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징조(1) (9/14)

 9.징조(1)

랜서의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미루어 두었던 꿈속의 단서를 되짚어 보았다.

우선, 폐기해야 할 것은 꿈속 남자와의 잠자리였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남자와 몸을 섞던 꿈에서 필사적으로 기억하려고 했었던 몸의 감각들.

블래이크와의 거친 정사로 전부 뒤죽박죽 섞여 버린 탓에 도저히 써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몸의 기억으로 흐꾸웩의 아버지를 찾겠다는 그런 무모한 방법은 두 번 다시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방법을 버리고 나니 아이의 아버지로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자상과 연고 통.

하지만 블래이크의 복근에는 자상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블래이크는 흐꾸웩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소리인가.”

하지만 상처는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기에 자상의 흔적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블래이크와의 거친 정사로 얻은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반드시 칼리언의 품이 아니더라도 기억에 관한 꿈을 꿀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체력이 고갈되어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을 때는 겨우 눈만 붙였다 일어날 뿐이지 숙면을 취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이번엔 숙면과 함께 기억에 관한 꿈을 꿨던 걸까…….

달랐던 점이라고는 딱 하나였다.

섹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라고 자신을 달래 봐도 특이점이라고는 정말 그거 딱 하나였다.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문란한 몸이 된 이유가…… 단순히 성적 쾌락이 좋아서가 아니라 숙면을 취하기 위해서였다면…… 만일, 정말 그렇다면 내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섹스 없이는 잠을 못 잔다니.

절망이 불길처럼 번져 왔다.

아니야, 아닐 거야.

이 불면이 차라리 기억 상실처럼 출산의 후유증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니겠지, 흐꾸웩아?”

흐꾸웩의 이마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흐꾸웩은 내 불안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입만 냠냠 오물거렸다.

“됐어.

너한테 뭘 바래.”

그리고 지금은 오랜 불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번에 꾼 꿈속의 기억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흐꾸웩의 아버지와 내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이미 여러 차례의 꿈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꿈속에서 나를 끌고 가던 남자는 여러 번 등장했던 흐꾸웩의 아버지와는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압도적인 두려움과 공포로 나를 짓밟는 느낌이었다.

내 손목을 옥죄었던 수갑.

뼈까지 얼려 버릴 정도로 차가웠던 감촉.

꿈에서 깨어난 지 반나절이 지났건만 아직도 손목이 시큰거렸다.

무심코 손목을 매만지자 은색 팔찌가 손끝에 걸렸다.

내가 팔찌의 둥근 몸체를 손으로 덧그리고 있는데, 흐꾸웩이 자세가 불편한지 칭얼거렸다.

“아, 미안해.”

나는 얼른 흐꾸웩을 고쳐 안았다.

작은 얼굴 위에 생겼던 심통 난 주름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스르르 퍼져 간다.

나는그런 흐꾸웩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뭐였을까.

그 남자도…… 흐꾸웩의 아버지였던 걸까?”

나는 꿈속의 남자를 두려워했으며, 남자는 나에게 짙은 증오와 혐오를 드러냈다.

가축을 대하듯 나를 우악스럽게 휘어잡던 손길.

흐꾸웩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사채라도 썼었나.”

사채 빚을 갚기 위해 칼리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칼리언의 물건을 훔쳐서 빚을 탕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흐음-.”

머릿속에서 소설 같은 이야기가 끝도 없이 흘러갔다.

어두운 거리를 무작정 걷던 와중에 차가운 것이 뺨을 톡, 하고 건드렸다.

“아…….”

순간 머릿속을 뒤덮고 있던 상념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나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낮게 흘러가던 구름이 달을 비껴가자 머리 위로 차가운 빛이 떨어졌다.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진눈깨비가 재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눈에 젖은 땅에서 축축한 새벽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하얗게 젖어 드는 새벽의 한가운데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폐허가 되어 버린 세계에서 길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정신은 열여섯에 가까웠지만, 스물여섯처럼 보여야 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솔직히……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자살하지 않고 버틴 게 얼마나 의젓한가.

나는 폐가 시려올 때까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얼굴 위로 쏟아지던 진눈깨비가 딱 멈추었다.

대신 돌연 나타난 어둑한 그림자가 달빛을 가리고 내 두 눈을 덮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익숙한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비릿한 피 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랜서?”

“사신은 망자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죠.”

모두가 잠든 새벽의 한 가운데서 마주친 사람은 랜서였다.

그러나 이전에 보아 왔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어딘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손끝으로 살짝 건드는 순간 살얼음처럼 힘없이 무너져 버릴 것 같이 연약한 느낌이었다.

“랜서, 너 괜찮아?”

랜서의 눈동자는 재가 낀 듯 어딘가 탁해 보였다.

그는 환각에 빠진 사람처럼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을 하다 온 건지, 고운 뺨에 방울방울 피가 튀어 있었다.

랜서가 불쑥 손을 들어 올려 내게 뻗는 순간, 아예 피로 범벅이 된 그의 두 손이 보였다.

흠칫.

나는 본능적으로 흐꾸웩을 보호하듯 품에 깊숙이 안고, 도망치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의 랜서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직감이 내 몸을 단단히 붙들었다.

“저는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내 마지막 길을 안내해 주는데, 어떻게 따라가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랜…….”

“아이고- 부단장님!!”

밤의 고요를 가르고 우렁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달빛을 등지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플로란?”

“세상에, 아가씨!

여기는 어떻게…… 아휴, 갑자기 왜 마차에서 뛰어내리셨나 했더니만, 아가씨 때문이군요.”

“……마차에서 뛰어내려요?”

내가 기겁하고 묻자 플로란이 한숨과 함께 말을 아꼈다.

“부단장님, 날이 춥습니다.

이만 마차로 돌아가시죠.”

블래이크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플로란의 두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플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지만 랜서를 마차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무언의 간청이었다.

마침 나도 랜서의 저택으로 가던 중이었으니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마차로 향하는 내내 랜서의 눈빛은 내게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의 벽을 못 보고 몇 번이나 머리를 부딪칠 뻔한 것을 나와 플로란이 번갈아 가며 잡아 세웠다.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온 걸까.

그러나 놈에게서 진동하는 강렬한 피 냄새 때문에 술 냄새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마차로 올라타자마자 훈훈한 열기가 얼어 있던 피부를 녹였다.

자리에 앉은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랜서와 플로란은 여전히 밖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들어오라고 눈짓하자 플로란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랜서를 가리켰다.

상관이 마차에 오르기 전에는 자신도 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랜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랜서의 몽롱한 눈이 움찔 떨렸다.

나는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이리 와.

얼른 집에 가자.”

말을 마치기 무섭게 요지부동이던 랜서가 홀린 듯이 마차에 올랐다.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았다.

랜서는 나와 허벅지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 앉았다.

옆에 자리 많은데…… 하지만 머리에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이놈에게 옆으로 가라고 말을 해봤자 도무지 들어 먹을 것 같지 않았다.

플로란이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마부석 창문을 쿵쿵 두드렸다.

신호를 받은 마부가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말을 몰았다.

덜컹, 덜컹.

기이한 적막 사이로 간간이 플로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얘기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랜서의 눈치를 보며 다시 꾸욱 다물기를 반복했다.

나 또한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랜서가 왜 꼭 몽유병 환자처럼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도 궁금했고, 그의 두 손과 얼굴을 적신 피의 정체 또한 알고 싶었다.

랜서의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이 얕게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감정적인 동요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그의 표정이 마치 시체처럼 건조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흐꾸웩을 플로란에게 건넸다.

플로란은 당황해하며 흐꾸웩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얼른 흐꾸웩을 받아 들었다.

“어디 아파?”

나는 랜서의 손을 겹쳐 잡으며 물었다.

“행복합니다.”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만큼.”

“죽긴 왜 죽어.

집에 가자.

도착할 때 깨워 줄 테니까 한숨 자.”

다른 손으로 랜서의 뺨을 감쌌다.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싶었으나, 덩치 차이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대신 내 정수리에 그의 얼굴을 기대게 했다.

랜서는 순순히 내게 몸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손의 떨림도 점차 잦아들더니 이윽고 뚝 멈췄다.

“푸하……!

질식사하는 줄 알았습니다.”

플로란이 살았다는 듯 숨을 탁 터뜨렸다.

“상관 때문에 긴장해서 죽는 것도 산재처리 되는지 단장님께 여쭤봐야겠습니다.”

“랜서…… 얘, 대체 왜 이래요?

손에 묻은 피는 다 뭐고…….”

쌓아둔 둑이 터진 듯 연신 혼잣말을 내뱉던 플로란이 멈칫하더니 생각이 많은 듯, 근심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는 왜 이 밤중에 혼자 다니시는 겁니까.

수도의 치안이 좋다고는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모르는 겁니다.”

“랜서의 저택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마차 부를 돈을 아낄 겸 조금 일찍 출발했거든요.”

“그렇다고 이 새벽에…… 미리 편지라도 보내 주셨으면 돈이든 마차든 보냈을 텐데요.

이럴 때 부단장님 돈 좀 쓰게 만들어야죠.

포상금이다 상여금이다 잔뜩 받아 두면 뭐 합니까.

길가에 널린 돌멩이만도 못한 취급을 하시는데요.

새로 지은 금고가 가득 찰 때까지도 돈을 안 쓰시니까, 전하께서 금 대신 땅을 주면 작물이라도 키우겠지 하고 영지까지 하사하셨습니다.

뭐, 덕분에 멀쩡한 땅덩어리를 통째로 버리게 생겼습니다만.”

칼리언에게 진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저 치기 어린 소리인 줄 알았는데, 무턱대고 한 말은 아니었구나.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랜서에게 빚을 대신 갚아 달라는 말은 꺼내진 않았겠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나, 내가 궁금한 것은 랜서의 재산 보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얘가 대체 왜 이 꼴인데요?”

“대체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

“부단장님께서 전장에 나가 계셨던 1년 동안, 좋지 않은…… 습관이 생기셨습니다.”

“습관?”

“그…… 정신 질환이라고 해야 할지, 중독이라고 해야 할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나는 10년 동안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으며, 섹스를 하지 않고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즉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부단장님이 나쁜 분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시죠?”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요.”

“아가씨니까 믿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웬만한 일 가지고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니까, 그냥 말해요.”

“…….”

플로란은 말을 하려다가도 막상 입을 떼면 다시 방어적으로 굴기를 반복했다.

그의 망설임을 기다려 주기에 내 인내심이 너그러운 편이 아니었다.

나는 콧김을 길게 내뿜고는 그에게 맹세하듯 또박또박 얘기했다.

“약속할게요.

그 어떤 얘기를 들어도 호들갑이나 유난 떨지 않을 거고, 도망가지 않을 것이며, 랜서를 이상하게 보지도 않겠다고요.”

“……정말이시죠?”

“만일 내가 말한 것 중 하나라도 어긴다면, 삭발을 하고 플로란 경의 집에 조명으로 여생을 보낼게요.”

내가 마음을 다해서 말하자 플로란도 확신이 서는 듯 보였다.

그는 목울대를 크게 움직여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속삭이듯이 고백했다.

“부단장님께서는 매일 밤 살인을 하십니다.”

***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외침이 나에게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마부가 문을 활짝 열었으나 도통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아가씨……?”

플로란이 다리를 뻗어 내 발을 밀었고, 나는 절대 이 마차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발가락에 힘을 주어 버텼다.

“왜…… 안 내리십니까?

예?”

플로란이 내 발을 밀어내느라 이를 악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달리 들를 곳이 있었어요.”

“아까는 부단장님 저택으로 가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일부러 꼭두새벽부터 출발하셨으면서, 또 어디를 가시려고요.”

“아주 중요한 약속이 생각났거든요.

친구를 만나러…….”

“이 새벽에요?

그리고 친구라니…… 하하.

수도에 아시는 분도 없지 않습니까.”

플로란이 웃으면서 비수를 꽂았다.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게 통탄스러웠다.

그러나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매일 살인을 일삼는 이놈과 함께 저택에서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아니, 아니, 플로란.

잠깐, 밀지 마요.”

“걱정 마세요.

설마 아가씨를 해치실까요.

물론 저는 부단장님께서 던진 철퇴에 머리가 박살 날 뻔했습니다만…… 하하.”

“무시무시한 말 하면서 웃지 마요!”

플로란을 향해 소리를 치는 순간, 랜서가 조금 뒤척였다.

“으음…….”

“……!”

나와 플로란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틀어막았다.

플로란이 한 손을 뻗어 흐꾸웩의 입도 가렸다.

랜서가 다시 잠잠해지자 그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얼른 부단장님을 데리고 들어가세요.

피바람 불기 전에.”

“지금 경만 피바람에서 벗어나면 답니까?

저는요!

피바람을 맞다 못해 맨몸으로 끌어안아야 하잖아요.”

“제가 장담하는데, 부단장님은 아가씨 손끝 하나 못 건드려요.”

“오늘도 넷이나 죽였다면서요!”

피칠을 한 손이 내 손가락 사이로 얽혀 든다.

잠꼬대처럼 내 손을 붙잡는 손길은 애틋했으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피가 내 손에도 묻어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뜨거운 물에 손을 빡빡 씻어 내고만 싶었다.

“다 중범죄로 끌려온 사형수들이었다니까요.

10세 이하의 아동을 납치 후 성매매를 시킨 쓰레기 집단이라고요.”

“그건 그렇지만……!”

“빨리 데리고 들어가세요.

저도 퇴근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요즘 애들이 아버지 없으면 잠도 안 잔다니까요.”

나는 이마를 짚으며 침음했다.

플로란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여기서 괜히 실랑이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안다.

알지만…….

“아가씨, 부탁드립니다.”

“…….”

“부단장님이 아가씨를 해칠 분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플로란이 눈꼬리를 처연하게 떨군 채 말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내 손을 꼬옥 쥔 랜서의 손을 눈에 담았다.

굳어 버린 피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긴 하지만, 플로란의 말처럼 나를 공격할 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 정말 미치겠네.

나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고는 눈을 부릅떴다.

“만일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죽어서도 저주할 거예요.

지옥에서도 따라다닐 거라고요.”

이를 악물고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하자 플로란의 표정이 밝아진다.

“절대로,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마부와 플로란이 랜서의 팔을 한쪽씩 잡아 침대 위까지 겨우 옮겨다 놓았다.

잠에 빠져든 랜서는 긴 속눈썹 때문인지 아이처럼 무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청초하게 눈을 내리감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방금 전 네 명의 사형수를 죽이고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부가 먼저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어 플로란이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인사하는 순간 나는 무심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놓으시죠.

아버지를 기다리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

“이렇게 저를 사지로 내몰고 가시면 마음이 편안하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푹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부단장님의 약 기운도 가시고, 광증도 가라앉아 있을 겁니다.”

“잠깐만요, 약 기운이라뇨?”

“아…….”

나는 플로란이 아차 하는 얼굴을 정확히 보았다.

그래, 환각을 보는 것처럼 몽롱한 랜서의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플로란은 맹렬하게 추궁하는 내 눈을 피하고 딴청을 부렸다.

나는 그런 플로란의 손등을 힘껏 꼬집었다.

“악!”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 약은 아니죠?”

“……맞을걸요.”

“별, 미친…….”

플로란이 우물쭈물하며 자초지종을 실토했다.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플로란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내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자 그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게…… 단장님께서 아편이라도 태우라고 하셔서…….”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왕궁 기사단이 마약초를 태우면 어쩌자는 거예요?!”

“아가씨께서 부단장님이 광증이 돋았을 때의 모습을 못 보셔서 그렇습니다.

오죽하면, 단장님께서 마약초를 태우라고 명하셨을까요.

부단장님 집무실에는 날붙이가 하나도 없는 거 아십니까?

살육을 하지 못하면 자해까지 일삼으니까, 미리 치워 버린 겁니다.

옷을 벗겨 보면 아실 겁니다.

온몸의 상처가 말도 못 해요…… 전쟁터에서 생긴 상처보다 더 지독합니다.”

“…….”

“혹시 몰라서 말씀드립니다만, 여분의 마약초는 책장 맨 아래 칸에 놔뒀습니다.

필요하실 때 태우세요.

광증이 눈에 띄게 잦아드니까요.”

“이게 대체 무슨…….”

“그럼 내일 부단장님을 모시러 올 때 뵙겠습니다.”

플로란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가 워낙 날렵하게 사라지는 바람에 잘 꺼지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쿵.

방문이 닫히자 온몸의 힘이 탁 풀렸다.

나는 랜서가 잠들어 있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칼리언, 블래이크, 랜서 세 놈 중 어떻게 정상이 단 한 명도 없냐.

“흐꾸웩아, 너 꼭 아빠 찾아야겠어?

이런 아빠들이라면 없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마차 안에서 플로란이 왜 그렇게 한숨을 많이 쉬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지금의 나도 곤히 잠든 랜서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답이 없는 인생이군.

나는 빈방에 흐꾸웩을 눕혀 놓고, 욕실을 찾아 나섰다.

랜서의 저택에는 단 한 명의 사용인도 보이질 않았다.

출근도 플로란이 직접 데리러 온다고 하는 거 보면, 개인 마차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광증 때문인가.”

나는 일단 깨끗한 수건을 찾아 물에 적신 후 침실로 돌아왔다.

랜서의 얼굴 곳곳에 튄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 내는데 순간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입가를 닦아 내던 손을 멈추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잠에서 깨어난 건 아니었다.

손에 범벅이 된 피까지 전부 닦아 내자 하얗던 수건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피에 젖은 수건을 용도를 알 수 없는 텅 빈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랜서를 등지고 앉아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광증이라…….”

플로란이 말하기를 광증의 기미는 5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건 작년, 전쟁에 참전한 직후부터다.

‘낮에도 그리 온화하신 분은 아니지만, 밤이 되면 정도가 달라집니다.

눈빛부터가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다니까요.

아가씨와 같이 밤을 보내고 나면 며칠 잠잠하다가도, 또 시간이 지나면 포악해지십니다.’

‘……어째서 밤에만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거죠?’

‘부단장님께서는 오랫동안 불면증을 앓아 오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미치광이처럼 사람을 찌르고, 내장을 뜯어내고, 피를 흠뻑 뒤집어써야 겨우 잠에 빠져드십니다.

그리고 나선 또 며칠 잠잠하고요.’

‘…….’

‘1년 동안 아가씨를 만나지 못했을 때는 정말…… 어휴.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밤에 격전이 일어났을 땐 물 만난 고기처럼 적군을 썰고 다니시지만, 전투가 없는 날에는 아군까지 죽이려 드셨어요.

나중 가서는 부단장님의 살의를 해소할 용도로 적군을 잡아서 우리에 가둬 두기도 했습니다.’

랜서가 내게 숨겨온 비밀은 차마 듣기 힘들 만큼 끔찍한 얘기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불면증’이었다.

살인을 하지 않으면 잠에 빠져들 수 없다.

어쩐지 내 상황과 조금 비슷했다.

물론 나는 살인처럼 끔찍한 조건은 아니었지만.

“내 불면의 원인이 랜서와도 연관이 있는 걸까.”

나의 불면이 출산 후의 후유증 같은 게 아니라 원래 지니고 있던 증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커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열여섯의 나는 잠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지, 불면증 때문에 고생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럼 이 불면증은 내가 모르는 10년 사이에 생겼다는 건데…….

“……단서가 더 필요해.”

나는 랜서가 잠든 틈을 타 그의 집안을 뒤지기로 했다.

블래이크의 집에서 내 일기장을 발견했던 것처럼 그의 집에도 나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랜서의 집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가구 대부분에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흔한 장식품 하나 놓여 있지 않은 삭막한 복도를 걸었다.

이 저택은 랜서가 직접 사들인 것이 아니라 포상금의 개념으로 하사받은 듯했다.

주인으로서의 애정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집이었다.

문을 여는 방마다 비어 있었다.

본관 옆에 방치된 별관은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

발견은 갑작스러웠다.

한참을 소득 없이 돌아다니다가 이번에도 별 기대 없이 문고리를 당겼는데, 웬걸.

수많은 서류 뭉치가 바닥에 깔려 있고, 벽에는 스크랩된 신문이 빼곡한 공간이 나타났다.

“집무실인가.”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함부로 들어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왕 뒤지기로 한 거, 여기서 소극적으로 굴 수는 없었다.

대신 방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서류 한 장까지 원래 모습대로 보존해 놓기 위해서였다.

스크랩 되어 있는 신문 쪽으로 먼저 눈이 갔다.

‘최악의 폐륜 범죄.

미첼 장교 부부를 살해한 외동딸 리아나 미첼.’

“…….”

덜컥.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신문이 발행된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었다.

내가 살인 사건이 일어난 후 5년이나 수배된 채로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왕국 전역에 내 수배 전단이 뿌려졌는데 어떻게 5년씩이나 숨어 다녔던 거지.

나는 거칠게 요동치는 가슴 부근을 손바닥으로 누른 채 기사를 마저 읽어 내렸다.

“장교 부부의 외동딸 리아나 미첼은 할리드 미첼과 카밀리아 미첼을 살해 후 범행에 대한 참회와 반성 없이 도주했다.

범행의 중대성과 패륜성을 볼 때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기사의 내용은 나를 향한 비난의 소리를 옮겨 적은 것이 전부였다.

내겐 살인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신문 기사를 뒤로 하고 부모님의 살인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서류를 어지르지 않겠다던 다짐은 무력하게 흩어져 버렸다.

놀랍게도 랜서의 집무실에 남아 있는 모든 자료는 부모님의 살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의 나의 행적을 엿볼 수 있는 메모도 남아 있었다.

이건 단순히 왕국의 기사로서 존속 살해범을 찾기 위해서 모아 놓은 자료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를 알아내려 한 거다.

지금의 나처럼.

나는 서랍의 오래된 수첩을 열었다.

랜서의 필체로 추정되는 메모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우발적 범행으로 보이나 치밀한 계획 범죄.

7cm의 단검이 미첼 부부의 급소만을 피해 열일곱 차례 관통함.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주려던 것으로 추정.」

「미첼 장교의 비리가 연달아 적발.

영지민들을 대상으로 세금 착취 및 횡령, 기사단원 부정 등용, 기사단의 기밀 사안으로 모종의 거래를 한 정황이 발견됨.

재산이 전부 몰수되는 사건이었으나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음.」

「미첼 가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이 의문사를 당하거나 타국으로 망명하는 일이 생김.」

「이대로 목격자는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수첩에 적힌 내용을 읽을수록 아연해졌다.

나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부모님을 죽인 진범이 따로 있었던 거다.

그리고 랜서는 그 진범을 찾기 위해서 정보를 모았던 거고.

수첩을 넘기는 손이 세차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재산을 쓸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존속 살인을 한 범죄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상속권이 박탈당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내가 존속 살인을 한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내게 떨어질 재산은 땡전 한 푼도 없었던 거다.

재산 몰수라니.

“우리 아버지가……?”

말도 안 된다.

이건 분명 누군가가 우리 가문을 몰락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이 틀림없었다.

“왜?

대체 누가……!”

머리칼을 아프게 쥐어뜯어 봐도 멍청한 머리통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불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입을 열면 피를 토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설움과 분노가 숨결에 섞여 거칠게 흘러나왔다.

나의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린 놈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그림자조차 밟지 못하는 처지가 한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왜!”

나는 강박적으로 수첩을 넘겼다.

랜서의 수첩에는 그 당시 살해 현장에 있었던 사용인을 만났으나 하나같이 죽거나, 사라져 버렸다는 내용만이 가득 이어졌다.

절망이 온몸을 활활 태우려던 찰나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유일한 목격자 확인.

게리 헤더슨.

섣부른 접근은 금물.

기회를 본 후 찾아가자.」

유일한 목격자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것이 수첩에 적힌 마지막 내용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 부분을 내 육아 수첩에 옮겨 적었다.

게리 헤더슨이라면 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우리 집안의 집사장이었으니까.

그는 내가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분명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육아 수첩을 끌어안고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바로 잡을 수 있어.

괜찮아.

할 수 있어.”

“아가씨.”

얼음장 같은 음성이 내 몸의 열기를 단번에 가라앉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랜서가 서 있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칼날처럼 꽂히는 시선에 몸이 관통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랜서가 긴 다리를 뻗어 저벅저벅 다가왔다.

“꿈이 아니었어.”

그가 읊조리듯 말했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시선이 질척하게 얽혀 들었다.

그의 품에서 옅은 피 냄새가 났다.

나는 뒤늦게 잔뜩 어질러진 집무실이 신경 쓰였다.

급한 대로 내 허벅지 옆에 놓인 랜서의 수첩을 조심조심 뒤로 밀어서 감췄다.

그 사이 랜서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목덜미가 오싹해질 만큼 차가운 손이었다.

“제 앞에서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내가 어떤 표정인데?”

“초조해하지 마세요.

겁먹은 눈으로 저를 보지 마세요.

저는 아가씨에게 가장 하찮은 존재이며, 약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의 눈이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등 뒤로 따스한 여명이 세상을 적셔 오고 있었지만, 아직 랜서의 얼굴 위까지는 드리우지 못했다.

약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건지 랜서는 자꾸만 두 눈을 끔뻑이며 내 얼굴을 붙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턱뼈와 뒤통수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랜서는 내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선으로, 악력으로 나를 제 앞에 붙들어 두려고 했다.

“랜서.”

약에 취한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다정한 손길이 놀란 내 눈가를 어루만지고, 살짝 벌어진 입술을 지분거린다.

내 얼굴 위에 드리운 초조함을 지워 나가는 것만 같았다.

강박적으로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진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랜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이런 간단한 사고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약 기운에 잠겨 있었다.

“제발, 제발…….”

애원하듯 말하는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진다.

그는 보기 싫은 얼룩을 지우는 것처럼 눈가를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의 강박적인 기세와 다르게 나를 만지는 손길만큼은 부드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약에 취한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섬세했다.

“제 모습이…… 아가씨를 불쾌하게 하나요?”

“…….”

“저 때문에 두려우십니까?”

“아니야.”

“아니라면 어째서 절 보자마자……!”

“…….”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어 갔다.

불안한 마음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기 전에, 랜서는 참아내듯 입을 다물었다.

숲을 닮은 녹색 눈동자 위로 투명한 물기가 일렁였다.

그가 가슴이 크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마시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맺혀 있던 눈물이 뺨 위로 길게 낙하했다.

“……그런 얼굴을 하셨습니까.”

랜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는 짙은 피 냄새를 달고 온 자신이 혐오스럽고,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 갇혀서 나도 그를 경멸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허락도 없이 그의 자료들을 훔쳐본 걸 들킬까 봐 놀란 것이지, 랜서 자체에 대한 감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문을 여니까.”

차마 그의 방을 뒤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는 말이 랜서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랜서는 구슬 같은 눈물을 턱 밑으로 뚝뚝 흘리면서 괴로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를 밟아 죽이시겠습니까?”

“뭐?”

그가 내 얼굴을 감싸 쥔 손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러면 아가씨를 놀라게 해드린 죗값을 치를 수 있을까요?”

“죄가 아니야, 난 정말 갑자기 큰 소리에 놀란 것뿐이지 너한테는 아무런……!”

“저는 아가씨의 신발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가씨 대신 더럽고 험한 길을 밟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삶이겠죠.

아가씨께서 더러운 흙밭을 지날 때마다 저를 찾으시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저를 아낌없이 사용해 주셨으면 하는 이 마음은 사치였습니다.”

“…….”

“저는 신발도 무엇도 아닌 한낱 벌레였습니다.

아가씨를 다치게 할 순 없지만, 존재만으로도 소름 끼치고 기분 나쁜, 그런 벌레요.”

랜서의 울음 섞인 말이 끊김 없이 이어졌다.

도대체 10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신을 벌레라고 비유할 수 있는 걸까.

랜서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그의 우울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랜서의 뺨을 닦았다.

손이 닿자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벌레라니 무슨 소리야.

이렇게 착하고 말 잘 듣는 벌레가 어디 있어.”

랜서는 내 손등을 겹쳐 잡고는 내 손바닥에 제 뺨을 비볐다.

그의 눈물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저는 당신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당신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못난 꼴만 보이게 되는 걸까요.”

“전혀 못나 보이지 않아.”

“제 마음이 당신에게 부정당하는 게 두렵습니다.”

그의 눈물은 둑이 터진 것처럼 쉼 없이 흘러나왔다.

이렇다 탈수에 걸리는 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랜서는 내 손바닥을 입술 위로 끌고 왔다.

부드러운 입술이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손을 거두었다간 랜서가 또 홀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 자신은 벌레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할까 봐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나는 다른 손으로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어.”

랜서가 내게 품은 마음은 연인 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뭐랄까…….

더 숭고하고, 맹목적인.

가장 낮은 자세로 제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는 자세가 신을 향한 신자의 열렬한 숭배와도 닮아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어마어마한 부담감이 몰려들었다.

시에 궁금해졌다.

랜서는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 줘도 열 번은 더 구해 준 게 아니고서야, 이해가 되질 않았다.

랜서는 내가 그에게 의문을 품는 것도 모르고, 내 손바닥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확실히…… 약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못 하는 것 같다.

평소의 그라면 입을 맞추면서도 끊임없이 내 눈치를 살폈을 텐데.

랜서가 도톰하게 튀어나온 손바닥 살을 입술로 머금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그의 속눈썹에 처연하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다른 손으로 눈물을 살짝 거두어 갔다.

그러자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녹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향했다.

“제가 입 맞추는 게 싫으십니까?”

그가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채로 물어 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좋으십니까?”

나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좋다고 말하기에 조금 부끄럽고, 민망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무난하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입술보다 더 매끈거리고 축축한 것이 손바닥을 길게 핥아 올렸다.

깜짝이야.

본능적으로 손을 뒤로 물리려는데, 랜서가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핥는 건 괜찮으십니까?”

“…….”

“저는 좋습니다.”

녹색 눈동자가 내게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랜서의 눈 속에 뚜렷한 욕망이 일렁였으나, 그는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내 손바닥 살이 그의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딱딱한 치아가 손바닥을 은근하게 긁어내리고, 혀끝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핥았다.

랜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마치 손바닥과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뜨거운 숨결이 손바닥에 닿자 어깨가 움칠 떨렸다.

단단한 이가 살을 가볍게 물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살을 애무한다.

“래, 랜서.”

“이 정도만…….

욕심내겠습니다.

불쾌하시면 제 혀를 잘라 내세요.”

“아니, 그럴 것까지는…….”

그가 손을 핥아 올릴수록 뚜렷한 열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의 타액으로 손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젖은 소리가 외설적으로 고막에 흘러들어 왔다.

손바닥에만 머물던 입술이 점점 올라와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그의 축축한 혓바닥이 내 손 틈 사이를 은근하게 스치며 빠져나갔다.

붉은 혀끝이 시야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졌다.

랜서의 모습은 키스를 나누는 것보다도 야해 보였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신발 안에서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랜서는 내 손가락을 길게 핥아 올리더니 이내 엄지와 중지를 한꺼번에 입 안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쮸읍-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인 그가 혓바닥으로 손가락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아…….”

손가락에 성감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랜서가 눈을 들어 올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욕망으로 사납게 이글거리는 눈을 보자 야릇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몸의 털이 전부 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둥글게 구부려서 그의 혓바닥을 꾸욱 누르고, 혀 밑의 부드러운 점막을 어루만졌다.

랜서는 말 잘 듣는 개처럼, 가만히 입을 벌리고 앉아서 내가 그의 입속을 마음껏 탐하도록 도왔다.

약에 취한 건 내가 아니라 랜서인데, 왜 내가 홀리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이상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부정할 수 없는 흥분감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볼 안쪽 살을 손으로 쿠욱 찔렀다.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자 툭 불거진 랜서의 뺨이 내 손을 따라서 움직였다.

손이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가는데도 더럽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 손을 타는 랜서를 보는 게 묘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그의 입을 가지고 노는 동안, 열기를 품은 손이 내 발목에 닿았다.

큼지막한 손이 내 종아리를 느리게 쓸고 올라간다.

랜서가 M자로 구부려 있던 내 무릎을 잡아 올렸다.

다리가 활짝 벌어지는 자세가 되었음에도 나는 랜서의 얼굴에 신경이 쏠려서 민망함을 느끼지 못했다.

“혀, 내밀어 볼래?”

랜서가 곧장 입술 밖으로 혀를 길게 뽑아 냈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충동적으로 목구멍 근처까지 손을 밀어 넣었다.

그가 놀란 듯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피하거나 저지하지 않았다.

아마 이대로 목에 주먹을 박아 넣는다고 해도 얌전히 내게 얼굴을 맡기고 있을 것 같다.

랜서는 구역감이 치밀어 오를 텐데도, 잘 참아 내고 있었다.

그의 큰 손이 내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리다가 치마를 골반 위까지 걷어 올렸다.

맨다리 사이로 찬 공기가 닿자 흐려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아, 아팠지.

미안.”

손가락을 빼자 손끝에 타액이 길게 늘어지다가 뚝 끊어진다.

“아가씨는 제게 사과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제 목젖을 뜯어낸다고 하시더라도 저는 기쁜 마음으로 목을 바칠 겁니다.”

“……그러지 마.”

랜서는 옅게 웃더니 갑자기 고개를 내렸다.

그의 얼굴이 향한 곳은 활짝 벌어져 있던 내 허벅지 안쪽이었다.

“읏……!”

성기 주변을 감싸는 열기를 느끼자마자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두 손을 뒤로 짚으며 상체를 지탱했다.

“아가씨껜 늘 좋은 냄새가 납니다.”

“아, 간지러…….”

혀가 허벅지 안쪽을 천천히 둥글리며 건드려 왔다.

입술이 더듬더듬 움직이며 안쪽으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내려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고 있는 랜서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숨결이 은밀한 곳까지 닿아 왔다.

“하아…….”

나는 전율처럼 퍼져 오는 쾌감에 목을 뒤로 꺾고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랜서가 내 속옷을 살짝 이로 물고 당기자 질척한 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느릿느릿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몸이 흥분한 상태였다.

“아, 랜서……!”

랜서가 속옷을 옆으로 완전히 젖혀 버렸다.

맨살 위에 입술이 닿자 허벅지 안쪽이 크게 움찔거렸다.

“저 때문에 이렇게 젖으신 건가요”

“……흐읏!”

단단한 손가락이 예고도 없이 음부를 길게 훑어 올렸다.

단단한 손끝이 음핵을 느리게 건드리고 지나가자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날카로운 쾌감이 퍼졌다.

훅 올라오는 성감을 다스리고 있을 때, 쯉- 하고 무언가 빠는 소리가 났다.

랜서가 내 다리 사이에 닿았던 손을 제 입에 넣은 거다.

나는 기겁하며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 그걸 왜 빨아, 더럽게!”

“그런 말씀 마세요.

아가씨가 가지신 것 중 더러운 것은 저 하나뿐입니다.”

“무, 무슨 소리를…….

아흐읏!”

그의 입술이 질구에 닿자마자 겨우 진정시켰던 성감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입이 속절없이 벌어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빨았던 것처럼 액을 쏟아 내는 구멍을 빨아들였다.

쯉쯉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릴 때마다 골반이 펄쩍 뛰었다.

“하으, 으으응, 아!

그, 그렇게, 빨면 안……!”

손바닥 아래로 그의 등 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쾌감이 계단을 밟고 차근차근 올라서는 게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올랐다.

그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려는 찰나, 랜서가 혓바닥을 내어 음부를 핥아 올렸다.

그 감각이 선연해서 나는 입만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랜서, 아……!

래, 랜서!”

지독한 쾌감이 눈물샘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눈가는 촉촉해지고, 목구멍은 반대로 바짝 말라 갔다.

불덩이를 집어삼킨 것처럼 온몸이 뜨겁다.

나는 홧홧해진 목구멍을 달래려 침을 삼키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랜서, 하으, 그, 그만, 아!

흐읏.”

그의 옷자락을 쥔 손이 세차게 경련했다.

랜서는 내 허벅지를 뒤로 밀면서 얼굴을 더욱 가까이 밀어붙였다.

“하아, 하아…….”

말랑한 입술 살이 음부를 건드리는 게 너무도 잘 느껴졌다.

음핵을 혀끝으로 짓눌렀다가 뭉근하게 놀리고, 이로 간지럽게 긁어내린다.

나는 몰아치는 쾌감에 밭은 숨을 토해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흐으, 미, 쳤어.

아, 아!”

성감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호흡이 점차 턱 아래까지 차오르고, 고개가 함께 위로 젖혀졌다.

“흐응, 흑.

아, 랜서….”

“하아, 아가씨.”

랜서가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떼지 않은 채로 제 바지를 풀어 헤쳤다.

그의 단단한 팔뚝이 성급하게 바지를 골반까지 벗어 내리는 게 보였다.

랜서는 흉포하게 일어서 있는 자신의 페니스를 꺼내고,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가씨, 너무, 하아…….

좋습니다.

아…….”

그가 내 아래를 빨면서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옷 아래로 팔뚝의 근육이 선명하게 움직인다.

이 외설적인 광경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몸에서 흘린 액인지 아니면 그의 타액인지는 모르겠지만, 랜서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질퍽질퍽하게 젖은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그리고 탁탁, 살 부딪치는 소리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으흣, 자, 잠깐!”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질구 안으로 쑤욱 밀려 들어와 내벽을 샅샅이 핥는 게 전부 느껴졌다.

혓바닥이 애액을 퍼내어 음부 전체에 펴 발랐다가 다시 안으로 밀려들어 간다.

정수리를 내리찍는 것 같은 엄청난 쾌감에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몸이 간헐적으로 들썩거리고, 크게 벌어진 입에선 울음과도 같은 신음이 줄줄 흘러나왔다.

“하아, 아가씨, 으음-.”

“랜서, 미치겠…….

하아, 좋아, 아!”

나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한 손은 랜서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살을 뚫고 튀어 나갈 것처럼 박동했다.

몸속의 피가 용암처럼 뜨거웠다.

랜서가 구멍에서 혀를 빼고 곤두선 음핵을 입술로 비비며 쭈욱 빨아들였다.

“하윽!

자, 잠깐……!”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두드렸다.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고, 무릎이 쫙 펴지면서 발이 랜서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닿았다.

“하으으!”

랜서가 날렵한 콧날을 내 아래에 비비적거리며, 짙은 숨을 토해 냈다.

그도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하아, 입에 좆이 달렸더라면, 이 구멍에 생좆을 박아 넣으면서 아가씨가 흘린 것도 함께 맛볼 수 있었겠죠.”

“아흣, 흣, 하아…….”

“제 입에 더 싸주세요, 하…….

너무 좋아요.”

“마, 말하지, 마, 수, 숨이 자꾸, 닿아서, 흐읏, 아!”

나는 랜서의 머리카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무언가라도 쥐지 않으면 쾌감에 온몸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으, 잠깐…….

아!”

아래가 온통 질척거렸다.

지독한 열기 때문에 머리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뒤로 바짝 젖힌 채 짙은 쾌감에 울음을 토해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랜서가 혓바닥을 넓게 펴서 음부 전체를 느릿하게 문지르고, 숨어 있던 음핵을 이로 갉작였다.

그의 입술이 바쁘게 움직일수록 나의 쾌감도 빠르게 치솟아 갔다.

“크흣, 아가씨……!”

“하으으…… 아!”

“하윽, 아, 아!

랜서, 랜서…….

아!

잠깐…….”

“하아…….

같이 느껴요, 아가씨.”

내 절정이 머지않았음을 눈치챈 랜서가 제 페니스를 문지르는 속도를 더욱 빨리하면서, 얼굴을 더욱더 깊게 처박았다.

랜서는 질구에서 흘러나오는 액을 혓바닥에 모아 다시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음핵을 빠르게 문질렀다.

나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다.

이성이 완전히 휘발되어 버리고, 발정 난 짐승처럼 쾌감에 울부짖었다.

“으응, 아, 아!”

“크흐읏……!”

쾌감의 극치가 머리 꼭대기 위에서 폭발했다.

전신을 두드리는 묵직한 쾌감에 온몸이 발발 떨려 왔다.

랜서도 제 성기를 문지르던 것을 멈추고, 격렬한 오르가슴에 몸을 떨었다.

그의 손은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내 음부 위로 화염 같은 숨이 쏟아졌다.

나는 절정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랜서의 머리카락만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탈력감에 몸이 뒤로 무너졌다.

눈물 때문에 천장이 잘 보이지 않았다.

랜서는 내 회음부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몸을 일으켜 제 페니스를 내 문질렀다.

뭉툭한 것이 닿자, 나는 놀라서 살짝 상체를 일으켰다.

“뭐, 뭐 해, 나 더는 못해…….”

“알겠습니다.”

말은 알겠다고 하면서도 그는 페니스를 치우지 않았다.

한 번 사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의 성기는 힘을 받아 꼿꼿이 서 있었다.

랜서는 사납게 눈을 빛내며 서로의 성기가 맞닿은 곳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넣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결코 안으로 밀어 넣지는 않는다.

그저 가만히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랜서.”

랜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랜서는 제 페니스를 아래에서 위로 길게 한번 쓸어올리고는 골반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싸놓은 정액과 내 다리 사이를 흥건하게 적신 체액을 보면서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등에 힘줄이 섰다.

뜨거운 숨을 연신 내뱉으면서 빠르게 성기를 흔들던 그가 한 번 더 사출했다.

정액이 내 다리 사이로 여러 번에 걸쳐서 쏘아 올려 졌다.

정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랜서는 그 장면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내가 다리를 살짝 오므리자, 랜서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하지만 다시 억지로 벌리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목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물수건으로 닦기만 할래.”

당연히 씻고 싶었지만, 랜서는 아직 약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저런 정신으로 누가 누구를 씻긴단 말인가.

랜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깊은숨을 내쉬고는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모르는 사람에겐 멀쩡하게 보일 만한 걸음걸이였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지금 그의 상태가 위태롭게만 보였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여러 장 적셔 온 랜서는 내 다리 사이를 닦아 주고, 새 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땀과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나 손이 자꾸만 삐끗했다.

내가 직접 닦고 싶었지만, 그가 대신 닦아 주고 싶어 하는 것이 너무도 강하게 느껴져서 차마 수건을 빼앗지 못했다.

“랜서.”

약이 깨려는 건지, 랜서의 눈꺼풀이 무겁게 끔뻑였다.

나는 그의 손등을 겹쳐 잡아 그의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고 말했다.

“침실로 돌아가자.”

일단 약이 전부 깰 때까지 랜서를 재우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도 그가 처음 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예민함이나 불안함 따위는 전부 사라진 것 같았다.

지금은 졸린 병아리같이 부스스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랜서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벽 이곳저곳에 어깨를 부딪치며 걸었다.

방으로 돌아가 그를 눕게 한 뒤 가슴 위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만 쳐다보고 얼른 자.

정신 멀쩡할 때 다시 인사하게.”

내가 그의 눈가를 살살 어루만져 주자, 랜서의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나는 그의 튀어나온 눈두덩이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랜서는 왜 진범을 찾아내려고 했을까.

그는 미첼 가의 사람도 아닐뿐더러, 그가 모아 놓은 자료 중 그 어디에도 랜서가 진범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면증까지.”

기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에게 애틋한 감정까지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내일 게리 헤더슨을 만난 후 진범을 알게 되면, 랜서에게만은 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제법 무른 생각까지 들었다.

“너는 내가 믿어도 되는 사람이니?”

나는 잠든 그의 얼굴에 대고 물었다.

“제발 그렇다고 해줘.”

혼자는 너무 힘들어.

커튼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랜서의 뺨 위에도 환한 빛이 너울거리며 내려앉았다.

나는 그가 좀 더 달콤한 잠을 청할 수 있게 커튼을 닫아 주었다.

***

“안녕.

잘 잤어?”

“……!!”

잠에서 깨어난 랜서는 약에 취해 묘하게 권태롭던 분위기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는 두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뜨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가씨!”

내가 귀신도 아니고 왜 저렇게 놀라?

내가 그의 얼굴 앞에 대고 손을 살짝 흔들자 랜서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금 귀엽기도 했다.

랜서는 부스스한 제 머리를 손가락을 쓸어 넘기다가 어떤 생각이 미친 듯 갑자기 제 얼굴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제가 원래 이런 얼굴이 아닌데.

어제 야식을 먹는 바람에 얼굴이 부은 것 같습니다.

머리도 까치집이 생기는 편은 아닙니다.

베개를 바꿨더니…….”

“너 못생겼다고 한마디도 한 적 없는데?”

혼자서 겁을 먹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제법 귀여웠다.

“조금만 쉬고 계세요.

얼른 정돈하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랜서가 말하는 정돈이란, 행색을 뜻하는 거였다.

욕실로 사라진 랜서는 얼마 후 시원한 향기를 흩뿌리며 나타났다.

까치가 둥지를 틀었던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서 이마 뒤로 넘겼고, 얼굴에 살짝 머물렀던 붓기는 완전히 빠져서 또렷하고 짙은 이목구비가 더욱 선명해 보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추한 몰골은 부디 잊어 주세요.”

“추하긴 누가.

귀엽기만 하던데.”

흘리듯 말하자 랜서의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애꿎은 콧잔등을 긁다가 금세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랜서의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피 묻은 수건을 던져 놓았던 바구니였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나 보다.

내가 왜 이곳에 있으며, 어제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사실은…….”

“괜찮아.

변명 안 해도 돼.”

“어제 기사단에서 사소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단원들을 말리다가 피가 묻었나 봅니다.

그리고 어제 제 상태가 이상했던 건…….”

“변명 안 해도 돼.”

“…….”

“어차피 너 안 무서웠고, 너 때문에 초조해지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며칠 신세 좀 지려고 찾아왔어.

네가 언제든 찾아와도 된다며.”

나는 그를 등지고 걸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자 순식간에 찬 바람이 폐부 가득히 밀려들었다.

어우, 추워.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태양 빛을 맞으며 들이마시는 아침 공기는 언제나 상쾌했다.

뒤에서부터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딛는 걸음마다 묵직한 상념이 느껴졌다.

굵직한 팔이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정수리에 무언가가 닿았다.

랜서의 얼굴이었다.

“저는…… 매번 당신을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머리 위에 맞붙은 입술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음성은 홀로 밤의 여운에 취해 있는 것처럼 어둡고 눅눅했다.

“당신이 무심코 흘리고 간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무겁게 짓눌려 버겁습니다.”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내게 애원하듯 속삭였다.

“그러니 내게 친절하지 마세요.”

“…….”

“심장이 감히 기대를 품게 하지 마세요.

욕심을 키우게 하지 마세요.”

절절하게 내뱉어지는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그가 힘겹게 내뱉는 말들이 피부 속으로 밀려들어 와 가슴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묵직한 것이 들어차는 기분에 어쩐지 숨을 쉬는 게 어려웠다.

“어제부터 하지 말라는 게 참 많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몸을 감싸 안은 팔을 풀어냈다.

몸을 돌려 랜서를 바라보았다.

랜서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코를 찡긋해 보였다.

“알았으니까, 울지 마.

너 울면 기분이 이상해.”

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처연하게 젖어 있는 눈꼬리를 예쁘게 접어 보였다.

시원한 입매가 입 동굴을 만들며 붉은 곡선을 그렸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과 셔츠를 흔들며 지나갔다.

유리알처럼 빛나는, 푸르른 녹색 눈동자.

속눈썹에 매달린 투명한 물기.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감정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망막에 오래도록 달라붙었다.

너무 예뻐서.

“부단장님!

아가씨!”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미묘한 공기가 우렁찬 외침 한 번에 먼 곳으로 밀려났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랜서의 낯이 선뜩할 정도로 싸늘해졌다.

“후아아앙-!!

먀!

먀!”

플로란의 어수선한 소음에 흐꾸웩이 깨버렸다.

나보다 먼저 랜서가 움직였다.

문을 벌컥 열자, 그 앞에 서 있던 플로란이 숨을 “헙!”하고 집어삼켰다.

그리고 한발 늦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그러나 랜서는 벌레 쫓듯이 플로란을 한 팔로 치워 버리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침실로 걸어갔다.

“아가씨!

몸은 무사하십니까?

어디 찔린 곳이나 썰린 곳은 없으십니까?”

“그렇게 걱정이 되셨으면 저를 여기에 혼자 버려두고 가지 마셨어야죠!”

플로란이 내 어깨를 잡고 좌우로 휙휙 돌려 가며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그는 내가 무사한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지 멀쩡하시잖아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역시 부단장님은 아가씨 머리카락 한 올 못 건드린다니까요.”

나는 플로란을 한 번 쏘아보고는 흐꾸웩에게 달려갔다.

흐꾸웩은 언제 울었냐는 듯 동글동글한 큰 눈으로 랜서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랜서도 흐꾸웩 못지않은 시선으로 아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호기심을 넘어선 경이로움이 비치고 있었다.

“이 아이가…… 아가씨의 배 속에서 열 달을…….”

그는 기적을 목도한 사람처럼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주 귀한 것을 대하듯이 흐꾸웩의 손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흐꾸웩이 살짝 맞닿았던 랜서의 손을 잡으려고 꼼지락대자 순간 감전된 듯 랜서의 몸이 움찔 튀었다.

랜서는 아이를 건드려 보고 싶어서 죽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랜서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냥 만져도 돼.

안 부서져.”

랜서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결국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못 떠날 것 같습니다.”

흐꾸웩이 멀어지는 랜서를 향해 팔을 뻗었다.

랜서가 잡아 주지 않자 아이의 눈망울에 촉촉한 물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 내가 얼른 다가가 흐꾸웩을 안아 들었다.

“멈추지 못할 거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랜서가 미련이 넘치는 눈으로 흐꾸웩을 바라보았다.

너무 의미 부여하는 거 아닌가.

저렇게 만지고 싶어 하면서 왜 참는 거지.

“부단장님, 슬슬 출발하셔야 합니다.

오늘도 늦으셨다간 단장님 검에 제 목이 날아갈 겁니다.”

“가자.”

나는 흐꾸웩을 안고서 랜서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마차에 올라타던 랜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갑자기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왔다.

그러곤 말릴 틈도 없이 입을 맞췄다.

쪽.

한 번 가볍게 맞닿고 떨어진다.

내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뭐……읍.”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깊게 맞물렸다.

세 번째엔 고개를 틀어 입술을 오래도록 머금고 빨아 당겼다.

입술을 핥아 올리던 혀가 살짝 벌어진 틈을 파고들어 안쪽의 점막까지 크게 훑었다.

호흡이 점차 짙어지며, 크게 뜬 눈꺼풀이 잔잔하게 퍼지는 열기에 나른해졌다.

“으응……하읍, 읍…….”

뜨거운 혀가 입 안 깊숙한 곳까지 밀려들어 와 혀와 입속을 샅샅이 들쑤셨다.

점점 격해지는 입맞춤에 몸이 움찔움찔 떨려 왔다.

랜서는 내가 뒤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감싸 쥐고, 미끈거리는 혀를 내 혓바닥에 비벼 댔다.

“하아…… 하.”

“흐읍, 음…… 잠깐…….”

깊게 얽혀 있던 혀가 빠져나가고, 아랫입술이 단단한 이에 콱 으깨지듯 깨물렸다.

랜서는 아쉬운 듯이 내 입술을 소리 내어 빨아 당긴 후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그래도 서로의 숨결이 입속으로 파고들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폐가 터질 것처럼 가빠오는 숨을 내쉬며 랜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열에 젖어서 보다 뜨거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후우잉…….”

칭얼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황급히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랜서는 멀어지기는커녕 진득한 시선으로 나를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는 눈을 내려 그의 목울대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가.”

“…….”

“뒤에…… 기다려.

얼른 가.”

“예.

다녀오겠습니다.”

랜서가 미련처럼 내 이마에 입술을 살짝 포개고는 멀어졌다.

뒤에 선 마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플로란은 아예 뒤를 돌아 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

“…….”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랜서가 깨물고 간 아랫입술이 얼얼했다.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싶은 것을 힘주어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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