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탈출구
칼리언과 살갗을 가깝게 맞대고 있는 순간만큼은 과거를 잊고 현재의 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릿속이 칼리언이 주는 감각들로 가득 채워져서 다른 생각은 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그가 내쉬는 숨결이 피부를 데우고, 콧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은은한 체취가 열꽃을 피워 냈다.
그가 나를 한계까지 몰아가길 원했다.
쾌락에 젖어 신음하다가 칼리언의 품에 안겨서 잠이 들 때면, 그 어떤 꿈보다 달콤한 숙면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집어삼킨 것과 다르게 부드럽고 다정하게 내 입술을 머금었다.
뜨거운 점막이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가며 문지르더니 쪽쪽 젖은 소리를 내며 가볍게 입맞춤을 뿌렸다.
나는 살짝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읍.”
그의 적안 속에 정제되지 않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간질거리는 입맞춤을 나누면서 점차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가슴이 크게 오르내린다.
곧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언은 제 인내심을 테스트하기라도 하듯이 좀처럼 욕구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의 반응을 살피며, 내가 그가 주는 감각을 즐길 수 있게 접촉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하아…….”
비스듬하게 상체만 기울였던 칼리언이 한 손으로 제 셔츠를 뜯어 냈다.
투둑, 그의 힘 앞에서 정교하게 세공된 단추가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단숨에 상의를 탈의한 칼리언은 바지 버클을 활짝 풀어 헤치고 내 몸 위로 겹쳐 올라왔다.
서로의 가슴과 배가 살짝 맞닿으면서 은근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는 내게 온전히 몸을 싣지 않으려 내 얼굴 옆에 팔을 대었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가왔을 때, 이번엔 내가 먼저 쪽 하고 입술을 맞댔다.
칼리언의 눈썹이 씰룩인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깊게 누르자 칼리언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담기는 것이 전부 느껴졌다.
“안달 났네.”
맞붙은 입술 사이로 지독하게 낮은 음성이 자잘한 울림과 함께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말에 홀로 코웃음을 쳤다.
안달은 내가 아니라 네가 났지.
그의 허벅지와 내 몸이 스칠 때마다 엄청난 양감의 살덩이가 크게 부풀어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네가 할 소리는 아니라는 뜻을 담아서 무릎을 세워 칼리언의 오른쪽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하아…….”
내 도발을 알아차린 그가 봉긋 솟은 가슴 둔덕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얇은 네글리제가 큼지막한 손아귀 아래에서 잔뜩 구겨졌다.
“칼리언, 읏, 거긴…….”
“그래, 알아.”
예민하게 솟은 유두를 단단한 손가락이 콱 짓눌렀다.
성감이 저릿하게 퍼지며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내 호흡이 점점 가빠지자 동시에 입맞춤 또한 깊어졌다.
질척한 점막으로 비벼 대기만 했던 아랫입술을 이로 물어뜯고, 신음과 함께 벌어진 입속으로 뜨거운 살덩이를 깊게 처넣는다.
뜨거운 혓바닥이 무법자처럼 내 입 안을 온통 헤집었다.
볼이 불룩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볼 안쪽 살을 혀끝으로 깊게 누르고, 넓은 혓바닥으로 질척하게 핥는 감각이 선연했다.
“우웁……!
웁!”
그러면서 제 부푼 성기를 과시하듯 내 허벅지에 비비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네글리제가 그의 손 아래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칼리언에게 잠식당한 기분이었다.
서로의 타액이 질척하게 얽히고 더운 숨결과 함께 젖은 소리가 뜨겁게 울려 퍼졌다.
집요하리만치 입 안을 괴롭히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내 턱선을 이로 긁듯이 깨물었다가 기어코 목에 날카로운 이를 박았다.
“아……!”
움찔!
통증과 함께 묘한 성감이 몸 전체에 찌릿하고 파고들었다.
칼리언은 자신의 잇자국이 남은 피부 위를 입술로 몇 번이고 문질렀다.
나는 그의 목과 어깨 언저리에 놓인 손을 올려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손가락 사이로 살랑살랑 스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아, 하…… 리안.”
칼리언은 내 가슴을 한 손으로 주무르면서 다른 손을 제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던 거대한 성기를 꺼내어 내 다리 사이에 직접 비볐다.
성기의 뭉툭한 앞머리는 벌써 선액으로 젖어 있었다.
칼리언이 매끈거리는 액을 내 허벅지 안쪽에 펴 바르듯이 성기를 문질렀다.
“아, 칼리언, 잠깐, 잠깐……!”
그가 옷 위로 내 가슴을 빨아들였다.
축축한 타액이 얇은 네글리제를 진득하게 적시자 홧홧한 열감이 가슴 전체에 퍼지는 기분이었다.
칼리언은 혀끝으로 유두를 꾹꾹 누르면서 눈만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혓바닥 끝이 바짝 선 유두 앞뒤로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읏……!”
기겁할 만큼 노골적인 모습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뺨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을 게 뻔했다.
게다가 아래에 비벼지는 감촉에 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의 머리를 움켜쥐기만 했다.
뻐억-.
칼리언이 가슴을 입에 크게 물었다가 떼어 내자 뻑- 하고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내 배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두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가슴 근육, 그리고 굴곡이 분명한 복근이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았다.
나는 가슴골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눈을 돌렸다.
“놀라지 말고.”
“하아, 뭘?”
그가 내 네글리제를 양손으로 쥐더니 단숨에 부우욱- 소리를 내며 종이 찢듯이 찢어 버렸다.
그의 두꺼운 팔뚝에 힘줄이 서는 것이 보였다.
한낱 천 조각으로 전락한 네글리제는 침대 아래에 무참히 버려졌다.
칼리언은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몸을 붙여 왔다.
그의 성기가 내 사타구니 안쪽을 퍼억, 퍼억 강하게 찔러 온다.
“흐읏, 으!
아!”
실제로 삽입한 것도 아니지만, 분명한 쾌감이 번져 오기 시작했다.
느리게 움직이던 그가 점점 속도를 내며 제 음모가 내 사타구니에 비벼질 만큼 깊게 문질러 댔다.
침대 전체가 들썩일 때마다 내 몸도 함께 흔들렸다.
열에 달뜬 적안이 내 눈짓, 숨소리, 안면 근육 하나까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집요하게 관찰하는 사이 그의 아래는 이성이 없는 짐승처럼 나를 탐해 갔다.
“아!
아으, 읏!
칼, 리언!”
그의 건장한 육체 아래에 꼼짝없이 깔린 나는 칼리언이 주는 쾌락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흥분에 달뜬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아, 리안, 벌써 울면 어떻게.
응?”
“잠깐, 우읏……!
조금, 지, 진정해…….”
“여기서 더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그가 내 귀에 입술을 붙이고 열에 들뜬 음성으로 속삭였다.
잔뜩 쉰 저음이 숨결과 함께 밀려들 때마다 고막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아…… 앗, 흐으응……!”
성기를 비비는 행위만으로도 선뜩한 쾌감이 몰아쳤다.
부끄러움을 잊은 나의 몸은 쾌락에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로 질척한 액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고, 호흡은 폐부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목 근처에서 가쁘게 껄떡거렸다.
내가 온몸을 홧홧하게 데우는 쾌락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긴 혓바닥이 목선을 핥아 올렸다.
그는 내 목에 얼굴을 깊게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눅눅한 욕망의 냄새가 내 콧속으로 함께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큼지막한 손이 나의 둥근 어깨뼈를 어루만지다가 팔뚝을 쓸어내리고,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으며 겹쳐 잡았다.
칼리언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내 몸을 정신없이 탐해 갔다.
“으으흣!”
손가락 두 개가 예고도 없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질척한 액이 손가락과 내벽에 짓눌리며 젖은 소리를 냈다.
고통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내벽이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집어삼켰다.
“아, 아아……!
그렇게, 빨리 흔들지 마.”
“왜, 하나 더 넣어 줘?”
이미 안쪽에 두 개가 박혀 있는데, 손가락 하나가 젖은 내벽을 밀고 더 들어오기 시작했다.
빠듯한 듯 아닌 듯 유유히 안으로 진입하는 감각에 골반이 움찔거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발가락에 힘을 주어 버텼다.
손가락만으로도 안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잘 삼키네.”
“하으으…….”
깊은 곳까지 푹 박혀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무심코 아쉬운 한숨이 토해 졌다.
그가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내 엉덩이 밑을 노골적으로 주물렀다.
질척한 액이 피부에 고스란히 들러붙었다.
내가 그의 손길에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 알려 주기 위한 짓궂은 행동이었다.
“나만 애달아 있는 줄 알고 섭섭했는데.”
“흐읏!
그, 그렇게 갑자기 넣지 마…….”
“너도 나만큼이나 발정하고 있었네.”
그가 내 목에 입술을 찍어 누르며 턱을 지나 뺨 그리고 눈꺼풀 위까지 가벼운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다정한 입맞춤과는 다르게 내벽을 자극하는 손길을 점점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남자들보다도 길고, 곧은 손가락 세 개가 안쪽으로 거침없이 박혔다가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질퍽거리는 소음이 침실 곳곳에 울려 퍼졌다.
“아흑…… 아!”
손 전체를 쑤셔 박을 듯이 한계까지 밀어 넣은 칼리언이 내벽 전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다.
나는 차오르는 성감에 헐떡거리면서 앓는 듯한 신음만 내뱉었다.
그의 손이 내 안을 낱낱이 더듬는 것이 느껴지자 알 수 없는 민망함이 차올랐다.
“소, 손 좀…….
그만, 흐으…….”
칼리언은 내 흐느낌 어린 부탁을 듣지 못한 척하며, 내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타액을 집어삼키고, 숨결과 신음 소리까지 모조리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끝까지 박혀 있던 손가락이 안에 고인 액을 후벼 파듯이 돌아갔다.
젖은 마찰음이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내 다리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손목까지 내가 흘린 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을 거다.
내가 내쉬는 호흡마다 선명한 욕정이 함께 새어 나왔다.
빠듯하다고 생각했던 이물감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익숙한 쾌감이 번져 들었다.
여러 번의 잠자리를 통해 절정의 황홀함을 학습한 몸이 본능적으로 더 강한 쾌감을 갈망하고 있었다.
쾌락의 극치에서 정신없이 녹아내리고 싶다.
나는 잘게 움찔거리는 허벅지를 느끼면서 무릎을 더 높이 세웠다.
굴곡이 선명한 근육들을 다리로 스치듯 만지자, 그가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더 보채 봐.”
그가 질 안에 박힌 손가락을 빼내고 내 허벅지를 길게 쓸어내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걸치며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원하는 것은 분명했으나, 칼리언처럼 적나라한 말을 내뱉을 만큼 내 입은 대담하지 못했다.
눈가가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시야는 은근한 쾌감이 만들어 낸 눈물로 하얗게 일렁였다.
사납게 가라앉은 적안에 가쁜 숨을 내쉬는 내 얼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사그라드는 게 보였다.
칼리언이 하체를 맞붙이며 흉포하게 부풀어 있는 성기를 노골적으로 비볐다.
뜨겁고 단단한 살덩어리가 닿자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아랫배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흐읏, 으…… 아!”
잠깐 사이에 말라 버린 손이 다시 아래에 닿기가 무섭게 질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언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만 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다시 뒤로 물리며 음핵과 내 성기 전체를 위아래로 문질렀다.
“손가락 하나 더 넣자.”
“아냐, 으, 안돼, 못해…….”
“네 개는 들어가야, 내 걸 받지.”
짐승의 것처럼 거친 숨결이 귓속으로 밀려들었다.
칼리언은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고 제 욕심껏 내 몸을 짓누를 듯 위험한 기세로 도리어 나를 달래는 시늉을 했다.
배꼽 위까지 페니스를 빳빳하게 세워 놓고 그런 말을 해봤자, 내 조급함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는 짓궂은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혹여나 내가 다치는 것이 두려워, 차근차근 내 몸을 적응시키려는 것이다.
제 다리 사이에 달린 것이 흉기와 다를 바 없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냥…… 해.”
나는 팔을 크게 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욕망의 수위는 곧 흘러넘칠 듯 한계에 달해 있었다.
모든 인내를 끌어모아 가까스로 자제하고 있던 칼리언은 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술을 겹쳐 왔다.
“우읍…… 하아……!”
입 안 깊숙한 곳까지 그의 혓바닥이 밀고 들어왔다.
그는 약탈자처럼 여린 점막 곳곳을 핥더니 혀뿌리까지 뽑아낼 듯이 거칠게 빨아 당겼다.
“너는 낭만적인 섹스를 좋아하지만, 나는 게걸스럽고 질척하게 뒹굴고 싶어.”
“…….”
“합의점을 찾아보자고.”
칼리언이 몸을 일으키자 거대한 그림자가 내 몸을 뒤덮었다.
뭉툭한 귀두가 충분히 젖은 질구에 맞닿는 것이 느껴졌다.
쿡 찔러 들어오는 감각에 아랫배가 바짝 긴장했다.
칼리언은 한 손으로 페니스를 쥔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욕망으로 짙게 가라앉은 눈이 내 얼굴 아래로 미끄러지더니 가슴, 배, 골반 그리고 다리 사이의 은밀한 곳까지 닿았다.
그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다른 손으로 쓸어 넘긴 후 내 허벅지 한쪽을 위로 밀어 올렸다.
“으읏…….”
푸욱.
골반이 들리자 입구에 닿아 있던 귀두가 안쪽으로 찔러 들어왔다.
손가락이 들어왔던 깊이에 비하면 그다지 깊은 것도 아니지만, 엄청난 양감 때문에 받아들이기에는 훨씬 부담스러웠다.
억지로 내벽을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 때문에 차올랐던 성감이 한층 짙어졌다.
칼리언은 제 성기가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뭘 저렇게 보는 거야.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차라리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수치심을 이겨 내는 것에 도움이 될까 싶어 나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아파?”
“…….”
내 행동을 다르게 받아들인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쁜 숨만 내쉬었다.
“널 억지로 안는 상상을 하면서 자위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어.”
“무슨, 소리……아!”
“그러니까 바보같이 참지 말고, 확실히 얘기해.”
먼저 관계를 요구한 건 내 쪽이었다.
지금의 내게는 정신을 온통 휘발시킬 만한 강한 쾌락이 필요했다.
그리고 칼리언은 그 누구보다 나를 확실하게 환락의 절정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내가 거부할 리가 없지 않은가.
“흐읍…… 그냥, 넣……어.”
내 대답을 기다리던 칼리언은 내 눈가에 입을 맞추며, 내벽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기이할 만큼 벌어지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낯설고 이상했다.
나는 엄청난 이물감에 몸서리쳤고, 그도 좁은 곳에 삽입하는 게 쉽지만은 않은 듯 긴 숨을 내뱉었다.
“아, 흐으윽.
아!
어, 어디까지 들어와.
아!
잠깐……아!”
“후우…… 어디까지 들어가는진 네가 가장 잘 알잖아.”
“흐으읏…….”
“몇 번을 박아야 익숙해질까.
응?”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칼리언이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으나 여전히 아래는 무자비하게 나를 꿰뚫고 들어왔다.
“아……!”
페니스의 불거진 핏줄이 전부 느껴질 만큼 안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거대한 남근이 움직이는 감각에 허벅지 안쪽이 발발 떨려 왔다.
이때 천천히 움직이던 칼리언이 돌연 아래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퍼억!
성큼 파고드는 페니스에 고개가 뒤로 꺾이고, 눈이 크게 뜨였다.
“하…… 아아…….”
거대한 남근이 내 안을 틈도 없이 가득 채우며 내벽 전체를 마구 짓눌렀다.
엄청난 부피감에 숨이 막힐 지경인데 칼리언은 무자비하게 쑤셔 넣은 것으로 멈추지 않고, 페니스를 깊게 박은 채로 뭉근하게 허리를 돌렸다.
페니스가 내벽을 억지로 넓히며 꾸역꾸역 진입하는 감각에 아찔한 소름이 끼쳤다.
“아으…… 아!
그렇게, 흐으……!”
통증 위로 짙은 쾌감이 번져 왔다.
내벽 안쪽에서부터 피어난 작열감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신경을 뜨겁게 달구는 것만 같았다.
“리안.”
“하으으…….”
삽입만으로도 땀이 송골송골 솟아났다.
열기를 품은 손이 달달 떨리는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자, 목과 어깨에 쌓여 있던 긴장이 스르르 풀려 갔다.
몸의 힘이 조금 빠지기가 무섭게, 퍼억- 칼리언이 거세게 안으로 치받았다.
허억!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도저히 품을 수 없을 거 같던 남근이 기어코 뿌리 끝까지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전신을 파들파들 떨며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조금 밀어냈다.
그러나 그의 강인한 육체를 밀어내기에 내 힘은 너무도 하잘것없었다.
바람에 몸을 실은 풀잎 하나가 바위를 스치고 지나간 격이었다.
단단한 어깨에 내 손가락이 하얗게 눌렸다가 두툼하게 솟은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칼리언이 몸을 더욱 겹쳐 오며 화염 같은 숨결을 쏟아 냈다.
“하아…… 좁아.
좆이 끊기겠어.”
“흐으, 우, 움직이지 마……아!”
“넣은 채로 잘까?”
칼리언은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과 함께 박혀 있던 페니스를 뒤로 물렸다.
안을 가득 채웠던 것이 길게 빠져나가자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입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성기가 뿌리 깊이 치고 들어왔다.
“아읏!
응, 칼리언!”
섬뜩할 만치 사납게 커진 페니스가 내벽 전체를 휘저으며 거침없이 쑤셔 박혔다.
칼리언은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기 위해 속도와 힘을 조절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이었다.
그가 한 번 치받을 때마다 몸 전체가 위로 불쑥 밀려 올라갔다.
“하앗…… 으, 사, 살살.
아…… 아!”
정수리가 침대 헤드에 살짝 스쳤을 때, 칼리언이 내 골반을 잡아 아래로 쑤욱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침대 헤드를 짚고, 다른 손으로 내 뒷목과 머리를 넉넉하게 감싸 쥐었다.
욕정으로 얼룩진 붉은 눈이 시야를 가득 압도했다.
그는 내가 억지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만든 채 사정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 칼, 리언……!”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관찰했다.
땀에 젖어 흔들리는 머리카락, 속눈썹을 진하게 적신 눈물, 붉어져 있을 눈가,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과 흘러나오는 신음까지.
그는 맞붙은 아랫도리에서 퍼지는 자극보다 자신 때문에 흥분해 가는 나를 보면서 쾌감을 느꼈다.
“하윽, 아!”
두꺼운 페니스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갈 때마다 애액이 뻐끔거리며 튀어나왔고, 다시 거침없이 안으로 쑤셔지면 퍽!
하고 크게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배 속에 고여 있던 쾌감이 통증을 완전히 밀어내고 이성을 흩뜨렸다.
“아…… 좋아, 흐응…… 아!”
거친 힘과 단단한 페니스가 쾌감을 찍어 올렸다.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할 만큼 저릿한 감각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교성과도 같은 신음이 정신없이 터졌다.
나를 억누르고 있던 불안감과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씻겨 나가고, 칼리언이 주는 감각이 머리를 온통 지배했다.
그의 허리 짓이 점점 빨라지면서 무자비하게 나를 절정으로 몰아세워 갔다.
무거운 침대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덜컹거렸고, 역동하는 근육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헐떡이는 신음과 질척한 마찰음이 침실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하윽, 좋아!
아, 칼리언, 흐읏, 아!”
“하아, 리안…… 후…….”
칼리언도 이성을 잃은 채 뜨거운 신음을 토했다.
그의 턱 끝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서로의 몸에서 뿜어낸 액으로 맞닿은 피부가 온통 끈적거리고, 침대까지 축축하게 적시고 말았다.
“리안…… 하…….”
그가 흥분할수록 행위가 더욱 적나라하고 격정적으로 변해 간다.
칼리언은 내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갈 수도 없게끔 단단한 몸을 겹쳐 눌렀다.
안에서부터 퍽퍽 밀어 쳐올리는 감각에 뇌가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완전히 짓눌린 채 퍼부어지는 쾌감을 꼼짝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빠르고, 강하게 고양되는 성감은 만족스럽다 못해 거북할 지경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확 솟구치는 쾌감을 조절하고 싶었다.
“하으, 아, 잠깐, 아, 아!
벌써……흐으응.
나…… 나 갈 것…….
하읍!”
고개를 가로저을 때, 그가 입술을 겹쳐 왔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함께 말려들어 가 까끌까끌한 감각이 혀에 엉켜 들었다.
그러나 머리카락 따위로는 잔뜩 흥분한 살덩이를 멈춰 세울 수 없었.
칼리언은 목구멍까지 혀를 쑤셔 박을 기세로 깊게 내 입 안을 탐닉해 갔다.
“우웁, 움……!
하아……!”
폭력적인 쾌감에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으며, 발바닥으로 마구 시트를 밀어냈다.
그러나 흥분해 날뛰는 허리 짓은 더욱 격렬해질 뿐이었다.
사고가 완전히 점멸하고, 몸을 덮치는 쾌감의 파도에 무기력하게 휩쓸렸다.
칼리언이 입술을 옮겨 내 뺨을 길게 핥아 올렸다.
“더 울어.
내게 매달려.
내게 집착해.
널 악몽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봐.”
“흐응, 아, 아…… 조금만, 천천……히, 제발.
아읏!”
“하아, 미치겠네.
우리가 짐승이었더라면, 눈치 보지 않고 어디서든 박을 수 있었을 텐데.”
“칼리언, 나 진짜, 흐읏, 아, 아!”
“다음 생은 짐승으로 태어나자.
네 안에서 내 정액이 마르지 않게 해줄게.”
“아, 하윽……!
아, 칼리언, 칼리언-.”
“크흑……!”
허리를 높이 띄우며 신음을 내지르자, 그가 내 골반을 틀어쥐며 사납게 성기를 밀어붙였다.
비명 같은 신음이 눅눅한 공기를 갈랐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시야가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던 쾌감이 전신에 퍼부어진다.
깊숙한 곳까지 박혀 있던 페니스가 역동적으로 박동하며 사출하는 것이 전부 느껴졌다.
나는 땀에 젖은 그의 등을 힘껏 끌어안으며 절정을 만끽했다.
“하악…… 아…….”
칼리언이 허리를 느리게 뒤로 물리자 내 안에 쏟아졌던 액이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려 나왔다.
완전히 빠져나갈 줄 알았던 페니스가 다시금 내벽을 밀어 올리며 깊숙한 곳까지 박혔다.
많은 양을 쏟아 냈음에도 여전히 죽지 않은 성기는 자신을 축축하게 빨아들이는 내벽을 앞뒤로 쑤시며 만족스러운 숨을 토해 냈다.
“그만, 하아…… 읏, 그, 그만.”
“걱정 마.
네가 기절하지 않을 만큼만 박을게.”
강렬한 절정으로 기운이 빠져 버린 나와 다르게, 칼리언은 이제 시작인 듯 보였다.
칼리언의 공간에서 그를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고, 성감에 예민한 나는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의 섹스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하며 나는 퍽!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
몇 차례나 오르가슴을 느꼈는지 셀 수조차 없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시체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리며 칼리언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기만 했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놀라울 정도의 체력으로 나를 한계까지 몰고 갔다.
거친 정사의 흔적으로 침실은 엉망이 됐다.
장식용으로 놓여 있던 화분은 산산이 조각났고, 테이블 위에 잘 정돈되어 있었던 집기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칼리언에게 안긴 채로 넓은 침실의 모든 곳에서 절정을 맞이해야 했다.
그는 내 정신이 쾌감에 밀려 까무룩 잠겨 들려고 할 때마다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 입속에 물을 머금고 내게 입을 맞추며 수분을 보충해 줬다.
협탁 위에 가득 채워져 있던 물병이 바닥을 드러내자 그것도 어김없이 밀려나 예리한 파편으로 전락하여 바닥 신세가 되었다.
누가 보면 도둑이 들었다고 오해할 만큼 난장판이었다.
그러나 나도 칼리언도 하녀를 불러서 침실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으…… 칼리언, 그만, 하, 아!
그만…….
나, 너무, 힘들……아…….”
칼리언이 침대 헤드에 기대고 포식자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죽지 않은 페니스를 안에 품은 채로 그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었다.
“리안, 움직여야지.”
땀에 젖은 손이 내 가슴부터 허리까지 쓸고 내려왔다.
나는 눈물로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그를 원망스레 돌아보았다.
욕정에 취해 있는 적안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힘들, 못하겠…… 아!
잠깐!”
칼리언이 예고도 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이미 깊은 곳까지 페니스를 집어삼키고 있는 내벽이 음낭까지 먹어 치울 듯이 거칠게 움찔거렸다.
칼리언의 눈가가 짙은 흥분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날뛰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커다란 손이 내 턱 전체를 감싸 쥐었다.
칼리언은 내 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깨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움직여서 날 싸게 하면 그만할 거라니까.”
“힘이…… 안 들어가.”
“그럼 평생 박은 채로 살자.”
“흐으으…… 시, 싫어.”
여러 번의 절정으로 사고는 마비된 지 오래였다.
칼리언의 말이 조금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그의 입술을 피하고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젖은 침대를 짚고 골반을 들었다.
내벽이 두꺼운 기둥을 뱉어낼 때마다 안에 고여 있던 액이 함께 흘러내려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지금 닦아 낸다고 해서, 또다시 흘러내릴 게 뻔했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
“날 싸게 해야지.
너 혼자 좋으면 돼?”
칼리언이 자세를 조금 움직여서 찌르는 방향을 달리 했다.
단단한 곳이 어느 지점을 쿡 하고 찌르자, 몸을 지탱하던 손에 힘이 풀려 버렸다.
털썩 주저앉음과 동시에 미약한 오르가슴이 뇌를 저릿하게 울렸다.
“리안.”
내벽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낀 칼리언이, 짙게 깔린 음성으로 나를 탓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울음 같은 한숨을 토해 냈다.
“흣, 그만할래.
덥고, 힘들어.”
칼리언이 내 가슴 한쪽을 부드럽게 주물럭거리며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래.
땀이 많이 나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가 투정을 받아 주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좆을 안에서 빼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돌연 그가 한쪽으로 치워 뒀던 이불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뒤덮었다.
습한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자 불쾌함에 와락 얼굴이 일그러졌다.
“덥다니까…….”
“가만히 있는 게 좋을걸.”
가만히 있기는 뭘 가만히 있어.
이불을 걷어 내려는 찰나 딸랑- 하고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열기가 전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저 종소리는 하녀를 부르는 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렸다.
칼리언 이 미친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이불 안에서 눈만 크게 뜬 채로 숨도 쉬지 못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박동했다.
이게…… 이게 지금.
쾌감에 가라앉아 있던 이성이 급하게 고개를 내밀고 이건 아니라고 발악했다.
내가 아무리 칼리언과 애까지 낳았다지만, 정사를 나누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게다가 난장판이 된 침실을 보면 얼마나 격정적인 정사를 나누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엉성하게 가려진 이 덩어리가 나라는 것도 단번에 눈치챌 거다.
칼리언……!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 익숙한 음성이 칼리언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칼리언은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여전히 내 가슴을 희롱하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이 장난치듯이 꼿꼿하게 선 내 유두를 조금 힘을 주어 꼬집자 입에서 “읏!”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실 물이랑 머리 손질할 것을 가지고 와.”
“알겠습니다.”
칼리언이 간결하고 짧게 명한 만큼, 안젤라도 짧게 대답했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이불을 걷어 내려는 찰나 손이 움찔 떨렸다.
곧 안젤라가 물건을 가지고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올 터였다.
“뭘 그렇게 겁먹고 있어.”
그가 내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나는 커다란 손등을 아프게 꼬집었다.
“네가 미친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미친놈인 줄은 몰랐어!”
“이미 네 신음 소리가 저택 전체에 퍼졌을 텐데.
뭘 부끄러워하고 있어.”
“그거랑 그거랑 같아?”
“화내는 거 보니, 힘이 남아도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거에 열 올리지 말고 허리나 잘 움직여.”
“하윽……!
야, 갑자기 움직이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칼리언이 허리를 쳐올렸다.
들쑤시는 감각에 아래가 찌르르 울린다.
충격으로 잦아들었던 성감이 다시 번져 들었다.
이때, 안젤라가 돌아왔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또각또각.
낮은 단화가 바닥을 딛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무언가를 밟았는지, 간간이 파열음 같은 것도 들렸다.
무언가를 협탁 위에 올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안젤라는 걸어 들어왔던 걸음보다 더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이불을 걷어 냈다.
“제정신이야?”
“네가 보기에는 어떤데.”
“미친놈 같아, 진짜.”
“그럼 그런가 보지.”
그는 나와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수치심도 없는 걸까.
칼리언은 긴 팔을 뻗어 빗과 붉은 머리끈을 집어 들었다.
내 시선이 그의 손에 따라붙었다.
“……그건 뭐 하려고.”
“덥다며.”
칼리언이 내 턱을 쥐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놨다.
그러고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빗어 내렸다.
뭐 하는 거야…….
내가 갑자기 빗질을 시작한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자 단단한 것이 어깨를 깨물었다.
“내 좆 박은 채로 머리도 빗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할 거면 계속 그렇게 앉아 있던가.”
“너 설마…… 내가 덥다고 해서 머리 묶어 주는 거야?”
“응.”
“무슨 변태 같은 짓이야, 싫…….
아!
제발, 흣, 말하고 있는데, 움직이지 좀, 마.”
“나도 머리 묶는 데 집중하고 싶어.”
칼리언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그와 입씨름을 해봤자 이 민망한 시간만 길어질 뿐이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빨리 싸게 하는 거다.
나는 힘 풀린 다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느리게 들어 올렸다가 앉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칼리언은 귀한 보물을 다루듯이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칼리언처럼 페니스를 길게 빼내지도 못하고, 살짝 몸을 들어 올렸다가 앉는 것뿐인데도, 힘에 부쳤다.
흐트러진 머리를 다 정리한 칼리언이 불시에 내 허리를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앞뒤, 좌우로 돌리기 시작했다.
“힘들면 이렇게, 응?”
그가 친절한 선생님인 척 연기하며 말했다.
굵직한 페니스가 예민한 내벽을 사정없이 짓누르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갑작스레 치솟는 날카로운 쾌감에 숨을 집어삼켰다.
“으응…… 아…….”
머리 위로 뜨거운 숨이 퍼부어지고,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욕심껏 움직이고 싶어 하는 티가 역력한데도 그는 초월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내 머리를 묶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내 이성은 차츰 날아가고 있었다.
정욕을 갈망하는 본능이 몸을 조종했다.
“하아, 아!
칼리언…… 으음.
좋아.
더, 더…… 으흣!”
허리를 움직이는 데 익숙해지자, 나는 더 대담하게 성감을 끌어 올렸다.
유독 느끼는 지점을 찾아 페니스로 그곳을 짓누르고, 허리를 돌렸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뜨거워진 머리가 부끄러움을 잊었다.
나는 남녀 간의 교합이 아니라 마치 자위를 하는 것처럼 요분질을 해댔다.
등허리까지 내려갔던 머리카락이 거두어지고, 머리가 단단하게 틀어 올려졌다.
칼리언이 숙인 내 목 뒤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척추 마디 하나하나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싸게 하라니까, 말 안 듣지.”
“하, 으.
으응, 아!”
“내 좆 가지고 노니까 좋았어?”
“좋아, 하…… 아, 칼리언, 흐읏!”
나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들썩였다.
나는 아랫입술을 악물고 오로지 절정을 향해 달렸다.
질퍽질퍽한 젖은 소리 위로 폭발하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갔다.
“흐윽, 아, 아아!”
칼리언이 나를 끌어안은 채로 허리 짓을 시작했다.
내가 움직이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칠게.
몸을 관통해 버릴 것처럼 봐주는 것 없이 박아 대는 속도와 힘에 나는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아윽, 아!
하악…… 하아, 아!”
“후우…… 리안, 크흣.”
“칼리, 언, 천천히, 으읏, 아, 흣……!”
그가 거친 목울음 소리를 내며 퍽, 퍽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아!
흐으, 아!”
“하아, 리안…….”
“처, 천천히, 갈 것 같, 아흑!”
그를 말리기 위해 힘줄이 팽팽하게 솟은 팔뚝을 잡아 봤으나 땀에 젖은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오랜 시간 정사를 나눴는데도, 어김없이 절정이 찾아들었다.
신경 줄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나는 교성을 내지르며 그의 팔을 힘껏 긁어내렸다.
“아, 아!
칼리언, 흐윽!”
“리안……!”
내벽이 경련하듯 꽉 조여들면서 황홀한 절정에 다다랐다.
머리를 강타하는 쾌감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몸에 등을 기대었다.
고개가 절로 위로 들리면서 정수리가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칼리언이 얼굴을 내려 내 입술을 머금었다.
절정의 여운으로 신음이 흘러나왔고, 칼리언은 혀를 내어 내가 내뱉은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그가 싸놓은 많은 정액과, 그의 페니스로 가득 찬 아래에 또 정액이 뿌려졌다.
칼리언이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나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이 완전히 늘어져 버렸다.
칼리언이 미끈거리는 내 몸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내가 도와줬으니까, 한 번만 더 싸고 끝낼게…….”
“…….”
나는 질리는 눈으로 칼리언을 바라보았다.
당장 정력 감퇴에 좋은 약초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칼리언과의 섹스는 악몽보다 잔악한 기억을 덮어 버리기에 효과적이었다.
다만, 그가 내 몸 곳곳에 남겼던 키스 마크가 사라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기억이 되풀이되었다.
하루하루 정신이 망가져 가는 것이 느껴지는 게 얼마나 끔찍한 기분인지 칼리언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다.
흐꾸웩을 낳기 전부터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섹스를 제외한 모든 방법이 다 실패했다.
미약한 차도를 보일지라도, 부모님을 연상시킬 만한 것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노력했던 것이 모든 노력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한 번은 하녀들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여 일주일 동안 저택 내의 모든 물건을 다른 것으로 바꾼 적도 있었다.
아버지를 연상시킬 만한 검이나 갑옷은 전부 처분하고, 비슷한 문양이 들어간 장식품도 모조리 바꾸었다.
어머니와 애인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코를 괴롭혔던 술 냄새, 화장품 냄새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던지라, 저택 내의 술과 화장품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하지만 부모님을 살해한 칼리언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나는 다시 기억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울증이 극에 달할 때마다 칼리언과 짐승처럼 몸을 섞는 나날을 보냈다.
기억이 나를 찾아오기 전에, 흐꾸웩을 마음껏 보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내 정신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
나는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반쯤 누운 자세 때문에 허리가 욱신욱신 아파 왔지만, 몸을 추스를 기력조차 없었다.
손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체스 말이 바닥 위로 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체스를 두려 했지만, 한 시간을 넘기도록 게임을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상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도통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일하고 있던 칼리언을 방해해가면서까지 체스를 두자고 조른 건 나였다.
그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따분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칼리언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반대로 나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궁금했지만, 묻고 싶지 않다.
우리 사이에 편안한 적막이 감돌았다.
우리 중 누구도 오랜 침묵을 갑갑하게 느끼지 않았다.
이때, 칼리언이 긴 다리를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나는 천장에 닿아 있던 눈동자를 움직여 칼리언의 동선을 쫓았다.
내 옆자리로 다가온 그가 바닥에 떨어진 화이트 폰을 내 손에 쥐여 줬다.
“재미있는 꿈을 꿨나 보네.”
“어.
어렸을 때의 네가 나왔어.”
칼리언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자주 체스를 두었다.
나는 그와 술래잡기나 나무 올라타기 내기 같은 것을 하고 싶었으나 칼리언은 주로 정적인 놀이를 좋아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껏 내 얼굴을 훔쳐볼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어린 나를 보는 것만 즐겁고, 지금의 나는 별로야?”
“다른 사람 같아.
어렸을 적의 너는 더 귀엽고, 내 말도 잘 들었고, 날 웃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안 좋은 기억들을 떠오르게 해.”
“그리고 네 구멍에 좆도 박아 주지.”
칼리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면서 맞은편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몸을 바로 세우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하늘을 뚫을 듯이 좋았다.
꿈에 나온 어린 칼리언이 새끼 오리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못 견디게 귀여웠고, 만족스러웠다.
아카데미 동기들에게 엉망진창으로 얻어맞고 온 그를 볼 때면 나를 둘러싼 모든 불행이 순식간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는 칼리언이고 내가 그런 그를 보듬어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아주 오랜만에 들뜬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체스판을 들고 다짜고짜 칼리언의 집무실로 찾아간 거다.
하지만 스물여섯의 칼리언을 본 순간, 한껏 부풀어 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성처럼 푸시시 쪼그라들어 버렸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건, 나를 의지하던 불행한 소년이 아니라 내 부모님을 집어삼키고 내 세계에 군림한 포식자였다.
나는 다시 체스 말을 떨어뜨리며 젖은 빨래처럼 늘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널을 뛰어.
좋았다가, 우울했다가.”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일찍 재웠더니.”
섹스 후에는 한동안 내 우울이 가시는 걸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칼리언은 내가 체스를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직접 체스판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곤 내가 닫아 놓았던 창의 커튼을 열었다.
햇빛이 집무실 안으로 쏟아졌다.
나는 햇빛을 피해 소파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부지런히 주변을 정리하는 칼리언을 구경하면서 속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었다.
“기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했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모든 게 딱 사라져.
시간도 공간도 딱 멈춘 기분이야.
심해 깊은 곳에 가라앉은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아.”
칼리언은 내 말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러곤 제자리로 돌아가서 나 때문에 멈췄던 일을 재개했다.
“네 품에 안겨서 잠들 때마다 이름 모를 신에게 기도를 해.
내일은 죽을 수 있기를.
이대로 영영 눈뜨지 않아도 되기를.”
팔랑.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아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내가 몇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지까지 전부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두렵지는 않았거든?
오늘처럼 좋은 꿈을 꾸고 난 다음 날은 드물지만, 오히려 활기가 돌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좀 무서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칼리언이 덮어 준 담요가 허리 밑으로 떨어지자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파고들었다.
나는 담요를 망토처럼 등에 두르고는 칼리언의 슬리퍼도 내버려두고 그의 옆에 나란히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서류에 집중한 칼리언의 옆모습을 보면서 속삭였다.
“내가 애를 죽일 것 같아.”
그가 펜을 쥔 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 속에 햇빛이 드리운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왜?”
칼리언이 물었다.
“여기는 지옥이니까.”
그는 물어 놓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가 지금만큼은 조금 당황한 듯 보인다.
물론 표정은 평소처럼 무덤덤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언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잠시 멈췄던 펜을 움직이면서 건조한 어투로 얘기했다.
“정말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말해.
내가 대신 해줄게.”
“…….”
“또 한동안 죄책감 때문에 울 거잖아, 너.”
나는 스스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저놈만큼 망가지진 않았다고 확신했다.
칼리언의 어마어마한 발언 때문에 흔들렸던 마음이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잠깐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햇빛이 커다란 집무실 창문을 뚫고 들어와 칼리언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나는 그의 옆에 붙어 앉아서,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넋을 놓았다.
“칼리언.”
“응.”
“그 전에, 같이 죽을까?”
“글쎄.”
그는 산처럼 쌓인 서류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 두루뭉술하게 얘기했다.
칼리언은 나와 잠자리에 드는 날엔 침대에서 하루 내내 빠져나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잠자리 횟수가 많아졌으니 당연히 업무도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 줘.”
나는 머리카락에서 손을 거두고, 억지로 그의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 언제쯤 괜찮아져?”
“…….”
“나 언제쯤 아버지를 잊을 수 있어?
언제쯤 네 얼굴을 보고서도 부모님이 생각나지 않을 수 있어?
언제쯤 내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어?
언제쯤?”
“…….”
“도와줘, 칼리언.”
나는 외줄 위를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그리고 외줄의 양 끝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곳으로 가나 처참하게 추락해서 목이 꺾이고 말 거다.
칼리언도 지금의 내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칼리언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네가 잊지 못하면.”
“…….”
“내가 잊을까.”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뭐?”하고 되묻자, 그는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의 내가 아닌, 네 부모를 살해하기 전의 나라면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냐고 묻는 거야.”
어둡게 죽어가고 있던 나의 눈이 희미한 빛을 내었다.
열여섯의 칼리언.
불행을 품고 사는 소년.
나의 유일한 위안.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연약한 말더듬이.
그 칼리언은 지금의 칼리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다른 존재였다.
지금의 칼리언이 아닌 그때의 칼리언이라면…….
부모를 살해하던 당시의 얼굴보다, 내가 연고를 발라 주던 상처투성이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잿더미 속에 꺼져가는 불씨가 다시 피어올랐다.
나는 지금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든 없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남들보다 살짝 서늘한 손이 내 한쪽 뺨을 감싸 쥐었다.
“내가 기억을 잊을게.”
***
칼리언이 망각초를 먹었다.
하녀장인 안젤라에게 미리 자초지종을 일러두었고, 능력 있는 고용인인 안젤라는 저택 내의 모든 하인들이 칼리언을 모시는 데 실수가 없도록 교육했다.
칼리언은 평온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정확히 하루를 넘기는 셈이었다.
괜찮은 걸까.
괜찮아야 할 텐데.
만약 칼리언이 이대로 잘못되면 어떡하지?
불안감이 머리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손톱만 물어뜯었다.
엄지손가락에 피가 흐르는데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때, 칼리언의 반듯한 눈가가 움찔 움직였다.
나는 기적을 목도한 신자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리……!”
나는 큰 소리로 그를 부르려다가, 혹여나 깜짝 놀라서 심장이 잘못될까 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칼리언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이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칼리언.”
호흡을 가다듬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움찔거리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으음…….”
“내 목소리 들려?”
“리안.”
짙게 가라앉은 음성이 내 이름을 부르자 깊은 안도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내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은 잘 보여?”
“으, 응.”
“손가락 움직여 봐.
그래, 잘하네.
무릎 세워 볼래?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
“네가 몇 살인지 말해 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내 말을 따라 순순히 입을 열었다.
“여, 열여섯 살.”
알 수 없는 전율이 온몸으로 퍼졌다.
나의 불행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되돌아왔다.
숨길 수 없는 미소 위로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놀란 칼리언이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리, 리안.
왜 그래…….
리안.”
나는 다시 그를 눕히며 고개를 저었다.
안젤라에게 칼리언이 깨어났음을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기억을 제외하고는 칼리언의 모든 것이 정상임을 확인했다.
의사가 돌아간 후, 칼리언은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급격하게 자란 키와 체격 때문에 적잖이 놀란 듯싶다.
“이, 이게 나라는 게, 미, 믿기지가 않아.”
“아카데미 다닐 때도 해마다 키가 쑥쑥 컸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칼리언은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10년의 기억이 사라졌으니 오죽 당황스러울까.
먼저 같은 일은 경험해 본 나로선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와 리, 리안의 아이가 있, 있다니…… 무슨, 소리야.
마, 말도 안 돼.
거짓, 거짓말이야.
뭐, 뭔가 오해가 이, 있을 거야.”
칼리언이 기겁을 하면서 진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의 격한 반응에 도리어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반응은 놀라운 것을 넘어서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송곳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
이런 반응일 줄은 몰랐는데…… 상처받았다.
안젤라가 잠든 흐꾸웩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칼리언에게 보여 주었다.
칼리언은 아이의 얼굴을 오래도록 확인하고도 고개를 저었다.
입에선 연신 “마, 말도 안 돼…….”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리, 리안…… 나는 그, 그니까 그게…….”
“당황스러울 거 이해해.”
“……혼자 이, 있고 싶은, 싶은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축객령이 떨어졌다.
나와 안젤라는 그의 말에 조용히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칼리언은 이틀 동안 침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하루는 그러려니 했고, 이틀은 불안했으며 사흘째가 되는 오늘에 접어들어서는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나는 칼리언이 곁에 없어 사흘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한 채로 온통 그를 걱정했다.
10년간의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던데……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아닐까.
나는 칼리언이 열여섯으로 돌아가기를 바란 거지, 죽기를 바란 건 절대로 아니었다.
절대, 절대로.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씻지도 않고, 칼리언의 침실 앞으로 갔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달칵 하고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칼리언.”
그는 막 씻고 나온 건지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머리를 쓸어넘기던 칼리언이 나를 발견하고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다짐이라도 한 듯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리안.”
“좀 괜찮아?”
칼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 노력해 볼게.”
“어?”
“내가 적응해 볼게.”
무작정 부정하려고 했던 나와 다르게 칼리언은 현실을 마주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가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서 다행이었다.
하긴 칼리언은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자신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하니라 삶의 흐름에 자신을 의탁해 가며 살았다.
10년 전의 칼리언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결정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포개어 잡아 주었다.
“내가 도와줄게.”
“으, 응…….
리안은, 하, 항상 나를…… 도와주니까.”
절벽 끝에서 내질렀던 마지막 방법은 내게 활기를 되찾아 주었다.
나 대신 자신이 모든 것을 잊겠다던 칼리언의 선택은 내 우울에도 큰 차도를 가져왔다.
가장 큰 효과는 칼리언을 볼 때마다 부모님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열여섯의 소년이 겹쳐 보인다는 거다.
늘 기억으로부터 도망가고만 싶었던 마음은 이제 열여섯이 된 칼리언을 어떻게 돌볼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찼다.
하루가 1년 같던 시간이 요즘은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칼리언에게 스물여섯으로 살기 위한 것들을 가르쳐 주다 보면, 시간이 정신없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망각초를 먹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앞서 내가 기억을 찾은 직후 칼리언이 저택에서 업무를 보겠다고 마탑에 미리 일러둔 덕에 마탑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칼리언은 비밀리에 고용한 마탑의 마법사에게 마법학을 배웠고, 눈에 띄게 놀라운 재능으로 빠르게 진도를 나갔다.
나는 정원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수업을 마친 마법사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나자마자 칼리언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집무실 문을 열자 삭제 흐꾸웩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숱이 많은 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막 잠에서 깨어난 건지 부스스한 머리를 한 흐꾸웩은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눈을 끔뻑였다.
칼리언은 표정 없는 얼굴로 흐꾸웩을 바라보고 있었다.
“…….”
상상했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무심하다 못해 싸늘해 보이는 눈빛이 흐꾸웩을 통째로 얼려 버릴 것처럼 차가웠다.
그의 날 선 옆모습을 보자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추락했다.
이건 열여섯의 칼리언이 아니야.
머리가 하얘지며, 간신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발목을 감싸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이때, 칼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리안.”
열여섯의 칼리언처럼 어눌하고 더듬거리는 어투가 고막에 박혀 들었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리며 안도감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한참을 기다려도 내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흐꾸웩에게서 눈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떨리는 입가를 겨우 움직이며 대답했다.
“뭐가?”
“내, 내가 너랑 호, 혼인한 사이가 아, 아니라는 거…… 진, 진짜야?”
칼리언은 나와 그가 혼인하지 않은 채 애를 낳았다는 것이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 그의 머릿속엔 당연히 혼인이 먼저라고 박혀 있었나 보다.
그제야 칼리언이 왜 차가운 눈으로 흐꾸웩을 봤는지 이해가 됐다.
나도 흐꾸웩을 직접 낳아 놓고도 내 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칼리언보다 더 심한 짓까지 했었지 않나.
“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 아니야…… 나는 무, 무조건 리, 리안을 미, 믿지.”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피식 웃자 칼리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시선이 미동도 없이 내 얼굴에 박혔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열렬한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왜?”
“아니, 아니야.
그런데, 아, 아이 이름이 정말…….”
“응.
흐꾸웩이야.”
“흐꾸…….”
“웩.”
그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어 심각한 표정으로 흐꾸웩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내 옷소매를 툭툭 당겼다.
“내, 내가 지었어?”
“아니.”
“그럼, 리안이?”
“아이가 직접 지었어.”
“어?”
칼리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직접 정했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진짜야.”
“으, 응.
의심한 적 없어.
그런데 리안.”
“…….”
“다시, 다시 정할까?”
칼리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네가 조, 좋다면…… 흐꾸……도 괘, 괜찮지만.”
이미 ‘흐꾸웩’이 입에 붙어 버린 나는 흐꾸웩이 ‘흐꾸웩’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서 친구가 생기게 되면 백이면 백 놀림을 받을 게 뻔했다.
상처받을 흐꾸웩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 왔다.
게다가 조금 전 아이를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칼리언이 먼저 이름을 짓자고 얘기해 오는 것에 희망을 느꼈다.
그는 나처럼 아이를 무작정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이의 새 이름.
묘한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니.
진짜 부모가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혼자였더라면 흐꾸웩의 이름을 짓는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죽음 이후까지도 가지고 갈 이름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짓는단 말인가.
하지만 칼리언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
“생각해 둔 거 있어?”
칼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없겠지…… 열여섯 살이 무슨 자기 자식 이름을 생각해 놓겠어.
“같이 고민해 보자.”
칼리언과 나는 한 책상 앞에 마주 앉아서, 종이에 이름을 끄적여 보았다.
내가 생각해 낸 이름들은 하나 같이 흔하거나, 어딘가 우스꽝스럽거나, 반려동물한테 지어 주면 딱 알맞을 것들뿐이었다.
나는 힐긋 곁눈질로 칼리언의 종이를 훔쳐보았다.
그럴싸한 이름들이 잔뜩이다.
그중에서 한 이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칼리언이 내가 점찍은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내가 놀란 눈으로 칼리언을 바라보자 칼리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 이름, 괜찮은 거 같아.”
칼리언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종이 한 바닥을 가득 채운 이름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이름.
‘엘빈’이었다.
***
칼리언은 나보다 훨씬 의연하게 스물여섯의 삶에 적응해 나갔다.
말더듬증은 차차 고쳐 나가고 있었고, 마탑의 간단한 서류도 혼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독 고쳐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겁’이었다.
칼리언은 마탑의 어려운 마법 수식은 하나도 어려워하지 않으면서, 조금만 덩치가 큰 남자가 앞에 있으면 슬금슬금 내 뒤로 몸을 숨겼다.
내 뒤로 온다고 해서 숨겨질 몸도 아니면서.
이래서야 영원히 마탑으로 출근도 못 하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블래이크가 홀로 말을 달려 칼리언의 저택에 찾아온 것이다.
그의 방문을 막아서는 하인들과 언쟁을 벌이던 블래이크는 급기야 주먹까지 내질렀다.
하인들은 타국의 왕자에게 차마 검을 빼 들지 못하고 몸으로 그를 막아섰다.
정문에서의 소란이 저택 안까지 퍼졌고, 당연히 내 귀에도 들어왔다.
나는 외투도 걸치지 않고 넓은 정원을 달려나갔다.
칼리언도 내 뒤를 따랐다.
“리아나!”
우리를 발견한 하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블래이크!”
잔주름 하나 없이 늘 완벽하게 단정한 차림을 고수했던 블래이크가 지금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계절감에 맞지 않게 가벼웠고, 머리카락도 이마 밑으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내가 어긋나게 채운 단추를 바라보고 있을 때, 블래이크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위에서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래이크는 온 힘을 다해 내 몸을 끌어안으면서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죽어도 내 옆에서 죽어.
네 피 한 방울, 뼛조각 하나 전부 내 것이어야 해.
알아들어?”
맞닿은 가슴에서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가 갑자기 왜 이렇게 불안에 떠는지 알 수 없었으나, 우선은 블래이크를 진정시켜야 했다.
나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이때, 블래이크의 몸이 내게서 거칠게 떨어져 나갔다.
방심하고 있던 블래이크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으나 곧 중심을 찾았다.
“누구, 누…….”
블래이크를 밀친 칼리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 명백한 두려움이 짙게 묻어났다.
겉보기에도 혼란스러워 보이는 블래이크는 칼리언의 상태가 수상하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칼리언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매서운 주먹을 얼굴로 받아 냈다.
퍼억-!
심상치 않은 타격음이 들려왔다.
“칼리언!”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나는 양팔을 휘저으며 하인들을 말리고 나섰다.
“더 소란 피우고 싶지 않아요.
칼리언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줘요.”
칼리언은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한쪽 뺨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기억을 잃기 전의 그였다면 블래이크에게 얌전히 맞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맞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가만히 서 있지만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열여섯의 칼리언은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였다.
아카데미 동기들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얌전히 맞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몸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였다.
“금방 갈게.”
붉은 눈동자가 내 얼굴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 시선이 내 팔목에 걸린 팔찌 위에 닿는가 싶더니 다시 눈을 마주쳐 왔다.
칼리언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블래이크의 손을 잡고 하인들이 보이지 않은 곳까지 걸어 나갔다.
“블래이크…….”
블래이크가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이전처럼 몸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포옹은 아니었다.
걷는 동안 날뛰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몸을 감싸 안은 그의 팔을 풀어내고, 블래이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갑자기…….”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블래이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죽다뇨?
제가 걱정하지 말라고 편지도 남겼었잖아요.”
“랜서의 저택으로 간 건 알고 있었어.”
“…….”
나는 ‘흐꾸웩에게 수도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 떠난다.’라고만 편지를 남겼었지, 랜서의 ‘랜’자도 쓴 적이 없다.
블래이크가 내게 사람을 붙인 게 틀림없었다.
내가 랜서를 만나서 그의 마차를 타고 간 것을 본 블래이크의 사람은 곧장 제 주인에게, 보고했을 거다.
완벽한 도주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런데 랜서가 내게 찾아오더군, 네가 사라졌다면서 말이야.”
“아…….”
블래이크와 랜서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사라진 나를 찾기 위해서 수도 전역을 수소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나를 빈민가까지 태우고 갔던 마부를 찾아냈고, 내가 갔던 빈민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살인 현장을 수습한 게 칼리언 워렌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어.”
“…….”
“네가 연관된 게 아니고서야 칼리언 워렌이 왜 빈민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갖겠어.”
블래이크는 내가 빈민가에서 살해당했고, 나의 시신을 칼리언이 수습했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내 시신이라도 되찾기 위해 이렇게 흐트러진 꼴을 하고서 달려온 거다.
놀랐을 블래이크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기억을 찾은 이후 누군가를 걱정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던 터라 그에게 편지 한 통 쓰지 못했다.
나는 블래이크의 차갑게 언 손등을 겹쳐 잡으면서 얘기했다.
“저 멀쩡해요.
다친 곳도 없고요.”
“그래.
그거면 됐어.”
그가 무릎을 접어 주저앉으며 깊이 안도했다.
나는 블래이크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블래이크도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눈치채고 있었을 거다.
나도 그처럼 무릎을 접어 앉았다.
블래이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검지로 내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저, 이제 다 기억났어요.”
“…….”
“전부…….”
블래이크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역시……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아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왜 모르는 척하고 있었어요?”
“너를 다시 지옥으로 밀어 버리는 짓이니까.”
블래이크, 칼리언 그리고 랜서.
이 세 사람 모두 내가 이 기억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자살 시도와 행복한 망상을 우겨 담은 일기를 쓸 만큼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내게 ‘네 행복은 다 거짓이야.’라고 말하는 건 악마보다 악랄한 짓이었다.
블래이크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엔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는 내 모습이 떠다니고 있을 거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들썩였다.
“괜찮아요.”
완벽하게 괜찮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괜찮아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나는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다.
블래이크는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이 내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윽고 어떤 판단이 들었는지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아블란으로 떠나자, 리아나.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
나와 함께 가자.”
아블란.
그곳은 내게 무너진 희망과도 같았다.
아블란 행 배를 타기만 하면 모든 불행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 희망은 한때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기대를 건 만큼, 아블란으로의 도피가 산산이 조각났을 때의 상실감은 어마어마했다.
더 이상 아블란은 내게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절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그리고 블래이크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나는 손목에 걸린 팔찌를 습관처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망각초를 먹은 칼리언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 내 아가만은 나와 다르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이곳에서.
나는 더 괜찮아질 거니까.
나는 블래이크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일어섰다.
“이겨 내 보려고요.”
“…….”
“이건 제 마지막 발버둥이에요.”
칼리언의 말처럼 내 뇌리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과거를 완벽하게 잊고 살 순 없다.
나는 처음으로 현재에 집중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가와 기억을 잃은 칼리언을 책임지면서.
블래이크는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나를 둘러업고 제 저택으로 달려갈 것만 같은 얼굴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는 제 욕심보다 내 망가진 정신 상태를 정상 궤도로 돌려놓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내가 처음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자, 블래이크는 한발 물러섰다.
이런 점이 칼리언과 다르다는 거였다.
칼리언이었다면 내가 어떤 상태이건 간에 무조건 제 옆에 붙들어 놓았을 거다.
블래이크의 두 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리아나, 이거 하나만 알아 둬.
네가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든, 마지막엔 내가 네 옆에 있을 거야.”
“…….”
그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나조차 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그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나는 발꿈치를 들어 올려서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블래이크는 가만히 내 손길을 받으면서 부드러운 어투로 속삭였다.
다정함으로 위장한 집착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늘 네 시선이 닿는 곳에 있어.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내게 어떤 행동을 해도 좋으니까 내가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나를 이용해.
이전처럼 네게 승선표만 쥐여 보내지 않아.
이젠 나도 함께야.
명심해.”
그의 맹목적인 애정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에 비해 나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시 돌아가면, 그땐 단검…… 꼭 받아 둘게요.”
단검을 주겠다던 그의 말을 농담처럼 흘려보냈던 순간을 얼마나 사무치게 후회했는지 모른다.
블래이크가 내게 보여 준 진짜 희망은 아블란이 아니라 바로 단검이었던 거다.
“그걸로 뭘 하게.
자살이라도 하려고?”
10년 전에 내가 했던 말을 블래이크가 그대로 읊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만일 그에게 단검을 달라고 얘기하게 된다면, 내가 여전히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거겠지.
그 단검을 받아서 뭘 할지는 지금 당장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딛고 선 땅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뭘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최후의 최후까지 내몰린 후에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너를 온전히 내 옆에 두지 못한다면, 네 몸을 박제해서라도 함께 있을 거야.
네 몸에서 나온 장기를 전부 씹어 삼키고, 네 피로 함께 목욕을 할 거야.
너의 모든 것을 이용해 너를 느낄 거야.
그러니까…….”
그는 나를 보면서 내 불안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의 블래이크가 상상할 수 있는 내 미래가 훤히 보였다.
괜찮아지려면 아직 멀었구나.
블래이크의 반응은 나를 객관화하기에 아주 유용했다.
나는 덤덤하게 판단을 내린 후 그의 말을 끊었다.
“고마워요.”
“…….”
점점 감정이 고양되어 가던 블래이크가 일순 입을 딱 다물었다.
“내게 집착해 줘서.”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을 얕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 시절의 내 희망은 아블란 행 승선표도 단검도 아니었다.
바로 눈앞의 블래이크였다.
“리아나.”
나는 양팔을 벌려 그 시절의 희망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아 보았다.
당황한 듯 얼어 있던 블래이크가 내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박동하는 가슴 부근에 뺨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블래이크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나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정말 죽기로 결심하게 된다면, 그를 찾아가지 않을 거다.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블래이크에게 끔찍한 기억을 폭탄처럼 떠안기고 죽을 순 없었다.
그가 박제된 내 시신에 얽매인 채 나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게 둘 순 없었다.
내가 블래이크를 다시 만나러 가게 된다면 그땐, 모든 우울을 이겨 낸 다음이어야만 한다.
***
나는 블래이크가 돌아간 직후 칼리언에게 향했다.
칼리언은 의사의 진찰도 받지 않고 홀로 침실에 앉아 있었다.
안젤라의 말로는 칼리언이 나 말고는 다른 누구를 만나는 게 무섭다고 얘기했단다.
“칼리언.”
칼리언은 주눅이 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뺨이 아까보다 더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나는 안젤라에게 미리 받아 놓았던 연고 뚜껑을 열었다.
10년 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칼리언이 내게 상처 부위를 보여 주었고, 나는 투명한 연고를 손가락으로 떠서 그의 뺨에 펴 발라 주었다.
그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내게 얼굴을 내맡겼다.
“아팠겠다.”
칼리언이 정말 아팠다는 듯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정말 10년 전의 칼리언을 보는 듯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칼리언의 한쪽 뺨 전체가 연고로 반들반들해질 때까지 발라준 후 연고 통을 닫았다.
순간 정말 열여섯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칼리언이 누군가에게 맞고 오면 이렇게 약을 발라 줬었는데.
만일 내가 없었더라면 칼리언은 오래도록 얼굴에 멍을 달고 살았겠지.
이런 그를 통해서 내 존재가 무가치하진 않다고 자기 위안으로 삼곤 했다.
조금쯤은 세상에 떳떳해지는 기분이었다.
안젤라가 준 연고가 좋았던 건지, 그의 자가 치유력이 대단히 좋았던 건지 뺨의 상처는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얻어맞은 충격은 꽤 깊이 남은 모양이었다.
칼리언은 그날부터 성인 남자만 보면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저택에는 성인 남자의 출입이 아예 금기시되었다.
전부 여자로만 새로 고용했다.
그렇게 이 저택의 남자는 칼리언과 엘빈 단 두 명만 남게 되었다.
***
나는 오랜만의 외출 준비를 했다.
랜서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이 저택엔 남자의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으니 내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미리 랜서와 약속을 잡진 못했지만, 그는 행동반경이 좁았으므로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저택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다 보면 마주치겠지.
워렌 가의 마차를 타고 랜서의 저택 앞으로 갔다.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마부가 나를 황급히 막아 세웠다.
“세상에, 웬 진흙이!
제가 금방 치워 드리겠습니다.”
마부가 황급히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정원도 없는데 웬 진흙.
나는 마부가 한 손 가득 든 진흙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간 화분 키우는 취미라도 생겼나.
하지만 최소한의 가구만 들이고 사는 랜서에겐 어울리지 않는 취미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저택의 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었다.
애초에 털어갈 것도 없지만, 설령 강도가 들더라도 랜서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도 없을 테니 문을 열어 놓고 산다고 해도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아……!”
실내로 한 걸음 들어서자마자 질퍽한 게 발에 밟혔다.
진흙이었다.
“이게 웬…….”
진흙이 복도에도 길게 이어져 있었다.
흔적을 보아 랜서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았다.
어디 흙밭에 구르고 온 것도 아니고…….
나는 진흙을 따라 걸었다.
진흙은 그의 침실 앞까지 이어지다가 문 앞에서 뚝 끊겼다.
오늘은 출근 안 했나?
아무래도 랜서가 저택 안에 있는 것 같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쿵거리는 소음이 들리더니 랜서가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그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정말 흙밭을 구르기라도 한 거야?”
그에게서 희미한 땀 냄새와 흙냄새가 동시에 풍겨 왔다.
머리카락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고, 옷 전체는 진흙 범벅이었다.
“아…….”
“자, 잠깐…….”
랜서가 본능처럼 내 팔을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나는 황급히 양손을 들어 그의 몸을 막아 냈다.
랜서는 뒤늦게 자신의 행색을 깨닫고는 흙 묻은 손으로 제 얼굴을 닦아 냈다.
손에 묻어 있는 흙이 얼굴에 묻은 꼴밖에 되지 않았지만.
“씻고 올래?”
“아닙니다.”
“…….”
나는 랜서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랜서는 그제야 내 말의 의미가 ‘씻고 와.’였다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움직였다.
“씻고 올게요.
또 저번처럼 말도 없이 사라지시면 안 됩니다.”
나를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대하던 블래이크와 달리 랜서의 반응은 평범했다.
블래이크에게 내 얘기를 전해 들은 듯싶다.
랜서는 욕실로 향하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 나를 확인했다.
내가 환영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거 같기도 했다.
“……도망갈까 봐 감시하는 건가.”
나는 그가 돌아올 동안 어질러진 저택을 청소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깨끗하게 치울 자신까지는 없었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흙만이라도 한곳에 모아 둬야겠다.
외투를 벗고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하려고 할 때, 그의 침실 모서리에 놓인 웬 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삽에도 랜서가 달고 온 진흙과 똑같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 삽으로 무언가를 파낸 모양이었다.
“보물찾기라도 했나.”
이따 랜서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려는데, 어떤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소매를 걷어 올리던 것을 멈추고, 다시 삽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단호하게 부정해 보려 해도 한 번 떠오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랜서는 정원도 가꾸지 않았고, 화분을 키우는 취미도 없었으며 나이에 맞지 않게 보물찾기를 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저 삽으로 대체 뭘 파내려고 했던 걸까.
……백골.
부모님의 무덤.
부모님의 시신은 어머니의 가문에서 수습해갔다.
가문에서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매장했다는 얘기만 들려올 뿐, 묘지의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혹시 랜서는 내 부모님의 백골을 찾기 위해 묘지 이곳저곳을 파헤치고 다녔던 건 아닐까.
그도 나처럼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였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도 그 속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나는 청소를 하려던 것도 잊고 오도카니 침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가정이 확신처럼 느껴졌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랜서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복도를 달려 돌아왔다.
거친 발소리가 문 앞에서 딱 멎었다.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랜서는 머리에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나는 랜서가 침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 일이 있어서 물도 안 닦고 왔어.”
“아가씨를 기다리시게 할 순 없으니까요.”
“내가 또 사라질까 봐 그런 건 아니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아가씨께서 기다리는 게 힘드실까 봐 걱정되었던 마음이 더 큽니다.”
“그래?”
나는 덤덤히 대답하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랜서는 내 옆에 나란히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기를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앉아.”
랜서는 그제야 의자를 끌고 와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콧등 위로 낙하하는 것을 보면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부모님 백골은 찾아서 뭐 하게.”
“…….”
순간 랜서의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보였다.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부모님’이라는 단어를 내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볼 안쪽의 여린 살을 아프게 씹으면서 감정의 동요를 참아 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랜서는 나의 불성실한 대답에도 수긍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랜서.”
내가 재촉하듯 부르자, 그가 물기 어린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대답하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그의 상처를 헤집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듣지 않으면 안 된다.
이대로 랜서를 지옥 속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내가 물러나지 않자, 랜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놈의 뼈를 박살 내면, 저와 아가씨를 괴롭히는 악몽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
“다시는 되살아 올 수 없도록 가루로 만들어 짐승에게 먹이면, 아가씨도 한결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부터 묘지를 찾아다녔어?”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납니다.
장례를 치렀다는 기사를 본 다음 날부터인지, 그 당일부터인지…… 그리고 전장에서 돌아온 후부터…… 다시 찾아다녔습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랜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같은 악몽에 시달리고, 밤마다 살인을 하고, 백골을 찾아다녔다.
내 일에 급급해 랜서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됐다.
랜서는 나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망가진 것 같았다.
내 주위에는 나를 지탱해 주는 것들이 있었다.
칼리언, 블래이크, 엘빈 그리고…… 눈앞의 랜서.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어서 쓰러질 때면 받쳐 주고, 잡아 주는 것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랜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이후부터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버텨 내고 있었다.
그가 느꼈을 지독한 우울감과 살인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괴로움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비참한 동질감이 가슴속에 번져 들었다.
“백골을 부수면, 좀 나아질 거 같아?”
“모르겠습니다.”
랜서의 대답에는 확신이 없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부모님은 죽었어.”
그의 허벅지 위에 얹어진 두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랜서의 반듯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죽어서 편안해졌겠죠.하지만 남겨진 저는요?”
“…….”
“그놈을 죽인 살인자가 저였더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
“저는 매일 그들을 죽인 살인자를 질투합니다.
제가 죽였어야 했는데, 저라면 더욱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수 있었는데…… 아가씨께 누명을 씌우지도 않고 저 혼자 모든 걸 떠안을 수 있었는데……!”
지독하게 낮은 음성이었지만, 내 귀에는 피를 토해 내는 것처럼 처절하게 들렸다.
그의 눈자위가 벌겋게 타올랐다.
랜서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공포심이 고개를 들었다.
랜서도 매일 되풀이되는 악몽이 두려운 것이다.
죽이고, 또 죽여서 악몽을 이겨 내 보려고 하지만 늘 다시 끝없는 수렁으로 발목이 잡혀 끌려들어 간다.
랜서 역시 우리를 괴롭힌 부모님과 관계없는 인간들을 죽여 봤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이 악몽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망상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이 내 부모님을 죽였더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고 뼈아픈 후회를 하고 있었다.
진짜로 죽이지 못한다면, 백골이라도 찾아내어 으깨 버리고 싶은 거다.
랜서는 그렇게 도망치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던 거다.
내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랜서의 머리를 안아 주었다.
그가 얼마나 두렵고, 괴로울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희곡을 읽는 것처럼 10년이고 20년이고, 시간을 종이 한 장 넘기듯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짊어진 채 매분 매초를 살아가야 했다.
그 고통은 무수한 말로 표현한다고 한들 그 누구도 우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거다.
랜서가 내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지옥일 테니, 저도 따라 죽으려고 했습니다.
지옥으로 쫓아가서 죽이고 또 죽이고, 죽이는 상상을 합니다.”
내 옷 위로 그의 눈물이 뜨겁게 번져 왔다.
나는 랜서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그래.
복수는 지옥에서 하면 돼.
그러니까 지금은 현재를 살아.
아버지는 여기에 없어.
그런데 왜 아직도 아버지한테 얽매여서 괴로워하는 거야.”
“아가씨는…… 그게 됩니까?”
나는 그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될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하지만 노력해 보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 거야.쉽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하지만 아예 손 쓸 수도 없는 것도 아니잖아.나를 만나고 난 후의 밤은 살인을 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며.내가 도와줄게.나랑 같이 이겨 내자.”
랜서라고 과거를 잊기 위해 노력하지 리 없었다.
랜서는 말없이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마지막이야.정말 마지막으로…….내가 부탁할게, 랜서.만일,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때는…….”
손끝이 차가워지고 눈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 때문에 일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불쌍했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라는 마음이 충동처럼 찾아 들었다.
그냥 죽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 나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날뛰는 충동을 억눌렀다.
“같이 죽을까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랜서에게서 흘러나왔다.
나는 랜서의 뺨을 쥐고 내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그래.그러자.”
랜서는 내 대답에 눈물 대신 미소를 그려 냈다.
그 기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지가 나와의 짧은 대화에서 다져진 게 아니란 걸 안다.
그저 나와 함께 죽을 수 있음에 초점이 맞춰진 약속이었다.
“당신과 함께 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응.죽어도 나랑 같이 죽어.혼자 망가지지 말고.”
지금의 랜서에게 ‘다 괜찮아 질 거라는’의미의 희망적인 말을 한다하더라도 그의 우울을 걷어 낼 수 없을 거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자신의 미래는 파멸뿐이다.
다른 선택지는 감히 떠올릴 수도 없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그런 그에게 삶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와 함께 죽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랜서는 나와 함께 죽는 것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결말은 없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제 모든 것은 아가씨의 것입니다.제가 죽고, 사는 것 또한 아가씨께서 결정하실 수 있죠.아가씨께서 모든 것을 끝내자고 말씀하실 때 비로소…….”
“같이 죽는 거야.”
만일 나의 마지막 발버둥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몰래 칼리언의 저택 담장을 넘어 망설임 없이 랜서에게 달려갈 거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가여워하며 나란히 독을 마실 거다.
내 최후는 정해졌다.
그 마지막 순간, 내가 충동적으로 엘빈에게도 독을 먹이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삐죽 설 정도로 아찔한 소름이 끼쳤다.
절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내게 살아갈 의지를 만들어준 건 엘빈이다.
랜서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면 함께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랜서를 돕기로 마음 먹었다.
랜서는 나와 함께 죽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진흙으로 범벅 된 삽을 버렸다.
***
저택에 도착하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엘빈은 일찍 잠이 들었고, 하녀들이 뜬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욕을 마친 후 침실로 돌아가자, 가운을 차림으로 독서 중이던 칼리언이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미련 없이 책을 덮어 버렸다.
칼리언은 긴 다리를 뻗어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큰 손이 내 손목을 한 번에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내 목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흙냄새가 나.”
“씻고 왔는데…….”
그 말에 내 팔뚝에 코를 박고 킁킁대 봤지만, 향유 냄새밖에 나지 안 났다.
흙냄새를 너무 맡았더니 후각이 무뎌졌나.
나는 옷깃을 들치며 칼리언에게 다가갔다.
“맡아 봐.아직 냄새 많이 나?”
저돌적으로 내 목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던 칼리언은 내가 다가가자 황급히 물러났다.
그의 목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냄새가 그렇게 독해?”
“……아, 아니.”
“그냥 말해.자는데 옆에서 계속 냄새나면 싫잖아.한 번 더 씻고 오든가 다른 침실에서 잘게.”
“너 옷이…….”
그가 내 가슴 쪽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눈을 돌렸다.
나는 그의 시선이 닿았던 곳을 따라서 고개를 내렸다.
네글리제가 벌어지면서 맨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
열여섯의 칼리언은 나와 입을 맞춰 본 적도 없는 놈이었다.
아니, 여자랑 입 맞춰 본 적이 있긴 한가?
그가 부끄러워하는 게 당연했다.
벌어진 옷을 여미고 있으려니 칼리언이 더듬더듬 말했다.
“그, 내, 내가…… 너랑 아, 아이를 낳았다는 건…….”
“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조심스러운 기색이 음절마다 느껴졌다.
“너, 너랑…… 그…… 서, 성교를 했다는 거지?”
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뒤늦게 “그렇지.”하고 대답했다.
대답하자 칼리언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역시…….”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얼굴은 왜 창백해져?
그렇게 싫어?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싫어서 그랬던 거였나 보다.
어이가 없었다.
잠자리를 할 때면 나보다 더 흥분해서 몇 시간이고 놓아주지 않았던 게 누군데.
나는 팔짱을 끼고 칼리언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 그게…… 너는 나, 나랑 많이 해봤겠지만, 지, 지금의 나는 자, 자신이 없어서.”
“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 사고가 마비되었다.
“채, 책에서 건강한 부부들은 이, 일주일에 두 번은 해야 한, 한다고 하는데…… 아, 아무리 공부해도, 모르게, 겠어서.”
나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그가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파트너를 위한 환상 애무 102가지>…….”
책 제목을 확인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와락 인상을 구겼다.
세상에 이런 책도 있단 말이야?
저놈은 이 책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칼리언을 돌아보자 그가 난처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하, 하루 내내 그것만 봤는데, 자, 잘 모르겠어.”
“하루 내내 이것만 봤다고?”
이 외설적인 말로 가득한 책을 공부하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니…… 잘해보겠다는 열정은 높이 사지만, 시간 아깝게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칼리언이 내 쪽으로 가까이 걸어왔다.
그는 내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고는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내 손 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채, 책으로만 봐선 모르겠으니까…… 리안이 가르쳐 줄래?”
“내가?”
나는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다.
하물며 가르쳐야 하는 게 다른 것도 아니라 성행위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부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칼리언이 망각초를 먹은 후로는 그와 잠자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전엔 못해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몸을 섞었는데 지금은 두 달 가까이 손만 잡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임신했을 때를 제외하면 이례적인 기록이었다.
칼리언이 은근하게 내 손등을 엄지로 비볐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에 점점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르쳐 주는 건 역시 좀…….
“너 아닌 다른 사람한테 배울 수는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가 나를 자연스럽게 침대로 이끌었다.
칼리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우선 나는 평생 수절을 하면서 살 자신이 없었고, 그가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애무 102가지를 배워 오는 것도 싫었다.
……내가 알려 주는 게 가장 확실하네.
침대에 눕자 칼리언이 내 몸 위로 겹쳐 올라탔다.
그는 내게 무게를 싣지 않으려 내 얼굴 옆을 제 팔로 지탱했다.
오랜만에 몸을 적당히 감싸오는 온기와 무게가 반갑게 느껴졌다.
“하나하나, 전부 다 알려 줘.”
칼리언이 애원하듯 속삭이며 입을 맞추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가 종일 저 이상한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의 말처럼 직접 알려 주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