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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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주 드러난 길거리도 아닌, 그렇다고 아주 숨겨진 골목도 아닌 어정쩡한 곳에 있는 한 작은 술집. 위치만큼이나 들락거리는 사람의 수도 애매했다. 붐비는 것도 아니고 텅 빈 것도 아니었고, 요란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막한 것도 아니었다.

그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약간 붉은 기가 도는 긴 고수머리는 제법 쉬이 볼 수 있었지만, 은은하게 금빛이 도는 듯 보이는 연녹색 눈동자는 한 번 눈에 담으면 좀처럼 잊기 힘든 것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평범한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건 여자가 가진 능력 탓이었다.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혼자 앉은 그녀의 앞에는 와인 잔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반쯤 차있었고, 다른 하나는 비어있었다. 그렇지만 반쯤 찬 잔에도 손댄 흔적은 없었다.

이 술집에 그녀가 들어와 앉은 것도 얼추 2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미 약속한 시간은 8분 전에 지났다.

하지만 그녀, 에르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 느긋했고, 적어도 30분 정도는 상대를 기다려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바람맞는 것도 각오한 터였다.

사실 이런 약속을 잡고 나오면 열 번 중 다섯 번은 불발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중 셋은 애초 목적과는 전혀 다른, 그러니까 만남의 목적을 오해하고 나온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겨우 한둘 정도나 그녀의 입맛에 맞는 상대가 나타나곤 했다.

오늘은 과연 어느 확률이 걸릴지, 에르나는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술집 입구를 흘끔거렸다.

이 술집은 애초에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기묘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만이 비밀스러운 연락망을 통해 서로에게 접촉하고 조용히 이곳에서 만났다. 그러고는 상대를 확인한 후 함께 그날 밤을 보냈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오래 만날 사람을 찾기도 했지만, 에르나처럼 한 번 보고 말 사람을 찾는 이들도 많았다.

입이 조금 마르는 듯해서 그녀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자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포도의 향이 확 퍼졌다.

입 안에서 와인을 굴리다 삼키고 입술을 혀로 핥는데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이 대번에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표정 없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번졌다.

거기에는 이런 조악한 술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술집 인원의 대부분이 그를 돌아본 듯했다. 금을 녹여낸 듯한 화사한 금발 머리카락에 맑은 파란 눈동자가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에 걸린 은은한 미소는 당연히도 여자 여럿 울리고도 남았을 법했다.

천장에 닿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흉통에 날씬한 허리와 단단해 보이는 하체도 범상치 않았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분명 검을 잡는 기사일 거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런 사람이 울면 볼만할 텐데.’

뱃속이 묘한 감각으로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에르나는 저도 모르게 살짝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하나같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돌렸다. 부루퉁해진 입술에 와인 잔이 다시 닿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와인이 좀 씁쓸하게 느껴졌다.

저런 남자가 그녀를 만나러 온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그녀는 언제나 운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녀의 예측이 틀린 모양이었다.

“혹시 엘 님이신가요.”

테이블에 그늘이 확 드리웠다. 에르나는 자신의 가명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아까 그녀가 포기했던 금발 남자가 서있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 더 환한 웃음이 걸렸다. 반대로 에르나의 얼굴은 제법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다시 물었다.

“엘 님이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제가 디터입니다. 앞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세상에.

영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에르나는 속으로 제법 놀랐지만, 겉으로는 덤덤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앉은 디터에게 빈 잔을 밀어주며 에르나는 와인을 조금 부어주었다. 그녀가 조금 늦었네요,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먼저 연락을 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럴 여유가 없이 늦고 말았습니다.”

“괜찮아요,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럼 다행입니다.”

바른 자세로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디터는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굉장히 순하게만 보였다.

무언가를 묻기 전에 에르나는 우선 남자를 관찰했다. 덤덤한 척 혹은 대범한 척하는 얼굴 너머로 애써 숨긴 약간의 긴장. 그녀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듯 보였는데 그게 명확히 오늘의 목적과 부합하는 것은 또 아닌 듯 보였다.

에르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먼저 물었다.

“디터 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오늘 이게, 처음이죠?”

그 질문에 디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의 귀가 조금 붉어진 것을 에르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반응에서 그녀는 듣지도 않은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에르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처음이구나.”

“…네.”

“음, 용감하시네요.”

“그래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를 거부하려 한다고 느낀 건지, 디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그의 몸과 부딪친 테이블이 흔들리면서 와인이 몇 방울 넘쳐흘렀다.

깜짝 놀란 에르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진정해요. 싫단 소리가 아니었어요.”

놀랍게도 디터는 에르나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얼른 몸을 물린 디터는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성급했죠.”

“괜찮아요. 너무 긴장하지 말고요.”

에르나는 잔을 들어 디터 쪽으로 내밀었다. 그에 디터도 와인 잔의 스템을 손으로 감싸 들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잔을 잡는 자세나 몸짓에서 제법 귀한 신분이라는 티가 났다.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술 한 모금을 마셨다.

‘저 남자의 숨에서 나랑 같은 냄새가 나겠네.’

그 생각을 하자 에르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오랜만에 밤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발가락 끝이 짜릿해졌다. 마음이 약간 급해졌다. 자신을 원하는 남자의 눈이 재미있었다. 처음이라면서도, 어쩜 그렇게 에르나를 보는 눈은 번뜩이는 건지.

그녀는 남은 술을 단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터는 술을 남긴 채로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최대한 상냥하게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에르나가 물었다.

“그럼 이제 갈까요?”

“제게 더 물어보실 건…….”

“그건 괜찮아요. 궁금한 게 있긴 하지만.”

여기서 물어볼 만한 것도 아니고요.

조그맣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선 에르나의 뒤를 그가 순순히 따랐다.

술집에서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한밤의 거리를 걸었다.

에르나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는 디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그녀의 상대로 오는 낯선 이들 가운데는 쓸데없을 정도로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불신하는 사람보다는, 이렇게 묵묵히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에르나가 디터를 데리고 향한 곳은 주거 단지의 2층짜리 주택이었다. 모조리 불이 꺼진 건물 앞에 서서 그녀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들어갈 건가요?”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도 될까요?”

“내 집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 따로 얻어둔 임시 거처이긴 했다. 이렇게 일회성으로 사람을 만나 데려오는 날이 아니면 언제고 비어있는 집.

그녀의 대답에 디터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커졌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현관으로 들어서고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그리고 아주 조그맣게 달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집에 사람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벽 곳곳에 달린 램프에 불이 붙었다. 손대지 않아도 켜지는 램프를 보고도 디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법사를 자주 보는 사람인가 보네.’

평범한 사람은 마법사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갑자기 집이 훤해지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벌벌 떨었다. 하지만 디터는 미동도 없이 오직 에르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현관에 서있는 디터를 신경 쓰지 않고 에르나는 재킷을 벗어 현관 근처의 의자에 대충 걸쳤다. 목에 두른 스카프도 풀어 내리며 그녀는 디터에게 손짓했다.

“따라와요.”

고개를 끄덕인 그는 소리 없는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현관의 작은 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보이는 방으로 들어간 에르나는 따라온 디터에게 명령했다.

“문 닫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요.”

아주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디터는 곧장 에르나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절도 있는 몸짓이 에르나는 마음에 쏙 들었다. 처음이라고 하더니만, 이렇게나 말을 잘 듣는다면 오늘 밤은 성공일 듯했다.

방은 어두웠다. 두꺼운 커튼이 창문마다 쳐있었고, 두 사람이 올라가면 딱 맞을 만한 크기의 침대와 1인용의 푹신한 소파 하나가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홀로 켜진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고, 한쪽 벽은 커다란 천으로 가려진 채였다.

소파에 앉은 에르나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디터를 훑어보았다. 그의 뺨과 목이 붉었다. 의연한 듯 보였지만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이 조금 꽉 쥐어진 거로 보아서는 제법 긴장한 모양이었다.

‘귀엽네, 진짜.’

거구의 남자를 향한 수식어로는 부적절한 감이 있었지만, 그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에르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할 수 없는 걸 얘기해 봐요.”

“전부 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다 할 수 있대요?”

“주인님이 시키시는 거라면 뭐든 괜찮습니다.”

그가 자신을 칭하는 호칭에 에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쾌한 걸까, 하는 마음에 디터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디터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좋아요.”

에르나는 양손을 주먹 쥐어 엄지와 검지끼리 맞붙도록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두 손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 공간에서 은은한 금빛이 감도는 가느다란 막대기 하나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팔뚝만 한 길이의 낭창한 그 막대를 그녀는 허공에 대고 몇 차례 휘둘렀다. 회초리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만족스럽게 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르나는 디터의 앞에 가 섰다. 막대 끝이 그의 턱에 닿았다. 약한 힘으로 슬쩍 들어 올렸을 뿐인데, 그는 충실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금발 미남은 여전히 처음 보았을 때의 그 희미한 미소를 여전히 띠고 있었다.

“디터는 눈이 참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벗어요,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그 명령에 디터는 주저하지 않고 재킷을 벗더니 이어서 셔츠의 단추도 풀어 내렸다. 무서우리만치 반듯하게 자리 잡은 근육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손을 바지춤으로 가져갔다. 철컥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엉거주춤 일어나 바지와 속옷을 벗어 던지고는 다시 바르게 무릎 꿇었다.

“잘했어요.”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대번에 디터의 얼굴에 아쉬움이 드리웠다. 곧장 무언가 시작될 거라고 기대라도 했던 걸까?

에르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나신의 남자를 감상했다.

‘이런, 세상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에르나는 입술에 잔뜩 힘을 주어야 했다.

말의 뒷다리처럼 갈라진 허벅지 근육들 사이로 보이는, 이미 반쯤 일어난 두껍고 커다란 살덩어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불그스레하게 달아오른 저 단단한 살 끝, 갈라진 틈에 손톱을 천천히 밀어 넣으며 흔들면 어떤 소리로 흐느낄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아직 누구도 손댄 적 없는 이 조각 같은 몸에 손이 닿으면 이 잘생긴 개가 어떤 소리로 울고 짖어댈지 상상하니, 등골이 쫙 조이며 오싹해졌다.

아직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사람치고는 차분히 잘 기다리고 있는 태도가 에르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디터의 앞에 살짝 쪼그려 앉아서 회초리를 바닥에 내려두고는 손으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디터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바짝 붙였다.

안심시키려는 듯 혹은 달래려는 듯, 그녀의 입술이 반쯤의 진심을 속삭였다.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너무 심하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주인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어디에서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법을 다 배워왔을까.”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정말 처음인 건 맞는지…….”

타박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만족감은 감출 수가 없었다. 에르나가 무릎을 꿇자, 그의 다리 사이에 그녀의 무릎이 자리 잡았다. 바짝 다가앉은 그녀는 디터의 뺨을 감싸 쥔 채로 가볍게 상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대었다. 촉, 촉, 하는 가벼운 키스일 뿐이었지만 디터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무릎으로 그의 다리 사이를 슬쩍 누르자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에르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벌어지고, 바짝 다가왔다. 말랑한 혀가 톡톡 디터의 입술을 두드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제 입을 열었다.

느릿하게 뱀처럼 파고든 혀가 느긋하게 그의 입 안을 유영했다. 달콤한 초콜릿을 녹여 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혀를 이리저리 굴리며 희롱해 대는 동안 디터의 페니스는 빳빳하게 일어서 버렸다. 흥분한 게 분명한데도 그는 여전히 처음의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키스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디터의 입에서 아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디터, 세이프 워드는요?”

“네?”

“그만하고 싶을 때 할 말요.”

욕정에 가득한 파란 눈이 에르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푸른 불이 화르륵 타오를 것만 같았다. 그녀를, 그녀의 손과 그녀가 줄 상벌을 갈망하는 게 또렷하게 보이는 디터가 기꺼워서 에르나는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마음 가는 대로 굴리고 그녀의 발아래에서 흐느끼는 걸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정도를 아는 주인이었다. 처음인 사람을 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에르나가 가진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디터는 겨우 한 단어를 내뱉었다.

“장미요.”

“장미. 좋아요.”

그게 디터에게 어떤 의미일지,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심장이 쿵쿵대고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에르나는 이미 심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이미 그녀의 다리 사이는 끈적하고 뜨뜻한 액체로 젖어있었다.

뺨에서 목을 타고 내려온 손이 단단한 가슴을 지나치며 유두를 슬쩍 긁었다. 디터가 아, 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힘들어요?”

“아니, 아닙니다.”

“으응, 잘 참아봐요.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는 참아야 해요.”

“읏, 네…….”

“허락 없이 싸버리면 벌 받을 거니까.”

그녀가 일부러 선택해서 내뱉은 조야한 단어에 자극되었는지 디터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뺨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울룩불룩하게 잡힌 배 근육을 손톱으로 쭉 긁으며 내려간 손이 배꼽 주변에서 꺼덕대는 두툼한 살덩어리를 꽉 붙들었다. 갑작스럽게 아랫배를 내리치는 듯한 강렬한 감각에 디터의 허리가 앞으로 푹 수그러들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 있었다.

움찔대던 디터는 결국 제 이마를 에르나의 어깨에 기대고 말았다. 에르나의 손이 그의 페니스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올라올 때마다 그의 등 근육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읏……!”

“난 디터가 끝까지 잘 버텼으면 좋겠어요.”

난 참을성 많은 사람이 좋거든요.

그녀는 남은 한 손으로 디터의 뒷머리를 다정하게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한 손은 사정없이 남자의 성기를 괴롭혀댔다. 요도에서 흘러나온 맑은 액체를 엄지로 펴 발라 문지르며 귀두 갓 주변을 슬슬 긁다가 꽉 쥐어짜듯 움켜쥐기도 했다.

강렬하게 조였다가 느긋하게 푸는 조그마한 손에 붙들린 채 디터는 무력하게 허리와 엉덩이만 들썩일 뿐이었다. 탄탄한 둔부에 보조개처럼 우물이 푹 팼다가 다시 팽팽해지고, 등줄기를 따라 근육이 바짝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하으, 윽, 주인님, 아!”

“디터의 좆이 엄청 딱딱하고 뜨거워진 거 알아요? 내 손에서 도망치고 싶은가 봐, 엄청 꿈틀거리고.”

“…아으…….”

“멋대로 허리 움직이지 말아요. 내 손을 자위 도구로 쓸 생각이에요?”

“죄송, 죄송합… 흐으……!”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에르나에게 디터는 얼른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톱이 요도를 꽉 짓누르자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참을 수 없는 작열감과 함께 힘껏 억누르려 했던 사정감이 치밀어 올랐다.

단말마의 비명처럼 신음을 토해낸 그가 눈을 꽉 감고 에르나의 어깨에 자신의 이마를 짓눌러댔다. 에르나는 그런 그의 머리를 다정히 끌어안으며 제 머리를 기댔다.

결국 참아내지 못한 정액을 페니스가 멋대로 토해냈다. 백탁액이 왈칵 흘러 에르나의 작고 흰 손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윤활액 삼아 그녀는 디터의 살 기둥을 붙들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 흐으, 주이, 주인님, 아, 제발, 으!”

바닥에 떨어진 정액 덩어리들이 꿈틀대는 디터의 무릎에 짓이겨지며 길게 얼룩을 남겼다. 얼굴도 귀도 목도, 심지어 가슴까지도 붉게 달아오른 채 헐떡이는 그가 에르나는 여전히 만족스러웠다.

처음에 참으려고 노력한 것만 해도 가상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가 할 일은 아쉽게도 칭찬이 아니었다.

“이런. 참으라고 했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나긋하게 흘러들었다. 디터는 흥분에 헐떡이면서도 얼른 다시 똑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하며, 땀이 배어난 이마와 가슴팍이 근사했다.

에르나는 혀로 윗입술을 슬쩍 핥으며 빙긋 웃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쉽게 싸버리다니 조금 실망이에요.”

“다음,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잘못했어요.”

디터가 다급하게 애걸했다. 여기에서 에르나가 그들의 밤을 끝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에르나는 조금도,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손이 다시 한번 디터의 다리 사이로 쑥 들어갔다. 한 번 사정하며 조금 말랑해진 그의 성기를 엄지와 검지로 잠시 잡았다가 떼자, 그 자리에 은색의 가는 고리 하나가 생겨있었다.

에르나는 상냥한 얼굴로 디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참기 쉽게 해줄게요. 이거면 멋대로 버릇없이 싸지 못할 테니까.”

“아…….”

제 좆을 꽉 움켜쥔 고리를 한 번 내려다본 디터는, 어느새 회초리를 들고 일어난 에르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그 기다란 막대로 톡톡 치면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럼 우선, 제대로 못 참은 것에 대한 벌부터 받아볼까요?”

네발로 엎드려요. 상냥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가 내뱉는 말은 서늘하기만 했다.

기대와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굴욕감에 떨며 두 손 두 발로 바닥에 엎드리는 남자를 바라보는 에르나의 연녹색 눈동자가 금빛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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