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진심
엘리아 로앙. 죽은 로앙 백작 부부가 남기고 떠난 남매. 그중 어리고 여리던 여자아이.
부모는 아이를 ‘엘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건 아이의 어머니인 엘레노아의 애칭이기도 했다.
<엘리.>
<아빠, 누구 엘리 찾아? 엄마 엘리?>
하여 아이의 아버지가 사랑을 가득 담아 ‘엘리’라는 애칭을 부르면, 아이는 우두커니 선 채 물었다. 아버지가 부른 게 저인지 꼭 확인하려 했다.
<우리 작은 엘리 불렀지.>
그가 저를 향해 팔을 활짝 벌리거든, 그제야 작은 아이는 바지런히 뛰어 품에 안겼다.
<아빠가 엘리랑 엄마 부를 때 조금 달라. 똑같이 엘리라고 부르는데 나는 사실 다 알 수 있어.>
<그래? 어떻게 다른데?>
<엘리 부르면 아빠가 더 다정해. 그리고 엄마한테 ‘엘리’ 할 때는, 아빠가 이렇게 더 많이 웃어.>
일곱 살 아이가 사람들의 감정을 기민하게 읽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부모는 걱정이 많았다.
<남들 아프고 슬픈 감정까지 다 헤아리느라 우리 엘리 힘들면 어쩌지.>
아이가 사람들 틈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 길어 와서 제 마음을 채우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키우고 싶었건만, 시간은 어찌나 잔인하던지.
<엄마랑 아빠가, 죽었어? 돌아가셔서,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거야?>
애칭을 불러 주던 부모가 죽은 뒤 아이는 불쌍한 귀족가 아가씨로 불리었다. 마치 이름만으로는 아이를 설명하기 부족하다는 듯.
<저 아이인가요? 불쌍해라. 부모도 잃고 친인척들은 다 등을 돌렸으니.>
불쌍하다는 수식어가 앞뒤로 붙어 아이를 규정했다.
<엘리.>
부모가 애정을 담아 불러 주던 애칭은 오빠 외젠이 물려받았다.
<엘리. 제발, 제발 너까지 나를 떠나지 마.>
사랑만 가득하던 애칭에 슬픔, 두려움, 절박함이 담겼다.
아이는 상실한 사랑을 체념하지 못하고 그저 그리워했다. 사랑만 가득 담아 제 애칭을 불러 주던 부모를,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과거를 욕망했다.
그래서 에드문트가 제 애칭을 불렀을 때, 엘리아는 그가 사랑을 담아 제 이름을 불러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감정 변화에 당황했음에도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엘리. 엘리아.>
그가 제 이름을 둘로 나눠 감정마저 분절했을 때에는 어땠던가.
다정하게 부르던 애칭만 제 것으로 인지한 채, 뒤따르던 이름에 담겨 있던 감정을 살피려 하지 않았다.
<미안해, 엘리아. 내가…….>
그가 소리 내어 말한 뒤에야 깨달았다. 저이기도 하며, 제가 아니기도 한 이름에 담긴 고통을. 죄책감을.
‘에디. 너는 오늘도 꿈에서 죽은 나를 바라보며 사과하고 있으려나.’
엘리아는 마차에서 전해 받았던 한스의 기록을 떠올렸다. 10년 후, 아내, 이혼 서류, 죽음. 그런 아픈 단어들의 나열은 무엇을 의미하던가.
‘내가 스물여덟이 되고, 너는 서른둘이 되어 우리가 결혼했는데, 내가 이혼 서류를 남기고 떠나다 죽어 버려서…… 죽은 엘리아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느라 바쁘려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비극적이기만 하다. 그러나 꿈이라는 설명 말고는 다른 추측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에드문트의 남다른 명민함이 꿈에 악영향을 끼쳤을 거라 짐작할 뿐.
엘리아는 뒷장부터 펼쳐 읽기 시작한 책의 앞 내용을 추리하듯 에드문트의 꿈을 헤아려 보았다.
“한스, 에디가 나를 만나러 저택에 왔던 날 말이에요. 그날 에디가 10년 후의 예지몽처럼 느껴지는 악몽을 꾸었나 봐요. 그 이후로 꿈에서 본 미래를 바꾸기 위해 다르게 굴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요?”
“전에 말씀하신 필체가 하루 만에 달라진 것도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응, 그리고 악몽은……. 내가 미래에 저와 결혼하고도 괴물이라 끔찍하게 여길 거로 생각해서, 그래서 그렇게나 구체적이고 슬픈 꿈을 현실이 될 미래라고 여겼을지도요.”
한스에게 추측한 걸 이야기하니 그 역시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자각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할 줄을 몰라서 그런 지독한 생각까지 하셨을 거라고 봅니다. 아가씨를 대할 적에 답지 않게 어수룩한 모습 보이기도 하셨으니까요.”
“예를 들면, 그 어마어마하게 많던 꽃 선물이라든가?”
“그건 어설펐다기보단 과한 선물에 가깝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의도적으로 과하게 준비한 거였을 테고요.”
의도적이었을 거란 한스의 추측에는 일리가 있었다. 응접실을 가득 채운 꽃 선물 탓에 엘리아는 온종일 에드문트를 생각해야만 했으니까.
“에디, 너 정말 일부러 그렇게 과한 선물 보냈던 거야? 그러고는 내 눈동자가 생각나서 보여 주고 싶었다고 시침 뗀 거고? 그럼 나는 네 계획에 홀랑 넘어가 버린 거였네.”
깨어났을 때 자신을 봐 주지 않았다는, 그때의 충격과 슬픔은 이틀이 지나자 많이 희미해졌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꿈에 나오던 푸른색 괴물이 두렵지 않게 되었던 것처럼.
엘리아는 에드문트가 회복하거든 묻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쌓아 가며 그를 기다려 주었다.
* * *
모처럼 하늘에 까만 먹구름 대신 새하얀 구름이 떠 있는 맑은 날이었다.
“엘리…….”
며칠 내내 진정제와 함께 몸을 회복시켜 줄 약재를 삼켰던 에드문트가 눈을 떴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다가 선잠이 들었던 엘리아를 향해서.
“……아, 에디. 일어났구나.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남자는 힘없이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작은 반응만으로도 엘리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미안해.”
한데 그를 향해 활짝 웃는 엘리아에게 에드문트는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왜 미안하다고 해?”
“나 때문에……. 내가 또 너를 울렸으니까.”
엘리아는 뒤늦게 제 얼굴을 적신 눈물을 확인했다. 그가 눈을 뜨는 모습에, 거짓말이 서툰 여자가 또 저도 모르게 울어 버리고 말았다.
“이거 그런 거 아니야. 슬퍼서 우는 거 아니야. 좋아서, 좋아서 눈물 난 거야. 진짜로. 내가, 나는…….”
엘리아의 두서없는 말에 에드문트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여자의 눈물처럼, 의도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었다.
천천히 입술이 열리더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엘리아.”
뚝뚝, 슬픔을 떨구는 여자를 향해 시선을 맞춘 채 다시, 이름을 불렀다.
“엘리아.”
“……응, 나 여기 있어.”
엘리아는 실망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떨어지는 눈물은 차마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흘려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드문트가 팔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훌쩍 높아진 그의 얼굴이 천천히, 허락을 구하듯 내려왔다.
엘리아는 어두워지려던 표정을 정제한 후 살짝 미소 지었다.
이내 눈을 감아 그를 재촉했다.
“…….”
남자의 입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젖은 눈가였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전부 그가 받아 마셨다.
“에드문트.”
엘리아는 눈물을 멈추지 않은 채 그를 불렀다. 열여덟의 제가 그를 부르던 애칭 대신, 스물여덟이 되면 익숙해질 그의 이름을.
자신을 여전히 스물여덟의 아내라 믿고 있을 에드문트를 위해서.
“나, 나 궁금한 게 있어. 당신한테 묻고 싶었던 거.”
엘리아가 침대보를 쥐고 있던 손을 올려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남자가 한없이 멀어지려 하기에 다시 붙들었다.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거리에 그를 잡아 놓고 멀어지지 않도록 했다.
“……내가, 스물여덟인 내가 당신을 버렸어?”
“…….”
“내가 그렇게, 그렇게 나쁜 짓 했어? 그러고는 죽어 버리기까지 했어?”
“엘리아.”
“미안해. 내가 절대 당신 미워서 떠난 거, 그런 거 아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나 당신 사랑해. 사랑했을 거야. 스물여덟에도 분명 당신이 좋았을 거야. 왜냐면……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좋아해서…….”
그가 삼켰던 눈물에 비할 수 없는, 더 짙고 많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눈물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입을 맞추는 대신 손을 뻗었다.
“미안해. 미안해, 에드문트. 아프게 해서 미안해. 외롭게, 추울 정도로 외롭게 해서 미안해. 그걸 네가 견디게 해서…….”
엘리아는 도통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분명 제 감정이 아닌데. 그의 꿈에 나온, 자신이 아닌 엘리아를 흉내 내 그를 위로하려던 것뿐이었는데.
“미안해……. 미안해…….”
홀로 남겨졌다는 남자의 마음이 지독하게 슬픈 나머지, 엘리아는 사과했다.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 괜찮아. 네가 사랑했었다 말해 주고 떠났으니까. 죽은 널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었지만, 어린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이렇게라도 보며 속죄할 기회를 주었으니까.”
“……나를, 다시 만났어? 열여덟……?”
“응. 너를 잃고 깨어난 뒤에, 열여덟의 네게 찾아갔어.”
“어땠어? 열여덟인 나는 네게 어떤…… 사람이었어? 그 애를…… 사랑했어?”
에드문트는 대답에 앞서 엘리아의 눈 밑을 더듬었다. 따듯한 온기 위로 흐르는 눈물을 덜어 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웃음이, 웃는 게…….”
여자에게서 닦아 낸 슬픔조차 버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 에드문트의 새파란 눈이, 엘리아에게 덜어 낸 슬픔을 가득 담았다.
“너무 따듯해서, 사랑스러웠어. 그래서 사랑받고 싶었어. 어린 네 사랑이 탐났어.”
에드문트의 손이 엘리아의 얼굴에 새겨진 눈물길을 훑어 내렸다.
“한데 닿으면 내가 다정한 척 거짓말한 걸 들킬까 봐, 그래서 닿지 않으려고 했는데 따듯해서 포기할 수가 없었어. 네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사랑을 놓을 수가 없었어.”
에드문트는 여전히 눈앞에 있는 엘리아를 다른 사람이라 착각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에드문트. 나도, 당신 안아 줄까? 안아 주고 싶어.”
타인에게 자신을 사랑하노라 절절히 고백하는, 그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어. 나를 꿈에서 본 죽은 사람 대신 삼아 사랑하는 척 거짓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무서웠는데. 나를 사랑했구나. 나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엘리아는 그를 세게 안아 주었다. 벅찬 마음을 멈추지 못해 그의 온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를 떠난 스물여덟의 여자가 되어, 그에게 사랑받은 열여덟의 엘리가 되어.
“고마워. 사랑해 줘서,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고마워…….”
목이 쉬도록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에드문트 역시 그에게 사랑한다고, 또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다시 잠이 들 때까지 따듯하게 안아 준다는 게, 그만 그를 끌어안은 채 함께 누워 잠이 들었다.
“두 분께서 하도 달게 주무시는 것 같아 깨우지 않았습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음……. 네, 오랜만에 좋은 꿈 꿨어요.”
사랑을 확인받은 여자는, 그날 몹시도 단꿈을 꾸었다.
깨어난 뒤에도 행복이 남아 있을 만큼 아름다운 꿈이었다.
* * *
기다림은 여전히 끝날 줄을 몰랐고, 그의 진심을 들었던 날처럼 긴 대화를 나누는 일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에드문트는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약을 먹고 잠이 들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막막한 기다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아는 이제 괜찮았다.
“에디, 나는 정말 괜찮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으니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게 돌아와 줘.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아.”
아침이 되면 그가 선물해 준 오르골 태엽을 감아 잠든 그에게 해가 떴음을 알려 주었다.
밤이 찾아오면 춥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 준 뒤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을 꿋꿋하게 견디어 마침내, 에드문트가 엘리아를 찾아왔다.
그를 기다려 준 연인에게 그 어느 것보다 귀한 선물이 될…….
“엘리.”
이름, 애칭을 불러 주었다.
마치 그가 다시 사랑에 빠지고, 여자가 몰랐던 이야기의 첫 장을 펼쳤던.
초봄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