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열여섯 (52/79)

52. 열여섯

“엘리가 또 어딜 갔다고?”

“책을 사러 가신다고, 마차 타고 나가셨는데요.”

외젠은 엘리아가 대뜸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거리를 모두 내팽개치고 저택 정문으로 나갔다.

날이 궂으니 어서 들어가시라는 사용인들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어린 동생을 향해 시위를 벌였다.

“여행 다녀온 뒤로 내내 몸살 앓다가 겨우 회복했으면서…… 하여간 오기만 해 봐, 진짜 오기만 해 보라고.”

엉겁결에 같이 쫓아 나온 보좌관 루카스는, 물론 아가씨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보다는 밖에서 5분만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릴 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다.

“주인님. 아가씨야 잠깐 상점가 다녀오시는 걸 테고, 바람도 너무 춥고, 라스페 공자님 승계식 참석하러 가는 것 때문에 안에 일도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들어가시면 안 될까요.”

“루카, 일이 걱정되면 먼저 들어가. 난 엘리 올 때까지 못 들어가니까.”

루카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럼 저라도 들어가서 어마어마하게 쌓인 일 처리하고 있겠습니다.”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방해꾼이 사라진 뒤에도 외젠은 씩씩거리며 저택 앞을 노려보았다.

“외젠 님, 정말 여기 계셨네요.”

그를 찾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엘리아의 탈주 소식을 들은 지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데이지, 루카가 그새 너한테 쫓아가서 이른 거야?”

“일렀다기보다는 저한테 나가서 살펴봐 달라고 부탁한 거죠.”

“어쨌든 루카가 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다 고해바쳤다는 거잖아.”

“다들 걱정되어서 그렇죠. 외젠 님이 엘리 아가씨 걱정하시는 것처럼요.”

데이지의 뼈 있는 말에 외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 남은 정원, 흰 이불을 덮고 잠이 든 나무와 진눈깨비가 흩날려 뿌연 하늘…… 스무 번을 넘게 마주한 겨울 풍경을 감상하느라 바쁜 체를 해 댔다.

“이제 열여섯이시잖아요.”

“이제 겨우 열여섯인 거야. 아직 한참 어려.”

“바텐 자작가의 도련님께선 열여섯 되면 결혼하신다던데요.”

“그건 바텐 자작이 미친 거지. 엘리는 스물 넘기 전엔 죽어도 안 돼. 그리고 데이지, 우리 둘 다 열여섯이 어땠는지 잘 알잖아. 제가 다 컸다고 생각해서 얼마나 무모한 짓을 벌일 수 있는 나이인지.”

“알아요. 그래서 많이 걱정하시는 거.”

데이지는 외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을 그저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고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그러나 동시에,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부쩍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던 엘리아의 심경도 헤아릴 수 있었다.

“외젠 님.”

그러니 데이지는 말하지 않았다.

외젠에게, 당신 역시 열여섯을 겪어 보았으니 그 갑갑한 심정을 부디 헤아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

엘리아에게, 외젠이 지난해 겨울 얼마나 당신 염려로 속을 끓였는지 기억해 달라 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랬으니 외젠이 여행을 마치고 온 엘리아를 두고 잔소리하는 대신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라 말하지 않았겠는가. 엘리아가 그를 마주 안아 주며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가.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 테니, 제 잔소리가 필요할 리 없다.

단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

“저 추워서 감기 걸릴 것 같아요.”

“얼른 들어가, 얼른.”

“외젠 님 계실 때까지 여기서 버틸 거예요. 같이 진눈깨비 맞고, 칼바람도 맞아야지요.”

믿음을 쌓아 갈 시간이, 필요할 뿐일 테니까.

“……네 고집 누가 말리냐.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들어가.”

“엘리 아가씨 도착하거든 제일 먼저 외젠 님께 들르시라 할게요.”

외젠은 데이지의 춥단 투정을 무시하지 못해 고집을 꺾었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들여보낸다고 데이지가 그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추위가 가득 묻어 있어 마음이 아팠다. 손으로 연신 털어 내고 또 털어 내도 찬기가 덜어지질 않았다.

“벽난로에 장작 더 넣어 드릴 테니, 근처에서 일 보세요. 몸 빨리 녹여야 감기 안 걸리죠.”

3층 하인들을 시켜 집무실에 장작을 더 넣게 하고는, 4층으로 올라가 엘리아의 침실도 따듯하게 덥혔다.

아마 엘리아 역시 외젠의 등에 서려 있던 것만큼 추위를 이고 올 테니까.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다렸다.

* * *

아침 일찍 연락을 받고 나간 엘리아는 정오가 조금 지나서야 저택에 돌아왔다.

“아가씨, 다녀오셨어요.”

“응, 나 잠깐…… 서재에 좀 있을게.”

엘리아는 데이지가 데워 둔 따듯한 침실 대신 4층 서재에 들어가 버렸다. 품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는데, 표정이 너무 굳어 있던 탓에 책에 대해 궁금해할 겨를이 없었다.

“7번가에 내려 드렸는데……. 한 한 시간 걸렸던가? 내 짐작으론 마차를 세우게 하고는 어디 멀리 걸어갔다 오신 것 같아.”

아가씨와 동행했던 마부도 정확한 행선지를 모른다 했으니, 데이지는 서재로 들어가 버린 엘리아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엘리아가 서재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데이지, 우리 저택에 ‘가을에 쓴 편지’라는 소설책 한 권도 없었던가? 분명 어릴 때 봤던 것 같은데.”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엘리아는 복도를 서성이던 데이지를 향해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데이지는 어쩐지 무척 낯익은 책 제목을 듣고 기억을 뒤적였다.

“아……. 아마 한 권 있었어요. 근데…….”

“혹시 팔아 버렸어?”

“아니요, 팔기는요.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났어요. 금방 찾아 드릴게요.”

“응, 여기 있을 테니까 가져다줘.”

불도 때지 않아 추운 서재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에, 데이지가 황급히 지하 창고로 향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문을 열었더니, 약한 먼지 냄새와 함께 다닥다닥 쌓아 둔 상자가 여럿 보였다. 전부 선대 백작 부부의 흔적이 남은 물품들이었다.

상자 하나에는 그들이 입던 옷가지가, 다른 상자에는 편지이니 일기장이니 하는 기록들이 즐비했다.

‘분명 책은 한곳에 모아서 아래쪽에 두었는데…….’

데이지는 열 개가 넘는 상자 틈에서 간신히 엘리아가 말한 소설책을 찾아냈다.

뽀얗게 엉긴 먼지를 조심스럽게 소매로 훔친 뒤, 그대로 들고 4층 서재 앞까지 올라왔다.

‘전해 드려도 되는 걸까.’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며 급히 책을 찾았으면서, 뒤늦게 망설였다.

제가 손에 든 책은 세월이 덕지덕지 묻어 낡아 있었고, 그 흔적이 누구의 것인지는 누구보다도 데이지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렸을 때라 기억 못 하실 줄 알았는데.’

주인마님이 늘 침대맡에 두고 살피던 책이었다. 데이지에게도 한 번 빌려주신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엘리아가 데이지만큼 크거든 다 함께 감상을 나눌 수 있을 거라며 기대가 많으셨다.

그만큼, 엘리아의 어머니가 아끼던 소설책이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서점에 다녀왔다가 문득 생각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책을 찾고 싶었을 테고.

데이지는 그 심경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막을 권리는 없다고 여겼다.

대신 지나간 기억 곱씹고 또 아프시거든, 옆을 지키며 같이 아파해 드릴 수는 있으리라.

“고마워. 창고에 있었나 보네.”

“네, 다행히 먼지 탄 것 말고는 괜찮은 것 같아요.”

“음. 그렇네. 오래된 책인데. 이거 데이지도 본 기억나지? 엄마가 침실에 두고 보던 책이야. 내가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장난치다가 몇 번 떨어뜨리기도 했는데.”

엘리아는 추억을 더듬으며 책 표지를 손으로 쓸었다. 이내 양쪽으로 표지를 잡고 책을 펼치니, 팔랑이던 종이가 한곳에서 멈추었다.

색 바랜 종이 한 장을 책갈피처럼 끼워 둔 자리였다.

엘리아는 끼워져 있던 종이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서점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이 책을 들고 있었어. 우연히 꺼내 봤는데 편지가 들어 있었다면서. 그걸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더라. 이 책에 편지 끼워서 선물하는 게 한때 유행했다고, 그렇게 들었던 것 같아.”

“소설 주인공이 가을에 써 둔 편지를 꽃아 두었는데, 나중에 연인이 책을 꺼내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제목이 ‘가을에 쓴 편지’였구나.”

엘리아는 책을 펼친 채 종이를 살피다가 양손으로 든 책을 그대로 데이지에게 밀어 주었다. 데이지도 엘리아를 흉내 내 양손으로 책을 받쳐 들자, 엘리아가 훌쩍 데이지를 지나쳐 나갔다.

“외젠은 집무실에 있지? 다녀올게. 책은 데이지가 알아서 해.”

“……다녀오세요.”

열린 문 틈으로 엘리아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데이지는 제 양손에 거꾸로 들린 책을 확인했다.

편지 대신, 책 사이에 잠들어 있던 건 각기 다른 필체로 적은 감상문이었다.

<엘레노아 로앙. 스물여덟의 가을에 읽음. 큰 사건이 없어 잔잔했지만 재미있게 읽었음.>

<에르히 로앙. 스물일곱의 가을에 읽음. 결말이 무척 슬픈 이야기라 그만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음. 추신. 엘레노아, 편지 고마워.>

<데이지 슈미츠. 열둘의 봄에 읽었습니다. 가을에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외젠 로앙. 열둘의 가을에 읽음. 다들 재밌다고 추천해 줬는데, 주인공이 고백하지도 못하고 죽어서 너무 슬펐다.>

나란히 적힌 네 사람의 흔적, 그 아래에 이름 하나가 더 쓰여 있었다.

<엘리아 로앙.>

외젠이 제 누이동생 크거든 감상을 쓰라고 적어 둔 이름을 보고, 데이지는 그만 세게 책을 덮어 버렸다.

‘아…….’

표지 위에 둥글게 눈물 자국이 찍혔다. 간신히, 종이 위에 눈물을 떨구지 않을 수 있었다.

* * *

3층 집무실. 나무 문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문이 빼꼼 열렸다. 불쑥 들어온 사람도, 이미 집무실에 있던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

따끈하게 데워진 벽난로 앞은 텅 비워 둔 채, 외젠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엘리아는 저를 무시하며 토라진 티를 내는 외젠의 곁으로 다가갔다.

추웠을 텐데. 겨울바람이 유리창에 한기를 다닥다닥 붙여 두고 달아나 버려서, 그가 삼킬 공기를 전부 다 식혀 버리고 말았을 텐데.

“외젠, 나 왔는데.”

“알아. 오는 거 봤어.”

그는 엘리아가 돌아올 때까지 내내 창가에 붙어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겨우 작은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추어 서는 걸 확인한 뒤에야 서류를 든 참이었다.

“나, 서점 다녀왔어.”

“그래. 테오가 뭐 책이 어쩌고 이야기하더라.”

“……좀 와 봐. 거기 추운 데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내가 그러고 있으면 잔소리했을 거면서.”

외젠은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저 걱정해 주는 엘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벽난로 앞에 둔 소파에 남매가 나란히 앉아, 일렁이는 불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굴처럼 팬 벽난로 안에 비친 색은 두 남매의 눈동자를 닮은 주홍빛이었다.

“외젠, 나 궁금한 게 있어.”

“왜. 뭔데.”

둘은 서로의 시선을 외면한 채 언어로만 상대를 대했다. 외젠은 엘리아의 눈에 그렁그렁 남은 눈물 자국을 모른 척해 주기 위해서였고, 엘리아는 고집스레 창가를 지키며 찬 바람을 맞아 결국 열이 나기 시작한 외젠을 모른 척해 주기 위해서였다.

“열여섯 살 때, 외젠은 뭐가 제일 무서웠어?”

“열여섯? 네 나이 때?”

외젠은 엘리아의 물음에 제 열여섯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부모의 죽음을 채 극복하기도 전에, 숱한 고통이 긴 장마처럼 이어지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열여섯의 외젠은 내린 폭우에 파묻혀야 했고, 양손에 엘리아와 데이지를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

“글쎄. 나는 아마…… 잃어버릴까 봐 제일 무서웠던 같아.”

두려웠다. 제가 현실을 헤쳐 나가는 사이 힘이 빠져, 손을 놓아 버리고 말까 봐.

“작위, 재산, 행복 뭐 그런 것들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기도 했지만, 내가 지키겠다고 각오한 걸 전부 잃어버릴까 봐, 마음먹은 걸 포기할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

“그걸 다 어떻게 지나왔어?”

“내가 잃고 싶지 않았던 게 뭐였는가 떠올렸지. 그럼 좀 괜찮아지더라.”

지쳐서 전부 포기하고 싶을 때, 외젠은 엘리아의 침실에 찾아가 잠든 아이를 끌어안았다. 새벽에 겨우 잠들었을 데이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다 포기해도 살 수 있을까. 힘들다고 포기하면 편해질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답이 나왔다.

손을 놓아도 결코 편해질 리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아집으로 보였을지도 몰라. 내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을지도 모르고. 찾아내지 못했을 뿐, 모두에게 더 좋을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지만.”

“…….”

외젠이 팔을 뻗자 엘리아가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 왔다. 기껏해야 얇은 담요 하나 두른 듯한 가벼운 무게감에 마음이 아팠다.

“……나도 외젠이랑 비슷한 것 같아.”

“뭐가 비슷한데.”

“무서운 거. 나도 나 자신을 포기해 버릴까 봐 무서워.”

저 살 빠진 거 걱정에 속 끓이는지도 모르고, 무섭다는 말에 외젠이 덩달아 겁을 먹을 줄은 모른 채. 엘리아는 조금 전 다녀왔던 서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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