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북부 (50/79)

50. 북부

때는 엘리아가 열다섯, 그리고 에드문트가 열아홉이 되어 작위 승계를 앞두고 있던 시기. 공작가 세력은 끝을 모르고 팽창을 이어 갔다.

이제 베르디에 자작가처럼 공작가에 합류하는 것만으로 에드문트 라스페의 관심을 끄는 건 어려워졌으니, 라스페가에 줄을 대려는 귀족들은 학술원까지 찾아 엘리아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했다.

이전까지는 귀족이든 그의 자식들이든 한결같이 귀찮아했지만, 열다섯에 접어든 엘리아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전부 상대해 주었다.

“사촌이 베르디에 자작이라면서?”

“네, 엘리아 님. 사촌 언니 부부 덕분에 저희 남작가까지 세력을 옮기게 되었지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연말이면 북부 후작령에 인사를 다녀와야 했는데……. 음, 제가 적절치 못한 주제를 꺼내고 말았네요.”

“왜? 나는 괜찮아. 마침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북부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아…….”

“걱정 마. 그냥 단순히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일전에 학장을 만나러 온 레만 자작과도 잠깐 이야기 나눈 적 있었는데, 듣기론 중부와 북부는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라던데.”

“다른 세상……. 아마 계절이 다르게 흘러서 그런 말을 하셨나 보네요. 겨울엔 상상 이상으로 춥고, 여름은 또 여름 같지가 않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식생도 많이 달라 매번 식탁에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올라와서 고생했어요.”

“영지민들 사는 건 어때? 레만 자작 말로는 북동부는 광산 인력 수급이 어려워 사업에 차질이 생길 정도라고 하더라.”

“그건 아마 크라우제 후작령 때문일 거예요. 대규모 경작지가 여러 곳 있어서 겨울 외에는 주변 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들었어요.”

겨우 1주일 전 베르디에가에 이어 공작가에 합류한 남작 일가, 후작가의 핵심 세력과 척을 지게 되며 공작가에 넘어온 자작가…….

귀족들은 끊이지 않았고, 그 모든 사람과의 대화는 엘리아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로앙 백작께서 황궁에 오실 적마다 누이 자랑에 늘 바쁘십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엘리아는 대화를 빙자하여 귀족들에게서 북부의 상황은 어떤지, 지역 경제는 어떤지, 크라우제 후작 일가의 건강 상태는 어떠한지 등의 정보를 얻어 냈다.

“크라우제 후작이 내년 봄에 손자를 결혼시킨다고 해서 북부가 아주 난리입니다. 겨우 반년도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발표했으니까요.”

“내년 봄이라면……. 그 전에 있을 에드문트의 공작 작위 승계식을 의식한 건가 보네요.”

“예. 공작가에서 연초에 승계식을 통해 세력 과시를 할 계획인 것처럼, 후작가에서도 결혼식을 통해 세력을 결집시키고 권력을 과시하려는 속셈이겠지요. 하여간, 그 도련님 참 신세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신세가 불쌍한데요?”

“결혼 당사자 말입니다. 울리히 크라우제이던가요? 제법 영특해서 후작이 기대가 많았는데 별안간 학술원을 중단하고 나가선 여태 폐인처럼 살고 있답니다. 한데 이제는 억지 결혼까지 시키려 하니…….”

“그래요? 레만 자작님에게 듣기로는 꽤 절절한 사이라 결혼을 서두르는 거라던데.”

반년쯤 되니, 귀족들이 가진 정보 역시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는 후작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고, 다음 날에 찾아온 귀족은 후작가에서 새로운 교역로를 뚫어 떼돈을 벌어 댄다는 말을 전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라스페가에서 후작가를 음해하기 위해 만든 가짜 정보까지 뒤엉겨, 정확한 정보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내년이 되어 에드문트가 정식으로 공작이 되면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거야. 수도에서 떠도는 소문의 절반은 거짓이 되겠지.’

엘리아는 당분간 외젠의 앞에서 계속 모르는 척해야 하겠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 수는 없었다.

무지한 엘리아가 얼마나 멍청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이미 울리히 크라우제가 깨닫게 해 주지 않았던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예상할 수 있어야 해. 한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거짓과 진실을 제대로 가려낼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아는 초조해졌다. 한번 자각한 결핍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으니 엘리아는 스스로가 우물 벽만 보고 사는 개구리처럼 느껴졌다.

평생 본 적 없는 세상을 누군가의 입으로 전해 듣기만 하다간, 어느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척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져만 갔다.

혼자 나갈 수 있을까.

밖으로 뛰쳐나가면 원하는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열다섯의 끝자락을 지나 가을이 되었고, 엘리아는 더는 선택을 미룰 수 없었다.

“졸업 축하드려요, 엘리아 님. 2년은 더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네요.”

“고마워. 졸업한다고 선물까지 챙겨 주고.”

“학술원 떠난 뒤에도 어떻게 지내시는지 소식 들려주세요.”

열여섯이 된 엘리아의 선택은, 월반과 동시에 졸업하겠다는 통보.

그리고 잠시 혼자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로앙가에 보낸 편지 한 통이었다.

“음. 일단은 여행이나 할까 해.”

“여행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열여섯의 겨울. 엘리아는 남들보다 2년 먼저 학술원을 떠났다.

우물 안처럼 단단히 저를 보호하던 장소를 떠나서…….

“내가 모르는 곳으로.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에 갈 거야.”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 *

가을을 지나니 땅이 얼어붙고, 하늘이 얼어붙어 새하얀 가루 흩날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중부에서 출발한 커다란 마차가 겨울과 함께 찾아온 추위를 뚫고 달렸다.

누군가 바닥에 둔 짐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겨울바람 지나가는 소리, 사람들의 잔기침 소리, 무료함을 달래는 대화 소리…….

마차에 탄 아홉 명의 여행자들이 소리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엘리아도 어깨에 올려 둔 모포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음에 일조했다.

“어린 아가씨는 혼자 어딜 가는가?”

움직임을 보이기가 무섭게 낯선 동행인이 엘리아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추위를 핑계로 눈만 빼꼼 내놓았는데도 사람들은 금방 엘리아가 어린 소녀라는 걸 눈치챘다.

엘리아는 정체를 들킬까 봐 경계하는 대신 천연덕스럽게 굴려고 노력했다.

“친척 집에요. 가는 길이 멀어서 걱정이에요.”

“아이고. 도착해서도 아가씨는 어딜 더 가야 하는가 봐?”

“네, 북부에 가거든요.”

“크라우제 후작령 말이지? 거기 요새 일감이 많다더니, 젊은 애들은 다 북부로 가네. 가면 여기보다 훨씬 춥다던데.”

“그래. 얼마나 추우면 북부에 사는 귀족 나리들이 가을 지나기가 무섭게 다들 중남부로 내려오려 하겠어.”

“이번엔 북부에 무슨 대단한 일거리가 생겨서, 엉덩이 붙들고 있을 거라던데?”

“귀족들이 돈 쓰는 거 말고 무어 할 일이 바쁘다고 추운 델 자처하고 있대?”

젊은 남자가 뱉은 신랄한 말에 엘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북부라니. 대단한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엘리아는 드문드문 대화에 참여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홀로 일거리를 찾아 북부로 간다는 소녀가 귀족 아가씨인 줄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다 에드문트를 앉혀 두었으면, 어땠을까? 혹은 외젠이라든가.’

제가 아는 귀족들을 데려다 평민 행세 시켜 놓으면, 그래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까?

어쩌면 외젠은 그들에게 수줍은 많은 청년으로 보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에드문트는? 그가 뚱한 표정을 하고서 강제로 평민 행세를 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

엘리아는 눈을 감고 그를 외면할 때조차 에드문트가 주는 위압감을 느끼곤 했으니까.

눈을 마주치는 순간, 다들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될 게 분명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에드문트는 나랑 참 다른 사람이구나 싶네.’

마차가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여행객들의 대화 주제는 두고 온 자신의 예전 삶으로 점철되었다. 엘리아는 서부 토박이인 중년 여자의 삶이 어떠했는지, 수도에서 장사하다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인이 평생 어떻게 살았는지 따위를 들으며 무료함을 견뎠다.

사흘을 꼬박 마차로 이동하고, 마차를 갈아타 닷새를 더 보내고서야 겨우 크라우제 후작령에 도착했다. 수도에서 로앙가 영지에 내려갈 때보다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여행길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일을 구하러 먼 곳에서부터 왔다던 또래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한 뒤, 사람들에게 추천받은 여관을 찾아가 방을 하나 얻었다.

“손님, 저녁은 내려와서 먹을 건가?”

“아니요…… 일단 좀 잘게요.”

좁은 방에서 나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삐걱거리는 침대에 불평할 새도 없이 쓰러져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자면서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지만, 열병을 앓아 끙끙 앓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아직 여독이 덜 풀린 몸을 이끌고 1층으로 내려가니 아침 식사를 하러 온 이들로 분주했다. 처음 온 여관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마침 주방에서 나왔던 주인이 엘리아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해 왔다.

“손님, 이제 일어났는가? 온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어. 마차 여행이 참 고되었나 보지?”

“그러네요. 음……. 제가 왔을 때보다 사람이 많아졌네요?”

“다 자고 가는 여행자들은 아니고, 저기. 후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야.”

“후작가요? 아……. 결혼식을 한다더니. 그것 때문에 사람이 많은가 보네요.”

“잘 아네. 사흘 전에 처음 온 거 아니었어?”

“마차에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실은 저도 일을 구하고 싶어서 왔거든요.”

“그럼 우리 여관만 한 곳이 없지. 후작가에서 겨울 한 철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대부분 여기서 끼니를 때우거든. 내가 몇 명 소개해 줄 테니까, 적당히 친분 쌓고 부탁 넣어 봐.”

오지랖 넓은 여관 주인 덕분에 엘리아는 아침 시간과 저녁 시간에는 후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은 시간에는 온몸을 꽁꽁 싸맨 채 후작가의 성 근방의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북쪽으로 많이 올라온 것도 아닌데 정말 다른 세상 같네. 게다가, 영지 형편도 소문과는 다르고.’

추위에도 꼬박꼬박 문을 여는 상점들, 엘리아만큼 온몸을 꽁꽁 싸매고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저녁이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와 술과 음식으로 여독을 푸는 외지인들…….

라스페 공작가에 밀려 파산할 지경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더니, 북부 영지는 어딜 가도 파산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활기만 가득 넘쳤다.

“살기 좋은 곳이네요.”

“암. 수도 못지않지? 전부 후작님 덕분이지. 우리 좋으라고 그렇게 열심히 세력 확장하시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후작가의 권세가 높아지니 우리가 같이 득 보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가요?”

“이 향신료도 그렇고, 말린 생선도 그렇고. 전부 다른 영지에서 교역품으로 들어오는 거잖아? 영주님이 힘이 없으면 이런 데에 세금이 얼마나 많이 붙는다고.”

“세율이 다른 영지와 많이 차이가 나려나요?”

“물론 교역하기 좋은 위치인지라 물건값이 많이 싼 것도 있지만, 세금도 예전에 비해 크게 오르지 않았어. 다른 영주들은 틈만 나면 권력자들에게 뇌물 갖다 바쳐야 해서 세금을 꼬박꼬박 올려 대는데, 그게 얼마나 우리 같은 사람들 살기 힘들게 한다고.”

대대로 후작령에 살던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영주님 권세 덕에 좋은 시절 보낸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나 엘리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대가 대부분 평지라서 작물 키우기도 좋고, 노동력도 풍부한 데다가 지형적으로 사방에 장애물이 적어 교역도 유리하고. 위로는 산이 막아 주고 양옆으로는 예전부터 우방이었던 영주들의 땅이 있으니 침략에도 안전하고.’

지도로 확인한 것 이상으로 크라우제 후작령은 세 살배기 어린애가 다스려도 잘만 굴러갈 축복받은 땅이었다.

물론 영지민들이 말한 대로 크라우제 후작의 영향력도 있겠지만, 이 축복받은 영지에 무슨 변고가 생기지 않는 한 크라우제 후작의 기반도 무너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분명, 파고들 틈이 보이기도 했다.

* * *

북부에서 머문 지 1주일이 지났다. 매일같이 엘리아와 얼굴 보며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의 대화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뭐 다들 후작령이 살기 좋다고는 하는데, 예전만큼은 또 아니지. 수도 사정 잘 아는 상인 중에선 기반을 중부로 옮기려고 눈치 보는 이들이 많아.”

“중부요? 혹시 공작령 인근 말하는 건가요?”

“그래. 듣자 하니 북부 출신 상인이면 정착금도 꽤 두둑하게 챙겨 준다지? 아, 물론 정착금만 보고 가는 이들은 드물지. 후작령이 워낙 발전 없이 정체되어 있고, 차기 황제로 밀고 있는 사위분께서 워낙 행실이 좋지 않다 보니까…… 다음 세대 권력이 그쪽으로 옮겨 갈 거라고 짐작하는 거겠지.”

“후작님의 사위라면, 황제 폐하의 동생분 말하는 거죠?”

“그래. 반황제파 사람들은 아직도 3황자라고 부른다며? 실은 여기선 그보다 더한 말로 부른다고. 망나니 사위이니, 허수아비니…….”

“그분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여기 인근에 커다란 여관이 몇 개 있었는데, 틈만 나면 찾아와선 주정 부려 대더니만 급기야 죄 없는 사람까지 하나 죽였거든.”

“술에 취해 사람을 죽였다고요?”

귀족이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 엘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사람들이 놀란 어린아이 대하듯 웃고 말았다.

“아이고, 아가씨 오늘 무서워서 잠 못 자겠네.”

“그러게. 영주님 이야기까지 듣다가는 까무러치겠는데?”

외지에서 온 엘리아에게 반질반질한 겉껍데기를 보여 주는 걸 넘어서, 그들은 자청해서 속을 잘라 썩은 부위를 구경시켜 주기에 이르렀다.

“내가 후작가에서 일한 지 벌써 석 달째라, 거기 사용인들이랑 꽤 친해졌단 말이야. 근데, 어휴. 말도 마. 얼마나 바짝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지. 나더러 혹시 정식으로 일자리 받을 생각 없냐고 묻는데 고민도 않고 바로 사양했어.”

“왜요? 돈도 많이 주고, 따뜻한 곳에서 일할 수 있잖아요.”

“그럼 뭐 해! 사람 죽어 나가는 곳인데. 이건 비밀인데…… 몇 년 전부터 후작님께서 술에 취하면 사용인은 물론이고 제 가족들한테까지 손찌검을 심하게 해 댄다나 봐.”

“지난달에는 좀 도가 지나쳤지? 다짜고짜 술병으로 시중들던 사람들을 때려서, 그중 한 명은 요양하라고 고향으로 보냈다고는 하지만…… 아마 죽었겠지.”

“이번에 결혼하는 손자도 성에 돌아온 뒤부터 마구간만도 못한 초라한 별관으로 쫓겨나서 사는 신세라잖아.”

“나도 들었어. 그나마 후작가 사람 중에는 심성이 고운 도련님이셔서, 사용인들이 불쌍하다고 몰래 챙겨 주긴 하는데……. 얼굴 꼴은 물론이고, 언제부턴가 다리까지 절더래.”

후작 일가에 대한 뒷말은 그가 얼마나 제 가족들에게 가혹한지 알게 해 주었다.

‘기대가 많던 손자라고 하더니……. 피 섞인 가족을 억지 결혼 시키는 것도 모자라 폭행하고 감금하기까지 한다니.’

<엘리아 양.>

가혹한 소년의 삶을 처음 알게 된 날, 엘리아는 꿈을 꾸었다.

<저는 로앙이 아닌, 당신을 원합니다.>

엘리아는 제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절박한 마음이 담긴 목소리가 뒤에서 메아리쳤지만, 엘리아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푸른색 괴물의 입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아주 짧고 의미도 없는 단편적인, 꿈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는 고작 꿈 따위 때문에 다음 날부터 지독한 열병을 앓아야 했다.

* * *

홀로 여행하는 게 쉽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했다. 아마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한 번쯤은 크게 앓으리란 각오도 했고.

‘설마, 악몽 꾸고 앓을 줄은 몰랐는데.’

엘리아는 무려 사흘 동안이나 좁은 여관방에 처박혀 스스로를 돌보아야 했다. 다행히 미리 약을 챙겨 온 덕분에 낯선 의원에게 몸을 보여 진료받을 일은 없었다.

<아가씨도 며칠 감기 때문에 고생했다며? 북부 처음 오는 사람들 다 한 번씩 그리 아파.>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한마디씩 건네는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되어 주긴 했으나,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북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1주일도 남지 않고 말았다.

‘사람들 말대로, 그냥 평범한 감기였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질리도록 앓아 온 후유증을 엘리아가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제가 아픈 건 전부 다 크라우제 후작가 때문이라며 속으로 욕을 퍼부어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약이 얼마나 남았으려나……. 이 근방에선 구하기도 어려울 텐데.’

신경질이 난 채로 남은 약을 세어 보던 엘리아는 가방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이걸…… 넣어 둔 것도 잊고 있었네.’

가방 안에서 끄집어낸 작은 가죽 주머니를 열자, 자작가 아가씨에게 선물 받은 단도 한 자루가 나왔다.

<여기, 손 닿지 않게 조심하고 검집 열면……. 보이시죠? 하소를 발라 둔 거예요.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 사람 한둘 쓰러트리는 거 우스운 맹독이에요.>

<이걸 가지고 다니라고?>

<학술원에 있는 사람들 절반은 가지고 있을걸요? 이걸로 누구 꼭 찌르겠다는 게 아니고, 여차하면 이걸로 찌르면 된다고 안심하고 싶어 들고 다니는 거죠.>

소녀의 설득에 엘리아는 찝찝함을 떨치고 독 묻힌 검을 여행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사람 죽일 독을 가죽 가방에 넣어 두고는 없는 듯 지냈는데.

‘스치기만 해도 사람 한둘 쓰러뜨리고……. 나이가 많다면 죽을 가능성도 크다고 했지.’

아직 열이 덜 내린 몸 탓이었을까. 엘리아는 단검을 보며 죽음을 떠올렸고, 죽은 부모가 아닌 부모를 죽인 후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로앙과 라스페가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후작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 무척 기뻐 웃었으리라. 인륜마저 저버리고 제가 죽인 이의 장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자신이 지옥으로 밀어 넣은 로앙가 남매를 바라보며, 그들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며 아마 몇 년이고 두고두고 곱씹을 가학적인 성취감을 느꼈을 테고.

‘성에 들어가면, 후작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 단검을 잘 숨겨서 들어가면…….’

복수를 계획하고 북부에 온 건 아니었다. 하나 순간 치민 분노에 눈이 멀어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열여섯의 제가 사용인 행세를 하며 후작가에 숨어들어 가서 그를 찌르고, 고통 어린 모습을 보게 된다면.

‘나도 기뻐할 수 있을까. 절명하는 후작의 모습을 보며 복수했다며 웃을 수 있을까.’

울리히에게는 조부의 수급을 가져오라며 겁박해 댔지만, 정작 엘리아는 독 묻은 단검 손잡이도 잡지 못했다.

엘리아는 제가 검 한 자루 손에 쥐는 것도 망설인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그저 가능성만을 재어 보고자 했다.

절반은 호기심 탓이었고, 절반은 충동적인 복수심에서 기인했다.

후작가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엘리아는 차근차근 정보를 모았다. 과연, 엘리아 로앙이 크라우제 후작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인가.

‘겨울 한 철 일하는 하인으로 들어가면 보통 무슨 일을 하나요?’, ‘석 달이나 일했다면, 혹시 후작님을 뵌 적 있나요?’, ‘성안에는 기사들이 아주 많으려나요?’

제 역량으로는 후작에게 접근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 보기도 했다.

별관에 갇혀 원치 않은 결혼식을 기다릴 울리히 크라우제.

그를 몰래 불러낼 수 있다면,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결혼식이 무산될 만큼만 해를 가한다면…….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내 조부모께서 평생 후작가에서 일했는데, 사람이 어찌나 독한지 가족한테마저 고운 말 한번 한 적 없다던걸?>

엘리아는 울리히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다시 지워 버리고 말았다.

‘그는 아니야. 아무 소용 없을 테니까.’

후작은 그에게 욕을 퍼붓고, 감금하고, 불구로 만들어 가축처럼 남에게 팔아 버리길 원한다지 않았던가.

그러니 결코 복수가 될 수 없었다.

‘내가 빼앗긴 건 슬퍼서 죽고 싶을 만큼 소중한 사람들이었어. 복수가 되려면, 그도 똑같이 소중한 걸 잃어야만 해. 하찮게 여겨 함부로 대하는 손자 따위가 아니라.’

가족에게조차 폭력적인 후작에게 소중한 게 무엇이겠는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황권. 사람을 죽여서라도 가지길 원했던 가장 높은 위치.

<라스페 공자의 조부 말이야. 그 사람이랑 유년 시절부터 평생 비교당하느라 사람이 돌아 버린 거라던데? 그 손에 죽어 나가는 하인 중 태반이 죽은 공작처럼 검은 머리라는 소리도 있어.>

그리고 열등감의 해소.

그가 황위 다툼에서 패배한다면, 그것도 평생 질투해 왔다던 라스페가에 황제의 자리를 빼앗긴다면 완벽한 복수가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에드문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엘리아는 눈으로 확인한 후작가의 비옥한 영지를 떠올렸다.

전부 무너지면, 복수할 수 있으리라.

또한 작은 여관방 창문으로 보았던 기나긴 행렬들, 후작에게 충성하고자 찾아온 수많은 귀족을 떠올렸다.

전부 빼앗으면, 복수할 수 있으리라.

‘복수의 끝은 아마 벨레노아 백작님의 즉위식이 되겠지. 에드문트는 공작이고 사촌이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즉위식을 지켜볼 테고, 나는…….’

엘리아는, 아마 라스페라는 성을 가진 채 에드문트의 옆에 서 있으리라.

‘어떤 기분일까. 에드문트의 곁에서 복수가 끝나는 광경을 지켜보는 건…….’

낡은 창문 틈으로 북부의 겨울바람이 스미었다.

엘리아는 옆에 개켜 두었던 담요를 끄집어 몸에 단단히 둘렀다.

‘춥다.’

담요를 덮었지만 공허함이 자꾸 추위에 장작을 밀어 넣었다. 시린 추위가 무력감을 잡아먹으며 점점 몸집을 불려 갔다.

몸을 웅크려 스스로의 체온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곤 에드문트를 생각했다.

‘나도 복수에 동참하고 싶어. 함께 어려운 일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위험한 일을 무릅쓰고…… 그렇게 복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와 나란히 설 수 있을까? 에드문트와 함께 ‘우리의 복수’가 끝났다며 자축하길 바라거늘. 단검 손잡이 한번 쥐는 것도 주저하는 자신이 나란히 서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복수의 행위자로 이름 올리는 건, 죽은 로앙 부부의 딸이 아닌 에드문트 라스페 혼자가 되는 게 아닐까.

‘에드문트가 내 몫의 복수까지 집어삼키면, 그러곤 타고 남은 재 가루만 남긴다면. 그럼 나는 남은 흔적만 끌어안고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텐데. 감정이 없는 그가 내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을까.’

희망에 찬 미래보다 자조적인 체념이 먼저 찾아오는 건, 엘리아가 아직 어린 탓일지도.

스스로가 가장 불쌍하다는 어린애 같은 연민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얼마든지 복수를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덜걱거리는 창문 덮개가 엘리아의 상념을 깨웠다. 눈가루 섞인 바람이 작은 여관방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홀로 웅크려 봐야 따듯해질 리 없는데, 이미 추위에 굳어 버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춥다. 너무, 너무 추워.’

달아날 수 없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모처럼 눈보라가 멎어 추위가 한풀 꺾인 날이었다. 엘리아는 따듯한 물에 몸을 녹인 뒤 짐을 챙겼다.

가죽으로 꼼꼼히 감싼 단검은 가장 안쪽에 밀어 넣은 뒤, 길가에서 충동적으로 산 장난감 오르골까지 챙기니 짐 가방이 가득 찼다.

“결국 친척한테는 연락 못 받았는가?”

“네, 사정이 있는 모양이에요. 어쩔 수 없죠.”

여관 주인이 짐을 챙겨 들고나온 엘리아를 보며 아는 체를 했다. 혼자 북부에 찾아와서 2주 넘게 기다렸는데 빈손으로 가게 되었으니, 소녀를 향한 그의 눈에는 동정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가?”

엘리아는 제 것이 아닌 동정심을 받아 주다가 행선지를 묻는 말에 멈칫했다.

여관 문을 열고 떠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머리칼 색을 바꾸고, 신분과 나이에 이름까지 속였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거짓으로 쌓은 가짜였다.

마지막조차 거짓으로 끝내는 게 옳겠지만, 엘리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진실하게 대해 보았다.

“여행이라도 할까 해서요. 이번엔 남부로 가 보려고요. 여기만큼은 춥지 않을 테니까요.”

“아, 남부 관광이라면 튀링겐 영지가 유명하지 않던가? 거긴 무슨 특이하게 생긴 새가 인기가 좋아서, 개나 고양이 대신에 그걸 키운다던데.”

낯설 리 없는 영지 이름에 엘리아가 살짝 웃음 지었다.

“새를 키운다니, 신기하네요. 혹시 가게 되면 확인해 볼게요. 건강하세요.”

“그래. 가는 길 먼데 조심하고. 여행 잘하게.”

진실 한 조각으로 얻은 따듯한 배웅을 뒤로하고 엘리아는 남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북풍이 마차에 꼬리처럼 붙어 엘리아를 따라갔다. 남으로, 남으로 바퀴를 굴리던 마차에 따듯한 햇살이 스밀 때까지.

낯선 풍경이 어린 소녀를 맞이한 뒤에야, 마침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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