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이름 (65/79)

65. 이름

약효는 분명 기한이 존재했으나, 잠이 든 에드문트가 시간의 흐름을 자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여 이틀 동안 꿈속에 갇혀 있던 에드문트는 준비 없이 꿈에서 쫓겨나야 했다.

방 한 편에 켜 둔 등불 빛이 쏟아져 눈멀게 했으니, 암흑 같았다.

꿈 같았다.

겨우 시각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백금색의 머리칼. 동그랗게 웅크린 작은 몸. 깊은 잠에 빠져 내는 숨소리.

얼굴을 다 보여 주지는 않았으나, 분명 잠이 든 엘리아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석실의 추위와 맞서던 꿈을 꾸었는데. 장소만 바뀐 채 꿈꾸는 중이려나. 아니면…….

에드문트는 돌처럼 굳어 있던 몸을 움직여 보았다. 뻣뻣하긴 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꿈은 아닌 듯했다.

‘약효가 다해 꿈에서 깨어난 거고, 지금은 환각을 보는 거겠지.’

다행이었다. 엘리아의 환각을 본다는 건, 제가 원했던 세상이 그대로 남아 주었다는 의미였으니까.

안도감을 느낀 에드문트는 눈앞에 있는 엘리아를 세세히 살폈다.

‘잠든 모습을 한 환각을 보는 건 처음인데.’

오늘 환상은 시신을 보는가 싶을 만큼 정적이었다. 환청마저 미약했다. 제 이름을 읊는 소리 대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니 빈방은 집사가 먼지를 훔치던 협탁도, 제 조부가 책을 꺼내 읽던 책장도 없이 황량했다.

수십 년을 조용한 저택에서 살아왔으니만큼 에드문트는 조용한 공간에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소리를 듣고 죽은 사람들을 보던 짧은 시간에 그새 적응하여, 낯설었다.

낯설지 않은 건 엘리아의 자는 모습 정도였다. 침대를 나누어 쓰던 시절엔 새벽에 먼저 일어나선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곤 했으니까.

그때 아내의 모습 그대로, 엘리아는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누워 있었다.

‘그때는 네가 나를 피하느라 멀리 떨어져 자는 줄 알았는데.’

잠들기 전만 해도 저와 가까이 누워 있던 여자는 깨어나 보면 꼭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에드문트는 저와 닿는 게 싫어 움직인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아내가 편히 잘 수 있기를 바라며 침대를 비워 주기도 했다. 밤이 한창일 무렵 침실을 빠져나와, 집무실 곁방서 홀로 잠을 청했다.

한데 제 착각이었다더라.

<에디, 원래 그렇게 천장 보고 반듯하게 자? 나는 절대로 똑바로 누워서 못 자. 어릴 때는 아무리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 눕혀도 자다가 떨어졌다지 뭐야?>

그냥 잠버릇일 뿐이었다고 했다. 열여덟의 여자가, 스물여덟의 아내를 변호하며 동시에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

마음을 담아 불러 주던 애칭은 의미 없다 여겨 왔으면서, 정작 의미 없던 거리감에는 거부감이 있다고 착각해 왔음을 깨닫게 했다.

‘오늘 다시 네가 자는 모습을 보는 건 그때 들었던 말이 인상 깊었기에……. 아니면, 그저 침대 위에 너를 끌어오고 싶었던 내 욕망의 발현일지도.’

에드문트는 자조적인 감상을 마치고 손을 뻗었다. 긴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움직임이 그리 자연스럽진 않았다.

그는 억지로 손을 뻗어 가면서, 잠이 든 아내에게 닿아 보려 했다.

환각이라 여기면서도 접촉을 갈구하는 건 명백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으리라는, 미친 것치고는 현실감 다분한 체념 때문에 시도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그가 손 뻗는 행위는 다분히 비이성적이었고, 또 충동적이었다.

이성을 외면한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머리칼에 닿았다. 충동의 보상으로 흐르는 물에 손 담글 때의 촉감을 느꼈다. 순식간에 갈망이 벅차올랐다.

‘조금만…….’

치밀어 오른 욕망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머리칼을 스치며 움직이는 손은 진즉부터 떨리고 있었다. 고작 환각에 닿기를 망설이느냐고 하느냐 묻거든, 그랬다.

환각조차 현실처럼 욕망하였으니까.

욕망하노라 떨림으로 외치는 그의 손이 머리칼 위를 벗어나 푸른빛의 침구 위를 거닐었다. 짧은 방황 끝에 마침내, 둥글게 말린 엘리아의 손을 지척에 두었다.

아주 작은 틈만 남겨 두고 숨을 골랐다. 한 번, 두 번.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의 눈동자가 깊게 침잠해 갔다.

그리고 세 번째, 그의 손끝이 함께 맥동할 정도로 깊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하여 우연인 척 움직인 손끝이 엘리아의 손등에 닿았다.

따듯하고 말랑한 촉감은 가히 현실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으음…….”

인기척을 느낀 엘리아가 웅얼거리며 뒤척였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반응에 놀랄 새도 없이, 침대에서 떨어질 뻔한 몸을 급히 붙잡았다.

그의 팔이 엘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서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가는 몸이 바람에 쓸리듯 이끄는 대로 다가왔다.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끌어당기는 대로 속절없이 가까워지기만 하더니, 어느새 엘리아가 남자의 품에 떨어졌다.

쇄골에는 말간 얼굴이, 그 아래로 상체가 남자의 가슴팍에 밀착되었다. 맞닿은 곳마다 열기가 느껴졌다. 해를 붙잡아 끌어안은 심경이었다.

남자는 환각이라 착각한 채 열기에 취하고 말았다.

조각조각 난 그의 이성이 따듯한 체온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따듯했다. 그가 지난 두 달간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따듯해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간 누구도 에드문트에게 체온을 나누어 주지 않았으며, 그나마 손 뻗어 봄 직한 집사에게 최초로 닿았을 때는 이미 죽음에 빼앗긴 뒤였다.

꿈에서는 어땠던가. 그의 망가진 정신이 제멋대로 만든 환각은 또 어땠던가.

그는 언젠가 지금처럼 엘리아를 끌어안던 꿈을 떠올렸다. 황홀했고, 순간순간이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려 발버둥 쳤다.

비록 차가운 시체일지라도 좋았으니까. 그러니 시신의 모습을 한 아내를 안는 걸 주저치 않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렀고,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몸은 아무리 입을 맞추어도 그에게 아픔만 돌려주었지만 홀로 석실에 방치되어 있던 순간보다야 따듯했다.

따듯하다는 착각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따져 볼 가치도 없었다. 에드문트는 어디에서건 언제나 외로운 만큼 추웠다.

시체에 절박하게 기댈 만큼 추웠으니, 따듯한 체온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조금만 더.’

에드문트는 마침내 따듯함을 품고도 끝 모를 갈망을 느꼈다. 허리에 머물러 있던 팔을 움직여 엘리아를 더 깊게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간절했던 체향을 확인했다. 이대로 입술을 붙여 살결을 탐하면 텁텁한 비누 향이 날 것만 같았다.

얼마 만에 느껴 본 감각인지. 남자는 전율하며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

“엘리아.”

입에서 흘러나와 귓가에 곧장 스민 제 목소리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날개 뼈를 손으로 감싸 제 품에 욱여넣었다. 목덜미에 스치던 입술이 다시 아내를 불렀다.

“엘리아.”

그러자 기대하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으응…….”

웅얼거림과 함께 품 안에 갇혀 있던 몸이 잘게 떨렸다. 에드문트가 옭아맨 팔을 풀자 엘리아가 좀 더 크게 뒤척였다. 품에 묻혀 가려져 있던 얼굴이 에드문트를 향해 왔다.

그러나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에드문트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린 연인일지도 몰랐다.

오늘만큼은, 지금만큼은 품 안의 여자가 스물여덟의 엘리아이기를 바랐다.

단 한 번만이라도 이렇게 체온이 남았을 때의, 죽기 전의 아내를 끌어안고 고백하고 싶었으니까.

그 열망에 힘입어 이렇게나 현실 같은 환영이 나타난 걸 테니까.

“엘리아.”

부르는 소리에 내내 감겨 있던 눈이 열려 보답해 주었다.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꽃 한 송이가 보였다. 저를 향해 완연히 피어난 꽃, 주홍빛 눈동자.

“……에디?”

이어 작은 입술이 열려 새빨간 열매를 드러냈다. 남자는 내내 느끼지 못했던 허기를 깨쳤다.

“에디, 일어났……. 일어났구나. 아…….”

정신이 든 엘리아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왔다. 자비 없이 얼굴을 헤집었다.

이마에서부터 환각만 갈구하던 눈, 푹 팬 볼과 스스로를 학대한 증거가 남은 입술까지 마치 제 것인 듯 손으로 구석구석 탐했다.

“보고 싶었어, 에디. 너무 보고 싶었어…….”

심지어 마음까지. 전부 그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쉼 없이 쏟아 냈다.

“나도.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있는데도 늘 그립기만 해서. 지금도…….”

에드문트는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실제처럼 황홀한 감각은 아마 제 기억 덕이라 여겼고, 데일 듯 뜨거운 온기는 늘 느끼던 통증의 일환이라 착각했다.

애정에 굶주렸던 속이 갑자기 환각으로 채워져 쓰린 줄만 알았다.

더, 더 채우면 통증이 가시리라 믿었다.

이제 갓 잠에서 깬 여자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얼굴을 더듬던 가는 손가락을 붙잡아 입 맞춘 뒤 점점이 내려와 손목을…….

“아.”

조금 아플 정도로 베어 물자 약한 비음이 울렸다. 본능적으로 물러난 팔을 따라 어깨까지 쫓아갔다. 입을 조금 벌리는 것만으로, 둥근 어깨가 얇은 옷째로 전부 잡아먹혔다.

그대로 이를 박아 넣으니 팔에 감긴 허리가 움찔댔다.

하나 여자는 피하지 않았다.

“에, 에디…….”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운에 매달렸다. 남자는 기꺼이 제 몸을 움직여 여자가 저를 붙잡는 걸 도왔다.

그 와중에 에드문트는 바쁘게 엘리아를 탐했다. 입맞춤을 발자국 삼아 어깨 위로 올라가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가장 깊은 곳,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자리를 찾아 입술을 파묻었다.

마침내 입술로 맥박을 확인하는 순간, 가학심이 일었다.

물어뜯어 집어삼키고 싶었다. 혹은 입술에서부터 불이 붙어 저를 다 불살라 주길 바랐다. 열기에 미쳐 이를 세웠다.

“에, 에디. 잠깐만. 나…….”

그러자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경고음처럼.

사실 당혹스러움에 가까웠지만, 남자에겐 그 둘을 구분할 여유가 없었다. 그제야 욕망에 취해 있던 그가 제정신을 차렸다.

“미안해.”

입술이 떨어지고, 옥죄던 팔이 풀어졌다. 남자가 천천히 여자에게서 저를 떼어 냈다.

“미안해. 내가, 내가…… 네가 떨어질까 봐. 그리고 너무…….”

남자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추워서. 추워서 그랬어.”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허공에서 멈춘 채 갈 곳을 잃어 방황했다.

“조금만……. 안 될까? 엘리아.”

거부당했다 여기면서도 그는 애원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이 온기를 부여잡고 있게 해 달라고. 가지지 못했을 때는 몰랐는데,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으니까.

“너무 추워서…… 엘리아, 엘리아.”

그의 간절함이 여자의 몸에 스몄다. 초여름의 녹진한 열기가 방 안에 가득했음에도 연신 춥다며 몸을 떨었다.

추위에, 외로움에, 두려움에 떨며 빌었다. 제발 저를 잠시만 허락해 달라고.

대체 누가 그에게 외롭기를 강요했을까. 방에는 엘리아와 에드문트뿐인데.

“엘리아, 미안해. 조금만, 내가…….”

엘리아라는 이름은 분명 제 것이었는데. 간절하게 제 품을 파고드는, 제 연인만 끌어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심을 함께 끌어안았다.

“잘못했어. 용서해 줘.”

남자의 간절한 사과는, 누구를 향하는 걸까.

* * *

이틀이나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에드문트를 마주했을 때.

“에디, 괜찮아. 응? 괜찮으니까.”

엘리아는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저는 언제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던 걸까. 에드문트의 옆에서 잠이 들었던 건지, 하면 그는 대체 언제 깨어나 자신을 끌어안은 건지.

‘하마터면 꿈이라고 착각할 뻔했어.’

머리가 없고 꼬리가 숨어 포옹만 남은 지금 상황을 따라잡아 보려 했지만, 전부 벅찼다.

“가지 마, 응?”

일단 급한 대로 팔을 뻗어 에드문트를 끌어안았다. 춥다는 그에게 당장 줄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그냥, 나 놀라서 그랬어. 이제 괜찮아. 응?”

엘리아가 그를 밀어내지 않고 되레 끌어안아 주자, 에드문트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 엘리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작은 봉투에 수십 장의 종이를 욱여넣으려 들었다.

그런 남자의 몸짓이 버거웠지만, 엘리아는 팔이 찢어져도 그를 품어야만 했다. 그러고 싶었다.

“에디, 추워? 아직도 추워? 어떡하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좀 괜찮을까?”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어서 에드문트의 팔 안쪽으로 들어가 등을 짚었다. 도닥여도 보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쓸어도 보고. 그래도 떨림이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너무…… 갈 테니까…….”

바짝 붙은 그가 무어라 자꾸 말을 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간절하다는 것, 애원하고 있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들었다.

그가 깨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엘리아는 이틀 내내 쉼 없이 고민했음에도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하나도 떠올리질 못했다.

한스 경을 부르려고 했나? 아니면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가.

에드문트는 왜 자꾸 춥다고 말하는 걸까.

“에디, 얼굴 좀 보여 줘. 응? 나 보고 싶었어. 네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몰라볼 정도로 살이 쑥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에드문트는 엘리아에 비하면 여전히 컸다. 옭아맨 팔을 밀어내고 품에서 벗어나기가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세 엘리아의 목덜미에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결국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얼굴을 보는 걸 포기하는 대신 그의 가슴에 편히 기대었다.

쿵쿵, 힘 있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안도하던 차였다. 엘리아의 몸에 힘이 빠지는 순간을 기민하게 눈치챈 남자가 여자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귓가에 에드문트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속삭임이 좀 더 선명해졌다.

“네가 떨어질 것 같아서.”

“으응. 내가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그래서 껴안았구나. 그랬구나.”

“미안해.”

“응?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덕분에 안 떨어졌네. 여기 침대 엄청 높던데 큰일 날 뻔했다. 그치?”

“미안해, 엘리아. 내가…….”

엘리아는 연신 그를 다독였다.

“에디, 괜찮아. 나 이렇게 너 보니까, 슬펐던 거랑 보고 싶었던 거, 다 괜찮아졌어. 내가 너 많이 사랑해서. 그래서 괜찮아. 응? 그러니까 사과 안 해도 돼.”

그러나 남자의 사과는 끝맺을 줄을 몰랐다. 답지 않게 말이 무척 많았다.

“미안해, 엘리아.”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고해인 탓일까.

“에디, 왜 계속 미안하다고 해? 그렇게 무서웠어?”

“닿으면 싫어할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어.”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목소리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니, 아마도 처음부터.

엘리아는 에드문트에게 말했지만, 그는 엘리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지금 말하는 게…….’

여자가, 남자를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건네던 말을 멈추어 보았다.

“엘리아.”

그리하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엉키던 방 안에 에드문트만 홀로 남게 되었다.

적어도 엘리아에겐 단 한 명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예전에는, 네가 싫어할까 봐 옮겨 줄 생각을 못 했어. 네가 나를 피하는 줄 알았어.”

“…….”

“그래서 잠든 걸 확인하면 방을 옮겼어. 네가, 불편할까 봐.”

엘리아는 도통 에드문트의 말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엘리아가 공작가에서 자고 갔을 때를 말하는 걸까.

‘아니, 그때 일이랑은 앞뒤가 맞지 않은데……. 꿈 이야기인가? 같이 누웠던 꿈을 꾼 건가?’

마치 엘리아가 모르는, 오래전 기억을 되짚는 듯했다.

엘리아의 의문이 점점 깊어지며 침묵이 길어졌다.

대화를 끊어 낸 엘리아를 내버려 둔 채,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에드문트는 더 가까워질 수도 없이 바짝 다가왔건만, 소리는 더욱 작아져만 갔다. 드문드문 단어가 삭제된 문장이 줄을 이었다.

“네가 나를 두려워한다고만…… 외로워할 거라고는…… 못 했어. 사실 네가, 외로워했더라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을 거야.”

가끔, 말이 완전히 끊기는가 싶더니 다시 이어 가기도 했다.

흡사 엘리아는 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대꾸를 가만히 듣는 것처럼.

“그래. 나는 네 말대로……. 아무것도 못 했을……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이렇게라도 빌면 네가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아침이 아직 오지 않은 새벽.

방에는 엘리아와 에드문트 둘뿐이었다.

에드문트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아’라는 이름으로 서두를 트고,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공유하고, 마지막으로 미래를 약속하는 연인 간의 대화였다.

<셋째 날. 환각과 대화. 여전히 엘리아 님을 아내로 지칭.>

혹은 부부간의 대화였다.

<다섯째 날. 밤새도록 잠들기를 거부하시더니 아침이 되자 엘리아 님의 시신을 확인한다며 석실에 가시려 함.>

어쩌면 망자와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품에 안긴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만 간신히 들을 수 있었기에, 남자가 어떤 표정으로 텅 빈 방의 어느 곳을 바라보며 대화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엘리아, 내가 어린 네게 했듯 너에게도…… 흉내 내 가며 다정한 척 굴었으면, 떠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부르는 엘리아는 열여덟, 남자가 깨어나길 애타게 기다려 온 자신이 아니었다.

에드문트가 엘리아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 부르듯 불렀으니까.

“엘리아.”

엘리아. 남자의 약혼자이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열여덟의 연인은, 드디어 자신이 에드문트를 사랑하기에 감당해야 할 현실을…… 비극을 마주하였다.

<집사가 사망했다고 말씀드렸지만, 믿지 않으시다가 재차 말씀드리면 그제야 납득하셨습니다.>

집사, 부모, 그의 조부. 그런 죽은 사람들을 보고 있다고 믿어 이야기를 나누고.

<공작님께선, 아가씨가 본인을 떠나다가 죽었다고 믿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 악몽을 경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제 여자까지 하지 않은 결혼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다 죽어 버렸다고 믿는.

에드문트 라스페의 망가진 모습을 귀로 끊임없이 확인받아야 했다.

“엘리아, 내가 너를 놓지 못해서 미안해.”

남자는 그의 아내, 시신이 되었다던 엘리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에 초대받지 못한 어린 엘리아가 품 안에서 침묵했다.

* * *

에드문트의 목소리는 그가 지쳐 눈을 감아 버릴 때까지 이어졌다. 단단하게 저를 안았던 팔에서 차츰 힘이 빠졌고, 문장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에디?”

대화를 엿듣던 엘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조용해진 방 안이 돌연 무섭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을 때.

엘리아를 끌어안고 있던 남자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모로 누워 있던 몸이 풀썩거리는 소음을 내며 푸른 침대보 위에 펼쳐졌다.

“……에디, 에디. 괜찮아?”

잠이 든 건지, 기절한 건지. 구분할 수 없는 그의 상태에 엘리아의 목소리가 무참히 떨렸다.

“눈 떠 봐. 응? 나, 나 여기 너 보러 왔는데…… 나한테, 나한테도 인사해 줘야지.”

“…….”

“에디, 좋은 꿈 꿨다고 말해 달라고…… 내가 옆에서 계속 말했는데. 빌었는데.”

엘리아는 남자가 지녔던 떨림까지 모조리 끌어와 제 팔에 얹었다. 휘청이는 몸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깨워 보려 했는데, 일어나질 않았다.

새파란 남자의 눈이 너무나 그리웠는데. 그가 늘 아름답다고 말해 주었던 제 주홍색 눈동자 안에 그를 가득 담고선 웃어 주고 싶었는데.

사랑한다고 눈 맞춘 채 속삭이고 붉은 입술에 입 맞추고.

혹시 내가 그리워, 남겨 주지 않은 흔적이 못내 탐이 나 스스로 상처 내었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에디. 내가…….”

뒤늦게 한스와 벨젠 경이 들어올 때까지.

이름을 불렀다. 에디. 에드문트. 목이 쉬도록 불러 보아야 닿지 않던 그 이름을.

“잠시만, 엘리아 님을 부탁합니다. 바로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넋이 나간 채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 대다가, 벨젠 경이 의원을 데려온 뒤에야 남자를 놓아주었다.

끌어안고, 붙잡고, 깨워 낸다고 계속 쥐고 있던 가운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아가씨, 의원이 진찰하러 왔으니 잠시 자리 비켜 줍시다.”

엘리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돌연 스스로 몸을 일으켜 집무실로 나왔다. 한스가 급히 그 뒤를 쫓았다.

날개가 찢어진 나비처럼 휘청거리던 여자가 소파에 스스로를 처박았다.

“한스.”

잠시 후, 엘리아는 닫힌 곁방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스를 불렀다.

“예, 아가씨.”

“……에디가. 에디가 깨어났었는데…… 근데…….”

감정을 토해 내던 엘리아의 몸이 크게 기울어 고꾸라졌다. 한스가 뒤늦게 손을 뻗자, 엘리아가 손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매달렸다.

“나는, 나는 견뎌 보이겠다고 다짐했어. 에디가 만약에 아파하면 내가 다 곁에서 받아 줄 거야. 아무리 마음 아파도 외면하면, 그러면 안 된다고 배웠으니까.”

목이 꽉 멘 소리가 들렸다. 듣는 사람까지 숨이 턱턱 막혀 괴로웠다.

“그러니까 나는, 나는 괜찮은데. 전부 다 내가 감당할 텐데 오늘만…… 오늘 딱 한 번만 울게. 딱 한 번만…….”

여자가 너무 안쓰러워서, 몇 년 뒤면 제 주인마님이 될 거라며 곧은 모습 보여 주던 여자였는데.

실은 이제 겨우 열여덟, 저는 그저 부모 품에서 철없게 굴면 그만이었던 나이라는 게 실감 난 바람에.

안쓰러운 모습을 동정하고, 제 팔로 지탱해 주느라 한스는 엘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알아듣지 못했다.

“에디가, 내가 계속 불렀는데…… 보고 싶었다고 제일 사랑한다고, 내가 계속 얘기했는데 한 번도……. 나를 안 불러 줬어…….”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눈떠 준 연인. 끌어안은 채 서로의 체온을 느꼈으니 마음을 주고받았다 여겼다. 에드문트가 착각했듯, 엘리아 역시 착각했다.

“나 죽은 줄 아는 거……. 그거 어떻게 해……. 자꾸 추워하는데…….”

무엇이 가장 서러워 이렇게 눈물 나는지 엘리아도 알 수 없었다.

잊혔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에드문트가 지금까지 애타게 불렀던 엘리아라는 이름이, 제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탓인지.

혹은, 추워하던 남자의 외로움에 공감한 게 연유였는지.

“너무 아파. 에디가 나를 못 알아봐.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 나 너무 힘들어…….”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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