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남부
크라우제 후작령에서 남부로 향하는 여정은 무척 고되었다.
수도를 가로지르면 넉넉하게 잡아도 1주일이면 도착할 테지만, 그랬다간 아는 사람을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차에 타고 있으면 들키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엘리아는 쉬운 길을 두고 산세가 험한 동부로 간 다음, 그곳에서 마차를 갈아타 또 한참을 돌아 남부로 향했다.
고된 여정에 몸이 아플 때마다, 지인의 별장에 머무는 척 외젠에게 안부 편지를 쓸 때마다 엘리아는 남은 일정을 포기하고만 싶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로앙가에 돌아가야 할까.’
그때마다 엘리아를 달래 준 건, 마차의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아가씨도 남부는 처음인가 보오?”
“네, 겨울인데 춥지도 않고 나무도 다 특이하게 생겨서 신기하네요.”
“본래 남부가 겨울에도 따듯하긴 하지만, 올해 유독 추워지질 않네. 이제 곧 새해가 될 텐데 말이야.”
“북부는 이번 겨울이 유독 추웠다던데. 아마 위에서 겨울을 다 가져갔나 보네요.”
사람들의 말대로 남부의 겨울은 초봄처럼 온화했다. 남부의 작은 영지를 가로지르는 동안, 엘리아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선 질리지 않을 풍경을 감상했다.
마른 여름 틈으로 겨울을 점점이 찍어 낸 듯, 초록이 넘실거리는 들판에 드문드문 겨울이 스민 풍경은 누군가 말로 전해 주어도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으리라.
“볼 거 없는 곳인데, 초행인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모양이네.”
엘리아는 여정 내내 창밖을 내다보면서, 남부 사람들의 생활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후작령은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 긴장감이 있었는데, 남부는 따듯한 겨울을 즐기러 온 사람이 대부분이라서인지 다들 여유로워 보여.’
한데 마차가 튀링겐 영지에 가까워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갈수록 사람이 많아질 줄 알았거늘, 되레 마차에 탄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북부에서 출발할 때 마차 세 대를 꽉 채우던 사람들은 어느덧 엘리아를 포함해 단 세 명만 남았다.
“튀링겐에 가는 사람은 별로 없네요. 겨울이라서 그런 걸까요?”
“튀링겐? 요즘 그쪽에 뭐 볼 게 있다고. 한 십수 년 전에야 여행객들이 좀 있긴 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여기 보라고. 당장 반나절만 더 가면 튀링겐 영지인데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아무것도 없다던 마부의 말대로, 반나절 뒤 도착한 튀링겐 영지는 여태 지나온 도시 중 가장 작고 초라했다.
‘명색이 황후의 본가인데 이 정도일 줄이야…….’
엘리아는 마차에서 내린 뒤에도 마부에게 몇 번이나 제가 도착한 곳이 튀링겐 영지가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같은 답을 받고 나서야 영지에 하나뿐이라는 여관을 찾아갔다.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엘리아를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죄 몰려왔다.
“어린 아가씨가 여기까지 뭘 한다고 왔는가?”
엘리아는 다짜고짜 캐묻는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북부에서처럼 ‘일 구하러 왔어요.’라고 하면 믿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미처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못했던 엘리아는 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새 보려고 왔어요.”
“새?”
“그, 여행하는 중에 누가 남부에 특이한 새가 있다고 하던데요.”
“여기까지 새를 보러 왔다고?”
여관 주인과 직원들은 어린 엘리아의 대꾸에 껄껄 웃고 말았다. 다행히 여행객이라는 말을 둘러말한 거라고 이해했는지, 진짜 사정이 뭐냐고 캐묻지는 않았다.
“여기 새 보려고 남부 놀러 온 외지인이 있다면서?”
작은 튀링겐 영지에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엘리아는 주인장의 호의에 가장 큰 방을 싼값에 빌려 머물며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을 독차지했다.
“새 보러 예까지 놀러 왔다는 말 듣고 실컷 구경하라고 데려왔더니만, 다들 나랑 똑같구먼?”
북부의 여관 주인 말대로 남부 사람들은 저마다 집에 알록달록한 새를 한 마리씩 데리고 살았다.
다들 남부가 처음이라는 아가씨 보여 주겠다고 어깨에 달고 오는 바람에, 여관은 늘 새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안녕! 안녕!
처음에는 새가 말하는 광경에 기절할 정도로 놀랐지만, 사흘쯤 지나니 엘리아도 익숙하게 초면인 새에게 말을 붙이기에 이르렀다.
장장 사흘간 여관에서 여독을 풀며 평생 볼 앵무새 구경을 한 뒤, 나흘째 되던 날부터 엘리아는 영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생필품은 북부보다 배는 더 비싸고, 대부분 한 철 농사로 모은 곡식으로 겨울을 버티는데 창고를 보니 딱히 풍족해 보이지는 않네. 강 주변 시설도 공사한 흔적은 있지만 전부 다 엉망이고. 버려둔 땅 같아.’
황제의 입단속 탓에 수도에서는 황후에 관한 소문을 모으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엘리아는 내심 남부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필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황후가 돈을 끌어 제 고향에 아낌없이 뿌렸으리라 짐작했으니까.
한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아무리 여기가 남부 중심 도시가 아니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설마 황후가 제 가문과 의절한 건가? 아냐. 그랬다면 아무리 남부 사정이라도 수도에 소문이 퍼졌을 텐데. 전부 이상해.’
엘리아는 혹시 제가 빠트린 게 있나 싶어 부지런히 온 길을 되짚어 걸었지만, 영지 사정을 살피는 건 시시할 정도로 빨리 끝났다.
저녁이 되어 여관으로 돌아가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엘리아의 감상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어때. 영 볼 것이 없지?”
자조적인 물음이었지만, 엘리아가 눈치챌 정도의 기대감도 서려 있었다.
평생 나고 자란 땅이 영세하든 볼품없든, 애정이 있었으니 내심 좋은 말을 듣고 싶으리라.
아직 정보가 필요한 엘리아는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대한 포장한 감상을 밀어 주었다.
“겨울인데 이렇게 밖을 오래 돌아다닌 적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오다가 커다란 저택을 봤는데 정말 멋지던데요? 주변을 지키고 있는 기사님들 갑옷도 멋있었고요.”
“아, 영주님 성 말이지. 아주 큰돈 들여 새로 지은 거야.”
“영주님요?”
“그래. 산비탈에 있는 성 봤지? 원래 거기가 영주님 성이었는데, 첫째 아가씨가 황후 폐하가 되시고 옛 성은 버리고 새로 지은 저택에 살고 계셔.”
“아……. 황후 폐하의 가족분들이 사는 곳이군요. 어쩐지 다른 영주님들 성보다 반짝반짝하더라고요.”
“근데 뭐, 성이 번쩍번쩍하면 뭐하나. 완전 빈껍데기만 반지르르한데.”
튀링겐의 영주가 빈껍데기만 멀쩡하다는 평가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라우제 후작을 향하던 북부 영지민들의 비난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의 평가에는 악심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서려 있었다.
“속이 다 곯았잖아. 저 집안사람들, 다들 날 때부터 온갖 병을 다 달고 태어나거든. 그나마 황후 폐하가 되신 첫째 아가씨가 제일 건강했는데. 그분도 결국 여태 아이 없이 사시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몸이 약하신 탓이겠지.”
“그럼 황후 폐하의 형제자매분들도 다들 아프세요?”
“아유. 말도 마. 다른 형제들은 하나 빼고 다 진즉 죽었어. 여기 사람들이 대관절 영주님 일가 장례를 몇 번을 치렀는지 몰라.”
엘리아는 황제가 황후를 대단히 아껴서 잠시도 제 곁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던 소문을 떠올렸다.
황실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도 좀체 밖에 내보내지 않을 정도로 집착한다면서, 다들 황제가 미친 거라고 하더니만.
지병 이야기를 듣고 나니 튀링겐 영지의 상태도 일견 이해가 되었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니 물질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겠으나, 지병을 앓는 튀링겐 자작가 사람들로서는 적극적으로 영지를 개혁하기가 어려웠으리라.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도, 당장 자기들 형편 나아지는 데만 쓰고 말았겠구나. 영지에 투자해도, 한 번도 제대로 돈을 써 본 적이 없으니 눈먼 돈이 되어 줄줄 새어 나갔을 테고.’
엘리아는 강 인근에 하다 만 꼴로 늘어져 있던 치수 공사 흔적이라든가, 마차가 부서져라 흔들릴 정도로 상태가 나쁘던 길을 떠올렸다.
‘튀링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도 확인했으니 다행인 셈 쳐야 하나.’
북부에서 억지로 불길을 살려 온 복수심이 허망하게 꺼지려던 순간이었다.
“그나마 후계자라도 건강하다니 다행스러운 일이지.”
“……후계자요?”
“자작가 후계 말이야. 여동생 하나가 살아남았는데, 그 아들이…….”
중년 남자가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자 주변 사람들이 티가 날 정도로 눈치를 주었다.
‘저건 분명히 누군가 입단속을 한 흔적이야.’
남자가 우물쭈물하는 틈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엘리아는 표정을 고쳐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아. 저도 고향에서 들었어요. 자작가 후계자께서 황후 폐하만큼 미인이라면서요?”
“그게 소문이 났는가? 하긴, 워낙 다들 인물만큼은 출중해서.”
“황제 폐하께서 만나기 무섭게 식 올린 거 생각해 봐. 아주 어릴 적부터 미모가 출중하셨는데, 그게 자매가 아주 똑같아서 조카께서도 그대로 물려받으셨지.”
순진한 영지민들은 엘리아가 아는 척을 하기가 무섭게 경계를 풀었다.
“황후 폐하는 평생 못 뵙더라도 그 조카분이라도 보고 싶은데…… 어렵겠죠?”
“그렇지. 여기 계시지도 않아. 저기 별장에 계시거든.”
심장이 뛰었다. 엘리아가 지난 2년간 긁어모은 자료에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던, 튀링겐가의 후계자 이야기라니.
심지어 그 병약한 집안에서, 혼자 살아남은 자매가 낳은 후계자라지 않은가.
황후에게는 버려둔 영지보다도, 죽을 날만 기다리듯 저택에만 틀어박혀 산다는 자작가의 사람들보다도 소중하지 않을까?
“……하나뿐이겠네요.”
“암. 하나뿐이지. 그마저 죽으면 대 끊기는 건 확정일 테고, 그랬다간 저 심약한 사람들 다 죽어 버리고 말걸? 하여간 박복한 팔자야.”
“아파 죽어도 귀족이 낫죠. 아픈 사람들 따로 사는 별장도 있다니……. 분명 엄청 화려하고 멋진 곳이겠죠?”
“그렇겠지. 저기, 영지 서쪽에 있는데 거기 한번 가시더니 아예 오질 않으시네?”
“서쪽 별장엘 가셨어? 나는 겨울나기 좋으라고 여기보다 남쪽으로 가신 줄 알았는데.”
“계절마다 옮겨 다니시는 걸까요.”
“그야 모르지. 아주 황후 폐하 되신 첫째 아가씨께서, 하나 남은 자매 딸처럼 귀하게 생각하니까……. 1년에 한 번씩은 본가에 오시는데 그때마다 난리도 아니야. 황제 폐하 오실 적보다 더 요란하다니까.”
“요란해요?”
“매번 무슨 전쟁하는 것처럼 떼 지어 몰려오거든. 영주님 둘째 따님이랑 손자분 호위한다고 말이야.”
“그렇군요. 소중할 테니까요.”
엘리아는 ‘소중하다’라는 말에, 의식도 못 한 채 힘을 실어 말했다.
꺼져 가던 복수심에 다시 불이 붙었다.
‘황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어디에 숨겼을까?’
* * *
자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영지민들과 좀 더 대화를 나누어 봤지만, 정보를 더 얻을 수는 없었다.
입막음 때문이 아니라, 영지민들조차 튀링겐의 후계자가 어디서 지내는지 모르는 탓이었다.
엘리아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만큼 튀링겐의 후계자가 황후에게 소중하다는 뜻이었으니까.
‘튀링겐가에서 영지에 투자하지 않고 버려두는 것도, 능력 부족보다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서겠지.’
영지 외곽을 뒤지니 별장으로 보이는 저택만 다섯 채가 넘었으며, 전부 수십 명의 사병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황후가 제 동생과 조카가 지내는 곳을 숨기기 위해 전부 사병을 깔아 둔 게 틀림없었다.
이는 튀링겐이 평범한 가문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재력을 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기 저택에 누가 사느냐고? 글쎄. 우리도 잘…….”
튀링겐 자작이 거주하는 본성 인근보다도 입단속을 철저하게 한 까닭에 다섯 채의 별장 중 후계자가 지내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엘리아는 사람들에게 캐물어 의심을 사는 대신 별장 인근을 염탐해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섯 곳이 전부 비어 있는데 대체 어디서 지내는 거지? 별장에서 요양한다는 게 거짓말이었나?’
꼬박 열흘 동안 영지 주변을 살폈는데 소득이 없자, 엘리아는 초조함을 느꼈다.
‘에드문트의 승계식에 참석하려면, 2월 중순까지는 돌아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 수도로 출발하기까지 딱 1주일을 남겨 둔 날, 엘리아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발견했다.
“저 강 건너 땅은 자작가 영지가 아니라고요? 이상하네. 분명 지도에는 훨씬 넓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마 아가씨가 옛날 지도를 본 모양이네. 저쪽도 원래 자작가 땅이긴 했는데, 10여 년 전에 남작가에 넘어갔거든.”
“남작가요?”
“그래. 예전에는 정말 다 쓰러져 가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남작가 후계자가 꽤 번듯하게 키워 놔서 구경거리가 많다지? 아가씨도 볼 것도 없는 이 동네에서 죽치지 말고 한번 구경이나 가 봐.”
“그래야겠네요. 남작령이라고 했죠?”
“저 다리 건너면, 거기부터 페소 남작령이야. 영주 성은 반나절 정도 더 걸어야 할 거고.”
남작가 영지 중심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다리를 건너 남작령에 다다르자마자,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커다란 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였구나. 설마 남의 영지로 만들어서까지 별장을 숨겨 놓았을 줄이야.’
엘리아는 흥분을 가라앉힌 뒤 주민들에게 접근했다. 근 두 달째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평민들 대하는 일도 무척 익숙해졌다.
“혹시 저 건물에는 누가 사는지 아시나요?”
“저거? 뭐, 귀한 분들 사는 곳이여.”
불행히도 다른 곳에 비해 남작령의 주민들은 경계심이 무척 높았다. 심지어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튀링겐 자작가 사병이 주기적으로 순찰 도는 탓에, 엘리아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엘리아는 고민 끝에 접근법을 달리했다. 마침 동네 꼬마들이 낯선 사람인 걸 대번 눈치채서는 제게 호기심을 보이며 졸졸 따르던 차였다.
북부에서 사 온 작은 오르골 몇 개를 손에 쥐여 주자, 아이들의 경계심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언니는 어디서 왔어?”
“자작님 사는 땅에서 왔어. 근데 여기 재미없는 곳이네.”
“아니거든? 여기 높은 사람 계시는 곳이라 조용한 거야.”
“맞아. 여기 우리 영주님보다 훨씬 높은 분이 계신댔어. 그래서 저기 근처로 절대 가면 안 돼.”
아이들이 비밀 이야기라며 소곤거린 말에, 엘리아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음. 남작님보다 높은 사람이 계신단 말이지?”
긴 숨바꼭질 끝에, 꼭꼭 숨어 있던 마지막 아이를 찾아낸 술래의 웃음이었다.
아이들은 분명 부모에게 입단속을 받았겠지만, 선물을 준 낯선 언니가 관심을 보이자 경쟁하듯 이야기를 쏟아 냈다.
“여기 기사님들이 다 높은 분들 지키려고 걸어 다니는 거야.”
“맞아. 비 올 때랑 태풍 와도 안 쉬어.”
“그리고 가끔 마차가 줄 서서 들어가.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전부 다 금화랑 비싼 음식들이랬어.”
어린아이들이 전해 준 이야기만으로도 엘리아는 충분히 이곳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병들의 철저한 감시하에 외부인 출입은 전면 통제하고, 필요한 사람과 물자는 전부 내부를 꼼꼼히 살핀 마차로만 옮기는 것이리라.
마치 황족들이 수도 밖에서 지낼 때처럼 말이다. 황제나 황후의 손길이 닿은 게 틀림없었다.
‘이건…… 라스페가에서도, 에드문트도 모르는 사실일지도 몰라.’
엘리아는 중요한 정보를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냈다는 점보다, 자신이 에드문트보다 한발 앞섰을 가능성에 흥분했다.
“진짜 대단한 분들 사시는 곳인가 보네. 그럼 너희들은 그분들 본 적 있어?”
“그건 아닌데…….”
“뭐야, 다들 본 적도 없고. 역시 시시해.”
“아니거든? 하나도 안 시시해! 진짜 만난 적 있단 말이야!”
“맞아. 엄청 잘생긴 도련님인데, 우리 다 본 적 있어. 심심하다고 매일 여기 나와.”
“나오신다고? 언제?”
“그냥……. 도련님 나오고 싶으실 때. 근데 지금은 안 계셔. 멀리 놀러 가셨어.”
“안 계신다고? 너희 거짓말하면 저기 기사님들한테 다 일러 준다?”
엘리아의 도발에 흥분한 아이들이 증거를 보여 주겠다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저마다 작은 손에 하나씩 올려 보여 준 건, 색색의 물감이었다.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아이들이 얼마나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는지, 물감의 색을 표시한 띠지가 닳아서 꺼멓게 색이 죽어 있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엘리아가 수도에서 본 적 있는 화방의 제품이었다.
“이거 전에 도련님께서 돈 엄청 많이 넣어 둔 주머니 잃어버린 거 우리가 찾아 드려서, 착하다고 주신 거야. 어른들이 그랬는데 엄청 귀한 거라고 했어. 언니 이런 거 본 적 없지?”
“그럼 너희, 그 도련님 이름도 알아? 어떻게 생겼는지도?”
“당연히 알지. 닐스 도련님이잖아. 엄청 예쁜 금발이고.”
“우리 언니랑 동갑인데, 닐스 도련님이 훨씬 키가 커. 언니보다 훨씬 클걸? 이제 거짓말 아닌 거 믿어 줄 거지?”
“알겠어. 믿어 줄게. 근데 그 닐스 도련님 이야기…… 나한테 해도 되는 거였어? 엄마 아빠가 비밀 이야기라고 말하지 말라고 안 하셨어?”
엘리아의 질문에 아이들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부모한테 혼날 생각에 아이들이 울상을 짓자 엘리아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급히 아이들을 다독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비밀로 할 거니까.”
“……진짜?”
“그럼. 내가 너희들한테 선물도 줬잖아. 그게 약속 지킨다는 맹세야. 알았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하기로 약속해.”
아이들의 입을 다물게 한 후, 엘리아는 바로 옷을 갈아입은 뒤 치안대를 찾아 나섰다.
예상대로 별장을 지키는 사병들이 순찰을 돈다는 핑계로 실지 치안 유지를 해야 할 지역 치안대 사람들은 무척 태평해 보였다.
“저기 다리 근처에서 주웠는데, 여기 갖다 드리면 될까요?”
엘리아가 대뜸 내민 건 천 주머니에 들은 금화였다. 물론 주머니 안에 있는 돈은 다리에서 주운 게 아니라 엘리아의 여비 일부였다.
영지 치안대원들은 금화 주머니를 보고는 혀를 찼다.
“참, 또 닐스 도련님이구먼.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잃어버린 사람을 알고 있나요?”
“아, 뭐 신고 들어온 건 없는데 이만큼 많은 돈을 잃어버릴 사람은 딱 한 명뿐이라서요. 이건 저희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외지인일 텐데, 어디서 머무는지 알려 주면 주인에게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알려 주실 수는 없고요?”
“지금은 어디 나가 계셔서……. 그렇지?”
“또 몰래 나가셨지 뭐.”
“그 도련님도 참 딱하지…….”
아이들의 말대로 닐스 튀링겐은 영지 밖에 나간 모양이었다. 심지어 호위도 뿌리치고 놀러 간 거라니. 엘리아는 다행히 얼굴을 꼭꼭 감추고 있던 덕분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숨길 수 있었다.
“어쩌죠. 실은 제가 곧 떠나야 하는데.”
“어딜 가시는데요?”
“수도에 올라가요.”
“아, 그럼 아마 도련님이랑…….”
“흠, 흐흠. 그 주인 되시는 분 일정은 저희도 아는 바 없고, 아마 1주일은 족히 걸릴 겁니다.”
젊은 치안대원 한 명이 아는 체를 하려 들었는데 옆 사람이 급히 입막음을 위해 말을 돌렸다. 하나 이미 그가 수도에 갔을 거라 짐작한 엘리아에게는 확신만 더해 줄 뿐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솔직히 이렇게 큰돈을 그대로 갖다 드렸는데, 제가 아무 보상도 못 받는 건 억울하잖아요?”
엘리아는 동의를 구하자마자 주머니를 열어 동전 몇 닢을 꺼냈다.
신고하지 않았다면 영영 찾지 못할 돈이었으니, 그중 1골드 동전 하나 챙기는 것쯤이야 묵인해 줄 거라 생각했다.
“음. 뭐……. 그러시죠.”
치안대원들은 엘리아의 손에 들린 동전 한 닢을 보고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엘리아는 주머니에 남은 자신의 6골드를 생각하면 속이 쓰렸지만, 닐스 튀링겐이 수도에 들락거린다는 정보를 사는 데 썼다고 치고 치안대를 나섰다.
‘닐스 튀링겐을 여기서 확인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어차피 여긴 감시하는 눈이 많아서 마주치는 것도 어려웠을 거야. 차라리 나한테 익숙한 수도가 훨씬 편할 테고. 주기적으로 들른다는 걸 확인했으니, 올라가서 기다리자.’
그길로 짐을 챙긴 엘리아는 다시 동부를 거쳐 수도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가방 안에는, 여전히 독을 바른 단도가 들어 있었다.
* * *
엘리아는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단 한 번도 창문 밖을 구경하지 않았다. 대신 흔들림이 가장 덜한 구석에 처박혀선 그동안의 여행을 돌이켜 보았다.
‘내가 본 적 없는 세상이 궁금했고, 이번 기회에 나가 보지 않으면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고……. 아무도 내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으려는 현실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았어.’
호기심과 불안감, 그리고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엘리아를 세상 밖으로 나가게 했다.
기대한 대로 세상은 말로 전해 듣고 글로 읽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커다란 마차에서 평민들과 부대끼고, 좁은 여관방을 빌려 홀로 잠이 들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웃으며 떠들썩한 저녁을 보내곤 했으니 매 순간이 모두 새로웠다.
전부 엘리아가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경험이었다.
‘마치 지금껏 긴 꿈을 꾸었던 것 같아. 북부에서 후작에 대한 소식을 듣고, 튀링겐의 존재를 확인한 것. 전부 다.’
첫 여행이 엘리아의 꿈이었다면, 현실은 무엇이던가.
‘내가 알아낸 건 북부가 결코 소문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 에드문트가 그를 상대해야만 진정한 복수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원수, 황후에게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거였지.’
그 모든 걸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엘리아의 현실은 복수였다.
복수는 엘리아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에드문트에 의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으리라.
그러나 엘리아에겐 적어도 독 바른 단검이 있었고, 또한 황후의 소중한 사람이 수도에서 지낸다는 정보가 있었다.
낯선 영지에서도 혼자 유의미한 성과를 얻었으니, 수도에 있을 닐스 튀링겐을 찾아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물감, 분명 전에 데이지와 같이 갔던 12번가 끝에 있던 화방 거였어. 그런 곳에 귀족 태가 다분할 남자애가 들락거렸으면 분명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문제는 엘리아였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페소 남작령을 떠났을 때 느꼈던 흥분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닐스 튀링겐을 발견했을 때의 꿈 같던 성취감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으니,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튀링겐 후계자의 이야기를 외젠한테 전할 수는 없어. 에드문트에게는…… 필요 없겠지. 내가 알아낼 정도였으니 공작가의 수하들이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외젠은 모를지언정, 에드문트는 알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혹은 알 가치가 없어서 모르고 있다든가 말이다.
‘그래. 어차피 닐스 튀링겐은 감정적인 복수를 하는 게 아니면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황제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에드문트와 엘리아의 부모가 죽은 일과도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변변찮은 가문의 후계자인 닐스 튀링겐이 안전한 곳에 호화스럽게 사는 건, 전부 그의 이모가 황후가 된 덕분인걸. 그리고 에드문트와 내 부모님이 살해당하지 않았으면 그의 이모가 황후가 되지 못했을 거고.’
엘리아는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크라우제가 성을 바라보며, 울리히 크라우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별장에 숨어 있다던 튀링겐의 후계자를 찾아다니며 키웠던 복수심은 어디로 갔는지.
마차가 멈추어 도착을 알린 뒤에도, 엘리아는 결국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은 아직 엘리아를 위해 남아 있었다.
“저기요, 계신가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엘리아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여독을 풀 틈도 없이 12번가로 향했다. 맨 먼저 화방을, 그리고 문이 열려 있는 과일 상점을 순서대로 찾아가 혹시 외지 사람이 온 적 없는지 물어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작년부터였나? 요기 길가에 서점 하나가 있는데, 한참 주인이 찾질 않더니 젊은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있다가 가는 것 같던데.”
“젊은 사람……. 혹시 짧은 머리에, 남부 출신처럼 생기지 않았던가요? 키 크고요.”
“맞는 것 같은데. 나는 근데 장사하느라 사람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얼핏 봐서. 혹시 찾는 사람이거든 저쪽 서점 맞은편 사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걸세.”
12번가 상점을 뱅글뱅글 돈 끝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건, 간판이 다 떨어질 정도로 낡은 서점, 그 맞은편에 있는 작은 상점이었다.
“아가씨도 저기 서점 건물 때문에 왔구나?”
“음. 맞아요. 저 말고도 찾는 사람이 많나 보네요?”
“이 주변에서 빈 상가 자리 찾는 게 요즘 쉬운 일이 아니니까. 벌써 세 명이나 나한테 부탁하던데.”
“저희 친척 오빠가 워낙 탐을 내는데, 주인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여태 찾아다녔거든요. 혹시 사람 오거든 연락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엘리아는 남은 여비를 탈탈 털어 젊은 상점 주인에게 들려 주었다. 여태 그에게 돈을 주고 당부할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는지, 금화 한 닢에 작은 동전까지 챙겨 주니 주인의 안색이 대번 바뀌었다.
“암. 내 꼭 전해 주지. 어디로 연락 넣으면 되는가?”
“로앙가의 테오 위겐 기사에게 전해 주시면 돼요. 꼭 부탁드려요. 그리고, 제가 건물 때문에 이것저것 물어본 건 꼭 그 서점 주인에겐 비밀로 해 주시고요.”
입단속까지 마친 엘리아는 30분을 걸어 대로로 나와서야 마차를 잡아타고 로앙가를 향했다.
두 달 만에 집에 온 엘리아를 가장 먼저 맞아 준 건,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온 외젠 로앙이었다.
“외젠, 다녀왔어.”
“…….”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돌아온 누이가 미워서였을까.
외젠은 엘리아를 마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잘 다녀왔어.”
“…….”
화가 난 줄 알았는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가까이 다가가니 얼굴이 벌써 눈물범벅이었다.
엘리아가 두 팔 가득 그를 안아 주자 외젠은 꾹꾹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리며 서럽게 울고 말았다.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편지도 꼬박꼬박 보냈고, 데이지도 곁에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외젠은 여행 간다며 떠난 동생이 혹여 훨훨 날아가 다시 오지 않을까 봐 속앓이를 심하게 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잘못했어. 응?”
뒤이어 쫓아 나온 데이지까지 엘리아를 끌어안고 두 달 만의 해후를 기뻐했다.
“다음번에는 꼭 먼저 말하고 갈게. 아니, 다음에는 같이 여행 가자. 응?”
“너, 엘리 너는 이 와중에 안 간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 하지…… 응?”
외젠이 눈물을 참는다고 이를 악물며 씨근덕대는 모습에 엘리아와 데이지가 웃고 말았다.
“아가씨, 여행 즐거우셨나 봐요. 다시 가고 싶어 하시는 걸 보니까.”
“음…….”
엘리아는 두 사람 없이 보낸 겨울을 떠올렸다.
홀로 마차에 올랐을 때 자신을 괴롭힌 불안함, 낯선 곳에 도착해 허름한 여관 문을 열었을 때의 지독한 피로,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생소한 음식들을 입에 넣었을 때 느낀 달콤함. 떠들썩하게 보낸 시간.
그리고 크라우제 후작과 울리히 크라우제. 복수를 꿈꾸었으나 결국 체념하고 등 돌려야 했던 부유한 북부 영지.
짙은 무력감과 동시에 느낀 에드문트를 향한 마음. 그가 대행해 줄 복수가 결코 제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의 좌절감. 체념.
남부의 아름다운 풍경,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고도 자신의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아 하는 황후의 치졸함. 그를 향해 새삼 분노했던 순간들.
<그 도련님도 참 딱하지. 매번 남들 눈 피해서 수도 들락거리는 이유가 뭐겠어? 보호랍시고 아픈 어머니와 저택에 꼼짝 못 하게 하는데, 그게 감금이지 보호는 무슨.>
이제 남은 건, 기다림뿐.
“외젠이랑 데이지 걱정 끼쳐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 여행 다녀온 거 후회 안 해.”
엘리아는 다시 한 번 외젠과 데이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아 서늘한 바람을 막아 주기 위해서.
덜 아파할 테고, 더 성장할 저를 믿어 주길 바라며…….
“절대 후회하지 않아.”
두 팔 가득, 사랑을 담아 안아 주었다.
* * *
“아가씨, 전에 아가씨가 말씀하신 서점 말입니다. 오늘 문 열었다고 연락이 왔는데요.”
엘리아가 미뤄 두었던 선택의 시간이 다시 찾아온 건, 엘리아가 긴 여행을 끝내고 로앙가에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고마워, 테오. 나 집사한테 말해서 마차 좀 불러다 줄래?”
“나가시려고요? 제가 같이…….”
“아니야. 다들 이번 주에 공작령 내려가는 일 때문에 바쁘잖아. 잠깐 다녀오면 되니까 마차만 부탁해.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작은 거로!”
엘리아는 동행하겠다는 테오 경을 떼어 놓고선 로앙가에서 가장 작은 마차에 올랐다. 다른 마차들과는 달리 가문 표시가 달려 있지 않은 유일한 마차였다.
“다녀올게. 데이지랑 외젠이 찾거든 금방 올 거라고 전해 주고.”
북부의 시린 바람만 못했지만, 남부의 따스한 겨울보다는 뾰족한 겨울을 뚫고 마차가 길을 내달렸다.
그리고 12번가의 작은 서점으로 향하는 엘리아는, 독을 품고 있을 단검 한 자루를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