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대단하신 디트리히 반 클라인 님이 아카데미에 납시셨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에르나는 앞에 놓인 접시에서 완두콩을 포크로 성의 없이 찍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날 밤, 그러니까 디트리히가 그녀의 발치에 꿇어앉아서 헐떡이다 쫓겨난 밤 이후로 그녀는 열심히 그를 피해 다녔다. 어쩌다 먼발치에서 보이면 일부러 먼 길로 돌아서 갔고, 불가피하게 한 공간 한자리에 있어야 하면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자신을 피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디트리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교적인 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볼 때면 에르나는 마음이 사뭇 불편했다.
그가 없는 자리라고 해서 디트리히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그분이랑 일단 지금 얼굴이라도 제대로 익혀놓으면, 나중에 분명 도움이 될 거 아니에요?”
“그냥 얼굴 아는 정도로 되겠어요? 클라인 공작 각하랑 뭔가 제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내가 그분과 친하다는 소리를 할 정도는 되어야지.”
“하, 내 연구 과제에 공작 각하가 관심이라도 가져주시면 앞으로 탄탄대로일 텐데…….”
요 근래 교수들의 가장 뜨거운 화제는 당연히 디트리히와의 친분이었다. 에르나는 교수들이 왜 그러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아카데미에 모인 자들의 대부분은 평민이거나, 망해가는 귀족 가문의 자제이거나, 가문을 계승할 수 없는 둘째, 셋째 혹은 방계였다. 능력은 있으되 권력과 부에 가까이하기에는 힘이 모자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 뜻이었다. 순수하게 연구와 학습이 좋아서 아카데미에 몸담은 사람은 정말 극소수였다.
그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에르나는 제 앞의 접시에 눈을 고정하였다. 포크에 찍히지 않은 완두콩이 데구르르 구르다가 으깬 감자에 가서 콕 박혔다. 굳이 먹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저 완두콩에 자신이 겹쳐서 에르나는 입맛을 잃었다.
커다란 포크 같은 디트리히에게서 콩알 같은 자신이 도망칠 수 있을까? 에르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저를 ‘먹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면야 디트리히와 관련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러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먹는단 말인가. 디트리히는 에르나의 개가 되고 싶어 안달 난 몸이었다. 주인은 그녀였고, 그녀의 관심과 자비를 구걸하는 게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나는 자꾸만 그에게 한입에 먹히고 마는 자신을 상상하고 마는 것이었다.
멍하니 자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르나는 깜짝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 앉아있던 기마와 창술 담당 교수 한스가 눈짓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에르나 교수님, 뭘 그렇게 생각하느라 사람 말을 못 들어요?”
“아, 미안해요. 세이라 교수님… 뭐라고 하셨죠?”
동그란 다갈색 눈에 도발적인 빛을 담은 세이라가 뾰로통한 얼굴로 에르나에게 비죽대며 다시 물었다.
“에르나 교수님은 관심 없어요? 클라인 교수님한테.”
“아, 뭐… 네. 별로요.”
“흐응. 뭐, 하긴. 굳이 클라인 공작가의 힘이 아니어도 우리 에르나 교수님은 아쉬울 게 없지…….”
비꼬는 목소리에 에르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슬쩍 한쪽 입술을 비죽 올렸다가 말았을 뿐이다. 그녀가 반응하지 않자 세이라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 보였지만, 곧 시선을 돌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사실 클라인 교수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있을까요? 그분 눈에 띄면 연구만이 문제겠어요, 궁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다른 교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라는 피식 웃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궁보다는 공작가에 들어가는 쪽이 더 좋지만.’
다들 제각기 마음속에 원하는 바가 있는 교수들은 수군거리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런 이들 속에서 에르나는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이 중에서 디트리히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건 오직 에르나 랑케 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이 사람들은 조금도 상상할 수 없는 이유로.
디트리히를 향한 사람들의 득실거리는 욕망 속에서 식사하는 건 아무래도 더는 무리일 듯했다. 그녀는 식기와 접시를 챙겨서 가지런히 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먼저 일어납니다…….”
인사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자마자, 에르나는 커다란 벽 같은 것과 마주했다. 깜짝 놀라며 위를 보니 거기에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있었다.
오로지 놀라움밖에 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디트리히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벌써 식사를 마치셨나요?”
잘 재단되어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남색 재킷을 입은 미남자는 비켜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에르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차마 입에서 인사가 나오지 않는데, 교수들이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입사를 건넸다.
“어서, 어서 오십시오!”
“식사하러 오셨나 봅니다. 하하, 이게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는데…….”
“자리가, 어! 그래요, 랑케 교수가 방금 식사 끝났다고 했지?”
“그래그래, 여기 앉으시면 되겠네. 여기, 자리 좀 치워주시게!”
교수들은 디트리히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눈을 번뜩였다. 어라, 하는 사이에 에르나는 자신이 서있던 자리에서 밀려났다. 두세 발짝 타의로 물러나다가 비틀대는데, 단단하고 뜨거운 팔이 그녀의 등을 떠받쳤다. 그녀의 옆구리까지 파고든 디트리히의 손가락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그 은근한 촉감에 에르나가 흠칫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가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에르나는 목 뒤가 뜨끈해지는 걸 느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
“어서 이쪽으로!”
디트리히의 물음에 채 답하기도 전에 교수들은 그를 솔개가 병아리 낚아채듯 데리고 갔다.
에르나를 향한 그의 눈빛에 조금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그는 의외로 순순히 교수들의 이끌림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아까까지 에르나가 앉아서 식사하던 자리는 급사가 깨끗하게 치워놓은 뒤였다.
어느새 뒤로 밀려난 에르나는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자리에 앉은 디트리히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운 좋게 그의 맞은편에 앉게 된 세이라가 몸을 잔뜩 그에게 기울이고 한껏 환한 웃음을 짓는 것도 보였다.
어쩐지 더 이상 보고 있는 것이 불편해서 그녀는 몸을 돌렸다. 어차피 다른 이들의 관심은 모조리 디트리히에게 쏠려있었으니, 그녀가 제대로 인사하고 가지 않는다고 하여 책망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서 열심히 멀어지는 동안에도, 기묘하리만치 그녀의 일부는 디트리히에게 남아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한동안 디트리히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오늘 에르나는 어쩔 도리 없이 디트리히의 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후 아홉 시라는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오늘은 도저히 짬이 나지 않으니 모든 일과가 끝난 뒤에 보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이라면 당연히 그의 숙소에 있을 테니 에르나의 걸음도 그곳으로 향했다.
행여 누가 보고 오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는 무조건 문밖에서 용건을 말하고 돌아설 작정이었다.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수는 사실 디트리히 말고도 더 있었다. 한스 교수라든가, 펠라인 교수라든가. 그들도 학생들에게 창술이나 기마술, 궁술 등을 가르치고 검을 쓰는 법도 아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로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다. 에르나가 항상 안톤 베커 교수에게 이 수업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던 건, 그가 가장 강했고 에르나를 버텨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톤이 없는 지금 그녀와 붙어서 쓰러지지 않고 학생들에게 본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디트리히뿐이었다.
그녀 개인적인 사정으로 치자면 당연히 이 과정을 누락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디트리히와 마주하는 것 자체로 그녀에게는 부담이 컸다. 그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자꾸만 가슴이 들끓었으니까.
그래도 에르나는 이 수업을 꼭 해야만 했다. 3년 전까지 이 안락한 아카데미가 아니라 쓰러진 자들의 피를 밟고 다녔던 에르나 랑케가, 제 후학들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은 것이 그 수업에 있었다.
그러니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부탁하러 가는 김에 디트리히가 멋대로 놓고 간 물건도 돌려줘 버리기로 했다. 낙낙한 치마에 숨겨진 주머니에 바로 그 낡은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천근만근 무거웠다.
내키지 않는 걸음이라 느릿했지만 결국에는 디트리히의 방문 앞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에르나는 ‘디트리히 반 클라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 앞에 서서 가슴 위에 한 손을 얹었다. 휴, 하고 한숨을 내쉬어 보았지만 술렁거리는 가슴은 썩 진정되지 않았다.
“괜찮아. 수업 협조 요청이잖아. 별것 아니야.”
문을 열고 마주한다고 해서 디트리히가 그녀를 방으로 끌어들여 또다시 주인이 되어달라 조르거나 하진 않을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똑똑똑.
문을 세 번 두드렸는데 안에서 곧장 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슬쩍 문 아래쪽을 살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니 안에 사람이 있는 건 분명했다.
똑똑똑.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인기척이 들렸다. 어쩐지 안에서 두 사람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이 시간에 디트리히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니, 에르나는 무의식중에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직접 열어줄 생각은 없는지, 안에서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르나는 잠시 머뭇하다가 문을 열었다.
그녀가 마주한 것은 언제나처럼 편안한 웃음을 짓는 디트리히였다. 그러나 에르나는 그를 보고 예의상으로라도 웃어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녀를 보고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았다. 다만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에르나에게 말을 건넨 건 게다가 디트리히도 아니었다.
“어머, 에르나 교수. 웬일이야?”
반가운 척하지만 분명 달가워하지 않는 세이라의 목소리에 에르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시간에 세이라가 디트리히와 마주 앉아서 있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디트리히는 늦은 시간에 그녀를 불러놓고 보란 듯 세이라와 함께 있었는데, 그 의도가 읽혀서 에르나는 기분이 상했다.
게다가 세이라는 아주 사적으로 그를 방문했다는 걸 티 내기라도 하듯, 그녀의 늘씬한 몸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실크 가운 차림이었다. 슬쩍 꼬아 올린 다리를 덮었던 슬립이 흘러내려서 날씬하고 탄력적인 긴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다만 디트리히가 그쪽으로 시선을 조금이라도 주었는지는 에르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 디트리히는 그의 방에 찾아온 에르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세이라가 그를 유혹하려고 하거나 말거나 상관할 바는 아니지.’
많은 이들이 디트리히를 노리고, 그의 곁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카데미 사람들이라 해서 무조건 연구와 학업, 출세라는 쪽으로 디트리히와 연관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지금 눈앞에 있는 세이라처럼 말이다.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매력적인 교수로 일컬어지는 금발에 아름다운 세이라 빈클러는, 줄을 잘못 서서 현왕 치세에 힘을 쓰지 못하는 가문의 장녀라 했다. 그녀는 언제든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그런 세이라에게 나타난 디트리히는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동아줄이었다. 저 줄을 잡아야 하늘로 올라가 마침내 고귀하고 부귀한 삶을 누리게 되리라고, 그녀는 확신하고 있으리라.
에르나의 불쾌감은 세이라 쪽으로는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이라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녀와 디트리히를 두고 다툰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세이라 빈클러는 에르나에게 조금도 위협적이지 못했다.
‘어차피 내가 부른다면 그는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을 텐데.’
저 세이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에르나는 디트리히를 발밑에 둘 수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디트리히는 모조리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을 테고.
그것이 실제가 되지 못하는 건 에르나가 여전히 그러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묘한 우월감을 느끼게 했다.
다만 조금 짜증스러운 것은 저 보란 듯 세이라를 이 시간에 방에 들이고도 담담한 얼굴을 한 디트리히였다. 딴에는 그녀의 질투라도 유발해 보려는 속셈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디트리히는 제법 괘씸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주인은 에르나 하나뿐이라고 열렬히 고백해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밀스러운 주점을 들락거렸다. 오해하기 좋게 방에 유혹할 생각 만만인 여자도 끌어들였고. 일부러, 에르나와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말이다.
참으로 건방진 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르나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세이라가 조금 뾰족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에르나 교수. 뭔가 오해를 하려는 거 같아서 미리 말해두려는데…….”
“관심 없으니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라고요?”
“클라인 교수님께 부탁드릴 게 있었는데, 제가 때를 잘못 맞춰 찾아온 모양입니다. 다음에 말씀 나누죠.”
제법 목소리가 쌀쌀맞게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돌아가 버릴 듯한 그녀의 말에 디트리히가 부드럽게 몸을 일으켰다. 클라인 공작 각하, 하고 속살거리며 세이라가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슬쩍 잡으려 했지만 디트리히는 예의 바르게 밀어냈다.
“다른 손님을 맞이해야 하니, 빈클러 교수님은 이만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하지만 각하, 제 이야기 아직 안 끝났…….”
“랑케 교수님과 선약이 있었거든요.”
그는 배 언저리쯤에서 불안하게 꼼지락대는 세이라의 손을 가볍게 붙잡아 올렸다. 그의 허리가, 고개가 나붓하게 수그러들었다. 그의 반반한 이마가 세이라의 손등에 엄숙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런 그의 예의 바른 인사를 두고 세이라는 화를 낼 수도 없었는지 콧잔등을 잠시 일그러트렸다가 곧 관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할 수 없지요. 다만 오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에, 부탁드려요. 꼭요.”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빈클러 교수님.”
사뿐사뿐 걸어 나오는 세이라의 얼굴에는 제법 공들인 화장도 얹혀있었다. 그녀는 에르나의 곁을 지나며 대충 고개만 까닥하고는 그대로 디트리히의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런 세이라를 따라 에르나도 몸을 돌리려 하는데, 곧장 손목이 붙잡혔다. 그녀는 잡힌 손목을 한 번 보고 이어 디트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난처하거나 당황한 듯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조금 부끄러운 듯 보였다.
“가지 마세요.”
“이거 놓으시죠, 클라인 교수님.”
“하실 말씀이 있다고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할 생각 없으니, 놔요.”
“…주인님, 제발요.”
그의 입에서 ‘주인님’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에르나의 눈빛이 돌연 바뀌었다. 그녀는 잡히지 않은 한 손을 번쩍 뻗어 디트리히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녀가 힘주어 밀자 디트리히는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자물쇠가 저절로 잠겼다.
그대로 밀려난 디트리히의 다리가 응접실 소파에 가 턱 걸렸다. 앗, 하는 사이에 그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엉성하게 벌어진 그의 사타구니 사이로 에르나의 무릎이 닿을 듯 파고들었다.
에르나는 어느새 자유로워진 나머지 한 손까지 들어 그의 옷깃을 꽉 틀어쥐었다. 그녀가 힘껏 팔을 당기자, 그녀보다 한참 더 큰 남자의 몸이 순순히 끌려왔다. 어느새 눈높이가 달라져 버려 디트리히는 에르나를 마음껏 올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좋아서 그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으르렁대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주인님? 네가? 이 상황에 나한테 그런 말을 입에 담아?”
나를 놀려먹으려는 거지. 예의를 집어치운 에르나의 얼굴에는 짜증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멸시와 가소로움에 디트리히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그의 주인님이었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얼굴 근육이 풀려서 디트리히는 헤실 웃었다. 그가 좋다며 웃는 것이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서 에르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저한테 화가 나셨어요, 주인님?”
“세상에 어떤 개새끼가 제 주인을 시험해?”
“저는 그저 주인님이 절 봐주기만 바랐을 뿐인걸요.”
“감히, 그런 방식으로 말이지.”
“화가 나신 만큼, 혼내 주세요…….”
디트리히의 커다란 두 손이 그의 멱살을 붙들고 있는 에르나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사나운 눈길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욕망으로 가득 찬 동굴 같은 입 속에서 붉은 혀가 뱀처럼 기어 나와 그녀의 손가락을 핥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할짝대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손가락을 뺨에 볼우물이 패도록 빨아댔다.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껍게 빨아대는 디트리히의 눈이 요물처럼 휘었다.
고작 에르나의 손을 빠는 것만으로도 디트리히의 바지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살덩어리가 점점 단단해져 갔다. 그리 두껍지 않은 옷 너머로 뜨거운 막대 같은 것이 느껴지자 에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질척이는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혀가 길게 훑고 지나가는 살결이 근질거렸다. 에르나는 제 손을 정성스레 핥는 디트리히를 가만히 보고 있는가 싶더니, 손을 비틀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혀를 꽉 잡아챘다.
“더럽게. 누가 멋대로 핥으래.”
“즈이히, 하아, 으읍!”
“버르장머리 없는 개 같으니라고.”
디트리히의 입 속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혀를 바짝 눌렀다가, 당겨댔다. 순식간에 말할 자유를 잃은 그는 헐떡이며 그녀의 손에 자신의 나약한 살덩어리를 맡겼다. 입천장을 긁고, 혀 아래를 자극해 대는 손길에 어느새 턱에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으읏, 헉…….”
난폭한 손길에 숨마저 막혀 어느새 그의 파란 눈동자에는 눈물마저 고였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흘러내리는 걸 고스란히 보아놓고도 에르나의 얼굴은 차갑게 굳은 채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개처럼 취급받고 싶다는데.
그녀의 머릿속은 어쩐지 단순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한 손이 디트리히의 결 좋은 금발을 잡아채고는 뒤로 홱 젖혔다.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녀의 손톱이 혓바닥을 긁고 손끝이 혀뿌리 근처를 짓누르면 디트리히는 숨을 멈추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의 안쓰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푸른 눈이 흐려질 때쯤이 되어서야, 에르나는 그의 입을 유린하던 손을 빼냈다. 겨우 입의 자유를 되찾은 디트리히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기침했다.
“허억, 컥! 콜록콜록…….”
“이런 걸 원했던 거 아냐? 왜 울어?”
빙그레 웃으며 에르나는 침으로 축축해진 손을 디트리히의 뺨에 문질렀다. 조금 지친 얼굴로 헐떡이며 그녀를 보던 디트리히의 입매가 서서히 묘하게 올라갔다. 그는 에르나의 손에 제 뺨을 밀어붙이며 나른히 웃었다. 마구잡이로 다뤄진 탓에 갈라진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맞아요, 주인님.”
“…….”
“건방진 개를 혼내주세요.”
이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디트리히는 지금 기쁨으로 심장이 터져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짜 이름 뒤에 숨지도 않고, 다른 얼굴로 다른 사람인 척하지도 않고, 디트리히 반 클라인으로서 에르나 랑케에게 짓밟히는 순간을.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왔다.
그녀는 조금도 모를 것이다. 성인이 된 에르나가 아직 어리기만 하던 10대의 디트리히를 떠났을 때부터, 오로지 그의 목표는 에르나를 되찾는 것이었다. 디트리히가 자신의 것이라며 예뻐해 주고 애정을 쏟았던 에르나를 그는 놓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룬 모든 일이 전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입술이 환희에 차서 다시 한번 그녀를 찾았다.
“주인님, 제가 당신의 개잖아요.”
에르나의 녹색 눈동자가 어둑해졌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화가 난 것 같던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그녀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곧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앉아 헐떡이는 디트리히를 훑어보는가 싶더니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내 개야? 정말로?”
“정말이에요, 주인님.”
“그래? 아무한테나 몸 굴리는 발정 난 개새끼가 아닌 걸 내가 어떻게 믿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술집 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때려달라, 밟아달라 애걸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증명할 건데?”
“주인님이 아니면…….”
“아, 맞다.”
마치 큰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에르나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디트리히, 나 아니면 이것도 못 세운다고 그랬지.”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신발에서 빠져나온 조그맣고 하얀 발이 디트리히의 다리 사이로 천천히 파고들고 있었다. 겨우 발끝이 살짝 닿았을 뿐인데, 디트리히는 허리를 들썩이고는 더운 숨을 토해냈다.
에르나의 손에 농락당했던 그의 붉은 혀가 천천히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는 제 고간을 슬슬 간지럽히듯 건드리고 있는 그녀의 발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발끝에서 발등으로, 발목에서 무릎으로 서서히 올라왔다. 그의 시선이 다리를 핥으며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에르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9년 전에도 지금에도, 심지어 디트리히가 디트리히인 줄 모르고 봤을 때부터 이 남자는 너무나도 에르나의 침샘을 자극해 댔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둘의 눈동자 모두에 이미 불길이 일어난 지 오래였다.
마침내, 주인이 그가 원하는 먹이를 던져주었다.
“바지 벗어. 발정 나서 꺼덕대는 네 더러운 좆부터 꺼내 봐.”
그 말에 디트리히가 환하게 웃었다. 그건 지금 두 사람의 상황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였다.
수치를 느끼지도 않는 듯 디트리히는 기꺼이 제 바지 앞섶을 풀어 헤쳤다. 속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던 건지, 그저 바지만 끌러냈을 뿐인데 흉흉하게 일어선 페니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붉다 못해 검게 보일 정도로 달아오른 그 단단한 살덩이에 새하얀 발가락이 슬며시 올라가는가 싶더니, 곧장 그의 페니스를 꾹 짓눌렀다.
“아……!”
“대체 뭘 했다고 이렇게까지 세웠어?”
비난하는 것도, 비웃는 것도 아닌 목소리였다. 오히려 덤덤한 듯한 그녀의 말투에 디트리히는 더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손이 조심스레 에르나의 발을 만지려 하는데, 그녀가 단호하게 제지했다. 발끝에 힘이 더욱 바짝 들어가자 디트리히의 허리가 앞으로 구부러졌다.
“손은 옆에 얌전히 두는 게 좋을걸.”
“하아, 윽……. 네, 주인님.”
“정말이지, 어릴 땐 이런 발랑 까진 아이가 아니었는데.”
하아, 하고 낮은 한숨을 내뱉은 에르나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녀의 발이 서서히 검붉게 달아오른 페니스의 뿌리 방향으로 나아가자 그는 허리를 움찔대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의 머리색을 닮은 가슬가슬한 음모에 발끝이 닿고, 속으로 파고 들어가 아랫배를 세게 짓눌렀다.
“흐으, 읏.”
디트리히의 몸이 달달 떨려왔다. 그의 코앞에, 얇은 치맛자락으로 덮인 에르나의 동그란 무릎이 있었다. 거기에 입이라도 맞출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치마에 코를 파묻고 숨을 들이마시면 얼마나 향기로울까.
하지만 착한 개는 멋대로 행동하면 안 됐다. 그의 주인인 에르나가 손대는 것도 금했는데 입술을 허락할 리 없었다. 디터로서 그녀를 만났던 밤, 디트리히는 그녀가 얼마나 다정하고 자상한지, 반면에 얼마나 단호하고 매서운지 이미 겪었다.
그녀는 그들이 어렸을 때보다 훨씬 황홀할 정도로 멋진 주인이 되어있었다.
다시금 에르나의 발이 뿌리에서 귀두로 물러나기 시작하자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젖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고작 그녀가 발로 몇 번 문질렀을 뿐인데, 디트리히는 곧장 사정해 버릴 것만 같았다.
에르나가 허락만 해준다면, 당장이라도 제 음낭에 든 정액을 모조리 쏟아내도록 짜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 이런 음란한 수캐가 다 있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디트리히를 모욕하기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듯 들렸다. 그는 이것이 에르나라는 주인의 특징임을 알았다. 이렇게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말이 제 개를 얼마나 수치스럽게 만드는지, 그녀는 과연 알까.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발가락들이 맑은 액을 흘리는 귀두를 꼭 쥐기라도 할 것처럼 움츠러들었다가, 불똥이라도 끄듯 비벼 밟았다.
“헉, 허윽.”
“허락할 때까지 참아야 해. 알고 있지?”
“으, 네.”
“네가 원한 거잖아.”
보드라운 작은 발이 일부러 자꾸만 귀두를 짓누르고 긁어댔다. 아랫배를 마구잡이로 후려치는 사정감을 참아내는 디트리히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그의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매달렸지만 에르나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했다.
그녀의 발은 기둥만 건드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페니스 아래쪽을 훑으며 지나간 발가락들이 말랑한 음낭을 굴리자, 디트리히는 순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 으! 주인, 님……. 저, 저 쌀 것 같…….”
“당장 손 안 떼?”
흐으, 흐으, 하고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디트리히는 이를 악물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억지로 허리를 다시 펴고 앉았다. 그런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에르나가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손 한가득 쥐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에르나의 얼굴을 마주한 디트리히가 힘겹게 웃었다.
“죄송, 합니다. 멍청한 개가, 주인님의 명을 어겼어요.”
“못 참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
“아니, 아니에요!”
그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자신을 그녀의 개로 받아들여 줄 듯한 에르나가 떠나도록 둘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디트리히는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무언가 알아내려는 듯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던 에르나가 그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욕망에 전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참으라고 했지만, 에르나는 디트리히가 참아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차라리 빨리 싸게 해버리고 돌아가 버리는 게 어떨까 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고 나니까, 땀에 젖은 이마와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헐떡임을 보니까, 달달 떨리는 허리와 손을 보니까…….
어느새 그녀의 속옷도 축축하게 젖은 채였다. 찌르르하게 약한 불꽃이 튀었다가 가라앉고 또 튀었다가 가라앉았다. 제 아래가 자꾸만 움찔대는 걸 에르나는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이성을 단단히 붙들어야 하는 건, 에르나 쪽이었다.
그녀는 턱에 힘을 꽉 주고는 발로 디트리히의 성기를 확 밀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다시 세워져서는 배에 꽉 눌려 붙은 페니스가 저릿저릿한지 디트리히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에 배어난 옅은 땀이 고스란히 보였다.
일부러 에르나는 발에 힘을 더 주어 밀어붙였다. 어차피 그녀의 힘 정도로는 디트리히의 좆을 아무리 세게 밟아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더는 참아내지 못하게 자꾸만 자극을 주는 것뿐이었다. 이래도 버틸 거야? 이래도? 이렇게 해도? 그녀가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뻣뻣하게 선 성기를 짓밟는 발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주이, 힉, 아, 아윽……!”
드득, 드득. 가죽 소파를 손톱으로 긁고 뜯어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물리칠 수 없는 절정에 휩싸인 디트리히가 허리를 튕겨댔다. 그의 목과 이마에 핏줄이 바짝 올라왔다. 바지가 흘러내려 드러난 사타구니와 아랫배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그 움직임이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에르나는 마지막으로 발에 힘을 꾸욱, 주었다.
그 순간 디트리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입이 벌어지고 목에서 소리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꺽꺽대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요도에서 희멀건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참을 대로 참았던 정액은 제멋대로 사방으로 튀었다. 뜨끈하고 물컹한 점액질이 에르나의 발과 발목에, 그리고 치맛자락에도 묻었다.
그녀는 그 광경을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번뜩이고 있었다.
바닥까지 짜낼 듯 끙끙대며 힘겨워하던 디트리히의 어깨에서 얼마 후 힘이 쭉 빠졌다. 사정해 버린 그의 페니스는 조금 기운을 잃었지만 여전히 흉흉하게 보일 정도로 불뚝 서있었다. 질척해진 발로 에르나는 그의 성기를 슬슬 문지르며 비웃었다.
“참으라고 했는데, 못 하잖아. 그러면서 무슨 내 개를 하겠다고 그래.”
“하으, 잘못, 잘못했어요.”
“디터일 때는 좋았는데. 디트리히 님은 영 아니네.”
“아니에요, 주인, 님. 하아, 제가 더, 잘… 잘할게요, 네?”
그는 여전히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애원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사정감을 자꾸만 자극하는 에르나의 발을 조심스럽게 붙든 그가 물었다.
“더럽혀서 죄송합니다. 제가 주인님의 발을, 깨끗하게 해드려도 될까요?”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에르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게 분명하지. 그녀는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다.
‘너를 개로 삼을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이제 와서 왜, 자꾸 흔들리고 그러는 거야. 에르나 랑케, 정신 차려.’
그녀가 스스로를 탓하고 욕하는 사이, 대답이 없는 것을 허락으로 이해한 디트리히가 손을 뻗었다. 그의 뜨겁고 큰 손이 에르나의 손을 유리 인형 만지듯 잡고는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디트리히가 음란하게 숨을 헐떡대며 앉았던 곳에는 에르나가 앉고, 그녀의 발치에는 디트리히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옷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정쩡하게 풀린 바지춤과 그 사이에 축 늘어져 버린 커다란 살 몽둥이가 에르나의 눈에 들어왔다.
고귀하게만 떠받들어졌을 공작가의 주인이, 천박하디천박한 꼴로 제 앞에 이러고 앉아있는 게 부정할 수 없게 기꺼웠다. 어쩌면 과거의 그녀는 무의식중에 이런 걸 원했는지도 몰랐다. 때 묻지 않은 듯 보이는 공작가의 소중한 후계를, 가진 거라곤 마법 능력밖에 없는 그녀만 바라보고 언제든 배를 까뒤집고 드러누울 수 있는 개새끼로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그사이 디트리히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정액 범벅이 된 에르나의 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발가락 끝에 키스한 그가 입을 벌려 엄지발가락을 머금었다. 혀를 굴려가며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빨고 핥은 그의 얼굴은, 마치 그녀에게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발가락을 둥글리고 핥는 감각이 에르나를 점점 달아오르게 했다. 디트리히는 그저 발가락에서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발등도, 발바닥도 혀로 천천히 싹싹 핥더니, 뒤꿈치를 살살 깨물어댔다. 발목 안쪽 움푹 팬 자리에 입을 맞춘 그가 점점, 점점 위로 올라왔다. 디트리히가 하는 양을 그녀는 복잡한 눈빛을 한 채 바라보았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종아리 살을 한입 베어 문 것만으로도 디트리히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조금 전에 기운이 빠졌던 페니스에 다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흰 다리 여기저기에 점점이 남은 제 체액을 핥아 먹으며 디트리히는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길 바랐다. 부들부들한 연갈색 천은 여전히 에르나의 무릎부터 그 위를 모조리 가리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종아리부터 무릎 뒤쪽까지를 쓸었다.
“하아…….”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헐떡이며 에르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주인님, 그의 여왕님, 그의 지배자가 영롱한 녹색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디트리히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제 아랫도리를 슬슬 문질렀다. 다시금 시작된 쾌락의 고문에 그는 심장이 갈가리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눈앞에 그 긴 시간 동안 갈구했던 에르나가 있는데, 그녀의 짙은 향이 이토록 제 코를 잡아끄는데…….
“주인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에르나를 불렀다.
“제가, 조금 더 주인님을 맛보게 해주세요. 제발.”
디트리히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질척이는 욕정이 에르나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엘로서 디터에게 손댔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지독하리만치 디트리히는 그녀의 취향이었다.
신의 사자처럼 아름답고 정결한 얼굴을 한 남자가 정욕에 헐떡이는 얼굴이 좋았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괴로운 신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더운 숨이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과거를 날려버렸다.
이번에도 역시 에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회피이며 기만이었다. 주인이고 싶은 마음과 아니어야 한다는 마음이 싸우니, 무책임하게 구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가장 저열한 욕망 쪽으로 디트리히는 항상 움직였다.
“너무, 달아요. 주인님, 주인님…….”
디트리히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이는 듯했다. 에르나는 무의식중에 숨을 흡 들이마셨다. 다리와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가면서 바르르하고 안쪽 허벅지가 떨려왔다.
디트리히가 요망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그녀의 치마를 들쳤다. 치맛자락을 걷어내는 대신 그는 그 안으로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금세 치마 안쪽이 남자의 뜨거운 숨으로 가득 찼다.
깨끗한 허벅지에 빈 곳 없이 입을 맞추며 디트리히는 가장 습하고 달콤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얇은 한 겹 천 아래에서 스스로의 거친 숨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디트리히는 두 손으로 다리 안쪽의 말캉한 살을 잡고 옆으로 벌렸다.
분명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더러운 개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하던 주인님이 그를 보고 흥분했다는 증거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속옷이 쾌감에 젖어 동그랗게 얼룩진 것을 보자 디트리히는 아찔해졌다.
주인님도 나를 원하시는 거야.
가슴속에 환희가 차올랐다.
그는 혀를 내밀어 젖은 속옷 위를 길게 핥았다. 손으로 붙든 에르나의 다리가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도톰하고 말랑한 살을 이로 긁어내리자 머리 위에서 억누른 신음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그는 정신없이 에르나의 아랫도리에 달려들었다. 게걸스럽게 핥고 빨아댔다. 어느새 그녀의 애액이 적신 부분보다 디트리히의 침으로 물든 부분이 훨씬 커졌다.
“으응, 읏, 하아아……! 아, 으!”
자꾸만 에르나의 샘에서는 디트리히를 혼몽하게 만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속옷을 붙잡고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단련된 기사의 손아귀 힘에, 얇디얇은 한 장의 천은 속절없이 부드득 소리를 내며 넝마가 되었다. 찢어진 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발그레한 살점은 엷은 음모로 덮인 채였다. 이미 질척하게 젖은 그곳은 번들거리며 디트리히를 유혹해 댔다. 물고, 빨고, 핥고, 삼키라고.
그때 열기로 가득 찬 디트리히의 머리를 에르나의 손이 붙들었다. 그는 흠칫 몸을 굳혔다. 이대로 밀려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치고 올려오려는 그 순간, 그녀가 꾹꾹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손, 쓰지 마.”
오로지 입으로만 그녀를 기쁘게 하라는 주인님의 명령에 디트리히는 환호했다. 그의 혀가 단박에 붉게 물든 살점 사이를 파고들었다.
“흐읏!”
에르나는 눈을 찡그리며 디트리히의 머리를 더욱 세게 붙들었다. 그의 혀가 살점을 헤집고 그 안에서 흥분으로 일어선 가장 민감한 돌기를 찾아내자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짓눌렀다가, 이로 긁고, 잇새로 빨아들이는 디트리히의 입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흐앙! 아, 아흑, 앗, 잠, 까, 아아아!”
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더 열렬히 주인의 민감한 감각을 일깨우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츄웁츄웁, 하는 음탕하고 질척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왈칵하고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따뜻한 애액을 마치 귀한 샘물인 것처럼 디트리히는 모조리 받아먹었다.
그의 물건은 유혹적인 주인님의 향기와 맛에 어느새 다시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제 버릇없는 좆을 손으로 꽉 쥐었다. 간헐적으로 흔들지언정 사정하지 않으려고 엄지로 요도구를 꽉 짓눌렀다.
그는 혀를 뾰족하게 해서는 오물거리며 삼킬 것을 찾는 질 입구로 쑤셔 넣었다. 에르나의 안쪽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혀를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침입자의 감각에 에르나의 둔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앗, 아……!”
그녀의 다리가 반사적으로 오므라드는 것을 디트리히의 손이 단단히 막았다. 그의 혀가 에르나의 질 안팎을 드나드는 사이에 코끝은 자꾸만 충혈되어 민감해진 음부를 헤집어댔다. 에르나의 허리가 파득 튀었다.
미칠 것 같았다. 미치도록, 좋아서 에르나는 스스로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디트리히를 밀어내야 한다고 외치는 이성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당장 이 안에 무언가를 쑤셔 넣고 마구 문지르고 긁고 싶었다. 거친 숨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그녀는 가벼운 절정에 다다랐다. 발끝이 오므라들고 다리가 뻣뻣해졌다. 치맛자락에 싸인 디트리히의 머리를 더욱 힘껏 붙들고 제 가랑이로 밀어붙였다. 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는 듯, 디트리히는 더욱 열렬히 그녀의 음부를 탐했다.
“하으, 아앗……!”
와르르 흘러내리는 애액을 느끼며 에르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디트리히의 머리를 밀어냈다.
잠시 버티는가 싶던 디트리히는 곧 그녀의 치마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붉게 상기된 채였다. 땀에 젖은 디트리히의 얼굴과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해소하지 못한 정욕이 읽혔다.
에르나는 할딱이며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디트리히의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황홀한지 디트리히는 눈을 내리깔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애액과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로 디트리히가 물었다.
“저, 착한 개지요……?”
“…….”
“제 주인님이 되어주실 거죠, 네?”
대답하는 대신, 에르나는 한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만 조금 전까지 쾌락에 겨워 못 이긴 교성을 내던 게 무색할 정도로 냉랭하게 말했다.
“일어나 봐.”
디트리히는 어정거리며 일어났다. 바지가 흘러내려 무릎에 걸쳐졌다. 배꼽까지 바짝 올라붙도록 발기한 페니스가 에르나의 눈높이에 놓였다. 에르나는 그걸 보고 픽 웃더니, 손가락으로 귀두를 탁 튕겼다.
“흐윽……!”
“주인님 밑을 빨면서, 또 세웠어.”
“저는, 주인님에게만… 발정하는 개니까요.”
에르나는 그의 것을 손에 꽉 쥐고는 디트리히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결심한 듯, 그녀는 남은 한 손으로 치마를 뒤적였다. 그리고 손에 든 것으로 그의 성기 뿌리 쪽을 꽉 죄어버렸다. 아플 만치 강하게 압박하는 힘에 디트리히의 허리가 뒤로 빠지자, 에르나의 손이 사정없이 그의 성기를 내려쳤다.
“아윽!”
“허리 멋대로 움직이지 마.”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렇게 내 개가 되고 싶으면.”
그녀는 여전히 디트리히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보지 않고 있으면서도 에르나의 손톱은 정확하게 그의 요도구를 찾아 움직였다. 약간 자란 그녀의 손톱이 멋대로 그 갈라진 틈을 헤집어댔다.
“아, 아학, 주인, 님 아, 아파……!”
“어디 한번, 내일까지 참아봐.”
그제야 디트리히는 제 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그가 에르나에게 제발 목에다 걸어달라고 부탁했던 그 가죽 목걸이가 성기 뿌리를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이래서야 아무리 그가 사정하고 싶어 발버둥 쳐도 쌀 수 없었다.
다정한 손길로 에르나는 그의 바지를 추켜올렸다. 그러고는 단추를 잠그고, 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바지를 툭툭 치고 쓸어내리며 정리하는 그녀의 손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디트리히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쥔 채로 참아냈다. 에르나가 허리를 멋대로 놀리지 말라고 한 말 때문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정자세를 유지하느라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에르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 사이가 허전했지만 개가 날뛰도록 두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채 저를 바라보는 디트리히의 뺨을 톡톡 두들겼다.
“네가 원한 거잖아, 그렇지?”
“네, 그렇, 습니다.”
“내가 풀어줄 때까지 그대로 잘 차고 참아봐. 성공하면… 네 주인이 될게.”
그녀는 한 발 옆으로 물러났다. 디트리히와의 거리를 조금 벌린 그녀는 우습게도 귀족에게 하듯 나붓하게 무릎과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그럼 부디 평온한 밤 되시길, 디트리히 님. 참, 부탁드리려던 것은 내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유히 그의 방을 떠나는 에르나의 뒷모습을 디트리히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탁,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디트리히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 꿇었다. 아직 에르나의 냄새가 남은 소파에 얼굴을 처박고 그는 허리를 흔들었다.
“주인님, 주인님, 흐으, 아… 주인님…….”
소파에 정신없이 비벼대고 짓눌러도 강제로 틀어막힌 페니스로는 욕정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제 사타구니를 주무르며 디트리히는 하하, 웃었다.
오랜 기간 소망해 온 그녀를 완전히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를 참아내는 일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의 누님. 나의 에르나.
그의 혀가 주인님의 이름을 그려냈다.
내일이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 * *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일부러 디트리히를 조금 늦게 찾아갔다. 그가 학생들의 아침 훈련을 봐주고도 제법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연무장에서 많은 학생을 상대하려면 그 몸 상태로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방으로 향했다. 디트리히에게 주어진 교수 연구실은 부재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긴, 그 상태로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연구실에 있긴 곤란하겠지.’
디트리히를 만나면 실컷 비웃어줄 생각이었다. 참을 수 있다더니. 주인 말 잘 듣는 개라더니. 어디 이 꼴 좀 보라고, 이미 네 손으로 그 주인님이 직접 매어준 줄도 풀어버리지 않았느냐고. 그를 단념시킬 생각을 하니 가슴에 얹힌 것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어젯밤의 해프닝은 단순한 사고 정도로 넘기자고. 아니면 그냥, 네 소원을 풀어주는 거로 치자고. 그렇게 말하고 완전히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디트리히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에르나는 돌처럼 굳었다.
소파 위에 흐트러진 자세로 앉은 디트리히는 숨을 새액새액 힘겹게 내뱉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웃었다. 그의 몸은 땀으로 젖은 채였고, 다리 사이는 숨기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주인님, 이… 말씀하신, 대로, 흐으, 참았, 참았습니다…….”
멍청한 얼굴이 된 에르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곧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어서는 디트리히에게 다가갔다. 그의 벌린 다리 사이에 앉은 그녀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검붉은 페니스가 단단하게 일어선 채로 그대로 툭 튀어나왔다. 어젯밤에 그녀가 묶어둔 가죽 목걸이도 그대로였다.
입술을 잘근 깨문 에르나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디트리히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듯 그는 눈가가 일그러진 상태에서도 헤실헤실 웃었다.
“제게, 시키신 거, 니까요, 아, 으흣……. 주인, 님, 아… 칭찬, 칭찬해, 주세요.”
이 꼴을 한 채 학생들 앞에 나섰을 그를 생각하니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에르나가 낮게 으르렁댔다.
“이 상태로 아침 훈련을 봐줬으면, 아이들이 네가 발정 났다는 걸 다 알아버렸을 텐데.”
“아니에요, 저, 잘… 잘 참고 숨겼… 하으윽!”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귀두 끝을 튕기자, 디트리히가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토했다. 당장이라도 토정하고 싶은 성기가 꿈틀거렸다.
에르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그녀의 숨결조차도 자극인지 디트리히가 주먹을 단단히 쥐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에르나는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뜨거운 기둥을 쓸며 내려가 가죽 목걸이에 닿자, 디트리히가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절정을 속박하던 족쇄가 풀려나가자 그가 몸을 떨었다.
“아윽, 아, 아아아……!”
머릿속이 곤죽이 되는 것만 같았다. 디트리히는 자신이 허리를 멋대로 흔들어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손으로 페니스를 붙잡고 마구 흔들고 싶었지만, 에르나의 손이 그의 것을 감싸 쥔 채 놓지 않아서 그는 그녀의 손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배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것이 끌려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뿌리째 뽑혀 나간다는 게 이런 것일까. 디트리히는 귀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창밖으로 들리는 학생들의 소리가 먹먹해졌다. 숨을 끊어 쉬며 그는 울부짖었다. 밤새 그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잠들지 못하게 괴롭힌 쾌락이 온몸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어댔다.
“크읏, 흐으으, 아앗!”
그는 괴로워하며 허리를 잔뜩 구부렸다. 턱선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왈칵왈칵하고 쏟아져 나오는 정액은 끝이 없었다. 고환과 회음부, 사타구니 전부가 뻐근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내장이 떨릴 정도로 좋아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디트리히는 눈물을 흘렸다. 신음 사이사이로 계속 주인님을 찾았다. 주인님, 주인님.
그의 주인인 에르나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은 어느새 질척한 정액 범벅이 된 채였다. 그녀가 제 비루한 좆을 잡고 더 흔들어주길 바랐다. 디트리히는 헐떡이며 손을 움직였다. 에르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모조리 짜내고 나자 그는 실신할 것만 같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천국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그제야 흐려진 눈으로 디트리히는 에르나를 찾았다.
“주, 주인님……!”
당혹감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모조리 힘이 빠진 다리는 그를 지탱해 주지 못했다. 디트리히는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고 에르나를 덮치고 말았다.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짧은 신음이 울렸다.
그의 아래에 뺨과 목, 그리고 가슴팍에 희멀건 정액을 묻힌 에르나가 있었다. 금세 디트리히의 얼굴이 언제 흥분에 붉었었냐는 듯 하얗게 질렸다.
“죄송해요, 더럽혀서 죄송해요!”
“…됐으니까, 일어나 봐.”
디트리히가 달달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고 나자, 에르나가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졌네. 완전히 졌어.
에르나는 자신이 너무 디트리히를 얕보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9년이나 집착한 디트리히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너무나도 안일했다.
그사이 정신을 완전히 차린 디트리히가 휘청이며 일어나서는 어디에선가 손수건을 여러 장 들고 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에르나의 얼굴과 목에 묻은 제 정액을 닦아냈다. 연신 그의 입에서는 죄송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어 디트리히가 에르나의 젖은 왼손을 들어 올려 닦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선언했다.
“잘 참았어.”
“…….”
“그러니까 네 주인, 할게.”
그 말에 디트리히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그대로 굳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차오르는 열기가 에르나는 두려웠다.
그 9년을 오직 그녀의 개가 되기 위해서 기다렸다고 여길 정도로 에르나는 순진하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그녀에게 그 이상을 원하는 건 곤란했다.
얼른 에르나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뿐이야. 나에게 그 이상을 바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너와 나에게 가능한 건 이 주인과 개라는 관계뿐이야.”
“…네.”
의외로 순순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하거나 투정 부리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면 화를 냈을 텐데, 오히려 너무나 깔끔하게 물러나서 에르나 쪽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슬쩍 디트리히를 밀어냈다.
“이제 비켜.”
“죄송합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에르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앗, 하는 사이에 그녀의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에르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디트리히의 손을 밀어냈다.
“내 몸에 멋대로 손대지 마. 버릇없이.”
“주의할게요, 주인님.”
“필요할 때 부를 거야. 그리고 밖에서 이런 일 티 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디트리히의 입가에 천진한 웃음이 걸렸다. 아까부터 그는 에르나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채였다. 정말이지, 훈련이 너무 잘된 개라서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9년 사이에 에르나가 모르는 디트리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대로 그를 두고 돌아서려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주지시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혀를 차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너랑 플레이는 해도, 섹스는 안 할 거야.”
“섹스를 싫어하시나요?”
“아니, 너랑은 안 한다는 말이야.”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잘 덮어쓴 그의 웃는 가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개랑 섹스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일부러 빈정거리며 하는 말에, 디트리히는 조금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고개는 끄덕였다.
‘어쩔 수 없어.’
에르나는 굳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디트리히가 바란 탓으로 시작되었으니, 이 정도는 그가 감수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런 ‘이상한’ 관계라 하더라도 자극이 반복되다 보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언젠가 그녀라는 사람에게 질리면 금방 돌아설지도 모른다고, 에르나는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아쉬울 게 없는 사람 아닌가. 디트리히가 지금까지 에르나에게 집착하는 까닭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그가 거절당했던 게 기억에 너무 남아서일 수도 있었다. 에르나와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과거의 분한 마음이 희석될 테고, 그 후에는 그녀에게 작별을 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이 부디 빨리 오길 바랄 뿐이었다. 에르나에게 디트리히와의 관계가 길어지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하물며 성적으로 부딪치는데 말이다.
에르나가 이런 안온한 삶을 계속하려면 그녀의 인생에서 디트리히가 빨리 발을 빼줘야 했다.
일단 중요한 한 가지 일을 마무리했다 생각한 에르나는, 지난밤에 이미 했어야 할 부탁을 하기로 했다. 빨리 용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서 씻고 싶었다.
“이건 이거고……. 부탁드릴 게 있어요, 클라인 교수님. 일단 옷부터 추스르시고, 이야기 나누어도 될까요?”
어느새 그녀의 말투는 바뀌어있었다.
디트리히는 손끝으로 눈초리를 꾹꾹 누르다가 무릎을 세워 일어나 바지를 입었다. 그 짧은 새에 그의 얼굴은 주인을 갈구하던 개의 것에서, 평온함으로 무장한 공작 각하의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네, 그러시죠.”
“해마다 안톤 교수님이 제 수업을 도와주시곤 했어요. 보통 학기당 두세 차례 정도요. 그런데 교수님은 안 계시니, 클라인 교수님이 도와주셔야 해요.”
“어떤 거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려고 이 자리를 대신 맡은 거니까요.”
“감사해요. 다음 다음번 수업부터 연달아서, 가능하다면 세 번 와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녀는 손을 슬쩍 뻗어 엉망이 된 그의 손을 가리켰다. 정액이 말라붙은 자리가 조금 부옇게 변해있었다. 에르나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잘, 처리하시고요.”
“…제가 닦아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요. 전 제 방에 갈 테니까요.”
디트리히에게서 몸을 돌린 에르나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복도에 나오자마자 그녀는 얼룩진 가슴팍을 손으로 대충 가리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볼세라 두려운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절정으로 잔뜩 젖은 디트리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볼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