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선물 (49/79)

49. 선물

학술원으로 돌아온 엘리아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간 모아 온 자료를 전부 한쪽 구석으로 치워 버리고, 부모의 필체가 남은 종이도 약혼 증서와 함께 상자에 넣어 손 닿지 않은 곳에 밀어 넣었다.

모르는 척하는 게 뭐 얼마나 힘들겠나 싶었다. 그냥 상자에 전부 넣어서 다시는 안 열어 보면 그만일 거라며, 우습게 알았다.

사실 저 하나 잊고 산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엘리아 양, 일전에 몸이 안 좋아서 큰일 날 뻔했다지요.”

외젠의 말대로 엘리아는 학술원에서 크라우제 후작 일가를 마주해야 했다.

나이도 다르고, 지내는 건물도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심지어 엘리아는 후작의 손자 손녀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대까지 해 가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상대가 뻔뻔함으로 일관하며 엘리아에게 찾아올 때에는 피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린 약혼자가 이렇게나 자주 크게 앓으니, 라스페 공자가 걱정이 많겠습니다. 보아하니 늘 일정에 무리하는 것 같은데…….”

“울리히 크라우제. 참 세상 쓸데없이 바쁘게 사네. 교류도 없는 로앙가의 여식 일정이니 건강이니 하는 것까지 염려하느라 공부할 시간은 있는지 몰라.”

크라우제 후작의 손자는 심지어 틈만 나면 엘리아를 찾아와 귀찮게 굴기까지 했다. 그러나 얌전 떨며 엘리아에게 존대하는 모습도, 예쁘장한 얼굴로 웃는 꼴도 전부 좋아 보일 리 없었다. 되레 엘리아의 화만 돋우었을 뿐.

엘리아는 감정이 격해지면 눈물부터 고이는 한심한 성격에 저주를 퍼부으며, 손이 터지도록 주먹을 쥔 채 독한 말을 쏟아부었다.

“후작께선 손자 손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바쁜 일 줄이고 책상에나 붙어 있는 게 어때? 연로하신 분께서 손자 멍청한 꼴에 속 답답해 죽어 버리기 전에 성과는 보여 드려야 할 것 아냐.”

말로 그를 모욕한 뒤에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마음 같아선 다시 쫓아가서 대꾸도 제대로 못 하던 멍청한 소년의 뺨이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잔인한 충동이 치밀 때마다, 엘리아는 외젠을 생각하며 속을 삭였다. 내키는 대로 욕을 퍼붓고, 주먹질하다간 분명 부모의 원수라는 말까지 퍼부을 게 분명했으니,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내가 상대하는 건 기껏해야 크라우제 후작이 낳은 찌꺼기일 뿐이야. 외젠은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도 모르는 척해야 하는데. 그 무력감을 전부 혼자 버텨 내고 있잖아.’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꼬박꼬박 저택에 돌아가 외젠과 데이지를 보며 다짐했다.

“학술원 생활 어떻냐고? 내가 불편할 게 뭐 있겠어. 백작가 이상인 자제가 나 하나뿐이라, 전부 공대해 주기 바쁜데 뭘.”

입 다물고 있느라 속이 터질지언정, 외젠이 바라는 대로 고민 없이 천진한 동생이 되겠노라고.

서너 달에 한 번은 에드문트를 만나야 했다. 전처럼 괴물이라며 무서워하진 않게 되었다. 엘리아는 대신 에드문트를 흘끔거리며 지루한 저녁 식사 시간을 보냈다.

‘또 오리 요리네. 전에 생선보다는 맛있긴 한데…… 왜 하필 오리야?’

언젠가부터 공작가의 식탁에는 늘 오리 요리가 나왔고, 엘리아는 그걸 한결같이 무뚝뚝한 에드문트라고 생각하며 꼭꼭 씹어 넘겼다.

‘너도,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생각하겠지.’

만약 지금 이 식사 자리에서 엘리아가 부모의 죽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에드문트의 무심한 시선도 조금은 달라질까. 엘리아는 눈앞에 있는 남자는 없는 셈 치고, 제 약혼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았다.

‘내가 뭐라고 고백한들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겠지.’

외젠이야 의자가 넘어갈 정도로 거센 반응을 보이겠지만 에드문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놀라서 표정이 변한다거나, 웃는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겠지. 복수를 달성하게 된다면 몰라도.’

에드문트가 부모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복수를 원하고 생존을 추구한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적어도 끝이 오는 날만큼은 그도 기뻐하지 않을까.

그때는, 에드문트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엘리아는 사용인들이 빈 접시를 치우고 후식을 내어놓는 틈에, 에드문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누군가 ‘그 공자께서 웃으시면 참 예쁠 텐데,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더라.’라고 말한 게 떠올랐다.

미동 한 번 보이지 않는, 입술 끄트머리만 살짝 올라간다면. 그리고 눈꼬리에 감정을 매달아 아주 살짝만 휘어 준다면…….

“엘리, 왜 그래? 체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얼굴에 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좀 보자.”

맙소사. 엘리아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크라우제 후작 일파의 아가씨들이 멍청하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에드문트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말이다.

아마 그들도 엘리아처럼 상상해 본 게 아니었을까.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엘리아는 결국 공작가를 나설 때까지 에드문트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 * *

안타깝게도, 엘리아가 제 약혼자의 잘난 낯짝을 새삼스레 자각한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에드문트를 흠모하여 주변을 맴도는 학생들은 여름날 파리 떼처럼 성가셨고, 사람들이 그를 찬미해 대는 말들은 공감이 되긴커녕 엘리아의 속만 뒤집어 놨다.

“엘리아 양, 명민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같은 수업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 크라우제 후작의 손자는 눈치도 없이 자꾸 엘리아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심지어 그는 엘리아가 두 학년 높은 수업을 듣는 걸 보며 ‘어려운 게 있으면 이야기하라.’라고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다.

‘대체 왜 찾아와서 사사건건 시비야. 내가 언제까지 하대해 가며 싫은 티 내야 알아듣는 거냐고!’

매번 무시하고 독설을 퍼붓는 것도 지쳐 엘리아는 스스로를 피신시켰다.

서고에 처박혀선 목적의식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파고들자, 가깝게 지내던 학자들이 엘리아가 지루해하는 걸 눈치챈 건지 일거리를 제안해 왔다.

“귀족가 자제분께서 보시기에도 보수가 적당할 겁니다.”

엘리아는 복수이니, 크라우제 후작이니 하는 것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거기에 돈까지 벌면 더 좋았고.

엘리아는 학자들이 챙겨 주는 번역이나 필사 등의 일감을 족족 받아 와서 책상 높이 쌓아 두기 시작했다.

“엘리아 님, 그러다 병나요. 대체 그 돈 벌어서 뭐 하시려고요?”

“미리 벌어 놓고 나중에 생각하지 뭐.”

“저희처럼 귀족가 혼처도 없고, 물려받을 작위도 없는 애들이야 미리 죽자 살자 모아야겠지만……. 엘리아 님은 졸업하면 바로 결혼일 텐데. 그것도 대부호 라스페 공자님이랑.”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간에 엘리아는 꿋꿋이 일감을 해치웠다.

“엘리아 양, 무리하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요.”

그야말로 펜이 부러져라 일한 통에, 그저 복잡한 마음 달래라고 일감을 주었던 학자들까지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을 틈타 로앙가에 다녀왔더니 학술원 기숙사 책상 위에 못 보던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제 방을 청소하는 하인을 불러다 물어보니, 모르는 일이라 딱 잡아떼고는 도망쳐 버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출처를 아는 이가 없었다.

“선물 같은데. 여기 이름도 있는걸요. ‘엘리아 양께’라고만 적혀 있는 걸 보면 약혼자께서 보낸 선물 아닐까요?”

호기심에 굴복한 엘리아가 사람들 앞에서 상자를 열었다.

겹겹이 싸인 포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짙은 푸른색 보석이 박힌 펜 한 자루였다.

“엘리아 님, 누가 보낸 건지 짐작 가는 사람 없나요?”

“……글쎄. 발신인을 적지도 않았고, 편지도 없는걸.”

“좀 이상하긴 하네요. 발신인도 없이 이렇게 값비싼 걸 보내고.”

“굳이 적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요?”

상자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 엘리아는 한참 동안 푸른색 펜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이라면 설마……. 아니겠지만, 일단 외젠한테 물어볼까.’

분명 에드문트가 준 선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엘리아는 자꾸 그를 떠올렸다.

굳이 발신자를 적지 않은 것도 딱 제 약혼자다운 행동이었으니까.

외젠에게 다음 날 보낼 편지 한 통을 적으면서도 엘리아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열네 살의 엘리아는 그만 기대하고 말았으니…….

<엘리아.>

그날 처음으로 에드문트가 꿈에 나왔다. 괴물이 아닌 모습으로. 장례식에나 어울릴 새카만 예복 대신, 평범한 귀족가 도련님이 입을 법한 옷차림을 하고선.

<엘리.>

이름을 불렀다. 그가 알기나 할까 의심되는 애칭을 다정하게 불러 주었다.

무엇보다 그가 보여 주는 웃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엘리아는 꿈인 줄 알면서도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같은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는 동질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어릴 적 기억, 약혼자라는 특별한 관계성.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엘리아를 잠시나마 설레게 했다.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저, 엘리아 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다음 날, 이른 아침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전날 정체불명의 상자를 열었을 때 함께 있었던 남작가 도련님이었다.

소년은 전날 밤을 설친 흔적을 눈 아래에 선명하게 매단 채 어렵게 말을 꺼냈다.

“실은 주말에 본가에 가던 중에 만난 사람이 엘리아 님에 대해 물어보아서…….”

“나에 대해서?”

“예. 그게, 그 여자 말로는 학술원에 다니는 동생이 로앙가의 아가씨와 가깝게 지내는지라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서 제가, 엘리아 님이 전에 펜이 부러졌다는 이야기 하셨던 걸 전해 주었거든요.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엘리아는 더듬거리는 소년의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날 선 감각이 불길한 징조를 감지했다.

“어제 선물 받으신 거 보고, 그때 만난 여자의 동생이 선물한 건가 싶어 주변에 물어봤더니…….”

순간, 엘리아는 간밤의 꿈에 나타나 자신을 착각하게 했던, 약혼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희 중에 누이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환상에만 존재하던 남자의 미소가 우르르 깨어졌다.

태풍을 이기지 못해 조각나 흩어지던 유리창처럼. 바람에 찢겨 바닥에 흩어지던 투명한 가루처럼.

부서진 꼴을 보고서야, 하룻밤의 망상이었음을 절실히 깨닫고야 말았다.

* * *

“엘리아 아가씨, 정말로 다른 사람에게는 말한 적 없습니까?”

누군가 엘리아의 뒷조사를 하고, 수상한 선물까지 보내왔다는 이야기에 학술원은 완전히 뒤집혔다. 학술원 소속 기사들이 곧장 엘리아의 방에서 발견된 펜을 수거한 뒤, 만약을 위해 침입자를 찾아 나섰다.

엘리아는 학술원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학장실에서 기사들이 수색을 끝내기를 기다려야 했다.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된 제국 중앙 학술원을 뒤지고,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일은 당연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초조함과 허탈함이라는 상반된 감정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엘리아는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엘리아 양.”

그러나 문 앞에 나타난 건, 크라우제 후작의 손자인 울리히 크라우제였다.

“잠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엘리아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문을 닫아 버리려 했다. 하나 양쪽으로 넓게 열린 문을 붙잡아 당기는 순간, 크라우제의 손자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보낸 겁니다.”

“뭐?”

“단순한 호의였는데 그만 엘리아 양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아서 사과드리고자…….”

울리히 크라우제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엘리아가 손 닿는 대로 그를 잡아채선 안으로 끌어들였으니까.

문이 세게 닫히고, 커다란 학장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다시 말해 봐. 울리히 네가 나한테 뭘, 보냈다고?”

손이 떨렸다. 갓 시작된 태풍이 소녀를 무참히 흔드는 바람에, 엘리아는 식탁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유리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가, 당신께 푸른색 보석이 박힌 펜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소년의 담담한 목소리가 엘리아를 밀어 버렸다.

유리잔이 바닥을 굴러 산산이 조각났다.

가득 채우고 있던 기대감이, 비처럼 쏟아지고 말았다.

엘리아는 아마 그동안 의도적으로 자신의 주변을 맴돌았을 소년, 울리히 크라우제를 바라보았다.

곱슬거리는 연갈색 머리칼, 그리고 금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가 소년이 크라우제 후작가의 자손임을 증명해 보였다.

“미안합니다, 엘리아 양.”

그런 주제에 엘리아의 앞에서 참담한 심경임을 온몸으로 호소해 대었다. 빗속에서 한창 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처연함이 느껴졌다.

처연하다니. 소년이 대체 무슨 권리로 엘리아의 앞에서 그따위 감정을 드러낸단 말인가.

“…….”

악문 턱에서 도통 힘이 빠지지 않았다. 엘리아는 분노로 온몸을 경직시킨 채, 한 자 한 자 찍어 내듯 뱉어 내야만 했다.

“내 이야길 캐묻기 위해 접근해 왔다던 여자, 후작가의 사람이었어?”

“아닙니다. 가문은 이번 일과 관계없습니다. 제가…… 따로 고용한 자였습니다.”

“고용했다고?”

“당신께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마땅히 좋아하실 만한 것을 찾기 어려워 의뢰를 넣었습니다. 그렇지만 세간에 알려진 정보를 제공할 줄로만 알았지, 그자들이 감히 엘리아 양을 불안케 하는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는 지은 죄를 알았는지 엘리아가 묻는 대로 곧이곧대로 대꾸하였다. 이어 낙엽색을 닮은 머리칼이 굽이치며 엘리아의 시야 아래로 저물었다.

“엘리아 양.”

이름 불린 소녀가 무릎을 꿇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귀족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굴종이었으나, 엘리아에게 고깝게 보일 리 없었다.

그건 소년만 홀로 만족하고 말 사과였으니까.

“약혼자가 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가문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하나 크라우제가 당신의, 로앙의 선택이 될 수는 없겠습니까.”

“지금 무슨…… 설마 나더러, 라스페 대신 크라우제가 되라는 거야?”

열여섯이면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거늘. 엘리아는 소년의 아둔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화가 치밀면 꼭 눈물이 터지곤 했는데, 무릎 꿇은 후작의 손자 앞에서 엘리아는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분노가 차고 넘치는 바람에, 눈물샘도 콱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나를 마음에 담았어?”

“예. 그리하여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다만 당신을 향한 감정을, 마음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순순한 긍정에 엘리아가 몸을 흠칫 떨었다. 제 감정에 취한 소년은 그 작은 거부감을 눈치채지 못한 채 속을 고백했다.

“엘리아 양. 용서해 주시고, 허락해 주신다면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

만약, 엘리아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랬다면 이 백치나 다름없는 소년의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

약혼자는 무심하기만 하고, 가족이라곤 외젠과 데이지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좀체 나아지지 않는 로앙가의 사정…….

어쩌면, 크라우제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걸 몰랐더라면. 엘리아는 자신을 라스페가에 팔아 치우는 것보다, 크라우제 후작의 손자에게 떠넘기는 편이 로앙에게 이득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엘리아는 스스로 세운 가정이 너무나도 끔찍해 진저리 쳤다.

“울리히, 너는…….”

이름을 부르자 단 한 번도 아파 본 적 없었을 그의 얼굴이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로앙이 크라우제의 것이 되길 원해? 진심으로?”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고백과 동시에 울리히의 눈에 불이 붙었다. 짙은 소유욕은 열여섯인 소년에게도, 열넷의 엘리아에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울리히의 열망은 부끄러운 줄 몰랐으니, 엘리아는 진심으로 그를 경멸했다.

“그렇다면 약혼 선물을 가져와. 그러고는 나를, 로앙까지 전부 차지해.”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번에는 붉은색이 좋겠어.”

울리히의 눈에 희망이 차오르는 모습이 엘리아를 간신히 만족시켰다. 상상 속에서 그는 엘리아의 온몸을 붉은 보석으로 옭아매 소유하려 들리라.

엘리아가 그의 환상에 덧댈 목소리를 만들고자 입을 열었다.

“네 조부의 목이 좋겠어.”

저처럼 추락하라고 밀어 버렸다.

“크라우제 후작의 목을, 붉은 피로 장식해서 내게 가져다줘.”

“…….”

“왜 충격받은 얼굴을 해? 내가 크라우제 후작이 죽길 바라는 줄 몰랐어? 로앙이 왜, 라스페를 원하여 정략혼을 하려는지 몰랐다고?”

울리히는 진심으로 엘리아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아마 엘리아가 그리 모진 말을 할 줄 몰랐을 테고, 거절당하리라는 불안감조차 가져 본 적 없었으리라.

그 자만심이 엘리아에게 불을 붙였다. 제가 품고 있는 줄도 몰랐던 잔인한 말을 쏟아 내게 했다.

“울리히, 나는 진심이야. 로앙에게 라스페 대신이 되고 싶으면, 네 조부의 목을 가져와. 그러면…….”

엘리아는 맹세코 울리히 크라우제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었다.

약혼자를 향한 믿음과 예의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복수를 위해서라면 엘리아는 저를 어디든 팔아넘길 수 있다고 믿었다.

어차피 에드문트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내 모든 처음이 네 것이 될 거야.”

엘리아 로앙은, 에드문트 라스페에게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 * *

잠시 후, 굳은 표정을 한 울리히 크라우제가 엘리아의 배웅을 받으며 복도로 나왔다.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단번에 쏠려 왔다.

엘리아는 기사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문 뒤에서 울리히를 향해 작별을 고했다.

“고마워, 울리히.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것도 모자라 직접 처리까지 대신해 준다니. 내가 받은 그 수상한 물건은 기사들에게 요청하면 될 거야. 나한텐 필요 없는 물건이니, 돌려줄 필요 없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이 학술원 마지막이라고 했지? 갑작스럽게 떠난다니 아쉽지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만나겠지. 잘 가, 울리히.”

엘리아는 일방적인 통보를 끝으로 문을 닫아걸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엘리아의 작별 인사가 ‘네 짓인 걸 말하지 않을 테니, 대신 당장 눈앞에서 꺼져라.’라는 뜻임은 알아들었으리라.

‘못 알아들었어도 상관없지. 옆에 있던 기사들이 들은 대로 소문내고 다닐 테니, 나가고 싶지 않아도 나가야 할 테니까.’

크라우제 후작가의 손자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겠다는 말 한마디에 학술원을 뒤집은 소동은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동시에 소년을 공개적으로 모욕할 기회도 사라지고 말았다.

아쉬웠지만, 어차피 엘리아에게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온들 변할 건 없었다.

순간의 복수심으로 그를 고발한다면, 울리히의 평판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기쁘겠지만…… 흔적이 남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허튼 연정을 품어 멍청한 짓을 저지른 소년에게뿐만 아니라, 피해자인 엘리아에게까지 ‘울리히 크라우제’라는 이름이 낙인으로 남아 평생 지워지지 않으리라.

‘그딴 건 죽어도 싫어.’

엘리아는 차라리 남자를 모욕하는 걸 포기하고 말지, 울리히와 관련된 소문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제겐, 정녕 기회가 없겠습니까. 저는 진심입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엘리아 양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왜 기회가 없다고 말해? 네 할아버지 목을 가져오면 된다니까. 그럼 얼마든지 내 약혼자를 버리고 울리히 널 받아 줄 수 있어.>

<그렇게까지…… 제 가문을 향한 감정이 깊을 줄은 몰랐습니다. 엘리아. 부디 단 한 번만이라도, 가문이 아닌 저를 봐 주실 수는 없습니까?>

<뭐? 설마 네 가문만 아니었다면 널 좋아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 나는 네가 크라우제가 아니었어도 싫어했을 거야.>

엘리아는 저를 갖고 싶다던 울리히에게 상처를 주고, 학술원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엘리아는 울리히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삶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거라는 것.

그리고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때론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 사랑도 죽으면 다 사라질 한때의 감정일 뿐이니까.’

엘리아는 비로소 인정했다.

‘나는 기대했던 거야. 아마 에드문트에게 약혼자라는 이름이 붙은 순간부터…….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남자아이에게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 되길 바랐던 거였어.’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소년의 앞에서 견뎌 냈던 분노와 함께, 슬픔이 쏟아져 내렸다.

엘리아는 소년이 제게 고백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의 사랑도 소년의 것처럼 아무 보답도 받지 못해 스러지리라는 사실을 절감해야만 했다.

‘외젠은 성년까지 생각해 보라 했지만, 결국 나는 에드문트와 결혼하게 될 테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 앞으로 내가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야.’

엘리아는 억눌러 둔 분노와 억울함을 모두 눈물에 섞어 흘려보냈다.

흘린 눈물에 팬 땅 깊숙한 곳에, 뒤늦게 인정한 에드문트를 향한 마음을 묻어야 했다.

그러나 엘리아만 몰랐을 뿐, 한번 품은 감정은 흙으로 덮어 둔들 다시 싹을 틔울 수도 있었다.

<엘리, 네가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마음 위로 예고 없이 찾아온 봄비가 내린다면.

<너무 예뻐서. 이런 선물 처음 받아 보는데…… 이거 오르골 맞지?>

체념으로 얼어붙은 땅을 햇빛이 녹여 준다면, 묻어 둔 감정은 금방 싹을 틔우리라.

<내가 네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어?>

다정한 마음을 머금어 끝내 가을빛 꽃을 피우고야 말리라.

* * *

“정보상을 소개해 달라고요?”

“그래. 너, 그때 이야기 나눴던 여자 그냥 우연히 길에서 만난 거 아니었잖아. 네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에 들렀다가 만났던 거겠지.”

울리히 크라우제가 ‘개인 사정’으로 학술원을 떠난 지 닷새 되던 날. 엘리아는 입방정을 떨어 자신을 곤란케 한 남작가 소년을 찾아갔다.

엘리아가 죄를 입 다물어 준 값으로, 소년은 한 달 동안 바삐 뛰어다니며 거래할 만한 정보상을 찾아야만 했다.

“근데 엘리아 님, 정보상이 왜 필요한데요?”

“전에 내 뒤 캐던 사람, 아무래도 한 명이 아닌 것 같아서 더 찾아보게. 혹시 나한테 또 접근하면 어떻게 해.”

엘리아는 소년에게 적당한 핑계를 댄 후 본격적으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원하는 정보들은 대부분 추가금이 붙는 바람에 그동안 야물게 모으던 돈은 순식간에 동났고, 엘리아는 돈이 사라지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일거리를 찾아 댔다.

정보상과 거래를 트고, 대리인을 내세워 원하는 정보를 요구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몇 차례나 요구하고도 겨우 엉터리 같은 정보만 손에 쥐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엘리아는 반년 뒤에야 자신이 그동안 모은 돈을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에게 적선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돈을 그렇게나 퍼부었는데…… 사교계 모임 다섯 번만 나가도 이거보다는 많이 알아 오겠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1년 동안 정보를 사 모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한때 품은 마음을 돌려받지 못할지언정 울리히 크라우제처럼 멍청한 꼴이 되진 않을 거야. 만만한 사람 취급받으며 조롱당하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든.’

엘리아는 자신만 모르는 이야기가 싫었다. 설령 외젠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살지언정, 제 세상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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