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 안녕.”
자신을 향해 인사하며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에르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답해주었다.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난 교정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학생들로 붐볐다.
다른 날보다 오늘 그녀의 기분은 꽤 좋은 편이었다. 다만 표정은 재미없을 정도로 딱딱했다. 학생들이 에르나가 기분 좋은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가볍게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코끝에 걸린 동그란 금테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에르나는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지난밤에는 진짜 좋았지.’
생각하지도 못한 월척이었다. 처음이라더니, 그렇게나 그녀의 입맛에 쏙 맞는 상대일 줄이야.
회초리를 휘두른 팔이 조금 뻐근하긴 했지만 이것조차도 기분이 좋았다. 남자의 탄탄한 둔부와 등에, 허벅지에 새겨진 붉고 가느다란 생채기들을 떠올리니 다시 배 안쪽이 짜릿해졌다.
디터라고 하는 그 남자는 그녀가 그날 밤 초짜 서브에게 베풀어보려 한 모든 것을 다 받아냈다.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밤이 좀 더 길었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의 그 커다랗고 튼실했던…….
“아, 진짜.”
에르나는 결국 발을 멈추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볼이 화르륵 불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남자의 성기를 보고 아쉬움을 다 느꼈다. 플레이하면서는 삽입 섹스는 하지 않는 게 에르나의 철칙이었지만 하마터면 어제 그 규칙을 깨버릴 뻔했다. 딱 봐도 아래로 삼키면 정말 끝내줄 것 같은 좆이었다.
‘주인님, 주인님……!’
디터가 스스로의 물건을 손으로 흔들며 자신을 애타게 불러대던 목소리가 귓가를 떠돌았다. 에르나는 두 손 아래에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몇 번이나 심호흡한 뒤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다시 손을 내렸을 때, 그녀의 얼굴에서는 흥분감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나 좋았는데.
조금 전의 환희는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약간의 시무룩한 기운만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에르나의 발걸음에는 조금 기운이 없었다.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남자는 고작 하룻밤 상대였다.
에르나는 장기적으로 만나 이런 식으로 플레이하고 성관계를 가질 상대를 두지 않았다. 우선은 그렇게까지 관계에 힘을 쏟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에르나는 자신의 취향이 결코 상식적이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이런 변태적인 취향을 가졌다는 게 괜히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조건 일회성의 상대만을 만났고, 만나더라도 마법으로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나갔다.
‘이런 식으로 쓰려고 배운 마법은 아니지만… 할 수 없지.’
어쨌든 어젯밤에는 정말 오랜만에 외모도, 성격도 전부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상대를 만났다. 늦은 시간까지 디터라는 남자를 괴롭혀대고 그가 지쳐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걸 보느라 그녀도 잠을 많이 자지 못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어떤 때보다도 좋았다.
다시 못 만날 상대였지만 한동안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에르나를 만족하게 할 만한 좋은 경험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연구실 앞에 다다라 있었다. 에르나의 손이 닿자 문은 소리 없이 슥 열렸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책들이 이리저리 날아 자리를 찾고 커튼이 젖혀지고 찻물이 끓었다. 에르나가 손을 댈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창문 앞의 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아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하아…….”
다리 사이가 근질거렸다. 속옷이 조금 축축해진 것도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지난밤은 끝내줬으니까.
이걸 동력으로 삼으면 한동안 연구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혹시라도 너무 아쉬우면 혼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금 방만한 자세로 앉은 채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휙 휘둘렀다. 연구실의 빈 공간에 그녀가 한창 구축 중인 새로운 마법진이 붉은빛을 뿜으며 떠올랐다. 여기저기 손볼 곳이 아직 많았다.
세기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에르나 랑케라 해도, 새로운 마법을 만드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기분도 좋고, 머리도 쌩쌩 돌아가니 오늘은 어쩌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그대로 에르나는 자신의 마법 속으로 침잠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 몽롱한 눈으로 마법진 곳곳에 손을 대던 에르나는 아스라이 들리는 작은 소음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멍하니 멈추어있는 그녀의 귀에 다시 한번 무슨 소리가 들렸다. 똑똑, 똑똑. 그건 분명히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한참 만에 소리의 정체를 인식해 낸 그녀의 초점이 겨우 명료해졌다.
피곤해진 얼굴로 에르나는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고는 허공을 문질렀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손보던 마법진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연구에 몰두하면 현실과 감각이 괴리되곤 했다. 물과 고체의 어느 중간쯤을 유영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 속에 있다 보면, 이렇게 반응이 늦곤 했다. 겨우 현실로 돌아오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교수님, 랑케 교수님!”
“아, 네. 들어와요.”
에르나의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문은 겨우 열렸다. 마법 연구를 하는 동안 보안 정도를 올려놓다 보니 그녀의 허가 없이는 문이 열리질 않았다.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아카데미 학장의 비서였다. 그는 얼마나 한참을 목청 높여 그녀를 부르고 문을 두드렸던 건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에르나는 난처함에 눈썹이 저절로 내려갔다.
“미안해요, 리카르도 씨. 연구 중이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오늘 전체 교수 회의가 있는데 랑케 교수님만 안 오셨어요. 모르셨어요? 학장님께서 당장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에르나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걸 내가 굳이 가야 해요?”
“오늘은 꼭 오셔야 합니다. 신임 교수 소개도 있고…….”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요?”
‘내 연구보다도 더?’라는 질문이 뒤에 생략된 말이었다. 평소라면야 리카르도도 당황스러워하며 ‘물론 교수님의 연구가 중요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꼭 오셔야 합니다.”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신임 교수가 온다고…….”
“안톤 베커 교수님 대신 오신 분인데요.”
“그럼 1년짜리 임시직이잖아. 게다가 나랑 상관도 없는 검술 가르치는 사람일 거고.”
에르나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리는 걸 알아챈 리카르도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갑작스레 몸이 좋지 않다며 휴직을 신청한 안톤 베커 교수 대신에 온 그는 1년만 검술을 가르칠 예정이었다. 게다가 에르나와는 딱히 자주 얼굴을 볼 사이도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주변에 무심한 데다,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닌 에르나 랑케를 굳이 서로 인사나 하는 자리에 부를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거기 가서도 어디 허공만 보다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올 게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래도, 꼭, 그녀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가셔야 해요.”
“…알았어요.”
리카르도가 이런 식으로 우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에르나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아마 지난주쯤에 알림을 받긴 했었던 듯도 했다. 다만 에르나는 이런 유의 행사에는 대부분 참석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녀를 오라 가라 하지 않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온다고. 그녀는 리카르도의 뒤를 따르며 그에게 짜증스럽게 물었다.
“누군데 그래요?”
“그게, 일단 가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뭐 황태자 저하라도 되세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분만큼이나 놀라운 분일 겁니다.”
그 대답에 에르나의 눈썹이 살짝 솟구쳤다. 그리고 학장이 굳이 에르나를 데리고 오라고 성화를 부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제법 대단한 인사가 오는 모양이니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괜히 나중에 인사하는 자리에 교수 하나가 빠져있었다고 무시하느냐는 등의 말이 나오면 학장도 곤란할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은 학장실 근처의 대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다들 모인 모양인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그녀가 들어서자 학장이 반색하며 환영했다. 학장의 옆자리에는 누군가 앉아있었는데, 교수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르나는 자기 자리를 향해 척척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를 보고 학장 쿠르트 메이어가 얼른 따라붙었다.
“랑케 교수! 어서 와요.”
“네, 학장님.”
미끈하게 생긴 그는 학장이라는 직함에 비해 상당히 젊었다. 햇빛에 노출을 조금도 안 한 듯한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욕망은 곧 부드러운 미소에 감추어졌다.
하지만 에르나는 그것을 금방 알아차렸고 금세 불쾌해졌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꼭 와달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죄송해요. 잊어버렸네요.”
“나도 랑케 교수 연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이해하지요? 오늘 오신 분이 정말, 정말 중요한 분이라서.”
“네, 네. 알겠습니다.”
그가 가까이 붙는 만큼 다시 거리를 벌리며 에르나는 고개를 몇 번이나 대충 꾸벅거렸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뒤에도 쿠르트는 계속 사과하다가 또 변명을 늘어놓다가 했다. 에르나는 그런 쿠르트가 짜증스러웠지만 그래도 상급자는 상급자라,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게 거의 홀로 떠들던 쿠르트도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대충 신임 교수 환영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언제나 회의나 행사가 있으면 그렇듯, 에르나는 조금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서는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젠가는 이게 다 끝나겠거니, 하며.
“예, 그럼. 오늘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일신상의 문제로 잠시 휴식을 취하러 떠난 안톤 베커 교수 대신 오시게 된 신임 교수를 소개하는 자리로…….”
뭐라 뭐라 떠드는 쿠르트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에르나는 아까 만들다 만 마법진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거기에 빠지자 또다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공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른 어떤 때보다도 크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회의 시간치고는 너무 시끄러워서 그녀도 결국 다른 짓 하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자세만은 그대로였다.
곧 기쁨과 기대, 그리고 약간의 비굴함이 묻어나는 쿠르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래서 베커 교수의 공석을 메워주실 분으로, 감사하고 영광되게도 이분께서 와주셨습니다.”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신임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선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에르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끔뻑거렸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바로 지난밤에.
에르나는 깜짝 놀라 신임 교수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역시나 거기에는 어젯밤 에르나가 착실하게 회초리를 휘둘러 온몸에 붉은 선을 그어준 남자, 디터가 서있었다.
디터의 눈이 교수들을 휘이 둘러보다가 에르나를 발견하고는 곱게 휘었다. 그 미소를 마주하자마자 에르나는 볼이 확 불타는 걸 느꼈다.
‘저 남자가 여기 왜 있어?’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디터가 자기소개를 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디트리히 반 클라인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처음 뵙는 분들도 있군요. 단 1년 동안이지만, 부디 동료로서 허물없이 대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에르나는 아예 동상처럼 완전히 얼어붙었다.
디트리히 반 클라인이라니.
그는 아주 여러 가지 면에서 유명한 남자였다. 양친의 불운한 사고로 겨우 스물한 살의 나이에 갑자기 공작가를 이은 것으로도 잘 알려졌고, 1년도 안 되어 가문을 완전히 휘어잡은 수완가로도 유명했다. 또 스물세 살에 황실 기사단장 자리에 오른 무시무시한 재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르나를 놀라게 한 건 그의 대단한 지위나 실력이 아니었다.
‘디트리히라고, 저 남자가?’
그녀는 디트리히 반 클라인을 잘 알았다. 아니, 이제는 잘 알았다고 하면 안 될 듯했다.
기억 속의 디트리히는 저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남들을 모조리 위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위압적인 키나, 에르나가 둘은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흉통이나, 커다란 손이나, 날카로운 눈과 베일 듯한 콧날이나……. 하여튼 저렇게 무서울 정도로 ‘남자’인 아이가 아니었다.
‘에르나 누님.’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거리는 금발에 새파란 눈을 반짝이는, 호리호리하고 선이 부드러웠던 소년. 처음 만났던 때 에르나보다 조금 작은 키였고 헤어질 땐 겨우 그녀를 웃돌았다. 조금 놀리면 쉽게 울먹거리고, 볼이 붉고 다정하게 웃으며 에르나의 마법을 보고 환하게 웃는, 지금보다 훨씬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디트리히는 그때의 그를 떠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나타난 그가 회의 상석에 앉아서 에르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에르나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디트리히가 너무나도 변해서, 어젯밤 디터라는 이름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도 몰라보고…….
하마터면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지난밤 그녀가 남자에게 저지른 그 모든 짓거리가 다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땀에 젖은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자신을 올려다보고 웃던 야한 표정의 남자가 떠올랐다. 잘 짜인 근육질의 몸을 고스란히 내보인 채로 무방비하게,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렸더랬다.
이 손에, 디트리히의 것을 붙들고 마구 흔들어댔다. 요도를 찌르고 벌리며 그가 애원하고 우는 걸 들으며 즐거워했다. 사정한 정액을 뺨에 발라주며 뭐라고 했더라.
우리 음탕한 강아지는 손만 대도 싼다고…….
현기증이 일어서 에르나는 눈을 감은 채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대로 사라질 수 있게 해주세요.
‘주인님, 하아. 주인니임…….’
디터의, 아니 디트리히의 붉은 입술이 속삭이던 그 단어가 들렸다. 이제 에르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릴 대로 질려있었다.
‘내가, 디트리히를, 그러니까, 디트리히에게 내가 무슨 짓을……!’
그사이에 소개를 마친 디트리히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보며 에르나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신임 교수가, 게다가 고위 귀족이기까지 한 디트리히 반 클라인이었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예의도 없이 사라지면 다들 에르나를 두고 수군댈 게 뻔했다.
쿵쿵대고 엇박자로 뛰는 심장을 한 손으로 꽉 누른 채로 디트리히를 바라보던 에르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어젯밤 자신은 지금 이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적갈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어깨에서 성의 없이 툭 잘라낸, 서늘한 연녹색 눈을 가진 에르나 랑케가 아니었다.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엘이라는 여자였다.
디터가 마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는 절대로 어젯밤의 그 여자가 에르나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서서히 그녀의 숨이 고르게 변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손도 얌전해졌고, 볼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겁먹게 만든 디트리히가 에르나의 앞에 다다랐다. 디트리히가 손을 내밀자 에르나가 그 손을 붙잡고 가볍게 이마를 갖다 대며 고개를 숙였다 일어났다. 아무리 그들이 이곳에서 동등한 교수로 있다고 한들 디트리히는 하늘 높은 공작가의 주인이며 왕이 아끼는 기사단장이었고, 에르나는 마법 실력 하나로 교수 자리를 꿰찼다 해도 평민이었다. 이런 예의를 차리는 것은 당연했다.
“디트리히 반 클라인입니다.”
“에르나 랑케입니다.”
인사를 마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침내 똑바로 마주쳤다.
그녀와 인사를 했는데도 디트리히는 마치 그녀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안도하는 것과 별개로, 의아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디트리히가 자신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이 알던 시절에 비해 정말 많이 변했지만, 에르나는 아니었다. 그때에 비해 키도 하나도 자라지 않았고, 외양도 거의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렇게나 모르는 척한다니.
설마 나를 잊은 걸까? 에르나는 눈을 깜빡이며 디트리히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어떤 특별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아, 이쪽으로. 여기는 세이라 빈클러 교수입니다.”
쿠르트가 디트리히를 다른 교수에게로 이끌자,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에르나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에 남겨진 그녀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디트리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나를 몰라보는 거야?’
아까의 난감함이 물러난 자리에 서운함이 들어찼다.
그래도 그들이 함께 지낸 시간이 자그마치 4년이었다. 물론 이미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 사이에 있었던 추억이 모조리 사라질 정도로 오래전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이 처음 만난 건 에르나가 열여섯 살이고 디트리히가 열세 살이던 때. 까맣게 기억이 지워질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헤어진 뒤로 9년이 지났다. 스무 살이던 에르나가 디트리히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를 보지 않았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그에게 어떻게 하고 떠났던가.
어쩌면 잊은 게 아니라 일부러 모르는 체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럴 만한 여러 이유가 떠올라서 에르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디트리히가 자신을 모른 척하기로 한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에르나는 인사를 나누는 디트리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쨌든 회의를 빙자한 클라인 공작과의 대면식은 끝났으니 연구실로 돌아가도 상관없으리라.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에르나는 그녀를 돌아보는 디트리히의 시선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복잡한 머리를 비우는 데는 역시 일하는 게 최고였다.
연구실로 돌아온 뒤로 에르나는 내내 마법진에 몰입했다. 금빛이 작게 밤하늘의 폭죽처럼 곳곳에서 터졌다가 다시 글자로 새겨지곤 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가 축 늘어지길 반복했다.
멍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또 멈추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마법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두 손을 천천히 휘젓던 에르나가 갑자기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이 깜빡, 깜빡, 하더니 벼락을 맞은 것처럼 커졌다. 느긋하게 커다란 의자에 기대어 있던 허리가 쭉 곧게 펴졌다. 에르나의 몸짓이 다급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꽃봉오리처럼 오므라들었다가 폭발하듯 확 펼쳐지자, 황금빛 마법진이 그대로 허공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을 바라보던 그녀는 쭉 뻗은 두 손을 다시 끌어당겨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아…….”
지금 에르나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분명 몇 시간 전에 리카르도가 죽어라고 자신을 부를 때는, 마법에 몰입해서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려도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마법에 침잠한 속에서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그 목소리. 만약 학생이나 다른 교수의 목소리였다면 절대 듣지 못했을, 그런 작은 목소리를 말이다.
무심결에 바라본 창문 밖은 어둑어둑하게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마법은 거두었지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그녀에게, 문밖에서 다시 한번 달갑지 않은 방문자가 말을 걸었다.
“랑케 교수님, 계십니까?”
하마터면 빽 소리를 지르며 대답할 뻔했다. 에르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겨우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답했다.
“들어오세요.”
정중한 방문자는 허락을 얻고도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에르나는 자신의 얼굴이 멀쩡한지를 의식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회의장에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던 디트리히였다. 잔잔한 미소를 띤 그는 에르나를 보자 화사한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럼요.”
에르나는 그녀가 모르는 시간 속의 디트리히가 분명 여자 여럿 울렸을 거라고 확신했다.
저런 미소를 보고 어떤 여자가 황홀해하지 않을까. 그에게 연심을 품은 귀한 아가씨들이 많다는 풍문은 어렴풋이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그 말이 헛된 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기분이었다. 분명 저 디트리히는, 에르나가 알던 그 소년과는 많이 달랐다.
에르나는 자신의 연구실 책상 앞에 놓인 방문자용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몸짓으로 그가 앉자 그제야 에르나도 자신의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녀의 손 움직임을 따라 방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찻잔과 주전자가 날아왔다. 흰 바탕에 푸른 덩굴이 그려진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 건네자, 디트리히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에르나는 작게 헛기침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클라인 공작 각하?”
“설마. 제가 왜 방문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글쎄요.”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답을 얼버무리는 에르나를 향한 디트리히의 미소가 조금 서글퍼졌다.
“제가 아까 모르는 사람처럼 대해서 혹시 화가 나신 건가요?”
“아니, 저는…….”
“아, 그 전에. 예전처럼 누님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그녀는 입을 뻐끔거렸다.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디트리히를 에르나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또 한 번 헛기침하며 시선을 미끄러뜨린 그녀의 목소리에 난감함이 묻어났다.
“공작 각하, 그런 호칭은 조금 부적절…….”
“저를 계속 공작 각하라고 부르시는군요.”
“공작 각하이시니까요.”
“그냥 예전처럼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쪽이 훨씬 듣고 싶어서요. 그도 아니라면… 그냥 클라인 교수라고 하시든가요.”
그는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부탁하고 있었지만, 에르나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제는 서로 그럴 만한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녀 혼자만의 생각인 모양이었다.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머뭇대던 에르나는 결국 한숨을 쉬고 항복했다.
“편한 대로 부르세요.”
“그럼 누님도 저를 편하게 불러주세요.”
“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예전처럼 디이, 라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그건 좀.”
그런 귀여운 호칭으로 부르기엔 디트리히는 너무나도 커버렸다. 에르나가 거절하자 그의 얼굴에 약간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러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에르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든 채 홀짝이며 계속 디트리히의 눈을 피했다. 디트리히는 반면에, 아주 느긋하게 차를 한두 모금 마시고는 줄곧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라리 뭐라고 말을 하지. 에르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사실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반가워서? 아니면 예의상? 그도 아니면 부탁할 것이 있어서?
전부 아니라면, 원망하러?
뭐가 되었든 그가 먼저 입을 열어주길 바랄 때였다. 마침내 디트리히가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누님.”
“…9년 만이네요. 그리고 많이… 변하셨네요.”
“그런가요?”
“아까 이름을 듣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그렇군요.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어요.”
정말로 못 알아볼 정도로 그는 많이 변했다. 어른의 냄새가 물씬 나도록 변한 그를 지난밤에 몰라본 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색한 기분에 손가락 끝을 꼼지락대며 바라보는데, 그가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뿍 담긴 한마디에 에르나의 눈이 곧장 디트리히를 향했다.
왕 아래 가장 고귀한 가문의 주인이 된 남자는 마치 9년 전처럼 순진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 에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쩐지 그녀는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귀가 불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순순히 ‘보고 싶었다’는 말만으로 표현하기엔, 그들의 마지막이 그렇게 매끄럽지가 않았다. 솔직히 에르나는 그가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답이 없자 디트리히가 물었다.
“누님은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궁금했습니다만, 클라인 님의……,”
“그냥 디트리히라고 불러주세요.”
“…디트리히 님의 소식은 종종 들을 수 있어서요. 잘 지내시는 것 같더라고요.”
잘, 지냈다라. 그녀의 말끝을 디트리히가 고스란히 곱씹었다. 그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은 웃는 낯이었다. 눈을 내리깐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디트리히가 다시 물었다.
“누님은 잘 지내셨지요?”
“클라인가의 후원 덕에, 저는 일찍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제 가문이 누님께 해드린 게 뭐가 있나요. 어쨌든 이렇게 아카데미의 교수로 계신 걸 보니 전 정말 기뻐요.”
그리고 둘 사이에 또다시 어색하고 숨 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이 갑갑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에르나는 힘겨웠다. 갑작스럽게 그녀의 앞에 나타난 디트리히의 존재는 일견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죄의식과 묻어두었던 고통을 자꾸만 들쑤셔댔다. 그를 얼른 내보내고 싶은 마음과, 그에 대한 궁금함이 속에서 싸웠다.
손님을 박대하는 건 곤란하지.
에르나의 속마음 중 하나가 이겼다.
“그나저나 디트리히 님이 갑자기 아카데미 교수로 오시다니, 놀랍네요.”
“기사단에 막 들어갔을 때, 베커 경의 종자로 잠시 복직했었거든요. 말하자면 제 스승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죠. 그런 분이 편찮으시다면서 제게 딱 1년만 대신 학생들을 가르쳐달라 하시는데 당연히 그 부탁을 들어드려야죠.”
“아, 그런…….”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에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찻잔의 찻물은 반이나 줄어있었다. 반면 디트리히의 찻잔은 거의 그대로였다.
“여기 에르나 누님이 있는 걸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러셨나요?”
“당연하죠.”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요?”
정말 놀랐다는 듯 디트리히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르나는 그 눈을 마주 보며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제 안을 샅샅이 살펴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멋쩍은 듯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떠났고, 음, 그날 이후 소식을 전한 적 없었으니까요.”
“아, 하긴.”
디트리히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인사 대신에… 이제 끝이라고 하셨죠. 저와는, 끝이라고.”
너무나도 가볍게 하는 말에 에르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디트리히의 말대로, 그녀는 그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아주 매몰차고, 차갑게. 여지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너와는 이제 끝이야. 그러니까 그만 매달리고…….’
그때 불쑥, 에르나의 눈앞으로 남자의 커다란 손이 들이밀어졌다. 흠칫 놀란 에르나가 의자 안쪽으로 엉덩이를 바짝 붙이며 조금 물러났다. 놀란 그녀가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그녀의 눈길이 내밀어진 그의 손으로 향했다.
페리도트색 눈동자가 그의 손에 놓인 물건을 보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건 고동색 가죽으로 된 끈이었다. 끈 한쪽에는 끼움쇠가, 다른 한쪽으로는 그 쇠를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있었다. 가죽끈의 중간은 실로 기워져 있었는데, 무언가에 잘린 적이 있는 것을 이어 붙인 모양새였다.
어렵게 입을 연 에르나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이건…….”
“누님이 잘라버린 목걸이예요. 제가 다시 이어 붙였지만요.”
“왜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으세요?”
“왜인지는 누님도 아실 텐데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디트리히가 쐐기를 박았다.
“끝난 적 없어요, 적어도 저는.”
디트리히의 눈매가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 웃음이 에르나는 다정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고 느꼈다. 정말로 그녀가 잘 모르는 디트리히가 앞에 앉아있었다.
그건 어릴 때의 일이었다. 그녀도 아직 잘 모를 때 반은 장난이고, 반은 오기로 벌인 일이었다. 그녀가 클라인 공작가에서 강제로 떠나게 되면서 모조리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디트리히에게 고한 나름의 작별 인사는 조금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에르나를 떨리게 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뛰었다.
이건 두려움일까? 에르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 따위는 아니었다.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디트리히는 그녀를 해칠 수 없었다. 심지어 9년을 고이, 에르나가 망가뜨린 것을 고쳐서 갖고 있었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건 무얼까. 기대감? 희열? 걱정? 난감함?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무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에르나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버려요, 당장. 아니, 나한테 줘요.”
“이런. 제가 누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디트리히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가죽 줄이 다시 남자의 품으로 숨겨지는 걸 에르나는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큼은, 죄송해요. 드릴 수 없어요.”
“디트리히 님.”
“차 잘 마셨습니다, 누님. 이만 가볼게요. 너무 시간이 늦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만한 시간이니까요.
디트리히는 마치 그녀를 배려하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에르나는 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건 협박일까. 그게 아니라면.
앞에 앉은 디트리히의 얼굴에, 지난밤 요망한 웃음을 지으며 저를 올려다보던 디터의 얼굴이 겹쳤다.
드르륵, 하고 의자 밀리는 소리와 함께 디트리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남자가 선 채로 에르나를 내려다보자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드리웠다. 그녀는 일어서지 않은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디트리히에게 일렀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랑케 교수라고 부르세요.”
“그럴게요, 누님.”
디트리히가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 그가 몸을 돌렸다. 한 걸음씩 점점 멀어져서, 마침내 그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자 에르나는 그제야 한숨을 푸우, 내뱉었다.
과거에 그녀가 저지른 짓이 결국 오늘날 그가 디터라는 이름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에서 재회한 에르나에게 목걸이를 내민 건, 말하자면 그녀에게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을 테다. 전부 에르나가 잘못 행동한 결과였다.
그와 별개로, 디트리히는 아직 엘과 에르나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닌지 그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 * *
디트리히가 에르나와 재회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드러내 놓고 친분이 있다고 알리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디트리히는 에르나를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대했다. 단둘이 있을 때 곧장 누님이라고 불러놓고, 그녀와 마주하면 꼬박꼬박 “랑케 교수님.”이라고 했다. 그의 태도는 에르나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날, 처음 에르나를 찾아왔던 밤 이후로 디트리히는 그녀를 따로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부러 그녀를 찾아 아카데미에 오려고 수를 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그는 너무나도 에르나에게 무심했다. 오히려 그는 교수로서의 자신에게 매우 충실했다.
그의 신분과 지위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하여 수업을 대충 진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는 고작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갑작스럽게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의 가르침을 받게 된 학생들의 열의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디트리히는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일제히 검을 휘두르는 연무장을 에르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생들 사이사이를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그들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디트리히의 동그란 머리를 따라 그녀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눈을 두지 않기에는 그가 너무나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에르나의 마음은 복잡했다. 아카데미에서 마주하게 된 과거의 인연이 여전히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자신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취향을 갖게 된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런 그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건드려보기도 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지.’
축 늘어져 있던 손이 꽉 쥐어지며 힘이 바짝 들어갔다. 미치겠네, 하고 그녀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룻밤 상대였던 디터가 디트리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볼 때마다 에르나의 몸이 자꾸만 반응했다. 정확히는 그를 탐냈다. 하필이면 그렇게도 딱, 그녀의 구미에 맞는 사람일 건 뭐란 말인가.
“으음…….”
낮은 신음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금방 손에 땀이 배어났다. 무의식중에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문질렀다.
이건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디트리히를 멀리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직접 관계를 갖는 것보다 상대를 괴롭히는 쪽을 더 선호하는 자신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그날 밤, 디터가 디트리히인 줄 모르고 그의 다리 사이에 달린 것을 제 안에 밀어 넣기라도 했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는 에르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자꾸만 그를 의식하게 되는 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싫으나 좋으나 앞으로 1년 동안은 무조건 디트리히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그날 밤을 잊어야 하는데. 그에게서 그 가죽 목걸이도 돌려받아서, 없애버려야 하는데.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는 어느새 손톱 끝을 잘근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때였다. 연무장을 돌던 디트리히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정확히 에르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눈이 마주친 그녀의 어깨가 퍼뜩 튀었다.
‘지금 날 본 건가?’
연무장에서 그녀의 연구실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그녀가 잘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에르나는 알 수 있었다. 디트리히는 지금 에르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수많은 창문 중에 그녀가 서있는 곳을 찾아내 바라보았다.
멀리 있는 그의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가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녀 또한 디트리히가 그녀를 보며 환히 웃는 걸 똑똑히 보았다.
“……!”
그녀가 당황하자 곧장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르나는 다급하게 커튼을 쳐 그의 눈에서 도망쳤다. 창틀에 기대어 선 에르나의 숨이 가빠졌다.
이래서 잘못하고 살면 안 되는 거야.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과거의 자신을 탓했다.
그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자위하며 디트리히를 떠나선 안 됐다. 일부러 매몰차게 끊어내는 대신에, 차분히 이별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했다. 아니면 나중에라도 사과하든가…….
아니야. 에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녀는 힘이 없었다. 밀리면 밀리는 대로 떠나야 했다. 그러고 나서 어디 편안하게 놀며 지내다 아카데미 교수가 된 것이던가. 고작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삶은 지옥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무조건 디트리히는 끊어내야 했다. 그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가 어떻든 간에,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에르나는 한숨을 쉬며 창틀에 뒷머리를 콩콩 박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에르나는 수업 준비를 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연구동 건물을 나서는데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연무장 쪽에서부터 연구동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디트리히의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에르나는 발걸음을 급히 놀렸다.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잰 발걸음으로 건물 모퉁이를 도는데, 앞에 나타난 그림자들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앗, 랑케 교수님! 안녕하세요!”
땀 냄새 폴폴 풍기는 십 대 소년 소녀들이 목청껏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이들과 마주치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학생들의 걸음은 훨씬 빨랐다.
에르나는 덤덤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까닥했다. 학생들을 지나쳐 다시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더 커다란 덩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랑케 교수님, 수업에 가시는 모양입니다.”
“…클라인 교수님.”
만나지 않으려 했던 사람과 마주치자 에르나는 속이 쓰려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디트리히를 피할 수는 없었다. 학생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에르나가 걸음을 옮기자 자연스럽게 디트리히가 옆에 따라붙었다.
“교실까지 함께 가도 괜찮겠습니까?”
“왜요?”
뜻하지 않게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디트리히는 선하게 웃으며 답했다.
“학장님과 만나기로 했거든요. 랑케 교수님이 수업하는 건물에 학장실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교정을 걸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유명 인사인 디트리히를 보고 일부러 더 친한 척하며 다가와 인사했다. 디트리히는 성의껏 답했지만 에르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옆에 서있는 남자가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의 수업이 끝나기 전에 미리 움직일 것을 그랬다며 내심 후회했다.
에르나의 발은 급하게 움직였지만, 워낙 디트리히의 보폭이 컸던지라 그는 여유롭게 걸었다. 앞만 보고 걷는 그녀에게 디트리히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에 혹시 시간 있으십니까?”
“아뇨, 약속 있어요.”
“그렇습니까…….”
단호하게 벽을 세우며 거절했지만, 사실 에르나는 아무 약속도 없었다. 단지 시간이 있다고 하면 분명 디트리히가 찾아올 것 같아 두려웠을 뿐이었다.
교실들이 있는 고풍스러운 갈색 건물 앞에 다다르자마자 에르나는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디트리히의 곁을 떠났다. 그가 뒤에 선 채로 자신을 계속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디트리히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였다.
마침내 에르나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의 얼굴에 언제나 머물 것만 같았던 웃음이 사라졌다. 살짝 입술을 깨문 채, 그는 한 손으로 가슴께를 짚었다.
가슴 가장 가까운 곳에 둔 오래된 가죽 목걸이를 꽉 누른 채로, 그는 제법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 * *
그날 저녁 에르나는 결국 아카데미에서 나왔다. 약속이 있다고 해놓고 연구실에 있다가 디트리히가 찾아올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은 그녀는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는 대신 항상 가던 곳을 가기로 했다. 바로 디트리히, 아니 디터를 만났던 그 술집이었다.
술집 앞에 걸린 간판에 그려진 두 마리 제비 모양이 똑바로 보이는 맞은편 골목에서 에르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꾸는 마법을 사용했다. 이전처럼 평범한 갈색 머리에 짙은 색의 눈을 가진 동그란 얼굴의 낯선 여자로 변한 그녀는 곧장 술집으로 향했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에르나에게 관심을 잠시 보이다가 곧 눈을 돌렸다. 이곳에서는 미리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 외에 말을 거는 일이 드물었다.
오늘은 딱히 밤을 함께할 상대를 찾아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에르나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와인 한 잔을 주문한 그녀는 턱을 한 손에 괸 채로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동안 에르나의 잔은 착실하게 줄어들었다. 어느새 그녀는 와인을 두 잔째 비웠다. 세 잔쯤 들어가면 금방 취할 게 분명해서 그녀는 속도를 줄였다. 이미 볼에 조금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또다시 덜컹,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사람을 보며 에르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어떤 불쌍한 사람이 저 인간에게 걸린 걸까.’
방금 술집에 들어온 남자는 이쪽에서 제법 유명한, 정확히 말하자면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장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을 두지 않았다.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같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와 관계를 가진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 아주 오랫동안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정말 지독하게 상대를 괴롭히는 걸 즐기는 자였다. 그러니 당연히 장기적으로 만나는 사람 따위가 생길 리 없었다.
‘솔직히 플레이가 아니라 학대를 하는 거지.’
다행히도 누가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는 소린 없지만, 남자의 손에 걸린 사람은 한동안 거동을 못 할 정도로 심하게 매질당하거나 괴롭힘당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에르나는 극도로 혐오하는, 상대의 몸에 지울 수 없는 심한 상처를 내는 행위를 즐기는 자였다.
자신의 악명이 이미 소문났다는 걸 알아서인지 남자는 꼭 이쪽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을 고르곤 했다. 그러니까, 멋모르는 초짜들 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대부분 타인의 운명에 손대는 법이 없었다. 그건 에르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 남자의 손에 희생될 사람을 애도하며 에르나는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에르나의 시선도 무심결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체, 왜 또…….’
하마터면 그녀는 앞에 놓인 잔을 쓰러트릴 뻔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에르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것 또한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가게에 들어선 디트리히가 천천히 안을 돌아보았다. 이전에 이곳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수한 옷차림을 한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설마 나를 찾아온 건 아니겠지.’
에르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엘이나, 에르나를 찾아 이곳에 왔을 리 없었다. 그날 이후로 에르나는 단 한 차례도 파트너를 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밤, 디터에게 엘은 분명 ‘우리 관계는 오늘 하루뿐’이라고 말해두었다. 그러니 디터가 엘을 찾아왔을 리 없었다. 에르나를 찾아온 건 더욱 말이 안 되었다. 그녀는 본래의 모습으로는 단 한 번도 파트너를 구한 적이 없었다.
‘그럼 다른 주인을 만나러 온 거라고?’
그 생각에 미치자, 그녀의 속에서 불길이 확 일어났다. 두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달달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에르나도 엘도 디트리히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하룻밤을 즐겼을 뿐이고, 그녀는 디트리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준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녀가 직접 디트리히의 목에 매어주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에르나가 직접 그것을 끊어냈음에도 손수 수선해서 소중히 간직했다고, 그녀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나.
그랬던 주제에 지금 다른 주인을 찾아서 이 술집에 왔다는 건가? 순간 배신감이 마구 들끓었다.
그러고 보면 디터로서의 디트리히는 일전에도 다른 주인을 찾았었다. 그게 바로 에르나이긴 했지만, 엘이라는 가짜 모습으로 만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계속 주인을 바꿔 놀 생각이었던 주제에, 나한테 와서… 목걸이를 내어 보이면서 마치 계속 나만 생각했던 양. 그랬단 말이지.’
속이 부글부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과 반대로 머리는 차게 식었다. 어차피 그 정도인 마음이면서, 뭐라도 있는 것처럼 그녀의 앞에서 연기했던 거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남은 술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트리히의 얼굴을 더 보고 있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그대로 술집을 나와버리려 하는데, 디트리히의 걸음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 그녀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이먼 님이신가요?”
“맞소. 당신이 디터?”
디터가 말을 건 사람을 보자마자 에르나의 가슴이 금세 조여들었다.
이 술집 안에서 그가 가장 피해야 할, 가장 개새끼인 남자의 앞에 디트리히가 서있었다. 남자의 눈이 탐스러운 먹이를 보고 번뜩였다.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손속을 가진 남자의 앞에 앉은 디트리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순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에르나의 눈앞으로 피떡이 된 채 바닥에 널브러진 디트리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그가 튼튼한 몸을 가진 기사라 해도, 마구 휘두르는 매질 앞에 멀쩡할 리 없었다. 게다가 회초리나 채찍만이 아니라 날카로운 쇠붙이를 쓴다고도 하지 않던가.
그런 몸 상태로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도 없을 거다. 또 분명 그에게 생긴 이상을 누군가는 눈치챌 수밖에 없을 거다.
어느새 에르나의 발걸음은 두 남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이 몇 번째…….”
“디터.”
당장이라도 디트리히를 깔아뭉개고 싶어 안달 난 남자의 말을 싹둑 자르고, 에르나가 디트리히를 불렀다. 두 남자의 눈이 그들이 앉은 테이블 앞에 선 그녀를 향해 동시에 돌아갔다.
탐스러운 먹이를 탐색하는 시간을 방해받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당신?”
“디터, 일어나요.”
“뭐 하는 거야?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어? 규칙 몰라? 너 뭐 하는 년이야?”
“일어나라고 했잖아, 디터.”
사람들의 시선이 세 사람을 향했다. 흔치 않은 광경에 모두의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이 바닥에서 악독하기로 자자한 남자였다.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가 짖거나 말거나 에르나는 오로지 디트리히만 바라보고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엘’에게 놀랐는지, 디트리히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에르나는 팔짱을 낀 채로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일어나서 날 따라오는 게 좋을 텐데?”
“이런 미친년이…….”
저를 무시하는 데다 멋대로 먹잇감을 가로채려는 에르나의 태도에 분노한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이 곧장 번쩍 치켜 올라갔다. 당장 에르나의 뺨이라도 칠 것 같은 기세였다.
마법을 쓴다면 이깟 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은 평범한 이에게는 흔한 게 아니었다. 마법을 쓰는 순간, 에르나는 신원이 특정될 수도 있었다.
한 대 맞고 말지 뭐.
그녀가 턱에 힘을 단단히 주는 순간이었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이 허공에 덜컥 멈추었다. 그의 손목을 잡아챈 건, 여태 멍하니 에르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디트리히였다.
“뭐야, 이거 안 놔? 감히 주인한테 손을 대?”
“함부로 손을 휘두르면 안 되지요, 하이먼 님. 여긴 공공장소입니다.”
“너 이 새끼……!”
“그리고 아직 당신과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니, 주인이 아니죠. 그러니 손을 대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 순간 남자가 어억,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전기 맞은 쥐처럼 몸을 비틀었다. 남자의 손목을 쥔 디트리히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 걸 알아챈 에르나는 얼른 그를 제지했다.
“그만해.”
그 순간 술집 안의 사람들은 저 훤칠한 미남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디트리히가 곧장 남자의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남자는 꽥꽥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며 아픈 손목을 붙들고 허우적댔다. 그러나 에르나도 디트리히도 그에게는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남자의 손을 놓자마자 디트리히는 세상에서 가장 양순한 표정으로 에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이든지 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 난리 속에서 계속 머무는 건 어리석었다. 게다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에르나는 나지막하지만 화가 난 게 분명한 목소리로 그에게 명령했다.
“나랑 같이 나가요.”
“네, 그럴게요.”
에르나가 앞장서고, 디트리히가 따랐다. 사람들은 폭풍처럼 술집을 휘저어놓고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다들 곧장 다시 자기 볼일로 관심을 돌렸지만.
오직 제 먹잇감을 놓친 남자만이 분함에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를 뿐이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닫히자마자 에르나는 디트리히의 손목을 붙잡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조그마한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그는 순순히 끌려다녔다.
에르나는 어둑한 골목으로 그를 데리고 가선, 마침내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홱 그 손을 놓았다.
“왜 이렇게 사람이 조심성이 없어요?”
잔뜩 억누른 음성으로 으르렁거리는 에르나를 디트리히는 말없이 바라만 봤다. 그 꼴이 마치 제가 뭘 잘못한 건지 조금도 모르는 듯해서 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 그녀는 술집이 있는 쪽으로 손가락질하면서 씩씩댔다.
“그 남자 얼마나 더럽게 노는지 알고 만나기로 한 거예요? 하마터면 당신, 만신창이가 될 뻔했다고! 그렇게 아무나 겁 없이 막 만나서 몸 굴리고,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닙니다.”
“그럼 뭐야, 왜 하필 그런 놈을 선택해서…….”
“당신께서 저를 모른 척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예상하지도 못한 일격에 화를 내던 에르나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뭐, 라고요?”
“하이먼이라는 남자와 제가 만나는 걸 보면, 분명 당신께서 저를 막아설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대체, 내가 거기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고…….”
“그 정도는… 금세 알 수 있거든요.”
비밀스러운 미소를 띤 디트리히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에르나는 순간 덜컥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정말로 그녀가 이곳에 있을 줄 알았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그때 그녀의 앞에 디트리히가 천천히 무릎 꿇었다. 더러운 뒷골목에 스스럼없이 꿇어앉은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르나의 치맛자락 끝을 붙들었다. 고귀한 남자가 그것을 마치 성물인 듯 쥐어 천천히 입술에 가져다 대는 광경을, 그녀는 망연한 기분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엘 님.”
디트리히가 에르나를 올려다보며 열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거칠고 뜨거운 욕망이 느껴졌다. 에르나는 하마터면 주춤 뒤로 물러날 뻔했다.
“제 주인님이 되어주세요,”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에르나의 치마 끝단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에 그가 원하는 것은 에르나가 주인이 되는 것, 오직 하나였다. 그는 다시 한번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큰 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다시 한번 애원했다.
“제발, 제 주인님이 되어주세요.”
안쪽에서 부풀어 오른 성기가 바지춤을 터트릴 듯 밀어댔다. 당장이라도 주인님의 다리에 제 좆을 문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자신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음란한 개라고 그녀가 매도해 주길 원했다.
아니, 그녀의 상냥함에 기대어 어리광 부리는 척 그녀를 쓰러트리고, 멋대로 핥고 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디트리히는 잘 알았다. 그는 영리한 개였으니까.
그는 깊은숨을 조심스레 내뱉으며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것을 꺼내어 에르나에게 두 손으로 바쳤다. 어둠에 가려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의 정체가 단번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르나는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녀의 어깨가 단박에 움찔댔다. 그녀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디트리히 쪽이 훨씬 빨랐다. 겨우 무릎을 세워 섰을 뿐인데 그의 눈높이가 쑥 올라왔다.
금세 단련된 기사의 손이 단박에 마법사의 조그마한 손을 붙들었다. 그녀의 손에 가죽 목걸이를 쥐여주며 디트리히가 다시 한번 애원했다.
“제 주인님이 되겠다고 말해줘요.”
“…….”
“그러겠다고 해줘요, 제발. 누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르나는 자신이 걸었던 외양 변화 마법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무효화?’
디트리히가 사랑해 마지않는 에르나의 연녹색 눈동자와 적갈색 고수머리가 서서히 드러났다. 가장 경애하고, 숭배하는 그의 주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자 디트리히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번졌다.
반면 마법이 풀린 채 디트리히에 손에 붙들린 꼴이 된 에르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대체, 너, 어떻게…….”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대던 에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 디트리히를 추궁하는 대신에, 그녀는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에르나의 모습이 모래처럼 파스스 흩어졌다. 그 와중에도 디트리히의 눈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자신을 얽어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새파란 눈에게서 지금 당장, 도망가야만 했다.
“내 주인님.”
그의 부름을 마지막으로, 에르나의 모습이 모두 사라졌다. 홀로 어둡고 더러운 골목에 남겨진 디트리히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허전해진 손아귀를 꽉 쥐었다.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디트리히는 비어버린 손을 보며 비죽 웃었다.
어떻게 자신이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있었는지 그녀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그녀의 곁에 자신의 눈을 붙여두었다는 걸 알면 경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의 주인님을 그렇게 허무하게 다시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정히 갈 곳이 없을 때 자연스레 파트너를 찾는 술집에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미리 보고도 올라왔다. 난폭하기 짝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를 급히 찾아 그곳으로 불러낸 건, 당연히 에르나가 막아서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 했어도, 그자에게 뭐든 당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본모습을 감춘 껍데기를 부숴버린, 무효화 마법이 걸린 작은 애뮬릿을 재킷 주머니에서 꺼낸 그는 그것을 바닥에 던졌다. 한 번 효과를 발휘한 애뮬릿은 본래의 색을 잃고 잿빛이 되어있었다. 디트리히는 발로 그것을 지그시 밟았다. 그의 발아래에서 애뮬릿은 가루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에르나는 다시 한번 도망쳤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녀는 디트리히의 목걸이를 가지고 갔다. 결국 그녀는 그 목걸이를 다시금 자신만 원하는 개의 목에 채워줄 수밖에 없으리라.
디트리히는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의 걸음이 느긋하게, 아카데미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모습도 순식간에 허공에서 녹아 사라졌다.
* * *
에르나의 모습은 아카데미 안, 교수 숙소에 있는 그녀의 방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주먹으로 가슴을 꽉 누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의 손 안에는 디트리히가 쥐여준 오래된 갈색 가죽 목걸이가 들려있었다. 에르나는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흠칫 놀랐다가 진저리를 치며 그것을 응접실 테이블에 던졌다.
‘대체 언제부터 나를 알고 접근한 걸까.’
처음 서로를 모르는 채로 만났다고 생각한 밤부터, 디트리히는 에르나가 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접근했던 게 분명했다. 그녀의 행선지도 알았고, 위장도 알았다.
그 어두운 골목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형형한 눈빛이 떠오르자 에르나는 다시 한번 부르르 떨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주인님 주인님, 그러던 디트리히가 누님, 하고 읊은 순간 에르나는 정말 말 그대로 숨이 멈추는 듯했다. 그의 손이 닿았던 손목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디트리히의 앞에서 제 원래 모습이 다시 드러난 순간 그의 눈에 어린 희열이란.
그건 절대로 주인님을 찾은 개의 절절한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 쫓은 사냥감을 마침내 사정권 안에 둔 사냥꾼의 것이었다.
“미쳤어…….”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당혹감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숨을 헉헉대다가 결국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끄응,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난감한 방식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에르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마법으로 온 그녀를 디트리히가 곧장 쫓아올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법을 파훼한 것도 마법이 깃든 물건의 도움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것들은 귀하디귀해서 쉬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에르나를 바로 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이상하게도 당장 저 문이 쿵쿵하고 울릴 것만 같았다. 그가, 문밖에서 에르나를 부를 것만 같았다.
똑똑.
에르나는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녀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히익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랑케 교수님.”
들려온 목소리에 에르나는 겨우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밖에서 그녀를 다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랑케 교수님, 안 계십니까?”
“네, 네. 잠시만요.”
급히 목소리를 높인 그녀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워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거기에는 리카르도가 있었다. 볼이 붉게 상기된 채 불안한 눈을 한 그녀를 리카르도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훑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오셨어요?”
“아, 학장님께서 주무시는 게 아니라면 잠시 차 한잔하며 논의할 게 있다고 그러셔서요.”
평소라면 분명 에르나는 쿠르트의 초대를 거절했을 것이다. 그가 에르나에게 학장과 교수라는 상하 관계 이상의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무언가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알았어요, 가시죠.”
“아, 네…….”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리카르도는 에르나가 순순히 따라 나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굳이 ‘오늘은 왜 같이 가시나요?’라고 묻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학장실에 가니 쿠르트가 한눈에 보아도 귀해 보이는 다기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늘은 바쁘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쿠르트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를 보고 에르나는 그제야 자신이 누구의 청을 수락한 건지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리카르도가 문을 닫고 나가자, 쿠르트는 곧장 에르나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에스코트를 빙자하여 허리에 닿은 손이 조금 불쾌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슬쩍 그의 손을 피한 에르나는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이고는 쿠르트가 앉았던 자리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가 내내 뭐라 떠들었지만 에르나는 하나도 귀담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경청하기에는 오늘 밤, 그녀가 겪은 일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도 랑케 교수의 고견을 듣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느긋하게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좋나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너무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쿠르트의 말에 에르나는 대충 대답했다. 쿠르트와 마주하는 건 언제나 약간의 불쾌감과 불편함을 동반했다. 그가 가진 호감이 빤히 보였지만, 에르나는 그에게 정말이지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열 살이나 많은 데다 외모도 취향이 아니었고, 자의식이 비대한 학장은 절대로 그녀의 취향에 맞출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도망치듯 학장의 방에서 나온 에르나는 기운 빠진 걸음으로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기운이 없었다. 이대로 침대에 쓰러져 자고 싶었다. 언제나 곧고 바른 모습으로 교정을 걷는 모습만 보였던 그녀였기에, 지금이 늦은 시간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지금이 낮이었다면 학생들이 얼마나 에르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을 것인가.
겨우 자신의 방까지 온 에르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에게 반응해 응접실에 불이 반짝 들어왔다.
그리고 그 불빛을 받아 드러난 불청객의 모습에 에르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은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버리고 말았다.
“어디를 다녀오셨나요, 누님.”
에르나가 아끼는 푸른 꽃이 수놓아진 일인용 소파에 디트리히가 우아하게 앉아있었다. 아까 술집에서 입고 있던 수수한 옷은 오간 데 없이 그의 고귀한 신분을 알려주는 고급스러운 슈트 차림이었다.
검은 슈트를 입고 조금 비스듬히 앉아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결 고운 금발이 슬쩍 흔들렸다. 그 모습은 역시나 충직한 개보다는 당장이라도 에르나의 목을 물어뜯을 맹수와 같았다.
주춤거리며 물러난 그녀는 문에 등을 바짝 기댄 채 경계하며 그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죠?”
“죄송해요, 누님.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면 지나가는 누군가의 눈에 띌 수도 있잖습니까.”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
“누님, 저는 이미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병장기와 격투로 단련된 기사의 커다란 몸이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겨우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선 디트리히는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에르나의 한 손을 붙잡아 올리더니 살짝 끌어당겼다. 마치 연회에서 파트너를 에스코트하는 듯한 태도였다.
두근대는 심장을 들키지 않길 바라며 에르나는 그를 따라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이 경계하며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에르나를 인도한 곳은 조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그 소파였다. 에르나가 자리에 앉자,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두 손은 에르나의 한 손을 다정스레 붙든 채였다.
“제 주인님이 되어주세요, 누님.”
“그건 안 된다고 이미 말했어요.”
“제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마음에 들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디트리히 님은 안 돼요.”
“하지만 디터는 주인님의 말을 잘 들었잖아요. 그날 밤에 주인님도… 저를 좋아하셨잖아요.”
응석 섞인 목소리로 칭얼대며 디트리히는 에르나의 무릎에 제 볼을 비볐다.
에르나는 이마를 한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려고 아카데미에 온 거야? 이게 진짜 네 목적이었어? 넌 클라인 공작가의 주인이고, 국왕 전하의 기사들을 이끄는 단장이고, 누구보다 귀한 몸이잖아. 네가 제정신이면 이러면 안 되지!”
“이런…….”
꾸짖는 듯한 말에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울적해졌다. 그는 에르나의 무릎에 제 얼굴을 파묻고는 웅얼거렸다. 조그마한 목소리였지만, 천둥처럼 그녀의 귀에 와 박혔다.
“저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는걸요.”
고개를 슬쩍 든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에르나는 흠칫했다. 주인을 바라보는 개가, 건방지게 비죽 웃었다.
“누님이 절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억지로 그녀의 손에 제가 갖고 있던 것을 돌려주었다. 다시금 손 안에 들어온 익숙한 물건의 감촉에 에르나가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응접실 테이블에 던져놓았던 가죽 목걸이였다. 진저리를 치며 버려둔 걸 디트리히는 착실하게 챙겨서 다시금 그녀의 손에 쥐여준 것이다.
에르나가 고개를 저었다.
“도로 가져가. 아니면 버릴 거야.”
“제 목에 다시 채워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건… 어릴 때의 실수야. 치기 어린 장난이었어. 그리고 그건 이미 끝난 일이야! 내가 이 목걸이를 끊어버린 게 무슨 뜻인지 너도 알잖아.”
“저는 한 번도 끝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내가 공작가를 떠난 그날로, 너와 나의 인연은 끝이었어!”
단호한 목소리로 종결을 선언하는 에르나를 보는 디트리히의 눈썹이 불쌍하도록 축 처졌다.
그의 커다란 두 손이 에르나의 무릎을 붙잡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등줄기의 솜털이 올올이 서서 등골이 찌릿했다.
절대로 디트리히가 그녀를 거스르거나 해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단단하게 다져진 남자의 몸이 주는 위압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법이 있지만 에르나는 결코 자신이 그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에르나 누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녀는 그가 잔뜩 흥분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밀며 거리를 벌리려 하자, 그걸 알아챈 디트리히가 빙긋 웃었다.
“그날 저한테 그랬잖아요. 장미 미로 안에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만해.”
“‘넌 이제부터 내 개야.’”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서 희열이 느껴지는 건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디트리히의 얼굴에서는 좀 전까지 그나마 남아있던 예의 바른 기운 따위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건 깊은 욕정과 갈망뿐이었다.
에르나는 새삼스레 과거의 자신을 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그녀는 무슨 짓을 했던 걸까.
하지만 그녀가 대응할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에르나는 그를 거부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그가 자신을 욕망할수록 그녀는 위험해졌다.
“우린 끝났어. 난 네 주인이 아니고, 넌 내 개가 아니야.”
“으음, 그러시면 곤란해요, 정말로.”
난처하게 웃으며 디트리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에르나는 그의 손을 무의식중에 눈으로 따라가다가 아차, 했다.
단단한 근육으로 팽팽해진 허벅지 안쪽으로 다리 근육이 아닌 무언가가 불뚝 길게 부풀어 올라 제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검을 잡아 마디가 굵어진 남자의 손이 그것을 쓰다듬을 때마다, 바지가 터질 듯 그의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렸다.
에르나가 자신의 이런 추잡스러운 꼴을 보아주길, 디트리히는 오래전부터 원했다. 이런 순간이 올 때까지 정말이지 많은 시간을 참고, 견디고, 버텼다. 목이 타고 숨이 가빠왔다. 아주 오랫동안 억눌렀던 욕구가 용틀임 쳤다.
“주인님 앞에 오니까, 주인님이 봐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아, 세상에. 디트리히…….”
“주인님이 아니면, 저는 이렇게 좆을 세우지도 못하는 몸이 된걸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는 디트리히를 보며 에르나는 결국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머리가 아파왔다.
그때는, 그러니까 어릴 때는 몰랐다. 디트리히가 이렇게나 그녀에게 집착하게 될 거라고는.
그건 아주 예전의 일이었다. 아직 에르나 자신도 스스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불안정한 시기에 저지른 치기 어린 ‘실수’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실 그사이에 에르나의 안에서 디트리히는 제법 희미해져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삶은 죽는 것보다 치열했다. 디트리히를 되새길 시간이 그녀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어릴 때보다도 그녀의 ‘취향’은 더욱 공고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디트리히를 다시 보고 싶다거나 그를 제 개로 제대로 길들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옛일 따위 잊은 채 적당한 상대를 찾아서 욕구를 푸는 사이에, 그녀가 처음으로 길들였던 그 ‘개’는 여전히 에르나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무릎에 디트리히가 다시 뺨을 비볐다. 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그가 헐떡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을 느낀 에르나는 다리를 움찔했다.
그가 느릿하지만 또박또박, 그녀에게 부탁했다.
“주인님, 이 목걸이를 제 목에 다시 채워주세요.”
“이러지 마, 디트리히…….”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주인님.”
그럴 순 없었다. 에르나는 정말로 그를 다시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디트리히는 이유를 모를 테고, 그녀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말할 수 없지만……. 에르나는 정말이지 그의 주인이 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는 바람에 디트리히는 그녀의 무릎에 뺨을 살짝 얻어맞았다. 하지만 그 작은 충격조차도 그는 기꺼워서 미칠 것 같았다. 하마터면 그 순간 바로 싸버릴 뻔했다.
오히려 디터라는 이름으로 ‘엘’의 앞에 있을 때 훨씬 더 참을 만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누님이 아니었고 그 또한 디트리히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의 손에 누님이 잡힐 듯 있어서 그런지 자제력이 바닥난 기분이었다.
흐으, 하고 작게 신음하며 몸을 떠는 디트리히는 다정하지만 절도 있는, 만인이 우러르는 공작 각하 따위가 아니었다. 당장 발정 나서 좆을 세운 채 헐떡이는 개 한 마리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에르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문을 가리켜 보였다.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 돌아가서, 네 손으로 수음을 하든 알아서 풀어. 나한테 이러지 말고.”
그녀의 명령에는 명백한 거부도 섞여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디트리히가 따르지 않고 버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기한 페니스 때문에 불편한지 자세가 바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똑바로 선 채 두 손을 뒤로 모아 쥐었다.
그 꼴에 에르나는 또다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서브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였으니까.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가.”
에르나가 명령하자마자 디트리히는 놀랍게도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을 부릅뜬 채로 지켜보던 그녀는, 마침내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걸 어쩌면 좋아.”
중얼거리던 에르나는 디트리히가 앉아있던 바닥을 보았다. 남자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그가 고이 간직했던 가죽 목걸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주워 든 에르나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결국 꽉 쥐고 말았다.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휘젓자, 평소 절대 찾을 일 없는 독한 술이 담긴 잔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 짙은 황갈빛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 안에 감도는 씁쓸한 맛을 느끼며 에르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편 주인님에게서 축객령을 받고 나온 디트리히는 곧장 같은 건물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문에 등을 기대고 쓰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윽…….”
그의 손이 다급하게 바지춤을 풀어 헤쳤다. 그의 손이 거칠게 사타구니를 헤집자 대번에 그의 성기가 튕기듯 모습을 드러냈다. 부풀어 오른 채 꽉 눌려서 아플 지경인 검붉은 페니스를 디트리히는 한 손으로 꽉 붙잡았다. 엄지로 불뚝 튀어나온 핏줄을 쓰다듬자 그의 이 사이에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인님을 다시 만난 개는 당연히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움직여야 했다.
방으로 돌아가서 발정한 제 성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만져서 풀라고. 그의 주인인 에르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디트리히는 당연히 주인의 말에 따라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명령’은 정말이지 오래도록 그가 기다려온 것이었다.
“흐으, 읏.”
굳은살이 잔뜩 박인 거친 손이 기둥을 붙들고 쓸어 올리고 내릴 때마다 그의 허리가 움찔댔다. 요도 끝에서 흘러나온 맑은 애액을 엄지로 펴 바르며 그는 귀두를 찌부러뜨리고 문질러댔다. 손톱 끝으로 귀두 끝의 갈라진 곳을 후벼 파자, 눈앞이 번쩍이도록 쾌감이 그를 후려쳤다.
물론 디터로서 있던 밤, 에르나가 휘두르던 회초리가 제 발기한 페니스를 때렸던 것보다는 훨씬 미약했지만.
고작 몇 번 주무르고 흔들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절정이 찾아왔다. 극도의 쾌락이 아랫배를 거세게 갈기자 디트리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헐떡이다가 숨을 멈추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배와 둔부가 단단해지고 골이 팼다.
울컥, 하고 쏟아져 나온 희멀건 정액이 바닥 여기저기에 질펀하게 튀었다. 꿀럭, 꿀럭하고 정액이 흘러나올 때마다 디트리히는 끅끅하고 신음을 참으며 허리를 튕겼다.
이 거칠고 커다란 손 대신에 에르나의 작고 보드라운 손이 닿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나 디트리히는 분수를 아는 개였다. 주인의 손을 멋대로 탐하는 그런 버릇없는 짐승이 아니었다.
“하아… 아, 으…….”
그의 입에서는 결코 사람의 말이 만들어져 나오질 못했다. 의미 없는 탄성이 잦아들자, 그의 성기도 서서히 기운을 잃어갔다.
예기치 않은 자극이나 잠결이 아니고서야 혼자 수음 따위 한 적이 없는 디트리히는 오랜만에 기껍게 맞이한 절정에 음낭까지 쥐어짜인 듯 아릴 지경이었다.
기운이 빠진 그는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여전히 다른 한 손은 자신의 성기를 붙들고 있었다.
“주인님, 아… 너무 좋아…….”
흐느끼듯 내뱉은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디트리히 스스로도 몰랐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때보다 환한 미소가 번진 채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언제고 곁에 두고 사랑해 줄 것처럼 말했던 에르나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나자 그의 삶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졌다. 오로지 그녀가 잘라버리고 갔던, 어린 그의 목에 헐거웠던 개 목걸이만이 디트리히를 버티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인님을 다시 만났다. 디트리히는 다시는 그녀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작정이었다. 에르나가 뭐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그녀를 한 번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또다시 버려진다면, 그땐 정말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