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 변명 (60/79)

60. 변명

평범한 하루였다.

어제와 같았고, 내일도 다르지 않을 아침이었다.

“아가씨, 아침이에요. 오늘도 날이 참 좋아요.”

사용인들이 양쪽으로 커튼을 걷자 초여름 햇살이 가득 쏟아졌다.

“응, 그러게. 날씨가 정말 좋네.”

잠에서 깬 엘리아는 창문 너머 쾌청한 하늘을 확인한 뒤 오르골을 깨웠다. 가벼운 손짓에 태엽이 감기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음악에 맞추어 사용인들이 세숫물을 나르고, 차 한 잔을 올린 뒤 하루를 함께할 연녹색의 실내복을 꺼내 주었다. 사람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작은 무도회 같았다.

엘리아도 그들의 움직임과 짝을 맞추어 아침 준비를 했다. 아직 햇볕이 스미지 않은 물로 얼굴을 닦아 내고, 햇살을 닮은 차 한 모금으로 몸을 깨우고.

준비를 모두 마치자, 오르골이 멈추기까지는 다섯 마디쯤 남아 있었다.

엘리아의 손가락이 남은 곡조에 맞추어 협탁을 두들겼다. 하나, 둘, 셋.

딱딱한 숫자를 가사 삼아 함께 읊조렸다. 일곱, 여덟, 아홉…….

스물하나를 끝으로 오르골 멈추는 소리가 쉼표를 찍었다.

태엽이 끝난 걸 확인한 엘리아가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마주했다. 커다란 구름이 푸른 하늘을 들판 삼아 유유히 산책 중이었다.

‘스물둘, 스물셋…….’

다시 숫자를 세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도 변함없을 하루가 얼마나 흘렀는지를 셈하니 어느덧 서른. 서른하나. 서른둘…….

한 달을 꽉 채우는 숫자를 훌쩍 넘어 두 달을 며칠 남겨 둔 숫자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로 봄이 다 가는구나.’

그제야 알았다. 제가 입은 실내복 소매가 어느덧 짧아져 어깨를 둥글게 감싸고 있음을. 도톰한 안감을 덧대 두었던 치맛자락이 얇아져 무릎을 간질이고 있음을.

저도 모르는 새 여름옷을 입고선 봄을 떠날 준비를 마쳤음을.

‘여름이 벌써 찾아왔네. 애타게 기다린 것도 아닌데.’

봄의 마지막 날.

연인이 북부로 떠난 지 56일째 되는 날이었다.

또한 스물세 통의 편지를 보낸 지 한 달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날이었으니……. 한 달째이던 어제는, 닳도록 꺼내 본 편지 위에 눈물까지 떨구고 말았다.

‘에드문트.’

그래도 엘리아는 그를 떠올렸다. 단 하루도 잊지 않은 사랑을 재차 곱씹었다.

다만, 차마 남자의 이름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우지 못했으니.

‘에드문트. 봄이 그새 다 가 버렸지만 사실 상관없어. 나는 그냥, 그냥…….’

소리 내려 입 벌리거든 잠시 담았던 남자의 숨이 떠나 버릴까 봐. 애칭으로 부르다간 마음이 눈물이 되어 새어 나갈까 봐. 어쩔 수 없이 마음속으로만 남자를 불렀다.

‘……보고 싶어. 네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아, 봄이 성급히 가 버린 탓에. 창 너머로 들어온 햇살이 너무 밝았던 탓에.

잠시 눈물이 고였다. 얼굴을 치켜들어 억지로 눈물을 도로 욱여넣었다. 아침부터 펑펑 울다간 하루가 고역일 테니까.

‘나도 참 바보 같지. 눈물 날 거 알면서 꼭 에드문트 떠올리고…….’

눈꺼풀을 꾹 닫아 눈물을 걸어 잠그는 행위야 이제 익숙했다. 거울을 보고 붉은 기가 가셨음을 확인한 뒤에야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외젠과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겸해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집무실에서 서류와 씨름하리라.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침실로 돌아와 어느새 새까매진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음을 깨달으리라.

그렇게나, 평범한 아침이었다.

어제와 같았고, 내일도 다르지 않을 그리움이 이어지리라 여겼다.

“엘리아 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라스페가의 기사가 내게 접견 요청을 했다고?”

“예, 아가씨께만 따로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분명 에드문트의 소식을 전한 것이리라, 그렇게 확신한 엘리아가 걸음을 재촉해 기사의 뒤를 따랐다.

‘편지일까? 아니면 또 나는 상상도 못 할 걸 선물이라고 보내온 걸까?’

그리움만 잔잔하던 나날이었다. 불쑥 찾아온 구름이 반가운 건 당연하리라.

엘리아는 잔뜩 들뜬 채 걸었다. 북부에 간 에드문트가 어떤 소식을 보내온 걸까.

북부의 짧은 봄을 상징하는 연분홍빛 꽃을 한 아름 보냈을까. 아직 수확하기엔 이른 북부산 과일을 한가득 보내왔을까.

푸른빛이 돌 과실이 달큼한 향을 품을 때 맞춰 돌아오려나.

천진한 상상이 짧은 거리를 좁혀 가며 엘리아를 가득 채웠다. 마음이 전부 다 봄을 놓지 않은 밝은 빛이었다.

그러나 엘리아가 철없이 매달고 온 기대감은 북부 고산 지대에서만 자라는 과일보다도 연약했으며, 낙화를 기다리며 색 바랜 연분홍빛 꽃보다 허망했으니.

아마, 봄이 떠날 준비를 마친 탓에. 햇살이 너무 강해서. 제 하늘 위를 덮으려 찾아온 구름이 새카만 먹구름인 줄도…….

몰랐다. 세찬 바람이 불고 비를 퍼부어 부푼 기대 전부 뜯겨 나갈 줄은.

* * *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저택 뒤편으로 향하니 라스페가의 마차가 엘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가지고 있는 마차 세 대는 전부 같은 모양이었으나, 엘리아는 마차 하나하나를 구분할 줄 알았다.

홀로 공작저에 초대받은 엘리아를 데려다주었던 마차는 지붕 끝이 뾰족했다. 그 안에서 에드문트는 엘리아의 마음을 처음으로 피워 냈다.

두 사람이 함께 호수를 찾았을 때는 짙은 색 발 받침이 달린 마차를 이용했었다. 어쩌면 에드문트가 처음으로 손 뻗었던 날 엘리아가 느낀 황홀함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봄의 마지막 날 로앙가를 찾아온 마차는 지붕이 뾰족하지도 않았고 발 받침 색은 어린나무를 사용했는지 연한 빛을 띠었다.

<엘리. 다녀올게.>

그때의 마차이리라. 남부에서 에드문트를 태우고 로앙가에 찾아왔던, 바람이 세게 불던 날 두 사람을 품어 주었던…….

<남겨 줘. 너를 만나지 못할 시간 동안 내가 기억하게 해.>

에드문트가, 평소와 다르게 엘리아를 향한 짙은 소유욕을 내비쳤던 날 보았던 마차였다.

잠시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날을 떠올린 엘리아가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에드문트가 수도로 돌아왔구나.’

그가 타고 떠난 마차가 돌아왔으니, 분명 연인도 돌아왔으리라 확신했다.

어쩌면, 에드문트가 문을 열고 나오는 거 아닐까?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두 손을 꾹 쥐었다. 마차 문 가까이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하필 그와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햇빛 아래에서 제 색을 잃은 남자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 탓에 엘리아는 망설였다.

까맣게만 보이는 사람을 향해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걸까.

가장 간절한 이름을 부르며 기어코 울어 버릴까.

아니면, 낙담한 채 현실을 읊어야 하려나. 엘리아의 고민이 두 갈래로 나뉘어 방황했다.

“……아.”

현실이 고민을 끊어 주었다. 드러난 남자는 마차를 꽉 메울 만큼 큰 체구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제 색을 찾은 머리칼은 적갈색이었다.

공작가의 가신 중 저토록 붉은 기 넘치는 적갈색 머리는 한 명뿐이었다.

“엘리아 님.”

두 달여 만에 본 적갈색 머리칼의 보좌관, 한스 마이어는 무척 이상하게 굴었다. 반갑다는 인사도 없었고, 분명 지난번 저택에서처럼 엘리아가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다 실망한 모습을 보았으면서 놀리는 기색도 없었다.

“엘리아 님.”

한스는 엘리아에게 인사 건넬 시간조차 주려 하지 않았다. 파리한 입술 사이로 내뱉는 소리가 누군가에 쫓기듯 다급했고, 자꾸 깜박거리는 눈꺼풀과 허공을 배회하는 손이 스스로를 재촉해 대고 있었다.

마치 엘리아가 그의 이름을 부를까 봐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엘리아는 깨달았다.

‘아…… 내가, 너무 기다리기만 해서. 그저 에디를 보고 싶다고만 생각하느라 바빠서 잊고 있었어.’

제 연인은 여린 사람이었는데.

안락한 저택에서 그리워하기만 하면 될 저와는 달리, 내내 죽음과 싸워야 했을 텐데.

‘부서져도 고치면 그만인 오르골이 아니었는데. 에드문트는, 부서지길 기다릴 게 아니라 아프지 않도록 더 아끼고 보듬어야 할 내 사랑이었는데. 내가 너무 안이하게만 생각했구나.’

여름옷에 하나씩 묶어 온 기대감이, 마차 문이 열리며 불어닥친 바람에 끊어져 나갔다.

그러나 분명, 몇 가닥은 엘리아가 스스로 끊어 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염치 불고하고 아가씨를 따로 모셔 달라 청했습니다.”

아프지 않았다. 아쉬움은 분명 있었으나 그냥 전부 바람에 흘려보냈다.

남자의 목소리가 읊어 줄 제 애칭, 그 달콤함. 저 하나 가뿐하게 감싸 줄 포옹, 그 따듯함. 계절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봄이었을, 아름다운 재회는 전부 봄바람이 데려가 버렸지만.

“괜찮아요, 한스.”

엘리아는 손 뻗어 잡히지도 않을 기대감을 쫓는 대신, 한스의 손을 잡아 주었다. 긴장한 탓에 굳어 있던 남자가 달아날 듯 움찔거렸다.

무척 차가웠다. 함께 있었을 에드문트의 손도 이처럼 차가울까. 잡아 줄 사람도 없이 혼자 아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스, 얘기해도 돼요. 나는 괜찮으니까.”

엘리아는 붙잡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되레 두 손으로 꼭 잡고 서늘한 그의 손에 제 온기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한스는 대신 눈을 꾹 감아 버렸다. 격정을 삼키는 표정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늘 화가 나거나 기쁘거나 할 적에, 엘리아는 꼭 저런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다시 밀어 넣으려면 눈을 질끈 감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목을 꺾어 들어 올리는 게 최선이었으니까.

한스는 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마차 안에서 수십 번 연습했던 말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지난번 제가…… 저를 위한 선택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기억해요.”

엘리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무슨 뜻인 줄 알아챘을 거면서도 목소리가 참 담담하기만 했다.

한스는 다시 울고 싶어졌다.

분명 낯선 손길 탓이었다. 두고 온 남자 탓이었고,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누군가 제 두려움을 다독여 준 게 처음이었음을.

그동안 홀로 두려워해 왔다. 함께 에드문트를 지키던 벨젠 경에게도 차마 속내를 고백하지 못해서, 내내 홀로 불안함을 삭여야 했다.

당연히 그는 에드문트를 지켜보며 엘리아를 떠올렸다. 망가진 공작을 고쳐 줄 사람은 엘리아뿐이라 믿었으니까. 제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한스, 엘리에게는…… 제발, 제발 말하지 말게.>

그러나 에드문트의 간청을 핑계로 그동안 미루기만 했다. 유일한 선택지라는 걸 알면서도.

“아가씨를……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발 엘리아 아가씨, 부탁드립니다.”

여자에게 찾아가 당신 없는 사이 기어코 망가졌으니, 고쳐 달라고 차마 요구할 수가 없었다.

변명할 말은 많았다. 입을 열어 제대로 지껄일 수만 있다면야 이미 몇 번이나 엘리아에게 변명했으리라.

에드문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을 때, 그와 한스는 북부에 있었다. 남자가 낯선 자비심을 보였을 때는 북부를 종단하느라 ‘엘리아’라는 이름 한번 꺼낼 틈도 없이 바빴다.

집사의 죽음을 듣고 눈물 흘리는 에드문트를 보았을 때는?

<로앙가에도 함구하란 말씀이십니까? 혹시, 엘리아 아가씨가 걱정되셔서 그러신 거라면 아가씨께서는…….>

<한스.>

<……예. 지시하신 대로 벨젠 경에게도 함구토록 전하겠습니다.>

그 당시 한스는 다정한 집사의 죽음을 추모하기에 바빴고, 에드문트를 감당하는 데만 해도 벅찼다.

그렇게 마지막 기회까지 놓치고 말았다.

‘집사를 새로 구한 다음에 바로 아가씨께 알릴 생각이었는데. 정말로…….’

공작의 함구령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엘리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구한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엘리아가 아직, 석실에 있을 텐데.>

차라리 자해를 하시지. 제 살 갈라서라도 제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하던 에드문트의 꼴이 그리울 줄이야.

<클라우스, 팔에 상처는 괜찮은가.>

환각을 보고, 허공을 향해 말을 걸어 대는 모습은 한스와 벨젠조차 감당하기 버거웠다.

에드문트조차 잠시나마 정신을 차릴 적에 본인이 미쳐 버린 꼴보다 엘리아가 자신을 보고 충격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남자의 모습을 본 여자가 무너지고, 남자는 계속 무너지고, 여자가 그 모습에 또 무너지고…….

서로 마주 본 채 멈출 줄 모르고 나빠지기만 하면 어쩌나 싶어서. 차라리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남자를 숨길 생각만 했다. 지난 열흘 동안 말이다.

그렇지만,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한스는 공작에게 붙들린 저를 끊어 내 로앙에 찾아오고야 말았다.

“라스페 공작님을 도와주십시오.”

약속한 대로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했다. 다정한 아가씨가 상처 입지 않길 바랐지만, 언젠가 엘리아에게 말한 것처럼 한스의 주인은 아직 에드문트뿐이었다.

엘리아가 에드문트를 위해 감당해 주기를 바랐다.

“제발, 엘리아 님. 부탁드립니다. 공작님께……. 저는, 저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 드릴 수가 없어서…….”

따듯한 체온에 결박된 손이 무참히 떨렸다.

툭, 툭. 겹쳐진 손등 위에 협탁을 두드리던 소리가 들렸다. 짊어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먹구름이 비를 쏟아 냈다.

엘리아는 제 작은 손을 더 넓게 뻗어 한스의 손을 고쳐 잡았다. 작은 지붕이 되어 남자가 뚝뚝 흘리는 눈물을 대신 맞아 주었다.

“한스, 자책하지 말아요.”

커다란 손은 떨림이 멈출 줄 몰랐다.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 비까지 머금은 탓에, 엘리아가 작은 개구리를 손에 숨겼던 어릴 적을 떠올리게 했다.

도닥도닥. 함께 떨리던 손을 움직여 위로해 주었다. 분명, 두려웠을 테니까.

“당신이 누구보다도 에드문트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거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스스로를 탓하지 말아요.”

눈물만 소리 없이 흘리던 한스는 엘리아의 앞에서 서럽게 울고 말았다.

다독이는 손길이 너무 따듯한 바람에 창피한 줄도 몰랐다. 어깨에 가득 메고 온 슬픔 전부 흩뿌릴 때까지. 다독이는 손이 멈출 때까지.

비를 뿌렸다. 봄과 이별하는 마지막 빗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