셔다주었을 텐데, 쾌락에 젖어 까무룩 잠들어버린 게 문제였다.

여전히 손 안에 에르나의 체온이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한 공간에 있으니 오늘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영원히 그의 것이 되어달라고 에르나에게 애원했다. 아마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았고.

그는 희미한 웃음을 띤 채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좋았던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아서 금세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디트리히의 귀를 잡아끌었다.

“갑자기? 왜?”

“몰라. 학기 중에 사임하다니 이해가 안 되네.”

“하지만 랑케 교수님만큼 실전 중심으로 마법을 가르치는 교수님도 없는데.”

사임? 이게 무슨 소리인지 디트리히는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랑케 교수가 이 아카데미에 둘이 아닌 이상에야,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에르나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연무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학생들은 조금도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디트리히의 성난 발걸음이 에르나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사납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방에서는 어떤 대답도 없었다. 문도 잠겨있었다. 그는 연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쾅쾅, 문을 두드리자마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디트리히는 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에르나는 다행히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의 방은 정말로 비어있었다. 디트리히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누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사임이라니요?”

“그렇게 됐어요.”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요.”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디트리히가 성큼성큼 에르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에르나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잔뜩 힘이 들어갈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그 와중에도 그녀가 다칠까 봐 제대로 붙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묘할 정도로 차분한 얼굴을 한 에르나가 제 팔을 붙든 디트리히의 손을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항상 단정하고 아름답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디트리히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사임하고 나면, 그러면요?”

“각하께서는 뭐가 궁금하신 거죠?”

“설마, 누님… 설마.”

어느새 핏기가 사라진 디트리히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또 도망치시는 겁니까?”

“제가, 누구에게서 도망을 친다고 그러세요?”

“또 저를 버리려고……!”

“각하, 사람들이 듣습니다.”

에르나는 슬쩍 그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소란을 알아챈 학생들과 교수들이 문간에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경고에도 디트리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심, 그딴 것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팔에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에르나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디트리히의 푸른 눈이 흔들리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눈을 피하려다가 그냥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자신이 피하면 거짓말하거나 무언가 숨기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놔주세요, 클라인 공작 각하.”

“전처럼 또 절 버리고 사라질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제가… 각하를 버리고 말고 할 위치가 아니잖아요.”

“계속 저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잖습니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그의 목소리에 문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에르나는 그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문을 닫아버릴까 하다가, 협박범에게 자신이 디트리히와 완전히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디트리히에게로 돌아온 녹색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을 보자 디트리히는 덜컥 겁이 났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속으로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불안감은 도무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나긋한 목소리로 에르나가 달래는 듯 그에게 말했다.

“각하, 저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어요.”

“사랑해요, 누님. 제발… 저한테 그러지 마세요.”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예요. 각하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거랍니다.”

세상에, 에르나 랑케가 지금 클라인 공작을 찬 거야?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커졌다. 이쯤 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리라. 에르나는 그제야 손을 휘저어 문을 닫아버렸다. 사람들의 코앞에서 문이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제 팔을 붙든 디트리히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그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는 듯했다.

“절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제 주인님이 되어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런데 왜요? 왜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다시 깨달아서 그래.”

“누가 그런 소릴, 아니지. 왜 그런 생각을…….”

“그리고 너도.”

이 말을 하면 디트리히는 분명 상처받을 거다. 에르나는 입 속에서 혀를 꽉 깨물었다.

디트리히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았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에르나를 잊지 못하고 오직 그녀만을 갈구했던 그의 마음이, 절대로 지금 자신이 말하려는 그딴 쓰레기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매도하지 않으면 디트리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자신이 진짜 쓰레기 같았다. 에르나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뺨을 마구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도, 한 번 했으면 됐잖아.”

“그게, 무슨…….”

“네가 나한테 집착하는 건 애정 같은 게 아닐 거야, 디트리히. 뭐든 가질 수 있었던 네가 유일하게 손에 넣지 못했던 게 나라서, 그래서 집착한 거야.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고.”

“…….”

“이제 네 눈을 가린 마법에서 풀려날 법도 하잖아. 이미 밤새, 실컷 박아봤으니까. 나라고 별다를 것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을 거고.”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경악으로 커다래진 눈을 마주 보며 에르나는 다시 손을 뻗어서 그의 손을 떼어냈다. 이번에는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이 순순히 밀려났다.

“이제 돌아가. 너랑 할 이야기 없으니까.”

“…이게, 누님이 제게 하실 말의 전부인가요?”

“갈 생각이 없으시다면 제가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을 허락해 주시죠, 각하.”

예의 바르게 에르나가 고개를 숙였다. 귀족에게 하는, 완벽한 예법에 따른 몸짓이었다.

디트리히의 주먹은 희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에르나는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벼운 손짓에 따라 에르나의 모습이 디트리히의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에르나의 연구실 한가운데에 서서 디트리히는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버리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이별이라니.

모든 것이 이상했고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은, 정확히 9년 전에도 일어났었다. 에르나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압박했을 때.

디트리히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분명 아무 이유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에르나의 연구실에서 나왔다. 소란스럽게 앞을 서성이던 사람들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디트리히의 걸음은 그의 숙소로 향했다.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사람 좋은 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잘 벼려진 칼처럼 냉랭한 기운만이 잔뜩 그의 얼굴에 맴돌았다. 여태 디트리히를 알던 사람들이 본다면 놀랄 정도로,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 돌아오자마자 애뮬릿 하나를 꺼내 들고 그것을 발동시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놀랍게도 잠시 후 그의 방에 칙칙한 색으로 온몸을 감싼 사람이 둘이나 나타났다. 그것은 공작가의 비밀스러운 수족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주인의 앞에 부복한 두 사람은 평소보다 훨씬 더 기분 나빠 보이는 디트리히의 상태에 많이 긴장했다. 대외적으로 보이는 모습 따위를 수족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이긴 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훨씬 사납기 짝이 없었다.

“너희들은 지금 당장 가용한 인원을 다 동원해서…….”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디트리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에르나 랑케의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조리 알아오도록 해. 특히 지난 한두 주 사이에 그녀의 방에 접근했던 자들을 기록해 둔 것들, 모두 샅샅이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는 건 전부 보고해. 내일 아침까지. 그리고 그녀의 소재를 지금부터 찾아내고, 발견하거든 조용히 뒤따르도록 해.”

그의 명령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는 곧 사라졌다.

에르나는 몰랐겠지만 디트리히는 그녀의 주변에 사람을 심어둔 터였다. 공작가가 부리는 수족들은 어둠 속에서 일하는 자들이라, 그녀의 눈에 띄지 않고 계속해서 관찰하고 디트리히에게 보고해 왔다.

만약에 이런 사실을 그녀가 알았다면 디트리히를 경멸하거나 크게 화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가 또 도망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모르는 에르나가 존재하는 건 싫었을 뿐이다. 그녀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대우를 받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도망가는데도 잡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족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디트리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그는 오로지 그녀를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두 번이나 도망가게 두지 않아요, 누님.”

디트리히가 어둠 속에서 웃었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의 모습은 조금도 착한 개답지 않았다.

* * *

쿠르트는 난감한 기분으로 에르나 랑케의 사직서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는 이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지금 아카데미에서 빠지면 당장 수업 중인 학생들을 다른 교수들에게 억지로 나눠 맡겨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불만이 폭주할 게 뻔했다. 게다가 그녀의 수업은 다른 교수들이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쿠르트는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실수한 것인지 되짚어 보았지만, 아직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처음 계획에서 제대로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에르나가 디트리히 반 클라인 공작을 차버린 것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공작을 매정하게도 거절했다지.

거기까지는 참 좋았다. 하지만 그 좋은 소식을 듣고 학장실로 돌아와서 본 게 왜 에르나의 사직서란 말인가. 대체 그 남자와 관계를 정리했다고 해서 아카데미에서 떠나야 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원래대로라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에르나를 자신이 가서 위로해 주려 했다. 은근한 말로 구슬리고 달래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짐짓 모르는 척 물어보고는 사실을 토해내게 만들려고 했다.

하필 그런 자와 엮여서 당신이 고생이 많았다고, 잘 도닥이고는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하려 했다. 예전부터,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3년 전부터 줄곧 좋아했어요. 당신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에르나가 아카데미를 떠나면 말짱 헛짓거리를 한 게 되었다. 심지어 에르나는 제 얼굴도 보지 않고 사직서만 달랑 둔 채,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짐도 언제 다 챙겨둔 건지 그녀가 머물던 숙소과 연구실에는 어느 것 하나 남은 게 없었다.

“아, 정말.”

그녀를 찾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쿠르트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에르나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기반이 되는 아카데미를 내팽개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을 사서 수소문해야 하나? 그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미간에서 주름을 지우지 못한 채로, 쿠르트는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지?”

“저, 학장님. 리카르도입니다만. 손님이…….”

“누구 만날 생각 없다고 말했잖아!”

“그게, 클라인 공작 각하께서 찾아오셨거든요…….”

쿠르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작자가 찾아올 건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디트리히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공작 각하 같으니라고. 쿠르트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대답했다.

“들어오시라 해!”

곧 리카르도가 문을 열고, 디트리히가 성큼 학장실로 들어섰다. 그 난리를 쳐놓고도 반반한 젊은 공작의 얼굴을 보니 쿠르트는 괜히 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굽실대던 태도로 디트리히를 대했던 쿠르트는 인상을 구긴 채로 소파의 상석에 가서 앉았다. 대충 손을 내밀어 디트리히에게도 자리를 권하며 그가 투덜거렸다.

“제가 너무 바빠서, 오늘은 손님을 맞을 수 없다고 미리 비서에게 말해두었는데. 많이 급한 일입니까?”

“메이어 학장. 내가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미묘하게 말끝이 짧았다. 쿠르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척하더니, 제 뱃속이 틀어지니 바로 그런 위선을 집어치우는 꼴을 좀 보라지. 쿠르트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면서 디트리히를 노려보았다.

“뭘 묻고 싶은 겁니까?”

“일전에 에르나 랑케의 방에 다녀갔었다지. 나흘 전, 그녀가 수업 중일 때.”

“네?”

“방에 두고 온 편지에 뭐라고 썼지?”

디트리히의 말에 쿠르트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에르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직접 하면 되었을 텐데, 굳이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방에 가서 편지를 놓고 왔다라.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뒤에 에르나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단 말이지.”

“이보십시오, 공작 각하! 대체, 나한테 뭘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요!”

“에르나가 아카데미에 사직서를 내고 사라진 이유에 아무래도…….”

사나운 남자의 눈이 쿠르트에게 가 박혔다. 시퍼런 불길이 뚝뚝 떨어지는 눈과 다르게, 디트리히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귀신 같아서, 쿠르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당신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나는 모르는…….”

“여기에서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좋아. 다른 곳에서 물어볼 수도 있지. 내 집 지하가 대화 나누기에는 적절한 편이기도 하고.”

“지,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그 여자가 당신 싫어서 사직서 내고 떠난 거랑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아. 에르나가 사직서를 낸 이유가, 나를 떠나기 위한 거였다는 건가?”

“…….”

“그녀는 아카데미를 떠나는 건 개인적인 일이라고 했지, 나 때문이라곤 안 했는데.”

웃음 섞인 디트리히의 되물음에 쿠르트는 아차, 했다. 디트리히를 거절한 것과 에르나가 아카데미를 떠난 것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

디트리히가 바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좀 더 학장의 얘기를 들어야 될 이유가 있는 것 같네. 그렇지?”

“으으, 으…….”

쿠르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 * *

짧은 사이에 집을 구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에르나는 적당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 혹시라도 디트리히가 자신을 찾아올까 봐 염려해 겉모습을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그에게 보였던 모습은 아니었다. 똑같은 모습을 또 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녀는 여관의 낡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에서 나오고 나니 막막해졌다. 어디에서든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면야 일을 구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에르나 랑케라면, 이미 전쟁터에서 자신의 이름을 충분히 알렸으니까. 하지만 제 이름을 대는 순간에 디트리히가 찾아올 것도 확실했다. 그러다 보니 당장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난감해졌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면 디트리히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아,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그의 명예를 자신 때문에 망가뜨리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서 협박범이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과연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났다 해서 그 빌어먹을 작자가 디트리히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법이 있을까? 에르나는 자신이 너무 섣부르게 판단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디트리히가 걱정되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움직이긴 했지만,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곳에서 그가 해를 입는다면.

차라리 그의 옆에 있는 것이 나았으려나. 모든 오명을 자신이 뒤집어쓴다 해도, 일단 디트리히의 옆에 있는다면 협박범이 무슨 짓이든 하려 할 때 막아설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후회하는 것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에르나는 이미 디트리히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주고 도망친 뒤였다.

“아냐, 내가 누굴 걱정해.”

에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디트리히가 계속 다칠까 봐 걱정했지만, 사실 그는 누군가의 걱정을 받을 필요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클라인 공작가의 주인 아닌가.

그는 혼자서도 괜찮을 것이다. 에르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가 뭘 어찌할 필요도 없이, 디트리히는 여태 힘을 키우고 업적을 쌓아온 대로 잘 해낼 것이었다.

자꾸만 상처 입은 그의 눈이 떠올랐지만, 에르나는 애써 그 모습을 지워냈다. 자신이 엮여서 디트리히에게 좋은 일이 없었다. 아니, 그와 엮여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기억을 털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디트리히가 달콤하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떠올랐다.

‘사랑해요.’

‘영원히 내 것이 되어주세요. 내 주인이 되어줘요…….’

다시 받아주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다시 목걸이를 채워주고, 내 개라며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에르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수그렸다. 낡은 침대가 삐걱거렸다.

대체 뭐에 홀려서 디트리히의 마음을 받아주었단 말인가. 이미 9년 전에 도망갔을 때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의 애절한 표정에 홀랑 넘어가선.

“…떠나자.”

에르나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디트리히의 눈이 닿는 곳에서 멀리 떠나는 게 옳았다. 이전처럼 전쟁터를 전전할 수는 없으니, 외진 곳을 찾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9년을 피했는데 그 이상을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디트리히가 그녀를 또 찾아내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두 번이나 버림받았음에야, 이제는 애타는 그리움이나 집착보다 슬픔과 분노가 더 크게 남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에르나를 찾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녀가 밉다 못해 죽이고 싶을지도 몰랐다.

아끼는 개의 손에 죽는 주인이라니 그건 그것대로 웃기는 일이었지만. 에르나는 그래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만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장 내일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기운 없이 에르나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은행에서 돈을 찾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바로 떠나야지. 에르나의 머릿속으로 몇 군데 지명이 떠올랐다. 어디가 좋을지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에르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마법으로 만든 주머니에 짐을 잘 정리해서 넣고, 은행으로 향했다. 계좌에 넣었던 돈을 모조리 인출해서 잘 갈무리해 넣은 뒤, 상점에 들렀다. 튼튼한 신발과 옷을 새로 사 입고 그녀는 시내를 벗어났다.

에르나는 자신이 상당히 비이성적으로 움직이고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도피하는 것 외에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에르나는 자신의 뒤를 쫓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시를 벗어나서 다른 도시로 가는 길은 아직도 썩 잘 닦여 있지 않았다. 거의 숲이나 다름없는 가도를 걸으면서 에르나는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는 걸 느꼈다. 사람의 기척은 없고 간간이 새소리나 동물들이 돌아다니는 소리만 들렸다.

그제야 그녀의 걸음에도 조금이나마 느긋함이 깃들었다. 당장 자신을 쫓아오는 기색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에르나는 안심했다.

“짧게 귀띔이라도 해줬어야 했나.”

누군가가 너를 해치려 들었다고, 네 뒤를 캐고 너의 소중한 명예를 깎아내리려 들었다고. 디트리히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적당히 거리가 떨어진 다음에 공작가로 편지라도 보내는 게 좋겠다. 에르나는 속으로 다짐하며 걸음을 바삐 옮겼다.

너무 오랜만에 많이 움직여서인지 다리가 뻐근했다. 에르나는 한참 걷다가,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에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그녀는 적당한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멍하니 바람을 맞으며 있던 그녀가 툭, 말을 내뱉었다.

“내가 뭐가 좋다고.”

그 말을 하고 나니 괜히 눈이 뜨거워졌다. 에르나는 일부러 힘껏 눈을 손등으로 박박 비볐다.

“바보 같은 디트리히.”

그 어린 시절, 조금 곁을 주었을 뿐이었다. 자신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소년이 귀여워서, 에르나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가 웃겨서.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는지도 몰랐다.

입을 맞추자마자 얼굴을 붉혔던 어린 디트리히를 놀렸지만, 어렸던 에르나도 볼이 붉어졌었다. 그녀가 걸어준 개목걸이에 당황하기는커녕 행복해하는 그를 보며 에르나의 가슴이 간질간질했었다.

그런 어린 시절의 짧았던 기억 때문에 에르나를 잊지 못해서, 심지어 그녀를 찾아와서는 또다시 무릎을 꿇고, 개가 되겠다 자청하고.

“바보다, 진짜.”

“바보여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에르나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청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디트리히가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 에르나는 자신이 지금 위장한 모습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디트리히,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주춤 물러나는 에르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선 디트리히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에르나는 회색으로 바꿔놓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다시 붉게 변하는 것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르는 척이라도 할걸.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디트리히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모습이어도 알아볼 수 있어요.”

“잠깐, 디트리히. 좀 놔봐…….”

“그럼 또 도망갈 거잖아요. 절대 안 놓을 겁니다.”

순식간에 남자의 커다란 팔 안에 단단히 갇혔다. 에르나는 숨이 막히도록 자신을 끌어안는 디트리히의 등을 주먹으로 몇 번 때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르나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는 심호흡을 하며 신음할 뿐이었다.

“디트리히, 디트, 리히! 놓고, 얘기 좀 해. 응?”

“무슨 얘기를 할까요.”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둘 관계를 폭로해서 내 얼굴을 먹칠을 하겠다고 당신을 협박한, 그 인간 얘기부터 할까요?”

그 말에 에르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가 얌전해진 것을 느낀 디트리히는 낮게 웃으면서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

“아니면, 그런 일이 있는데 제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 짊어지고 도망쳐 버린, 누님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얘기할까요?”

“디트리히, 그게, 내가…….”

“그렇게 제가 믿음직스럽지 않았습니까? 상의 한 번 할 수는 있는 거잖아요.”

“…내가 무슨 염치로. 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나만 아니었어도, 네가 그런 추문에 휘말릴 일이 있었겠어?”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는 듯, 디트리히는 고개를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휘둥그레져서 끔뻑대는 눈이 조금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기는커녕, 에르나는 더욱 울상이 되었다.

“넌 나랑 얽혀서 좋을 게 없어. 9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잖아.”

“무슨 말입니까 그게. 반대라면 반대지요.”

디트리히는 자잘하게 그녀의 뺨에 연달아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제가 누님에게 얽혀서, 누님이 고생하는 거죠. 하지만 누님, 어쩔 수 없습니다. 저 같은 놈의 주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탓이에요. 그리고 그거 아세요?”

그의 입술이 에르나의 것으로 찾아들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깊게 맞붙었다. 부드럽지만 집요하게 에르나의 혀를 끌어당기고 입천장을 쓰다듬는 디트리히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떠올랐다.

쪽, 하는 가볍고 귀여운 소리와 함께 둘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그녀의 뺨을 혀로 가볍게 핥으며, 디트리히가 더 낮고 음험한 목소리로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했다.

“개에게는 지켜야 할 명예 따위가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개에게는 지켜야 할 주인님은 있죠. 저는 충견이라서, 제 주인님이 절 버리고 가도… 끝까지 쫓아갈 거거든요.”

그러니까 절 두고 어디로 사라질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디트리히의 목소리는 정말로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했다. 그는 자신을 또 버리고 사라지려고 했던 주인님의 목덜미를 조금 힘껏 깨물었다. 원망과 반가움을 담아서. 아얏, 하고 에르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자신이 남긴 잇자국이 계속해서 남아 있길 바라면서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깨물기만 했다.

여전히 조금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에르나의 이마에 입을 맞춘 디트리히가 환하게 웃었다.

“돌아갈까요, 이제?”

“그럼, 너를 협박한 사람은 찾은 거야?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누님을 협박한 거죠. 그리고 네, 찾았어요.”

“누군데?”

“그 새끼가 누군지 궁금하세요?”

그 순간 에르나는 그의 웃음이 아주, 아주 사나운 맹견처럼 보였다. 그녀는 금방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에르나가 그자에 대해서 알지 않길 바라는 거다. 그자가 누구든, 무슨 목적이었든, 어떻게 되었든 그녀가 관심 갖는 게 싫은 거다.

에르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궁금해.”

“그래요,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 새끼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빨리 같이 돌아가요.”

그러면서 디트리히가 그녀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무언가 딱딱한 것이 에르나의 허벅지와 배에 맞닿아왔다. 에르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를 쫓아온 남자의 얼굴을 경악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디트리히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칭얼거렸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망가 버린 주인님을 다시 찾은 희열 때문인걸요.”

“…여기 길 한복판인 거 알고는 있어?”

“아무도 안 다니는 숲길이지요.”

“아무 데서나 발정 나고… 정말이지, 이렇게 음란한 개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주인님.”

디트리히는 에르나의 손을 가져다가 제 페니스 위에 얹고는 힘주어 눌렀다. 당장이라도 사정해 버릴 것만 같은 것을 꾹 참으며 그는 제 주인에게 졸라댔다.

“빨리, 돌아가서… 이 음탕한 개를 혼내주세요. 다시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해야, 착한 개가 되는지…….”

이미 볼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아랫도리를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디트리히를 빤히 바라보던 에르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의 두 손이, 디트리히의 옷깃을 붙잡아서 끌어당겼다. 다시 한번 겹쳐진 입술에 디트리히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감겼다.

주인님이 먼저 해주는 키스만큼이나 그를 흥분시키는 것은 없었다. 짙은 색이라 티가 나지는 않겠지만, 이미 앞섶에는 동그랗게 얼룩이 져있을 게 분명했다.

디트리히의 애원에 에르나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발동된 마법이 단숨에 두 사람의 신형을 조용한 숲길에서 삼켜버렸다.

* * *

커다란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서류를 살피는 디트리히의 미간에는 아주 얕은 고랑이 패어있었다. 그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지금 그가 앞에 둔 것은 중요하면서도 또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고, 또 그의 기분을 한없이 나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겁게 했다.

에르나는 끝끝내 몰랐지만, 그녀를 협박한 쿠르트는 클라인가의 힘으로 착실히 짓밟아 두었다. 그가 아카데미 학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제법 자연스럽게 보였고, 그 뒤로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거기에 클라인가의 입김이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디트리히는 그가 어디에서도 발붙이고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누구도 그를 써주지 않을 것이고, 어디를 가도 그에 대한 더러운 소문이 떠돌 것이었다. 아마도 쿠르트는 영원히 떠도는 신세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그때는 그때 가서 또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곱게 내치고 싶지 않았다. 공작가의 영지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여러 장소가 있었고, 그 중에는 사람답게 살 수 없는 비밀 감옥도 있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그의 주인님에게 눈을 둔 죄를 물어 사람 구실 못하게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더 오래 고통받게 하는 쪽을 택했다.

쿠르트에 대한 보고서를 넘기고, 다른 서류로 옮겨가는 때였다.

똑똑.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디트리히는 누구인지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부터 했다.

“들어와.”

그의 답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곧 닫혔다.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젊은 공작의 앞으로 다가온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에게 뭔가 보고하러 온 사람이라 생각했던 디트리히는 미간을 더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책상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얼굴에는 꽃이 피는 듯한 웃음이 걸렸다.

“주인님!”

“뭐야, 내 얼굴 보자마자 주인님부터 찾아.”

일견 퉁명스럽게 들렸지만, 에르나의 얼굴에도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책상을 돌아 디트리히의 앞까지 가는 동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해 보이던 그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디트리히가 제 주인을 되찾은 이후, 그는 절대로 그녀를 자기 곁에서 떼어놓지 않겠다며 공작저에서 머무르게 했다. 이미 그녀가 오는 게 예전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는지,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에르나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에르나도 공작저에서 지내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법이 필요하다는 곳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종종 공작저를 떠나 있곤 했다.

이번에도 에르나는 의뢰받은 일이 있어서 이틀 동안 디트리히와 떨어져 지낸 터였다. 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칭얼대는 디트리히를 밤새 달래고―물론 그들 사이의 ‘달램’은 전혀 다른 형태였지만― 가능한 한 빨리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디트리히는 그녀를 보자마자 어리광이었다.

“하아, 주인님… 주인님이 시키신 대로, 저 잘 참고 있었어요. 손도 안 대고, 흐윽, 참느라고, 엄청 힘들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아까 굉장히 멀쩡해 보이던데.”

“그건, 주인님이 티 내지 말고, 하아, 흐, 있으라고…….”

“그래, 잘했어. 어디 볼까?”

그사이에 디트리히의 이마에는 옅게 땀이 배어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열심히 참은 모양이었다. 에르나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여 목 끝까지 채워진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일견 금욕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단정한 슈트 안은 전혀 딴판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에르나가 자신의 사랑하는 개를 위해 새로이 맞춘 검은 가죽 목걸이에는 두 개의 가느다란 체인이 매달려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검붉게 달아오른 그의 유두에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동그란 고리가 단단하게 집고 있는 유두는 그냥 보기에도 자극을 받을 대로 받은 꼴이었다. 에르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손끝으로 빳빳하게 일어선 그 동그란 살덩어리를 긁어내렸다.

“하으으……!”

“이래서야, 누가 시중도 못 들었겠네.”

“이건, 주인님, 한테만, 보여드릴 수 있어요.”

“그래. 잘했어.”

그녀는 부러 세게 그의 양 젖꼭지를 손톱으로 꼬집었다. 디트리히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젖혔다. 꽉 다물린 입에서는 미처 다 막지 못한 신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붉게 타오르는 듯한 목덜미에 시퍼런 핏줄이 바짝 일어섰다.

커다란 남자의 몸이 그녀의 손 아래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에르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려고 입술을 살짝 윗니로 누르며 그의 다리 사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제 바지도 벗어.”

대낮의 집무실인데도, 디트리히는 거침이 없었다. 조급한 손길로 풀어낸 바지가 금세 무릎 아래로 내려갔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채로 내놓은 성기에는 동그란 고리 여럿이 채워진 채였다. 그녀가 공작저를 잠시 떠나 있으면서 채워준 정조대였다.

아마도 성욕을 느껴서 발기했다면 제법 아팠을 것이다. 그의 물건은 정조대의 크기만큼 부풀어 있는 채였다. 에르나는 정조대를 찬 채로도 꿈틀거리는 디트리히의 페니스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렇게나 세워대서, 이틀 동안 어떻게 참았어?”

“으읏, 주인님만 떠올리, 면, 아아, 자꾸 서서… 흐으! 아파서, 힘들었는데… 그래도, 참았는데요…….”

“이 꼴로 계속 지낸 거야?”

“그건, 아닌데, 으응, 주인님을 보니까, 자지가 바로, 하악!”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르나의 무릎이 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꽉 조여서 발기하는 성기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사정없이 짓눌리자 디트리히는 이를 악 물고 벌벌 떨었다. 의자 팔걸이를 붙든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피부가 희게 짓물렀다.

무릎으로 세워 배꼽 쪽으로 붙인 페니스의 끄트머리를 에르나의 손가락이 살랑살랑 지나가며 긁어댔다. 아랫도리가 타는 듯한 자극에 디트리히가 고개를 저으면서 애원했다.

“제발, 풀어주세요, 주인님. 네? 저, 저 잘 참았, 참았어요. 자지가 터질, 거 같아……!”

“그러게, 잘 참은 거 같네. 예쁘게도 말이야.”

풀어줄게, 라고 말하며 에르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이 얼마나 느린지, 디트리히에게는 마치 살갗 위로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가장 먼저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유두를 꽉 물고 있는 고리부터 빼냈다. 느릿한 움직임에 비해 쇠사슬을 당기는 손짓은 거칠기만 했다.

“으윽!”

양쪽 가슴에 불이 붙는 듯했다. 이틀을 짓눌린 채로 자극받은 젖꼭지가 쓰라려서 어디에든 문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급한 건 아랫도리 쪽이었다. 이미 에르나를 본 순간 쾌감이 아픔을 넘어선 뒤였다. 그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에르나의 무릎과 허벅지에 하초를 갖다 붙이고는 문질러댔다.

“주인님, 하아, 주인님…….”

그의 입에서는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주인님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물과 땀에 젖은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에서는 욕정이 뚝뚝 흘러내렸다. 에르나는 그런 그가 귀여워서 뒷머리를 붙들고는 끌어당겨 키스해 주었다. 끙끙대는 소리가 좋아서 더 세게, 페니스를 누르기까지 하자, 디트리히는 아예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놓자, 디트리히가 기운 없이 의자에 기대었다. 에르나의 두 손이 그의 페니스를 조이고 있는 고리들을 천천히 벌렸다. 그녀의 손이 아니면 절대로 벌어지지 않게 만들어진 마법도구였다. 서서히 틈이 벌어지면서 아래에 가해지던 압박이 느슨해진 순간, 디트리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아, 아… 아아아!”

그가 두 손으로 에르나의 팔을 급히 붙들었다. 하복부에 힘이 잔뜩 몰리는가 싶더니, 이틀 내내 내보내지 못했던 욕망의 정수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푸슛, 푸슛 하고 쏘아져 나온 정액이 디트리히의 아랫도리는 물론, 에르나의 다리도 더럽혔다.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디트리히는 헐떡이면서 허리를 움찔댔다. 몽롱하게 풀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던 에르나는 나지막이 착하다, 잘했어, 라고 속삭이며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디트리히는 전력으로 달리기라도 한 양 헐떡이면서 에르나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녀는 이 순간, 디트리히에게는 여신이며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그를 진창에 빠트렸다가, 다시 구해주는, 그만의 사랑스러운 주인님.

헐떡이는 그를 보던 에르나는 천천히 몸을 물려서 디트리히의 집무실 책상 위로 올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치마를 천천히 걷어 올리며 다리를 벌렸다. 주인님이 원하는 바를 알아차린 디트리히가 곧장 그녀의 다리 사이에 무릎 꿇고 앉았다. 질책하는 듯 말하는 에르나의 목소리에도 뜨거운 열기가 흘러 넘쳤다.

“발정 난 너 때문에 나도 잔뜩 젖어버렸잖아.”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제가 깨끗하게 해드릴게요.”

“천천히, 하윽…….”

곧장 젖어버린 속옷으로 달려든 디트리히 때문에 에르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녀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아 올린 디트리히는 게걸스럽게 에르나의 다리 사이에 코를 박고 핥아댔다. 이미 푹 젖은 속옷을 모조리 빨아먹을 듯 들러붙었다가, 성에 차지 않는지 그녀의 속옷을 벗기려 했다. 에르나가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 수월히 벗겨내도록 했다.

“아으응!”

곧장 질 안쪽으로 파고든 혀에 에르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의 손이 이미 발딱 서버린 클리토리스를 굴리며 짓누르자, 안에서 왈칵하고 애액이 터져 나왔다. 갈증에 허덕이던 개는 주인님이 주신 그 소중한 애액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빨아먹었다. 츄읍, 츄읍, 난잡한 물소리가 집무실을 메웠다. 그녀의 질구는 이런 자극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자꾸만 움찔거렸다.

“그만 하고, 빨리.”

에르나의 목소리가 급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서 디트리히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제 주인이 원하는 바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디트리히는 이미 빳빳하게 선 제 살 몽둥이를 손으로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질 입구를 슬슬 문질러대던 귀두가 곧장 안으로 파고들자, 에르나가 소리 없는 교성을 내뱉으며 허리를 휘었다.

팍, 팍, 안으로 제 좆을 처넣으며 디트리히가 속삭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안이 제 자지를 계속, 계속 끌어당겨요.”

“아앙, 아! 아흐흑, 더어, 좀 더, 아!”

“이렇게, 자꾸만 조이시면, 끊어질지도 모릅, 니다.”

“흐아앙, 아, 디이, 디트리히, 아, 좋아!”

“뜨거워서, 저도 기분 좋아요…….”

점점 그의 허리 놀림이 거칠어졌다. 격렬한 섹스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며 잉크병, 펜과 문진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지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점점 앞뒤로 쑤셔 박는 몸짓이 빨라지고 강렬해질 때마다 에르나는 눈앞에 흰 별이 팡팡 튀는 것을 보았다. 배 속 가장 깊은 곳까지 짓쳐들어와 헤집어대는 디트리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제게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충실한 개를 바라보았다. 음란한 빛으로 물든 새파란 눈동자 안에 오로지 에르나 한 사람만이 담겨 있었다. 그 눈가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에르나는 헐떡이는 숨 사이로 그가 가장 좋아할 말을 내뱉었다.

“사랑, 해. 내 개. 내 디트리히.”

“…제길, 이건, 반칙입니다.”

“아학! 아! 으하앙!”

디트리히는 두 팔로 에르나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이 작고 뜨거운 체온을, 앞으로 죽어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제 곁에 묶어두고,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게 가둬둔 채 영원히 사랑하리라. 그의 성기가 더욱 멋대로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더욱 깊이, 더 깊이 박아서, 아예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서, 디트리히는 에르나의 안으로 한껏 몸을 묻었다.

경련하듯 펄떡대는 내벽을 느끼며 디트리히는 숨을 멈추었다. 사정하는 페니스를 질 내벽이 붙잡고 쭉쭉 빨아들였다. 동시에 에르나도 절정에 다다랐다. 그녀의 발끝이 발발 떨리며 곱아들었다. 끝에 다다랐는데도 멈추지 않는 디트리히 때문에, 두 사람의 결합부에서는 애액과 정액이 난잡하게 뒤섞인 것이 부글부글 흘러내렸다.

한껏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디트리히는 연신 에르나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황홀한 기색이 가득한 남자를 보며 그녀는 픽 웃었다. 그러면서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지?”

“그럴 리가요.”

에르나의 도발에 디트리히의 얼굴에 색정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얼마든지.”

누님의 개는 말을 잘 듣거든요. 속삭인 디트리히가 다시금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사이에 다시 점점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페니스의 감각에, 에르나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음란한 개와 주인의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내가 누나의 개예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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