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결심 (2/14)

2.결심

스물여섯으로 살게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은 빛처럼 빠르게 흘렀다.

해가 바뀌어 이제는 크로바티움력 710년이 되었다.

정신은 엉망진창이었지만 한 달 사이에 몸은 거의 회복이 되었다.

회음부의 통증이 가라앉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집 밖으로 나가볼 수 있었다.

내가 머무는 곳은 훌쩍 큰 나무들이 빽빽한 산속의 한가운데였다.

나를 돌봐 준 부부는 산지기라고 했다.

이름은 밀드레드, 로빈.

가을비가 여름 장마처럼 내리던 날 밤, 이 오두막 앞에 쓰러져 있던 나를 밀드레드가 데려왔다.

나는 왜…… 만삭인 채로 이 앞에 쓰러져 있던 걸까.

하물며 이곳은 내가 머물던 크로바티움의 수도도 아니고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남쪽 끝이었다.

대체 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맞지 않는 퍼즐이 마구 흩뿌려져 있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차분히 바라보았다.

울고불고 난리 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하나하나 실마리를 찾아 퍼즐을 완성시켜야 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10년이 지난 이 괴상한 현상도 겨우겨우 마주 보았는데…… 내가 낳았다는 아이는 도저히, 도저히…….

“아휴-.예뻐라.엄마가 그렇게 좋을까?”

“……제가 엄마인 거 확실해요?”

“내가 아가씨 다리 사이에서 직접 꺼냈다니까, 글쎄.”

밀드레드는 자그마한 아이를 분홍색 이불로 핫도그처럼 둘둘 말아서는 품에 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런 밀드레드를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저엉말로 이상해서 그래요.

저는 평생 남자 손 한 번 잡아 보질 않았다니까요.

아, 뭐 이런 거라면 가능하겠네요.

순결하고 고결한 제 몸에 신이 수태를 시켰다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자, 봐.아가씨 머리 색이랑 눈 색을 빼다 박았잖아.”

“…….”

밀드레드가 품 안의 아이를 내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과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거북할 만큼 눈부셨다.

정말 나의 것과 똑같았다.

나는 얼른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밀드레드를 보았다.

“기억도 열여섯에서 딱 멈춰 버렸다며.혹시 알아?비어 버린 10년 사이에 잘생긴 남자랑 열렬한 사랑을 했을지.”

“하아…… 진짜 턱도 없는 소리예요.저는요, 연애는커녕 결혼 생각도 없어요.아주 확고하게.템블란으로 유학을 가서 약학 공부를 한 뒤에 제 이름을 건 약학서를 내려고 했어요.약학계의 바이블이라고 불릴 만큼 아주 자세하고, 전문적인 내용을 꽉꽉 담아서요.그다음 왕실 아카데미의 최연소 정교수로 취임해서 제자를 키운 다음, 왕실 고문이 되어 제 이름을 널리 널리 알릴 거라고요.”

“어련하시겠어.”

밀드레드는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순한 아이는 처음 본다느니, 밤에 엄마 깰까 봐 울지도 않는 게 기특하다고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아이일 리가 없는데.”

“또 그 소리.애가 어려도 사람 말 다 알아들어.”

“…….”

나는 뚱한 낯으로 아이를 응시했다.

네가 정말 내 배에서 나온 애라면…… 애 아버지는 대체 누구니?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연애를 금기시하는 신전의 사제보다도 순결한 삶을 살았던 나로선 떠오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몸도 충분히 회복되었으니 이틀에서 사흘 정도 배를 타는 것쯤이야 견딜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의지를 다지기가 무섭게 내 발목을 붙잡는 문제가 발생했다.

***

나는 축축이 젖은 실내복이 가슴에 닿지 않게 바짝 붙들었다.

팅팅 부은 가슴을 바라보고 있자니 목구멍 밑에서 온갖 육두문자가 한숨처럼 밀려 나왔다.

이놈의 모유!

당연한 수순처럼 서러움이 차올랐다.

내가 무슨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루아침에 미혼모가 되냐 이 말이야.

우리 부모님이 아시면 뒷목 잡고 기절하실…….

“흐으…… 엄마…….”

순식간에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가에 열이 올랐다.

이때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울음을 집어삼키고 태연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니, 옷이 이게 다 뭐야.

나 안 부르고 뭐 하고 있어?”

“이 심각한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제 가슴에 빵꾸가 난 것 같아요.

우유가 너무 많이 흐르고, 또 아픈 게…… 애기가 제 가슴을 너무 아프게 씹었나 봐요.

젖꼭지가 떨어진 거 같아요.

너무 아파요.”

“젖니도 안 난 애가 무슨 젖꼭지를 씹어.”

“아니요.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요.하루아침에 나이를 열 살이나 먹었는데, 젖꼭지가 떨어져 나가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나요?빨리 확인 좀 해주세요.”

“그러게…… 모유가 차면 짜놔야 한다고 했잖아.”

참아 왔던 서러움이 울컥 치솟았다.

열여섯의 나에게 출산 후의 산모가 어떤 일을 겪는지 알려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된 상황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당황스러웠고 또 충격적이었다.

“애 입에 제 가슴 가져다 대는 것도 겨우 했는데!”

“우는 거야?

애도 안 우는데 엄마가 왜 울어.

엄마들은 누구나 다 겪는 일이니까 진정해, 아가씨.”

“안 울어요.

저 그렇게 쉽게 우는 편 아니에요.”

“자존심은.”

나는 화끈해진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밀드레드가 피식 웃으며 내 옷을 벗겼고, 띵띵 부은 내 가슴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얼마 후 조악한 나무 물통 안에 내 모유가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말 내가 출산한 게 맞구나 하는 깨달음이 머리를 후려쳤다.

나와 똑 닮은 아이를 보고서도 믿지 못했던 현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품은 기억도, 낳은 기억도 없는 이 아이를……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곳을 떠나기 전에 결론을 내야 했다.

***

“자, 이렇게 두 다리를 들고, 천을 새 걸로 갈아 주면 돼.

아니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어떻게 해?

얼른 와.

기저귀 가는 방법 배워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코를 틀어막고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새로 배운 두 가지 사실에 매우 놀라는 중이다.

하나, 아기는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서 사람을 죽이는 극악의 변을 싼다는 것.

둘, 저 악령도 내쫓을 수 있을 거 같은 변을 보고도 인상 한 번 안 찌푸리는 밀드레드의 비위는 가히 존경할 만하다는 것.

밀드레드는 심지어 “똥 색도 어쩜 이렇게 예쁘고 건강하니-.”하고 웃기까지 했다.

“아기가 모유도 잘 먹고 건강해서 다행이야.”

“아니에요.

이 구린내는 틀림없이 문제가 있는 냄새예요.

배 속에 독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당장 의원에게 데려가죠.”

“아가씨도 어렸을 땐 이랬어.”

“설마요!”

밀드레드는 호호 웃으면서 부드러운 천으로 아이의 엉덩이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아이는 자신의 뽀얗고 통통한 엉덩이 사이에 천이 들어왔다가 나가는데도 한 번을 칭얼거리지 않고 말갛게 웃었다.

“아가씨도 얼른 익숙해져야지.

수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며?

집으로 가는 동안은 나 없이 혼자서 애를 봐야 할 텐데.”

그래.

이게 문제였다.

이 애를 돌봐야 한다는 것.

애가 내 배에서 나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나로선 이 아이가 남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도 모르고,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심지어 결혼이고 출산이고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의 신념에 반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아이의 똘망똘망한 큰 눈과 발그레한 두 뺨 그리고 뭉게구름처럼 구불거리는 은빛 머리카락까지 전부 귀엽고 앙증맞긴 했지만, 남의 애일 때나 순수하게 예뻐해 줄 수 있는 거지.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했다.

무거운 책임감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그러나 책임감과는 별개로 내겐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

정신 연령이 열여섯에 멈춰 버린, 육아에 관해선 백치나 다름없는 엄마를 둔 아이도 가엽게만 느껴졌다.

아이는 나 말고 더 좋은 엄마를 만나야 했다.

이를테면, 밀드레드 같은 엄마.

“저, 밀드레드.”

“왜?”

“밀드레드의 자식들은 어디에 있어요?”

“내가 젊었을 때 몸이 안 좋아서, 임신이 어려웠어.

로빈이랑 결혼하고 11년 만에 기적처럼 애가 들어섰는데, 배 속에서 열 달을 못 채우고 가버렸어.”

예상치 못했던 무거운 이야기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밀드레드의 목소리는 먼지 쌓인 옛날 일기장을 잠깐 꺼내 보는 것처럼 덤덤했다.

“애가 그리워서 이집 저집 가리지 않고 애 낳는 엄마들 다 도와주다 보니까, 내 자식 한 번 못 키워 봤어도, 애 돌보는 건 박사가 다 됐지.”

아이를 맡아줄 수 있겠냐는 말이 목전까지 차올랐다가 흩어져 버렸다.

대뜸 찾아온 나를 돌봐 주고, 또 살뜰히 보살펴 주는 것만으로도 밀드레드와 로빈에게는 이미 큰 신세를 지고 있었다.

여기에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아이까지 무턱대고 맡겨 버리는 건 정말로 염치가 없는 짓이었다.

기저귀를 다 간 아이는 상쾌한지 까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밀드레드와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런 아이 옆에 다가가 앉자,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향해 두 팔을 내민다.

“손잡아 달라잖아.”

밀드레드가 채근했고, 나는 어색하게 검지 하나를 내밀었다.

아이가 두 손으로 내 검지를 그러쥐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내 검지 첫마디에 착 달라붙었다.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아찔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나는 놀란 마음에 손을 뒤로 빼버렸다.

아이가 아쉬운 듯 입을 쩝쩝 오물거리면서도 용케도 울지는 않는다.

밀드레드가 그런 아이의 코에 제 코를 비비자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중에 엄마가 기억 찾으면, 그때 서러웠던 거 다 풀어야 한다, 알았지?”

“……뭐래요.”

나는 그 모습을 한 발 떨어져서 시큰둥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늑한 노을빛이 숲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차갑게 언 땅 위로 유독 색이 짙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르는 로빈이 만든 무른 길이었다.

“밀드레드.”

“왜?”

“여기서 마을까지 멀어요?”

“한 시간만 걸으면 돼.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기적이고 추악한 내면이 냉철하고 이성적인 척 가면을 둘러썼다.

어쩔 수 없어, 이게 최선이야.

나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도피와도 같은 타협을 끊임없이 되뇌며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

노란 꽃무늬 이불에 둘둘 싸인 아이는 얼굴만 빼꼼 내놓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큼지막한 두 눈망울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뭘 봐.”

나는 그런 아이를 어색하게 품에 안고 숲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겨울의 찬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날 때마다 이기적인 나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럴수록 굽이굽이 이어진 길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꼭두새벽부터 걸어 도착한 곳은 산 아래의 마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을의 신전이었다.

신전 앞에 아이를 두고 가면, 신전에서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산한 겨울 아침.

옷을 벗은 가지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찬 기운이 내려앉은 신전의 돌계단에 흙먼지들이 작게 회오리쳤다.

나는 줄곧 외면하고 있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꼬옥 쥐고선 입으로 쭉쭉 빨고 있었다.

“……먹는 거 아니야.”

머리카락을 빼내는데도, 아이는 무엇이 좋은지 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내가 저를 봐준 것만으로도 신이 난 듯싶다.

콩알만 한 코와 두 뺨이 복숭아처럼 살짝 붉어져 있었다.

“기억 찾으면, 다시 올게.”

네가 내 아이라고 자각할 때.

“…….”

“너도 기저귀도 못 가는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여기서 몸 편히, 마음 편히 지내고 있어.

알았지?”

“…….”

“알아들었지?”

“먀!”

“뭘 알고는 대답하는 거야.”

아이는 눈꼬리를 접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기다란 속눈썹 끝에 걸린 햇빛이 유독 천연하게 빛났다.

이 빛이 내 마음을 어둡게 살찌웠다.

어젯밤 내내 냉정해지자고 기껏 마음먹었던 게 무색하게도 나약한 감정이 고개 드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연민인지 책임감인지 모를 감정들 때문에 남이라고밖엔 생각되지 않는 아이를 무턱대고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사라져 버린 내 10년의 세월을 찾아야 했으며 또 엉망이 된 삶을 바로 세워야 했다.

내 인생에 아이는 있어선 안 될 존재였다.

바람이 매서웠다.

갈고리 모양의 공기가 피부를 마구 할퀸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쌀쌀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샛노란 손 싸개를 낀 동그란 손으로 졸린 듯 제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하움.”

위기감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평온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거칠게 쿵쿵 울렸다.

아이의 숨결이 칼날처럼 날아와 가슴에 푹푹 박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입을 벌리고 크게 헐떡거렸다.

아이를 안고 있는 팔이, 아니 몸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숲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괜찮았는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쌀쌀한 날씨에도 식은땀이 비죽비죽 흘러내렸다.

아이가 졸린 듯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도망치듯 아이를 내려놓고 냉정하게 뒤를 돌아 걸었다.

“…….”

아이를 감싼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손끝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힘 빠진 다리가 풀썩풀썩 꺾이는 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어느 방향이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판단할 겨를조차 없었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

“으아아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벼락처럼 정수리 위에 내리꽂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시하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두 다리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머릿속에서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애를 내려놓은 돌바닥이 차가웠던 거 같은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지.

신전에서 아이를 늦게 발견해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

나는 멈췄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도망쳐 나왔던 속도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신전 쪽으로 돌아갔다.

계단을 오르자 두툼하고 하얀 코트를 걸친 사제가 아이를 안아 들고 어르고 달래는 것이 보였다.

분명 다행스러운 일인데도 어째서인지 조급함이 더욱 심해졌다.

“자, 잠시, 잠시만요!”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인 노사제가 나를 보고는 그 어떤 추궁도 없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내밀었다.

나는 낚아채듯 아이를 안아 들었다.

거리가 떠나가라 울던 아이는 내 품에 안기자마자 울음을 딱 멈추었다.

그러나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닭똥 같은 눈물이 우유처럼 희고 부드러운 뺨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나를 탓하듯 이따금 칭얼거렸다.

나는 아이를 마주 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사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저 뭘 훔치기라도 한 사람처럼 불안하게 눈동자를 휙휙 돌렸다.

“그, 제가, 이게 다…… 사정이 있어서, 그니까, 얘가 제 아이는 아니고, 아…… 낳은 건 저지만 기억이 없어서…… 그러니까…….”

“날이 추운데 꿀차라도 마시고 가시겠어요?”

“아뇨!

괜찮아요.

꿀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럼.”

무슨 정신으로 다시 오두막까지 걸어갔는지 모르겠다.

행여나 아이를 놓칠까 봐 양팔로 가득 껴안았다.

심장 박동이 아직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느껴지고, 입에서 연신 딸꾹질이 터졌다.

오두막 문을 밀고 들어가자 주방에 있던 밀드레드가 힐긋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어디 갔다 와?”

“저, 저…… 집에 가려고요.”

“어?”

“몸도 이제 멀쩡하고, 엄마랑 아버지도 보고 싶고…… 아이는, 일단…… 집에 가면 엄마가 다 해결해줄 거예요.

집에 갈게요.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가 머물던 방으로 올라가 아이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직도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따라 올라온 밀드레드가 내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온기가 몸을 감싸자 혼란스럽게 일렁였던 머리가 잠깐이나마 차분해졌다.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도, 돈을…… 조금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승선표를 사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요.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열 배로 갚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차용증이라도 쓸까요?”

“몸을 왜 이렇게 떨어.

일단 앉아 봐.

승선표 값은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

밀드레드는 내 손목을 끌어 나를 안락의자에 앉히고는 김이 폴폴 나는 차를 가지고 왔다.

밀드레드가 직접 따서 말린 캐모마일 잎이 뜨거운 물 위를 느리게 유영했다.

은은한 향이 콧속으로 밀려들자 한기가 한풀 내려갔다.

“오늘 떠난다고?”

“네.

이전부터 계속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뭐, 아가씨가 그러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마는…… 그런데 달랑 승선표 살 돈만 가지고는 못 가.

내가 애 천 기저귀랑 옷 그리고 배 안에서 먹을 수 있는 말린 음식들 좀 챙겨 줄게.”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밀드레드가 주머니에서 작게 접힌 종이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얼결에 받아 들었다.

“진즉 주려고 했는데, 아가씨가 몸도 성치 않은데 혼란스러워 할 거 같아서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주네…….”

“이게 뭔데요?”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던 건지, 종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했다.

나는 의심 없이 그것을 펼치며 되물었다.

“아가씨가 오두막 앞에 쓰러져 있을 때 쥐고 있던 거야.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가 않아서…….”

「아무도 믿지 마, 리아나.

절대, 절대, 절대로 믿지 마.

아무도 아무도, 믿지 마.

그 누구도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리아나, 제발, 제발, 제……」

먹물처럼 번진 잉크가 종이 한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박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글씨는 내 필체가 분명했다.

비록 뒷부분이 찢겨 있었지만, 뒤 내용을 굳이 보지 않아도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이 쓰여 있었을 거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눈가를 구기며 어지럽게 쓰인 글씨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경고가 분명했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내 필체가 뿌리째 뽑혀 나와 가슴속에 콱 박혔다.

과거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혼란스러워 머리칼을 쥐었다.

쥐어뜯을 듯 힘을 줘봐도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가장 최근의 기억은 유학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잠들었던 그 순간이다.

“무슨 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도 얼른 찾고 잘 해결되기 바래.”

밀드레드의 위로가 허공을 부유하다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나는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 바다 위에 던져진 것처럼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쪽지를 누가 훔쳐 갈세라 작게 접어서는 품 안 깊숙한 곳에 넣었다.

“……가야겠어요.”

***  

마음 같아서는 쪽지를 건네받은 당일에 바로 떠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수도로 향하는 배가 이미 출항해 버려서 하는 수 없이 이 오두막에 하루 더 묵게 되었다.

다음 날.

밀드레드와 로빈이 나를 항구까지 바래다주었다.

“이거 챙겨 가.

기저귀 가는 법이랑 애기 아플 때 응급 처치 하는 법, 이유식 만드는 법까지 다 적어 놨어.

말로 한번 다 설명했지만 글로 보는 게 머릿속에 더 기억에 남으니까.”

밀드레드가 손바닥만 한 수첩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후 승선했다.

뱃전에 서니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배웅하는 부모님의 모습 대신 걱정이 그득 담긴 밀드레드와 로빈의 얼굴이 보였다.

거대 범선이 아닌 소형 선박엔 돛도 겨우 한 개뿐이었다.

그것도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누런빛의.

얼마 지나지 않아 뱃고동 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아이의 귀를 감싸고는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길게 늘어져 있는 나무 좌석 중 비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엉덩이와 허리를 보호해 줄 쿠션 하나 깔려 있지 않았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어.”

아이의 포동포동한 흰 뺨을 검지로 살짝 건드리자, 아기가 간지러운 듯 눈을 찌푸리며 까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넌 웃냐.

난 울고 싶다.

“턱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침을 흘려.”

나는 아이의 목에 둘러 둔 하얀 손수건을 풀어 입가를 콕콕 찍듯이 닦았다.

침 닦아 주는 것도 좋은지 아이는 연신 간드러진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작고 빨간 혓바닥으로 연신 침을 뱉어 냈다.

“나랑 해보자는 거야?”

“꺄흐, 아부부!”

“침 그만 흘려.

피부 빨개지잖아.”

“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가…… 입술을 앙다무는 모습에 순간 살짝 놀랐다.

이 아이…… 혹시 천재가 아닐까.

내가 낳은 아이니까 남들보다 우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비록 나는 아카데미에서 늘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그건 다 내가 시험공부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였다.

즉, 노력에 비해 결과가 뛰어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아니지, 아직 아이를 천재라고 단정 짓기엔 섣부른 감이 있다.

아비 유전자가 또 어떤 막돼먹은 놈인지 알지 못하니 원.

나는 아이를 안아 들고 얼굴을 가까이 맞붙였다.

볼록한 이마와 말랑한 두 뺨 그리고 쏟아질 듯이 커다란 눈망울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네 아비니?”

“아부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해도 짐작 가는 사람조차 없다.

이때 뒤에서부터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귀여워라.”

“애가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겼네.

여자예요?

남자예요?”

“남자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주머니 세 명이 가던 길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관심을 즐기는 듯이 눈꼬리를 해사하게 접으면서 앙증맞은 미소를 흘렸다.

얼씨구?

사람 홀리는 게 예사롭지 않은데.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얘는 나중에 오페라 가수가 된다면 엄청난 인기몰이를 할 거 같다.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조그만 게.

“세상에, 이렇게 예쁜 남자아이는 또 처음 보네.

엄마는 너무 좋겠다.

이름이 뭐예요?”

“아…….”

속으로 쉬지 않고 떠오르던 말들이 가위로 싹둑 자른 듯 끊겼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들어 올려, 눈앞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애 이름…….”

모른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애한테 네 이름이 뭐니?

하고 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태어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고, 내가 지어 주지 않는 이상 이름을 가질 수도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가 세 사람을 불렀다.

“아프지 말고 쑥쑥 크렴.”

그들은 아이의 이름이 크게 궁금하진 않았는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남겨진 나는 직면한 문제에 짙은 당혹감을 느꼈다.

“……너한테 이름을 지어 줘야 하는 거지?”

“뺘!”

“그치, 그래야겠지?”

잠시간 작동을 멈췄던 두뇌가 유례없이 치열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사는 난쟁이들이 석탄을 증기 기관차에 밀어 넣듯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이름 후보들을 마구 집어넣으며 억지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 같았다.

“으음…… 있어 봐.

생각 중이니까.”

“우뺘!”

“알았어, 알았어.

재촉하지 마.

아무렇게 지을 수는 없잖아.”

그러나 용량이 가득 찬 뇌는 푸스스 검은 연기를 뿜으며 고장 나고 말았다.

나는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 줘 본 적이 없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열여섯 살 중 누구도 이 엄청나고, 위대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죽은 후까지도 영원히 따라다닐 이름을 짓는다니.

부담감이 버거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내가 열 살 때, 얼굴도 모르는 강아지 이름을 일주일 동안 고민한 적이 있어.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키우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거든.

서른 개의 후보를 두고 맹렬하게 경합을 벌였지.

그 끝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름이 뭔지 알아?”

“아부?”

“피넛 버터.

어때, 마음에 들어?”

아이가 동그란 손 싸개를 낀 손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흐드러지게 미소 지었다.

내가 일주일간 고심한 이름이 아이는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막상 말하고 나니 내가 내키지 않았다.

강아지에게 주려고 한 이름을 아이한테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이거 말고.

으음.

필립?

리처드?

크리스…… 뭐가 있을까, 존, 알프레드…… 으, 이것도 아닌데.”

내가 아는 모든 남자 이름을 다 꺼냈다.

그러나 무슨 이름을 가져다 대도, 맞지 않는 옷처럼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지.

나는 딱딱한 나무 등받이에 몸을 추욱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수평선 위에 잘게 흩뿌려지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가, 그럼 이렇게 하자.”

“뺘?”

나는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껏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이름을 직접 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줄게.

자, 지금부터 신중해야 해.

내 말 제대로 듣고 있지.”

분홍색 혓바닥이 보일 정도로 미소 짓던 아이가 웃음을 싹 거두고 눈을 부릅떴다.

내 표정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한테 뭘 물어볼 거고, 네 대답이 곧 네 이름이 될 거야.”

“꺄부부!”

“신중해야 해.”

나는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나와 아이의 주위엔 말로 형용하기 힘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이가 온전히 내게 집중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발음을 하나하나 씹으면서 질문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게 뭐야?”

“흐꾸웩.”

방울진 침방울이 톡 터지면서 아이가 트림했다.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한지도 모르고 속이 시원하다는 듯 크게 까르르 까르르 웃어 댔다.

나, 리아나 리첼 2세의 이름은 흐꾸웩이 되었다.

흐꾸웩 리첼.

***

소형 선박에 1인용 객실은 단 세 칸뿐이었다.

그마저도 일주일 전에 예약이 꽉 차서 나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나와 흐꾸웩은 선실의 딱딱한 나무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선박이 꿀렁꿀렁 흔들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행히 흐꾸웩은 뱃멀미가 없는 대견한 아이였다.

어수선한 선실 내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쿨쿨 잘만 잤다.

문제는 나였다.

“우욱, 웨에엑-.”

나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로 뱃전에 대고 먹은 것을 전부 게워 냈다.

위액에 쌉싸름한 침까지 퉤, 퉤 전부 내뱉고 나서야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 죽겠네, 진짜.

하아아…….”

차가운 밤바람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앗아 갔다.

출항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나흘이면 도착할 거라던 밀드레드의 말과 다르게, 여러 도시를 경유하는 선로 때문에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하루만 참으면 드디어 수도에 도착하는 것이다.

“흐잉, 우이잉-.”

그런데 나와는 달리 어느 장소에서도, 어느 상황에서도 울지 않고 잘 적응하던 흐꾸웩이 돌연 칭얼거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안아 들고 녀석의 엉덩이를 만져 보았다.

따뜻하고 묵직한 것이 기저귀 천 너머로 느껴졌다.

“또 쌌냐.”

시팔.

목구멍을 밀고 나오려는 욕지기를 겨우 눌러 삼켰다.

선실 내에서 기저귀를 갈았다간 악령을 부르는 냄새가 다른 사람들의 단잠을 전부 깨울 게 뻔해, 어쩔 수 없이 갑판에서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나무 상자가 잔뜩 쌓인 갑판 구석은 나와 흐꾸웩의 기저귀 교환대가 되었다.

상자가 찬 바람을 막아 주는 덕에 그나마 아이의 옷을 벗길 만했다.

그러나 몇 번을 해봐도 방금 싼 따끈따끈한 변을 생눈으로 보는 건 익숙지 않았다.

바지를 벗기자 맑은 갈색 변이 아이의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다리 사이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기저귀 가는 것쯤은 이제 밀드레드가 준 육아 수첩을 보지 않아도 할 수 있을 만큼 손에 익었지만 문제는…….

“우욱, 욱!”

이 지독한 냄새만은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아니, 적응되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거야?

방금 속을 게워 낸 게 무색하게도 또다시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나는 참기 힘든 냄새에 다시 뱃전 앞으로 달려 나가서 속을 게워 내다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냉큼 아이에게 뛰어갔다.

그 짓을 한 서너 번 반복한 후에야 무사히 기저귀를 갈 수 있었다.

“흐꾸웩아, 너 문제 있는 거 아니니?

무슨 똥을 하루에 네 번이나 싸.

먹는 건 우유밖에 없으면서 냄새는 왜 또 그렇게 심한데.”

“으걍!”

“으갸는 무슨.

너는 우리 집 가면 주치의한테 검사부터 받아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똥을 싸지르는 건 정상이 아니야.”

나는 두꺼운 분홍색 담요로 아이의 몸을 둘둘 말고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배의 속도가 유난히 느려진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항구에 정박했다.

마지막 경유지였다.

공동 선실을 더 여유롭게 쓰고 싶은 마음에 승객이 많이 내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르르 내린 것만큼 또 우르르 몰려 탔다.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뀌어 나는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러 가자.”

그러나 나는 뱃멀미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출산한 이후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뇌는 피곤해서 말라 죽어 가는데, 두 눈은 멀뚱멀뚱 컴컴한 어둠을 응시했다.

오두막에 있을 때는 사흘 밤을 뜬눈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

지독한 불면증.

“이것도 출산 후유증인가.”

나는 결국 새벽빛이 수평선을 밝히고 나서야 겨우겨우 귀한 잠에 빠져들었다.

체감상 한 10분 정도 잔 거 같은데 눈꺼풀 위로 볕이 따갑게 부서져 내렸다.

흐꾸웩은 기특하게도 똥을 싼 게 아니고선 나를 깨우지 않았다.

나를 무의식에서 끄집어낸 건 웬 걸걸한 사내들의 음성이었다.

“아오!

제발 나 한 번만 믿어 봐.”

“이 새끼야, 잠 좀 자게 입 닥쳐!

진심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려다가 철컥철컥, 차가운 금속음에 일순 몸을 움찔 떨었다.

……검?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러네!”

“정말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네놈 말은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쉬, 쉬 조용히 해.

깨겠어.

내가 저년 얼굴을 똑똑히 봤다고.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자, 봐.

그런 은발이 어디 흔하냐고.”

바스락바스락.

다급하게 종이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내들이 말하는 ‘저년’이 설마 나인가?

미약하게 들러붙어 있던 잠기운이 싹 가셨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등 뒤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정말…… 살인마 몽타주랑 비슷한데?”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아!

현상금이 무려 100만 골드야.

이 돈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용병 생활도 청산할 수 있어.”

“…….”

“…….”

왁자지껄하던 사내들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등 뒤로 몇 쌍의 날카로운 시선이 칼처럼 내리꽂히는 기분이다.

온몸의 피가 식었다.

100만 골드의 거액이 걸린 살인마.

그게…… 나라고?

말도 안 돼.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 나갈 듯 거칠게 박동했다.

흐꾸웩은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 속 편하게 부유하는 먼지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팔을 움직여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 직후 두툼한 손이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 봐…… 으악!

악!”

나는 세탁하지 않은 똥 기저귀를 남자의 얼굴에 짓누르듯 문질렀다.

남자가 당황하여 버둥거리는 사이 힘껏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부터 “사람 죽인 년 잡아라!”하는 고함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잔악한 지칭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뭐야, 내가 왜 살인마인데, 내가 왜 사람 죽인 년이야, 왜!!

태어나서 벌레 한 마리 허투루 죽여본 적 없는 나다.

이런 내가 사, 사람을 죽였을 리가 없다.

절대로.

이건 뭐가 잘못된 거야.

충격으로 홉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찼다.

나를 쫓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등 뒤로 바짝 추격해 왔다.

내가 탄 선박은 50명 정원의 소형 선박이었고, 아무리 뛰어 봤자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허억, 헉, 으윽.

끄흐으…….”

미친 듯이 달렸으나 결국 마주한 건 사방이 꽉 막힌 벽이었다.

죄인을 단죄하는 사형 집행관 앞에 선 것처럼 짙은 절망이 나를 짓눌렀다.

뒤쫓는 발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듯했다.

나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어깨로 벽을 쾅쾅 두드렸다.

“착하지.

조용히.”

이때 큼지막한 손이 내 허리를 휙 감싸 안았다.

지독하게 낮은 저음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달칵.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불 꺼진 객실.

반쯤 열린 커튼을 타고 흘러들어온 빛이 방안을 어슴푸레 비추었다.

은은한 향초 냄새, 포근해 보이는 1인용 침대와 조금 전까지 누가 앉아 있었던 듯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는 다갈색 안락의자.

그리고 눈앞에 선 장신의 검은 인영.

“누구…….”

“쉿.”

부드럽게 울리는 음성과 은근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햇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이 어두웠다.

“분명히 이쪽으로 튀었는데…….”

“…….”

한 걸음, 한 걸음.

사내들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관자놀이에 맺힌 땀이 뺨을 쓸고 주륵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흐꾸웩을 안은 손바닥도 축축했다.

저놈들이 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치면…… 그땐 어떻게 하지?

나는 살인범이 아닌데, 내 말을 과연 믿어 줄까.

아니 내가 정말…… 무고하긴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로 머리가 핑핑 돌았다.

제발 지나쳐라, 제발.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자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참기 힘든 울렁거림이 목구멍에 맺혔다.

나는 달달 떨리는 턱에 힘을 주고 숨을 참았다.

할 수만 있다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흐꾸웩을 안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조금의 기척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숨을 죽였다.

아이가 칭얼거리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면서.

“으휴!

네놈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갑판 위로 올라가 봐!”

“너도 못 봤으면서 내 탓은!”

“항구에 정박하기 전에 찾아야 해, 수도로 달아나 버리면 현상금은 구경도 못 한다고!

잘못되면 다 네놈 때문인 줄 알아!”

사내들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이윽고 내 심장 박동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가, 감사합니다.”

터질 것 같던 심장이 차츰 진정되자 뒤늦게 눈앞의 남자가 신경 쓰였다.

내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는 이마, 팔뚝 전체를 휘감은 큼지막한 손 같은 것이 그제야 전부 느껴졌다.

10년 사이의 나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열여섯의 나는 맹세컨대 이성과 이 정도로 밀접한 접촉을 해본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남자의 몸은 또 왜 이렇게 단단하고, 두꺼우며 뜨거운지.

맨살이 닿은 것도 아닌데 남자에게서 나온 열기가 내 피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객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전신에 퍼져 나가는 묘한 간질거림 때문에 피부를 긁어내리고 싶었다.

“저기…… 잠깐.

너무 가까운…… 아!”

어둠 속에서 남자가 움직였다.

그는 전조도 없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나는 놀란 숨을 집어삼키면서 본능적으로 아이를 힘주어 안았다.

나를 통째로 짓누르는 듯한 강한 악력은 내게서 저항 의지를 휘발시켰다.

속절없이 끌려간 내 몸이 정착한 곳은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 위였다.

햇살이 드리운 침대 위에서 생판 처음 보는 남자를 깔고 앉은 꼴이 되었다.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심장이 펄떡펄떡 뛰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봤으나 커다랗고 뜨거운 손 하나에 저지당했다.

남자가 내 다리를 가볍게 끌어 올려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저, 저기…….”

당황으로 말이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옆얼굴에 남자의 가슴이 닿았다.

그의 심장이 내 것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박동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빠르게 내달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혼란을 비집고 남자의 손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절로 고개가 들리면서 어둠 바깥의 남자와 두 눈이 마주쳤다.

찌를 듯이 날카로운 눈매가 낯설지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단정한 차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예민하고 차가운 인상.

한 번도 뜨겁게 타오른 적 없을 것 같은, 지극히 이성적이면서도 금욕적인 그.

“……선생님.”

연인처럼 내 허벅지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이는 다름 아닌 나의 개인 과외 선생님인 ‘블래이크 자베른’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리자, 블래이크가 내 도드라진 눈두덩이를 엄지로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알던 블래이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보게 될 줄 알았어, 리아나.”

낮은 목소리와 열기 섞인 호흡이 귓가에 쏟아졌다.

오싹, 간질거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어깨로 귀를 문질렀다.

“서, 선생님…… 왜 이러시는…….”

내가 알던 블래이크와 완벽히 다른 모습에 혼란이 일었다.

정말…… 블래이크가 맞나?

한쪽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적발, 피처럼 붉고 반들거리는 입술, 색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흑안.

허튼 주름 하나 없이 각이 잡힌 재킷, 반듯하게 목 아래까지 채워진 단추, 언제나 깔끔하고 둥글게 정돈되어 있던 유려한 손톱과 손목뼈를 살짝 드러내는 소매까지…… 분명 기억 속의 블래이크가 맞았다.

하지만, 하지만.

내게 미소 한 자락 허락하지 않았던 싸늘한 얼굴이, 자비 없이 회초리를 들었던 두 눈이 지금은 애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꿀이 흐를 것만 같은 눈빛에 짙은 당혹감이 일었다.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그 호칭으로 불리니까 색다른걸.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리아나.

아니, 미친놈이나 다름없었지.

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네 얼굴이 신기루처럼 떠오르고, 유일하게 너를 만날 수 있는 꿈에서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어.”

그가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움직이면서 격양된 음성이 피부를 핥아 올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당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0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선생님, 저 리아나예요.

리아나 미첼.”

혹시 그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도 내가 미친놈처럼 보여?

내가 너를 잊었을 리가 없잖아.

매일 네 생각을 했어.

네 꿈을 꾸다가 눈을 뜨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네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박혀.

사실 지금도 두려워.

고개를 돌리면 네가 연기처럼 사라질까 봐.”

“선생님.”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

널 놔줄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

대체 10년 사이에 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 물음을 나는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블래이크가 고개를 기울이며 바짝 다가왔다.

그의 체취가 콧속으로 화악 밀려들었다.

“잠깐…… 아!”

내가 블래이크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내 허벅지를 은근하게 더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벅지를 움켜쥔 우악스러운 힘이 느껴지자 다리가 움찔 떨렸다.

이윽고 고개가 들리고 그에게 입술이 집어 삼켜졌다.

블래이크를 부르는 목소리가 솟구쳤으나 그의 입속으로 전부 씹혀 들어갔다.

“후읍, 읍!”

생의 첫 키스다.

달콤하지도 않았고, 간질거리는 설렘도 없었다.

열망에 들뜬 남자의 짙은 체취와 격렬하게 파고드는 혓바닥이 내 이성을 휘어잡았다.

거칠게 입술을 비벼 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갸우뚱 넘어갔다.

내 등을 단단하게 감싼 강철같은 팔이 없었더라면 뒤로 발라당 쓰러진 신세가 됐을 거다.

블래이크는 갈급한 사람처럼 조금의 틈도 없이 입술을 맞붙이고 입 안 곳곳에 혀를 찔러 넣었다.

볼 안쪽의 예민한 점막을 핥고, 목구멍까지 박아 넣을 기세로 혀를 깊게 쑤셔 왔다.

나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 으…….”

입에서 앓는 듯한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키스에 머리가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내 혀를 통째로 뽑아 갈 듯 빨아 대다가 혀 밑의 말랑한 살을 후벼 파듯 짓눌렀다.

타액이 울컥 솟아나며 신음과 함께 젖은 소리가 공기를 홧홧하게 데웠다.

“후읍, 으, 자, 잠깐……!”

열기 때문인지, 입을 틀어막고 있는 블래이크 때문인지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칠게 헐떡이다가, 도무지 끝날 거 같지 않은 입맞춤에 그의 어깨와 가슴팍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뺨을 아프도록 깨물곤 기어이 입술을 덥석 삼켰다.

“수, 숨이…… 웁, 흐우읍.”

“하아, 보고 싶었어.

리아나.”

그가 원피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뜨거운 손바닥으로 맨살을 더듬었다.

옆구리를 느릿하게 주물렀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도드라진 척추뼈 하나하나를 손으로 짚어 가며 묘한 열감을 불러일으켰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야릇한 감각에 허벅지가 달달 떨려 왔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고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블래이크의 반듯한 옷자락을 힘껏 구기면서 우는 듯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애기, 애기가…….”

고개 각도를 틀어 깊숙이 입술을 맞물리던 블래이크가 멈췄다.

그의 치아가 내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아쉽다는 듯이 혀끝으로 느리게 문질렀다.

나는 폭주하던 그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고개를 뒤로 물렸다.

흐꾸웩은 언제 잠들었는지, 이 상황에서도 팔자 좋게 숨을 새근새근 내쉬고 있었다.

촉.

또 한 번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블래이크의 시선이 오래도록 내게 머물렀다가 아이에게 향한다.

……설마, 블래이크가 흐꾸웩의 아버지인가?

말도 안 돼.

우리가 연인 사이였냐는 물음이 불쑥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나 끝내 소리로 흘러나오진 못했다.

「아무도 믿지 마, 리아나.

절대, 절대, 절대로 믿지 마.

아무도 아무도, 믿지 마.

리아나, 제발, 제발, 제…….」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써놨던 쪽지가 입술에 자물쇠를 걸었다.

……블래이크에게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 거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밝혀도 괜찮을까?

블래이크의 뭘 믿고?

내가 열여섯 살 적에도 그와 비밀을 공유할 만큼 깊은 유대를 가진 적은 없었다.

그는 집으로 일주일에 단 두 번 찾아오던 과외 선생님일 뿐이었다.

그런 블래이크에게…… 지금 내 상태를 다 밝혀도 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품 안의 흐꾸웩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 풀린 다리 때문에 한 번 엎어질 뻔했지만 블래이크가 팔을 뻗어 잡아 주기 전에 재빠르게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리아나,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응?”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고 말했다.

“이 아이를 보고서도……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나는 괜찮아, 리아나.

네가 누구의 아이를 낳았든 다 이해할 수 있어.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

“…….”

“설마, 내 아이야?”

블래이크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팔뚝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부여잡으며 재차 묻는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까, 제발 얘기해 줘, 리아나.

너와 내 아이가 맞아?

응?

제발, 리아나.”

블래이크도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나의 유일한 연인이었다면…… 이런 반응이 나와서는 안 됐다.

내게 블래이크 말고도…… 다른 남자가 있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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