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기억 속의 남자(2)
투욱, 툭…….
얼음송곳이 입술을 사정없이 찌르는 듯했다.
따끔한 통증에 앓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눈을 뜨니 어둡고 차가운 천장이 보였다.
고풍스러운 벽지로 도배를 한 것도 아니고, 유명한 조각가가 정교하게 무늬를 새긴 벽도 아니었다.
사각으로 깎아지른 투박한 돌덩이가 숨을 턱 틀어막듯 깔려 있었다.
벽돌 틈 사이로 흘러내린 정체 모를 물이 찢어진 입가에 떨어지고 있었다.
물이 혼몽한 정신을 깨우자 타는 듯한 갈증이 몰려들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머리맡에 있던 물컵을 들고 게걸스럽게 전부 빨아 마셨다.
갈증이 해소되고 나니 점점 흐릿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벽에 꽂힌 횃불이 아스라이 일렁이며 삭막한 감옥 내부를 비추었다.
나는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 검은색 담요 한 장만 덜렁 있는 곳에 혼자 갇혀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모님의 죽음도 전부 떠올랐다.
“……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내가…….
차마 생각으로도 더듬어 보지 못할 끔찍한 진실이었다.
이대로 벽에 머리를 박고 죽고만 싶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왜, 왜!!”
나는 영혼을 빼앗긴 송장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토할 듯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성대를 끊어 버릴 듯한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그러기를 한참.
손끝 발끝까지 기운이 전부 빠져버렸다.
나는 옆으로 쓰러지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잠들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지긋지긋한 불면증이 숙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말라 죽어 간다는 게 이런 걸까.
가슴을 쥐어뜯으며 스스로를 탓해 봐도, 텅 빈 기억은 일말의 죄책감마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길을 걷다가 운석을 맞은 것만 같았다.
나는 피할 수 없는 사고에 휘말린 것뿐이지, 절대로 가해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 봐도 내가 부모님을 죽였다는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한 줄기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감옥 속에서 시간을 죽이고, 나를 죽여 갔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식사도 거르고 가만히 눈물만 흘리고 있으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만큼 기력이 저하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그 덕에 머릿속에 들끓던 자기 파괴적인 생각들이 썰물처럼 밀려나고, 살고자 하는 본능이 몸부림치듯 튀어 올랐다.
미칠듯한 허기에 손도 대지 않았던 식판을 끌어왔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빵을 물에 적셔서 조금씩 뜯어 먹었다.
느릿느릿 식판을 전부 비우고 나니 살 것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흐꾸웩.”
블래이크에게 떠맡기듯 안겼던 흐꾸웩이 뒤늦게 떠올랐다.
블래이크가 성질이 더러운 선생이긴 해도, 나쁜 인간은 아니니 흐꾸웩을 무책임하게 버리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흐꾸웩을 다시 데려와야 하는데.
신전 앞에서 들었던 흐꾸웩의 울음소리가 나의 무기력한 정신을 가열하게 채찍질했다.
이대로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 순 없었다.
흐꾸웩의 아버지도 찾아야 하고, 잃어버린 10년간의 기억도 되살려야 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억울했고 또 의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특히 누구도 믿지 말라던 그 쪽지…… 내 행적을 쫓다 보면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소설 같은 추측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계획적으로 이 지옥에 떠민 걸 수도 있다.
우리 가족이 어떤 사건에 휘말렸고, 진실을 엄폐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든가 하는…….
내가 기억을 찾기 전까지 확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야 해.”
나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살인죄에 대한 재판이 있을 거고, 곧 기사들이 나를 데리러 올 것이다.
이때, 베고 누운 땅에서부터 규칙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돌연 찾아온 어수선함에 눈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쇠창살 앞에 서 있었다.
정오의 태양보다 화려한 붉은 망토를 두른, 금빛 갑옷 차림의 누군가.
내게 죗값을 물으러 온 집행관인가.
몸을 일으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툭, 데구르르-.
남자의 옆구리에 껴 있던 금빛 투구가 떨어져 바닥으로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무심코 시선이 투구를 좇아갔다.
“……아가씨.”
부드러운 미성이 귓가를 감아올렸다.
나는 눈앞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가가 복숭아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고 있는 갑옷보다 밝은 금빛 머리카락.
눈가에 맺힌 수분을 빨아들인 것처럼 축축한 짙은 녹색 눈동자.
왕궁 기사단은 길거리의 흔해 빠진 용병들과 달리 자신들만은 품격 있고 고고한 기사로 기록되기를 원했다.
하여 대외적으로 기사단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기 위해 귀족 자제 중 무예에 소질이 없더라도 외모가 출중한 이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기사단의 소모품으로 ‘꽃’이라 불리는 기사들은 오직 빼어난 외모로 선발되었다.
부모도 성도 없는 천민 중에서 이런 식으로 기사가 된 이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천민 출신의 기사는 기사단 내에선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곤 하지만.
눈앞의 기사도 그런 부류 같았다.
대중을 홀리는 향수로 쓰이다 버려질.
놈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은 거추장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철컥.
기사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쇠창살을 쥐었다.
뼈마디가 예쁘게 자리한 큰 손이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흐윽…….”
거친 목울음 소리와 함께 기사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의 방울진 눈물이 차가운 돌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 사람은 누구길래 내 앞에서 이토록 서럽게 우는 걸까.
진짜 울고 싶은 건 난데.
서로 궁상맞게 마주 앉아서 누가 더 불행한지 경쟁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비벼 닦았다.
“……저리 가서 우세요.”
그러나 목소리가 처량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흐느끼던 기사는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긴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처연한 눈망울이 내 얼굴을 살피는 것이 수상했다.
마치 나를 아는 사람처럼…….
“아가씨.”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마주 보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얼굴 위로 짙은 당혹감이 드리웠다.
“아…….”
순간, 그가 나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의 쌀쌀맞은 태도에 그는 둔탁한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기사의 당황은 길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넘겨 놨던 앞머리를 큰손으로 빠르게 흩뜨렸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이마를 덮는다.
“제 앞머리 때문에 못 알아보신 거죠?
죄송합니다.
왕성에 돌아온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서…… 머리 정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앞머리 유무의 차이로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보겠냐.
내가 바보인 줄 아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럼 왜 못 알아봤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장난이었다고 해야 하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주제에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겠다.
나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바보가 되기를 선택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축축한 그의 얼굴 위로 그린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뺨에 잡히는 보조개와 입 동굴이 드러나는 시원한 입매.
미소가 잘 어울리는 꽃의 기사였다.
아, 저 미소……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아가씨께서 이런 모습으로 갇혀 계실 걸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전쟁에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당하더라도…….”
기사의 몸이 무너졌다.
쿵.
거대한 덩치가 바닥에 양 무릎을 꿇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치 내게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왜, 왜 이래?
그의 태도가 닭살 돋을 만큼 부담스러웠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선 눈앞의 기사가 누구인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 알아내야 했다.
나도 그의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그리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들을 낳았어…….”
나는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갑자기 왜 반말입니까?’하고 되물을 가능성을 대비해 말을 길게 끌었다.
다행히도 반말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다만, 훌쩍거리던 그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투욱 떨어지며 시원한 입매가 놀란 듯 벌어졌다.
“누구의…… 아이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설렘으로 떨리고 있었다.
“…….”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뜻이 명백히 전해졌다.
블래이크와 같은 반응이었다.
나의 문란함이 변명의 여지도 없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
제 아이가 맞습니까?
그것보다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아가씨를 연행해 온 기사들이 강제로 빼앗았습니까?
그놈의 인상착의를 말씀해 주세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하다못해 턱수염 색깔이라도.”
기사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어 갔다.
애를 빼앗아 간 기사가 누군지 말하면 당장에 그놈을 잡아 죽일 것만 같은 기세였다.
꽃돌이 기사가 그런 힘이 어디 있겠냐마는…….
“아이는 잠시 맡겨 뒀어.
잡혀 오기 전에…… 사정이 있어서…….”
“또 블래이크 자베른입니까?”
……블래이크를 알고 있어?
그가 얼굴을 매섭게 굳혔다.
폭발 직전의 감정을 참아 누르는 모습이었다.
숨을 짧게 내쉬고는 기껏 정리해 뒀던 앞머리를 이마 뒤로 쓸어 넘겨 버린다.
“설마 그자의 아이입니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물어봐도 말 못 해.
나도 모르니까.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면서 기사의 이목구비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누구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희미했다.
그리고 어쩐지 흐꾸웩은 블래이크보다 이 기사 쪽을 더 닮은 것 같았다.
흐꾸웩의 외모는 천사 같고 앙증맞은데, 천사랑 앙증맞음은 블래이크와는 1억 광년 정도 떨어진 말이었다.
차라리 이 기사라면 몰라도.
“……누구의 아이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돌아왔으니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네 아이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습니다.”
“남의 애를 왜…….”
“당신의 피가 섞인 아이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맹목적인 시선에 나는 그만 눈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따끔따끔 저렸다.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게 못내 미안한 탓이었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텨 주세요.
금방 꺼내드리겠습니다.”
“무슨 수로?”
겉모습만 기사인 당신이 장교 살해범으로 지목당한 나를 어떻게 꺼내려고.
기사는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햇살같이 웃어 보였다.
어렸을 적, 원망과 분노가 점철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녹안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전처럼 당신의 귀한 입술로 제 이름을 불러 주신다면, 저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름.
“당신의 부름 한 번으로 제 모든 것을 버렸던 그 날처럼.”
“…….”
“다정하게 ‘랜서’라고.”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닫혀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고 폭발하듯 하늘 위로 솟구쳤다.
기억들이 은하수처럼 쏟아져 나오며 나는 기사의 10년 전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냈다.
곧장 기억해 내지 못할 만큼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그의 정체에 경악이 뒤따랐다.
눈앞의 기사는 촉망받던 예비 기사이자 아버지의 종자였던 ‘랜서 발레라’였다.
***
아버지가 처음 랜서를 저택으로 데려오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까워서 신년에도 따지 않았던 와인을 호쾌하게 따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왕궁 호위 기사단의 장교로서 국왕 전하께서 지방으로 거동할 때마다 그곳이 어디든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그리고 재채기를 하면 침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던 북쪽 지방 끝자락에서 웬 소년 용병 하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 왕국을 대표할 영웅이 될 재목을 찾았어.”
아버지는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남들이 눈치채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발견한 게 천만다행이라는 얘기를 모험담처럼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가 궁금해졌다.
많은 종자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자 매일같이 그의 갑옷에 묻은 먼지와 피를 닦았으며 또 손바닥에 물집이 터지도록 검을 들었다.
아버지는 저택의 하인들 에게조차 말을 높일 정도로 자애로웠지만, 종자들과 부하 기사들에겐 그 누구보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상관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와인을 따게 할 만큼 훌륭한 인재라니.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다.
침실로 올라가려던 찰나 저택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아버지의 새 종자가 도착한 것이다.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하인의 말에도 나는 떼를 쓰며 응접실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응접실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에게, 저게 그 영웅이야?”
키도 덩치도 우락부락한 덩치가 걸어올 줄 알았는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건 나보다도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예쁘장한 꼬맹이였다.
그때 당시의 내가 열세 살이었으니, 랜서는 고작 열 살이었다.
셔츠는 다른 천으로 덧대어 꿰맨 흔적으로 너절했고, 걸레로도 쓰기 힘들 만큼 잔뜩 헤져 있었다.
그리고 새하얗고 동그란 복숭아뼈가 드러나는 짧은 바지.
한 번도 빗질해본 적 없는 듯 덥수룩한 금빛 머리칼.
기사라기보다는…… 거지 같았다.
말 그대로 거지.
북대륙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랜서의 부모님은 설산에서 눈 폭풍을 피하지 못해 실족사했고, 홀로 남은 랜서는 밥값을 벌기 위해 용병단에 들어가서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먼 곳까지 온다고 수고 많았다.
밤이 늦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꾸나.”
꼬박 일주일을 쉬지도 않고 달려온 사람에게 하는 말치고는 성의가 없었다.
나라면 ‘그게 끝입니까?!
예?’하고 화를 냈겠지만, 랜서는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익숙한 듯 얌전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하인을 불러 랜서에게 묵을 곳을 알려 주라고 일렀다.
랜서가 뒤돌아섰다.
얼핏 소년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으나 그야말로 찰나였다.
랜서의 녹색 눈동자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랜서는 장시간의 이동이 힘들었는지, 온몸에 피로가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빡이는 걸 보고 있자니 조금 안쓰러웠다.
소년이 본능적으로 배를 움켜쥐는 게 보였다.
“지금쯤이면 주방 정리를 다 했을 텐데.”
나나 부모님이 출출하다는 말 한마디면 곧바로 불을 피울 테지만 저 꾀죄죄해 보이는 꼬마 때문이라면 주방 문은 열리지 않을 거다.
나는 나무로 촘촘히 짜인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 두 알을 집어 들었다.
과일 바구니를 잠시 내려보다가 커다란 포도송이를 하나 더 집어 올렸다.
과일을 품에 잔뜩 안아 들고 랜서의 뒤를 쫓았다.
“야.”
랜서는 내가 자신을 부르는 줄도 모른 채 앞만 보고 걸었다.
랜서의 옆에서 나란히 걷던 하인이 작은 어깨를 툭 건드리고 나서야 “예?”하며 하인을 올려다봤다.
“야, 너.”
“……예.”
소년이 그제야 나를 마주 보며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눈썹 밑까지 내려온 앞머리 아래로 녹안이 모습을 감추었다.
손 안 가득 들고 있는 과일만 아니었더라면 충동적으로 소년의 앞머리를 들췄을 거다.
“자, 받아.”
그리고 떠안기듯이 과일을 소년의 품 안에 밀어 넣었다.
멍하니 서 있던 소년은 입술을 꾸욱 눌렀다가 뗐다.
그러고는 한숨처럼 말했다.
“어디에 가져다 놓으면 될까요?”
나는 내 코끝에 닿는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여력을 다해서 표정을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비집고 나왔다.
내 호의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너 먹으라고, 바보야.”
나는 과일을 떠안겼을 때처럼 다짜고짜 화내듯이 말하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버렸다.
그 첫 만남 이후로 랜서와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나는 저택의 연무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늘 산이나 들판을 쏘다니면서 약초를 채집하거나 아카데미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는 것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말을 섞는 건 1년에 한 번 아니 두 번……?
아무튼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는 뜻이었다.
랜서가 아버지의 종자로 들어온 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열다섯 살이 되었고, 랜서 그 꼬맹이는 열두 살 꼬맹이가 되었다.
아카데미 수업도 일찍 끝나고 과외도 없는 한가한 날이었다.
저녁을 빵으로 대충 때우고 잠들기 직전까지 약학 서적을 읽을 생각이었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랜서만 아니었다면.
처음 봤을 때보다 키가 조금 더 자란 그는, 한 몸처럼 들고 다니던 목검은 어디에다가 내팽개치고 나무 쟁반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마른 낙엽이 그의 발밑에서 부서지며 바스락거렸다.
아무래도 수상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날은 지독하게 한가한 날이었고, 랜서는 목검 대신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랜서가 향하는 곳은 정원사 마커 씨가 애지중지하는 정원이었다.
티타임을 즐기기에는 늦은 시각이라 랜서의 시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랜서를 연무장 관리에만 신경 쓰게 하지 그 외의 시중은 들게 하지 않았다.
역시 수상해.
따라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걸었다.
랜서가 밟아서 뭉그러뜨려 놓은 낙엽을 그대로 따라 밟으며 걸었다.
랜서가 멈춘 곳은 숲처럼 우거진 측백나무 앞이었다.
마커 씨가 울타리 대용으로 쓰고 있던 그 나무들을 모두 베어낸 뒤 정원을 확장할지 고민하던 게 떠올랐다.
마커 씨의 고민이 고민으로 끝나는 일은 없었다.
머지않아 이 측백나무는 뿌리째 뽑혀 어디론가 팔려 가든가 아니면 다른 조경 장식품으로 쓰일 것이다.
곧 사라질 나무에 왜 관심을 두는 거지?
랜서는 사시사철 푸릇푸릇한 침엽수 속으로 다이빙하듯 상체를 밀어 넣었다.
그의 하체가 엉거주춤 움직이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씰룩쌜룩 움직이는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꾸욱 누른 채 킬킬거렸다.
한참이나 측백에 얼굴을 박고 있던 랜서가 머리칼에 잎을 잔뜩 매단 채 빠져나왔다.
그는 텅 빈 나무 쟁반을 들고 한참이나 측백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아차 싶은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경계가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이런 애가 영웅 감이라니.
아버지가 랜서에게 속은 것 같다.
나는 랜서가 자리를 뜨길 기다렸다.
저 측백에 뭐가 있는지 확인을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은 물론이고 몇 년을 침대에서 뒤척일 것만 같았다.
나는 랜서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얼른 측백 앞으로 튀어 나갔다.
랜서가 그랬던 것처럼 우거진 잎 안으로 상체를 쑤셔 넣었다.
잎을 헤치자 누군가의 옷과 담요가 겹겹이 쌓아 올려진 게 보였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여섯 마리 새끼 고양이도.
“우와…….”
랜서를 향한 의심이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꼬물거리는 생명을 향한 경이로움만 남았다.
“너무…… 귀여워.”
옷 위에 흩뿌려진 빵가루와 작은 컵에 담긴 물은 랜서가 가져온 것이었다.
나는 약학 서적을 읽어야 하는 것도 잊고 해가 질 때까지 측백 안에 머리를 처박았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눈앞의 측백조차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일과처럼 랜서를 몰래 미행했다.
랜서가 새끼 고양이들에게 음식과 물을 가져다주고 떠나면 나는 한참 뒤에 배불리 먹고 잠든 고양이를 구경했다.
그러나 구경만 해도 좋았던 마음에 근심이 들어섰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새끼 고양이들이 혹한의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나는 내가 가진 목도리 중에 가장 두껍고, 깨끗한 것을 골라서 고양이 주변을 감싸 주었다.
랜서가 목도리를 발견하겠지만, 고양이를 위해서 감싸 줬다는 것을 알면 그도 크게 저어하진 않을 것이다.
“뭐, 혹시 모르지…….”
나한테 같이 고양이를 구경하러 가지 않겠냐고 넌지시 물어볼지.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고양이 구경이 아닌 피투성이가 된 목도리였다.
짜악.
짜악…….
집사장이 랜서의 뺨을 연거푸 올려붙였다.
하루 치 간식을 다 먹고 우울해하고 있으면 부모님 몰래 내게 사탕을 쥐여 주던 그 집사장이…… 랜서의 뺨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손찌검을 했다.
나는 경악으로 사고가 마비되었다.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로 꼿꼿하게 체벌을 받던 랜서가 크게 휘청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집사장이 팔을 크게 휘둘렀을 때 나는 그의 앞을 가리고 섰다.
집사장이 황급히 손을 내리며 놀란 눈으로 반걸음 뒷걸음질 쳤다.
“아가씨,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원에 나오시기에는 아직 날이 많이 찹니다.
제가 침실로 차와 다과를 가지고 갈 테니…….”
“왜 애를 때리고 그러세요?
아버지한테 허락받고 이러시는 거 맞아요?”
“주인어른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분명히 이해해 주실 겁니다.”
“랜서는 기사가 될 종자로 온 거지, 우리 저택의 하인이 아니에요.
아무리 집사장이라도 이렇게 대하실 수는 없어요!”
그러나 집사장은 내 말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도리어 랜서를 향한 노골적인 혐오와 경멸을 드러냈다.
자신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두려울 게 없는 거다.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
집사장의 당당한 태도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랜서가 이렇게 뺨을 얻어맞을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걸까.
나는 슬쩍 뒤를 돌아 랜서를 바라보았다.
랜서는 예의 그 곧은 자세로 선 채 시선을 자신의 발끝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선 차마 닦지 못한 눈물이 쉼 없이 뚝뚝 떨어졌다.
랜서의 발치가 그의 눈물 자국으로 짙게 변했다.
욱신.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랜서가 무슨 잘못을 했든 간에 아직 어린 애를 이렇게나 무차별적으로 때리는 건 말도 안 된다.
집사장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지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찰나 랜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눈물에 젖어 한층 짙어진 녹색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처연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내게 날아와 박힌 것은 분노와 혐오감이었다.
그것도 집사장이 아닌 나를 향한 적의.
“왜…….”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당혹감에 의문이 치솟았다.
하지만 말이 이어지기 전에 집사장이 벼락처럼 큰소리를 내었다.
“이거 보세요, 아가씨.
아가씨의 비싼 목도리를 저 배운 거 없는 도둑놈이 훔쳤습니다!”
나는 내게 내밀어지는 목도리를 얼결에 받아 들었다.
내가 고양이 주변에 둘러 뒀던 그 목도리였다.
이건 내가 직접 가져다 놓은 건데 왜 랜서가 훔쳤다고 생각하는 거지?
명백한 오해였다.
하지만 나는 해명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목도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핏자국.”
티 하나 없이 하얬던 목도리 위에 붉은 핏자국이 낭자했다.
“이 목도리를 들고 아가씨 침실 근처에서 서성이는 것을 제가 냉큼 잡아 왔습니다.
핏자국은 저놈의 손에 묻어 있던 게 묻은 모양인데, 당최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입을 열지 않습니다.
괘씸한……!”
집사장이 내 뒤로 손을 뻗어 랜서의 작은 어깨를 우악스럽게 쥐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가 끌고 가는 걸 막기 위해 랜서의 손을 붙들었다.
탁!
그러나 손끝이 스치기가 무섭게 랜서가 나를 거칠게 쳐냈다.
얼얼한 손등보다 사납게 들끓는 그의 분노가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옆에 서 있던 하인 중 하나가 랜서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무방비 상태였던 랜서는 그대로 고꾸라졌고, 하인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흙먼지와 짧게 깎인 잔디가 흩날리며 랜서의 몸 위로 낙하했다.
나는 하인에게 그만하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랜서는 얻어맞는 와중에도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나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 건방진 놈이 주제를 모르고!
건방진 눈깔 안 치워?!”
하인의 구둣발이 랜서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터지며 억눌러 왔던 신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 묻은 목도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만 하세요!
당장 랜서한테서 떨어…….”
“왜 그러셨습니까?”
랜서가 엎드린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피처럼 눈물이 콸콸 쏟아지고, 그의 선하던 눈빛은 분노와 절망으로 이지러졌다.
왼쪽 얼굴이 크게 부어올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와중에도 나를 응시하는 두 눈엔 짙은 경멸과 살기가 도사렸다.
“아가씨가 제 뒤를 밟는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내버려 뒀습니다.
아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저지한다고 해도 말릴 수 없는 분이라는 걸 아니까요.
제 주제를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왜…… 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거친 목울음 소리는 흥분에 차 점점 격양되어 갔다.
이건 내지르는 절규였다.
내가 그의 기세에 눌려 주춤하자 하인이 또 랜서를 걷어찼다.
셔츠를 반듯하게 바지 속으로 밀어 넣어 입었던 옷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다.
나는 랜서의 적의에 숨통이 조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불안감을 무릅쓰고 주먹을 힘주어 쥐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하세요!
지금부터 그 누구도 랜서를 건드리지 마세요.
아셨어요?”
“하지만, 아가씨 이 버릇없는 놈은 지금부터 철저히 교육시켜야 합니다.”
“내 말도 따르지 않는 분들이 누구의 버릇을 지적하는 거죠?
교육은 집사장부터 다시 받아야겠군요.”
“아가씨…….”
집사장이 꺼림칙한 눈으로 랜서를 내려보다가 내가 물러나지 않을 거 같자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저희가 이놈의 팔만 붙들고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뇨, 모두 물러가세요.랜서와 둘이서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저는 아가씨 같은 사람이랑 나눌 이야기 없습니다.”
랜서가 말 하나하나를 짓씹듯이 말했다.
“이놈이……!”
“때리지 마세요!”
발을 들어 올렸던 하인은 씨근거리면서도 랜서에게 더는 손대지 못했다.
나는 랜서의 적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피 묻은 목도리를 들고 내 침실 주변을 서성였다는 것 또한.
왜, 왜일까.
펄떡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순간 벼락처럼 여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하인들을 헤치고 미친 듯이 측백 앞으로 뛰어갔다.
측백 속을 따뜻하게 채웠던 옷들이 거꾸로 뒤집힌 채 바닥에 쏟아져 있었고 그 주위로 형체를 알 수 없는 살점과 내장이 붉은 카펫처럼 넓게 깔려 있었다.
묵직한 것이 자비 없이 내려앉았던 것처럼 처참하게.
쭈뼛 소름이 돋았다.
잔악하리만치 끔찍한 형태에 절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슬픔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이 처참한 현장에 내 목도리가 떨어져 있었다면…… 그리고 랜서 말고 이 장소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면…….
충분히 나를 범인으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야…….내가 아니야.내가 아니라고!”
엉망진창이 된 열두 살 소년에게 결백을 주장했으나, 소년의 이성은 충격으로 흐려진 뒤였다.
내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소년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고 있는 거다.
나는 턱밑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집사장에게 걸어갔다.
“랜서를 놔줘요.그리고 랜서가 무사히 숙소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풀려난 랜서는 허리를 꾸벅 숙인 후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바닥에 난자한 살점과 내장을 자신의 셔츠 위에 쓸어 담았다.
그는 둥그렇게 모인 시신을 들고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게 헤어진 것이 내 기억 속 랜서의 마지막 모습이다.
***
“……랜서.”
꿈결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몽롱한 음성이었다.
랜서가 쇠창살을 잡아 뜯을 듯 힘을 주었다.
“아가씨의 발등에 키스하고 싶습니다.동그란 무릎에도, 골반과 움푹 파인 쇄골 위에도…….”
나는 귀가 가려운 척하며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연인들끼리나 나눌 법한 밀어는 내게 익숙지도 않았으며 또 그 상대가 하얗고 작은 소년 랜서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놈은 그간 뭘 먹었길래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는 어렸을 때의 그 말갛고 예쁘장한 얼굴은 남아 있었지만, 몸은 수컷 냄새가 물씬 나는 건장한 기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인재였으니…… 꽃돌이용 기사는 아닌 거 같다.
그럼 정식 기사란 말이야?
이때 바닥을 거칠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멀리서부터 횃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부단장님.”
은색 투구를 쓴 기사가 다가와 왼쪽 가슴 위에 자신의 주먹을 가져다 대며 기사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부단장님, 단장님께서 당장 데려오라고 성화십니다.더는 시간을 지체했다간 또 얼마나 노발대발하실지…….”
“기다리시라고 해.”
“벌써 말씀드려 봤습니다만…… 1년을 기다렸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냐면서 불쌍한 단원들을 두들겨 패고 있습니다.부단장님께서 오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으실 거 같은데…….이대로는 단원들이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아니, 죽을 겁니다.”
기사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기사가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건 말건 랜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시선 한 번 주질 않았다.
그는 이 공간엔 나밖에 없는 것처럼 내게 맹목적인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기사가 힐긋 내 눈치를 봤다.
나도 기사의 눈치를 보던 중인지라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 새끼 왜 이래요?’
‘나한테 묻지 마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기사지만 우리는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눈 맞춤만으로 서로의 의중을 파악했다.
가만, 저 기사도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내가 기사를 쳐다봤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랜서가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랜서가 돌아보자 기사가 움찔했다.
“곧 간다고 말씀 드려.”
랜서가 옆에 서니 기사의 몸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졌다.
기사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간청하듯 말했다.
“단장님께서 부단장님을 데리고 돌아오지 않으면, 제 손톱을 뽑아서 머리 장신구로 쓰신다고…….
알겠습니다.”
내 시야에선 랜서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기사가 창백하게 질려서는 도망치듯 감옥을 빠져나가는 걸 보아 대충 어떤 느낌일지 추측만 할 수 있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방금 전 나간 놈 편으로 갈아입을 옷과 새 담요를 보내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따뜻한 음식, 아무거나.”
“알겠습니다.”
“…….”
곧장 갈 줄 알았던 랜서는 말을 끝마치고도 한참이나 서 있었다.
이제는 내 쪽에서 그의 존재가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가…….급해 보이는데.”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
나는 검지로 쇠창살을 그러쥔 손을 톡 건드렸다.
랜서가 그제야 낮은 숨을 탁 터뜨리며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돌아오겠습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가…….”
부담스럽게.
랜서는 떨어진 투구를 느리게 줍고는 감옥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죽음 같은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담요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몸을 웅크려 앉았다.
어두운 감정은 정신과 몸을 갉아먹는다.
이미 벌어져 버린 과거에 집어 삼켜져 내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은 잠시 들었지만……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자신을 향한 살의는 완전히 멸렬했다.
대신 그 자리에 상대 없는 증오와 복수심이 들어찼다.
이것들이 나를 숨 쉬게 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순 없지 않은가.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나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짓씹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침착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하나하나.
우선 내가 알아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 흐꾸웩의 아버지.
둘, 우리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 의문의 존재.
사실 후자는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의문의 존재’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인간인지, 아니면 어떤 극적인 상황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마리가 아예 잡히지 않는 것보단 어느 정도 가닥이 있는 것부터 밝혀내는 게 좋겠지.”
어느 정도 추측으로 짐작해 낼 수 있는 건 바로 ‘아이의 아버지’다.
“블래이크 자베른 그리고 랜서 발레라.”
현재로서 후보는 둘이다.
모두 열여섯의 내가 알고 있던 인물이긴 하나, 나와 어떠한 이성적인 교류도 오가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둘과 나눴던 대화를 가만히 되짚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우리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거잖아.’
‘절대로 전쟁에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에 처하더라도…….’
둘은 내가 임신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지만,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대략 1년 전쯤 비슷한 시기에 나는 둘과 관계를 했고, 둘은 모종의 이유로 1년 동안 나와 떨어져 지냈다는 거다.
그리고 홀로 남은 나는 만삭인 채로 배를 타고 숲속에 숨어들어 갔고, 아무도 믿지 말라는 쪽지를 남겼다.
“흐음.”
경우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애 아빠 후보들이 떠난 틈을 타 검은 세력의 누군가가 나를 해하려고 했든가 아니면 애 아빠 후보들이 내게 좋지 않은 이유로 접근했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스스로 도망쳤다든가.
“으으, 모르겠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째 실타래가 더욱 엉망으로 꼬인 기분이었다.
무언가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은 단서가 부족했다.
그 누구에게도 내 기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되, 차근차근 기억의 조각을 모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