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추락 (59/79)

59. 추락

새파랗게 녹음 진 봄의 끝자락. 하늘 아래 모든 곳이 푸르렀으나 라스페 공작가에는 한기가 맴돌았다.

겨울 같은 음산함이 감싼 저택에서 에드문트가 마지막으로 정상적인 모습을 보인 건, 사흘 전.

<이졸다 경이 랄프 경의 복수를 하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뿐이었습니다.>

하필 한스가 자리를 비운 틈이었고, 가신들이 공작에게 또 사람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날이었다.

<미안하다 전해 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유가족에게 전하라는 말씀 아니었을까요?>

이졸다 경이 연인의 복수를 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더라.

공작이 그 죽은 이들을 연민했다더라.

죽어 버린, 말년의 제 조부처럼 굴었다더라.

그 말을 들은 즉시 한스는 집무실로 달려갔다. 에드문트는 새파란 집무실에 홀로 있었으며…….

<공작님, 에드문트 님!>

커다란 소파가 눈을 감은 그를 절반쯤 집어삼킨 채였다.

숨이, 끊어진 줄만 알았다.

규칙적인 맥박을 확인하고, 주변에 독약 병 따위가 없음을 확인한 한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 달이 넘도록 하루에 겨우 두세 시간씩 자며 버텼으니 한계에 도달한 거겠지.’

감정을 보인 것도 누적된 피로 탓이라 여겼다. 차라리 잘되었다며 남자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에드문트. 에디.>

내내 연인을 부르짖다 기절하듯 잠든 남자의 꿈을 엿들을 수 있었다면.

<에디. 내 꼴을 좀 봐. 너무 아파. 죽음이 너무 아파.>

팔다리가 으스러진 여자가 자신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그런 꿈을 꾸는 줄 알았다면.

홀로 버려두지 않았을 텐데.

<아파. 에드문트. 너무 아파.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당신 때문에 죽어 버렸는데, 다시 죽고 싶지 않아. 아파. 아파…….>

하루를 꼬박 잠이 든 채 에드문트는 꿈속을 헤매었다. 추운 석실에 웅크린 채 연인이 죽어 가는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에드문트. 왜 나를 살렸어. 지켜 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어린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었어?>

붉은 고통과 함께 원망 토해 내는 연인의 앞에 웅크린 채, 에드문트는 눈물로 빌고 또 빌었다.

꿈속에서.

<엘리아. 미안해. 용서해 줘. 용서해 줘…….>

아니. 어쩌면 눈 감을 때 나타난 비극이 남자의 진짜 현실이었을지도.

새파란 봄. 잠시나마 사랑받는 꿈을 꾸다가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에디. 에드문트. 이름을 불러 줘. 나를 선택해.>

고통으로 선명하던 목소리가, 별안간 이지러지더니 선택을 요구했다.

‘어느 쪽을?’

죽어 버린 아내?

죽지 않은 연인?

<나는…… 나는.>

남자는 선택할 수 없었다. 마치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던 것처럼. 죽기 전 삶과 새로 얻은 삶을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뒤엉킨 마음을 칼로 잘라 분리해 낼 수가 없었다.

여자의 시체를 끌어안고 일평생 속죄하며 살고 싶었다. 또는 제 거짓된 다정함에 피어난 사랑에 매달려 착각하며 살고 싶었다.

버리고 싶지도, 버려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전부 끌어안으려 했다.

<엘리아.>

팔다리가 바스러진 아내를 기어코 품에 끌어안았다. 고통이 전부 제게로 밀려오도록 온 곳에 입을 맞추었다.

<엘리.>

웃어 보기도 했다. 어린 연인을 위해 다정하게 애칭을 부르고, 거짓말을 해야 했으니 제가 만든 보고서는 전부 등 뒤에 감추었다.

<엘리. 엘리아, 엘리아…….>

긴 꿈에서 깨어났던 건지. 혹은 세상이 드디어 무너져 내린 건지.

다시 눈을 떴을 때, 에드문트는 스물두 살이었고 또한 서른두 살이기도 했다. 죽음이 가득 차 있던 꿈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선 엉성하게 붙여 놓는 바람에.

스스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에드문트가 긴 잠에서 깨어난 후. 그의 눈꺼풀이 열리고 희뿌연 눈동자가 드러난 순간.

한스는 그가 미쳤음을 깨달았다.

* * *

첫째 날.

에드문트의 상태를 확인한 한스는 곧장 벨젠 경을 공작가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는 에드문트를 본 순간 벨젠 경은 순순히 인정했다.

제가 평생 지켜야 할 주인께서 이지를 잃었음을.

“지난번처럼 시간이 지나면 증세가 호전되지 않겠습니까. 일단 지켜봅시다.”

기사와 보좌관이 함께 에드문트의 곁을 지켰다. 자해할 것을 대비해 의원에게 진정제를 받아 왔으나 굳이 약을 처방할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를 버리는 행위마저 버거웠는지, 남자는 고작 시체 흉내나 낼 뿐이었으니까.

둘째 날.

허공만 바라보던 남자가 돌연 입을 열었다.

“한스. 자네,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던가.”

보좌관은 제가 올해 스물일곱이라고, 공작가에 온 지 4년째라고 답해 주었다.

“그렇군. 서른일곱이 아니라 스물일곱이군.”

에드문트는 왜인지 10년을 덧댄 숫자를 읊조리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손에 쥔 머리끈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벨젠 경이 궁금해하길래, 한스가 알려 주었다.

“이전에, 엘리아 아가씨께 받아 온 겁니다.”

에드문트는 머리끈 외에도 다른 물건들을 꺼내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한스가 손에 들린 물건이 바뀔 때마다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아가씨께 처음 받은 편지입니다.’, ‘연극 표가 들어 있던 봉투입니다.’, ‘아, 저건 엘리아 님께서 그림을 그려 돌려주셨던 봉투입니다. 저기 사슴 주변에 주홍색 꽃 그림 말입니다.’…….

벨젠 경은 한스에게 더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셋째 날.

곁방에서 쪽잠을 잔 한스가 집무실로 건너오니 에드문트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벨젠 경은 그가 벌써 네 시간째 쉬지 않고 글만 쓰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두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남자가 펜을 내려놓았다.

“한스.”

탁한 음성이 한스를 불렀다.

“내가 온전치 않은 동안은 이를 토대로 움직이게. 최종 판단은 자네들에게 맡기지.”

그제야 깨달았다. 글을 적는 동안이나마 공작이 제정신이었음을.

“그리고, 엘리에겐 말하지 말게.”

거기까지였다.

“엘리아에게 말하지 말게. 아내에게…… 말하지 말아 주게. 부탁이네.”

제 약혼자를 아내라 칭하며, 남자는 다시 정신을 놓아 버렸다.

다음 날에도 그를 내버려 둔 채 시간이 흘러갔으며, 여전히 에드문트의 상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오전에는 한스와 벨젠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 한번 없었으면서. 해가 뜨고 조금 더워지자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벨젠 경. 지금이라도 동부에 사람을 보내면 이졸다 경을 구할 수 있겠는가.”

“공작님. 이졸다 경도, 랄프 경도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래. 죽었다 했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는데. 하면 집사가…… 아니, 그도 죽었던가.”

“…….”

“3년이 남았는데. 3년 뒤에나 죽을 사람이었는데.”

한스는 그날부터 펜을 들어 에드문트의 혼잣말을 적기 시작했다.

아내, 죽음, 장례식, 마차 사고, 집사. 3년, 서른둘, 이혼…….

한 글자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갈 때마다 제가 같이 미치는 것 같았지만 뭐라도 해야만 했다. 사흘 만에 정신이 돌아왔으니, 다시 사흘이 지나거든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은가.

“한스 경, 크라우제 후작의 행방을 잡아냈습니다. 공작님께서 예측하신 대로 레만 자작령의 폐광산을 따라 이동 중이었다는군요. 또한, 에스코 남작에게 여태껏 황후의 차명 자산을 관리하였다는 자백을 받아 냈습니다.”

“설마 황제가 라스페가의 방계 혈족인 에스코가를 끌어들였을 줄은…….”

“전부 그때 써 주신 정보 덕분입니다. 공작께선 마치 미래를 전부 알고 계신 것만 같군요.”

그때가 오면 물어볼 심산이었다. 미쳐 버린 꼴로도 연인의 안전을 염려해 글을 적던, 제 ‘진짜’ 공작님께 도움을 구할 생각이었다.

* * *

에드문트 님.

아십니까? 당신께서 정신이 혼미한 동안 엘리아 님을 수십, 수백 번 찾으셨습니다. 많이 그리워하셨습니다.

<무얼 찾으신다고요?>

<이혼 서류 말일세. 분명 서명을 마치고 여기다 놓았는데.>

또한 공작님께선, 아가씨가 당신을 떠나다가 죽었다고 믿으시더군요. 서랍 안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이혼 서류를 애타게 찾으며 확인하려 하셨습니다.

물론, 이혼 서류 따위는 없었지요.

공작님.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석실에 가 봐야겠다. 엘리아가…….>

<오전에 다녀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엘리아 님께선 로앙가에 계십니다.>

<엘리아가, 살아 있다고.>

악몽을 꾸신 듯합니다. 아주 지독한 악몽 말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꿈에서 살아 엘리아 님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분께선 당신을 떠나다 죽어 버렸다고. 그렇게 믿고 계시지마는.

“에드문트 님, 엘리아 아가씨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실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바라고 있는 게 아닙니까.

당신이 살아야 할 곳은, 살고 싶은 곳은 이곳임을 말입니다.

아가씨가 살아 계시고 당신의 사랑이 남은 현실 속 말입니다.

그 증거로, 아침부터 공작님께선 내내 푸른색 꽃 그림만 바라보고 계시질 않습니까. 손에는 또, 편지 다발을 닳도록 움켜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리워서 어쩔 줄 모르시는 거겠지요. ‘엘리아’라는 이름 하나에 봉투를 움켜쥐며 반응하시는 것도 전부 그리운 탓이겠지요.

자해하고, 무너지더니 급기야 가신들의 죽음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로 미쳐 버렸음에도.

아직 당신은 사랑을 붙잡고 있으리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에드문트 님,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그리하십시오. 당신께서 누가 봐도 넋 놓은 꼴인 게 이제 겨우 열흘쯤 되었으니까요. 아가씨께서 편지 보내고 답장 한 번 받지 못한 것도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니까요. 그분은 아직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한스는 가시 어린 말을 피워 그를 찔러 보았다. 그러자 푸른 꽃을 바라보던 청색 눈이 깜빡였다.

“하지만 그분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시진 마시길 바랍니다. 사랑이라는 건,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사랑. 영원. 그 단어가 마치 목줄이라도 되듯 남자가 한스에게 끌려왔다.

몇 번을 제 이로 씹어 물어 피딱지가 깊게 앉은 입술이 들썩였다.

“……알고 있네. 한스.”

대강 사나흘꼴로 정신을 차리던 에드문트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내가 전부 잃어 간다는 것도. 겨우 돌려받은 시간마저 스스로 버리고 있다는 것도.”

아직 미쳐 있는 걸까.

“하나 어차피 영원하지 않을 테니, 결국 잃게 될 것들이 아닌가.”

영원을 부정하는 그는, 허공에 대고 연인을 아내라 부르던 미친 남자이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정신을 부여잡아 보겠다고 발악하던 한스의 주인님이시던가.

“하면 잃으려 하십니까. 진심으로 말입니까.”

방 안에는 한스와 공작, 두 사람뿐이었다. 벨젠 경은 미쳐 날뛰는 공작을 제압하기 어려울 테니, 최대한 그에게서 떨어져 있도록 권하였다.

다섯 걸음. 그래서 한스는 공작에게 다섯 걸음 떨어져 있었다.

“버리실 겁니까?”

남자를 향해 한스가 거리를 좁혔다.

네 걸음, 그리고 세 걸음.

두 걸음. 손을 살짝만 올리면 남자의 장갑 낀 손이 든 봉투를 훔쳐 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놓아 버리십시오. 버려졌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죽었다고 여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어 없는 말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그가 입 벌려 받아 마셨다. 놓아 버리라는 권유, 버려졌다는 확인, 죽었다는 단정적인 단어를.

“이리 주십시오. 영원하지도 않고, 그냥 썩어 버릴 편지 따위 왜 그리 쥐고 있으십니까? 엘리아 님께 돌려 드리고 오겠습니다.”

한스가 손 뻗어 봉투를 잡아채려 하자 남자가 움찔대며 뒷걸음질 쳤다.

여기저기 구멍 난 봉투가 함께 흔들리다 그만,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고 말았다.

투둑, 툭. 봉투에 있던 편지가 추락하는 소리가 꽃망울 터지는 음을 흉내 냈다.

제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여자의 마음을, ‘보고 싶어.’, ‘사랑해.’, ‘그리워.’ 그 황홀한 아름다움을 우수수 바닥에 토해 냈다.

<에드문트, 당신을 사랑했어. 사랑했는데, 더는 견뎌 낼 수가 없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속을 갈기갈기 찢어 내고서야, 그 안에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에드문트는 어린 연인의 마음이 제 손을 떠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잡아야 했으나, 너덜너덜한 봉투의 시체를 놓을 수가 없어서 눈으로 뒤쫓았다.

한스가 그 굳은 꼴을 눈에 담았다. 웃음이 나왔다. 에드문트의 집무실에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한때는 영원하시라 축복 담아 던지던 웃음을 남겨 두고 한스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한스. 제발.”

남자가 애원했다.

“엘리에게는…… 제발, 제발 말하지 말게.”

한스는 쉬이 멈추어지지 않는 웃음으로 그의 애원을 덮어 버렸다.

“하. 집무실에 처박혀서, 현실이랑 악몽도 분간 못 하는 인간 부탁을 내가 왜 들어줘야 합니까?”

에드문트는, 한스의 날 선 언사에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 유약한 꼴에 부아가 치민 한스는, 문고리를 일부러 천천히 돌려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스…… 엘리가…….”

엘리아가 싫어할 거야. 피딱지가 앉은 남자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말했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여자를 걱정하더라. 상처 받을까 봐. 제 무너진 꼴 보고 상심할까 봐.

아플까 봐. 팔다리 짓이겨지다 못해 마음까지 무너져 아플까 봐서.

“알게 뭡니까. 이젠 당신 배려하고 걱정하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문손잡이가 완전히 돌아가고, 잠금장치 풀리는 거센 마찰음이 들렸다. 절망 어린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외면했다.

“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할 겁니다.”

이기적인 말을 지껄이곤 한스는 도망쳤다.

겨울이 깊은 저택에서 달아나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