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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가면 (14/14)

14.가면

-2년 후.

리아나는 본격적으로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선선한 봄바람을 즐기겠다면서 저택의 모든 창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리아나가 찾아올 때가 아니면,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창을 가려 두던 칼리언의 집무실도 오늘만큼은 활짝 열려 있었다.

홀로 집무실 책상에 앉은 칼리언은 화창한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봄의 기운을 꺾어 버리는 매서운 시선이 안젤라가 건넨 서류에 꽂혔다.

. . .

「-14시 30분 낮잠으로 인한 늦은 점심.

-16시 00분 엘빈과 정원 산책.

엘빈에게 강아지를 키우는 게 어떻겠냐고 물음.

-18시 10분 랜서 발레라와 만남.

잠자리는 하지 않음.

-22시 37분 저택에 도착.

-23시 12분 블래이크 자베른에게 보낼 편지 작성.」

전날 리아나가 무엇을 하면서 지냈는지 시간대별로 정리해둔 보고서였다.

칼리언은 펜 끝으로 보고서를 툭툭 두드렸다.

검은 잉크가 랜서와 블래이크의 이름 위에 콕 찍혀 있다.

당장 둘을 처리해 버리고 싶었으나, 만일 그랬다가는 겨우 회복되고 있는 리아나의 정신이 또다시 엉망으로 변해 버릴 게 우려되었다.

자신이 2년 동안이나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해 온 것도 모두 헛수고가 될 거다.

칼리언은 애초에 모든 마법초에 내성이 있었다.

망각초를 한 뿌리가 아니라 한 궤짝째 끓여 마신다고 해도 배만 부를 뿐이지 아무런 효과도 볼 수 없었다.

칼리언이 지난 2년간 연기까지 하며 거짓말을 해온 건 그 역시 하루하루 더한 벼랑으로 내몰리는 리아나의 정신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가 어떤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끝은 정해져 있었다.

리아나는 아이도 죽이고, 자신도 죽일 것이다.

리아나의 입에서 정말로 아이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칼리언은 그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기억을 잃을게.’

그와 자신이 어렸을 적 꿈을 꿨다면서 평소답지 않게 들떠 있던 리아나가 그에게 준 큰 힌트였고 선물이었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리아나의 관심을 사기 위해 말더듬이 연기를 했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 훨씬 수월했다.

그때에는 있지도 않은 폭력의 흔적까지 조작하기 위해 자해를 일삼아야 했으니 말이다.

칼리언은 리아나를 잘 알고 있었다.

리아나는 본능적으로 밝고 행복한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예쁜 시선이 닿는 곳은 늘 우울하고, 불쌍하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것들뿐이었다.

칼리언은 그런 리아나의 관심을 사기 위해 아카데미 왕따를 당하는 척 연기해 왔다.

그시절 그는 그렇게 온전히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리아나의 관심을 배부르게 받아먹었다.

리아나가 자신에게만 아블란으로 갈 거라는 사실을 알려 줬을 때엔, 생전 느껴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전율이 머리를 강타했다.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리아나와 단둘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달떠서 매일 같이 자위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작정 그녀를 끌고 가고 싶었으나 리아나의 관심을 받으려면 칼리언은 그녀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소년이어야 했다.

그는 리아나를 조금씩 구속하다가 끝내 완전한 자신의 소유로 만들 계획을 그리며 먼저 아블란으로 떠났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리아나는 오지 않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리아나가 탄 배가 난파된 건 아닐까?

도중에 해적을 만나 납치되었나?

아니면 길이 엇갈렸나.

칼리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아블란을 샅샅이 뒤졌지만, 리아나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깨달았다.

리아나는 처음부터 아블란 행 배를 타지 않았음을.

칼리언은 그때야 자신의 순수함과 어리석음을 비난했다.

바보 연기를 한다고 진짜 바보가 되어 버렸을 줄이야.

얌전히 기다릴 게 아니라 리아나를 납치해서라도 아블란으로 끌고 왔어야 했다.

아블란으로 떠나겠다던 리아나의 마음이 도중에 바뀌었건, 그녀가 자신을 떼어놓기 위한 거짓말을 했건 아니면 그녀의 버러지 같은 부모가 발목을 잡았건, 이유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리아나가 와 약속한 아블란으로 오지 않았다는 거다.

칼리언은 무른 방법으로 리아나의 관심과 동정만 겨우 받아먹는 비렁뱅이 행세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대신 리아나가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통제하고, 팔다리를 잘라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기로 했다.

그래야만 이 허한 마음의 구멍이 채워질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을 묻는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멍청한 말더듬이 연기를 하던 바로 때라고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흐음.”

그때의 바보 같은 연기가 지금에 와서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칼리언은 그때도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

게다가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리아나가 어리숙하게 리드하는 잠자리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리아나에게 섹스를 가르쳐 달라고 졸라 댔다.

그때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주제에 태연한 척 구는 게 귀여웠다.

그런 그녀를 오래 감상하지 못하고 흥분해서 정신없이 몰아붙이고 마는 게 그 완벽한 시간 속 유일한 흠이었다.

칼리언은 매일 리아나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은 자제하자고 다짐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의 밑에서 울며 빌고 있는 리아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칼리언은 잠시 제 아래에서 흐느끼는 리아나의 얼굴을 생각하다가 펜을 움직였다.

화려한 필체가 무언가를 거침없이 적어 나갔다.

「혈통 좋은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유기견처럼 보이도록 만든 후, 리안이 발견할 수 있게 준비할 것.엘빈이 다섯 살이 되는 해에 블래이크, 랜서를 처리.완벽한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게 미리 준비.」

칼리언은 펜을 내려놓았다.

곧 엘빈과 함께 나들이를 하러 갔던 리아나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칼리언은 즐거운 마음으로 가면을 쓸 준비를 했다.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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