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비참함
긴, 꿈을 꾸었다.
<에디. 에드문트.>
다정한 이름을 시작으로 비명이 이어지는 악몽이었다. 죄를 알기에 순순히 침잠하여 고통스러워했다.
한데 자각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꿈속에까지 찾아오더라. 선명하던 악몽이, 추위가 점점 흩어졌다.
마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듯.
추위가 지나간 자리에 평범한 꿈이 남았다.
낮이 끝나 밤이 찾아오는 저녁놀인지…… 혹은 밤이 지나 낮이 돌아오는 새벽하늘인지 모를.
떠나보내야 했을 과거의 엘리아인지…… 사랑한다고 말해 주던 열여덟의 엘리인지 모를 누군가가, 저를 기다려 주는.
봄처럼 따듯한 꿈이었다.
<에디, 소리 들려? 전에 네가 선물해 준 오르골이야. 에우리아의 춤곡. 데이지가 알려 줬는데, 예전에는 성년 무도회 때 약혼자와 함께 이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는 게 유행이었대.>
비명 대신 음악이 들렸고, 슬픔이 흐르는 물소리 대신 나지막한 고백이 연회장의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 나도 너를 많이 사랑해.>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꾸는 다정한 꿈에 누워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아주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가끔은, 어렴풋이 꿈에서 깨어났음을 느낄 때도 있었다.
<일어났구나. 좋은 꿈 꾸었고?>
눈뜨자마자 인사해 주는 미소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내가 아주 오랫동안 꿈꾸던 웃음을 보곤 아마도 꿈인가 하고 여겼다.
<그런 거 아니야. 슬퍼서 우는 거 아니야. 좋아서, 좋아서 눈물 난 거야.>
우는 모습일 때는 가슴이 아팠다. 이제 나도 눈물을 흘릴 때 느낄 심경을 알았기에, 멍청히 바라만 보는 대신 눈물을 그치게 하려 노력했다.
눈물 밴 얼굴이 아플까 싶어 마른 손으로 닦고 또 닦아 주었다.
<고마워. 고마워 에디.>
내 서툰 위로에 너는 꼬박꼬박 고맙다고 말해 주더라. 그래서 나도, 넘치는 마음을 애써 표현했다. 정확히 어떤 말을 건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름답지만 평범한, 따듯하지만 현실이 아닌.
꿈이었을 테니까.
<사랑해.>
그래, 아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사랑한다고. 또 미안하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턴 미안하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사랑해.>
아주 여러 번,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랑한다고 고백했더니…….
<에디, 네가 잠든 사이에 내가 했던 이야기 너는 전부 기억할 수 있으려나? 다음에 내가 다시 이야기해 주면 너는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이야기를 들어 주려고 할까. 아니면 기억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여 줄지도 모르겠다.>
새벽과 아침을 가르는 경계처럼, 죽은 아내인지 어린 연인인지 구분하기 어렵던 여자의 모습이 또렷해지려 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아 엉망으로 엉켰던 두 사람의 모습이, 하나만 남기고 떠나려 했다.
<에디, 우리 전에 같이 봤던 연극 말이야. 겨울에 다시 무대에 올릴 거래. 그때 우느라 놓친 장면이 있어서 아쉬웠는데, 다음에 한 번 더 보러 가지 않을래?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제일 좋은 자리에서 보게 해 줄게.>
저와 함께 봄을 보내 준, 열여덟의 연인이 되었다.
<에디, 나는 정말 괜찮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으니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게 돌아와 줘.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아.>
그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가 왜 여기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절대로.
분명 어린 제 연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로앙가에 있어야 하는데. 제 망가진 모습 대신 다정한 제 가족들을 바라보며 가을이 오길 기다려야 할 텐데.
이 추한 꼴을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속삭인다니.
현실일 리가 없었다. 현실이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에디, 좋은 아침이야.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와.”
현실이라면, 너무 비참하잖은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열은 없어 보이는데. 비 때문인가……?”
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너를 닮은 꽃, 이상적인 연인, 귀한 선물들과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
그런 것들만 가득 채워도 모자랄 텐데.
감히 내가 귀한 사랑을 받았으니, 마땅히 귀한 것만 네게 주어야 할 텐데.
거짓된 모습만 보이고, 내 곯은 속은 어디든 좋으니 네가 볼 수 없는 구석에 숨겨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슬픔은 죄 나만 독차지하려고 아등바등하였거늘.
“오늘은 네가 쉬는 날인가 보다. 어제는 씻고 온 뒤로도 곧장 잠들지 않아서 제법 오래 이야기 나눴는데. 기억나? 데이지한테 들었던 네 어릴 적 이야기……. 아, 미안해. 피곤할 텐데.”
엘리아의 푸릇한 목소리가 잠시 끊겼을 때, 나는 오랫동안 방치해 둔 몸뚱이가 어떤 꼴일지 두려우면서도 확인해야 했다. 저 아래 어딘가에 버려둔 손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푸른 천을 기어 올라온 손에는 장갑이 없었다. 그러나 햇빛을 받은 지 오래된 손은 마치 흰 장갑이 붙은 듯 창백했다.
볼품없는 손에서 시작해 아래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마 네게 묻는다면, 다정한 너는 애써 거짓말하며 괜찮아 보인다고 다독여 주겠지.
하지만 부정할 수 없으리라. 뼈가 드러난 창백한 손, 그 아래로 이어진 팔목은 어디선가 급히 주워 온 시신의 일부 같았다.
“응? 왜 그래. 내가 손잡아 줄까?”
이 끔찍한 걸, 눈에 담지도 못하게 하고 싶은 마음을 모르고선 기꺼이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으니.
비참했다.
“어때. 따듯하지? 에디 얼른 나아라. 어서 나아라.”
손등을 가득 메우는 네 입맞춤이, 따듯한 숨결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꿈이라 생각하면서 받아 온 나날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듯.
꿈이었다면 그저 황홀했을 텐데.
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의원이 오늘 일어나거든 가볍게 식사해 보자고 했거든. 같이 앉아서 아침 먹는 거 처음인데 기대된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고, 한 술만 떠 보자. 알았지? 내가 금방 가서 사람들 불러올게.”
엘리.
어째서 이 추한 모습을 네 눈에 담으려 해. 품어 주려 하는 거야.
왜, 왜 이런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바라보는 거야.
“……엘리.”
차라리 환상이라고 해 줘. 내가 여전히 죽은 너와 어린 너를 놓지 못해 아직도 환상에 갇혀 있다고 말해 줘. 제발.
“제발…….”
더 갈 곳 없이 무너진 내게.
“제발, 엘리. 엘리아.”
비참함까지 깨닫게 하진 말아 줬으면…….
* * *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깨어나던 에드문트는 날이 지나며 하루에 두세 번씩 눈을 떴다. 엘리아는 그가 눈을 뜨는 매 순간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함께했다.
‘오늘은 어제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엘리아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오히려 어제보다 대답이 없었다.
‘어제는, 그래도 몇 번 대화도 주고받았는데. 꿈에서 추웠냐고 물으니까 안 추웠다고, 분명 대답도 해 주었고.’
좋아질 듯 통 나아지지 않았지만 조급하게 굴어선 안 되었다. 하룻밤 새 씻은 듯 나을 리가 없었으니까.
“한스, 에디가 방금 깨어났어요. 잠깐 옆에 있어 줄래요? 나는 의원한테 갔다가 식사 준비하는 거 보고 올게요.”
“아…… 네. 제가 잘 모시고 있겠습니다.”
엘리아의 들뜬 목소리와 달리, 집무실 소파에 앉아 대기하던 한스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문을 향하던 엘리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한스는 새카만 먹색 종이를 들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그의 손에 들린 흑색 종이는 이제 엘리아에게도 익숙해진, 공작가의 밀서였다. 나쁜 소식임을 짐작한 엘리아가 표정을 굳힌 채 다가갔다.
한스는 들고 있던 밀서를 순순히 넘겨주었다.
“조금 전 벨젠 경이 받아서 건네주었습니다. 크라우제 후작이 사흘 전 은신처를 버리고 이동해서 급히 추격했으나, 비가 많이 와서 놓친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감시하던 걸 놓쳤다고요?”
공작가는 지금까지 크라우제 후작을 붙잡는 대신 그를 동부에서 감시하는 중이었다. 당장 후작을 살해한다면, 공작가에서 남은 세력을 흡수할 확률보다 중립이었던 가문이 제2의 세력으로 떠올라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사로잡는 것도 아니고 감시만 하면 그만인 상황에서 후작을 놓치다니. 치명적인 실수였다.
“비 때문이라면, 설마 우리 쪽에 낙마해 사상한 자가 있나요?”
“말 한 마리가 미끄러지며 뒤따르던 병사 셋이 같이 넘어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병사들은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여러 명이 말을 잃은 탓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는군요.”
“은신처 근처 탈출 경로가 될 만한 곳에 사람을 심어 두지 않았던 건가요? 아니면 후작이 그 감시자들까지 뿌리치고 달아난 건가요?”
“그게, 공작님께서 은신처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 외에는 하달 받지 못했다면서…… 뒤늦게야 인근 지역을 뒤졌으나 아직 성과가 없다고 합니다.”
소식을 알리는 한스에 이어 엘리아까지 한숨으로 대화를 끝맺었다. 공작의 수하들이 벌였으리라곤 상상도 못 할 실책이었다.
사실 그동안 공작가의 수하들은 고민할 것 없이 에드문트의 일방적인 명령을 수행하면 그만이었다.
하여 동부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후작이 달아날 때를 상정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지 않았다. 이미 후작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겠다, 기다리면 분명 공작이 따로 지침을 내려 주겠거니 태만하게 굴었을 뿐.
에드문트의 부재, 그리고 수하들의 나태함이 후작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를 안겨 준 셈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일단 다음을 생각해야죠. 후작이 하필 비가 올 때를 골라 움직였다는 건 여태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의미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인근을 뒤진들 소용없을지도요.”
“예, 벨젠 경도 후작이 미리 봐 둔 탈출로를 통해 빠져나갔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한데, 후작이 이제 와서 자력으로 탈출로를 찾았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데리고 있는 사병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외부 지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북부 국경 지역의 귀족들은 전부 저희 쪽에서 매수해 둔 상태라, 가능성이 그리 크진 않습니다.”
“국경을 넘어올 필요 없는 동부의 귀족이라면 가능하죠. 인력 수급으로 늘 고충이 많던 레만 자작이 변절했다든가. 지난주에 레만 자작이 자수정 광산에 인신매매해 온 아이들을 투입해 왔다는 고발 때문에 곤란해졌잖아요.”
1주일 전 레만 자작은 제국법으로 금지된 인신매매 의혹에 휘말려 투자금 반환 압박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더불어 해당 범죄를 폭로한 건 라스페 공작가와 예전부터 교류해 오던 남동부의 자작가 후계자였다.
“범죄 고발에 라스페가의 입김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먼저 이쪽을 배신하겠다고 나섰을 가능성 충분하잖아요? 비겁한 인간 같으니라고……. 공작가에서 그동안 내어 준 투자금이 얼마인데.”
레만 자작의 범죄 소식을 듣자마자 공작가의 투자 기록을 확인했던 엘리아가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투자금을 회수하고 싶었지만, 레만 자작을 흔들 무기로 남겨 두어야 했기에 일단 회수를 보류한 상태였다.
“레만 자작이 변절했을 가능성을 알아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차후에 벨젠 경과 상의해 보고 결정해요. 지금 당장은 레만 자작보다 후작을 쫓는 게 급할 테니까요. 그리고 나는 의원한테 다녀오는 게 급하니까, 에드문트 좀 부탁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엘리아가 걸음을 바삐 옮겨 집무실을 나서고, 한스는 엘리아에게 돌려받은 밀서를 쥔 채 곁방으로 향했다.
늘 활짝 열려 있던 문은 엘리아가 급하게 나오며 절반이 닫힌 채였다. 손잡이를 향해 손 뻗기 전, 잠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공작님께서는 오늘은 좀 괜찮으시려나.’
근래엔 에드문트가 폭력적으로 굴거나 자해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그를 간병하는 일은 주로 엘리아가 전담해 왔다.
물론 문은 항상 열어 두었고, 집무실에 늘 한스나 벨젠 경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굳이 엘리아가 부르지 않으면 곁방을 찾지 않았다.
사흘 전이던가. 공작이 일어난 듯해서 호기심에 들여다본 게 마지막이었다.
<에드문트. 네가, 아니. 당신이…… 어릴 때 그렸던 거야. 보여? ‘일곱 살 봄에 에드문트가 그림’이라고 쓰여 있는 거. 로앙가 창고에서 찾은 거야. 외젠이 당신이랑 내 보모 역할 한다고 그리게 한 거래.>
<…….>
<그리고 이건…… 내가 그때 옆에서 같이 그린 거. 엉망이지? 이땐 글도 쓸 줄 몰라서, 외젠이 써 준 이름 위에 내가 물감으로 따라 썼나 봐.>
<…….>
<음. 당신은 어릴 적부터 뭐든 잘했다더니, 그림도 잘 그렸구나. 내 건 대체 뭘 그린지도 모르겠는데. 계속 그림 그렸으면 지금 외젠보다 더 잘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같이 한번 그려 볼까?>
<…….>
평범한 대화였다.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이 여자 하나뿐이라는 점. 무언가 참아 내는 듯 찌푸린 얼굴을 한 남자는 단 한 번도 대꾸하지 않는다는 점.
<에드문트.>
여자가 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애칭 대신 그를 에드문트라 불러 스물여덟의 다른 사람 행세를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린 시절 추억담을 조곤조곤 읊는 모습은 크게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한스는 물끄러미 바라보던 풍경에 끼어들지 못했고, 이를 악문 채 등을 돌려야만 했다.
<빌어먹을…….>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훔쳐봤느냐며 스스로를 향해 욕설을 뱉었다. 그리고 어린 아가씨가 남자의 꿈에나 존재할 죽은 아내 흉내를 내게 만든, 공작을 비난하고 또 비난했다.
그 후로 한스는 다시는 곁방을 훔쳐보지 않았다.
‘그래 봐야 고작 사흘 안 들여다본 건데……. 긴장되네.’
문을 마저 열기 위해 뻗은 손이 떨렸다. 한번은 의원이 한스의 손떨림을 눈치채고는 피로 누적이라며 약을 권했지만 사양했다. 몇 날 며칠을 쉬면 나을, 피로 누적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오직 이렇게 라스페 공작에게 다가갈 때에만 나타나는 증세였으니까.
‘젠장. 아무래도 계속 공작 옆에 있다가 같이 미쳐 가는 모양인데. 때려치워 버릴까 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지껄이던 한스가 문을 밀었다. 환자가 머무는 공간에 마땅해야 할 무거운 공기 대신, 진한 꽃향기가 터져 나왔다.
그런다고 한스의 무거운 마음까지 덜어 주지는 못했다.
‘오늘은 또 어떤 꼴을 하고 있으려나.’
조금 전 집무실을 나서던 엘리아의 모습을 보아 가시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을 성싶었다. 한스는 불필요한 기대감을 잠시 내려 두었다.
“……공작님?”
그러나, 곁방에 들어선 한스가 마주한 건 언제나처럼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한스는 깨달았다.
공작이 긴 잠에서 깨어났음을.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왔음을.
* * *
“한스.”
무슨 일인지 자각할 틈도 없이, 먼저 이름이 불리었다.
제국 수도에서 외치면 수십 명은 불러낼 수 있는, 흔해 빠진 이름이었다.
하나 특별했다.
이유야 뻔했다. 오랜만이었으니까.
물론 에드문트가 제 이름을 부른 게 아주 오래전 일은 아니었다. 공작은 종종 죽은 사람들, 혹은 죽었다 믿는 사람들의 이름 틈새에 한스의 이름을 끼워 넣곤 하지 않았던가.
<한스, 집사는 어디 있는가.>
<엘리아의 장례는 어떻게 할 건가. 한스 자네가 도와주게.>
대관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까마득한 물음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착각일 리가. 푸른 눈동자가 저를 직시하여 느껴지는, 이 기묘한 긴장감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공작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그, 환청…… 소리 같은 게 들리진 않으시고요?”
가까이 다가가자 짐작은 곧 확신이 되었다. 한스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이 따라올 뿐만 아니라, 찌푸리거나 혹은 멍한 채였던 얼굴도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이지를 찾았구나. 예전으로 돌아왔어.’
한스가 감격에 겨워 그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어디 아프신 곳은 없는지, 계속 누워만 계셔서 힘들진 않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러나 에드문트는 저는 괜찮다느니 하는 말 따위 없이 용건부터 물어 왔다.
“엘리아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거지?”
봄이 오기 훨씬 전으로 돌아가 버린 듯 굴었다. 한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아……. 아가씨께서는 열흘 전에 오셨습니다. 공작님께서 약을 드시고 잠드셨던 날,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벨젠 경을 불러와. 아니, 불러올 것 없이 당장 엘리아를 호위해 로앙가에 돌아가라고 해.”
“예? 설마 지금 당장 말입니까? 공작님, 아가씨께서 장장 열흘 동안 옆에서 간병해 왔습니다. 일단 좋아진 모습을 잠시라도 보여 드려야…….”
“손에 들고 있는 건 동부에서 온 밀서인가?”
에드문트는 한스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곤 손에 들고 있던 밀서를 빼앗아 들었다.
“공작님!”
“말이 많군. 두 번 이야기해야 하나.”
공작은 한스의 반항을 무시하고 축객령을 내렸다.
제기랄. 화가 치민 나머지 욕설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을 있는 대로 고생시켜 놓곤 기껏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뭐? 로앙가에 돌려보내라고?’
그가 미쳐 있는 사이 다들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특히 엘리아 아가씨가 그간 얼마나 괴로워했는데.
<한스, 에디가 나를 못 알아봐.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 나 너무 힘들어…….>
정신 놓은 남자 대체 뭐가 좋다고, 그걸 붙들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는 애달픈 고백을 퍼부었는데. 겨우 정신 차리자마자 소식도 전하지 않고 쫓아내겠다니?
“아가씨를 여기서 당장 쫓아내란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는 죽어도 못 합니다. 인정머리 없는 짐승만도 못한 짓이 정 하고 싶으시면, 직접 하십시오. 일어서 있기에도 벅찰 본인 몸으로 붙잡고 막아 보시든가, 아니면 내가 입 닥치게 죽여 버리든지요!”
상처가 될 말들을 토해 내며 에드문트를 마주했다. 내친김에 그의 면전에 대고 실컷 퍼붓고 제멋대로 할 작정이었다.
“한스.”
“엘리아 님께서, 아가씨께서 당신 옆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 견뎌 주셨는지 아십니까? 열흘 동안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아시냐고요! 이렇게 공작께서 깨어나신 것도 전부 그분 덕분인데!”
공작은 항상 그래 왔듯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스의 말을 받아 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이 되고 칼이 되어 에드문트를 상처 입히길 바라고 던진 말임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상처 입을 리 없다고 여겨 마음대로 퍼붓는 걸지도.
의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에드문트는 상처 받았으므로.
<미안해. 미안해, 에드문트. 아프게 해서 미안해. 외롭게, 추울 정도로 외롭게 해서 미안해. 그걸 네가 견디게 해서…….>
한스가 퍼부은 비난이 살을 가르고, 꿈이라 착각해 온 엘리아의 목소리가 그 안을 속절없이 파고들었다.
<에디, 내가 널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데, 마음을 어떻게 다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 글을 쓰고 말로 해도 다 표현이 안 돼서 답답하기만 해.>
곁에서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던 따듯한 순간들이 현실이었음을 외면치 못하게 만들었다.
에드문트는 침대를 벗어나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 나왔다.
한스가 지적한 대로 그는 일어서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몸이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그를 감싼 진청색 가운이 그를 끌고 나오는 건지 분간이 어려웠다.
“한스, 내가 자네에게…….”
목소리는 또 어떻던가. 차갑게 일갈하던 건 전부 연기였음을. 그의 목소리는 그저 지나온 추위에 얼어 잠시 한기를 품었을 뿐, 두려움이 금세 딱딱하게 얼었던 표면을 녹여 냈다.
꼭꼭 숨어 있던 절박한 목소리가 여린 살을 드러내 보였다.
“부탁한다고 말하면, 그럼 엘리아를 돌려보내는 데 협조할 건가.”
한스는 에드문트의 애원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저 미쳐 버린 채 자신을 내내 괴롭게 했던 남자의 말 따위 들어주지도 않을 작정이었는데.
“부탁하네. 나를 이 이상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 주게.”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온 듯 굴던 남자가 애걸하더라.
제발 부탁한다고, 어린 연인이 제 망가진 꼴을 보고 싫어하고 또 슬퍼할 거라며 꺼낸 애원을 무시한 한스 마이어에게 다시 부탁하더라.
‘비참하다니.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폄훼할 줄이야…….’
장장 20여 일을 환각에 시달려 왔던 남자였다. 입에 댄 거라곤 겨우 물이나 다름없는 묽은 환자식 따위였고, 심지어 그전에는 독한 술을 부어 대며 제 몸을 혹사해 왔다.
과하게 깎아 생기를 덜어 낸 조각상처럼.
위압적인 모습 따위는 전부 사라지고, 처연한 아름다움만 존재했다.
이제 한스가 제 주인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동정심뿐이었다. 하면 동정받는 그의 심경은 어떨까? 겨우 정신이 들었더니 안전한 곳에서 행복할 거라 믿던 여자가 제 닳은 꼴을 감상해 왔다는 소릴 들었을 때. 깨달았을 때.
남자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한스는 그간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외면해 왔던 그의 심경을 헤아려 보았다.
‘내가 엘리아 아가씨를 모셔 와서, 당신 꼴을 지켜보게 했으니. 비참했겠구나.’
공작이 옳았다. 비참함은, 그 감정에 더없이 어울리는 단어였다.
“한스, 나는 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아. 만약 엘리아가 죽는다면…… 지금도 이미 한계인데.”
남자는 스스로 비참함을 토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명하던 그의 푸른빛 눈동자가 뿌옇게 변하려 들었다. 어떤 징조인지 한스가 모를 리 없었다.
‘완전히 나은 게 아니시구나. 아직…….’
에드문트가 눈을 감아 희뿌연 고통을 숨겼다. 제 보좌관의 동정 어린 눈을 피해 숨어 버렸다.
“공작님께선 아직도 그렇게 믿고 계십니까? 아가씨가 죽었다고 여기고, 그 꿈인지 뭔지 하는 게 현실이 될 거라 믿은 뒤부터 환각을 보시는 겁니까?”
환각에 더불어 꿈 이야기를 떠드는 한스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가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던 침대 위를 가리키듯 시선을 던졌다.
<아……. 으…….>
신음을 내지를 때마다 새빨간 피를 울컥 토해 대는 엘리아의 모습은 오직 에드문트만이 볼 수 있다. 오롯이 그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
“올리버 페소가 죽었던 모습이야.”
그가 실제로 보았던 시신의 모습은 저런 날것이 아니었다. 피를 씻어 내고 실로 꿰맨 살 위에 옷을 입혀 살아 있는 사람인 척 정돈되었던 모습만이 그가 볼 수 있는 엘리아의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짓이겨진 팔다리와 눈동자가 사라진 채 울부짖는 시체 역시, 제 아내였다.
비록 제가 살해한,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올리버 페소를 살해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사…… 제발…… 살려 줘…….>
에드문트가 놓친 광경일 뿐, 엘리아는 부서진 마차 틈새에 처박힌 채 고통스러워하며 죽어 갔을 테니까.
“내가 계속 보아 온, 보고 있는 엘리아 말일세. 올리버 페소가 저택 지하 감옥에서 숨이 끊어졌을 때 모습만큼 많이 상한 채이네.”
“올리버 페소처럼이라니요?”
“자네가 떠나고, 내가 벨젠 경에게 약을 청했을 때. 그때 집사가 죽은 지 열흘이 지났다고 했지. 그리고 엘리아가 왔고…… 열흘이 더 지났다고 했는가.”
에드문트는 고통에 바르작거리는 여자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내내 엘리아를 보고 있었어.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여자를. 너를 바라보았어.
남자의 고백에 여자가 비명을 잠시 멈추었다. 힐난을 위해서였다.
<에드문트, 당신이 원한 거잖아. 죄책감을 덜겠다고 내가 당신 앞에서 계속 죽어 가게 했잖아.>
에드문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그 비난에 수긍하였다.
네 죽어 가는 꼴이라도 보고 있어야 했다고.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노라고.
“20일 동안……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팔다리가 짓이겨진 엘리아의 모습을 보아 왔어. 그 모습을 흉내 내 올리버 페소를 살해했던 거고. 그가 엘리아가 죽었을 때만큼의 고통을 느끼길 바랐으니까.”
다시 시작된 비명 아래에 한스의 목소리가 약하게 깔렸다. 대체 왜 올리버 페소였느냐, 당신의 꿈에서 그가 엘리아 님을 죽이기라도 한 거냐. 그런 물음이었으나 에드문트에게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살려 줘. 너무 아파. 죽어 버려. 당신도 죽어 버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한스의 대답 대신,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엘리아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올리버 페소가 그랬듯이. 팔을 시작으로 두 다리를, 머리를 망가뜨렸는데 그는 곧장 죽지 않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비명을 질렀으니까. 그날 이후부터 엘리아도 비명을 지르더군. 그래서 사실 지금 자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언제고 내게 꿈 이야기를 하라고 권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내가 보아 왔고, 들어 왔던 것들을.”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에드문트의 입술이 살짝 들렸다. 조각칼을 아무렇게나 내려쳐 깎아 낸 듯, 비틀어진 표정이 뜻하는 건 분명 자괴감이었다.
“한스, 자네의 의견이 궁금하군. 들리지 않으니 고개라도 끄덕여 보게. 내가 이 이야기를, 엘리아에게 전해야 하겠는가.”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물었다.
“내가 듣는 환청은, 죽은 아내의 목소리는 내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데.”
고개를 끄덕이고, 혹은 가로젓는 대신 한스가 무어라 지껄였다. 들리지 않는다고 이미 말해 주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에드문트도 똑같이 굴었다. 제 보좌관이 무어라 지껄이건, 방 안을 가득 메운 비명을 그에게 전달했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죽지 않은 여자에게서 실은 매일 죽은 사람을 겹쳐 보았다고 하면 분명 배신감을 느낄 거라고. 차라리 입을 다물고 미친 모습을 보이는 게…….”
행복할 거라고.
<에디. 내게 더 사랑받을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모르게 해. 네 비참한 꼴을 충분히 보였으니 이 이상 추락하지 마. 네 쓸모없음을 증명하려 하지 마. 너도 알잖아.>
어린 여자의 환청이 그의 침묵을 부추겼다.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여자의 말에 수긍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엘리에게, 엘리아에게는…….”
그러나 전부 기만이었다. 그가 정말로 침묵을 원했다면 지껄이지 말았어야 했다. 이해를 구하겠다며 발버둥 치는 대신 여자를 속이기 위한 변명이나 생각했어야 했다.
제 비참함을 진열해 대는 행위는, 결국 위안 받고 싶다는 자기표현에 불과했으므로.
“……에디, 한스.”
자기 연민에 심취한 남자는, 열린 문을 타고 제 목소리가 뻗어 나간 줄 몰랐다. 엘리아가 돌아온 것도 눈치채질 못했다.
“지금, 무슨……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 게 뭐야? 두 사람, 뭘 비밀로 하려고 했던 거야?”
스스로 가장 두려운 상황을 끌어오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다.
* * *
고통을 호소하던 비명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다.
<아하, 아하하.>
끔찍한 웃음소리였다. 남자의 비극을 아낌없이 축하하는, 새빨간 비명이었다.
방 안에 메아리치다가 죽어 버렸다. 사라졌다.
에드문트가 환청보다 더 끔찍할, 엘리아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침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