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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왜곡된 과거(2) (12/14)

12.왜곡된 과거(2)

그 난리를 피웠음에도 나는 칼리언의 말대로 스스로 이 저택에 돌아왔다.

나가라는 칼리언의 말에도 고개를 내저었고, 내 손으로 이 팔찌까지 찼다.

나는 등 뒤에 달라붙은 칼리언을 팔꿈치로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흐꾸웩은?”

“안젤라랑 놀고 있어.”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응.”

“너 말 더듬는 거 언제 고쳤어?

아블란에서?”

칼리언이 갑자기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며 웃었다.

“안 알려 줄래.”

“지금 나랑 장난쳐?”

정색하고 말하는데도, 칼리언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아기처럼 무구하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소름 끼쳤다.

“내가 멀쩡하게 잘 사는 놈이었으면, 네가 나를 쳐다봐 주기나 했을까.”

“뭐라는 거야.”

“…….”

칼리언은 저 혼자 뜬금없는 말을 하고는 또 혼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반대로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다.

나는 침대 위에 늘어진 쇠사슬을 잡아 올렸다.

“이거나 풀어 줘.”

칼리언은 내 체취를 깊게 들이마시며 얼굴을 비볐다.

“팔찌도 채웠잖아.

두 개는 싫어.

답답해.

숨 막혀.”

“흐음.”

“흐꾸웩이 보면 족쇄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안심되겠지.

아빠를 닮았을 테니까.”

확 쏘아봐 주려는데, 발목을 감싸고 있던 족쇄가 풀렸다.

그리고 칼리언이 그것을 침대 밑으로 던져 버렸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그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나는 확실히 가벼워진 발목을 느끼며 이불 속으로 발을 감추었다.

칼리언의 진득한 시선이 내 발등에 들러붙어서 집요하게 따라왔다.

뜨거운 눈빛이 이불을 뚫고 발을 낚아채 갈 것 같았다.

나는 그의 턱 아래를 손끝으로 슬쩍 건드렸다.

칼리언이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응.”

나는 무릎 위에 턱을 기댄 채로 칼리언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는 내 말이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음에도 재촉하지 않았다.

이대로 아침까지 입을 다물고 있더라도, 나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네가 순순히 날 풀어 준 게 이상해.”

“왜?”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죽어서 시체가 되더라도 옆에 붙들고 있을 놈이잖아.”

“로맨틱하네.”

“내가 네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어떻게 확신했어?”

칼리언과 내기를 했을 당시에 나는 지독한 우울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고, 내 불우한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칼리언이 내게 내기를 제안한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았다.

놈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내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놈이다.

내가 죽을까 봐 나를 놓아줬다고?

차라리 하루아침에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게 더 현실성 있어 보였다.

“너는 내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세계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이곳의 주인이야.

내가 너를 원하는데, 세계가 내게서 너를 빼앗아 갈 리가 없지.

네가 주인인 세계에선 나를 버리고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간단해.

무수히 많은 세계 중에서, 지금의 너는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어차피 네 자리는 정해져 있어.”

당최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아듣질 못하겠다.

역시 놈의 머릿속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물어본 내가 바보가 된 것만 같다.

칼리언은 자기만의 확실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는 듯했다.

여하튼 중요한 건, 칼리언은 내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내 행동을 나조차 예측하지 못하는데 저놈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진짜 내가 칼리언의 세계에 살고 있는 체스 말 중 하나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만 손해 본 기분이야.

속았어.”

가슴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다.

그 안으로 허탈함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 왔다.

기억을 잃기 위해서 망각초까지 먹어 놓고는, 다시 기억을 찾겠다고 아등바등했던 꼴이라니.

한심하고 우습기 짝이 없다.

그런 나를 보는 칼리언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칼리언과의 내기는 나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발악이었다.

끝없는 악몽이 펼쳐지는 현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악에 받쳐 발버둥 쳤다.

칼리언은 그런 나의 의지를 웃으면서 짓밟았다.

“화났어?”

그가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초조한 척 물었다.

저 반질반질 잘난 얼굴에 주먹을 꽂아도 백 번 넘게 꽂아야 내 문드러진 속이 조금 풀릴까말까 할 텐데, 어째서인지 ‘그래, 화났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나도 지금 느끼는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기억을 잃었을 때 느끼던 불안감이 지금은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은 변화라고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손 쓸 수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인간이라면 날 때부터 쥐고 있을 진취력이나 자존감 같은 것마저 산산이 조각났다.

내 삶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당연히 분노도 없다.

심지가 뽑힌 촛대엔 불이 붙지 않는다.

그렇다 한들, 칼리언에게 내 텅 빈 마음을 전부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억울한 건 있어.”

“뭔데?”

그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언제 네 물건을 훔쳐서 도망갔어.”

나는 기억을 잃었던 내내 칼리언을 볼 때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저 지독할 만큼 음험한 놈을 순수한 호구로 보고 안타깝게 여기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망각초.”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건조하게 흐르는 목소리가 내 혀를 결박했다.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이자 칼리언이 나를 따라서 저도 눈을 깜빡인다.

놀리는 게 분명했다.

……하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놈이 내가 망각초를 훔쳐서 달아난 걸 몰랐을 리가 없다.

멀쩡히 잘 있던 망각초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다시금 나타난 내가 기억 상실이었으니.

크게 놀랄 거리도 되지 않았다.

나는 일순 느낀 당혹감을 갈무리했다.

마탑에는 망각초 말고도 훨씬 귀한 마법초들이 산처럼 쌓여 있을 거다.

내가 마탑에서 보유한 망각초를 통째로 들고 튄 것도 아니고 딱 하나였다.

하나.

물건의 값어치에 비해 놈의 반응이 유난스러웠던 건 사실이니까 뻘쭘할 필요는 없었다.

“고작 마법초 하나 가지고.”

“망각초라고 얘기한 건 장난이었어.”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네 파탄 난 성격 중에 유일한 장점이 쪼잔하지 않다는 거…….”

“대놓고 가져가라고 알려 준 건데,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면 이상한 새끼지.”

귀를 의심했다.

나는 무릎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뭐?”하고 되물었다.

칼리언이 이불을 들추는데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충격이었다.

그는 내 옆구리 쪽으로 손을 넣어 납작해진 배를 어루만졌다.

“우리 아이.”

“…….”

“네 다리 사이에서 나오는 거, 꼭 보고 싶었는데.

못 보게 됐잖아.”

내 표정이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내가 망각초를 훔친 게 다 저놈의 유도였고 설계였다는 거야?

망각초를 훔쳤을 당시만 해도, 나는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꿔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멍청한 착각이었다.

칼리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의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내 자아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지금 이렇게 두 눈을 뜨고 칼리언을 바라보고 있지만, 이것도 내 뜻이 아니라 칼리언이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닌가.

멍청한 내가 등 뒤에 달린 끈을 보지 못한 채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면.

아니야,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정신이 망가지는 소리가 두개골을 뚫고 고막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나는 괴이한 가정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처박고 내 아랫배를 느릿하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거칠게 치워 냈다.

“망각초까지 가져가게 내버려 뒀으면서, 이제 와서 아이를 훔쳤다고 몰아세우는 게 말이 돼?”

“리안, 내가 한 거라고는 네게 망각초를 보여 준 것뿐이야.

그걸 가져간 건 네 선택이었고.”

“…….”

“아이를 워낙 끔찍하게 생각하길래, 적어도 출산을 한 뒤에 나갈 줄 알았는데.”

칼리언은 이것만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투로 얘기했다.

“네가 나가도 된다며!”

“이미 너와 약속을 했는데 어쩌겠어.

만일 그때 내가 널 가지 못하게 막았더라면…… 너, 내 앞에서 자결했을걸.”

“어찌 됐든, 나는 네가 보는 앞에서 두 발로 걸어 나갔어.

그게 왜 아이를 훔친 게 되는 건데?”

“칼을 든 강도가 보석을 훔치고 당당히 걸어 나가는 거랑 같은 거지.”

“지랄 맞다, 진짜.”

역시나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칼리언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나는 놈의 가슴팍을 밀어 버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목적지도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칼리언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좋았다.

“리안.”

힘껏 내딛는 내 발걸음과 다르게 칼리언은 긴 다리로 여유 있게 다가왔다.

그러곤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는 듯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네 얼굴 보기 싫어서, 자리 피하는 거 모르겠어?”

“네 생각을 내가 모를 리가.”

“알면, 눈치 있게 사라…….”

칼리언이 불쑥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내 발목을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순간 몸이 휘청하며 무게 중심을 잃었다.

두 손이 자연스럽게 칼리언의 어깨를 짚었다.

“아…….”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이 발바닥을 쥐었다.

칼리언은 자신의 큰 손안에 내 발이 전부 잡혀 들어가는 게 재미있는지 몇 번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뭐 해?”

“발이 커지는 마법초를 개발해야겠어.

이 작은 발로 걸어 다니는 건 너무 위험해.”

대뜸 붙잡아서 하는 말이 저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더는 듣고 있을 가치가 없었다.

그를 밀어 내려는데 칼리언이 힘을 주고 버텼다.

뭘 하려나 싶었는데 그는 내 발에 신발을 신겨 주고 난 후에야 나를 놓아주었다.

푹신하고 따스한 촉감이 발을 아늑하게 감싼다.

맨발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신겨 준 후 우두커니 서 있는 칼리언을 뒤로하고 무작정 걸었다.

발이 멈춘 곳은 나의 침실이었다.

그러나 내게 이곳만큼 낯선 공간도 없다.

“기억을 잃기 전에 여기에서 잔 적이 있긴 한가?”

나는 침실 안으로 들어서며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칼리언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잤고, 심심할 때마다 그의 집무실에 놀러 가서 그가 일하는 걸 방해했다.

이게 지난날 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속 편한 인생이었네.”

나는 곧바로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자 복잡했던 속이 조금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의자를 끌고 와서 창문 앞에 앉았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본다면, 참 한가한 사람이구나 하고 부러워하겠지.

그러나 내 머릿속은 적군을 앞에 둔 장수보다 치열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지.”

삶의 목표를 상실한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왜 코로, 입으로 호흡하고 있는지조차 의아했다.

망각초를 가지고 도망쳤던 찰나의 도피는 끝이 났고, 난 다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허무했다.

칼리언과의 내기는 애초에 내가 질 수밖에 없는 내기였다.

그것도 모르고 단꿈에 부풀어 있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코를 간지럽히면 재채기가 나오고, 식사를 거르면 배곯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내 생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절로 나를 망가뜨렸다.

인생이라는 게 왜 이따위인지.

왜 나에게는 늘 최악의 선택지만 주어지는지.

혼자선 잠들 수도 없는 나는 창문 앞에 앉아 시간을 죽이며 나의 자존감도 함께 죽였다.

***

나는 그 후로 몇 날 며칠을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누군가 나를 시체라고 불러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정말 시체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하녀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니까.

그래도 죽어 있는 내가 활기를 찾는 유일한 순간이 있었다.

“아뱌!”

바로 흐꾸웩이 노는 것을 지켜볼 때.

기억을 찾은 이후부터 흐꾸웩의 모든 육아는 하녀들이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흐꾸웩의 곁에 머물면, 나의 불행이 저 조막만 한 아기에게 옮겨붙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파고들었다.

흐꾸웩은 샛노란 모자가 달린 옷을 야무지게 입고, 같은 색인 손 싸개를 하고서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나는 요람에 누운 흐꾸웩을 보며 잔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사람이야, 개나리야?”

흐꾸웩의 앙증맞은 코가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코를 건들려다가 얼굴 바로 앞에서 손을 멈칫했다.

내가 아이를 만져도 되는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

만삭이었음에도 대책도 없이 무작정 배를 탔고, 망각초를 씹어 먹었다.

망각초가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로.

내가 망각초를 먹을 것을 칼리언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다행인 부분도 있었다.

아이에게 해로운 것을 내가 먹게 뒀을 리 없으니까.

출산 직후에는 흐꾸웩을 제대로 안아 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신전 앞에 버리려고도 했다.

만약, 신전 앞에서 흐꾸웩이 울지 않았더라면 나는 흐꾸웩을 버리고 떠났을까.

가정만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기분 나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머리털이 비쭉 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쿵쿵 뛰는 가슴을 느끼며 손을 뒤로 물렸다.

“먀하!”

그러나 복슬복슬하고 두툼한 것이 내 손을 포옥 하고 안았다.

동그란 손 싸개가 내 검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힘으로 떨어뜨리면 충분히 떼어 낼 수 있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맑은 바닷물을 퍼 올려 만든 것만 같은 푸른 눈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이 눈이 나의 눈동자와 같은 색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빼버렸다.

흐꾸웩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님, 안젤라입니다.

도련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흐꾸웩을 외면한 채 뛰듯이 문 앞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안젤라가 내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어색해요.”

안젤라가 놀란 척 입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칼리언이 시킨 거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제가 칼리언한테 말해 둘게요.”

“알겠습니다.”

그의 아이를 낳긴 했지만, 그와 혼인을 한 건 아니었다.

‘마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마치 내가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호칭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해요.”

나는 건조한 인사 한마디만을 남기고 도망치듯이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직후 내가 향한 곳은 칼리언의 집무실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마탑으로 갔기에 주인 없는 집무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익숙하게 집무실 한 편에 자리한 금고 앞에 섰다.

괘종시계처럼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금고는 무장한 기사들을 형상화한 금 조각상이 테두리에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안쪽으론 화려한 색채의 종교화가 채우고 있었다.

문부터 온갖 장식들로 인하여 여백을 찾아보기 힘든 금고다.

칼리언이 처음 이것을 가져왔을 때 잔뜩 핀잔을 줬던 기억이 난다.

‘귀중품을 숨겨 놓기 위해 금고가 필요한 건데 저렇게 화려하면 어쩌자는 거야?

도둑 보고 가져가 달라고 광고하는 것 같잖아.’라고.

칼리언은 내 말에 피식 웃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놈이 화려한 장식이 달린 물건들을 좋아한다는 건 알았으나 금고까지 저 지경인 걸 가져다 놓을 줄은 몰랐다.

뭐, 듣기로는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라고 했다.

잠금장치가 다중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복잡한 수식의 마법이 걸려 있다던데…… 잘 모르겠다.

이렇게 손만 가져다 대면 ‘덜컹!’

소리를 내면서 쉽게 열려 버리니.

원 참.

금고가 반으로 갈라지며 제 속을 무방비하게 내보였다.

금고 안엔 내가 칼리언에게 건넸던 낡은 가방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난 그것을 챙기고 어깨로 금고문을 닫았다.

나는 그길로 성냥 한 갑을 가지고 저택 뒤의 작은 정원으로 나갔다.

여러 쌍의 시선들이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저택에서 자유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타악-.

작은 성냥개비에서 불이 화르륵 타올랐다.

주저 없이 가방에다가 불을 옮겼다.

누리끼리한 섬유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쉽게 타들어 간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타들어 가는 가방을 바라보았다.

“불구덩이에 내 머리를 집어넣으면, 기억도 쉽게 사라질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간절했다.

흐꾸웩을 안아 주지 않았던, 신전에 버리려고 했던 그 과거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싶다.

아이 앞에서 떳떳해지면 망설이지 않고 흐꾸웩을 안아 줄 수 있을 텐데.

내 머릿속은 늘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투성이였다.

비참한 과거를 밟고서 비참한 현재를 만들어 간다.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

무섭다.

***

금고에서 가방이 사라졌는데도 칼리언은 내게 그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가방을 태운 걸 본 하인들이 분명 칼리언에게 말을 전했을 것이다.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고 내가 먼저 ‘금고에서 가방을 꺼내 태웠어.’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그냥 칼리언에게 그 가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오늘 그는 웬일로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집무실 소파에 길게 늘어진 채 하릴없이 천장 무늬를 구경했다.

“오늘 마탑에 안 가?”

사각사각-.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누가 내 저택을 태워 먹을까 봐 불안해서 갈 수가 없더라고.”

“…….”

역시 놈은 알고 있었다.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채 “그러냐.”하고 말았다.

“읏차.”

나는 몸을 일으켜 뻑뻑한 두 눈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몸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

“침대에 좀 누워 있게.

소파는 불편해.”

“데려다줄 테니까, 움직이지 말고 있어.”

작은 발이 어쩌고저쩌고할 때부터 알아봤다.

놈은 내가 무슨 설탕으로 만들어진 인형쯤 되는 줄 아는 게 분명하다.

칼리언의 저택이 넓긴 했지만 그래 봤자 저택이었다.

게다가 집무실이랑 침실의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마차 타고 멀리 나가는 줄 알겠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유난 떨지 말라는 뜻을 담아 쏘아보았다.

칼리언은 펜을 탁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내가 도망갈까 봐 그래?”

“너 도망 못가잖아.”

“…….”

칼리언은 담백한 말로 대꾸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 버리고는 나를 안아 들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내 신경을 예민하게 긁어 대는 건 몸부림칠 기력조차 없는 내 몸뚱어리였다.

얌전히 칼리언의 품에 실려서 옮겨지는 꼴이라니.

짧은 거리를 옮겨지는 동안 여러 명의 하인과 마주쳤다.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허리를 구부려 인사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침실로 가야지.

왜 여기로 들어와?”

쿵.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언은 당당히 자신의 침실로 들어와선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혔다.

가슴 위까지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내 침실 아니잖아.”

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뒤통수를 받치며 어깨를 누르는 손 때문에 다시 풀썩 누워야 했다.

“재워 줄 테니까 자.”

놈이 보기에도 내 몰골이 말이 아니긴 한가 보네.

나는 묵직한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너 마탑주잖아.

불면증 치료법 같은 거 몰라?”

“마탑주가 의사는 아니지.”

“정말 몰라?

나 평생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해?”

“죽어서도 나랑 함께 있을 텐데 뭐가 문제야.

“…….”

너는 평생 모르겠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나는 감정 없는 눈으로 내 속마음을 속삭였다.

칼리언은 듣지 않았다.

아니, 내가 느끼는 처절함을 알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이불을 걷어 내려는 찰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칼리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안젤라가 곤히 잠든 흐꾸웩을 안고 들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살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칼리언은 자연스럽게 안젤라에게서 아이를 받아 들었다.

귀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섬세한 손길이었으나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금의 온기도 찾아볼 수 없다.

안젤라는 흐꾸웩을 안겨준 뒤 곧장 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흐꾸웩의 잠든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안젤라가 아이를 여기로 데리고 와?”

“아빠 침실에서 같이 자는 게 뭐가 문제지?”

태연하게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번져 왔다.

죽어 있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온전히 내 것이었던 걸 눈앞에서 도둑맞은 기분이다.

나도 함부로 만지지 못하는 보물을 남이 제 것인 양 휘두르고 있었다.

“네가 뭔데.”

칼리언이 흐꾸웩을 내 옆에 눕히고는 아이의 작은 배를 도닥거렸다.

“네가 보기엔 내가 뭔 거 같은데?”

아이 아빠.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아이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아이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아이를 어려워하는 것만큼 아니 그것의 반의반만이라도, 칼리언도 아이를 만질 때 망설임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계속 아이랑 같이 자고 있었어?”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길었잖아.

아이가 나를 확실하게 아빠로 인식해야 다른 잔챙이들이 욕심내지 못하지.”

“…….”

“우리 가족의 완벽한 행복을 위해서.”

칼리언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가족이라는 글자가 칼날이 되어 날아와 내 가슴을 가른다.

칼리언은 내게 낯선 소속감을 부여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 견디게 부담스러워서 도저히 이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칼리언이 이런 나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선수를 쳤다.

“버둥거리지 말고, 얌전히 누워 있어.

아이 깨.”

아이가 깬다는 말이 어떤 마법의 주문이라도 된 듯이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을 느꼈으나,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칼리언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놓고는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아기 그리고 칼리언, 이렇게 세 명이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웠다.

그가 팔목으로 눈을 가리며 피곤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피곤해서 눈 좀 붙일 테니까, 너도 쉬고 있어.

잠들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고.”

“…….”

칼리언의 도움이 없더라도 어차피 곧 기절하듯 정신이 끊길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언에게서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것 같더니…… 피곤하다는 소리는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정말 오랜 시간에 걸쳐 몸을 조심스럽게 모로 돌렸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몸의 온 근육을 바짝 긴장시킨 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는 훌륭한 무용수가 민달팽이가 산책하는 속도로 앞구르기를 했을 때 사람들이 왜 박수를 쳤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겨우 몸을 모로 돌려서 흐꾸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후우.”

나는 팔꿈치를 세워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세상모르고 편안하게 잠든 아이의 얼굴의 나의 피로를 일순 씻겨 내렸다.

그리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이의 옆에 누운 칼리언에게 닿았다.

“닮았나?”

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가늘게 좁히는 걸 반복하면서 흐꾸웩과 칼리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닮은 거 같기도 한데…….

“안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의 뼈대가 칼리언의 것과 얼추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표정을 지우면 서릿발처럼 차가운 인상인 칼리언과 다르게, 흐꾸웩은 울어도, 웃어도, 심지어 짜증을 부려도 말간 인상이었다.

“저놈의 씨로 이렇게 천사 같은 아이가 나올 리가 없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흐꾸웩의 아빠가 칼리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뭐, 하긴…… 아카데미 재학 시절의 칼리언은 지금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청명한 아이였다.

그랬던 칼리언이 지금은 공감 능력을 상실한 망종이 된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잠깐만, 그렇다는 건…….”

문득 섬뜩한 생각이 가슴을 싸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미소 한 번으로 혹한의 겨울도 화사한 봄으로 만들어 버린 흐꾸웩이 장차 칼리언처럼 상종 못 할 냉혈한으로 변할 수도 있는 걸까.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나는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흐꾸웩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절대로 네 아빠 성격을 닮아서는 안 돼.

아빠를 닮아도 되는 건 껍데기뿐이야.

그 외의 것들은 전부 폐기해.”

내게는 마력도 없고, 신성력도 없지만 말 자체에 힘이 있다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출처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어떤 대단한 사람이겠지, 뭐.

온 마음을 다해서 간절하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다 보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정신을 잃기 직전, 피식하는 헛웃음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그것이 내 뇌가 만들어낸 환청인지 아닌지 분간할 여유조차 없었다.

내 의식은 가위로 싹둑 절단당한 듯 시커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달이 꺼멓게 죽어 있었다.

태양이 차가운 빛을 가린 것이 아니다.

놀란 별들이 허겁지겁 제 몸을 태워 갔지만, 암청색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나는 그 아래서 홀로 산속을 걸었다.

잔가지가 우거진 나무가 빽빽하게 나를 둘러쌌다.

만추의 낙엽처럼 곧 바스러질 것 같은 나뭇잎이 가지마다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이파리들은 바람이 훑고 지나가도 떨어지지 않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나는 맨발로 산속을 걸었다.

낯설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저 멀리 밀드레드와 로빈이 있는 오두막이 보였다.

나는 홀린 듯이 오두막을 향해 발을 옮겼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명확하게 분간이 되지 않는 날씨임에도 나는 얇은 네글리제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추위도 어둠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산에 사는 이 빌어먹을 산짐승들이 꽥꽥 비명을 질러 대는 통에 고막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제발 좀 닥쳐 줬으면……!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비명은 내 살갗을 가르고 뼈를 통과해 기어코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둠 속에서 나를 노리는 음산한 눈동자들이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나를 조롱하듯이 일부러 비명을 질러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을.

‘시끄러워, 닥쳐!

닥쳐!

제발……!’

내가 끝내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자, 짐승들이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내었다.

그것들은 저들끼리 손을 마주 잡고 나를 에워쌌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발이 어딘가 익숙했다.

짐승의 발이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피눈물을 쏟고 있는 나였다.

내가 입을 쩌억 벌린 채로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처절하게 토해 냈다.

드러난 입 안이 온통 시꺼멨다.

턱 아래로 흐르는 타액이 먹물 같았다.

‘허억-!’

온몸의 털이란 털이 삐죽 솟았다.

두피까지 닭살이 돋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북함이 파고들었다.

놀라서 털썩 주저앉자, 나를 둘러싼 짐승들이 손을 잡고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니, 나였다.

전부 ‘나’.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가장 어린 내 모습부터, 현재의 내 모습을 한 나까지.

내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들은 숲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를 죽일 듯이 부르짖기도 했고, 어머니를 원망했으며,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내 운명을 원망했다.

겁에 질린 나는 짐승들로부터 도망쳐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눈을 더듬더듬 굴려 탈출구를 살폈다.

짐승들이 마주 잡은 손들 사이로 빠져나가면 될 것 같았다.

양손을 바닥으로 짚고 엉금엉금 기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배가 부풀었다.

죽어 버린 달만큼이나 커다랗게 부푼 배로는 저 구멍을 통과할 수 없다.

위기감이 급습했다.

부푸는 것을 막기 위해 양팔로 배를 끌어안아 억지로 밀어 눌렀다.

그러나 내가 힘을 주어 누른 만큼 다른 쪽이 크게 부풀어 왔기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 그만- 왜 이래!’

배가 더는 부풀어 오를 수 없을 만큼 한계까지 커졌을 때, 명치부터 세로로 붉은 선이 주욱 그어졌다.

나의 뱃가죽을 뚫고 무언가가 불쑥 튀어 올라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나였다.

***

“으아악-!

허억, 끄흑!”

“리안, 괜찮아.

쉬이-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어.”

사지가 고장 난 것처럼 발발 떨렸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푸욱 젖었고, 호흡은 곧 넘어갈 듯이 꺽꺽거렸다.

나는 악몽의 공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몸의 열기를 잠재우는 서늘한 체온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살려 달라고 외치며 그 팔에 매달렸다.

“흐윽, 칼리언- 칼리언!”

“응.

나 여기 있어.”

칼리언이 내 등을 도닥이면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나를 괴롭히는 놈들은 자신이 다 죽였다고.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라고.

나는 쉽게 진정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그의 품에서 몸을 떨었다.

칼리언은 발작하는 내 몸을 한참이나 안고서도 지친 기색 없이 다정한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의 오랜 노력 끝에 거칠게 박동하던 심장이 차차 제 속도를 찾아 갔다.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손 쓸 수도 없이 망가져 버린 줄 알았던 정신이 다행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칼리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다시 눕혀 주었다.

그는 땀에 엉겨 붙은 내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걷어 낸 뒤, 언제 준비해 뒀는지 모를 수건으로 내 뺨을 닦아 주었다.

“……흐꾸웩은?”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처음 꺼낸 말이었다 “한참 전에 깨서, 안젤라가 분유를 먹이고 있어.”

“다행이다.”

아이가 나의 추한 꼴을 보지 않아서.

그러나 안도감은 잠깐일 뿐이었다.

평생 이 지옥 같은 악몽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언젠가 흐꾸웩에게도 이 한심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게 분명했다.

……안 돼.

절망이 실체가 되어 내 몸 위로 흩뿌려졌다.

깨진 유리처럼 파열된 절망이 입 안을 까끌까끌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힘 빠진 손으로 칼리언의 옷자락을 쥐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눈동자에 들어찬 눈물이 쉴 새 없이 관자놀이 밑으로 떨어져 갔다.

“칼리언, 도와줘.”

“뭐든 해줄게.”

“이대로는 정말 못 살겠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아니 이미 나는 오래전에 죽었고, 지옥에 있는 걸지도 몰라.”

칼리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눈앞의 남자가 유일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갇혀 있던 나를 꺼내 줬던 그날처럼.

이 끔찍한 악몽에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줄 것만 같았다.

비록 칼리언이라는 탈출구가 또 다른 감옥이 될지언정, 지금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곳보다는 훨씬 나을 거라는 확신이 나를 집어삼켰다.

“어떻게 해줄까.”

“…….”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는 헐떡이면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코끝이 스칠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진다.

칼리언은 내 콧등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남들보다 체온이 낮은 주제에 입술만큼은 넉넉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입술은 눈꺼풀 위에도 머물렀다가, 이마, 뺨, 입술 바로 아래에 가볍게 맞닿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의 느릿한 입맞춤을 느끼며 사무치는 감정을 전부 토해 냈다.

“내딛는 걸음마다 땅이 무너지는 기분이야.

어느 날 눈을 뜨면 옷이 까맣게 물들어 있어.

심장에서 검은 피가 철철 흐르는 거야.

그런데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아.

몸이 아니라 감정이 죽어 가는 거니까.”

벌어진 입에서 끄윽, 으으-.

하는 울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눈동자 위로 가득 들어찬 눈물 때문에 칼리언의 얼굴이 흐릿하게 번졌다.

코가 꽉 막혀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칼리언이 입술로 내 눈물을 가져갔다.

나는 칼리언의 입술에 이마를 문지르면서 애처롭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어.

어떻게 하면, 미래를 기대하면서 살 수 있어?”

“리안, 과거를 바꿀 수는 없어.”

칼리언의 단호한 말이 꼭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거대한 쇠뇌가 심장을 관통하여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찢어발기는 것만 같았다.

“행복하게 사는 것까지는 감히 안 바래.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아이 앞에서 죄인으로 살고 싶지 않아.

도와줘, 칼리언.”

나는 다 타고 남은 감정의 잿가루를 끌어모아 외쳤다.

이 고백은 나의 최후의 날갯짓이었다.

칼리언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네 모든 시간 속에 내가 있을 테니, 내가 없던 과거에 얽매이지 마.”

그토록 떨어뜨려 놓고 싶었던 칼리언인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의 품 안에서만 표류하고 있던 내 몸이 단단히 끌어안긴 것 같은 깊은 안도가 밀려왔다.

어쩌면 나는 칼리언에게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니라 학대받았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망설임 없이 낡은 가방을 모조리 태워 버렸던 것처럼.

“그럼 오늘 꾼 악몽을 잊을 수 있게 해줘.”

“…….”

“대신 빈 자리를 달콤한 꿈으로 채워 넣어야 해.”

나조차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칼리언은 나의 희미한 애원을 알아차리고 기꺼이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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