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불안
불안감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자, 엘리아는 외면해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엘리, 보고 싶었어.>
그때, 에드문트는 왜 불쑥 엘리아를 찾아왔을까. 분명 엘리아는 전날 외젠과 에드문트를 찾아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저녁 식사를 했는데.
<너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해하지 못할 거라 단언하면서도, 어째서 고백한 걸까.
<네가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지독할 만큼 깊고 절박하던, 그리움은 언제 쌓았던 걸까.
분명 그가 오르골을 남겨 두고 떠났던 당시에는 너무나 이상하다고 여겼다. 이해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눈물이 날 정도로 답답하기만 했다.
남자의 변심이 아무래도 좋다 여기게 된 건…….
<네가 어릴 때 좋아했던 것 같았다고 이야기해 주었어.>
그의 마음이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자라난 게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한 이후였다.
수천 송이의 꽃을 보여 주고 싶었다는 달콤한 말, 보고 싶었다는 애정 표현도 아닌 그 한마디가 엘리아의 마음을 녹여 에드문트를 받아들이게 했다.
한데, 전부 제 착각이었다면?
예컨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쌓은 남자의 그리움이, 애정이…… 진심이 아니었다든가.
혹은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이었다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구 대신이라든가 하는 게…… 에디가 나한테 그럴 리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엘리아는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능성을 외면하려 애썼다.
다른 사람이라니. 거짓 마음이라니.
<엘리. 엘리아.>
황홀하던 미소가, 다정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나중에는 엘리아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던가.
‘그래. 나도 에디가 무섭다가 어느 순간부터 두렵지 않게 되었잖아. 자각하지 못하다가 뒤늦게서야 좋아해 왔다는 걸 깨달았잖아.’
그러니 부정하고, 또 부정해 댔다.
‘글씨처럼, 마음도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거야. 오래전부터 조금씩 쌓아 올리다가 한순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사랑이 되었을 거야.’
사랑이 아니었을 리가. 남자의 마음이 제 것이 아니었을 리가.
‘그렇지 에드문트?’
엘리아는 무심코 그가 잠든 곁방을 바라보았다.
“…….”
한참을 생각해 놓고, 정작 입이 열리질 않았다.
어차피 잠이 들어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을 연인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 * *
“아가씨.”
“…….”
“엘리아 님,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괜찮아요.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엘리아는 한스가 여러 번 이름을 부른 뒤에야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머리가 복잡한지 마주 본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를 않았다.
한스는 순간 그 흐린 눈동자에서 에드문트를 겹쳐 보고 말았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잠시 침실로 옮기시지 않겠습니까. 어제도 거의 주무시질 못하셨잖습니까.”
“아니, 그럴 거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엘리아는 한스의 제안을 사양하느라 움직인 척, 머리를 크게 가로저어 상념에 저항했다. 풀어 둔 머리칼이 혼란한 마음을 표현하듯 굽이쳤다.
당연히 한스가 보기엔 좋아 보일 리 없었다. 덩달아 불안해지고 말았다.
공중에서 유영하던 머리칼이 가라앉기도 전에, 성급하게 엘리아를 재촉했다.
“아가씨, 무슨 의미라고 보십니까?”
한스의 물음에는 공작의 필체가 달라졌다는 쪽보다, 대체 엘리아가 느끼는 불안감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의중이 담겨 있었다.
“……글쎄요.”
엘리아는 저 때문에 불안해하는 한스를 달래 주고 싶었지만, 해 줄 수 있는 건 힘 빠지는 대답뿐이었다.
차마 연인의 마음을 의심하는 소리를 뱉고 싶지 않았으니까.
“일단 당장 급한 일부터 생각하기로 해요.”
엘리아는 한스가 더 캐묻기 전에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장례식은 에디와 내 뜻이 같다니 그대로 진행해 줘요. 입소문 나지 않도록 더욱 신경 써 줘야겠어요. 크라우제 후작의 납치 미수 사건 때문에 수도에서 에드문트를 향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크라우제 후작 일은 변동 사항이 있으면 알려 줘요.”
“예, 문제가 없다면 다음 주에 새로 보고를 받을 예정입니다. 즉시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한스는 공작을 대하듯 엘리아에게 딱딱한 공대로 대꾸했다. 못내 어색하면서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전부 엘리아가 적응해야 할 문제였다.
공작가의 가주 행세를 하는 엘리아에게 한스가 적응해야 하는 것처럼.
“내용은 공유해 주되 당분간은 벨젠 경이 후작을, 한스가 수도 상황을 맡아 줘요. 대신 상단 운영과 영지 업무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동부에서 다른 기사들과 시릴 보좌관이 돌아올 때까지만 좀 더 고생해 줘요. 괜찮죠?”
“문제없습니다. 한데 상단 업무는 혹시 아가씨께서 공개적으로 대행하실 생각입니까?”
“조만간 그래야겠죠. 크라우제 후작에 관한 소문이 퍼질수록 라스페가를 향한 관심도 더 높아질 테니, 누구라도 얼굴 내밀어서 관심을 받아 줘야 하지 않겠어요?”
엘리아는 지금까지 부모 잃은 남매라며 다른 귀족들의 질척거리는 호기심을 질릴 만큼 받으며 살아왔다. 하여 그들의 관심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후작가에서 어떻게 악용해 대려 굴지 뻔히 보였다.
장기간 에드문트의 자리를 비워 두어 뒷말 나오게 하느니, 엘리아가 예비 공작 부인이랍시고 관심 끌어 주는 편이 유리하리라.
“걱정 마요. 다 감수하지도 못할 책임감 짊어지겠다고 나서진 않을 거니까.”
“그런 걱정은 않습니다. 귀족들 상대하는 일은 오히려 공작님보다 훨씬 잘하실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앞선 대화와는 달리 확신에 찬 어조가 들려왔다. 한스가 눈을 끔벅이며 엘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매가 살짝 올라가 만든 미소가 보였다.
“에디는 애초에 그 사람들 아무도 상대 안 해 줬을 거잖아요? 이렇게 노려만 봐도 다들 지레 겁먹어서 도망갔을 텐데.”
“크흡.”
에드문트의 서린 눈초리를 흉내 낸답시고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엘리아의 모습에, 한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 불안감을 털어 주겠다고 일부러 본인 마음 숨겨 농담을 하시니 저도 웃어 주는 게 도리였다.
곁방에서 에드문트를 지키고 있던 벨젠이 낯선 소리에 집무실로 나와 고개를 내밀었다.
“두 분, 무슨 일 있습니까?”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벨젠 경께서도 식사하시지요. 제가 교대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에디 옆에 있을게요. 둘 다 쉬어요. 이따가 복도에 있는 렐 경과도 교대해 줘야 하잖아요.”
엘리아는 누가 말릴세라 벌떡 일어나선 곁방에 쏙 들어왔다. 벨젠 경은 엘리아가 좀 더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가씨가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말릴 수 없다는 걸 깨쳤기에 순순히 물러섰다.
“문은 열어 두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가서 식사도 하고 좀 쉬다 와요.”
벨젠 경이 앉아 있던 작은 의자에 자리 잡은 엘리아가 그를 재촉했다. 한스에게 했듯 미소까지 지어 보이자 그제야 기사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눈치채고 밖으로 나섰다.
집무실로 통하는 문은 열려 있었지만, 방이 워낙 넓어 공간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덕분에 에드문트와 단둘이 남겨진 느낌이 완연했다.
‘아까 한스 경이 불러서 나갔을 때가 9시였으니까. 에디가 잠든 채로 또 하루가 다 간 셈이네.’
여전히 에드문트는 움직임 한번 보이지 않고 조용했다. 조금 전 사용인이 들어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힌 터라 멀끔했지만, 처연해 보인다는 감상은 여전했다.
‘내일이면 약효가 떨어질 테니 에디가 깨어나겠지. 묻고 싶은 게 많은데. 깨어난다고 해도 곧장 대화할 수 있으려나.’
눈을 뜨고 저를 바라봐 주는 모습이 그리웠지만, 폭풍이 찾아오기 전 고요함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엘리아는 복잡한 심경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막한 방은 짧은 한숨조차 감당하기 버거워했다. 마치 바람 소리처럼 크게 울려 방 안을 한 바퀴 헤집었다.
에드문트의 곁에 있던 엘리아가 제가 뱉은 소리가 방을 굴러 작아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머문 지도 이틀째였는데, 에드문트만 바라보느라 방을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벽에 흔한 장식물도 하나 없네. 전부 다 치운 거려나.’
집무실에 딸린 곁방이라고 해도 방 크기는 상당했다. 응당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협탁이라든가 장식장 따위가 있어야 마땅했지만, 가구라고는 커다란 침대 하나와 엘리아가 앉은 의자가 전부였다.
집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옮길 수 없는 가구를 제외하고는 펜 하나조차 함부로 책상 위에 올려 두지 않았다.
‘자해를 시작한 지 꽤 되었다고 했지. 그럼 에디에게 해가 될 만한 것들을 보이는 대로 치워야 했을 테고.’
공작가의 사람들은 에드문트의 자해 행각에 훌륭히 적응하여선, 위험한 물건들을 잠시라도 눈 밖에 두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벨젠 경은 엘리아가 온 첫날 작은 단도를 내밀기까지 했다.
<지니고 계십시오. 맨몸으로 계시는 것보다는 훨씬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실 겁니다.>
크라우제 후작 일파가 허를 찌르겠답시고 공작저에 잠입할 수도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엘리아의 손에는 다소 큰 손잡이를 쥐고 검집을 벗겨 냈다. 학술원을 졸업할 적 선물로 받은 단도와는 달리,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매끈한 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거리는 날이 마치 피를 조르는 것 같았다.
누구의 피가 묻기를 바라는가. 엘리아는 그 악랄한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벨젠 경이 건넨 단도를 적시게 될 건, 에드문트의 피였다.
‘공작가 저택을 에워싼 병사들도, 잠을 아껴 가며 보초를 서는 복도의 기사들도 전부 침입자를 염려하는 게 아니잖아. 크라우제 후작 일파는 동부에서 탈출하는 데에 급급해서 공작가 저택까지 찾아올 수가 없으니까.’
그리하여 침입자는 없을 것이며 나가지 못하는 자만 존재했다.
에드문트를 막기 위해. 그가 미쳐서 자해하든가 누군가를 해치는 걸 막기 위해.
라스페가의 수백 년 세월을 머금은 저택이, 살아남은 유일한 핏줄인 에드문트를 가두는 감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약혼자인 자신마저 단검을 쥔 채 그의 옆을 지키게 했다.
‘죽었다고 여긴 여자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에디가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공격할까 봐 염려하는 걸까.’
그가 깨어나면 알 수 있으리라. 하면 엘리아는 기다리는 동안 어느 쪽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
“에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남자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창문조차 없는 휑한 방에 벌써 몇 번째 울린 이름이었는지.
만약 소리가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이 고요한 방에는 엘리아가 부른 그의 이름이, 사랑이 빼곡해 발 디딜 틈이 없으리라.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면 전자였으면 좋겠어.”
그 위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만약 그가 들었다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소리를 흩뿌렸다.
“네가 나를 잊어버리는 건 싫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치기 어린 욕망으로 소망했다. 차라리 그가 저를 미워하면 좋겠다. 제 이름 앞뒤로 비난을, 원망을 터트릴지언정 잊지는 않으면 좋겠다고.
“네가 왜 나를 갑자기 그리워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에디. 아무래도 좋아. 잊지만 말아 줘. 다시 네게 아무것도 아닌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에드문트는 아무것도 잊지 않을 테고, 무사히 깨어나 엘리아의 곁에 돌아와 줄 테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에게 원망을 받든지 잊히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면. 엘리아는 차라리 비난을 감내하고 싶었다.
‘너도 이제 죽음에 아파할 줄 알잖아. 나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가 자신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는 모습은 차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드문트, 왜 내가 너를 떠나다 죽어 버리는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나를 원망할 일이 있었던 거라면, 네 비난을 전부 들어 줄게. 고통스럽길 바라면 배를 갈라 피를 쏟을게. 죽기를 바라면 관에 누워 마지막 인사를 할게.’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느니, 차라리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 그럼 저는 적어도 그의 앞에서 비명으로 노래 부르고, 고통에 바르작거리는 춤을 추어 그를 기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네가 그랬지. 왜 무서워할 줄을 모르냐고……. 사실 예전엔 네가 무서웠어. 한데 이제는 네가 무섭지가 않아. 오직 네게 잊힐까 봐, 죽은 사람만도 못한 존재가 될까 봐 그게 두려워.’
깨어난 남자가 여전히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는 와중에 저를 잊어버렸으면 어떻게 하나.
엘리아는 이제 오직 그 하나가 두려웠다.
“아가씨는 어떻게 해야…… 불안해 보이는…….”
잠시, 두려움에 떠는 틈을 타 바깥에서 한스와 벨젠 경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 중 누구도 제 심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내일 공작께서 깨어나시거든 일단 먼저 상태를 본 다음에 엘리아 님께…….”
에드문트가 깨어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려 온 저를, 기어코 떼어 놓을 생각이나 하질 않은가.
그들의 염려는 실로 이성적이었지만 엘리아는 그러질 못했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이 저를 끌어낼까 봐 두려워선, 에드문트가 누워 있는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그가 눈을 뜨면 알려 줘야 하는데. 엘리아 로앙은 죽은 게 아니라고, 함께하지 못한 낮과 밤을 네 생각으로 가득 채워 과거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아 왔다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줘야 하는데.
“에디. 나는 절대로, 어디 도망가지 않고 네 곁에 있을 거야. 안 무서워. 네가 깨어날 때 어떤 모습인들 나는, 나는 진짜 괜찮아. 내가 다 견딜게. 그러니까 좋은 꿈 꾸다가 일어나 줘.”
엘리아는 커다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소맷자락에만 머물던 손이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에드문트에게 향했다.
여자가 쏟은 무게에 침대가 살짝 흔들리다가 금방 멈추었다. 마치 그 마음마저 한없이 가볍다고 비웃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는가. 타인의 비난, 비웃음, 그런 것들은 여자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데.
오직 제 주인 품만 간절한 강아지 흉내를 내며, 엘리아는 남자가 누운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웅크렸다.
닿을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가깝고 싶어서. 그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는 게 저이길 바랐기에.
“……좋은 꿈 꿔.”
불안함도, 두려움도 전부 까만 어둠에 밀어 넣고.
잠을 청했다.
오직 침묵만이 자장가가 되어 지친 두 사람을 다독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