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10년을 잃고 얻은 것 (1/14)

1.10년을 잃고 얻은 것

겨울이 여름의 아름다움을 앗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홀로 찬연하다.

홀로 빛을 뿜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뜨겁다.

겨울이 여름의 활기를 무덤 채 씹어 먹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황량한 벌판에서 홀로 생명력이 넘친다.

성인이 되지 못한 소녀의 무구한 열기.

우주의 별만큼이나 욕심이 많은 아이의 천진함.

마음만 먹으면 별을 품에 안을 수 있다 믿는 아이의 순수함.

지금의 나는 그렇다.

아직 치기 어린 시기에 머물러 있다.

무릎 위를 살랑이며 스치는 스커트, 주름 하나 없이 단정한 아카데미의 재킷을 입고 하루의 대부분을 강의실에서 보내는 소녀.

살랑이는 바람 한 점에도 작은 불씨를 활활 태우는 열여섯.

나는 열여섯이다.

“흐읏, 아……!아파!”

검붉은 남근이 미끈거리는 입구를 사정없이 쑤시고 들어왔다.

각오했던 일이지만, 지난밤 겨우 다잡았던 마음이 한순간에 바스러질 만큼 낯선 격통이 몰아쳤다.

군림하듯 내 몸을 깔아뭉갠 남자의 머리칼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날렵하고 오똑한 콧등으로 미끄러진 땀방울이 내 뺨 위로 떨어졌다.

순간 열기가 머리끝까지 화악 번지며 남근이 여린 살을 찢듯이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이불 시트를 쥐어짜듯 쥔 손이 놀라서 허공을 긁다가 남자의 너른 어깨에 손톱을 박았다.

원망이 울컥 차올랐다.

마물 사냥꾼을 고용해서 토벌해야 할 것만 같은 남자의 남근 크기도 서러웠고, 남보다 어색한 사이인 남자와 침대에 뒹굴게 된 내 처지 또한 그랬다.

이 모든 게 다 매일 밤 등장하는 그 빌어먹을 꿈 때문이었다.

꿈속의 나는 얼굴이 꺼멓게 칠해진 누군가와 낯뜨거운 행위를 이어 갔다.

그러다 꿈에서 깨면 속옷이 동그랗게 젖어 있기 일쑤였다.

아카데미에서 남자애들이 몽정한 일화를 저들끼리 숨어서 소곤거릴 때, “그럼 너희 맨날 바지에 오줌 싸?”하고 놀리지 말았어야 했다.

꺄악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던 남자애들을 보고 킬킬 비웃지 말았어야 했다.

매일 아침 속옷이 젖어 있는 일이 내 일이 될 줄 알았다면…… 놀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동질감을 느꼈어야 마땅했다.

옆에서 잠든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침마다 속옷을 빠는 처지가 마음에 사무쳤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 격렬한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누군지 밝혀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흐윽, 자, 잠깐만…… 더, 더는 못 하겠, 아, 아!”

“쉬이, 다리 더 벌리고 힘 빼.”

“선생……읏, 하아…… 못 하겠, 어요.아!”

그가 느리고, 강하게 쳐올릴 때마다 더는 들어올 수 없을 거 같던 무지막지한 성기가 내벽을 억지로 벌리며 진입했다.

몸이 기이하게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겁을 집어삼키며 황급히 그의 굴곡진 복근을 짚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볼썽사납게 고개를 저었다.

“다, 다음에 해요.죄, 죄송……흐으, 못 하겠, 하아…….”

“괜찮아.뱃가죽이 내 좆 모양대로 들썩일 때까지 박아 줄게.”

잔인한 입술이 내 눈물을 부드럽게 머금으며 시를 읊조리듯 속삭였다.

감미로운 음성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내가 아무리 두 손으로 싹싹 빌어도 이 남자는 이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볼지언정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다.

섹스가 이런 걸건 줄 알았다면, 몸의 기억으로 꿈속의 남자를 찾는 방법은 시도도 하지 않았을 거다.

대체 내가 모르는 ‘나’는 땅에 박혀 있어야 할 말뚝 같은 성기가 뭐가 좋다고 며칠씩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걸까.

아무리 내가 한 짓이라지만 개미 눈물만큼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익숙지 않은 묘한 감각과 버겁게 파고든 페니스를 느끼며 엉엉 목놓아 울었다.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뜨거운 입술로 내 얼굴을 다정하게 탐했다.

“구멍 적셔 줄까?”

“…….”

내가 너무 아파하자 그가 내 볼을 한 번 깨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배꼽 아래까지 들어와 있던 것이 내벽을 긁으며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오싹.

아찔한 감각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하으읏…….”

다리 사이는 오랜 애무로 인해 이미 충분히 젖어 있는 상태였다.

삽입의 고통은 남자의 무식한 성기 크기 때문이지 윤활제 역할을 하는 액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성기가 완전히 빠져나가자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천장을 보면서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큼지막한 손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화끈거리는 체온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래를 바라보자 어린아이 팔뚝만 한 성기가 남자의 배꼽 위까지 꼿꼿이 선 채로 꺼떡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괜히 쳐다봤다.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단정하게 정리된 반듯한 손톱과 뼈대가 예쁘게 튀어나온 큰 손이 굵직한 성기를 꽉 쥐었다.

남자는 활짝 벌어진 내 다리 사이를 빤히 바라보며 느릿하게 제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 남자의 손은 깨알 같은 글자가 빼곡한 책 페이지를 넘기고, 날카로운 펜촉으로 글씨를 쓰고, 회초리를 쥐는 모습이 전부였다.

“…….”

유려한 손이 검붉은 성기를 쓸어 올릴 때마다 붉은 귀두 끝에 투명한 액이 맺혔다.

선액이 점차 묽어지며 귀두 아래로 흘러내렸다.

불거진 핏줄을 타고 주욱 미끄러지다가, 고운 손에 짓이겨져 굵은 몸통 전체에 펴 발리기를 반복했다.

남자의 직각으로 뻗은 너른 어깨와 두툼하게 솟은 가슴 근육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를 다시 내 아래에 비비기 시작했다.

“아!”

뭉툭한 것이 입구를 쑤셨다가 음부를 가르고 음핵을 짓눌렀다.

작은 살점이 뜨거운 귀두에 비벼질 때마다 허벅지 사이가 달달 떨리며 경련하듯 요동쳤다.

노골적인 쾌감이 퍼지자 발가락이 꽈악 오므려지고 등허리에 전류가 튀는 것처럼 자꾸만 들썩였다.

정염에 젖은 눈이 내가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감상하듯 응시했다.

정신이 성감으로 뿌옇게 흩어져 있는 와중에도 미약한 수치심이 느껴졌다.

나는 남자의 시선에서 도망치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으, 흐윽!”

불시에 하체가 위로 들렸다.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와 골반 위로 양쪽 다리가 걸쳐지자 엉덩이가 침대에서 떨어지며 축축하게 젖은 아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많이 안 넣을 거야.참아.”

귀두가 안으로 쑤욱 밀려들어 왔다.

입구에만 걸쳐져 있는 것이 여전히 버겁기는 했지만,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던 탓에 이 정도 깊이는 큰 통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양심 없는 크기의 성기 앞머리를 쑤셔 박은 채로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성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내 골반을 지그시 누른 채 두 눈동자는 결합되어 있는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으으…… 뭐, 뭐 하는…….”

“한 번 싸고 시작하는 게 덜 아플 거야.”

“미친, 자, 잠깐……만, 요.

으으…… 이상…….”

남자는 피임약을 먹고 있으니 또 애가 들어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피임 문제를 떠나서 오로지 싸지르기만을 위한 이 행위는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남자는 귀두만 입구에 쑤셔 박은 채로 자위를 이어 나갔다.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내 골반을 누르고 있는 큼지막한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의 두꺼운 목에 핏대가 바짝 서고, 성기를 문지르는 손과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리아나, 내 눈 똑바로 봐.지금 네 안에 싸는 게 누군지.”

고압적인 음성이 내 시선을 잡아끌어 왔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내 체온이 뜨겁게 상승했다.

날 향한 욕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눈과 시선이 질척하게 얽혀 들었다.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는 손이 점차 빨라지는가 싶더니, 남자가 억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

곧게 뻗은 굵은 눈썹이 구겨지고, 어금니를 짓씹으며 많은 양의 액을 내게 전부 쏟아 냈다.

“헉…… 하아…….”

“아, 아아!”

남자는 사정과 동시에 내 안에 고환이 뭉개질 정도로 성기를 깊숙이 박아 넣었다.

말뚝에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참기 힘든 작열감이 머리끝까지 번지며 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하으으…….”

얼굴 위로 그의 화염 같은 숨결이 쏟아졌다.

거북할 정도로 벅찬 부피감에 허리가 위로 높이 들렸다.

남자는 봐주는 것은 이제 끝났다는 듯이 큰 손으로 내 오금을 움켜쥐었다.

무릎이 귀에 닿을 때까지 몸이 접히고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성기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터뜨리기도 전에 침략자처럼 안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하아, 아, 아!”

벅찬 압박감에 적응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자제를 잃은 허리 짓에 기억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쾌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라고 믿기 힘들 만큼 음란한 소리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오자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으음, 으, 움, 읏!”

남자가 광폭한 움직임을 이어 나가면서 내 다물린 입에 손가락 두 개를 쑤셔 넣었다.

억지로 혓바닥을 눌러 턱을 벌리는 손가락에 막혀 있던 신음이 튀어 나갔다.

혀 아래에 고여 있던 타액이 숨결과 함께 흘러내렸다.

남자는 대단한 친절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턱 아래까지 줄줄 흐른 타액을 훔쳐 친히 입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내 허락 없이 입 다물지 마.눈 돌리지 마.”

남자의 눈이 섬뜩한 광기로 이글거렸다.

하지 말라는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엄마도 너보다는 잔소리를 안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뱉었다가 엉덩이를 맞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시큰하게 달아오른 눈 아래로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그가 눈꺼풀에 입을 맞춰 줄 때가 돼서야 겨우 눈꺼풀 안쪽이 주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우읍, 아, 아윽, 그, 그만, 선생, 님, 하아, 아!”

내벽을 빠듯하게 채운 성기가 이리저리 방향을 달리하며 찔러 대다가, 고환까지 밀어 넣을 기세로 한계까지 박혔다.

“아윽……!”

눈알이 튀어나올 듯 크게 확장되고,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손으로 쥐었다.

남자는 안쓰럽게 경련하는 내 몸을 화염 같은 눈으로 응시하며 허리를 느긋하게 돌렸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감각을 버티지 못하고 도리질 치면, 눈 돌리지 말라는 음성이 나를 무섭게 채찍질했다.

“못하, 겠……흐, 으, 봐, 봐주세……아아!”

“박아 달라고 먼저 다리 벌리고 있던 건 너야.”

나는 이를 사리물었다.

그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낙하했다.

이때 남자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동시에 내 머리통을 으스러트릴 듯한 손으로 뒤통수를 감아쥐며 입술을 겹쳤다.

사지 말단까지 아찔한 쾌감이 진하게 번져 오는 게 느껴졌다.

인내를 상실한 허리 짓은 내 몸을 관통할 듯 격렬해졌다.

살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얻어맞는 것처럼 폭력적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역류하는 흥분감을 입 밖으로 토해 내며 교성을 질렀다.

머리가 징징 울릴 정도로 몸이 크게 들썩이고 짓밟히는 듯한 섹스가 나를 엉망진창으로 뭉갰다.

“흐으, 아, 아읏, 아…… 처…… 천, 히!흐윽, 제발…….”

“더 세게 해줘?”

“아니, 아니야……!”

그는 호흡만 조금 가빠져 있을 뿐, 나처럼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상체와 하체가 각각 다른 사람의 것만 같았다.

열기로 내 이성을 흩뜨려 놓고는 몰래 다른 남자가 들어와서 성기를 쑤셔 박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무자비하게 날뛰는 하체와 다르게 남자의 낯은 차분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고개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남자가 내 목을 조르기 쉽도록 훤히 내보이곤 흥분감에 헐떡였다.

질척한 혓바닥이 목선을 주욱 핥아 올렸다.

“이렇게 금방 나가떨어질 거면서 왜 도발은 하고 그래.”

“흐으, 아, 아…….”

“사람이 기껏 참고 있는데.”

그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쾌감의 감도가 해일처럼 덮쳐 오고 있어서 일말의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귀엽게 구는 건 좋은데, 감당도 못 할 거면서 건방 떨지 마.리아나.”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의 말에 백번이고 천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몸의 기억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려야 한다고 나 자신을 몰아세워 봐도 흥분감에 이성이 이지러졌다.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야 했던 다짐은 철퍽거리는 체액에 잠겨 부식되었고, 꿈에서 훔쳐보았던 옛 기억의 장면은 남자의 진한 체취 속으로 가라앉았다.

목표도 다짐도 전부 쾌감에 밀려난 채 나는 남자가 움직이는 대로 거칠게 흔들렸다.

강제로 쏟아부어 지는 벅찬 감각을 만끽했다.

지금 내 머릿속엔 몸을 겹쳐 누른 남자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섹스는 내 기억을 찾는 수단일 뿐인데.

원초적인 쾌감은 남자에게나 허락된 것이지 내가 즐겨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와 감정을 공유하고 쾌락을 나누는 행위를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박혀 있던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그와 내가 쏟아 낸 액이 울컥하고 엉덩이 밑으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천장을 풀어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현재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갈수록 과거는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 틀렸던 걸까.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어제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또다시 남자의 영역에 발을 들였을 거다.

나는 막다른 절벽에 내몰려 있었다.

비극의 종장 같은 현실이 내 목을 죄어올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내가 주인공인 희곡의 내용을 몰랐다.

인생이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1막에선 새의 지저귐 같은 관현악기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화사한 봄옷을 차려입은 소녀들은 코펠리아의 발레를 추며 내 삶의 무대를 활기로 채웠다.

한낮의 소녀 같은 활기가 영원할 거라 믿었다.

1막 중간.

단 한 번의 암전 만에 희곡의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 삶의 커튼콜이 피를 토하는 절규와 비명의 협연일 줄은 더욱이나 알지 못했다.

***

하, 이를 어쩌면 좋지.

째깍, 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심장을 압박하는데도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이 불면은 벅찬 흥분과 기대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내일 출항 시간에 늦지 않게 가려면 지금 자야 하는데.”

아, 짐은 빠진 거 없이 다 챙겼나?

갈아입을 옷은 엄마가 나중에 보내 준다고 했고, 서적도 다 챙겼고, 내 약학 연구 노트랑 경비…… 그리고 일기장, 음……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면서 꼼꼼하게 헤아려 봤다.

일주일 전부터 기록해 놨던 목록 중에 빠트린 것은 없었다.

얌전히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가방을 네 차례나 뒤엎고, 머릿속으로도 열 번 넘게 짐을 점검했다.

그런데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찬란하게 펼쳐질 유학 생활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무려 부모님께 1년을 조르고 졸라 성취해 낸 유학이었다.

외동딸인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던 부모님이셨지만, 내 입에서 “저 유학 가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처음으로 입가의 미소를 거둬들이셨다.

처음엔 “네 나이가 아직 열다섯 밖에 안 됐는데, 무슨 유학이니?

성년식이 끝난 후에 가도 늦지 않단다.”라고 달래던 부모님도 내가 의지를 꺾지 않고 고집을 피우자 언성을 높이셨다.

부모님 눈에는 내가 아직 곰 인형이나 끌어안고 자는 열 살짜리 어린아이로 보이나 보다.

내 나이가 벌써 열다섯인데.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쥴리는 심층 있는 공부를 위해 다음 달에 당장 유학을 떠난다고 했다.

쥴리는 나랑 동갑인데다가 심지어 내가 생일도 석 달이나 빠른데 왜 나는 안 되냔 말이야.

우리 부모님은 나를 너무 품속에 싸고도는 게 문제였다.

내가 쏘아 올린 ‘유학, 가고 싶어요.’

이 한 마디로 인해 나와 부모님은 1년간 냉전을 벌였다.

나는 유학을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부모님과의 대화 거부, 단식.

심지어 밤낮없는 눈물 세례까지.

그러고서야 난 부모님 입에서 “딱 반년만이야.”라는 답을 받아 내었다.

무려 1년간의 투쟁 끝에 얻어낸 성과치고 유학 기간이 지나치게 짧은 감이 있었지만, 내가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흔쾌히 기간을 더 늘려 주실 거다.

“아, 설렌다.”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어슴푸레한 새벽이 방 안으로 스며들고 나서야 겨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내일이면, 드디어…….”

나는 만족감이 넘치는 미소를 머금은 채 스르르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회음부에서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아릿한 통증에 절로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격통이 가라앉아 있던 의식을 흔들어 깨웠다.

나는 뜨거운 숨을 가쁘게 내뱉으며 번쩍 눈을 떴다.

“아이고, 정신이 들어?”

시야가 흐릿하게 너울거리고 꿉꿉한 땀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숨구멍을 탁 틀어막는 듯했다.

하아, 하아…….

귓속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집어넣은 것처럼 고막이 뜨거웠다.

낯선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으나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나는 힘주어 눈을 깜빡였다.

뿌옇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면서 처음 보는 상아색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목구멍을 거친 사포로 문지른 듯한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분명 내가 낸 목소리가 맞지만 지독하게 낯설기만 했다.

이때 차가운 것이 내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고생했어, 아가씨.

어휴.

나는 아가씨가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툭툭 두드리면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나는 누구냐고 묻지도 못했다.

아직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모든 것이 현실성이 없었다.

낯선 이불, 낯선 침대, 낯선 천장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통증.

오랜 시간 오줌을 참았을 때 빼고는 한 번도 통증을 느껴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눈으로 확인하기조차 두려울 만큼 끔찍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세상에, 왜 이렇게 떨어, 응?”

“아, 아아…….”

“물 좀 마시고.따뜻한 물이야.천천히.그래, 아휴 다 흘리네.괜찮아, 괜찮아.”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받친 채 물을 먹여 주었다.

혼몽한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제야 예기치 못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갑작스레 들이닥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아 참, 내 정신 좀 봐.로빈!이제 들어와도 돼!”

아주머니가 뒤쪽의 오래된 나무 문을 향해 소리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색 가죽 헌팅캡을 쓴 아저씨가 두꺼운 이불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그것을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봐봐.엄마를 닮아서 이목구비가 똑 부러지는 아들이야.나중에 여자 여럿 울리게 생겼어.”

흰 보 안에는 웬 모르는 아이가 싸여 있었다.

얼굴도 고사리 같은 작은 손도 쪼글쪼글 한 것이 어디가 잘생겼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아이를 왜 내게 내미냐는 거다.

나는 힘 빠진 손으로 아주머니의 손을 쳐냈다.

“저……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아니지, 지금 몇 시…… 쿨럭, 추, 출항 시간에 늦으면 안 되는데…….”

“아가씨…….”

혼란스러운 머리로 내뱉는 말은 나조차 이해하기 힘들 만큼 두서가 없었다.

횡설수설하는 나를 아주머니가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우욱…….”

순간 그 동정 어린 시선이 버티기 힘들 만큼 부대꼈다.

치미는 구역감에 절로 토악질이 나오고 눈앞이 찰흙 뭉개지듯이 어지러이 일그러졌다.

놀란 음성이 나를 여러 차례 부르고, 힘없이 하느작거리는 몸을 받쳐 드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넘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  

백색 함선의 매끄러운 선체가 푸르고 광활한 바다를 가르며 시원하게 뻗어 나간다.

항구에 남은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손을 흔들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싼 채로 멀어져 가는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차오르는 걱정을 든든한 눈빛으로 애써 갈무리한 채 내게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만끽하며 바다의 짠 내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발뒤꿈치가 설렘으로 들썩이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열흘.

무려 열흘이나 바다 위에서 지내야 했지만, 조금도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유학 생활을 가만히 상상하고 있노라면 일주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터이다.

“허억, 헉…….”

냉수가 확 끼얹어진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속눈썹 위로 달라붙는 땀방울을 손으로 비벼 닦았다.

나를 배웅하던 부모님도, 반짝이는 수평선도, 꿈을 실어 나르던 함선도 보이질 않았다.

까끌까끌한 모직으로 짠 실내복을 식은땀으로 흠뻑 적신 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격심했던 몸의 통증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은근하게 욱신거리는 통증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땀으로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창백하게 질린 손엔 온기가 희미했다.

출항했던 것이 꿈이고, 당최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혼곤한 정신을 다잡기 위해 주인의 허락도 없이 좁은 탁자 위의 물을 입 안으로 전부 털어 넣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물어봐도 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창으로 들이친 햇볕이 내 뺨 위로 따갑게 쏟아졌다.

나는 시린 눈을 찌푸리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청명하고 높은 하늘 아래로 나뭇가지가 무성했다.

“여기는 또 어디야.”

눈가를 때리는 햇빛 하나에도 신경이 바짝 솟았다.

도무지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욱신거리는 다리를 침대 밑으로 내렸다.

한 발자국 걷자 회음부에서 소름 끼치는 통증이 느껴졌다.

당장 주저앉을 만큼 아픈 건 아니었다.

단지 그 부위가…… 내 몸이긴 하나 몹시 낯선 곳이라 두려움이 앞섰다.

어금니를 짓씹으며 통증을 모르는 척 걸었다.

커튼을 확 치자 찾아온 어둠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한숨 돌리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침입자는 이전의 그 풍채 좋은 아주머니였다.

내게…… 모르는 아이를 안겨 주었던.

아주머니의 갈색 동공이 놀란 듯 크게 부풀어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먹은 것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면 쓰러져.”

쟁반에서부터 고소한 수프 냄새가 퍼지자 잠잠했던 배 속이 갑자기 요동쳤다.

당연한 수순처럼 혀 밑으로 침이 고였다.

나는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낯선 침대에 앉았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아기 낳은 이후로 일주일이나 쓰러져 있었어.”

“…….”

“잠깐 눈 떴다가 픽 잠들어 버리고, 또 괜찮아지나 싶더니 픽 잠들어 버리고.

로빈이 의원을 찾으러 마을에 내려갔는데, 이 숲속까지 와줄 의원이 어디 있어야 말이지.

요즘 의원들은 다 장사꾼들이야.

병자를 병자로 보지 않고, 돈으로만 봐.

주판을 땅땅 두드렸을 때, 손해 보는 진찰인 거 같으면 무거운 궁둥이를 움직이지도 않는다니까.”

아주머니는 퍽 기분이 상했는지 연신 툴툴거리면서 대야에 담긴 물수건을 꽉 짰다.

그러곤 익숙하게 내 목에 맺힌 땀들을 닦아 주었다.

나는 그런 아주머니의 손을 밀어냈다.

“엄마, 아버지를 불러 주세요.”

“……뭐?”

우리 부모님이 내 유학을 순순히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잠든 사이에 몰래 새 별장으로 옮겨 놓은 거겠지.

몸의 통증까지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지금으로선 이 추측이 가장 가능성 있어 보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유학을 얼마나 바라 왔는지 다 알면서 어떻게 이런 심한 짓까지 할 수 있는 거야.

“텀골드 전하의 근위 기사이신 미첼 장교님이요.”

아버지의 이름을 대는데도 아주머니는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아버지가 고용한 사람이면 아버지를 모를 리가 없었다.

굳이 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크로바티움 왕국의 국민이라면 근위대 장교이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으리라.

“……아가씨 왜 이래, 무섭게.”

“뭐가요?”

“텀골드 전하께서 승하하신 지 올해로 벌써 10년인데 무슨 소리야.”

“…….”

아주머니의 말이 정확히 귓속으로 꽂혀 들었음에도 마치 타국의 언어를 들은 것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신문에서 텀골드 전하께서 위독하시다는 기사를 읽긴 했었다.

그런데…… 전하께서 승하하신 지 10년이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나를 놀리려는 건가?

하지만 아주머니의 얼굴엔 조금의 장난기도 묻어 있지 않았다.

도리어 심각하게 낯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살피기에 급급해 보였다.

“어휴, 애 낳다가 죽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기억 상실은 차라리 나을지도.”

“애를 낳다뇨?기억 상실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돌연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아주머니의 품엔 한 번 보았던 그 아이가 안겨 있었다.

“왜, 왜 이러세요!”

아주머니가 내 팔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깜짝.

소스라치게 놀라며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아주머니의 손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흰 보에 싸인 아이를 억지로 안겨 주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낳은 애야.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큰 충격이 잇따랐다.

입이 쩍 벌어졌으나 아무런 튀어나오지 못했다.

애를 안고 있는 내 손은 핏기 없이 창백한 시체 같았다.

나는 넋이 나간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쯧쯧.신발도 안 신고 만삭인 채로 우리 집 앞에 쓰러져 있는 걸 로빈이 데리고 왔어.애 아버지 얼굴이나 이름…… 떠오르는 게 전혀 없어?”

“아…….아니, 저는…… 남자랑 입 한 번 맞춰 본 적도 없고 아니 그전에……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애예요, 애는.제가 자웅 동체가 아니고서야 출산을 할 리가 없는데.”

“괜찮아, 괜찮아.푹 쉬다 보면 곧 기억이 돌아올 거야.”

아주머니의 크고 따뜻한 손이 내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조금의 위로도 되질 않았다.

눈을 뜨면 찬란한 유학 생활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웬 아이가 덜컥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품은 기억도, 낳은 기억도 없는 이 아이를 나보고 대체 어쩌라고.

아니 그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건…….

“시, 신문…… 오늘 자 신문을 보여 주세요!”

“아고고!애를 그렇게 함부로 내려놓으면 어떡해!”

벼락같이 터지는 일갈에 화들짝 놀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대에 덜렁 내려놓았던 아이를 어색하게 안아 들었다.

발갛고 쭈글쭈글하던 아이는 일주일 사이에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하얗고 포동포동한 뺨은 우유처럼 부드러워 보였고, 꽉 감고 있던 눈꺼풀이 들리자 푸르고 무구한 벽안이 드러났다.

맑은 구슬 같은 두 눈에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는 아주머니의 커다란 목청에도 놀라지 않고 멀뚱멀뚱 눈을 끔벅였다.

“못 안고 있겠으면, 이리 줘.”

아이가 내 품을 떠나가는데도 일말의 아쉬움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겁게 짓누르던 부담이 사라진 것만 같아서 홀가분했다.

“오늘 자 신문은 없어.일주일에 한 번씩 로빈이 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일주일 치 신문을 가지고 와서.이틀 전 신문이라도 줘?”

“네, 뭐든 좋아요.”

“로빈!신문 좀 가지고 올라와!”

다급하게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로빈’이라 불린 아저씨가 둘둘 만 신문을 겨드랑이에 낀 채로 올라왔다.

나는 그것을 냉큼 받아 들었다.

「넬리카 여행일보 - 크로바티움력 709년 12월 02일

이달 말일부터 성 하스니엘 신전에 평신도들의 출입이 제한된다.

헤르탄티누스 교황이 선언한 칙령 이후 이교도들의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겨울에만 볼 수 있는 성 하스니엘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스노우플라워의 눈부신 광경을 올해엔 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스노우플라워를 볼 수 있는 숨겨진 장소가 또 있다.북대륙의……」

“709년, 709년, 709년…….”

나는 노려본다고 해서 바뀔 리가 없는 글자를 눈으로 덧그리고 또 덧그렸다.

다른 신문들도 전부 펼쳐 보았다.

일자만 바뀔 뿐이지 연도는 애석하게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신문을 허망하게 내려놓았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스물여섯이라고?”

혼란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부정하려 발버둥 쳐봐도, 바뀌지 않는 신문의 연도처럼 내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열여섯에서 스물여섯이 되었고, 품은 적 없는 아이를 출산한 몸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