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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속임수 (74/79)

외전 1. 속임수

어둑한 밤이 찾아온 수도의 골목. 귀족이 타기엔 다소 낡은 4인승 마차에 한 남자가 직접 문을 열고 올라탔다. 이윽고 문 너머에서 희미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한때 수도의 어느 모임에 가든지 환영받던 사람이었다. 적당한 지위에 재력을 짐작게 하는 화려한 옷차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자는 없었다.

<지금까지 채광한 광산이 소유하신 것에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으신다지요?>

<수도에 자작님의 자수정 하나 갖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물론 저도 매달 사들이느라 허리가 휘청일 지경입니다.>

레만 자작의 삶이 항상 그리 반짝거렸던 건 아니었다. 한때 그가 가진 광산에서 채굴하는 보석은 턱없이 적었으며, 기껏 캐 봐야 천박한 색이라 손가락질 받는 자수정 따위에 불과했다.

하필 가문 대대로 이어진 그의 눈동자 색마저 보랏빛이 감돌았던 터라 영지가 있는 동부에서조차 레만 자작은 한미한 가문의 후계 취급을 받고 자라 왔다.

세상이 뒤집힌 건, 그가 선친의 유지를 땅에 내던진 이후부터였다. 사람을 돈보다 우선하지 말라는 같잖은 소리를 무시하고 나니 돈이 벌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악착같이 제 가치를 올려 갔다.

수도에 올라와 기민하게 두 권력자 사이를 오간 끝에 라스페 공작가에 줄을 섰고, 그를 위해 제 딸뻘인 어린 소녀를 찾아가 비위를 맞추었다. 보상은 무척이나 값졌다.

한데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빌어먹을 공작, 그리고 빌어먹을 제국의 귀족들.

수도의 귀족들이 윤리적인 사업 운운하는 건 다섯 살 애새끼도 웃을 소리였다. 그럼에도 레만 자작이 인신매매를 했다는 고발에 귀족들은 너도나도 투자금을 환수하겠다며 난동을 부려 댔다.

그들에게 레만 자작이 비루한 신분의 고아들을 사들여 광산에 밀어 넣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권력의 중심이 될 라스페 공작에게 버림받은 게 분명하다는, 잔인한 낙인을 찍어 대는 것뿐이었다.

버림받다니? 그때까지만 해도 레만 자작은 공작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배신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하필 자신을 고발한 인간이 라스페 공작과 친분이 두텁다던 자작가의 후계자였던 까닭에 그는 끝없이 추락해야만 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는 운명처럼 닥친 위기에 저항했다. 공작이 저를 버리려거든 그 역시 공작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레만 자작은 제 영지에서 공작가 기사들과 숨바꼭질하고 있다던 후작을 찾아내 내통하였고, 그 대가로 권력을 약속받으려 했다.

그러나 기껏 배신한 결과가 어떠했는가.

“제기랄…….”

분이 풀리지 않은 레만 자작이 다시 욕을 내뱉었다. 조금 전, 쫓겨난 거나 다름없이 떠나온 귀족가 모임에서 엿들은 이야기들이 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워 그를 조롱해 댔다.

<선대 공작 부부와 로앙 백작 부부의 죽음이 석연찮기야 했지. 한데 1황자 전하까지 살해하다니요? 하도 그전에 지병 이야기가 잦아서 급사한 줄로만 알았는데.>

<후작이 살해자로 지목받은 이상, 3황자와 황제도 공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니…….>

<근데 사실일까요? 정말 후작이 주도하여 그들을 다 살해했다는 게…… 증거도 없잖습니까.>

<이제 와서 사실이 아닌들 무어 하겠습니까? 전세가 다 역전된 마당에. 애초에 죄인으로 지목된 자가 스스로 결백을 밝히라고 지껄여 왔던 게 누굽니까. 후작 아니었습니까.>

<황제를 쥐지 않고도 영원할 것 같더니만. 결국 무너지려나 봅니다.>

크라우제 후작을 살려 수도로 도피하게 했는데, 정작 후작은 스스로의 입지도 유지하기 버거운 처지가 되었다더라.

젊은 라스페 공작이 후작의 모든 권력을 빼앗아 가장 정점에 설 거라더라.

그러니 말인즉, 레만 자작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었다.

‘그래도……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

레만 자작은 염치를 모르는 척 끼어든 사교 모임에서 비윤리적인 사업가라 조롱받았을지언정, 라스페 공작가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아직 공작이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혹은 알면서도 저를 내버려 둘 만큼 그가 쓸모 있다거나.

레만 자작은 아직 희망을 품을 여지가 있었다. 인신매매 고발 사건이 터졌을 때도, 후작이 수도에 나타났을 때도…….

그리고 후작을 살인자로 고발한 장례식이 끝난 뒤조차 라스페가에서 그에게 아무런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심지어 수십의 귀족들이 투자금을 뱉어 내라며 아우성치는 와중에도, 라스페가에서는 아직 제게 투자한 수만 골드를 회수하지 않았으니까.

그 희망을 밑천 삼아, 레만 자작은 얼마 전, 공작가를 찾아가 젊은 집사에게 납죽 엎드리기까지 했다. 비록 그 대가로 얻어 낸 건 입만 열었다 하면 제가 공작인 양 거들먹거리는 보좌관 한스 마이어와의 면담뿐이었지만.

<가까운 시일에 공작께서 다시 부르실 테니, 그 전까지 본인 안위 잘 챙기는 게 좋겠군요.>

그는 제 행색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기까지 하는 무례를 저질렀으나, 레만 자작은 이를 악물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그마치 3주가 지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크라우제 후작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리고 라스페 공작은 여전히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초조함으로 보낸 시간은 길어져만 가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늘처럼 초대받지 못한 귀족들의 모임을 기웃거리는 것 정도였다.

<최근 로앙 백작가의 투자 규모가 심상치 않다던데. 거래하던 소규모 상단들을 크게 키울 심산이라지?>

<겨우 과일 몇 가지 싣고 다녔을 작은 상단에 돈을 부어 봤자 뭐 얼마나 키울 수 있다고?>

<자금이 보통 많은 게 아니라던데? 선대 로앙 백작 부인이 죽기 전에 많이도 모아 두었나 봐. 그게 얼마 전까지 전부 묶여 있다가 돌려받았다잖아.>

<로앙 백작 인생도 다 폈군. 일찌감치 공작에게 제 누이 떠안기고, 부모 재산도 돌려받았으니 이제 걱정할 게 무어 있겠는가.>

그는 엿들었던 귀족들의 이야기를 곱씹다가 ‘로앙 백작’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공작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보다야, 그 백작을 찾아가 동정이라도 구하는 편이 낫겠지.’

레만 자작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허름한 상점가 앞에 세워 두었던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고는 억지를 부려 머물고 있던 친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인을 불러냈다.

“로앙 백작가에 내가 좀 만나자 하더라고 약속 잡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겠다고, 가서 엎드려 빌어서라도. 알았나?”

빈손으로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한참 윽박질러 쫓아낸 후, 그는 초조함으로 술잔을 채워 가며 하인을 기다렸다.

하인이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건 해가 까마득히 진 밤이 되어서였다.

“이틀 뒤에 시간을 비워 두시겠다 합니다.”

레만 자작은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다행히, 하늘은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라며 제 운을 자축하였다.

* * *

로앙가를 찾은 건 5년 만이었다. 공작과의 연줄을 확고히 하겠답시고 로앙 백작의 맹랑한 누이를 찾아왔던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백작의 누이동생은 어린애치고 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북부 대농장 탓에 광산 인력 수급이 힘들다고요? 한데 북부에서 대농장을 운영해 온 것도, 자작님의 가문에서 광산업을 유지한 것도 늘 있었던 일이잖아요. 오히려 자작께서 가문을 이어받은 이후부터 채광량이 몇 십 배나 늘어나지 않았던가요?>

오히려 통찰력은 여타 귀족들보다 한 보 앞서 있기도 했다. 몇 년 후 학술원에 찾아갔을 때, 조기 졸업한다는 말을 듣고선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부족한 건 자작이 지껄인 말에서 모순을 찾았음을 숨기지 않는 천진함 정도.

그 천진함 덕분에 자작은 큰 교훈을 얻었으니, 다시는 제 범죄를 스스로 누설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늘 만나게 될 건 그 어린 여자가 아닐 테지만,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

레만 자작은 기필코 사활을 다해 로앙 백작을 구워삶으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1층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친인척들이 고소를 취하하며 묶여 있던 자금을 돌려받았다더니, 5년 만에 찾아온 로앙가는 이전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해져 있었다.

집사가 그에게 내준 차마저 구경하기 힘든 값비싼 수입품이었다.

‘비단 형편이 좋아져서 이리 귀한 대접을 해 주는 것만은 아니겠지.’

분명 로앙이 제게 괜찮은 대접을 해 주는 걸 보면 아마 원하는 게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자산을 굴리기 위해 제 광산에 투자하고 싶은 걸지도.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백작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레만 자작.”

그러나, 값비싼 사치품으로 가득한 1층 응접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오랜만이네요.”

백작이 아닌 그의 어린 누이동생이었다.

황당함, 이어 불쾌함을 느낀 자작은 곧장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아무리 제가 이리저리 치이는 처지지만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고선 어린 누이에게 손님맞이를 시키다니.

엘리아는 자작이 표출하는 감정에 개의치 않고 재차 인사를 건네었다.

“잘 지냈나요? 이런. 영 좋아 보이지 않네. 수도 생활이 많이 안 맞나 봐요?”

“엘리아 양, 나는 분명 로앙 백작을 만나러 약속까지 잡고 왔네만.”

“걱정하지 말아요. 내 오라비는 지금 저택에 없고, 당신 볼일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으니까.”

“…….”

자작은 그제야 자신이 뻗댈 처지가 아님을 상기하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오만하게 굴어도 무서울 게 없던 시절이 고작 몇 년이었는데. 몸에 배기어 잠시만 마음이 흐트러져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흐흠. 흠. 엘리아 양께서……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모양입니다.”

태세를 바꾼 자작의 모습에 엘리아가 소리 내 웃었다.

“그럼요. 내가 당신의 귀인이 되어 줄 생각이에요. 지금만 해도 봐요, 다들 당신의 발끝 하나 허락하지 않는데 나는 귀한 시간을 내어 주고 있잖아요?”

무례할 정도로 거들먹댄 엘리아가 먼저 상석을 찾아가 앉았다. 얼떨결에 상석을 뺏긴 자작은 엘리아가 권한 자리에 앉고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항변할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나는 당신한테 보여 줄 선물도 준비해 놨는걸.”

“예? 선물이라니, 그게 무슨……?”

엘리아는 자작의 반응을 무시한 채 응접실 내부에서 대기하던 기사에게 데리고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쇠가 부딪치는 낯선 소리와 함께 문이 덜컥 열렸다.

응접실에 들어온 건 참으로 기괴한 몰골의 남녀 한 쌍이었다.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한 남녀는 팔에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입은 발음을 할 수 없도록 막아 둔 채였다.

“저것들은 대체 뭡니까?”

“어머. 정말 모른다고? 이상하다. 그렇게 큰돈 주고 사들여 놓고는 얼굴도 못 알아보다니.”

“사, 사들이다니 무얼……!”

레만 자작이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의 손에 붙들려 있던 남녀가 자작에게 달려들었다.

“히익!”

놀란 자작이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에 걸려 꼴사납게 넘어졌다. 천장만 보이는 상황에서 끔찍한 비명, 그리고 기사들이 그들을 다시 붙잡는 소리가 이어졌다.

엘리아가 혀를 차더니 호위 기사를 시켜 레만 자작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마치 맞은편에 선 지저분한 남녀처럼 끌려가듯 몸을 일으켜야 했다.

자작을 일으켜 세운 기사는 이어 그를 반강제로 끌어다 발광해 대는 남녀 앞에 세웠다. 자작이 가까이 끌려오자 입이 막힌 채 울부짖던 두 사람의 짐승 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공포에 질린 자작이 기사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자작을 붙잡은 기사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자작, 인사 나눠요. 오랜만에 보는 걸 텐데.”

짧은 시간 발버둥 치느라 기진맥진한 자작을 위해 엘리아가 그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미 자작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을 테지만.

“우리 기사들이 폐광산에서 후작을 찾아다니던 중 발견했어요. 광산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길을 잃고 미쳐 버린 불쌍한 이들이죠. 그래도 필요한 건 기억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자신들을 사들인 당신 이름이라든가. 어디서 살다가 억울하게 팔려 왔는지.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왔는지.”

“저, 저들이 정말…….”

“입을 막아 놔서 아쉽겠지만……. 당신 공개 재판 날 전부 들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자작을 붙잡고 있던 기사가 손을 놓자, 그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선 두 남녀가 응접실을 떠나는 걸 지켜보았다.

큰 소리를 남기고 문이 닫힌 뒤에야 자작이 정신을 차렸다. 황망한 눈으로 올려다본 시선 끝에 엘리아가 있었다.

천진하던 웃음은 이제 잔인하게만 보였다.

“……뭘 원하는 건가.”

“저울로 재어 봐. 네가 가진 것 중 무얼 올려야 균형이 맞을지.”

엘리아가 미소를 유지한 채 그에게 다가갔다. 도리어 해맑은 미소가 끔찍하여 바닥에 붙은 채 뒷걸음쳤지만, 뒤에서 그를 감시하던 기사가 다시금 자작을 붙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왜 공작가에서 그동안 저를 방치했는지. 왜 로앙이 순순히 그를 저택에 들였는지.

“반대편에 내가 올릴 건 배신의 대가로 치러야 할, 네 목숨이니까.”

끝없는 절멸이, 숨죽인 채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 * *

레만 자작이 도망치듯 떠나고 몇 시간 뒤, 아침 일찍 외출했던 로앙 백작이 돌아왔다.

“다들 너무한 거 아니야?”

애석하게도 다들 각자 일로 바쁜지라 그를 맞아 주는 이는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전부였다. 외젠은 얼굴에 서운한 티를 다 드러내며 제 집무실로 향했다.

“어머, 오셨어요?”

문을 열자 제 자리에 대신 앉아 일 처리를 하던 데이지가 가장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정신이 없어 오신 줄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데이지의 목소리에 그는 금방 서운함을 잊었다.

“데이지, 쉬어 가면서 해. 남은 건 루카스나 다른 애들 좀 시켜.”

보는 눈이 많으니, 외젠은 데이지에게 늘 하던 입맞춤 대신 손 한번 도닥이는 거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에도 애정이 뚝뚝 묻어나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슬며시 고개를 꺾어 두 사람을 외면했다.

“아침에 레만 자작이 다녀갔어요.”

“아…… 오늘이었던가? 어땠어?”

“어땠긴. 아주 잘 해결되었지.”

외젠의 물음에 대답한 건, 인사 한마디 없이 소파에 누워만 있던 엘리아였다. 평소 같았음 잔소리를 했겠지만, 그보다 레만 자작이 다녀간 일을 묻는 게 급했다.

“설마, 지난주에 하기로 한 거 그대로 했다고?”

“그럼 장난인 줄 알았어?”

엘리아의 대꾸에 외젠이 급히 뒤돌아 앉아 있던 두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외젠은 그만, 위로는커녕 상처만 후벼 팔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보좌관 루카스와 애나는 ‘레만 자작의 광산에서 탈출한 광부’ 흉내를 내기 위해 칠한 검댕을 다 지워 내지 못해 얼굴이 온통 얼룩덜룩한 상태였으니까.

“진짜 했다고? 그…… 탈주한 사람인 척하는…….”

“들어 봐. 글쎄 루카스랑 애나가 얼마나 명연기를 했는지 알아? 극단에서 연기 선생 해 줄 사람을 데려오길 진짜 잘한 거 있지. 솔직히 처음 연습 시작했을 때는 망했다 싶었는데.”

“아가씨…… 제발…….”

루카스는 수치스러워하며 거뭇거뭇한 얼굴을 다시 제 손 안에 묻어야만 했다.

반면, 얼마 전부터 한스의 추천으로 로앙에서 일하기 시작한 새 보좌관 애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물론 미친 사람 흉내를 내는 건 부끄러웠지만 덕분에 연기 선생으로 온 잘생긴 배우와 인연을 맺었으니까.

“외젠, 그보다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되었어?”

“보자마자 일 이야기야? 나도 좀 쉬자.”

“내가 바빠서 안 돼. 두 시간 후에 나가야 한단 말이야.”

엘리아의 채근에 외젠은 한숨을 쉬곤 옷만 갈아입고 돌아오겠다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사이 엘리아도 이야기 끝나는 대로 외출할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고 왔다.

다시 응접실에 마주 앉은 외젠에게 엘리아가 먼저 레만 자작을 감쪽같이 속여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어 외젠은 아침 일찍부터 학술원에 다녀온 경과를 공유했다.

“학술원을 다 뒤집어 가며 확인했는데, 아버지가 학술원 측과 교류하던 시절 학자들은 대다수 수도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더라. 아무래도 한 명씩 수소문해 가며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어. 혹시 어머니나 아버지와 편지 주고받은 게 있는지, 크라우제 후작에 관해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말이야.”

두 사람은 크라우제 후작이 1황자를 살해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부모님의 주변을 들쑤시는 중이었다.

“외젠, 당장 성과가 없어도 실망하지 말자. 어차피 증거가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엘리아는 여상한 태도로 외젠을 달래었다. 혹 아쉬움 담긴 체념인가 얼굴을 살폈는데 어린 누이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외젠은 사실 더 바라는 게 없었다. 억울한 두 분의 죽음을 공론화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엘리아가 아픔을 이겨 내 씩씩한 모습을 되찾았으니까.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 좀 일찍 가 있어도 괜찮을 테니까.”

“엘리 너, 오후 일정이 뭐길래 그렇게 차려입고 나가는 거야?”

대강 서로 할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외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가 아무리 동생을 몰라도, 큰일 아닌 이상 저렇게나 부지런할 애가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엘리아는 대답 대신 씩 웃고는 “다녀올게!”라는 맑은 인사만 남기고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외젠이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신나서 나가는 걸 보니 보나 마나 내일 점심 지나야 돌아오겠네.’

씩씩해져서 좋긴 한데…… 집에만 있다고 구박했던 시절이 그리울 줄이야.

외젠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며 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 * *

저녁놀이 하늘을 뒤덮은 시간. 공작가의 집사가 멀찍이서 다가오는 마차에 벌써 긴장을 집어먹었다.

공작가에서 일한 지 몇 달째. 대다수 일에는 적응했지만, 아직 마차를 타고 들어오는 주인을 대하는 것만큼은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한스 경 말로는 예전에는 더 날이 서 있던 분이라 하셨는데, 그럼 대체 전에는 어떤 분이셨다는 건지…….’

그는 공작의 먼 친척 되는 모 자작가에서 보좌관 업무를 하다가 수도에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라스페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

얼마 전까지 가족이나 다름없던 집사를 잃고 상심에 빠져 있었다는 것 정도가 그가 아는 전부였다.

그리고 최근에 추가된 정보는, 사람들이 전부 공작을 두고 냉혈한이라고 수군대지만 정작 공작은 무엇보다도 제 약혼자를 끔찍이 아낀다는 거였다.

“공작님, 그…… 엘리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하여 에드문트가 막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는 지체 없이 엘리아 아가씨가 저택에 있다는 소식부터 전했다. 역시나 평소 눈도 안 마주쳐 주던 주인께서 바로 반응을 보였다.

“두 시간 전에 오셨고, 주인님께서 일이 바쁘실 테니 부러 알리지 말라 하시었습니다. 한스 경과 이야기 나누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에드문트는 집사의 보고를 받으며 저택에 들어섰다. 평소보다 빨라진 그의 걸음을 열심히 뒤쫓던 집사가 2층에 다다라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주인님, 그쪽이 아니라……. 침실에 계십니다.”

집무실 문 앞에 서려던 에드문트가 곧장 걸음을 멈추었다. 집사는 그가 짧게 멈칫거리는 모습에 황급히 준비해 둔 변명을 꺼냈다.

“그게, 식사 끝나고 아가씨께서 쉴 곳을 청하셨는데 3층 손님방은 오늘따라 불을 아무리 때어도 한기가 도는 바람에 사용하기가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침실로 모셨습니다.”

집사는 무척 긴장한 채로 변명을 쏟아 냈지만, 에드문트는 알았다고 짧게 대답할 뿐 딱히 추궁하려 들지 않았다.

집사는 공작이 침실로 들어선 뒤에야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짧은 안도감 뒤에 느낀 건, 죄책감이었다.

“후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공작이 집무실 문 앞에서 주춤했던 순간을 떠올린 집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다고 과거의 잔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혹시 내가 침실에서 잠들거든, 그래서 에드문트가 3층에서 자겠다고 하면 그 방은 엄청 추워서 누가 자게 되거든 내가 속상해할 거라고 설득해 줘. 집사만 믿을게. 알았지?>

주인님의 약혼자께서 당부하시던 목소리가 사라질 리도 없는데 말이다.

* * *

에드문트가 침실에 들어서자, 호위 기사가 묵례를 남기곤 방을 벗어났다. 엘리아가 오늘처럼 침실에서 그를 기다리는 데에 모두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가끔 에드문트는 이 모든 상황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제가 오기 전 미리 따듯하게 데워 둔 침실이라든가.

그 온기 사이에 감도는 옅은 꽃내음이라든가.

너른 소파 위에 길게 누워 잠이 든, 제 연인의 모습이라든가.

에드문트는 천천히 엘리아에게 다가갔다. 잘 준비까지 마친 채 서류를 보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엎드려 자느라 볼이 눌린 모양새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당장이라도 저 뽀얀 뺨을 입술로 누를 때의 촉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굳이 기억을 떠올릴 필요 없이 여린 살을 탐할 수도 있었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에게 있어 서로 허락을 구하지 않고도 잠든 얼굴에 입 맞출 수 있는 연인이므로.

하나 제 권리를 앞세워 탐닉하는 대신, 그는 소파 앞에 무릎 꿇고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얼굴이 늘 에드문트를 기껍게 하는 건 아니었다. 엘리아가 눈 감은 모습을 바라볼 때면, 지금처럼 갈증이 일기도 했다.

그건, 욕정보다도 훨씬 원초적인 갈망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에드문트는 이 갈망을 해소하는 방법을 몰라 여자에게 파고들기에 급급했다. 맥박이 느껴지는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 이를 세우는 짐승 같은 짓을 벌이고 나면 조금이나마 갑갑함이 가셨다. 하여 어리석던 과거의 그는 제가 느끼는 게 그저 욕정인 줄만 알았다.

하나 이제 그는 제 감정을 이해하는 건 물론이요,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도 알았다.

에드문트는 무릎 꿇은 채 엘리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짝 얼굴을 붙인 채, 옅은 숨소리를 듣고자 제 숨을 멈추었다.

들이쉬고 내쉬는, 작디작은 호흡을…… 살아 숨 쉬는 소리를 확인하자 텅 빈 속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음을, 자신이 지킨 생을 확인하고 싶었음을.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재차 엘리아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가 한 번 잃었던 생이었으니 더욱 간절했고 황홀했다.

이 숨에, 영속성을 부여할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스스로를 목 졸라 죽이리라.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도 마다치 않으리라. 에드문트는 스스로를 잔인하게 죽게 하는 상상을 할수록 깊은 환희를 느꼈다.

제 숨을 기꺼이 양도하고 싶은, 엘리아를 향한 마음을 자각하는 행위였으므로.

에드문트는 몇 번 더 엘리아의 숨소리를 기억에 새긴 뒤 입을 열었다. 미뤄 두었던 숨을 몰아쉬는 것보다도, 말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엘리.”

짧은 애칭이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바닥에 낮게 깔렸다. 그러자 엘리아가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난 티를 보였다. 에드문트는 보채는 대신 참을성 있게 엘리아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영원을 닮은 기다림이 이어지다 마침내, 주홍빛 눈동자가 반짝 나타나 주었다.

“으응……. 에디, 왔구나.”

잠에서 깬 엘리아가 뜨다 만 눈을 하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곧장 에드문트를 향해 팔 뻗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당연스러웠다. 에드문트 역시 기껍게 엘리아를 받아 끌어안았다.

작고 따끈한 몸을 끌어안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은 달아오른 채였다. 그러나 남자는 당장 욕구를 채우는 대신, 제 허벅지 위로 올려 앉힌 몸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입술을 깊게 맞대는 행위보다 느리지만, 따듯한 포옹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천천히 그의 허전함을 달래 주었다.

“에디, 보고 싶었어.”

엘리아는 잠이 덜 깬 몸을 끙끙거리며 움직인 끝에 에드문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꼿꼿이 상체를 세우기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아서, 대신 간신히 닿은 그의 턱 언저리에 입을 맞추었다.

쪽쪽 쪼는 얕은 애정 표현이 한 번만으로 끝날 리 없었다.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단단히 잡아 주어 마음껏 저를 탐하도록 배려했다.

“으음…….”

연이은 입맞춤으로 엘리아의 숨이 달뜨기 시작하자, 그제야 에드문트가 차례를 이어받았다.

이마를 시작으로 점점이 내려오던 그의 애정 표현이, 입술을 머금고 숨을 받아 마시는 일련의 행위로 넘어가 점점 깊어질 것을 예고했다.

엘리아는 예정된 행위에 기대감을 내비치며, 손가락으로 그의 옷을 바짝 쥐었다.

한데, 깊게 맞물리던 입술이 별안간 엘리아를 떠나 버렸다. 한참 열기에 취해 있던 몽롱한 얼굴에 상실감이 번졌다.

“왜……?”

“잠시만.”

에드문트의 손이 허리에서 떨어져 나와 엘리아의 얼굴을 감쌌다. 역시나, 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그는 엘리아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히곤 의원을 불러냈다. 엘리아가 열이 있다는 말에 공작가의 의원이 만사 제쳐 두고 침실에 찾아왔다.

“아가씨께서 큰 병세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곧 가을인지라 낮과 밤으로 기온이 크게 달라지는 탓에 가벼운 몸살 증세를 보이시는 겁니다.”

의원은 엘리아에게 몸이 추운 계절에 적응할 때까지는 충분히 쉴 것을 권했다.

엘리아는 이깟 미열은 자고 나면 금방 나을 거라며 항변해 보았지만, 에드문트의 설득에 못 이겨 결국 로앙가에 내일 오전 일정을 취소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근래 무리한 일정이 많았으니 며칠 쉬도록 해.”

“안 힘들었는데. 오늘 일정이라곤 여기서 서류 뒤적거리는 거랑 레만 자작 만나는 게 다였어. 그 인간 속여 먹을 생각에 들떴으면 모를까. 이야기 아직 못 들었지?”

엘리아는 얌전히 그의 침대에 누운 대신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다.

북부에서 광산 인부들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말에 즉석에서 떠올린 계책이었는데, 황당하게도 레만 자작에게 먹혀들어 간 모양이었다.

혹여 실패할 걸 대비하여 몰래 다른 방편을 준비해 두었던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고작 “축하해.”라는 말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엘리아는 더없이 뿌듯해했다.

문장이 길지 않았지만 그가 한 자 한 자 늘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 에디. 내 이야기 떠드느라 정신없어서 아직 옷도 안 갈아입은 줄 몰랐어. 어서 다녀와.”

“약 먹고, 자는 거 본 뒤에 다녀올게.”

“약은 지금 먹을 거고, 자는 건 너 잘 준비 끝낸 다음에. 그러니까 어서 씻고 와. 응?”

에드문트는 저항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순히 엘리아의 요구를 받들었다. 그의 등 뒤로 엘리아가 “다녀와.”라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

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여 에드문트는 평소보다 서둘러 몸을 씻고 돌아왔다.

사실 엘리아가 저택에 머무는 날이면 그는 무얼 하든 서두르게 되곤 했다.

침실로 돌아오니 엘리아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몸을 따듯하게 하는 약을 먹고 금방 노곤해진 모양이었다.

에드문트는 미열기를 보인 엘리아를 두고 잠드는 대신, 열이 오르지는 않는가 확인하며 밤을 새우고자 했다.

“후우…….”

낮은 의자를 끌고 와 자리를 잡은 뒤, 에드문트는 그답지 않게 한숨을 흘렸다. 복잡한 속을 헤집고 빠져나온 한숨은 짙고 또 무거웠다. 새근새근 잠이 든 엘리아만 홀로 평온했다. 남자의 속도 모르고.

흐리게 켜 둔 등불에 비친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제 손으로 체온을 확인하는 순간마다…….

남자가 어떤 감정에 시달리는지는 모를 테니, 그 홀로 억눌러야 했다.

애초에 그의 탓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은 건 에드문트였다. 엘리아는 그저 에드문트와 조금이라도 오래 함께하고 싶을 뿐이고, 그 역시 같은 심경이었으니까.

그러니 구태여 제가 나서서 함께할 시간을 잘라 낼 이유 따위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밤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오늘도 연인의 곁에서 뜬눈으로 버텨야 할 그에게는, 무척이나 긴 밤이 될 테지만.

한때는 목숨과 바꾸어 얻고 싶었던 시간임을 잊지 않았기에. 기쁘게 시간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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