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몸으로 찾는 기억(1)
칼리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사람은 눈으로도 말을 한다는데, 그의 눈동자 속엔 밤보다 짙은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거 같다.
칼리언의 속은 추측하기조차 힘들다.
서릿발처럼 냉랭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향한 소유욕을 드러낸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할 거리라도 줘.”
“네가 뭘 할 수 있지?”
칼리언은 명백히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래 봬도 내가 남들보다 특출나게 잘하는 게 하나 있었다.
약초 뿌리를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캐내는 것.
하지만 이 저택에서 내 재주가 쓰일 일은 없을 거 같다.
랜서의 말에 따르면 딱히 요리에도 재능이 없는 거 같고…….
“……청소?”
칼리언이 드물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머리칼을 쥔 손이 떨어져 나가고,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감췄다.
감출 거면 제대로 감추든가.
다 보이거든.
“내 서류를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고, 잘 정돈된 장식장을 헤집어 놓는 청소라면 사양하겠어.
불쌍한 하인들이 네가 저지른 일거리를 치우느라 배는 더 일해야 하니까.”
“아니, 뭐…… 간단한 거 있잖아.
그냥 바닥 닦는 정도?”
“한겨울에 물난리가 나는 걸 보고 싶진 않아서.”
“내가 무슨 재앙이냐.
손만 대면 다 엉망으로 만들게.”
“네가 해야 할 일은 차차 생각해 볼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
그리고 저택에 처박혀 있으란 소린 안 했어.
나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나가.”
쟤는 도망가면 죽일 것처럼 말하더니, 왜 계속 밖으로 나가래?
내가 그렇게 귀찮나.
하지만 나도 이곳에만 갇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칼리언 쪽에서 먼저 말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라 경이 왔다 갔다지?”
“…….”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하긴 칼리언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을 주인인 그가 모를 리가 없지.
랜서는 칼리언이 저택을 비울 때를 틈타 하녀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나를 만나러 왔었다.
즉, 랜서가 정당하게 저택의 정문을 두드려도, 칼리언이 쉽게 열어 주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었고, 두 사람의 사이가 그리 살갑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
화라도 내면 어쩌나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동생처럼 여기던 칼리언에게 이렇게까지 눈치를 보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내 자존심을 지켜 줄 만한 갑옷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놈과 내 저택에서 뒹굴었나?”
“…….”
나는 얼굴을 구긴 채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말하는 ‘뒹굴다’가 랜서랑 정신없이 바닥에서 뒹굴며 놀았냐는 말은 아닐 거다.
서, 설마…….
“얼굴은 왜 빨개지지?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진짜였나 보네.”
“아니야!”
나는 어른의 대화에 익숙해지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의 난 열여섯 리아나가 아닌 방탕하고 문란한 스물여섯 리아나다.
이런 수위 높은 농담도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털어 정신을 다잡은 뒤 목을 빳빳이 세웠다.
“이젠 그런 것도 질렸어.”
“그래?”
칼리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릴 듯 말 듯 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눈을 한 번 깜빡인 후 다시 본 그의 얼굴은 여전히 권태로웠고, 무덤덤했다.
“이제 무분별한 잠자리는 하지 않을 거야.
난잡한 쾌락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니까.”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얘기했다.
그러나 두 눈은 칼리언의 표정을 살피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칼리언은 내 대답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다행이군, 밤낮 가리지 않고 네가 내 좆을 억지로 세우는 바람에 곤란한 일이 많았었는데.”
“……내가?”
“그럼 내가 너를 억지로 안았을까.”
칼리언이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탄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저 말은 지금 내가 칼리언과 서로 합의한 관계가 아니라 강압적으로…….
“…….”
이건 진짜 말도 안 된다!
내가?
리아나 미첼이?!
나는 벌어지려는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열여섯의 칼리언은 내게 ‘싫다’라는 소리 한번 한 적 없을 정도로 순종적이었다.
그는 말더듬이에다 왕따였지만,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인기가 많았다.
다들 왕따를 짝사랑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칼리언과 짝꿍이 되고 싶어서 제비뽑기 번호를 조작하는 애도 있었고, 칼리언의 사물함에는 꾸준히 러브레터와 선물이 들어 있었다.
아, 맞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수많은 예술가의 뮤즈라고 불리던 여자 선배가 자신의 생일 파티에 칼리언을 파트너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칼리언은 다른 남자애들에게 유독 심하게 얻어터졌다.
내가 칼리언의 얼굴에 연고를 발라 주고, 우울해하는 그를 내 침대에서 재우기까지 했다.
물론 생일 파티도 나란히 불참했다.
나도 초대장을 받았지만, 얼굴이 엉망이 돼 파티장에 갈 수 없는 칼리언을 차마 혼자 두고 갈 수 없어서였다.
내 파트너였던 필립한테 장문의 사과 편지를 썼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손목 부러질 뻔했었지.
여하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도 칼리언의 근사한 이목구비를 보고 속으로 감탄한 적이 셀 수도 없이 많다.
놈이 왕따 말더듬이에 소극적으로 구는 답답이라 할지라도 잘생긴 것만은 사실이니까.
나도 눈이 있는데, 그의 외모가 훌륭하다는 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냔 말이야.
하지만…… 그게 성애적인 감정이었나?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순종적인 칼리언을 이용해서 그를 건드린 거라면…….
맙소사.
하늘이 두 쪽 나고 번개가 정수리를 내리찍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 종말에 가까운 자연재해가 세차게 몰아쳤다.
……리아나 미첼, 너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칼리언의 물건을 훔쳐서 달아난 것도 모자라 그를 어, 억지로…….
입가가 바짝 말랐다.
나는 혀를 내어 입술을 훑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차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사과할 필욘 없고.
난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거든.”
“‘이렇게’라니?”
“너한테 동정 떼일 줄 알았다고.
각오하고 있었어.
넌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아홉 살 때인데, 아홉 살 때부터 나한테 잡아먹힐 걸 직감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각오까지 했다고?
이런, 답답이가.
위험을 예견했으면 도망갈 궁리를 해야지, 뭘 각오를 하고 앉아 있어!
내 속은 지금 혼돈 그 자체였다.
내 안의 색마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는 것과, 칼리언이 그 색마를 눈치챘음에도 제 운명인 것처럼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마…… 고의는 아니었을 거야.”
“남 일처럼 얘기하네.
그리고 고의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지?”
돌아오는 반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고의가 아니면 실수라는 건데, 실수로 섹스를 했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발기한 칼리언이 나체인 나와 부딪쳤는데, 내가 그의 위로 넘어지면서 우연히 삽입된 게 아닌 이상 실수와 섹스는 같이 쓸 수 없는 말이다.
“실언했어.
잊어 줘.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이상해진 거 같아.”
그가 돌연 손을 뻗었다.
나는 무심코 몸을 크게 떨었다.
나의 과장된 반응과 달리 차가운 손끝은 귓바퀴를 스치듯 건드리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 냉기에 닿으니 내 귀가 얼마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빨개져 있을 귀가 욱신거렸다.
칼리언의 손끝엔 붉은색 깃털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애도 아니고.”
칼리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역시 잘 자라는 인사말 하나 없이 등을 돌린다.
나는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잠깐만.”
칼리언이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돌아보는 몸짓이 아주 느리게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다.
붉은 눈동자가 담담히 내 얼굴을 담았다.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니었나?”
“있어.
그러니까…….”
해야 할 말은 분명했다.
하지만 누가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혀끝에서 감돌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나는 손톱이 살에 파고들도록 주먹을 세게 그러쥐며 내지르듯 말했다.
“나 한 번만 안아 볼래?”
반듯하던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가 다리의 무게중심을 바꾸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시선이 닿는 자리가 화끈거렸다.
칼리언이 한숨 같은 숨을 짧게 내쉬고는 벌렸던 거리를 좁혀 왔다.
“이제는 질렸다더니.”
낮게 뇌까린 칼리언이 빠르게 코트를 벗어 던졌다.
힘줄이 선명한 큰 손으로 벨트를 철컥 풀어내고는 내 어깨와 팔뚝을 한 번에 감싸 잡았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냥 포옹 말이야.
옷 입은 채로 하는 건전한 포옹!”
“아…….”
단단한 장골이 드러나도록 바지를 내렸던 칼리언이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잘 빚은 조각상처럼 굳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조심조심 손을 움직여 내려간 그의 바지를 배꼽 아래까지 올려 주었다.
아휴, 민망해라.
내 어깨를 감싼 손이 팔뚝을 쓸어내리듯 아래로 떨어졌다.
못 견디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러기에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뭘 저렇게 성급하게…… 나는 민망함에 목을 긁어내리다가 괜히 큼큼 헛기침했다.
“포옹…… 해줄 수 있지?
어려운 거 아니잖아.”
“더 한 것도 하려고 했는데, 얼마든지.”
그의 입에서 쉽게 승낙이 떨어졌다.
눈치 보던 것도 잊고, 두 눈이 기쁨으로 크게 떠졌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칼리언이 익숙하다는 듯이 내 등과 뒷목을 감싸 안으려 했다.
“잠깐만.”
그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그가 “이번엔 또 뭐.”하며 옅은 불만을 내비쳤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서 등을 보이고 앉았다.
“뒤에서 안아 줘.”
“…….”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그래.
내가 네 체온을 느낄 수 있게 꽉 안아 줘.
부탁할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붙들었다.
놀랄 틈도 없이 몸이 살짝 떠오르더니 이내 칼리언의 다리 사이에 앉은 자세가 되었다.
“뒤에서 안으려면 이 자세가 편해.”
등 뒤로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이 맞붙었다.
칼리언이 말을 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가슴이 전부 느껴졌다.
두꺼운 팔뚝이 내 몸을 감싸고, 배를 끌어안았다.
완전히 그의 커다란 몸에 갇히게 되자 왠지 모르게 조금 긴장이 되었다.
열여섯의 칼리언도 나보다 키가 크긴 했지만, 이만큼이나 거대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힘 풀어.
안아 달라고 한 건 너야.”
“……알아.”
심장 박동이 전부 느껴질 만큼 밀접하게 붙어 있는데, 내 몸이 뻣뻣해진 걸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의 긴장이 들킨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끄러움도, 민망함도 전부 찰나였다.
아늑한 품이 내 몸을 끌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아 미친…… 졸리다.
굳어 있던 몸이 나른해지며 그의 가슴팍에 편안히 머리를 기댔다.
나흘간의 불면을 보상하듯 깊은 어둠이 정신을 빠르게 덮쳐 왔다.
***
새하얀 맨발이 굵은 핏방울을 짓이겼다.
발이 움직일 때마다 깨끗했던 대리석 바닥에 옅은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툭.
발끝이 딱딱한 것을 건드렸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차갑게 귓전을 울린다.
내 발에 치이고 미끄러진 가위가 바닥 위를 매끄럽게 구르더니 테이블 다리를 맞고 나서야 멈춰 섰다.
가위.
그래, 가위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갈 듯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피에 젖은 두 손으로 부른 배를 감싸 안았다.
흰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지며 악에 받친 듯 무어라 소리를 질러 댔다.
목에 핏대가 도드라지고, 기침이 튀어나와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매끄러운 광택이 흐르는 검은 구두.
누구지?
눈에 잔뜩 힘을 줘봐도 검은 연기가 남자의 상반신을 먹칠하듯 자욱하게 가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야…….
남자의 검은 앞코가 내 엄지발가락을 스쳤다.
나는 부릅뜬 눈을 힘없이 감아 내렸다.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턱밑으로 떨어지며 피에 젖은 옷을 짙게 물들였다.
***
쏟아지는 하얀 햇살에 부스스하게 깨어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려봤다.
쿵.
쿵.
쿵.
느리고 규칙적으로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처음에 꿈을 꿨을 때와 다르게 몸 상태는 안정적이었다.
고개를 돌려 화창한 바깥 날씨를 멍하니 구경했다.
몽롱한 정신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숨어 있던 상념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침대가 아니라 칼리언이었어.”
내 불면증 치료제는 칼리언이었다.
그렇다면, 세 남자 중에 왜 하필 칼리언이지……?
근거 없는 상상은 집어치우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누군가의 옆에서 깊게 잠들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을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여기서 정신을 놓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사람.
10년 전인, 열여섯 살 때의 나는 블래이크나 랜서보다 매일 같이 붙어 다니던 칼리언과 가장 돈독한 관계였다.
따지고 보면, 세 사람 중 칼리언을 가장 친근하다고 느끼는 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왜 불면증이 생기게 된 걸까.”
지금까지는 10년을 통째로 잊어버린 뇌가 수면 장애까지 일으킨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이 불면증이 출산 전부터 오래도록 계속됐던 거라면……?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엔 아직 단서가 부족했다.
생각이 많아지자 눌어붙어 있던 잠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협탁에 올려 두었던 육아 수첩과 펜을 꺼내 들고는 책상에 앉았다.
「두 번째로 꾼 꿈.
피와 가위, 검은 구두의 남자.」
처음 꿈과 비교했을 때, 두 번째 꿈에서는 만삭일 때보다 배 크기가 작았었다.
“최근 기억부터 시간을 거꾸로 보여 주고 있는 건가……?”
두 번째 꿈속에서 나는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었고, 굉장히 흥분해 있던 상태였다.
누군가를 향해 악에 차서 소리를 질렀는데 아마도 그 상대는 검은 구두의 남자이리라.
“자, 여기서부터는 근거 없는 상상이야.
그냥 때려 맞춰 보자고.”
내 직감은 검은 구두의 남자가 흐꾸웩의 아버지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검은 구두의 남자를 애 아빠라고 가정해 보자.
피와 가위…… 남자는 나와 배 속의 흐꾸웩을 없애려고 했던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지키기 위해 남자에게서 도망쳤고, 정신을 잃기 직전 아무도 믿지 말라는 쪽지를 남겼다.
애 아빠가 다정한 척 가면을 뒤집어쓰고 내게 접근할 것을 예언한 경고였던 걸까.
“……그럼 내가 안심하고 같이 잘 수 있는 칼리언은…….
흐꾸웩의 아빠가 아니라는 소리인데.”
나는 칼리언의 물건을 훔쳐서 달아난 거로 모자라 강제로 몸을 취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스물여섯의 칼리언은 내게 다정하게 굴기는커녕, 싸늘한 낯으로 깊은 배신감을 표출했고.
다시 말해서…….
“칼리언은 나한테 내내 이용당하기만 했던 거네.
저놈은 그냥 불쌍한 녀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 같은데?……”
……어쩐지 더 미안해졌어.
놈의 말투가 냉랭해졌다고 실망했던 순간을 반성하게 되었다.
수첩에 적혀 있는 칼리언의 이름에 엑스 표를 치려던 찰나 흐꾸웩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냉큼 수첩을 덮고 흐꾸웩에게 달려갔다.
“똥 쌌어?”
흐꾸웩을 안아 들자마자 녀석은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이 배시시 웃음을 흘린다.
“어쭈, 쬐끄만 게 벌써부터 어른을 속여?”
통통하고 흰 뺨을 입술로 꾸욱 누른 채 바람을 불었다.
부우욱.
입바람이 여린 살에 부딪히면서 잔진동이 느껴지자 흐꾸웩이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이빨도 없는 주제에.
새빨간 혀가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는다.
크고 똘망똘망한 눈망울은 보석이 박힌 것처럼 반짝거렸다.
“우뺘뱌!”
“뭐라는 거야.
언제 말 배울래?”
내 핀잔에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느라 정신이 없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뒤늦게 노크 소리를 듣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눈에 익은 하녀가 젖병을 든 채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요.
분유를 가져다드리면, 아기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잖아요.”
“주세요, 먹이는 건 제가 할게요.”
흐꾸웩은 배가 고팠는지, 한 번 칭얼거리지도 않고 우유를 꿀꺽꿀꺽 잘만 마셨다.
배고프면 울어서 신호라도 주지.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가슴께가 찌르르 울린다.
“분유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분명히 배 속에서 나왔을 때도 엄마 안 괴롭히고 한 번에 쑤욱 나왔을 거야.
그렇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낳은 기억이 없으니 흐꾸웩이 한 번에 쑤욱 나왔는지 여러 번에 걸쳐 힘겹게 나왔는지 알 턱이 없다.
“어…… 네.”
“나올 때는 속 썩였나 보네요.”
하녀가 흐꾸웩의 턱밑으로 흐르는 분유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귀엽다는 듯 뺨을 콕 찔렀다가 뗀다.
“저, 감사해요.
매번 애기 분유도 챙겨 주고, 놀아 주셔서…… 그러니까, 이름이…….”
“안젤라입니다.”
“네, 안젤라.
고마워요.”
흐꾸웩은 분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먹고는, “흐꾸웩…….”하며 시원하게 트림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당연한 수순처럼 안젤라와 함께 놀이방으로 놀러 갔다.
흐꾸웩을 보내고 난 뒤 갑자기 든 생각인데…….
“흐꾸웩의 장난감은 누가 사주는 거지?”
설마 하녀들이 사비로 사주는 건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워렌 가문의 돈이었다면 그깟 딸랑이 몇 개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거다.
태산처럼 많은 재산에서 골드 몇 닢이 사라진다고 해서 어디 티라도 나겠는가.
하지만 하녀들은 처지가 달랐다.
숙식은 워렌 가문에서 제공해 준다고 하지만, 그들에게 딸린 식솔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병든 가족이라도 부양하고 있다면…….
“엄청 미안하네…….”
그러나 미안한 마음과 다르게 주머니는 빈털터리였다.
누가 누구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는 건지…… 순간, 스스로가 몹시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당장 일자리라도 구해야 하나 싶었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제 칼리언과의 대화로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또 지금은 한가로이 돈이나 모으고 있을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나는 조금씩 쌓여 가는 부채감을 무겁게 실감하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밀드레드가 준 육아 수첩을 펼쳐서 랜서의 주소 밑에 갚아야 할 돈을 적었다.
「칼리언 워렌 (측정할 수 없음)」
「안젤라 (대략 1골드)」
「블래이크 자베른 (대략 10골드)」
언젠가 반드시 갚을 수 있길 바라며 수첩을 닫았다.
지금은 부모님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되짚어 봐야 할 때였다.
***
“안젤라, 걸어서 광장까지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예?
걸어서요?
세상에, 아가씨.
걸어서는 절대 못 갑니다.
고운 발이 상하세요.”
“발이 상하는 건 괜찮은데,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가 해서요.”
“마차를 타고 가도 한 시간을 넘게 달려야 하는데요.
아가씨 보폭으로는 온종일 걸으셔야 할 겁니다.
날도 추운데, 그러다 쓰러지세요.”
아직 가겠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안젤라가 하얗게 질린 낯으로 나를 극구 말렸다.
하지만 광장까지 걸어서 가는 게 아주 무모한 일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열다섯 살 때는 약초를 캐기 위해 뒷산을 동산처럼 오르내렸던 나다.
새벽빛을 등불 삼아 걷다 보면, 해지기 전에는 광장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광장은 왜 가시게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하인은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더니…… 하녀도 호구 칼리언처럼 제 것을 전부 내어 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젤라의 주머니 사정은 칼리언과 다를 터였다.
“……봉급도 적으실 텐데.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네?”
하녀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아, 얼마 전까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돈 한 푼 없이 겨우 빠져나온 내가 자신을 걱정하는 게 기분 나빴을 수도 있다.
“아…… 그러니까, 뭐가 필요해서 가려는 게 아니라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뚫으면서까지 가고 싶은 곳은 다름 아니라 나의 집, 미첼 가의 저택이었다.
지금의 내게는 부모님을 살해한 진범을 찾아낼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저택을 뒤지다 보면 무언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떠올린 생각이었다.
운이 좋아서 기억의 단편이 떠오를지도 모르고.
“목적지를 말씀해 주시면 금방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칼리언 가의 마차를 타면 내 행적이 칼리언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세간에는 부모님을 죽인 살인범이 나라고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칼리언 또한 그 소문을 믿고 있고.
만일 칼리언이 왜 저택에 갔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살인범 낙인이 찍힌 내가 이제 와 옛 추억이 그리워서 저택에 갔다고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버려진 지 몇 년이나 된 저택에 잊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갔다는 핑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곧장 눈치챌 게 뻔했다.
……가만, 차라리 랜서의 집으로 갈까?
번쩍 떠오른 생각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랜서는 왕궁 기사단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분명 광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얻었을 거다.
게다가 지하 감옥에 있을 때 들은 바로는, 랜서는 기사단장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는 듯했다.
쉴 틈도 없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놈이니 집에 있는 시간보다 왕궁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을 거다.
이곳보다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마음이 완전히 굳어졌다.
“아가씨?”
“아, 죄송해요.
저택 안에만 있는 게 조금 답답해서 광장 구경이라도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럼 저랑 내일 같이 나가실까요?”
안젤라랑 같이 가면 나갔다가 다시 이 저택으로 돌아와야 하잖아요.
저는 나가기만 할 거라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신세 질 수 없어요.”
“아니에요, 아가씨.
신세라고 생각하지 마세…….”
“실은 이제 슬슬 저택에서 나갈 때가 된 거 같아서요.
여기에 있어 봤자 밥만 축내잖아요.
그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안젤라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내게 정이 많이 들은 모양이었다.
얼마 머문 것도 아닌데…….
안젤라는 밀드레드, 로빈 부부만큼이나 편견이 없는 선한 사람 같았다.
세간에서 나는 부모를 살해한 인간 망종이나 다름없는데도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 그래도 아예 떠나는 건 아니에요.”
“……그렇죠?”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오지 않을까 싶어요.
아마도.
삯마차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마련한다면 말이죠.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들를게요.”
숙면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꿈속에서 지난 10년간의 단서를 찾으려면 어쨌거나 칼리언의 품이 필요했다.
안젤라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러고는 분홍 꽃을 촘촘히 수 놓은 손수건으로 관자놀이를 닦아 냈다.
“그럼 주인님께는…….”
“제가 잘 말할게요.
또 사람도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배신하는 거냐, 죽고 싶냐 추궁하면 골치 아프니까요.”
“죽인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을 거 같은데…….”
“꼭 입으로 뱉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죠.
딱, 분위기가 그랬다니까요.
어찌나 무섭게 사람을 몰아가는지…… 분위기만으로 숨 막혀 죽을 뻔했어요.”
“무슨 느낌인지는 알 거 같아요.”
안젤라가 공감해 주자 순간 무언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무섭게 뇌까리는 음성이 귓전에 맴돌며 참아 왔던 서러움이 튀어나왔다.
“그렇죠?
애가 원래 이렇게까지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은 아니었거든요.
불과 몇 달…… 아니, 몇 년 전, 아니 열여섯 살 때는 얼마나 착하고 저를 잘 따랐는데요.
제 말에 아주 껌뻑 죽었다고요.
어디서 처맞고 오면, 내가 때린 놈들 다 혼내 주고, 약까지 발라 줬는데…… 은혜도 모르는 게 후레자식이 따로 없더라니까요.”
“누가 후레자식이지?”
커다란 손이 내 한쪽 어깨를 은근하게 감쌌다.
나는 정수리로 천장을 찍을 듯이 크게 몸을 펄떡였다.
안젤라의 시선이 내 머리 위에 향해 있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서둘러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나가 봐.”
“알겠습니다.”
“애도 데리고.”
칼리언이 어느새 곤히 잠든 흐꾸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안젤라는 흐꾸웩이 깨지 않도록 노련하게 안아 든 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안젤라에게 제발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열렬한 시선을 보냈으나, 안젤라는 칼같이 방문을 닫고 떠나갔다.
쿠웅.
이윽고 소름 끼치는 적막이 찾아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던데.”
귓전으로 뜨거운 숨결과 함께 나직한 음성이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어깨를 감아 쥔 손이 팔뚝을 쓸어내리자 오금이 저려 왔다.
나는 입술을 꾸욱 맞물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네 편의를 많이 봐줬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봐.”
“아냐, 많이 봐줬어.
되게 많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진짜로.”
칼리언이 긴 다리로 소파를 돌아와 내 옆에 붙어 앉았다.
앞에 자리 많은데 왜 여기 앉는 거야.
사람 심장 쫄리게.
“열여섯 살 때처럼, 내가 네 말에 껌뻑 죽지 않는 게…….”
“…….”
“속상했어?”
예전에도 느꼈었지만, 칼리언의 시선은 묘한 구석이 있었다.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눈빛이 닿는 자리가 미치도록 화끈거렸다.
나는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을 말아 쥐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아냐.”
후레자식은 칼리언이 아니라 나였다.
기껏 훔친 물건값도 안 받고, 지하 감옥에서 평생 썩을 뻔한 죄인을 꺼내 주었더니, 뒷담이나 까고 있고.
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열여섯 살 이후의 리아나가 한 행동을 내가 했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내 속을 모르는 칼리언이 나를 괘씸하게 여겨 오늘 당장 저택에서 내쫓아 버릴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 내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나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라고 말하면 아마 살인범에 이어 희대의 변태로 낙인찍히겠지.
“그, 투정……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애정이 없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말…… 그런 거 있잖아.
욕한 건 절대 진심이 아니야.
나는 단지, 내가 아무리 너한테 몹쓸 짓을 했다지만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거든.
근데 네가 너무 차갑게만 대하니까…… 그게 서운했나 봐.
나도 모르게…… 그런 거 있잖아.”
뭐가 자꾸 그런 게 있는지.
횡설수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튀어 나갔다.
칼리언이 비웃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변명이었다.
그런데 칼리언은 의외로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나를 압박하던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진 듯한 느낌이었다.
“반가웠어?
내가?”
“어…….”
“서운해서 욕할 만큼?”
“그랬나 봐.”
“대답에 확신이 없네.”
“아냐.
반가웠어.
엄청, 엄청.”
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음절마다 힘주어 발음했다.
여느 때와 같이 이렇다 할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일순 칼리언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못 참겠다는 듯이 잔잔한 웃음을 흩뜨렸다.
“…….”
뭐야.
나는 진지한데 왜 처웃고 난리야?
내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그를 멀거니 바라보자 칼리언이 엄지로 내 미간 사이를 문질렀다.
차가운 손가락의 표면이 내 열기를 가져갔다.
“화내지 마.
화낼 처지 아니잖아.”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말뜻은 쌀쌀맞았으나 어째서인지 어투는 내게 사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뒤늦게 깨달았다.
놈한테 농락당했다는 것을.
놈은 애초부터 화난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후레자식이 아니라 쌍놈의 후레자식이라고 제대로 욕할걸.
칼리언의 손을 치워 내려는데 반대로 내 손목이 붙들렸다.
얇은 은색 팔찌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칼리언은 그것을 유심히 보더니 돌연 손목 안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뭐, 뭐 해!”
“어울리네.”
“…….”
“팔찌.
잃어버리지 않게 간수 잘해.
나한테 정말 중요한 물건이니까.”
내 손목이 아니라 팔찌에 입을 맞춘 거였나.
하지만 차디찬 손과 다르게 유독 뜨거웠던 입술의 감촉이 내 손목에도 닿았다가 떨어졌다.
마치 자국이라도 남은 것처럼 입술이 닿았던 부근이 간지러웠다.
나는 손목 안쪽을 긁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등 뒤로 손을 감추었다.
“걱정 마.
내가 청소는 못 해도, 물건 하나는 잘 챙기거든.”
칼리언은 얼마간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언제나처럼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잡혀 주었다.
“칼리언, 나 이제 여기서 나갈까 해.”
“이미 다 결정해놓고 고민하는 척 말하지 말지.”
그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서 너한테 진 빚은 꼭 갚을게.”
“살인범을 고용해 줄 간 큰 머저리가 있기를 기도할게.”
저 후레자식.
어떻게 저 예쁜 입술로 내뱉는 말이라곤 하나같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말뿐일까.
하지만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할 말은 끝났어?”
그가 따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끝났으니 나가라고 단호하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나는 놈이 필요했다.
구질구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 있어.”
“…….”
“오늘도…… 안아 주라.”
***
이미 체액에 흠뻑 젖은 채로 자글자글 주름진 시트를 다시 힘껏 쥐어뜯었다.
‘아!’
뒤에서 치받아 오는 힘에 몸이 크게 흔들리고, 얼굴은 눈물과 땀 그리고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배를 만져 보았다.
뼈가 느껴질 정도로 마른 몸에 배만 볼록하게 솟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흑!’
누군가의 단단한 몸이 내 등을 겹쳐 눌렀다.
봐주는 거 없이 남근을 거칠게 박아 넣으면서, 내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인다.
하지만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턱이 잡힘과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긴 손가락이 내 입술을 축축하게 더듬었다.
입은 연신 터져 나오는 신음 때문에 속절없이 벌어진 상태였다.
남자가 손끝으로 삽입하듯 내 혓바닥을 길게 쓸더니 난폭하게 입술을 부딪쳐온다.
치열을 헤집고, 미끈한 점막을 크게 훑은 살덩이가 잔뜩 뜨거워진 내 혀를 난잡하게 얽었다.
‘흐읍, 으, 읍!’
박아 넣는 속도가 감당할 수 없이 거칠어졌다.
강렬한 쾌감이 저릿하게 번지며 튼튼한 침대가 기이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세차게 경련했다.
조절할 수 없는 흥분감이 전신을 휘감고, 맞붙어 있는 입술로 제발 천천히 해달라며 사정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그의 입속으로 전부 먹혀들고 말았다.
남자가 성기를 길게 빼냈다가, 힘을 실어 깊은 곳까지 한 번에 박아 넣었다.
살 부딪치는 소리는 가히 폭력적이었다.
다리 사이에 박힌 성기가 몸을 가르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을 뒤로 뻗어서 그의 옆구리를 밀쳐 봤지만, 남자는 오히려 제 음낭까지 집어넣을 기세로 더욱 힘을 주었다.
내벽을 억지로 밀어내듯 벌리며 들어온 남근은 그 핏줄까지 전부 느껴질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크게 벌어진 내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성기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사정액을 토해 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남자는 후희를 즐기듯, 느긋하고 관능적인 몸짓으로 허리를 움직이며 내 안에 제가 뱉어낸 액을 깊게 밀어 넣었다.
철퍽, 철퍽.
남자가 사정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내가 머금고 있는 정액의 양이 상당했다.
나는 남자에게 깔리듯 엎드린 채로 흥분감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눈물로 잔뜩 짓무른 눈을 겨우 뜨자 어지럽게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힘줄 선 굵직한 팔뚝이 보였다.
그리고 협탁 위에 피 묻은 붕대와 붉은색 연고가 놓여 있었다.
나는 하얗게 흩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 자세, 싫어.’
남근이 박혀 있는 상태로 몸이 반 바퀴 돌려졌다.
뭉툭한 선단이 내벽을 후비는 감각에 발가락이 전부 움츠러들었다.
남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저번처럼 검은 안개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대신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으로 남자를 느끼려 발악했다.
팔을 크게 벌려 남자를 끌어안고, 볼록하게 솟은 가슴 근육을 손으로 더듬으며, 선명한 복근 그리고 나와 교접해 있는 성기의 뿌리 부근까지 전부 어루만졌다.
복근 쪽에 세로로 기다랗게 난 상처가 만져졌다.
그 순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길게 빠져나갔다.
‘으흐읏, 아아…….’
남자가 내 손등을 겹쳐 잡고는 제 성기를 쥐게 했다.
나는 민망함도 잊고, 성기를 탐색했다.
위로 쓸어 올렸다가 굵기를 가늠하기 위해 손가락을 최대한으로 뻗어 쥐었다.
하지만 손끝이 맞닿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튀어나와 있는 핏줄을 손끝으로 더듬고, 매끈거리는 귀두를 엄지로 샅샅이 문질렀다.
나아가 그 아래에 달린 음낭까지 쥐어 보았다.
한창 성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남자가 내 손을 강제로 떼어 내더니 급하게 제 성기를 다시 내 안에 박아 넣었다.
미칠듯한 쾌감이 불시에 퍼져 왔다.
정수리가 베개에 파묻힐 정도로 고개를 힘껏 젖히며 신음을 토해 냈다.
남자가 드러난 내 목에 이를 세워 까득 깨물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퍼지는데도 몰아치는 쾌감이 너무도 거대해서 아프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남자의 거대한 육체에 깔려 울부짖었다.
***
“시발, 신이시여.”
모두가 잠든 새벽.
푸른빛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한 고즈넉한 저택.
싸늘한 찬 바람이 틈새를 비집고 욕실 안으로 몰아쳤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오고 손은 꽝꽝 얼어 붉게 변했는데도 나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뜨지 못했다.
“이게 무슨 추태야.
나가 죽어라, 죽어.”
어제 꿈속에서 본 기억은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자극적인 시청각 자료에 몸은 솔직하게 반응했다.
놀라서 눈을 번쩍 떴을 때 아래가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조심스럽게 치마를 끌어 올리자 애액에 흥건히 젖은 속옷이 보였다.
내가 아무리 성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이 액이 어떤 연유로 생기는지 정도의 기초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는 것은 처음이라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빨자.
나는 침착하게 하녀가 채워 놓았던 새 속옷으로 갈아입고, 축축한 천 쪼가리를 숨긴 채 살금살금 밖으로 빠져나왔다.
비어 있는 욕실에 들어가 찬물을 퍼 올려 무작정 손으로 비벼 빨았다.
이것을 하녀가 직접 빨게 하느니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고 죽겠다!
“필립이 몽정했다고 했을 때 놀리지 말걸.
얼마나 끔찍한 기분이었을까.
미안해, 필립.
앞에 있다면 무릎 꿇고 사과할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누가 들을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게다가 꿈속에서의 나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대담했다.
남자의 땀에 젖은 몸을 품 안 가득 끌어안고, 흉흉한 성기를 스스럼없이 만졌다.
이 손으로…… 미쳤지, 진짜.
문득 꿈에서처럼 손을 둥글게 말아 봤다가 뭔가 아찔한 느낌이 들어 얼른 손을 털어버렸다.
인간의 신체가 아니었어, 그건.
“……한 손에 잡히지도 않았었지.”
그게 내 안을 왔다 갔다 하니까 흐꾸웩이 뿅 하고 생긴 거다.
“인간은 꽤 난잡하게 태어나는구나.”
나는 속옷의 물기를 꽈악 짜내고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주먹 안에 꼭꼭 말아 쥐었다.
이 저택의 아침은 다른 곳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인 칼리언도 뭐가 그렇게 할 게 많은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단련을 했다.
그 후엔 그를 실은 마차가 저택 밖으로 부지런히 빠져나갔다.
제발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길 바라면서 잔뜩 긴장한 채 걸은 끝에 다행히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태양이 커다란 몸체를 반쯤 드러냈을 때, 불그스름한 빛이 밤을 밀어 냈다.
나는 무심코 창가 테이블에 앉아 아래를 바라보았다.
예상처럼 칼리언이 검은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새벽 이슬이 마르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저놈은 항상 내 방 밑에서 저러고 있더라.
나는 창틀에 턱을 괴고 무심히 칼리언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가고, 손목을 단정히 감쌌던 소매는 어느새 팔꿈치 위까지 말려 올라가 그의 힘줄 선 팔등을 드러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칼리언은 단추 세 개를 풀어헤쳤다.
그가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검은 셔츠 사이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가슴 근육이 엿보였다.
내 가슴을 내려다볼 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칼리언의 두툼한 가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귓가가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만지면 어떤 느낌일까?
딱딱하려나…… 의외로 말랑거릴 수도 있어.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사이 손가락이 무언가를 만지고 있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정신 차려.”
황급히 못된 손을 허벅지 위로 떨어트렸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칼리언의 옷깃 안을 파고들어 있었다.
뭔가…… 조금 더 벌어지면 젖꼭지가 보일 거 같은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 부위만을 유심히 노려보았다.
그런데 옆으로 휙휙 잘만 벌어지던 옷이 갑자기 정숙한 척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만족스럽게 눈가를 찌푸렸다.
탁!
허공을 찌르고 가르던 목검이 땅에 콱!
하고 박혔다.
칼리언이 정확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
나는 당황한 나머지 커튼을 확 닫아 버렸다.
쿵쿵쿵.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깜짝이야…….”
땀에 젖어서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 살짝 상기된 얼굴로 평소보다 빠르게 내쉬던 숨.
붉은 입술 그리고 나를 변태 보듯 경멸하던 적안.
“가슴 훔쳐보던 거 눈치챘겠지.”
장님이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다.
내 방은 고작 2층 높이였고, 창문에 딱 붙어서 열정적으로 그의 가슴만 구경했으니 말이다.
“망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침대에 엎어졌다.
나중에 칼리언이 따져 물었을 때 뭐라고 변명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칼리언은 하루 중 가장 바쁜 아침에 내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태운 마차가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탑의 근무 환경이 극악이라는 소문이 진짜인가 보네.”
마탑주도 휴일 없이 아침마다 출근하는 걸 보면 소문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닌 거 같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단련은 또 거르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저택이 이렇게나 넓은데 왜 하필 내 방 아래에서 그러냐 말이야.
그러니까 눈이 가지.”
나는 툴툴대며 작은 요람 안을 들여다보았다.
흐꾸웩이 노란색 딸랑이를 입에 가져다 댄 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밤새 쭉쭉 빨았는지 턱받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작은 손이 앙증맞게 쥐고 있는 딸랑이를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후응…….”
본능적으로 떨어져 나가려는 딸랑이를 쥐려고 내 손가락의 반의반도 안 되는 손가락을 움찔거린다.
텅 빈 손바닥 안에 내 검지를 밀어 넣자 흐꾸웩이 입을 냠냠 맞붙였다가 떼면서 내 손을 쥐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흐꾸웩의 뽀얀 뺨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참 신기한 게, 매일 같이 끔찍한 변을 싸면서 어떻게 살에선 이렇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냄새가 나는 거지.
이런 걸 아기 냄새라고 하는 건가.
“아가씨, 분유를 가져왔어요.”
“들어오세요.”
흐꾸웩이 분유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코를 움찔거렸다.
안젤라가 가까이 다가오자 꼭 감고 있던 눈꺼풀이 씰룩였다.
“깨려나 보네요.
귀여워라.”
“강아지도 아니고.”
나는 분유를 달라고 칭얼거리는 흐꾸웩을 안아 들었다.
“이제 분유 먹이시는 데에도 익숙해지셨나 봐요.”
“뭐…….
계속 하다 보니까요…….”
“아차, 오늘 나가신다고요?
주인님께 말씀은 드리셨죠?”
“빨리 꺼지라던데요.”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안젤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안젤라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도리어 나까지 당황하고 말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절 보는 눈빛이 이제야 나가냐?
이런 느낌이었거든요.”
“그렇군요…….
아,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럼 저, 마차 말고 하나 더 부탁해도 될까요?
강보가 필요해요.
가지고 있는 건 너무 낡은 데다 얇아서요.”
“물론이죠.
당장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
이른 점심을 먹고, 랜서의 집으로 갈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안젤라가 두꺼워 보이는 방한용 가방을 건넸다.
안에는 흐꾸웩의 분유, 기저귀, 장난감, 깨끗한 손수건 등 아이를 돌보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칼리언에게 천 기저귀를 제외한 모든 짐을 빼앗겼었는데…… 안젤라가 내가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마련해 주었다.
그 넉넉하지 않은 봉급으로…….
무언가 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왔다.
나는 시리도록 추운 겨울 한가운데에서 따뜻함을 느끼며 안젤라의 두 손을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은혜는 꼭 갚을게요.”
안젤라는 부담스러운 듯 “하하하…….”하고 멋쩍게 웃었다.
“안에 경비도 조금 챙겼어요.
필요할 때 쓰세요.”
“안젤라…… 당신은 정말.”
나는 안젤라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안젤라가 “아가씨…….”하고 불렀지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 가문이 건재했더라면 안젤라를 우리 저택으로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칼리언이 얼마를 주는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두 배는 많이 얹어서 주고 호화로운 집도 장만해 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내 처지는 안젤라의 도움 없이는 길거리에 빵 하나 사 먹지 못하는 신세였다.
기억을 되찾고, 부모님을 살해한 진범을 찾은 후엔 반드시 다시 약초 공부를 해서 인생을 바로 잡을 거다.
나의 모든 지식이 담긴 책을 낼 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밀드레드와 로빈 그리고 안젤라의 이름을 넣는 것이다.
어차피 곧 다시 돌아올 저택이지만, 나는 10년 전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쥴리와 작별 인사를 나눴던 것처럼 안젤라와 오래도록 인사를 나눈 후 삯마차 앞에 섰다.
왕궁 앞에서 탔던 거대한 호화 마차가 아닌 단출한 삯마차였다.
이건 내가 부탁한 것이었다.
최근까지 수배 전단이 곳곳에 붙어 있던 처지였다.
보석금 덕에 풀려났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용서받지 못할 패륜아이자 범죄자니까.
괜히 억 소리가 나올 만큼 화려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원했던 것은 말 한 마리가 끄는 협소한 삯마차였으나 안젤라는 말 네 필과 두 명의 마부 그리고 두 명의 호위가 딸린 마차를 준비했다.
내 난처한 낯빛을 알아챈 안젤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왕궁에선 너무 저렴한 삯마차가 오히려 눈에 띄는 법이에요.”
“왕궁으로 가는 건 아닌데요…….”
“광장이라고 다를 게 있나요.”
이미 불러 둔 마차를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고, 신세 지고 있는 안젤라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안젤라의 말처럼 광장에선 이 삯마차보다 훨씬 더 휘황찬란한 무늬와 휘장으로 장식한 마차가 많으니, 오히려 너무 작고 낡은 마차는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감사해요, 안젤라.
또 봐요.”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아가씨.”
***
부서지는 햇빛 사이로 하얀 것이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었다.
나는 흐꾸웩을 고쳐 안으며 창문 가까이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눈이야.
태어나서 처음 눈을 본 소감이 어때?”
“우뺘뺘!”
“심장을 촉촉하게 만드는 말이네.
시인 해도 되겠다, 야.”
나와 흐꾸웩은 마차 안에서 눈에 대한 깊은 감상을 나누었다.
흐꾸웩은 내가 묻는 말에 고민도 없이 곧장 말을 내뱉었다.
이를테면 “뺘-!”라던가 “후이잉.”같은 말을.
나는 아기의 말을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덜컹덜컹.
조금씩 내리던 눈이 몸집을 부풀려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차가운 들판과 발가벗은 나무만 보이던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 반 정도 온 거 같으니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광장이었다.
흐꾸웩은 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쿨쿨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런 흐꾸웩의 강보를 단단히 여며 주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히이이잉!!”
“어, 어어?!”
쿠웅!
마차를 끌던 네 마리의 말이 놀란 듯 소리를 지르며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잘 깨지 않는 흐꾸웩이 눈을 번쩍 뜰 정도로 큰 소란이었다.
흐꾸웩은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흐꾸웩을 안아 들고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온전히 흐꾸웩한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마차가 갑자기 길 한가운데에 서버렸고, 밖에서 웬 남자의 강압적인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마부석과 연결된 창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무장한 남자가 마부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험궂게 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치려는 찰나 재빠르게 창을 닫았다.
나는 벽에 등을 딱 부딪친 채 크게 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며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좌석 옆의 창문으로 보니 호위들이 허리춤에 찬 검도 뽑지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흐아아앙!!
먀, 우앙!”
“흐꾸웩아, 우리 튀어야 할 거 같아.”
아무리 이곳이 외진 곳이라도 그렇지, 대낮의 수도에서 강도를 만나다니.
나는 앞 좌석에 세워 뒀던 가방을 메고 창밖의 동태를 살폈다.
강도들이 호위와 마부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차 안을 살피기 전에 어서 도망쳐야 했다.
나는 최대한 살금살금 움직여 마차의 문을 잡았다.
그런데 내가 힘주어 열기도 전에 밖에서부터 문이 활짝 열렸다.
찬 바람과 함께 햇빛이 쏟아져 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차가운 눈발이 귓바퀴에 내려앉았다.
익숙한 저음이 눈송이와 함께 귓속으로 녹아내렸다.
나는 감은 눈을 서서히 떴다.
“……선생님.”
블래이크가 마차 문간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빙긋 웃고는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겨울 냄새가 화악 풍겨 온다.
“집으로 가자.”
***
인생이 내 맘대로 흘러가면 그게 인생이냐.
랜서의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블래이크의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마부는 길거리에 버려졌고, 대신 블래이크의 하인이 고삐를 쥐었다.
마차에서 이동하는 내내 흐꾸웩은 오랜만에 만난 블래이크가 반가웠는지 그의 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블래이크의 저택은 칼리언의 저택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건물도 본관 하나에 별관 하나가 끝이라, 칼리언의 저택의 호수라면 여기는 말 그대로 연못이라 부를 수 있는 크기였다.
한눈에 연못이 전부 눈에 들어오는 크기.
하지만 누군가 두 저택 중 한 곳을 고르라면 나는 블래이크의 저택을 선택했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이쪽이 더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전에 블래이크가 나와 함께 살았다던 그 저택이 이곳인 게 분명하다.
나는 이 저택에 처음 와본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주변을 눈으로 훑으며 내부로 들어갔다.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앉아.”
나에겐 익숙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지만, 이곳이 블래이크의 저택이라고 생각하니 강한 위화감이 고개를 들었다.
금색과 상아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벽지, 곳곳에 배치된 수많은 화분, 그리고 화려한 색감의 그림까지.
블래이크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따뜻한 분위기의 인테리어였다.
블래이크는 필요한 가구 외엔 아무것도 방에 들이지 않은 않고, 널찍한 방을 대부분 비워둔 채 사용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토록 화사한 벽지라니…….
이 공간은 벽지부터 화분 그리고 샹들리에까지 전부…… 블래이크보다는 내 취향에 가까웠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캐모마일 차를 바라보았다.
‘목구멍일 델 것처럼 뜨거운 캐모마일 차를 좋아하시잖아요.’
랜서가 내가 즐겨 마시는 차를 알고 있던 것도 놀라웠는데 블래이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블래이크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 기호를 전부를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마차에서 놀랐던 속을 달랠 겸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았다.
흐꾸웩은 여전히 블래이크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중 나오는 방식이 요란하시네요.”
“최대한 신사적으로 굴었던 건데, 섭섭하군.”
“신사적이요?”
“그놈들 살려 줬잖아.”
쓰러져 있던 마부와 호위병을 말하는 거였다.
잔뜩 두들겨 패서 거리에 던져두고 오는 게 언제부터 신사적인 방법이 된 거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10년 사이에 많이 벌어진 모양이다.
“네가 싫어할 거니까.”
“제가 사람 목숨에 감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 거 같니.”
오래 생각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블래이크의 단정한 손끝을 바라보았다.
회초리를 쥘 땐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무서운 손이지만, 칭찬을 해줄 때는 꿀보다 달콤하게 느껴지던 손.
시선을 들어 올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10년 전의 과외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는 답이 뻔한 질문을 던져 놓고는 이 침묵마저 즐겁다는 듯이 여유로운 눈빛으로 나를 감상하고 있었다.
만일 지금이 진짜 과외 시간이었다면 나는 칭찬을 받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큰소리로 대답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열여섯의 리아나도 아닐뿐더러 블래이크도 과외 선생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상상하기도 싫은 답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왜요?
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돌려 말하자, 블래이크가 묘한 표정으로 흐꾸웩의 통통한 볼을 쓰다듬었다.
손톱 거스러미 하나 없는 길고 단정한 손.
튀어나온 뼈대마저 신이 공을 들여 만든 장식품처럼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저 손이 얼마나 사나워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희고 반듯한 손가락이 희꾸웩의 뺨을 쓸어내리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이 파고들었다.
“칼리언 워렌을 모시는 개들이야.
사람이 아니라고, 리아나.”
“……삯마차를 끄는 마부인데.”
그가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모습이 지독하게 낯설었다.
블래이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 거 같은 놈이냐 하면 단연코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손에 쥐는 놈이었다.
그래서 칼처럼 이성적인 그가 이토록 야만인 같은 말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내뱉을 줄은 몰랐다.
블래이크는 편히 잠든 흐꾸웩의 손을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여전히 멍청하구나, 리아나.”
“…….”
그가 놀랍도록 다정한 음성으로 내게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아니 비난했다.
욕을 할 거면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주고 욕을 하든가.
“제가 오늘 저택 밖으로 나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칼리언 워렌이 저택의 출입을 막는다고 해서, 내가 너를 순순히 버려둘 거 같니.
섭섭해하지 마.”
내 물음과 전혀 상관없는 생뚱맞은 말이었다.
“섭섭해한 적 없…….
아무튼, 사람을 시켜서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블래이크가 빙긋 웃었다.
미소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웃으니까 분위기가 더욱더 살벌해지네.
***
오랜만의 외출에 곯아떨어진 흐꾸웩을 재워 두고 나는 블래이크의 안내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집구경을 시작했다.
하지만 저택 내의 여러 공간 중에서도 이제 막 한 곳을 둘러보았을 뿐인데 기력이 전부 바닥나는 기분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이랑 같이 자야 한다는 거죠?”
블래이크가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침실의 한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침대를 보며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너무 오랜만이라…… 하하.”
나, 리아나 미첼.
수녀보다도 순결한 삶을 살았던 소녀다.
16년 동안 외간남자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칼리언을 이용해서 잠을 잘 때도, 등 뒤에서 그의 체온이 느껴짐과 동시에 잠에 빠졌기 때문에 동침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침에 눈을 뜰 때도 혼자인 건 당연했고, 칼리언이 옆에서 머무른 흔적 역시 찾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잠들기 전에 잠깐 껴안고 마는 게 아니라 블래이크와 함께 잠을 자야 한다.
한 이불을 덮고.
아니, 차라리 잠들 수나 있으면 다행이지, 내 불면증을 생각해 봤을 때, 이대로라면 나는 아침까지 뜬눈으로 옆자리의 블래이크를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 메말랐다.
건조한 목구멍에 억지로 침을 삼켜 봐도 입 안의 텁텁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때, 갑작스러운 온기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놀라지 않기 위해 내 모든 자제심을 끌어 써야 했다.
아씨, 깜짝아.
나는 뻣뻣해진 고개를 움직여 블래이크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침대 근처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던 내 몸을 부드럽게 움직여 침실 내부를 구경시켰다.
팔뚝을 감아쥔 악력이 은근하게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신음을 흘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가득 찬 혼란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줄 정도는 되었다.
“옛날 모습 그대로야.
아무것도 바꾸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거든.”
뒤늦게 블래이크의 목소리가 들리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응접실에서 봤던 화분들이 방 안에도 한가득이었다.
창틀에서부터 문가, 침대 옆까지.
이것들이 다 내가 몇 년간 키워 왔던 화분이란 말이야?
잎사귀는 사라진 주인이 1년간 방치했다는 사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싱그러웠다.
“어, 저건……!”
“역시 가장 먼저 찾는군.”
서적에서만 볼 수 있었던 명월초였다.
키우기 까다로운 편은 아니나 크로바티움 왕국의 반대편 대륙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초여서 여태껏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명월초의 긴 잎을 눈으로 쓰다듬었다.
“이거 말고도 더 있어요?”
“전부 그대로라니까.”
내가 신이 나서 묻자 블래이크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한 침대에서 자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걱정이 순식간에 밀려났다.
나는 저택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귀한 약초가 또 있는지 탐방했다.
한 번쯤 키워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블래이크는 내가 가는 곳마다 조용히 뒤를 따라왔다.
딱히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옆에서 내 감탄 어린 중얼거림에 거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림자.
그래, 딱 그림자처럼 졸졸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택을 구경하면 할수록 약초 때문에 들떴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블래이크의 저택은 어딘가 이상했다.
여기엔 주인인 그를 위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저택은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완벽히 꾸려져 있었다.
내 저택도 아니고 둘이 같이 살았던 곳인데…… 적어도 수많은 그림 중 한 점 정도는 블래이크가 관심 있어 하던 화가의 작품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택 곳곳을 돌아다녀도 그의 취향에 맞는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리아나는 블래이크의 이런 호의를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고 살았던 걸까.
그의 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에 기뻐했을까.
나는 다시 돌아온 침실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여태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던 블래이크가 움직였다.
그는 상앗빛 책상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손때가 잔뜩 탄 검은 가죽 수첩이었다.
“기억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랜서도 아닌 블래이크가 내게 조심스럽게 묻다니.
나는 살풋 인상을 찌푸리며 블래이크가 건넨 수첩을 받아 들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가죽 표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은 후 천천히 열어 보았다.
‘크로바티움력 696년 4월 29일.’
첫 줄, 첫 문장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 필체였다.
나는 수첩을 눈으로 훑어내렸다.
「매우 우울하다!!
12년을 살면서 이렇게 우울했던 적이 있었던가?!
여섯 살 때부터 써왔던 일기장이 빗물에 전부 젖어 버렸다.
한 장 한 장 펼쳐서 말려 봤지만, 잉크가 다 번져서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엄마 말대로 비 오는 날에 달리기 시합은 하지 말걸.
필립 그 똥구멍에 난 털보다도 쓸모없는 놈이 하는 말은 듣는 게 아니었다!
가방이 있어서 일기장은 젖지 않을 거라며!」
「크로바티움력 696년 11월 20일.
아버지께서 건국일 날에 곰 인형을 사주셨다.
생일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왕국인데 왜 나한테 선물을 주신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곰 인형이 귀여웠으므로 별말 하지 않았다.」
「크로바티움력 698년 1월 10일.
신년 파티를 열흘째 하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을 거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크로바티움력 698년 12월 26일.
엄마는 사교 모임을 좋아한다.
그래서 친구도 많다.
엄마의 친구는 다양하다.
후작님부터 양초 만드는 평민까지.
신분이나 계급을 따지지 않는다.
오늘 엄마에게 “친구를 사귀는 기준이 뭐예요?”
물었더니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다.
“친구는 계산을 하면서 사귀는 게 아니란다.”
아버지도 하인들에게 전부 존댓말을 쓴다.
아카데미 동기들은 하인들에게 상스러운 욕도 하던데.」
부모님께 사랑받으며 자라났던 나의 삶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래, 이 수첩…… 얼핏 기억이 나는 거 같다.
수첩의 질감 하며, 펜을 쥐었을 때 손가락이 눌리던 감각, 잉크 냄새.
일기는 매일 같이 꾸준히 쓴 게 아니었다.
적으면 1년에 한 번, 많으면 1년에 세 번 정도 기록되어 있었다.
일기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게 당연할 만큼 적은 횟수였다.
그마저도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선 뚝 끊겨 버렸다.
내가 꾸준히 썼더라면, 열여섯 살 이후의 내가 어떻게 살았던 건지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리아나.”
“아, 예.
기억나요.
오랜만에 읽으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좋네요.”
다정한 무게가 몸을 감싸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내려앉았으나 어쩐지 목 뒤에 묘한 소름이 끼쳤다.
약초와 일기장 때문에 밀려났던 블래이크의 존재감이 사소한 접촉 하나로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부풀었다.
블래이크는 딱딱하게 얼어 있는 내 손에서 일기장을 가져갔다.
‘탁’하고 서랍이 닫히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만 내려가자.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저녁을 준비했어.”
“……직접요?”
“원한다면,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하지.”
……블래이크가 직접 요리를 할 리가 없잖아.
당황한 나머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게다가 저택에 온 직후부터 블래이크와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가 저녁을 준비했겠는가.
왕족 출신인 그는 평생 부엌에 들어가 본 적도 없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나를 덜떨어진 사람으로 보고 있는 블래이크에게 또 멍청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그는 내게 핀잔을 주는 대신, 무안하지 않도록 말해 주었다.
아까는 삯마차를 끌던 마부가 워렌 가의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했더니 살벌하게 웃는 얼굴로 멍청하다고 잘만 욕하더니만.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이야?
친절하거나 까칠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하라고.
블래이크에게 ‘욕먹지 않을 멍청함’이란 어떤 것인지 기준을 모르겠다.
기준을.
***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완연한 밤이.
블래이크와 함께 침대를 써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밤이.
일부러 식사 속도를 늦추고,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를 물리고 홀로 손발이 퉁퉁 불 때까지 욕조에서 버텼다.
하지만, 이런저런 꾀를 부려 봐도 다 소용없었다.
태양은 이런 내 노력을 비웃듯이 부지런히 땅속으로 숨어들었고, 하늘엔 군청색 암막이 이불처럼 세상을 덮었다.
블래이크가 나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먼저 잠들어 주기를 바랐으나, 그는 득도한 성인(聖人)만큼이나 강한 인내심을 가진 놈이었다는 걸 잠시 잊었다.
10년 전 과외 시간에도 내가 지문에 답이 빤히 나와 있는 문제를 풀지 못할 때마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던 그가 아니었는가.
물론, 제한 시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칼날 같은 독설을 퍼부었지만.
“흐꾸웩아, 나랑 같이 잘까?”
나는 흐꾸웩의 동그랗게 솟은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의 배는 분유를 먹은 후 소화하기가 무섭게 바로 잠든 탓에 평소보다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평소엔 내 머리카락을 꼭 쥐고 놓아주지 않던 흐꾸웩은 오늘따라 두 손을 편안히 늘어뜨려 놓은 채로 잠에 빠져 있었다.
일부러 내 머리카락을 작은 손바닥 위에 살살 문질렀는데도 귀찮다는 듯 픽 하고 쳐낸다.
“…….”
조금 상처받았다.
나는 명백한 축객령에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는 무거운 발을 움직여 블래이크가 기다리고 있는 침실로 향했다.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섰다.
노크를 해야 하나?
오른손을 어색하게 올렸다가 내리기를 열 번 정도 반복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게 침실인데 그때마다 노크를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쓰는 경우에도…… 노크 없이 막 들어가던가?
부모님은 어떻게 했었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보아도 노크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에라이, 모르겠다.
나는 곧장 문고리를 당겼다.
“…….”
문을 여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발이 좀처럼 움직여지질 않았다.
책상에서 무언가를 적어 내리던 블래이크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거슬린다는 듯이 살짝 찡그린 눈가가 심장을 덜컹하게 만들었다.
블래이크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들었던 펜을 내려놓았다.
……노크 해야 했나 봐.
“내 얼굴 구경하는 취미라도 생겼니?”
“아닌데요.”
“그럼 들어와.오해하게 만들지 말고.”
“예.”
쭈뼛쭈뼛 걸어 침대까지 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다.
자는 척할까?
그러다 들키면 그것만큼 쪽팔린 일이 어디 있어.
책이라도 읽을까.
아…… 근데 이미 책장을 지나쳐 버렸어.
다시 돌아가야 하나.
그러나 두 발은 정직하게 앞을 향해서만 걸었다.
긴장한 몸이 뇌의 명령을 무시한 채 저절로 부드러운 이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내가 침대에 편히 앉기가 무섭게 블래이크가 일어났다.
심장이 살을 가르고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거칠게 쿵쾅거린다.
그러나 내 옆에 앉을 줄 알았던 블래이크는 침실의 불을 전부 끄고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의 램프만이 아늑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먼저 자.”
블래이크가 담백하게 말했다.
함께 침대에서 잔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홀로 바짝 긴장한 것이 머쓱해지는 어투였다.
손등이라도 스칠 줄 알았는데, 블래이크는 내 손등은커녕 나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뭐 하시는데요?”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허무하게 풀어졌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는 그 위에 턱을 기대었다.
“아버지께 편지.”
“아…….”
복잡하고 머리 아픈 논문을 쓰는 중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꽤 감성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블래이크가 내 침묵을 다르게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가볍게 사냥을 나가실 정도로 많이 회복되셨어.”
레토니아 국왕이 병중에 있었나?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블래이크는 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기에 차마 되물을 수 없었다.
그저 그러냐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사고 당시에 아버지를 지켰던 호위 기사들을 전부 숙청하고, 새로 등용했어.전에 있던 놈들보다 훨씬 실력 있는 인재들이지.호위의 수도 늘렸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블래이크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위로는 국왕의 친자인 블래이크가 아니라 내 쪽에서 해야 하는 거였다.
“…….”
“다신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소리야.”
블래이크가 잠시 멈추었던 펜을 움직이면서 덧붙였다.
“아버지께 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안 돌아가.”
“…….”
“평생 네 곁에 머물 거야.
1년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
그의 내리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굴은 건조해 보였지만,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연달아 말하는 어투에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블래이크가 크로바티움을 1년간 떠났던 이유가 라토니아 국왕의 사고 때문이었구나.
새로 습득한 사실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정리해보자면, 지난 1년간 랜서는 전쟁에 차출당해서, 칼리언은 내가 그의 물건을 훔쳐서 도망치는 바람에, 그리고 블래이크는 병세가 위중해진 아버지 때문에 나와 만나지 못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날짜가 딱 들어맞았다.
그럼 이 세 남자가 없던 1년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이 세 남자가 없는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만삭의 배로 타지로 건너간 걸까.
누구를 피해서.
이때 가볍게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블래이크가 램프를 들고 일어나 침대로 다가왔다.
탁.
협탁 위에 램프를 놓고는 내 옆자리에 앉는다.
옷자락이 살짝 스칠 정도의 거리였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다 쓰셨어요?”
“네가 있어서 집중이 안 돼.”
“……말은 저보다 선생님이 더 많이 했는데.”
왜 내 핑계를 대냐고 덧붙여 말하고 싶었으나 그의 시선이 내 뺨을 태울 듯이 뜨거워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내 발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순간 큼지막한 손이 내 골반을 감싸 쥐었다.
“아!”
“아무 짓도 안 해.”
어둠 속에서 지독하게 낮은 저음이 흘렀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음성 때문에 그의 말뜻을 뒤늦게 이해했다.
몸이 쑤우욱 미끄러지며 푹신한 베개가 뒤통수에 닿는다.
블래이크는 나를 재우려는 듯이 이불을 가슴 위까지 덮어 주었다.
커다랗게 뜬 눈 위로 엄지손가락이 내려앉는다.
그는 내 눈두덩이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만 꼼질거리고 자야지.”
그와 나란히 누운 자세가 되자 진심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불면증이 아니더라도 나는 잠들지 못했을 거다.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제 꿨던 그 음란한 꿈이 머릿속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내 안을 파고들던 남근과 땀에 젖어 미끈거리던 팔뚝, 열에 들뜬 숨결까지.
하아, 미치겠네.
할 수만 있다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가만 보니까, 꿈속의 남자와 블래이크의 가슴 사이즈가 비슷했던 거 같다.
옷에 가려져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근육의 윤곽이 비슷했다.
한번 만져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어디 그뿐인가.
남자의 신체를 기억하기 위해 그 괴물 같던 조, 좆도 만졌었고, 복근도 쓸어 보았고, 질 안을 드나들던 감각까지 필사적으로 느꼈었다.
움찔.
블래이크가 조금 뒤척였다.
나는 살색이 난무하던 머릿속을 들키기라도 한 듯 몸을 크게 떨었다.
“크흠, 콜록, 콜록.”
“몸이 안 좋아?”
블래이크가 상체를 조금 일으킨 후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숨결이 은근하게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입 안에 침이 흥건하게 고였다.
꿀꺽.
나는 침을 삼킨 후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까 찬 바람을 쐤더니.”
“의원을 부를 게 누워 있어.”
“아뇨!진찰을 받을 정도는 아니고…….”
“출산한 지 얼마 안 됐잖아.내가 걱정돼서 그러니까, 얌전히 진찰받아.”
“……네.”
블래이크는 침실 밖으로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과 하녀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오랜 검사 끝에 나온 병명은 ‘피로’였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니 몸이 피로한 건 당연한 거였다.
나는 속으로 ‘꾀병입니다.’
따위의 소리를 듣지 않아서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오랜만이라 어색하겠지만, 그래도 자려고 노력해 봐.할 수 있지?”
그가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못해요, 못한다고요!
불면증이라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으나 침과 함께 눌러 삼킨 후 고개를 끄덕였다.
블래이크는 나를 뒤에서부터 안락하게 끌어안은 후 배를 도닥였다.
재우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도리어 정신이 말짱해졌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과 내 몸을 감싼 체온이 전부 야릇하게 내 몸을 달구었다.
나는 이날, 내 생에서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
미치고 환장하시겠네.
“솔직히 말해.”
“뭐, 뭘요?”
“내 얼굴 구경하는 취미 생긴 거 맞잖아.”
“아니라니까요.벌써 몇 번째 묻는 거예요.”
“네가 몇 번째 넋 놓고 보고 있는 건지 알고 하는 말이지?”
블래이크가 재밌다는 듯이 물었고,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사람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야한 생각이나 하다니.
블래이크와 함께 있는 내내 꿈속의 장면들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나중에는 꿈속의 남자 얼굴이 블래이크로 보이기도 했다.
내가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쉽게 달아오르는 몸의 반응을 보니…… 더 이상 부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변태다.
개변태.
블래이크는 이런 내 머릿속 상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싶다.
나는 한 페이지가 채 넘어가지 않은 책을 내려놓았다.
“그만 읽게?”
“네.아기 이리 주세요.”
흐꾸웩은 블래이크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안젤라보다 블래이크를 더 잘 따르는 것 같다.
안젤라와 있을 때는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내가 보고 싶다면서 칭얼거렸으나, 지금은 하루 반나절을 블래이크와 있어도 나를 찾지 않는다.
나, 리아나 미첼 16…… 아니, 26세.
이토록 강한 배신감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내가 토할 거 같은 것도 꾹 참고 똥 기저귀 다 갈아 줬더니.
내가 블래이크를 향해 손을 내밀자 흐꾸웩이 “꺄항!”하고 웃으며 저도 나를 따라서 손을 뻗었다.
앙증맞은 몸이 내 품으로 안겨 왔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이게, 지가 귀여우면 단 줄 알아.”
나도 흐꾸웩을 따라 배시시 웃으며 통통한 배를 콕 찔렀다가 뗐다.
흐꾸웩을 안고 있으니까 머리를 괴롭히던 음탕한 상상도 잠잠해졌다.
그래, 애 앞에서까지 남의 좆이나 가슴 크기를 떠올리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지.
***
……나는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다.
흐꾸웩의 방어막도 피로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사흘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제정신이 아니니까 판단력도 점점 흐려졌다.
나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야한 생각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아니.
밀어낼 기력도 없었다.
이대로 칼리언의 저택으로 돌아가서 잠이라도 잘까 싶었지만, 블래이크에게 그랬듯이 칼리언을 앞에 두고 야한 생각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침대에서 뒹구는 상상을 한다니…… 스스로가 몹시 방탕하게 느껴졌다.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고, 나는 멀뚱멀뚱 뜬 눈으로 컴컴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려지는 것은 뒤에서부터 내 팔뚝을 단단히 붙든 채 허리 짓을 하는 블래이크였다.
시발.
망했어.
뇌가 어떻게 돼버린 것만 같아.
“또 잠을 못 자겠어?”
입 열지 마요.
지금 네가 하는 모든 말들이 야릇한 신음 소리로밖에 안 들리니까.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이때 큼지막한 손이 내 턱과 뺨을 한 번에 잡았다.
이어서 묵직한 것이 내 몸을 겹쳐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혼곤함에 느릿느릿 오르내리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어둠에 녹아든 흑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발끝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묻잖아, 리아나.”
“막 잠들려고 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피를 토하면서 죽어 가는 중이라도, 내가 부르면 대답하고 손을 내밀면 잡아.알아들어?”
“우리나라 말을 하시니까…… 알아듣긴 했는데요.”
정신이 혼몽한 와중에도 블래이크의 집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불안해 보이는 건 집착당하는 내가 아니라 블래이크였다.
그의 등을 도닥여 주며 알겠다고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와 같은 집착을 목도한 게 처음이 아닌 건가.
내 몸은 태연하다 못해 상대의 기분까지 파악할 만큼 이런 일에 익숙한 것 같았다.
“리아나.”
그가 어둠 속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나는 그의 부름에 순순히 응답했다.
“리아나.”
“여기 있어요.”
“그래.”
숨 막히는 분위기에 비해 싱거운 대화였다.
그는 몇 번이나 확인받은 뒤에야 내 얼굴에서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었다.
배와 가슴이 그의 몸에 살며시 겹쳐져 있었다.
그의 뜨겁고 단단한 육체가 느껴지자 순간적으로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나는 손톱을 손바닥 깊숙이 박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빌어먹을 꿈!
꿈!
꿈!
차라리 눈이라도 감아서 외면하고 싶었는데, 블래이크의 진득한 시선에 눈동자가 묶여 버린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뇌 속까지 내 말을 듣는 놈들이 단 하나도 없다.
나와 블래이크는 서로의 호흡을 오래도록 주고받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러나 내 속은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것만큼 혼잡스러웠다.
그래서 블래이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부드러운 것이 내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두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입맞춤이었다.
그만큼이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고 또 갑작스러웠다.
순간 내가 욕망을 이성으로 누르지 못하고 그에게 입술을 비빈 줄 알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손은 여전히 이불 속에 머물러 있었고 뒤통수도 베개에 안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
입술은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블래이크가 내 아랫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가 뗐다.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내가 화끈거리는 아랫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무는 순간이었다.
“으읍, 하아.”
블래이크가 다시 고개를 내려 입술을 겹쳤다.
처음보다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내 입에서 탄성과도 같은 신음이 흘렀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같은 소리였다.
다시 입술이 떨어진다.
나는 홀린 듯이 축축해진 그의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밤의 고요가 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블래이크가 이불을 걷어 내고 대신 자신의 몸을 겹쳐 왔다.
발끝까지 밀려난 이불을 다시 끌어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겹쳐 오는 입술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흐응, 아…….”
입술이 얕게 맞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촉, 촉 살이 맞물리는 소리가 귓가를 홧홧하게 데웠다.
뜨거운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귓바퀴를 훑어 내린다.
나는 어지러이 헝클어지는 머리칼을 정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구걸하듯 블래이크의 입술에 매달렸다.
가볍게 쪽쪽거리던 입맞춤이 점차 진득해지고, 깊어졌다.
서로의 메마른 입술을 비비다가 안쪽의 여린 살까지 흡입하듯 빨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가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어 들었다.
“하읍…….으!”
“입 벌려.박아 줄 테니까.”
그가 한 손으로 내 턱을 부여잡고 사납게 얘기했다.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그의 이글거리는 흑안을 응시했다.
블래이크가 물고 빤 탓에 부풀어 있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블래이크가 먹잇감을 도륙하는 짐승처럼 내 입을 집어삼켰다.
“으읏, 아, 읍…… 아파요!”
살을 부드럽게 비비며 교감하는 키스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사냥당하고 있었다.
단단한 치아가 아랫입술을 도려낼 듯이 깨물고, 손가락을 입 안으로 밀어 넣어 볼 안쪽을 깊게 찔렀다.
한쪽 볼이 톡 하고 튀어나오자 곧장 이를 박았다.
그는 내게 표식을 남기듯 입가 전체에 잇자국을 냈다.
비릿한 피 맛이 타액과 섞여 혀 밑에 고였다.
“아!자, 잠깐…….”
블래이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허벅지를 받치고 위로 들어 올렸다.
무릎이 구부려지며 축축하게 젖은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
그 사이로 블래이크의 하반신이 맞붙자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배꼽에 하읍, 따, 딱딱한 게 닿아서…….”
내 다리 사이를 꾸욱 누르다 못해 배꼽 위까지 침범한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신체가 아니었다.
이건 둔기라고 불리는 게 더 어울리는 크기였다.
무시무시한 것이 다리 사이에 비벼지자 열기로 녹아내렸던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너무, 읏, 문지르지…….아!”
머리가 핑핑 돌았다.
꿈속에서는 단순히 옷 위로 문지르고 끝난 게 아니라 이것이 내 안을 쑤셨다가 나가길 반복했었다.
미쳤다.
진짜 미쳤어.
지금도 미칠 것만 같은데…….
이걸 어떻게 몸 안에……!
“으응!아!”
“가만히 있어.”
아랫배 전체를 짓누르는 그것을 피하고자 허리를 뒤로 물렸으나 침대에 가로막혀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블래이크는 나의 도주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혼내듯이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몸이 크게 들썩이고,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아래에 딱딱한 것이 거칠게 비벼진다.
“하윽!”
“얌전히 있어야지.
선생님이 좋은 거 가르쳐 주잖니.”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느껴지는 은은한 숨결에 취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블래이크는 내 입 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혓바닥을 아래로 꾸욱 눌렀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올라온다.
마치 끄덕이는 듯이.
“입술 모아.”
나는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그의 손가락 두 개를 입에 담은 채로 입술을 오므렸다.
블래이크가 삽입하듯 손가락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옷 위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읍, 음!읍, 우움!”
그의 육감적인 허리 짓이 계속될수록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목구멍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는 손끝 때문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음에도 손가락을 뱉어내지 않았다.
뱉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착하지?아, 하렴.”
그의 명령에 자아를 상실한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블래이크가 벌어진 입 안으로 제 숨결을 밀어 넣었다.
후우.
열기로 온통 뜨거운 입속을 식혀 주듯이, 부드럽게.
나는 관자놀이 밑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숨결을 받아먹었다.
“말 잘 듣는 학생에게는 상을 줘야지.”
“허리, 그만, 으, 읍, 그만, 움직여 주세요, 선생, 하아, 아!”
벌어진 입 사이로 혀가 부드럽게 밀고 들어왔다.
혀끝을 가볍게 건드리고, 열이 오른 점막을 쓰다듬자 정신이 하얗게 흩어지며 눈앞이 어찔해졌다.
질척한 혀의 감촉에 몸이 절로 파르르 떨려 왔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이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치 충격적이고, 위험했으며 또 알 수 없는 갈급함을 유발했다.
내 몸이 생소하기만 한 이 쾌감을 미치도록 원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블래이크를 밀어내고 싶으면서도 그가 내게 더한 황홀함을 가져다주길 바라고 있었다.
“저, 흐읍…… 모, 목소리가, 이상, 아!우웁……!”
블래이크가 살짝 입을 떼자 나와 그의 입술 사이에 질척한 타액이 거미줄처럼 이어졌다.
“네가 원하던 거잖아.더 기쁘게 울어야지.”
거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내가 블래이크를 볼 때마다 불건전한 생각을 했다는 걸 그도 눈치채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오며, 미약한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다.
“부끄러워하지 마.
나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가 내 내리깐 눈꺼풀에 입술을 살며시 붙였다.
“추잡하니까.”
“아!”
블래이크가 예고도 없이 크게 허리를 쳐올렸다.
굵고 뭉툭한 것이 젖은 아래를 푹 찌르자, 저릿한 쾌감이 진하게 퍼졌다.
나는 그가 눈꺼풀을 지분대고 있다는 것도 잊고 두 눈을 부릅떴다.
예민한 점막 위로 혀가 문질러졌다.
눈가에 시큰한 통증이 퍼졌으나 고통과 쾌감의 경계가 모호했다.
“하으으.아.”
그의 가슴을 밀어내던 손은 어느새 머리맡의 침대 시트를 쥐어뜯고 있었다.
퍼억, 퍽!
블래이크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폭력적인 소음이 방안을 울렸다.
천 너머로 뭉툭한 성기 끝이 입구를 꾸욱 눌렀다가 길게 음핵을 비비곤 물러나길 반복했다.
“아!아흣, 아, 아파요…….”
“착각하지 마.안 넣었어.”
블래이크는 이를 악물고는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여 댔다.
아래를 거칠게 쳐올리는 움직임에 아릿한 느낌이 드는데, 블래이크는 내가 엄살을 부리고 있다고 타박했다.
성난 페니스는 당장에라도 옷을 뚫고 내 안으로 처박힐 기세였다.
“흐읍…… 음!”
흥분한 블래이크가 내 입술을 집어삼키며 허벅지를 길게 쓸어 올렸다.
옷자락이 골반 위까지 올라가며 공기가 피부에 엉겨 붙었다.
나는 토할 듯 울렁대는 성감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바르작바르작 떨었다.
블래이크의 허리 짓이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거세졌다.
혀뿌리가 아프도록 빨아 대던 블래이크가 나직이 욕을 짓씹더니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하체가 틈 없이 꽈악 맞붙음과 동시에 그가 허리를 뭉근하게 돌린다.
길고 굵은 페니스의 형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아, 리아나.”
“선생님, 아…….”
블래이크는 가로막고 있는 천이 혐오스러워 미치겠다는 듯이 욕을 짓씹었다.
그러곤 옷을 뚫어 버릴 기세로 아래를 강하게 쳐올렸다.
퍽, 퍽!
퍼억!
그가 움직일 때마다 뇌가 징징 울려댔다.
위태롭던 정신이 사정없이 부서지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욕망이 내 몸을 휘어잡았다.
서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우리는 죽을 것처럼 헐떡거리며 서로의 몸을 더듬고,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땀과 타액, 눈물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온몸이 질척거렸다.
피부에 달라붙은 옷이 마구 구겨지고, 격한 숨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퍼져 나갔다.
“하아, 아, 흐으윽…….”
신음은 어느새 울음처럼 변해 있었다.
나도 내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블래이크의 움직임에 따라 짐승처럼 허리를 들썩이고, 그가 주는 감각을 더 느낄 수 있게 다리를 넓게 벌렸다.
블래이크의 팔뚝이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그의 목에도 힘줄이 바짝 섰고 머리칼은 땀에 젖어 흐트러져 있었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던 그가, 늘 금욕적이고 싸늘한 눈으로 세상을 대하던 선생님이 음욕에 젖어 있었다.
그는 절정을 눈앞에 둔 듯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고, 나는 흔들렸다.
위험할 정도로 아찔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내달렸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성큼성큼 차오르더니 이윽고 폭발하듯 부서져 내렸다.
“흐읏, 아, 아아!”
감당하기 버거운 쾌감이 찾아들었다.
심장이 망치라도 된 것처럼 몸을 쾅쾅 울리고, 사지 말단까지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하아, 선, 선생님…….이거, 시, 싫어, 아, 아!”
발버둥 쳐봐도 거대한 몸에 깔아뭉개진 나는 쾌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내 입속에 혀와 손가락을 삽입하듯 쑤셔 박아도 벌어진 입은 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체액에 푹 절여진 채 말라 가고 있었다.
쾌감에 사로잡혀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몇 번 더 허리 짓을 이어 나가던 블래이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신 늘어져 있던 내 손목 안쪽에 입술을 비비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하아, 하아, 하아…….”
전력 질주라도 한 듯이 뜨거운 숨결이 손목에 스며든다.
블래이크는 내 손목에 입과 코를 박으며 자신의 아랫배 부근을 어루만졌다.
굵직한 성기가 배꼽을 가리며 바짝 기립해 있었다.
그의 바지춤은 어느 틈에 골반까지 내려가 있었고, 셔츠가 들썩일 때마다 그 안의 남근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길 반복했다.
블래이크는 내 손목을 이로 잘근잘근 씹으며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서, 선생님…….”
내가 질겁하며 부르자, 그가 어금니를 짓씹었다.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가고, 페니스를 쥔 손이 억세게 파들거렸다.
블래이크는 무언가를 참아 내려는 듯이 페니스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눈물로 흥건해진 내 뺨을 부드럽게 입술로 머금는다.
“선생님이라는 호칭 그만 집어치워.”
“…….”
“당장 쑤셔 박아 달라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니까.”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래이크는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고, 배꼽 위까지 밀려 올라간 옷을 정돈해 주었다.
드디어 내 몸 위에서 내려온 그는 한껏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절로 한숨이 크게 터졌다.
그리고 뒤늦은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미쳤다.진짜 미쳤어.”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는 새벽 안개가 뿌옇게 부유하고 있었다.
쓰라린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이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폭풍처럼 지나간 키스는 강렬했고 황홀했다.
나는 정말 미친 게 틀림없었다.
배 속의 욕망은 해갈되기는커녕 오히려 크기를 부풀리고 있었다.
블래이크가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고, 갈아입을 옷을 건네줄 때도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에게 또 내 욕망이 들킬까 봐.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