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공감
다음 날. 약을 먹고 잠들었던 엘리아는 개운한 몸으로 깨어났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기대어 방을 둘러보다가, 뒤늦게 제 바로 옆에 누운 에드문트를 발견했다.
분명 직전까지 잠을 쫓아 가며 저를 살피다 열이 확실히 떨어진 걸 확인한 뒤에야 겨우 잠들었을 터였다.
‘어쩌지. 내가 또 욕심부리다가 쪽잠 자게 했네.’
밤새 간병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공작가에서 하루 묵을 기회가 생겼으니, 이왕이면 나란히 누워 잠이 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를 배려한다고 꾹꾹 눌러 참지만, 에드문트도 싫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싫다, 좋다 묻고 대답을 들었던 건 아니다. 제가 아무리 뻔뻔해도 같이 누우면 괴로운 것보다 좋은 게 더 크지 않냐고 묻기는 부끄러웠다.
대신 그를 살피고, 짐작해 내린 결론이었다.
이를테면,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어제처럼 먼저 잠들어도 방을 옮기지 않았다. 가까이 들러붙지는 않아도 한 침대에 눕는 걸 마다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약혼한 사이잖아. 이 정도는 남들 연애하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
엘리아는 다시 침대에 누워선 반듯하게 누운 에드문트를 바라보았다. 예쁘다고 온종일 말해도 부족할 얼굴을 뜯어보다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몸이 닿자마자 눈을 뜨고 일어나려는 걸 엘리아가 붙들었다.
“아직 새벽이야. 한스 경 출발할 시간 되려면 멀었어.”
“응, 좀 더 자 엘리. 나는…….”
“재워 줘. 응? 한 시간만.”
저만 눕혀 두고 혼자 일어날 기색에 엘리아는 잽싸게 그에게 엉겨 붙었다. 이 정도는 해야 에드문트가 잠시나마 눈 붙이고 누워 있을 테니까.
다행히 에드문트는 일어나는 대신 저 재워 달라는 엘리아를 바짝 끌어안았다.
서로의 숨소리만, 체온만 느끼며 보내는 새벽 시간은 도리어 얼굴을 맞대고 사랑을 고백할 적 못지않게 충만했다.
“오늘은 좋은 꿈 꿨어?”
두 사람은 짧은 단잠으로 한 시간을 채운 뒤 일어났다. 에드문트는 꿈 없이 잠들었다고 대답하자 엘리아가 그를 꼭 끌어안고 제 꿈 이야기를 했다.
“호수에 갔는데 햇빛이 정말 많이 쏟아져서 내내 따듯했던 꿈 꿨어.”
“호수에 가고 싶어?”
“가고 싶기야 하지만, 그보다 너랑 더 있고 싶어.”
엘리아는 함께 있는 거로도 충분하다고 말해 주곤, 아침 인사를 한다고 그에게 먼저 입술을 붙였다.
“으음…….”
얌전히 엘리아의 입맞춤을 받아 준다 싶더니…… 어느새 그는 손을 뻗어 엘리아의 체온을 확인하느라 바빠 보였다.
“한눈……. 팔지 말고. 응?”
그의 아랫입술을 문 채 웅얼거리자, 열이 없는 걸 확인한 에드문트의 손이 엘리아의 목덜미를 받쳐 깊이 파고들었다.
밤사이에 식은 공기가 금방 열기에 휩싸이고, 엘리아는 기어코 에드문트에게 어제 몫까지 애정을 받아 냈다. 밤을 꼬박 지켜 준 남자에게 주는, 다정한 감사 인사였다.
깊은 입맞춤의 여운을 만끽하고 난 뒤에도 두 사람이 하루를 시작하기엔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몇 시간 앞당겨 몸을 일으켰다.
“날씨가 괜찮아서 다행이다. 한스 경 은근 약골이잖아. 이 날씨에 비까지 왔으면 분명 남부 도착하기도 전에 감기 걸렸을걸?”
두 사람의 아침 일정은 남부로 떠날 한스를 배웅하는 일이었다. 간단히 씻은 뒤 저택 밖으로 나가자 벌써 마차 두 대가 출발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엘리아가 직접 짐이 잘 실려 있는지 확인했고, 에드문트는 이른 시간부터 보고를 올리겠다고 찾아온 기사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사이 무대 위 주인공처럼 한스가 한발 늦게 등장했다.
“두 분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나와 계십니까?”
“한스 배웅해 주려고 나왔죠. 감동받았죠?”
그는 참으로 영광이라는 대꾸 대신 “제가 직접 다녀오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며 거들먹거려 엘리아를 웃게 했다.
“잘 다녀와요. 여기 일 많으니까 늦지 말고.”
“보고 싶을까 봐 일찍 오라는 걸 둘러 말씀하시는 거 압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의 장난스러운 작별 인사가 끝나자,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을 것 같던 에드문트가 한스에게 한마디 덧대었다.
“한스. 고된 일이 되겠지만, 믿고 맡기니 부탁하네.”
“……예. 다녀오겠습니다.”
수다스러운 그는 예상 못 한 에드문트의 살가운 배웅에 당황해선 짧은 대답 하나만 남긴 채 떠나고 말았다. 엘리아는 이번만큼은 한스가 감정 복받쳐 울 뻔했다는 걸 놀리는 대신 모르는 척해 주었다.
마차 한 대, 그리고 보좌관 한 명에게는 꽤 과분한 여섯 명의 호위 인원이 출발했다. 저택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한스가 탄 마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한스 경이 너를 많이 아끼는 것 같아. 좀 질투 나네. 내가 에디를 더 좋아하는데.”
엘리아는 질투 난다고 말하면서도 만면에는 미소를 띠었다.
“그와 공유하길 잘한 것 같아. 네가 믿고 애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는 거잖아.”
에드문트와 엘리아는 상의 끝에 한스에게만 과거 이야기를 알려 주기로 했다. 늘 에드문트의 곁에서 그의 기쁨을 지켜 주고 슬픔을 함께 견뎌 준 사람이었으니, 분명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받아들여 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한스는 공작의 긴 이야기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내가 자네에게 괜한 이야기를 전한 거면, 사과하겠네.>
에드문트는 그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사과까지 건네었는데, 한스는 그 위안에 되레 화를 내었다.
<젠장. 말해서 미안하시다니, 그게 지금 할 소리입니까? 사람이 어찌 그리 독하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고는, 그걸 평생 숨기려 하셨다니요. 위안 받지도 못한 채 혼자 버티려 하셨다니……. 어째서 그렇게까지 스스로에게 잔인하게 구셨습니까!>
한스는 원망을 실컷 토하고 제집으로 돌아가 버리더니, 다음 날이 되어서야 감정 정리가 모두 끝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제 말씀해 주신 이야기 듣고 생각해 봤습니다. 올리버 페소의 유해 말입니다, 저희 쪽에서 아직 보관하고 있으니 그 자식을 이용해서 튀링겐과 황후를 흔드는 거 어떻습니까?>
<죽은 사람 유해를 이용하자고?>
<안 될 거 뭐 있습니까, 죽어 마땅한 놈인데요. 감히 공작가에 기어들어 와서 극악한 짓을 벌였는데…… 시신만 남은 게 원통할 지경입니다.>
정작 피해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아는 무덤덤했지만, 올리버 페소를 향한 한스의 분노는 쉬이 꺾이지 않았다.
내막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공작님이 올리버 페소를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했다.’라며 질겁하던 건 이미 기억에서 지워 버린 모양이었다.
에드문트는 한스의 감정적인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당사자만큼이나 슬퍼하고 분노하는 모습이 그에겐 괴이쩍어 보이기까지 했으리라.
“언젠가 이해할 날이 올까.”
“물론이지. 오늘처럼 믿고 아끼는 네 마음 표현해 주고, 그의 애정을 조금씩 받아 주면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홀로 끌어안고 있던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그들을 무조건 믿어 주는 든든한 아군까지 얻었다.
이제 에드문트와 엘리아에게 남은 일은 복수,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보듬는 시간을 누리는 것뿐이었다.
“한스가 페소 남작가를 찾아가 일이 잘 풀리면, 복수도 머지않아 이룰 수 있을 테고.”
남부로 떠난 한스는 페소 남작에게 찾아가 그의 아들, 올리버 페소의 시신을 보여 주리라.
<크라우제 후작이 자신의 뒤를 캐던 자를 살해했다는 증언을 확보하여, 진위 확인을 위해 공작가에서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지만, 머리칼과 유류품으로 남작님의 아드님임을 확인했습니다.>
<후작이, 크라우제 후작이 내 아들을 살해했다는 말인가?>
<잘 아시잖습니까. 후작이 얼마나 잔악한 자인지…… 그간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셨을 테니까요.>
평생 황후를 위해 살았던 아들의 시신을 보며, 페소 남작은 마땅히 절망하리라.
곧장 유해를 끌어안고 황실에 찾아갈 테니, 황후는 비탄에 빠지면서도 무척 궁금해하겠지.
어째서 라스페 공작가가 올리버 페소의 시신을 수습한 건지. 정말 올리버 페소를 살해한 게 후작인지.
그가 목숨 걸고 알아내려 했던 크라우제 후작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폐하, 분명 올리버가 뭔가 알아낸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후작에게 살해당한 거라고요.>
황제와 황후를 공범으로 삼아 유지해 오던 후작과의 신뢰 관계가 뿌리째 흔들릴 테니 결국, 서로를 배신하게 되리라.
두 세력을 자멸케 하리라.
로앙과 라스페의 완벽한, 복수를 위하여.
“한스 경 배웅도 끝났고, 나는 오후 일정 하나만 있는데. 너는 어때?”
에드문트는 오후부터 빡빡하게 몰려 있는 일정을 알려 주었다. 엘리아가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이마를 연신 쓸었다.
“힘들어서 어쩌지.”
“힘들지 않아.”
에드문트의 즉답에 엘리아가 빙긋 웃었다. 살이 많이 빠졌던 그의 몸이 예전만큼 회복했다는 것도, 그가 이틀을 꼬박 지새워도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체력이 좋다는 것도 알지만 그도 사람이라 아프고 힘들 때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괜찮다는 사람을 붙들고 묻고, 또 묻곤 했다.
‘아직은 힘든 걸 힘들다고 말하는 게 어색할 테니까. 그래도 머지않아 적응하겠지.’
잠이 다 깬 뒤에도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품에 안겨 들고, 평범한 하루였지만 위로해 달라고 파고들고……. 그런 것도 할 줄 알게 되리라.
외로움을 갈망하는 법을 익히겠지. 그 전까지는 엘리아가 도와주어야 할 터였다.
“에디, 같이 정원 산책하지 않을래? 해도 쬐고, 기사들과 단련하기 전 준비 운동 겸해서.”
“괜찮겠어?”
“에이. 아까 확인했잖아. 나 열 다 내렸는걸.”
엘리아가 다시 확인해 보라며 그의 손을 끌어다 제 목에 얹어 주었다. 여린 살결이 손에 엉겨 붙는 감촉에 그가 낮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왜 그래?”
에드문트는 천진한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엘리아를 끌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차갑게 식은 새벽 공기를 가르고 온 입술에서부터 따듯함이 번져 나갔다.
그대로 손을 내려 엘리아의 손을 가볍게 쥐자, 엘리아가 깍지 껴 그의 손을 잡았다.
“같이 산책하자.”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두 사람은 곧 가을꽃이 흐드러지게 필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 보내다 보면, 가끔 궁금했다.
에드문트는 이전 생에서도 함께 정원을 거닌 적이 있었을까?
질투하느냐고 물으면, 솔직히 그랬다. 저이지만 또 제가 아닌 사람과 어떻게 애정을 나누었는지 알고 싶었다.
혹은 그때는 나누지 못한 탓에, 새로운 일을 겪을 때마다 공허함을 느끼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짧은 산책조차도 생경해하던 그를 떠올리면, 과거에는 어땠느냐고 묻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그저 현실의 저를 마음껏 누리게 해야지.
더 원하고, 갈망하는 법에 익숙해지게 하여, 스스로 행복을 욕심내게 해 줘야지.
“에디, 저녁은 로앙가에서 먹고 가지 않을래? 일정에 치여서 자꾸 식사 거르는 것 같아서 내가 챙겨 주고 싶어.”
에드문트가 정원 중앙에 심어 둔 커다란 꽃나무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의 손가락 몇 개를 꼭 붙잡고 걷던 엘리아가 함께 멈추어 올려다보자, 입술이 살짝 달싹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하는구나. 무슨 말을 하려나?’
엘리아도 덩달아 긴장되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 괜찮다면, 좀 더 오래 같이 시간 보내도 괜찮을까?”
“저녁 먹고, 오늘처럼?”
“오늘처럼.”
“그럼 로앙가에서 하루 자고 가. 새벽까지 이야기 나누고, 아침 일찍 산책도 하자. 어때?”
에드문트는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고 가겠다 대꾸했다. 매번 공작가에서 엘리아가 그와 한방에서 지내려고 고집을 부려 댈 때와는 사뭇 달랐다.
‘흐음. 저번에 왔을 때처럼 손님방에 머물 생각이겠지?’
한데 어쩌나. 근래 저택 수리에 맛 들인 로앙가의 집사가 손님방을 전부 뜯어고치는 중이라, 에드문트가 머물 공간이라곤 엘리아의 방뿐이었다.
“빨리 저녁이 되면 좋겠다. 그치?”
혹은 알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그와 함께할 시간을 꿈꾸는 엘리아와 같은 마음인지라…… 모르는 척 자꾸 넘어와 주는 걸지도.
* * *
“하루 묵고 가신다고요?”
이른 아침, 라스페 공작이 저녁 식사를 위해 찾아올 거란 소식에 간신히 시간 맞춰 손님맞이 준비를 마쳤거늘.
엘리아가 깜빡 잊었다며 뒤늦게 추가한 소식에 집사는 울상이 되고 말았다.
깜빡했다는 말은 속내 뻔한 핑계였다. 기껏 에드문트를 자고 가게 하는데, 손님방을 준비시키면 아까운 밤을 각자 보내야 하지 않은가. 엘리아의 기준에서 그건 각자의 저택에서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외젠이 제 누이동생의 검은 속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든지 말든지, 엘리아는 해맑게 상황을 수습해 나섰다.
“걱정하지 마. 에디는 내 침실에서 지내면 되는걸? 에디, 4층 정리한 후로 처음 온 거였지? 식사 준비될 동안 내가 구경시켜 줄게. 화실 깨끗한 거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엘리, 잠깐만. 공작님이랑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일단…….”
“저녁 먹을 때 이야기해도 되잖아! 준비 다 되면 알려 줘!”
잔뜩 신난 엘리아와 묵묵히 끌려가는 에드문트를 보며, 외젠은 한숨을 쉬었다.
“둘이 저렇게 사이좋아질 줄 누가 알았겠어.”
한때는 죄책감을 느꼈다. 어린 엘리아에게 안전을 위해서라며 마음이 통하지 않은 상대와 약혼을 강요했으니까.
그런데 이젠 엘리아가 공작이 없으면 죽을 것처럼 목메고 있다.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 건 마땅히 축하할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큼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으니까.
하나 요즘 엘리아를 보면 걱정되는 게 하나 있었다.
“데이지, 솔직히 말해 줘. 내 눈에만 엘리아가 조급해 보이나?”
서로 마음을 확인했다면서도, 엘리아는 어쩐지 매 순간 사랑을 확인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굴었다. 침실을 나누는 것쯤이야 누가 흠잡을 일은 아니지만 저리 집착할 것도 없잖은가.
게다가 에드문트는 또 어떻던가. 엘리아가 원하는 기색을 보이면 그는 어떤 요구에도 반항하지 못했다.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구는 게 예뻐 보이는 걸 넘어서 이제는 불안해 보일 지경이었다.
“초조하신가 봐요. 제가 이야기 한번 드려 볼게요.”
“그래. 공작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공작님께도 제가 이야기 드릴게요. 그 전에 아가씨께 먼저 말씀드려 보고요.”
“엘리한테 먼저?”
“그야 두 분 일에 끼어드는 거고, 공작님께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게 될 테니 허락부터 받아야죠.”
“그런 거야?”
순진하게 묻는 모양새가 어린애 같았다. 데이지는 어릴 때 하던 것처럼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후우. 그래, 원하는 대로 해. 엘리 걔가 너 닮았으니 네가 잘 알겠지.”
“서운하세요? 두 분도 정말 많이 닮으셨어요.”
“위로해 달라는 거 아니었어. 저녁 식사 준비되는 거나 보러 내려갔다 올게.”
“저도 내려갈게요. 이야기는 저녁 식사 뒤에 나누면 되니까요.”
“그럼 가는 길에 두 사람한테 무슨 이야기 할 건지 알려 줘.”
외젠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사정한 끝에 데이지가 엘리아의 문제에 어떻게 조언할 생각인지 들을 수 있었다.
“……어려워서 머리 깨질 것 같다.”
기껏 알려 주었더니, 외젠은 도저히 남의 연애사에는 참견 못 하겠다는 투정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데이지가 그 모습을 보고 방긋 웃었다.
“데이지, 너 내가 바보 같아서 웃지.”
“그럴 리가요. 사랑이 어렵다고 하시니까.”
“그래서?”
“외젠 님을 위해서 좀 더 쉬운 사람이 되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느라 웃은 거예요.”
외젠은 잠시 데이지의 아리송한 말을 곱씹어 보다가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외젠 님, 지금 저한테 입 맞춰 주시는 게 좋겠어요.”
“……알아, 안다고. 그러려고 했어.”
그는 어린애 가르치듯 애정 표현을 요구하는 말에 자존심 상한 척 굴었지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그만 양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엘리아가 보면 아마 질투해 마지않으리라.
서로가 이다지도 편안하면서도 또 금세 수줍어지는 감정은…… 태어난 이래 오로지 서로뿐이었던,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일 테니까.
* * *
엘리아와 외젠의 주도로 떠들썩하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데이지가 엘리아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외젠이 눈치껏 에드문트를 제 서재로 안내하고, 데이지와 엘리아는 바깥바람을 쐴 겸 정원 밖으로 나왔다.
“벌써 해가 지네. 확실히 가을이 오긴 했나 봐.”
일찍 져 버린 해가 남기고 간 노을을 바라보다가, 두 사람이 저택 인근을 산책했다.
“시간이 빠르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봄이었는데.”
“음…… 그러게. 마음만 급하고, 시간은 없고……. 차라리 눈 감았다 뜨면 시간이 다 가 버렸으면 좋겠다 싶어.”
“초조하세요?”
마음 한 지점을 쿡 찌르는 질문이었다.
엘리아는 고민하던 중 저택 2층을 올려다보았다. 불 켜진 외젠의 집무실에는 달빛을 흉내 낸 희미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 빛을 보며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떠올렸다.
“맞아.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초조해.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아마…… 지금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것 같아. 이상한 변명이지?”
“이상하긴요. 아가씨가 지금 행복하시다니 기쁜 소식이죠.”
“그렇게 말해 주면 고맙고.”
엘리아는 어둠 속에서도 용케 데이지의 손을 찾아 쥐었다.
“나한테 할 말 있다는 게 뭐야?”
“아가씨한테 허락 맡을 일이 있어서요.”
“허락?”
“공작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괜찮을까요?”
잠시 맞잡고 있던 손에 고민이 비쳤다.
“그걸 굳이 나한테 허락을 구한다는 건, 에디랑 나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겠다는 거지?”
“예.”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대신 으음…… 혹시 뭐라고 잔소리하려는 건 아니지? 혼내지 마. 에디가 나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에디 엄청 여리단 말이야.”
애정이 듬뿍 묻어난 표현에 데이지가 놀리듯 눈을 흘겼다. 엘리아는 얼굴이 붉어질지언정 그가 여린 사람이라는 표현은 번복하지 않았다.
“진짜야. 너만큼 소중한 사람이니까, 잘 대해 줘. 알았지?”
“영광이네요.”
“누구한테?”
“당연히 공작님이죠. 저만큼 아가씨께 예쁨받으신다니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아무리 뻔뻔하기로서니 그런 말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장난스러운 대화는 다시 두 사람이 저택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을이 이미 찾아왔거늘, 정원에 내려앉은 밤은 그저 따듯할 뿐이었다.
* * *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잘 준비를 마칠 때 즈음 침실에 찾아왔다.
“어쩐지 데이지랑 이야기가 길어진다 했는데. 잘 준비까지 하고 왔구나?”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방금 씻고 나왔어.”
얼굴 보자마자 껴안고 애정 표현하느라 바쁜 두 사람의 모습에, 호위 서던 로앙가의 기사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모시는 아가씨가 무척 행복해 보여서 같이 웃음 짓다가도, 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온몸으로 표현하는 걸 내내 보고 있자니 얄밉기도 하고.
타인의 사랑이 다 그런 것이리라.
내 것이 아니어도 사랑스럽고, 내 것이 아니기에 질투하게 되고.
“두 분 좋은 꿈 꾸시기를.”
엘리아에게 늘 하던 밤 인사에 에드문트가 포함되자,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물론이고 받는 엘리아에게도 못내 낯설게 들렸다.
함께 밤을 보낼 연인들에게, 조금은 짓궂은 인사이기도 했다.
“아직 안 잘 건데. 그치?”
괜한 부끄러움에 엘리아가 안 해도 될 말 하나를 덧붙이고, 자기 전 이야기 나누자며 에드문트를 소파로 이끌었다.
“다른 곳은 가구를 교체했던데, 이곳은 그대로네.”
에드문트의 지적대로, 로앙가 내부는 응접실이며 복도까지 전부 새 가구로 교체했음에도 엘리아의 침실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안 바꾼다고 했어. 이 방 하나쯤은 추억으로 남겨도 될 것 같아서. 전에 나이메르 자작 부부랑 만났을 때 방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작 부인은 어린 시절 방을 바꿀 때마다 부모님이 쓰던 방을 그대로 두게 했다지 뭐야. 전부 추억이라면서. 나도 비슷하게 따라 해 보려고.”
“로앙에 남을 백작과 데이지 슈미츠를 위해서?”
“응, 그리고 어차피 이 방에서 지내는 날이 얼마 안 남았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결혼을 암시한 엘리아가 부끄러움에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에드문트는 어떤 때에는 대담하게 굴다가도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는 엘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디 적당한 배려가 되길 바라며, 그는 엘리아 대신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아까 슈미츠 양에게 네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어.”
“어떤 이야기?”
“네가 어릴 적부터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선대 백작 부부가 걱정이 많았다고.”
에드문트는 데이지의 이야기를 듣고, 제게 미안하다며 눈물 뚝뚝 흘리던 엘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흐르던 눈물은 비단 죄책감만이 아니었으리라. 에드문트가 느꼈을 슬픔을 그대로 느끼고 제 일처럼 아파한 탓이겠지.
“그리고 네가 조급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어.”
데이지는 에드문트에게 콕 짚어 조언했다.
<그분은 한시도 쉬지 않고 공작님의 기분을 살피려 하실 거예요. 그게 스스로를 조급하게 만드는 걸 알면서도, 성격이라 잘 고쳐지지는 않는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니 공작님, 아가씨께 많이 표현해 주세요. 사랑한다고, 행복하시다고.>
두 가지의 조언이 맞물린 지점에서 에드문트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표현이 부족한 사람이고, 엘리아는 확신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선 서로 노력해야만 했다.
“엘리, 사랑해.”
일상적인 말처럼 단조로운 고백에, 엘리아는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에드문트가 가운 자락으로 엘리아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네게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해 주지 못해 미안해.”
그제야 엘리아는 저조차 몰랐던 갈증이 전부 한순간 녹아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미안하다고…… 그럴 필요 없어. 에디, 나는 그냥 욕심부린 거야. 널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쳤잖아. 그걸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
뒤돌아보면 그에게 행복해지라며 강요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제가 막무가내로 사랑을 퍼붓는다고 상처가 더 빨리 아물리라는 법도 없는데.
“조급하지 말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마음이 그러질 못했어. 어서 네가 아픈 일을 전부 잊고 행복해진 모습을 보고 싶어서……. 내가 함께 감당해 주어야 할 시간을 다 건너뛰고만 싶었나 봐. 내가…….”
엘리아가 고개를 떨구었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씹어야만 간신히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에드문트는 힘겨워 보이는 엘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도록, 다만 제 체온만 전해지도록 품에 끌어안았다.
“엘리, 나는 단 한 번도 싫지 않았어. 그리고 나 역시, 늘 너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까.”
“비슷한 감정? 조급한 거…… 말하는 거야?”
엘리아가 겨우 고개를 들어 묻자, 그가 엘리아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시선은, 흔들림 없이 엘리아에게 고정되었다.
“엘리.”
“…….”
커다란 짐승과 마주한 듯한 긴장감이 엘리아를 옭아맸다. 에드문트가 바짝 굳은 엘리아를 예고 없이 들어 올렸다.
놀란 엘리아의 입이 살짝 벌어지자 그가 침입해 왔다.
겪어 본 적 없는, 지독한 감각이 휘몰아쳤다.
정신없이 그를 받아 내던 엘리아가 등 뒤로 폭신한 감촉이 느껴지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어느덧 그가 자신을 침대에 눕힌 채 양팔로 가두고 있음을.
푸른빛이 점멸한 새카만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네 말대로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 그게 나를 미치게 해.”
한껏 예민해진 살갗은 지독하게 낮아진 목소리에 통증을 느꼈다. 엘리아가 무의식중에 움찔거리자 에드문트가 이번엔 엘리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서 헤집어 댔다.
분명 누워 있는데, 오직 그의 팔에 간신히 매달린 듯 온몸이 휘청거렸다.
하나 엘리아와 달리 그는 여유작작했다. 원하는 대로 엘리아의 입술을, 자주 이를 세우는 눈가를 탐한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그러니 어서, 성년이 되어 줘.”
“……어?”
“좋은 꿈 꿔, 엘리.”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침실을 떠났다. 부끄러워서 끙끙 앓을 엘리아를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으으…….”
그의 예상대로 엘리아는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침대 위에서 한참 몸부림쳐야 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바라야 할지, 아니면 가을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길 바라야 할지.
엘리아의 고민이 밤과 함께, 흐르는 시간과 함께 깊어 갔다.
가을. 멀게만 느껴졌던 붉은 계절이 어느덧 한창이었다.
엘리아의 생일까지, 이제 스무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