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꿈속의 단서
10년 사이에 대체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르는 척하기 힘들 만큼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적의는 분명 나를 향한 것이었다.
게다가…… 열여섯 살 때는 나랑 키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던 놈이 지금은 고개를 바짝 젖혀야 겨우 턱 끝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자랐다.
키도 덩치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거대해져 있었지만, 놈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쉽게 잊힐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릿발보다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눈은 내가 알던 말더듬이 칼리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집요한 시선에 살과 뼈가 샅샅이 해체되는 기분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밤보다 깊은 새벽 속에 숨어들어 당황하고 있을 내 얼굴을 감추고 싶었다.
나는 칼리언의 앞에선 늘 대장 노릇을 했었다.
그의 영웅을 자처하며 내 입맛대로 칼리언을 굴렸는데…….
“유리창에 머리라도 들이받을 기세네.”
“…….”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를 휘감아 올렸다.
그가 먼지와 땀이 엉겨 붙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차가운 손끝이 잔뜩 예민해져 있는 귓바퀴를 은근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 간지러운 접촉 하나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머리털까지 바짝 서는 기분이다.
“어울리지 않게 굴지 말고, 앉아.”
“…….”
그가 나를 지나쳐 갔다.
시원한 체취가 그의 동선을 따라 은은하게 풍겼다.
나는 시선으로 그를 좇다가, 한발 늦게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열여섯 코흘리개에서 순식간에 건장한 어른이 된 칼리언에게 기가 죽었다.
나는 몸만 자랐을 뿐, 정신은 아직 열여섯에 머물러 있었다.
10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는데, 시간을 통해 배우는 성숙함을 학습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칼리언은 정복자처럼 긴 다리를 꼬아 앉았다.
칼날 같은 적안이 내게 내리꽂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그의 턱 끝에 고정한 채로 손만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오랜 적막이 이어졌다.
그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지레 긴장한 나머지 입속에 잔뜩 침이 고였다.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이 침묵 속에선 꿀꺽하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크게 울릴 게 뻔했다.
앉은 소파는 가격표를 찾아보지 않아도 될 만큼 값비싼 소파임이 분명했으나 차라리 딱딱한 돌바닥 위에 앉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될 만큼 불편했다.
이 불편함의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눈앞의 칼리언, 저놈이고.
놈은 맛 좋은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한껏 여유로워 보였고, 나는 조금만 긴장을 풀면 곧장 목이 뜯길 듯이 위태로웠다.
어깨에 납덩이가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칼리언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숨이 턱 막히다니…….
말도 안 돼.
솔직히 말하면 저놈은 내 부하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저놈의 체격이 바위처럼 단단해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쫄아 있진 않았을 텐데.
쓸데없이 위험한 분위기나 풍기고…….
“…….”
하지만 언제까지 그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잘게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껍데기 안에 있는 알맹이는 내가 알던 말더듬이 칼리언이다.
말더듬이 칼리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없던 용기가 샘솟았다.
한…… 개미 뒷다리 길이 정도.
“크흠흠…… 손님이 왔는데, 아무것도 안 내줘?
하다못해 물이라든가…….”
“…….”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가 한발 늦게 피식 웃었다.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손님이라.”
“…….”
조소를 띈 시선을 마주하자 덜컥 겁이 났다.
나를 찍어누르듯이 응시하던 칼리언은 꼰 다리를 풀고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곤 내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윽……!”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짧은 비명을 터뜨렸다.
“뻔뻔하네, 리안.”
“…….”
젠장, 가만히 있을걸.
본전도 못 찾았다.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턱을 쥔 큼지막한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내 뺨을 감싸 올라왔다.
“아…….”
저 손으로 때리기라도 할까 봐 절로 위축된 신음이 튀어 나갔다.
그러나 그 손은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지르고는 다시 멀어졌다.
그제야 막혔던 숨이 탁 터지며, 내가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 전체에 그의 체온이 끈적하게 남아 나를 묘한 기분으로 끌어당겼다.
……놀래라.
진짜, 진짜로 한 대 얻어맞는 줄 알았다.
칼리언의 태도를 보아 하니 내가 그에게 큰 잘못을 한 것 같긴 한데…….
번번이 그를 구해 주고, 연고를 발라준 기억밖에 없는 나로선 이 상황이 조금 억울하다.
게다가 이 심정을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기억에도 없는 잘못 때문에 내 부하 같던 녀석에게 눈치를 봐야 한다니…….
나는 입술을 꾸욱 눌렀다 떼며 말했다.
“미안해.
햇빛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봐.”
언제 흥분했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주시하던 칼리언이 따분한 낯으로 턱을 괴었다.
내 허술한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칼리언이 나와 뜨겁게 몸을 섞었다는 마탑주는 아닌 것 같지……?
지금 놈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를 혐오스러워하고 있었다.
칼리언이 10년 만에 이렇게 사납게 변해 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이놈이 세 번째 애 아빠 후보가 아니란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칼리언의 권태로운 얼굴을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치면 다시 시선을 돌리고 또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폭군 앞에 선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폭군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순간 즉결 처형당하는 광대.
서슬 퍼런 눈빛이 나를 추궁하는 듯했다.
빨리 무슨 말이든 꺼내서 그의 화를 달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였다.
“그…… 매일 매일 너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느 정도의 미안함이었냐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루에 케이크를 딱 50개만 판매하는 베이커리의 케이크를 겨우겨우 사 와도 네 얼굴이 떠오르면 포크를 내려놓을 정도라고 할까…….”
“나만 생각하면, 밥맛 떨어진다는 거 아냐?”
“아냐!
너한테 크은 잘못을 한 나 따위가 감히 이 귀한 케이크를 먹어도 되는 걸까……하고 반성한 거지.”
“눈물겨운 사죄네.”
“그렇지…… 열흘 넘게 도전했는데 실패한 케이크였으니까.”
칼리언이 소파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러곤 긴 다리를 양옆으로 벌려 앉았다.
탄탄한 허벅지를 감싼 검은 바짓단이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갑작스러운 사타구니 공개에 시선이 절로 다리 사이로 향했다가 황급히 눈을 돌렸다.
“네가 나한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달았으면.”
“…….”
“네가 앉을 자리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는 것도 알겠지, 리안?”
칼리언이 턱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이제 와서 다정하게 몸을 겹쳐 앉자고 하는 건 아니겠고…….
맨바닥에 앉으라는 건가?
이건 주인을 섬기는 가축에게나 취할 법한 태도였다.
“…….”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칼리언한테 이런 수모까지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칼리언은 내가 미워 죽겠으면 그냥 감옥에 내버려둘 것이지 왜 어마어마한 보석금까지 지불하고서 나를 빼 온 건지 모르겠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머릿속엔 칼리언을 향한 궁금증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중이었다.
키는 왜 그렇게 커졌어?
옛날엔 비리비리하더니 언제 또 이렇게 근육을 키운 거야?
말 더듬거리는 건 어떻게 고쳤는데, 아카데미는 무사히 졸업했어?
하지만 이 모든 궁금증보다 앞선 부탁이 있었다.
이야기를 꺼낼 상황이 아니라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칼리언의 태도를 보아 날 선 분위기는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기회만 엿보다가 영영 말을 못 꺼내게 될 것만 같았다.
“네게 한 잘못을 무슨 일을 해서라도 갚을게, 대신…….”
“대신이 왜 붙지?
네가 뼈와 살을 깎아 가면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평생 갚지 못할 도둑질에.”
……도둑질?
내가 그의 물건을 훔쳤단 말인가.
미안한 척 울상짓고 있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당황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미친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표정을 지웠다.
“알아.
네 걸 훔쳐 놓고 입을 닦겠다는 건 아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을게.
다만 그 전에…… 아이를 찾아야 해.”
뜻밖의 얘기라는 듯 무심하기만 하던 칼리언이 흥미를 보였다.
“기사단에 잡혀가기 전에 블래이크에게 아이를 맡겨 뒀었어.
지금 당장 데리러 가고 싶은데…… 블래이크의 새 거처가 어디인지 몰라.
아이를 찾을 때까지만 시간을 좀 주면 안 될까.”
칼리언이 보석금을 내주면서까지 날 빼낸 이유는 모르겠지만, 높은 확률로 좋은 마음에서 한 건 아닐 거다.
재화의 가치를 넘어서는 중요한 걸 훔친 나를 옆에 두고 분풀이를 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기억에도 없는 짓으로 놈에게 남은 인생을 저당 잡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선 흐꾸웩을 찾은 후에 이놈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다.
“아이라…….”
그의 시선이 내 배 쪽으로 향했다.
입가를 매만지는 손 때문에 그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애를…… 낳았거든.”
“네 구멍에 들락거리던 좆이 몇 개인데.
임신이 안 될 리가 없지.”
“그렇지 한두 개도 아니고 세……뭐?”
놈의 적나라한 표현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차라리 블래이크가 구멍이니 조, 좆이니 하는 말을 했더라면 이만큼이나 충격받진 않았을 거다.
내가 옆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던 칼리언이……!
귀엽기만 하던 칼리언이 어떻게 이런 막돼먹은 어른으로 자라난 거지?
내가 놀라서 입을 떠억 벌리자 그가 소파에서 등을 떼고 바로 앉았다.
“내 아이야?”
“네 아이라니…….
자,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네가 마탑주…….”
칼리언은 잠자코 내 입에서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내심 그가 마탑주라는 말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나를 무안 주길 바랐다.
“……마탑주구나.”
나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랑 살림을 차리는 편이 덜 절망적일 것 같았다.
애 아빠 후보가 블래이크에 랜서, 그리고 칼리언이라니.
“말하기 싫다 이건가.
뭐, 상관없어.”
칼리언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래이크의 거처라면 내가 알고 있어.”
“정말?!
주소만 알려 줄 수 있을까……?”
“사람을 시켜서 데리고 올 테니까, 그 냄새 나는 옷이나 갈아입고 있어.
목욕도 좀 하고.”
“아냐.
그렇게까지 안 도와줘도…….”
되는데…….
칼리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려던 말이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대신 내가 발가벗겨진 채로 거꾸로 매달릴 것만 같았다.
칼리언이 먼저 자리를 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가 나를 데리러 왔다.
미리 물을 받아 놨는지, 둥근 욕조 안에 김이 풀풀 나는 따뜻한 목욕물과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했다.
딱히 씻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욕조를 본 순간 당장 저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마구 샘솟았다.
“아가씨, 목욕 시중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녀가 익숙하게 내 옷을 벗겨 갔다.
맨살 위에 부드러운 가운이 닿는다.
이때, 다른 하녀가 내 옷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
제 옷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린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하녀가 처음으로 사람다운 반응을 보였다.
한쪽 뺨을 움찔하면서 내 옷을 내려다보고는 묻는다.
“세탁해서 침실로 가져다 놓을까요?”
“……예.”
그거 아니면 입을 옷 없단 말이에요.
블래이크의 집으로 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가지고 있어야 했다.
당신들 눈에는 걸레짝 같겠지만, 내 유일한 재산이란 말이에요!
“옷 안에 수첩이 있는데, 빨기 전에 꼭 빼놔 주세요.”
“알겠습니다, 리아나 아가씨.”
하녀가 나간 후, 나는 다른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피부를 감싸자 피로가 발끝으로 전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수면이 입술 바로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나는 노곤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에 내 침실이 있는 건가.”
동거는 블래이크와 했다고 들었는데…….
설마, 요일 남편처럼 일주일에 세 번은 여기, 네 번은 블래이크 집으로 왔다 갔다 했다든가…….
와.
나 진짜 문란함을 넘어선 쓰레기잖아.
“아프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
좋아요.”
어깻죽지부터 목 뒤 그리고 두피까지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손길이 달콤했다.
이대로 잠들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나른하게 늘어지기만 할 뿐 도통 잠에 빠져들 순 없었다.
흐꾸웩을 껴안고 있으면, 좀 나으려나…….
목욕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 옷을 세탁하겠다던 그 하녀가 새 옷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왕궁 같은 저택에 성인 여성이 입을 만한 옷 한 벌 없다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나한테까지 옷을 내어줄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내 몸에 맞춰서 재단한 듯 딱 맞는 사이즈에 조금 놀랐다.
“……역시 두 집 살림 한 게 맞았나 봐.”
“네?”
“아, 아니에요.”
“주인님께서 자베른 님의 저택에 사용인을 보내셨으니 곧 마차가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다과라도 드시면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벌써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이었다.
오랜만의 마사지가 좋아서 욕실에 오래도록 눌어붙어 있었던 건 맞지만, 그래 봤자 한 시간일 터였다.
무슨 이웃집에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빨…….
설마, 정말로 이웃집인가?
칼리언의 소유지로 보이는 정원이 넓은 탓에 아무리 창밖으로 고개를 빼내도 온통 들판밖에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숲속 한가운데 떨어진 것처럼 길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택 밖으로 엄연히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목이 트여 있었기에 그 길로만 주욱 따라 걸으면 광장도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
“예.
걸어서 가기엔 멀지만, 마차를 타면 금방 도착하니까요.”
블래이크의 저택은 칼리언뿐만 아니라 내 목욕 시중을 들어 주던 하녀마저도 알고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하…….
섣부르게 칼리언한테 부탁하지 말고, 내가 좀 더 찾아볼걸.
안 그래도 칼리언한테 갚아야 할 돈이 산더미고, 또 돈으로 갚지 못할 무언가 때문에 몸까지 바쳐야 할 판이었다.
여기서 더 빚을 늘리긴 싫었는데…….
“아가씨,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블래이크를 맞이할 응접실로 안내해 주세요.”
하녀는 내 옷을 받아 들었을 때처럼 난처한 얼굴을 했다.
또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상한 말은 없다.
“저…… 블래이크 님은 한 번도 저택 안으로 들어오신 적이 없으셔서요.
리아나 님께서 저택 밖에서 기다리시기엔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 때문에 혹여나 감기라도 걸리실까 걱정이 됩니다.”
타국의 왕자를 문전 박대하는 경우가 어디 있지?
전에 지하 감옥에서 플로란이 말한 대로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마탑주라는 별명이 딱이었다.
“그럼 정문이 보이는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네, 아가씨.”
하녀가 예상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나보다 반 발자국 앞장서서 걸었다.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움직이는 그녀의 태도는 꽤 익숙해 보였다.
내가 전에도 이런 말을 했었나.
넌지시 추측할 뿐이었다.
하녀가 나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생활감이 느껴지는 집무실이었다.
문패가 없어도, 서류가 잔뜩 쌓인 긴 테이블 하며, 누군가의 코트가 걸려 있는 옷걸이,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 한쪽 벽면 가득 채운 책장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하녀는 집무실 구석에 놓여 있던 짙은 보라색 벨벳 의자를 창문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삭막하기만 한 집무실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화려한 의자였다.
“이곳에 앉아 계시면 정문이 바로 보입니다.”
정말이었다.
탁 트인 정원과 하인들이 지키고 선 정문까지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다.
하지만 옆 방에서도 충분히 정문은 보일 것 같았다.
남아도는 접견실도 아니고…….
이렇게 남의 집무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건 조금 불편했다.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보아 하니까 여기는…….”
“주인님께서 사용하시는 집무실입니다.”
그걸 누가 몰라?
칼리언의 저택이니까 당연히 칼리언의 집무실이겠지.
내 말의 요지는 당신이 그렇게 깍듯하게 모시는 주인님의 집무실을 고작 바깥 구경을 한다는 이유로 들어와도 되냐는 거지!
다행히 내 속뜻을 알아차린 하녀는 깊게 미소 지었다.
“주인님께서는 관대하시답니다.”
……칼리언은 몸만 자란 거지, 여전히 호구 취급받는 게 틀림없다.
꺼림칙하긴 했으나 하녀가 저렇게 당당한 얼굴로 괜찮다고 하니까, 일단은 의자에 앉았다.
놀랍게도 의자의 길이와 팔걸이 위치 그리고 등받이 각도까지 내 몸에 맞춰서 제작한 것처럼 딱 알맞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의자나 하녀의 태도를 보아 이곳에서 한가로이 바깥 구경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 거 같았다.
편한 몸과 다르게 머릿속은 새로 추가된 퍼즐 조각 하나에 엉망이 돼버렸다.
남의 집무실에 내 전용 의자까지 들여놓고 있다니.
평정심 위로 비집고 솟아오르는 짜증을 억누른 채 이 상황이 익숙한 척 연기했다.
평평한 창턱에 양팔을 기대고, 쏟아지는 햇빛을 얼굴로 맞았다.
머릿속이 바늘 하나 들어갈 자리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까지 모은 기억의 조각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를 만큼 난장판이다.
차분히 시작해 보려고 해도 뇌가 백기를 들며 드러누워 버렸다.
지독한 수면 부족이 사고를 마비시켰다.
“흐꾸웩…….”
지금은 흐꾸웩이 무사한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아가씨, 옷에 들어 있던 수첩입니다.”
“아, 고마워요.”
나는 수첩을 겉옷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머리 빗질은 괜찮으니 이만 볼일 보세요.
저는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게요.”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머리가 다 엉키실 텐데…….”
“괜찮…….
아…… 저 진짜 아무것도 안 훔칠게요.
전적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답니다.
눈앞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게 지금의 저예요.”
하녀가 한시도 내게 눈을 떼지 않고 옆에 졸졸 붙어 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칼리언의 귀중한 무언가를 훔쳤던 나를 경계하는 거였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표정과 손짓 발짓을 동원해 나의 선량함을 주장했다.
“머리를 다 빗으실 때쯤이면, 마차가 도착할 겁니다.”
하지만 고작 나의 말 몇 마디로 하녀의 경계가 풀어질 리 없었다.
나는 씁쓸하게 등을 보이면서 앉았고, 두꺼운 브러시가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 내려갔다.
빗질이 마무리될 즈음 정말로 검은 마차가 정문을 통과했다.
정원 안쪽으로 달려온 마차는 저택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이어 하인이 문을 열어 주자, 그토록 기다리던 블래이크가 쏟아지듯 마차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흐꾸웩!”
흐꾸웩은 블래이크의 품 안에 아주 편안히 안겨 있었다.
똘망똘망한 큰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주변을 이리저리 살핀다.
블래이크가 흐꾸웩의 손에 딸랑이를 쥐여 주자 흐꾸웩은 신이 난 듯 활짝 웃으며 이리저리 딸랑이를 흔들어 댔다.
“가야겠어요.”
나는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힘껏 달렸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노련하게 계단을 밟고 내려와 외부로 통하는 두꺼운 문을 힘껏 밀어 열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흐꾸웩!”
“먀!”
싱글벙글 웃고 있던 흐꾸웩이 나를 보자마자 딸랑이를 툭 떨어뜨렸다.
하얗고 작은 턱에 주름이 생기며, 도톰한 입술이 툭 튀어나온다.
나를 닮은 두 눈에는 물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흐꾸웩은 블래이크의 품에서 벗어나려 힘껏 발버둥 쳤다.
통통하고 짧은 팔이 나를 향해 허우적거리는 걸 보자마자 절로 몸이 움직였다.
나는 단숨에 블래이크의 앞으로 뛰어가 흐꾸웩을 안아 들었다.
흐꾸웩은 앙증맞은 손으로 내 목을 조르듯이 껴안고 펑펑 울음을 쏟아 냈다.
“후아아앙!
먀!
후이잉…….”
“커헉, 야, 목…… 졸려.”
쪼끄만 게 누굴 닮아서 이렇게 힘이 센 건지…….
나는 흐꾸웩을 달래기 위해 작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흐꾸웩을 조금 떨어뜨리자, 아이는 또다시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작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이가 눈물 콧물을 줄줄 쏟아 가면서 못생기게 우는 걸 보자 어쩐지 내 눈가에도 열이 몰렸다.
“너…….
1분 전까지만 해도 잘만 웃다가 갑자기 왜…… 울어.
흐읍, 네가 우니까, 나도 이상해지잖아.”
많은 사람 앞에서 쪽팔리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괜히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며 태양 빛 때문에 눈이 시린 척 연기했다.
이때 소스라치게 차가운 손이 내 뺨을 감싸 올렸다.
눈 위로 따갑게 내리쬐던 볕이 사라지고 대신 검은 그림자가 얼굴을 뒤덮었다.
“선생님.”
블래이크는 내 눈가를 살살 어루만지며 집요한 시선으로 얼굴 곳곳을 살폈다.
“리아나.”
“…….”
“다친 곳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블래이크는 숨을 탁 터트리고는 내 몸을 끌어안았다.
나와 블래이크 사이에 낀 흐꾸웩이 걱정되어 그의 어깨를 밀어 봤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몸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 놈은 없었어?
죽여도 될 만한 놈이라든가.
무슨 말이라도 해봐, 리아나.
뭐든 들어줄 테니.”
“당장 눈앞에서 꺼지는 거.”
내 목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낮고, 울림 있는 음성이 머리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칼리언의 날렵한 턱선이 보였다.
그는 예의 그 권태롭고 무심한 낯으로 블래이크를 찍어 누를 듯 바라보았다.
저 벌레 보는 듯한 시선의 종착지가 내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칼리언의 냉담한 눈빛을 받아 내고 있는 블래이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보란 듯이 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이 침묵을 끌고 왔다.
칼리언과 블래이크뿐만 아니라 주위에 서 있던 사용인들 또한 숨소리마저 죽인 채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블래이크였다.
“1년 만에 보는 건데, 손님을 불러 놓고 밖에 세워 두는 건 여전하십니다.”
“다시 만날 때는 땅속에 파묻힌 제 시체가 보고 싶으셨을 텐데, 그 바람을 이루어 드리지 못해서 아쉬울 뿐입니다, 남작.”
“그러게나 말입니다.
마탑주님 무덤 앞에 기쁜 마음으로 장미를 놓아 드렸을 텐데.”
정중하게 쌍욕을 주고받는 모습이 참 보기 좋긴 한데요…….
애가 들으니까 나머지는 저 없는 자리에서 하실래요……?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신사다우시네요.
다른 분들은 제 유골을 좆 모양으로 조각해서 남창들에게 던져 주겠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뵌 것도 오랜만인데, 이만 돌아가시지요.”
칼리언은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고는 사용인에게 마차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당황스러운 축객령에도 블래이크는 의연했다.
“가자, 리아나.”
블래이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반질반질한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블래이크를 따라가도 되는 건가?
칼리언이 보석금까지 내주면서 나를 꺼내 왔는데, 과연 순순히 보내 줄까.
하지만 칼리언은 블래이크가 재촉하듯 내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저놈의 속내를 알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우선은 내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칼리언보다는 블래이크를 따라가는 편이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훨씬 나은 환경이라는 판단이 섰다.
블래이크의 손을 마주 잡는 순간이었다.
비틀.
순간 눈앞이 노래지면서 줄 끊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블래이크가 드물게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블래이크가 내 손에서 떨어지는 흐꾸웩을 서둘러 받아 들었다.
동시에 듬직한 체온이 무너지는 내 몸을 받쳐 안는 게 느껴졌다.
“리아나……!”
머리가 납처럼 무거워져서 도무지 이 목으로 머리를 이고 있을 재간이 없었다.
시야가 하얗게 흐려지고 블래이크의 얼굴이 찰흙 반죽처럼 일그러졌다.
“아…….”
기절이다.
축적된 피로와 오랜 불면으로 모자랐던 잠 그리고 흐꾸웩을 찾음과 동시에 밀려든 안도감에 몸이 고장 나버린 게 분명했다.
눈꺼풀이 감기기 바로 직전, 엄지손가락을 쭉쭉 빨던 흐꾸웩이 손가락 퐁 하고 놓으며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 위로 침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닦아 줘야 하는데.
침방울이 흐꾸웩의 턱 밑으로 툭 떨어지는 순간 내 의식은 검은 파도에 휩쓸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
‘허억, 헉…… 흐으윽.’
불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웠다.
흙먼지를 잔뜩 끼얹은 얼굴 위로 눈물과 땀방울이 지저분한 얼룩을 만들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덕지덕지 들러붙고, 흔들리는 나뭇잎이 괴기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달빛마저 등을 돌린 컴컴한 산.
나는 부른 배를 안고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도망치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내 몸은 산과 함께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나를 쫓는 이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멀리, 더 멀리 멀어져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허윽, 아!!’
돌부리가 내 간절함을 조롱하며 발을 콱 깨물었다.
보기 좋게 걸려든 나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싼 채 옆으로 쓰러졌다.
‘하윽, 하아, 하아…….’
내쉬는 숨 한 번에 수억 개의 칼날이 목구멍을 할퀴며 지나갔다.
나는 흐려지는 정신을 어금니를 짓씹어 가며 붙잡았다.
그리고 살려 달라는 외침 대신 품속에 넣어 두었던 수첩과 펜을 꺼냈다.
어차피 이곳에서 구해 달라고 소리를 질러 봤자, 어둠 속에 숨어 호시탐탐 나의 뼈와 살을 노리는 들짐승의 귀에만 들릴 뿐이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강박적으로 글씨를 적어 내렸다.
「믿지 마, 아무도 믿지 마, 리안, 절대, 절대로!
그 누구도…….」
“헉!!”
글씨를 미친 듯이 써 내려가던 꿈속 장면이 유리창 깨지듯이 파열되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꿈에서 산속을 헤매던 것처럼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억지로 입을 다물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살갗을 가르고 튀어 나갈 것처럼 박동하는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부터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별거 아닌 소음에도 발작하듯이 몸을 떨었다.
나는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에 혀를 내어 침을 묻히고, 불안함을 억눌렀다.
“미첼 아가씨, 마탑주님을 모시고 있는 의원 셀마 덴터스입니다.”
“……네.”
짙은 금발을 하나로 틀어 묶은 하녀가 다가왔다.
창밖은 밤보다 깊은 여명이 푸르스름하게 뒤덮여 있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셀마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동안 나는 꿈의 여운에서 느리게 빠져나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산속, 부른 배를 안고 도망치던 나.
누가 들어도 악몽이라고 말할 만큼 찝찝한 꿈이었다.
정신이 점차 또렷해질수록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라 파묻혀 있던 나의 옛 기억이라는 걸 자연스레 깨달았다.
그 순간, 몸을 억누르던 두려움이 한순간에 씻겨 나갔다.
진찰을 마친 셀마가 대기하고 있던 하녀를 불렀다.
“아가씨께서 기력이 많이 약해져 있으니, 처방해 드린 약을 시간에 맞춰서 꼭 드시게 하세요.”
“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오늘처럼 갑자기 정신을 놓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걱정 안 했는데.
잠들기 위해선 차라리 정신을 놓는 편이 나았다.
이 순간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기력을 회복하면 정신을 놓지도 못한다니.
셀마가 처방해 주는 약을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셀마가 왕진 가방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셀마의 처방전을 받은 하녀들이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은밀하게 셀마의 옷자락을 잡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저…… 제 머리는 괜찮은가요?”
셀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수첩을 꺼내 들었다.
“아프신 곳이 있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전부 말씀해 주세요.”
“그러니까…….”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진찰이다.
하지만 셀마는 워렌 가문 소속의 의사였다.
내가 아무리 비밀이라고 당부해도 칼리언의 명 한마디면 잘 훈련받은 개처럼 배를 보일 게 분명한.
기억을 잃었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
“제가 출산한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제가 요즘 자꾸 뭘 깜빡깜빡해서요.”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로요?
통상적인 건망증이라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셀마는 내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받아 적을 기세였다.
나는 그녀의 열정적인 질문에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칼리언이 눈치챌 거 같고…….
“음…… 크, 큰일은 아니고 사소한 걸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출산 후 건망증은 쉽게 볼 수 있는 증상입니다.
석 달 정도 지나면 점차 호전되니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관련된 약을 추가로 처방해 드릴까요?”
“네, 네네!
그렇게 해주세요.
뇌에 좋은 거로요.
막 두 살 때 일까지 번쩍번쩍 생각나는 강한 약으로 부탁해요.”
셀마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약은 없답니다.”하고 냉정하게 일갈했다.
똑똑.
누군가 반쯤 열려 있는 문에 노크했다.
“진찰은 끝났나?”
노크의 주인은 놀랍게도 칼리언이었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일찍 일어난 걸까.
칼리언은 제 존재를 알린 후 셀마를 향해 턱짓했다.
셀마는 내게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제 주인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저 봐.
역시 숨기길 잘했다니까.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셀마와 칼리언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럴 거면, 아예 장소를 옮기지 왜 굳이 내가 묵고 있는 침실 앞에서 저러냔 말이야.
나는 뻘쭘하게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문이라도 닫고 나가든가.
나는 칼리언과 셀마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내가 묵었다던 침실인가.
모든 가구가 광이 번쩍번쩍 날 만큼 지나치게 말끔했다.
도리어 생활감이 없어 보였다.
장식장 안의 조각품처럼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방 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말 내가 쓰던 침실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출산 직후 일주일 내내 기절해 있던 것을 제외하고 오늘처럼 잠을 깊게 잔 적이 없었다.
거기다 꿈에서 과거의 기억을 엿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이곳이 내 침실이 맞다면, 몸이 이 장소를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한 번 더 시험해 볼 가치가 있겠어.
딱!
“깜짝이야.”
눈앞에서 긴 손가락이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왜 얼을 빼놓고 있어?
셀마가 큰 이상은 없다고 했는데, 오진인가.”
어느새 다가온 칼리언이 표정 없는 얼굴로 내 이마를 짚었다.
뜨거운 체온이 얼굴 전체를 뒤덮는 듯했다.
“열은 없는데.”
“흐꾸웩, 아니 아이는?”
“흐꾸웩?”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언은 그다지 궁금한 건 아니었는지 관심을 거두고 뒤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먀먀!”
하녀가 흐꾸웩을 안고 들어왔다.
그새 옷을 갈아입혔는지, 흐꾸웩은 벚꽃잎처럼 화사한 분홍 잠옷을 야무지게 챙겨 입고 있었다.
“너 정말 사람 안 가리고 다 좋아하는구나?”
흐꾸웩을 받아들자마자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쥐방울만 한 게 겁도 없는지 아무한테 안겨서 실실 웃어 댄다.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흐꾸웩은 작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더니 곧장 입으로 가져가서 쪽쪽 빨기 시작했다.
그런 흐꾸웩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칼리언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와 흐꾸웩을 훑어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적안에 소름 끼치는 광채가 스몄다.
무심코 그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브, 블래이크는?”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고작 그딴 거야?”
“그딴 거라니…….”
너 원래 그런 말 안 썼잖아.
“다들 물러가.”
“네, 주인님.”
모여 있던 하인들이 썰물 빠지듯이 우르르 뒷걸음질로 방을 떠났다.
쿠웅.
문이 닫히고 이곳에 칼리언과 나 그리고 흐꾸웩 셋만 남자 순식간에 공기가 답답해졌다.
칼리언이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무게만큼 침대가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엉덩걸음으로 그와의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래 봤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멀어진 것뿐이지만.
“웅냐, 쯉-.”
흐꾸웩이 내 머리카락을 사탕 빨 듯이 빨며 칼리언을 올려다보았다.
칼리언은 자신에게 눈웃음치는 흐꾸웩에게 오래도록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봤다.
“내일 해 뜨는 대로 떠나도록 해.”
“어?”
그는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듯이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만 있었다.
그의 냉랭한 낯에 무안함이 차올랐다.
“진짜 그냥 가도 되나 해서.
왜냐면, 네가 나를 보석금까지 주고 빼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충동이었어.
날 따돌린 네가 생뚱맞게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어처구니가 없더라고.”
“…….”
“널 꺼내 준 구원자가 나라는 걸 알면, 그 표정이 꽤 볼만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하였어, 리안.”
읊조리듯 말하는 글자 하나하나가 귀에 콱콱 박혔다.
아까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굴더니 왜 지금은 미련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이냐고.
나는 이 침실에서 하루 더 묵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이야.
“이렇게 놓아준다고?
믿기지가 않는데.
나는 네 걸 훔쳤잖아.
갑자기 등 뒤에서 칼 찌르지 말고, 화난 게 있으면 앞에서 풀면…… 안 될까?”
“복수 때문에 나를 갉아먹으면서 사는 건 관둘 거야.
이러다 정말 지옥 갈 거 같거든.
너 하나쯤 살려 주면 신께서 좀 봐주시지 않을까 하고.”
“신이 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칼리언은 대답 대신 흐꾸웩의 포동포동한 뺨을 톡 건드렸다.
그의 돌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낮에는 산 채로 파묻어 버릴 것처럼 무섭게 굴더니 왜 지금은 아무 미련 없이 놓아주냔 말이야.
“자, 잠깐만.
나 진짜 너한테 정말로 미안해서, 이대로는 떠날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은 쥐뿔도 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이 침실에 머물기 위해 그에게 간도 심장도 다 빼줄 듯이 연기했다.
“평생 내 눈에 띄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사는 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죄야.”
재수 없는 새끼.
무슨 말을 저따위로 하냐.
당장 놈의 멱살을 쥐고 내 순둥이 칼리언을 어떻게 한 거냐며 따져 묻고 싶었다.
억지로 울상 짓고 있던 얼굴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와락 일그러지는 낯을 숨기기 위해 나는 자학하듯 양손으로 뺨을 짝 때렸다.
“뭐 하는 짓이야?”
“네가 날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어.
어떻게, 어떻게…… 흐윽!”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나 스스로가 너무도 끔찍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쥐어뜯었다.
이때 눈물 한 방울 흘려 주면 좋으련만, 눈물샘은 잠잠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나는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아부부!”
한없이 해맑은 목소리가 나의 거짓 울음소리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이 녀석이…… 내가 목숨을 건 열연을 하는데도 흐꾸웩은 나의 이 간절함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내 머리카락을 칼리언에게 건넸다.
‘너도 한 번 잡숴 봐.’하는 듯한 얼굴로.
나는 조막만 한 손에 들려 있는 내 머리카락을 빼냈다.
내게 머리카락을 빼앗기자 칭얼거리는 흐꾸웩을 고쳐 안고는 건조하게 메마른 눈가를 닦는 척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칼리언이 흐꾸웩의 손에 내 머리카락을 다시 쥐여 주며 덤덤하게 물었다.
흐꾸웩은 빼앗긴 장난감을 다시 찾은 것처럼 기분 좋게 다시 머리카락을 쭉쭉 빨기 바빴다.
“네 화가 풀릴 때까지…… 여기서 일이라도 하고 싶어.
막 부려 먹어도 좋아.
증오하는 대상을 무작정 치워 버리는 것보다는, 문득 내 얼굴을 떠올려도 그땐 그랬지 떠올릴 수 있는 편이 네 정신 건강에 더 좋지 않을까.
이러면 네가 천국 가는 데에도 더 도움이 되지 않겠어?”
“…….”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거르지 않고 전부 내뱉었다.
칼리언은 내 횡설수설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다.
도중에 비웃으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이 끝났음에도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칼리언은 여전히 세상만사에 관심 없어 보이는 듯한 무표정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칼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그는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 책장 맨 위 칸의 서랍을 열었다.
내가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위치였다.
“그게…… 뭐야?”
다시 돌아온 칼리언의 손엔 검붉은 빛깔의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아카데미 교재에서나 보았던 마법진이 보석함 전체를 장식처럼 두르고 있었다.
칼리언이 금색 자물쇠를 살짝 어루만지자 달칵-.
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서서히 뚜껑이 열리면서 가느다란 은색 팔찌가 드러났다.
실처럼 얇은 표면에 정교한 음각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림은 아닌 거 같고 무슨 글자 같았는데 확실한 건 대륙 공용어는 아니라는 거다.
팔찌의 가운데에 박혀 있는 보석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언뜻 투명한 빛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은은하게 푸른 빛이 감돌았다.
“내 소중한 물건.”
“이게?”
확실히 값나가는 물건인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팔찌가 너무 작지 않나?
칼리언의 손목에 끼우는 것 자체도 힘들어 보였다.
만일 어찌어찌 낀다고 하더라도 분명 피가 안 통해서 손 전체가 보라색으로 변할 것만 같은 크기였다.
꽉 끼다 못해 고문 수준으로 손목을 조이는 팔찌가 정말 좋은 건가?
못 본 사이에 성격도 많이 변했지만, 취향도 꽤 독특해졌네.
칼리언은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내 손등을 감싸 쥐었다.
이어 부드럽게 내 손목을 돌려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만든 후 그 위에 보석함을 올려 두었다.
“이걸 갑자기 왜…….”
의심 가득한 눈으로 칼리언을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아, 리안.”
그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살며시 내리깐 눈동자 속엔 나를 향한 쌀쌀맞은 기운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 밑으로 처연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열여섯 살 때의 칼리언에게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표정이다.
“…….”
이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내 마음에 솟아 있던 경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너를 진심으로 증오했다면, 보석금을 지불하면서까지 널 구하지 않았겠지.”
“…….”
“어렸을 적, 너는 내 유일한 버팀목이기도 했고.”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떡정도 정이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네 구멍에 좆을 박아 넣…….”
“그 말은 안 해도 돼!”
버럭 소리 지르자 칼리언의 적안이 스르르 움직였다.
가슴을 훑고, 목을 지나 턱, 입술, 콧등 하나하나 눈빛으로 자국을 남기듯 느릿하게.
이윽고 눈이 마주쳤을 때 목 뒤에 묘한 소름이 돋았다.
“너를 완벽히 용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증오하지 못한 채로 영영 치워 버리면, 나는 평생 너라는 그리움과 분노에 짓눌려 살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마지막으로 너를 믿어 봐도 될까, 리안.”
눈이 번쩍 뜨였다.
반신반의하면서 던져 본 빈 낚싯대에 칼리언이 제대로 낚였다.
나는 몸을 앞으로 당겨 그와 바짝 붙어 앉았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계약서라도 쓸까?
내가 지켜야 할 항목을 네가 부르면 전부 받아 적을게.
서명도 하고.”
“고작 종이 따위로 널 붙잡아 둘 수 있겠어?”
“왜?
나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야.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오늘 출소한 사람이 누구더라.”
“너는 참,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예전 같았으면 내 말에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투덜거림이 치고 올라왔으나 속으로만 구시렁거리고 말았다.
칼리언이 내게서 흐꾸웩을 데려갔다.
마침 한 팔로 흐꾸웩을 안고 있자니 슬슬 팔이 저려 오던 참이었다.
작은 손에 잡힌 내 머리카락이 실타래처럼 공중에서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나와 칼리언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두피가 뜯기는 듯한 아픔은 없었다.
나는 저린 팔을 툭툭 털며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이 팔찌는 왜 가져 왔는데?”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한테 맡기는 것.
이게 너를 향한 나의 마지막 신뢰이자 우리의 계약이야.”
“뭐?”
그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리송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 말한다.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담보 정도로 생각하면 돼.”
“…….”
“이게, 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보다는 신사적이니까.”
적안이 내 복숭아뼈를 핥듯이 건들고 지나갔다.
실제로 족쇄가 채워진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발목이 시큰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발을 이불 안으로 숨기듯 밀어 넣었다.
칼리언이 내 발을 힐긋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내가 네 물건을 가지고 또 도망가는지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말이잖아.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말했잖아, 너를 마지막으로 믿어 보고 싶다고.”
칼리언은 나의 형식적인 사과나 껍데기 같은 몸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신뢰였다.
서로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바닥나 버린 신뢰를 되찾으라는 거였다.
애정도 애증도 아닌 이 모호한 감정을 매듭지을 수 있도록.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너는 내 집을 나가면 되고, 나는 죽을 때까지 네 생각에 괴로워하겠지.”
“…….”
“아침이 되면 하녀가 깨우러 올 거야.
마차 정도는 내어 줄 테니까 그렇게 세상 끝난 얼굴 하지 마.”
이 매정한 자식.
이놈이 정말 내가 알던 칼리언 워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칼리언의 탈을 쓴 성격 나쁜 마법사가 아닐까.
허무맹랑한 상상이 꽤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탁.
상자 뚜껑이 닫혔다.
“자, 잠깐만!”
얘가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자물쇠가 걸리기 전에 안간힘을 다해 그의 손을 막았다.
칼리언이 눈썹을 씰룩이며 나를 바라본다.
놈의 손이 자물쇠를 건드는 순간 기억을 찾을 기회가 한순간에 재가 되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눈앞의 달콤함에 홀려 덫을 밟아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솟아났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나한테 소중한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
나는 비굴하게 말을 덧붙였다.
칼리언의 손이 상자에서 떨어져 나가자 깊은 안도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지금의 내게 소중한 것 따위 아무것도 없었다.
단언컨대 내 수중에 칼리언이 건넨 이 팔찌와 견줄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칼리언도 내게 값비싼 물건을 바라고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닐 거야.
그래, 나는 감성으로 밀어붙인다.
밀드레드가 주었던 허름한 가방을 뒤져 작은 장갑 한 쌍을 꺼냈다.
원래는 촘촘하게 짜인 뜨개 장갑이었으나 흐꾸웩이 하도 물고 빤 탓에 실 사이가 잔뜩 벌어져 더는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곧 버릴 물건이었다.
“이거.”
장갑을 내밀자 칼리언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간다.
장난하냐는 뜻이었다.
“내가 아기를 위해서 처음으로 직접 뜬 장갑이야.
이렇게 헤질 때까지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거짓말이다.
버려야지 해놓고 잊어버린 것뿐이었다.
“아뱌뱌!”
자기 장갑을 알아본 흐꾸웩이 짧은 팔을 파닥거렸다.
칼리언은 장갑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확실히…… 이 팔찌와 교환할 물건치고는 심하게 비루해 보인다.
“‘디자이너 라비안 그린.’”
“…….”
장갑 안쪽을 확인하던 칼리언이 심드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곤 조용히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추궁하는 눈빛에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망했다.
“언제 개명을 했는지, 그리고 언제 디자이너가 됐는지 설명해.”
나는 황급히 장갑을 수거했다.
등 뒤로 감추자 칼리언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다.
“……그, 잘못 꺼냈어.
내가 직접 뜬 건 이게 아니라 비슷한 모양인데…….”
“…….”
변명할수록 스스로가 더욱 구차하게만 보였다.
“미안.”
나는 다시 가방을 뒤졌다.
그런데 소중하다고 여길 만한 물건이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밀드레드에게 쓰고 버리라는 의미에서 받은 보잘것없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통째로 들고 칼리언에게 건넸다.
“내가 가진 전부야.
이중 무엇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지만, 네 마음에 차지 않을 게 뻔해.
그래서 다 맡길게.”
칼리언이 묵직한 가방을 받아 들었다.
마치 쓰레기 더미를 한 아름 받아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그런데 그 안에 기저귀만 좀 가져갈게.”
나는 줬던 가방을 다시 빼앗아 들고는 곱게 접어둔 천 기저귀 여섯 장을 빼냈다.
천 기저귀를 품에 안은 채로 칼리언의 반응을 살폈다.
다 집어치우라고 던지면 어떻게 하지.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불쑥 보석함을 열었다.
단정한 손끝에 은빛의 팔찌가 반짝이며 매달린다.
그는 내가 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또 조심스러운 손길로 팔목에 팔찌를 걸었다.
집중한 듯 살짝 내리깐 눈을 훔쳐보았다.
정말…… 저 허름한 가방으로 충분한 걸까.
“됐어.
손목 움직여 봐.”
“조금 헐렁한 것 같은데, 금방 빠지겠……어?”
작은 보석에서 푸른 실타래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던 빛은 내 손목에 감겨들었다.
그 순간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던 팔찌가 손목에 딱 맞게 조여들었다.
“그런데…… 이거 안 빠지는데.”
“네 손목을 잘라서 빼는 방법밖엔 없지.”
“…….”
“농담이야.”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냐.
칼리언 몰래 팔찌를 힘주어 당겨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농담 아닌 거 아니야?
칼리언은 내가 팔찌와 씨름하는 동안 보석함과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가게?”
“다시 잠들 때까지 동화책이라도 읽어 줘?”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야.”
굳이 트집 잡아서 받아치는 태도에 시무룩해졌다.
그럼 네놈이 가든지 말든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칼리언은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곧장 나갈 기세였던 그가 웬일로 멈춰 섰다.
의아함을 느끼며 오도카니 서 있는 건장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또 저번처럼 달아나면…….”
잠깐의 적막이 흐른 후,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그땐 네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보다 더 잔악하게…….”
“…….”
서슬 퍼런 음성이 내 모든 신경을 휘어잡았다.
나는 숨 쉬는 방법도 잊은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칼리언은 내 긴장을 외면하듯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쿠웅.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사람 쫄리게 하고 있어.”
“뺘!”
“줘패주고 싶다.
그치?”
나는 그의 별거 없는 한 마디에 바짝 긴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보는 이도 없건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내리 잠을 자서 그런가…… 눈이 졸음기 하나 없이 말똥말똥했다.
흐꾸웩은 내가 배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자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끔뻑끔뻑 졸기 시작했다.
그런 흐꾸웩을 눈에 담으면서 나도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젠장맞을, 잠이 안 와.
잠이 하나도 안 온다고!!”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잠을 자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봤다.
미친 것처럼 정원을 뛰어다니면서 땀을 빼고, 보기만 해도 머리 아파지는 철학서도 들여다봤고, 잠이 잘 온다는 차를 물처럼 마셨다.
하지만 나의 이 모든 노력을 비웃듯이 불면은 내 신체 일부라도 되는 듯 떨어지지 않았다.
몸부림치며 침대 위에서 뒹굴다가 대자로 뻗어 버렸다.
천장에 아름답게 수놓아진 나비 장식이 실제로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날갯짓을 한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내가 왜 이 부담스러운 팔찌까지 차면서 이 침실에 머무르겠다고 한 건데 왜!
왜!
이 침대만 있으면 숙면도 취하고 꿈속에서 기억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희망 어린 가정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말도 안 돼…….
스스로에게 배신당한 기분은 현존하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절친한 친구에게 보증 서줬다가 인생을 송두리째 말아먹었어도 이만큼 좌절하진 않았을 것이다.
“흐꾸웩이라도 데려올까.
녀석을 좀 안고 있으면 잠을 안 자도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이긴 한데…….”
하지만 흐꾸웩은 하녀들의 귀여움을 잔뜩 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었다.
왜 흐꾸웩을 하녀들이 돌보게 되었냐면…… 약간의 오해 때문이었다.
나와 흐꾸웩이 저택의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슬금슬금 우리를 훔쳐보던 하녀들이 어느 순간 한 마디씩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혹시…… 아기 이름이 정말 흐꾸웩이 맞나요?’
‘…….’
하녀는 몹시 죄송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하녀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아가씨께 무슨 실례야.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아직 어려서 애칭이랑 이름을 헷갈린 듯합니다.’
‘이름 맞아요.’
그때부터였다.
하녀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새파랗게 질리더니, 흐꾸웩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많아진 것이.
‘아가씨, 물에 비해 분유 가루가 너무 많지 않나요?’
‘하지만 밀드레드가 준 수첩에 분명 다섯 스푼이라고…….’
‘스푼의 크기는 천차만별이니까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분유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저귀 가는 것, 목욕시키는 것 등등 모든 돌봄에 하녀들이 개입했다.
내가 흐꾸웩을 안고 있으면 하녀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는 게 등 뒤로 전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아이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순간 곧장 주인의 손님이고 나발이고 하극상을 일으킬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내가 흐꾸웩을 돌보는 모든 행동이 탐탁지 않았는지, 하나둘 조언하던 것에서 이제는 자기네들이 직접 하겠다며 흐꾸웩을 빼앗아 갔다.
이 모든 것이 나흘 동안 일어난 일이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는데요.”
나는 문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하녀가 나의 퀭한 얼굴을 보더니 작게 소리를 질렀다.
왜요, 내 꼴이 그렇게 한심해 보입니까?
예?
진짜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건 나라고요.
하녀는 서둘러 제 입을 가리고는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손님이요?”
내가 칼리언의 저택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블래이크밖에 없다.
블래이크가 곧 찾아올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난번엔 갑자기 기절하는 바람에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었지…….
무사히 수도로 데려와 주기도 했고 또 흐꾸웩도 돌봐 줬는데.
“……다음에 오시라고 할까요?”
“아니에요, 지금 가요.”
어지러워 두 눈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비볐다.
나는 무덤을 헤치고 나온 시체처럼 하녀의 뒤를 뒤따랐다.
도착한 곳은 별관의 응접실이었다.
본관은 주인인 칼리언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므로 내 손님은 별관에서 맞이해야 했다.
“저…… 칼리언한테 허락은 받은 건가요?
블래이크를 저택 안으로 들여도 되는지 몰라서요.”
응접실까지 와놓고 이제야 묻는 게 민망했지만,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블래이크는 칼리언의 저택 안으로는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다고 했다.
내게 악감정이 가득한 현재의 칼리언이 나를 위해서 블래이크의 출입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예?
블래이크 님이요?”
하녀가 응접실 문을 열다 멈칫한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하녀가 서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아가씨!”
웬 장신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빠른 보폭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온 단단한 가슴팍을 보고 고개를 올리려는 찰나 강한 힘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으앗……!”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고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졌다.
언질도 없이 찾아와서 나를 끌어안은 이 손님은 블래이크가 아니었다.
“래, 랜서?”
랜서의 물기 어린 두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친 곳은 없는지 내 얼굴을 빠짐없이 살피고는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얼결에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녀가 안절부절못하더니 행여나 누가 볼까 싶어 분주하게 문을 닫았다.
“저…… 아가씨랑 사전에 약속하고 오셨다고…….”
돌아본 하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불안한 듯 두 손을 만지작거리고,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약속이요?”
“예, 예…… 아가씨께서도 별말씀 없이 만나 뵙겠다고 하시길래, 저는 당연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지?”
“어, 저기, 그러니까…….”
랜서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하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냉랭한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응접실 밖으로 물러났다.
“방해꾼은 사라졌어요.”
큼지막한 손이 내 뒤통수와 목덜미를 넉넉하게 감싸 쥐었다.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었다.
달뜬 숨결이 귓가에 파고들고, 맞닿은 가슴팍에서 거친 박동이 느껴졌다.
“얼마나 저를 지옥 불에 담금질하셔야 만족하시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언제 지옥 불에 넣었어…….”
“1년 만에 만난 아가씨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다니, 제 머리가 또 환각을 만들어 낸 건 아닌가 했습니다.
텅 빈 지하 감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 두 눈을 뽑아 씹어 먹어 버릴까…… 그러면 이토록 잔인한 환각에 더는 시달리지 않아도 될 텐데.
아가씨를 보지 못하는 눈은 차라리 없는 게 나으니까요.”
“랜서…… 잠깐, 진정해.”
“이러는 제가 미친놈 같습니까?
아가씨를 두고 전쟁에 차출되었을 때부터 미친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매일 밤 당신 꿈을 꾸며 몽정을 하고, 사춘기 소년처럼 당신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적었습니다.
오늘은 운이 좋아 살았지만, 내일은 적군의 철퇴에 머리가 박살 날 수도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당신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어요.
악령보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서……!”
랜서가 울부짖듯이 제 감정을 토해 냈다.
위험하게 비뚤어진 애정이 습격처럼 나를 덮쳐 온다.
하나하나 씹듯이 내뱉던 말이 점차 빨라지고, 그에게서 흥분한 숨결이 느껴졌다.
내 머리를 누르는 악력이 강해졌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차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연락을 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어.”
“…….”
“미안.”
짧게 사과하자, 랜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자책하는 듯이 묵직한 숨을 내쉬고는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아가씨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는 얘기를 늦게 전해 들은 제 잘못입니다.
그 정도의 보석금을 지불할 수 있는 재력가는 한 사람뿐이죠.
칼리언 워렌.
그가 저택을 비우는 날을 기다리느라 찾아뵙는 게 늦었습니다.”
뒤통수를 누르던 그의 손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목을 짚었다가 등까지 뜨겁게 훑어 내려간다.
나는 랜서의 어깨를 짚고 상체를 조금 떨어뜨렸다.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그의 눈망울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물기에 젖어 일렁이는 두 눈을 시간을 두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불안정하게 떨리는 호흡에서, 그리고 나를 끌어안은 팔에서…… 그가 심적으로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고작 내가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오른쪽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면서 차올랐던 눈물방울이 뺨으로 낙하한다.
“정말 미안.”
랜서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홧김에 제 팔을 자르셔도, 실수로 심장에 칼을 박으셔도 미안하다는 말은 입에 올리지 마세요.
아가씨는 제게 사과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짓…… 안 해.
홧김에 팔을 자르는 건 미치광이들이나 하는 짓이잖아.”
랜서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보다 처연하고, 뭉클하게 느껴졌다.
“보고 싶었습니다.”
“…….”
“제가…… 당신을 감히 그리워했습니다.”
피 묻은 목도리와 눈도 뜨지 못하던 어린 고양이들.
열다섯 살 때의 오해 이후로 나와는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았던 랜서다.
‘왜!!
왜 그러셨습니까!’
그의 증오 가득한 눈빛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그랬던 랜서가…… 내게 사랑을 속삭인다.
“제가 당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기도하게 하지 마세요.”
얼굴에 피가 터지도록 얻어맞고서도 제 몸이 아픈 것보다 날 향한 분노를 드러내느라 여념이 없던 열세 살의 랜서.
그리고 나의 애정을 가장 낮은 자세로 구걸하는 스물세 살의 랜서.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같은 사람임이 분명하나 내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이 느껴졌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열렬함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어떤 것이 말입니까?”
“……아니야.
이제 내려 줘.
앉아서 이야기하자.”
곧장 내려놓을 줄 알았는데 랜서는 소파 앞까지 걸어간 후에야 팔에 힘을 풀었다.
내가 흐꾸웩을 다루듯이 직접 의자에 앉혀 주기까지 했다.
테이블에는 먹기 좋게 손질된 과일과 다 식어 버린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랜서가 테이블 위의 종을 드는 순간 서둘러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하녀를 부르려고?”
“예.
혀가 델 정도로 따뜻한 캐모마일 티를 좋아하시잖아요.”
……이 자식, 어떻게 알았지?
랜서는 나의 취향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이때, 은근한 열기를 품은 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랜서는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마치 불안한 사람처럼 나를 걱정스레 살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랜서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왔다.
코끝이 살짝 맞닿고, 그의 숨결이 목소리를 타고 입가에 내려앉았다.
그에게서 새어 나온 열기가 얼굴은 물론이고 내 몸 전체를 은근하게 달구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전신이 발갛게 물들어 있을 게 뻔했다.
나는 예기치 않게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며 고개를 숙였다.
랜서에게서 좋은 냄새가 풍겨 왔다.
“그…… 실은 내가 손님 입장으로 이곳에 머무는 게 아니라서…… 말하자면…….”
“네, 듣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에 목소리가 자꾸만 숨어 들어갔다.
랜서는 내 말을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붙여 왔고, 나는 그럴수록 더욱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일단, 손 좀…….”
“아…….”
랜서가 크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나는 얼굴에 손부채질하고 싶은 것을 참는 대신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넘겼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눈 밑이 세차게 경련하는 게 느껴졌지만, 랜서가 나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다.
“너도 알다시피 칼리언이 내 보석금을 대신 내줬잖아.
그 대가로 저택에서 일하기로 했어.
뭐…… 아직까지는 놀고먹는 것밖엔 안 하지만.
여하튼, 내가 하녀를 부릴 처지는 아니라는 거야.”
“마탑주가 아가씨께 돈을 갚으라고 했다고요?”
랜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칼리언은 내게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놈의 귀중한 물건을 훔쳐 달아난 나를 그냥 보내 주겠다는 파격적인 자비를 베풀었다.
물론 용서의 의미는 아니었고, 아예 눈앞에서 썩 꺼지라는 식이었지만.
그러나 랜서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칼리언의 곁에 굳이 머물려는 이유를 밝히려면,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 또한 털어놔야 했다.
“어쩔 수 없지…….
한두 푼이 아니잖아.
칼리언이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제가 대신 갚겠습니다.
아가씨는 제 저택으로 가시죠.”
뜻밖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 빚을 네가 왜 갚아?
실수로 팔을 자르네 어쩌네 할 때부터 정신머리가 나가 있다는 걸 대충 짐작했지만, 빚까지 떠안으려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냐!
됐어.
내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런가…… 여기서 하는 일도 없어.
썩은 곰팡이 같은 존재에 가깝지.
습기 찬 천장이나 벽 구석에 달라붙어 있는 곰팡이 알지?
딱 그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어.”
“아가씨는 존재만으로도 귀하고, 완벽한 분이십니다.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제 마음이 찢어질 거 같습니다.”
“너야말로 나를 너무 추켜세우는 거 아니야?
빈털터리한테 아부 떨어 봤자 사탕 하나 못 주니까 그만해.”
“대답 없는 신에게 일생을 바쳐 기도하는 신자도 있죠.”
“내가 신이라는 소리야?”
“아가씨는 그런 허상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더 존귀하고, 성스러운…….”
나는 더 이상 듣지 못하고 손을 뻗어 랜서의 입을 막아 버렸다.
이놈은 부끄럽지도 않나?
어떻게 저런 낯뜨거운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거지.
“읏…… 뭐, 뭐 해!”
얼굴에 몰린 열기를 홀로 삭히고 있는 와중이었다.
랜서가 제 입가를 가린 내 손을 붙잡더니 그대로 손바닥에 잘은 입맞춤을 남겼다.
부드럽고 뜨거운 살이 맞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민망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향기가, 당신의 감촉이.”
“그, 그랬구나.”
랜서는 입맞춤으로도 모자라 내 손바닥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애처롭게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에 태연한 척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허둥거렸다.
엉덩이가 의자 위에서 들썩이고, 눈은 연신 깜빡였다.
왜, 왜 이러세요, 아저씨!
물론…… 나이로 따지자면 내가 세 살 위지만, 지금의 내 눈엔 랜서가 한참이나 어른으로 느껴졌다.
“아가씨께서는 제가 그립지 않으셨습니까……?”
“…….”
“아주 조금이라도요.
지난 1년 동안…… 제가 당신의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머문 적이 있었나요?”
만일 내 기억이 온전한 상태고, 1년 동안 랜서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더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을 거다.
저런 얼굴로 물어 오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건 길가에서 홀로 엉엉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외면하는 것만큼이나 무자비한 짓이었다.
“있지, 당연히.”
랜서가 내 엄지손가락 첫마디를 입술로 느릿하게 지분거렸다.
그의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가씨께서 제 생일날에 파이를 구워 주셨던 것도 기억하십니까?”
“아, 그랬지.
내가 요리 하나는 일품이잖아.”
“예.
같이 파이를 먹었던 플로란이 아가씨가 제게 화난 게 분명하다면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라고 했었죠.”
“…….”
잘한다고 으스대지 말걸.
그냥 기억난다고만 말할걸.
“으음…… 내가 다른 건 다 잘하는데 파이만 조금 약해.”
“제가 아가씨 무릎에 키스했을 때, 아가씨께서 그러셨죠.
더 맛있는 파이를 구워 주겠다고.”
그날을 회상하듯 랜서의 푸른 눈동자가 적연히 일렁였다.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내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깊게 묻었다.
내 손바닥이 랜서의 숨결로, 입술로 그리고 열기로 온통 젖어 들었다.
“아가씨의 미래에 제가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달콤해서…… 그날은 비겁하게 알겠다는 대답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뭐가 비겁해.
내가 해주겠다는데.”
랜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서는 저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기억 속의 어린 종자는 아버지 밑에 있을 때도 이 정도로 맹목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에 부딪힌다.
랜서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
내 상황을 털어놓는다면, 랜서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물렁물렁해진 마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내게 보이는 이 애정이 거짓말일 리 없다.
랜서라면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이든 올곧은 애정으로 내 손발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지속되는 불면과 텅 비어 버린 10년간의 기억 그리고 나를 지탱해줄 부모님까지 사라진 마당에 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 빈 시간에 밑그림을 그려줄 누군가가…….
나는 허벅지 위에 올려 둔 한 손을 꽉 말아 쥐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랜서…… 저기, 실은 내가…….”
하지만, 만에 하나 연기라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내게 접근한 거라면?
어렸을 적의 증오를 감쪽같이 숨기고 내게 복수하려던 거라면?
랜서를 향한 순간의 신뢰는 현실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철부지 망상과 다름없었다.
만일, 랜서가 나를 배신했을 때의 대안도 없었다.
“…….”
결심하듯 꽉 쥐었던 손이 허탈함으로 느슨해진다.
나는 10년 전에 겨우 말 몇 마디를 나눴던 어린 종자보다 필사적으로 쪽지를 남겼던 과거의 나를 믿기로 했다.
랜서에게 잡혀 있던 손을 뒤로 뺐다.
랜서는 생각보다 쉽게 나를 놓아주었다.
멀어져 가는 내 손을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하면서도 다시 붙잡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려고.
아기가 하녀들을 잘 따라.
갑자기 환경이 자주 바뀌는 것도 아이한테 좋지 않을 거 같아서.”
“……아가씨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이곳 생활이 지겨워지시면 제게 편지를 보내 주세요.
‘랜서’, 이렇게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그렇다고 너무 기다리진 마.”
“아가씨의 종착지가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답고 좋은 곳만을 떠돌다가…… 이제 그만 됐다고 생각이 들 때, 지치고 더는 힘이 없을 때, 고된 발을 씻겨줄 손이 필요하고, 외로움을 달래줄 체온이 필요할 때…… 그때는 부디 저를 찾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배 속이 뜨거워졌다.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나긋하게 감길 때마다 손발이 찌릿하고, 속이 화끈거렸다.
내게는 랜서의 고백이 거짓인지 진심인지 구별해낼 경험이 부족했다.
만일 랜서가 하는 것이 사랑이고 연애라면, 이 두 단어는 꽤 구차하고 비겁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고, 상대는 그 희생을 발판 삼아 더 큰 행복을 누린다.
대부분의 연인이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걸까.
아니다.
아무리 남녀 간의 사랑에 미숙한 나라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이런 희생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하지만 이런 랜서를 순수한 마음으로 가엾이 여기기엔 내 처지가 여유롭지 못했다.
“주소 알려 줘, 랜서.
1년 만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근사한 저택 위로 군청색의 하늘이 깔려 있었고, 선명한 보름달은 태양만큼이나 밝았으나 시리도록 싸늘한 빛을 흩뿌렸다.
창문을 꽉 닫았음에도 유리창 너머로 찬 기운이 전해졌다.
나는 두꺼운 겨울용 커튼을 닫고, 뒤를 돌았다.
그러고 보니 칼리언이 나를 무작정 내쫓았으면, 나는 이 추운 겨울 날씨에 갈 곳도 없이 오들오들 떨어야 했던 거네.
감기 걸리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흐꾸웩은 첫 겨울이 주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을 거다.
“흐꾸웩아, 우리 진짜 큰일 날 뻔했다.”
흐꾸웩은 폭신한 아기 요람에 파묻히듯 누워 있었다.
잠들기 전까지 가지고 놀았던 새 인형 장난감이 흐끄웩의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붉은 새, 파란 새, 노란 새를 용케 구분하는 흐꾸웩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놀랐던지, 미래에 훌륭한 조류 학자가 될 싹이 보인다.
나는 새 장난감을 정리하고는 요람에 팔을 기대었다.
“이빨도 다 안 난 아기 주제에 속눈썹은 왜 이렇게 길어.”
감은 눈 밑으로 초승달 모양의 예쁜 그림자가 졌다.
희고 통통한 뺨 옆으로 침이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소매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아무리 봐도 내가 낳았다는 게 안 믿긴다.”
흐꾸웩에게 책임감을 느끼지만, 모성애가 생겼냐고 하면 글쎄…… 잘 모르겠다.
그저 흐꾸웩이 나의 악몽보다 더 지독한 불면증까지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곤히 자는 흐꾸웩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다리가 저릴 즈음이 돼서야 푹신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맨발에 닿는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전신에 몸의 힘을 쭈욱 뺐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눈을 떴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협탁 위에 나의 유일한 재산인 육아 수첩이 보였다.
육아 수첩 맨 마지막 페이지엔 오늘 랜서가 적어준 주소가 들어 있다.
이것 또한 나의 재산이 되었다.
분명히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혼곤한 머릿속에 다른 잡생각이 더 들어차기 전에 몸을 돌려서 협탁을 외면해 버렸다.
“대체 어떻게 하면 잠들 수 있을까.”
기절할 듯이 정신이 혼미해진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저번에 블래이크가 이 저택에 찾아왔을 때 겪었던 것처럼, 따뜻한 물 속에 몸이 서서히 잠기듯 졸음이 밀려오진 않았다.
그때 당시의 기분이 어땠더라…….
머리가 어지러워서 비틀거렸고, 아늑한 온기가 몸을 감싸 안았다.
“……그래, 온기.”
그 온기를 느끼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졌다.
그때 나를 감싸 안았던 건…….
“칼리언?”
“나 찾아?”
“아, 깜짝이야!”
칼리언이 문가에 비딱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왔으면 왔다고 노크라도 하지!
심장 떨어질 뻔했네.
“왜 그렇게 놀라?
죄지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니까 그러지!”
그가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큼지막한 손이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쥐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파고드는 감각이 선연하다.
“이 작은 머리통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거나.”
“여기 남겠다고 말한 게 누구인지 잊었어?”
“두 번은 안 봐줘, 리안.
또다시 네게 배신당하면, 그땐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