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왜곡된 과거(1) (11/14)

11.왜곡된 과거(1)

어느 날 랜서는 창고 밖으로 끌려 나갔다.

탈출이 아니라 왜 끌려 나갔다고 생각했냐면, 아버지가 억지로 데려갔으니까.

‘기사가 되어 업적을 세워라.’

아버지는 그렇게 명했다.

나이가 듦에도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한 아버지는 곧 장교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두려워했다.

아버지는 늘 명예롭고, 권위적인 삶을 살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종자인 랜서가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 드높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리아나를 살리고 싶으면, 내 명을 들어야 할 거다.’

나는 랜서가 없는 창고에서 홀로 시간을 죽이며 버텼다.

랜서가 창고를 나간 직후 아버지의 폭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는 누에콩 죽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큼, 큼큼!!

랜서 발레라가 오늘 기사 서임을 받는다지?”

벽돌 너머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랜서가 돈을 주고 매수한 하인이었다.

랜서는 가끔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하인을 이용했다.

“북방으로 발령 났다더군!

정인과 함께 북방에서 살겠다며 좋아하던데!”

랜서는 북방으로 떠나는구나.

아버지의 간섭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한 삶이라고 할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누에콩 죽을 담은 접시는 나무로 바뀐 지 오래였다.

집어던져도 껍질만 떨어질 뿐, 부서지지 않았다.

랜서가 기사 서임을 받고 북방으로 발령 난 날 밤.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

평소보다 광포한 기운이 피부를 후벼판다.

마주친 눈동자에서 소름 끼치는 살의와 폭력적인 즐거움이 이글거렸다.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 나는 맞아 죽겠구나.

침착하려고 애쓰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발은 물론이고 이까지 달달 떨려 왔다.

공포가 심장을 으깨어 놓을 듯 거칠게 쥐어짰다.

아직 맞지도 않았지만, 눈앞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귀엔 쿵쿵거리는 박동 소리가 장송곡처럼 들려왔다.

퍼억-!

아버지가 내 목 밑부분을 발로 짓눌렀다.

뒤통수가 차가운 돌바닥에 부딪히며 입 안에서 피가 팍 터졌다.

숨이 가빠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헉, 허억, 개처럼 숨을 쉬었다.

나는 살고 싶은 걸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걸까.

“그동안 아버지가 그리웠지, 리아나.”

“허억- 끄헉, 컥…….”

그때, 검은 가죽이 아버지의 목을 예쁘게 감쌌다.

내 숨통을 누르던 위압감이 연기 걷히듯 사라지고 아버지의 무쇠 같은 몸은 바닥을 굴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신이 붉은 옷을 갖춰 입고, 아버지를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리아나.”

신의 목소리가 낯익었다.

붉은 옷을 입은 신이 아니었다.

나는 눈앞의 남자를 알아보기 위해 몽롱한 정신을 바로잡아야 했다.

“칼리언 워렌.”

5년 전에도 키가 컸던 소년은, 지금은 아버지를 내려다볼 만큼 거구로 자라 있었다.

불행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버지를 손쉽게 무릎 꿇리는 절대자로 재림했다.

칼리언은 아버지를 곰 인형 다루듯이 다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움직임만으로 아버지를 천장에 매달았다.

내가 매달렸던 것처럼 대롱대롱.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아블란에서 3년이나 기다렸어.

처음 1년 동안은 많이 바쁜가보다 하면서 얌전히 기다렸고, 그다음 해에는 울었지.

많이 울었어.

눈물샘이 말라서 피가 쏟아지더라고.

그다음 해엔…….”

칼리언은 여상하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러곤 아버지의 몸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가 뽑아내기를 반복했다.

매달린 아버지가 공포에 젖어 비명을 질렀다.

나처럼.

그러나 칼리언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이 온통 붉은색으로 젖어 갔다.

그제야 칼리언이 붉게 보였던 것이 피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다른 게 있다면 칼리언을 물들인 건 그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거였다.

“……죽이기로 했어.”

“…….”

“나한테 너를 빼앗아 가는 모든 걸.

그게 리안, 너라고 할지라도.”

칼리언은 아버지의 몸 곳곳에 칼자국을 낸 후 단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매달린 그는 눈을 회까닥 까뒤집은 채로 턱밑에 질척한 침이 줄줄 흘리고 있었다.

순간, 뜨거운 희열이 심장에서부터 퍼져 나와 사지 말단까지 짜릿하게 울렸다.

오싹할 만큼의 전율이 나를 뒤덮었다.

나는 4년 만에 소리 내어서 웃었다.

“데리러 왔어, 리안.”

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잡지 않았다.

***

‘데리러 왔어, 리안.’

칼리언의 그 말이 나의 고립된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그때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했다.

나는 어떻게 이것을…… 죽어도 잊지 못할, 그날의 짜릿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잊을 수 있었을까.

감은 눈이 뜨였다.

눈은 맞아서 부어 있지도 않았고, 입술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끈했다.

“리안.”

고저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정신을 깨웠다.

나른하게 풀려 있는 붉은 눈동자, 이마에서 콧대로 떨어지는 유려한 곡선, 입술 끝에 매달려 있는 만족감.

칼리언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내가 말했지, 리안.

네 발로 돌아오게 될 거라고.”

칼리언이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쇠사슬이 그의 손목에 칭칭 감겨 있었다.

칼리언이 팔을 아래로 당기자, 발목이 지끈거리며 몸이 딸려 내려갔다.

입술을 비집고 감출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어떤 희극도 내 인생만큼 우습지는 않을 거다.

부모님을 살해한 사랑스러운 진범을 코앞에 두고 이상한 곳이나 들쑤시고 다녔다니.

칼리언이 엄지로 내 입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피부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 서늘한 체온이 익숙했다.

끔찍했고.

“여행은 즐거웠어?”

내 대답은 그의 맞닿은 입술 속으로 먹혀 들어 갔다.

***

잃어버린 10년의 기억, 아니 잃어버린 26년의 기억이 전부 되돌아왔다.

기억을 따라 뿌리 깊은 우울감까지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날 저택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달빛이 눈부시도록 쏟아졌다.

그리고 나의 불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피에 젖은 몸이 나를 뒤에서부터 감싸 안았다.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이 내 손목을 은근하게 어루만졌다.

‘어디 가게?’

‘죽으러.’

‘그건 안 되는데.’

‘네가 죽여주는 건?’

‘그것도 안 돼.

막상 다시 보니까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나는 칼리언의 팔을 풀어내고, 무작정 걸었다.

거친 땅을 맨발로 걸어 도착한 곳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블래이크의 저택이었다.

나는 뒤따라온 칼리언을 돌아보았다.

‘오지 마.

가.’

나는 칼리언을 그렇게 남겨 두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5년 만에 만난 블래이크는 지저분한 내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난 재회의 감동으로부터 멀찍한 곳에 서 있었다.

손목에 채워진 푸른 팔찌가 눈에 거슬린 탓이었다.

***

오래된 기억에서 빠져나오자 등 뒤에 닿는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팔찌를 다른 손으로 톡 건드렸다.

“이 팔찌에 달린 마석 말이야.”

“응.”

“내 위치랑 내가 나누는 대화들 외에 또 뭘 너한테 전달해 줘?”

“보는 거.”

맞아.

그랬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팔찌를 풀어 달라며 칼리언이랑 대판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칼리언은 내가 죽겠다고 소동을 벌인 후에야 팔찌를 풀어 줬다.

“블래이크의 저택에서 살던 4년 동안, 내가 블래이크랑 섹스하는 거 다 봤구나.”

“그 말 1년 전에도 했었어.

내 대답은 그때와 같아.”

“4년씩이나 잘 참았어.”

“사랑해서 한 게 아니잖아.

섹스를 못 하면 잠을 못 자니까 그랬던 거니 내가 이해해야지.”

“…….”

“내가 억지로 널 데려왔으면 죽어 버렸을 거면서.”

“결국 억지로 데려왔잖아.

라토니아 국왕 마차에 살수를 보낸 것도 너고, 전쟁에 랜서를 차출한 것도 너면서.”

“네가 나를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어.”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는 베개에 깊숙이 머리를 파묻었다.

5년 전, 창고에서 나온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일 아버지가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고 잠을 두려워하게 됐다.

이 두려움은 당연한 수순처럼 불면으로 이어졌다.

악몽을 꾸지 않고 잠에 빠질 유일한 방법은 정신을 온통 짓무르게 하는 격정적인 섹스뿐이었다.

블래이크는 불안정한 나를 보살피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내가 저택 밖으로 나가서 치료받는 것만은 도울 수 없었다.

내가 부모님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속으로 아버지를 죽여도 천 번도 넘게 죽였으니 아예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블래이크는 궁여지책으로 나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던 랜서를 불러들였다.

나와 깊은 유대를 쌓은 랜서라면 나의 불안증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랜서와도 숙면을 위한 섹스만 할 뿐 차도는 없었다.

급기야 블래이크는 내게 최면을 걸었다.

내가 겪은 일들은 모두 허상이며, 나는 귀족 아가씨다운 삶을 살았노라고, 소설과도 같은 일기를 쓰게 했고, 실제로 나는 그 순간만큼은 망상에 젖었다.

일기가 효과가 보일 즈음 칼리언의 인내가 바닥났다.

그의 억눌려 있던 집착과 소유욕이 폭발했다.

칼리언은 블래이크와 랜서를 타지로 보내 버린 후 나를 자신의 저택에 가두었다.

놀랍게도 블래이크의 저택에서 살던 것보다 훨씬 편안한 나날이었다.

그 시절 나는 블래이크와 랜서가 날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걸 알고 있었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억지로 괜찮은 척 구는 것에 지쳐 가고 있었다.

칼리언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나의 의사나 나의 감정은 뒷전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나도 숨겨 두었던 욕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나는 죽고 싶었다.

계속되는 나의 자살 시도 때문에, 칼리언은 내 발목에 족쇄를 채워 놓고 행동을 통제했다.

그리고 그는 내 자살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묘안을 생각해 냈다.

‘칼리언,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네 안에 박고, 쌌을 뿐이야.’

블래이크와 랜서는 내 숙면을 위해 늘 피임약을 복용했다.

그러나 칼리언과의 섹스는 오직 쾌감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내 아버지를 죽인 신이 곁에 있으면 나는 마음 놓고 잘 수 있었기 때문에 섹스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숙면을 위한 것이든, 쾌감을 위한 것이든 확실한 건 나는 저들의 아이를 갖고 싶어서 몸을 섞은 게 아니었다는 거다.

칼리언도 아이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에 나와 같은 마음일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네 몸에 내가 싼 정액이 열 달 동안 머물러 있는 게 낭만적이잖아.’

‘미친 거야?’

‘원한다면 나도 네 것을 몸에 새길게.

아, 팔이 절단되어도 빠르게 처치만 하면 괴사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군.

어때, 서로의 오른팔을 바꾸는 건.

네 작은 손으로 언제든 자위할 수 있으니 나는 아쉬울 게 없어.’

그는 내가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정말로 자신의 팔을 깔끔하게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당시엔 그의 괴이한 발언에 휩쓸려서 침착하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중에서야 그가 왜 그랬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아이를 가지면 삶에 의지가 생길 거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처음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칼리언이 멍청한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아이 때문에 죽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달랐다.

오히려 내가 죽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짓는 그의 착각을 처참히 부숴 주고 싶다는 반발심이 생겨났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아버지의 환영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나는 배 속의 아이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다.

아이는 내 배를 콩콩 걷어차며 현실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고, 배를 가만히 만지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두려움이 차츰 옅어지기도 했다.

배가 불러 왔을 때,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이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있었다.

태동이 느껴질 때면 가슴이 뻐근해지고, 일순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벅찬 감정이 치솟았다.

이대로라면 죽지 못할 게 뻔했다.

이 마음이 커지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차르륵-.

움직일 때마다 족쇄가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었다.

내가 이동할 수 있는 반경이라고는 침실과 욕실 그리고 칼리언의 집무실까지였다.

나는 노크도 없이 칼리언의 집무실을 열었다.

탄 냄새가 확 끼쳐 오는 바람에 인상을 썼다.

‘이건 뭐야?’

‘만지지 마.

위험해.’

‘이미 만졌어.’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태우고 남은 재가 있었고, 그 옆에 처음 보는 마른 풀이 놓여 있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약초가 아니라 마탑에서 재배한 망각초야.’

‘무슨 효과가 있는데?’

‘기억을 잃어.

짧게는 하루, 길게는 생의 모든 순간을.’

칼리언은 바쁜지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말했다.

나는 마법초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의자 뒤에 코트가 걸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뒤로 걸어가서 앉아 있는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칼리언은 고개만 돌려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진짜 바쁜가 보네.’

‘서 있지 말고, 앉아.’

‘잠깐 정도는 괜찮아.’

나는 눈으로 빠르게 집무실을 훑었다.

여러 번의 자살 소동 때문에, 칼리언은 저택 내의 모든 날붙이를 치워 버렸다.

이 넓은 집무실 안에 흔한 도자기 화분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종이가 걸리길래 확인도 하지 않고 일단 꺼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대로 인사도 없이 집무실을 나왔다.

칼리언은 붙잡지 않았고, 왜 왔냐고 묻지도 않았다.

내 돌발 행동이 익숙한 놈이니.

무작정 가지고 나온 종이는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나는 칼리언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하녀 안젤라를 불렀다.

‘머리를 자르고 싶어요.

가위를 가져다줘요.’

‘예?

아가씨, 하지만…… 제가, 제가 잘라 드리겠습니다.’

‘제 몸에 누가 손대는 거 싫어해요.

아시잖아요.’

‘…….’

‘칼리언이 허락했어요.’

‘제가 주인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마탑의 일이 바빠서 며칠 못 들어온대요.

칼리언이 안젤라의 충성심을 알고 이렇게 미리 서명까지 해주고 갔어요.’

안젤라는 글을 몰랐다.

하지만 칼리언의 서명은 몇 번이고 보아 왔기 때문에 그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안젤라는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를 믿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안젤라가 가위를 가지고 왔고, 나는 하인들을 내쫓지 않았다.

가위를 막 넘겨받은 마당에 저들을 내쫓는다면 당연히 수상하게 여길 거다.

배를 찌르고 목을 찌르는 것쯤이야 순식간일 테니 괜찮다.

저들에게 좋지 못한 기억을 남기는 것이 찝찝하지만…….

그러나 차분한 마음과 다르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에 들린 가위가 뼛속까지 얼려 버릴 듯 차가웠다.

손이 자꾸만 떨려 왔다.

하인들이 보면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지도 몰랐다.

우선 진정하는 게 먼저다.

머리를 빗으면서 마음을 가다듬자.

‘아가씨,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뜨거운 것을 한 모금 넘기면 이 한기가 조금 가실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안젤라는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안젤라가 차를 가지고 올 때까지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찻잔의 손잡이를 살짝 만지자 찻물이 넘칠 듯 위태롭게 넘실거렸다 나는 황급히 손가락을 놓았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칼리언이 올 때까지 죽지 못할 거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가위를 들었다.

그리고 크게 휘둘렀다.

‘아가씨!’

탁.

가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위로 뜨겁고, 붉은 피가 낙하했다.

성공했나.

내가…… 내가 애를 죽였나…… 희열이 몰아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온몸의 뼈가 조각조각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고통이 퍼졌다.

절규와도 같은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배를 만져 보았다.

순간, 안에서부터 배를 팡 하고 차는 태동이 느껴졌다.

‘……재미있는 짓을 했네, 리안.’

‘…….’

내가 긁어내린 건 내 배가 아니라 칼리언의 배였다.

언제, 어느 틈에 온 거지?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돌렸다.

안젤라가 시선을 피했다.

눈치채고 칼리언한테 일러바쳤구나.

하…… 멍청하긴.

안젤라가 시간을 버느라 차를 주겠다고 한 것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걸 몰랐을까.

이 상황이 너무도 끔찍했다.

내가 죽으면 아이도 함께 죽어야 하는 것도,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저택에 갇혀 있는 것도.

전부.

모든 원흉은 칼리언이었다.

나를 지옥에 감금한 나의 신.

‘날 그만 놔줘.’

‘아…… 피 나네.’

‘흐읍, 끅, 네가 뭔데, 나를, 살게 해…… 그만, 풀어 줘.’

‘나 다쳤어, 리안.’

‘차라리 죽여줘…….’

‘약 안 발라줄 거야?’

칼리언의 몸에는 수많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치유 마법으로 충분히 없앨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내가 직접 연고를 발라 주는 것 외에는 어떤 치료도 받지 않았다.

‘미친, 흐읍, 흑, 미친놈.’

칼리언은 피 묻은 몸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가 내 머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마음이 아파.’

칼리언 워렌은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미쳐 있기 때문에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나 보다.

내쉬는 숨결에서 두려움이 묻어났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불행의 향기가 만족스럽게 퍼졌다.

내가 아이까지 죽이려고 들자, 칼리언이 한발 물러났다.

그는 내 발목에 걸린 족쇄를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하자.’

‘…….’

‘너를 풀어 줄게.’

‘왜?

이젠 내가 죽어도 돼?’

칼리언이 기분 좋다는 듯이 웃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린 입가에 입 동굴이 드러났다.

‘못 죽잖아, 너.’

‘…….’

칼리언은 나를 전부 꿰뚫고 있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하고,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거다.

나도 부정하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내 곁을 떠나.

팔찌도 다시 안 채울 거야.

대신, 네가 네 발로 돌아오면 그땐 영원히 나와 사는 거야.

살아가는 거야.’

‘…….’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내 사랑을 받아들이는 거야, 리안.

약속해.’

‘약속할게.’

‘장담하지.

너는 네 발로 나를 찾아오게 될 거야.’

나는 내 두 발로 칼리언의 저택을 나섰다.

만삭이었고, 당장 내일 출산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다.

배를 타고 먼 곳으로 향했다.

밤이 찾아오면 아버지가 나타났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 못해 환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칼자국으로 낭자한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됐다.

아이가 있었다.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환영을 피해서 무작정 달렸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구르는 와중에도 순간적으로 배를 감쌌다.

그동안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광포한 기운을 발산하며 나와 아이를 죽이러 쫓아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뒤졌다.

칼리언의 집무실에서 종이와 함께 몰래 가지고 나왔던 망각초를 씹어 삼켰다.

다 잊는 거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블래이크, 랜서 그리고 칼리언까지.

모두 잊어버리고 행복한 리안으로 다시 사는 거야.

아이랑 함께.

아이랑.

그리고 망각초를 싸고 있던 종이와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펜을 들어 미친 듯이 적어 내렸다.

「아무도 믿지 마, 리아나.

절대, 절대, 절대로 믿지 마.

아무도 아무도, 믿지 마.

그 누구도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리아나, 제발, 제발, 제……」

네 자신도 믿지 마.

네가 겪은 불행은 다 거짓말이야.

너는 행복한 리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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