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봄을 떠나보내며 (61/79)

61. 봄을 떠나보내며

한스가 진정된 뒤, 엘리아는 에드문트의 상태를 전해 듣기 위해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벌겋게 열이 올라 있던 보좌관의 얼굴도, 창백해진 엘리아의 얼굴도 마차 안의 어둑하게 내린 그림자가 전부 숨겨 주었다.

“아가씨, 이제 와서 말씀드리기 염치없지만……. 많이 충격받으실지도 모릅니다.”

당장 보기엔 엘리아가 침착해 보였지만, 한스는 에드문트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내면의 불안을 숨긴 채 멀쩡한 척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체감한 뒤였다.

더군다나 엘리아 아가씨는 고작 열여덟이지 않은가. 감당해 주실 거란 기대와는 별개로, 각오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스, 그 전에 할 말이 있어요.”

엘리아는 저를 염려하는 한스를 위해 에드문트에게 전하려 했던 이야기를 먼저 알렸다. 그 역시 자신이 부모의 죽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니까 전부, 알고 계셨던 겁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라우제 후작이 내 부모님을 살해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한스는 조금 놀랐지만 금방 수긍했다. 에드문트도, 한스도 엘리아를 알아 가며 어렴풋이 짐작한 바였으니까.

‘아마 로앙 백작 때문에 지금껏 숨겨 와야 했겠지. 그리고 공작님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대화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굳이 말을 안 했을 뿐일 테고. 이후에는 말할 틈이 없었으니까.’

부모의 죽음을 모르는 척해야 했을 엘리아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마 그간 에드문트와 함께 저택에 처박혀 있던 한스의 심경보다, 몇 배는 깊고 버거운 짐이었겠지.

잠시 침묵해야 했을 갑갑함을 헤아리고 있었더니, 엘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스를 재차 설득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니까 한스, 전부 이야기해 줘요. 내가 몰랐던 것,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요. 이를테면, 집사의 이야기라든가.”

“…….”

“결국, 독을 이겨 내지 못한 거죠?”

이번에는 정말 당황하고 말았다. 한스가 눈만 끔뻑이자 엘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집사가 정말 좋아졌다면 내게 좀 더 자주, 구체적으로 소식을 전해 주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근래 전해 들은 거라고는 의원이 열심히 보살피고 있다느니 하는 말뿐이더라고요. 그래서 집사의 상태에 관해 거짓 소식을 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어요.”

엘리아는 진작 집사의 부고 소식을 전해 받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한스는 그 말에 여태껏 제가 수도에서 전달받았던 보고를 떠올렸다.

<회복 중이라고 합니다. 의원이 직접 살피고 있습니다.>

엘리아가 전해 받은 소식과 마찬가지로 집사의 상태를 고하는 말들은 전부 의원의 전언일 뿐이었다.

수하들이 눈으로 집사의 상태를 확인한 게 아니라, 집사의 부탁으로 그의 건강 상태를 숨겨 온 의원의 거짓말을 그대로 전해 왔던 것이리라.

‘젠장……. 아가씨의 말씀대로 진작 알아챘어야 했는데.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어. 하면 공작님께서는 진즉부터 의심하셨던 걸까.’

어쩌면. 그래서 한스에게 구태여 집사의 상태가 나빠지면 보고 올리라 사람을 보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들 의원의 말만 믿고 진실을 확인하지 않았으니, 기어코 에드문트의 눈까지 멀게 한 셈이었다.

“그리고 한스, 알잖아요. 지난번 공작가 서고에서 이야기 나누었듯, 에디가 정신적으로 불안하다는 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거요.”

엘리아는 장갑을 떨쳐 내지 못하던 에드문트의 모습을 되새겼다.

그날 제대로 대화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에드문트의 상황도 최악을 맞지는 않았을지도.

놓쳐 버린 기회는 안타까웠지만, 엘리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마치 부서진 오르골이 예언이었다는 듯, 에드문트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작금의 현실로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들을 준비가 다 되었어요. 한스는 어때요?”

엘리아의 곧은 시선을 마주 본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꽃이 아직 피지 않던, 초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 * *

한스가 가장 먼저 꺼낸 시간은 엘리아도, 한스도 잊지 못하는 어느 봄날이었다.

“그날 황성에서 공작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무슨 일이 있었는가 했는데, 이후에 하인에게 확인했습니다. 공작님께서 눈을 뜨자마자 집사에게 그의 나이를 물어보셨다고요. 그러더니 대뜸 석실에 내려가셨다더군요.”

“석실요?”

“공작가 저택의 지하층인데, 직계 가족들의 시신을 안치하는 용도로 마련된 공간입니다.”

돌이켜 보면 전부 이상했다. 집사의 나이를 궁금해할 분이 아니었거니와, 애초에 공작은 한번 알게 된 정보는 잊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석실을 찾다니. 제 부모가 죽은 이후로 기일조차 챙기지 않았으면서.

그러나 최초의 전조는 모두에게 금방 잊혔다. 그가 대뜸 황성에서 나와 엘리아를 찾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마저 사람들은 가벼이 넘겨 버렸다.

<공작님께서도 드디어 사랑에 눈을 뜨신 모양이지.>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납득하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며칠 후부터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잠을 자려 하지 않으시고, 겨우 잠들었다가 일어나시면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자해를 했다고요?”

“당장 정신을 차리기 위해 통증이 필요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처음 한 번뿐이었고, 이후에는 주변에 거울을 두셨습니다.”

“거울…… 그럼 침실에 있던 거울이 전부?”

엘리아는 공작저에 머물렀던 날을 떠올렸다.

<한스, 이 방에 거울 진짜 많던데 아무거나 들고 확인해 봐요.>

장식 삼아 두었다기엔 너무 많지 않나 생각은 했지만, 설마 다른 용도가 있었을 줄이야.

“아가씨께서 주신 선물에 의지하시기도 했습니다. 푸른색 꽃 그림, 봉투, 편지…….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가씨와 가까워지시며 점점 좋아지는 듯 보였습니다.”

한스는 엘리아가 에드문트와 함께하기 시작한 시간을, 또한 함께하지 못한 공백을 되짚어 올라왔다.

하여 엘리아도 그와 함께였던 시간을, 남자가 홀로 있었을 시간 위에 겹쳐 보았다.

에드문트가 꽃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는 말에, 남자가 처음 제 선물을 받아 들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물린 턱, 뚫어질 듯 보던 시선. 그 모습에 괜히 부끄러움을 느꼈던 순간을.

봉투는 또 어떻던가.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고 했지. 그러고는 따듯한 꿈을 꾸었노라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건 실은, 따듯한 꿈이 필요했다는 외침이었을지도.

‘아.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때 네게 따듯한 애정이 필요했다는 걸…… 홀로 앓고 있었다는 걸 알아줬어야 했는데.’

엘리아는 그저 처음 피워 낸 꽃에 감격하여 하늘을 올려다보기에 바빴다.

따듯한 체온에 손 뻗고 싶다 욕망하고 다정한 말이 쏟아지길 기대하느라, 제 옆에 함께 꽃피운 그를 신경 쓰지 못했다.

먼저 핀 꽃이, 먼저 스러지리라는 걸 왜 몰라주었을까.

“공작님의 상태는 계속 악화와 안정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아가씨의 병문안을 다녀오셨던 날, 급격히 악화되셨습니다.”

한스는 봄이 깊어질수록 에드문트의 상태가 나빠졌다고 말했다.

“그날 황후가 닐스 튀링겐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혹시 엘리아 님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걸 염려하여 공작님께서 현장에 동행하셨는데, 황후의 마부로 왔던 페소 남작가 아들을 보시더니 예민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구체적이지 않은 표현을 지적하자, 한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내뱉기엔 용기가 필요한 말들이었다.

말로 표현하는 순간 바닥을 구르며 발작해 대던 남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를 테니까.

“……당장 쫓아 나가 그를 살해하려 하셨습니다. 말리던 기사들 둘이 부상 입을 정도로요. 결국, 납치 후 직접 살해했습니다.”

“페소가의 남자를요? 그를 인질 삼아 황후를 협박했던 건가요?”

“아닙니다. 황후 쪽에서는 아직도 그가 제국 밖으로 장기 여행을 떠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세게 쥔 주먹을 풀지 않고서 못다 한 설명을 이어 갔다.

빈 석실에 처박혀 한나절을 보냈다는 것, 올리버 페소를 잠재적 위험 인물로 인식하던 태도, 심문도 하지 않고는 그를 잔혹하게 살해한 행동까지.

그러고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에드문트의 끔찍했던 봄은 이제 겨우 중반을 지나왔으니까.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솔직히 공작님의 정신적 문제가 기어코 아가씨 앞에서도 터질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버티시더군요. 아가씨를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견디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로앙에 다녀온 이후 엘리아에게 두려웠노라 고백한 덕분이었을까. 혹은 그저 홀로 버텨 냈던 걸까.

에드문트는 엘리아를 로앙에 데려다준 후 남부에서도 꽤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에디는 그때도, 장갑을 끼고 있었죠. 남부에서 북부로 가기 전 나를 찾아왔을 때 말이에요.”

“예, 지금까지도 계속 착용하고 계십니다.”

“……계속, 이야기해 줘요. 북부에서 크라우제 후작을 상대하는 동안에는 에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크라우제 후작이 동부에서 인질극을 벌이려다 실패하고선 도주했다는 소식은 이미 수도에 파다했다. 엘리아는 벨젠 경이 ‘무사하시다.’라고 알려 주었기에 에드문트가 괜찮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우려하시는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크라우제 후작을 상대하는 일은 직접 나서지 않으셨고, 이후에는 호위를 받으며 북부 중립파 귀족가를 방문하셨을 뿐이니까요.”

“그럼, 은신처에 있을 때 문제가 생겼던 거군요. 에디가 북부에 도착했을 때 어땠죠?”

“북부에 도착하신 직후부터 집사의 건강을 염려하셨습니다. 수도에서는 집사가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해 왔지만, 그분께서는 죽음을 이미 염두에 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에디가 집사를 많이 걱정했군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집사의 죽음을 염려했다는 사실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드문트답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플 적에 찾아와서 걱정할 때도, 애틋하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답지 않게 군다고 생각했는걸.’

무엇이 에드문트가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걸까.

계기는 알 수 없었다. 수도를 떠나기 전 만났던 엘리아의 다정한 말 때문일지도 몰랐고, 결국 얼굴 한 번 살피지 않았던 집사를 떠올린 탓일지도 몰랐고.

“북부에 도착한 첫날 이후로 감정적인 갈등을 겪고 계신다는 게 명확히 드러나더군요. 마치 평범한 사람을 흉내 내듯 구셨습니다.”

“흉내…… 예를 들면요?”

“의견을 구하고, 본인 결정에 확신을 갖지 못하시고, 상대할 귀족가에게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후작을 상대하는 일만큼은 빈틈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괜찮다고 여겼겠지요. 알아요. 이해해요.”

엘리아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공감했다. 에드문트의 비극의 출발점은 바로 그 완벽성에 있었다.

마음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마저 그는 외적으로 완벽했으니,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으리라.

누구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을 테고.

“에드문트가 달라졌음을 감지하고도 다들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했겠지요. 주변 가신들도, 심지어 본인도.”

“이전에도 불안 증세를 보이시다가 며칠 내로 회복하셨으니까요. 도움을 요청하신 적도 없고, 자해할 만큼 불안정할 때도 본인의 고민을 말씀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할 줄도 몰랐다. 아마 아주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 왔을 테니까.

누가, 비현실적으로 완벽하고도 무심한 그에게 애정을 주었겠는가.

‘집사가 유일했을 텐데. 에디에게 그가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슬픔을 토로할 줄도 몰랐던 남자. 연인의 앞에 쥐어짜듯 겨우 두려웠다고 고백하던 그는, 아마 밤이 올 때마다 홀로 남겨진 채 생각했으리라.

“공작님께서 집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도로 내려오셨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 임종을 지킬 수 있었는데 공작님께서, 집사에게 사과하셨습니다. 전부 공작님 본인 탓이라고요.”

한스는 그때의 에드문트의 모습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니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늘 고아하기만 하던 남자의 등이 잘게 떨리던 모습은 처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사의 머리맡에서 이름을 부르던 소리는 또 어땠던가.

<클라우스. 내가……. 내가 잘못했네.>

바스러질 것 같았다. 아니, 바스러지더라. 절박하게 죽어 가는 사람의 손을 부여잡고 그 위로 제 감정이 부서진 흔적을, 눈물을 흩뿌리지 않았던가.

“장례를 유예한 채, 시신은 라스페가의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지하 석실에 안치해 두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동부에 있는 기사가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전해 들으셔야 했습니다. 사망한 정예 기사 둘이…… 연인 관계였다는 것도요.”

엘리아는 눈을 감았다. 감당하겠노라 큰소리쳤지만 에드문트가 서서히 망가지는 순간을 따라가는 게 당연히 쉬울 리 없었다.

무엇보다도 엘리아를 힘들게 한 건, 에드문트의 괴로웠을 시간 구석구석에 엘리아 로앙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네가 내내 괴로웠을지도 모르는 봄을 나는 따듯하다고만 여겼어.

너를 삼킬 진창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꽃을 피워 아름다움에 감탄할 줄만 알았어.

썩어 가는 뿌리를 알지 못하고 탐스러운 꽃만 품어 행복해지고만 싶었어.

<엘리. 엘리아, 약속할게. 네가 다치지 않게, 위험하지 않게 내내 너를 지켜 줄게.>

홀로 꽃이 꺾일까 봐 두려웠을 순간은 너는 어떻게 인내한 걸까.

‘에드문트, 내가…….’

엘리아는 마음속으로 연인의 이름을 뇌까렸다. 잘못을 빌고 싶었다.

그러나 첫 문장부터 가로막혔다.

“그리고 이건……. 공작님께서 최근 보이신 증세를 적어 둔 겁니다.”

한스가 품 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엘리아의 속죄를 저지했다.

전하는 것조차 고통이 될, 에드문트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으므로.

* * *

엘리아에게 내민 건, 그동안 에드문트가 보인 착란 증세를 기록해 둔 종이였다.

“동부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이 교전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으신 후, 공작님께서는 꼬박 하루 동안 잠들어 계셨습니다. 거의 두 달 동안 하루에 두세 시간 겨우 잠들곤 하셨으니 피로가 누적된 탓이라 여겼습니다.”

한스는 그가 깨어났을 때의 광경까지는 묘사하지 않았다.

눈꺼풀이 걷어 올려진 자리에 죽은 눈이 차지했음을 확인한, 그가 미쳐 버렸음을 확신했던 순간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다음 날 깨어나셨을 때, 무척 혼란스러워…… 보이셨습니다.”

그 모든 기괴한 광경들을 건너뛰고, 한스는 자신이 적은 기록만 엘리아에게 보이려 했다. 차라리 엘리아가 최악을 상상하게 했다.

그 어떤 상상도, 현실보다는 나을 테니까.

<첫째 날. 착란. 창가에서 해 뜰 때까지 혼잣말을 함. ‘밖에 비가 많이 온다.’, ‘아내가 탄 마차에서 마부를 끌어내야 한다.’, 벨젠 경에게 ‘당장 저택에서 올리버라는 마부를 찾아내라.’라고 명령. 올리버 페소의 사망을 알리자 혼란스러워하더니 본인이 현재 몇 살인지 질문함.>

엘리아는 한스의 글을 바라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더라.

<둘째 날. 여전히 잠들지 않음. 소파에 앉은 채 혼잣말. 맞은편에 엘리아 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며 대화를 나눔. 죽게 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을 반복. 책상에서 엘리아 님의 흔적을 하나씩 꺼내어 매만짐.>

아, 그때의 심경이었다. 열둘. 제게 무심한 에드문트가 밉다고 외젠의 집무실을 뒤졌던 날.

<1황자 시해…… 2황자, 크라우제 후작 개입 정황? 이게 다 뭐지?>

책장 사이에 꽂혀 있다가 팔랑거리며 떨어진 부모님의 흔적을 마주했을 때.

절박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 필체이며, 세게 튄 잉크 자국. 그에 더해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내용까지 전부 닮아 있었다.

<셋째 날. 세 시간 잠들었다가 깨어난 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심. 엘리아 님께 상태를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할 때까지는 정신이 온전하셨던 것으로 추정. 이후에는 다시 환각과 대화. 여전히 엘리아 님을 아내로 지칭.>

<넷째 날. 전날과 달리 식사를 하심. 해가 진 후부터 계속 집사를 찾으심. 사망을 알려 드렸지만 3년 후에 죽어야 한다며 믿지 않으려 하심. 벨젠 경에게 죽은 기사들을 구할 방도를 찾으라 명령. 죽음을 알리면 수긍했다가 몇 시간 뒤 다시 묻는 식의 행동이 반복. 저녁에는 이혼 서류를 분실했다고 주장하시며 계속 책상을 뒤짐.>

<다섯째 날. 밤새도록 잠들기를 거부하시더니 아침이 되자 엘리아 님의 시신을 확인한다며 석실에 가시려 함. 벨젠 경이 동행하여 석실 중앙 제단이 비었음을 확인시켜 드림. 다녀오신 뒤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심. 환청을 듣는 건 여전하나 그들과 대화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임.>

엘리아는 열흘 동안의 에드문트가 중얼거린 말들을 읽어 내려갔다.

아내, 이혼, 죽음, 마차 사고, 올리버 페소, 시체…….

무너져 내린 남자가 흘린 조각 틈틈이 자신이 존재했다.

“오늘은 아가씨께서 보내 주셨던 편지를 봉투째 내내 쥐고 계셨습니다. 하도 쥐고 계셔서 급기야 찢어졌는데, 그걸 줍지도 못하고 계속 바라만 보며 엘리아 님 이름만 내내 부르셔서…… 보다 못해 뛰쳐나왔습니다.”

엘리아가 종이를 왈칵 구겼다. 공작저에서 사용하는 종이는 질긴 탓에 옅은 흔적만 남을 뿐이었다.

하물며 엘리아의 편지가 담겨 있었다는 봉투는 훨씬 더 두꺼우니 손으로 몇 번 쥔다고 찢길 리가 만무했다.

찢어질 때까지 그러쥐고 있었던 남자의 심경은 어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엘리아는 미쳐 가는 남자의 흔적을, 저의 이름과 뒤엉킨 채 새까맣게 녹아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공작님께서 사흘에 한 번꼴로 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나오기 전에 잠시나마 환각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한스의 목소리가 이지러져 종이 위에 쌓였다. 무게감이 엘리아를 짓누르려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에드문트만을 생각했다.

* * *

“잠시 기다려 주겠어요? 금방 올게요.”

이야기를 마치고, 엘리아는 한스를 마차에서 기다리게 한 뒤 저택에 돌아왔다.

“데이지 좀 불러 줘. 그리고 다들 자리 좀 비워 줄래?”

4층에 들어서자마자 사용인들을 다 내보낸 후 데이지만 불러들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시간도,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다.

“공작가에 갈 거야. 며칠 머물게 될지도 모르니까, 넉넉하게 챙겨 줘.”

데이지는 엘리아에게 무슨 일이냐며 이유를 묻는 대신 곧장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엘리아는 중요한 서류를 모아 둔 침실 구석 서랍을 뒤져 봉투 다섯 개를 모두 꺼내 들었다.

‘이걸 다 챙겨야 하나……. 아, 전에 에디한테 이야기하려고 미리 써 둔 것들이 있었는데. 어디에 뒀었지?’

엘리아가 급히 짐을 챙긴다고 허둥대는 사이 어느새 데이지는 적당히 며칠 머물 수 있는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왔다.

도울 게 있을까 싶어 다가온 데이지가 엘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일부러 걱정을 지워 낸 담백한 어투였다. 데이지는 그런 쪽으로는 재주가 좋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여상스러운 말투로, 듣는 사람까지 ‘그래 별일 아니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엘리아와 외젠을 살피곤 했다.

저까지 불안에 떨며 말을 걸거든 대번 울음을 터뜨리는, 두 남매에게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응, 괜찮아. 나는 괜찮은데 에드문트가…….”

무심코 대답하던 엘리아는 그제야 제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을 한 번 보고, 그리고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춰 오는 데이지의 모습에 엘리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주 보고 있던 보좌관을 떠올렸다.

<한스. 괜찮아요. 천천히 이야기해요.>

그를 앞에 두고 내내 데이지 흉내를 내었다. 마주 보거든 더 불안케 할 제 본래 모습보다는 데이지가 늘 보여 주던 침착한 모습을 흉내 내 보려 했다.

실은 무서웠다.

“에디가…… 많이 아프대. 마음이 많이 아파서, 혼자 힘들어하고 있어.”

애써 찾은 봉투 위에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한스가 먼저 내어 둔 눈물길을 따라 꾹꾹 눌러 두었던 엘리아의 슬픔이 새로 길을 터 흘러내렸다.

“아가씨.”

데이지는 울지 마시라 이야기하는 대신 제 손을 얹어 주었다. 저보다 크고 곧은 데이지의 손이 함께 떨렸다.

“데이지, 나 한 번만 안아 줘.”

기다렸다는 듯 곧장 팔이 뻗어 와 엘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아직도 데이지에겐 아이처럼 작은 엘리아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희미한 부모의 품보다 따듯했고, 남자의 단단한 품보다 부드러웠다. 엘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 따스함에 감격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거 알아? 나랑 외젠이 힘들 적에, 버티기 어려울 때는 네 흉내를 내며 견뎌 왔다는 거.”

“음…….”

엘리아의 고백에 등 위에 도닥거리던 손이 멈추었다. 말을 고르느라 목을 울리는 소리가, 엘리아의 몸에 닿아 간질거렸다.

작은 진동은 이윽고 미소가 되어 엘리아의 어깨 위에 해처럼 걸렸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마다, 아가씨랑 외젠 님 흉내 내며 살았는데요.”

“나랑 외젠을?”

“안아 달라는 말도, 곁에 있어 달라는 말도. 아가씨와 외젠 님에게 처음 배웠으니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울기만 하던 데이지를 가장 먼저 껴안아 준 게 엘리아였다.

<데이지, 엘리 안아 줘. 응? 데이지가 엘리 안아 줄까?>

아직 말도 아직 서툰 아이가 어떻게 저를 찾아왔는지, 엉엉 따라 울면서 안아 달라 팔 뻗어 왔다. 어린 아가씨 품에 꼭 안으니 얼마나 따뜻하던지.

새파랗게 마음을 얼리던 슬픔이 금세 녹아내리더라.

<데이지. 우리 부모님도, 엘리도, 그리고…… 나 역시, 네가 여기 있어 주길 바라.>

어린 제게 로앙가에 있어 봐야 폐가 될 거라면서, 먼 친척이 자신을 거두겠다고 찾아왔었다.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말에 슬퍼했다.

그러자 외젠이 찾아와 로앙가에 남고 싶어 하는 자신을 붙잡아 주었다. 데이지가 가장 듣고 싶었던, ‘필요하니 곁에 있어 달라.’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이 데이지에게 따듯한 버팀목으로 남아 주었기에, 몇 년 후 닥친 로앙의 비극을 함께 견딜 수 있었다.

“전부 다 아가씨한테, 외젠 님한테 배운 거예요. 슬플 때 꼭 안아 주고 위로해 주는 거. 저는 정말 하나도 몰랐는데, 두 분이 저한테 가르쳐 주셨어요.”

서로가 서로를 베껴 살아왔노라는 고백 속에는 충만한 애정이 있었다. 벅찬 마음에 서로를 더욱 가깝게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 달라붙어 있던 불안감이 닿은 곳부터 녹아 흩어졌다.

“있잖아. 나한테 잘될 거라고 얘기해 줄래?”

“다 잘될 거예요. 잘될 거예요.”

두 번, 세 번. 넘치는 애정으로 엘리아를 다독여 준 데이지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가져왔다. 엘리아는 그 안에 생각나는 물건들을 전부 집어넣었다.

아직 포장을 풀지 않은 새 비누와 향유, 그리고 두 개의 오르골까지 밀어 넣자 커다란 가방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여행 가방의 잠금장치 닫히는 소리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데이지는 가방 잠금 쇠를 한 번 더 손본 뒤 배웅하듯 가죽으로 된 가방 겉면을 어루만졌다. 길이 잘 들어 매끈한 가죽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사실, 데이지는 엘리아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 종종 이 가방을 꺼내곤 했다. 덕분에 긴 여행 동안 해진 곳은 말끔히 수선되어 있었고, 삭지 않도록 관리한 겉가죽이 반질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이 가방은 북부에 남부까지 다녀왔던 거네요. 저보다 제국 여행을 더 많이 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긴장하고 있던 엘리아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여행 가고 싶어? 가자. 다녀오거든 우리 같이 여행 이야기하자.”

“네, 공작님께 물어봐 주세요. 그분은 제국 곳곳을 다니셨다니까 좋은 곳을 잘 아실 테니까요.”

“알았어. 제일 좋았던 곳은 데이지랑 다녀올 테니까, 에디랑은 두 번째로 좋았던 곳에 가자고 할게.”

“공작님께서 질투하실라. 저 미움받으면 아가씨 뒤에 숨을 거예요. 제 편 해 주실 거죠?”

데이지가 미리 연습하듯 엘리아의 어깨를 잡고 뒤로 몸을 살짝 숙였다. 등 너머로 따듯한 체온이 기대 오며 실린 무게감이 떨림을 멈추게 했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기사의 맹세를 흉내 내어, 엘리아는 제 어깨를 감싼 데이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작은 새가 부리 쪼듯 닿아 오는 입술이 두 사람을 웃게 했다.

데이지의 손이 엘리아의 어깨에 살짝 더 깊게 파고들어 왔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다녀올게. 돌아오거든 여행 이야기를 하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이야기를 듣고 올게.”

어느새 떨림은 멎어 있었다.

떠나는 길 앞에 어떤 시련이 있든, 엘리아는 이겨 보일 생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기다렸던 사랑과 마침내 함께이리라.

* * *

공작가에 도착한 건 스산함을 느끼기엔 무척 이른 오후였다. 하나 엘리아는 여름을 맞이해 뜨거워진 햇살이 전부 공작저를 비켜 나가 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계절인데, 여긴 꼭 겨울 같지요.”

마차에서 내려 우두커니 공작저를 바라보던 엘리아에게 한스가 한마디 덧대었다.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인적이 전혀 없는 텅 빈 풍경, 바람에 흩어 올라간 흙을 치우지 않은 정문 앞 디딤돌, 옮겨 심는 게 늦어져 시들고 만 정원의 꽃, 비가 올 조짐이 보이는 데에도 가리개를 벗겨 둔 마차.

다정한 봄이 자리를 비운, 텅 빈 겨울의 모습이었다.

“호위는 전부 저택 밖에 집중시키고 내부는 비워 두었나 보네요. 가신들은 전부 북부로 보낸 건가요?”

“예, 저택 내부에는 사람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신 벨젠 경과 함께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공작님을 호위 중입니다.”

저택을 쓸고 닦는 사용인들마저 최소한만 남기고 전부 공작령의 본 저택으로 보냈으니, 사방에는 일손이 부족한 흔적이 역력했다.

채 훔치지 못하고 남겨 둔 먼지라든가, 까만 얼룩이 진 바닥이라든가.

‘복도에 걸어 둔 그림도 지난번이랑 그대로이네. 매번 공작저를 찾아올 때마다 복도의 그림이 바뀌어 있곤 했는데.’

엘리아는 구면인 유명 화가의 작품을 지나치며 생경함을 느꼈다. 겨우 몇 달 만에 온 저택이 버려진 건물처럼 삭아 가는 듯 보였다.

“공작님께선 이곳 집무실에 계십니다.”

잠시 낯선 풍경에 넋 잃은 사이 한스가 도착을 알렸다. 살짝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엘리아는 눈을 감았다. 긴장감까지 함께 전달받은 탓이리라.

문 너머에 있는 에드문트를 두고 잠시 멈추어 있는 순간이 벌써 몇 번째였더라.

매 순간, 엘리아는 비쭉하게 올라온 긴장감이 살갗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은…….

문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한스가 문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문장 하나를 속삭였다. 벨젠 경과 정한 두 사람의 암호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는 하필 세게 뛰던 엘리아의 심장 박동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대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엘리아 님.”

곧장 에드문트의 모습이 보였다면, 엘리아는 고통에 울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 안쪽으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벨젠 경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기사가 한스를, 이어 엘리아를 바라보고는 다시 앞에 있는 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짓으로 에드문트의 상태를 묻는 한스를 향해 벨젠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들어오라는 말 대신, 그가 에드문트에게서 엘리아의 시선을 차단하는 행위였다.

“엘리아 님.”

나지막한 기사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경계심이, 짙게 어려 있었다.

“벨젠 경, 한스 경에게 이야기 전해 들었어요. 에드문트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저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에디를 만나는 게 그에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직설적인 물음에 벨젠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한스는 벨젠 경에게 ‘잠시 외출할 테니 공작님을 부탁한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지만, 그는 보좌관이 엘리아 아가씨와 함께 오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드문트와 남겨진 채 고민한 끝에, 벨젠 경은 결정을 내렸다.

“공작님께서는 아시다시피 열흘 내내 환각으로 아가씨를 마주하고 계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가씨 목소리가 들리고, 진짜 모습이 보인들 혼란만 가중될 겁니다.”

“벨젠 경.”

“공작님을 열흘 동안 보면서, 제 주인께서 누구보다 아가씨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저분의 무너진 모습을 동의 없이 보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벨젠 경은 물러서지 않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보고 있으면 저까지 미칠 지경인 모습인데, 직접 이름이 불릴 엘리아는 무슨 심경이겠는가.

“더군다나 현재 저택 내부는 호위 인력이 최소화된 상황입니다. 당장 돌아가셔서 스스로의 안위를 살피셨으면 합니다. 한스 경, 당신도 너무 경솔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마부 하나만 이끌고 로앙가에 찾아가다니요.”

“제기랄, 벨젠 경!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분 명령을 지키겠답시고 엘리아 아가씨를 막겠다는 겁니까?”

“저는 지키려는 겁니다.”

두 사람의 실랑이에 엘리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주먹을 그러쥔 채 벨젠 경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를 지키려는 건데요. 에드문트를 내게서 지키겠다는 건가요?”

“공작님과 아가씨, 두 분 모두를 지키고자 합니다.”

“벨젠 경, 제발.”

엘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닫힌 문 너머에 있을 연인을 생각하니 갈증이 인 탓이었다.

두 달을 기다렸다. 남자가 미쳐 버려선 저를 알아보지 못하든 말든 엘리아는 그를 만나야만 했다. 그래야 이 타는 갈증이, 죽을 것 같은 어린 사랑이 해소되리라는 걸 본능으로 알았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벨젠 경, 한스 경과 함께 에드문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는 거 알아요. 그를 잃을까 봐 무섭고, 더 아파할까 봐 두렵겠죠. 지금도 그를 위한다며 나를 가로막는 걸 테고요.”

엘리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벨젠 경의 굳은 팔을 다독였다. 떨림은 부러 숨기지 않았다. 계산적인 행위라 하기엔, 애초에 숨길 여력 따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공작의 기사에게 다정하게 수고했다는 말 한번 해 준 적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엘리아뿐이었다. 오직 공작의 연인인 저만이 당신의 두려움을 지극히 이해하노라 말해 주려 했다.

그래야만, 제게 에드문트를 향해 걸어 들어갈 길을 열어 줄 테니까.

“그렇지만 벨젠 경. 더는 에드문트를 홀로 버티게 하지는 말아요. 누구한테도 의지해 본 적 없는 사람이잖아요. 도와 달라 말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란 거, 벨젠 경도 알잖아요.”

이름을 들먹이는 것과 동시에, 옅은 무게감이 팔에 실렸다. 기사인 그는 엘리아의 작은 손길 따위에 몸을 움츠리지는 않았으나…….

눈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자해하지 않게 감시하고, 죽지 않은 사람을…… 이미 죽은 사람을 찾아 나서려는 걸 막아 세우고. 그런 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나요? 벨젠 경.”

색소 옅은 갈색 눈이 눈꺼풀 뒤로 숨어 들어갔다. 엘리아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혼란한 마음에 비집고 들어갔다.

“당신도 알겠지만, 10년 전 나도 에디와 다르지 않았어요. 부모가 죽은 충격에 웅크린 채 환청을 들었죠.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었어요. 몇 달 동안이나. 그런 나를 구한 건, 곁에서 끊임없이 나를 불러 준 내 가족들이었고요.”

순간 복받친 감정에 밀려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엘리아는 쏟아지는 비를 피해 급히 뛰어가듯 말을 이었다.

폭우처럼 쏟아질 눈물이 제 목소리를 잡아먹기 전에 달아나야 했다.

“벨젠 경, 나는 알아요. 내버려 둔다고 저절로 나아질 리가 없어요. 누군가 말해 줘야 해요. 그가 집사의 죽음에 자책하는 거라면 그의 탓이 아니라고 수십 번 말해 줘야 할 테고, 죽은 기사를 추모하는 중이라면, 함께 슬퍼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해요.”

한번 터진 눈물이 점점 세를 불려 왔다. 엘리아는 기사의 팔을 움켜쥐었다. 저 따위가 잡아 봐야 흔들리지 않을 단련된 몸이었지만, 어쩐지 엘리아의 작은 손에 잡혀선 함께 휘청일 것처럼 굴었다.

감정이, 동화된 채 흔들리려 들었다. 충분할 성싶었다.

이제 멈추어도 되는데. 멈춰야 할 텐데 멈출 수가 없었다. 엘리아는 터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전부 쏟아 냈다.

“내가 아무 도움 안 될지도 모르죠. 악화시킬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만약 에디가 죽지 않은 나를 죽었다고 여기고 자책하는 중이면요? 그가 스스로 열고 나와 주길 기다려야 하나요? 혼자 꿈속을 헤매다가 어느 날, 내가 죽지 않았음을 깨달아 주길 바라라고요?”

그리움을 넘어서, 그를 잃을까 봐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 공포는 성토가 되어 높게 울렸다. 아무도 없는 저택에 엘리아의 울음이 마음껏 복도 끝까지 내달렸다가 희미하게 메아리쳐 돌아왔다.

두려움을 꾹꾹 속에 넣어 두기만 하던 보좌관과 기사의 앞에서, 엘리아가 말로도 못다 표현할 감정들을 선연히 드러냈다.

그들이 여태껏 외면해 오던 나약함을 마주 보게 했다.

“에디가, 내가 죽었다고,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내가 엄마 아빠를 잃었을 때처럼, 그렇게나 많이 아픈데 어떻게 보고만, 있으라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벨젠은 정직하게 두려움을 호소하는 엘리아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가 어린 탓이라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은 두렵다고 말할 용기조차 갖추지 못하지 않았던가.

공작을 홀로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며 변화에 겁먹어 나아가려는 사람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던가. 혹시 제가 길을 열어 두 사람 마주하게 했다가, 그가 더 악화된다면.

후회할까 봐. 자신의 탓이 될까 봐 두려워했으니.

자각은 새삼스러웠다. 벨젠은 비로소 제가 비겁했음을 인정했다.

“……엘리아 님.”

눈물을 억지로 참아 가며 이를 악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열흘 동안 넘치게 보았던 공작의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공작도 사실 같은 심경이었을까. 벨젠은 그가 정신을 놓은 모습을 한시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서도 정작 그가 어떤 심경일지는 한 번도 헤아려 본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제가 열흘 동안 헤아리지 못한 심경을 어린 약혼자께서 대번 헤아리는 까닭은, 제게는 충성심이나 그에게는 사랑이라서 일지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아 님.”

* * *

벨젠 경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엘리아가 서재에 들어섰다. 에드문트의 서재를 찾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인상적일 정도로 깔끔하던 책상 위 공간은 여전했고, 붉은색과 백금을 섞어 고상하게 꾸민 벽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서재에 딸린 작은 곁방, 작은 침대에 누운 남자의 모습은 엘리아에게 무척이나 낯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엘리아는 잠든 그가 좁혀 주지 않을 거리를, 로앙에서 시작해 한없이 짚어 온 공백을 스스로 걸어 채웠다.

가까이 갈수록 익숙한 향이 짙어졌다.

<고통을 호소하시더니, 진정제를 원하셨습니다.>

진정제라고 했지만 엘리아는 코로 흘러들어 오는 향만으로도 성분과 약효를 추측할 수 있었다. 열병으로 통증이 극에 달했을 때나 사용하던 수면제였다.

코를 할퀴던 짙은 향에 후각이 마비될 즈음, 드디어 그가 누운 침대에 다다랐다. 엘리아는 기꺼이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잠든 에드문트를 마주했다.

“에드문트.”

이름을 불렀다. 먼저 확인을 구하듯. 살이 빠져 선이 더 날카로워진 얼굴을 보며.

“……에디.”

이어 기다린 시간 동안 눈물 나느라 한 번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던 애칭을 불렀다. 남자를 감싼 얇은 이불을 손톱으로 긁어 가며 울음을 참았다.

밤새 심문을 하고 돌아왔을 때조차 멀끔하던 남자였는데. 부모의 장례식 때조차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기만 했거늘.

굳게 닫힌 눈꺼풀이며 스스로 짓씹어 피딱지가 앉은 입술에 아름다움 대신 고통이 완연했다. 엘리아의 눈물을 부추겨 댔다.

다시, 이번에는 매끄러운 이불 대신 제 손을 사려 쥐었다. 손톱이 여린 제 거죽을 찔러 피가 날 때까지 긁어 댔다.

눈물 대신 차라리 피를 바랐다. 혹여 잠든 남자에게 제 울음소리가 들릴까 봐. 어린 제가 꿈에서 들었던 빗소리처럼 들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꿈을 꿀까 봐 억지로 참았다.

“에디, 네가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눈물 대신, 보고 싶었다고 속삭였다. 입에서 흐르는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엘리아는 에드문트를 만날 때마다 몸 안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선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쏟아 냈다. 부끄러움 느낄 줄도 모르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에드문트를 향한 감정이 차고 넘쳐 숨구멍을 전부 막아 대는 바람에 어떻게든 쏟아 내야만 했다.

감정에 침식해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숨도 못 쉴 정도로. 하늘을 보다가도 네 생각이 나서 속이 꽉 막혔고, 정말 아무 전조도 없이 불현듯 네 생각이 나고, 또 나는 바람에 잠이 들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한 적도 있어. 에디. 에드문트…….”

벨젠 경과 한스, 두 사람은 차마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웠노라 연인의 애칭을 쉼 없이 부르는 여자를, 바닥에 눌어붙은 채 바들바들 떨어 대는 가련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자의 꿈을 해칠까 싶어 눈물을 욱여넣는 바람에 떨림은 주체할 줄 모르고 거세어져 갔다. 엘리아는 그저 목소리만이라도 멀쩡한 척을 해 보겠다고 용을 써 댔다.

“……좋은 꿈, 꿔. 오늘 날씨처럼 아주 따듯한 꿈 말이야. 나는 꿈에서 네 얼굴 한 번 보면 하루 내내 행복해서 어쩔 줄 몰랐는데. 에디 네게도 그런 꿈이 있다면. 아주 따듯해서 곱씹을 때마다 웃음이 나오고, 깨어난 게 아깝다 싶을 정도로 따듯한 꿈을 꾸길 바라.”

그 꿈에 자신이 존재하길 바라는 건 당연히 말로 종용해 댈 수 없는 욕심이었다. 전부, 그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갈망을 제외하면 전부 다 버려야 마땅했다.

“그리고 행복한 꿈을, 한참 꾸고 잠에서 깨어나면. 나 한 번만 안아 주면…… 아니면 이름, 이름 불러 줘도 좋고…… 아니야. 그냥 아무것도 안 해 줘도 돼. 억지로 웃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에디. 깨어나거든 한마디만 해 줘. 좋은 꿈을 꾸었다고, 아프지 않았다는 말을…….”

목소리에 자꾸 눈물이 고였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름이라도 몇 번 더 불러 보고 싶은데.

여전히 너는 내게 아름다워 보이노라 고백하며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데.

푸른 호수에 입술이 붙은 듯 꼬로록, 꼬로록. 폐부를 침식하는 물소리가 소리가 섞이는 바람에.

아름답다는 말, 보고 싶었다는 말, 기다렸다는 말을 하나씩 하나씩 덜어 내야 했다. 그러자…….

“에디, 에드문트.”

이름이 남았다.

그리고 사랑이 남았다.

자리를 잃은 감정은 둘 곳이 없길래, 그의 소매를 살포시 잡아 그 위에 입술을 붙였다.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새하얀 소매를 전부, 그를 향한 마음으로 더럽혔다.

* * *

그렇게 봄을 떠나보내고.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열여덟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에디. 사랑해. 좋은 꿈 꿔.”

따뜻한 포옹으로 장식할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아직 이별한 채, 만나지 못한 남자의 꿈이 따듯하기를 빌어 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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