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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작별 인사 (77/79)

외전 4. 작별 인사

“에디, 목욕물에 선물 가득 담아 줘서 고마워. 그리고 실내복도. 네가 입은 것도 잘 어울려.”

엘리아는 갓 목욕을 마쳐 발갛게 열 오른 몸으로 에드문트를 꼭 안아 주었다. 색을 맞춘 실내복이 맞닿아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다른 선물도 보여 줄게. 맞은편 방에 준비해 뒀어.”

“대체 무슨 선물이길래?”

에드문트는 아직 비밀이라며, 목욕물에 데워진 따끈따끈한 손을 맞잡고 건너편 방으로 엘리아를 데려갔다.

“음…… 나 눈 감을까? 눈 감고 있을 테니까 떠도 될 때 알려 줘.”

눈을 감으니 방문이 열리는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에드문트가 허리를 감싸 엘리아를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눈을 감은 탓에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진 탓일까. 방 안에 들어서자, 아까 욕실에서 느낀 것과는 비할 바 없이 짙은 꽃향기가 엘리아를 휘감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꽃을 갖다 두었길래? 의심이 말소리로 터져 나올 차였는데, 다른 감각이 엘리아를 콕콕 찔렀다.

“엘리.”

가까이 다가온 에드문트의 나직한 음성이 아찔한 꽃향기와 뒤엉겨 엘리아를 전율케 했다.

“이제 눈 떠도 돼.”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이게…… 다 뭐야?”

색색의 꽃이었다. 지난번 수천 송이의 꽃을 겪어 본 엘리아조차 말문 막히게 할 정도로 많은 생화가 커다란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꽃이 워낙 가득한 터라, 다른 것들은 뒤늦게야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장식장을 가득 채운 오르골이라든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라든가.

그 앞에 언젠가 보았던 것과 같은 모양의 넓은 쿠션이라든가.

“쿠션은 새로 만들었어. 책장이 있으니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엘리아의 시선을 함께 쫓던 에드문트가 설명을 덧대었다. 그러고는 편하게 구경하라며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그의 몸에 가려져 있던 커다란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세상에. 엘리아는 비슷한 단어만 계속 반복한 끝에 간신히 다른 감상을 꺼냈다.

“에디……. 저 침대, 다리가 여덟 개나 돼. 여덟 개야.”

“넓게 만들려다 보니 지지대가 많이 필요했어.”

언젠가 그가 말했던 대로, 엘리아가 아무리 잠결에 굴러도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침대가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거, 이거 다 선물이야? 나한테 방을 선물로 준 거야?”

엘리아의 목소리에는 기쁨보다도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에 에드문트는 방에 딸린 옷 방은 나중에 이야기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옷 방에 가득 채워 둔 새 옷이라든가, 보석까지 보여 주면 너무 과하다고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니까.

“결혼 전까지 네가 지낼 방을 따로 마련해 주고 싶었어.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로앙에서 쓰던 물건은 그곳에 두고 와. 이 방도, 결혼하면 그대로 남기고 새 방을 준비해 줄게.”

엘리아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 한 번이라도 시선이 머물다 갔던 물건들.

또 에드문트가 엘리아에게 주겠다 약속했던 것들, 그리고 그가 엘리아를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는 모든 아름다움이 방 안에 가득했다.

“에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 안에 웃음이, 눈물이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누가 너더러 다정하지 않다고 말하면, 그럼 한 대 때려 줘. 아니, 나한테 말해. 내가 가서 발을 밟아 버릴게.”

얼굴을 돌리지도 못하고, 저를 위해 준비했다는 커다란 침대를 보며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에드문트가 다가오더니 미리 준비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새하얀 손수건마저 엘리아가 좋아하는 꽃 자수가 가득했다.

“너무, 너무 기뻐. 나는 네가 이 손수건 하나 줘도 마냥 좋았을 텐데. 평생 간직하겠다고 했을 텐데……. 어쩌지? 너무 좋아서 자꾸 눈물 나려고 해. 여기 있는 거 정말 다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다 네 거야.”

“너무 많아서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어. 너무 많아.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너무 많아.”

너무 많다는 소리만 계속 반복하고 먼저 다가가질 못하자, 에드문트가 기꺼이 엘리아를 이끌어 방을 채운 선물을 짚어 주었다.

커다란 침대를 지나 둥근 모양새가 예쁜 협탁은 로앙에서 엘리아가 사용하던 것과 가장 닮은 걸 골랐다고 말해 주었다.

후원이 잘 보이는 창문 옆에 기다란 의자를 둔 것도, 아침에 일어나면 창밖을 보는 걸 좋아하는 엘리아를 위한 에드문트의 배려였다.

엘리아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방을 거닐었고, 바닥을 빼곡히 채운 꽃을 한 바퀴 둘러보기도 했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달리아 꽃.”

엘리아는 수천 송이의 꽃 사이에서 달리아 꽃 한 송이를 꺼내어 향을 맡았다.

“네 눈동자를 닮았어.”

에드문트의 말대로, 동그란 달리아 꽃은 엘리아의 눈동자만큼 아름다웠다.

“책장도 구경할래. 무슨 책을 저렇게 많이 가져다 뒀어?”

한 손에는 꽃을, 다른 한 손에는 에드문트의 손을 잡은 채 엘리아는 책장을 향해 앞서 나갔다. 엘리아가 이전에 스치듯 언급했던 책들이 빠짐없이 꽂혀 있었다.

“누워 볼래?”

쿠션 앞에서는 에드문트가 먼저 누워 보라고 제안했다. 엘리아는 기꺼이 커다란 쿠션에 드러누웠고,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옆에 나란히 누워 새로 칠한 천장화에 얽힌 설화를 알려 주었다.

“그거, 데이지가 나 어릴 때 해 주던 이야기인데.”

“네가 어릴 때 제일 좋아하던 이야기라고 들었어.”

“그럼 에디가 선물 준비하는 거, 나만 쏙 빼놓고 다들 알고 있었던 거야? 두고 봐. 나도 나중에 너만 쏙 빼놓고 선물 준비해서,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엘리아는 자신만만하게 선물을 주겠다 예고했지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의 선물을 보자니 점점 자신감이 떨어져 갔다.

촉감이 좋아서 하나 더 사고 싶다고 했던 남부산 모포, 지인 부부와 대화하던 중 지나가듯 관심 보였던 유리 세공품, 학술원에 다닐 적 그의 선물로 오해했던 보석이 박힌 펜까지.

부지런히 방 안을 살펴도 선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이걸 다 언제 준비한 거야. 힘들었겠다.”

“힘들지 않았어.”

그는 진심으로 엘리아가 기뻐할 생각에 하나도 힘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어느 하나 쉬이 준비한 게 없었다. 한스와 집사, 그리고 로앙의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올해를 넘기고도 다 마련하지 못했을 거였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오르골 상점을 절반 뚝 떼어 온 듯한 커다란 장식장 앞에 다다랐다. 족히 100개는 넘을 오르골은 전부 엘리아가 좋아할 법한 것만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엘리아를 가장 기쁘게 한 건, 장식장 중앙에 있는 푸른 사슴과 흰 토끼 두 마리였다. 주변에는 엘리아가 봉투에 그렸던 그림처럼 주홍색 꽃이 가득했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 내 그림을 그대로 옮겨다 두었네.”

“한스 경에게 조언을 구해서 완성한 거야.”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기댄 채 장식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에드문트가 고심해서 하나씩 고르는 모습을 그려 보며 애틋함을 느꼈고, 또 한스가 옆에서 열심히 참견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웃음 짓기도 했다.

예전 기억을 곱씹기도 했다. 상점에서 그와 처음 닿고 싶다고 느꼈던 순간, 그리고 부서진 오르골을 들고 찾아갔던 날.

매일 태엽을 감으며 그를 그리워했던 시간, 그가 깨어나길 간절히 바라며 태엽을 감았던 열흘…….

그리고,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봄의 어느 날. 새파란 봉투가 너무 차가워 보인다는 핑계를 대며 제 마음을 그려 넣었던 때를.

‘사슴이 외로워 보여서, 그래서 두 마리를 그렸던 건데.’

그림을 그대로 재현해 둔 두 마리의 토끼는, 이제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스물여덟의 엘리아. 그리고 열아홉이 된 엘리아. 새하얀 토끼가 마치 그들 같았다.

어쩌면, 에드문트도 같은 감상을 느끼진 않았을까?

“하나 들어 보고 싶어. 꺼내 봐도 되지?”

엘리아는 고민하다가 이파리 위에 앉은 작은 개구리 오르골을 꺼내었다. 엘리아의 선택에 에드문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개구리이니까, 빗소리를 닮은 곡이 나오려나?”

기대감에 가득 찬 손이 열심히 태엽을 감았다. 더는 감기지 않을 때까지 부지런히 태엽을 감은 오르골을 내려 두자 꽃이 가득한 방 안에, 익숙한 곡조가 퍼져 나갔다.

‘에우리아의 춤곡’이었다.

“아하하.”

엘리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이미 어떤 곡이 흘러나올지 알고 있었던 에드문트가 마주 보며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엘리아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살짝 떼더니, 다시 앞에 펼쳐 보였다.

춤을 청하는 동작이었다.

“그거……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는구나. 춤추자고 했던 거.”

잠들어 있던 그의 옆에서 딱 한 번, 속삭였던 말이었다.

설마 에드문트가 기억해 줄 줄은 몰랐는데.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에디, 나 근데 한 번도 춤춰 본 적이 없어.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해 두는 건데…….”

처음이라는 말에 에드문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처음이야.”

그의 삶에 유일한 사랑을 향해, 에드문트가 고백했다.

두 사람은 춤을 추는 대신 서로에게 기댄 채 내키는 대로 오르골 앞을 걸었다.

사뿐사뿐 이어 가는 발걸음은, 언젠가 그를 기다리며 홀로 박자를 세었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수백 번 들어 익숙한 덕분에 두 사람은 곡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속한 듯 멈추어 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엘리아가 먼저 눈을 감고, 에드문트가 내려와 입을 맞추었다.

오르골은 멈추었지만, 맞닿은 두 사람의 입술은 한참 뒤에야 떨어졌다. 입맞춤을 위해 고개를 한참 숙이고 있던 에드문트가 다시 멀어지는 모습에, 엘리아는 지독한 상실감을 느껴졌다.

“에디.”

그의 옷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목에 팔을 감았다. 안아 달라는 표현에 그가 곧장 엘리아의 허벅지를 받쳐 제 위로 올려 주었다.

에드문트의 새파란 눈에는 아직 입맞춤이 남긴 열기가 남아 있었다. 덕분에 엘리아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아직, 선물 받은 것 중에 확인 안 한 게 남았잖아. 그…… 침대 말이야.”

엘리아는 간신히 말을 끝내고선 그를 꼭 끌어안았다. 부끄러워 숨어 버린 엘리아의 얼굴을 찾아, 에드문트가 입을 맞추었다.

아까보다 좀 더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 결코 옅어질 줄을 몰라 깊어지기만 했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감각에 휘청이다 정신을 차리니, 선물한 침대 위에 누운 채였다.

에드문트가 잠시 몸을 뒤로 물러 숨 쉴 틈을 주었다. 하나 새카만 눈동자는 엘리아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

바닥을 긁는 저음과 함께, 그가 다시 몸을 내려 입을 맞추었다.

다정하게 굴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탐하기 위해서였을 뿐. 귓가를 지나 목덜미까지 내려온 입술에 엘리아가 숨을 삼켰다.

“숨, 쉬어.”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에 엘리아가 느낀 기시감은 착각이 아니리라.

“엘리.”

연이은 요구에 겨우 참았던 숨을 터뜨리자, 뱉은 숨을 그가 전부 차지했다.

전부 집어삼키듯 몰아치던 입맞춤이 얼굴선을 타고 귓가를 찾아갔다.

“성년이 된 걸 축하해.”

나직한 목소리에 더는 달아오를 수 없을 만큼 온몸에 열이 올랐다.

에드문트는 맞닿은 뺨에서 느껴진 열기만으로도 충분히 엘리아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몸을 뒤로 물러 자신의 팔 안에 가둔 연인을 확인했다.

사랑스러웠다. 당장 붉게 달아오른 온몸에 입을 맞추고, 이를 박아 제 흔적을 새겨 넣고 싶었다.

배 속에 고인 열기를 식히기 위해 한숨과 함께 뱉어 내자, 뜨거운 열기를 느낀 엘리아가 제 아래에서 움찔거렸다.

어쩔 줄 몰라 울상이 된 얼굴마저 아름다웠다.

“엘리, 무서워?”

“안 무서워. 정말…… 괜찮아. 괜찮으니까…….”

낯선 행위를 앞두고 긴장한 게 여실히 보이는 데도, 엘리아는 혹여 그가 그만둘까 싶어 고집을 부렸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손을 쥐어 제 심장 위로 올려 주었다. 팔딱거리던 엘리아의 손이 그의 심장 박동을, 열기를 확인했다.

“정말, 괜찮아?”

지금이라도 밀어내면 물러나겠다는, 그 나름의 배려였다. 아마도 오늘 밤 그가 행할 마지막 배려이리라.

맥박 치는 심장 위에 닿았던 손이 그를 밀어내는 대신 힘껏 끌어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아 줘, 에디. 에드문트…….”

만개한 꽃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을 휘감았다.

그저 영원하길 바랄, 밤이 깊어 갔다.

* * *

밤이 어둠을 전부 걷어 간 하늘에 새벽이 찾아왔다.

주인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공작가 저택은 함께 꿈을 꾸는 듯 고요했다.

간간이 잠들지 않는 기사들의 발소리, 잠들지 못한 보좌관들의 종이 넘기는 소리만 사각거렸다.

그러다 작은 소리 하나가 덧대어졌다. 서류를 붙들고 밤을 새운 한스가 문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호기심에 문을 열자, 하필 그 앞을 지나가던 엘리아와 정면에서 마주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게, 몰래 어딜 가다 들킨 모양새였다.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음……. 석실요.”

그는 목이 다 쉰 엘리아의 대답에 눈을 찌푸리더니 복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만약 에드문트가 같이 있었다면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띄었을 테니까.

“에디는 아직 자고 있어서……. 나 혼자 몰래 나왔어요.”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저를 씻기고 옷까지 갈아입혀 주느라 늦게 잠들었을 거라는 변명을 굳이 하진 않았다.

어차피 눈치 빠른 한스는 금방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짐작할 테니까.

<엘리.>

간밤을 떠올리자, 돌연 귓가에 이름을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자신을 향한 격정이 담겨 있던 그의 얼굴 또한 마주한 듯 선연했다. 마치 기다란 밧줄에 얽어 둔 것처럼 하나의 기억이 다음 기억을 끌어와 지난밤을 되짚게 했다.

<싫어?>

<아니, 아니……. 부끄러워. 좀, 조금만 천천히…….>

부끄러워 바르작거릴 때마다 다독이던 입맞춤이라든가. 예상하지 못한 격통에 놀랄 새도 없이 뒤이어 찾아온 낯선 감각, 그리고 나중에는 부끄러움을 잊고 매달리던 제 모습…….

<괜찮아. 예뻐.>

그리고 욕망에 푹 절은 숨소리, 사랑한다는 고백, 말소리가 되지 못해 흩어진 제 신음까지.

그게 도통 잊히질 않아 절로 얼굴이 홧홧해졌다. 천만다행으로 한스는 엘리아가 혼자 얼굴 벌겋게 물들이는 걸 보면서도 못 본 척해 주었다.

“마침 저도 잠깐 쉬려던 차였으니 괜찮으시면 동행하겠습니다.”

혼자 석실에 간다는 게 마음에 걸린 한스가 겉옷을 챙겨 나왔다. 엘리아는 선선히 동행을 허락하곤 그와 나란히 석실로 향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핑계로는 부족할, 평소보다 엉성한 걸음걸이. 그리고 살짝 부은 눈두덩이와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에 남은 붉은 흔적…….

두 사람의 밤을 짐작하게 할 흔적들 대신, 한스는 다른 곳에 시선을 팔았다.

엘리아는 품에 무언가 꼭 안고 있었는데, 크기로 보아 오르골을 천에 감싸 챙겨 온 것 같았다.

“공작님께서 준비하신 선물 드디어 확인하셨군요.”

“음. 봤어요. 고마워요, 한스. 같이 고생했다고 들었어요.”

“저야 돈 쓰는 일에 끼워 주시는 건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엘리아에게 비밀로 하느라 입이 근지러웠다며 그간 선물을 준비하며 있었던 일들을 고백했다. 언제나처럼 그의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쉼 없이 떠들 것처럼 굴던 한스는 석실 문이 열리자 제 목소리를 전부 거두어 갔다. 덕분에 불을 밝혀 두지 않은 석실은 무척 고요했다.

“한스, 이제 올라가 봐도 돼요.”

“아닙니다. 올라가 봐야 할 건 일뿐인데요.”

어깨를 으쓱하며 함께 있겠다는 말에 엘리아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실은 혼자 들어가면 외로울 것 같았거든요.”

엘리아는 두툼한 가운을 추스른 뒤 석실 가장 안쪽에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그사이 한스는 아가씨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헤아려 보고자 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화해한 장소를 찾아 추억을 곱씹고 싶으셨으려나.

아니면…….

잠시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관을 안치해 두는 커다란 공실에 도착했다.

늘 텅 비어 있던 중앙 받침대 위에, 잘 마른 주홍색 꽃이 놓여 있었다. 영문 모를 물건에 한스가 경계심을 보이자, 엘리아가 그를 만류하며 설명해 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 꽃 내가 가져다 둔 거니까.”

“아가씨께서요?”

“전에 생일 때 공작가에 들렀잖아요. 그때 두고 간 거예요.”

엘리아는 짧게 긍정해 준 뒤 받침대 위에 품에 안고 온 천 뭉치를 풀어 내렸다.

푸른 천에 둘둘 감아 챙겨 온 건 색색의 생화, 그리고 새하얀 토끼가 조각된 오르골이었다.

태엽을 다섯 바퀴 감아 내려놓자, 이름 모를 곡조에 맞추어 새하얀 토끼가 둥글게 움직였다.

아마 이 석실에 음악 소리가 찾아온 건 수백 년 만에 처음이리라.

두 사람은 잠시, 석실을 극장 삼아 넓게 울리는 음악을 감상했다.

“바보 같죠?”

“어떤 점이 말입니까.”

“내가 여길 그 사람의 무덤처럼 여기는 거…… 그리고 에디한테 받은 걸 나누어 주고, 내가 그렸던 토끼 두 마리를 보고 또 다른 나를 떠올렸다는 거 말이에요.”

엘리아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공작가에 들를 때마다 꼭 이 석실에 들르곤 했다.

스물여덟의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과거에만 존재한다고 여겼으면서. 결코 저와 같은 사람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음에도.

<에디, 나 잠깐 석실에 내려갔다 와도 될까? 같이 가도 좋고.>

엘리아는 종종 홀로 기억에만 존재하는 여자를 보듬고 싶어 했다.

얼마 전 생일에도,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받은 꽃다발에서 탐스럽게 핀 몇 송이를 골라 이곳을 찾았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은 에드문트도 함께였다. 굳이 석실을 찾아와 꽃을 두는 저를 지켜보던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네가 준 꽃이 너무 예뻐서, 음…… 그래서 보여 주고 싶었어.>

하지만 저도 구태여 자꾸 마음 쓰는 이유가 왜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길이 없어 변명만 해야 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자꾸 생각이 나요.”

당혹스러웠다.

질투했으면서. 미워했으면서.

“그 사람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너무 복잡해요.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느냐고 소리쳐 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기도 하고, 혼자 외로웠을 걸 생각하면 너무 안타까워서 끌어안고 위로해 주고 싶기도 하고.”

“자꾸 마음에 걸리는 모양입니다.”

“맞아요. 에디한테는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서. 나만 사랑해 달라고 졸랐으면서 정작 내가 그러질 못하네요.”

한스는 엘리아의 고민을 찬찬히 곱씹다가 제 나름대로 이해한 답을 내놓았다.

“자꾸 생각난다고 하시는 거 말입니다. 감명 깊게 본 책 속 주인공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진 않으신가요?”

오르골 앞, 차가운 석조물을 매만지던 엘리아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잠시 멈춘 엘리아의 손을 흘끗 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저는 비슷한 경험이 많아서 말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불현듯 인상 깊었던 주인공을 떠올리고, 마치 실재하는 친구처럼 여기어 혼자 그의 삶을 곱씹게 되더군요. 혹은 어린 시절의 저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요?”

“예, 아가씨는 그런 적 없으십니까? 과거 어느 날이 떠올리다가 ‘그때 대체 왜 그랬던 거야?’라고 구박하고, 스스로를 타인 취급하게 되는 거 말입니다.”

“…….”

엘리아도 어렵지 않게 제 과거를 떠올리며 자책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아니, 그건 자책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자신에 대한 연민에 가까웠다.

‘너무 스스로를 원망하지 말 걸 그랬지.’,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만약 여덟 살의 나를 만난다면 그럼 어린 내게 알려 주었을 텐데.’…….

돌이켜 보니 에드문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스물여덟의 엘리아도 똑같이 대했더라.

마치 과거의 자신을 들여다보듯…….

‘평생을 남이라 여기고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였을까. 남이라 여기며 외면하지 못하게 된 건.

남자에게 네 죽은 여자는 내가 아니라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제가 정작 여자를 놓지 못하다니.

“……에드문트한테 말하면 뭐라고 생각할까요? 내가 그 사람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 속상해하겠죠? 겨우 잊어 가고 있는데.”

“글쎄요. 공작님의 반응이 중요합니까?”

정신을 반짝 들게 하는 물음이었다.

에드문트가 두 엘리아를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와 엘리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다른 문제일까? 그러기엔 너무 에드문트와 가까운 일이 아닌가.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자 한스가 짐을 덜어 주었다.

“아가씨 마음 가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정답은 없을 테니까요.”

“나는 정답을 원하는데. 그마저 없으면 뭐가 남을까요?”

“사랑이 남아 있잖습니까.”

한스는 참 당연한 걸 물으신다는 태도로 대꾸했다. 슬픈 연극을 보고 마차에 오르던 엘리아에게 능청스럽게 답했을 때처럼.

“같은 사람이냐 다른 사람이냐의 문제엔 정답은 없지만…… 아가씨였으면서 또 다른 사람이기도 한 이가 공작님께 사랑을 남겼고, 그걸 지금의 아가씨가 이어받으셨다는 건 아가씨가 직접 확인하셨잖습니까.”

그의 말에 엘리아가 깨달았다.

‘죄책감이었구나. 내가 그가 남긴 사랑을 이어받았으니까. 그래서 자꾸 죽은 이를 떠올리곤 여길 찾아온 거였어.’

외로웠을 여자에게 오직 유일했을, 에드문트의 사랑마저 제가 약탈했다는 죄책감을 저도 모르게 키워 온 모양이었다.

하나 사랑을 이어받았다는 한스의 표현이 뒤늦게 깨달은 죄책감을 끌어안아 보듬어 주었다.

그래서…… 엘리아는 괜찮았다.

“고마워요, 한스. 정말 고마워요.”

석실에 울리는 오르골 소리에 맞추어, 웃을 수 있었다.

* * *

한스는 좀 더 머물겠다는 엘리아의 말에 먼저 자리를 떴다.

<공작님께서 깨어나셨으면 이곳에 계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편지 남겨 두고 왔거든요.>

에드문트는 아마 진작 잠에서 깨어났을 테지만, 엘리아가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남겨 둔 편지를 확인하고 방에 머물러 있을 터였다.

그가 선물해 준 펜으로 쓴 첫 편지에, 엘리아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을 담았다.

많이 사랑한다고, 더 많이 사랑할 것임을 맹세하는 흔한 말을 적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그 짧은 편지를 아주 소중하게 품어 주리라. 함께 보낸 밤을 되새기고, 앞으로 함께할 수많은 시간을 꿈꾸며 엘리아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엘리아는 그에게 돌아가기 위해, 석실을 떠날 준비를 했다. 마른 꽃을 걷어 낸 자리에 새로 가져온 꽃, 그리고 오르골을 가지런히 얹어 놓았다.

“……안녕. 엘리아.”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저에게 들리는 거로 충분한 인사를 건넸다.

“있잖아. 이건 에디한테 비밀인데…… 꿈에서 널 만난 적이 있어.”

꿈속에서 엘리아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또 다른 저와 마주 볼 뿐이었다.

제게 에드문트를 빼앗아 갔다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스물여덟의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보고 미소만 지었다.

그 시선이 너무도 다정한 탓에, 열아홉이 된 엘리아 역시 밉다는 말 한마디 하질 못했다.

다른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바라만 보다 꿈에서 깨곤 했다.

엘리아는 이제야 저를 바라보던 여자에게 해 줄 말을 찾아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행복한 모습이 기쁘다는 듯 바라보던 또 다른 자신에게, 엘리아는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를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외롭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매일 그를 사랑해 주려고 해. 너는 나이기도 하니까, 내가 더는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는 게 네게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라.”

외로워 저물어 버린 사람에게, 사랑하지 못한 이에게 엘리아가 고백했다. 아프지 않기를 기원했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까지. 네게 이어받은 사랑을 소중히 여길게. 많이…… 많이 행복해질 거야. 행복하게 해 줄 거고. 후회 없이 살게. 후회 없이 사랑할게.”

벅차오른 감정이 엘리아를 힘겹게 했다. 열아홉의 여자에겐 아직 모두 어렵기만 했다. 서른둘의 남자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할 테니, 언젠가 괴롭지 않은 기억이 되리라.

“잘 있어. 아주 오래 뒤에 다시 올게.”

새하얀 토끼에게 입을 맞추어 주고, 뒤돌아선 엘리아가 한 걸음씩 멀어졌다.

죄책감을, 죽음을 두고 떠나갔다.

남겨진 오르골이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 * *

안녕, 엘리.

부디 못다 했던 사랑, 오래도록 활짝 피워 주기를.

꿈같은 밤을 보내고 만난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려 주기를. 그리고 사랑한다고 입 맞추어 주기를.

그리하여 두 사람 함께 행복하길.

사랑과 함께 늘,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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