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기억 속의 남자(3)
“리아나, 아가씨.”
나는 멀뚱멀뚱 눈을 뜬 채로 누워 있었다.
피곤했지만 지독한 불면증 때문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죽이다 보면 피로해진 몸이 알아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겠지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누구세요?”
“으악, 깜짝이야!”
“…….”
몸을 일으키자 웬 남자가 요란스럽게 몸을 떨고 있었다.
지가 불러 놓고 왜 자기가 놀래?
“대답하시기 전에 인기척이라도 좀 내주시면 안 됩니까?”
……적반하장까지.
남자가 들고 온 보따리와 뜨끈한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음식을 보니 아까 랜서를 데리러 왔던 그 기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사는 배식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철문을 밀어 열고는 그 안으로 음식과 옷을 건네주었다.
“꼭 식기 전에 드셔야 합니다.아니, 식은 후에 드셨더라도 부단장님이 와서 ‘따뜻하게 드셨습니까?’라고 물으시면 반드시 입천장이 다 까질 만큼 따뜻했다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
“아, 아니다.입천장이 까졌다고 하면, 제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을 거 같네요.속이 뜨뜻해서 좋았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허물없이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남자는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껏 떠들던 남자가 뒤늦게 내 눈치를 보았다.
“왜 말씀이 없으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아니.”
“…….”
“콜록, 요…….”
내가 반말로 짧게 대답하자 남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떠졌다.
순발력 있게 기침을 한 후 곧장 ‘요’자를 붙이자 그제야 남자가 “후우…….”하고 안심하는 듯했다.
“제가 그렇게 말 편하게 하시라고 말씀드려도, 죽어도 싫다고 하시더니…… 1년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말도 마세요.
전장에서 무려 1년을 썩었는데, 잘 지냈을 리가요.
그나마 부단장님께서 진두지휘를 맡으셔서 빨리 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칼라키나 해협 쪽은 아직도 한창입니다.”
“……다치지 않고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아가씨께서도 이만 부단장님 마음을 받아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부단장님은 아가씨를 만나러 가려고 잠도 자지 않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셨습니다.그 기세가 얼마나 살벌하던지…… 적군들이 부단장님만 보면 사기가 꺾여서 오줌을 지리더라니까요.”
“…….”
“그렇게 온 마음으로 사랑을 바치는 남자가 어디 있다고.그 레토니아의 왕자나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마탑주보다는 우리 부단장님이 훨씬 진국입니다.저, 플로란이 보증합…….”
“잠깐, 잠깐만요.마……탑주요?”
자신의 이름을 ‘플로란’이라고 밝힌 남자가 눈매를 가늘게 뜨고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숨길 필요 없어요.저도 다 압니다.아가씨가 세 남자를 간 보고 있다는 걸요.아아…… 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절세 미남 셋이 다 아가씨가 좋다고 매달리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제가 그렇게 문란한 사람은 아닌데…….”
“알죠, 알죠.다소 개방적인 연애관을 갖고 계실 뿐이죠.”
“아뇨?저 진짜 완전히 보수적인 사람이에요.왜 이래요?”
“예에?”
플로란이 웃기는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탁 뱉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 모습에 억울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쇠창살을 쥐고 흔들면서 큰소리로 맞받아쳤다.
“제 한때 꿈이 수녀였다니까요!”
“아하하!으하하하!아, 눈물 나.올해 최고의 농담!크으…….이 감옥에서도 기죽지 않는 아가씨.여전하십니다.”
플로란은 손등으로 눈가를 찍어 누르면서 가끔 내게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아, 최고!
최고!”하면서 도무지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아니, 내가 문란하면 얼마나 문란한 인생을 살았길래 저런 반응이야?
그의 대폭소에 아연했다.
“아가씨께서…… 큼큼, 누구의 성기가 너무 커서 죽을 거 같다고 제게 한탄했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주점에서 팔아야 할 맥주병이 다리 사이에 달려 있다면서 욕하셨잖아요.그리고 이틀 내내 침실에 갇혀 있었다면서 막 화내셨던 거 저는 다…… 기억합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모르는 척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밤일까지 털어놓았던 거 보면 플로란과 꽤 막역한 사이였나 보다.
그건 그렇고…… 맥주병?
나의 맑고 깨끗한 뇌 속에 불순한 무언가가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털어 생각을 흩뜨렸다.
내가 문란한 연애를 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아-.네.들으니까 생각나네요.”
“또 뭐라고 하셨더라…….
그, 떠돌이 왕자님이 너무 깨물고 빨아 대서 당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그 새끼는 아가씨가 싼 똥 빼고 다 처먹을 새…….”
“그만 말해요.다 기억났으니까 두 번 말 안 해줘도 돼요.”
얼굴이 터질 듯이 화끈거렸다.
기억에도 없는 나의 침대 사정을 남 입으로 듣는 건 보통 정신이 아니고서야 감당하기 힘들었다.
플로란은 무려 1년 만에 재회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창살을 사이에 둔 채로 여러 이야기를 건넸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건 나의 방탕한 성생활과 5년 전에 플로란을 처음 만났다는 것 그리고 애 아버지의 후보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이었다.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플로란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씁쓸함이 내비쳤다.
“한기가 들 거 같은데…… 옷을 더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아요.이거로 충분해요.”
나는 이불처럼 푹신하고 두꺼운 담요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플로란이 돌연 코를 찡긋했다.
그의 흰자가 서서히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숨을 크흡 하고 마시더니 쩝 소리를 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부단장님이 곧 여기에서 나오게 해주신다고 하셨으니, 분명 금방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네.기다리죠.”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내가 부모님을 살해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다른 범인을 지목하려야 할 수도 없고, 그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플로란이 떠나고 나는 또 홀로 남겨졌다.
지금쯤이면 흐꾸웩이 기저귀를 갈아 달라고 칭얼거릴 때인데…….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이런 곳에 갇히게 될 줄도 몰랐고, 태어나서 처음 와 본 지하 감옥이었지만 생각보다 지낼 만했다.
혹시 10년 사이에 지하 감옥을 밥 먹듯 드나들었던 건 아니겠지.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다던가…….
“에이…… 내가 비록 남자 셋과 문란한 밤을 즐겼다지만, 범법 행위까지 저질렀으려고.얼굴부터가 범법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는데.딱 봐도 선량한 난봉꾼이잖아.”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가슴께를 토닥였다.
플로란이 나간 후 네 번 더 끼닛거리가 들어왔다.
하루가 지났다는 뜻이었다.
그동안에도 나는 한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피로는 차곡차곡 누적되어 갔고, 이제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 만큼 묵직하게 몸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때, 철그덕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다가왔다.
끼니를 가져다주던 기사도 아니고, 플로란도 랜서도 아니었다.
무장한 기사 두 명은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근엄한 태도에 조금 긴장되었다.
재판을…… 받으러 가는 건가?
아니면 재판 없이 바로 형을 처하려는…….
그러나 들려오는 말은 생뚱맞은 것이었다.
“리아나 미첼, 석방이다.”
“예?”
기사가 허리춤에서 열쇠 꾸러미를 빼내어 주먹만 한 자물쇠를 풀어냈다.
찰칵.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쇠창살이 열리자 뜨거운 환희가 소름이 돋듯 전신을 뒤덮었다.
랜서가…… 랜서가 나를 꺼내준 건가.
나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더듬더듬 물었다.
“그…… 제 무, 무죄가 입증된 건가요?”
정면을 주시하던 기사가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가 스쳤다.
“뻔뻔하군.”
그의 중얼거림에 가슴께가 뜨끔했다.
무죄가 증명된 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풀려나게 된 거지.
“한 거부가 보석금을 지불했다.듣기론 왕실의 1년 치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라고 하더군.그 정도 돈이면 친부이자 근위대장을 살해한 살인자도 풀려날 수 있지.빌어먹을.”
기사는 나를 씹어먹고 싶은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기사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보석금을 지불했다는 거부가 누구인지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보석금의 액수가 턱이 빠질 만큼 어마어마했다.
일단 확실한 건, 랜서는 아니라는 거다.
기사단 부단장이 높은 자리이긴 하나, 왕실의 1년 치 예산에 달하는 돈을 한 번에 덥석 지불할 수 있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보석금으로 나를 빼낼 생각이었으면, 그가 왕궁에 도착한 첫날에 바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을 거다.
……블래이크인가.
이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였다.
나는 돌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돌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숨이 헉헉 차오르고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아려올 즈음에야 드디어 계단이 끝났다.
이제 밖이겠거니 했는데 이번엔 일직선의 나무 계단이 한 차례 더 등장했다.
아니, 얼마나 깊은 지하에 갇혀 있었던 거야.
어쩐지 주위에 수감자가 한 명도 없더라니.
나무 계단은 돌계단만큼 길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보였다.
기사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어둑한 감옥 안을 벗어나자 환한 햇빛이 눈가를 따갑게 비추었다.
순간 정신이 띵-하고 흔들렸다.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으나 재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타라.”
눈앞엔 흑마 네 마리가 끄는 검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붉은 자수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마차는 왕도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덟 명이 들어가 앉아도 널찍할 거 같은 대형 마차를 두고 멀뚱멀뚱 서 있자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고갯짓했다.
아치형의 둥근 천장과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좌석을 갖춘 마차 안은 몇 권의 서적, 다과, 담요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 와서 그런가?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 타고 가기엔 마차가 지나치게 컸다.
나는 좌석에 앉은 후 기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렇게 저만 타고 가도 되는 거예요?”
기사는 듣기 싫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마차의 문을 닫아 버렸다.
이윽고 마부의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승질 더럽기는.일주일 내내 꼽주는 상관이랑 같이 야근해라.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햇빛과 찬 바람을 마음껏 즐겼다.
딱 잠들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불면증은 여전했다.
지긋지긋하네.
나는 가지런히 꽂힌 책 중 한 권을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골라 펼쳤다.
“음.”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그대로 덮어 버렸다.
<객체 지향 철학과 사회 이론, 고대 신의 실존적 논증과 영향>이라는 책은 제목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책을 빼낸 적 없는 것처럼 다시 원래 자리에 꽂아 두었다.
이딴 책을 읽으랍시고 가져다 놓다니 마차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십중팔구 지독한 놈일 거다.
마차는 광장을 지나 한적한 길을 계속해서 달렸다.
흔히 보이는 민가 하나 없이 탁 트인 들판이 이어졌다.
마치 외딴섬으로 팔려 가는 듯한 기분에 덜컥 겁이 났다.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즈음 마차가 정차했다.
웅장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은 광활한 들판을 국토로 둔 작은 왕궁 같기도 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아나 미첼 님.안으로 드시지요.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복을 차려입은 집사가 나를 안내했다.
나는 뻘쭘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회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넓은 정원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ㄷ’자 형태로 이어진 여러 채의 건물엔 매우 커다란 여러 개의 문과 그보다 많은 창문이 섬세하고 기교적인 장식을 단 채 배치되어 있었다.
벽돌 하나도 허투루 두지 않고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대저택 곳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본관으로 보이는 건물 상층에는 탑으로 보이는 아치형 기둥 두 개가 균형을 맞추고 있어 더욱 궁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내부는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화려했다.
미첼 가의 저택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경관에 기가 죽었다.
그냥 보고 지나치기 쉬운 창틀에까지 정교한 음각이 새겨진 걸 보고 나는 혀를 내둘렀다.
돈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 가는 사람의 집이구나.
노신사가 멈춰 선 곳은 비교적 평범한 문이었다.
물론 금색의 기다란 손잡이는 도금한 게 아니라 진짜 금일 테지만.
눈 아플 정도로 호화스러운 주변에 비하면 평범하다는 뜻이었다.
문이 열리자 봄철의 화원에서나 맡을 법한 싱그러운 꽃내음이 화악 풍겼다.
정원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러나 곧 야외가 아니라 세 벽면과 높고 둥근 천장까지 전부 유리로 만들어진 실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꽃내음은 실제 꽃향기가 아니라 엄청난 재력의 냄새였던 거다.
그리고 찬연한 빛 아래에 누군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유난히 색이 짙은 흑발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내심 블래이크이길 바랐는데…….
노신사는 가볍게 묵례를 한 후 뒤로 물러났다.
“어, 저기…….”
쿠웅.
내 부름을 들었을 텐데도 그는 매정하게 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뺨을 긁적이고는 눈앞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놈이 플로란이 말하던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마탑주’겠거니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저를 감옥에서 꺼내 주셨다고요.”
검은 구둣발이 대리석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몸을 돌렸다.
오뚝 솟은 콧날을 가로지르며 사선으로 그림자가 졌다.
하지만 랜서를 만났을 때와 다르게 그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상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의 몸이 비딱하게 기울었다.
그는 검은 코트를 젖히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꼴이 더럽네.”
중저음의 음성이 가슴을 관통했다.
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그늘진 그의 얼굴을 올려봤다.
세 번째 애 아빠 후보는 아카데미 동기인 말더듬이 ‘칼리언 워렌’이었다.
***
“모, 못 참겠어.
하게 해줘, 리안…….”
“안 돼, 버텨.”
“흐, 흐아…… 제발, 나 더, 더 이상은…….”
칼리언의 부드럽고 반듯한 눈가가 일그러졌다.
촉촉한 붉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흐르고 긴 속눈썹은 위태롭게 팔랑거렸다.
나는 구슬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는 긴장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호흡 소리가 점차 거칠어지고, 인내심이 한계를 맞닥뜨리는 것이 보였다.
이때,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너희 뭐 하는 거니?!”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엄마의 얼굴이 드러났다.
“으, 으핫……!”
칼리언의 얼굴에 하얀 액체가 퍼부어졌다.
액체는 머리카락과 속눈썹 그리고 입술까지 질척하게 적시며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세상에…….”
덜커덩.
놀란 칼리언이 팔등 위에 받치고 있던 쟁반을 그대로 쏟아 버린 결과였다.
쟁반 위의 우유가 엎질러지면서 칼리언의 얼굴에 쏟아졌고, 체스판은 엉망이 되었다.
칼리언은 우유를 뒤집어쓴 채로 퀸 하나만 들고는 눈을 끔뻑거렸다.
엄마는 바닥에 쏟아진 체스 말과 우유로 흥건해진 체스판 그리고 칼리언에 비해 멀끔한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칼리언이 재채기를 하자 그제야 하녀를 불러 방을 청소하게 했다.
엄마는 직접 손수건으로 칼리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는 그런 칼리언을 보며 킬킬 웃다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번 판은 내 승리야, 칼리언.”
“하, 하지만…… 체크, 체크메이트였는데.
체스 말만 노, 놓을 수 있게, 해줬어도 내가 이긴 건…….”
“규칙 잊었어?우유를 쏟는 순간 바로 패배라고.”
칼리언은 억울하다는 듯이 반듯한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낯이 시무룩해지는 걸 보자 안쓰러움보다 웃음이 밀려들었다.
칼리언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또 이렇게 쩔쩔매는 걸 보면 귀엽기도 하니까.
“리, 리안, 네가 체스판을 여기저기 우,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체, 체크메이트 하, 할 수 있었어…….”
그가 소심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나는 귀를 후벼 파는 것으로 무시해 버렸다.
칼리언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 준 엄마가 젖은 손수건을 하녀에게 건네며 나를 꾸짖었다.
“그래, 리안.칼리언을 왜 괴롭히는 거니.”
“괴롭힌 게 아니에요!비리비리한 체력을 기를 수 있게 도와주는 거란 말이에요.팔등에 우유 접시를 올려놓은 채 체스를 하면 체력과 집중력 그리고 사고력까지 전부 기를 수 있으니까요.”
“그게 괴롭히는 거잖니.”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칼리언이 얼마나 제 도움을 받고 있는지.그치, 칼리언?”
칼리언이 손을 뻗어 내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종적인 칼리언의 모습에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봐요, 내 말이 맞죠?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심각한 낯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칼리언,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털어놓으렴.
나는 무작정 딸의 편만 드는 사람이 아니란다.
리아나가 올바른 가치관과 곧은 성품을 갖출 수 있게 노력할 거야.”
“아, 아니에요.
리안은 지금도 충분히…… 올바르고, 고, 곧고…….”
칼리언이 쭈뼛쭈뼛 내 칭찬을 이어 나갔다.
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앞에서 내 칭찬을 하라고 미리 교육해 둔 보람이 있었다.
엄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조금 씁쓸해 보이셨다.) 칼리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칼리언, 우유에 옷이 다 젖어서 안 되겠구나.나타샤를 따라가렴.갈아입을 옷을 줄 거야.”
“네.”
칼리언은 하녀 나타샤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가에 손을 모아 “어디 안 가니까 다녀와.”하고 크게 외쳤다.
엄마는 칼리언이 사라지자마자 쓰게 웃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워렌 공작가에서 저렇게 맑고 순한 아이가 나올 줄이야.”
나는 엄마의 혼잣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워렌 공작가는 왕위 계승 서열 11위였던 왕자를 부추겨 역란으로 왕좌를 차지하게 만든 가문이다.
왕의 뒤에서, 아니 머리 꼭대기 위에서 그를 조정하는 실세이며 가문에 해가 되는 존재라면 전대의 왕도 숙청해 버리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다들 쉬쉬하는 소문 중엔 워렌 가문의 몸속에는 피가 아니라 쇳물이 흐른다는 말도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오로지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워렌 가문의 차갑고 냉철한 면모를 표현하기에 그보다 어울리는 표현도 없었다.
그런 워렌 공작 부인은 쉰한 살에 계획에 없던 아이를 뱄다.
늦둥이 칼리언 워렌.
맏형인 제니드 워렌과는 스물일곱 살 차이가 나는 칼리언은 가문 계승 싸움엔 출사표도 던지지 못하고 자격을 박탈당했다.
게다가 열 달을 채우지 못하고 나온 미숙아의 생명력이란 만추의 낙엽만큼이나 하잘것없이 연약했다.
칼리언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허약한 체질 탓에 독한 약물을 물처럼 달고 살아야 했고 부작용 때문에 1년간 실어증을 앓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말을 더듬게 되었다.
세간에서는 말더듬이 칼리언을 워렌 가문의 수치라고 조롱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와 같은 비난과 모욕을 들었던 칼리언은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그리고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인 자신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홀로 터득했다.
눈에 띄지 않으며, 밟으면 밟히고 납작 엎드려서 숨죽여 사는 삶.
이 잔악한 깨달음이 진리라고 여겼다.
워렌이라는 가문을 등에 업고서도 칼리언은 늘 바짝 긴장했다.
자신을 해악이라고 여기는 듯, 사람들이 저 때문에 불쾌함을 느끼면 어떻게 하나 눈치 보면서.
인간은 때때로 간사하고, 때때로 잔악하다.
처음 칼리언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당시, 칼리언은 아카데미의 모든 학부생뿐만 아니라 교수들에게도 뜨거운 관심을 샀다.
칼리언의 주변엔 늘 사람이 들끓었다.
그와 친분을 쌓음으로써 워렌 가문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는 학부생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리언이 가문의 힘을 휘두를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못하고 또 학부생들의 가식적인 친절을 기록해 둘 만큼 영악하지 못하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났다.
학부생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처음엔 멀리서 비아냥과 조롱을 던져 대다가, 칼리언의 교재나 필기구, 가방 따위를 연못에 빠뜨리고, 나아가 손찌검까지 하게 되었다.
칼리언은 입가가 터져서 피를 줄줄 흘리는데도 교수나 제 유모에게조차 폭력을 고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업보라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이유 없이 당하고만 사는 그가 안타까워서 칼리언 대신 동기들에게 화를 냈었다.
칼리언은 내게 불똥이 튈까 봐 안절부절못했지만,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해?
내가 졸업하기 전에 저놈의 답답한 성격을 고쳐 줘야겠다고 마음먹게 할 만큼 속 터지는 답답함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칼리언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물론 나는 칼리언 말고도 쥴리, 세르비안, 케이시, 피터…… 등등 다른 친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이놈은 실을 직접 뽑으러 갔나…….”
옷을 갈아입으러 간 놈이 3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방은 멀끔히 정리되었고, 하녀가 새 간식을 올려다 주었다.
나보다도 친구가 많은 엄마는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오늘은 프랭크 백작님이 놀러 온 모양이었다.
“리안…….”
나는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너는 무슨 옷을 하루…….”
녀석의 차림새를 보자마자 치솟았던 짜증이 흩어졌다.
비뚤비뚤 잘못 채워진 단추, 느슨하게 풀린 바지 벨트에 제멋대로 쑤셔 넣은 옷자락까지.
솜씨 좋은 유모가 환복을 도와줬다면, 셔츠 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을 거다.
“마, 많이 기다렸지?
미, 미안해…….”
“너 혼자 옷 갈아입은 거야?”
“으……응.”
“왜?”
내가 추궁하듯 묻자 칼리언은 내 눈치를 힐긋 보고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하는 게 수상했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혼낼 때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착 깔고 그를 불렀다.
“칼리언 워렌.”
손을 까딱이자 그가 쭈뼛거리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칼리언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을 들춰 올렸다.
찬 공기가 맨살에 닿자 칼리언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내 손목을 붙잡으려 했으나 “스읍.”하고 경고를 하자 차려 자세로 주먹만 그러쥐었다.
“너…… 이게 뭐야.”
마른 배 위에 시퍼런 멍이 몇 개나 들어 있었다.
파랗고, 노랗고…… 알록달록한 멍이 드러나자마자 칼리언의 표정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 그냥…… 좀.”
“배 가리지 않게, 옷 들고 있어.”
나는 칼리언의 손에 옷자락을 쥐여 주고는 책상 쪽으로 달려갔다.
블래이크 선생님이 줬던 연고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붉은색 케이스의 연고를 쥐고는 칼리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내가…… 바를게…… 소, 손에 여, 연고 묻으면 불쾌하니까.”
“옷도 제대로 못 입으면서 무슨.”
칼리언은 울 듯이 얼굴을 구기면서도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배를 내보이고 섰다.
“옷…… 더 드, 들어 올릴까?”
그가 손가락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나는 그의 검은 속눈썹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돼.
가만히 있어.”
검지로 연고를 조금 퍼냈다.
푸르게 물든 멍에 조금씩 찍어 바를 때마다 그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떨리는 게 보였다.
옷자락을 쥔 손은 긴장한 것처럼 주먹을 그러쥐고 있었다.
“아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니…… 계속 바, 발라 줘.
조, 좋아…….”
“좋을 건 또 뭐람.”
“……그, 그냥.”
“아픈 게 좋아?
이 머저리.
그러니까 애들이 자꾸 괴롭히는 거 아니야.
너무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그, 그래도…… 네가 약 발라 주는 게 조, 좋아…….”
그가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소심하게 말했다.
한심했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칼리언이 꼭 내 어린 동생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다 됐어.
이제 어디 가서 맞지 마.
그럼 나한테 두 배로 맞아.”
“……네, 네가 때리면…… 나는, 그냥 맞을래.”
“내가 아니라 딴 놈이 때려도 그냥 처맞고만 있잖아.”
“…….”
“안 되겠어.
내가 그놈들을 반쯤 조져 놔야지.”
나는 연고를 칼리언의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다시 책상을 뒤졌다.
딱 한 번 쓰고 꺼내지 않았던 묵직한 오르골이 잡혔다.
웬만한 짱돌보다 단단하고, 강력한 둔기다.
칼리언이 얼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걸로 뭐, 뭘 하게?”
“정의 구현.”
그리고 힘껏 오르골을 휘둘렀다.
부웅.
쇳덩이가 묵직하게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리안, 머, 머리를 바, 박살 내는 걸 정의 구현이라고 하, 하지 않아…….”
“그럼 대가리 박살.”
“자, 잡혀 들어가는 건, 내, 내가 잡혀 드, 들어갈게.”
칼리언의 비장한 목소리에 헛웃음이 터졌다.
나는 휘두르던 오르골을 내려놓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마.
너 감옥에서 썩게 하는 짓 안 해.”
“고, 고마워…….”
왜 그가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신, 거짓말하지 말고 얘기해.
이번엔 왜 때린 거래?
생긴 게 재수 없대?
그럼 질투하지 말고, 얼굴에 분이라도 찍어 바르라고 맞받아치지 그랬어.”
“아, 아니야…….”
“고대어 해석하는 과제 대신 해오래?
그럼 동요 가사를 적어 놓으라니까, 어차피 걔네 공부 안 해서 네가 뭔 말을 적었는지 절대 몰라.”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칼리언은 사람 홀리는 미소를 부드럽게 머금었다.
얼굴로 화난 나를 달래려 하는 거였다.
“그럼 대체 뭔데?”
“……마, 말을 더듬을 때마다, 한 대씩, 때, 때린다고…….”
나는 오르골을 다시 집어 들었다.
칼리언이 뒤에서 와락 안겨 들며 내 어깨에 입술을 내렸다.
“지, 진짜 감옥 가…….”
“네가 간다며!”
“응, 내, 내가…… 갈게.”
“으휴!
멍청아, 네가 감옥을 왜 가?”
나는 홧김에 오르골을 내던졌다.
묵직한 쇳덩이가 얼마 굴러가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 쿠웅 하고 멈춰 섰다.
칼리언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속이 콱 틀어막혔다.
칼리언의 말더듬증은 왕실 의사도 치료하지 못한 불치병이나 다름없었다.
말더듬증 때문에 가장 불편한 건 칼리언 본인일 텐데, 왜 다른 놈들이 안 그래도 가여운 칼리언을 더 불행하게 만드냔 말이다.
내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만 있자, 등 뒤에 서 있던 칼리언이 오르골을 주웠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하, 하고 싶은 대로 해.
뇌, 뇌가 터지고 뇌수가 쏘, 쏟아질 때까지…… 마음껏 쳐.”
“…….”
“가, 감옥은…… 내가 갈 테니까.
네 화가 푸, 풀릴 수만 있다면.”
“뭐?
누가 사람을 그렇게까지 때린다는 거야.
너는 가끔 이상한 말을 하더라.”
“미, 미안…….”
사과는 왜 하는 거야?
답답함에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게다가 칼리언은 자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끝까지 날 위해 희생하겠단다.
이 순진하고 착해빠진 놈을 어쩌면 좋지?
아무래도 내가 더 신경 써서 칼리언을 지켜 줘야겠다.
이른바 밀착 보호다.
누군가 칼리언을 해코지하려고 하면 그땐 진짜 오르골로 단죄해야지.
나는 의지를 다지며 내던졌던 오르골을 주워 들었다.
그러나 내 의지는 바람 앞의 촛불만큼이나 빈약했다.
다음 날 아카데미에서 점심을 먹은 직후 쥴리와 수다를 떠는 사이 칼리언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오르골을 든 채로 아이들을 닦달하여 칼리언의 행적을 뒤쫓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구관의 도서관이었다.
방학 때 이곳을 허물고 연무장을 새로 짓는다는 건 학부생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곧 허물어질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이곳은 거미줄과 먼지가 그득했다.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칼리언을 찾아 걸었다.
그때, 천이 바스락바스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언?
자물쇠가 고장 난 문이 어깨뼈가 빠진 사람처럼 맥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벌어진 틈 사이로 눈을 가져다 댔다.
“……!”
그곳엔 칼리언이 홀로 서 있었다.
찢긴 커튼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며 그를 빛으로 흠뻑 적셨다.
칼리언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료하고, 권태로워 보이는…… 맨손으로 아기의 목을 비틀 수 있을 것처럼 싸늘한 낯이었다.
‘워렌 가문의 몸속엔 쇳물이 흐른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웃음 쳤던 소문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반쯤 풀린 눈꺼풀 아래에 붉은 안광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칼리언이 돌연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등을 길게 그었다.
예리한 날이 피부를 푹 쑤시는데도 칼리언의 낯은 여전히 나른하기만 했다.
그의 부드러운 팔등에 긴 자국이 생기며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붉은 것이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는 순간 멍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칼리언!”
문을 벌컥 열자 칼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붉은 동공이 확장되는 게 보였다.
하지만 평소의 얼빠진 모습은 아니었다.
“봤어?”
그의 고개가 사선으로 비딱하게 기울었다.
선이 뚜렷한 턱과 붉은 입술에 눈이 갔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손을 ‘탁’
쳐냈다.
피 묻은 단검이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해는 안 돼.”
칼리언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잠시 멍해 보였다.
이윽고 무언가 깨달은 듯 잘생긴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다.
그가 근사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마주 봤다.
“아…….”
“‘아…….’는 무슨 아야!
괴롭히는 놈들 있으면 내가 다 때려눕혀 줄 테니까, 위험한 생각하지 마.
알아들어?”
칼리언이 들고 있던 팔을 아래로 투욱 떨어뜨렸다.
붉은 피가 강줄기처럼 나뉘어 손등을 타고 아래로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나 아파, 리안.”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나는 피범벅이 된 그의 손을 잡아 올리며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보기만 해도 내 팔이 다 아팠다.
“당연히 아프지, 이 멍청아.
따라와, 깨끗한 물에 씻으러 가자.”
칼리언은 내가 당기는 대로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얘 또 이러네.
가끔.
열 번 중 한 번 정도.
칼리언은 나에게 모진 말을 들어도 주눅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밤바다보다 깊은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뭘 쳐다봐.”
그의 눈동자 속엔 화염을 이고 다니는 새가 둥지를 튼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피부가 홧홧하게 달아오를 리가 없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칼리언의 입매엔 청렴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 내가 나쁜 생각하지 않도록…… 평생 지켜 줄 거지?”
그가 물었다.
내가 알던 칼리언의 그 어리숙하고, 맹한 어투로.
“알았으니까, 따라오기나 해.
안 그러면 연고 안 발라 준다.”
내 입에서 확답을 듣고 나서야 칼리언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유학이 결정되었다.
칼리언에게 유학 간다고 얘기했을 때 그의 반응이 어땠더라…….
축하해 줬던 거 같다.
칼리언은 원하는 바를 이뤄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나와 포옹도 했다.
나는 칼리언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고, 칼리언은 방학 때마다 날 찾아오겠다고 했다.
나쁠 것이 전혀 없는 이별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