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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축하 (76/79)

외전 3. 축하

시간. 누군가는 느리게 가길 원하고, 또 누군가는 차라리 멈추길 바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해 기울어지는 대신, 그저 제 속도를 지켜 한 걸음씩 걸어 나갈 뿐이었다.

하여 가을에 닿은 초목이 색을 바꿔 계절을 실감케 했다.

엘리아는 기꺼이 다가온 가을을 만끽했다.

<두 분께서 명하신 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페소 남작 역시 오늘 수도에 도착하여 바로 황후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남부에서 돌아온 한스가 전한 기쁜 소식에, 엘리아는 날이 밝자마자 황궁으로 향했다.

한스의 말대로 전날 페소 남작이 황궁에 들이닥쳐 제 아들을 살려 내라고 울부짖은지라, 황후의 얼굴에는 슬픔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엘리아가 그 꼴을 보고 기껍게 웃었다.

“엄밀히 말하면 네가 올리버 페소의 사지를 찢어 죽인 건 아니지만, 부모의 심경이란 그런 거지.”

부모의 원수에게 예를 갖출 생각 없었으니, 엘리아는 황후에게 공대하지 않고 적대적인 태도를 이어 갔다.

“참 불쌍하지 않아? 올리버 페소 말이야. 보답받지도 못할 사랑에 매달린 대가가 죽음이라니.”

황후는 엘리아의 불충한 태도를 지적할 여유가 없었다.

돌려받지도 못할 사랑에 매달렸다는 조롱이 가리키는 대상은 제 조카인 닐스가 명백했으므로.

<제발, 클로디 님. 단 하루만, 하루만 주십시오. 다음 주 화요일에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황후는 마지막으로 엘리아 로앙을 만나게 해 달라 사정하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남자를 떠올렸다.

<클로디 님, 저는 괜찮습니다. 약혼이 파기되어도 저는 당신의 오랜 친우로 남을 겁니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사랑을 떠올렸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따스함이라, 갑자기 찾아온 불길에 견주니 미약했다. 그래서 등 돌렸다.

그럼 사그라들 줄 알았다. 홀로 이토록 오래 빛날 줄은 모르고.

마음만 남기고 떠나기가 못내 아쉽기라도 하듯 생까지 저버릴 줄 모르고.

<내 자식이, 클로디 당신만 보고 미련한 삶 살았던 아이가 참혹하게 죽어 돌아왔는데, 당신은 이리 살아 있지. 보호받고, 사랑받고……. 그러나 이제 끝일 거다. 내 죽은 자식의 한이 업보로 네게 돌아올 거야.>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던 올리버 페소의 아비에게 복수를 약속하는 건 불가능했다. 후작이 누굴 살해했다 한들 자신에겐 그를 불러들여 죄를 물을 힘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후작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 설사 로앙의 어린 여식이 올리버를 살해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은 가족들을 보호하는 것뿐이니까.

그리하여 황후는 수십의 황궁 기사를 남부로 보내 제 가족을 지키게 했다.

“불쌍한 페소 남작. 황궁 밖으로 끌려 나가자마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던데. 그 몸을 하고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영지 구석에 지어 둔 별장을 찾아갔을지도.”

자식 잃은 부모로부터.

“그 불쌍한 노인네를 내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 기분이 어때?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마침 오늘이 내 열아홉 번째 생일이거든. 물론 부모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더 좋았겠지. 그랬다면 황궁이 아니라, 가장 화려한 연회장에서 부모님께 축하받고 있었을 테니까.”

부모 잃은 자식으로부터.

“……로앙의 어린 것아, 네가 이리 나를 겁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수도에 떠도는 의혹들에는 근거가 없고, 여전히 우리는 황좌에서 건재할 거란다.”

황후는 목을 쥐어짜 항변했지만, 열아홉의 어린 귀족이 두려워할 리 없었다.

엘리아는 황후를 향해 반걸음 다가갔다. 양손이 비어 있었으나 황후를 보호하는 기사들은 움찔거리며 엘리아를 경계했다.

여자가 라스페 공작의 약혼자이자 로앙 백작의 누이였기에.

그리하여 날을 갈아 둔 검보다 위험한, 권력이 여자의 양손에 쥐어져 있었으므로.

“클로디 튀링겐. 네가 스스로를 황궁에 처박아 둔 채 진실을 외면한들, 1황자를 살해하고 내 부모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던 일이 사라지진 않아.”

다시 반걸음, 또 반걸음 가까워지던 엘리아가 아슬아슬한 거리를 남기고 멈추었다.

제 분노가 선명하게 보일 만큼의 거리이면 충분했다.

“비가 올 때마다 내 부모님이 떠나던 순간을 떠올려. 너희들이 고작 권력을 얻겠다고 살해한 부부의 마지막 모습 말이야.”

응접실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엘리아의 손으로 향했다. 새하얀 손에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분노가 맺혀 있었다.

“가장 소중한 핏줄을 두고 죽어 갔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너는 평생 이해하지 못하겠지.”

부모인 적이 없었으니까. 엘리아가 조롱과 함께 싸늘하게 바라보자, 황후는 한 번도 부풀지 못한 자신의 배를 손 아래에 감추었다.

가져 본 적도 없는 자식을 감싸는 듯한 모습이 엘리아의 화를 돋웠다.

죽는 날까지 자신들만 소중할 뿐 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닫지 못할 테니, 용서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었다.

“너희에게 자식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우리가 알려 주었을 거야. 아이를 남겨 두고 죽어야 하는 부모의 심경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이야.”

엘리아는 진심 어린 사과와 후회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자식을 낳아서, 아이를 두고 죽어야 했던 부모의 고통을 똑같이 겪길 원했다.

저들에게 자식 낳게 할 방법은 없었으나, 대신 그의 가짜 자식인 닐스 튀링겐을 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럼 황후는 정신을 놓아 버리리라. 에드문트가 이전 생에서 복수했을 때처럼.

그러나 엘리아는 다른 방식으로 복수하고자 했다.

서점 주인 닐스를 동정한 건 아니었다. 제가 2년이나 시간을 끌면서도 끝내 튀링겐을 직접 해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차마 하지 못한 일을 에디 네게 떠넘기고 싶지 않아.>

하여 엘리아는 황후와 황제에게 가짜 자식을 빼앗는 대신, 그들이 진짜 자식을 상상토록 했다.

“나는 말이야, 너희들이 자식을 갖지 못하는 게 전부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겼어. 죽은 올리버 페소의 소식을 듣기 전까지 말이야.”

“그게 무슨……?”

“올리버 페소가 후작의 뒤를 캐 알아내려던 게 뭐였는지, 아직 듣지 못했나 봐?”

엘리아는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고의적인 침묵이었다.

황후는 소리가 멈춘 공간에서 제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단서에 매달렸다.

마주 본 어린 귀족의 표정,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에 담긴…… 미약한 동정.

동정심이라니. 황후는 그게 엘리아가 꾸며 낸 감정인 줄은 모르고 혼란스러워했다.

제가 부모를 살해한 원수라 확신하면서도 어찌 저를 동정한단 말인가. 대체 왜…….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왜 너만 아이를 갖지 못하는지 말이야. 황제의 형제들은 전부 자식을 봤는데. 같은 병을 앓는 네 병약한 동생조차 닐스 튀링겐을 낳아 길렀는데 말이지.”

아이. 작고 연약한 생명을 연상하게 하는 단어가 황후에게 가지는 의미는 너무나도 컸다. 그들이 후계를 얻지 못한 탓에 크라우제 후작에게 매달려야만 했으니까.

하여 황후는 황제가 크라우제 후작에게 휘둘리는 걸 볼 때마다 한탄했다. 어째서 저는 자식을 보지 못하는 걸까.

“해 줄 이야기가 또 있는데.”

누가 우리에게 자식을 사랑할 기쁨을 앗아 갔는가.

“당신도 들었지? 로앙과 라스페가 크라우제 후작에게 학대받던 손자 부부를 구출했다는 소식 말이야.”

엘리아와 에드문트는 후작의 저택에 갇혀 비참하게 살던 울리히 크라우제와 그의 아내를 빼돌렸다. 그들은 은인을 위해 혈육을 배신하는 길을 선택했다.

곧 울리히 부부가 수도에 올라와 후작이 자신들을 학대 감금했다고 고발해 살인 의혹에 휩싸인 후작을 더욱 궁지에 몰 예정이었다.

하나 당장 엘리아가 황후에게 울리히 크라우제를 들먹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 부부도 아이가 없더라고.”

노력했는데, 배가 부른 적조차 없었다고 덧붙여 주자 황후가 눈을 홉떴다.

“이상하지. 왜 후작의 눈 밖에 난 절름발이 손자만 아이가 없을까? 마치 후작이 선택한 이들만 자식을 갖는 것 같단 말이야. 안 그래?”

황후의 얼굴이 서서히 부서져 갔다. 벌써 정신이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열심히 고민해 봐. 내가 보기엔 답은 이미 나와 있지만……. 아, 잊고 갈 뻔했네.”

엘리아가 품에서 화려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엘리아의 성년식 초대장이었다.

“너희들이 살해한 내 부모님 대신, 벨레노아 백작님께서 내 성년식을 열어 주시기로 하셨거든.”

엘리아는 인사 대신 화려한 초대장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황제가 응접실에 들이닥친 건, 엘리아가 떠나고 고작 몇 분이 흐른 뒤였다.

“당장 북부에서 들어온 선물을 모조리 꺼내! 아니, 황후의 짐을 전부 버려!”

평생 황후에게 자식을, 안전한 삶을 보장해 주고 싶어 애썼던 남자가 핏발 선 눈으로 괴성을 질렀다. 하나 여자는 이미 무너져 버린 뒤였다.

“클로디!”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 에드문트가 황제에게 보여 주었던 편지였다.

그 비루한 것이 무너진 황후의 흉내를 내었다. 황후의 시종장이 간신히 떨어진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엘리아 님, 그리고 라스페 공작님. 아내와 함께 머물 거처를 마련해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 인사 올립니다.

두 분의 보호 덕에 아내가 심적으로 많이 안정된 모습을 보여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더불어 아내와 함께 의원에게 진료받게 해 주신 점 또한 감사 인사 전합니다. 비록 아내와 저는 불임임을 재확인했지만, 아이 없이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나누며 살고자 합니다.

의원에 따르면 불임의 원인은 장기간 독에 노출된 탓이라고 합니다. 아마 제 조부가 손을 쓴 것이겠지요.

그의 조언에 따라 독이 있었으리라 의심되는 식자재와 물품 목록을 첨부합니다. 모쪼록 은인이신 두 분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정결한 필체로 적힌 편지글의 끄트머리에는 울리히 크라우제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시종장은 황제를, 그리고 그의 품 안에서 오열하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전부…… 크라우제가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서…… 우리 아이를…….”

황후의 입에서 비탄이 흘러나왔다. 황제의 눈에서 슬픔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죽게 한 이들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크라우제 후작과 한편이 되길 선택했던, 과거의 자신들을 향한 지독한 후회와 절망만 있을 뿐이었다.

그저 울음만 요란할 뿐이었다.

* * *

황궁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응접실에서는 짐승 울음을 닮은 황후의 울음이 새어 나왔고, 이어 황제의 노성이 울음소리에 대답하듯 복도를 가득 메웠다.

엘리아는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황궁을 빠져나갔다. 먼저 나와 있던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맞이했다.

“황제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어. 안에 난장판이지 뭐야.”

“아…….”

뒷짐 지고 있던 에드문트가 갑자기 외마디 말로 당혹감을 표현했다.

“울리히 크라우제가 보내온 편지를 황제에게 보여 주었는데 돌려받지 못했어.”

“괜찮아. 필요한 일 생기면 새로 써서 보내라고 시키면 되는걸. 근데 무슨 일 있었어?”

뭔가 잊어버린다는 건 평소 에드문트답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다며 에드문트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엘리아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그를 바쁘게 살폈다.

“손은 왜 그러고 있어? 혹시 정말 무슨 일 있던 건……. 만약 황제 때문에 다친 거면 당장 돌아가서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엘리아의 분개에 에드문트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 옆에 서 있던 공작가 기사들은 심지어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보이기까지 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어 추궁하려던 때였다.

“엘리, 성년 축하해.”

에드문트가 축하 인사를 건네며 뒤에 숨겨 두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언젠가 엘리아가 생일 선물로 받고 싶다고 했던, 가을이 가득 핀 꽃다발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걸 언제 준비한 거야? 계속 같이 황궁에 있었잖아.”

“아침에 마차 아래에 보관해 두었어. 황궁에서 나온 다음에 주려고.”

엘리아는 오래전 에드문트가 제게 보여 주려 했던 마차 바닥 비밀 공간을 떠올리곤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기사들이 아침부터 이상한 표정 지으면서 저를 힐끔거린다 싶었더니. 다들 두 사람이 꽃을 주고받을 걸 상상하느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장소가 변변치 않아서 미안해.”

두 사람 앞에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으나 에드문트는 꽃을 건네주기 전 자리를 옮기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들의 뒤에 있는 황궁 때문이었다.

“전혀 미안할 것 없어. 네게 축하받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인걸.”

엘리아는 마차에 오르기 전 햇빛 아래에서 꽃 하나하나를 헤아려 보았다. 달리아. 메리골드. 헬레니움…… 전부 제가 좋아하는 꽃뿐이었다.

“공작님께서 아침에 직접 꺾어 만드신 꽃다발입니다.”

“정말? 이걸 에디가 직접 만들었다고? 잘하는 것도 많으면서 꽃다발까지 이렇게 잘 만들면 어떻게 해.”

옆에 있던 공작가의 기사가 참견한 덕분에, 사랑에 취해 발갛게 열 오른 얼굴이 꽃과 함께 어우러졌다.

“정말 행복해. 내가 꿈꾸었던 그대로야.”

환히 웃는 엘리아에게서 퍼져 나온 행복이 에드문트까지 미소 짓게 했다. 실은 오늘 아침 엘리아를 위해 꽃을 모을 때부터 감정이 부풀어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지, 기쁜 날을 맞이해 축하받아야 할 이는 자신이 아닌데. 제 연인이 가장 행복해야 하는 날인데.

어째서 제가 이리 행복한 건지. 만개한 꽃을 품은 연인을 보며 그는 결국 더 인내하기를 포기했다.

“엘리, 입 맞추고 싶어.”

남자가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 애정을 갈구하자, 엘리아는 기꺼이 눈을 감았다.

입술을 내리자, 몇 번을 반복해도 황홀한 애정 표현에 심장이 뛰었다. 품에 안긴 꽃다발이 마음이 두근거릴 때마다 함께 흔들려 짙은 향을 내었다.

“사랑해.”

포개졌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아쉬움을 달래는 고백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이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넘치는 애정이 엘리아를, 그리고 에드문트를 따듯하게 감쌌다.

열아홉이 된 엘리아에게. 그리고 에드문트에게도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날이었다.

* * *

로앙과 라스페의 계략으로, 황제와 크라우제 후작의 반목은 더욱 심화되었다. 3황자를 차기 황제로 지목하고 합심해도 모자랄 상황이거늘, 두 세력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하여 후작과 황제는, 갈라진 채 각자 추락했다.

자식을 잃은 페소 남작은 튀링겐 자작가와 절연하였고, 그들의 수완에 기대어 살아왔던 튀링겐은 가주까지 병사한 탓에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하나 후작에게 등 돌린 대가로 아군을 잃은 황제와 황후는 자신들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후작도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황제의 협력 없이 3황자를 차기 황제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고, 남은 수단은 반역뿐이었지만 한때 넘치던 부와 권력은 이제 과거가 되고 말았다.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줄 알았는데. 우리 대에서 크라우제 후작가가 몰락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크라우제 후작의 간계로 황제 부부가 불임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여파가 후작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황제와 황후가 북부산 과일을 먹고 불임이 된 거라며?”

“우리 영지에도 벌써 소문이 다 퍼져서, 북부산 농작물이라고 하면 가축 먹이로도 안 쓴다던데. 정말 북부산 작물을 먹으면 불임이 된다는 게 사실일까?”

“중앙 학술원에서 북부 귀족들이 유독 불임이 많다는 통계까지 나왔잖은가.”

소문을 실어 나르는 입들이 알아서 그럴듯한 추측을 얹었고, 기정사실이 된 음모론이 끝 모르고 넓게 퍼져 나갔다.

수확 철이 다가올 때쯤 제국의 누구도 북부의 작물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독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아 일부 영지에선 반입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한때 크라우제 후작을 비옥하게 한 대농장이 차례대로 문을 닫았다. 가을을 맞아 잘 익은 작물은 어디에도 팔지 못해 그대로 썩혀야 했다. 북부 전역에 지독한 썩은 내가 가득했다.

생계가 곤궁해진 북부 자유민들은 다른 영지의 거주권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쳤고, 마침 인력난에 시달리던 동부가 그들 다수를 받아 주었다.

대규모 이주에 가장 크게 웃은 건 당연히 로앙 백작가였다.

“엘리아 님 덕분에 저희는 요즘 죽을 맛입니다.”

“내 덕분이라는 거야, 나 때문이라는 거야?”

“감사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한 명이 아쉬워 어떻게 광산을 운영하나 걱정이었는데, 갑자기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난리도 아닙니다.”

“그럼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난 그때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다 같이 응접실에 모여 앉아서, 기껏 몇백 골드 벌겠다고 아등바등하던 시절 말이야.”

죽어도 싫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상단주들의 모습에, 엘리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당분간 운이 따라 줄 모양이니 기회가 왔을 때 욕심껏 벌어 두자고.”

엘리아는 새침 떼며 말했지만, 이제 돈을 벌기 위해 현실에 아등바등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에드문트가 향후 10년간의 작황과 날씨를 모두 알고 있으니까.

미래의 날씨를 아는 건 오직 신의 영역이었으나, 에드문트에게는 그저 떠나보낸 기억 일부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오직 엘리아 하나만이 중요했으므로.

“세공은 잘되고 있어? 공연 보러 가기 전에 에드문트에게 주고 싶은데.”

“아무렴요. 늦지 않게 선물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엘리아는 레만 자작의 목숨을 보전해 주는 대가로 그가 가진 광산 절반을 받아 냈고, 운영은 로앙 백작가와 지금까지 함께해 준 상단들에 위탁했다.

아낌없는 투자금 덕에 광산에서 캐낸 가장 값비싼 보석은 당연히 로앙가의 차지였다.

“푸른색보다는 못하지만, 이제 날이 추워지니까 예복 위에 달면 어울릴 거야.”

엘리아는 보석값을 상회하는 세공비를 지출하여 완성한 장신구를 약혼자에게 선물했다. 에드문트가 그 값진 선물을 예복에 장식하여 극장을 찾았으니, 잠시 주춤했던 자수정 유행이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이 관람한 연극의 극작가 트루아 파앵도 엘리아에게 새 연극을 위한 투자금이라며 아름다운 자수정 반지를 선물 받았다.

이후 극작가가 연인인 주연 배우에게 청혼할 때 그 반지를 선물했고, 약혼한 자들 사이에서 자수정은 인기 있는 선물로 공고히 자리매김했다.

“레만 자작이 통곡할 일이군요. 자수정 유행을 다시 불러일으키겠다고 용써 댔는데 말입니다.”

“어휴, 좋은 날 왜 그런 재수 없는 이야기를 꺼낸답니까.”

누군가 자수정 이야기에 레만 자작을 떠올렸지만, 몰락한 귀족에 관한 관심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레만 자작은, 자신이 로앙 백작가의 비호를 받아 재기할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결국 엘리아의 의도대로 죄의 대가를 치렀다.

그를 몰락하게 한 가장 결정적이었던 일을 꼽자면, 평생을 비인간적인 노역에 시달렸던 광부들이 탈출해 레만 자작가를 습격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수백 명의 광부가 어떻게 귀족가 저택으로 몰려갈 수 있었는지, 또 그들이 휘두른 무기는 어디서 구한 건지……. 궁금해하는 건 일방적으로 구타당해 죽을 뻔한 레만 자작뿐이었다.

그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영지 깊숙한 곳에 피신하였으니, 다시는 수도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모두가 알면서도 침묵했다.

그가 로앙과 라스페를 배신한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지어 마땅한 보복을 받은 것임을.

* * *

“엘리아 님, 성년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가을의 끝자락, 벨레노아 백작이 인수한 후 재개장한 트롱프 뢰이유 극장.

그곳에서 엘리아의 성년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제국에서 이제 엘리아 로앙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여자는 로앙 백작의 하나뿐인 누이였고, 머지않아 라스페 공작 부인의 자리에 오를 예정이었다.

곧 차기 황제로 선포될 벨레노아 백작 역시 엘리아를 제 딸처럼 아낀다는 증언이 파다했다.

하여 단 한 사람의 성년을 축하하는 자리에 제국의 고위 귀족들은 물론이요, 명사들까지 대거 참석하여 진풍경을 연출했다.

“내 아버지께서 가장 아끼던 극장에서, 내 가장 아끼는 가신이자 곧 가족이 될 엘리아 로앙 양의 성년식을 열게 되어 무척 기쁜 바이니. 모두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바라네.”

벨레노아 백작의 축사에 이어, 라스페 공작이 제 약혼자의 발치에 무릎 꿇어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이어 수많은 귀족이 앞다투어 선물을 바쳤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기 위해 준비했을 값비싼 선물이 연회장 한구석에 가득 쌓여 갔다.

“엘리아 님, 성년을 축하드립니다.”

그들 중에는 엘리아의 스승이었던 정치학자 테레사 경도 있었다.

“제가 준비한 선물은 비록 부족한 재산 털어 마련한 건 아니지만, 오늘 엘리아 님께서 받을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지리라 확신합니다.”

학자가 자신 있게 건넨 작은 상자에는 고운 천으로 감싼 편지 두 통이 있었다.

바로 확인해 보시라는 학자의 채근에 엘리아가 둘 중 낡은 것을 먼저 꺼내 겉면을 확인했다.

간신히, 봉투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하나 얼마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건…….”

“학술원의 비어 있던 집무실에서 찾아냈습니다. 다행히 편지의 주인인 케이트 경과 연락이 닿아, 그에게도 따로 편지를 받아 함께 동봉하였습니다.”

엘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열었다. 그리운 사람의 필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케이트 경. 나와 우리 가족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들 외젠이 외로움을 많이 타는지라 학술원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학술원 생활에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전부 아이의 재능을 알아주신 케이트 경 덕분입니다. 깊은 은혜 잊지 않고 꼭 보답하겠습니다.

외젠에게 들으셨겠지만, 아이는 작위를 물려받게 하는 대신 자유롭게 살게 할 생각입니다. 대신 둘째인 엘리아에게 로앙을 물려줄 생각입니다.

딸아이는 아직 어리지만, 가문을 이어받는 일에 벌써 열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두 아이가 매사 부모에게 기쁨만 안겨 주어, 아비로서 무얼 더 해 주어야 할까 늘 고민케 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참으로 죄 많은 아비입니다. 1황자 전하의 억울한 죽음은 아직도 밝히지 못했고,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될 간악한 자가 감히 황위에 오르는 모습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때의 동지들이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내와 저는 도저히 세상을 이리 어지러운 채로 둘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남은 이들이나마 함께 노력한다면, 진실이 묻혀 있던 자리에 다시 싹이 움터 주겠지요. 튼튼한 나무로 키워 우리의 아이들이 기댈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내 근래 소원이 오직 그뿐입니다.>

엘리아는 두 장에 걸친 편지를 읽은 뒤에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심경이 어떨지 알았기에, 눈치껏 학자가 말을 이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케이트 경은, 선대 로앙 백작님의 학술원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상자에 함께 들어 있던 편지에는, 그가 로앙 부부가 사망한 뒤 후작 일파에게 목숨을 위협받아 제국 밖으로 피신해야만 했다는 사정이 적혀 있었다.

엘리아는 외젠과 데이지를 불러 편지를 읽게 했다. 감격에 젖은 세 사람을 보며 학자는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전례가 없지만 원하신다면 엘리아 님께서 백작위를 넘겨받는 데에 무리가 없을 겁니다. 선친께서 편지 아래에 서명을 남기신 터라, 유언과 같은 효력을 이룰 테니까요.”

“고맙네, 정말 고마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엘리아 대신 외젠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어 에드문트가 무슨 일이냐며 다가와 묻자, 엘리아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다녀오세요. 벨레노아 백작님께 사정 전해 드리겠습니다.”

도통 눈물 그치질 못하는 엘리아가 에드문트와 휴게실로 향했다.

텅 빈 휴게실에서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제게 기대앉게 한 후, 손에 들려 있던 편지를 받아 읽어 내려갔다.

사랑한다는 말도, 무거운 단어도 쓰이지 않은 평범한 편지였다. 그러나 엘리아는 마치 부모가 돌아온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에드문트가 조용히 그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울지 말라는 말은, 그다지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슬퍼 보이지마는 마냥 슬프기만 한 건 아닐 연인에게, 무어라 말해야 다시 웃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은 깊어지는데 뾰족한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공작님, 아가씨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혹여 실수하시더라도 아가씨께선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공작님이 보여 주시는 노력은 언제나 아가씨께 큰 위안이 될 거랍니다.>

에드문트는 이전에 데이지에게 받은 조언을 떠올렸다.

그래,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틀리더라도 엘리아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노력해야만 했다.

한참 고민하던 에드문트가 엘리아에게 속삭였다.

“엘리. 많이 그리워서 눈물이 나는 거라면, 곁에 있을 테니 괜찮아질 때까지 울도록 해.”

곁에 있을 테니, 마음껏 제 품에서 슬퍼하라는 위로에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 너무 많이 보고 싶어. 부모님이 너무 그리워.”

비가 계속 내렸다. 엘리아와 짝 맞춰 입은 에드문트의 예복에 금방 눈물이 번져 나갔다.

“오늘 네 모습을 봤으면 자랑스러워했을 거야.”

에드문트는 자신이 성년이 되었을 적 누군가 건넨 말을 빌려 왔다. 다행히 적절했는지 엘리아가 조금 울음이 잦아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위를 물려받아. 계속 원하던 거였잖아.”

근래 엘리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외젠과 데이지의 문제였다.

두 사람은 얼마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신분 차를 극복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데이지에게 적당한 작위를 주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랬다간 아무리 로앙이 건재해도 평생 손가락질 받게 될 거야. 데이지뿐만 아니라, 나중에 태어날 두 사람의 아이까지.>

외젠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그는 작위를 엘리아에게 넘기고 자신이 데이지의 곁으로 내려가고 싶어 했다.

<엘리 네가 작위를 이어받아 준다면야 우리야 무척 감사할 일이지. 한데 무턱 대고 네가 작위를 잇게 했다간 로앙을 지지했던 귀족들에게서 불만이 나올 거야. 가주가 생전에 자식도 아닌 누이에게 작위를 양도한 전례가 몇백 년 동안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귀족들이 작위 승계 문제에 무척이나 예민한 만큼 여론이 부정적으로 쏠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일을 진행해야 했다.

한데 두 사람의 아버지가 남겨 준 편지 덕분에, 일이 아주 쉽게 풀리게 되었다.

작위 승계에 있어 선대 가주의 유언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엘리아를 후계로 삼겠다고 한 아버지의 편지를 증거로 내밀면,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할 터였다.

“부모님께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정말 다행이야.”

엘리아는 이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에드문트의 지난 생에서 외젠과 데이지가 서로 마음을 숨기며 살았던 것과 달리, 이제 떳떳하게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으니까.

* * *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곁에서 다독여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엘리아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다고 말했다.

“선물? 전에 내 생일에도 받았는데.”

“성년식이니까. 선물은 공작가 저택에 가져다 두었어.”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눈가를 훔치며, 나직이 속삭였다.

평소보다 배는 낮은 목소리, 그리고 시끌벅적한 밖과 단절된 둘만의 공간.

어쩐지 속이 끓었다. 덩달아 엘리아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언제 보여 주려고 했어?”

“연회가 끝나면 같이 가자고 청하려고 했어.”

엘리아는 닫힌 휴게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저녁 시간이고, 문밖에 한창인 제 성년식은 자정을 넘겨야 끝날 게 분명했다.

“있잖아. 나 어릴 때부터 성년 기념 연회 엄청 기대했거든. 엄마가 별관에 커다란 연회장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외젠이랑 내 성년 연회를 열어 준다고 해서.”

작은 손이 에드문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제 눈물이 만든 얼룩을 지우고 싶어서. 혹은 그저 남자를 어루만지고 싶어서.

“근데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어. 사람도 너무 많고, 정신도 하나도 없고. 그리고…… 재미있는 일은 다 끝났잖아?”

뜸을 들이는 엘리아의 목소리에 에드문트가 옅게 웃었다.

“그럼 빠져나갈까? 우리 둘만.”

엘리아는 정답을 말한 그를 한 번 꼭 안아 준 뒤 눈물을 지워 내고 휴게실을 나섰다. 이대로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가 마차에 탈 작정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람들에게 붙잡혀야 했다. 에드문트의 추종자들이 몰려왔나 싶었는데, 그들의 시선은 오직 엘리아를 향해 있었다.

“엘리아 님, 곧 로앙 백작이 되신다고 들었어요. 선친께서 남기신 유지가 발견되었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이제 로앙 백작님께서 마음 편히 작위 내려놓으시고 예술 활동에 전념하실 수 있겠네요.”

엘리아가 어안 벙벙하여 주변을 살피자 저 멀리서 벨레노아 백작이 그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외젠에게 소식을 전해 받자마자 소문을 퍼트린 게 분명했다.

“벨레노아 백작님께서 어찌나 엘리아 님을 아끼시던지. 로앙 백작이자 라스페 공작 부인으로서 훌륭히 소임을 다하실 거라 확신하시더라고요.”

결국 엘리아는 에드문트와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걸 포기해야 했다. 꼼짝없이 남아서 손님 응대를 하게 된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난처한 웃음을 나누었다.

“엘리아 양, 속히 로앙가를 물려받아 내게 힘이 되어 주길 바라. 두 사람 결혼도 서두르면 더더욱 좋고.”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무척이나 닮은, 그러나 훨씬 생동감 넘치는 벨레노아 백작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몰래 빠져나갈 거라는 걸 눈치챈 벨레노아 백작의 짓궂은 책략이 아니었을까.

* * *

연회가 끝난 건 달이 높게 뜬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엘리아는 로앙가에 돌아가는 대신 에드문트의 선물을 확인하기 위해 공작가로 향했다. 한스가 두 사람이 탄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두 분 오붓한 시간 방해해서 무척 죄송하지만, 몇 가지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한스가 건넨 건 오늘 성년식 초대에 응하지 않은 불참자 명단이었다.

정말 참석 의사가 있었다면 친인척이라도 대리인으로 내세웠을 터이니, 불참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벨레노아 백작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과 다름없었다.

피곤해하는 엘리아 대신 에드문트가 목록을 확인했다.

“대다수 예상했던 이들인데, 튀링겐이 없군.”

“불참 목록에 튀링겐가가 없다니? 그럼 설마 참석했다는 거야?”

“예, 두 분이 잠시 자리 비운 사이 서점 꼬맹…… 아니, 닐스 튀링겐 자작이 벨레노아 백작님을 알현하고 갔습니다.”

“황후인 제 이모를 설득하겠다고 하던가.”

“예, 어디든 받아들일 테니 망명을 허가해 달라고 청하더군요. 많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후작 일가는 물론이고 3황자와 현 황제와 황후까지 처형대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한지라, 그의 불안함은 극에 달했으리라.

오죽하면 사방에 정적들이 가득한 곳까지 찾아와 빌었겠는가.

“벨레노아 백작께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신 걸까? 황제와 3황자 처벌 문제 말이야.”

“계승권을 포기하게 한 뒤, 타국에 망명시키겠지요. 공작님께서 이전에도 그렇게 조치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잘 모르겠어. 계승권을 포기하게 하는 거로 충분할까?”

“하지만 벨레노아 백작님께서 그들을 처형대에 올린다면 좋은 선례로 남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벨레노아 백작님께서 도덕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신 덕이니까요. 이 문제는 백작님께서 두 분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응, 작위 승계 문제도 같이 상의해야 할 테니까. 내일 점심때로 약속 잡을까?”

에드문트는 동의를 구하는 엘리아를 바라보더니, 몸을 숙여 귓속말을 건넸다.

“아, 내일? 정말 내일 전부 시간 비워 둔 거야?”

“응, 하루쯤 같이 쉬었으면 해서.”

“나야 좋지! 계속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서 아쉬웠는걸.”

엘리아가 기뻐하며 그에게 엉겨 붙어 대는 모습을 보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스가 입을 비죽였다. 엘리아 아가씨더러 같이 일정이 비는 김에 함께 쉬자고 제안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오늘 작정을 하셨나 보네.’

연인을 하루 붙잡아 두려는 공작이 무슨 심산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괜히 제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는데, 정작 아가씨는 부끄러운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스, 샘나서 그래요? 우리 모처럼 시간 난 거니까, 하루만 놀게요. 한스는 다음에 따로 휴가 신청해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의외로 이런 데선 순진하여 아직 눈치 못 챈 건지.

해맑은 모습을 보며 한스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얼마 전 결혼한 사촌 동생이 자꾸만 눈앞의 아가씨와 겹쳐 보였다.

* * *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저는 크흠. 흠.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공작가에 마차가 멈추고, 한스는 과하게 어색한 헛기침을 하곤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엘리아가 수상쩍은 기색을 읽고 눈을 찌푸리는데, 근래 눈치가 빨라진 공작가의 집사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엘리아 님, 성년식 무사히 치르신 것 축하드립니다.”

“아, 고마워요. 두 번씩 축하받으려니 민망하네요.”

“성년식에서 좋은 소식도 들으셨다지요.”

엘리아가 집사와 나란히 걸어 저택으로 들어가고, 에드문트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직접 색을 고른 융단, 그리고 가을이라며 바꿔 걸은 장식 한가운데에 엘리아가 거닐고 있었다.

한때는, 계절이 바뀌지 않기를 바랐다.

초록이 바라지 않는 여름만 죽 이어져, 엘리아가 마지막으로 남겼다 여긴 흔적들에 파묻혀 살고 싶었다.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어쩌면, 여름 바람에 엘리아의 흔적이 묻어올까 싶어 창밖을 살피다, 견디지 못하고 몸을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죽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었으리라.

도망치고 싶다는 이기심도 아니었을 테니, 그저 사무치는 그리움이 그를 죽게 했을 터였다.

“에디, 나 준다는 선물은 어디 있어?”

침실에 함께 들어온 엘리아가 선물이 궁금하다며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상념에 젖었던 에드문트가 미소 짓더니 엘리아를 욕실로 이끌었다.

“선물은 나중에 보여 줄게. 우선 예복부터 갈아입어. 계속 입고 있으면 불편할 테니까.”

안 그래도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예복이 불편했던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따라 옷 방으로 향했다.

“엘리, 머리 장식 내리는 거 도와줄게.”

에드문트가 사용인들을 대신해 시중을 들어 주었다. 겉옷을 받아 주고, 거울 앞에 엘리아를 앉혀 머리 장식을 하나씩 덜어 주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머리카락이 잡혀 뜯기기 마련인데, 에드문트는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여덟 개나 되는 장식을 전부 풀어 주었다.

그의 손에 귀걸이와 목걸이까지 벗겨져 나가니, 벌써 목욕을 마치고 온 것처럼 온몸이 노곤했다.

“후우.”

“무거웠어?”

“응, 보석 걸고 돌아다닐 때마다 어깨 아파. 나 조금 오래 물에 담그고 있어도 될까?”

“그렇게 해. 목욕물 준비해 두었으니까.”

에드문트가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떠난 뒤, 엘리아가 욕실에 들어갔다.

평소와는 달리 색색의 꽃이 수북한 욕조가 엘리아를 반겼다.

“이게 다 뭐야?”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라 이르셨습니다.”

“……그래?”

엘리아는 최대한 사용인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대체 왜 에드문트가 이런 걸 준비했는지 궁금해하느라 바빴다.

‘아! 아까 그 머리 장식 직접 빼 준 거랑 이게 선물인가?’

엘리아는 욕조에 수북한 꽃잎을 보며, 이게 다 얼마 치려나 하는 습관적인 생각에 몰두하다가 고개를 휘적거렸다.

대신 에드문트에게 소감을 말해 주기 위해 꽃향기를 담뿍 머금었다. 따듯한 향에 마음까지 함께 녹아내렸다.

피로 쌓인 몸을 한참 위안 받은 뒤 목욕 시중을 받고 옷 방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사용인들이 수십 벌의 옷을 꺼내 왔다.

“아가씨, 오늘은 가운 대신 다른 걸 준비해 두었습니다. 공작님께서 엘리아 님을 위해 새로 구입해 두신 거랍니다.”

눈앞에 등장한 실내복은 감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엘리아의 마음에 들었다.

“엘리아 님 머리 색과 무척 잘 어울려요.”

“다른 옷도 입어 보시겠어요?”

평소 얌전하던 사용인들이 저마다 실내복을 두 벌씩 손에 들고선 호들갑을 떨었다. 엘리아는 선심 써서 그중 세 벌을 착용해 보았다.

“공작님께서도 아가씨와 같은 색으로 맞춰 입으시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음…… 이 색, 에디한테도 잘 어울리려나? 에디는 주로 어두운 옷 입은 것만 봐서.”

“그럼요. 두 분은 무얼 입으셔도 잘 어울리실 거예요.”

엘리아가 한 마디씩 꺼낼 때마다 찬사가 쏟아졌다. 이쯤 되니 엘리아도 눈치 못 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에디가 대단한 선물을 준비했나 봐. 심지어 무슨 선물인지 나 빼고 전부 다 아는 것 같은데.’

일부러 시간까지 빼서 저를 데려왔으니 평범한 선물은 아닐 것 같았다.

대체 뭘 준비했을지 사용인들을 살살 꼬드겨 미리 알아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제가 깜짝 놀라는 모습이나마 답례품으로 에디에게 주고 싶었으니까.

‘사실 무슨 선물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일 하루 종일 같이 쉴 수 있게 된 게 제일 기쁜데.’

엘리아는 깜짝 놀랄 선물 생각은 일단 미루어 두고, 내일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는 데 열중했다.

오늘은 꼭 먼저 잠들지 않고 오랫동안 에디와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내리라.

아침에 일어나거든 딱 하루만 훈련을 건너뛰어 달라고 부탁한 다음, 배가 고파질 때까지 침대에 누워 못다 나눈 이야기 나누자고 해야지.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점심은 후원에서 꽃을 보며 먹는 건 어떨까. 햇살 아래에서 따듯한 차를 마시면 늦가을 추위쯤이야 금방 잊을 수 있을 테니까.

오후에는,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호수에 찾아가는 것도 좋을 듯했다. 저녁놀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추억을 곱씹으리라.

하루를 꽉 채운 계획을 세우고 나니 어느새 사용인들이 머리 손질이 끝났다고 고해 왔다.

침실에 나가니, 에드문트가 소파에 걸터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알려 준 대로, 에드문트는 엘리아와 같은 색감의 실내복 차림이었다.

‘……오늘 좀 달라 보이는데. 가운 차림이 아니라 그런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자꾸 평소랑 다르게 구는 사람들 탓일까?

‘그러고 보니 요즘 계속 바빠서……. 에디랑 이 시간까지 같이 있는 거 오랜만이네.’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성년이 되어 달라 속삭이던, 연인과 맞이하는 첫 밤이라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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