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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후일담 (78/79)

외전 5. 후일담

하늘이 흐리더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제국 서부 국경 너머, 작은 공국에 도착한 한스가 쌓이는 눈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오셨습니까, 한스 경. 날이 하필 참 궂군요.”

“후우. 그러게 말입니다. 원래 서부 날씨가 이리 지독하답니까? 북부와 맞먹을 정도로 춥군요.”

“지난주부터 유독 날이 추워졌습니다. 바로 가시지요. 길이 좁아 걸어 이동해야 합니다.”

한스는 마중 나온 서부 공국 행정관의 안내를 받으며 목적지로 향했다. 한스와 함께 온 라스페 공작가, 그리고 로앙 백작가의 기사들이 그들을 에워싼 채 함께 걸음을 옮겼다. 눈이 쌓이기 전에 일을 마치고자 모두 분주하게 움직였다.

추위를 뚫고 한스 일행이 도착한 곳은 평민들의 주거지가 밀집된 골목이었다. 낯익은 이들이 3층 높이의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다.

“한스 경! 오신다는 소식을 아침에야 전해 받았습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파울 님, 벌써 뵙지 못한 지가 반년이었습니다.”

파울 경은 에드문트의 사촌 누이이자 3년 전 황제가 된 레오노르 벨레노아의 측근이었다.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노기사인 그는 반년 전, 서부 공국으로 요양을 겸한 임무를 떠난 차였다.

“폐하께서 예상보다 일찍 파울 경을 되찾게 되어 기뻐하시겠습니다. 모두 파울 님의 은덕이 아닌가 싶군요.”

“이 늙은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늘에 뜨게 하는 말솜씨는 여전하시군요. 로앙 백작님께선……. 아, 이런. 일이 급한데 제가 사심부터 챙기려 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반갑게 인사 나누던 노기사가 한스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공국의 행정관과 기사 몇 명이 함께 갔다.

3층 건물은 도시에서 일용직으로 벌어먹고 사는 평민들의 공동 거주지였다. 그중 한스의 최종 목적지는 창문마다 전부 못질이 되어 있어 언뜻 폐가처럼 보이는 꼭대기 층이었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국 병사들이 문을 열자 옅은 악취가 퍼져 나왔다. 불쾌한 첫인상에 비하면 내부는 깔끔했다.

“발견 당시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겨울이고, 외풍이 센 방이라서 바깥 못지않게 춥더군요. 그래도 내일쯤에는 옮길 생각이긴 했습니다.”

응접실과 식당이 합쳐진 작은 공간을 지나자, 두 사람이 누우면 딱 알맞을 작은 침대가 놓인 방이 나왔다.

그곳에, 사흘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을 남녀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한스가 무심코 다가가려다 발밑에 까맣게 스며 있는 핏자국을 보고 도로 멈추었다. 핏자국의 출처는 남자의 시신, 검이 꽂혀 있는 가슴팍 언저리였다.

“살해했다거나, 뭐 그런 흔적은 결국 못 찾았습니다. 열이면 열 전부 자진한 것으로 추정하더군요. 여자 쪽이 시름시름 앓는가 싶더니 결국 지병으로 먼저 죽었을 테고, 2황자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따라 죽은 걸 테지요.”

“……그렇군요.”

한스는 파울 경의 설명을 들으며 황후였던 여자와 황제였던 남자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죽음이 알려진 건 사흘 전이었다. 마침 서부에서 일정이 있던 에드문트와 한스가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황제와 황후의 죽음은 에드문트에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들은 에드문트에게 있어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엘리아는 다르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여 에드문트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식에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 낌새를 눈치챈 한스가 일을 자청했다.

<공작님, 제가 서부 공국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두 분께 돌아와 소상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사실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기 어려워서 그렇기도 합니다. 간 김에 그곳에 파견했던 저희 측 기사들에게 대면 보고도 받고 오겠습니다.>

한스는 에드문트의 허락이 떨어진 즉시 기사들과 함께 서부로 달려왔다.

제국 역사상 최초로 황족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제국 밖으로 추방된 두 사람의 말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죽은 찌꺼기를 제 눈에 담고서 엘리아와 에드문트에게는 ‘충분히 비참한 죽음이었다.’라는, 기쁜 소식만 듣게 하고 싶어서.

다만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폐위된 황제가 제국 밖으로 추방된 것이 겨우 반년 전의 일이었다. 한스는 그들이 아주 오랫동안 비참함을 버텨 주길 바라 왔다.

‘엘리아 님께서는 마지막 두 인간이 보여 준 꼬락서니에 그럭저럭 만족하신 모양이지만.’

황후는, 제국 밖으로 추방되기 전 이미 심신이 망가진 채였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 후작의 계략이었다는 엘리아의 거짓 속삭임을 철석같이 믿었고, 이내 일어나지 않은 일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폐하, 아이를 만나고 싶어요. 누가 우리 아이를 데려간 거죠?>

자신이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고 착각했다. 어디선가 작은 인형 하나를 가져와선 고이 품고 어르기 시작했다.

<아가. 폐하께서 너를 귀하게 키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실 거란다.>

낳은 적도 없는 아이랍시고 인형에게 젖 먹이는 시늉을 하고, 이름을 부르며 돌보는 모습이 심심찮게 목격되었다. 불유쾌한 광경에 누구도 그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오직 황제만이 벨레노아 백작의 처분을 기다리며 제 아내를 보살폈다.

제발 정신을 차려 달라고 호소했다.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자식이 아닌 저를 봐 달라고. 아이 삼아 어르는 솜 인형을 빼앗아 보기도 하고, 생전 처음으로 여자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를 향한 여자의 집착은 더욱 깊어지기만 했으니, 남자는 결국 체념했다.

<폐하, 우리 아이가 참 예쁘지요.>

<……그래. 당신을 닮아 예뻐.>

해진 인형을 함께 보듬어 주고, 여자가 원하는 대로 입 맞추어 주기도 했다.

그 비참한 인형 놀이가 제국 밖으로 추방된 뒤에도 지속되었음을, 한스는 다른 이들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겨울 한기가 부패를 늦춘 여자의 시신은 여전히 작은 인형을 품고 있었기에. 그리고 남자의 손이, 여자의 시신과 함께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죽기 전, 부모 잃은 자식들에게는 한 번이라도 죄스러운 심경을 느꼈을까.

혹은 끝까지 스스로의 과오만 탓하고, 자신들을 해쳤다고 믿는 후작을 원망하다 생을 끝냈을까.

여자의 심경을 알 도리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를 따라 죽은 남자의 고통이 어땠을지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악인이기에 앞서, 한스는 2황자의 시신에 에드문트의 과거를 겹쳐 볼 수밖에 없었으므로.

“유언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이것입니다.”

노기사가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보여 주었다. 평생을 황족으로, 황제로 살던 남자의 마지막 글은 간결한 지시를 담고 있었다.

<발견하거든, 부디 아내의 시신만큼은 훼손되지 않도록 조처해 주시오. 그리고 아내가 품에 안은 인형 역시, 실제 아이에게 하듯 장례 치러 주시오.>

손바닥만 한 종이에 사과나 후회를 담은 문장은 어디에도 존재치 않았다. 그저 아내의 안위만을 보살핀, 하여 자신의 마지막 염원만을 담은 이기적인 글이었다.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유언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리 탐탁지 않아 하시지 않겠습니까. 조카인 닐스 튀링겐도 유언에 욕심내지 않으니 내려 주시는 처분 달게 받겠다 해서 아마 규정대로 처리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국법상 죄인의 시신은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도록 여러 과정을 거치게 했다. 남자는 그 마지막 처벌만은 면하게 해 달라 읍소했지만, 그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황제가 관대함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한스는, 남자의 유언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혹시 조금 미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미뤄 주십시오. 그……. 클로디 튀링겐이 안고 있는 저 인형과 함께 말입니다.”

서부 공국 측에서는 한스가 부탁한 대로 부부의 시신을 보관해 주기로 했고, 노기사가 수도에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를 올린 날 엘리아가 황궁을 찾아갔다.

“폐하, 허락해 주신다면 두 사람의 시신은 저희 쪽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로앙 백작의 뜻대로 하게.”

엘리아가 그들의 장례를 치러 줄 것으로 짐작하면서도 황제는 두 사람에게 시신을 인계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며칠 뒤, 엘리아는 에드문트와 함께 서부 공국으로 향했다.

때마침 날이 화창했다. 약식으로 꾸민 장례식에 세 개의 관이 놓여 모처럼 찾아온 겨울 햇살을 만끽했다.

다들 죽은 이들에게는 더없이 호사스러운 장례라 입 모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라스페 공작님, 로앙 백작님. 두 분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튀링겐의 작위와 영지를 모두 포기하고 서부 공국에 정착한 닐스가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의 얼굴에는 비참하게 죽은 혈육을 향한 슬픔이 아닌, 후련함이 남아 있었다.

“제 어머니를 모신 묘지 옆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무명 묘로 꾸며 다른 이들은 알 길 없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엘리아는 못 본 새 많이 달라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따로 이야기 나누자 제안했다. 에드문트와는 이미 이야기가 되었기에 그가 선선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한 채 마주 보는 건 열여덟, 성년이 되기 전 서점에서의 이별 이후로 처음이었다.

“닐스.”

이제 스물세 살이 된 엘리아는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제 시선을 앗아 갈 만큼 아름다워서, 엘리아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긴장되었다.

“이제 당신의 삶을 살아. 적어도 제국 밖에서는 자유로울 거야. 원한다면 남부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도 좋아. 눈에 닿는 곳에 있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해 볼 테니까.”

그리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얼마나 따듯하던지. 일찍 찾아온 봄 햇살 같았다.

“……어째서.”

이모님의 죽음을 전해 듣고도, 체념하고 있었던 장례를 치르고도 말라 있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 죄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라는 말 덕분에.

“왜냐하면, 이제 전부 끝났으니까.”

엘리아가 저를 용서했음을 깨달았으니까.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지. 내일을 살 우리의 아이들은 같은 아픔을 겪지 말아야 할 테니까.”

충분히 시간을 줄 테니 고민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아가 뒤돌아 떠나려 했다.

“엘리아.”

마치 두 사람이 아직 열여덟인 것처럼, 닐스가 로앙 백작을 이름으로 불렀다. 돌아본 시선은 다행히 아무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축하해. 아이…… 많이 사랑받고, 행복하기를 기원할게.”

작별 인사 삼아 건넨 축하에, 엘리아가 눈을 크게 뜨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와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처음 받는 축하야.”

“처음이라니. 아직, 공작께선 모르셔?”

“응, 의원이랑 나 둘밖에 몰라. 언제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너무 미루지는 말고, 단둘이 있을 기회 생기거든 바로 이야기해. 괜히 미뤘다가 나처럼 먼저 눈치채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리고?”

“혹시 소식 듣고 눈물이라도 보이면, 네가 그 순간을 두고두고 놀려 먹을 게 분명하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 없을 때로 해.”

엘리아는 닐스의 확신에 목까지 젖히며 크게 웃고 말았다. 뽀얀 입김이 몽실몽실 솟아 함께 웃었다.

“조언 고마워. 같이 놀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전할 건지, 아니면 나 혼자만 남편 우는 모습 독차지할지는 좀 더 고민해 볼게.”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리하여 닐스도 마지막이 될 인사를 웃으며 전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행복을 빌어 주고 닐스가 엘리아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차에 올라, 이제 문이 닫히고 나면. 두 사람의 인생에 가장 기쁨이 될 선물을 주고받으리라.

“잘 가. 엘리아.”

부디 우리의 세상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슬픔 모르고 살기를.

그리하여 엘리아, 너의 삶에도 슬픔은 모두 사라지고 행복만 남기를.

* * *

스물셋. 그리고 스물일곱. 어느덧 여자에게는 처음이었고, 남자에게는 두 번째인 숫자가 그들의 현재가 되었다.

“이러다 해 질 때 되어서야 오는 거 아냐?”

공작가 저택 앞을 한참 서성이던 엘리아가 투덜거렸다. 아침에 오기로 한 손님이 정오가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은 탓이었다.

정작 한스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엘리아에게만 쏠려 있었다. 아직 산달이 한참 남았는데도 막달처럼 부푼 배 때문이었다.

“엘리아 님, 제발 앉아 주시면 안 될까요? 넘어지실 것 같아서 조마조마하단 말입니다.”

“안 넘어져. 그리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제 사촌 누이는 임신 확인하자마자 꼼짝도 안 하고 누워 살던데요. 조심해야 한다고.”

“우리 애는 에드문트 닮아서 튼튼할 테니 괜찮아.”

근거 없는 엘리아의 주장에 말문 막힌 한스는 어떻게 해야 로앙 백작님이자 주인마님이신 엘리아를 의자에 앉게 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엘리아 님.”

“이제 포기해 한스.”

“제 결혼식 진행 상황 보고드리려고 했는데요. 백작님께서 앉아 주시면 말이죠.”

“아, 그런 거로 치사하게…… 됐지? 앉았으니까 빨리 이야기해 봐. 레오니가 뭐래?”

한스의 꾐에 엘리아가 드디어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스 역시 근처에 작은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전날 밤 자신의 연인 레오니와 나눈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공작가 후원에서 결혼하는 건 부담스럽다던데요.”

“어째서? 나중에 위겐 부인과 함께 우리 아이 유모 되어 줄 사람인데, 그 정도는 아무도 흠 안 잡아. 레오니한테 시간 날 때 좀 오라고 해. 내가 다시 얘기하게.”

엘리아는 아이를 가진 뒤 곧장 테오 경의 아내인 위겐 부인을 불러 유모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 당시 만삭이었던 위겐 부인이 흔쾌히 차기 공작이 될 아이의 유모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에 더해 한창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한스의 연인까지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레오니가 몸 약한 언니 대신 조카를 둘이나 키웠다며? 그보다 더 좋은 적임자 찾기가 힘들 것 같아서 내가 제안했어.>

<예? 조카를 대신 키웠다는 건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대체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레오니가 전에 찾아와서 말하던데. 일 잘하니까 뭐든 시켜만 달라고. 처음에는 주방을 맡길까 했는데, 마침 위겐 부인이 저 혼자 괜찮을지 조금 걱정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어차피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원한다고 하면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라 상의할 것도 없었고, 한스 역시 연인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성격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도, 한스를 향한 레오니의 잔소리가 시작이었으니까.

<저희 식당 옆 건물에 집이 있다는 거랑, 공작가에서 일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근데 한 달에 두세 번은 꼬박꼬박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발길을 뚝 끊으니 그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더라고요.>

레오니는 한번 신경 쓰이기 시작한 한스를 마음에 담았고, 그가 눈에 띌 때마다 끼니 챙겨 먹으라는 잔소리를 건네는 걸 시작으로 한스와 가까워졌다.

엘리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한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유세를 부렸다.

<한스, 나랑 에드문트한테 고마워해. 원래 10년 뒤에도 연애 한번 못했을 운명인데, 우리가 한스의 운명까지 바꿔 준 거잖아.>

엄밀히 말하면 한스가 집에도 못 갈 지경으로 바쁘게 구른 덕에 이뤄진 사랑이었지만, 엘리아는 자신이 은인이라 주장하며 두 사람의 결혼에까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평민인 레오니로서는 아무리 저를 좋게 봐 준다 해도 결혼식에 고위 귀족의 도움을 받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친지들과도 상의해 봤는데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라서요. 대신 예복 맞춰 주시는 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정 부담스러우면 어쩔 수 없지.”

전부 제일 좋은 거로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의 결혼식에 제 욕심 앞세울 수만은 없었다. 예복이라도 양보받았다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예복 준비에 사력을 다해야지. 푸아티에가 막내딸보다 더 예쁘단 소리 듣게 해 줄 거라고 전해.”

내친김에 엘리아는 한스와 예복 가봉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고, 마차가 늦어져 걱정하던 건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기다리던 마차가 공작가 저택에 들어선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백작님,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데이지, 외젠! 어서 와. 우리 올가는?”

엘리아는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을 보자마자 조카아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외젠이 품에 안아 든 제 딸아이를 보여 주었다.

외젠을 닮아 금발 머리에 연주황빛 눈동자를 가진 올가는 긴 여정에 지쳤는지 그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엘리아가 못 본 새 훌쩍 큰 아이를 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외젠과 데이지는, 배가 부른 엘리아의 모습이 생경해 인사 나누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그렇게 어색해?”

저택 안으로 자리를 옮겨 짐을 풀고, 때늦은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외젠은 엘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근처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화들짝 놀라 엘리아에게 ‘괜찮아?’라고 묻기 일쑤였다.

“나름 사람들 앞이라고 참는 거예요. 제가 올가 가졌을 때는 더 심했어요. 수저 떨어뜨리는 소리에도 기겁하셨다니까요.”

외젠은 저 놀리는 걸 듣고 자제해 보려 했지만, 엘리아가 식사 중 얼굴을 살짝 굳히기라도 하면 다시 안절부절못했다.

“엘리, 음식을 왜 남겨. 네가 언제 이렇게 본 요리를 남겼다고? 다른 음식 내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기다려 봐. 내가 집사에게…….”

“제발 좀, 충분히 잘 먹고 있단 말이야. 에디도 그 정도 유난은 안 떤다고.”

엘리아가 겨우 몇 점 남긴 오리 요리를 두고 항변하던 중, 마침 에드문트가 황궁에서 돌아왔다. 외젠과 데이지에게 짧게 인사 건넨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히 엘리아의 접시 위였다.

“엘리, 입맛이 없어?”

“…….”

“엄마, 엄마 왜 고개 숙이고 몰래 웃어?”

데이지는 에드문트의 말을 듣고 차마 대놓고 웃을 수가 없어 급히 식탁 아래로 피신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딸 올가가 고개를 숙인 채 끅끅대는 데이지를 쿡쿡 찔러 물었다.

그 모습에 엘리아와 외젠까지 덩달아 웃음을 터뜨려 식당이 오랜만에 여러 명의 웃음으로 가득 찼다.

“공작님, 다들 왜 웃어요?”

“글쎄.”

어리둥절하던 아이와 에드문트만 다들 왜 웃는지를 몰라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당신 열심히 변호했는데, 오자마자 내 끼니부터 챙기면 어떻게 해.”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엘리아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자, 외젠이 끼어들어 에드문트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에드문트가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고민하고 있으니, 가만히 듣고 있던 올가까지 끼어들었다.

“근데요. 그러면 공작님이나 제가 먹으면 돼요. 그리고 고모님은 더 맛있는 걸 드시면 되죠. 그쵸?”

“우리 올가가 여기서 제일 똑똑하네. 이건 에디가 대신 먹어 줄 거고, 올가는 그럼 고모 대신 후식을 먹어 줄래?”

주방장이 엘리아의 지시에 미리 준비해 둔 후식을 접시 가득 쌓아 왔다. 아이가 좋아하는 견과류 케이크에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행복해!”

온몸으로 행복을 표현하는 아이 덕분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늘 행복하게 해 줄게. 사랑하는 우리 올가.”

엘리아가 크림 묻은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며 속삭였다.

그날은, 크라우제 후작이 낡은 움막에서 숨을 거둔 지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 * *

레오노르 벨레노아가 대관식을 치러 황제가 되자, 사람들의 이목은 후작의 처리 문제에 쏠렸다. 다들 새 황제가 그를 언제쯤 사형대에 올릴 것인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사형대에는 후작의 추종자들이 흘린 피만 낭자했을 뿐 크라우제 후작은 목숨은커녕 작위조차 빼앗기지 않았다.

황제, 그리고 엘리아와 에드문트가 후작을 살려 둔 채 평생 그를 고통스럽게 할 형벌을 내리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제국 중앙 학술원 학장이 된 정치학자 테레사 경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누구도 들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기이한 형벌을 찾아냈다. 모두가 그 설명을 듣고 기함했지만, 감히 형이 과하다며 반대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황제가 자신이 원하는 형벌을 학자의 입을 통해 제안했다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후작은 전례 없는 형벌을 확정받았다.

<일신의 자유를 구속하고, 평생 스스로의 죄를 마주하여 속죄하도록 하겠다.>

황제의 명령이 내려온 즉시, 황실 병사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크라우제 후작을 수도 인근에 있는 들판으로 이송했다. 그곳에는 낡아 빠진 움막과 그의 다리를 묶을 긴 쇠사슬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이 후작이 남은 평생 지내야 할 감옥이었다.

<이곳에서 하루에 세 번, 당신이 살해한 자들이 잠들어 있을 북쪽을 향해 기도를 올리도록.>

후작은 제게 주어진 형벌을 들은 뒤 차라리 죽겠다며 혀를 물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즉시 그의 턱을 벌려 목숨을 연장시켰다. 비가 새는 움막에서 최소한의 치료를 받고 기력을 되찾자마자 잘린 혀로 비명을 질렀지만, 그럴 때마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죽지 않을 만큼만 매질하였다.

그러면서도 병사들은 ‘후작님’이라며 꼬박꼬박 공대하는 걸 잊지 않았다.

<후작님, 죽을 때는 죽더라도 죗값은 다 치르셔야지요. 또 짐승 취급해 드려야 기어 나와 속죄할 겁니까?>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병사들이 저항하는 그를 움막에서 질질 끌어내 북쪽을 보고 무릎 꿇게 했다. 후작은 눈을 질끈 감고선 앞으로 닥칠 비참한 시간을 견뎌 보려 했다.

<저기 나왔다!>

<와, 더러운 거 봐. 우리 집 돼지도 저것보단 깨끗하겠다.>

후작이 시간 맞춰 나오기를 기다리던 인근의 꼬마들이 깔깔거리며 돌이나 쓰레기 따위를 던졌다. 생전 누군가에게 들어 본 적 없는 더러운 욕설도 함께였다.

움막을 지어 둔 곳이 워낙 사람들이 평소에 많이 이용하던 길목이라, 지나가던 이들도 금방 움막 옆 노인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조롱을 아끼지 않았다.

<개자식아, 내 가족들! 억울하게 죽은 내 가족들 다시 살려 내!>

때론 악에 받친 사람들이 후작을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전부 그의 손에 가문을, 사랑하는 사람을, 목숨 바쳐 구하고 싶었던 주인을 잃은 피해자들이었다.

후작을 감시하는 병사들은 적당히 한 맺힌 자들의 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가 그들을 만류하곤 했다.

<후작님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 끊이질 않습니다. 참 대단하기도 하지.>

<그 와중에 당신 편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말입니다. 아, 후작님 감싸 줄 인간들은 당신이 저지른 일에 휘말려서 진즉 다 죽었던가요?>

<듣자 하니 3황자도 도망 다니다가 그 인간 손에 자식 잃은 가족들에게 맞아 죽었다던걸.>

<후작님께선 운이 좋으십니다. 이렇게 당신 목숨 구제해 줄 병사들이 있으니까요.>

병사들의 조롱이 후작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냈다.

구원을 바라지 못할 크라우제 후작의 비참한 생은, 2황자 부부보다 석 달을 더 버틴 뒤에 끝이 났다.

아침이 되어 평소처럼 무릎을 꿇고 강제로 기도 올리던 중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다시는 눈뜨지 못했다.

얼은 땅을 녹이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봄의 한가운데였다.

황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형벌을 받던 크라우제 후작을 찾아와 바닥에 처박힌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같은 빗속에 머물다가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아이를 가져 거동이 불편한 엘리아를 위해 직접 공작가에 찾아갔다.

<후작의 처분도 두 사람의 뜻을 존중하겠네.>

2황자 부부에 이어 후작의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의견을 묻는 황제의 행동에 엘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어리디어린 백작의 놀란 표정이 그를 웃게 했다.

<나는 이미 모두 이루었으니, 그의 시신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아. 그러니 자네들에게 남은 여한이 있다면 뜻대로 하게.>

엘리아는 마음의 짐을 모두 털어 낸 황제의 면을 보고 기꺼이 그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에디, 외젠과 데이지에게도 연락 넣자. 이제 정말 끝이니까.>

그리하여 후작이 사망한 지 1주일이 되던 날 외젠과 데이지가 아이를 데리고 수도로 올라왔다. 엘리아는 올가와 함께 저택에 남고, 남은 세 사람이 함께 후작의 시신이 방치된 움막을 찾았다.

따듯한 날씨에 썩은 시신과 한쪽 지붕이 무너진 움막. 그리고 죽은 이의 유일한 혈육, 울리히가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내부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병사들의 도움으로 이미 시신은 움막 안으로 옮겨 둔 뒤였다. 세 사람이 후작의 시신을 확인한 뒤, 울리히가 낡은 움막에 불붙인 장작을 던져 넣었다.

“날이 건조하여 아마 오늘 밤 즈음에는 전소될 겁니다.”

그의 말대로 커다란 불길이 금세 후작의 시신을 담은 움막을 절반 넘게 집어삼켜 시커먼 재를 날렸다.

“울리히, 지금껏 고생했다 들었네.”

“아닙니다, 외젠 님. 고생은요. 전부 제 욕심에 한 일이었습니다.”

크라우제 후작은 몰랐겠으나, 울리히는 그가 움막살이를 시작한 후 수도에 올라와 매일 그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자신을 불구로 만들고, 억지로 맺어 준 아내까지 학대했던 후작의 말로를 눈으로 새겼다.

그동안 오직 증오만 선명하던 감정은……. 희미해졌던가.

아니면 끝내 용서하지 못하여, 남은 앙금을 재 가루와 함께 날려야 했던가.

“울리히, 이제 어찌할 건가.”

다들 떠날 채비를 마치는 사이, 에드문트가 울리히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울리히는 제가 공작에게 돌려준 답이 엘리아에게 전해지리라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그가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어린 시절 그가 보인 치기 어린 모습을 용서하고, 연민한 여자에게. 죄지은 조부와 저를 분리하여 저를 사람으로 대해 주었던 로앙과 라스페의 사람들에게.

자신과 아내의 구원자에게.

“살아야지요. 허락된 곳에서 누릴 수 있는 만큼만 욕심내며 살겠습니다. 남은 생 동안 은혜 잊지 않고 남은 빚을 갚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그에게, 외젠이 다가가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울리히, 자네 빚 청산은 진즉 끝났네. 그러니 행복을 욕심내며 살아. 나도, 엘리아도……. 다들 그러길 바라니까.”

“…….”

“로앙으로 같이 돌아가지. 자네 아내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불길 꺼지지 않은 노인의 무덤을 뒤로하고, 네 사람이 마치 처음부터 함께였던 것처럼 떠나갔다.

못다 해소한 마음을 불길에 넘겨주고, 그러고도 남은 마음은 따듯한 봄볕에 녹아 흩어지길 바라며.

복수가 모두 끝나고,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오로지 행복만 남아 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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