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꿈
까만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 죽은 이후 늘 반복되던 기억.
언제나, 시작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에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가는 목소리가 저항할 수 없는 강한 인력으로 나를 붙들었다. 결박된 채 다음 소리가 이어지길 기다려야 했다.
<에디. 에드문트.>
꿈은 늘 똑같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단지 이름뿐이다. 아프다는 말도, 원망하는 말도 당장은 들리지 않는 덕분에 나는 반복되는 목소리가 읊는 단어를 곱씹곤 했다.
<에드문트. 에디. 에디…….>
본래 이름보다 짧게 줄인 저 단어가 나를 지칭하던 건, 언제부터였던가.
시기는 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누가 처음이었던가.
<에디이. 엘리랑 놀자. 응?>
엘리아, 네가 처음이었다.
나를 낳고도 혐오하던 부모도, 나를 아꼈으나 망가져 가던 조부도 아니었다.
여러 갈래로 땋은 머리칼을 한 네가 처음으로 나를 ‘에디’라고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나를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던 어린 시절부터.
여섯, 일곱. 그리고 여덟 살.
<엄마, 아빠…….>
부모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서럽게 울던 시절을 지나.
<곧 제 누이동생의 생일이 됩니다. 이제 아홉 살 되지요.>
정원에 이름 모를 꽃이 피는, 가을이 찾아올 때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어서는 아홉이 되고, 이어 열, 열하나라는 숫자가 나이랍시고 붙어 따라다니던 때에도.
<……안녕. 에디.>
무서워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시절조차 부르던 그 이름은 달라질 줄을 몰랐다.
열두 살. 약혼 후 처음으로 소녀 태가 나는 예복을 갖춰 입고 찾아왔던 날에도.
<에디, 아니 에드문트. 이 팔찌 선물해 줘서 고마워. 로앙에서도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정식 공표 때 교환할 줄 알고 미처 준비하지 못했대.>
더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자기주장을 하고 싶었는지 ‘에드문트’라는 이름을 잠시 담긴 했지만, 그때조차 ‘에디’라는 짧은 이름이 제일 먼저 나를 향해 왔다.
<엘리, 왜 그래. 입맛이 없어? 혹시 어디 아파?>
<아니. 이거 다 맛없어서, 그래서 먹기 싫어.>
그날 너는 조금 다르게 굴었다. 저녁 식사가 차려진 자리에서 돌연 투정을 하기도 했다. 두려움과 지루함만 번갈아 표현하던 과거완 달리, 퍽 낯선 모습을 보이곤 떠났다.
<죄송합니다. 아가씨의 취향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집사가 뒤이어 찾아와선, 열둘의 엘리아가 무얼 좋아하는지 궁금해했다. 누군가의 기호를 물어본 적이 없었지만, 어쩐지 약혼자가 된 소녀에 관해서는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일전에 오리 요리가 나오면 곧잘 먹었으니, 아마 좋아하겠지. 앞으론 그걸로 내오게.>
그때 남긴 말이 시간이 흘러 예고도 없이 선물을 안고 돌아왔다.
<집사가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있냐고 물어보길래. 그래서 네가 어릴 때 여기서 오리 요리를 자주 먹었고, 좋아했던 것 같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어.>
꽃 한 송이가 되어, 엘리아의 얼굴 위로 수줍게 피어났다. 노을 색이 퍼져 나가는 모습이 회색의 기억 속에 유일하게 색을 지니게 되었다.
일렁이는 색채에 잠시 마음이 불편하다고 느꼈는데, 돌이켜 보면 감정이었다.
사랑이었다.
스무 살이 된 엘리아는 로앙의 이름을 버리고 라스페가에 들어왔다. 정원에 꽃을 심겠다고 부산하게 다니고, 서고 바닥에 책을 가득 꺼내 두곤 행복해하느라 하루하루가 바빠 보였다.
<에디.>
그때도 너는 ‘에디’라는 애칭을 고집했다.
그러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던가.
<에디…… 아니, 에드문트. 미안해요. 고치기가 어렵네요.>
제 오라비에게 주의를 받은 건지, 혹은 단순한 심경의 변화였는지. 공작가에 온 이후로 이름을 달리 부르고 말투를 바꾸려 했다.
따로 그에 관해 의견 내세운 적은 없었다. 내겐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아무 의미 없다고, 착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나 자각하지 못한 주제에 몸으로는 애타게 너를 갈구하던,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마주 보고 있자면 어쩐지 속이 갑갑했고, 해소할 방법은 하나밖에 몰라선 끌어안고 탐닉했다.
여린 살을 짓씹어 붉게 물들이면 그제야 답답함이 가셨다. 생애 처음으로 느낀 쾌락에 중독되었노라 여겼다.
배려 부족한 행위가 네겐 버거웠을 텐데도, 단 한 번도 밀어낸 적이 없었다. 가끔은 네가 먼저 서툰 몸짓으로 나를 끌어안고 보채기도 했다.
그때 즈음엔 이미 호칭도, 말투도 달라져 있었지만.
<에디…….>
침실에서만큼은 꼭 짧은 단어로 나를 불러 욕망을 부추겼다. 너는 아마 숨을 쉬기도 버거워 못다 불렀으리라 짐작했고, 나는 단지 네 목소리라는 이유로 발정했다.
두 팔로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는 충족감이, 정사의 규칙 같던 입맞춤이 주는 황홀함이……. 탐할수록 더 기갈이 드는 욕망이 사랑임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저 네가 내 여자라는 사실에만 온 관심을 쏟았다.
너를 안전한 곳에 두고, 어린 시절에 느꼈을 결핍을 보상해 주고자 값비싼 선물을 안겨 주고.
<다녀와요.>
죽음이 덕지덕지 붙은 나를 네게서 멀리 떨어트려 놓고. 그럼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어릴 적 습관이라서, 잘 고쳐지지 않네요.>
호칭에 의미를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어차피 이름이건 말투이건 네가 말한 대로 습관일 뿐 달리 의미는 없었을 테니까.
애초에 나는, 네가 나를 어떻게 부르든지 그 안에 감정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한 적이 없었음을. 그래서 나 역시 의미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에드문트. 당신을 사랑했어. 사랑했는데…….>
네가 죽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도련님. 에드문트 님.>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듯, 유일했음을 깨달았다.
<에디.>
오직 너 한 명만이 나를 애칭으로 불러 왔음을.
또한 네가,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음 역시 뒤늦게 깨달았다.
<아파…… 나 너무 아파. 무서워.>
그래서, 들리지 않아야 할 목소리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해도 나는 귀를 막지 못했다.
<아파, 아파. 싫어. 죽기 싫어. 제발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내 손에 죽은 수많은 이들의 말소리를 흉내 내고, 비명을 지르며 나를 고통케 했지만.
<에디. 에디…….>
나를 부르는 짤막한 애칭이 들릴 때면 달아날 수가 없더라. 그건 네 마음이 공허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소리였으며, 더불어 내 마음도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게 한 증표였으니까.
귀를 막기를, 달아나기를 포기한 채 소리를 음미했다.
시간이 지나니, 무뎌진 청각에서 끝나지 않고 시각마저 잠식되었다. 동시에 꿈과 현실이 뒤엉긴 세상에 던져졌다.
그곳은 마치 죽은 사람에게만 허락된 공간 같아서, 나는 기쁘게 발 디뎌 환각과 환상을 끌어안았다.
* * *
하루를 꽉 채운 꿈에서 깨어난 이후로, 에드문트는 그렇게나 원하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치 죽기 전으로 돌아간 듯했고, 죽은 뒤 돌려받은 시간이 그 위에 겹쳐져 이지러졌다.
죽은 아내도, 죽지 않은 연인도 놓을 수 없어 전부 욕심내어 끝내 얻어 낸, 거짓 기쁨이었다.
<에디.>
집무실 한쪽에선 열여덟 소녀가, 마주한 동시에 사랑하여 놓고 싶지 않았던 어린 연인이 이리저리 배회했다.
햇살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집무실을 거닐다 제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에디, 춥지 않아?>
다정한 목소리로 명백히 제 사랑이기에 기쁘게 좇았다.
“엘리, 네가 있어서 괜찮아. 겨울 한복판에 내가 버려지더라도 네 기억 한 줌만 있으면 춥지 않을 거야.”
그렇게 여자를 위해 지어낸 답을 전하고, 또 전했다. 마른 입술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겹쳐 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고백하고 싶었다.
“이제야 깨달았어. 뒤늦게야.”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음이 전부 여자의 것이었노라, 애써 전해 보려 노력했다.
<에드문트.>
죽은 아내. 홀로 껴안고만 있었던 지독한 사랑임과 동시에, 차마 죄책감이 짙어 놓기를 포기한 엘리아의 흔적이 같은 공간을 유영하기도 했다.
기억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반듯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자세가 불편하다며 이리저리 몸을 꼬다 눈이 마주치면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던.
<에드문트, 그렇게 내내 책상 앞에만 있는 게 힘들지 않아요?>
뜻 모를 질문 던지고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라고 수습하며 책으로 눈을 돌리던 모습이 선명하다가도, 얇은 천을 덮은 듯 희미해지곤 했다.
그럼 에드문트는 견디지 못하고 이름을 불렀다. 엘리아.
아마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엘리아. 네가 내게 건네던 말들, 그게 전부 의미가 있었음을 전에는 몰랐어.
책을 보고 있거든 무슨 책을 읽느냐 물어봤어야 했는데. 왜 오랜만에 저택에 와서도 일만 하느냐는 말에 담긴 외로움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미안해. 엘리아. 내가 무지했어.”
이제 나도 외로움을 알게 되었어. 아마 죽은 너를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할 때 느끼는, 이 감정이 외로움이겠지.
마른 입술이 공기를 머금었다가 다시 뱉기를 쉬지 않고 반복했다.
“엘리아…….”
에드문트는 아무것도 없을 공간에 소리를 던지고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혼 서류가, 분명 여기다 두었는데.”
그래도 제겐 현실이나 다름없었었다. 죽은 사람을 사랑하며 동시에 죽지 않은 사람을 갈망할 수 있는 곳이 제 현실이길 바랐으니까.
하여 조금이라도 꿈과 현실이 분리되려 하면, 억지로 끌어다 다시 엉기게 했다.
“석실에, 분명 엘리아가…….”
스스로가 서른둘이라 믿으며 시신을 찾다가도 스물둘이었던가 싶어 망연히 죽은 사람을 그리워했다.
간혹 애써 덮어 둔 장막이 걷히고 죽은 뒤의 세상만이 또렷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보좌관과 기사의 연민 넘치는 눈빛. 익숙지 않은 시선이 그를 헤집어 댔다.
“내가 온전치 않은 동안은 이를 토대로 움직이게.”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펜을 들어 글을 적었다. 책임을 진답시고 과거의 기억을 뱉어 내고 다시 도망칠 생각이었다.
“엘리에겐 말하지 말게.”
다시 스물둘인지 서른둘인지 혼란스럽던 세상에 스스로를 던졌다. 그러다 또 강제로 붙들려 엘리아가 죽지 않은 현실에 내쳐지는 게 반복되었다.
마지막으로 현실을 마주했을 때 눈에 담은 건, 벌어진 봉투에서 편지가, 사랑이 떨어지던 광경.
“그분은 아직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달아난 저를 책망하는 보좌관의 목소리였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뭐라고 대꾸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서른일곱인지 스물일곱인지 모를 남자를 향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말, 그런 한심한 소리를 지껄였던 것 같은데.
당장 제 미친 꼴을 엘리아에게 보여 준들 좋을 게 없다는, 아니. 분명 다시 버려질 거라는 확신만 강하게 뇌리에 남았더라.
“벨젠 경, 부탁이네.”
도망쳤다. 그냥 제 죽은 듯 잠든 꼴 보고는 포기하고 돌아가길 바라며.
“내가 자진할 걸 대비해 약을 마련해 두었다는 거 알고 있네.”
지긋지긋하다느니, 떠난다느니. 그런 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에드문트는 약에 취해 무력해진 몸뚱이를 끌고 꿈으로 달아났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악취가 가득한, 석실에 그가 앉아 있었다. 가슴에는 긴 검이 꿰어 있었고, 몸을 기댄 석관에는 짓이겨진 아내가 누워 있었다.
<에디…….>
약의 힘을 빌려 찾은 새까만 세상은, 늘 그랬듯 다정한 목소리로 시작했다.
<죽어, 죽어 버려. 에디. 비겁하게 도망칠 거라면 차라리 죽어. 제발 나를 놓으란 말이야.>
종래에는 늘 그렇듯 제게 잔혹하게 굴었다. 돌아볼 수도, 입을 벌릴 수조차 없어서 용서도 구하지 못했다.
입이 닫혀 죄책감을 고백하지 못하자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왔다.
<에드문트, 편해지려 하지 마. 수십, 수백을 죽여 놓고 너 혼자 살려 하지 마.>
후회되더라. 도망치지 말걸. 차라리 제 꼴 전부 보게 하고는 엘리아더러 저를 버려 달라고 할걸. 환각이나 부여잡고 앓다 죽어 버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에디.>
그러다 돌연, 다른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분명 어린 연인이었다. 시신이 마땅히 자리해야 할 곳이 아닌, 정면에 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머리칼에 따듯한 햇살을 담아, 얼굴에는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걸어오더니 단 한 걸음…… 그가 좁혀야 할 거리만 남겨 둔 채 멈추어 섰다.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숨도 못 쉴 정도로. 하늘을 보다가도 네 생각이 나서 속이 꽉 막혔고…….>
뭉그러지지 않은 다리로 석실 바닥을 디딘 채, 떨어져 나가지 않은 두 팔을 뻗어 저를 향해 왔다.
<집무실 협탁에 있는 약병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네 아픈 마음도, 약으로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서진 오르골을 고치는 것처럼 상처 입은 마음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엘리아의 손길을 따라 바람이 불었다. 석실에 머물던 거친 한기가 아닌, 짙은 봄 내음이 나는 바람이었다.
꿈을 꾸고 있던가. 죽은 여자와 아름다운 연인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꿈이던가.
<에디, 깨어나거든 한마디만 해 줘. 좋은 꿈을 꾸었다고, 아프지 않았다는 말을…….>
<에드문트, 깨어나서는 거짓말을 하려고? 나를 외면하고는 아프다는 내 비명에서 도망치려고?>
소리와 소리가 얽혀 그의 의식을 혼란케 했다.
그리하여, 겨우 눈을 떴을 때.
눈앞을 가득 메운 햇살을, 엘리아의 머리칼을 보고도.
“…….”
꿈인 줄 알았다.
제가 꿈을 꾸는 사이 여자가 따듯한 마음을 주려 찾아왔거늘.
제가 깨어나 주기만을 기다리며 잠이 든 연인을, 사랑을.
“……엘리아.”
알아보지를 못했다.
착각했다.
꿈. 환상. 죽은 아내. 그런 것들로.
“엘리아.”
착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