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다짐
엘리아가 닐스 튀링겐을 만난 건, 남부에서 돌아온 지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오라비 때문에 연락 달라더니, 아가씨가 다시 왔네? 저기, 전에 말한 서점으로 두 시간 전쯤 사람 들어갔어. 계속 지켜보진 않았는데 아마 아직 서점에 사람 있을 거야.>
서점 맞은편 상인에게 젊은 남자를 봤다는 목격담을 들은 후 점점 고조되던 긴장감은, 낡은 문 앞에 서자 심장이 아플 지경에 이르렀다.
엘리아는 품에 넣어 둔 단도 위로 몇 번이나 손을 얹어 심장께를 눌러야만 했다.
아마 잠시 소강상태였던 분노에 불이 붙느라, 그래서 심장이 뛰는 거라고 생각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뒤에야 낡은 문손잡이를 붙들었다.
무거운 나무 문을 몇 번 두드려 인기척을 내 준 뒤 힘껏 열어젖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엘리아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황후와 똑같은 머리 색을 가진 소년은 분명 닐스 튀링겐이었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심지어 제가 우는지도 몰라서 양 뺨을 축축하게 적신 눈물을 닦으려 하지도 않았다.
엘리아는 저도 모르게 물어보았다.
<왜 울고 있어?>
소년은 뒤늦게 제가 울었다는 걸 깨닫고는 서툴게 변명했다.
<책이, 아니라. 아버지 편지였어. 돌아가신…….>
손에 든 책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죽은 아버지가 남겨 둔 편지를 읽다가 울었다고.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건 하필 엘리아에게도 부모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책이었다.
낡은 책 한 권 때문이었을까. 혹은 소년이 엘리아와 비슷한 슬픔을 고백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없어.>
엘리아는 제 백금발을 보고도 로앙 백작가를 떠올리지 못한 소년에게 절반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소년은 서툴게나마 처음 본 소녀를 위로해 주려 했다.
함께,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죽으면 억울하잖아. 당신이 죽은 탓에 슬퍼할 사람들만 많아지겠지.>
분명 형편없는 위로였다. 그런데도 엘리아는 서툰 위로에 홀려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저 죽거든 슬퍼할 사람. 하나뿐인 오빠, 가족이나 다름없는 데이지.
그리고, 소년에게는 아마 저 죽으면 슬퍼할 사람 겨우 두 사람뿐이라고 했지만…….
<라스페 공자가, 네 생일이 가까워졌다 하니까 정원에서 꽃을 꺾어 가라 하더라.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한 송이 얻어 왔어.>
실은 에드문트를 떠올리기도 했다. 저 죽었다고 슬퍼하진 않아도 무덤 앞에 꽃 한 송이는 놓아 줄 약혼자를.
<엘리아 양. 용서해 주시고, 허락해 주신다면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어리석은 마음을 고백했던 후작의 손자였다.
마구간보다 못한 별관에 감금되었다고 했던가. 사용인들이 불쌍하다며 챙겨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후작에게 학대당해 다리까지 절게 되었다고 들었다.
‘울리히에게 화를 냈던 걸 후회하지는 않아. 그가 설령 크라우제 후작의 손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굴었을 테니까.’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고 구애하는 행동은 엘리아를 향한 모욕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아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았으니, 울리히는 오히려 엘리아에게 감사해야 마땅했다.
거기까지가 악연의 끝이었다. 한때의 인연이고,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는 사이였을 뿐.
‘울리히 크라우제는 후작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그를 아무리 상처 입힌들 후작에게 복수가 될 수 없으니까…….’
복수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니 잠시나마 동정해도 괜찮으리라. 엘리아는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합리화했다.
닐스 튀링겐은 어떨까.
‘저 애를 다치게 하는 게, 정말 황제와 황후에게 복수가 될 수 있을까.’
애타게 찾아낸 소년을 겨우 눈앞에 두고서 하기에는 참으로 늦은 고민이었다.
심지어 엘리아는 닐스 튀링겐을 만나거든 가장 잔인한 단어를 골라 그에게 상처 입히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부모를 죽였다고. 튀링겐 일가가 1황자를 죽인 것도 모자라, 크라우제 후작이 내 부모를 살해하는 데 동조했으니 복수할 거라 말하려고 했는데.’
품 안에 아직 독기가 가시지 않은 단검까지 품은 채로 찾아왔거늘.
정작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갑자기 서점에 찾아온 소녀가 누구인지, 왜 자신을 찾아왔을지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아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들고 페소 남작령의 치안대를 찾아갔을 때, 그들 중 한 명이 혀를 차며 떠든 말을 떠올렸다.
<그 도련님도 참 딱하지. 매번 남들 눈 피해서 수도 들락거리는 이유가 뭐겠어? 보호랍시고 아픈 어머니와 저택에 꼼짝 못 하게 하는데, 그게 감금이지 보호는 무슨.>
하나뿐인 자작 후계를 보호한답시고 닐스 튀링겐을 아픈 어머니와 저택에 감금해 놓다시피 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몰랐겠지.
마치 엘리아 로앙처럼.
마치 울리히 크라우제처럼.
작은 서점 안에 바람 한 점 불 리 없었다. 그럼에도 엘리아의 마음은 겨울바람을 맞는 나뭇가지처럼 휘청였다.
그만, 꺾여 버리고 말았다.
한 권에 5골드는 받아야 할 귀한 책을 헐값에 구입한 뒤, 엘리아는 서점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다시 세찬 겨울바람과 마주했을 때.
엘리아는 곧 떠나갈 겨울을 향해 변명했다.
‘도망치는 거 아니야.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까, 말한 대로 다음 달 두 번째 화요일에 다시 올 거야.’
소년은 약속한 대로 서점 문을 열고 소녀를 기다릴까.
그때는 말할 수 있을까.
마차를 타기 위해 7번가의 골목으로 돌아가며 끊임없이 자문했다.
다음 달 두 번째 화요일에 다시 마차를 타고 이곳에 돌아온다면, 그때는 복수할 수 있을까.
‘복수해야 하는데. 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애한테, 울리히 크라우제에게 했던 것처럼 상처 줘야 할 텐데.’
다 가지 않은 겨울이 진눈깨비를 흩날리며 작은 마차를 휘감아 돌았으나 엘리아는 추운 줄도 몰랐다.
불안감이, 죄책감이, 연민이 전부 땔감이 되어 엘리아의 속에 불을 붙였다. 복수심마저 녹여 사라지게 할 것만 같았다.
두려운 나머지 창고에 박혀 있었을 부모의 흔적을 마주해 보았다. 그럼 잠시 품은 동정심이 다시 식어 복수심을 살려 낼까 싶어서.
외젠을 찾아가 제 속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나도 나 자신을 포기해 버릴까 봐 무서워.”
딱 절반만. 전부는 차마 말 못 하고, 그냥 무섭다는 마음만 털어놓았다.
권력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될 수가 없어서 무섭다고. 그들처럼 잔인해질 수가 없어서, 울리히 크라우제의 고통을 동정하고 닐스 튀링겐의 슬픔에 공감하고야 말았으니…….
혹시 부모의 복수까지 저버릴까 봐 두려운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으니까.
“나도 외젠처럼 놓고 싶지 않은 걸 계속 마주하고…… 그러면 괜찮아질 수 있겠지?”
어떤 위로를 바랐던가.
본심을 다 드러내지 않은 두려움에 외젠이 무슨 말을 해 주길 원하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열여섯. 양손을 전부 접었다가 다시 한 손을 펴도 모자란 숫자가 되었는데도, 아직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엘리. 그러니까, 나는……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해. 너랑 데이지만큼은,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어.”
“…….”
“괴롭다면 억지로 견디려 하지 마, 엘리. 필요한 게 있으면, 네가 잃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내가 전부 붙잡아 줄 테니까……. 꼭 네가 힘든 일을 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부디 너까지 아프려 하지 마.”
뾰족한 가시가 박힌 덩굴을 쥐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상처 받지 말라고 엘리아에게 애원했다.
무해해야 할 위로는 겨울바람에 흩날려 엘리아의 마음을 세게 찔러 댔다.
‘그래. 외젠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어차피…….’
어차피 엘리아가 노력하지 않아도, 아는 척하지 않아도 복수는 이루어질 테니까.
어차피 엘리아가 모르는 채 흘러갈 세상에서, 에드문트가 부모의 복수를 할 테니까.
이미 죽은 부모, 그냥 사고로 죽었거니 스스로를 속이며 살까.
크라우제 후작의 손자가 억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흘려보내고, 튀링겐가의 후계자가 드나들 작은 서점은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려거든, 행복해질 수 있을까.
* * *
1주일 뒤, 엘리아는 외젠과 함께 에드문트의 공작위 승계식에 참석했다.
“엘리, 이제 곧 네 차례야.”
각 가문의 대표가 축복을 기원하며 꽃을 바치는 순서였다. 엘리아는 약혼자라는 이유로 외젠 대신 로앙가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푸른색 보석으로 만든 꽃을 들고, 엘리아가 에드문트의 앞에 섰다.
검푸른 예복을 입은 그는 제가 든 꽃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제 공작가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한 뒤 발밑에 꽃을 바치면 엘리아의 역할은 끝이었다.
허리를 천천히 숙여 그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먼저 바쳐진 수십 송이의 보석 꽃이 깊은 바다 속처럼 일렁였다.
정해진 대로 손에 든 꽃을 내려놓는다면, 똑같이 생긴 다른 꽃들과 뒤엉겨 구분할 수 없게 되리라.
“에디.”
엘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손에는 여전히 꽃을 쥔 채 에드문트와 시선을 맞췄다.
남들과는 다르고 싶었다. 특별해지고 싶었다.
설령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홀로 붙잡고 있어 봐야 뾰족한 가시가 저를 찌를 뿐이라 해도.
“공작님이 된 걸 축하해.”
장미를 흉내 낸 보석 꽃에는 가시가 없었다. 엘리아는 그 아름다운 꽃을 에드문트에게 내밀었다.
동시에 엘리아는 제 몫으로 남은 가시 돋친 줄기를 쥐어, 각오를 다졌다.
‘비록 후작의 손자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말았지만, 황후의 조카를 눈앞에 두고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진 않을 거야. 설령 네가 전부 집어삼켜 재만 남고 끝나더라도.’
또한 엘리아는 염원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남자가 자신을 의식해 주기를 꿈꾸었다.
“엘리아 로앙.”
에드문트는 엘리아가 내민 꽃을 받아 들고는 이름을 불렀다. 단순한 절차였을 뿐이니 의미는 없었다.
“로앙가에, 변치 않을 번영이 찾아오길.”
그럼에도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엘리아는 불변을 기원하는 그의 목소리에 덧대어 기원했다.
어차피 죽으면 함께 사라질, 사랑을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 제 작은 소원이나마 이루어져 그의 마음 속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부디 영원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시간이 흘러, 엘리아는 열여덟의 봄을 맞이했다.
그다지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엘리아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또 여전히, 에드문트는 사람처럼 굴지 않는 냉랭한 약혼자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서점을 찾아가 황후의 조카를 만나고, 가시 돋친 말로 복수하는 대신 그 역시 엘리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임에 위안이나 받으며…….
복수라는 가시덩굴을 놓지도, 세게 쥐지도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변하지 않을 거라 체념했다.
<엘리, 보고 싶었어. 너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약혼자가 예고도 없이 열여덟 엘리아를 갑자기 찾아오기 전까지는.
<네가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푸른 꽃을 향해 빈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 *
새벽 해가 어스름한 창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외젠이 소리의 정체를 입으로 읊조렸다.
“비가…….”
어린 엘리아를 아프게 했다던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봄이 한창이었으니, 창문을 열면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올지도 몰랐다.
“그러네. 비가 오네.”
열여덟의 엘리아가 봄비 내리는 소리에 맞장구를 쳤다.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희미한 미소만 남아 있었다.
“괜찮아. 이제 비가 와도 그때만큼 아프지 않아.”
외젠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마른 살갗을 찾아 길을 내려 했지만, 온통 먼저 흘린 슬픔에 젖어 있던 탓에 둥근 형체를 잃고 흩어져야 했다.
“엘리.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이기적이었어.”
여덟 살. 그때 이미 부모의 죽음을 이해했던 누이가 어떻게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외젠은 죄책감에 쉴 새 없이 울었다.
“외젠. 데이지.”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이제 전부 그만두어야 했다.
“나도 미안해.”
그러니 엘리아는 괜찮다는 말 대신,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알면서 외젠 혼자 버티게 해서 미안해. 그게 최선이라고 내 멋대로 생각해서 미안하고, 두 사람이 거짓말하게 해서 미안해.”
이제 외젠과 엘리아는 서로의 침묵이 남긴 상처가 아물 때까지 아파해야 하리라.
데이지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함께 슬퍼해야만 했다.
그러나 엘리아는 고백도, 용서도 힘들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전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며 살아 보려고 했는데 그게 훨씬, 훨씬 더 아팠어.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 아는데도, 그래도 외면받는 게 너무나 슬펐어.”
한때는 행복이 슬픔과 양립할 수 없으리라 믿었지만, 아픔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까.
“아파하지 않으며 살 수는 없잖아. 서로 아픈 상처 보여 주지 않고 감춘다고 사라질 리도 없고. 그러니 이제 서로에게 숨기지 말자. 나는 그래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엘리아는 두 사람을 위해 약속했고, 에드문트를 위해 다짐했다.
‘에드문트에게도 전부, 이야기해야지. 나를 믿고선 장갑 안에 숨긴 상처까지 내게 고백할 수 있도록.’
그가 이른 봄과 함께 엘리아를 찾아오며 당황했고, 아파했으나 결국 사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엘리아는 그가 두려움을 극복하여 함께 행복하길 바랐다.
불가능할 리 없었다. 이미 엘리아는 불가능할 줄 알았던 사랑을 돌려받는 기적을 겪어 보지 않았던가.
묻어 둔 마음에 남자가 절박한 마음을 흠뻑 뿌리고, 여자가 웅크린 몸을 일으켜 희망을 쬐어 꽃을 피우게 될 줄은 몰랐다.
몰랐지만, 함께 피운 꽃 한 송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누군가에겐 아집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너무 고집부렸다며 스스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너를 놓지 않기 위해 그 어떤 아픔도 견딜 거야.’
상처 입을지언정, 에드문트를 절대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