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6)

3.

마법사를 희망하는 학생들의 수업은 주로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교실이라든가 약제를 다루기 위한 실험실, 그도 아니라면 조그마한 실내 연습장 정도를 사용했다. 몸을 단련할 필요가 없으니 밖에 나가서 수업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3년 전 에르나가 이 아카데미에 교수로 들어온 이후로 마법사들을 위한 수업에 야외에서의 활동이 추가되었다. 처음에는 다들 제법 불만이 많았지만, 그녀가 왜 그런 수업을 고집하는지를 듣고 나서는 수긍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 길었던 에프네피아 전쟁에서 최전선에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끝끝내 살아 돌아온 극소수의 마법사 중 하나였다.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수업이라 하는데, 어린 마법사 지망생들이 환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법 사용자는 언제나 후방에 배치된다고 배웠겠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전방과 후방의 경계가 흐려지는 일이 반드시 생깁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코앞으로 달려드는 검을 보고 당황하여 얼어붙거나 무너진다면, 여러분의 목숨은 물론이고 아군도 큰 피해를 입게 돼요.”

연무장에 줄을 맞춰 앉은 어린 학생들에게 에르나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수업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학생들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실상 마법사 지망 학생들도 어리고 기운 넘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바깥 활동은 그들의 의욕을 잔뜩 북돋고 흥분케 했다. 거기에다가 에르나 랑케가 직접 전투에서처럼 시연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입학할 때부터 들었던 터라 모두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잠시 말을 멈춘 에르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맑고 티 없이 즐거움만 가득한 얼굴들이 보기 좋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대규모의 전쟁이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인접한 적국과의 국지전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아이들 중 일부는 운이 없으면 그런 전쟁터에 나가게 될 수도 있었다.

마치 스무 살의 에르나처럼 말이다.

“마법사는 무기를 다루는 자들에게서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법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얼마나 무섭게 공격당할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해요.”

에르나는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반짝이는 얼굴에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셔츠와 가벼운 조끼, 움직이기 편한 바지 차림을 한 디트리히가 서있었다.

선생님의 시선이 이미 명성이 자자한 공작 각하를 향하자 학생들의 눈도 일제히 그를 향했다. 디트리히가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하자 곳곳에서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붉힌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평생 공작 각하의 얼굴 같은 건 먼발치에서도 못 볼 수 있는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왕의 오른팔이며 가장 유명한 검사인 그는 많은 이들의 우상이었다. 물론 그 잘생기다 못해 눈이 멀어버릴 정도인 얼굴도 유명하지만 말이다.

그의 파란 눈이 반짝이며 에르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맑은 페리도트와 같은 그녀의 눈동자에 빨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맹목적이었다. 에르나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에르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오늘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검사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보여줄 거예요. 클라인 교수님은 검만이 아니라 창이나 궁에도 능하시니, 가능하다면 그것들도 시연할 겁니다. 오늘 잘 보고, 다음 시간에는 연습을 할 거예요. 개인적으로 많이 연습하길 바랍니다. 이 수업도 시험 본다는 사실, 잘 알고 있죠?”

시험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학생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르나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고는 손을 들어 흔들었다.

“다들 뒤로 좀 물러나요.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방어 마법을 걸어두겠습니다.”

아이들이 물러나고 그들의 사방에 우윳빛의 반원이 생겼다가 곧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학생의 안전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마법이었다.

연무장 한가운데에 에르나와 디트리히가 마주 섰다.

그녀는 디트리히의 등 뒤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오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에게 검을 배우는 학생들인 듯했다. 그녀가 무엇을 봤는지 알았다는 듯, 디트리히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랑케 교수님과 맞붙는다고 하니 다들 궁금해서 가만히 있질 못하더군요.”

“괜찮아요. 좀 멀리에서 보라고 하셨지요?”

“네, 그랬습니다.”

“좋아요.”

에르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하나하나 잘 보세요. 되도록 천천히 움직이려 할 테지만, 아무래도 조금 집중하다 보면 과격해지거나 움직임이 빨라질 수도 있어요.”

학생들이 입을 모아 네, 하고 외치는 소리에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천성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아이들이 예쁘고 귀엽게만 느껴졌다.

에르나는 깊게 심호흡하고 디트리히에게 부탁했다.

“단순한 상하 베기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공격 범위를 넓혀주세요.”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디트리히가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실력의 검사였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쓰러진 자들뿐이라는 말이 무성했으니까.

하지만 에르나는 그저 비죽 웃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철컥, 하고 검집과 검이 분리되는 소리가 나자 에르나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스르릉, 하고 오금을 저리게 하는 쇠의 날카로운 울음을 듣자 그녀는 팔뚝의 털이 오소소 솟는 것을 느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이건 그저 연습일 뿐이었지만 검이 내는 소리는 언제나 에르나를 다시 전장의 한복판에 내던지곤 했다.

그녀는 제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검을 똑바로 바라보며 첫 번째 마법을 펼쳤다.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에르나도 디트리히도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수업을 마쳤다. 에르나는 곧장 학생들에게로 돌아갔고, 온갖 궁금함이 폭발한 그들에게 둘러싸였다.

디트리히는 제 학생들을 돌려보내고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에르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질문에 답하는 에르나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주인님이 되는 시간과는 다른 의미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디트리히는 그저 기쁘고, 감사할 뿐이었다.

그가 막 땀을 닦아내려 손수건을 꺼내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불쑥 그의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손의 주인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학장인 쿠르트가 서있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디트리히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전 랑케 교수가 이 수업을 할 때 항상 지켜보러 나온답니다.”

쿠르트의 시선은 금세 디트리히에게서 에르나에게로 옮겨갔다. 부드러운 눈매를 한 학장의 갈색 눈동자는 에르나의 옆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디트리히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자신의 옆에서 공작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쿠르트는 미묘한 열기에 휩싸여 입을 열었다.

“참 아름다운 사람 아닙니까, 에르나 랑케는.”

“…….”

“3년 전에 이곳으로 데려왔을 때만 해도 제법 날이 서있었는데, 이제는 많이 편해진 듯합니다.”

“학장께서, 이곳으로.”

“네, 전장에서 랑케 교수가 절 구해주었지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목숨인데. 그래서 전쟁이 다 끝난 뒤에, 이곳으로 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는 전쟁과 거리가 멀고 안온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요.”

그때 그냥 죽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디트리히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근심 없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전장에서의 모습이 보이는 이 수업은 자꾸만 저를 불러내곤 하네요. 그곳에서는 정말이지 잘 벼린 검 같았는데.”

“랑케 교수에게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뭐… 그런 셈이죠.”

수업이 끝났는지 에르나가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녀에게서 학생들이 떠나가자 에르나가 비로소 디트리히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편안하게 풀어진 채였던 그녀의 얼굴이 금세 바짝 굳었다. 디트리히는 그것이 자신 때문이 아닌, 쿠르트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누님은 이 쥐새끼를 싫어하는 모양인데.’

불편해하는 기색은 금세 사라졌다. 에르나는 거짓으로 덤덤한 얼굴을 꾸며내고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학장님, 이번에도 또 나오셨군요. 그리고 클라인 교수님, 오늘 협조 감사합니다.”

“아닙…….”

“오, 무슨 그런 말을. 랑케 교수의 수업을 보는 게 내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알면서 매번 그러는군요.”

디트리히의 말허리를 베고 들어온 쿠르트는 한술 더 떠 앞으로 불쑥 나섰다. 그는 마치 귀부인을 에스코트하듯 에르나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의 손이 에르나의 허리께로 다가가는 것을 본 디트리히의 얼굴에 금세 사나운 기운이 맹렬하게 어렸다.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에르나는 잽싸게 몸을 틀어 몇 발짝 옆으로 빠졌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이.

그걸 보자 디트리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감히, 더러운 손을 누구에게…….

그의 손이 검 근처에서 어른거렸다.

그때 마치 그럴 것을 알았다는 듯 에르나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절대로 허튼짓하지 말라고 단호히 속삭였다.

그는 턱에 힘을 바짝 주고는 검에서 손을 뗐다. 에르나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해서 얌전히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 이후로 수업이 없죠? 잠시 내 방에 가서 차라도 한잔…….”

“죄송하지만 학장님, 랑케 교수님은 저와 선약이 있으셔서요.”

두꺼운 나무 몽둥이 같은 디트리히의 팔이 두 남녀 사이로 끼어들었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그는 에르나와 쿠르트 사이로 끼어들었다. 순식간에 방해를 받고 말았지만, 쿠르트는 그의 무례를 따질 새가 없었다. 어느새 에르나의 한 손이 소중하게 디트리히의 손 안에 쥐어진 채였다.

쿠르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디트리히를 올려다보았다. 멋대로 끼어든 이 남자가 매우 불쾌했지만 쿠르트로서는 그를 밀어낼 힘 따위는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그랬지만, 디트리히는 감히 쿠르트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대였다.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 그랬습니까? 이런, 아쉽게 되었군요.”

금세 한 발짝 물러나는 태도를 취했지만 쿠르트는 제법 집요하게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혹시 이 훤칠한 공작 놈이 제 귀여운 마법사에게 관심이라도 보이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작의 태도는 아주 정중하게 숙녀를 모시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는 꼭 시간을 내줘요, 랑케 교수.”

“…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지요.”

연무장에 쿠르트를 세워둔 채로 디트리히와 에르나는 걸음을 옮겼다.

에르나는 몇 걸음 걷다가 디트리히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쿠르트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였다. 디트리히가 한껏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저 인간이 언제부터 누님에게 치근덕거렸습니까?”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교수님.”

“학장 놈의 눈이 누님을 그저 흠모하는 게 아니던데요.”

“신경 쓰지 마시라고…….”

“감히, 그런 더러운 시선으로 누님을…….”

곧장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에르나는 손끝으로 미간을 문지르면서 디트리히를 타일렀다.

“학장님이 제게 호감을 가지신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적당히 거절하며 잘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일이에요. 저와 아무 상관 없는 디트리히 님이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제가 왜 누님과 상관이 없습니까?”

두 사람이 건물에 들어서자 목소리가 울렸다. 에르나는 그래서 더욱 목소리를 조그맣게 했다.

“그럼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는 단기간 동료일 뿐이에요.”

“그래도 전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럼 뭘 어쩌시게요?”

계단을 오르는 에르나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그것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대화가 멈추었다. 에르나의 연구실은 건물 3층에 있었고, 아직도 올라가야 하는 계단은 한참 남아있었다.

세 번째 계단참에 올라서서 에르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선 넘지 마세요.”

“그건, 주인님으로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

“그게 아니시라면, 누님이 저를 막으실 순 없을 겁니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까지 모두 올라 3층에 도착해서, 에르나는 걸음을 멈추고 디트리히를 내려다보았다. 계단 두 개를 덜 올라온 그의 시선이 미묘하게 아래에 있었지만, 워낙 키가 큰 디트리히에게는 그 정도 차이는 별것도 아닌 듯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에르나의 손을 아주 가볍게 붙잡았다.

“제가 당신과 쿠르트 메이어 사이에 끼어드는 게 싫으시다면, 명령하십시오.”

“…그분이 나를 불편하게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 아카데미에 발붙이게 도와준 사람이야.”

“하지만 학장이 누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죠.”

“지금껏 문제없이 잘 넘겨왔어.”

“이제는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러리라고 디트리히는 생각하는 듯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내가 있으니까요. 분명 학장이 불쾌하게 느끼겠죠. 아니, 이미 그랬을 겁니다. 아까 쳐다보는 눈 보셨잖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걸까.

디트리히가 환하게 웃었다.

“제 모든 건 전부, 누님의 것이에요. 제가 누님의 개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 전부요. 그러니까, 절 이용하세요. 디트리히 반 클라인도, 클라인가도 전부 당신 손에 있는 거예요.”

제가 당신의 방패이고, 칼이 될 테니까요.

그의 입술이 뱀처럼 속삭였다.

거절하기 위해 에르나는 입술을 뗐다. 하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멋대로 자신의 삶에 끼어들려고 하는 걸 거부해야 옳았다. 디트리히는 그럴 만한 권리가 없었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도 혀가 움직이질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제안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쿠르트의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다만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던 데다, 직위상 윗사람이니 적당히 참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자를 막아주겠다고 하는 디트리히의 말에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디트리히가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그의 눈은 싸늘한 불꽃에 휩싸인 채 빛나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절대 쿠르트가 에르나에게 가까이 오는 걸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

결국 에르나는 끝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에 디트리히가 금세 따라붙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가 어리광을 부렸다.

“오늘 수고했으니, 차 한잔 정도는 주실 수 있겠죠?”

“클라인 교수로서 오신다면… 얼마든지요.”

“아, 이런. 꼭 그래야만 합니까?”

귓가에 바짝 다가온 디트리히의 입술이 속살거렸다.

“당신의 개를 귀여워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약속할 수 없으면 그냥 가세요.”

“알겠습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디트리히는 에르나의 바로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커다란 맹수가 꼬리를 느긋하게 흔들며 함께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들으란 듯 한숨을 푹 쉬었지만 디트리히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 * *

그 이후로 쿠르트는 쉬이 에르나의 근처에 오지 못했다. 디트리히는 수업을 빌미로 하여 에르나에게 부쩍 친한 척을 했고, 그의 존재는 마치 부적처럼 쿠르트를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았다.

종종 쿠르트와 마주칠 때 눈빛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에르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는 마치 배신감이라도 느낀 사람처럼 굴었지만, 에르나는 그와 어떤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에르나의 옆에 디트리히가 있는 건 제법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그사이에 친해진 거냐며 몇몇 교수는 그녀에게 ‘공작 각하에게 다리 좀 놓아달라’며 부탁했다. 그러나 에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런 부탁을 드릴 정도로 클라인 교수님과 가깝지가 않아서요.”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디트리히에게 제발 거리를 좀 두자고 말하면 그는 언제나 보이던 상냥한 웃음을 거두곤 했다.

“저는 이 정도도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누님.”

그녀를 달래고 싶을 때 디트리히는 매번 비슷한 수를 썼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는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다. 선량해 보이는 동그란 눈이 살짝 처지고 눈썹도 기운을 잃어 내려온다. 언제나 호감을 자아내는 맑은 미소 대신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게 기울인 채 그는 꼭, 그녀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에르나 누님, 저는 정말 노력하고 있는걸요.”

대체 뭘 어떻게 노력한다는 건지 에르나는 모를 노릇이지만, 그런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어쩐지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마치 열몇 살 시절 디트리히와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물론 그때에 비하면 디트리히는 그녀보다 훌쩍 키도 크고, 무서우리만치 어깨도 등도 넓어졌고, 손 한쪽으로 그녀의 얼굴 전체를 다 덮을 정도였지만.

그래서 울컥 화를 내려다가도 결국 한숨을 폭 쉬고 말았다.

“적당히 하세요. 이러다가 저랑 너무 가까워져서, 불측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음…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정신 차리세요. 두 발, 떨어져서 걸으시고요.”

그녀가 일부러 손을 뻗어 거리를 벌리면, 디트리히는 일부러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곤 했다.

슬쩍 고개를 든 그의 장난기 어린 눈과 마주치고 나면, 에르나는 자신이 이 남자에게 너무 약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다.

과하다고 생각하는 에르나와 달리 디트리히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인님에게 관심이 있었다. 감히 디트리히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불측한 눈으로 그녀를 훑는 놈들을 발견할 때면, 아니면 그녀를 두고 은근히 더러운 이야기를 흘리는 놈들을 지나칠 때면…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지만 모조리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몰래 사람을 시켜 죽여버리고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9년 전에 누님을 놓쳐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때 자신이 조금 더 눈이 밝았더라면, 좀 더 힘이 있고 용기가 있었더라면 절대로 에르나를 공작가에서 그렇게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서 주인님을 앗아간 이들을 디트리히는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시 그녀를 제 시야에 담은 지금부터라도 바짝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디트리히는 절대로 에르나에게 접근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점점 더 디트리히는 자연스럽게, 에르나의 곁에 스며들었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조금씩 시간을 늘려가며.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학생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여름이 되면 광범위 저격 마법을 시연하러 에르나는 학생들을 이끌고 아카데미에서 한 주 동안 떠나 있곤 했다. 디트리히는 그 사실을 알고 굉장히 슬퍼했다.

늦은 밤, 숙소로 조용히 찾아온 그를 앉혀둔 채 에르나는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가져갈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녀는 리스트를 만들어두고 확인하는 편이었다.

얇아지긴 했지만 긴팔 셔츠 차림인 에르나를 뒤에서 바라보던 디트리히가 울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같이 가면 안 되겠지요? 하이네 분지까지 가는 길 동안만이라도요.”

“교수님은 교수님의 수업을 하셔야죠.”

한껏 불쌍한 척을 해보아도 에르나는 단호했다. 어차피 안 되는 일을 투정 부리고 있다는 걸 디트리히도 알고 있었다. 그는 울상이었던 얼굴을 다시 펴고는 손에 턱을 괸 채로 에르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주인님은 이렇게 예쁜 개를 앞에 두고도 회가 동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입에서 “네 주인이 되겠다”라고 이야기가 나온 뒤로, 에르나는 디트리히를 한 번도 제대로 예뻐해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았다.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의 수업이 진행되면서 에르나는 학생들에게 온 정신을 쏟았다. 학생들을 질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착한 개였기에―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주인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조르지 않고 기다리겠노라고 마음먹긴 했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달이나 지났는데…….’

디트리히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에르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저 눈으로 어루만졌을 뿐인데 금세 다리 사이가 뻣뻣해졌다. 열기가 서서히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후으, 하고 작게 더운 숨을 내쉬었다. 욕망에 뒤덮인 그의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의 뒤로 다가가서 꼭 끌어안고 싶었다. 사랑스러운 주인님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었다. 주인님, 당신의 이 음란한 개가 발정 났어요. 제발, 어떻게든 해주세요. 멋대로 세웠으니 벌해주세요…….

디트리히는 계속 참아왔다. 기다리고, 견디는 것. 그건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9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며칠, 몇 달을 더 못 참을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렇게나 얌전히 지냈는데, 곧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지내야 하는데. 조금 미끼를 던지는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를 꾀어내겠다고 마음을 먹자 디트리히의 얼굴에 나른한 미소가 퍼졌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위장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떠나시기 전에…….”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에르나는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 손에 턱을 괸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디트리히의 시선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

“주인님이 그리워서 울지 않게, 예뻐해 주고 가실 거죠?”

아, 그걸 바라는 거였나.

에르나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디트리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새빨간 입술은 아주 살짝 벌어진 채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혀가 천천히 나와서는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저렇게 욕망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바라보면 곤란한데.’

팔짱을 낀 에르나의 손에서는 땀이 옅게 배어나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무덤덤했다. 디트리히에게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바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주인은 개를 두려워하면 안 되었다. 특히 저 디트리히라는 개는 더욱 그랬다. 지금은 순한 척하며 제 발치에 무릎 꿇고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따를 것처럼 굴고 있지만, 그의 속내는 다르리라는 걸 에르나는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디트리히는 애초에 개가 아니라 맹수였다. 언제든 원하는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을 준비가 된 늑대였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찾아 헤맨 에르나라는 먹이 앞에서 얼마나 참고 또 참고 있는지 그녀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런 디트리히의 이빨에 에르나 스스로가 목을 내어주고 싶은 기분이 자꾸만 든다는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닥칠지 모르는 그 순간을 상상하면, 에르나는 정말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흥분인지는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에르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디트리히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디트리히의 금발을 쓰다듬자 대번에 그의 눈에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그는 눈을 감고 주인님의 손길을 느꼈다. 고작 손이 닿았을 뿐인데 페니스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아, 하고 뜨거운 숨이 흘러나온 것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디트리히의 뺨에 와 닿았다.

“어떻게 예뻐해 주길 원하는데?”

“매 순간… 주인님이 떠오르도록…….”

검을 오래 잡아 굳은살로 단단해진 손바닥이 에르나의 손등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에르나의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헐떡였다. 그는 이미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발정한 채였다. 달달 떨리던 남자의 손은 이내 주인님의 손을 소중히 감싸 쥐었다. 디트리히는 그녀의 손등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 주인님…….”

어쩐지 디트리히의 목소리에 눈물이 섞인 듯했다. 더는 얌전히 있을 수 없었는지, 디트리히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소파를 돌아 나와 에르나의 앞에 무릎 꿇었다.

욕정으로 붉어진 눈이 제 주인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에르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축이고 손을 아래로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디트리히의 목 근처에 가서 단추를 툭, 툭 풀었다.

단단하고 굵은 목에 두 사람을 이어주는 증표가 걸려있었다. 셔츠 옷깃으로 교묘하게 감추어둔 어두운색의 가죽 목걸이가 드러났다. 디트리히가 언제나 이것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에르나도 알고 있었다.

에르나의 연녹색 눈동자가 순간 깊어졌다. 그녀의 심장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약간의 불안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정염에 휩싸여 불타 녹아버렸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목걸이 안쪽으로 파고들어 당기자, 디트리히가 컥 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멈추었다.

서있는 에르나가 허리를 슬쩍 구부린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녀의 숨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에 디트리히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으읏, 윽…….”

“앉아도 서도 내가 생각나게 해주면 되는 거야?”

“헉, 네, 크윽!”

“그거 좋네.”

아무리 에르나가 자신을 피해도, 결국 이 순간이 오면 기꺼이 그녀의 개를 사랑해 줄 거라는 사실을 디트리히는 알고 있었다. 속삭이는 듯 낮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에르나의 욕망에 디트리히는 활짝 웃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선사할지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목걸이에서 손을 뗀 에르나가 빙긋 웃으며 그에게 명령했다.

“전부 벗어. 네 몸을 보고 싶어.”

“기꺼이요, 내 주인님.”

근육으로 탄탄하게 짜인 미끈한 몸을 내보이는 걸 디트리히는 주저하지 않았다. 셔츠도, 바지도, 속옷도 벗어 던진 그는 자랑스레 제 알몸을 에르나의 앞에 바쳤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의 다리 사이에 숨길 수 없는 거대한 성기가 우뚝 솟아 꺼덕댔다.

주인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것을 알아챈 디트리히의 얼굴에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 주인님이 제 좆을 쥐고 흔들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자마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의 귀두 끝에서 맑은 물방울이 조금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서 에르나는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개에게 못되게 구는 주인은 아니었지만, 개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이 더 우선하는 이였다. 그러니 당연히도, 당장이라도 정액을 쏟아내고 싶어 하는 디트리히의 페니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르나가 드디어 웃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린 호선에 디트리히는 황홀한 얼굴이 되었다.

“엎드려.”

주인의 미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디트리히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완전히 굴종하는 짐승의 자세가 된 그를 보며 에르나가 손바닥을 마주쳤다가 천천히 양쪽으로 벌렸다.

그녀의 손 사이에서 이미 디트리히와 만난 적이 있던 얇고 길쭉한 회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나는 막대 끝을 붙들고 가볍게 휘둘렀다. 공기를 찢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가벼운 흰 빛이 튀었다.

“조금 아플 거야. 하지만 괜찮지?”

어느새 완벽한 지배자의 얼굴을 한 에르나를 향해, 디트리히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에르나가 없는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디트리히는 에르나가 떠난 순간부터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없어지자마자 단둘이 있을 기회를 노리던 자들이 계속 디트리히의 주변에 날파리처럼 꼬여들었다. 그동안은 에르나라는 보는 눈이 있으니 괜한 눈치와 자존심에 못 하던 온갖 청탁이 난무했다.

“그건 아무래도 곤란하겠군요.”

난처한 얼굴로 좋게 거절하는 디트리히의 속내는 시꺼멓고 검게 뒤틀리는 중이었다. 클라인 공작으로서의 가면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매몰차게 구는 법 없는, 만인에게 호감을 사는 사람을 연기하는 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디트리히는 사실 뒤틀릴 대로 뒤틀린 인간이었다. 그 모든 겉포장들은 전부 에르나 한 사람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서, 이미 그녀가 반쯤 손아귀에 들어온 이상 언제 본성이 툭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오늘 거절당한 남자도 한껏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지만 말이다.

디트리히는 주제 파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클라인가의 부와 권력은 과연 수많은 학자들이 탐낼 만한 것이란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죄다 들러붙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제안서나 연구 계획 가운데 그가 선뜻 손을 내밀 만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굳이 이자들이 아니라도 클라인에게 그런 비슷한 제안을 해올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아…….”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짜증과 피로에 디트리히는 목덜미에 손을 얹고 목을 크게 돌렸다. 한숨이 크게 터져 나왔다.

“보고 싶어…….”

에르나. 혀끝으로 주인님의 이름을 굴려보자 대번에 배 속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돌아오려면 아직 며칠 더 있어야 했다.

디트리히는 손을 내려 자신의 팔뚝 위쪽을 붙들었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그의 팔뚝에는 에르나가 남겨준 붉은 자국들이 잔뜩 남아있었다. 상처를 누르자 곧장 기꺼운 쓰라림이 느껴졌다.

“으읏…….”

아픔이 쾌감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에르나가 그에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 디트리히에게는 기쁨이고 환희였다.

‘맞으면서도 이렇게 세우고…….’

‘너, 9년 전보다 훨씬 더 민감한 몸이 된 거 같아.’

‘한 대 맞을 때마다 네 좆이 꺼덕대면서 줄줄 흘려대는 거 알고 있어?’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디트리히는 턱에 힘을 잔뜩 주고 버텼다.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차갑던 에르나의 손가락이 붉은 선이 잔뜩 그어진 등줄기를 천천히 긁어내렸을 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사정해 버리고 말았더랬다. 그 뒤에는 당연히, ‘참으라’고 했던 주인님의 말을 따르지 못한 벌을 받고 말았다.

“하하, 하.”

눈물을 흘리는 그를 즐겁다는 듯 바라보던 에르나의 얼굴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디트리히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를 보고 기뻐하는 그녀라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제 주인님이 돌아오는 날을 헤아렸다. 나흘 정도 더 있으면 에르나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에게 보고 싶었다며 투정을 부리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왜 얌전히 기다려야 하지.’

디트리히는 에르나가 단 한 번도 ‘얌전히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녀로서는 당연히 그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나 가르치며 지낼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에르나가 간 곳은 아카데미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이상, 디트리히가 그녀를 찾아갈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말을 죽자 사자 달린다 해도 주어진 일을 다 내팽개치지 않는 이상 에르나에게 갔다가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미래를 촉망받는 황실 기사단장이기도 했지만, 가장 부유하고 강한 클라인 공작가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건 즉 그가 못할 일은 없다는 뜻과 같았다.

삽시간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나마 주어진 ‘연구실’로 가는 길에, 맞은편에서 오는 썩 반갑지 않은 얼굴과 마주쳤다.

언제나 온화한 기색으로 물들어있던 그의 얼굴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미소만은 그대로였다.

마주 오던 사람도 디트리히를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속으로 조소했다. 저깟 것, 에르나가 눈만 한번 감아준다면 당장이라도 사라지게 할 수 있는데. 그는 제 주인의 넓은 마음 씀씀이가 아쉬웠다. 그녀가 조금만 더 못된 사람이었다면 디트리히는 기쁘게 저 작자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비뚜름한 웃음이 걸린 입술이 열렸다.

“아, 학장님. 어디 다녀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수업에 다녀오시는 길인가 봅니다, 클라인 교수님.”

“산책을 좀 했습니다. 아카데미는 조경이 제법 괜찮아서요.”

마주 선 두 사람의 얼굴은 조금도 싸울 기색이 없었지만, 그들은 이미 서로에 대한 경계를 바짝 올린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쿠르트는 경계하고 디트리히는 비웃는 쪽에 가까웠지만.

여유로움으로 무장한 젊은 공작을 바라보며 쿠르트는 내심 이를 갈았다.

저 인간이 안톤 교수의 대타로 온 뒤로부터 에르나와의 관계가 놀라울 만치 멀어졌다.

그녀는 수줍음도 많고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이라 쿠르트는 그녀에게 공을 많이 들인 터였다. 3년 전, 그녀를 아카데미에 데리고 온 그날부터 줄곧. 그녀가 점점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언젠가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젊은 클라인 공작이 기묘하게 그와 그녀의 사이를 방해했다. 처음에는 디트리히의 잠깐의 호기심이라고 여겼다. 에르나도 그를 경계하는 듯해서 안심하기도 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르나의 곁에 디트리히가 너무나도 가까이 붙어있었다. 그녀 스스로는 그다지 의식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쿠르트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종종 기분 좋게 웃기도 했다.

그가 느꼈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에르나에게 잘해주었는데. 저 얼굴 반반하고 어린놈이 와서 조금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그렇게 경계를 푼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트는 여전히 한편으로는 에르나를 믿었다. 어차피 디트리히는 1년 정도만 있으면 이 아카데미를 떠날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쿠르트조차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고위 귀족이었다. 평민 출신의 교수인 에르나는 주제넘은 생각을 하지 않을 거였다.

‘그녀는 자기 처지를 잘 아니까. 그렇게 속물적으로 굴 사람도 아니야. 그러니 결국에는 나에게…….’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에르나를 애써 떠올리며 쿠르트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카데미의 환경을 잘 가꾸는 것도 학생들의 면학에 도움이 되니까요. 참, 우리 아카데미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교수들이 참 많은데……. 클라인 교수님의 눈에 띈 사람이 좀 있었나 궁금하군요.”

“아, 뭐……. 글쎄요.”

“만나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세이라 빈클러 교수가 참 훌륭한 사람이랍니다. 똑똑한 거야 이루 말할 데 없고, 온갖 곳에서 제발 와서 함께 일 해달라고 그러는데. 어찌나 후진 양성에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사실 공작 각하 같은 분 옆에서 능력을 펼쳐야 하는데요.”

일부러 세이라의 이름을 꺼내는 쿠르트의 의도를 알아서 디트리히는 피식 웃었다. 에르나에게 관심이 있고, 그를 경계하고 있는 학장은 당연히 공작의 옆자리를 노리는 세이라에 대한 정보도 알아뒀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티 나게 견제를 하는 건지. 더 우스운 건, 쿠르트가 진심으로 디트리히를 라이벌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에르나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는 듯한 그의 행동이었다.

종종 에르나의 곁에 접근한 쿠르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푹 빠져버려서, 불쾌해하는 에르나의 감정에는 눈 돌릴 생각도 없는 이기적이고 멍청한 사내였다.

“글쎄요……. 빈클러 교수가 뛰어난 분이란 이야기는 네, 저도 들었습니다.”

“역시, 그러셨…….”

“하지만 공작가에는 이미 많은 인재들이 있어서요. 빈클러 교수가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쪽이 훨씬,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곧장 쿠르트의 얼굴에 짜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디트리히는 이 쥐새끼 같은 남자의 배를 발로 차 쓰러트려 버리고 지나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굳이 이 남자와 더 길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되지도 않은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쿠르트를 더 상대할 의욕을 잃은 디트리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적당히 그 자리를 마무리하려 했다.

“제가 이제 곧 수업도 있고, 오늘 저녁에는 개인적으로 볼일도 있어서. 아쉽지만 이만 자리를 떠도 괜찮은지요?”

“…….”

쿠르트는 대답하지 않고 눈만 번뜩이며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꼭 그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 디트리히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분을 꾹꾹 눌러 참는 듯한 쿠르트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에르나 랑케를 가벼운 마음으로 건드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디트리히는 더 웃을 수가 없었다. 감히 지금 누가, 누구에게 뭘 어쩌라고 말한 건가.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디트리히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사나운 얼굴을 한 클라인 공작을 본 쿠르트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더욱 눈에 힘을 주고 버텨냈다.

“그녀는, 그렇게 공작 각하가 흥미 본위로 건드리고 말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흥미 본위로 건드린다는 겁니까?”

“에르나는, 그녀는!”

가까스로 쿠르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누군가에게 들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는 이를 갈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여리고, 마음의 상처도 많고, 보듬어주어야 할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녀가 각하의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라 신기한 마음에 자꾸, 그렇게 가까이하고, 여지를 주면… 에르나가 착각이라도 하면…….”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뭐라고요?”

“당신이 에르나 랑케의 뭐나 된다고, 나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둥 그런 소리를 하냐 이겁니다.”

점점 디트리히의 목소리도, 표정도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에 비해 쿠르트는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얼굴이 붉어지고 숨도 거칠어졌다.

“나는 그녀를 3년 넘게 지켜봐 왔습니다! 그녀의 아픔을 보듬어주려, 수도 없이 노력했다고요! 그런 그녀를 괜히 건드려서 더한 고통에 빠트리지 말라는 겁니다. 어차피 잠시 머무르다 가는 곳이니 괜한 사람 흔들고 그러지 말라고요!”

“그렇게 말하니 무슨 당신이 에르나 랑케의 보호자나 된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디트리히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말았다. 맹렬한 적의에 쿠르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물러났다.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남자가 내뿜는 살기는 책상물림인 쿠르트가 쉬이 받아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봐, 쿠르트 메이어.”

“…….”

“적어도 당신이 아는 것보다 내가 에르나 랑케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뭐, 뭐……!”

“그리고 충고하는데, 에르나 옆에서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끙끙대고 돌아다니는 건 그만하지? 그녀가 굉장히 싫어하거든.”

쿠르트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기분으로 디트리히는 기쁘게 말해주었다. 그가 성큼 쿠르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학장의 귓가에 입을 가져간 디트리히가 속삭였다.

“에르나는 착해서 널 어찌 못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녀 주변에서, 꺼져.”

분노에 하얗게 질린 쿠르트를 흘겨보며 디트리히는 빙긋이 웃었다. 성화 속 천사의 미소를 닮았다는 디트리히의 웃는 얼굴이 쿠르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악마의 것으로 보였다.

얼어붙어 바들바들 떠는 쿠르트의 어깨를 세게 툭툭, 두드린 디트리히는 그를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저런 얼간이를 상대하느라 쓴 시간이 아까웠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는 그의 사랑하는 누님을 빨리 보러 가야 했다.

* * *

외부 실습을 나오면 항상 묵는 숙소의 복도를 에르나는 천천히 걸었다. 이미 자야 할 시간인데 속살거리는 소리와 웃음이 새어 나오는 방은 문을 두드리면 곧 조용해졌다. 아카데미가 아닌 곳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학생들은 신나서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자곤 했다. 다음 날 수업을 하려면 아이들이 제때 자줄 필요가 있었다.

이틀 뒤에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광범위한 저격 마법 같은 건 아카데미에서 시전 할 수가 없어서 항상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실습할 때 생기는 오류 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어쨌든 이렇게 외부로 나오는 건 에르나에게도 제법 기분 전환이 되어서 그녀도 기분이 좋긴 했다. 게다가 광범위 마법으로 목표물을 모조리 다 부숴버리는 건 쌓였던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되었다.

학생들의 방을 쭉 돌아보고 난 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어깨를 한 손으로 꾹꾹 주무르며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아…….”

눈을 감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디트리히를 떠올렸다가 깜짝 놀랐다.

수업할 때 외에는 자꾸만 그가 떠올라서 곤란했다. 이렇게나 빠르게 디트리히가 그녀를 잠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주인과 개로, 서로 플레이하는 사이로 남자고 말해놓고는, 오히려 그녀가 디트리히에게 자꾸만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저 자신과 너무 잘 맞아서, 혹은 예전에 서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과했다. 정신없이 그에게 휘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보며 웃으면, 붉은 입술을 벌려서 그녀를 부르면, 눈가를 찌푸리고 고통스러워하다 황홀해하면…….

대체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보이는 끈적하고 진득한 감정에 자꾸 그녀도 휘말리는 듯했다.

‘누님, 왜요.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요.’

‘내가 너 싫다고. 질렸다고. 이제 너, 내 개 아니야. 그러니까 질척하게 굴지 마.’

‘제가, 더 잘할게요. 제가 뭐든 할게요. 누님이, 아니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구르라면 구르고 짖으라면 짖을게요. 저 버리지 마세요, 네? 저한테는, 저한테는 주인님뿐이에요. 제발요…….’

울며 제 다리를 붙든 채 올려다보던 어린 디트리히의 얼굴이, 이제는 성인이 되어 야하게 웃으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얼굴에 겹쳤다.

‘사랑해요, 주인님. 사랑해요……. 주인님 없으면 저 죽어요. 주인님 말고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악을 써대며 자신을 붙잡은 디트리히를 매몰차게 밀어내던 순간, 사실 에르나의 심장에도 큰 상처가 났다. 그녀가 그러고 싶어서 디트리히를 ‘버리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에르나가 디트리히를 버리지 않으면, 하루빨리 클라인가를 떠나지 않으면, 정말로 그녀의 목숨이 위험했다.

에르나가 보라는 듯, 어린 디트리히는 목을 꽉 죄던 가죽 목걸이를 내보였었다.

‘이렇게 주인님이 주인님 거라고 표시도 해놓았잖아……!’

그때 어떻게 목걸이를 끊어버렸는지 에르나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두렵고, 혼란스러웠고, 그에게 미안했으며, 그렇지만 살고 싶었다.

사실 그녀도 디트리히를 아꼈다. 아끼는 것 이상이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 만큼, 사실, 그녀도 그를…….

에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디트리히 곁에서 위험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칼날이 여전히 그녀의 목에 드리워진 상태였다. 이제는 공작가의 가주가 된 디트리히라 해도 그 위험한 물건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생각을 이어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얼른 씻고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에르나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펴고 침대에서 일어나 씻으러 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열고 방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비명을 지르는 대신 에르나는 재빨리 날카로운 얼음 칼날을 만들어 상대의 얼굴로 들이밀었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 들린 얼음 칼이 산산조각 났다. 흩어지는 얼음 조각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에르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여전히 마법의 기운이 남은 아주 작은 얼음 파편이 침입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가느다란 붉은 실선을 남겼다.

“아야.”

엄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얼음 칼날을 부순 작은 단검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디트리히가 뺨을 감싸 쥐었다. 에르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아채 치웠다. 그녀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쏘아붙였다.

“미쳤어? 죽고 싶어?”

“죽일 생각이었습니까?”

“그럼 이 밤에 멋대로 방에 침입해 놓고……!”

“아, 근데 제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라서.”

씨익 웃는 디트리히의 뺨을 에르나는 일부러 아프라는 듯 꽉 꼬집었다. 그래도 다친 쪽을 꼬집지는 않았다. 아야, 아야, 하고 엄살을 부리는 디트리히를 흘겨보던 에르나는 혀를 차고는 손을 놓아주었다.

뺨이 붉게 달아오른 그는 씩 웃으며 엄지로 상처를 훑어 피를 닦아냈다. 그러더니만 예고도 없이 에르나를 꽉 끌어안았다.

“누님, 보고 싶었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못 참고 와버렸어요.”

“왜 이래,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나저나 아카데미에서 여기가 얼마나 먼데 어떻게 온 거야?”

“이런. 썩어 넘치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썼단 소리였다. 에르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굳어있던 몸에서 힘을 뺐다.

“아픈 게 부족했어? 그거로는 못 견뎠어?”

“보고 싶을 때마다 쥐어뜯어 봤는데, 그러면 이상하게 누님이 더 보고 싶어서.”

“하아… 내일 수업 있을 거 아니야.”

“그것도 역시, 돈으로 해결할게요.”

그러면서 디트리히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보석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미 하나 회색으로 변한 것 외에도 마법이 깃든 것으로 보이는 애뮬릿들이 여럿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에르나는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지는 듯했다.

그녀가 좀 더 순순해지자, 디트리히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고 어깨에 코를 묻었다. 그녀의 냄새를 들이마시자 금세 다리 사이의 물건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누님.”

“…….”

“입 맞춰도 됩니까?”

대답을 듣기도 전에 디트리히의 입술이 에르나의 목덜미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술과 그만큼이나 뜨거운 숨결이 멋대로 여리고 부드러운 살결을 탐했다.

에르나는 끙, 하고 신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거절했다.

“안 돼.”

“그럼 주인님의 개라면 괜찮아요?”

안 된다고 말하려 했는데, 에르나는 입을 떼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어린 시절의 디트리히를 떠올려서일까.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서, 거절의 말이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주저하는 마음을 알아챈 맹수는 눈을 빛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에르나의 허리와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고개를 살짝 틀며 입술을 겹쳐오는 디트리히의 눈빛이 짙고 깊었다. 목을 물어뜯기는 듯한 기분에 에르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가 개라면, 진짜 에르나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게 맞는다면, 당장 그를 밀어내고 벌해야 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녀가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에르나는 제 혀에 얽혀오는 디트리히의 혀를 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디트리히의 허리께에 얹어져 있던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옷이 에르나의 손 안에서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흣, 흐응…….”

“하아… 주인님, 내, 주인님…….”

“읍, 디트, 아, 으,”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달콤하게 핥고 뭉개지는가 하면, 격렬하게 빨아들이고 깨물어댔다. 에르나는 제 개에게 매달린 채로 열렬한 키스를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디트리히는 지난 9년 동안의 공백에 대한 보상을 지금 모조리 받아내기라도 할 기세로, 그녀를 탐했다. 주춤주춤 두 사람의 걸음이 어설프게 엇갈리다가 동시에 침대에 다리가 걸렸다.

“앗…….”

풀썩, 쓰러진 에르나는 제 위에 올라탄 디트리히의 얼굴과 마주했다.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예쁘게 웃기만 하던 남자는 지금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찡그린 채였다. 급히 몰아쉬는 숨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정쩡하게 벌어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돌덩어리 같은 사내의 다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에르나의 손을 붙잡아서는 제 불뚝 솟은 다리 사이로 이끌었다. 에르나가 이미 익히 보아 알고 있는 그 커다란 성기가 단단하고 뜨겁게 부풀어있었다.

“너무, 저 너무 힘들어요, 주인님.”

“디트리히.”

“어떻게 좀 해주세요. 예뻐해 주셔도 되고, 혼내 주셔도 되니까… 제발.”

에르나는 자신이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9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에르나는 자꾸만 디트리히에게 실수를 저지르기만 했다. 차라리 9년 전에 그에게 조금이라도 진실을 알려주고 떠났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다시 만났을 때, 절대 안 된다며 그를 밀어냈다면 어땠을까.

전부 어정쩡하게 행동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가학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보통의 섹스를 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디트리히를 아프게 할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은…….

에르나는 욕정이 뚝뚝 묻어나는 디트리히의 새파란 눈을 응시한 채로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이 목 끝에서부터 단추를 풀어 내렸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뽀얀 앙가슴이 드러났다. 숨이 조금 떨려 나왔다.

셔츠를 벗어 옆으로 밀어놓은 에르나는 이어 허리춤의 단추도 하나씩 풀었다. 허리가 느슨해진 스커트를 잡아당겨 발 쪽으로 밀어내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뒤이어 속옷까지 벗어 던진 에르나는 나신을 온전히 그의 앞에 드러냈다.

제 팔다리 아래에 갇힌 그의 주인을 디트리히는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달달 떨리는 디트리히의 뺨에 에르나가 손을 살며시 가져다 댔다.

“내가, 왜 그렇게 좋을까?”

“하아…….”

“너도 벗어, 디트리히.”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사실에 디트리히의 눈빛이 변했다. 주인님이라고 애절하게 부른 자신을 에르나가 왜 개로 대하지 않기로 한 건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주어진 기회를 놓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디트리히는 제 옷을 찢어발길 기세로 벗어 던졌다. 몸 여기저기에 작고 큰 상처들이 남은 우람한 근육질 몸이 흥분으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에르나의 손이 그의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리자, 디트리히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꽉 감았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그의 몸을 어루만지는 에르나의 손을 결국 그가 잡아챘다. 턱에 잔뜩 힘을 주고 끙, 하고 탄식을 내뱉은 그가 눈을 번뜩였다.

“저 못 참겠어요, 누님.”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정말이죠?”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디트리히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에르나가 그를 버리고 간 이후로 줄곧 갈망하던 그녀가 지금 앞에 있었다. 게다가 그녀 스스로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급히 에르나를 덮친 그의 입술은 그녀의 숨결을 모조리 앗아가 버릴 기세였다. 물러섬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양, 디트리히의 혀는 덩굴처럼 그녀를 얽매었다.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에르나는 가벼운 쾌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커다란 기사의 손이 말랑하고 하얀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일그러지는 가슴의 감촉에 디트리히는 정신이 아찔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단단하게 곧추선 유두를 붙잡고 굴렸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에르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가볍게 몇 차례 에르나의 부풀어 오른 입술에 입을 맞춘 디트리히는 이마를 맞대고는 속삭였다.

“이거, 꿈 아닌 거죠?”

“흐으, 꿈, 인 거 같아……?”

“아니, 하지만 꿈이어도 좋아요. 다만 깨지 않았으면…….”

제 숨을 모조리 묻혀둘 생각인지, 디트리히는 에르나의 얼굴에 빼곡히 입술을 찍었다. 이마에, 콧등과 콧방울에, 뺨과 광대와 턱에, 눈꺼풀과 귓가에 연신 입을 맞춘 그는 마침내 보들보들한 에르나의 목선까지 내려왔다.

얇디얇은 피부를 이로 살짝 깨물자 에르나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작은 소리 하나, 몸짓 하나에도 디트리히는 당장 사정할 것만 같았다.

“너무 좋은 향기가 나요, 누님.”

“아, 으… 깨물면, 아, 자국이 남…아!”

“남으라고, 하는 건데.”

밀어내려 하는 에르나의 양 손목을 한 손에 잡아 올린 디트리히는 더욱 거침없었다. 단숨에 목덜미와 쇄골 근처에 새빨간 순흔을 세 개나 남긴 그는 이어 에르나의 말랑한 가슴을 베어 물었다.

“하아……!”

강렬한 감각에 에르나의 허리가 싱싱한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두 손으로 양 가슴을 모아 쥔 그는 발딱 선 유두를 핥고 잘근잘근 씹어댔다.

양쪽 모두에 오는 자극에 에르나는 끙끙대며 디트리히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주인으로서 통제 가능한 자극만 익숙했던 그녀에게는 이렇게 남에게 모조리 몸을 내맡긴 채 받는 애무가 어색하면서도 다른 어떤 때보다 훨씬 심장을 뛰게 했다.

그녀의 유방에 달콤한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디트리히는 열렬히 핥고 빨아댔다. 그가 잔뜩 씹어대서 부풀어 오른 유두는 이제 슬쩍 스치기만 해도 저릿할 정도였다. 다리 사이가 저릿저릿하고 무언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발로 침대 시트를 밀어내며 에르나가 헐떡였다.

“그만, 그, 으만……. 아, 아파……!”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어. 누님 진짜, 제길…….”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유혹적인 에르나를 고작 요만큼 맛본 것만으로도 디트리히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그녀와 비견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 입술을 대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런 그녀를, 디트리히가 모르는 그 수많은 시간 동안 수도 없는 벌레 떼들이 탐냈을 것을 생각하니 분이 치밀어 올랐다. 감히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더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무심한 그녀는 그런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상처받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아니었다. 아직도 그녀를 향한 놈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울컥 치밀어 오른 분노에 손길이 거칠어졌다. 그는 깨끗한 가슴을 이로 콱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에르나의 미간이 왈칵 찌푸려졌다.

“아윽!”

“아무도, 못 줘.”

“아프잖아, 디트리히!”

“누님은 내 거예요. 내가 누님 것이듯이, 내 거야.”

으르렁대는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위협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째서인지 상처받은 듯했다. 에르나는 마치 자기가 잘못한 양 움찔했다.

납작한 배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올려다보는 디트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격랑이 이는 푸른 눈에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소름이, 쫙 돋았다.

이 남자는 결코 내 개가 될 수 없어.

그 순간에 에르나는 완전히 깨달았다. 아무리 그가 발톱을 감추고 이를 숨긴 채 그녀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해도, 디트리히는 맹수였다. 갖고 싶은 것은 갖고야 마는 사냥꾼이며 모든 이를 발아래 두는 것이 당연한 최상위 포식자였다. 에르나를 사랑하기에 그저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을 뿐이었으리라.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를 보며 디트리히가 웃었다. 마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디트리히는 천천히 도장 찍듯 입술을 아래로, 아래로 꾹꾹 누르며 내려갔다. 그의 입술이 가슬가슬한 음모 근처에 닿자 에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거긴, 하지 마. 아직 씻지도 못했고…….”

“쉬이, 괜찮으니까 그냥 있어요.”

“싫다니까… 아아……!”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요.”

이미 알고 있는 그녀의 몸이기에 디트리히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혀는 곧장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아들었다. 축축한 혀가 흥분으로 살짝 도톰해진 음순을 길게 핥았다. 그의 뜨겁고 말캉한 혀가 닿을 때마다, 그리고 이가 은근하게 여리고 민감해진 살을 긁을 때마다 에르나는 숨을 할딱이면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두 손은 그녀의 양 골반을 단단히 붙들고는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흐응, 아… 아읏!”

도톰한 살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그 사이의 조그마한 살점을 짓눌렀다.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쾌감이 점점 아래에 뭉쳐 들었다. 디트리히가 클리토리스를 건드릴 때마다 그녀의 아래에서는 애액이 흘러넘쳤다.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기꺼이 그것들을 핥고 빨았다. 그녀의 애액으로 갈증을 해소하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다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혀를 뾰족이 만들어서는 맑은 액체를 흘리는 구멍에 밀어 넣었다.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혀의 감각에 에르나가 허리를 뒤틀었다.

내벽을 혀가 훑어 내리는 감각에 등이 선뜩했다. 한두 번 겪어본 애무도 아니고, 이때껏 디트리히가 제 아래를 빨아준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유별났다. 이상하게도 부끄러우면서도 애달아서, 그녀는 허리를 흔들며 그를 더욱 졸랐다.

결국 애액으로 그녀의 아랫도리와 둔부까지 모조리 축축해지고, 그 아래의 시트까지 젖은 다음에야 디트리히는 입술을 떼어냈다. 그는 행복한 듯 웃으며 그녀의 음순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달콤해.”

“아, 제발… 조금 더…….”

“누님이 제게 애원하는 것도 새롭네요……. 정말 기분이 좋아.”

“하앙!”

잔뜩 허물어져서 벌름대는 질 입구에 디트리히가 손가락을 하나 밀어 넣었다. 그가 손가락을 구부려 아주 천천히, 도톰하게 부어오른 질벽을 긁어내렸다. 에르나의 몸이 발발 떨렸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시트를 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일부러 아주 느릿하게 그가 안을 휘저어대는 동안,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에르나의 몸은 연신 애액을 쏟아냈다. 어느새 디트리히의 손가락은 두 개, 세 개로 늘어났고 그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질척하고 음란한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좀 더, 이것 말고 다른 거를.

그녀는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쾌락 속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무언가를 깨닫고 힘겹게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둘의 음탕한 행위에서 비롯된 소리를 막아줄 마법이 그들을 감쌌다. 이렇게 늦게 생각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무엇을 한지 알아차린 디트리히가 코를 울리며 웃었다.

바깥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야 그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언제나 꿈으로만 상상했던 모든 것을 에르나에게 쏟아부을 수 있을 테니까. 그녀가 어떤 소리를 지르는지, 어떻게 우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에르나의 음부를 정성스럽게 농락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물이 들어 쾌락으로 범벅된 그녀의 얼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란했다. 음욕에 젖어 흐트러진 연녹색 눈동자와 울상이 된 듯, 혹은 기대감에 찬 듯 일그러진 얼굴 모두가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디트리히의 이가 아무 자국도 남지 않은 그녀의 허벅지를 깨물었다. 몇 개째 잇자국을 낸 건지 몰랐다.

이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겨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아니다. 반대로 에르나가 그에게 그녀의 것이라는 표시를 남겨준다면 훨씬 행복할 것이다. 다시는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제 개에게 책임감을 느껴서 스스로를 디트리히에게 묶어버린다면.

그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달콤한 냄새에 다시 한번 취했다.

“설탕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흐, 으……. 그, 만…….”

“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만이라니요.”

그가 천천히 다시 기어 올라왔다. 어두운 그림자가 금세 에르나의 몸 위에 드리웠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디트리히를 본 그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내가 뭐가 좋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저에겐 누님뿐이었어요.”

“너와 나는 어차피 어울리지도 않는데……. 앗!”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에르나와 디트리히가 어울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디트리히는 기분이 상한 얼굴을 했다.

네가 기분이 나빠도 사실은 사실인걸.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몸이 홱 뒤집혔다.

정말 온몸을 맛보기라도 할 작정인 걸까.

디트리히는 그녀의 등을 뒤덮은 부드럽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밀어냈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에르나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녀는 허둥대며 다시 몸을 돌리려 했지만, 강인한 남자의 팔과 다리가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 연신 키스했다. 혀로 핥고, 또 핥았다.

에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보일 리 없었다. 그런데 마치 디트리히는 그 자국이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그녀의 어깨에 남은 그 ‘문신’은 굳이 디트리히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의 흔적이었다.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전대 공작만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너, 그게…….”

“이 문양이, 보이느냐고요?”

여상한 대답에 에르나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건 흥분이 아니라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이었다.

디트리히는 그 문양의 의미가 뭔지 알기는 하는 걸까? 혹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녀와 관계를 하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 이러는 걸까?

그 어느 쪽이든 에르나는 싫었다. 그의 것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도망쳐야 했다. 달아나야만 했다.

에르나는 몸을 바르작대며 소리쳤다.

“놔, 이거 놔줘! 너랑 안 할 거라고 했잖아!”

그녀가 미친 듯이 외치는데도, 디트리히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사랑합니다, 누님.”

“디트리히, 잠깐만!”

“나에게는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뿐이었어.”

가늘게 떨리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내려앉았다. 거기에는 신경 써서 보지 않는다면 절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희미한 문양이 있었다. 바로 클라인가의 상징인 장미와 가시덩굴이었다.

아주 희미해서, 신경 쓰며 보지 않는다면 있는지도 모를 그런 낙인. 마법으로 만들어진 맹세의 자국이 이 소중하고 여린 몸에 남아있었다.

지금 그의 아래에 깔린 에르나가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디트리히도 알았다.

‘하지만 놓아주면, 또 도망갈 거잖아.’

한참 물 밖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퍼덕대던 에르나를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디트리히는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두 손을 붙잡아 위로 결박하듯 짓누르자 단박에 에르나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엉덩이 사이에 닿는 남자의 단단한 페니스의 감촉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다.

“싫어, 안 돼! 제발 이러지 마!”

“누님, 내 사랑.”

디트리히는 자신의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단단히 모아 고정했다. 그녀의 모인 다리와 음부에 제 것을 끼워 넣고 천천히 움직이자 기분 좋은 감각이 그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귀두가 뜨겁고 축축해진 에르나의 은밀하고 예민해진 부위를 마구 눌러댔다.

“아흐, 아아… 안, 돼! 싫, 싫다고, 흐아앙!”

“싫다고 하는 것치고는, 누님의 아랫입이 엄청 오물거리는데요.”

“안 된다고, 하앙, 아, 했었, 으읏!”

“그건 개에게 한 말이잖습니까. 저는 지금 누님의 개가 아니니까.”

그건 저에게 해당 사항이 없는 거죠. 그의 목소리에 섞인 단단한 결심에 에르나는 헐떡이면서 거세게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근육 따위는 조금도 없는 마법사의 몸으로 돌덩어리 같은 기사를 밀어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에르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세상의 그 누구와 섹스할 수 있다 하더라도, 디트리히만은 안 됐다. 그와는 절대로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의 인생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가 조금만 허리를 다르게 움직인다면,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한 채 그의 것을 억지로 밀어 넣기라도 한다면…….

조금 전까지 그녀의 몸을 달구던 쾌락이 단박에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격하게 흔들렸다. 에르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낌이 점점 커져만 갔다.

“안 돼, 디트리히……. 안 돼, 부탁이야, 제발…….”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에르나가 연신 애걸했다. 어느새 제 허벅지 사이를 오가던 디트리히의 성기가 멈춘 것도 그녀는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있었다.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는 에르나를 디트리히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피식 웃었다. 에르나가 우는 건 당연했다. 조금 심술이 났을 뿐이었다. 그래서 정말 잠깐만 그녀에게 투정을 부리려던 거였는데.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제가 싫으면 밀어내세요. 마법으로 날려버려도 괜찮아요. 누님에게는 충분히 그럴 힘도, 권리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도 에르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디트리히가 그녀를 놓아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가느다랗게 떠는 에르나를 디트리히는 꽉 끌어안았다. 의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한 척. 그런 척은 참 잘하는 그의 주인은 중요한 순간에 너무나도 나약했다.

정말로 그토록 두렵다면 밀어내면 그만이었다. 디트리히가 다치든 말든 말이다. 디트리히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결코 그에게는 손대지 못했다. 이런 다정한 마음에 그가 반한 것이기도 했다.

선 고운 입술이 에르나의 귓가에 다가왔다.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이것 때문에 저와 관계를 안 한다고 하신 거죠.”

“……!”

“그럼 이 문양만 없어진다면, 저를 안아주실 겁니까?”

에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디트리히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돌려 눕혔다. 혹시 화난 그녀에게 한 대 맞는 건 아닐까, 했지만 그녀는 그저 발개진 눈을 하고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화가 나서 뭐라고 하고 싶으면서도 그저 아랫입술을 엉망진창으로 씹어대는 게 안쓰러워서, 디트리히는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눌러 빼냈다.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절, 안아주실 건가요?”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이런, 누님. 그런 당연한 걸 물으시다니요…….”

처연하게 웃는 디트리히의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그가 우는 것 같다고, 에르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에르나 랑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한시도 쉬지 않고, 당신만 사랑했어요.”

“왜……?”

“누님만 저를 디트리히라는 사람으로 아껴주었으니까요. 클라인가의 소공자 따위나, 종마나, 미래의 권력자 이딴 것이 아니라. 그냥, 저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줬으니까.”

애타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디트리히는 스물 중반의 창창한 성인 남자가 아니라, 처음 보았을 때의 소년처럼 보였다.

내가 그랬던가. 에르나는 오래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냥 그녀는, 클라인가의 후계에게 큰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에르나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이어질 후원이었다. 수도에 연 하나 없는 그녀가 몸 누일 장소와 배곯지 않을 식사, 마음껏 마법을 갈고닦을 수 있는 금전적 여유.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그곳이 클라인 공작가였을 뿐이다.

거기에서 만난 디트리히에게 관심을 갖기에는 에르나는 하루하루가 바빴다.

그와 어느 정도 말을 나누게 되었을 때, 그를 제 여물지 않은 괴상한 취미에 끌어들인 건 그녀를 미래 공작가의 가축 정도로 보는 클라인 공작과 그 부인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그 미래 공작가의 주인을 내가 멋대로 애완동물처럼 굴려주겠다는, 그런 치기 어린 반발심.

물론 친한 친구도 없고 순진하게 그녀를 따르는 디트리히가 조금 귀엽기도 했지만…….

처음 시작은 그랬어도 나중에는 에르나 또한 디트리히를 아꼈다. 그는 사랑스러운 소년이었고, 똑똑했으며, 그녀에게 헌신적이고 언제나 다정했다.

과거를 되짚는 건 디트리히도 마찬가지인지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아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처음부터 절 좋아한 건 아니라는 사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누님도 결국엔 절 좋아하게 됐잖아요.”

“넌 너무 어렸어. 그땐…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 전 기뻤어요. 누님이 저를 필요로 하는 것도, 저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도……. 그저 누님이 저로 인해 조금이라도 기쁨을 느낀다면 그걸로 만족했거든요.”

공작가 뒤편, 거대한 정원의 장미 미로에서 처음으로 입을 맞췄을 때, 디트리히는 웃으면서 울었다. 얼굴이 붉어져서는 그 맑은 눈동자에서 눈물방울을 툭툭 흘렸다. 키스했는데 그게 무슨 반응이냐며 놀리던 에르나의 손을 꼭 잡은 채, 그가 했던 말을 그녀도 아직 기억했다.

‘너무 좋아서, 행복해서요.’

그리고 마치 그때와 비슷한 얼굴을 한 디트리히가 에르나의 위에서 다시 한번 물었다.

“그때는 미처 못 했지만, 이제는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까 누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아직도 계약은 유효해.”

“아, 제 아버지와 했던 그 계약. 그 빌어먹을 것 말이죠.”

그는 비죽 웃었다. 제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도 그토록 냉랭할 수가 없었다.

디트리히는 에르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혔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에르나는 눈만 깜빡이며 시트로 앞을 가렸다. 흘끔 본 제 몸에 너무나도 많은 디트리히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볼이 달아올랐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디트리히의 손에는 네모지게 접힌 종이 하나가 들려있었다. 에르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경멸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디트리히가 씹어 뱉듯 말했다.

“참 그 인간이 할 법한 생각이죠.”

팔랑거리는 종이를 본 에르나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네가 그걸 찾은 거야? 절대, 못 찾을 곳에 숨기겠다고…….”

“누님이 자꾸 잊어버리시는 것 같은데.”

키득대며 디트리히는 에르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지금 클라인 공작은 저입니다. 가문의 일이라면 제가 찾아내지 못할 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단 뜻이에요.”

에르나가 떠나버린 뒤에 이 빌어먹을 계약서의 존재를 알아차린 디트리히는 좀 더 빨리 공작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아버지를 해친 건 아니었지만, 그가 좀 더 빨리 뒈질 수 있도록 손을 쓰긴 했다. 다 알면서도 묵인한 어머니도 역시.

비열하고 음흉한 그의 아버지가 이곳저곳에 나누어 숨겨둔 가문의 각종 더러운 정보와 계약들을 찾아내느라 또 많은 시간을 쓰고, 많은 피를 보았다. 그리하여 끝내 이 계약서를 찾아냈을 때의 희열이란.

하지만 그런 일들을 에르나에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세상에는 굳이 알아서 좋은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으니까. 그녀에게 더 이상 클라인가의 더러운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디트리히는 종이를 펼쳐 거기에 쓰인 내용을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클라인가의 후계자인 디트리히 반 클라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잉태할 만한 행위를 금지한다’는, 아주 저열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다. 전부 에르나에게 불리한 것들뿐.

디트리히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어린 에르나에게 후원을 받길 원한다면 무조건 이 내용들에 동의하도록 강요했을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니 구역질이 났다.

격에 맞지 않는 태에서 디트리히의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는 적은 가능성마저 이런 식으로 미리 차단한 것이리라. 심지어 이 계약서는 약속을 어길 경우, 에르나의 마력이 모조리 사라지도록 하는 금제까지 걸려있었다.

이딴 계약서를 만드느라 어느 마법사에게 얼마나 돈을 주었을지. 만약 약속을 어기고 아이를 가진다 해도 마력 없는 평민 여자 하나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닐 테니, 어느 쪽이든 아버지로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마법사에게서 마력이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에르나는 그래서 계속 디트리히와 ‘마지막’까지 가길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디트리히가 종이를 두 손으로 들었다. 그 종이를 바라보는 에르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클라인가에 목걸이가 매인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그녀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기 직전이었다.

“클라인가의 주인으로서, 저는 이 계약서를 무효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약서라서 참 다행이에요.”

클라인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계약서를 없앨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가 반으로 서서히 갈라졌다. 찌이익, 경쾌하게까지 들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마침내 완전히 계약서가 반으로 갈린 순간, 에르나는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 완전히 눈 녹듯 사라진 것을 느꼈다.

하아, 하고 숨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완전히 망가진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무의식적으로 에르나의 손이 오른쪽 어깨를 더듬거렸다. 손을 댈 때마다 느껴지던 찌릿한 마법의 낙인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기쁘지 않으냐 하면 당연히 기뻤다. 에르나는 자신이 어릴 때 했던 불공정한 계약에 대해서 줄곧 후회했었다. 스물이 되자마자 쫓기듯 클라인 공작가를 나와서 전쟁터에 매여있어야 했던 것도, 계약 때문이었다.

‘디트리히의 눈이 닿지 못할 곳으로 가라.’

‘그 아이가 너를 완전히 단념하게 만들어. 다신 널 찾지 않게.’

그녀가 디트리히와 좀 더 깊은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챈 공작은 냉혹하게 명령했다. 에르나는 그걸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디트리히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떠났고…….

그렇게 해서 돌고 돌아 이렇게, 마주 앉은 것이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주인과 개라는, 기묘한 관계로.

얼빠진 얼굴로 앉아있는 에르나를 디트리히가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디트리히.”

“오직 당신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9년이었어요, 에르나 랑케.”

천천히 몸을 떨어트린 디트리히가 에르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여전히 에르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디트리히도, 절대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한 계약서가 파기된 것도, 온전히 에르나 랑케로서 살 수 있게 된 미래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들의 키스는 이전의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욕정과 쾌락보다는, 그보다는 훨씬 더 조심스럽고 순수했다. 서로의 숨과 온기만을 탐하는 두 사람의 고요한 입맞춤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커튼이 쳐지지 않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느끼며 에르나는 홀로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까지 옆에 누워있었던 디트리히는 이미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가 누웠던 자리를 손으로 쓸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계약 파기했다고 바로 누님에게 들이대면, 진짜 짐승 새끼 같잖아요.’

그렇게 말한 디트리히는 씩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기만 하고 누워있었다. 디트리히는 그녀에게 격렬한 밤을 부탁하는 대신, 자신의 지난 시간을 들려주길 원했다. 반대로 에르나의 9년도 알고 싶어 했다.

서로가 알지 못하고 보낸 시간들을 공유하는 사이, 에르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수마가 그녀를 집어삼키기 직전, 디트리히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계속 이렇게 함께 있어요, 내 주인님…….’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에 에르나는 침대 시트를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돌아가면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주인과 개에서, 좀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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