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시작
5월. 북부에도 봄이 농익어 가는 시간이 찾아왔다.
에드문트는 로앙의 저택을 떠나 북부 외곽 지역에 마련한 은신처에 도착했다. 스물둘의 남자에겐 처음이었으나, 서른둘. 그는 분명 서른둘이었다.
외관만 낡아 빠진 북부의 목조 주택도, 라스페 공작을 위해 갖춰 둔 값비싼 가구까지. 낯설어야 할 광경이 그에겐 너무나 익숙했다.
죽기 전에는 수도의 저택보다 더 오래 머물던 곳이었으니까.
“지내시는 데 불편함 없도록 수도 저택과 수준을 맞추어 두었습니다. 침실을 비롯하여 중요한 공간은 2층에 마련해 두었고…….”
에드문트는 불필요한 내부 안내를 받던 중 침실에 있는 협탁 앞에 멈추어 섰다. 수도 저택 집무실에 있는 협탁과 같은 가구였다.
작은 약병, 흰 장갑 한 쌍. 그리고 주름진 남자의 손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집사가 관여했나 보군.”
“예, 이곳의 가구는 전부 집사가 하나씩 골라 보내온 겁니다.”
예상대로 공작에게 익숙한 물품을 골라 준비시킨 건 그의 집사였다. 에드문트는 수하의 대답을 듣고는 마지막으로 들었던 집사의 상태를 떠올렸다.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고, 혹시 몰라 다른 이들의 출입은 엄금한 채 의원이 직접 간병 중이라고 합니다.>
남부에서 바로 북부로 올라와야 하는 바쁜 일정 탓에 에드문트는 수도 저택에 들를 수 없었다. 대신 수하들의 짤막한 보고로만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 때문인지 에드문트는 좀처럼 집사가 나아질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엘리아를 만나는 대신, 저택에 가서 집사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던 걸까?
‘어차피 가 봐야 치료 때문에 대면하지도 못했을 테니, 죽음 앞에서 때늦은 눈물 흘리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이었을 텐데.’
에드문트는 장갑 낀 손으로 협탁을 짚었다. 같은 높이, 같은 재질의 가구 위에 새하얀 손이 닿았다.
존재하지 않는, 실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 집사의 흔적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무척이나 낯선 행위였다.
낯설어서 한참이나 손을 떼지 못한 채 머물렀다. 마치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낯설어하며 계속 곱씹는 것처럼.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이 낯선 감정은 무엇이던가. 손을 뗄 수 없어 한참을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이던가.
<도련님.>
그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수도에 당도하고도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지나쳐 온 집사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그가…… 죽을까 봐. 집사의 죽음이 두려운 거겠지.’
체념 같은 긍정이 이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드문트는 오로지 엘리아의 죽음 하나에만 슬퍼하였으니, 집사의 죽음은 단편적인 기억 중 하나에 불과했거늘.
두렵다니. 타인의 죽음까지 일일이 염려하다니.
그는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나약해졌음을 실감했다. 당장이라도 깨질 듯 금이 간 유리창이 그의 처지였다.
다가올 태풍을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함을 알지만, 이제 그는 태풍이 어떻게 저를 망가뜨릴지 알기에 두려움을 쉽사리 떨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에드문트. 많은 치들이 네 무감함을 멸시하고 두려워하겠으나, 감정을 모르는 건 축복이다. 내가 죽은 뒤에 네가 스스로에게라도 기대어 살 수 있게 해 줄 테니.>
에드문트는 감정에 무지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조부가 죽었을 때, 가신들이 배신했을 때, 크라우제 후작과 황제가 그의 부모를 살해했음을 깨달았을 때…….
지금과는 비할 데 없이 미약한 감정을 느껴 왔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깨달았다.
‘조부의 말대로, 나는 여태 축복받은 삶을 걸어왔던 거겠지.’
이제 무지함의 축복에도 망각을 고해야 했다. 불행하게도.
외딴 섬처럼 홀로 오롯이 존재했던 그를 향해, 감정은 파도처럼 몰려와 그를 헤집고 상처 남기려 들었다. 남들보다 높고 견고하던 벽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무너졌을까. 혹은 스스로 낮추었던가.
연인 앞에서 평범한 사람인 척 행세하느라 스스로 높게 쌓아 둔 벽을 조금씩 허물었던가.
낮아진 벽 위로 엘리아의 죽음, 상실, 애정, 후회……. 그런 숱한 시련들이 높이 파도쳐 넘어온 거라면.
이제 에드문트도 여태껏 엘리아가 홀로 겪었을 슬픔을, 고통을 하나씩 겪어야만 할지도.
‘어차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감정에 다시 무지해질 수가 없다면 전부, 감당해야겠지. 네가 곁에 있을 땐 두렵다고 호소하고, 네가 곁에 없을 땐…….’
홀로 버텨야겠지. 늘 그래 왔듯.
에드문트는 협탁을 내려다보았다. 불청객처럼 걸쳐 있는 제 손가락 외엔 텅 빈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리아의 부재를, 집사의 고통을 형상화한 듯 보였다.
그는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품 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한 달 전 저택에서 챙겨 온 뒤로 북부에 올 때까지 내내 가지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새로 흔적이 남았다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 찢어 냈던 왼팔의 상흔도, 연인의 서툰 애무가 남겼던 입술 위 작은 상처도 모두 아물었으니 약병은 쓸모를 잃었다. 장갑 너머로, 밋밋한 감촉만 전할 뿐이었다.
중앙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치우친 자리에 병을 내려놓았다. 이어 장갑을 벗어 협탁 위에 올렸다.
구겨진 장갑과 약병으로 빈 자리를 채우니, 그제야 허전함이 가셨다.
“밖에, 보좌관 있으면 들어오도록.”
에드문트의 부름에 한스 마이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도에, 집사의 상태가 달라지거든 즉시 보고하도록 전해.”
“집사…… 말입니까? 예, 바로 전하겠습니다.”
에드문트의 지시가 끝났음에도 한스는 우물쭈물하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좌관은 그가 협탁 위에 벗어 둔 장갑, 그리고 아직 갖고 있을 줄은 몰랐던 약병에 시선이 팔린 것이리라.
“공작님, 집사는…… 괜찮을 겁니다. 나아질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공작님께서, 무척 염려하신다고 전하라 이르겠습니다.”
의미가 있을까.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린 명령이, 괜찮을 거라 달래는 보좌관의 말소리가. 집사에게 전해질 말뿐인 격려에 무슨 힘이 있을까.
푸른색으로 치장한 이 은신처에 고여, 썩어 가기만 할 텐데.
“그래.”
이성으로는 알았다. 고작 아픈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다고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수하들을 수도로 보내는 건 멍청한 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전해 주게. 내가 무척 염려하노라고. 의원에게도 치료에 힘써 달라 당부했다고.”
모른 척했다. 제 멍청한 행위는 적어도 스스로의 불안감을 다독여 주었으니까.
‘아마 감정을 가진 모든 이들이 겪어 왔을, 그러니 나 역시 이제는 감당해야 하는 일이겠지.’
제 비이성을 향한 합리화는, 어찌나 쉽고 달콤한지…….
* * *
북부에 머문 지 1주일이 지났다. 에드문트가 집사를 향한 죄책감에 무력하게 굴복한 것도 1주일째가 되었다.
그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공작의 가신들은 새 은신처에 적응하느라, 또 맡은 일을 수행하느라 바쁘기만 했다.
한스도 다를 바 없었다. 오늘은 에드문트를 찾아온 가신들을 맞이하느라 특히나 정신이 없었다. 북부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상인, 얼마 전 라스페가에 충성을 맹세한 하급 귀족들…….
그리고, 마지막 손님만이 남았다.
“공작님 말입니다. 오랜만에 뵈었더니, 다른 분인 줄 알았습니다.”
가장 늦게까지 에드문트와 독대하고 나온 건 노령의 남작이었다. 그는 집무실을 나와 한스를 보자마자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남작께서 보시기엔 공작님이 어디가 변하신 것 같습니까?”
“글쎄요. 뭐라 딱 꼬집기는 어려운데, 전보다 말씀 올리기가 편해졌습니다. 말년의 에른스트 님을 다시 뵙는 느낌이 들더군요.”
“에른스트 님이라면, 공작님의 조부 되시는 분 말씀이지요.”
“예, 그분도 젊은 시절엔 참 감정 표현이 드문 분이셨는데 손자인 에드문트 님이 태어난 뒤로 부쩍 감정 표현이 느셨지요.”
감정 표현이 늘었다는 말 뒤에는 당연히 흡족함을 내비칠 줄 알았다. 그러나 남작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한스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남작님, 대체 무얼 염려하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노령의 남작은 한스의 질문에 주변을 살피더니 복도 끝 으슥한 공간을 향해 앞장섰다. 심상치 않은 말에 이어 자리를 옮기는 행위조차 불길함을 느끼게 했다.
남작이 등불을 등지고 가장 먼저 꺼낸 주제는 에드문트의 조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스 보좌관은 아마 에른스트 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겠지요.”
“예, 돌아가신 지 한참 되지 않았습니까. 공작님이 그분을 무척 많이 닮으셨다는 이야기 정도만 들었습니다.”
“하면 그분의 죽음에 관해서는, 혹 소문 들은 적 있습니까?”
“소문 말입니까? 그건 따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군요. 그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짐작했는데요.”
“예, 당시 공식적으로는 그리 알려졌습니다.”
오래전 있었던 죽음을 끄집어내는 목소리에 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작은 보좌관의 무지함을 확인하고 더욱 고민 어린 표정이 되었다.
그건, 자신의 이야기가 혹여 불행의 씨앗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한스 경, 지금 말하는 건 정설은 아닙니다만…… 오늘 에드문트 님께서 달라진 모습을 보고 나니, 내 염려가 많이 되어 당신에게만 당부하는 겁니다. 혹시,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남작님, 설마…… 그분의 죽음마저 평범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사람을 피해, 불빛을 피해 숨은 두 사람 위로 어둠이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자가 어둠 위에 겹쳐 새카만 그림을 그렸다.
남자는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는 붓질로 긍정했다. 이에 한스가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두 사람의 공통된 시선 아래에 새카만 바닥이 보였다. 불길함이 고여 만든 호수 같았다.
“에른스트 님께서 돌아가신 직후 퍼졌던 이야기입니다. 당시 그분의 호위 기사가…….”
빠끔빠끔 열렸다 닫히는 인영이 문장을 만들어 냈지만, 내뱉은 말들은 전부 새카만 호수에 잡아먹혔다.
의혹, 고통, 목격자, 약병……. 안락한 죽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각들이 흩뿌려졌다.
남작은 한참을 종알거리다 뒤늦게야 뻣뻣하게 굳어 있는 보좌관을 발견했다.
“이 늙은이가 괜히 짐만 안겨 드린 꼴이군요. 그때는 이 미욱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외면했거늘, 지나고 나니 돌이킬 수도 없는 일들이 자꾸 후회되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족을 붙이고 말았습니다.”
“……성심껏 모셔서 우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자 밖에서 청록색 옷소매가 튀어나왔다. 남작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꺼내어 한스의 등을 두들기더니 먼저 어둠에서 벗어났다.
“부디 보좌관께서 많이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
구석진 복도에 혼자 남은 한스가 겨우 몸만 돌려 남작이 가는 길을 배웅했다.
닿았던 곳이 아팠다. 남작이 어지럽히고 간 말보다 더 상처가 되었다.
<다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되레 그분께서 좋은 쪽으로 변하신다며 기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분명 한스에게 알려 주고 간 것이리라. 방관한다면, 분명 그보다 더 많이 아플 거라고…….
‘나더러 어쩌라고. 내가 그분께 대체 뭐라고.’
그러고 보면 엘리아 아가씨도 한스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
<한스. 믿을 거예요. 나에게도, 에디에게도 당신뿐이니까.>
믿는다고, 두 사람에게 한스 한 명뿐이라고.
‘나뿐이라니. 공작이 미쳐 날뛸 때 내가 뭘 할 수 있었는데. 자해를 멈추게 한 것도, 사람같이 굴게 만든 것도 전부 다 엘리아 아가씨였잖아.’
버거운 책임감을 벗어 어린 아가씨에게나 떠넘기고 싶었다. 지난번에 확인하지 않았던가.
제가 아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인 것을.
그러니 유일한 사람은 엘리아 로앙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다시 읊조렸다.
‘그래. 나는 공작님께 아무것도 아니잖아.’
한스는 구석에 마음의 짐을 내던진 뒤 걸음을 옮겼다. 옹졸한 노인네가 억지로 떠넘기고 간 죄책감 따위 다 털어 냈으니, 더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자만했다.
“에드문트 님, 한스 보좌관이 만남을 청해 왔습니다.”
집무실 앞을 지키던 기사의 목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자, 아직은 낯선 공간이 드러났다. 푸른색으로 꾸민 침실은 북부의 추위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에드문트와도 잘 어울렸다. 남자는 제 가문의 색에 녹아들듯 침실의 푸른빛에 파묻혀 있었다.
‘……파묻혀 있다니. 저 공작이?’
한스가 스스로의 감상에 놀라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한스.”
청색 소파에 앉아 있던 공작이 돌연 한스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가져가서 읽고 의견 보태게.”
“의견…… 제 의견 말입니까?”
“벨젠 경과 공유해도 상관없네.”
의견이라니. 생소한 지시가 황당해 반문하고 말았다. 그걸 자신 없다는 의미로 이해한 건지, 벨젠 경과 둘이 머리 맞대 고민해 오라는 말이 이어졌다.
‘왜 한 번도 안 하던 짓을…….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가, 이게?’
서류를 들추어 보자 오늘 면담한 귀족들이 떠들어 댄 북부 동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려 공작 본인의 필체로.
어쩌면, 제 과민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스의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지 않던가.
‘아까 그 남작이 가기 전에 뭐라고 했더라?’
에른스트 라스페의 석연찮은 죽음, 그에 관한 소문을 떠들던 남작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무어라 지껄였던가.
<말년에는 본인 판단에 확신을 못 하셨습니다. 특히나 감정적인 일에 관해 예민하게 구셔서 몇 번이고 확인을 구하시곤 했습니다.>
한스의 손에 들린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붉은 피 대신 덜 마른 검은 잉크가 흘러 남자의 손을 더럽혔다.
한스는 그게, 에드문트의 찌꺼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넘어서 타인으로까지 확장된, 그의 인간성이 채 정제되지 못하고 남은 흔적이라 여겼다.
억지로 덮어 둔 불안감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듯, 한스에게 덤벼들었으니.
“공작님.”
굴복하고 말았다.
“괜찮을 겁니다. 괜찮을 테니 에드문트 님. 저라도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디, 버텨 달라는 말소리마저 허공에 흩날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