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억 속의 남자(1)
블래이크에 관한 인상적인 기억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선명한 기억은 그에게 회초리를 맞던 순간이었다.
휘익, 짝.
가느다란 지휘봉이 내 여린 피부를 후려쳤다.
하얀 종아리에 일직선의 붉은 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정확히 세 대째 맞았을 때 나는 무릎을 구부려 종아리를 감췄다.
“일어나세요, 일곱 대 남았습니다.”
“하으…… 너무, 아파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다음부터는 꼭 숙제해 올게요.
흐윽.”
고풍스러운 벨벳 의자에 앉은 블래이크는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겐 신 같은 존재였다.
나를 저 지독한 회초리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
나는 수치도 모르고 블래이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눈가에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어른거렸다.
“엄살 부리면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두, 두 배로 맞는다고…….”
“일어나세요.”
구원자는 개뿔.
저놈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게 분명하다.
열 살이나 어린 제자가 이렇게 사정사정하는 데도 한 번을 봐주는 법이 없다.
놈에게 자비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아버지는 어디서 이런 인간을 선생이랍시고 데려왔을까…….
“올라가세요.”
나는 죽기보다 싫은 표정으로 책상 위로 엉금엉금 올라가서 자세를 잡았다.
“아흑!”
블래이크가 돌연 내 종아리를 한 손에 틀어쥐고 꽈악 힘을 주었다.
그의 손아귀에 치맛자락과 종아리 살이 한꺼번에 짓뭉개졌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봐줍니다.”
내가 어떻게 쳐다봤다는 거야.
봐줄 거라 생각하고 쳐다본 거 아니라며 항의하고 싶었지만, 블래이크에게 말대꾸를 해서 결과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치마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렸다.
블래이크가 시계를 풀고 소매를 접어 올리는 것을 보면서 ‘오늘 나는 죽었구나.’하고 좌절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블래이크 선생님은 크로바티움 사람이 아니었다.
가문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기껏해야 작은 영지 하나를 소유한 시골 귀족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동대륙에 위치한 왕국 레토니아의 막내 왕자란다.
그는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둔기로 써도 손색없는 두꺼운 사상서와 철학서를 독파하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으로 지질학, 역사학, 정치학, 천문학, 공학 등등의 수많은 영역을 섭렵하며 천재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영웅의 일대기를 보는 것 같은 비범함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레토니아의 국민들은 블래이크가 차기 왕좌의 주인이 되길 바랐지만, 블래이크는 왕위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에겐 새로운 지식을 탐미하려는 욕구뿐이었다.
하여, 더 넓은 세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왕족의 삶을 버리고 ‘자베른’이라는 성(姓)과 작위를 사서 왕궁을 뛰쳐나왔다고 했다.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냉담하고 재수 없는 블래이크를 나를 같은 부류로 묶고 싶지 않았지만, 블래이크의 이 결정은 누구보다 이해가 됐다.
나 또한 안락한 집을 놔두고 유학을 가기 위해 발버둥 쳤던 몸이니.
아, 블래이크는 성까지 버려 가면서 타국으로 떠나왔지만, 가족들과의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었다.
국왕 부부는 아들의 결정을 존중했고, 블래이크는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어머니에게 틈틈이 서신을 보낸다고 했다.
어쩐지…… 믿을 언덕이 있었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를 좀 부드럽게 가르쳐 달라고 청했음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도리어 “제 교육관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개인 과외 선생을 고용하시지요.”하고 당돌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
블래이크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알고 싶지 않아도 귀에 저절로 들려오는 걸 나보고 어쩌란 거냐고 맞받아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화려한 배경과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성 그리고 선뜻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차가운 인상이긴 하나 큰 키와 수려하고 잘생긴 얼굴 탓에 어디를 가나 그에 관한 말이 돌았다.
아카데미에선 러브레터를 대신 전해 달라는 부탁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나도 블래이크 선생님이 무섭고 어렵다고 거절을 해도 친구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등쌀에 못 이겨 러브레터를 전달했고, 그날 맞은 회초리는 유독 아팠다.
휘익, 짝!
“아!”
“제 수업 중에는 딴생각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하으…… 그게 아니라, 너무 아프니까…… 아픈 걸 좀 잊어 보려고…….”
목소리에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쪽팔리게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블래이크는 이런 내가 조금도 안쓰럽지 않다는 듯이 회초리를 휘둘렀다.
휘익, 짝.
휘익, 짝…….
차가운 막대가 공기를 가르고 종아리를 내리쳤다.
피부에 감겨드는 화끈한 감각이 피부를 찢는 것처럼 느껴졌다.
“흐으, 아!
아!
아파요…… 아!”
종아리보다 눈가에 몰린 열이 더욱 홧홧했다.
맞는 내내 아랫입술을 씹으며 고통을 참다가 결국 축축한 신음이 터져 나갔다.
잘못했어요, 숙제할게요.
저번 주에 내주신 범위보다 두 배 더 해올게요.
부끄러움도 잊고 울며 애원했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말은.”
치마를 걷어 올린 손이 처량하게 파들파들 떨렸다.
종아리를 홧홧하게 데우던 통증이 멎자 뒤늦게 그깟 숙제 한 번 안 한 거 가지고 이 정도로 매를 드는 건 너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물론…… 숙제를 안 해오면 몇 대를 맞겠냐는 물음에 당당하게 “열 대요!”라고 대답한 건 나였지만, 그래도 서러웠다.
억울할 이유도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훌쩍임 속에서 탁, 블래이크가 회초리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불에 지진 듯 뜨거운 종아리에 차가운 손바닥이 닿았다.
“아픕니까?”
“흐윽, 말이라고 하세요?”
“이리 오세요.”
블래이크가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목소리는 회초리를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다정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 칭얼거림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는 내가 달달 떨면서 책상 위에서 내려오는데도 손 한 번 잡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왜 이리 행동이 굼뜨냐며 재촉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고고하게 앉아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힘겹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나를 관망할 뿐이었다.
“이제 숙제 잘해 올 겁니까?”
“……예.”
“믿겠습니다.
여기 엎드리세요.
상처를 봐 드리겠습니다.”
블래이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저 앉았다가 일어나는 단순한 동작일 뿐인데도, 워낙에 장신이라서 그런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긴 다리는 일어날 때 남들보다 시간이 두 배 정도 걸릴 것만 같았다.
블래이크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고개를 한참이나 뒤로 꺾어야 할 만큼 키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나는 푹신한 의자 위로 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등받이를 껴안으며 엉덩이를 세웠다.
의자에 남아 있는 그의 체온이 잘 버텼다며 나를 칭찬하듯 감겨들었다.
“흐으…… 아파요.
너무 아파서 뛰쳐나갈 뻔했어요.”
“엄살은.”
큼지막한 손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을 내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그가 나를 달래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블래이크를 향한 원망과 두려움이 연기처럼 흩어져 갔다.
블래이크는 연고를 꺼내어 내 종아리에 꼼꼼히 발라 주었다.
그리고 치맛자락이 종아리에 닿지 않도록 무릎 위로 단단히 묶어 주기도 했다.
“……진짜 아팠어요.”
그에게 ‘잘 참았습니다.’라는 칭찬을 듣고 싶었다.
통증은 이미 가신 지 오래였음에도 나는 한 번 더 소심하게 속삭였다.
블래이크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숙제를 해오면 아플 일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원하던 대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수리부터 뒤통수까지 내려오는 부드러운 손길이, 그리고 나긋한 음성이 좋아서 배시시 미소가 새어 나갔다.
“이젠 꼭 숙제해 올 거예요.”
“저도 아가씨께 매를 들고 싶지 않습니다.”
거짓말.
입술을 샐쭉거렸다.
나도 싫고, 선생님도 싫으면 안 때리면 되잖아.
그럼 우리 둘 다 행복해질 텐데.
속으로 마음껏 비아냥거렸다.
그러다 수업에 집중 못 한다고 또 한 소리를 들었다.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블래이크는 1분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시각에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게 매를 들고 난 후의 다음 수업 때는,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서 상처를 돌봐 주었다.
연고를 꼼꼼하게 발라 주고 어울리지도 않게 호호 입바람까지 불면서.
그의 숨결이 종아리에 닿을 때면 소름이 쭈뼛 돋는 걸 숨기느라 꽤 애를 먹어야 했다.
그의 친절 때문에 나도 30분 일찍 움직여야 하는 것은 불만이었다.
그러나 상처를 살살 어루만져 주는 손길만은 나쁘지 않아서, 30분 이르게 시작하는 날에도 수업에 늦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가만.
기억을 되짚어 보다 보니까…… 어째서인지 블래이크가 내게 다정하게 굴었던 때만 유독 선명하게 떠오른다.
말도 안 돼.
10년 동안의 기억을 통으로 날려 버리더니……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걸까.
블래이크의 과외가 있는 날이면 그 전날부터 블래이크를 봐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한숨을 쉬어도 천 번은 넘게 쉬었었다.
그래, 내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면서 그의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다정한 블래이크라니 말도 안 되지.
그나저나…… 나의 마지막 기억인 열여섯, 유학 가기 전날에도 블래이크와 마지막 수업을 했었다.
유학 간다고 말했더니…… 블래이크의 표정이 어땠더라?
검은 먹구름이 낀 듯 그 당시의 기억이 흐릿했다.
미간에 힘을 주고 그 당시를 떠올려 보려 노력했으나 검은 벽이 나를 가로막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 속으로 깊게 파고들 수 없었다.
머리가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저택에 도착하면 의원부터 불러야겠다.
지금의 내겐 정밀한 검사가 필요했다.
***
“네가 답하고 싶지 않으면, 나도 억지로 묻지 않을게.”
블래이크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에 나는 속으로 픽 하고 웃었다.
웃기고 있네.
열여섯의 나한테 네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 못 하냐?
블래이크는 문제를 낸 후 내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야속한 말을 망설임 없이 쏟아부었었다.
“제가 지금 금붕어와 수업하는 중입니까?”, “교육자로 살아온 제 삶에 회의를 느껴 본 적은 처음이군요.
꽤 잘 가르치는 편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말이죠.”, “제 발음이 엉망인가요?
아니면 아가씨 귀에 이상이 있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혹시 머리는 안 아픕니까?”
등등.
신랄한 조롱에 내가 얼마나 피눈물을 삼켜야 했는가.
블래이크에게 칭찬 한 자락을 듣기 위해서 교재를 통째로 외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블래이크는 내가 교재를 외운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한 달도 전에 끝낸 이전 단계 교재에 나오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놈이…… 뭐?
억지로 묻지 않는다고?
너무나도 다른 태도에 배신감까지 느껴질 지경이다.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나는 침대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평선을 눈에 담았다.
반짝이는 물결이 너울거리며 내 눈동자 안까지 깊숙이 밀려들었다.
시리게 차가운 겨울 물결은 온갖 상념을 쓸어 담아 머릿속에 흩뿌렸다.
반면 흐꾸웩은 여전히 팔자 좋게 잠들어 있었다.
귀 따갑게 우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입을 냠냠 오물거리며 자는 아이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리아나…… 날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우리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거잖아.”
“…….”
“너한테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는데, 혹시 못 받았어?
답장이 한 번도 안 와서 걱정했어.
다친 곳은 없는 거지?
그거면 됐어.
네가 무사하다면 그걸로…….”
무사하긴.
차라리 상처가 났으면 연고를 바르면 되고, 독에 중독되었으면 해독제를 마시면 된다.
그런데 10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머저리가 돼버린 건 무슨 수로 고치냔 말이야.
게다가…… 덜컥 아이까지 생기고.
나는 품에 안긴 흐꾸웩의 볼록한 이마를 쓸었다.
보송보송한 피부가 닿자 이유 없이 헛웃음이 흘렀다.
그런데 아이의 아빠가 정말 블래이크가 맞나?
맞다고 해도 문제고, 아니라고 해도 문제였다.
블래이크와 다정하게 여보, 당신 하면서 살 생각을 하니까 소름이 돋았다.
아니지…… 치열한 양육권 다툼 후에 따로 살아야지.
하지만 블래이크가 아니라…… 다른 남자면 그땐 어떻게 하지.
나는 10년 동안 얼마나 문란한 삶을 살고 있던 거야.
그럼 나 자신에게 실망할 거 같다.
“리아나…….”
내게 애정을 갈구하는 블래이크는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그의 이런 태도가 익숙한 척 연기해야 함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몸의 반응은 투명하리만큼 솔직했다.
목과 허리가 뻣뻣하게 굳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말이 더듬더듬 튀어나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내들에게 쫓기고 있는 지금의 나는 블래이크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진 돈도 없고.
“저기…….”
어렵사리 입을 뗐다.
스물여섯의 나는 블래이크를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다른 호칭으로 불렀던 거 같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만약 안다고 하더라도 부를 자신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완전히 등지고 있던 몸을 조금 돌렸다.
차마 얼굴은 마주 보지 못하고, 내 옆얼굴만 살짝 내비치는 자세였다.
하지만 블래이크는 나의 이런 작은 변화에도 크게 감동한 사람처럼 깊은숨을 내쉬었다.
“응, 리아나.
뭐든 말해 봐.”
“집으로…… 가고 싶은데요.”
흐꾸웩이 나를 보호해 줄 갑옷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를 꽈악 끌어안았다.
힘 조절을 하지 못한 탓에 흐꾸웩이 불편한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금방 적응하고 다시 평온하게 얼굴을 누그러트렸다.
“집?”
“네.”
블래이크가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나는 얼이 빠졌다.
왜 웃지?
의아하게 바라보는 와중에 어깨 위로 은근한 무게가 떨어졌다.
블래이크는 내 목에 얼굴을 비비며 기분 좋은 숨을 터뜨렸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아직 그대로 있어.
우리가 함께 쓰던 침실, 네가 한 번씩 내다보던 화분, 자주 입던 옷까지 전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하나도 처분하지 않았어.
사람을 시켜서 매일 같이 관리했으니까 청소할 필요도 없이 바로 돌아가서 지내도 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 가, 같이 쓰던 침실?
당황으로 입이 벌어졌다.
내가 블래이크와 동거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황급히 그의 어깨를 밀었다.
눈이 마주치자 키스할 듯 고개를 틀며 다가오는 얼굴을 두 손으로 막았다.
블래이크는 입술 대신 내 손바닥을 제 입술로 지분거리면서 끊임없이 애정 표현을 했다.
“아니, 그, 그 집 말고요.
우리 집.
미첼 가 저택이요.”
이로 내 손바닥을 깨물던 블래이크가 행동을 멈추었다.
살짝 내리깐 검은 눈이 천천히 올라와 내 두 눈을 주시했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함이 내게로 흘러들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물렸다.
입술이 닿았던 부위가 유난히 뜨겁고 간질거려서 블래이크 몰래 허벅지에 쓱쓱 비벼 닦았다.
“미첼 가 저택?”
“……네.”
“거긴 왜.”
이상한 물음이었다.
미첼 가 사람인 내가, 내 집에 간다는데 이유는 왜 묻는 걸까.
“확인할 게 있어서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심장도 뼈도 꺼내서 줄 것만 같던 헌신적인 태도는 환영처럼 사라지고, 열여섯의 나에게 회초리를 들던 블래이크가 나타났다.
밤하늘보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두 눈은 마치 시커멓게 탄 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의 눈빛에 사지를 결박당한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고, 블래이크는 심각한 낯으로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해.”
“……고마워요.”
가슴이 불안하게 떨렸다.
혹시 집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온갖 추측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블래이크의 입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단서가 될만한 얘기를 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블래이크는 내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 주고는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빗어 내리기만 했다.
나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거부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 집에 가면 안 되는 것처럼 반응하는 그를 본 이상 평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설마…… 내가 공부하겠다면서 유학을 가놓고, 거기서 나쁜 친구들이라도 사귀었나.
술과 마약 그리고 도박에 빠져 내 인생을 진창으로 빠뜨렸을 수도 있다.
나는 유혹에 약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으니.
반항아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됐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이 된 나는…… 부모님과 연이 끊겼을지도 모른다.
내게 남자가 블래이크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을 보면 일리 있는 추측 같았다.
만약 부모님이 찬물을 끼얹으면서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무릎 꿇고 빌어야지.
***
발목을 덮는 긴 남색 코트, 얼굴 전체를 가리는 모자 그리고 눈 밑까지 오는 머플러까지.
나는 배에서 내리기 전 블래이크의 옷을 빌려 그야말로 완벽히 몸을 감추었다.
블래이크는 그 차림새가 더 눈에 띌 것 같다며 나를 말렸지만, 내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자 알았다며 물러났다.
자고 있는 내 옆모습만 보고도 나를 알아본 놈들이다.
이렇게 얼굴을 꽁꽁 감춰야 나를 몰라보지.
하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옷을 골랐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평범한 선착장 대신 다른 경로를 통해 빠져나갔다.
블래이크가 선원에게 긴말 없이 돈을 주었고, 선원은 익숙하게 우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선원들이 오가는 통로인 듯, 문은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협소했다.
주위는 한적했다.
모자랑 머플러는 왜 한 건지.
이런 통로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머저리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뻘쭘하게 모자를 벗고 원망을 담아 블래이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에 부드러운 빛이 스쳤다.
“그러니까 내가 과하다고 했잖아.”
“…….”
자신은 잘못 없다는 듯 말하는 모습이 꼭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 이리 줘.”
“……왜요?”
“코트 벗기게.
지금은 괜찮지만, 광장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다 의심할 거야.
수상한 사람이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있는 거 같아.”
“제가 벗을게요.”
나는 흐꾸웩을 한 손으로 안아 든 채 불편하게 코트를 벗었다.
끝자락이 바닥에 쓸렸으나, 나를 놀린 놈의 코트이니 이 정도의 흠집은 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블래이크는 정말로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익숙하게 코트를 받아 들었다.
머리를 안정감 있게 가려 주던 모자가 불시에 사라졌다.
“이것도 벗고.”
“왜요!”
블래이크는 대답 대신 검은 머플러를 풀어서 다시 매어 주었다.
내가 묶었던 엉성한 매듭보다 훨씬 정교하고 꼼꼼한 솜씨였다.
머플러는 콧등 바로 위까지 올라와 얼굴 반을 가렸다.
“이 정도면 충분해.”
그가 하나로 뭉친 내 앞머리를 손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그의 단정한 손끝이 눈썹에 닿자 무심코 눈을 감으며 얼굴을 맡겼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고 스스로 놀랐다.
블래이크가 이런 식으로 앞머리를 정돈해 준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몸이 그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마차가 도착할 거야.”
“…….”
“추우면 이리로 들어올래?”
블래이크가 자신의 코트를 젖히며 품 안을 내보였다.
몸에 딱 맞는 베스트가 단단한 그의 상체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벗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귓가에 열이 올랐다.
나는 빨개졌을 얼굴을 황급히 숙이며 고개를 저었다.
블래이크가 연인처럼 구는 것은 역시나 어색했다.
마차에 오른 후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둘 다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으나, 마치 남을 앞에 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블래이크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나를 바라봤으며 나는 애써 그의 눈빛을 무시하고 창밖 풍경만 의미 없이 구경했다.
아, 부담스럽게 왜 이렇게 쳐다봐.
“리아나.”
깜짝.
덜컹거리는 마차의 소음을 뚫고, 나직한 저음이 나를 불렀다.
나는 삐걱거리는 목을 움직여 블래이크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얘기해 줘.
이젠 내가…….”
“…….”
“싫어졌어?”
언제나 냉철하게 독설을 날리던 블래이크가 지금은 몹시 어렵게 문장 하나를 말했다.
차분한 어조였으나 내게 박힌 눈빛 속에서 불안이 읽혔다.
나는 놀라서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건조한 입술 위에 침을 바르고 “아…….”하며 의미 없는 침음만 내뱉었다.
블래이크의 손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내 입술에서 나오는 말에 따라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죄인처럼 초조해했다.
여기서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색하기만 한 블래이크를 떨쳐 낼지 말지를.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내려졌다.
블래이크는 내 잃어버린 10년의 기억 속에 머물던 인물이었다.
그것도 꽤 깊은 관계의.
기억의 단서를 찾기에 블래이크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블래이크가 큼지막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도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콕콕 찔렸다.
“이제는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아…… 뭐, 급한 일이 있으면 떠나도 되긴 하는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선생님도 일이 바쁘시니까.”
순간 사납게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을 보고 나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까부터 그 호칭으로 부르네.”
“……달리 불리고 싶은 호칭이라도 있으세요?”
“뭐든.
원래 하던 대로 내 이름을 불러도 좋고.
계속 선생님이라고 하겠다면…….”
블래이크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했다.
“침대 위에서까지 선생 노릇을 하는 취미는 없는데, 너라면 꽤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완벽히 지워 버렸다.
***
“도착했습니다.”
저택 앞에서 설 줄 알았는데 창밖을 보니 조금 걸어야 하는 위치였다.
의아했지만, 그다지 오래 걸어야 하는 거리도 아니었고 삯을 지불하는 건 블래이크였으니 나는 잠자코 그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으면 말해.”
“뛰어가고 싶긴 한데…….”
“…….”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블래이크가 먼저 내리고, 뒤따라서 내리던 와중에 허리가 잡혔다.
블래이크는 나와 흐꾸웩을 가볍게 들어 올린 후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보였다.
마차에서 내리는 건 나 혼자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몸에 밴 듯한 블래이크의 태도에서 그가 나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사랑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선생님과 내가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구겨진 방한용 케이프를 펴주는 그를 올려다보다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내 기억에서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본 건 10년 전, 유학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통보하듯 유학 소식을 전했을 때 선생님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블래이크를 무섭고 엄한 선생님으로만 인식하고 있었지,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유학을 가면 편지 정돈 써서 보낼 생각이 있었다.
반드시 선물을 챙겨야 하는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그를 만나러 가거나 혹은 반대로 그가 나를 만나러 오는 일 같은 건 상상하기 어려운 관계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는 내가 흐꾸웩을 돌보는 것보다 더 나를 애지중지하며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예전엔 말 한마디도 조심조심 가려 가면서 해야 했는데, 지금은 욕을 퍼부어도 사랑한다며 입 맞춰줄 것만 같았다.
잠깐……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머릿속에서 짜릿한 전류가 번쩍 튀었다.
심장이 호기심으로 두근거리고, 다물려 있던 입가가 나도 모르게 곡선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저 블래이크에게 정말 무슨 말이든 해도 돼?
따위의 물음이 입가에서 맴돌았다.
그를 속으로밖에 욕할 수 없었던 서러운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드디어 찾아온 복수의 기회에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나는 내 안의 모든 용기를 끌어모았다.
그의 변함없이 잘난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야.”
내 옷깃에 머물던 칠흑 같은 눈이 턱과 입술 코끝을 차례대로 훑으며 시선을 맞춰 왔다.
그 느릿한 움직임을 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도 짙은 흑안 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내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혈관을 얼릴 만큼 싸늘한 표정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리아나, 얘기했잖아.
건방지게 말하는 건 안 된다고.”
“어, 네…… 그, 죄송해요.”
딱히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야.”라고 한 번 불렀을 뿐인데,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것처럼 쳐다보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니, 전 재산을 달라고 해도 흔쾌히 그러마 할 것처럼 굴어 놓고, 갑자기 이렇게나 극단적으로 변하는 건 뭐야.
머쓱함에 피부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는 괜히 흐꾸웩의 이마에 입술을 지그시 눌러 보았다.
그리고 그를 따돌리듯 말도 없이 앞서 걸었다.
하지만 내가 종종 뛰어간 게 무색하게도 그가 긴 다리로 몇 번 걸으니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정말 괜찮겠어?”
갑작스럽게 떨어진 물음이었다.
고개를 드니 블래이크가 어둡게 침잠된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제가, 제 집에 가는 건데요 뭐.”
“…….”
아무래도 부모님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게 맞나 보다.
10년간 방탕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익숙한 담벼락이 보이는 순간부터 부모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차올랐다.
당장 대문을 열고 안으로 달려가려는데, 저택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정문을 지키는 하인도 없고, 외벽을 넘어오던 화려한 장미 덤불은 전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
나는 자물쇠가 걸리지 않아 바람결을 따라 스산하게 흔들리는 정문을 밀어젖혔다.
매일 아침 정원사가 정성 들여 가꾸었던 푸릇푸릇한 정원은 죽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관리되지 않은 무성한 잡풀이 방치된 무덤가에 난 풀처럼 마구잡이로 뻗쳐 있었고,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윤이 났던 조각상들도 시꺼먼 먼지가 내려앉아 잿빛으로 퇴색해 있었다.
떠들썩하던 하인들의 목소리도, 싱그러운 풀잎에 맺힌 이슬과 향긋한 꽃내음으로 활기를 띠던 정원도 싸늘하게 잠들어 있었다.
불길한 고요가 심장을 발끝까지 추락시켰다.
나는 미친 듯이 걸음을 빨리하여 본관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올랐다.
늘 낙엽 하나 없이 멀끔했던 계단엔 잡풀과 낡은 종이 따위의 쓰레기가 어지러이 몸을 뉘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먼지 쌓인 문을 힘껏 밀었다.
시기마다 경첩에 기름칠을 해둬서 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부드럽게 열 수 있었던 문이 지금은 작동을 멈추고 부식된 톱니바퀴처럼 뻑뻑하기 그지없었다.
“안에 누구 없어요?
나예요, 나!
리아나!”
묵직한 문을 앞뒤로 흔들다가 포기하고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아무리 악을 질러 봐도 내게 답을 해주는 건 괴괴한 적막뿐이었다.
설마 다른 곳으로 저택을 옮겼나?
하지만…… 이 저택은 정원부터 벽돌 하나하나, 장식된 작은 소품까지 부모님이 온 정성을 쏟아 사랑으로 지은 저택이었다.
죽어서도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무덤을 만들겠다고, 산 전체를 사들이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그 산이…….
“……어디였더라?”
발밑의 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훅 빠져 버린 것처럼 덜컥 아찔해졌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담벼락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아!
그래 저기 저 산이었어.
저택과 가까운 곳에 정말로 산이 하나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분명 저곳이었다.
맞아, 저 산이었어!
보고 나니 확실해졌다.
흩어졌던 퍼즐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안도감보다 더욱더 깊고 지독한 절망이 가슴 깊숙이 뿌리내렸다.
부모님은 이 저택을 두고 떠나갈 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탓이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열어 주시라고요!”
혼절할 것처럼 소리를 내지르던 와중에 꼼짝 않던 문이 기이한 소음과 함께 열렸다.
어느 틈에 다가온 블래이크가 내 등 뒤에서부터 팔을 뻗어 오는 게 보였다.
나는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눌러 삼키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블래이크는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겨울의 칼바람보다 날카로운 기운이 그에게서 흘러나와 내 살을 찔러 댔지만, 지금은 그의 기분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야.”라는 한 마디에도 사납게 굴던 블래이크이니 분명 내 행동 중 어느 사소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 거다.
아주 사소해서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나는 블래이크에게 아이를 안겨 주었다.
“자, 잠깐만 안고 계세요.”
그리고 빨려 들어가듯 저택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창문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면서 희뿌연 먼지가 느릿하게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아끼던 ‘물을 긷는 토끼’
조각상도 아버지가 경매장에서 거액을 주고 사들인 옛 장군의 초상화도 그대로였다.
이로써 부모님이 새 저택으로 떠난 게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섬뜩하리만치 생활감이 없었다.
이곳은 괴담에 나올 법한 버려진 흉가와 다름없어 보였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빛바랜 사진처럼 회색빛으로 변해 버린 저택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차라리 끔찍한 악몽이길 바랐지만, 눈과 콧속으로 밀려드는 먼지가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으으…… 아.”
환한 대낮인데도 사위가 어둑어둑 물드는 것만 같았다.
검은 연기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복도 끝에서부터 밀려오고 있었다.
내가 디디고 선 복도와 벽면에는 검붉은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질질 끌고 나간 듯한 흔적은 핏자국이 분명했다.
이게 뭐지?
우리 저택에 왜 피가…….
긴 복도 전체를 휘감은 핏자국이 기이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손마디가 부서질 것처럼 떨려 오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순식간에 호흡이 불안정하게 흐트러지고, 숨이 부족해진 머리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엄마, 아버지…… 엄마, 아버지…… 엄마, 아버지…….”
나는 두껍고 단단한 밧줄에 목이 졸린 사람처럼 죽을 듯이 숨을 헐떡였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흐꾸웩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내 것 같지 않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러나 아이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10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발 기억해 내.
제발.
따뜻한 온기가 내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무너지듯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미첼 장교 내외는 죽었어.”
펄떡거리는 생선의 목을 내리치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설마 했던 두려움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흐으, 아.
아……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리아나, 너…….”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그리고 무작정 달렸다.
얼굴을 감싼 목도리가 풀렸다.
꽃잎처럼 하느작거리며 날아가는 목도리를 주울 정신조차 없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블래이크의 목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절정으로 치닫는 오케스트라의 합주곡처럼 쩌렁쩌렁 내 머리를 내리쳤다.
나는 길가의 마차를 몸으로 막아 세웠다.
놀란 마부가 욕지거리와 함께 말고삐를 당겼다.
말의 울음소리가 사위를 날카롭게 찢는다.
나는 마부가 무어라 하든 말든 무작정 마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가씨!
말발굽에 밟혀서 신문에 나고 싶어요?!”
“왕궁 앞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빨리.”
내가 마부와 통하는 창문을 쾅쾅 두드리며 발작하듯 외치자 마부는 언성을 높이던 것도 잊고 일단 마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마차 내부의 커튼을 모조리 닫아 버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니…… 말도 안 된다.
블래이크가 질 나쁜 거짓말을 한 게 분명하다.
지금쯤 아버지는 왕궁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테고, 무작정 찾아온 나 때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을 거다.
우리 부녀 사이가 틀어졌다면, 아마 냉랭하게 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머지않아 따뜻하게 안아 주실 거다.
쉬지 않고 덜컹거리던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추위에 덜덜 떠는 사람처럼 잔뜩 구부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쏜살처럼 마차에서 빠져나왔다.
“아가씨, 돈은!!”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겨울의 찬 공기가 예리한 날이 되어 피부를 할퀴고 지나가는데도 다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웅장한 황금빛 왕궁이 지척에 보였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몇 개나 되는 문을 통과해야 했다.
미첼 장교의 외동딸인 리아나 미첼이라고 이름을 대면 큰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심장 소리가 고막을 뚫고 뇌까지 징징 울리는 듯했다.
마주 오는 사람들과 부딪칠 때마다 넘어질 듯 무릎이 풀썩풀썩 꺾였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꼭 물속에 잠긴 소리처럼 불분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성문을 지키고 선 무장한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아, 하아…… 아버지, 미첼 장교님을 뵈러 왔습니다.”
기사는 아리송한 얼굴로 동료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명백한 조소가 깔려 있었다.
대충 상대하고 내쫓으라며 노골적으로 말한다.
나를 정신 나간 여자 취급하는 게 틀림없었다.
“저는 장교님의 외동딸 리아나 미첼이에요.
아버지한테…… 딸이 왔다고 말이라도 전해 주세요.
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기사들의 얼굴에서 돌연 미소가 거두어졌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팔뚝을 휘어잡았다.
“리아나 미첼, 정말 본인이 맞나?”
“미첼 장교님을 만나 뵙게 해주세요.
네?
제발, 저 진짜 수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아버지한테 꼭 할 말이 있는데…….”
이때 누군가가 벽에 수배 전단을 부욱 뜯어냈다.
수배 전단에 실린 초상화를 본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들은 수배 전단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무언가 확신이 들었는지 내 두 팔을 포박했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내 몸을 칭칭 감았다.
소름 끼치는 냉기가 두꺼운 천을 뚫고 온몸을 얼려 버릴 듯 퍼져 온다.
“뭔가, 뭐가 잘못되었어요.
저 아니에요.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세요.
놔요, 놔!”
나는 실성한 것처럼 몸부림치고 매달렸다.
배려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거친 손길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풀린 다리를 질질 끌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끔찍한 절규가 하늘을 가르고 퍼져 나갔다.
이건 뭐가 잘못되었다.
기억의 공백이 아무 잘못도 없는 열여섯의 나를 구더기가 들끓는 구덩이 속으로 처박아 넣었다.
나는 손톱이 다 빠질 만큼 벽을 짚어 봐도 올라올 수 없는 까마득한 구렁텅이에서 울부짖었다.
그 과정에서 딱딱한 것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기사의 주먹에 맞은 건지 아니면 갑옷이나 검집에 머리를 박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코안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무언가 흘러내렸다.
시야가 획 돌고 머리는 빙빙 돌았다.
“할리드 미첼 그리고 카밀리아 미첼을 살해한 죄로 리아나 미첼을 즉각 연행하겠다.”
세상이 쩍 하고 갈라졌다.
발악하던 사지에서 힘이 빠지며 완전히 널브러졌다.
나는 넋을 놓고 시린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나는 10년 전에 죽었고, 이곳은 지옥인 게 아닐까.
어둠 속으로 의식이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