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손님
오후부터 하늘이 까맣게 짙어지더니, 비가 내렸다.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바닥을 때리고 튀어 올라 옷자락을 적셨다.
지저분하게 튄 흙탕물이 불쾌할 법도 한데, 데이지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후원에 정차한 마차에서부터 걸어오는 사이 푹 젖은 몸도 아무래도 좋았다.
품 안에 꼭 끌어안은 가방은 무사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하필 중간부터 비가 와선……. 그래도 혹시나 해서 꼼꼼하게 싸 오길 잘했네.’
천으로 몇 번이나 감싼 짐 가방을 품에 꼭 안은 데이지가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리 평민이라 해도 제가 호위를 책임진 손님이었으니, 앞서 걷던 벨젠 경이 연신 데이지의 상황을 살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비를 쫄딱 맞은 두 사람이 겨우 저택에 당도했다. 그러나 당장 몸 닦을 수건을 들고 기다려야 할 사용인들이 보이질 않았다. 대신 기사 하나가 허둥대더니 뒤늦게 수건 몇 장을 집어 들고 왔다.
“죄송합니다, 벨젠 경.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저는 괜찮으니, 여기 손님께 먼저 드리십시오.”
데이지가 꼭 안고 있던 짐 가방을 잠시 내려 두고 수건을 받아 들었다. 덜 말린 수건에서 여름 장마 냄새가 났다. 급한 대로 얼굴과 머리만 닦았다.
“슈미츠 양, 엘리아 아가씨를 모셔 올 테니 렌 경을 따라가십시오.”
벨젠 경이 저택 2층으로 향하는 사이, 수건을 건네주었던 렌 경이 데이지를 1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을 머금은 구두가 쩍쩍거리는 소음을 울렸다.
응접실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바로 근처에 위치했다. 굳게 닫혀 있던 나무 문이 소음과 함께 열렸다.
데이지는 어릴 적 로앙 백작 부부를 따라 공작가에 찾아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응접실 안을 둘러보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내부는 기억과 달라진 점이 많았다.
유행에 맞추어 고풍스러운 가구와 그에 어울리는 장식물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데이지는 참담한 심경이었다.
“혹시 아가씨께서 이곳 응접실에 오실 예정인가요?”
“그럴 텐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기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 모습에, 데이지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죄송하지만 수건 몇 장을 더 가져다주실 수 있으실까요? 먼지가 너무 많아서 아가씨께서 앉으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벽난로에 불을 때야겠으니 좀 도와주세요.”
“이 여름에 벽난로를 이용하겠다고?”
“요즘같이 비가 자주 올 때는 습도 관리를 해 줘야 합니다. 더군다나 귀한 가구가 많은 곳이니 잠깐이라도 불을 때야 상하지 않을 테고요.”
데이지는 저택 관리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기사를 위해 직접 얼마나 응접실 상태가 엉망인지를 보여 주었다. 창틀에는 며칠째 이어진 비가 스며 나무가 썩고 있었고, 물을 잔뜩 머금어 늘어진 커튼은 변색이 심해 차마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가방을 싸맨 천을 하나 풀어 커다란 소파를 직접 닦아 보여 주기도 했다. 새카만 먼지가 묻어난 모습에 기사가 입을 쩍 벌렸다.
“분명 문을 다 닫아 두었는데.”
“오히려 환기를 안 해 주면 이렇게 먼지만 더 쌓여요.”
그제야 사태가 심각함을 인지한 기사가 청소 도구와 장작을 가져다주었다. 데이지는 급한 대로 엘리아가 앉을 자리를 치운 뒤, 마른 장작을 골라 불을 붙였다.
덕분에 엘리아가 올 때쯤, 데이지의 기준으로 폐허 꼴이던 응접실이 그럭저럭 괜찮은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반면 응접실을 갈아엎느라 데이지의 행색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데이지, 차라리 여기 못 있겠다고 하고 2층으로 올라오지 그랬어.”
비에 젖은 옷에 먼지가 엉키어, 뒤늦게 내려온 엘리아를 안아 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로앙가에 늦는다고 연락 넣어야겠어요. 저 오늘 여기 저택 다 치우기 전에는 죽어도 못 가요. 두고 갔다간 분명 열흘이 지나도 못 잊을 거예요.”
“너 혼자 어떻게 다 치우려고? 그냥 잊어버려. 차라리 로앙가에 돌아가서 창고 정리를 해.”
“정리할 창고가 없어요. 아가씨 안 계시는 동안 외로워서 다 정리했거든요.”
에둘러 보고 싶었노라 말하는 데이지가 애틋해서, 엘리아는 별수 없이 데이지를 꼭 끌어안아야 했다.
옷자락이 머금고 있던 빗물이 금세 엘리아에게 묻어 나왔다.
“어휴, 어떻게 해요. 갈아입으실 옷도 넉넉지 않으실 텐데.”
“아니야. 일손이 부족해서 방치해 둔 곳은 있어도 나는 대접 잘 받고 있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저택과 비교하면 엘리아의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머리칼은 누가 빗어 묶어 주었는지 단정했고, 입은 옷은 앉아 있느라 구겨져 있었을 뿐 깔끔했다. 수건에서 묻어나던 꿉꿉한 냄새도 엘리아에게선 찾을 수 없었다.
“필요한 사용인들만 두고 다 다른 곳으로 보내 두셨나 보네요.”
“응. 나랑 에디랑, 기사들 몇 명 지내는 공간만 신경 쓰게 하고 있어. 밖에 병사들은 원래 저택 밖에 지내는 공간이 별도로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계속 이대로 두면 가구며 장식품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먼지 쌓이고 다 갈라질 텐데.”
“음, 괜찮아. 나중에 그냥 전부 다 바꿔 버리면 되겠더라고. 돈이 좋지?”
엘리아와 데이지는 평범한 대화를 몇 번 더 주고받은 뒤에야 본론에 들어갔다. 품에 소중히 안고 온 가방을 열자 종이 더미가 가득했다.
“이렇게나 많아? 진짜 고생했네.”
“절반은 외젠 님이 예전 기억 되살려 쓰신 거고, 저는 이전부터 모아 오던 자료 정리해서 챙겨 넣었어요.”
“고마워. 갑자기 황당한 부탁이었을 텐데.”
오늘 새벽, 엘리아는 벨젠 경에게 부탁해 로앙가에 소식을 넣었다. 며칠째 연락도 없이 공작가에서 지내 왔으니 한 번쯤은 소식을 전해 주어야 했다.
더불어 부탁할 것도 있었다.
<외젠, 그리고 데이지에게.
혹시 걱정할까 봐 편지 보내.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공작가에서 지내야 해.
그리고 나 필요한 게 있어. 에드문트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이나, 공작가 사람들에 관해 들은 소문이 있으면 모아서 전해 주겠어?
벨젠 경이 오후에 공작가에 다시 돌아오기로 했으니 그에게 전달해 줘.
두 사람 다 건강 잘 챙기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
사랑을 담아, 엘리아가.>
데이지는 라스페 공작에게 큰일이 일어났다고 짐작했지만, 소식을 전해 받고 나서도 무슨 일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편지 전해 준 벨젠 경도 전에 계실 적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시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말을 안 해 주시네요.>
안부가 짧게 적힌 편지를 받아 든 데이지의 걱정이 더욱 커지기만 했다.
<데이지, 걱정하지 말라고 엘리아가 편지 줬는데 더 걱정하면 어떻게 해.>
평소 같았음 데이지가 외젠을 달래느라 바빴을 텐데, 이번에는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었다.
<공작가가 지금 상황이 좋은 건 아니겠지만, 엘리아가 라스페 공작을 도와서 잘 버티는 중일 거야. 많이 걱정되면 가서 확인해 봐. 가서 한번 안아 주고 와.>
저도 엘리아가 괜찮은지 공작이 대체 무슨 상황에 놓인 건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텐데. 그는 데이지를 공작가에 보내기로 하곤 해가 질 때까지 라스페 공작에 관한 기억들을 종이에 쏟아 냈다.
<데이지, 벨젠 경과 언제 출발하기로 했다고?>
<두 시간 내에 출발하려고요. 오늘도 비가 올 것 같아서 조금 서두르자고 말씀드렸어요.>
<두 시간……. 그럼 내가 적은 건 출발하기 전에 따로 전해 줄게.>
몇 시간 동안 글을 썼으니 팔이 저릴 텐데, 그는 저녁까지 걸러 가며 펜을 놓지 않았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창고에서 해묵은 종이 몇 장을 쥐고 돌아오기도 했다.
데이지는 외젠이 그날 내내 바빴던 사정을 출발 직전에야 알게 되었다.
“안에, 외젠 님이 선물이라며 따로 챙겨 주신 것도 있어요.”
“선물이라고? 이상하다. 아까 가방 열어 봤을 땐 종이밖에 없던데.”
엘리아는 다시 가방을 열어 안을 뒤적거렸다. 가방 안쪽을 보니 앞엣것들과 질감이 다른 종이가 몇 장 섞여 있었다.
혹시 이걸 말하는 걸까. 엘리아가 호기심에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가씨.”
“……안 돼, 데이지. 지금 나한테 말 걸지 마.”
눈물 날 것 같단 말이야. 엘리아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데이지까지 눈이 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다행히 데이지는 외젠의 선물을 보고 울 뻔했다는 이야기를 비밀로 지켜 주기로 약속했다.
* * *
데이지는 엘리아와 짧은 해후를 마치고 다시 로앙가에 돌아갔다. 다행히 한참 내리던 비는 소나기였는지 금방 잠잠해져 가는 길이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엘리아는 데이지를 배웅해 준 뒤, 전해 받은 종이를 품에 안고 2층으로 향했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계단을 오르던 중, 벨젠 경과 함께 공작의 호위를 맡아 주고 있는 렌 경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엘리아가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겨우 두세 마디 나누었을 정도로 말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지간히 엘리아가 기분 좋은 티를 낸 모양이었다.
“음. 오랜만에 보고 싶은 사람 만났으니까요. 선물도 받았고.”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엘리아가 빠른 걸음으로 2층에 올라간 탓이었다. 문이 열리기 바쁘게 안으로 쏙 들어간 엘리아가 곧장 한스 경부터 찾았다.
“오셨습니…….”
“한스! 어제 내기했던 거 내가 이겼어요.”
“벨젠 경께 들었습니다. 슈미츠 씨와 동행했다고요. 축하드립니다.”
활짝 웃으며 들어왔던 엘리아가 한스의 순순한 축하 인사에 다시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네. 내가 기대한 반응이 아닌데.”
“흠. 제가 말입니다, 사실 일부러 져 드리려고 ‘로앙 백작께서 오신다.’에 걸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한스는 나름 표정 관리를 하며 생색을 냈지만, 엘리아에겐 턱도 안 먹힐 소리였다.
<한스, 벌써 5분 지났어요. 어디다 걸지 빨리 정해요.>
<잠깐만요, 아가씨. 저 딱 5분만 더 고민하면 안 될까요? 아니 아무래도 두 분 함께 올 것 같긴 한데, 근데 또 로앙 백작님께서 저택 비워 두려 하실 것 같지는 않고…….>
이미 내기를 하던 시점에 장장 20분을 들여 고민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장난처럼 시작한 내기가 규모가 커진 탓이었으며, 한스가 벌써 수일 동안 격무에 시달려 일탈이 간절했던 탓이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내기로 걸었던 이틀 치 서류를 기쁜 마음으로 한스에게 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엘리아는 들고 있던 종이들을 에드문트의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내기에서 지면 전부 맡기로 했던 서류를 들어 한스에게 안겨 주었다. 괜히 엘리아의 기분을 살핀답시고 내기를 제안했던 한스가 뒤늦게 후회 어린 한숨을 쉬었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한스 경은 도박에 소질 없다고.”
“…….”
“한스, 지금 나 안 들리게 몰래 뭐라고 했어요? 도박꾼 뭐 어쨌는데.”
“무슨요. 장차 도박사 마님을 모실 생각에 홀로 기뻐하던 중이었습니다.”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 쉬는 한스를 보고 웃어 준 뒤, 엘리아는 데이지에게 받아 온 종이 중 세 장을 골라 곁방으로 향했다.
“에디, 다녀왔어.”
잠시 두고 갔던 그리움이, 에드문트 대신 엘리아를 반겨 주었다.
다시, 잠든 남자의 곁에서 그리움을 키울 시간이었다. 그 외롭고도 평화로운 시간에 엘리아가 기꺼이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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