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 유언 (57/79)

57. 유언

에드문트가 한스에게 의견을 구한 지 닷새가 지났다.

낮과 밤이 수차례 바뀌는 동안, 공작의 얼굴을 마주한 사람은 한스와 기사 몇 명에 불과했다.

그런 에드문트의 행각을 유별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공작님께서 바쁘신 모양입니다.>

하나 평소와는 분명 달랐다. 에드문트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침실과 집무실에 격리한 채 생활하는 중이었다. 가신들과의 대화는 모두 서면으로 대체했고, 대면 보고는 전부 불허했다.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 직후 마주한 외부의 반응 탓이었다.

<에드문트 님, 저라도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버텨 주십시오. 제발…….>

한스 마이어는 에드문트의 변화에 명백한 과민 반응을 보였다. 덕분에 그는 깨달았다.

<제 기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공작님께서 달라지셨다고 느꼈습니다. 잘못되었다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자신이 실수했음을. 유약함을 함부로 드러내어서는 안 되었음을.

<엘리아 아가씨처럼 당신께 버팀목이 되어 드릴 수 없어 죄송할 뿐입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털어놓으셔도 됩니다.>

<무엇을.>

<무엇이든요.>

한스는 제게 조언하길, 뒤늦게 느낀 수많은 감정을 누구에게라도 토해 내라고 했다. 그러나 보좌관의 말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겨우 서류 한 장에 극렬한 불안감을 보이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의 반응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으리라.

누군가는 에드문트가 변했다는 담백한 감상을 내뱉겠지만, 몇몇은 그가 보였던 불안 증세를 떠올리며 ‘라스페 공작이 유약해졌다.’라고 지껄일 게 분명했다.

타인의 앞에서 에드문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어딘가에 쏟아 내지 못할 감정을 껴안고 버텨야만 했으니, 에드문트는 하는 수 없이 그리워해야만 했다.

<에디. 절대로 너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제 모든 걸 포용해 주려던 여자를. 제 유일한 구원을.

창틈으로 비치는 빛줄기에 엘리아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떠올렸다. 맨살에 닿던 따듯한 온기를 곱씹었다.

시간이 흔적을 앗아 간 입술을 거울에 비쳐 보며, 간혹 스스로 입술을 물어 엇비슷한 상처를 남길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사랑이 그리워서, 어쩔 줄 몰라 괴로워했다.

그뿐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변한 그를 괴롭히는 건 연인을 향한 그리움만이 아니었다.

<도련님.>

집사에게 죄책감을 느낀 이후, 에드문트는 꿈을 꾸었다.

엘리아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죽은 사람들이 어둠으로 자아낸 장막을 젖히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죽어 가는 저를 또 외면하시렵니까.>

어떤 날은 죽어 가는 집사가 홀로 무대에 올라 그를 바라보았으며, 또 어떤 날은 올리버 페소와 후작이 찾아와 그의 이름을 부르다 막이 내리기도 했다.

<주인님, 제가 엘리아 님을 살해했습니다. 당신께서, 당신 아내 죽일 사람을 고용하여 마부로 삼은 탓에 말입니다.>

<라스페 공작님, 엘리아를 죽이고 다시 얻게 된 기분이 어떠신지요? 이번에도 황후의 조카인 저를 살해하고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엘리아의 옆자리를 차지하실 생각이십니까.>

<라스페 공작, 자네가 시체로 만든 사람들을 마주하는 건 어떤 기분인가? 나를 죽이고 자네 사촌 누이를 황제로 만들고, 자넨 무얼 얻었는가?>

죽었던 부모가 찾아와 자식인 저를 힐난하기도 했다.

<너는 죽어서도 끔찍하구나. 낳아 기른 우리조차 아들인 너를 포용하지 못했거늘, 한 번 죽어 망가지기까지 한 너를 누가 사랑해 주길 바라느냐.>

<에드문트, 부모의 죽음마저 하찮게 취급했던, 너 스스로 염치없음을 깨우쳐야 할 것이야.>

목소리도, 얼굴도 전부 달라야 마땅했으나 그들은 전부 같은 모습이었다.

피가 돌지 않는 창백한 피부, 그 위에 검붉은 상흔들까지. 꿈속에서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전부 시체였다.

차라리 엘리아를 떠나보내는 꿈이었다면. 그랬다면 비록 괴로움은 더 극악했겠으나 적어도 깨어난 뒤에 여자의 얼굴이라도 곱씹어 그리워할 수 있었을 텐데.

시체의 입이 열려 그를 비난하는 꿈을 꾸고 나면, 온 하루가 죄악감으로 물들 뿐이었다.

에드문트는 더욱 강박적으로 엘리아를 그리워했다. 연인을 만날 수 없는 꿈을 헤매는 대신 억지로 기억을 붙잡고 머리를 처박았다.

<잊으면 안 돼. 내가 노력할 거라는 거, 그리고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도.>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기억은 황홀했다.

때론 죽음으로 색 바랜 아내의 목소리가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당신이 지긋지긋해.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엘리는 호수에서 현재를 위해 과거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도 이제 염치라는 걸 알았다.

제가 편하려고 아내의 기억마저 죽이는 건 염치없는 짓이었다. 그러니 에드문트는 스물여덟 엘리아의 비난마저 달게 받아 마시고자 했다.

‘엘리아. 네가 알면 우습다 여기겠지. 고작 기억일 뿐인데, 외면하는 거로 죽은 이를 다시 살해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니.’

에드문트는 누구를 향해야 좋을지 모를 조소를 홀로 뇌까리며, 스스로의 그리움을 다독였다.

그마저도 어려울 땐 일에 매달렸다. 그의 유일한 구원이 엘리아였다면 하나뿐인 도피처는 크라우제 후작을 상대하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과거의 경험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 * *

“공작님, 동부에 있던 기사들이 급보를 보내왔습니다.”

이전 생에서도,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스물둘의 에드문트는 같은 시기에 같은 보고를 전달받았다. 크라우제 후작이 과거를 그대로 답습해 준 덕분이었다.

“크라우제 후작이 메클렌 자작의 아들을 납치하려…….”

<크라우제 후작이 메클렌 자작의 아들을 납치하여…….>

동부에서 온 전령이 입을 열자, 그와 똑같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에드문트가 죽기 전 스물두 살 적의 기억이었다.

“납치하려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저희 기사들이…….”

<납치하여 신체 일부를 메클렌 자작에게 보냈고…….>

공명으로 시작한 소리가 조금씩 어그러져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죽은 뒤 다시 깨어난 지도 벌써 세 달째.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그는 과거에 겪었던 일이 반복될 때마다 같은 증세를 겪어야 했다.

처음에는 기시감에 불과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 에드문트는 같은 말을 과거에도 들었음을 떠올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올리버 페소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지.’

하나 과거와 현실에 점점 괴리가 생기며, 하나의 소리처럼 울리던 기억과 현실도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갈라졌다.

에드문트는 눈을 감고, 과거와 현실이 뒤엉긴 틈바구니에서 억지로 현실을 끄집어냈다.

“크라우제 후작이 메클렌 자작의 아들을 납치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저희 기사들이 피해 없이 방어했으며, 후작의 하수인 중 일부를 생포하였으나 그쪽의 의도는 아직 파악 중이라고 합니다.”

과거와 달리 크라우제 후작의 계략이 실패했다는 현실이 엉킨 실타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메클렌 자작은 아들의 안전을 확인하겠다고 동부로 출발했습니다. 그쪽에서도 크라우제 후작이 인질극을 벌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권을 들이밀며 설득하려 했다더군요.”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인질극을 벌여서 지지 서약을 받아 낼 생각이었을 거다.”

“후작이 메클렌 자작에게 강제로 3황자 지지 서약을 받아 낼 계획이었을 거라 짐작하시는 거군요. 한번 서약하면 3황자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철회가 불가능하니까요.”

치졸한 수법으로 끌어들여 봤자 그들이 후작에게 충성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라스페가에 빼앗길 일 없는 소극적 우군을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 에드문트의 지난 생에서, 후작은 같은 방식으로 귀족들에게 서약을 받아 내 수적 우위를 차지했다.

에드문트는 두 번째 생에서까지 후작에게 밀릴 생각은 없었다. 그는 기사들에게 메클렌 자작의 아들을 감시하도록 했고, 덕분에 동부 귀족들을 협박하려던 후작의 야욕을 저지할 수 있었다.

“메클렌 자작이 동부에 도착하면 아들을 보호해 준 대가로 우리 쪽 서약을 받아 내. 다른 가문에도 공작가에서 메클렌을 보호해 주었음을 내세워 벨레노아 백작을 차기 황제로 지지한다는 서약을 받아 내도록.”

“크라우제 후작의 만행을 고발하여 역이용하시자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메클렌 자작가에 심어 두었던 기사들은 이제 어쩔까요? 동부 귀족들에게 서약을 받아 내는 일에 합류시킬까요?”

“아니, 메클렌 자작을 호위할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후작이 북부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저지하게 해. 그사이 중립 선언한 북부 귀족들을 상대하겠다.”

에드문트는 후작이 동부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동안 북부에서 중립파 귀족들을 상대로 회유 작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한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빈집 털이…….”

한스의 농담을 들은 사람들이 숨죽여 웃었다. 공작의 명료한 판단력을 확인한 한스도 모처럼 마음 놓고 웃음 지었다.

‘갑자기 메클렌 자작의 아들을 감시하라고 했을 땐, 혹시 또 올리버 페소처럼 밑도 끝도 없이 죽이려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요 며칠 동안 에드문트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느라 짊어지고 있던 긴장감도 조금 덜 수 있었다.

“주인님, 첫 목표는 뷜로 백작가가 어떠십니까? 후작의 공세에도 아직 지지 서약을 하지 않고 버티는 거로 유명하잖습니까.”

“뷜로 백작의 딸이 아직 북부 학술원에 있던가?”

“예, 지난번 로앙가 사건 때 조사한 바로는 뷜로 백작의 딸뿐만 아니라 오폴레 자작의 딸 역시 재학 중이었습니다. 두 가문 모두 크라우제 후작에게 비협조적이면서도 아직 저희의 협상에 응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둘 다 데리고 와.”

“예, 그럼 일단 실종 사건으로 조작한 뒤에…….”

“아니, 공작가에서 동부 사건을 목도한 뒤 중립파 자제들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껴 두 가문의 여식을 보호했노라 연락 넣어.”

“보호…… 말입니까? 인질이 아니라, 보호라고 전하란 말씀입니까?”

에드문트의 지시에 가신들이 난색을 보였다. 다들 에드문트가 후작의 계획을 역이용해 북부 귀족들을 납치하자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보호라니. 그의 온건한 명령은 낯설기까지 했다.

“하면 뷜로 백작가 측과 인질 협상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두 가문 모두 중립파로 10년 넘게 버텨 온 만큼, 자식들만 돌려 달라고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도 있는데요.”

에드문트조차 제 명령을 낯설어했다. 원래대로였다면 다른 결정을 내렸으리라. 더 합리적이고, 덜 감정적인 명령 말이다.

그러나 사랑이 남자를 죽였던 것처럼, 겨우 싹튼 감정이 그의 이성을 짓밟고 세를 불렸다. 그리하여 에드문트는 감정이 점철된,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명목으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 보려 했다.

“협상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시간 끌지 말고 넘겨. 동부 사례를 명분으로 어쨌거나 보호였음을 표명하고.”

가신들은 에드문트가 다른 뜻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나 대강 납득하려 해 봐야 어색하게 방황하던 당혹감마저 지울 순 없었다.

잠시 가신들의 대답이 지연되었고, 에드문트는 그 시간의 틈새에 다시 제 감정을 쏟았다.

“다른 의견 있는가.”

“예, 예에?”

“없으면 해산하지. 메클렌가에는 랄프 경과 이졸다 경을 대기시켜.”

“……명 받들겠습니다.”

어색한 대답을 끝으로 가신들이 해산했다. 등 돌려 공작에게서 멀어지는 가신들 틈으로 한 쌍의 눈동자가 유일하게 에드문트를 향했다.

자신이 제정신인지 확인하는 한스의 시선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에드문트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지 않았다.

새파란 눈을 관찰하던 보좌관이 확인을 끝내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조아릴 때까지. 괜찮아 보인다고 안도하며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

그렇게, 무사히 속였음을 확인한 뒤에도 에드문트는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닫힌 문 너머로 수군거림이 들렸다.

“공작님께서 좀 달라지신 것 같지 않습니까?”

미쳐 죽은 조부를 향하던 과거의 말인가. 아니면 그의 비극을 답습하는 에드문트를 향한 말인가.

확인이 두려운 말소리에 등을 돌렸다. 감정에 붙잡힌 발목을 움직여 소파에 앉으니 우그러진 가죽이 에드문트의 몸을 받쳤다.

‘피곤하군.’

잠들지 못하는 남자가 죽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발목께에서 찰랑대던 감정이 점점 그를 집어삼켰다.

<에디. 잊으면 안 돼. 내가 너를…… 한다는…….>

엘리아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멎었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가을처럼 타오르던 여자의 애정이 떠나며 겨울 같은 죽음이 찾아왔다.

하는 수 없이 남은 소리에 기대었다. 시린 겨울과 무척 잘 어울리는, 죽음이 울리던 소리였다.

<에드문트. 감정을 느끼지 못함은 곧 축복이니, 누리거라. 감히 가진 척 흉내 내지도 말거라. 네가 호기심에 무심코 한 발 딛거든 발목을 붙잡아 너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이 감정이니라.>

조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가 요란했다. 마치 저주처럼 새겨져 선명하게 들렸다.

<네 부모를 보아라. 그리고 늙고 병든 나를 기억하거라. 감정의 말로를 네 눈으로 수백 번 곱씹고 또 곱씹거라. 그 깨우침이 너를 살릴 것이다. 에드문트.>

죽어 가는 사람치고는 제법 또렷하게 뇌까린 유언과 함께, 바닥에 약병 하나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곁에 있던 조부의 호위 기사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병을 들어 올렸다.

아이의 키와 엇비슷하게 올라온 병에서는 달큼한 냄새가 났다. 언젠가 식탁에서 맡아 본 적 있던 독 향이었다.

잠시 빈 병에 한눈을 팔자, 죽음을 자초한 노인이 다시 아이를 불러냈다.

<에드문트, 미안하구나. 남기고 가서 미안하다.>

제 죽음을 지켜봐 달라고 외쳐 댔다. 미쳐 버려서는, 제 손자까지 미치게 하고 싶었는지.

<그러나 내가 자초한 죽음마저 비극이라 여기지 말거라. 나는 달아나길 바라니……. 부디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기를 기도해다오.>

<예, 조부님.>

<……아, 끝이 오는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우습구나. 겨우 독 한 모금에 안식이 찾아올 줄 알았다면. 진즉 알았다면 발버둥 치지 않을 것을…….>

기억 속 조부의 유언이 끝났다.

그의 손을 잡고 떠나던 죽음이 퇴장하며 인사를 남겼다.

* * *

남겨진 아이야.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날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기를.

지독한 고통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채 나를, 죽음으로 반겨 주기를.

* * *

수도를 떠나온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공작가는 크라우제 후작을 동부에 묶어 둔 채 북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내 딸아이를 보호하고자 했다는 공작님의 변명을 믿어 드리는 건 절대 아니네. 단지 갈림길에 접어들었으니, 뷜로 백작가의 수장으로서 최악 대신 차악을 택하고자 할 뿐이지.>

<백작께서 차악이라 여기신 길 끝에, 라스페 공작님이 계실 겁니다. 그분이 먼저 닦아 둔 영광된 길 함께 걸으시면 됩니다.>

겨우 사용인 몇 명 죽고 끝나는 독살이나 경제적 보복이 아닌 납치라는 가시적인 협박은 제국 귀족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부 메클렌 자작이 직접 후작의 악행을 부르짖고 다녀 준 것도 당연히 공포심 조성에 한몫해 주었다.

그리하여 며칠 만에 뷜로 백작가, 오폴레 자작가…… 북부에서 중립을 지키던 가문들이 하나씩 공작의 손에 넘어왔다.

“귀족 나리들, 참으로 심약하기도 하시지.”

늘 그보다 더 악랄한 보복을 주고받아 온 공작가의 사람들은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다들 후작의 납치 미수에 겁먹어 공작가에 들러붙었으니 하등 나쁠 게 없었다.

“수도까지 소문이 퍼져 후작이 망신당하는 것도 순식간이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한스 경.”

“뭐 황실과 후작가에서 기를 쓰고 입단속을 시키는 모양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후작의 기세가 꺾이는 날이 머지않겠지요. 한데,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은 뭡니까?”

“아, 이건 남부 공국에서 보내온 것이고……. 여기 이건 벨젠 경께서 다른 서류들과 함께 챙겨 주신 겁니다. 한스 경께 전해 달라 하시던데요.”

열흘 동안 에드문트와 함께 북부 영지를 세 군데나 돌고 막 도착한 참이었는데, 어젯밤 먼저 북부 은신처에 도착했다던 기사가 한스를 보자마자 봉투 여러 개를 내밀었다.

그중 벨젠 경이 보낸 커다란 봉투를 본 한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분명 공작 못지않게 일에 미친 기사께서 일거리를 가득 보내 준 것이리라.

“이리 주십시오. 벤자민 경께서도 남부 공국에 수도까지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오늘은 일정 없으니 내일 오전까지는 쉬시면 되겠습니다.”

“예, 그러겠습니다. 한스 경께서도 좋은 저녁 보내십시오.”

어차피 서로 쉬라는 말은 인사치레였을 뿐, 막 수도에서 올라온 기사처럼 한스 역시 지친 몸을 이끌고 서류를 들춰 보러 가야 했다.

‘제발, 가뜩이나 죽겠는데. 또 머리 터지게 할 고민거리 들어 있진 않아야 할 텐데.’

다행스럽게도, 벨젠 경이 보내온 봉투에 들은 건 한스를 괴롭힐 일거리가 아니었다.

밀랍으로 꼼꼼히 봉인된 봉투를 열자마자 쏟아진 건…….

색색의 편지 봉투였다. 연한 빛의 편지들이 한스의 책상 위에 꽃을 가득 피워 냈다.

“설마, 이게 다 편지라고?”

한스는 그만 조용한 집무실에서 육성으로 당혹감을 내뱉었다. 서류 더미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가신들이 곧장 그의 말소리에 관심을 보였다.

“한스 경, 무슨 일 있습니까? 수상한 게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아닐세. 수상한 게 아니고 생각지 못한 게 들어 있어서. 크흠.”

그는 헛기침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려 했지만, 봉투 하나하나마다 적힌 엘리아 아가씨의 서명을 보자니 금방 다시 웃음이 나왔다.

‘이게 다 몇 통이야? 하나, 둘……. 스물둘, 스물셋. 스물셋이잖아? 아니, 1주일도 전에 보냈다지 않았나? 무슨 편지를, 하루에 하나꼴로 쓰셨다고?’

한스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편지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무려 스물세 통이나 되는 편지 사이에는 쪽지도 두 장 끼워져 있었다.

하나는 봉투에 담은 편지가 스물세 통이며, 모월 모일에 밀봉하여 보내었다는 벨젠 경의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엘리아의 필체가 적혀 있었다.

<한스 경에게. 편지 봉투 안에는 종이 외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으니, 혹시 전달 과정에서 들어간 이물질이 발견되면 편지째 폐기 부탁해요. 그리고 약속 잊은 거 아니죠? 나 대신 에드문트를 잘 챙겨 주길 바라요.>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는 이름만 한스 마이어라 적혀 있었을 뿐, 오롯이 에드문트를 향한 마음이 가득했다.

공작의 충실한 보좌관은 스물세 통의 편지와 함께 제 이름이 적힌 쪽지까지 봉투 안에 넣었다.

제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으므로.

할 수만 있다면, 잠시 편지와 함께 우수수 흩어졌을 아가씨의 마음까지 도로 담아 공작에게 전하고 싶었다.

남자를 위로할 유일한 사람의 감정이지 않은가.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 써서 보내다니, 참 대단한 사랑이지. 이런 건 가진 돈을 전부 다 쏟아도 가질 수 없는 귀한 건데. 누군가는 평생 가져 보지도 못하고 사는 게 사랑인데. 공작께서는 알고 있으려나. 얼마나 귀한 걸 받았는지…….’

한스는 엘리아의 편지를 보며 에드문트의 불안정한 상태를 떠올렸다.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그의 조부 이야기를 들먹일 수는 없었으니 지켜만 보는 중이었다.

‘아니, 당신 조부가 꼭 당신처럼 미쳐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더라. 그러니 당신도 조심해라. 그딴 말을 어떻게 하냐고.’

그나마 근래에는 일이 바쁜 탓인지 상황이 더 악화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물론 에드문트가 괜찮은 척을 해 대는 걸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그가 작정하고 제 속을 숨기려 든다면 한스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눈으로만 괜찮은지 확인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온 편지는 에드문트도 모자라 한스까지 구원하려 들었다.

‘엘리아 아가씨께서 주신 편지 보시거든 많이 좋아지시겠지. 암. 그렇고말고. 매번 죽어 버릴 것처럼 굴다가도 아가씨 흔적 보면 나아지곤 하셨잖아.’

한스는 규정대로 편지 몇 통을 무작위로 꺼내 안을 확인하고, 독 바른 암기 따위가 들어 있지 않는지 살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스, 가을꽃을 취급하는 화훼상을 알아보도록.>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봄날처럼. 그때처럼 아마 상대는 생각도 못 했을 선물을 품에 안고서 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꺼운 융단을 눌러 밟는 발걸음에는 금세 들뜬 기색이 드러났다.

편지가 도착했다고, 그렇게 말씀드리진 않으리라. 일단 봉투 열어 보시라 강권한 다음, 조금 전 제가 겪은 것처럼 깜짝 놀라게 해 드리리라.

메마른 흙처럼 새카만 책상에 스물세 송이의 꽃이 피는 모습에 그는 어떻게 반응하려나.

수천 송이의 꽃 앞에서 당황하던 아가씨처럼, 놀라시려나. 아니면 마치 연인을 앞에 둔 남자처럼 희미한 미소를 보이시려나.

한스는 에드문트가 엘리아의 선물을 마주하는 순간을 빠짐없이 눈에 담고자 결심했다. 글로 옮겨 적어서, 새 봉투에 담아 아가씨께 꼭 보내 드리리라.

“흠흠. 저는 잠시 공작님께 보고드릴 게 있어서 다녀오겠습니다.”

집무실을 함께 나눠 쓰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운다고 알린 뒤 문을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참 좋은 날이라 생각했는데.

‘……뭐지? 이렇게 소란할 리가 없는데.’

복도로 나오던 한스가 기대한 건 적막이 감도는 풍경이었다. 다들 북부에서 강행군을 마치고 돌아온 지 겨우 몇 시간이니 조용할 게 당연했다.

하나 그를 맞은 건 불안정한 소음이었다.

기사들의 수군거림, 열어 둔 창 너머로 들리는 말발굽 소리.

마치 불안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연주되는 음악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수도에서 급히 찾아온 사람이 있어서요.”

“벤자민 경 말입니까? 그는 어제 도착했다고 들었는데요. 공작께 따로 보고 올릴 만한 이야기는 없기에 서류는 제가 대신 받았고요.”

“아니요. 벤자민 경이 아니라 수도 저택에서 말입니다. 시릴 보좌관이 혼자 이곳까지 찾아왔지 뭡니까.”

“시릴이 말입니까? 지금 어디 있습니까?”

“조금 전 도착해서 곧장 주인님을 뵈러 갔습니다. 상태가 말이 아니라 한숨 돌리고 내일 아침 보고 올리라고 만류했는데, 아주 급한 일이라면서 뛰어 올라가더군요. 대체 수도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

“한스 경? 왜 그러십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문을 나서던 가벼운 발걸음을, 두려움이 중첩된 울림으로 변주하며 2층으로 내달렸다.

수도에서, 소식이 왔다니.

<한스. 수도에, 집사의 상태가 달라지거든 즉시 보고하도록 전해.>

한스는 손에 잡은 봉투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힘껏 잡았다.

남자를 구원할 여자의 사랑이었는데. 그만 제가 세게 구겨 쥐고 말았다.

* * *

늦은 시간 에드문트를 찾아온 보좌관 시릴의 꼴은 처참했다. 수도에서부터 제대로 쉬지도 않고 말을 바꿔 가며 달려온 탓이었다.

“공작님.”

북부의 바람을 맞아 저리 일그러졌던가. 얼굴 역시 만신창이가 된 차림과 다르지 않았다. 입을 열기도 전에 시릴은 온몸으로 제가 나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걸 드러낸 셈이었다.

만약 소식을 가져온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에드문트의 불안한 정신 상태에 대해 잘 아는 한스였다면 괜찮았을까.

하다못해 경험 많은 기사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소식을 전했더라면, 에드문트의 반응이 달랐을까.

어느 쪽이 더 에드문트에게 나은 선택지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수도의 저택에서 왔습니다. 전에 명하신 대로……. 명을, 따르기 위해 왔습니다.”

에드문트는 아무래도 좋을 보좌관의 말소리는 무시했다. 떨리는 시릴의 음성이, 어떤 말을 전할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이미 한 차례 겪어 본 일이 아니던가.

<공작님, 수도의 저택에서 왔습니다.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비록 시기도, 전하는 사람도 달랐으나 에드문트는 시릴이 전할 소식을 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기억이 현실과 중첩되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과거에 휩쓸려서는 안 되었다. 에드문트는 스스로를 애써 다잡고, 오직 시릴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참담한 심경이 정직하게 드러나 있는 얼굴은 자꾸만 남자의 감정을 부추기려 들었다.

‘장례식에서 보았던 엘리아의 얼굴이 저것과 같았지.’

그때 눈물을 아끼지 않던 어린아이처럼 보좌관의 얼굴도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남자가 평범한 사람인 척하고 싶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그림 한 점 같았다.

“집사가 많이 위독합니다. 의원의 말로는 주말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거울이 보고 싶어졌다. 분명 그의 보좌관이 근처에 거울을 준비해 두었겠지만, 에드문트가 원하는 건 저택에 있을 거울이었다.

돌아가거든 확인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명령에 따라 집사가 준비해 둔 수십 장의 거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공작님……. 에드문트 님, 괜찮으십니까?”

“…….”

“다들, 기사들 제외하면 모두 나가십시오. 시릴, 자네도 당장 나가게. 어서!”

뒤늦게 집무실로 달려온 한스가 다른 가신들을 물러나게 했다. 에드문트의 비정상적인 반응을 우려한 행동이었으나, 사실 그는 괜찮았다.

검을 뽑아 들어 제 살을 가르고 싶은 것도, 통증에 기대어 꿈과 현실을 구분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거울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제 표정이 어쩌면, 눈앞에 있던 젊은 보좌관을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기대감마저 느꼈다.

<당신은 불길이야.>

엘리아.

네 사랑이 나를 변화시킨 건지, 아니면 죽음이 나를 바꾸어 낸 건지 모르겠어.

하나 기대하기를, 괴물 같게만 느껴졌을 나의 얼굴도 조금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을까.

나는 비겁하게도 이 고통 속에서 구원을 찾고자 하니……. 모든 죽음과 죄책감이 훑고 지나간 내 시체만큼은 부디 끔찍하지 않기를.

조금이라도 너를 닮아 아름답기를.

* * *

수도에 있는 저택에 도착한 건 짙은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등불을 든 공작가의 기사들이 에드문트와 한스를 맞이했다.

“집사는 별관에 있습니다. 아직, 그러니까…… 늦지 않으셨습니다.”

시릴이 공작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 출발한 게 벌써 1주일 전이었다. 혹시 늦었을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던 한스가 기사의 대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적막한 별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집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 탓이었다.

“1주일 전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의원이 홀로 간병해 왔다고 들었는데.”

“예, 지금까지도 계속 의원이 홀로 간병해 왔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의원이 직접 보살폈으나 나빠지기만 했다니. 부디 나아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는 별개로 에드문트와 한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두 사람 서로 얼굴 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천운이지.’

다만 한스가 이상하게 여긴 건, 바로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수도에서 ‘집사가 나아지고 있다.’라고 소식을 전해 왔던 점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빠질 줄이야. 차라리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에드문트는 집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즉시 기사들을 소집하여 수도로 내려왔다. 당장 북부에서 한 가문이라도 더 만나야 할 상황이었으나, 남자에게 더 이상 크라우제 후작을 상대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상황이 급한데 굳이 내려가신다니 의외이긴 하지만, 이해는 됩니다. 공작께 집사는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 아닙니까.>

가신들은 에드문트의 결정을 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공작이 집사의 임종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문해 왔다.

걱정하는 건, 수십 명 중에 오직 한스 마이어뿐이었다.

‘그래. 겉으로만 봐서는 달라진 건 없어 보이니 다들 그렇게 생각할 법하지. 그런데 저 냉철한 모습이 속마음이랑은 다를까 봐, 나는 그게 걱정된다고.’

곧 닥쳐올 죽음에 에드문트의 안위까지 염려하느라 한스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하필 도착한 시간이 밤인지라, 사방이 그의 속을 비춘 것처럼 새까만 어둠이었다.

한스에게 등을 보인 채 앞서 걸어 나가는 에드문트의 속도 마찬가지는 아닐까.

“집사가 지내는 별관은 본관을 통과해서 가셔야 합니다.”

새카만 밤하늘 아래에, 공작가의 사람들이 긴 선을 그려 냈다. 에드문트와 한스, 그리고 두 사람을 에워싼 기사들까지. 모두 조급하지도,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은 속도로 별관으로 향했다.

“…….”

가끔, 에드문트는 복도에 걸린 장식용 거울을 바라보느라 걸음을 지체하기도 했다.

저택 곳곳에 거울을 손수 걸었을 집사를 떠올리는 건지, 아니면 그저 용도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살피려는 의도인지.

그 의도가 궁금하여 뒤따르던 한스가 공작의 시선이 닿았던 거울을 훔쳐보았다. 먼저 비친 이의 흔적이 남았는가 싶었는데.

그러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금을 두른 거울에 비치는 건 한스의 굳은 얼굴뿐이었다.

“한스 경? 무슨 일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울을 보느라 잠시 멈추었던 한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기사들은 에드문트와 한스가 자꾸 거울에 시선을 주는 게 이상했는지, 뒤따라오면서 너도나도 거울을 흘끔거렸다.

한 명씩, 죽어 가는 사람을 향해 걸었다. 지나가면 사라질 흔적을 거울에 남기면서.

“집사가 머무는 곳은 2층입니다.”

앞서 걷던 기사의 안내대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자, 경계를 서던 두 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조금 전 의원이 사용인들을 불러 작별 인사를 나누게 했습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병사들이 에드문트에게 보고를 올린 뒤, 지키고 있던 나무 문을 안쪽으로 밀어 열었다.

세월이 넉넉히 묻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용인들이 지내는 별관에 들어선 것도, 집사가 50여 년을 지내 온 방을 찾은 것도 에드문트에게는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집사. 주인님께서 오셨네. 일어날 수 있겠는가?”

늘 제 곁을 지키던 집사가 침대에 누운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에드문트는 집사가 누워 있는 침대에 다가가는 대신 문 앞에 멈추어 섰다. 한스와 기사 몇 명이 먼저 집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집사님. 예, 접니다. 한스 보좌관요. 여기 렌 경과 함께 공작님 모셔 왔습니다.”

“…….”

“그런 말 마십시오. 금방 일어나야지요. 사람들이 얼마나 집사님 기다리는 줄 아십니까?”

“…….”

“집사님, 다른 건 걱정 마시고 몸 추스르는 것만 신경 쓰십시오. 엘리아 님 말입니까? 그럼요. 로앙가의 분들도 잘 지내고 계십니다.”

방이 좁은지라 가까이 가지 않아도 침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사람들의 움직임에 바닥에 두었던 주전자가 밀려나는 소리까지 에드문트에게 쉬이 닿아 왔다.

오직, 집사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마치 빈 침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드문트의 감상은 금세 변하였다.

<에드문트, 이리 와 보거라.>

아주 어렸을 때. 죽어 가던 조부가 저를 불러내던 때의 기억과 중첩되었다. 만일 이전의 생에서 에드문트가 죽어 가던 집사를 배웅했더라면 비슷한 기억이 겹쳐 더욱 큰 혼란을 주었겠으나.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으니, 만약 내가 가기 전에 사망하거든 먼저 장례를 치르게 하도록.>

<공작님, 그렇지만 마님께서도…….>

<장례는 벨젠 경이 주관토록 하고, 엘리아에게는 최소한으로만 알려 신경 쓰지 않도록 해.>

이전 생에서, 에드문트는 북부에서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집사를 홀로 죽게 버려두었다.

<마님께는 집사가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고했습니다. 벨젠 경이 장례를 맡으려 했는데 워낙 강경하게 나오셔서……. 마님께서, 집사를 위해 아주 아름다운 장례식을 치러 주셨습니다.>

<분명 아내가 신경 쓰는 일 없도록 하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다시는 저택에 지시 전함에 있어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부턴 일 처리를 제대로 하도록. 로앙가에는 제대로 연락을 넣었는가?>

<예, 말씀하신 대로 로앙 백작께서 공작가에 방문하시어 마님과 함께 집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도록 조처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혼자 견뎌야 했을, 엘리아마저도 로앙 백작에게 맡겨 두곤 제 의무를 다했다고 여겼다. 당시의 에드문트는 그런 제 결정에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났다는 말 한마디로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에드문트 님, 저희는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작별 인사가 아닌 척 마지막을 나누던 이들이 한 명씩 밖으로 사라졌다. 이내 그의 앞에 빈자리가 드러났다.

에드문트가 그 빈 곳을 채워야만 했다.

“의원은 나가지 말고 근처에 대기하게.”

그의 명령에 의원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스 역시 공작에게 허락을 구한 뒤 의원의 옆에 남았다.

문이 닫히고, 에드문트가 마침내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집사.”

“…….”

“클라우스.”

어릴 때 이후로 입에 올린 적 없었던 집사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죽음이 가까워진 노인이 입을 살짝 달싹여 응답했다.

“……도련님.”

에드문트가 가주의 짐을 떠안은 지 벌써 10년째. 열두 살의 소년을 주인님이라 부르는 게 어색했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그를 어린 도련님으로 삼고 싶었던 건지.

집사는 이전의 생에서도 그를 종종 도련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다가 정정하곤 했다.

<도련님, 에드문트 님.>

열여덟의 연인을 애칭으로 부르고, 구태여 제 죽은 아내를 기리듯 엘리아라는 이름 한 번 더 부르던 에드문트처럼.

마치 한 사람을 둘로 나누듯. 그러나 결국 두 이름을 가진, 한 사람임을 실감하듯.

“에드문트 님.”

집사의 눈에는 희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분명 독이 시각을 잡아먹은 흔적일 테니, 제대로 앞이 보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집사는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희미하게 미소 지어 에드문트를 반겼다.

“지금 새벽이라고…… 들었습니다.”

남자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에드문트는 대꾸 없이 집사의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누군가 전했을 거짓말을, 까만 밤을 해가 어스름한 새벽으로 속인 선의의 배려를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이전에, 아가씨께서 도련님 어린 시절을 물어보셔서. 그때 오랜만에 도련님을 처음 뵈었던 날을 떠올렸습니다. 아마 지금쯤이 아니었을까요.”

“그래. 내가 태어난 것도 지금처럼 새벽이라고 했으니까.”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온 이들에게, 집사는 ‘혹시 지금 새벽이 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으리라.

마치 스물두 해 전에 태어난 도련님의 푸른 눈동자를 만났을 때처럼, 그의 마지막 순간이 새벽이기를 바랐겠지. 하면 제 자식처럼 애틋하던 주인께서 돌아와 주실까 싶어서.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창고에 에른스트 님의 초상화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자꾸 눈이 감기는 바람에 보지 못했지만…… 기억을 떠올리자면, 두 분께서 참 많이 닮으셨습니다.”

집사 말대로 그의 머리맡에는 초상화 한 점이 있었다.

에드문트의 기억에서조차 흐리게 남은 중년의 남자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게 도련님을 곁에서 잘 보필하라 하셔서, 꼭 곁에서 오래 지켜 드리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남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죽음을 고하였다. 그게 마치 죄인 양. 치부인 양.

살려 달라는 비명, 복수하겠다는 저주 짧게 끊기다 사라져 버리는 목소리.

에드문트가 보아 온 죽음은 늘 그런 식이었는데.

“도련님께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아끼는 사람들과 늘 행복하셨으면…… 두 분이 서로에게…… 진실된 사랑을 하시면서…….”

집사가 이별을 고하며 행복을 빌어 주었다. 억울해 마땅해야 할 자신의 이른 죽음은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혹여 누가 죄책감 느낄까 봐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은 표현하지도 못한 채.

그저 홀로 남겨질 제 도련님께서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낯선 죽음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클라우스. 나는, 내가…….”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남자의 참회는 들어 주지도 않고,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먼저 떠나갔다.

아니, 죽음이 그를 데려갔던가. 에드문트에게 다시 만나자 하더니, 제 죽음도 모자라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앗아 가려는가.

뒤늦게 깨친 마음 하나 전하지도 못하도록 끌고 가려는가.

거멓게 죽은 집사의 손을 절박하게 붙들었다. 그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나 제가 낸 상처에, 죄의 흔적에서 새카만 피고름이 흘러 남자를 덮쳐 올 뿐이었다.

에드문트가 그 위로 눈물 한 방울을 떨구었다.

집사의 손에서 흐른 새카만 피고름이 눈물과 뒤엉켜 침구 위로 떨어졌다.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남자가, 하직한 세상에 두고 간 통증이었다.

이제 남겨진 에드문트가 전부 삼켜 내야 할 고통이었다.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자네를…….”

어리석게도 에드문트는 이미 숨 끊어진 남자가 들어 주지도 않을 참회를 계속 이어 갔다.

“내가, 자네를 또다시 죽이고 말았어.”

재차 떨어지는 눈물이 그를 깨워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대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 인생에서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었지요.>

그때 제가 했던 생각들. 때늦은 다짐들을 떠올리며 아파했다.

조부도, 부모도 없던 자신을 유일하게 사람 취급하며 곁을 지켜 준 이였는데. 뒤늦게야 깨달은 애정을 이제 누구에게 갚아야 하나. 나는 어떻게 버텨야 하나.

에드문트는 고통을 털어 버리고 떠난 집사 대신 남은 저를 염려하였다.

엘리아를 떠나보냈을 때처럼, 남겨진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어찌할 바 몰라 오직 제 생각만 했다. 이기적이게도.

“클라우스.”

식어 갈 열기가 잠시 머물러 있는 시신을 향해, 다시 이름을 불러 보았다. 부디 다시 깨어나길 바라며. 눈 떠 줄 리 없는 걸 알면서도 저를 위해 눈 떠 주기를 바랐으니까.

눈은 떠지지 않았다. 죽음은 완연하였고, 남자는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

이제 에드문트도 죽음을 배웅할 때 눈물 흘리는 게 예의인 줄 알았으니, 눈물을 삼켜 속으로 밀어 넣기를 포기했다. 마음 안에 고여 제 속까지 썩게 할까 봐 밖으로 쉴 새 없이 밀어냈다.

어찌 우는가. 염치를 알고서도, 어떻게 죄를 짓고도 저 가슴 아프다고 눈물 보이려 드는가.

스스로를 치죄해 본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잃고 만 자는 부끄러움도 모르곤 스스로를 계속 슬픔으로 적실 뿐이었다.

* * *

“음독 후 두 번째로 깨어났을 때 집사가 제게 부탁해 왔습니다. 엘리아 님과 공작님께서 염려하시지 않도록, 꼭 괜찮다 말씀드려 달라고요.”

의원은 집사의 사망을 확인한 후 짧게 고해 왔다. 어째서 집사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도 그의 상태를 속여 왔는지를.

“벌을 각오하고 거짓을 고했습니다. 산 자의 명보다 죽어 가는 자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에드문트의 처분을 기다렸다. 한스는 그런 의원을 보며 독해 빠진 자라고 욕을 퍼붓고 싶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게 하면, 남은 에드문트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물론 의원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설마 그 독하던 사람이 집사의 죽음에 무너지겠느냐,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을 남자 대신 제 친우의 죽음이나 보듬으면 되리라. 그리 여겼을 테지.

“……죄송합니다. 공작님.”

설마 집사의 죽음에 눈물 흘릴 줄은 몰랐을 테니, 빈 껍데기로 남은 시신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 되고 말았다.

“집사의 시신은 지하 석실에 안치하도록.”

“공작님, 석실은 대대로 라스페가 일원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사망했다는 소식은 외부 유출을 금한다. 기밀로 지키도록. 명령에 불복한 의원은 탑에 유폐시키고, 처분은 나중에 정하겠다.”

에드문트는 한스에게 더는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고 나가 버렸다. 두 사람은 남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만 보아야 했다.

“신이시여. 제가 대체 무슨 짓을…….”

남겨진 의원이 나지막이 한탄했다. 저들에게 비극만 안겨 준 신을 부르짖었다.

한스는 신을 찾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 대신 남자의 연인을 떠올렸다.

‘엘리아 님. 죄송합니다. 저는 결국 쓸모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어 흐른 눈물을 닦지도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간 에드문트를 떠올렸다.

눈물을 떨구고, 그 위에 발을 디뎌 걷던 남자가 사라져 버리던 광경을 되새김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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