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 흔적 (72/79)

72. 흔적

장례식이 끝나고, 에드문트는 수도 저택으로 향했다.

에드문트는 환각에서 벗어나 체력을 회복하자마자 수도를 떠나 다시 제국 각지를 돌아다녀야 했다.

동부와 북부에서는 아직 다 설득하지 못한 귀족들을 만나야 했고, 장례식 준비를 위해 벨레노아 백작령까지 다녀온 참이었다. 하여 저택에 오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떠나 있는 사이 명하신 대로 저택 보수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한스가 말한 대로 저택은 더는 황폐하던 이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름답게 가꾼 정원을 지나 마차가 멈추자, 새 집사가 에드문트를 맞이했다.

“주인님, 서부에서 보고서가 올라와 집무실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1층에 식사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의복을 갈아입으시고 바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지시해 두겠습니다.”

에드문트는 잠시 젊은 집사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색 머리칼, 진갈색 눈에 주름 하나 없는 피부,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체구.

과거 집사가 죽은 후 새로 온 집사와는 정반대되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공작이 후보 중에 직접 골랐던 반면 이번에는 제가 부재한 사이 한스가 고용했기 때문이리라.

“우선 서류부터 확인하지.”

피곤했다. 서류도, 식사도 전부 무시하고 쉬고 싶었으나 에드문트는 서부에서 왔다는 보고를 확인하기 위해 2층으로 향했다.

계단으로 향하는 짧은 복도에는 통일성 없이 걸어 둔 그림 대신, 아늑한 풍경화가 가득했다. 그가 떠나 있던 사이 전부 교체한 것들이었다.

<에디, 네가 깨어나기 전에 저택 개보수 지시서를 써 두었어. 혹시 취향에 맞지 않은 게 있으면 수정하도록 해.>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남기고 간 서류를 펼치지 않은 채 서명을 적어 넣었다. 그러니 어디까지가 엘리아의 지시로 바꾼 건지, 무엇이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사의 취향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에드문트는 전부, 엘리아의 흔적이라 여기고 말았다.

홀로 남겨질 남자가 안쓰러워 따듯한 풍경화를 걸게 하진 않았을까.

응접실로 향하는 계단에 푸른색 대신 붉은색이 쓰인 것도, 저를 기억해 달라는 엘리아의 의도가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저택을 훑으며 에드문트는 저택의 모든 변화를 엘리아와 결부하려 들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에드문트가 착각하고 살면 안 되는 걸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텐데. 계절에 맞춰 바꾼 융단, 여름 햇살과 어우러지는 커튼, 따듯함이 감도는 풍경화까지.

전부 엘리아가 그를 위해 남기고 간 마음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계절이 지나가면 전부 바꿔야겠지.’

그러니 에드문트는 계절이 바뀌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아름다웠던 스물둘의 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 적어도 이 여름이, 엘리아의 흔적이 남은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2층 집무실에 도착하니 1층과 마찬가지로 달라진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자해할까 봐 떼어 두었던 장식물들은 다시 자리를 되찾았고, 수십 장의 거울은 복도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치워진 채였다.

그래도 푸른 꽃이 활짝 핀, 엘리아의 그림은 그대로였다.

에드문트는 그림을 잠시 응시하다가 예장용 장갑을 벗었다. 여자의 어설픈 손길을 추억하려는 듯, 그는 단추 위를 한참 헤맨 끝에 백색 장갑을 벗었다.

벗은 장갑은 곁에 있던 집사에게 건네는 대신 협탁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한데 이상하게 장갑을 올려 두었는데도 협탁 위가 허전했다.

에드문트는 금방 허전함의 진원지를 깨달았다. 늘 올려져 있었던 약병이 보이질 않았다.

“집사, 약병은 자네가 치웠는가.”

“아닙니다. 제가 온 이후로 협탁에 약병이 올라가 있는 건 본 적이 없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바로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아마 제 보좌관이 예전 집사의 흔적이라며 치웠는가 싶었다.

어차피 팔목에 남겼던 자해 흔적도, 입술에 몇 번이나 새겨졌던 엘리아의 흔적도 약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아물었지 않은가.

구태여 약병을 찾는 건 다분히 비이성적인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비참함만 되새기는 행동이었고.

“업무 마치고 부를 테니 나가서 대기하게.”

에드문트는 집사를 물러가게 한 뒤 책상에 앉았다. 에드문트는 보고서에 담긴 서부 근황을 자신의 과거와 대조해 본 뒤, 중앙 권력에 관심이 적은 서부 귀족들을 회유할 만한 계책을 적어 내려갔다.

한 장을 가득 채운 지시서를 옆으로 치우고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후우…….”

잠시 찾아온 휴식 시간. 모처럼 텅 빈 머리는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상념을 떠올렸다.

몇 주 전 바로 이 집무실에서, 에드문트는 엘리아에게 숨기고 있던 모든 과거를 고백했다.

<엘리아 네가 스무 살이 되고 다음 해 봄에 식을 올렸어.>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진행된 예식. 의무처럼 이어진 결혼 생활. 마음에 담고도 결국 표현하지 못한 사랑. 사람들, 수많은 이들의 죽음.

때론 열흘, 길게는 몇 달간 집을 비운 채 복수를 향해 내달렸던 시간들.

<후작의 세력을 전부 흡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닐스 튀링겐을 이용해서 크라우제 후작을 살해했어. 완벽한 복수를 위해선 황제와 후작에게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야 한다고 여겼으니까.>

그리하여 제 누이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증오만 표현하고 떠난 엘리아 라스페……. 스물여덟의 엘리아.

끝내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았으며 떠나는 여자를 붙잡지도 못한, 서른둘의 에드문트.

붙잡지 못한 대가로 돌려받은 아내의 시신. 실은 자신의 복수가 야기한 여자의 끔찍한 죽음.

아내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혼자 남겨진 걸 슬퍼하다 죽어 버린 남자.

모든 진실을, 어쩌면 미쳐 버린 남자의 상상이라 치부될지도 모르는 10년의 삶을 엘리아의 앞에서 전부 끄집어냈다.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이야기를 헛소리 취급하는 대신 묵묵히 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에드문트의 고백이 끝나자, 그의 필체 이야기를 꺼냈다.

<네 글씨체가 바뀐 걸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바뀐 거라고 하면 이해가 되네.>

그뿐만 아니라 엘리아는 그의 웃는 얼굴도 간혹 남을 흉내 낸 것처럼 어색했다고 알려 주었다.

조금 부끄러웠다. 그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자 엘리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부끄럽다는 말을 하는 걸 듣게 될 줄이야. 음…… 너무 민망해하지 마. 분명 외젠이나 다른 사람들은 몰랐을걸? 네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다들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하고 홀리기 바빴을 테니까.>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예쁘다는 표현은 예전처럼 다정하게 들리지 않았다.

감정이 결여된, 단순한 감상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네가 로앙가에 찾아오기 전날에 공작가에서 저녁을 먹었거든. 근데 하루도 안 되어선 갑자기 보고 싶었다고 말하니까, 네가 나를 놀리려는 줄 알았지 뭐야. 1층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4층 응접실 문을 열고 나타난 걸 본 심경이었어.>

함께 보낸 봄을 되짚을 때조차, 엘리아는 마치 책 이야기를 하듯 아무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에드문트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미안해.>

<뭐가? 네 글씨체가 달라진 게 미안하다고?>

<내가 스물둘이 아니라는 것, 너를 만나러 갔던 것. 너를 한 번 잃었으면서 다시 탐낸 주제에, 계속 너를 속일 생각만 했던 것까지. 전부.>

<…….>

<미안해. 미안해, 엘리.>

에드문트는 몇 번이나, 목이 쉬도록 엘리아에게 사과했다. 당연히 용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엘리아가 너무 슬퍼 보여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살아야 했는데. 죽음으로 도피하는 대신 고통을 모두 견디며 속죄해야 했는데. 어리석은 욕심에 돌아오고 말았어. 열여덟인 네 사랑까지 욕심내며 거짓으로 너를 기만했어.>

절절한 고백에도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시선을 외면했다. 고개를 숙인 채 분홍빛이 감도는 옷자락만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입을 열었을 때조차 엘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옷자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럼 에디 너는 10년 뒤의 삶, 우리의 결혼 생활, 크라우제 후작의 말로…… 복수. 그 결말을 전부 보고 앞으로 돌아온 거구나.>

책을 좋아하는 여자는 새로운 삶이나 회귀라는 표현 대신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에 빗댔다.

엘리아의 말이 맞았다. 에드문트는 서른둘에서 끝난 제 생을 읽고서 다시 책을 앞으로 넘겨 스물두 살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제멋대로 뒷장의 내용을 바꿔 댔다.

<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했어. 이번에는 네게 사랑받고 싶었어.>

그리고, 다시 되돌리기엔 전부 늦어 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망가뜨린 이야기를 엘리아에게 들키고 말았으니까.

<전에 말했지만 네가 나를 엘리아라고 부를 때 가끔…… 그게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들렸어.>

자신을 처음 흔든 남자의 ‘보고 싶었다.’라는 말이 실은 저를 향한 게 아니었음을, 고작 꿈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엘리아는 남자의 말에 진위를 의심하기에 앞서 상처 받았다.

<그리고 네가 나를 환각이라 여기며 ‘엘리아’라고 불렀을 때, 그때 네가 나를 각기 다른 사람으로 인식해 왔다는 걸 알게 되어서 무척 슬펐지만…… 감당할 수 있었어. 네가 무사히 깨어나기만 한다면 해결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스물여덟의 엘리아’는 남자의 악몽에만 존재할 뿐이라고, 그러니 에드문트가 보고 싶다고 말했던 순간 그가 사랑한 건 저 하나뿐이었을 거라고.

엘리아는 그렇게 믿었기에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었던 거야. 그치?>

그러나 에드문트는 꿈 따위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적어도 에드문트에게 있어 스물여덟의 여자는 한때나마 현실로 존재했다는 의미였다.

엘리아는 팔에 아주 작은 상처를 남기는 것조차 무섭고 고통스러웠는데…….

<에디. 엘리아를, 죽은 네 아내를 사랑했어?>

심장에 칼을 찔러 넣을 정도라면, 대체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다는 건지.

오죽 슬펐으면. 얼마나 깊이…… 사랑했으면.

<나를 볼 때마다 죽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를 떠올렸어?>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질문에 긍정한다면, 여자가 아주 많이 상처 입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이 지경에 이르고서까지 거짓말로 매달릴 수는 없었다.

작은 움직임에 여자의 눈동자에 슬픔이, 고통이 어리다 끝내 한 줄기 눈물이 되어 흐르는 걸 지켜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로선 도무지 자신과 동일인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할, 그리하여 타인에 불과할 여자를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한 번이라도 고백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환각에 매달려야 했어.>

<왜? 내가 있었잖아. 나한테 죽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내내 전했던 게 아니었어?>

눈물이 맺힌 엘리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배신감에 끝이 좁아진 마음에는 눈물 둘 곳이 없어, 후드득 흘려 내기 바빴다.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래서 나한테 처음 볼 때부터 보고 싶었다고 말한 거잖아.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환각까지 필요했어?>

<엘리.>

에드문트는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려 했지만, 엘리아가 고개를 숙여 그의 위로를 거부했다.

엘리아의 눈물이 분홍빛 옷자락 위로 맥없이 떨어지는 모습에, 에드문트는 타는 갈증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엘리아의 눈가에 입술을 붙여 슬픔이 아롱진 눈물을 전부 받아 마시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으니, 대신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눈물 그치길 바랐다.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너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너를 죽은 아내 대신으로 여기며 고백한 적 없었어.>

하나 아무리 호소해 본들 이미 상처 받은 엘리아에겐 변명으로 들릴 뿐이었다.

엘리아는 그에게 진심이냐고 재차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에드문트가 계속 말했으니까.

<엘리,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단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어. 어린 너를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받고 싶었어. 그래서 이상적인 연인이 되어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

사랑한다고, 네가 준 사랑을 단 한 번도 죽었던 아내가 주는 사랑이라 착각한 적 없었노라고. 그래도 엘리아의 굳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붙잡았는데.

<엘리, 내가 전부 잘못했어. 다시는 네게 어느 것도 숨기지 않을게.>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곁에 있고 싶다고 매달렸는데.

엘리아는 아무 대답도 주지 않은 채 떠나갔다.

한때 그를 사랑해 주던 엘리아의 마음이, 전부 말라 버린 걸까.

아마도.

사랑이, 애정이 전부 메말라 사라져 버렸으리라.

하면 언젠가, 제 마음도 그렇게 될까.

세찬 바람을 견디고, 고통 어린 시간을 감내하면 전부 말라 아무리 손으로 짓이겨도 묻어나지 않는 날이 올지도.

그렇지만 이미 적은 글을 지울 수 없듯이. 마음을 품었던 흔적까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

종이가 풍화되어 사라질 때까지 글이 남아 있듯 사랑이 머물렀다 떠난 빈 자리도 그대로이리라.

아마도.

아마도 죽을 때까지.

* * *

엘리아가 라스페 공작가를 떠난 지 3주가 지났다.

에드문트는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로 지새운 밤을 꾸준히 셈하였다.

“공작님, 레만 자작이 접견을 요청해 왔습니다. 크라우제 후작의 편에 서려던 계획을 포기한 모양입니다.”

유일하게 엘리아를 떠올리지 않는 시간은 일할 때뿐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크라우제 후작 일파의 발버둥이 에드문트에게 끊임없이 일거리를 조달해 주었다.

“레만 자작가의 인신매매 고발 건은 어떻게 되었지?”

“그게……. 레만 자작이 증인이 될 만한 인부들에게 큰돈을 주어 입막음을 했다고 합니다. 대신 명하신 대로 광산에서 탈주한 이들을 수소문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크라우제 후작령으로 넘어간 탓에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황제의 도움으로 수도에 입성한 크라우제 후작은 레만 자작을 증인으로 내세워 ‘라스페 공작이 자신을 동부에 감금한 채 음해했다.’라는 여론전을 펼치려 들었다.

그러나 에드문트와 벨레노아 백작이 부모의 시신을 다시 꺼내어 억울한 죽음을 고발했으니, 수도에선 후작의 도덕적 흠결을 비난하는 여론만 더욱 거세졌다.

“레만 자작은 언제든 다시 배신할 자이니, 광산 탈주자를 확보하는 대로 자작가를 무너뜨릴 수 있게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엘리아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면 무척 기뻐하시겠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실은 일전에 엘리아 님께서 후작의 탈주 소식을 전해 듣고는 분명 레만 자작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시면서 꼭 자작에게 복수하겠다며 이를 가셨거든요.”

한스의 속없는 말에 에드문트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세게 쥐었다. 눈치 좋던 보좌관이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자각했다.

불행하게도, 한스를 포함한 사람들 전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엘리아에게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 하여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 없이 떠났다는 것도.

전부 말하지 않았다. 차마 제 입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대로라면 제 보좌관은 몇 번이고 엘리아의 이름을 꺼내 그를 흔들어 댈 것이 분명했다.

에드문트는, 힘겹게 스스로를 쥐어짜 고백해야만 했다.

“한스, 엘리아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예? 그게 무슨……. 혹시 엘리아 님께서 떠나기 전에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그의 보좌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부재를 잘 견뎌 왔다는 의미였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지만 내게도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 오늘은 이만 나가 주면 좋겠네.”

에드문트는 무사히 보좌관의 성가신 질문을 피할 수 있었다. 대신 조만간 그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한 번 죽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테지만, 어느 정도 사실을 섞어 전하리라.

엘리아가 그에게 실망했기에 당분간은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그리하여 엘리아가 그러했듯, 저 역시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남은 시간을 버텨야만 한다고.

* * *

‘아가씨께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니.’

다음 날 아침, 공작은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찾아온 한스에게 정말로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보였다.

공작이 말한 바에 따르면, 그가 환각에 대해 해명을 하던 중 크게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엘리아 아가씨가 무척 상심했다고 했다.

<약혼은, 아마 엘리아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후속 조치가 있을 걸세.>

그는 심지어 약혼이 파기될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공작은 엘리아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그 뜻을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마디로 두 사람이 이별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크게 싸웠다는 말이었다.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환각까지 봤던 남자와, 그 남자를 옆에서 열흘이 넘도록 보살폈던 여자가 싸움이라니.’

물론 두 사람의 문제가 그리 간단히 해결될 만한 건 결코 아니었다.

‘공작님께선 추한 몰골 보이셨다고 좌절하셨고, 아가씨께선 혹여 그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 온 게 아닌가 의심하셨으니까.’

에드문트의 말대로, 두 사람에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별한다는 건 한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스스로 떠나다니.

‘분명 내가 모르는 다른 이야기가 있는 걸 텐데, 두 사람 사이에 감정적인 문제라면 내가 억지로 알아내 봐야 참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스는 갑갑함에 제 집무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인부들이 부산 떨고 있기에 무얼 하는가 봤더니, 정원에 옮겨 심을 새 묘목을 옮기는 중이었다.

정원 중앙 분수대 앞에는 마침 젊은 집사가 정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나마 머리를 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한스가 참견을 하러 다가갔다.

“집사, 갑자기 웬 정원 가꾸기인가?”

“아, 한스 보좌관님. 조금 늦었지만 가을 꽃나무를 심으려고 합니다.”

“이 계절에 나무를 심겠다고?”

한스는 직접 정원을 가꿔 본 적은 없지만 대강 언제 정원에 나무를 심는지 정도는 알았다. 보통 더운 여름철에는 묘목을 심지 않는 게 관례였다.

집사 대신 옆에 있던 정원사가 한스의 호기심을 채워 주었다.

“좀 더 일찍 심으려 했는데, 워낙 전부 구하기 어려운 묘목이라 이제야 받았지 뭡니까. 그래도 내일부터 장맛비가 시작될 것 같으니 오늘 심어 두면 비를 흠뻑 맞고 금방 자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저게 준비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릴 정도로 귀한 나무라는 건가?”

“예, 묘목 다섯 종류 전부 그림을 받아 두었는데 보시겠습니까?”

정원사가 건넨 건 화훼상에서 구매 당시 제공한 꽃나무 그림들이었다. 다섯 장의 종이에 각각 크고 작은 묘목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하나같이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건……. 전부 주홍색 꽃이 핀다고?”

“예, 의외이지요? 공작님께서 집무실에 있는 푸른색 꽃 그림을 자주 보시는 것 같기에 당연히 푸른 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이걸 자네가 고른 게 아니고 전부 공작님께서 지시하셨는가?”

한스의 물음에 집사가 정원 개보수 계획서를 보여 주었다. 겉면에는 공작이 승인했음을 표시한 서명이 적혀 있었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사는 몰랐겠으나, 마지막 장이 아닌 표지에 서명을 적었다는 건 공작이 서류를 펼쳐 보지도 않고 승인했다는 뜻이었다.

‘그럼 설마 꽃을 고른 건…….’

한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획안 표지를 넘겼다. 아주 낯익은 글씨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엘리아 님 글씨인데.”

“엘리아 님이라면 공작님의 약혼자 되시는 로앙가의 아가씨 말씀이지요? 저택 개보수안에도 같은 글씨체가 있어 어떤 분이 쓰신 건지 늘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집사의 다정한 대꾸에도 한스는 서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떠나시기 전 새벽까지 뭘 열심히 쓰셨지. 저택 내부도 모자라 정원 개보수 지시서까지 작성해 두고 가셨던 거구나.’

그는 다시 앞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주홍빛 꽃이 가득 피는 묘목을 목록에 올려 둔 글씨는 분명 엘리아의 필체였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돌아오겠다는 말씀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어째서 공작가 정원에 주홍색 꽃을 심게 한 거지? 그것도 구하기도 어려운 묘목들만 굳이 골라서…….’

우연일까. 괜한 기대감에 한스가 확대 해석하는 걸까.

그렇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시 오실지도 모른다고.

다녀오겠다는 말 대신 주홍색 꽃을 증표로 두고 가신 건 아니었을까.

* * *

한스가 정원에서 엘리아의 흔적을 마주한 사이, 에드문트 역시 저택에서 엘리아의 흔적을 발견했다.

시작은 침실에 딸린 옷 방이었다. 에드문트는 옷 방 구석에 옷 두 벌을 나란히 걸어 둔 걸 발견했다.

왼쪽에는 아마도 에드문트의 옷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분홍빛이 감도는 얇은 여름 실내복이 있었다. 분명 엘리아의 옷이었다.

눈을 감으면, 당장이라도 저 연한 옷감 위에 눈물이 떨어지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에드문트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을 불러 옷의 출처를 물었다.

“그게, 아가씨께서 떠나실 때 두고 가셨는데, 아끼는 옷이니 꼭 잘 손질해 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 옆에 있는 옷도 말인가?”

“아, 저것은…… 일전에 아가씨께서 저택에 머무셨던 날 두 분 옷을 나란히 걸어 둔 걸 보고 좋아하셔서요. 그때 생각이 나서 챙겨 두었습니다. 명하지 않으신 일을 저질러 죄송합니다.”

말인즉슨, 그가 볼 수 있는 곳에 옷 두 벌을 걸어 놓으라 지시한 건 엘리아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옷을 발견한 순간 거세게 울렁였던 속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기대감, 그리고 이어진 건 실망이었다.

그 낯선 감정들은 온종일 작정한 듯 에드문트를 헤집어 댔다. 에드문트는 메슥거리는 속을 견디다 못해 독주를 넣어 둔 장식장을 열었다.

그러나 장식장 안에는 술병 대신 엘리아에게 선물 받았던 오르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홀린 듯 손 뻗어 오르골 태엽을 감자 익숙한 곡조가 울렸다.

<음악은 나도 처음 듣는 피아노 곡인데, 정말 예뻐. 잠이 솔솔 올 것 같더라.>

분명 엘리아가 선물할 때 골라 준 건 자장가 삼아 들을 수 있는 조용한 피아노 곡이었다.

그러나 지금 에드문트의 손 위에 올려진 오르골에서는 다른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성년 무도회 때 약혼자와 함께 이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는 게 유행이었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좀 부끄럽지만…… 언젠가 같이 춤 연습해 보지 않을래?>

잠들어 있는 그에게 아침을 알려 주겠다며 틀어 두던, ‘에우리아의 춤곡’이었다.

그는 오르골을 들고 홀린 듯 곁방으로 향했다. 저택에 돌아온 뒤 한 번도 찾지 않은 곳이었다.

문을 여니 엘리아가 아낌없이 부었던 향유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에드문트는 텅 빈 협탁 위에 오르골을 내려 두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느새 오르골이 멈추었지만, 금방이라도 다시 음악이 들릴 것만 같았다.

‘다시 환청을 듣게 되는 걸까.’

죽은 여자의 환청에 내내 시달렸는데. 또다시 저를 떠난 여자가 그를 찾아오려나.

그렇게라도 다시 만나면, 마음이 좀 편해질까?

어쩌면. 그때처럼 잠시나마 위안 받을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에드문트는 스스로를 다시 내버리는 대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실로 돌아가 억지로나마 잠을 청해 볼 생각이었다.

그때, 뒤늦게 에드문트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열어 둔 문밖에서 새어 들어온 빛줄기 끄트머리에, 가방 하나가 있었다. 엘리아의…….

<학술원을 나와서, 크라우제 후작령과 튀링겐 자작령을 찾아갔어. 혼자 여행하는 게 무섭긴 했지만……. 더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

열여섯 시절 여행을 함께했다던 가방이었다.

‘전부 로앙가에 돌려주라고 해야겠군.’

에드문트는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히 잠겨 있는 줄 알았는데 가방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안에 있던 서류가 떨어지고 말았다.

피곤한 와중에 짜증 날 법도 했지만, 에드문트는 그저 엘리아가 두고 간 물건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제가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그는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떨어진 서류를 하나씩 주워 들었다. 엘리아가 그에게 보여 줬던 서류들은 따로 챙긴 건지, 다섯 개의 봉투 대신 낱장의 종이 여러 장만 바닥에 가득했다.

에드문트는 혹여 떨어진 바람에 순서가 뒤엉켰을까 싶어, 하나씩 내용을 살폈다. 또박또박 쓴 글씨가 어딘가 낯익었다.

<라스페 공작이 세 살 때 함께 호수에 간 적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쁜 어른들 대신, 데이지와 내가 공자를 데리고 호수 주변을 돌아보았어. 여름이라 땅이 질어서 데이지가 공자께서 넘어질지도 모른다며 업어 주고 싶어 했는데…….>

가지런한 필체는 로앙 백작의 것이었다. 에드문트는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여름날의 기억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글 곳곳에 붉은색으로 작게 첨언해 둔 건…….

<에디에게 이야기해 주고, 데이지 대신 외젠이 업어 주려다가 같이 넘어졌던 일 기억나는지 물어보기.>

분명 엘리아의 필체였다.

에드문트는 모아 쥐고 있던 다른 종이를 살폈다. 한 줄기 빛에 의지한 채 빳빳한 종이를 넘기고 또 넘겼다.

한 장도 빠짐없이 전부, 에드문트에 관한 기록이었다. 로앙 백작의 단정한 글씨가 까맣게 색 바랜 기억을 적어 두었고, 그 위에 엘리아가 기억에 색을 덧입히듯 붉은 잉크로 덧붙인 글이 적혀 있었다.

까만 나무 덩굴 위에 붉은색 꽃이 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마지막에 꺼내 든 빳빳한 종이에는 진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아이의 어설픈 붓질이 담긴 그림을 마주한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에드문트. 네가, 아니. 당신이…… 어릴 때 그렸던 거야. 보여? ‘일곱 살 봄에 에드문트가 그림’이라고 쓰여 있는 거.>

순간 환청인 줄 알았다. 온몸을 녹이는, 애정 어린 목소리를 떠올린 게 실로 오랜만이었던 탓에.

그리고 희미한 엘리아의 흔적에 감격하기도 잠시. 다른 기억들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에디, 내가 손잡아 줄게. 이렇게 하고 있으면,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니어도 서로 심장 울리는 게 좀 느껴지는 것 같지 않아?>

<우리 전에 같이 봤던 연극, 다음에 한 번 더 보러 가지 않을래?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제일 좋은 자리에서 보게 해 줄게.>

<꿈에서 네가 보고 싶은 사람 만나. 그게 내가 아니어도 괜찮아. 이번 한 번만 봐줄게. 에디 네가 어떤 사람이든, 무얼 하든 다 용서해 줄 거야. 화 안 낼게.>

제가 환각을 피해 잠들어 있던 동안 곁에 있어 준, 엘리아의 목소리였다.

<에디, 네가 잠든 사이에 내가 했던 이야기 너는 전부 기억할 수 있으려나?>

거짓 환청이 아니었다. 다만,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잔상이었을 뿐.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소중한 걸 알아서, 욕심이 나선 차곡차곡 주워 담은 엘리아의 목소리를…… 에드문트는 전부 떠올릴 수 있었다.

<좋은 꿈 꿔, 에디.>

좋은 꿈을 꾸라는 익숙한 끝인사까지.

“좋은 꿈…….”

대답해 주고 싶었다. 비록 전해질 리 없지만. 못다 한 인사를 기도 삼아 전하고 싶었다.

한 자 한 자 뱉을 때마다 숨이 막혀서, 여러 번 반복한 뒤에야 겨우 옳게 인사할 수 있었다.

“따듯한 꿈 꾸길 바라, 엘리.”

엘리. 죽어서도 잊지 못할 나의 사랑.

나는 늘 너를 그리워하며, 남기고 간 기억들을 곱씹으며 살 테니. 부디 너는 행복하길.

“네가 늘 그리울 거야. 정말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우는 게 아직 익숙지 않은 탓에, 손에 쥔 종이가 눈물에 젖어 잉크가 다 번지는 줄도 모르고.

움켜쥔 종이가 전부 눈물에 녹아 사라질 때까지.

내내 서럽게 울었다.

처음으로, 새빨간 핏물 없이 맑은 눈물로 이별하는 법을 배웠다.

* * *

그 후 매일 밤, 눈물 번진 종이를 어루만지며 잠을 청하던 남자에게 손님이 찾아온 건…….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로앙가의 마차인데, 출입을 허가할까요?”

거센 장맛비가 지나고 더위가 시작된, 푸른 여름 한가운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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