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이야기의 끝
해가 쨍한 여름날이었다. 한스 마이어는 햇빛이 고픈 들짐승처럼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아침 시간이라 햇빛이 견딜 만했던지라 그는 그대로 몇 시간이고 더 버티고 앉아 있을 심산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바닥을 울리며 가까워지는 마차 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점심때까지 다리 한번 펼 줄 모르고 있었으리라.
‘뭐지? 오늘 누가 찾아온다는 말 없었는데. 설마…… 아니겠지.’
잠시 후. 저택 앞까지 들어온 마차가 멈추었는지 땅을 둥둥 울리던 진동이 멎어 들었다. 마차를 확인할 겸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대관절 얼마나 쭈그려 앉아 있었던 건지, 발바닥부터 하체가 찌르르 울려 휘청이고 말았다.
한스는 그냥,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젠장, 다음부턴 의자라도 갖고 와야……. 아니, 다음부터 그냥 나오질 말아야지.’
잠시 피었던 기대감도 흙 위에 거름으로 던져 버렸다. 이참에 매일 아침 정원에서 청승 떨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짓도 끝낼까 싶었다.
애초에 참 바보 같은 짓거리였다.
정원에 새로 심은 꽃나무가 장맛비를 이기지 못해 죽건 말건 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뿌리가 다 드러난 어린나무가 밑동부터 썩어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죽으면, 새로 구해다 심으면 그만일 텐데.
‘후우. 가서 점심 먹고 일이나 해야지.’
저택에 들어가면 또 일거리가 가득 쌓여 있을 테고, 우울함 가득한 저택에 처박혀 있다 보면 또 금방 내일이 되겠지.
내일은, 절대 정원에서 궁상떨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는데…….
일렬로 심어 둔 꽃나무를 지나, 막 정원을 벗어나니 한스의 앞에 체구가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풀어 헤친 긴 머리칼이 햇빛 아래에서 잘게 부서져, 마치 금빛 꽃을 가득 피워 낸 꽃나무 같았다.
“한스.”
엘리아였다. 그의 주인께서 기다리시길 체념하고, 그럼에도 저는 포기하지 못해서 내내 기다렸던 사람이 마치 환영처럼 그의 앞에 나타났더라.
“뭘 그렇게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봐요? 아, 내가 주문했던 나무 다 심었네요.”
한 달이 넘는 시간이었다.
초여름의 절반은 멍청하게도 ‘아가씨가 언제쯤 돌아오셔서 두 분 행복한 모습 보여 주시려나.’라는 헛된 기대와 함께 보냈고, 남은 절반 동안은 간절한 바람으로 채워 왔다.
제발 오시기를. 돌아오겠다는 말은 그저 하지 않았을 뿐, 오시겠지.
이렇게 많은 가을 꽃나무를 심어 두고 설마 안 오시진 않겠지.
불안함 전부 날려 줄 바람을 고대해 왔다.
매일 아침 공작에게 보고를 올리고 나면 저까지 불안한 마음을 어쩔 줄 몰라 그길로 정원에 나왔다.
혹여 이것들 죽어 버리거든 아가씨가 돌아오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불안감에 휩쓸려서……. 흙 묻는 거라면 질색하는 성격에도 직접 뿌리 위를 도닥거리곤 했다.
장마를 견뎌 낸 꽃나무들이 아가씨 오실 때까지 무사히 뿌리 내리길 바라며.
돌아온 아가씨가 공작님과 함께 심은 나무 앞에서 웃는 걸 보고 싶어서.
“어떻게…….”
그렇게나 기다렸던 사람이었는데, 여름이 죄다 비껴간 듯 희고 말간 얼굴을 보는 순간.
“대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구실 수가 있습니까.”
화가 났다. 원망스러웠다.
“저분을 버려두고는……. 차라리 돌아오시지를 말든가요. 이렇게 오실 거면, 돌아올 거라 말이라도 남기고 가시든가요. 꽃나무를…… 저깟 죽어 버리면 끝인 것들 남겨 두는 거로 위안 받으랍시고……!”
“한스.”
악문 턱 사이로, 설움이 북받쳤다.
다행히 스물일곱의 남자는 눈물 흘려 본 적이 있으니 참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꼴사나운 표정을 보일지언정 간신히 얼굴 보기 무섭게 눈물 뚝뚝 흘려 대는 건 어찌 막을 수 있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의 기분을 짐작한 엘리아가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그러더니 미안하다는, 그깟 말 한마디로 저를 원망하는 마음을 다 빼앗으려 들었다.
“에디가 아닌 당신한테 하는 사과예요. 미안해요, 한스. 많이 원망했을 거 알아요. 내가 또 혼자 에디 옆에 당신만 두고 갔으니까. 그래도 늦었지만, 에디를 만나러 왔으니, 그러니 용서해 줄 거죠?”
손수건과 함께 내민 사과의 말을 듣는 순간, 한스의 눈에만 벌써 하루가 다 지나가고 노을이 비쳤다. 엘리아는 그의 눈동자를 못 본 척해 주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저택의 2층, 에드문트가 있을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에디는 괜찮은가요? 혹시 아직 몸이 좋지 않은 건 아니죠?”
여전히 환각을 보느냐는 물음을 에둘러 표현하자 한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엔 조금……. 그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셨지만, 이후에는 그저 그리워하셨을 뿐입니다.”
“…….”
“아가씨를 정말 많이 그리워하셨습니다.”
제 양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말에 엘리아는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은 못하신다더니.’
한스는 엘리아의 속내를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괴로움을 삭이는 걸까, 아니면 정말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일단 두 분 모두 1층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알려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한스가 엘리아에게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부디 이별하시진 마시기를.
당신들께서 나누었던 아름다운 사랑을 과거에 처박지 마시기를 간곡히 원할 뿐이었다.
“아니요, 한스. 다른 곳에서 에드문트를 만나고 싶은데, 부탁해요.”
“따로 원하시는 곳이라면, 혹시 서고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음. 거기도 나쁘지 않지만, 예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어서요.”
엘리아는 짧게 웃더니 제가 원하는 장소를 말했다.
한스는 그만, 엘리아가 빌려준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공작가의 저택 1층. 조용한 가운데 에드문트의 발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긋하지도 않은 발걸음이 점점 공작가 저택 깊은 곳으로 향했다.
지금 그는 저택의 가장 깊고 어두운 지하 석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공작님, 엘리아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집사가 로앙가의 마차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한 데 이어, 한스가 에드문트에게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이 엘리아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에드문트를 혼란케 하기 충분했다.
<공작님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응접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한스는 잠시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꼭 지하 석실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아라는 이름이 타인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일었거늘. 저와 이야기 나누겠다고 찾아왔다니.
게다가 하필…… 지하 석실이라니.
<다른 말은 없었는가.>
<데이지 슈미츠 양을 통해 공작가에 전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시어, 두 분 말씀 나누시는 동안 제가 따로 전달받기로 했습니다. 일단 원하시는 장소는 공작님의 허가가 필요하다 말씀드리고 1층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혼란스러웠다. 또한 두려웠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왜 하필 그곳이어야 할까.
해가 잘 들고 따듯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말만 뱉고 떠날 심산일까? 혹은 그를 시험하고 싶은 걸까.
의중은 알 수 없었고, 두려움만 커져 그를 잠식해 갔다.
엘리아가 떠난 후, 에드문트는 단 한 번도 지하 석실을 찾은 적이 없었다. 다시 환각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으니까.
하나 에드문트에게는 엘리아의 요구를 거절하는 선택지 따위 존재치 않았다. 가야만 했다. 설령 엘리아가 자신과의 관계에 완전한 끝을 고하러 왔을지라도.
<석실 내부를 먼저 치우게. 그리고 앞에는 기사를 배치하도록.>
에드문트는 제가 자해를 할 가능성을 대비해 공간을 비운 뒤 엘리아를 최우선으로 보호할 기사들을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전후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집사 대신 한스가 에드문트의 지시를 받들었다. 그러고는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뿐인 위로조차 하지 않고 집무실을 떠났다.
한스가 엘리아에게서 그 어떤 긍정적인 언질도 받지 못했음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에드문트 역시 아마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는 것이 옳으리라.
그는 홀로 집무실에 남아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노력했다.
‘환각은 아직 보이지 않아. 그러니 괜찮겠지.’
적어도 엘리아의 앞에서 또 환각에 미쳐 혼잣말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대체 어떤 얼굴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엘리아를 맞이해야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엘리아를 맞이하기 전 스스로의 몰골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마음은 분명 긴장, 초조함, 불안함 등의 감정으로 혼란스러웠으나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보았던 한스의 표정이라도 흉내 내 볼까. 어설프게 눈꼬리를 내려 보다가 그만두었다. 거짓 표정을 지어 봐야 엘리아가 눈치챌 테니까.
아니, 그런 노력이라도 보이는 게 좋을까. 그러면 이번엔 잡을 수 있을까. 곁에 있게 해 달라고 빌어 보았지만 떠났던 여자를 잡으려면 무얼 더 해야 하는 건지 전부 어렵기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몸서리쳤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한번 들을 수 있기를 얼마나 소망해 왔던가.
하물며 제가 쫓아가 엎드려 빌기도 전에 엘리아가 그에게 몸소 찾아와선 다시 매달릴 기회를 주는 셈이었다.
‘이번에는 잡을 수 있을까. 용서받을 수 있다면, 혹시 나를 다시 받아 준다면…….’
이기적인 그의 마음은 체념하던 시간을 전부 내던지고는, 다시금 욕망하고 만다.
‘네가 다시 나를 허락해 준다면. 그럼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전부 잃게 되더라도 무엇이든 하겠어. 다시는, 버려지지 않을 수 있도록.’
치솟은 갈망이 애써 쌓아 둔 체념을 물어뜯도록 내버려 두곤 걸음을 옮겼다. 엘리아를 어떤 말로 붙잡아야 할지 고뇌하며 보낸 시간은 금세 그를 목적지 지척에 데려다 두었다.
“공작님, 준비 다 마쳤습니다.”
저택 끝에 있는 지하 계단을 걸어 내려가니 서늘한 공기가 그를 휘감았다. 저택에 있던 한기가 여름을 피해 죄다 이 석실로 숨어 버린 건지. 입구에서 뻗어 나오는 찬 바람이 계단을 내려오며 느꼈던 것과는 비할 바 없이 강했다.
“공작님, 석실 내부는 전부 확인하였고 등불을 켜 시야를 확보해 두었습니다. 안쪽 깊숙이 들어가도 큰 소리는 여기까지 들리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희를 불러 주십시오.”
에드문트는 만약 내부에서 수상한 큰 소리가 들리거든, 엘리아의 안위를 가장 우선하라고 재차 당부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집사의 장례를 준비하는 동안 드나들던 사용인들이 말끔하게 치워 먼지 하나 없었다. 미리 켜 둔 등불에 의지하며 직선을 그으며 걷자, 곧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의 부모가, 또 그들의 부모가 잠들어 있으며……. 언젠가 에드문트가 썩어 갈 몸을 의탁해야 할 공간이었다.
사람 손을 거의 타지 않는 내부는 시간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에드문트는 이곳에 올 때마다 현실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장례를 준비하는 동안 시신을 안치해 두는 중앙 자리에는 당장이라도 죽은 여자가, 혹은 잠시 이곳에 머물렀던 집사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에드문트는 죽은 사람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석실을 둘러보았다.
벽에 조각된 석상들은 장식용 검이 전부 치워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드문트는 손이 비어 있는 장식물을 보며,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한 감상을 느꼈다.
상실감……. 그는 마찬가지로 빈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장갑을 두고 나왔다는 걸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가져와야 할까.’
실내에서 장갑을 고집하지 않은 지는 꽤 되었다. 그러니 장갑이 없다고 불안한 건 아니었지만…… 오해할까 봐, 그게 무서웠다.
장갑이 없는 제 손을 보고는 엘리아가 이제 그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저 없이 살 수 있겠거니 안심하고 뒤돌아 떠나 버린다면?
역시, 장갑을 가져와야겠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 추해 보이고, 저를 비참하게 만들어도 좋으니 엘리아가 저를 가엾게 여길 만한 거라면 뭐든 챙겨 와야 하리라.
제가 흘린 눈물에 우그러진 종이를 가지고 내려와서, 네가 없는 긴 시간을 두고 간 흔적으로 버텼다고 고백한다면. 다 아문 입술을 새로 찢어선 네가 너무 그리워서, 그래서 참을 수 없었다고 매달린다면.
또한 아주 오래전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매일 밤 네가 잠든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려 곱씹고 또 곱씹었다고 말하면…….
어쩌면. 조금은 그를 연민해 주지 않을까.
엘리아의 앞에서 무릎 꿇고 절박함을 토로할 생각을 하자, 몸이 떨렸다. 분명 흥분감이었다. 이성은 추한 몰골을 진열하려는 다짐이 어째서 제게 희열 느끼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너무나 선명한 감정이었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장갑도 없어 보호받지 못한 손으로 간신히 벽을 짚어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생각에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소리가 들렸다.
몇백 년 된 지하 석실에 유일하게 세월에 흔적이 남아 있는,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였다.
점점 더 선명해지던 발걸음에 에드문트는 손으로 벽을 세게 긁어내렸다. 손끝이 벗겨질 정도로, 아주 세게 마찰시키길 반복했다.
점점이 매달린 통증이 기쁘게 대답해 주었다. 전부 현실이라고.
“에디.”
네가 기다렸던 여자, 사랑하는 사람, 무수히 많은 감정을 알게 되었음에도 한 달 남짓의 시간을 오로지 절절한 그리움으로만 채우게 했던…….
절대로, 설령 오늘 다시 저를 버릴지언정 원망할 수 없는.
“안녕, 에디.”
열여덟의 엘리아가 그를 찾아왔노라고.
* * *
석실을 찾아온 엘리아의 인사에, 에드문트는 답인사를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웠다. 찾아왔다는 소식은 물론이고, 석실에 홀로 들어온 모습조차.
‘내가 처음 로앙가에 찾아갔을 때, 엘리아도 이런 심경이었을까.’
그때 엘리아가 보여 주었던 놀란 표정을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잠시 멈추어 선 채 인사를 건넨 엘리아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벽이 만든 그림자에 파묻혀 있던 엘리아의 전신이 밝게 드러났다.
못 본 새 좀 더 길어진 머리칼, 여전히 새하얀 얼굴을 지나자 한 손에 가방을 든 엘리아의 가는 팔목이 보였다. 다행히 상처는 아물었는지 손목에 붕대는 없었다.
‘옷이…….’
그리고 엘리아가 입은 연분홍빛 실내복은, 분명 공작가 저택에 두고 갔던 옷이었다.
에드문트의 시선을 느낀 엘리아가 바람을 흉내 내듯 하늘하늘한 옷감을 잡아 팔랑였다.
“이거? 기다리는 사이에 갈아입었어. 수도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여기로 온 거라서.”
엘리아는 참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옷을 두고 간 걸 잊지 않았구나.’
하나 에드문트는 감격했다. 고작 필요해서 찾아 입었을 옷 한 벌일 뿐인데.
에드문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삭이는 사이, 엘리아는 넓은 석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공작가에 드나든 지 10년도 훨씬 넘었는데,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는 곳이니까.”
“하지만 너는 종종 찾아왔다면서.”
석실은 여느 귀족가의 응접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풍스러웠다.
중앙에 높이 튀어나온 관 받침대, 그리고 사방에 배치된 조각상만이 이곳이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임을 알려 주었다.
엘리아는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공간 중앙으로 다가갔다. 관을 올려 두는 중앙 받침대를 한 걸음 앞두고 멈추어 섰다.
이내 시선이 바닥을 살폈다.
에드문트가 이전에 남긴 새카만 핏자국은 전부 지워져 있었는데도, 엘리아는 마치 그가 남겼던 피 웅덩이가 보이는 것처럼 오랫동안 한곳을 응시했다.
“네가 꿈을 꾸던 때 석실 이야기를 종종 했어. 춥다고, 그리고 죽은 엘리아가 뒤에 있는데 돌아볼 수가 없다고. 그래서 한 번쯤 와 보고 싶었어.”
에드문트는 엘리아에게 제 죽음에 대해서는 상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견디지 못해서 따라갔다는 짧은 설명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는 그가 환청과 대화할 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추측할 수 있었다.
에드문트가 이곳에서, 안치된 아내의 시신을 보고 목숨을 끊었으리라는 걸.
“네게 의미가 있는 장소이니까. 그래서 이곳에 오면…… 어쩌면 나 역시 스무 살이 되어 너와 결혼하고, 이곳에서 8년간 살았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했고, 또한 궁금하기도 했다. 만약 그 10년의 기억이 제게도 돌아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았던 열여덟의 엘리아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걸까.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가운데 엘리아는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제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기억할 수가 없나 봐.”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목소리에서 쓸쓸함을, 안타까움을 읽었다.
<직접 와서 보면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네. 처음 와 본 곳 같아.>
그건, 엘리아가 이전에 호수에서 보였던 모습과 무척 닮아 있었다.
“엘리.”
에드문트는 알려 주어야 했다. 알려 주고 싶었다.
“설령 기억이 남아 있더라도 다시 떠올리려 하지는 마.”
“왜?”
“네겐 괴롭기만 할 기억일 테니까. 내가 전부 집어삼켜 재만 남겼다고 했으니까.”
“……그래. 그렇게 말했다고 했지. 네가 마음을 전부 집어삼키기만 하고 돌려주지 않았다면서 화를 내곤 떠나 버렸다고.”
잠잠하던 엘리아의 목소리에 가는 떨림이 느껴졌다.
석실에 들어온 후 줄곧 비켜 가 있던 시선이 맞닿는 순간.
“미안해.”
높게 쌓인 눈이 햇살에 녹아 바스러지는, 그런 소리가 났다.
“아마…… 네 아내도, 당시엔 네가 미웠을지라도 나중에는 후회했을 거야. 나처럼.”
차가운 돌바닥 위에 툭툭, 물방울이 낙하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에드문트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에디, 미안해. 정말 많이 후회했어.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서 네게…… 같은 고통을 두 번이나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는데. 그렇지만 견딜 수가 없었어. 너무 혼란스러워서 널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랐어.”
에드문트도 느꼈으리라.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떠나게 했던, 그때의 배신감이나 슬픔 따위의 감정은 이미 다 녹아 사라졌다는 걸.
“네가 너무 미웠어. 나는 그저 네가 꿈을 꾼다고 여겨 왔으니까. 깨어나거든 전부 현실이 아닌 꿈이었을 뿐이라고 알려 주면 될 거라고 믿으며 기다렸는데…….”
엘리아는 그를 원망했고, 동시에 그를 미워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에드문트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존재하던 엘리아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죽을 만큼 사랑해 다시 엘리아에게 돌아왔을 뿐이었다.
<엘리, 너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너를 죽은 아내 대신으로 여기며 고백한 적 없었어.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단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어.>
그는 진심으로 열여덟의 엘리아를 사랑했고, 애초에 그가 상실한 사랑 역시 엘리아였다.
다만 다른 기억을 가지며 마치 타인처럼 갈라져 버렸을 뿐.
엘리아가 스스로 자신이라 인정하지 못했을 뿐.
그러니 남자에게 물을 죄라고는 그저 절박하게 사랑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에드문트에게 엘리아가 제멋대로 기대했고, 무턱대고 감당하겠다고 덤비었다.
사랑했기에, 아무리 고난이 예상되어도 엘리아는 덤벼들 수밖에 없었다.
“내 멋대로 네 고통을 꿈이었으리라 단정 지었으면서 꿈이 아니었다는 말에 배신당한 피해자처럼 굴었어. 네가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 했으면서 정작 알게 된 뒤엔 도망치고 말았고.”
달아났다. 하지만 차마 사랑은 두고 갈 수가 없었고,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그리하여 엘리아는 겨우 제 흔적만 둔 채 떠나고 말았다.
자주 입었던 실내복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게 했고, 그의 입술에 남은 제 흔적이 지워지는 게 싫어서 협탁 위 약병을 숨겼다.
장식장에는 술병 대신 오르골을 두었다. 그를 잠들게 하던 잔잔한 피아노 곡 대신, 연인들을 위한 춤곡으로 바꾸어 놓았다.
또 잊고 간 척 그를 위해 준비했던 글들을 전부 가방에 넣어 두고 왔다.
돌이켜 보니 얼마나 부끄럽던지. 또 얼마나 비참하던지.
하나 당시엔 절박했다.
그리고 떠나온 뒤에야 인정할 수 있었다. 질투심이었음을.
“네가 죽을 만큼 사랑했다던 여자를 도저히 또 다른 나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이었어. 그래서 네가 미웠고, 스물여덟이었다던 여자까지 미웠어.”
그러나 엘리아는 말했어야만 했다.
“미안해. 아무리 혼란스러웠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고 갔어야 했는데. 너를 상처 입히진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나도 다를 바가 없었던 거야. 널 상처 주고 떠난 스물여덟의 엘리아와, 다를 바가…….”
눈물이 자꾸 끼어들어 엘리아의 말을 훑어 먹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뭉그러진 사과를 이어 갔다.
“믿어 줘. 공작가를 떠난 뒤에 정말 많이 후회했어. 그리고 스물여덟의 엘리아를 또 다른 나라고 인정하려고 노력했어. 왜냐면…….”
엘리아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에드문트에게 그대로 보이는 것도 모자라, 제 추한 속까지 드러냈다.
“왜냐면 네 사랑이 갖고 싶었으니까.”
죄책감을 고백했을 때보다, 염치없이 다시 돌아와 그의 앞에 섰을 때보다 더한 비참함이 찾아왔다.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 오직 그에게만 들려줄 수 있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고해하며 자신을 옥죄던 죄책감에서 도망쳤다.
“네게 돌아와 말해 주려고 했어. 스물여덟의 엘리아는 나와 같은 사람이고, 절대로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널 위로해 주면……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줄 거라 기대했어. 죽은 여자가 받은 사랑도 전부 내가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자, 그제야 엘리아가 제 손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새하얀 팔이 전부 젖어 투명하게 빛났다.
“너를 버리고 달아난 주제에, 전부 갖고 싶어 미쳐 버릴 것 같았어. 네가 사랑했던 여자에게 주었던 사랑마저 너무 갖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어.”
“어째서?”
엘리아의 속죄를 듣고 있던 에드문트가 물었다. 목소리에 담지 못한 의문은 대신 그의 손에 맺혔다.
주먹 쥔 손이 희게 떨렸다.
“나조차, 스물두 살인 채로 다시 깨어났던 나조차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죽은 뒤 새롭게 얻은 삶이라니. 차라리 그가 내내 미쳐서 서른두 살까지 살아왔다고 말하는 편이 설득력 있었다.
그럼에도 에드문트가 이 세상을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엘리아 로앙.
그의 죄, 후회, 사랑.
“엘리, 오직 널 욕망하여 감당하기로 작정한 세상이었어. 그래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에 순응한 것뿐이야.”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혈흔이 묻은 검, 새카만 핏자국이라는 조악한 근거에 만족하곤 더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네가 억지로 받아들여 줄 필요 없어. 내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미쳐서 떠든 말일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받아들여 주려는 거야.”
한데 엘리아는, 그의 의문이 일고의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숨에 대답했다.
“널 믿으니까. 네가 거짓말할 리 없고, 실제로 네가 겪은 일을 고백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에드문트의 필체에 남은 흔적, 달라진 모습. 그 작은 근거에 만족하곤 더 의심하려 하지도 않았다.
“네가 전부 일어난 사실이라고 받아들였는데 내가 멋대로 그걸 부정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너를 사랑하니까. 네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간에 내 사랑이 지워지는 건 아니니까.”
하여 엘리아는 진위를 의심하는 대신 그의 상실, 그리고 사랑을 전부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저 전부 갖고 싶었어. 네가 또 다른 내게 품었던 사랑마저 독차지하고 싶었어. 그러기 위해서 네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어.”
엘리아는 제 사랑이 끔찍하리만큼 이기적임을 인정했다. 배신감, 실망, 질투……. 사랑은 그 지독한 감정들까지 집어삼키길 주저치 않았다.
“근데 도저히 나라고 여길 수는 없었어. 왜냐면 네 말대로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네가 나를 찾아왔고, 그래서 내가 다른 삶을 살게 했잖아.”
스물여덟의 엘리아. 그리고 열여덟의 엘리아.
그들은 같은 사람이었다. 열여덟 초봄까지의 기억은 완벽히 일치할 터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기도 했다.
에드문트가 열여덟의 엘리아를 찾아온 순간, 여자의 삶은 둘로 갈라졌으니까.
“나는 네가 잃었던 엘리아가 될 수 없었어. 어쩌면 단지 내가 기억 못 할 뿐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기억에도 없는 일로 널 비난하고 싶지 않아, 에디. 에드문트.”
툭툭, 엘리아가 석조 바닥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에드문트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서로의 눈동자에 각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비록 네가 겪은 10년의 슬픔과 8년의 외로움을 내가 공감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네게 위안이 되어 주고 싶은데. 나 하나만으론 부족할까?”
간절한 물음이 실로 생경했다. 부족한 건 늘 남자의 노력이었고, 여자의 사랑은 늘 제게 차고 넘치기만 했거늘.
진심으로, 스스로가 부족하진 않으냐는 질문에 확신이 필요한 것처럼 굴었다.
“네가 괜찮다면 몇 번이고 말해 줄게. 지나온 삶에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 고통도 떠올리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까지 자책하지 말라고 이야기할게. 네가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언제까지나.”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노을 진 눈을 바라보며, 마치 불길 같다고 여겼던 과거를 떠올렸다.
실로 그에게 과분한 불길이었다.
에드문트가 모든 걸 집어삼켜 재 가루만 남기는 푸른 불꽃이라면,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버거워하는 모든 감정을 집어삼켜 온기로 되돌려 주는 노을빛 불꽃이었으므로.
그러니 누가 감히 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 팔다리를 전부 갖다 바쳐서라도 행복하게 해 주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에드문트의 손이 조심스럽게 엘리아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둥근 이마를 미끄러지던 손길이 귀를 가볍게 스쳤다.
그러고는 잠시 부드러운 머리칼 위에 머물렀다.
“엘리, 네가 부족하냐는 질문은 당치 않아. 나는 네 사랑을 얻기 위해 거짓된 모습까지 불사했어. 너를 기만하면서까지 사랑받으려 했어.”
머리칼을 따라 내려온 에드문트의 손이 엘리아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눈물이 묻어 축축한 손목 위, 가는 상처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흔적이었다.
“오직 사랑만 탐하느라 너를 속이고 심지어 상처 입히기까지 했으니, 네가 주는 거라면 악심마저 내게 과분할 뿐이야.”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 없다고 고백하는 목소리에, 지독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엘리아는 그런 에드문트의 모습 위로 어린 시절의 자신을 겹쳐 보았다.
위로해 주고 싶었다. 어린 저에게 하지 못한 위로까지 더해 그에게 전부 안겨 주고 싶었다.
엘리아는 상처를 어루만지다 떨어진 에드문트의 손을 다시 찾아 쥐었다.
석실의 한기에 체온을 빼앗긴 탓에, 두 사람의 손은 눈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에드문트에겐 아니었다. 엘리아의 체온이 제게 닿은 순간 남자는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맨살에 닿은 제 손가락이 전부 녹아 버린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제 속까지 전부 쏟아져 내릴 듯했다.
두고 온 장갑이 간절했다.
“에디, 그 말은…… 허락해 주는 거지? 내가 네 아내랑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해도, 내가 네 전부를 욕심내도 되는 거지?”
연이어 불린 애칭에, 자신을 향한 갈망에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다급하게 눈을 감았다. 그토록 원했던 엘리아의 모습을 지척에 두고는 감히 외면하려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다 녹아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마른 눈에 눈물이 맺힌 뒤에야 깨달았다.
고통으로 착각할 만큼, 지독한 감격에 눈물이 나려던 징조였음을.
엘리아는 눈을 감은 채 감정을 삭이는 에드문트에게, 다시 눈 떠 저를 봐 달라 종용하지 않았다.
그의 손을 감싸 쥔 채 전해야 마땅할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그가 보여 주었던, 혹은 숨겨 왔던 상처를 전부 보듬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가 오직 저 하나만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에디, 스스로를 비난하지 마. 나를 기만했다며 자책하지도 마.”
에드문트는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 위에 사랑을 쌓아 올리고 말았다며 자책했다.
그러나 엘리아의 목소리가, 에드문트가 제 것이라 품어 왔던 죄목을 하나씩 지워 버렸다.
이기심과 죄책감이 사라지자 남은 건…….
“그저 다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거잖아. 전부 내가 좋아할 거라고 기대해서 한 일이었잖아.”
남자에게 남은 건, 사랑뿐이었다.
“내게 선물을 받고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지? 사소한 질문을 해도 매번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생각했잖아. 웃는 게 좋다고 한 뒤로 늘 미소 지어 주려고 노력했고. 그게 왜 기만이야. 그냥 네가, 날 사랑한 건데.”
사랑이라는 단어, 이 새파란 공간 안에 유일하게 붉게 빛나는 목소리가 읊조린 불씨에 에드문트가 눈을 떠 반응했다.
단지 그가 엘리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짚어 주었을 뿐인데.
마음이 세차게 파도쳐 그를 흔들었다.
시간을 돌려받고도 죽은 여자에게 얽매여 있던 죄책감, 그 지독한 감정마저 뿌리째 뒤흔들더라.
“엘리.”
그가 스스로 꿰뚫은 심장에 뿌리내렸던 죄책감이 마지막으로 확인을 구해 왔다.
“정말 내가 너를 아프게만 한 건 아니라고 여겨도 될까. 지나온 내 삶이 헛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해도 될까.”
투쟁과 좌절, 죽음만이 가득했던 삶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아의 행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면. 그렇게 말해 준다면.
둘로 나뉘어 버린 사랑 사이에서 헛되다 느껴지던 그의 삶도 위안 받을 수 있을 테니까.
* * *
“에디.”
해가 뜨지 않은 겨울, 그 차가운 공기와 쓸쓸한 추위를 닮은 공간.
여자가 부르는 남자의 이름이 석실을 울렸다. 이름과 애칭이 반복되는 소리가 무척이나 따듯하게 들렸다.
“나의 사랑. 네가 나를 구원했어.”
추위를 전부 내쫓아 그가 더는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네가 변하지 않았다면 내 삶 역시 변하지 않아 오직 예견된 슬픔과 기쁨만 존재했을 거야. 네가 나를 바꾸어 살게 하고, 사랑하게 한 거야. 그러니 만약 네 치열했던 삶이 의미 있길 갈망했다면, 너는 자랑스러워해도 돼.”
엘리아의 속삭임은 오직 에드문트만을 위해 울렸다. 그가 가장 바라 마지않던 위안을, 사랑만을 골라 안겨 주려 했다.
“고마워. 많이 힘들었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정말 괴로웠을 텐데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 주어서 고마워. 다시 나를 사랑해 주어서 고마워.”
기어이 에드문트의 심장에서 죄책감을 뽑아냈다.
빈 자리를 채우려는 듯 새파란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
먼저 눈물 젖은 얼굴을 하고 있던 엘리아가 그의 눈 밑을 닦아 주었다. 그 손길이 영원하길 바라듯 에드문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쉼 없이 떨어졌다.
눈썹조차 찌푸리지 않은, 고요한 표정으로 눈물만 뚝뚝 떨구는 모습이 무참히도 슬퍼 보였다.
그를 달랜다고 입을 열었으니 당장 튀어나온 말은 미안하다는 사과였다.
“에디, 미안해. 내가…… 말도 없이 떠나서, 나 많이 원망했지? 다신 안 그럴게. 정말 미안해.”
엘리아에겐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사과였으나, 에드문트에겐 몇 번을 들어도 과분할 말이었으니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망하지 않았어.”
단조로운 목소리는 사각의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저를 밟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원망도 보이지 않는, 실로 무심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계단으로 향하는 곧은 길에 난 흔적이 그 증거였다. 같은 곳을 계속 밟거든 창백한 대리석에도 흔적이 남지 않던가.
에드문트의 목소리 또한 그러했다. 반복되던 단조로운 소리가 끝내 감정의 흔적을 남겼다.
“다만 그리웠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거든 이 그리움도 희석될까 생각해 봤지만, 그럴 것 같지 않았어.”
다시 만나길 바라던 희망은 지나가는 시간에 하나씩 내어 주고 나니, 에드문트에게 남은 건 그리움뿐이었다.
만약에 기회가 온다면. 엘리아를 만나 마지막으로 엎드려 빌 수 있다면.
애원하려 했다. 저를 딱 한 번만 불쌍히 여겨 소원을 들어 달라고.
<당신을 사랑했어. 사랑했는데…….>
그때, 떠나던 엘리아가 남겼던 ‘사랑했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이번에는 한때나마 사랑이 있었음을 추억하며 남은 계절을 버텨 볼 생각이었다.
따듯한 봄이 되면 호수를 찾아가려 했다. 푸른 하늘과 그 아래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며 외로웠던 순간을, 그러다 순식간에 행복이 차오르던 감각을 되새겨 볼 수 있을 테니.
여름이 더위를 몰고 찾아오면 연분홍색의 옷감을 구해 창가에 걸어 둘 생각이었다. 바람이 불어 천을 툭툭 두드리거든, 엘리아가 제 앞에서 거닐던 모습과 착각하여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가을이 오면 꽃을 가득 심은 정원을 거닐고, 때론 화원을 찾아 가을꽃을 살피리라 다짐했다. 화병에 한 송이 꽂아 두거든,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며 자신을 위로해 주리라 기대했으니.
그리고 한 해의 끝, 겨울이 되면 그는 엘리아와의 마지막 날을 곱씹을 생각이었다. 저택 안까지 스민 추위에 엘리아와 보낸 마지막 시간도 이토록 추웠다며 곱씹고 또 곱씹는다면.
그럼 다시 봄이 돌아올 테니까. 그러니 부디. 겨울을 버티게 할 따듯한 목소리 하나 남겨 두고 떠나 주기를 소망했다.
“네가 남겨 준 기억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여겼어. 그래도 혹시 기회가 온다면 애원해 볼 생각이었어. 나를 사랑했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 달라고.”
함께한 봄과 여름, 기다리던 가을과 홀로 버텨야 할 겨울을 전부 그리워하면서 보내겠다는. 그 다짐 안에 사랑이 가득했다.
“에디…….”
더는 견딜 수 없었기에,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품에 뛰어들었다. 제 마음을 전부 그에게 안겨 주었다.
목을 그러안고 매달려 오는 여자를 그가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바짝 당겨 끌어안는 힘에 서로의 심장이 맞붙었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더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엘리아도, 에드문트도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으려 서로에게 엉기었다. 격정에 몸부림쳤다.
싸늘하게 식어 있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상대의 몸을 뜨겁게 데웠다. 마음까지, 순식간에 녹아 서로의 옷자락을 적셨다.
“엘리, 네가 정말 그리웠어. 돌아와 줘서 고마워. 뭐든지 할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그의 어투는 여전히 감정을 섞는 법을 몰라 담담했지만, 엘리아는 충분히 에드문트가 못다 표현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에디, 나를 위해 웃어 줘. 애칭을 불러 줘. 어색해도 괜찮아.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운걸.”
엘리아의 요청에 에드문트가 화답했다.
“엘리. 엘리.”
다정하게 들릴 때까지 애칭을 불렀다. 숨을 쉬느라 잠시 멈출 때면 입꼬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한 끝에 어색하게나마 웃어 주었다.
“예뻐. 에디 네 웃는 얼굴 정말 예뻐.”
엘리아는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일그러지고 만 그의 미소까지 아름답다고 해 주었다. 노력한 그의 새카만 머리칼을 매만져 아낌없이 칭찬하고, 아래로 내려가 고생한 얼굴을 꾹꾹 눌러 주더니 다시 끌어안았다.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품에 자신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켜자 엘리아의 체향이 폐부에 가득 스미었다.
다시 뱉어 내기가 못내 아쉬워, 잔 숨을 내쉬며 조금이라도 오래 담아 보려 했다.
엘리아가 간지럽다며 깔깔 웃을 때까지, 깊은 들숨과 옅은 날숨을 반복했다.
“에디, 좋아해.”
온몸으로 저를 갈구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해 주었다.
“네게 등 돌려 떠나고선 정말 많이 후회했어. 대신 돌아오거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얌전히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에드문트의 모습에, 엘리아가 못다 전한 말을 이어 가고자 했다.
* * *
“에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많이 궁금했지?”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물음에 주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었다. 저를 떠나 어디를 다녀왔는지, 왜 다시 돌아왔는지, 손목에 남은 상처는 이제 아프진 않은 건지…….
엘리아에 관한 거라면 전부 알 수 있기를 바랐다.
“우선 좀 앉을까? 매일 마차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다리가 아프네.”
다리가 아프다며 바닥에 앉으려 하는 모습에, 에드문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엘리아를 도로 끌어안았다.
“응? 왜 그래?”
“내가 안고 있어도 될까?”
늘 명령조로 대화하는 게 익숙한 남자가 서툴게 엘리아에게 의견을 물어 왔다.
“응, 네가 편한 대로 해.”
바닥에 앉는 게 싫은가 싶어 그러라고 했는데, 돌연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안아 든 채로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덕분에 엘리아는 차가운 바닥 대신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게 되었다.
“추울 것 같아서. 아니면 자리를 옮기겠어?”
“아니, 이대로가 좋아.”
엘리아는 그의 위에서 꼼질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자, 에드문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한때는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을 그의 심장은 이제 엘리아의 귓가에 규칙적인 진동만을 전달했다.
그의 전신에 데운 피를 돌게 해, 품에 안긴 엘리아까지 따듯하게 데워 주었다.
“고마워. 내 생각 해 줘서. 따듯해서 정말 좋다.”
엘리아가 완전히 자리 잡은 걸 확인한 에드문트가, 팔을 둘러 끌어안고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체온을 확인하는 듯한 다정한 접촉이었다.
“한 번 더 해 줘.”
에드문트가 기꺼이 입을 맞추는 사이, 엘리아는 그의 손을 찾아 보듬었다.
맨손이 닿아도 이제 에드문트는 피하지 않았다. 엘리아는 기쁘게 그의 손을 보듬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한참 이어지던 애정 표현은 대화가 시작되며 잔잔해졌다.
“여행은 어땠어?”
“응, 즐거웠어. 원하는 걸 거의 다 얻었거든.”
어둑한 석실. 엘리아는 마치 잠들기 전 책을 읽어 주듯, 나긋한 목소리로 여행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도를 떠나서 중남부에 갔어. 우리 친척들 전부 그 인근에 몰려 살거든. 마침 곧 태어난 줄도 몰랐던 내 사촌 생일이라 다들 모일 예정이라길래, 인근 도시에서 기다리다가 날짜 맞춰 쳐들어갔지.”
예고도 없이 등장한 엘리아를 보고 친척들은 기함해선 엘리아를 내쫓으려 들었다.
그러나 엘리아가 그들 앞에 서류를 집어 던지자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뭐? 고발이라니,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산을 전부 동결하겠다니! 지금 우리한테 이따위 거짓 죄를 덮어씌우겠다고?>
엘리아가 작성한 고발장에는 친척 일가가 마조비아국에서 사치품을 밀수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죄목이 적혀 있었다.
물론, 전부 엘리아가 꾸며 낸 모함이었다.
“아무도 안 믿을 소리이긴 하지. 우리 친척들이 무슨 재주가 있다고 전후 처리도 다 안 끝난 마조비아국을 상대로 밀수를 할 수 있겠어?”
“그럼 어떻게 믿게 한 거야?”
“전부 에디 네 덕분이었지.”
“……공작가의 인장을 사용했구나.”
“맞아. 네 이름이랑, 공작가 인장 좀 빌려 썼어. 네 서명 진짜 어렵더라. 연습하느라 팔 엄청 아팠어.”
원래대로였다면 무시당하는 게 당연한 공갈이었으나 엘리아에겐 잠시 라스페가의 영지 업무를 대리하며 맡아 둔 공작가의 인장이 있었다.
그리하여 황당하기 짝이 없는 고발은 에드문트 라스페를 주체 삼아 더없이 완벽한 협박이 될 수 있었다.
엘리아는 아직도 에드문트의 이름을 발견한 친척들이 당황하던 꼴이 눈에 선하다면서 킬킬거렸다.
“그 인간들은 시골짝에 처박혀 사느라 크라우제 후작이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조차 모르고 있더라? 그래서 친절히 상황 파악 도와주고, 어쭙잖게 굴면 라스페가에서 당신들 다 죽여 버릴 거라고 협박했지.”
크라우제 후작이 무너질 거라는 말에 믿을 수 없다며 악을 써 대는 그들을 향해, 엘리아는 ‘곧 울면서 우리 남매에게 매달리게 될 거다.’라는 예고를 남기고선 서부로 향했다.
“서부에 갔다고?”
“응, 데이지가 서부에 있는 극장에 꼭 가 보고 싶다고 했거든. 나도 찾아갈 곳이 있었고. 대강 도시 구경은 다 했다 싶을 때쯤 수도에서 연락이 왔어. 친척들이 네가 벨레노아 백작님과 함께 크라우제 후작을 고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앙가에 우르르 찾아왔대. 자기들 좀 살려 달라고.”
미리 엘리아에게 언질을 받고 기다려 왔던 외젠은 우르르 몰려온 친인척들을 앉혀 두고 회유 작전을 펼쳤다.
공작의 분노를 산 그들의 사정은 무척 안타깝지만, 힘없는 저는 공작의 고발을 무르게 할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실은, 공작님께선 저희 부모님과 선대 공작 부부의 죽음에 여러분들의 조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하고 계십니다.>
데이지의 말에 따르면 그건 ‘외젠 님의 역할로 더없이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외젠, 아니 로앙 백작. 제발 누이와 공작님을 좀 만류해 주시게. 이렇게 부탁하네. 자네 부모가 죽었을 당시엔 우리도 사정이 곤궁했다네. 협박, 그래 협박받았다고.>
<죄송하지만 말뿐인 사과는 로앙도, 그리고 라스페 공작가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제대로 된 성의를 보이셔야지요.>
결국 엘리아의 협박과 외젠의 설득 사이에서 휘둘리던 친인척들은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외젠이 내미는 서류에 모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벨레노아 백작을 지지한다는 서약을 받아 낸 거야?”
“응, 그리고 우리한테 건 소송도 전부 취하하겠다는 각서까지 받아 냈어. 이제 곧 묶여 있던 재산도 전부 되찾을 수 있으니, 가난뱅이 로앙 백작가 시절도 다 끝나는 거지.”
엘리아는 뿌듯함에 취한 채 여행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나 여행 이야기가 모두 끝났음에도, 에드문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디, 내 이야기 재미없었어?”
엘리아에게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에드문트는, 작게 고개를 저어 간신히 의사 표현을 했다.
하나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친척들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에 에드문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로앙가가 송사에 휘말려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태껏, 엘리아가 직접 나서기 전까지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변명하자면 그랬다. 복수가 끝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었으며, 굳이 로앙가에서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데 그가 나설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에드문트는 원래가 그런 인간이었다. 추울까 봐 걱정하고, 배려하는 행위는 오직 엘리아를 대하면서 뒤늦게 배우지 않았던가.
“엘리, 내가 네 상황을 먼저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할 거 전혀 없어. 오히려 우리가 먼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해결해 버렸으면 엄청 속상했을 거야.”
마치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들떠 있던 엘리아는 이제 차분한 시선으로 에드문트를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꼬박꼬박 말을 걸어 대던 어린아이는 과거에만 존재했다.
앞에 있는 건 열아홉을 채 몇 달 남겨 두지 않은 그의 연인뿐이었다.
“친척들과의 소송 문제만큼은 직접 해결하고 싶었거든. 내가 아직 부족해서 네 이름을 빌려야 했지만…… 도움을 받는 것과 네가 전부 해결해 주는 건 나한테만큼은 전혀 다른 의미이니까.”
엘리아는 오직 제힘만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면 의미 없다고 여겼던 아집을 포기하고, 그의 약혼자라는 지위를 이용했다.
그럼에도 엘리아는 예전처럼 자격지심을 느끼진 않았다. 이제는 그에게 빚을 지더라도 제힘으로 보답해 주고, 사랑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고마워, 에드문트. 덕분에 나는 원하는 걸 이루었어. 그 보답이라고 하긴 많이 부족하지만. 선물을 가져왔어.”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부탁해 옆에 두었던 가방에서 가죽으로 만든 서류 봉투를 꺼냈다.
“열어 봐.”
봉투를 건네받은 에드문트가 가운데에 묶인 매듭을 풀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가죽 봉투에 들어 있던 건, 귀퉁이마다 금박을 입힌 화려한 무늬가 있는 빳빳한 문서 한 장이었다.
“엘리, 이건…….”
에드문트가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하자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석실의 한기로 식은 체온이 차게 서린 것도 잠시,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곳에서 열기가 퍼져 나갔다.
에드문트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서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함께 쥔 종이는…… 엘리아 로앙과 에드문트 라스페의 약혼 증서였다.
* * *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약혼 증서를 돌려받은 뒤, 그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불빛 아래에 펼쳐 보였다.
“여기, 이거 보여? 외젠이랑 벨레노아 백작님 서명이 적힌 부분 말이야.”
엘리아가 지적한 대로 6년 전 작성된 약혼 증서에는 당시 성년이 아니었던 두 당사자의 서명 대신, 각자의 후견인들 서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난 늘 이게 불만이었어. 아무리 성년이 아니라고 해도 당사자 서명 하나 적을 공간이 없다니. 나는 외젠 대신 백작이 되기로 결심한 일곱 살 때부터 내 서명을 만들어서 연습했단 말이야.”
자연스레 엘리아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던 에드문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의 감정을 살피던 엘리아도 함께 안도하여 미소를 지었다.
엘리아는 봉투에 다시 두 사람의 약혼 서류를 챙겨 넣은 뒤 에드문트의 손을 찾아 쥐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엘리아의 작은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끼워 넣자, 들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엘리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약혼에 관해서 예전부터 많이 고민해 왔어. 정략혼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약혼은 다른 정략적 결합과 비교해도 너무나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부모를 잃은 남매가 생존을 위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기생하기 위해 성사시킨 약혼이었다.
“네가 약혼자로서 의무적으로 나를 보호하고, 나는 네게 보호받기만 하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평범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두려웠어.”
외젠은 두 사람이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알아 가면 된다고 말했고 엘리아도 처음에는 그 말을 믿어 보려 했다.
그러나 에드문트를 대하는 건 어렵기만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어야 하는 엘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결국, 엘리아는 책이나 뒤적거리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무력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다시 희망을 품게 된 건,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에드문트가 자신을 찾아오면서부터였다.
“마음을 나누었으니 이제 문제없을 줄만 알았는데, 기대한 것과는 다르더라. 네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뒤에도 불안감이 다 사라지진 않았어. 특히 네가 나를 지켜 주겠다고 했을 때, 가시에 찔린 듯 마음이 불편했어.”
불안감의 정체를 찾기 위해, 엘리아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거짓말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젠에게 진실을 고백했다.
한데 그렇게 하고도 마음의 짐이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에드문트가 장갑 안에 숨긴 비밀 탓인가 싶어서 그를 성급하게 채근하기까지 했는데.
“그러다가 네가 겪었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를 듣게 되었고, 대체 어디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비틀렸을지 생각하다가…… 그때야 알게 되었어. 바로 여기가, 시작이었다는 걸.”
엘리아의 손가락이 무릎에 올려 둔 약혼 증서를 짚었다.
강요된 관계. 두 사람의 서명조차 들어가지 않은 약혼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엘리아의 마음에 불안을 피워 낸 씨앗이었다.
두 사람의 약혼은 서로를 향해 사랑보다도 의무감을 먼저 깨닫게 했다.
에드문트는 약혼이 성사됨과 동시에 엘리아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붙들렸고, 엘리아는 그런 에드문트에게 종속된 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발이 묶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한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나눈 사이였기에, 의무감으로만 점철된 그 척박한 땅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품고야 말았으니…….
엘리아는 홀로 피운 꽃에 오직 비만 뿌려 주었다. 외롭고 절박한 심경만 주어 사랑을 키웠다. 에드문트는 홀로 피운 사랑이 오직 해만 쬐게 했다. 맑은 하늘만 보여 주면 꽃이 피는 줄 알았을 테니까.
그 결과는 에드문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에드문트, 당신을 사랑했어. 사랑했는데, 더는 견뎌 낼 수가 없어.>
엘리아가 그를 떠나고, 에드문트는 붙잡지 못하고.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한 채 끔찍한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그래서, 전부 되돌리고 싶었어. 에디 네가 나를 보호하고, 나는 보호받기만 해야 하는 이 비틀어진 관계를 지금이라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마침 엘리아는 공작가를 떠나 영지로 향하던 중이었고, 품에는 언젠가 쓸 일이 오지 않을까 싶어 만들었던 위조 고발서가 있었다.
또한, 두고 온 남자를 향한 죄책감, 평생 버릴 수 없는 사랑이 있었다.
그리하여 엘리아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로앙 백작령으로 향하던 마차를 돌려 그대로 친척들에게 향했다.
“나는 앞으로 더 노력해서, 올곧이 엘리아 로앙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네 곁에 나란히 서고 싶어. 네가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길 바라. 그래야만 너를 당당히 사랑하고…… 부모님의 복수도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
복수를 함께하고 싶다는 말에, 에드문트는 후작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낯빛이 어둡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의 엘리아 역시, 복수하고 싶었을 텐데. 스물여덟의 엘리아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어 망설이는 무력감에 익숙해져 메말라 가야 했다.
그러나 열여덟의 엘리아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부모의 죽음을 혼자 감당하는 대신 함께 슬픔을 나누며 상처를 치유해 갔다.
“내가 용기 낼 수 있었던 거, 전부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아직은 내가 못 미덥겠지만, 앞으로 증명해 보일게. 네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보일게.”
엘리아는 그걸 전부 에드문트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한 거라곤 엘리아에게 사랑받겠다고 발버둥 친 것뿐이었는데.
차마 제 것이라 당당하게 받기엔 그도 이제 염치를, 부끄러움을 알았다.
“엘리, 네가 행한 것은 전부 네 성취이니 내게 고마워하는 건 옳지 않아.”
담담한 그의 부정에 엘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나 목소리엔 드러나지 않았지만, 쑥스러움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럼, 고맙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은 괜찮지?”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부족한 것 같아서 그가 늘 오랫동안 머물곤 했던 눈가에, 볼에, 그리고 입술까지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에드문트의 숨에 욕망을 억누르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엘리아의 몸을 받쳐 주고 있던 팔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욕구를 터트리는 대신 엘리아의 목덜미에 기대어 격정을 삭혔다.
입술을 머금고 혀를 얽어 탐닉하는 것보다 간절한 게 있었으니까.
“엘리, 한 번만 더 말해 줘.”
“사랑한다고?”
“응.”
“사랑해. 정말 많이. 또 어떤 말이 듣고 싶어?”
“내가 너를 기만한 게 아니라는 말.”
망설임 없는 대답에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귓가에 따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맙고, 노력해 줘서 고마워. 그러니 기만했다고 자책하지 마. 그래도 죄책감이 풀리지 않는다면, 미안하다고 말해 줘. 그럼 나는 백 번 천 번, 네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괜찮다고 대답할 테니까.”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바랐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따듯한 말로 돌려주었다.
“에디, 내가 아까 했던 말 기억나? 네가 여행 어땠냐고 물었을 때 한 대답.”
“기억해. 원하는 걸 거의 다 얻었다고 말했던 거.”
“맞아. 거의 다 이루었고, 네가 남은 것도 다 이루어 줄 수 있는데…… 도와줄래?”
엘리아는 가방에서 다른 봉투를 꺼냈다. 처음 꺼냈던 봉투와 달리, 두 번째 봉투에는 양쪽에 각각 푸른 꽃과 주홍색 꽃을 그려 넣어 무척 화려했다.
“실은 이게 진짜 내 선물이야. 아까처럼 풀어 봐.”
에드문트는 시키는 대로 푸른색과 주홍색 꽃 사이에 묶인 매듭을 풀어 봉투를 펼쳤다.
수십 송이의 꽃을 가르고 나타난 건, 펜 한 자루와 두 장의 약혼 증서였다.
각자의 후견인이 서명한 진짜 약혼 증서와 달리 증서 맨 끝에 나란히 놓인 서명란에는 외젠의 서명 대신 엘리아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벨레노아 백작의 서명이 있던 자리는 에드문트를 위해 비어 있었다.
“어때? 서부에서 되게 어렵게 구한 거야. 이거 봐, 여기 아래쪽 금박 장식은 심지어 원본보다 더 화려해.”
위조한 약혼 증서를 보여 주며 장난스럽게 웃던 엘리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꿔 에드문트의 맞은편에 살짝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짧은 옷자락 때문에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엘리아는 제법 진지하게 에드문트를 마주했다.
“에디. 에드문트.”
그는 뒤늦게, 엘리아가 약식 청혼을 위해 무릎 꿇었음을 깨달았다. 당혹감에 잠시 지체한 에드문트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랑해. 늘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게 될 날을 꿈꾸었어. 어쩌면 내가 멋대로 널 갖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던 탓에, 네가 긴 아픔을 겪고 내게 와 준 게 아닐까 싶어.”
엘리아는 오직 저만을 사랑한, 죽어서도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은 남자에게 맹세하고자 했다.
“내게 기회를 준다면, 네가 겪은 상실과 외로움이 다할 때까지 평생 곁에 있을게. 네 슬픔을, 내 기쁨을 전부 너와 함께 나누고 싶어.”
남자의 사랑을 지켜 주겠다고.
여자의 사랑을 증명하겠다고.
“그러니 에드문트, 내가 성년이 되면 결혼해 줄래?”
에드문트는, 아마 평생을 가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폭우처럼 쏟아져 그를 숨 막히게 했다.
도저히, 입을 뗄 수조차 없어서 그는 대신 펜을 들었다. 두 장의 가짜 약혼 증서에 그의 서명을 적어 넣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엘리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작은 꽃망울에 불과하던, 엘리아의 마음이 활짝 피어났다.
사랑한다는 말도, 청혼해 주어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는데 엘리아는 그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가 펜을 바닥에 내려 두자마자 품에 뛰어들었다.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내가 많이 행복하게 해 줄게. 돈 많이 벌어서 예쁜 선물도 많이 해 줄게. 우리가 할 일이 전부 끝나거든 같이 여행도 가자.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네게 사랑한다고 말할게. 아니, 마차가 멈출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우리를 맞이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할게.”
두서없이 쏟아 내는 말이 그저 감격스러웠다.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더욱 세게 끌어안아 제 마음을 표현했다. 어떤 말로 이 감정을 전할 수 있는지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에드문트는 석실에 따듯함이 감돌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갑기만 하던, 고통만 어려 있던 석실에 따듯한 계절이 찾아온 것 같길래, 엘리아에게도 알려 주었다.
“엘리. 여긴 늘 추웠는데, 겨울만 고여 있던 곳이었는데 이제 더는 춥지 않아.”
사랑한다는 대답보다 먼저 꺼낸, 춥지 않다는 말은 엘리아를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게 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가 꿈에서 다시 이곳을 찾아도 춥지 않기를 바랐어. 네가 가는 곳 어디든지 내가 있을 테니,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
“따듯해. 그리고 이제 외롭지 않아. 네가 있으니까.”
따듯하다는 말로 시작한 고백이 이어 사랑을, 애정을, 영원을 속삭이게 했다.
“엘리, 나를 구원해 주어서 고마워. 사랑해 주어서 고마워.”
서로를 향한 마음은 어찌나 깊은지, 또 얼마나 쌓여 있었는지.
“에디, 근데 나 언제 입 맞추어 줄 거야? 기다리고 있는데.”
그에게 청혼한 엘리아가 승낙의 입맞춤을 받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그의 고통, 죽음, 사랑이 맺혀 있던 석실에서…….
“에디, 네 흔적을 남겨 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리하여 평생 너를 잊지 못하게 만들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이야기의 끝에서 돌아온 남자와, 그가 펼친 책에 새로운 이야기를 적어 나간 여자가.
남은 이야기를 함께하기로 다짐했다.
다시는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을, 영원한 사랑으로 가득 채울 것을 맹세했다.
* * *
그의 곁을 맴돌던 죽음이, 석실에 스민 따듯한 온기에 밀려 떠나갔다.
시린 한기를 잃어 온화해진 죽음이 다정한 작별 인사를 남겼다.
아이야. 언젠가 다시 나를 만나야 할 테지만.
죽음의 끝에서 피워 낸 사랑,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영원하기를.
부디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