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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징조(2) (10/14)

10.징조(2)

정오의 태양이 찬 기운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흐꾸웩의 발에 두꺼운 양말을 신겨준 후 바지 안으로 야무지게 밀어 넣었다.

작은 발바닥을 손으로 살짝 긁어내리자,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은 바쁘게 다녀올 곳이 있어.”

흐꾸웩은 온몸이 부드러운 옷감으로 칭칭 감긴 채 얼굴만 바깥으로 쏘옥 빼냈다.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눈을 빛내며 내 입을 쳐다봤다.

“그래도 새벽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아.

날도 밝고 덜 춥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흐꾸웩의 작은 코에 내 코끝을 가져다 댔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이 내 얼굴을 거침없이 긁어내렸다.

“아!”

“먀!

꺄하!”

작은 손가락이 눈 안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시린 통증에 인상을 쓰는데 흐꾸웩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분홍 혓바닥을 내비치면서 깔깔 웃는다.

그래, 좋을 때다.

나는 랜서의 집을 나서기 직전, 그의 침실에 있는 작은 금고를 보았다.

혹시나 해서 열어 보니 이제 막 발행된 것 같은 지폐와 금화가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플로란의 말에 따르면 금고로 쓸 건물을 새로 지을 정도의 부호라고 했으니 금화 몇 닢 주워 간다고 해서 화내진 않겠지.

나는 삯마차 값과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여분의 비상금을 챙겼다.

그리고 육아 수첩에 적어 두었던 「은혜 갚는 리아나 미첼」이란 항목에 ‘랜서 발레라’의 이름을 추가했다.

***

나는 후드가 달린 남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광장으로 나갔다.

거리를 유유히 지나다니는 삯마차 중 하나를 잡아 주소가 적힌 쪽지를 보여 주었다.

“정말 이 주소가 맞아요?”

“왜 그러시죠?”

마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민촌에 사는 아가씨로는 안 보이는데…… 어디 팔려 가는 건 아니죠?”

“……빈민촌.”

“몰랐나 본데, 이런 곳에 함부로 가지 말아요.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지…… 다른 좋은 일거리를 찾을 수 있을 거요.”

마부가 다시 마부석에 올라타려는 찰나였다.

나는 황급히 마부의 팔을 잡았다.

“아뇨.

여기 맞아요.

가주세요.”

마부는 영 찝찝한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는지 하는 수 없단 얼굴로 고삐를 쥐었다.

낡은 삯마차가 덜컹거리면서 출발했고, 광장의 화려함을 벗어나 빛의 뒷면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

겨울이 휩쓸고 간 거리는 역병이 돌기라도 한 것처럼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다.

며칠 내내 내렸던 흰 눈이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 같았다.

마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처음 오는 곳이었지만, 이곳이 내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마부가 매몰차게 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안으로 확 들이닥치며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았다.

나는 흐꾸웩을 품 안 깊숙이 끌어안고 물었다.

“네?

왜 걸어가야 하죠?”

“이 앞으로는 다 빙판길이라 말이 못 지나가요.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수도의 널찍한 거리에 여러 대의 마차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이유는 매일 아침 쌓인 눈을 치우는 관리인들이 있어서였다.

이 쌓인 눈들은 외면당한 빈민가 사람들처럼 쓸쓸하게 방치되었고, 녹은 눈이 땅속으로 스며들기도 전에 찬 겨울의 입김에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버린 거다.

바다 건너의 대륙이 아니라 한 땅덩어리에 붙어 있는 마을이건만 마치 타국에 온 것처럼 낯설었다.

마부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재촉했다.

마차에서 내려 삯을 치르자 마부가 손바닥에 돈을 얹어 놓고 한 닢, 두 닢 세었다.

그러더니 동전 두 닢을 내게 다시 건네줬다.

“허튼 생각 말고 얼른 돌아가슈.

아이도 있는 엄마가.”

“예?

저기 괜찮…….”

마부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마차를 몰고 훌쩍 사라졌다.

단단히 오해를 산 거 같은데 그게 무슨 오해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으악!

깜짝이야…….”

길이 미끄러워서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마을 전체가 빙판길이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췄다간 거하게 나자빠져서 크게 다칠 것만 같았다.

나는 다리를 들어 올리지 않고, 신발 밑창을 마찰시켜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차라리 이렇게 걷는 게 더 안전할 듯싶었다.

나 혼자 넘어지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흐꾸웩이 다칠까 봐 염려되었다.

뒤뚱뒤뚱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와중이었다.

“아앙!

아!

빨리, 흣, 더 빨리…….”

“허억, 헉, 흐아…… 아!”

포대 자루처럼 거친 천을 뒤집어쓴 두 남녀가 하반신만 바깥에 내놓은 채 벽에 딱 붙어서 성교를 하고 있었다.

흐꾸웩이 신기한 듯 꺄하!

하며 호기심을 내비쳤고, 나는 얼른 흐꾸웩의 두 눈을 가렸다.

남자가 거친 숨을 토해 냄과 동시에 여자가 작위적인 비명을 터뜨렸다.

남자는 옷 위로 여자의 가슴을 우악스러운 손길로 주물렀고, 여자는 귀찮다는 듯이 남자를 밀어 냈다.

“다 쌌으면, 질척거리지 말고 떨어져!”

“퉤, 귀족 나리도 안 찾아 주는 골방 신세 주제에.”

여자는 치마를 추어올리고 남자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남자는 바지 주머니를 전부 뒤적이며 구리 동전 몇 닢을 건넸다.

그러나 여자의 셈과는 맞지 않았는지 서로 거칠게 욕을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벌였다.

조금 전까지 민망한 신음을 내뱉었던 사이가 맞는지 내 두 눈이 다 의심스러웠다.

“……설마, 그 마부가 나를…….”

내가 몸을 팔기 위해 빈민가로 왔다고 생각하던 거였나.

좋지 않은 오해 같다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질 나쁜 오해일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마부를 쫓아가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다 무너져 가는 폐가와 투박한 벽돌집은 이곳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마을은 겨울에 씹어 먹힌 것처럼 볼품없었다.

색이 존재하지 않았고, 들판은 눈에 파묻혔으며 주위의 나무는 얄팍한 밑동만 겨우 남아 있었다.

“정말 이런 곳에 집사장이 살고 있는 건가.”

아버지는 사용인들의 봉급을 후하게 주면 줬지, 절대로 수전노처럼 구는 주인이 아니었다.

재산이 몰수당했다 하더라도 집사장은 그전에 받아온 봉급이 있을 터다.

호화스러운 생활은 어려울지 몰라도 이런 빈민촌에 들어가야 할 만큼 열악한 상황은 아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순간, 랜서의 정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그의 수첩에 적혀 있던 것은 오직 주소뿐, 집사장를 만나고 왔다는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랜서도 마지막 희망인 줄 알았던 정보가 허탕인 것을 확인한 후 진범을 쫓는 걸 포기해 버린 건 아닌가?

그래서 구태여 수첩에 적어 놓지도 않았다든가.

“……그래도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까 가보긴 하자.”

나는 차올랐던 기대를 반쯤 내려 두며 주소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랜서의 수첩에 적힌 곳에 도착했다.

“여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허름한 천이 덧씌워진 나무집이었다.

둥그렇게 헤진 천 사이로 벌어진 목재 이음새가 보였다.

겨울의 찬 바람이 그대로 안까지 불어닥칠 것 같은 집이었다.

그뿐인가.

비도 눈도 막아 주지 못하고, 태풍이라도 심하게 몰아치는 날에는 집의 반절이 날아가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꿉꿉한 악취가 풍기는 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거기 누구 없습니까?”

“…….”

“게리 헤리슨 씨.”

“…….”

“게리 헤리슨 씨!”

“누구야!”

안에서부터 벼락같은 고함이 터졌다.

잔뜩 신경질이 돋아난 음성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순간 어깨를 움찔 떨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거칠게 바닥을 쿵!

쿵!

울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얼굴의 반이 지저분한 수염으로 뒤덮인 사내가 나타났다.

풀어헤친 머리칼은 어깨를 덥수룩하게 뒤덮고 있었고, 퀭하게 파인 두 눈이 신경질적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기억 속의 집사장은 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이마를 단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수염도 없었고.

게다가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낭창한 몸이었다.

집사장 특유의 볼록 튀어나온 옆 광대뼈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못 알아볼 뻔했다.

남자의 뒤로 헐벗은 여자 두 명이 목을 빼고 나를 구경하는 게 보였다.

게리 헤리슨은 집안에 대고 “눈깔 안 돌려?!”하며 사납게 소리쳤고, 여자들은 대놓고 코웃음 쳤다.

“오랜만입니다.

저 리아나 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서서히 경악으로 물드는 얼굴을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네년이 어떻게 여기에……!!”

네년?

옛 주인 일가에 대한 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스러운 호칭이었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헤리슨은 분노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야기 좀 나누러 왔습니다.”

“더러운 년!

시발, 재, 재수가 없으려니까…….”

5년 동안 잠적하다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니 어느 정도 경계를 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걸걸한 욕설을 퍼부으며 경멸과 두려움에 찬 눈으로 맞이할 거라고는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희 부모님을 살해한 범인, 보셨잖아요.

그때 이야기를…….”

“가증스러운 개잡년 같으니라고!

한 번만 더 나를 찾아오면 그 곱상한 얼굴을 뜯어내서 내 의자 방석으로 쓸 줄 알아!

퉤!”

“저기, 잠깐만요!”

“흐아아아!

아앙!”

흐꾸웩이 울음을 터뜨렸다.

게리 헤리슨이 뒤늦게 흐꾸웩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모멸감이 어렸다.

“시발, 어디서 애새끼까지 데리고 와선…… 내가 그런다고 네년을 가엾게 여기기라도 할 거 같아?

네년 때문에 내 인생이 어떻게 곤두박질쳤는데, 잘 봐!

속이 시원해?

어?!”

남자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내 몸을 밀쳤다.

나는 남자의 배나 어깨가 부딪칠 때마다 한 발자국씩 뒤로 밀려나야 했다.

차가운 빙판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일방적인 적대감에 질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대로 나도 한껏 욕을 퍼부어 주고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솟았지만, 이 남자는 진범을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였다.

나는 화를 삭이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게리 헤리슨 씨, 제발 진정하세요.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다 사과드릴 테니 일단 대화를 좀…….”

“하!

네가 나한테 사과를 한다고?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군.

겨우 살아남은 나를 기어코 찾아내서는!”

“살아남아요?”

“왜, 네년 눈에는 이미 뒤진 것만도 못한 거 같아?

어?!”

“누구한테서 살아남은 건데요?”

내가 자꾸만 반문하자 흉흉하던 집사장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나를 향한 혐오와 증오는 변함없었지만, 그는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진 듯했다.

“……뭐야, 너.”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을지 몰라요.”

“…….”

“우리 부모님이 살해당하던 날.

그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직설적으로 말하자 남자의 성난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하!

뭐라고?”

“으윽……!”

남자가 순식간에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목이 졸리면서 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남자의 숨결이 전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지자 심한 악취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와 남자의 사이에 낀 흐꾸웩이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데도 남자는 제 화를 터뜨리기에 바빴다.

“나를 놀려 먹으려고 이 빈민촌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

“소, 손 좀…….”

“대가리가 고장 난 게 아닌 이상 어떻게 그걸 잊어.

어?!”

“으윽!”

흐꾸웩이 없었더라면 발로 국부를 까줬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나는 있는 힘껏 몸부림치며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발악했다.

“너 설마…….”

그때 어떤 생각이 미쳤는지 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래.

너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 리가 없었겠지.

하!

너도 나랑 똑같아.

똑같다고!”

남자가 나를 던지듯이 내팽개치고는 허리를 젖혀가며 꺽꺽 웃어 젖혔다.

“허억, 컥…….”

“그렇게 알고 싶다면 전부 얘기해 주지.

대신, 네년 씹질 솜씨 한 번만 맛보자.

저택에 있는 동안 네년 구멍 맛 좀 보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데.”

“…….”

“뭐해!

그 더러운 구멍을 잡아 벌리지 않…….”

“…….”

나와 남자의 주위로 회초리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지저분한 혀를 놀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남자의 이마 정중앙부터 미간을 지나 인중과 목, 가슴 아래까지 붉은색으로 일직선이 그어졌다.

촤아아-!

뜨거운 피가 솟구치더니 남자의 몸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파앗.

솟구친 피가 내 안면에 흩뿌려졌다.

쯔어억.

두 개로 쪼개진 남자의 몸이 바닥으로 처참하게 쓰러졌다.

나는 동강 난 팔다리가 뭍에 떨어진 생선처럼 펄떡펄떡 요동치다가 서서히 멎어 가는 것을 전부 지켜보았다.

길게 갈라진 단면 사이로 붉은 내장과 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뜨거운 피가 차갑게 언 빙판길을 흥건하게 적셨다.

“아…….”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턱 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흐꾸웩을 안은 팔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뿐인가.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 속에 피가 섞여 들어가는데도 놀란 눈을 감을 수조차 없었다.

“허억, 헉…….”

나는 숨이 뒤로 넘어 갈듯 끅끅거렸다.

피보다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흐아아앙!

후응…… 끄하아앙!”

흐꾸웩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우는데도 달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온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미약한 겨울바람에도 휘청거리던 몸이 결국 피 웅덩이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나는 무릎으로 피를 헤치며 자리에서 도망쳤다.

유일한 목격자가…… 게리 헤리슨이…….

두 동강이 났다.

그것도 내 앞에서.

극한의 공포가 나를 집어삼키고, 처참한 광경이 끊임없이 눈꺼풀 안쪽에서 되풀이됐다.

나는 미친 듯이 피에 젖은 옷을 빙판에 문질러 가며 엉금엉금 현장에서 도망쳤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흐아악!

아악!”

나는 흐꾸웩을 보호하면서 한 팔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팔꿈치가 단단한 몸에 부딪히고, 발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었다.

나를 뒤에서 받치고 선 몸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자빠졌을 거다.

“리아나, 정신 차려.

나야.”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감겨들어 오자 마법처럼 발작이 멈추었다.

나는 떨리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쉬, 괜찮아.”

“……칼리언.”

“내가 왔으니까 이제 다 괜찮아.”

다정한 체온이 세차게 떨리는 내 몸을 깊숙하게 끌어안았다.

바짝 경직되어 있던 근육들이 서서히 풀어지면서 고막을 시끄럽게 울리던 심장 박동 소리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흐려지는 의식이 기꺼웠다.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 꿈으로 도망칠 시간이었다.

***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모든 감각이 둔했다.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어둠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무수한 별이 쏟아질 것처럼 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나는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시선을 던졌다.

‘리아나.’

다급한 음성이 내 신경을 잡아끌었다.

나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네, 선생님.’

블래이크가 허리를 구부려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검은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기억 못 하겠으면 받아 적어.’

‘아니에요.

잊어버릴 리가 있나요.

내일 자정.

아블란 행 선박.

맞죠?’

블래이크가 긴 팔로 나를 끌어안으며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성애적인 입맞춤이 아닌 아이의 축복을 기원하는 어른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떨지 마.

다 괜찮을 거야.’

‘…….’

‘도착하면 선착장에서 붉은 우산을 든 귀부인을 찾으면 돼.

쉽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블래이크가 희미하게 웃으며 내 뺨을 문질러 닦았다.

그제야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몸 전체가 파들파들 경련하고 있었다.

블래이크는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는 내 두 손에 무언가를 단단히 쥐여 주었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그는 내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 빠진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내 손엔 아블란 행 승선권 두 장이 땀에 젖은 채로 위태롭게 들려 있었다.

***

나는 물속에서 건져 올려진 듯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심장이 살갗을 가르고 튀어 나갈 듯 거칠게 박동했다.

“뭐야…….”

나는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떻게 된 거야.”

꿈속의 나는 ‘아블란 행 승선권’을 쥐고 있었다.

그래.

내가 부모님께 1년을 조르고 졸라서 허락받은 유학 장소가 아블란이었다.

그런데 왜 승선권을 부모님이 아닌 블래이크가 건넸으며 그것도 두 장을 건넸을까.

“윽…….”

머리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거대한 손아귀에 머리통이 잡힌 채 쥐어짜이는 것만 같았다.

“어지러워.”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부림치다가 침대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추락의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에서 퍼지는 고통이 끝나기를 버티는 것밖에 없었다.

꽉 다문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여러 색이 번쩍거리고, 귓속으로 회오리가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고막을 찢을 듯 시끄럽게 파고들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

‘아가씨, 가세요!

크흑, 뛰세요!’

랜서…… 열세 살의 랜서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외쳤다.

나는 눈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도망가지도, 랜서를 구하지도 못하고, 내 머리를 후려치는 손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이상해…… 이상하잖아.

나한테 이런 기억이 있을 리가 없는데.

숙인 고개 밑으로 눈물과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머릿속의 남자가 내 머리를 후려친 순간, 엄청난 격통과 ‘삐-.’하는 이명이 나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머릿속의 내가 외쳤다.

‘놔주세요.

랜서를…… 안 갈게요.

잘못했어요.’

현실의 내가 중얼거렸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마침내 검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할리드 미첼.

기억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다정한 시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머리 위에 뿔이 돋아난 악마 같았다.

두 눈 속에는 살기를 담은 불길이 나를 태울 듯 이글거렸다.

“아, 아…….”

아버지는 내 머리채를 쥐어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긴 복도를 가로지르며 끌려가는 동안 내 울음소리 너머로 교태를 부리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어머니가 보였다.

그리고 금발의 남자 두 명이 어머니의 가슴 양쪽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를 보지 못하고 열락에 취해 있었다.

그사이 나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손길 아래에서 서서히 죽어 갔다.

“사, 살려…… 흐윽, 아…….”

달칵.

누군가가 내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그새 질질 짜고 있네.”

다정한 품이 나를 안아 올렸다.

불덩이 같은 몸을 식혀 주는 시원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절박하게 그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냉기를 품은 손이 내 귓가를 살살 어루만지자 날카롭게 꽂히던 이명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놀랐어?”

남자…… 칼리언이 즐겁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한 손이 내 눈물을 훔쳐 냈다.

나는 피부에 닿는 체온이 좋아서 그 손에 뺨을 비볐다.

“무서웠어?”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애를 낳았네.”

칼리언이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칼리언이 낮게 웃는 것이 느껴졌지만,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피부에 닿는 이 서늘함이 사라지면 다시 그 악몽 같은 이명에 사로잡힐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기분이다.

바늘을 한 움큼 쥐고 삼킨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어디 안 가.”

“……흐윽, 으…….”

“리안.”

칼리언이 옆자리에 누우며 팔베개를 해주었다.

나는 본능처럼 그의 품에 파고들었고, 칼리언은 기꺼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가 내 귓가를 어루만지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우리의 기억을 찾으러 가자.”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이 침대 아래로 쑤욱 빨려들었다.

어두컴컴한 통로에 갇힌 채 끝도 없이 계속 추락했다.

이윽고 저 멀리, 희미한 빛 한점이 보였다.

점보다도 작았던 빛은 점차 몸집을 키우더니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새하얀 빛이 내리쬐었다.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가린 채 잔뜩 인상을 썼다.

이윽고 빛 사이에 검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알이 깨지듯 나를 감싼 빛이 제각각의 크기로 산산이 부서졌다.

***

죽어 있던 감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청각이었다.

누군가의 음성이 단조롭게 흘러들었고, 그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드디어 구분이 된다.

나긋하게 얘기를 하는 건 역사 과목의 페실라 선생님이고, 명랑한 목소리는 짝꿍인 쥴리다.

나는 쥴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허연 침 자국이 나 있었다.

졸지 않은 척하는 쥴리의 연기 실력은 훌륭했지만, 페실라 선생님의 예리한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쥴리, 아르벨라 부인께서 내가 통속 소설을 읽고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숙제를 내준 걸로 알고 계시더구나.”

“헛…….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그러니까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부인께 ‘소꿉친구와 하는 불장난’이라는 책은 수업 교재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단다.

부인께 책을 드리고, 오늘은 일찍 자도록 하렴.”

“……네.”

쥴리의 시무룩한 대답이 학부생들의 웃음소리에 파묻혔다.

쥴리는 얼굴을 사과처럼 물들이고는 입가를 쓱쓱 닦았다.

나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배 속이 텅 빈 사람처럼 허하기만 했다.

쥴리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샐쭉하게 말했다.

“너까지 놀리기야?”

사실 무엇이 우스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상념에 빠져 허우적대던 중이었다.

나는 펜으로 쥴리의 손등을 툭 건드리는 것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쥴리는 “쪽팔려…….”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빌만 베르거 4세는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어른들이 구두로 나눴던 혼담에 따라 열여섯 살 연상인 마가레트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부모님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맺어진 결혼 생활이 무탈하게 잘 흘러갔을까요?

두 사람이 밤낮 가리지 않고 싸우는 소리가 넓은 저택의 정원을 가로질러 담벼락을 넘어갔을 정도라는 야사도 있어요.

순탄하지 못한 결혼 생활로 지쳐 있던 빌만의 앞에 한 묘령의 여인이…….”

페르실 선생님의 강의가 귀 언저리를 맴돌다가 흩어져 버렸다.

나는 교과서에 깨알만 한 글씨로 적힌 ‘정략결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단어가 내 모든 신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젯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소리쳤던 단어였다.

‘당신과의 정략결혼이 내 인생을 처참히 짓밟았어.

제발 죽어…… 죽어 버려, 카밀리아!’

“이 뜻이었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때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던 칼리언 워렌이 집요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설마 내 혼잣말을 들었나?

내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뭘 봐.’

칼리언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작고 까만 뒤통수를 노려봤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있어.

강의 끝나면 왜 쳐다봤냐고 끝까지 추궁할 거다.

그런데 칼리언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조명 아래에 앉아 있는데 왜 저놈 머리만 저렇게 반짝반짝 빛이 날까.

워렌 가문의 수치라는 소문이 파다해도 워렌은 워렌인가 보다.

최고급 기름으로 매일 관리하겠지.

나는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묶어 버렸다.

***

쾅쾅쾅!!

누군가가 내 방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창문이 지레 겁을 먹은 것처럼 파들파들 흔들렸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풀벌레 소리가 음울하게 흘러들어 왔다.

“카밀리아-!

히끅, 카밀리아-!”

웬 남자가 엄마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의 혀 풀린 발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술 냄새가 나는 듯했다.

쾅!!

쾅쾅!!

문의 경첩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경첩이 떨어져 나가면…… 나를 지켜 주는 유일한 성벽인 방문조차 없이 살아야 한다.

나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제이든이랑 둘이서만 재미 보겠다는 거…….

어라, 카밀리아가 아니네?”

“……안녕하세요.

어머니 침실은 반대쪽인데요.”

남자가 문가에 기댄 채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부스스하게 흩어진 머리, 셔츠 없이 재킷만 걸쳐 입은 남자는 상체를 거의 드러내다시피 한 차림새였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아하!

네가 소피아구나!”

“소피아?”

“카밀리아의 하나밖에 없는 딸.

맞지?”

“하아…… 네, 뭐.”

이름을 정정해 줄 가치도 없는 남자였다.

저 남자가 나를 소피아로 알든 마리아로 알든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남자가 빨리 이곳을 떠나 어머니에게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머, 프랭크.

어디 있나 했더니.”

어머니가 비틀거리며 내 침실 앞으로 걸어왔다.

어머니는 몸이 다 비치는 슬립 위에 가운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걸음마다 철벅 철벅 젖은 소리가 났다.

그녀의 가운 밑자락이 술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어머니의 상태도 프랭크라 불린 저 남자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아니, 더 엉망이었다.

“내 사랑.”

프랭크가 어머니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어머니는 보란 듯이 그에게 안겨 들었다.

그러나 프랭크의 힘 풀린 다리가 어머니를 지탱하지 못하고 둘이 사이좋게 바닥을 굴렀다.

꼴값을, 꼴값을……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니와 프랭크는 술에 젖은 옷을 입고 바닥을 굴러도 허파에 바람 빠진 사람처럼 시시덕 웃어 댔다.

“얘, 인사드렸니?

프랭크 백작님이란다.”

“안녕하세요.”

아까 인사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안녕하세요.’라고 짧게 대답하는 편이 기력 소모가 덜했다.

그래서 한 번 더 인사했다.

“아까 받았어.

인사를 두 번 시킬 것까진 없지.

있어 봐.

내가 선물을 하나 줄게.”

“괜찮은데요.”

내 만류에도 프랭크는 제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타이트한 검은 바지와 옷의 기능을 상실한 재킷을 더듬어 봤자지.

프랭크는 급기야 재킷에 달린 금색 단추를 똑 떼어서 내게 건넸다.

나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진짜 금이야.

보석상에 갖다 팔면 맛있는 사탕 원 없이 사 먹을 수 있단다.”

“사탕 좋아할 나이는 지났…….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프랭크의 드러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어루만지자 프랭크가 어머니의 몸을 겹쳐 눌렀다.

나는 곧장 방문을 닫아 버렸다.

창문을 타고 넘어가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손바닥 안에 차가운 금속이 걸리적거렸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어쩌지…….”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씩 용돈을 주긴 하지만, 그 액수래 봤자 책 한 권도 살 수 없었다.

그마저도 잊어버리고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가지고 있자.

혹시 모르니까.”

비상금이 생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창문을 미리 열어 놓는 것과 같은 안정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아무튼 프랭크와 어머니의 꼴사나운 장면을 봐야 했던 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다.

아버지가 단추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빠악-!

두툼하고 단단한 손바닥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입 안에서부터 비릿한 피 냄새가 확 퍼지며 눈앞이 핑 돈다.

나는 쓰러지는 몸을 가눌 겨를도 없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이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대체 언제쯤 철이 들까.”

당신보다 한참 작고, 약한 나한테 손찌검하는 아버지는요?

“카밀리아의 손님과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 못 하는 거니?”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어요.

불가항력이었다고요.

아버지가 문의 경첩을 새로 달아줄 사람이었더라면 저도 끝까지 버텼겠죠.

“내 집안에 이딴 더럽고, 천박한 물건을 들이면 안 된단다, 리아나.”

그럼 어머니한테 먼저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는 그저 준 걸 받은 것뿐인데.

“내 딸은 맞아야 말을 알아 처먹지.”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기사단 장교인 아버지로서는 나름대로 살살 봐줘 가면서 패는 거였다.

하지만 어린 내 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위협적이고 잔악한 행위였다.

아버지에게만은 빌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아파서.

정말 맞다가 죽을 것만 같아서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무릎을 꿇고 제발 그만하라고 다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몇 번을 차이고, 밟히고 와중에 정신을 잃었다.

이대로 끝이면 좋으련만,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눈을 떠야 했다.

밤의 적막을 가르고 나의 절규가 울려 퍼졌지만, 누구 하나 안을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

부모님은 정략결혼을 하셨다.

그래서 사랑이 없다.

하지만 사랑이 없더라도 대외적으로는 화목한 가정인 척 위장하고 살았다.

속은 썩다 못해 구더기가 득실득실 끓어 넘치고 있지만.

어머니는 밤낮 가리지 않고 저택에 애인을 불러들였다.

애인들은 멀끔하게 차려입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아마 그것도 위장용이겠지.

하지만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짐승처럼 헐벗고 서로 엉겨 붙기 바빴다.

아버지는 평민 출신의 기사로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워 건국 이래 첫 평민 출신 장교가 되었다.

아버지는 수많은 젊은 기사들의 우상이며 왕에게 직접 서임을 받은 훌륭한 기사였지만, 평민이라는 신분에 지독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명예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작위는 자작뿐.

사지가 찢어져라 발버둥을 쳐봐도 신분의 벽은 두껍고 높기만 했다.

아버지는 더 높은 작위를 얻기 위해 어머니와 정략결혼을 했다.

두 분은 어머니가 성인이 되던 해에 바로 식을 올렸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잘살아 보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어머니의 남성 편력은 아버지 한 명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출신 탓에 오랫동안 귀족들과 지내오면서 늘 무시와 질타를 받았었다.

아버지가 어떤 공을 세워도 평민이라는 꼬리표는 늘 따라다녔다.

그런데 부인인 어머니까지 자신을 무시하자 억눌러 왔던 분노가 잔악성을 띠고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분노가 향한 곳이 나였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자식.

아버지의 소유이며, 어머니를 쏙 빼닮은 화풀이 인형.

풍비박산 난 집안이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랐다.

어머니도 엄한 가풍의 친정에 이 이야기가 새어 들어가길 원치 않았다.

억지로 고고하고 조신한 숙녀의 삶을 살다가 매일 술과 섹스에 취할 수 있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으니 이곳이 얼마나 천국 같았을까.

부모님은 자신들의 썩은 내면을 철저하게 감추고 화목한 가정인 척 연기했다.

그 대외적인 연기를 위해 내게 유명한 개인 교사를 붙여 주었다.

아버지가 직접 개인 교사를 알아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시는 국왕께서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연기에 홀라당 넘어간 게 그 배경이었다.

웃돈을 얹어 주고도 못 부른다는 유명한 개인 교사를 아버지께 직접 소개해 주겠다고 하신 거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딸이 뛰어난 스승에게 배우게 돼서가 아니라, 왕께서 아버지를 신경 써주셨다는 사실이 그를 들뜨게 했다.

개인 교사는 왕의 하사품이었으며, 훈장이었다.

“아 씨, 오늘 과외 있는 날인데 얼굴을 이 꼴로 만들어 놓냐.”

왕이 직접 소개해 준 개인 교사, 블래이크 자베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했던 게 아버지였다.

그런데 순간의 감정을 못 이기고 얼굴을 죽사발로 만들어 놓다니.

본연의 색을 찾아볼 수도 없을 만치 내 얼굴엔 알록달록한 멍 자국이 빼곡했다.

오른쪽 눈은 퉁퉁 부어서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고, 입술은 죄다 부르텄다.

누가 봐도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이런 몰골로 과외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과외를 빠지면 어제보다 더 얻어맞을 게 분명했다.

탁.

나는 손거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나는 하는 수 없이 머리카락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시선을 내리깔고 안으로 들어가니 블래이크의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자답게 뼈대가 굵직하면서도 길고 유려한 손가락.

둥근 손톱부터 그 위에 하얗게 자리한 반달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예쁜 손이었다.

아버지의 거칠고 투박한 손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귀를 못 알아먹습니까?”

“…….”

“아니면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블래이크가 나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늘 그랬듯 무언가 다른 일을 하면서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리자 은테 안경 너머로 내리깐 눈이 보였다.

“지각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죠?”

“선생님께서 묻기 전에 이실직고하라고요.

거짓말 했다가 들키면 숙제를 두 배로 내겠다고 하셨어요.”

“잘 아는데, 왜…….”

“…….”

블래이크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불편한 적막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탁.

그의 예쁜 손에 쥐어져 있던 펜이 책상 위를 굴렀다.

“리아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닿는 곳에 그의 검은 구둣발이 보였다.

“고개 들어.”

“…….”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날 봐.”

따스한 손이 내 턱을 가볍게 건드렸다.

손길이 부드럽고 다정해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감추고 싶은 얼굴이 눈부신 조명 위로 드러났다.

블래이크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동정 어린 시선을 건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동정받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그는 수학 문제를 푸는 사람처럼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나를 관찰했다.

“또 미첼 경이 그랬니?”

“아니요.

넘어졌어요.”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안 믿겨도 믿으세요.

전 계속 넘어졌다고 얘기할 거니까.”

“이리 와, 앉아.”

그가 내 등을 껴안으며 소파로 함께 이동했다.

블래이크는 나를 옆에 앉혀 두고 재킷 안 주머니에서 붉은색 연고 통을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상처를 건드릴 때마다 머리털이 쭈뼛 설만큼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 피하지 말고 참아.”

“으으…… 아파요.”

“맞는 건 더 아팠을 텐데, 왜 이건 못 참아.”

“넘어진 거…….

아!”

블래이크의 손이 입가를 스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블래이크는 내가 울먹이는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연고를 발랐다.

“이 조막만 한 얼굴에 연고 반 통을 썼네.”

블래이크가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남은 반 통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차라리 단검을 쥐여 주는 게 낫나.”

“왜요?”

“이 나라가 할리드 미첼을 죽이지 못하니까 너라도 찔러 죽이라고.”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버지를 죽이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나는 그 허무맹랑한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입가를 또 찢어 먹고, 연고를 발라야 했다.

“단검 정도는 얼마든지 구해 줄 수 있으니까 말만 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 나라에서 네가 살아남으려면, 성년식을 치러 독립하든가, 그를 죽이든가.

둘 중 하나야.”

크로바티움에는 귀족을 대상으로 한 아동 학대 범죄 처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건 성년식을 치른 귀족뿐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블래이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가지고 온 교재를 펼쳤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상 자신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블래이크가 내게 처음으로 연고를 가져다줬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어.

식인을 하는 야만족의 땅부터 태양을 두려워해서 밤에만 활동하는 소수 민족의 영토까지 전부 경험했지.’

‘자랑해요?’

‘햇빛을 못 봐서 허약해지는 사람들을 보고도 지나쳤어.

자신이 펄펄 끓는 탕 속의 재료가 되는 것도 모르고 불을 지피는 사람에게도 귀띔해 주지 않았어.’

‘알겠어요.

선생님이 제가 아는 선생님 중에 가장 인성이 더럽다는 거 인정해 드릴게요.’

‘근데 너는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

‘다른 놈들처럼 멍청한 건 똑같은데.

왜.’

블래이크가 나를 이만큼 챙겨 주는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나에게도 그가 이례적이긴 했다.

다친 몸에 연고를 발라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니면 우리 집으로 가는 건 어떠니?

주소를 알려 줄게.”

“싫어요.”

“싫어도 외워.”

그는 산수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내게 자신의 집 주소를 외우게 했다.

***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나’다.

내가 리아나 미첼이니까 리아나미첼이 가장 불쌍하게 보이고, 내가 쥴리라면 쥴리가 가장 불쌍하겠지.

나는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람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나만 특별하게 불쌍한 게 아니라고.

“저기 불쌍한 놈이 있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이 가장 험난하고,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녀석이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청승을 떨고 있었다.

“칼리언 워렌.”

“…….”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가가 터져 있었다.

또 남자애들한테 얻어맞았나 보네.

칼리언은 잘생겼고, 가문도 좋고, 공부도 잘했다.

비록 말더듬이긴 하지만.

남자애들은 칼리언의 답답한 말주변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웃기고 있네.

사실 칼리언이 가진 모든 것들을 질투하고 있으면서.

나는 칼리언의 옆구리를 뭉툭한 구두 앞코로 툭툭 건드렸다.

“엎드려 봐.”

“왜, 왜…….”

“엎드리라니까?”

“……아, 알았어.”

칼리언이 마른 잔디 위에 팔과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나는 구두의 버클을 풀었다.

까만 스타킹을 신은 발로 칼리언의 등을 밟았다.

움찔.

발이 닿자마자 그의 등이 심하게 요동쳤다.

“야.

움직이지 마.

나 떨어지면 너도 똑같이 떨어뜨린다.”

“미, 미안해…… 가만히, 이, 있을게.”

나는 그의 등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았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팔을 쭈욱 뻗었다.

둥그렇고 부슬부슬한 촉감이 손끝에 느껴지자 생선을 낚아채는 새처럼 빠르게 복숭아를 땄다.

그렇게 한 번 더 반복하니 내 양손엔 빛깔 좋은 복숭아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칼리언의 등위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이제 일어나도 돼.”

“…….”

“자, 먹어.”

칼리언이 무릎에 잔뜩 묻은 잔디도 털지 못하고 두 손으로 복숭아를 받아 들었다.

“고, 고마워…….”

나는 그의 옆자리 대신 바로 맞은편에 앉아 복숭아를 크게 베어 물었다.

순간 아물지 않은 입가 상처가 터지면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악 소리를 지를 뻔한 걸 모든 인내심을 끌어와 겨우 참았다.

아삭.

과즙은 입속에서나 달콤하지, 입가의 상처로 스며드니 맹독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칼리언에게 말했다.

“너도 먹어.”

“으, 응.

잘 머, 먹을게.

리안.”

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칼리언을 모든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가 복숭아를 베어 물기 위해 입을 벌리자마자 눈동자 위로 눈물이 맺혔다.

“아!”

“푸흡.”

“아, 아파서…….”

칼리언이 차마 상처는 더듬지 못하고 멀쩡한 입가 주변만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으휴.

그러니까 누가 맞고 다니래?”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제 블래이크에게 받았던 연고를 꺼냈다.

그런데 연고를 반 이상 써버린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텅 비다시피 한 연고 통에 두 쌍의 시선이 꽂혔다.

아, 모양 빠져.

이게 아닌데.

“그…… 다른 애들도 발라 주고 다니다 보니까.”

“아, 안 물어봤는데.”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얼굴 이리로 가져다 대.”

나는 블래이크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그의 입가에 연고를 톡톡 발라 주었다.

칼리언이 초조한 사람처럼 복숭아를 주물렀다.

두 뺨은 장밋빛으로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그.

그…….”

“고맙다는 말은 됐어.”

나는 스스로의 비겁함을 인정했다.

칼리언의 불행은 나의 양분이었다.

그는 나의 활기이자, 내 어둠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왕따였다.

그를 보살펴 줌으로써 내가 이 녀석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합리화했다.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리안, 너 입에 피…….”

주르륵.

묽은 액체가 턱까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무심코 손등으로 입가를 꾸욱 눌렀다.

“윽!”

“괘, 괜찮아?”

“네 걱정이나 해.”

그리고 뒤늦게 입가만 문제가 아니라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쥴리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리, 리안…….”

“다음에 남자애들이 또 괴롭히면, 나 불러.

내가 다 혼내 줄게.

그럼 간다.”

그의 불행으로 배를 채우려 했던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

오늘은 나의 불행이 더 컸던 탓이다.

괜히 내 처지가 더 비참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꼴만 되었다.

***

깊은 밤중이었다.

나는 활짝 열어둔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구름을 구경했다.

잠든 사람들을 깨울까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거리는 편안한 고요 속에 파묻혀 있었다.

“리아나 미첼!!”

그러나 재해는 밤낮 할 거 없이 예상치 못한 때에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순간 고민했다.

이대로 창문을 넘어 도망갈 것인지, 아니면 곧장 대답할 것인지.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포악한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나는 이불을 걷고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콰앙!

괴물이 기어코 내 방안까지 침범했다.

나의 유일한 방패였던 이불이 괴물의 손에 처참히 일그러졌다.

“아악!

아버지!”

대번에 머리채를 붙잡혔다.

아버지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힌 채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가 뺨을 얻어맞았다.

학습된 폭력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대단했다.

나는 저항을 멈추고 물먹은 빨래처럼 늘어졌다.

문밖으로 나오자 턱이 높은 계단이 나를 맞이했다.

각진 돌계단에 허리와 골반이 부딪치고 등이 쓸렸다.

아버지가 나를 내동댕이치듯이 놓아준 곳은 측백이 우거진 정원이었다.

그곳엔 나보다도 작고 어린 소년이 목검을 들고 서 있었다.

소년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얼어 있었다.

저 소년이라면 오다가다 몇 번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가 북쪽 지방에서 고아인 저 아이를 종자로 키우겠다며 억지로 끌고 왔다고 했다.

이름이…….

“랜서, 내 딸 리아나 미첼을 상대로 대련해라.”

랜서…… 발레라.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예?

하지만…… 장교님, 아가씨는 한 번도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여자 아닙니까.

못합니다.”

아버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저 반응 후에 이어질 행동이 무엇인지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서운 기세로 걸어가 랜서의 뺨과 머리를 후려쳤다.

랜서는 잠시 비틀거릴 뿐, 넘어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의 하체 근력에 감탄을 보냈다.

나보다도 키가 작은데 꽤 탄탄하구나.

“고양이랑 소꿉장난이나 하라고 너를 여기까지 데려온 줄 알아?!”

“…….”

“고양이도 못 죽이겠다 하고, 내 딸과 대련도 못 하겠다…….”

“…….”

잘하고 있어, 랜서.

아버지가 무작정 화를 낼 때는 그냥 닥치고 아무 말 안 하는 게 가장 현명한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으로 해.

속으로 말하는 게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지 차차 알게 될 거야.

욕을 퍼부어도 모르거든.

“그딴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기사가 돼서 전쟁에 나가겠다는 거야!”

“기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커헉!”

아버지가 랜서의 배를 걷어찼다.

쯧.

잘하다가 왜 삐딱선을 타.

랜서는 배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벌어진 입에서 질척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헤더슨-!”

아버지의 큰 몸집에 비례한 엄청난 성량이 터져 나왔다.

멀리서부터 집사장 게리 헤더슨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는 땀을 닦지도 급하게 숨을 헐떡였다.

“부르, 하아, 부르셨습니까?”

“힘 잘 쓰는 놈들로 셋 정도 데리고 와라.

빨리!”

“아, 알겠습니다!”

집사장은 꽁지 빠지게 뛰어와 놓고는 다시 엉덩이에 불이 붙을 듯 잽싸게 멀어졌다.

그리고 막 자다 깬듯한 하인 세 명을 데리고 왔다.

눈가에 졸음이 그득 붙어 있던 남자들은 아버지의 흉흉한 기세를 보자마자 정신을 바짝 차렸다.

“두 눈 똑똑히 뜨고 봐라, 랜서 발레라.”

“…….”

“네가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거야.”

아버지는 뒤에 있는 측백을 향해 턱짓했다.

“죽여라.

밟아서 뼈와 내장까지 전부 터뜨려.”

“자, 잠깐만요, 장교님!”

랜서가 급하게 외쳤다.

아버지가 말로 해서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측백을 향해 뛰어갔다.

하인 중 한 명이 랜서를 뒤에서 잡아챘다.

“안돼, 안돼요!”

집사장이 측백에서 꺼내 든 것은 옷가지에 담겨 있는 여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였다.

하인들이 고양이를 보고 주춤거렸다.

“다들 왜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지?”

음산한 목소리가 하인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집사장이 고양이들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를 악물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나는 더는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멈춰요!

안 돼, 안 돼!!

놔, 놓으라고!”

살점이 으깨지고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랜서가 피를 토해 낼 듯이 울부짖었고, 나는 그 처절한 외침 속에 스민 불행을 읽을 수 있었다.

남의 불행을 양분 삼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였지만 랜서의 불행까지는 씹어 삼킬 수 없었다.

도리어 토악질이 나왔다.

감은 눈 밑으로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차라리 이것이 피였더라면 이 상황이 덜 비극적으로 느껴졌을 거다.

입가에 닿은 액체는 지독하게 짠맛이 낫다.

발길질이 멈추고 죽음과도 같은 고요가 찾아들었다.

랜서의 흐느낌이 떠오르는 태양 빛 속에 녹아내렸다.

나는 감은 눈을 떴다.

동시에 붉은 무언가가 머리카락을 스치며 앞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투욱.

랜서 앞에 떨어진 것은 피와 살점이 그득 묻은 목도리였다.

“네가 나서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잘 기억해.”

“……흐윽, 크흡.”

“헤리슨.”

“네, 주인님.”

“요즘 리아나가 속을 썩여서 골치야.

침실에 웬 못 보던 값비싼 단추가 있길래 추궁했더니 손님의 물건을 훔쳤다는 거야.

아버지인 내가 직접 리아나를 혼내려니 마음이 약해지는군.”

“……알겠습니다.”

랜서가 죽이지 않은 고양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깨졌고, 랜서가 대련하기를 거부한 나는 집사장의 손과 발에 채이고 맞았다.

사흘 전, 아버지에게 맞았을 때보다 더 오랫동안 구타당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신없이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퉁퉁 부은 눈 사이로 랜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집사장을 뜯어말리려다가 멍청하게 얻어맞았다.

미련하긴.

맞는 데에도 면역이 생기나 보다.

이쯤 맞았으면 기절할 만한데, 아직 정신은 또렷했다.

가만히 누워서 시뻘겋게 변한 세상을 눈에 담았다.

“랜서 발레라.

아직도 기사가 되고 싶지 않아?”

“……되고, 끄흑, 되고 싶습니다.

대답하는 랜서의 두 눈에 절절한 증오가 들끓었다.

랜서는 울음 섞인 숨을 토해 내며 뻗쳐 나오는 분노를 다잡았다.

“일주일 뒤, 이 시각, 이 자리에서 리아나와 대련이 있을 거다.

목검이 아닌 장검을 쓸 것이고, 둘 중 한 명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찌르고 썰어라.”

아버지가 정원을 빠져나가자 하인들도 눈치를 보며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랜서는 피와 살점에 젖은 목도리를 찢을 듯이 부여잡았다.

소년의 눈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넘실거리는 살의를 숨기지 않으며 아버지의 뒤통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

랜서가 나를 업고 침실에 데려다주었다.

걷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를 꺼낼 체력도, 기력도,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

못 보던 꼬맹이네.

너도 카밀리아의 새 정부니?”

헐벗은 남자들이 랜서에게 질 낮은 농담을 건네며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랜서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술에 젖어 퀭한 여러 쌍의 눈이 새 놀림감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내가 그들의 먹잇감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 네 애인은 따로 있었구나.

그런데…… 얼굴이 왜…….”

“어??

너 소피아잖아.”

프랭크가 랜서의 앞을 가로막으며 내 얼굴을 살폈다.

“소피아가 누군데?”

“카밀리아의 딸 말이야.

세상에…… 아주 피떡이 됐는데?”

그는 평소보다 덜 취한 건지, 내 몸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카밀리아한테 얘기해서 의사를 불러 줄게.”

프랭크는 알몸 위에 얇은 이불 한 장만 걸친 채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프랭크가 사라지지 랜서도 다시 발을 옮겼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프랭크는 정말 의사를 보내 주었다.

어머니가 값을 치렀을 게 분명하니 프랭크가 보내 준 건 아닌가?

여하튼 내게 관심 한 자락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점수를 높이 산다.

물론 내 점수가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니다.

의사는 내 상태를 보고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저, 아픈데요.”

“왜 그렇게 됐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고용주께서 조금의 호기심도 갖지 말라고 이미 명하신 부분입니다.

말씀하셔도 제가 도와드릴 방법은 없습니다.”

“도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냥 치료해 달라고 한 건데.

그러려고 온 거잖아요.”

“…….”

의사는 빻아서 놓은 온갖 약초를 내게 먹이고, 피부 위에 바르고, 향까지 맡게 했다.

그 행위를 반복하다 보니 정말 놀랍게도 고통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이 약초만 있으면, 아버지의 폭력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이것저것 캐묻자, 의원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전부 알려 주었다.

의사는 치료를 끝내고 가방을 정리한 후 침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게 책 한 권을 건넸다.

“기초 약초학입니다.

원래는 제 조카 주려고 샀던 건데,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서…… 드립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또 외부의 물건을 들였다고 아버지께 모함당하고, 구타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일순 스쳤지만,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이 두려움을 이겨 냈다.

“……감사합니다.

저, 고용주가…… 어머니, 그러니까 카밀리아 미첼 맞죠?

저한테 책 주신 건 말씀 안 하실 거죠?”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만 보고하니까요.

하지만 대면할 것 없이 보고서만 작성하라고 하셨으니, 더더욱 말할 일은 없겠네요.”

지금쯤 어머니는 내게 의사를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 거다.

저 의사가 열심히 작성한 보고서는 벽난로 속 장작이나 되겠지.

“감사합니다.”

“그럼.”

***

아카데미는 이틀이나 쉬어야 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눈에서는 자꾸 진물이 나는 데다, 결정적으로 몸이 잘 움직여지질 않았다.

의사가 다녀간 후부터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멀쩡한 척 걷기는 힘들었다.

몸이 이 지경인데도 거를 수 없는 것도 존재했다.

바로 전하께서 특별히 소개해 주신 과외다.

절뚝거리며 문을 열자, 블래이크가 안경을 벗었다.

키가 큰 만큼 다리도 긴 그는 단 몇 걸음 만에 내 앞에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는 이제껏 본 표정 중에 가장 무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처럼 때리려나?

왜?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하긴, 내가 어디 잘못해서 맞은 적 있나.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다.

회까닥 돌아 버린 남의 정신 상태까지는 내가 조절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여태껏 정상으로 보였던 블래이크가 오늘 미친놈이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단 얘기였다.

“단검.

아직도 생각 없니?”

그가 나직이 물었다.

“그걸로 뭘 해요.

자살이라도 할까요.”

“네가 왜 죽어.”

“…….”

“죽여줄까.

말만 해.”

아버지를 죽여준다니.

너무나도 달콤하고, 황홀한 동화였다.

나는 내 허리 반만 한 어린애들이 부모님이 읽어 주는 동화책을 왜 그렇게도 좋아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웃지 마.

못생겼어.”

“저 선생님한테 예뻐 보이려고, 웃는 거 아니거든요.”

블래이크가 나를 부축해서 소파에 앉혔다.

그는 준비해 왔던 새 연고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고만 있을 뿐 뚜껑을 열지도 않았다.

내 온몸에 가득한 상처를 이 연고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블래이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연고.

저 주려고 가져오신 거 맞죠?”

“왜.

이거 가져가면, 또 얻어맞으려고?”

“아뇨.

줄 사람이 있어요.

저는 의사한테 치료를 받았는데, 아무런 치료도 못 받은 애가 있거든요.

걔 주려고요.”

“너 같은 애가 또 있니?”

나 같은 애는 도대체 뭐야.

랜서 발레라 걔보다는 차라리 내 처지가 낫지.

나는 의사한테 치료 받았다니까.

걔는 그냥 상처가 나을 때까지 이 악물고 참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랜서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쯤 더 맞았지만.

아무튼.

나는 연고를 받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블래이크는 다행히 별말 없이 연고를 넘겨주었다.

“리아나.

내가 아주 심각하게 고려 중인 게 있는데.”

뜬금없는 서두였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블래이크를 올려다보았다.

“죽이는 것도 못 하겠고 죽는 것도 싫으면, 도망치는 게 어때.”

“…….”

“도와줄게.

너도, 그 연고 주인도.”

***

어린 나와 랜서의 도주를 돕기 위해 블래이크가 브로커 역할을 자처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아블란이었다.

아블란으로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블래이크의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의 영지가 아블란의 해안가와 붙어 있어 밀항이 쉬웠으며, 아블란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백작 이상의 귀족에게 고용되면 시민권이 발급되는 나라였다.

게다가 고온다습한 기후 덕에 책에서만 보았던 수많은 약초가 많이 재배되는 곳이기도 했다.

블래이크의 친구이자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줄 랑브란 후작은 나와 랜서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블래이크에게 약속했다.

서명도 받아 놨다고 하니, 뒤통수 맞을 일은 없을 거다.

나와 랜서의 밀항은 은밀하고, 순탄하게 준비되었다.

이 계획은 아무에게도 알려선 안 될 비밀이었지만, 딱 한 사람.

마음에 걸리는 이가 있었다.

내가 없으면 완벽히 혼자가 될 불쌍한 아이.

나의 양분.

배부른 불행을 보여 주던 그.

칼리언 워렌.

나는 상처를 주렁주렁 매달고 나흘 만에 아카데미에 나갔다.

그리고 칼리언을 교정 뒤로 불러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아무에게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자신 있어?”

“으.

으응.”

“나, 곧 아블란으로 떠나.

앞으로…… 내 인생에 큰 이변이 없다면, 랑브란 백작의 저택에서 일하게 될 거야.”

“…….”

“만약 너도…… 이곳이 지긋지긋해지면.

넘어와.

나처럼 완전히 오라는 소리는 아니야.

그냥.

가끔 심심할 때 놀러 오라는 거지.

대신 너만 조용히 와야 해.

쥴리도 안돼.”

“나 치, 친구 없는 거 아, 알잖아…….”

“응.

이 말 하려고 불렀어.”

칼리언이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옷을 탁 놓았다.

“나도, 따, 따라갈래.”

“뭐?”

“이, 아블란에…… 가, 갈게.

가 있을게…… 너 기다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나, 나는 너 없으면, 매일, 이렇게 마, 맞고 살 거야.

부모님도, 나, 벼, 별로 안 좋아해서 괜찮아.”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솟았다.

충동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나의 양분을 힘껏 끌어안았다.

칼리언의 몸이 당황으로 뻣뻣해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너, 꼭 와.

네가 먼저 오겠다고 말한 거야.”

“응.

가서, 기, 기다릴 거야.

너.”

칼리언과의 약속 이후로 시간은 물속에 잠긴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느리게 흘러갔다.

빨리,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생의 첫 희망은 꽃망울이 터지기도 전에 처참히 짓밟혔다.

어둠이 아버지의 귀와 눈을 가려 줄 깊은 새벽.

나와 랜서는 컴컴한 장막 속에 숨어들어 저택의 후문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됐다.

블래이크가 미리 매수해 놓은 마차를 타고, 항구로 가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날 아침부터 내리는 폭우 때문에 길이 비에 잠겨서 도저히 마차가 다닐 수 없었다.

출항 시각에 맞춰서 항구에 도착하려면, 계획했던 출발 시각보다 훨씬 일찍 움직여야 했다.

아버지의 종자인 랜서는 아버지가 잠든 후부터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컴컴한 하늘 위에 있을 신에게 기도했다.

이 빗소리가 아버지의 귀에 자장가 같기를.

우리의 발소리를 덮어 주기를.

이때 창문 아래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닫아 두었던 창문을 재빠르게 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랜서였다.

랜서는 건물 벽을 타고 올라와 내 방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그의 몸에 이불을 둘러 주었다.

“아가씨.”

“아버지는?”

“침실에 들어가셨어요.”

나는 옷장 구석에 숨겨 두었던 가방을 챙겼다.

이 안엔 블래이크가 챙겨 준 승선권과 돈이 들어 있었다.

짐은 그게 전부였다.

“후문에 경비가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좋아, 가자.”

우리는 어둑한 밤길을 내달렸다.

거친 빗방울이 피부를 사정없이 때리는데도 아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추운 것도 몰랐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박동했으며, 두 발은 긴장으로 자꾸만 힘이 풀렸다.

무릎이 풀썩 꺾일 때마다, 랜서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저택이 이렇게나 넓었었나.

대륙을 횡단하는 것만큼이나 길고 험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후문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경비를 서는 하인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문이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랜서, 잠깐…….”

그 순간 누군가가 랜서의 얼굴을 가격했다.

집사장, 게리 해리슨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밤마다 몰래 빠져나가서 아가씨를 만나는 게 영 수상하다 싶었어.

종자 주제에 아가씨께 삿된 마음을 품어?

건방진……!”

집사장이 랜서를 엎어 놓고 발로 무자비하게 밟기 시작했다.

나와 랜서의 만남을 야반도주 모의가 아니라 데이트로 오해한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짐이 하나도 없었으니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그래…… 오해하게 내버려 두자.

도망치다가 들킨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억!”

누군가가 내 손가방을 우악스럽게 뺏었다.

살이 손잡이에 쓸리며 뜨거운 통증이 잔잔하게 남았다.

“아, 아버지…….”

빗물이 입 안을 침범하는데도 입술이 속절없이 벌어졌다.

가쁜 숨이 튀어나왔다.

비를 흩뿌리는 검은 구름 아래에, 아버지가 흉흉한 시선으로 내 정수리를 찍어 내리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위압감과 공포심에 숨통이 막혀 왔다.

내 머리를 수도 없이 후려쳤던 손이 가방을 여는 순간 신이 죽었다.

단검.

받아 둘걸.

***

나는 그 길로 저택에 감금당했다.

나와 랜서의 야반도주 시도는 아버지의 낮은 자존감을 더욱 처참히 짓밟아 놓았고, 아버지는 우리를 용서하지 못했다.

잿빛 돌로 쌓아 만든 감옥 같은 창고에 가만히 묶여 있으면, 앞을 지나다니는 하인들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과외 선생이 또 찾아왔다지?

아가씨한테 승선권을 준 것도 그 과외 선생이라며.”

“쉬…… 입조심해.

주인님 앞에서 그런 소리 했다간, 손가락 한두 개 잘리는 거로 안 끝나.

모르긴 몰라도 목이 날아가거나 혀가 뽑힐걸.”

“벌써 2년째 찾아오고 있으니까 그러지…… 지치지도 않아.

우울증 때문에 타국으로 요양 보냈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고 갈 것이지.”

아버지는 우울증에 걸린 딸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불쌍한 아비인 척 연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딸 시늉을 하던 화풀이 인형이 아닌, 진짜 화풀이 인형으로 전락했다.

그는 유서 깊은 귀족들에게 수모를 당하거나 어머니가 다른 남자들과 밤을 보낼 때마다 차오르는 분노를 내게 풀었다.

열 손가락 중 손톱이 제대로 남은 손가락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인들의 주절거림도 들리지 않았고, 아버지가 처음 듣는 귀족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할 때도 귓전이 웅웅거리기만 했다.

그 창고 한구석에는 랜서도 나처럼 발에 족쇄를 찬 채 묶여 있었다.

그나마 랜서는 나처럼 얻어맞지는 않는다.

가끔 나를 때리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당했지만, 그는 랜서가 쓰러지기 직전에 폭력을 멈추었다.

“아가씨, 드세요.”

손바닥만 한 접시에 묽은 누에콩 죽이 담겨 있었다.

랜서는 햇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창고에서 지내면서도 날이 갈수록 키가 껑충 자랐다.

나보다 작았던 아이가 2년 사이에 나와 키가 얼추 비슷해졌다.

아니, 더 큰가?

나는 내 앞으로 내밀어지는 누에콩 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루에 들어오는 음식이라곤 누에콩 죽과 물 한 컵이 전부였다.

하루 세 번.

그중 두 끼는 내가 먹고 한 끼만 랜서의 몫이 되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내 입에 랜서가 죽과 물을 넣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질려서 못 먹겠어.”

나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내는 죽이 담긴 그릇을 보며 말했다.

창고 안을 가득 채운 먼지 때문에 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목소리를 낼 때마다 바늘을 집어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따가웠고,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랜서는 물이라도 드시는 게 어떠냐며 내게 끊임없이 권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계속 고개를 젓자 그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게 곁눈질로 보였다.

랜서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진 반면 내 손발은 자유로웠다.

아버지는 나를 때릴 때만 내게 수갑을 채워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하지만 수갑과 족쇄가 있건 없건 부러진 뼈와 찢어진 근육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랜서.

우리 그냥 같이 죽을까.”

그건 창고에 갇힌 이후 내가 가장 침착하고 이성적인 어투로 꺼낸 말이었다.

랜서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나는 누에콩 죽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그리고 접시를 그 위에 내리쳤다.

깨진 접시 조각 중 가장 큰 것을 랜서의 손에 쥐여 주고, 나도 하나를 쥐었다.

“랜서.

어디를 찔러야 한 번에 죽을 수 있어?”

“…….”

“너도 모르는구나.

그럼 내가 먼저 해보고 나서 숨이 끊어지기 전에 말해 줄게.”

흐릿한 시야가 오늘은 유독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접시의 뾰족한 곳을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반대 손으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이쯤일까.

“아가씨!”

이때, 철컹- 하면서 차가운 쇳소리가 나더니 랜서가 나에게 안겨들었다.

손에 들려 있던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시선은 조각을 따라 움직였다.

“크흑, 그러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아가씨를 꺼내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아 주세요…….”

그의 얼굴과 맞닿은 어깨가 뜨겁게 젖어 갔다.

랜서는 창고에 갇힌 이후로 눈물이 부쩍 많아졌다.

어려서 그런가.

나는 서툴게 그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물었다.

“날 꺼내서 어디로 데려갈 건데?”

“…….”

“아블란?”

“어디든, 어디든…… 아가씨가 원하는 곳이면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죽음보다 내가 접시를 깼단 얘기를 전해 들은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갈굴까 상상하는 게 더 두려웠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건, 랜서가 너무 서럽게 울고 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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